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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9일 04시 29분 등록

현대 물리학은 별들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우주의 불인 핵융합의 열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은 인간들에 의하여 대량 학살을 초래할 수 있는 핵무기로 발전되었고, 이에 현대 물리학의 태두들은 많은 회의와 양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문명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모순에 그 죄가 있는 것이지, 이 천상의 불을 지상에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언젠가는 이 지구가 핵무기에 의하여 소멸될 것이라는 불안 속에 살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 문명의 분열 작용에서 오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16


정신,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탁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 이 '데카르트적'인 분할은 물질을 죽은 것으로, 자신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고,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각기 다른 객체의 군집으로 보도록 허용했다.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해서 그의 기계론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 그것은 신성한 법을 펼쳐 천상에서부터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전제적인 신의 이미지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자연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 불변한 신의 법으로서 보인 것이다. 40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으나, /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 이 세상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 그는 네 영혼, /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43


이론적 지식이 추정하고 정량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 과학을 그 영역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방법들로써 획득된 어떠한 지식도 그 한계가 현돼 과학에서 점점 두드러지고 있으며, 베르너 하이젠 베르크의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으ㅢ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라는 말에서처럼, 특히 우리를 가르쳐 온 현대 물리학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하다. 48


추론적 지식과 추론적 행위는 확실히 과학적 탐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과학자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부여해서 그를 창조적이게 하는 직관에 의하여 탐구의 추론적 면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기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채강 앞에 앉아서 등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욕탕 속에서 심신을 놀이고 있을 때나 숲 속이나 해변을 거닐 때처럼 허심할 때에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52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것은 실재의 철학적 모형과 다를 바 없으며, 그래서 이 양자는 잘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55


현대의 아원자 물리학의 실험을 반복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년간의 수련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 실험을 통하여 자연에 특정한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그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8


물리학자들의 기술적 장치의 복잡성과 효율성은 깊은 명상에 잠긴 신비가들의 육체적, 정신적인 의식 상태보다 못하지 않다면 거의 필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과 신비가들은 범인들이 따를 수 없는 자연을 관찰하는 법을 극히 정교하게 계발시킨 것이다. 현대의 실험 물리학에 나오는 한 페이지만 해도 초심자에게는 티베트의 만다라 신상처럼 불가사의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우주의 본질 속으로 파고들어 간 질문의 기록일 따름이다. 59


동양의 예술 양식들 역시 명상의 양식이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이념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직관적 형태를 발전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자기 실현의 방도인 것이다. 인도 음악은 악보로 읽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연주를 듣고 음악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킴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극 운동도 구두 지시에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생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거듭거듭 반복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일본의 다도는 느리고 의례적인 동작으로 가득 차 있다. 중국의 서도 는 억제되지 않은 삼매경의 손놀림을 요구하고 있다. 동양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모든 기예는 의식의 명상적 형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쓰이고 있다. 61


모든 과학적 모형과 이론들은 근사치 밖에 안되고 그것의 언어직인 해석도 우리의 언어가 지닌 애매모호성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생각은 금세기 초 새롭고 전혀 예기치 않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널리 받아들여졌다.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원자와 아원자적인 실체를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납인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은 이 실체가 고전적 논리를 초월하며, 그것은 일상 언어를 통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69


가장 어려운 문제는......양자론에서 야기되는 언어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수학적 기호들을 통상 언어의 개념들과 연결시키는 단순한 지침도 우리는 애초에 가짇고 있지 않다. 우리가 처음부터 알고 있는 오직 한 가지는 우리들의 통상 개념들이 원자의 구조에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이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확실히 가장 흥미로운 사태 발전이 되어 왔으며, 여기에 그것을 통양 철학과 연관지을 수 있는 뿌리의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학파에서 논리와 추론은 철학적 이념을 공식화하는 주요한 도구로 언제나 쓰여 왔으며, 버트런드 러셀에 따른다면 종교 철학에 있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동양의 신비 사상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실재가 일상 언어를 초월한다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 있었으며, 그래서 동방의현자들은 논리와 통상 개념을 뛰어넘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실재에 대한 모형이 서양 철학의 모형보다도 현대 물리학에 보다 적절한 철학적 배경을 이루게 된 주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양의 신비 사상이 부딪친 언어의 문제는 현대 물리학이 당면한 문제와 똑같다. 물리학자나 신비가나 양쪽 다 그들의 지식을 전달하려 하고 있지만, 말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경우 그들의 진술을 역설적이고 논리적 모순에 가득 차 있다. 70


사물의 본질적인 솟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 점을 신비가들은 언제나 인지해 왔지만 과학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문제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천변만화하는 자연 현상의 배후에 있는 '자연의 기본 법칙'을 탐구해 왔다. 이러한 현상들은 과학자들의 거시적 환경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들언어의 지적 개념과 이미지는 바로 이런 경험에서부터 추상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데 충분하고도 적절한 것이다. 75


무한히 작은 세계로의 이 여행에서 철학적 견지에서 보아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그 첫걸음, 즉 원자 세계로 들어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운자의 내부를 조사하고 그 구조를 살핀다는 것은 과학이 우리가 가진 감각적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과학이 논리와 상식에 그의 절대적 확실성을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원자 물리학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의 일단을 과학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 준 것이다.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도 이제 비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신비가들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 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 77


현대 물리학의 최근의 발전에 대한 격렬한 반응은 물리학의 기초가 여기에서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 동요로 해서 과학의 토대가 와해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물리학의 이론적 토대를 이러한 (새로운 방식) 인식에 적응시키려 했던 나의 모든 시도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것은 마치, 지반이 밑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어느 곳에도 근거를 가질 만한 간단한 기반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현대 물리학의 제 발견은 공간, 시간, 물질, 대상, 인과 등과 같은 개념들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개념들은 우리들의 세계의 경험 방식에 매우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 개념들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었던 물리학자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한 변화로부터 새롭고도 아주 다른 세계관이 나왔고, 그것은 현재의 과학적 탐구에 의하여 아직도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80


아인슈타인은 자연 본래의 조화를 굳게 믿었고, 그의 과학적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가장 깊은 관심은 물리학의 통일된 바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전 물리학에서는 별개의 두 이론인 전기 역학과 역학의 공동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이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다. 이 체계가 곧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것은 고전 물리학의 구조를 통일하고 완전하게 하였지만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전통적인 개념을 철저히 변화시켰으며 뉴턴적 세계관의 한 근본을 전복시켰다. 90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관찰자들이 관찰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들은 사건들을 시간상으로 다르게 볼 것이다. 그러한 경우, 어느 관찰자에게는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다른 관찰자들에게는 다른 시간차를 가지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적ㅇ은 그 절대적 의미를 상실한다. 상대성 이론에서 물리적 현상의 토대가 되는 뉴턴적인 절대 공간의 개념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절대적 시간의 개념도 그러하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91


새로운 원자 이론은 원자 구조에 관계되어 제기되었으며, 러더퍼드의 유성 모델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었던 몇 가지 수수께끼를 즉시 풀어주었다. 우선 첫째 러더퍼드의 실험은 견고한 물체를 형성하는 원자들이 물질의 분포에 관한 한 거의 전적으로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주위의 모든 대상들과 우리 자신이 거의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닫혀 있는 문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것일까? 바꾸어 말하면 물체에 견고한 성질을 부여하는것은 대체 무엇일까? 98


우리는 핵의 구조와 핵자들 간의 상호 작용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알고 있으나, 아직 그 근본적인 단계에서의 핵력의 본성과 그 복잡한 형태는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원자 세계를 밝혀 준 양자론에 견줄 만한 핵자 세계에 관한 완전한 이론이 없다. 물론 입자 세계의 몇몇 성질을 매우 잘 설명해 주는 '양자-상대론적 모델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입자 세계의 완전한 이론을 위하여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을 융합하는 일은 여전히 현대 기초 물리학의 중요 문제며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다. 106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를 얻는 한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가 이 세계에 관해서 말하는 것도 모든 '사물'의 무상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임존 때 부처가 한 마지막 말은 그의 세계관과 교사로서의 자세의 특성을 잘 드러내 보여 준다. "쇠퇴는 모든 복합적 사물에 고유한 것이다"라고 그는 입멸 직전에 말했다. "그러하니 정근 정진하라." 131


공자의 어록인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은 중국적 사유 방식의 전형이라 할 간결하고 암시적인 스타일로 쓰여 있다. 중국 정신은 논리적으로 추론해 들어가는 일이 없어 서양에서 진화되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언어를 발전시켰다.  중국의 단어들은 명사와 형용사와 동사로 사용될 수 있고 시제는 문법에 의해서라기보다 문장의 정서적 내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중국의 고대어는 분명하게 묘사된 개념을 나타내는 절대적 기호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강렬한 암시력을 가지고 마츰속에 그림과 같은 영상과 감정을 막막하게 복합시켜 주는 심원한 상징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화자의 의도는 어떤 지적은 사상을 많이 나타내기보다 듣는 이에게 영향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록된 문자는 꼭 무슨 절대적인 기호가 아니라 이미지의 완전한 융합과 단어의 암시력을 보존시켜 주는 하나의 유기적 패턴-하나의 '형태'-이었다. 140


중국인의 견해로는 과다히 가지는 것보다 과소히 가지는 것이 더 낫고 너무 지나치게 해버리는 것보다 덜 된 채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비록 멀리 가지는 못할지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멀리 멀리 가려는 사람이 마침내 서쪽에 당도하게 되는 것처럼, 부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돈을 계속해서 축적하는 사람은 결국 가난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생활 수준'을 높이려고 끝도 없이 발버둥치는 오늘날의 산업 사회가 바로 그것 때문에 그 모든 구성원들에게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중국의 고대 지혜를 웅변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143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 주고

때려 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울 것이니. 158


노자에 있어서처럼 헤라클레이코스가 대립자의 역동적 상호 작용으로서의 변화의 개념을 가지고 모든 대립자는 극성을 띠고 있고, 따라서 접합된다는 발견에까지 어떻게 도달하게 됐는가는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하나고 같은 것이다. 신은 낮/밤이며, 겨울/여름이며, 전쟁/평화며, 배부름/굶주림이다."라고 그 그리스인은 말했다. 그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립하는 쌍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고, 이러한 모든 개념들의 상대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찬 것은 따뜻하게 되고, 따뜻한 것은 서늘하게 되고, 축축한 것은 건조하게, 메마른 것은 축축해진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쉬운것이 어려움을 불러일으키고......음양이 소리를 조화되게 하고, 뒤가 앞을 따른다"라는 노자의 말을 강하게 상기시켜준다. 160


음과 양의 대조는 중국 문화를 일관하는 기본적인 질서 원리일 뿐만 아니라, 중국 사상의 두 지배적인 경향 속에도 역시 반영되어 있다. 유교는 이성적, 남성적, 행동적, 지배적이다. 다른 한편 도교는 직관적, 여성적, 신비적, 순응적인 모든 것을 강조한다. 노자는 말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도가들은 인간성의 여성적인, 순응하는 성질을 펼쳐 보이는 것이야말로 도와 조화된 완전히 균형잡힌 삶으로 이끌어 주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믿었다. 162


'곧바로 가리킨다'는 기법이 선에 독특한 풍미를 주고 있다. 이것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동양적 마음의 전형이다. 선사들은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고 일체의 이론화와 공론을 경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갑작스럽게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말로써 진리를 곧바로 가리키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내가 언급한 공안처럼 개념적 사고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신비 체험에 대비시키기 위하여 사고 과정을 정지시키는 것을 뜻했다. 167


선에 있어서 깨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섞여 드는 대상과 범사와 사람들이다. 이처럼 생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싶은 신비성을 여전히 띠고 있다.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169


고요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봄은 오고, 풀잎은 저절로 자란다.


깨달음은 나날의 범사에 나타나 보인다는 선문의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회화와 서도, 원예 등의 다양한 기예뿐만 아니라 다도, 꽃꽃이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 궁도와 검도, 유도와 같은 무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제각기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도, 즉 개오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선 체험의 다양한 특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마음을 수련시켜 궁극적인 실재와 접할 수 있게끔 해준다. 171


원자 물리학에서 과학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단지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에 그가 영향을 미치는 정도만큼 자신이 관찰하는 바로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존 휠러는 관찰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을 양자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기고, '관찰자'라는 말을 '참여자'로 대치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188


동양의 신비가들이 모든 사물들을 기본적인 전일자의 현신으로서 경험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물들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 모든 상이성과 대비점들이 일체를 포용하는 통일체 속에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든 대조적인 것들의 통일성이라는 것, 특히 대립자들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의식으로서는 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므로 그것은 동양 철학의 가장 난해한 특성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양인의 세계관의 바로 근원에 들어 있는 통찰인 것이다. 193


나는 이미 그와 유사한 경지에 현대 물리학이 도달하고 있다고 주장한바 있다. 아원자 세계의 연구는 실재가 언어와 추리 작용을 부단히 초월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고, 또한 지금까지 대립적이고 융화할 수 없는것으로 여겨졌던 개념들이 통일이 이 새로운 실재의 가장 놀라운 모습의 하나로 드러났다. 이렇게 외면상 융화할 수 없는 개념들의 일반적으로 동양의 신비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바는 아니지만 - 비록 때때로 그들이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 그러한 개념들의 비통상적인 실재 수준에서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동양의 신비주의와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현대 물리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분야에서의 처험과 관려니킴으로써 극동의 몇몇 주요한 가르침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소수지만 동양의 신비주의에 대하여 이처럼 매우 가치 있고 고무적인 접근 방법을 찾아내고 있는 젊은 물리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198


힘과 물질, 입자와 파동, 운동과 정지, 존재와 비존재 - 이것들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초월된 대립 개념이거나 혹은 모순 개념들 중의 일부다. 이러한 모든 대립하는 쌍들 중에서 마지막 것이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원자 물리학에 있어서도 역시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까지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거은 양자론 가운데에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며, 그래서 계속 그 해석 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중심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은 동양의 신비주의에 있어서도 가장 곤혹스러운 난제 중의 하나다. 원자 물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신비가들도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 있는 실재를 문제 삼으며, 그들은 늘 이 중요한 사실을 역설해 마지 않는다. 204


현대 물리학은 동양의 신비주의의 기본이 되는 사상의 하나를 가장 극적으로 확증시켰다. 그것은 곧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도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지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경험의 영역을 확장시킬 때마다 우리 정신의 한계는 더욱 분명해지고 우리는 어떤 개념들을 수정하거나 심지어 방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215


상대성 물리학으로 인하여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시간이 제4차원으로서 3차원의 공간 좌표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상이한 관계 구조 간의 변형은 한 구조의 각 좌표와 다른 구조의 좌표의 결합으로써 표현하기 때문에 한 구조에 있어서의 공간 좌표는 일반적으로 다른 구조에 있어서는 공간과 시간 좌표의 결합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전혀 새로운 상황이다. 모든 좌표계의 변화는 공간과 시간을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결합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관찰자에게 있어서 공간이라는 것도 다른 관찰자에게는 공간과 시간의 결합일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은 공간이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자는 밀접하고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으며 '시공'이라고 불리는 4차원의 연속체를 구성한다. 224


불교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글자 뜻 그대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삼사라(samsara)'라고 부른다. 또 그들은 이 세계에는 집착할 만한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하여 불교도에 있어서 각자란 생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다. 선승 운문은 "도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간단히 "계속 걸어가라"라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불교도는 부처를 '여래', 즉 '왔다가 그렇게 가는 사람'이리고 한다. 중국 철학에서는 유동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재를 도라고 부르며 모든 사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우주적 작용으로 본다. 불교도와 마찬가지로 도교도도 사람이 흐름을 역행해서는 안 되며 그의 행동을 그것에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 역시 성현- 깨달은 자 -의 특징이다. 부처가 '왔다가 그렇게 가는 사람'이라면 도교의 성현은 회남자의 말과 같이 '도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사람이다. 253


'기'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가스' 혹은 '에테르'를 뜻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호흡이나 우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인체에선의 '기의 통로'가 전통적인 한방의 기초가 되고 있다. 침술의 목적은 이 채널을 통하는 기의 소통을 자극하는 데 있다. 기의 소통은 또한 무사의 도교식 무용인 태극권의 흐르는 듯한 몸놀림의 기본이기도 하다. 279


소리는 그 소리가 변할 때 변하는 일정한 진동수를 가진 파라는 것과, 원자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과 같이 현대의 입자 역시 그 에너지에 비례하는 진동수를 가진 파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견해와 현대 물리학의 견해 사이의 유사성은 특히 놀랄 만한 것이다. 장 이론에 따르면, 각각의 입자는 '조밀하고 오묘한 형태'로 에너지의 율동적 모형 (가상적 입자들)을 산출하면서 실로 '연원히 그의 노래를 부른다.' 310


대칭에 대한 동양 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 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산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동양의 예술 형식들은 비대칭을 현저하게 편애하였으며 완전히 규칙적이거나 기하학적 형상은 종종 기피되고 있다. 선의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일본의 회화는 소위 '여백(onecomer)'양식이라 불리는 방법으로 자주 그려졌다. 또한 일본 정원에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부석은 극동 문화의 이런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327


S행렬 체계에서는 공명을 입자라 부를 것인지 그러지 않을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입자들은 반응의 망에 있어서 중간 상태로 보여진다. 그리고 공명들이 다른 강입자들보다 훨씬 더 짧은 생명을 지녔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공명'이란 말은 매우 적절한 용어다. 그것은 반응 채널에 있어서의 현상이나 그 현상중에 형성되는 강입자들 모두에 적용되므로 입자와 반응 사이의 밀접한 연계를 보여 준다. 공명은 입자이기는 하나 대상물은 아니다. 그것은 일, 사건, 또는 발생으로서 기술되는 편이 한결 더 어울릴 것이다.


불교도들은 대상을 사건으로 여겨 왔지 사물이나 실체로서 여겨 오지 않았다. 불료도들이 그들의 자연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현대 과학에서 실험과 수학적 이론을 통하여 재발견되어 온 것이다. 340


동양의 신비가들은 우리가 감지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특별한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고 이 의식 상태가 지나가면 다시 사라지는 마음의 소산물임을 거듭거듭 우리들에게 말해 준다. 힌두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상들과 구조들은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것들에게 깊은 의미를 부여하려는 우리의 성향을 인간의 근본적인 망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불교도들은 이 망상을 무명(avjidya) 혹은 무지라고 부르며, 그것을 부정한 마음의 상태로 본다. 348


현대 물리학자와 동양의 신비가는 양편 다, 변화와 전환의 이 세계에 있어서의 일체의 현상이 역동적을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이러한 상호 관계를 우주적 법칙, 곧 업(karma)의 율법으로서 보고 있지만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건들의 우주적 망 속에 들어있는 어떤 특별한 모형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편 운동과 변화를 역시 강조하는 중국 철학은 도의 우주적 유동 가운데에서 연속적을 형성되었다가는 다시 이산하는 역동적인 모형의 개념을 발전시켜 왔다. <역경>, 즉 <변역의 서>에서 이러한 모형들은 이른바 육효라는 원형적 상징의 체계로 다듬어져 왔다. 350


<역경>에서 단괘와 중괘는 '음'과 '양'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되며, 우주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상황들 속에서 반영되는 도의 모형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돌은 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적 흐름과 변화 속에서의 단계로서 보여진다. 이것이 바로 그 제목에 표현되어 있다시피 <변역의 서>의 기본적인 사상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상황들은 변화와 변형에 따르는 것이므로 그것들의 상인 중괘와 단괘도 역시 그러하다. 그것들은 끊임없는 변역의 상태에 있다. 외줄의 선이 바깥쪽으로 놓이고 또한 둘로 갈라진 선이 안쪽으로 놓이고 다시 그것이 뒤바뀐다. 변화에서 또 다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나타낸다. 353


중국인의 견해로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들과 현상들이 변역의 모형으로부터 생겨나며 단괘와 중괘의 다양한 선들에 의해 표상된다. 이리하여 물리적 세계에 있는 사물들은 정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도의 우주적인 진행 과정에 있어서의 변전적인 단계들로서 나타난다. 355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즉 움직임과 변화와 변형에 역점을 두고, 입자를 진행 중인 우주적 작용에서의 순간적인 상태로 간주하여 아원자적 세계의 '사물들'을 보게 된 것이다. 356


부트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최종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뉴턴의 우주는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기본적인 실체로부터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으므로 그 이상의 분석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실체들의 집합으로서는 이 세계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부트스트랩 가설이 명백히 표명했을 때까지는 이러한 개념은 자연 과학의 모든 이론에 절대적이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있어서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망의 어느 부분의 특성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든 다른 부분들의 특성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서로의 상호 관계의 전체적 조화가 그 망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 359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본성은 이름지어질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어떤 언어의 형식으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동양의 현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설혐앟는 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물의 통일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비지성적인 경험을 체득하는 데에 더욱 흥미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생의 의미, 세계의 기원, 열반(nirvana)의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고귀한 침묵'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부처의 태도다. 무엇인가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선사들이 하는 불가해한 대답도 제제들에게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거으로 여겨진다. 즉 모든 것이 다른 것을 결과라는 것, 또 자연을 '설명'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의 통일성이 보여 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뜻한다는 것, 궁극적으로는 설명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녀는 것으로 여겨진다. 365


깨달은 경지에서의 상호 관통 체험은 우주 안의 모든 현상들이 조화롭게 상호 관계하는 완전한 '부트스트랩' 상황에 대한 신비적 투시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한 의식의 경지는 모든 사물과 사건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직접적 경험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지성의 영역은 초월되며 인과적 설명도 불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상호 관통이라는 불교적 개념은 어떠한 과학적인 부트스트랩 이론보다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트스트랩 가설에 입각한 현대 물리학의 아원자적 입자 모형들은 대승 불교의 견해와 가장 인상 깊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369


하나가 다른 모든 것에 맞대여 놓여 있을 때 그 하나는 그것들 모두에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서, 또한 동시에 그 자체 속에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각 입자가 다른 입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개념은 동양의 신비주의 속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신비 사상에 있어서도 일어났다. 예를 들면 그것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단시에 암시되어 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 그리고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의 보기 위하여, /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 그리고 하나의 시간에 영원을 간직하라. 374


현대 물리학에서 의식의 문제는 원자적 현상의 관찰과 관련되어 야기되었다. 양자 이론에서 이런 현상은 일련의 작용에 연결함으로써만 이해 할 수 있으며, 그 종국점은 인간 관찰자의 의식에 놓여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의 말을 빌리면 "의식에 관계 없이 양자 이론의 법칙을 완전히 일관된 방식으로 형식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자들에 의해 그들의 연구에서 사용되는 양자 이론의 실용적 형식화는 그들의 의식에 뚜렷하게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그너와 다른 물리학자들은 분명히 인간 의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물질에 의한 미래 이론의 본질적인 국면이 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378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물리적 현상 같은 것의 기술에는 유용하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을 다루는 데에는 적절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기술 공학의 근본으로서 매우 성공적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적 영역에 있는 물리적 현상의 기술에는 부적당하다. '유기적'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신비가들의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불가분하고 조화된 전체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 개념에 반대된다. 이 세계관은 신비주의적 전통에 있어서 의식의 명상적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신비가들은 이러한 비일상적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내오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 세계를 서술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거시적 현상의 과학적 서술에는 부적절하다. 유기적 세계관은 기계를 조립하거나 인구 과잉의 세계에 있어서 기술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는 유리하지 않다. 382


우리는, 처음엔 완전히 관계가 없는 듯이 보였던 현대 물리학자와 동양 신비가의 방법들 사이에 사실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계에 관한 그들의 서술에 현저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만일 서양의 과학과 동양 신비주의간의 이러한 유사점들이 일단 인정된다면 이와 관련된 많은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현대 과학이라는 것이 그 모든 정교한 기계장치를 가지고서도 동양의 현인들에게는 수천 년 동안이나 알려져 왔던 고대의 지혜를 단지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물리학자들은 그 과학적 방법을 버리고 명상을 시작해야 하는가? 과학과 신비주의는 서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어쩌면 종합이 될 수 있을 것인가? 385


고전 물리학에서는 어느 사상의 세부가 알려지지 않을 때마다 확률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질 때 원칙적으로 그 조작에 개입되는 일체의 기계적 세부 요소들을 안다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주사위 그 자체, 땅에 떨어지는 표면 등등의 조성이 알려져야만 한다. 이러한 세부 요소들은 그 대상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국소 변수(local variable)들이라 부른다. 아원자 물리학에서는 국소 변수들을 공간 분리의 일반 법칙을 존중하는 신호 - 입자와 입자망 -를 통하여 공간적으로 분리된 사상들의 연결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어떤 신호도 광속이상으로 빨리 전달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국소 연결 이외의 다른 형태의 비국소연결이 최근에 밝혀졌다. 그 연결은 순간적이고, 현재로서는 정확한 수학적 방법으로 예측할 수 없다. 390


그래서 확률을 고전 물리확과 양자 물리학에서 같은 잉로 사용되고 있다. 두 경우에 다 같이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변수들이 있고, 이와 같이 알 수 없는 요인들이 정확한 예측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주앧한 차이가 있다. 고전 물리학에 있어 숨겨진 변숟즐은 국소 매커니즘인데 반하여 양자 물리학의 그것들은 비국소적이다. 전체 우주에 순간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일상적이고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비국소 연결들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따라서 독립된 물체를 거론하며 확실성이라는 각도에서 그 행태를 기술할 수 있는 법칙을 정식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대상으로 갈수록 비국소 연결의 영향이 커지고, 확실성은 활률에 자리를 넘겨 준다. 그리고 우주의 어느 부분을 전체와 분리하기란 점점 어려워진다. 391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물리학 연구는 2대 기본 이론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을 아원자 입자들의 완전한 이론으로 통일하려는 목표를 세워 두고 있다. 아직은 그와 같이 완전한 이론을 정식화하지 못했지만, 아원자 현상의 어떤 측면들을 아주 훌륭하게 묘사하는 부분적 이론과 모델 몇 가지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 바 있는 소립자 물리학의 '양자-상대성(quantum-relativistic)' 이론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일단의 양자장 이론들이며, 전자기와 약한 상호 작용에 적용된다. 그 둘째는 S행렬 이론으로 알려진 이론이며, 강한 상호 작용을 서술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중대 문제는 양자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중력의 양자 이론으로 통일하는 작업이다. '초중력(supergravity)' 이론이 최근에 개발되어 이 문제 해결에 일보 전진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이론이 발견되지 않았다. 395


원자 내에서 원자핵과 전자를 속박해 주는 힘은 광자사이의 호흡 현상에 의하여이루어지고 있고 원자핵 내에 있어서의 속박력은 중성자와 양성자, 중성자와 중성자, 양성자와 양성자 사이에서 고속으로 진도하는 파이 중간자의 호흡 현상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것은 원자의 세계상이 역시 전술한 고대철학의 세계상과 상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중국 역의 음양의 상호작용도 역시 호흡 현상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인간과 세계, 정신과 물질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453


강입자의 상호작용은 특히 강입자 출돌에서 형성되는 공명(resonance) 현상을 통하여 설명하는데, 그것은 매우 짧은 순간적인 현상으로서 입자의 성격을 띠지만 어떤 물적인 대상은 아니다. 공명이란 반응확률에 의해 담지되는데, 그거은 바응 채널에 있어서의 현상이나 그 현상중에 형성되는 모든 강입자들에 적용되므로 모든 강입자들은 반응의 그물에 있어서의 중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자연을 사물이나 실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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