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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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36]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1. 저자에 대하여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저자이다.
그는 1966년 비엔나 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스탠포드 선형가속기 센터, 런던대학교 등에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했으며, 버클리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물리학에 대한 연구 이외에도 카프라 박사는 지난 30여 년 동안 현대과학의 철학적. 사회적 연관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왔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그의 저서들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럽과 아시아, 북남미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유럽과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본 등에서 수많은 TV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토크쇼 등에 화제의 인물로 출연한 바 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 살고 있는 카프라 박사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 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그가 1984년 스프레트낵(Spretnak, Charlene)과 공저로 펴낸 <녹색정치>는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던 녹색 운동을 소개함과 동시에 특히 독일 의회의 당당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녹색당의 이념 정강 및 그 현황과 문제점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녹색운동이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정치 세력으로 결집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제1판 역자 서문
고전 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드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전지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오만의 극에 달했던 고전 물리학은 태양에 도전했다가 추락한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처럼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난 것이며, 자연은 그 신비의 자태를 되찾게 되었다. p11
고전 물리학이 데카르트나 칸트를 가졌다면 현대 물리학은 새로운 데카르트나 칸트를 찾고 있으며, 이 책의 저자 카프라 박사는 이것을 동양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찾아본 것이다. 두 개의 이질 문화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합류할 때에 위대한 사상이 나올 수 있고 더욱 폭넓은 사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선례가 있다면 카프라 박사가 유연한 동양사상에 현대 물리학의 조명을 비추어 그 윤곽을 좀 더 선명히 하고, 거기에 담겨 있는 지혜의 빛으로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 있는 수상한 현상들을 역조명해 본 것은 실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직관적이며 주관주의적인 동양사상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사변적이며 객관주의적인 서양 과학 문명 속에 살고 있고 그 양자의 사상적 괴리와 상충을 체험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두 개의 사상 경향이 새로운 정신적 용광로에서 융합되고 체계화되는 것이 절실히 요망된다. p14
일체를 시공 4차원적인 변화의 견지에서 보는 동양사상은 3차원적인 논리로는 적절하게 해설할 수 없으므로 그로서는 신비주의라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질의 궁극체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며, 물질적 존재란 전일저인 것의 한 과정으로만 성립될 수 있다는 현대 물리학의 자연관은 그 보는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 전혀 대조적인 것이지만 동양사상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p14
이 책은 고전 물리학의 유물인 메마른 기계론적 자연관이나 소박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해방되고 더욱 윤택하며 친화력 있는 전일적 우주관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번역된 것이다. p17
제2판 저자 머리말
내가 물리학자의 세계관과 신비주의자의 세계관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했을 때는, 그런 유사성이 그 전에 암시된 적은 있었으나 철저히 탐색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분명한 것이었고 미래에 상식이 될 것이라고 굳게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집필하면서도 때로는 내가 글을 쓴다기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쓰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p19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하여 물러난다”는 중국의 옛 격언을 예증하는 거대한 진화운동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일련의 광범한 사회운동을 낳았고, 그들은 모두가 동일한 방법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생태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신비주의에 강력한 관심이 쏠리고 있으며, 남녀평등에 대한 각성이 고조되고, 건강과 자유에 대한 전일적 접근법의 재발견 등은 동일한 진화적 흐름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합리적 남성적 자세와 가치의 과대평가에 대항하여 인간 본성의 남성과 여성적 측면 간의 균형을 되찾으려 한다. 이리하여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과 동양 신비주의의 세계관 사이의 심오한 조화를 깨닫는 것이 곧 보다 큰 문화적 전환의 뗄 수 없는 일부며, 거기서 우리들의 사상, 지각과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게 될 새로운 실재관이 출현하게 된다. p21
제1판 저자 머리말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5년 전 한 가지 아름다운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 나는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Dance of Shiva)'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25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와 신비적 진리에 대한 명상적 체험 사이에 가로놓인 간격을 극복한다는 것은 내게는 여간 아닌 난제였고 지금도 어려운 문제다. p25
이 책은 물리학을 꼭 알지 않아도 되는, 동양의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진 일반 독자를 위해 쓰인 것이다. p25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는 이러한 뛰어듬이 고도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주는 일 뿐이다. p26
제1부: 물리학의 길
1.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그것은 초기 그리스의 신비적 철학에서부터 출발하여 주지주의적 사고의 인상적인 발전을 통해 융성하고 개화했지만 그것 때문에 점차 그 신비적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극동의 세계관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서구 과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고 다시 초기 그리스나 동양 철학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p37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 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쌍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보았다. 이 대립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이 통일체의 분열은 엘레아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학파는 제신(諸神)과 인간의 위에 신성한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 원리는 처음에는 우주의 통일체와 동일시되었으나 후에 와서는 이 세계의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는 지적이요, 인간적인 신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끝내는 정신과 물질의 분열, 즉 서양 철학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 간 사조가 시작된 것이다. p38
그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불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서양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 p38
정신, 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 이 ‘데카르트적’인 분할은 물질을 죽은 것으로, 자신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고,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각기 다른 객체의 군집으로 보도록 허용했다. p40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불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p40-41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p41
이러한 분열-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환ㄱ여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열-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p41
힌두교도건, 불교도건, 도가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 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개오(開悟)라고 부르는-은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체득이며 그 구경에 있어서는 종교적 철학인 것이다. p42
2. 아는 것과 보는 것
사람의 마음엔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 가지 지식 또는 의식의 양태가 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과학과 종교에 연관되어 왔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하여 인정되어 왔다. 서양에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때문에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지식이 자주 평가절하 되었고, 반면에 동양의 전통적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와는 정반대이다. 서양과 동양의 위대한 두 사람의 지식에 관한 다음의 진술은 이 두 가지 입장을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고, 중국의 노자는 “알아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p46
이 개념적 지식의 한계나 상대성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일은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실재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실재 그 자체보다 훨씬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 개념들과 상징들을 실재 그 자체로 곧잘 혼동하기도 한다. .. 불교의 선사들은 달을 가리키기 위하여 손가락이 필요한 것이지, 일단 달을 알아본 다음에는 그 손가락 때문에 마음을 써서야 되겠느냐고 말한다. 도가의 현자 장주는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p48
인류는 근 2,000년 동안 그 합리적 지식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더 현명해지지 못했다는 사실로 절대적 지식은 언어로써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장주가 말했듯이 “만약 그것을 말로써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네들의 형제에게 말했을 것이다.” p50
추론적 지식과 추론적 행위는 확실히 과학적 탐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과학자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부여해서 그를 창조적이게 하는 직관에 의하여 탐구의 추론적 면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기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등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욕탕 속에서 심신을 녹이고 있을 때나 숲 속이나 해변을 거닐 때처럼 허심할 때에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p52
수학이 극단적으로 추상되고 압축된 언어라는 견해가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상 많은 수학자들은 수학을, 단지 자연을 기술하는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 신조의 창시자는, “만물은 수(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매우 독특한 수학적 신비론을 발전시킨 피타고라스였다. 이리하여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종교의 영역에 논리적 추리를 도입시켰는데, 이것은 버트런드 러셀에 의하면 서구의 종교 철학에 결정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p53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직관적 통찰의 또 다른 예로서 농담이 잘 알려져 있다. 농담을 이해하는 그 눈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개오’의 순간을 경험한다. 이 순간은 무의식중에 자발하는 것이어서 설명으로나 지적분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직관적인 통찰이 익살의 밑바탕을 순간적으로 꿰뚫을 때에만 우리는 그 익살이 의도했던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통찰과 농담의 이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개오한 인사들에게는 틀림없이 잘 알려져 있을 터다. p60
노자는 학구와 명상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한다.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 ...
장주의 말에, “성인의 고요한 마음은 천지와 만물의 거울이다.”는 것이 있다. 주위 환경과 합일하는 체험은 이러한 명상 상태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모든 분별이 정지되고 분별이 없는 통일체로 사라져 가는 의식 상태인 것이다. p62
선의 대가 야수타니 노사는 선명상법인 ‘시칸타자’를 기술하는 데 이 이미지를 쓰고 있다.
‘시칸타자’는 긴장되거나 조급하지 않으며 분명 이완도 되지 않은 집중된 자각의 고양상태다. 그것은 죽음을 마주 보고 있는 자의 마음이다. 고대 일본에서 곧잘 있었던 것과 같은 검도의 칼 겨룸을 당신이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이 상대방과 마주 섰을 때 당신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노려보면서 심신을 다잡아 조일 것이다. 만약 일순이나마 방심하면 당신은 즉각 베일 것이다. 군중들이 검투를 보러 모여든다. 당신은 장님이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목의 한쪽 귀퉁이로는 그것들을 보고 들을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이 그 같은 감각적인 인상에 흘리지는 않는다. p62
도교의 태극권은 중국에서 최고의 무예로 간주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전사의 마음을 독특한 방법으로 극히 영민하게 하는, 느리고도 율동적인 요가와 같은 동작으로 연속된 것이다.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현대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 사사상가들은 피차 이 점을 잘 인시하고 있다. p63
그러면 동양의 전통은 언어적 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무엇보다 먼저 신비가들은 실재의 체험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그 체험의 기술에는 흥미가 없다. p66
3. 언어를 초월하여
동양의 신비 사상은 ... 힌두교에서는 신화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그것들을 우회한 반면에 불교와 도교는 그 역설을 감추느니보다 차라리 두드러지게 드러내려 했다. 도가의 주요한 경전인 노자의 도덕경은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난문(難文)이다. p72
우리는 수천 ‘칼파’ 이전에 헤어졌지만
우리는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우리는 하루 종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없소
선종은 대화에서 야기되는 불일치에서부터 지덕을 창출해내는 특별한 비결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언어로써가 아니라 공안의 체계를 가지고 온전히 전주시키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시켜 왔다. ‘공안(公案)’은 세심하게 궁리해 낸 일견 사리에 합당치 않은 난문으로서,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논리와 추론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 합리적인 언사와 역설적인 내용은 사유로써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다 그것들은 사유 과정을 정지시키고자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며, 그래서 제자에게 실재에 대한 비언어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대비시켜 주는 것이다. p73
당신이 필히 해야 할 바는 이 ‘무’의 정신이나 정수를 지적인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가장 내밀한 존재 속으로 파고듦으로써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 다음 개념이나 이론이나 추상적 설명에 의지함이 없이 무를 살아 있는 진리로서 이해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내 앞에 펼쳐 보여야 한다. 통상적인 인식으로써는 ‘무’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당신의 전존재를 내던져 그것을 곧바로 거머잡아야 한다. p74
무한히 작은 세계로의 이 여행에서 철학적 견지에서 보아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그 첫걸음, 즉 원자 세계로 들어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원자의 내부를 조사하고 그 구조를 살핀다는 것은 과학이 우리가 가진 감각적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과학이 논리와 상식에 그의 절대적 확실성을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원자 물리학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의 일단을 과학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 준 것이다.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도 이제 비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신비가들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 p77
4. 새로운 물리학
동양의 신비가에 의하면 실재에 과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은 그 사람의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스즈키 다이이세쓰는 그것을 “경험의 모든 표준 형태를 다 뒤엎는, 인간의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체험의 충격적인 특성을 ‘깨어지고 있는 그릇의 바닥’이라고 묘사한 어느 선사의 말을 빌려 설명하였다. p79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현대 물리학의 최근의 발전에 대한 격렬한 반응은 물리학의 기초가 여기에서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 동요로 해서 과학의 토대가 와해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p80
뉴턴은 그의 광학(光學)에서 신이 물질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였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명백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태초에 신이 이렇게 물질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견고하고, 질량을 지니고, 딱딱하고, 꿰뚫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입자로써 물체를 빚어 내시고 당신의 창조 목적에 가장 잘 이바지할 수 있도록 거기에 그러한 크기와 모양과 그러한 속성과 그리고 공간에 대한 그러한 비율을 내셨으리라. 저들 견고한 원초적인 입자들은 고체이므로 그것은 포개어 이룬 구멍이 있는 어떤 것보다 비할 바 없이 더 단단해서 그것들은 결코 닳지도, 부서져 조각나지도 않는다. 신이 몸소 빚어 내신 이 최초의 창조물을 세속의 힘으로는 절대 나눌 수 없으리라. p83
18세기와 19세기는 뉴턴 역학의 어마어마한 성공을 보았다. ... 따라서 그는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규칙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러한 불규칙한 것을 바로잡으려고 우주 안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신을 가정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p85
현대 물리학의 초기에 비범한 지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이 곧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905년에 간행된 두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두 혁명적인 추세를 창도했다. 그 하나는 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적 복사에 대한 새로운 고찰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그 후 원자현상에 관한 이론인 양자론의 특성이 되었다. 완전한 양자론은 25년 후에 물리학자들의 전체 팀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의 경우엔 거의 전적으로 아인슈타인 자신에 의하여 완전한 형태로 수립되었다. p90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p90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데 매우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의 수정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는 데 이용하는 전체계의 수정을 초래한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mc2에 의해 주어진다. 이때 c는 빛의 속도다. p91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2차원적인 평면 기하학이 구의 표면에 적용될 수 없듯이 평범한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러한 휘어진 공간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p92
제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
5. 힌두교
힌두교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볼릴 수도 없고, 또한 잘 정의된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종파와 의식과 철학적 체계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하고도 복합적인 사회 종교적 유기체이며,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잡다한 남신과 여신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교 의식과 예식 및 정신적 계율을 포함하고 있다. p117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무기를 활로 삼고
명상으로 날카롭게 간 화살을 그 위에 걸어
‘그것’의 본질로 향하는 사유로써 잡아당기어
벗이여, 표적인 그 불멸을 꿰뚫어라. p118-119
힌두교는 해탈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힌두교는 그 모든 교도들이 같은 방식으로 신성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각기 다른 깨달음의 양태에 맞추어 상이한 개념과 의식과 정신적 수련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의식 중에 많은 것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에 힌두교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브라만이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힌두교의 특성인 대자 대비한 관용과 포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p123
7. 중국 사상
중국인들은 현자와 왕의 이미지로 이것을 연관시켰다. 장주의 말로 표현한다면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그들의 고요함으로 해서 현자가 되고 움직임으로 해서 왕이 된다”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p138
두 가지 사상 경향은 중국 철학에서 정반대의 두 극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다 같은 인간성의 양극으로서, 그래서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다. 유교는 대체로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규율과 관습을 익혀야만 하는 아동교육에서 강조되었고, 반면에 도교는 사회적 관습에 짓눌려 파괴되어 버린 원래의 자발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년층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p138
도의 길에 순응하고 천지의 자연 순리를 따르는 자는 전 세계를 쉬이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 ..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이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p142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p143
이 <번역의 서>, 즉 중국의 <역경>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세상의 모든 문헌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 3천년을 헤아리는 중국 문화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의미심장한 책이라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 책에서부터 그 영감을 취했거나, 아니면 거꾸로 이 책의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수천 년의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지혜가 <역경>을 만드는 데에 다 녹아 들어갔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p147
8. 도교
도의 운동이 대립자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이라는 인식으로부터 도가들은 인간 행위를 위한 두 가지 기본율을 추출해 냈다. 어떤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그 반대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 약화시켜리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주고
때려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p158
음과 양의 대조는 중국 문화를 일관하는 기본적인 질서 원리일 뿐만 아니라, 중국 사상의 두 지배적인 경향 속에도 역시 반영되어 있다. 유교는 이성적, 남성적, 행동적, 지배적이다. 다른 한편 도교는 직관적, 여성적, 신비적, 순응적인 모든 것을 강조한다. 노자는 말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p162
9. 선
다른 한편 중국 정신의 실용적인 면을 인도불교의 실제적인 상에 집중하여 보통 명상으로 번역되는 찬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정신적 수련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도불교의 영향에 대응했다. 이 찬 철학은 기원후 약 1200년경 결국 일본에서 채택돼 젠이란 명칭 아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전통으로서 그곳에서 꾸준히 계발되어 왔다. 선은 이처럼 상이한 세 문화의 철학과 특질이 독특하게 융합된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하나의 생활방식이지만 여전히 인도의 신비주의, 도가의 자연성가 자발성에 대한 사랑, 유교 정신의 철저한 실용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p165-166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 언어나 문자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이 ‘곧바로 가리킨다(直指)’는 기법이 선에 독특한 풍미를 주고 있다. p167
선에 있어서 개오(開悟)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을 뜻하지 않고 그 반대로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p168
선에 있어서 개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섞여 드는 대상과 범사와 사람들이다. 이처럼 생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깊은 신비성을 여전히 띠고 있다.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p169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선의 불성을 실제로 깨닫는 일이다. 곧 몸과 마음이 더 이상의 개선이 필요 없는 조화된 통일체 속에 융합돼 있다는 깨달음 말이다. 선시에서 이르기를,
고요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봄은 오고, 풀잎은 저절로 자란다. p171
그는 궁예가 힘들이지 않고 목적도 없이 신명나게(spontaneous) ‘춤추는’ 종교적 의식으로서 어떻게 그에게 내보였는지를 묘사했다. ... 헤리겔의 궁술에 관한 묘사는 선에 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바로 그 까닭으로 해서 선에 관한 가장 순수한 설명의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p172
제3부: 대비
10. 만물의 통일성
그러나 이 모든 전통 속에서 발전되어 온 세계관의 근본적 요소들은 동일하다. 또한 이러한 원리들은 현대 물리학으로부터 도출되는 세계관의 근본적 특색들과 유사하다.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그 본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인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p175
물질적 대상들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된다. ... 그 밖의 자연의 배후 또는 환경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객체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통일체의 불가분한 일부요, 그 미묘한 표현이기도 한 그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다. ...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p185
현대 물리학으로부터 도출되는 상호 연결된 우주적 망(網)이란 상(이미지)은 동양에서 자연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전달하는 데 널리 쓰여 왔다.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브라만은 우주적 망을 통일시켜 주는 망사로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반이다. p186
대승 불교도들은 이 우주적인 상호 연관성을 예증하기 위해 수많은 우화와 직유를 개발시켜 왔는데, 그중 몇몇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망철학의 상대론적인 해석과 관련하여 뒤에 논의될 것이다. 우주적 망은 마침내 대승 불교의 일파로서 서기 3세기경 인도에서 기원하여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주종파를 이루고 있는 탄트라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종파의 경전들은 <탄트라>라고 불리는데, 산스크리트 어원은 ‘엮는다’는 뜻이며 만물의 교직과 상호 의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p186
원자 물리학으로부터 도출되는 세계관을 요약하기 위하여 탄트라 승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아주 적절할 것 같다.
불교도는, 독립적으로 또는 외따로 존재하는 바깥 세계가 있어 그 역동적 힘 속에 자신을 삽입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는 동일한 직물이 양면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모든 힘과 사건들, 의식의 형태와 그 대상물의 실날들이 서로 연관 지어져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끝없는 망으로 짜여지고 있다. p190-191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따라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 이러한 역동적 균형의 개념은 동양의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이 경험되는 방법상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정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언제나 두 극단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이 점은 중국의 현인들이 원형적 양극을 상징하는 음과 양으로써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것이다. p195
우리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남성/여성적 양극성에 불안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 서양 사회는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면보다 남성적인 면에 치중하였다. 각인의 퍼스널리티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상호작용이 낳은 결과라는 것을 인식하는 대신에, 모든 남자는 남성적이고 모든 여자는 여성적이라고만 생각하는 고정된 양식을 수립시켰다. 그래서 이러한 고정 관습이 남자에게 지도적인 역할과 많은 사회적인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또 이러한 태도는 인간성의 모든 ‘양성적’인 면-남성적인 면, 즉 활동성, 이성적 사고, 경쟁, 공격성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직관적, 종교적, 신비적, 비의적 혹은 심령적이라는 말로써 묘사될 수 있는 ‘음(陰)’, 즉 여성적인 의식 양태는 서양의 남성 지향적 사회에서는 항상 억압을 받아 왔다. ... 노자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깨달은 인간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p197
빛의 경우에 보라색은 높은 진동수와 짧은 파장을 가지므로 고에너지의 광자와 높은 운동량으로 구성돼 있는 반면, 적색은 낮은 진동수와 긴 파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낮은 에너지의 광자와 낮은 운동량을 가지고 있다. p207
12. 공간 - 시간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 하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도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지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경험의 영역을 확장시킬 대마다 우리 정신의 한계는 더욱 분명해지고 우리는 어떤 개념들을 수정하거나 심지어 방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15
이처럼 고대 동양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상대성 이론의 기본 태도와 같은 태도를 이미 취하고 있었다.-즉 우리의 기하학적 개념은 자연의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특성이 아니라 지성의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p219
현대 물리학에서의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앞서 인용한 “공간과 시간은 명목, 생각의 형식, 일상적 관용어에 불과하다”는 동양 신비가의 개념과 극히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p222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어떤 사람의 그림자의 실제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한 물체의 ‘진정한’ 길이를 묻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림자란 3차원 공간에 있는 점들이 2차원 평명 위에 투영된 것이며, 그래서 그 길이는 투영의 각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4차원적인 시공 속에 있는 점들이 3차원 공간에 투영된 것과 같으며, 그것의 길이는 관계 구조에 따라서 달라진다. p227
동양의 신비주의에는 그 어느 곳에나 실재의 ‘시공 특성’에 관한 강한 직관력이 일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과 시간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것은 상대성 물리학의 놀라운 특성으로, 재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직관적 관념은 아마도 불교에서 특히 대승 불교의 화엄종에서 가장 명료한 표현을, 그리고 그 불후의 정교함을 발견하였다고 할 것이다. p229
나의 견해로는, 동양 신비주의의 자연관이 그리스의 대부분 철학자들의 견해보다도 현대의 과학적인 견해에 훨씬 더 잘 부합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네들의 시간 지향적인 직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 자연 철학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본질적으로 정적이며, 대체로 기하학적인 사고방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지극히 ‘비상대론적’이며 그것이 서양사상에 강한 영향을 끼친 탓으로 오늘날 우리가 현대 물리학의 상대론적 모델 문제를 두고 그토록 혹심한 개념적인 곤경을 겪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철학들은 ‘시공’의 철학들이요, 그리하여 그들의 직관은 종종 우리의 현대적 상대성 이론에 함축돼 있는 자연관에 상당히 밀접하게 접근되어 있다. p230
이 공간 체험에서 시간적 연속은 동시적인 공존, 즉 병존하는 사물들의 존재로 전환된다. ... 그리고 이것은 다시 정지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통합된 생동하는 연속체로 된다. p246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은 흐른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은 현재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다고 하는 이 생각이 아마도 시가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지나가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시간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p247
13. 역동적인 우주
부처는 카르마의 전통적인 개념을 가지고 그 역동적인 상호 연결의 개념을 인간적 상황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카르마는 세간에 있어서의 인과의 끝없는 사슬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부처는 개오(開悟)의 경지에서 멸진(滅盡)시켰다. p251
동양의 신비가들은 우주를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그물로서 보았는데 그 상호 연관은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다. 우주의 망은 생동하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성장하며 변화한다. p254
이 ‘대폭발(big bang)' 모델에 따르면 그 대폭발의 순간은 우주의 시작 및 공간과 시간의 시작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그 순간 이전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시 사고와 언어상의 지난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버나드 러벨 경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거기에서 우리는 사고의 커다란 장벽에 부딪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적 경험의 견지에서 존재했던 것 이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들과 고투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친숙한 세계가 사라져 버린 거대한 안개의 장막 속으로 돌연히 들어선 것처럼 느껴진다. p261
맺음말
현대 물리학의 주요 이론들과 모델들이 동양 신비주의의 견해들과 내용이 일치하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나에게 있어서는 끊임없는 환희와 영감의 근원이 되어 왔던 경험을 독자로 하여금 수시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화를 체험한 사람에게 있어서 물리학자와 신비가들의 세계관 사이의 유사성의 중요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때 흥미있는 문제는 그러한 유사성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왜 존재하며, 더 나아가 그것의 존재가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p382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물리적 현상 같은 것의 기술에는 유용하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을 다루는 데에는 적절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기술공학의 근본으로서 매우 성공적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적 영역에 있는 물리적 현상의 기술에는 부적당하다. ‘유기적’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신비가들의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불가분하고 조화된 전체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 개념에 반대한다. 이 세계관은 신비주의적 전통에 있어서 의식의 명상적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p382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과 유기적 우주관 둘 다 정당하며 유효하다. 전자는 과학과 공업에, 후자는 균형있고 충만된 정신생활에 대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의 차원들을 넘어서면 기계론적 개념들은 그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신비가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들과 매우 흡사한 유기적 개념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던 현대 물리학의 본질적인 경험이다. p382
물리학자들과 신비가들의 견해 사이의 유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방법은 철두철미 경험적이다. 물리학자는 그의 지식을 실험으로부터 유도해 내고, 신비가는 명상적 통찰로부터 끌어낸다. 둘 다 관찰 행위인데, 이 두 영역에 있어서 이러한 관찰이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p383
현대 과학이라는 것이 그 모든 정교한 기계 장치를 가지고서도 동양의 현인들에게는 수 천년 동안이나 알려져 왔던 고대의 지혜를 단지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물리학자들은 그 과학적 방법을 버리고 명상을 시작해야 하는가? 과학과 신비주의는 서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어쩌면 종합이 될 수 있을 것인가? p385
중국의 고언(古諺)으로 부연하자면 신비가들은 도의 가지가 아니라 도의 뿌리를 이해하고, 과학자들은 뿌리가 아니라 그 가지를 이해하고 있다. 과학은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주의자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둘을 필요로 한다.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p386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원래 영국의 임페리얼 칼리지의 물리학 교수로 있다가 현재는 미국의 버클리 대학에 재직하고 잇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The Tao of Physics-An Exploration of the Parallels Between Modern Physics and Eastern Mysticism> 전 3편 18장을 번역한 것이다. 카프라 교수는 미국의 물리학 잡지에 수차 현대 소리자 물리학과 동양 철학의 비교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또한 로스엔젤레스의 선 센터에서 직접 선을 공부하기도 한 동양통의 물리학자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비교라는 다소 상이해 보이는 두 가지의 주제에 대한 비교를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과 관찰방법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적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과 현재 인류에게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내었다는 이 책의 가치를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가 현대 물리학의 주요개념들과 이론들을 수식이나 전문 기호를 쓰지 않고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여전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 펴낸 이 책이 지금까지 장수하는 것을 보면, 세상은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있는 듯하며, 다만 나의 무지를 탓할 뿐이다. 분명히 고교 시절에 한 번씩 들어봤던 이론들이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했던 내용들인 것 같은데... 나는 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암기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 책의 가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철학이 종교와 과학의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버틀란트 러셀의 개념정의에도 불구하고, 카프라는 이런 구분마저도 사실 사변적인 것일 수 있으며, 오히려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과 육체, 양과 음, 내부와 외부, 종교와 과학, 천당과 지옥, 선과 악 등 이원론적인 구분으로 개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서양식 사고에 대한 동양사상적 접근과 해석에 대한 깊은 공감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자연과 환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주제로 한 나의 책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일반인들의 시각과 공감을 끌어내는 문제는 신비주의적 체험도 물리학적 추론적 사고도 멀게만 느껴지는 방법들이다. 일상의 소재... 그러면서도 놓쳐왔던 것들... 반전이 있는 이야기들이 좀 더 설득력 있는 소재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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