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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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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9일 09시 29분 등록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 프리초프 카프라>

 

<저자에 대하여>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1939~ )는 신과학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다. 그는 빈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학의 교직에 있으면서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소립자 연구를 계속했다. 그가 중심에 선 신과학 운동은 1960년대의 뉴에이지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1970년대에 정립된 과학계의 한 흐름이다.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과 같은 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의 위협과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물질주의 그리고 환경오염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면서, 이러한 문제의 배경에 현대 과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이 불거져 나왔다. 현대 과학에 대한 반성과 의식의 전세계관을 모색하자는 것이 신과학 운동의 핵심이다.

카프라는 대학에 있으면서도 동양사상과 물리학을 비교하는 많은 강연과 논문을 발표했고, 그 스스로 선(禪)이나 요가 같은 동양적 명상 수련을 실천하면서,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가진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가 1975년에 펴낸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 1982년에 펴낸<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이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이 두 저서는 구미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신과학 운동과 신생활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운동이 가열되어 감에 따라 그는 세계 각처의 요청에 의해 순회 강연을 하는 데 주력했다.

카프라가 1988년에 펴낸 <탁월한 지혜>는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던 녹색 운동을 소개함과 동시에 특히 독일 의회의 당당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녹색당의 이념 정강 및 그 현황과 문제점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녹색 운동이 미국과 유럽 이러 나라에서도 정치 세력으로 결집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참고자료*

1. http://www.fritjofcapra.net

2. 프리초프 카프라의 <히든 커넥션> - 권희정, <고교독서평설>, 2005.3월호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제2판 역자 서문

p8 서구 문명을 과거 300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주로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일(一)에서 다(多)를 보는 것이지만, 동양의 철인(哲人)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했던 것이며, 시간의 축(軸)에서 생멸(生滅)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로(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제1판 역자 서문

p10 현대 물리학의 개요와 그 물질관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동양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일치해 가고 있는가를 평이하면서도 치밀하게 설명한다.

p10 현대 물리학이라 함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p11.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 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 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단순한 질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p11-12 불교 등의 동양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그 사변적(思辨的)인 방법으로 일(一)에서 다(多)를 보려 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 데 반해서 동양사상은 그 직관적 방법으로 다(多)에서 일(一)을 보려 하고 일체(一切)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즉 4차원적 시공(時空)의 차원에서 보려 한다.

p12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은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曲率)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p13 양자 물리학은 그 관찰의 대상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그 ‘존재’의 기술로써 양자 물리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관찰의 경험을 정리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그 설문의 방식을 통하여 관찰 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되므로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p14 저자는 이 책 속에서 힌두교, 불교, 도교, 역사상(易思想) 등 동양사상을 통틀어서 신비주의라 했다. 4세기의 사리치우스는 “신비란 일어난 일이 없지만 언제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란 마술을 행하거나 기적을 바란다는 뜻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일 것이다

p14 이 책에서 일관되는 저자의 자연에 대하 친화감(親和感)과 예술적 자태에 감명을 받을 것이다.

p15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나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p16 동서양의 양극적 기질의 대조는 예술이나 문화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생활의 실천면에서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일음일양(一陰一陽)의상보적 관계에서 파악하고 그 조화의 도를 따르는 것은 현대사회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 제2판 저자 머리말

p19 이 책을 집필하면서 때로는 내가 글을 쓴다기 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쓰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p20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내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지난 여러 해에 걸쳐 나는 널리 여행을 다니며 전문직과 비전문가의 많은 청중들에게 강연과 강좌를 열었고, 각계 각층의 남녀와 ‘신물리학’의 함축을 토의했다.

p20 나는 중국의 음양 사상이 그와 같은 불균형을 묘사하는 데 대단히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서양 문화는 꾸준히 양 또는 남성적 가치와 태도를 선호해 왔고, 그와는 상보적으로 대립하는 음을 가벼이 보았다. 서양인들은 융합보다는 자기 주장, 종합보다는 분석,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 종교 보다는 과학, 협동 보다는 경쟁, 보전 보다는 확장에 편중해 왔다. 이 같은 일방적인 발전은 이제 극히 위험한 단계, 즉 사회적, 생태계적,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p20 동시에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하여 물러난다”는 중국의 옛 격언을 예증하는 거대한 진화 운동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p21 이리하여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과 동양 신비주의의 세계관 사이의 심오한 조화를 깨닫는 것이 곧 보다 큰 문화적 전환의 뗄 수 없는 일부이며, 거기서 우리들의 사상, 지각과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게 될 새로운 실재관이 출현하게 된다.

p21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이론이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은 이제 설 자리가 없음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가치 중립적 과학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패턴은 그들의 정신 패턴, 즉 그들의 개념, 사상과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이룩하는 과학적 성과와 그들이 연구하는 기술 응용법은 그들의 정신 형태에 따라 조건지워진다. 그들의 상세한 연구 대부분이 명료하게 그들의 가치 체계에 좌우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연구를 추진시키는 보다 큰 틀은 결코 가치중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지성과 도덕 양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p22 이 시대에 부처의 길, ‘가슴이 있는 길(path with a heart)’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p23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저환<에서는 자유 의지, 죽음과 탄생, 그리고 생명, 정신, 의식과 진화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들을 논의했다. 시스템 언어로 표현된 이러한 개념들과 그에 상응하는 동양 신비주의 개념들 사이의 심오한 조화는 ‘영구철학(永久哲學)’이라고도 알려진 신비주의 전통의 철학이 현대 과학 이론들의 가장 일관된 철학적 배경이 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한 인상적인 증거가 된다.

* 제1판 저자 머리말

p24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p24 그 해변에 앉았을 때 나의 이전 경험들이 싱싱한 생기를 띠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神)인 ‘시바의 춤(Dance of Shiva)’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25 나는 양자 이론의 불가사의를 연상시키는 선의 불가사의함에 특히 이끌렸다.

p26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는 이러한 뛰어듦이 고도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 주는 일이다.

* 제1부 : 물리학의 길

* 1.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p33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을 소용없는 것이다. /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 후앙의 가르침>

p36 내가 ‘동양적 신비주의’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힌두교와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철학을 뜻한다.

p37 최근에 와서 서구 과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고 다시 초기 그리스나 동양 철학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실험과 엄밀하고도 일관성 있는 수학적 형식주의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p38 이 대립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p42 동양적인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는 것이다.

p42-43 운동과 변화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처럼 객체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본원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신성(神性)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p44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도(道)-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途程)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 2. 아는 것과 보는 것

p48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라는 말에서처럼, 특히 우리를 가르쳐 온 현대 물리학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하다.

p48 불교의 선사(禪師)들은 달을 가리키기 위하여 손가락이 필요한 것이지, 일단 달을 알아본 다음에는 그 손가락 때문에 마음을 써서야 되겠느냐고 말한다.

p48 도가의 현자 장주(莊周)는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p49 서양에서는 어의론자(語義論者)인 알프레드 코지프스키가 ‘도(地圖)는 영토(領土)가 아니다.’ 는 힘찬 슬로건으로서 똑같은 견해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p49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궁극적인 실재는 추론, 즉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개념의 근원이 되는 감각이나 지성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p50 절대지란 이렇게 전적으로 실재의 비지성적인 체험인데, 이것은 ‘명상적’ 또는 신비적 상태라고 불릴 수 있는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험이다.

p50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 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통상적인 깨어 있는 의식은 실상 의식의 한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얇은 스크린에 의해서 분리된, 그 건너 저편엔 전혀 다른 의식의 잠재 형태가 가로누워 있는 것이다.’

p52 만약 과학자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부여해서 그를 창조적이게 하는 직관에 의하여 탐구의 추론적 면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가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등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욕탕 속에서 심신을 녹이고 있을 때나 숲 속이나 해변을 거닐 때처럼 허심(虛心)할 때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p55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p55 동양 신비주의의 다른 유파들에 있어서도 좀 덜 극단적이긴 하지만 직접적 신비 경험은 여전히 그들 모두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p55 모든 지식은 이러한 체험의 기반 위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에 동양적 전통은 그 지지자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강한 경험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p56 동양적 신비론들이 경험에 그 지식의 기반을 확고히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 지식이 실험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과 유사함을 암시하고 있다.

p59 대체로 심오한 신비적 경험은 오랜 준비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지만 직접적인 직관적 통찰은 우리 모두의 일상 생활에서 경험되는 바다.

p59 선불교의 학도들은 그네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되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이 본래 면목을 돌연히 ‘기억해 내는 일’이 곧 개오(開悟)인 것이다.

p60 직관적인 통찰이 익살의 밑바탕을 순간적으로 꿰뚫을 때에만 우리는 그 익살이 의도했던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통찰과 농담의 이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개오한 인사들에게는 틀림없이 잘 알려져 있을 터이다.

p60 특히 선은 재미있는 이야기와 기담으로 가득 차 있는데, 《도덕경(道德經)》에는 “그것이 웃음거리가 아니라면 도가 되기에는 아직 불충분한 것이다.”는 구절이 있다.

p61 동양의 예술 양식들 역시 명상의 양식이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이념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직관적 형태를 발전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자기 실현의 방도인 것이다.

p61 동양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모든 기예는 의식의 명상적 형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쓰이고 있다.

p61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 과정에서 오는 직접적인 직관적 통찰에 익숙해 있다. 그것은 모든 새로운 발견은 홀연한 비언어적인 섬광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정보와 개념과 사고 유형들로 충만해 있을 때 일어나는 극히 짧은 순간이다. 반면에 명상에 침잠하면 마음은 모든 이념과 개념을 텅 비우고 오랫동안 그 직관적 형태를 통해서만 작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p62 노자(老子)는 학구(學究)와 명상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한다.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들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

p62 헤아리는 마음이 숨을 죽이면 직관적 형태가 비상한 깨달음을 가져 온다. 환경은 개념적 사고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경험된다.

p62 주위 환경과 합일하는 체험은 이러한 명상 상태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모든 분별이 정지되고 분별이 없는 통일체로 사라져 가는 의식 상태인 것이다.

p62 깊은 명상 속에서 마음은 완전히 깨어 있다.

p63 명상적인 상태와 무사의 정신 자세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무사도의 이미지는 동양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p63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을 기반을 두고 있다. 양쪽 다 그 관찰은 해석되고 이 해석은 자주 언어에 의해 소통된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현대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피차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p66 신화적 언어는 논리와 상식에 의해 훨씬 덜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마력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암시적인 이미지가 풍부하고 엄밀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적인 언어보다는 신비가들이 실재를 체험하는 방식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 따르면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p66 깊이 있는 혜안을 지닌 힌두교도들은 이런 모든 신들이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과 신화적 이미지는 실재의 여러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p66 신화적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철학의 교리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수레라는 것도 알고 있다.

p68 물질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양자장이론(量子場理論)의 어떤 국면에 의해 물리학자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시바 신(神)의 우주적 무도(舞蹈)에 의해 전달된다. 춤추는 신과 물리학적 이론은 양쪽 다 마음의 소산이며, 그 지어 낸 이 실재에 대한 직관을 기술하는 모형인 것이다.

* 3. 언어를 초월하여

p70 동양의 신비 사상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실재가 일상 언어를 초월한다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 있었으며, 그래서 동방의 현자들은 논리와 통상 개념을 뛰어넘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실재에 대한 모형이 서양 철학의 모형보다도 현대 물리학에 보다 적절한 철학적 배경을 이루게 된 주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p72 원자론의 초보 단계에서 물리학자들을 괴롭히는 문제는 어떻게 전자장 방사가 입자(아주 적은 지역에 국한된 실체)와 넓은 공간의 영역에 퍼져 있는 파동으로 동시에 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언어나 상상력의 어느 쪽도 이 부류의 실체는 그렇게 잘 다룰 수가 없는 것이다.

p75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 점을 신비가들은 언제나 인지해 왔지만 과학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문제가 되었다.

p77 감각의 세계에서 그 이미지를 취하는 우리의 통상적 언어는 이렇게 관찰된 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합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는 일상 언어의 이미지와 개념을 더욱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4. 새로운 물리학

p79 동양의 신비가에 의하면 실재에 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은 그 사람의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p87 양성과 음성 전하 사이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단순하게 두 전하가 뉴턴 역학에서의 두 질량처럼 서로 끌어당긴다고 말하는 대신에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각 전하는 다른 전하가 나타나면 어떤 힘을 느끼도록 그 주위의 공간에 ‘산란(散亂)’ 혹은 어떤 ‘조건’을 만들어 낸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어떤 힘을 일으키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에서의 이와 같은 조건을 장(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일 전하에 의하여 생겨나며 다른 전하가 들어와서 그 효과를 느끼게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것은 존재한다.

p90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기본적인 고체 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 어느 것도 물리학이 현재 뚫고 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영역에로 확장될 수 없었다.

p90 아인슈타인은 자연 본래의 조화를 굳게 믿었고, 그의 과학적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가장 깊은 관심은 물리학의 통일된 바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p90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時空)’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全一的)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p91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데 매우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의 수정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는 데 이용하는 전체계(全體系)의 수정을 초래한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 = mc2 에 의해 주어진다. 이 때, c는 빛의 속도다.

p97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p98 원자 물리학에서는 울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p104 핵력은 핵으로 하여금 극도로 역동적이면서 지극히 안정된 평형을 유지케 한다.

p105 거대한 우주와 우리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해 주는 태양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출이 무한히 작은 세계의 현상인 해반응의 결과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현대 물리학이 거둔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다.

p109 아원자적 소립자들을 더 이상 분할하는 유일한 방법은 높은 에너지를 포함한 충돌 과정에서 그것들을 함께 부딪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물질을 거듭해서 분해할 수는 있지만 더 작은 조각들을 얻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그 과정에 수반된 에너지로부터 입자들을 생성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원자적 입자들은 파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p110 지난 수십 년 동안에 행해진 고에너지의 산란 실험들은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입자 세계의 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물질은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것으로서 나타났다. 모든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로 바꾸어질 수 있다. 그것들은 에너지에서 생겨나 에너지로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p112 입자의 속성들은 그 활동 – 주위 환경과의 상호 작용 –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입자는 독립된 실체일 수가 없고 전체의 통합된 부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p112 이제 힘과 물질은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역동적인 모형드에 그 공동의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p113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이러한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 유사성은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에서 분명해지며 이 두 이론이 통합된 아원자적 물리학의 ‘양자-상대론적’모델에서는 한층 더 강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가장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 제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

* 5. 힌두교

p117 동양철학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고, 이런 체험은 본래 종교적인 까닭에 그것은 종교로부터 다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p122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

p122 '카르마‘의 의미는 마야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우주적인 단계에서 인간적 수준에까지 점차 떨어져 심리학적 뜻을 띠게 된다.

p122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p122 <기타>경전은 이 점에 관해서 매우 잘 밝혀 주고 있다. ‘모든 움직임은 자연의 힘이 교직하는 대로 다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망에 사로잡혀 그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의 힘과 행위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자연의 어떤 힘이 다른 자연의 힘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되며, 그리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p123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다.

p124 우주적 무도자로서의 시바는 춤을 추어 우주의 끝없는 율동을 유지하는 창조와 파괴의 신이다. 비슈누 또한 여러 가지 변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 신이다. 대체로 비슈누의 역할은 이 우주를 보존하는 데 있다. 이 삼위 중 세 번째 신이 샤크티(shakti), 즉 성모로서 자신의 여러 많은 형태를 가지고 이 우주의 여성적인 에너지를 나타내는 원형적인 여신이다.

p124 힌두교에서는 대부분의 서양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가 인간 존재의 불가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고 신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육욕을 의식적인 의지로써 제어하려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전존재로써 스스로 깨닫는 데 목표를 두었다.

p125 힌두교도들이 이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들은 모두 다 같은 거룩한 실재의 갖가지 현시며, 무한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브라만의 다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6. 불교

p127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儀式的)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p127-128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인간적 좌절의 기원과 그 극복 방법을 교시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 마야, 카르마, 니르바나 등과 같은 인도의 전통적 개념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에 새롭고 생동하는, 맞바로 들어맞는 심리학적 해석을 가하였다.

p128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 (小乘佛敎)와 마하야나 (大乘佛敎)라는 두 주류로 발전돼 나갔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p128-129 대승 불교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상 속에 결코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동양적 신비 사상 안에서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지성은 직접적 신비체험- 불가에서는 ‘각’이라고 부른다-에의 길을 밝혀 주는 한 가지 수단으로 비쳤을 뿐이다. 이 체험의 본질은 지적인 분별과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아친탸, 즉 무사의(無思議)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실재가 분할되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 ‘진여’로서 나타난다.

p131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를 얻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가 이 세계에 관해 말하는 것도 모든 ‘사물(事物)’의 무상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p133 실재의 본질적인 성질이 공이라는 나가르주나의 진술은 흔히 그렇게 오해 되는 허무주의적 진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낳은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실재 즉 공 자체는 단순한 무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형태의 본질이다.

p133 초월적인 지혜 혹은 직관적 지성인 프라주나(Praina)와, 사랑 혹은 자비인 카르나(Karuna)다.

p133-134 지혜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 불교의 특징적인 발전 중의 하나인 보디사트바 (菩提 陀):깨달은 중생)의 이상에 가장 강하게 표현되어 왔다. 보살은 성불(成佛)의 도정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이끌어 내 주는 것이며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개오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열반에 들기 전에 다른 일체 중생이 성불하기를 서원(誓願)한 사람이다.

p135 아바탐사카의 중심 주제는 모든 사물과 물건의 통일과 상호 작용으로서 이 개념은 동양적 세계관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는 세계관의 기본 요소의 하나를 이루기도 한다.

* 7. 중국 사상

p138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 ‘도’를 찾아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p141 그들은 이 실재를 ‘도(道)’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원래 ‘길’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주의 길이요, 도정이요, 자연의 질서였다.

p142 중국인들은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 특징임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전(變轉)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유형이 있어 인간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자들은 이 유형(pattern)을 지각하여 여기에 맞게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도와의 합일’을 이루게 되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을 누리며,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뜻대로 달성되는 것이다.

p142 기원전 2세기의 철학자 회남자(淮南子)의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도의 길(道理)에 순응하고 천지의 자연 순리를 따르는 자는 전 세계를 쉬이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

p142-143 중국인들은 어떤 상황이 그 극한에서 발전하면 반드시 되돌아 그 반대로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본적 신념의 덕분으로 고난의 시기에도 그들은 용기와 인내를 지닐 수 있었고, 성공했을 때에도 조심성 있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나아가 도가와 유가에서 다 같이 믿는 중요의 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자는 과도와 낭비와 탐닉을 피한다”라고 노자는 말한다.

p143 중국인의 견해로는 과다히 가지는 것보다 과소히 가지는 것이 더 낫고 너무 지나치게 해버리는 것보다 덜 된 채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비록 멀리 가지는 못할지라도 올바른 방양으로 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p143 도의 운동에 있어서 순환 양식이란 아이디어는 두 정반대 극인 ‘음양’의 도입에 의해 명확한 구조가 주어지게 된다. 그것은 변화의 주기를 한정시켜 주는 두 극이다.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중국적 관점에서는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極力)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일어난다.

p144 그러나 이 대칭이 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단한 순환 운동을 강하게 암시하는 회전적인 대칭이다.

p145 이 도표 가운데에 있는 두 점은 두 힘의 어느 하나가 그 극에 도달할 때 마다 이미 그 자체 안에 대립자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상징화한 것이다.

p145 음양론은 중국 문화에 두루 퍼져서 전통적인 중국 생활 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주요한 중심 사상이다. “삶은 음과 양이 고루 섞인 조화다”라고 장주는 말하고 있다.

p146 양경락은 음기관에 속하고 음기관은 양경락에 속하는 식으로 상호 연관된 경락을 각 기관은 가지고 있다. 이 음과 양 사이의 흐름이 막히면 신체는 병들게 되고 따라서 그 질병은 경혈에 침을 놓아 기의 흐름을 자극하여 회복시켜 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p146 그들은 음양의 갖가지 배합을 계속 연결하여 우주적 원형의 체계로 발전시켰다. 이 체계는 <역경>, 즉 <변역의 서 Book of Changes> 속에 정교하게 완성되어 있다. 이 <번역의 서>는 유가의 육경 가운데서도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며,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핵심에 놓인 저작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이 책이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누렸던 권위와 평가는 다른 문화권에서의 <베다경>이나 <성경>에나 비견될 수 있을 정도다.

p146-147 '이 <번역의 서>, 즉 중국의 <역경>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세상의 모든 문헌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이 책의 기원은 고대의 신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내에서는 오늘날까지 가장 탁월한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왔따. 3천년을 헤아리는 중국 문화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의미심장한 책이라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 책에서부터 그 영감을 취했거나, 아니면 거꾸로 이 책의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수천 년의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지혜가 <역경>을 만드는 데에 다 녹아 들어갔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p148 <역경>에 의탁하는 목적은 단순히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 상황의 소인(素因)을 찾아 적절한 행동을 취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역경>을 보통 점술서의 차원을 넘어 지혜의 서(書)로 끌어올린 것이다.

p146-149 모든 사물과 상황의 쉼 없는 변용은 이 <변역의 서>의 핵심을 이루는 메시지다. '천변만화가 한 권의 책일지니 그것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네./그 도는 영원히 변하나니 –

/쉼 없는 변화, 움직임, 공허한 여섯 장소 속을 흐르나니, /고착된 법도 없이 생하고 멸하며, 강약이 서로 바뀌며, /하나의 법률 아래 얽매일 수 없으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것은 오직 변역일 뿐이어라.'

* 8. 도교

p155 도교는 신비적인 데로 나아가 우리가 현대 물리학과 비교하는 데 보다 적절한 바가 있다. 힌두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도교는 추론적인 지식보다 직관적인 지혜에 보다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p156 도가에서는 논리적 추론을 사회적 예절 및 도덕적 규범과 아울러 작위적인 인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이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관조에 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p157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p157 도가들은 자연 속의 모든 변화를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빚어 낸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떤 대립하는 쌍도 그 극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역동적으로 연관돼 있는 극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믿게 되었다.

p159 이것은 높은 관점에, 즉 모든 대립자들의 상대성과 극관계가 명료하게 지각되는 어떤 조망에 도달한 현자의 생활 방식이다. 이런 유의 대립자 가운데에는 음양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 연관된 선악의 개념이 맨 먼저 포함된다. 선악의 상대성과 나아가 모든 도덕적 규범의 상대성을 깨달은 도가의 현자들은 선을 위해 분투 노력하지 않고 선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p161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p161 도교 현자들의 행위는 그의 직관적 지혜 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 그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나 자기 주변의 어떤 것도 강제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도의 운동에 자기의 행위를 순응시켜 나갈 따름이다. 회남자에 의하면 이렇다 '자연 질서를 따르는 자는 도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이러한 행동 방식을 도교 철학에서는 ‘무위’라고 부른다.

p162 만일 사람이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고, 혹은 니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의 본성에 거스르지 않으면’ 그는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의 행동은 성공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처럼 당혹스럽게 보이는 노자의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라는 말이 뜻한 것이다.

p162 노자는 말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도가들은 인간성의 여성적인, 순응하는 성질을 펼쳐 보이는 것이야말로 도와 조화된 완전히 균형 잡힌 삶으로 이끌어 주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믿었다.

* 9. 선(禪)

p166 선의 체험은 따라서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교리나 철학, 형식적 강령이나 독단적 교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고착된 신조로부터의 해방이 진실로 정신적이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p166 동양 신비 사상의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선은 언어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p167 선 체험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해질 수 있으며, 또 실제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선에 적합한 특수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네 글귀를 통해 선은 요약 기술되고 있다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언어나 문제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p167 이 ‘곧바로 가리킨다(直指)’는 기법은 선에 독특한 풍미를 주고 있다. 이것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동양적 마음의 전형이다.

p169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나는 장작을 져 나르고, 물을 긷는다.'

p169-170 우리가 가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정신적 위업을 이루는 것이다. 유명한 선가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개오를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p170 우리의 본성의 완전함에 대한 믿음이요, 개오의 과정이란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면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깨달음일 따름이다.

p171 깨달음은 나날의 범사에 나타나 보인다는 선문의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회화와 서도, 원예 등의 다양한 기예뿐만 아니라 다도, 꽃꽂이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 궁도와 검도, 유도와 같은 무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제각기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도, 즉 개오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선체험(禪體驗)의 다양한 특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마음을 수련 시켜 궁극적인 실재와 접할 수 있게끔 해준다.

* 제3 부: 대비

* 10. 만물의 통일성

p177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 그것은 원자의 단계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영역에까지 물질을 더 깊이 투시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통일성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철학에 관한 우리의 대비를 일관하는 하나의 반복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아원자 물리학의 다양한 모델들을 연구해 감에 따라 그것들이 물질의 구성 요소들과 그에 관련된 근본적 현상들이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그리고 그것들이 고립된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단지 전체의 완전한 부분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동일한 견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p179 아원자적 입자들은 일정한 시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원자적 사건들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확실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p187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이 우주적 상호 연결성에는 언제나 관찰자와 그 의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점은 원자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원자의 단계에서, ‘대상들’은 준비와 측정의 과정 사이에 있는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연쇄 과정의 종국점은 언제나 관찰자의 의식에 놓여 있다.

p187 원자 물리학의 결정적인 특성은 어떤 대상의 속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관찰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속성들을 정의하는 데에도 관찰자란 존재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자 물리학에서 우리는 대상 그 자체의 속성에 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 작용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 관찰자는 그가 어떻게 자기의 측적을 진행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이 조정에 따라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결정지어진다. 실험상의 배열이 변경되면 이번에는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이 변할 것이다.

p188 원자 물리학에서 과학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단지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에 그가 영향을 미치는 정도만큼 자신이 관찰하는 바로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존 휠러는 관찰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을 양자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기고, ‘관찰자’라는 말을 ‘참여자’로 대치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p190 양자론은 근본적으로 분리된 대상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관찰자의 개념을 참여자로써 대치시키기 시작했으며, 이 세계를 기술하는데 인간의 의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깨닫고 있다. 그것은, 그 대부분들이 이 전체와의 연결을 통해서만 정의되는 물리적, 정신적 관계들의 상호 연결된 망으로서 우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p193 대립자란 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개념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바로 그 우리의 행위 때문에 그 개념의 대립자가 생겨난다.

p193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p194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p195 모든 대립적인 것이 양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즉 광명과 암흑, 득과 실, 선과 악 등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동양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다. 따라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p195 이러한 역동적 균형의 개념은 결코 정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언제나 두 극단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이 점은 중국의 현인들이 원형적 양극을 상징하는 음과 양으로써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음과 양의 배후에 놓여 있는 통일체를 ‘도’라고 부르고, 그것을 음양의 상호 작용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보았다. “지금 어두음이 되게 하고, 또 곧 빛을 나타내 주는 것이 ‘도’다.”

p197 동양의 신비주의에서는 이 여성적 양태가 계발되었으며, 또한 인간성의 두 국면간에 하나의 통일성이 추구되었다. 노자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깨달은 인간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사람”이다. 동양의 여러 가지 전통에 있어서는 의식의 남성적인 양태와 여성적인 양태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이 명상의 주요한 목표고, 그것은 예술 작품들 속에서 흔히 예증되어 있다.

p198-199 상대성 이론은 이러한 세계를 기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상대성’의 체계에서는 4차원적인 시공 같은 고차원에 들어감으로써, 고전적인 여러 개념들이 초월된다. 공간과 시간 그 자체는 전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개념으로 보였지만 상대성 물리학에서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p199 상대적 공간-시간의 실재는 본래 역동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물질적 대상들 역시 진행 과정이요, 모든 형상들은 역동적인 모형들로 존재한다.

p200 동양의 신비가들은 고차원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명상의 경지에서 그들은 일상적 삶의 3차원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 때 모든 다원적인 것이 하나의 유기적 전체 속으로 통합되는 전혀 다른 실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p201 물리학자들이 물질은 상호 배척적인 것으로 보이는, 즉 입자들은 또한 파동이고 파동은 또한 입자들이라는 방식으로 그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p205 대립 개념 너머에 있는 실재에 직면해서 물리학자와 신비가들은 특별한 사유 방법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마음이 고전 논리의 완고한 틀에 고착되어서는 안 되며, 항상 그 생각하는 관점이 살아 움직이고 끊임없이 전환되도록 해야 한다.

p210 불확정성 원리가 지닌 근본적인 중요성은 그것이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전적 개념의 한계성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인 ‘대상’에 하p211 개념을 부여하려 하면 할수록, 그 다른 개념은 점점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리고 그 두 개념 사이의 정확한 관계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주어질 뿐이다.

p211 상보성의 개념은 물리학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고방식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보어는 그것이 물리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역시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종종 암시해 왔다. 사실상 상보성의 개념은 이미 2,500년 전에 지극히 유용한 것으로 입증된 바 있다. 상보성의 개념은, 그 대립 개념과 상호간에 극성의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통찰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고대 중국 사상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다했다. 중국의 현자들은 음과 양이란 원형적인 양극으로써 이 대립자의 상보성을 표상 했으며, 또 모든 자연 현상과 모든 인간 생활의 본질이란 그것들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p213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

p213 고대 동양의 지혜와 현대 서양의 과학 사이의 두터운 조화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12. 공간 – 시간

p215 현대 물리학은 동양의 신비주의의 기본이 되는 사상의 하나를 가장 극적으로 확증시켰다. 그것은 곧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지도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지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다.

p217 그리스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은 항상 공간과 시간이 마음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주장해 왔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다른 모든 지성적 개념들처럼 공간과 시간을 상대적, 제한적, 환상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p219 공간이란 오직 우리의 개체화 의식에 연관되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p222 동시성이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좌우되는 상대적 개념임이 밝혀진 이상, 전체 우주를 두고 그러한 일정한 순간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p222 '주어진 한순간의 우주‘를 절대적인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관측자에게서 독립된 절대 공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p222 현대 물리학자의 이와 같은 진술은. 현대 물리학에서의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앞서 인용한 “공간과 시간은 명목, 생각의 형식, 일상적 관용어에 불과하다”는 동양 신비가의 개념과 극히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p230 시,공간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상호 관통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가 갖는 세계관은 둘 다 시간과 변화를 그 본질적 요소로서 함유하는 본래적으로 역동적인 관점이다.

p231 ‘일반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확대되어 중력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의 영향으로 시-공은 만곡(彎曲) 된다는 것이다.

p237 일반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는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공간과 시간의 고전적인 개념들은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

p238 순간의 일직선적인 연속 대신에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바 무한하고 영원하고도 역동적인 현재를 체험한다.

p247 많은 동양의 현인들은, 생각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지만 통찰력은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빈다는 “통찰력은 고차원의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 13. 역동적인 우주

p254 아원자 입자들의 속성은 역동적인 맥락 안에서만, 즉 운동, 상호 작용, 변형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p255 운동함으로써 제한에 반작용하는 입자의 성향은 아원자 세계의 특징인 물질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p256 현대 물리학은 물질을 부동적이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율동의 패턴이 분자, 원자, 핵의 구조에 따라서 결정되는 연속적인 율동과 진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또한 동양의 신비가가 물질 세계를 보는 방식과 같다. 그들은 우주가 움직이고 진동하고 춤추는 것이므로 동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 즉 자연은 정적인 균형이 아니라 동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p263 상대성 이론 체계의 특징적인 면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전에는 전혀 관계 없이 보이던 기본적인 개념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p265 이제 상대성 이론은,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너지는 고전 물리학에서 알려진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분만 아니라 또한 어떤 물체의 질량 속에 잠겨 있을 수도 있다.

p267 우리가 관찰하게 되는 것은 상대 안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모형들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무도(舞蹈)인 것이다.

p269 우주의 기본적 요소란 역동적인 모형들, 즉 그것은 장주(莊周)가 말하듯이 ‘변형과 변화의 끝없는 흐름’속에 있는 일시적인 단계들이다.

* 14. 공(空)과 형상

p273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는 물질은 그 중력장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중력장은 만곡된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물질과 공간은 단일한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상오 의존적인 면으로 이해된다.

p275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이라는 것을 장이 극도로 강하게 집중된 공간의 영역들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와 같이 새로운 물리학에서는 장과 물질 모두를 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장이 곧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p276 동양적인 견지에 있어서는 모든 현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는 어떠한 형태도 초월하고 있으며 어떠한 묘사와 상술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종종 무형, 공 또는 허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공은 단순한 무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형태들의 본질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p277 도를 움푹한 계곡이나 혹은 영원히 비어 있는 그릇으로 비유하며 무한한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

p278 신비적인 허의 현상적인 현현(顯現)은 아원자적 소립자들처럼 정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칠 줄 모르는 운동과 에너지의 율동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동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이다. 물리학자의 아원자적 세계와 같이 동양 신비가들의 현상적인 세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과 죽음 곧 윤회의 세계다.

p280 양자장에서와 같이 장(場) – 또는 기(氣) –은 모든 물체의 기초가 되는 본질일 뿐만 아니라 파동의 형태로써 서로 상호 작용을 수행한다.

p289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있다.

p290 바로 여기에 현대 물리학이 동양 신비주의의 허에 가장 가장 가까운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동양의 허와 같이 ‘물리적 진공’-장 이론에서 이렇게 불림-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 세계의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 15. 우주적 무도

p291 입자 상호 작용은 물질 세계를 형성하는 안정적인 구조를 낳게 하지만 그 물질계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동적인 운동을 하며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 우주는 끊임없이 운동과 활동을, 즉 에너지의 지속적인 우주적 무도(舞蹈)를 하고 있다.

p310 우주적 무도라는 이런 은유는 그것의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힌두교의 무도 신 시바의 이미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여러 화신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인도 신 중의 하나인 시바는 무도자들의 왕으로 나타난다. 힌두교의 신앙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생성과 소멸, 죽음과 재생의 거대한 율동적인 과정의 한 부분이며, 시바의 춤은 끊임없이 윤회(輪廻)를 계속하는 이 영원한 생사의 율동을 상징화한 것이다.

p313 현대 물리학은 창조와 붕괴의 율동이 계절의 순환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기 물질의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밝혀 왔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물질의 구성 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케 하는 기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입자들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자체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너지 무도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 무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 16. 쿼크 대칭들 – 하나의 새로운 공안?

p315 아원자의 세계는 리듬과 운동과 연속적인 변화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임의적으로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뚜렷하고 명확한 모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p327 대칭에 대한 동양 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소산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동양의 예술 형식들은 비대칭을 현저하게 편애하였으며 완전히 규칙적이거나 기하학적 형상은 종종 기피되고 있다. 선(禪)의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일본의 회화는 소위 ‘여백(餘白)’양식이라 불리는 방법으로 자주 그려졌다. 또한 일본 정원에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부석(敷石)은 극동 문화의 이런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 17. 변역(變易)의 모형

p332 S행렬 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새로운 개념은 강조점을 대상물로부터 사건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그 기본 관심이 입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반응에 있다는 것이다.

p333 개개의 반응은 그것을 다른 반응에 연결하는 입자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리하여 작용의 모든 망(網)을 형성하게 된다.

p339 그 음파가 공명 주파수라 불리는 특정한 진동수에 이르게 되면 ‘공명(共鳴)’, 즉 매우 강하게 진동할 것이다.

p347 그것은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구조들과 현상들이 측정하고 분류하는 우리 마음의 소산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p347-348 동양의 신비가들은 우리가 감지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특별한 의식상태에서 일어나고 이 의식 상태가 지나가면 다시 사라지는 마음의 소산물임을 거듭거듭 우리들에게 말해 준다.

p349 S행렬 이론은 단지 그 궁극적 결론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물질에 관한 일반적 견해에 있어서도 동양적 사고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S행렬 이론은 아원자적 입자의 세계를 사건들의 동적인 그물 조직으로서 기술하며, 근본적 구조나 실체로서 보다는 변화와 전환을 강조한다. 동양에 있어서의 그러한 강조는 일체의 것들을 역동적이고 일시적이며, 미망(迷妄)으로서 여기는 불교 사상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p350 현대 물리학자와 동양의 신비가는 양편 다, 변화와 전환의 이 세계에 있어서스이 일체의 현상이 역동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353 변화와 변역에 의하여 생성되는 그 역동적인 모형들의 개념으로 인하여 《역경》은 어쩌면 동양사상에서는 S행렬 이론에 가장 가까운 비유가 된다. 두 체계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상물보다 작용면에 있다. S행렬 이론에서 이러한 작용들은 강입자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현상들을 일으키는 입자 반응이다. 《역경》에서는 기본이 되는 작용들이 ‘역(易, the changes)’이라고 불리며, 모든 자연 현상의 이해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여겨진다.

* 18. 상호 관통

p360 현대 물리학에서는 현재 매우 다른 태도가 전개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기술하는 ‘법칙들’을 포함하여 자연 현상에 관한 그들의 이론 모두가 인간 마음의 소산, 즉 실재 그 자체라기보다 실재에 관한 우리의 개념도(槪念圖, conceptual map)의 속성들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적인 도식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과학적 이론과 ‘자연 법칙’이 그러하듯이 필연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근사적(近似的)이다. 모든 자연 현상은 궁극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p365 동양의 현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설명하는 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물의 통일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비지성적인 경험을 체득하는 데에 더욱 흥미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생의 의미, 세계의 기원, 열반(nirvana)의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고귀한 침묵’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부처의 태도다.

p365 모든 것이 다른 것의 결과라는 것, 또 자연을 ‘설명’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의 통일성을 보여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뜻한다는 것, 궁극적으로는 설명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p366 우리가 사물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업(業)에 의해 속박된다. 우리의 개념의 그물이란 덫에 걸리게 된다. 말과 설명을 넘어서는 것이 곧 업의 속박을 깨뜨리고 해방을 얻는 길이다.

p366 동양 신비주의의 주요 학파들은 우주란 하나의 상호 연관된 전체고, 그 안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결코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은 다른 모든 부분의 속성으로부터 결정된다는 부트스트랩 철학의 견해와 일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모든 부분들은 다른 모든 부분들을 ‘포함’하며 상호 구현에 대한 투시가 진실로 자연에 관한 신비적 체험의 특성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p378 인간의 의식을 이해하고 우주의 모든 것과 이 의식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 모든 신비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p380 참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참 알고 있지 않다.[知者不言, 言者不知=역주]

* 맺음말

p383 우리는 건강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몸속 각 기관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전한 전체로서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이 안녕과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

p384 신비가와 물리학자는 하나는 내적인 영역으로부터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외적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견해들 사이의 조화는, 외부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이 내부의 실재인 아트만과 일치한다는-범아일여(梵我一如))-고대 인도의 지혜를 확인해준다.

p387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동양적 신비주의의 어느 정도의 음(陰)적 태도를 채택할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자연의 전체성을 경험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역량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제2판 후기 : 다시 찾은 신물리학

* 제3판 후기 : 신물리학의 미래

p405 나는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의 유사점은 언젠가 상식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유사점들을 철저하게 탐구하고 그것들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느꼈다.

p415 우리는 실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지식의 과정이 주요한 부분이 된다는 생각은 신비주의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잘 알려져 있다. 신비적 지식은 분리되어 지고 객관적인 관찰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참여를 의미한다. 사실 신비주의자들은 하이젠베르크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 양자 물리학에 있어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더 이상 분리될 수 없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구분될 수는 있다. 깊은 명상에 잠긴 신비주의자들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구분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내가 저자라면>

1974년에 지었다는 저자의 책이 지금 전혀 과거의 지식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현대의 물리학인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의 핵심원리를 동양철학에서 찾은 일은 당시로 신선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최대한 2개의 관점을 객관적이며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일단 1부에서 현대물리학에 대한 설명을 하여 이론을 간단히 정리하고, 2부에서 힌두교, 불교, 중국사상, 도교, 선 등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설명을 통해 동양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3부에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철학을 대비하여 2개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이론으로 정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서양과 동양의 사상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엔 하나의 진리로 통합되어지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대상 자체이면서 관찰자이기도 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 자체의 경험이면서 거울에 비춰지는 마치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를 관람하는 듯한 관찰자의 입장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적용시켜보면 우리가 어떤 감정을 경험하게 되어도 그것이 내게 불필요한 감정이라면 거기에 동요되지 말고 빨리 스스로가 관찰자임을 인식하여 그 상태에서 빠져나와 현재의 삶을 좀더 편하고 즐겁게 사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공감과 시간의 개념을 통합하여 모든 것이 역동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 있으며 궁극의 진리가 아님을 말한다. 공간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관찰의 입장이라면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설정해 놓은 것일 뿐이고 언제든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공간과 시간을 설정하여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에너지라면 그것이 물질화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우주는 음과 양의 원리로 분리되어 있는 것 같으나 음속에는 양의 구조가 있고 양속에는 음의 구조가 동시에 들어있다. 음과 양은 결국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로 태극으로 하나되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의 논리를 확실하게 벗어나야 한다. 과학적으로 상대성의 이론에 의해 공간과 시간이 절대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 또한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를 대표한다. 부분은 전체의 합이다. 부분의 조화를 통해 전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지구가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하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론들이 신선하기만하다. 하지만 벌써 서양의 일부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지식을 쌓는 동시에 동양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배워나가고 접목하여 발전된 교육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과학과 철학을 분리하는 교육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교육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과학과 철학을 통합시키는 교육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사들이 지니고 있는 사유체계를 점검해야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철학이 결국 하나임을 알게 되듯이 우리 교육에서 또한 통합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 현대물리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참고자료 *

1. 양자론 이중슬릿실험 동영상(Dr Quantum - Double Slit Experiment ) - 듣기로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교육용 자료로 사용하는 것이랍니다. 유투브 등의 동영상 검색 사이트에 입력하시면 볼 수 있어요.

2. 카오스(CHAOS) - 제임스 글리그 지음 - 동문사

3. 복잡계 개론 - 윤영수 저 - 삼성경제연구소

: 일반인이 양자물리학을 처음 공부할 때 참고하면 좋은 자료들이랍니다. 그나마 쉽게 설명이 되어 있다는 추천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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