- 박상현
- 조회 수 289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Ⅰ. 저자 소개
프리초프 카프라 (Fritjof Capra) (1939~ )
1966년 비엔나 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스탠포드 선형가속기 센터, 런던대학교 등에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했으며, 버클리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물리학에 대한 연구 이외에도 저자는 지난 30여 년 동안 현대과학의 철학적.사회적 연관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왔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그의 저서들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럽과 아시아, 북남미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유럽과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본 등에서 수많은 TV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토크쇼 등에 화제의 인물로 출연한 바 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 살고 있는 저자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 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 동양사상과의 만남
히피의 물결에 이어 월남전 그리고 1968년 파리에서 폭발한 5월 혁명의 열기는 1970년대를 통틀어 서구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가 성취한 모든 것을 의심하고 거부하며 거기서 이탈하게 만든 계기였다. 근대 과학정신에 뿌리를 둔 욕망과 성장 위주의 경제 모델, 이데올로기의 방편이 되어버린 관료적 정치 제도, 위선적이며 권위적인 가족과 종교의 윤리, 제 3세계를 억압하며 절대 우위를 점령한 서구문화는 동양정신의 순환과 조화, 깨달음과 해탈의 진리 앞에 60년대 서구의 젊은 지식인들을 초라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물결의 선봉에서 열심히 존 레논을 따라 부르며 새로운 진리를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이후, 천방지축 동서문명의 자락을 마구 잇대어 놓고 그 어울림에 감탄하며 새로운 감수성을 예감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68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프리초프 카프라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은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지평이 열린 양자물리학과 전통적 동양사상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고자 한 카프라의 역작이다. 나름대로 안정된 학자로서의 진로를 중도에 포기한 채, 누가 보아도 당시로서는 미덥지 않았던 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과감하고도 지루한 항해를 시도했던 카프라. 그는 이 책의 발표와 함께 세계적 명사가 되었고, 덕분에 문명 전환의 생생한 현장을 종횡무진하며, 특히 지구 문명의 생태 위기에 대한 각성을 누구보다 일선에서 확인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는 [명상이냐, 죽음이냐!]라는 총체적 위기 현상을 극복하려는 환경운동가로 변모하였다.
Ⅱ.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제2판 역자 서문
즉 20세기에 들어와서 물리학이 다루게 된 극대(極大) 세계와 극미(極微) 세계의 현상은 인간 경험의 좁은 영역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그 기계론적 자연관은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그는 역설한다. 기계에서는 정태적으로 분리된 각 부분의 작동이 전체의 기능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유기체에서는 역동적인 부분들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부분은 전체의 필요에 따라 역할하는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다. 7~8
서구 문명을 과거 300여 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일(一)에서 다(多)를 보는 것이지만, 동양의 철인(哲人)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다(多)에서 일(一)을 보려 했던 것이며, 시간의 축(軸)에서 생멸(生滅)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로(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소립자의 세계와 코스몰로지(cosmology)의 세계를 다루게 된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8
카프라 박사를 위시한 신과학 운동의 거장들은 동양 고대 사상의 자연관을 지적인 면에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동양의 가치관에 동조한다. 서구의 과학은 객관을 관찰하기 위하여 관찰의 과정에서 모든 주관적인 것을 배제했던 것이며, 그 결과로 가치 중립(value neutral)의 과학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의 학문은 그 궁극적 목적을 선(善)의 실천에 두고 주관적인 마음을 항시 수련함으로써 도덕성을 함양하여 인격의 완성을 기하는 것을 학문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카프라 박사는 오늘의 산업 문명이 중병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객관적 지식의 대가로, 가치 문제를 소홀히 한 가치 중립의 과학에도 책임이 있다 하여 오늘의 서구 학계에 맹성(猛省)을 촉구하고 있다. 8
제1판 역자 서문
현대 물리학이라 함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상대성 이론(相對性理論)과 양자 물리학(量子物理學)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10
라플라스는 인간이 우주의 현재의 모든 상태와 그 운동을 다 알게 되는 날에는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10
고전 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전지자(全知者)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오만의 극에 달했던 고전 물리학은 태양에 도전했다가 추락한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처럼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난 것이며, 자연은 그 신비의 자태를 되찾게 되었다. 고전 물리학을 키워 온 기본 개념들, 즉 절대 공간(絶對空間)과 절대 시간, 인과율(因果律), 질량적(質量的) 물질 등등의 고전 물리학적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모조리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 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 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고전 물리학에서 생각했던 단순한 질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11
불교 등의 동양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그 사변적(思辨的)인 방법으로 일(一)에서 다(多)를 보려 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 데 반해서 동양사상은 그 직관적 방법으로 다(多)에서 일(一)을 보려 하고 일체(一切)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즉 4차원적 시공(時空)의 차원에서 보려 한다. 12
19세기 말경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자장 현상(電磁場現像)의 이론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은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曲率)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12
저자는 이 책 속에서 힌두교, 불교, 도교, 역사상(易思想) 등 동양사상을 통틀어서 신비주의라 했다. 4세기의 사리치우스는 “신비란 일어난 일이 없지만 언제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란 마술을 행하거나 기적을 바란다는 뜻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일 것이다. 14
보들레르는 그의 시(〈correspondence))에서 자연은 가끔 수상한 발언을 하는 상징의 삼림(森林)이라고 보았던 것이며, 상징이란 환언하면 유사성을 보는 것이다. 극미(極微) 세계의 원자의 구조가 극대 세계의 태양계의 구조와 거의 같듯이 이 우주의 제 현상 간에는 엄청난 유사성이 있는 것이며, 고도로 민감하고 언제나 통찰하는 예술 정신은 삼라만상 간의 상징을 보고 그 만뢰(萬賴)속에 공명의 화음을 들으며 육합(六合)에 차 있는 친화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5
제2판 저자 머리말
서양인들은 융합보다는 자기 주장, 종합보다는 분석,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 종교보다는 과학, 협동보다는 경쟁, 보전보다는 확장에 편중해 왔다. 이 같은 일방적인 발전은 이제 극히 위험한 단계, 즉 사회적ㆍ생태계적ㆍ도덕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20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하여 물러난다.” 20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이론이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은 이제 설 자리가 없음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가치 중립적 과학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패턴은 그들의 정신 패턴, 즉 그들의 개념, 사상과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이룩하는 과학적 성과와 그들이 연구하는 기술 응용법은 그들의 정신 형태에 따라 조건지워진다. 그들의 상세한 연구 대부분이 명료하게 그들의 가치 체계에 좌우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연구를 추진시키는 보다 큰 틀은 결코 가치중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지성과 도덕 양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21
동양 신비주의와의 유사성은 물리학에 그치지 않고 생물학, 심리학과 그 밖의 과학에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주제들은 더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느껴진다. 물리학과 이들 과학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나는 시스템 이론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개념을 다른 분야로 자연스럽게 확대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 생물학,의학, 심리학과 사회 과학 분야의 시스템 개념을 살펴보았다. 그에 따라 시스템 접근 방법이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의 유사성을 크게 강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시스템 생물학과 심리학은 물리학 영역 외의 신비 사상과의 또 다른 유사성을 가리킨다. 22
제1판 저자 머리말
나는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神)인 ‘시바의 춤(Dance of Shiva)’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5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 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는 이러한 뛰어듦이 고도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 주는 일이다. 26
제1부 물리학의 길
1. 현대 물리학-마음을 담은 길?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것이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 《돈환(Don Juan)의 가르침》33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학파의 현인들은 이러한 구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피지스(physis, 자연)’라고 불렀던 사물의 본질, 즉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물리학(physics)’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37
사실 그들은 모든 존재의 양식을 생명과 영성이 부여된 ‘피지스’의 구현으로 보았기 대문에 실제 물질에 해당하는 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탈레스(Thales)는 모든 물질은 모든 물질은 신성(神性)으로 충만해 있다고 선언했으며, 아낙스만드로스(Anaximandros)는 인체가 공기에 의해 유지되듯이 우주는 우주의 숨결인 ‘프노이마(pneuma, 靈魂)’로 지탱되는 일종의 유기체라고 본 것이다. 37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生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38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 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쌍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보았다. 이 대립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38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차게 맞선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이 방향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그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불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서양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 38
정신 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res cogitans)과 물질(res exrensa)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立脚點) 위에 섰다. 이 ‘데카르트적’인 분할은 물질을 죽은 것으로, 자신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고,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가기 다른 객체의 군집으로 보도록 허용했다. 40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어(統御)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그의 활동이나 재능, 감정, 신앙 등에 따라서 수없이 쪼개진 많은 분야로 더욱 분열되어 갔고, 이것은 한없는 갈등을 일으켜 형이상학적 혼란과 좌절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41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연 환경은 제각기 다른 이해 집단에 의해 착취되는 따로 떨어진 부분들로써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이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열-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ㆍ생태적ㆍ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자연과 인류 동포로부터 소외시켰다. 그것은 자연 자원을 대단히 부당하게 분배시켜 경제적 무질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폭력은 우발적이거나 제도화되어서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있으며, 더럽게 오염된 환경 속에서 생명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41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리된 것으로 구분하고 이 세계 내에서 고립된 자아로서 우리 스스로를 체험해 보려는 경향은 우리들의 측정하고 분류하려는 심성에서부터 연유되는 환각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 철학에서는 아비다(avidya), 즉 무지라고 불리며 극복해야 할 마음의 불안 상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42
운동과 변화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처럼 객체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본원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신성(神性)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43
2. 아는 것과 보는 것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48
서양에서는 어의론자(語義論者)인 알프레드 코지프스키가 ‘지도(地圖)는 영토(領土)가 아니다’라는 힘찬 슬로건으로서 똑같은 견해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49
소리도 없고 접촉도 없고, 형체도 없고 불멸하며,
또한 맛도 없고 항존(恒存)하며, 냄새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위대한 것보다 더욱 높고 영속하는-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사람은 죽음의 아가리로부터 해방되나니.(우파니샤드) 49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불교도들은 절대지(絶對知)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항상 상대적이고 근사치에 머무는 분별하고 추상하고 분류하는 지성에 의존하고 있지 않을 까닭이다…….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궁극적인 실재는 추론, 즉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개념의 근원이 되는 감각이나 지성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49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것은 실재의 철학적 모형과 다를 바 없으며, 그래서 이 양자는 잘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55
불교에서 생장해 나왔으나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종(禪宗)은 문자에 서지 않고[不立文字], 언어를 끊고[言語道斷], 지혜 없는[不求智慧], 지식 없이 마음으로 전하는[敎外別傳]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다. 55
불교적 인식론에 있어서는 본다는 것이 안다는 것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본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앎은 봄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지식은 본다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앎과 봄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통합되어 보인다. 그러므로 불교 철학에서는 궁극적으로 실재를 본래 면목대로 보는 것을 지향한다. 봄[正見]은 개오를 증험하는 것이다. 57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덧붙여져야 한다. 신비적 전통 속에서 보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며 비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재에 대한 신비적 체험은 본질적으로 비감각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신비가들이 ‘봄[見]’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시각을 포함한 지각의 한 양식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언제나 또 본질적으로 그것을 초월하여 실재에 대한 비감각적인 경험으로 되는 것이다. 58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직관적 통찰의 또 다른 에로서 농담이 잘 알려져 있다. 농담을 이해하는 그 눈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개오’의 순간을 경험한다……특히 선은 재미있는 이야기와 기담으로 가득 차 있는데, 《도덕경(道德經)》에는 “그것이 웃음거리가 아니라면 도가 되기에는 아직 불충분한 것이다.”는 구절이 있다. 60
동양의 예술 양식들 역시 명상의 양식이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이념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직관적 형태를 발전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자기 실현의 방도인 것이다. 61
노자는 학구(學究)와 명상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한다.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
[爲學日益, 爲道日損=역주]
헤아리는 마음이 숨을 죽이면 직관적 형태가 비상한 깨달음을 가져온다. 환경은 개념적 사고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경험된다. 장주의 말에, “성인의 고요한 마음은 천지와 만물의 거울이다[聖人之心靜乎, 天地之鑒也, 萬物之鏡=역주]” 62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을 기반을 두고 있다. 양쪽 다 그 관찰은 해석되고 이 해석은 자주 언어에 의해 소통된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현대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피차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63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아인슈타인) 64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 따르면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66
3. 언어를 초월하여
‘공안(公案)’은 세심하게 궁리해 낸 일견 사리에 합당치 않은 난문(난문)으로서,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73
4. 새로운 물리학
최근 몇 해 동안 우리의 경험이 크게 확장됨에 따라 우리의 단순한 기계적인 관념들은 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관찰에 대한 종래의 해석을 성립시켜 준 그 토대가 뒤흔들리게 되었다. – 닐스 보어
일체의 사물들이 진실로 그 본성과 외양을 바꾸기 시작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모두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 사물들을 경험하고, 보고, 인식하고, 접촉하는 넓고도 깊은 새로운 방식이 있는 것이다. – 스리 아우로빈도 81
뉴턴의 운동에 관한 방정식은 고전 물리학의 기초다. 그것은 그에 따라 질점들이 움직이는 고정된 법칙이라고 여겨졌으며, 따라서 물리적 세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변화들을 설명해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뉴턴의 견해로는, 태초에 신이 물질적 입자들과 그것들 사이의 힘들을, 그리고 운동의 근본적 법칙들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우주는 운동하게 되었으며, 그 후 항상 불변의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는 기계처럼 우주는 계속 운동하여 왔다. 84
이와 같이 자연의 기계론적 견해는 엄격한 결정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거대한 우주 기계는 완전히 인과적인 것,. 결정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발생하는 일체의 것은 명확한 원인을 가지고 일정한 결과를 초래하여, 이 우주 체계의 어느 부분의 미래도-원칙적으로-만일 그 상태가 어느 때라도 모두 자세히 알려져 있기만 하면,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예견할 수 있었다.
이 엄격한 결정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근본적인 구별에 그 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결과로 세계는 객관적으로, 즉 인간이라는 관찰자에 관해 전혀 언급함이 없이 기술될 수 있다고 믿어졌고, 자연에 대한 그러한 객관적인 기술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84
빛이 파동의 형태로 공간을 통과하는 급속히 교체하는 전자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 전기 역학이라 불리는 이론의 정점을 이룬다. 오늘날 우리는 전파나 광파, X선들이 모두 전자기파, 즉 진동의 주파수만 달리하는 진동하는 전기장 및 자기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은 그 전자기 스펙트럼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88~89
금세기가 시작되고 처음 30년간에 물리학의 전상황은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기본적인 고체 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因果性),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이 부서졌다. 90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時空)’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全一的)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관찰자들이 관찰되는 시간들에 대해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들은 사건들을 시간상으로 다르게 볼 것이다. 그러한 경우, 어느 관찰자에게는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다른 관찰자들에게는 다른 시간차를 가지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90~91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데 매우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의 수정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는데 이용하는 전체계(全體系)의 수정을 초래한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mc2에 의해 주어진다. 이 때 c는 빛의 속도다. 91
이러한 원자의 ‘유성(遊星)’모델의 출현에 뒤이어 곧 원소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수가 그 원소의 화학적인 성질들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95
광양자(光量子)는 양자론이란 명칭의 유래가 되는 것이지만 그 후 진정한 입자로서 받아들여졌고, 지금은 광자(光子)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빛의 속도로 진행하는 특별한 종류의 입자인 것이다. 97
궤도상의 전자의 ‘회전’은 고전적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전자파의 형태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이것은 궤도상의 어떤 부분에서 입자가 존재하는 확률을 뜻한다. 101
물질이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 질량의 모두를 함유하고 있는 원자핵을 연구하여야 한다. 102
제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
5.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무기를 활로 삼고
명상으로 날카롭게 간 화살을 그 위에 걸어
‘그것’의 본질로 향하는 사유로써 잡아당기어
벗이여, 표적인 그 불멸을 꿰뚫어라. 118
‘브라만(Brahman)’이라고 불리는 이 실재는 힌두교가 수많은 남신과 여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일원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통일 개념이다.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만물의 영혼 또는 내적 정수로 이해된다. 그것은 무한하고 모든 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지성으로 이해될 수 없고, 언어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도 없다. 120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되는 것을 ‘아트만(Atman, 自我)’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120
힌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萬相)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마야며, 위대한 마술사의 신성한 유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거룩한 ‘릴라’는 율동적이고 힘찬 유희인 까닭에 이 마야의 세계는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다.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Karma)’인데, 이것은 인도의 사상에서 또 다른 주요 개념이다. 이 카르마는 ‘행위’를 의미한다. 122
우리가 단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마야의 그 주술 아래 놓여,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全一性)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122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사(moksha)’,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精髓)다. 123
힌두교에서는 대부분의 서양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가 인간 존재의 불가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고 신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124
사랑하는 아내의 품속에 안긴 사내라면 그는 그 안의 또는 그 밖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지적인 영혼의 품안일지라도 그는 그 안의 또는 그 밖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125
6. 불교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127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Hinayana, 小乘佛敎)와 마하야나(Mahayana, 大乘佛敎)라는 두 주류로 발전돼 나갔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字句]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하나야나 종파는 실론과 버마와 타이에 정착하였고, 마하야나는 네팔, 테베트, 중국, 한국, 일본에 전파되어 마침내는 두 종파 가운데에서 더 중요시되었다. 인도 자체에서는 불교가 수세기를 지나면서 융통성 있고 동화력이 있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부처는 결국 여러 얼굴을 가진 비슈누 신의 한 화신(化神)으로 간주돼 버렸다. 128
제2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trishna, 집제)’, 즉 집착 또는 탐욕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불교 철학에서 ‘아비댜(avidya)’, 즉 무명(無明, 無知)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무익한 욕심이다. 이 무명 탓으로 우리는 지각된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열된 사물로 쪼개고, 이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낳은 이 고착된 범주에다가 실재의 유동하는 형태를 붙잡아 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좌절에 좌절을 거듭 겪지 않을 수 없다. 130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開悟)를 얻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131
7. 중국 사상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 그것은 교육 제도와 사교적 예절의 엄격한 관습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복합적인 구성과 조상 숭배의 의식을 지닌 중국의 전통적 가족 제도에 윤리적 기초를 형성시켜 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 ‘도’를 찾아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138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라고 노자는 말했다. 이 사상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 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 패턴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142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중국적 관점에서는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極力)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일어난다. 143
8. 도교
도가(道家)에서는 논리적 추론을 사회적 예절 및 도덕적 규범과 아울러 작위적인 인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이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관조에 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이리하여 그들은 본질적으로 과학적인 태도를 계발시켰으나 분석적 방법에 대한 그네들의 깊은 불신이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적절한 과학적 이론들을 수립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가의 현자들은 강한 신비적인 직관과 결합된 주의 깊은 자연 관찰로써 현대의 과학 이론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는 깊은 통찰에 이르렀던 것이다. 156
도의 운동이 대립자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이라는 인식으로부터 도가들은 인간 행위를 위한 두 가지 기본율을 추출해 냈다. 어떤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그 반대편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 주고
때려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구부려라, 그려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울 것이니. 158
선악의 상대성과 나아가 모든 도덕적 규범의 상대성을 깨달은 도가의 현자들은 선을 위해 분투 노력하지 않고 산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59
노자에 있어서처럼 헤라클레이토스가 대립자의 역동적 상호 작용으로서의 변화의 개념을 가지고 모든 대립자는 극성을 띠고 있고, 따라서 접합된다는 발견에까지 어떻게 도달하게 됐는가는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하나고 같은 것이다. 신은 낮/밤이며, 겨울/여름이며, 전쟁/평화며, 배부름/굶주림이다”라고 그 그리스인은 말했다. 그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립하는 쌍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고, 이러한 모든 개념들의 상대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160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161
9. 선(禪)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의 말에 의하면 “선은 개오의 수련이다.” 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처의 깨달음과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잇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정수다. 166
동양 신비 사상의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선은 언어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166
경전(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전승),
언어나 문자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역주]167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선문(禪門)의 강조는 확실히 그 도가적인 뿌리를 부여 주고 있는 일이지만, 이런 강조의 기반은 엄연히 불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본성의 완전함에 대한 믿음이요, 개오의 과정이란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면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깨달음일 따름이다. 대선사 백장은 불성을 찾는 데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황소 등에 타고서 황소를 찾는 것과 너무나 같다.” 170
제3부 대비(對比)
10. 만물의 통일성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에서는 ‘범(梵)’, 불교에서는 ‘법신(法身)’,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그것을 일러 또한 ‘진여(眞如)’라고도 부른다. 176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 그것은 원자의 단계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영역에까지 물질을 더 깊이 투시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잇다.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통일성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철학에 관한 우리의 대비를 일관하는 하나의 반복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177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서 보게 한다. 185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185
한 소립자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석 불능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상, 밖으로 다른 것 들에 미치는 일련의 관계다. 따라서 세계는, 그 안에서 복합적인 사건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연결들과 교체하고 겹쳐지고 종합되어서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85
현대 물리학으로부터 도출되는 상호 연결된 우주적 망(網)이란 상(이미지)은 동양에서 자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전달하는 데 널리 쓰여 왔다.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브라만[梵]은 우주적 망을 통일시켜 주는 망사로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반이다. 186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 187
이것은 원자적 실재에 고유한 원리상의 한계다.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하면 그 입자의 운동량이 정확하지 않게 되고 운동량을 측정하려고 하면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게 된다. 188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미)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醜)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194
‘저것’과 ‘이것’이라는 대립자임을 그만두는 것이 바로 ‘도’의 본령(本領)이다. 오직 이 본령만이 말하자면 하나의 축으로서 가없는 변화에 응답하는 원궤(圓軌)의 중심이다. 196
노자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깨달은 인간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197
12. 공간-시간
그리스 철학과는 달리, 동양 철학은 항상 공간과 시간이 마음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주장해 왔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다른 모든 지성적 개념들처럼 공간과 시간을 상대적ㆍ제한적ㆍ환상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217
이러한 생각에 대신하여 상대성 이론은 공간-시간 좌표계의 관측자가 그의 환경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하나의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222
현대 물리학자의 이와 같은 진술은. 현대 물리학에서의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앞서 인용한 “공간과 시간은 명목, 생각의 형식, 일상적 관용어에 불과하다”는 동양 신비가의 개념과 극히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222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은 흐른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은 현재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다고 하는 이 생각이 아마도 시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지나가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시간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선사 道元)247
13. 역동적인 우주
동양의 신비가들은 우주를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그물로서 보았는데 그 상호 연관은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다. 254
14. 공(空)과 형상
신비적인 허의 현상적인 현현(顯現)들은 아원자적 소립자들처럼 정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칠 줄 모르는 운동과 에너지의 율동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이다. 물리학자의 아원자적 세계와 같이 동양 신비가들의 현상적인 세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과 죽음 곧 윤회(輪廻, samsara)의 세계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허의 순간적인 현현이므로 아무런 근본적인 주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을 특히 불교 철학에서 강조되는 것으로서 어떤 물질적 실체 같은 것의 존재를 부정하며 또한 지속적인 경험들을 겪는 변치 않는 ‘자아(自我)’라는 생각은 하나의 망상이라고 간주한다. 278
상대성 이론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대립되는 두 개념의 통일은 역동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물질의 그 양면성은 끊임없이 서로 모습을 바꾼다. 동양의 신비주의도 공과 그것이 창조해 내는 형상들 사이의 유사한 역동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 라마 고빈다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색(色)과 공(空)의 관계는 서로 배타적인 대립의 상태로서 생각될 수가 없으며, 다만 동일 실재의 양면성으로서 공존하면서 연속적인 협력 관계 속에 존재한다. 281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현대 물리학이 동양 신비주의의 허(虛)에 가장 가까운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동양의 허와 같이 ‘물리적 진공’- 장 이론에서 이렇게 불림-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 세계의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독립된 물리적 실체들이 아니라, 단지 근본적인 허의 일시적 출현이다. 불경에서 말하듯이 “색(色)이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다.”289
15. 우주적 무도(舞蹈)
시바의 무도는 생사와 소멸의 우주적인 윤회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인도의 신비 사상에서 모든 존재의 기본으로 간주되는 생사의 일상적인 율동까지도 상징한다. 동시에 시바는 세계의 다양한 형상들이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환상(幻像, maya)이라는 것, 즉 그가 그의 춤의 끊임없는 유동(流動)속에서 그것들을 계속하여 창조하고 소멸시키므로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망상이요, 계속하여 변화하는 것이라고 깨우쳐 준다. 311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자에 있어서 시바의 무도는 아원자적 물질의 무도가 된다. 314
16. 쿼크 대칭들-하나의 새로운 공안(公案)?
대칭에 대한 동양 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산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동양의 예술 형식들은 비대칭을 현저하게 편애하였으며 완전히 규칙적이거나 기하학적 형상은 종종 기피되고 있다. 327
17. 변역(變易)의 모형
S행렬 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새로운 개념은 강조점을 대상물로부터 사건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그 기본 관심이 입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반응에 있다는 것이다. 332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는 세계를 대상물들의 여러 가지 그룹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연결 관계의 그룹으로 세계를 나눈다……. 식별될 수 있는 것은 어떤 현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 관계의 모습이다. ……따라서 세계는 사건들의 복잡한 조합으로서 나타나며 그 안에서 다른 종류의 연결 관계들이 서로 엇걸리거나 겹쳐지거나 결합하고, 이렇게 하여 천체의 구조를 결정짓는 것이다. 333
S행렬 이론은 단지 그 궁극적 결론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물질에 관한 일반적 견해에 있어서도 동양적 사고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S행렬 이론은 아원자적 입자의 세계를 사건들의 동적인 그물 조직으로서 기술하며, 근본적 구조나 실체로서 보다는 변화와 전환을 강조한다. 동양에 있어서의 그러한 강조는 일체의 것들을 역동적이고 일시적이며, 미망(迷妄)으로서 여기는 불교 사상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라다크리슈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절단된 부분을 만들고 그것을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위적인 태도다…….우리가 사물들의 진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변화의 끊임없는 연속에서 떼내어진 소산물들을 마치 영원하고 실재적인 것인 양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생은 사물도 아니요, 사물의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움직임이요, 변화다. 349
변화와 변역에 의하여 생성되는 그 역동적인 모형들의 개념으로 인하여 《역경》은 어쩌면 동양사상에서는 S행렬 이론에 가장 가까운 비유가 된다. 두 체계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상물보다 작용면에 있다. S행렬 이론에서 이러한 작용들은 강입자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현상들을 일으키는 입자 반응이다. 《역경》에서는 기본이 되는 작용들이 ‘역(易, the changes)’이라고 불리며, 모든 자연 현상의 이해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여겨진다. 353
18. 상호 관통
자연은 소립자나 근본적인 장과 같은 기본적인 실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른 입자 물리학파가 있다. 그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상호간에도 그 자체로도 어느 쪽으로나 모순되지 않는 자체 조화를 통해서만 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S행렬(S-matrix)이론과의 관계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부트스트랩(bootstrap : 구두끈)’가설로 알려져 있다. 이 이론의 창시자이며 주요 주창자는 제프리 추(Geffrey Chew)인데 그는 이 생각을 한편으로는 자연의 일반적인 상호 작용의 철학에로 발전시켜 왔으며, 또 한편으로는(다른 물리학자의 협력으로) S행렬이라는 말로 형식화된 입자들의 특정한 모델을 작성하는 데 그것을 이용하였다. 358
부트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최종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358
현대 물리학에서는 현재 매우 다른 태도가 전개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기술하는 ‘법칙들’을 포함하여 자연 현상에 관한 그들의 이론 모두가 인간 마음의 소산, 즉 실재 그 자체라기보다 실재에 관한 우리의 개념도(槪念圖, conceptual map)의 속성들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적인 도식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과학적 이론과 ‘자연 법칙’이 그러하듯이 필연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근사적(近似的)이다. 360
동양의 현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설명하는 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물의 통일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비지성적인 경험을 체득하는 데에 더욱 흥미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생의 의미, 세계의 기원, 열반(nirvana)의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고귀한 침묵’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부처의 태도다. 365
우리가 사물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업(業)에 의해 속박된다. 우리의 개념의 그물이란 덫에 걸리게 된다. 말과 설명을 넘어서는 것이 곧 업의 속박을 깨뜨리고 해방을 얻는 길이다. 366
동양 신비가의 세계관은 모든 현상들의 상호 관련성과 자체 조화를 강조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물질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를 부인하는 것에서도 현대 물리학의 부트스트랩 철학과 공통점을 갖고 잇다. 불가분의 전체며 그 안에서 모든 형상들이 유동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 안에는 어떤 고정된 근본적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물질의 ‘기본적 구성체’라는 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366
따라서 동양 신비주의의 주요 학파들은 우주란 하나의 상호 연관된 전체고, 그 안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결코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은 다른 모든 부분의 속성으로부터 결정된다는 부트스트랩 철학의 견해와 일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모든 부분들은 다른 모든 부분들을 ‘포함’하며 상호 구현에 대한 투시가 진실로 자연에 관한 신비적 체험의 특성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스리 아루빈도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초지성적 의식에서는 실로 어떠한 것도 유한하지 않다. 이러한 그것은 개개에 있어서의 전체, 그리고 전체에 있어서의 개개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367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그리고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하여,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그리고 하나의 시간에 영원을 간직하라.(윌리엄 블레이크) 374
단자들 사이의 실제적 상호 관계에 관한 한 강입자 부트스트랩과의 주요 차이는 단자는 서로간에 상호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듯이 “창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단지 서로 반영할 뿐이다. 그 반면에 강입자 부트스트랩에서는 대승 불교에서와 같이 그 강조점이 모든 입자들의 상호 작용 또는 ‘상호 관통’에 있다. 더군다나 부트스트랩 이론과 대승 불교의 물질관은 둘 다 대상을 사건으로서 보는 ‘시공’ 관(space-time view)이며, 그것들 서로 간의 상호 관통은 공간과 시간 역시 상호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376~377
참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참 알고 있지 않다.
[知者不言, 言者不知=역주]380
맺음말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물리적 현상 같은 것의 기술에는 유용하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을 다루는 데에는 적절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기술 공학의 근본으로서 매우 성공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적 영역에 있는 물리적 현상의 기술에는 부적당하다. ‘유기적’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신비가들의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불가분하고 조화된 전체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 개념에 반대한다. 이 세계관은 신비주의적 전통에 있어서 의식의 명상적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신비가들은 이러한 비일상적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내오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 세계를 서술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거시적 현상의 과학적 서술에는 부적절하다. 유기적 세계관은 기계를 조립하거나 인구 과잉의 세계에 있어서 기술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는 유리하지 않다. 382
따라서 신비가와 물리학자는 하나는 내적인 영역으로부터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외적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견해들 사이의 조화는, 외부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Brahman)이 내부의 실재인 아트만(Atman)과 일치한다는-범아 일여(梵我一如)-고대 인도의 지혜를 확인해 준다. 384
나는 과학과 신비주의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물리학자는 추론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고, 신비가는 직관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385
중국의 고언(古諺)으로 부연하자면 신비가들은 도(道)의 가지가 아니라 도의 뿌리를 이해하고, 과학자들은 뿌리가 아니라 그 가지를 이해하고 있다. 과학은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주의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둘을 필요로 한다.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386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암시되고 있는 세계관이 현재의 우리 사회와는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형평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386
제2판 후기 다시 찾은 신물리학
원자 물리학의 법칙은 통계적 법칙이고, 그에 따라 원자 사상들의 확률이 전체계의 동력학에 따라 결정된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부분의 성질과 행태가 전체의 그것을 결정하는 반면, 양자 물리학에서는 그 상황이 역전된다. 부분의 형태를 좌우하는 것은 전체다. 391
고전 물리학에 숨겨진 변수들은 국소 메커니즘인데 반하여 양자 물리학의 그것들은 비국소적이다. 전체 우주에 순간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일상적이고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비국소적 연결들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따라서 독립된 물체를 거론하며 확실성이라는 각도에서 그 행태를 기술할 수 있는 법칙을 정식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대상으로 갈수록 비국소 연결의 영향이 커지고, 확실성은 확률에 자리를 남겨 준다. 그리고 우주의 어느 부분을 전체와 분리하기란 점점 어려워진다. 391
불교의 고승 나가르주나 곧 용수(龍樹)는 약 1,80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395
제10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봄의 출발점은 ‘깨어지지 않은 전체성(unbroken wholeness)’의 개념이다. 402
봄은 부분의 하나하나가 어느 의미로는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성질을 전제로 하여 이 함축된 질서를 유추하는 수단으로서 홀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홀로그램의 어느 부분은 완전한 홀로그램이 주는 영상보다 자세하지 않지만, 그 부분을 조명하면 전체적인 영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봄의 견해에 따르면, 현실 세계는 동일한 일반 원리에 따라 구성되어 있고, 그 부분마다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 403
첫째, 우주의 허공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초양자장(superquantum field)으로 충만 되어 있다고 하였다.
둘째, 초양자장으로 충만 된 우주는 하나(oneness)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을 비국소성 원리(non-locality principle)라고 불렀다.
셋째,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초양자장으로부터 분화되며, 이렇게 하여 생긴 존재는 크게 3 가지 부류, 즉 정신계, 에너지계, 물질계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에너지가 분화하는 과정을 보면 초양자장이 중첩되어 파동이 되고, 파동이 중첩되어 에너지가 된다고 하였고, 의식의 분화는 초양자장이 중첩되어 파동이 되고, 파동이 중첩되어 에너지가 되며, 에너지가 중첩되어 소립자가 되며 이 소립자가 의식이 된다고 하였으며, 물질의 분화는 초양자장이 중첩되어 파동이 되며, 파동이 중첩되어 에너지가 되며, 에너지가 중첩되어, 소립자가 되며, 소립자가 중첩되어 원자가 되고, 원자가 중첩되어 분자라는 물질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에너지, 마음, 물질 등은 동일한 질료로부터 만들어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초양자장으로부터 분화하기 때문에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부분 속에 전체의 정보가 들어 있다고 하였으며 이것을 홀로그램(hologram) 모델이라고 불렀다.
또한 봄(Bohm)은 우주를 홀로그램이라고 말함으로써 수학적 언어로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 에너지 그리고 마음 같은 것도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봄(Bohm)은 현재의 과학 수준 때문에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수학적 이해로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을 봄(Bohm)의 양자 형이상학(quantum metaphysics)이라고 부른다.
제3판 후기 신물리학의 미래
“과학은 잠정적인 대답을 통해서 자연 현상의 본질에 더욱 깊이 도달하려는 일련의 더욱 미묘한 물음들을 향해 나아간다.”(루이 파스퇴르) 418
Ⅲ. 내가 저자라면
■ 책의 구성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도(島)-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途程)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44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동양의 사상이라는 뿌리와 서양의 과학이라는 가지를 통하여 우리가 깃들어 살고 있는 세계의 원리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설명한 경전이자 철학서이다. 제1부 <물리학의 길>에서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언어의 불완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현대 물리학을 중심으로 동양사상과의 유사성을 탐색한다. 제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에서는 3부에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접목지점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힌두교, 불교, 중국 사상, 도교, 선 등 동양사상의 특성을 명확하게 서술하고 개념화하고 있다. 제3부 <대비> 에서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별개의 체계로 인식되어온 서양과 동양의 세계관을 통합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논점이 명확한 그의 문장을 따라 가다 보니 1부와 2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3부에서 중복 설명된 부분은 단점이라기 보다는 난해한 텍스트를 보다 쉽게 독자에게 이해시키려는 저자의 배려로 느껴졌다. 간혹 등장하는 물리학 이론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저자의 친절한 안내가 전후 맥락을 짚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머리말 2편, 후기 3편에서 보듯 새로운 물리학 이론의 등장에 맞춰 정성스럽게 내용을 보강한 것에서 저자의 진지함과 성실성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제3판 후기에서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와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 대한 비판을 논리적으로 반박한 부분이 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좋았다.
■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은 왜 서로를 품어야 하나?
에드워드 오스본 월슨이 1998년 《통섭, 지식의 대통합》을 출판하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간격을 메우자는 ‘통섭(通涉,Consilience)’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섭의 진정한 시작은 1975년에 출간된 이 책《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언어의 탈을 쓰고 베일에 쌓여 있던 불교, 도교의 字句들이 물리학 이론 덕분에 훨씬 명료하게 이해되는 경험을 했다. 이를 통하여 모든 현상들이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가 자연의 순환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내가 부분이요 전체라는 일자(oneness)의 자각이 온전히 나의 깨달음이 되었을 때 세계와 관계는 어떻게 변화될까. 생각만으로 전율이 일었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조화가 다음과 같은 현상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과학과 신비주의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 정신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물리학자는 추론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고, 신비가는 직관적 정신의 극단적 전문화를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385
독립된 존재로서 내가 몸담고 있는 자연과 사회의 유익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낄 때와 자연이자 사회의 일부이자 전체인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전체의 관계망에 영향을 끼침을 사실로 수용할 때 눈 앞에 전개되는 세상은 겪어 보지 않아도 많이 다를 것 같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612 |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 프리초프 카프라> [1] | 김연주 | 2010.11.29 | 8447 |
2611 |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_발췌 | 맑은 김인건 | 2010.11.29 | 2879 |
2610 | [북리뷰]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1] [1] | 이선형 | 2010.11.28 | 2702 |
2609 |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저자 구성 | 맑은 김인건 | 2010.11.28 | 3129 |
2608 | [북리뷰 36]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2] | 신진철 | 2010.11.28 | 2705 |
» | 북리뷰 36.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_프리초프 카프라(범양사) | 박상현 | 2010.11.28 | 2890 |
2606 | 북리뷰 60 :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 앤서니 라빈스 | 범해 좌경숙 | 2010.11.22 | 3961 |
2605 | [리뷰]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 최우성 | 2010.11.22 | 3521 |
2604 | 35.<행복한 논어읽기> 양병무 [3] | 박미옥 | 2010.11.22 | 3523 |
2603 | [북리뷰 35] 노자의 도덕경 [1] | 신진철 | 2010.11.22 | 3509 |
2602 | 북리뷰 35.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 [4] | 박상현 | 2010.11.22 | 3055 |
2601 | 도덕경- 노자/현암사/오강남 | 이은주 | 2010.11.22 | 4362 |
2600 | [북리뷰] 맹자 | 이선형 | 2010.11.22 | 3513 |
2599 | 북리뷰35-<주역강의:서대원> | 박경숙 | 2010.11.22 | 2926 |
2598 | 주역강의_발췌 | 맑은 김인건 | 2010.11.22 | 2889 |
2597 | 주역강의_저자, 구성 | 맑은 김인건 | 2010.11.22 | 4191 |
2596 | 주역강의 - 서대원 지음 / 을유문화사 [2] | 연주 | 2010.11.21 | 3822 |
2595 | 북리뷰 59 : 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 범해 좌경숙 | 2010.11.18 | 3548 |
2594 | 북리뷰 34. 강의, 나의 동양고전독법_신영복(돌베개) [1] | 박상현 | 2010.11.16 | 2651 |
2593 | 34. <강의> 신영복 [3] | 박미옥 | 2010.11.16 | 2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