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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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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9일 09시 49분 등록

북리뷰36-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20101129



 (프리초프 카프라 지음  김용정, 이성범 역, 범양사 출판부,  증보3판)


저자에 대하여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1939-) 박사는 신과학운동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물리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이다. 1966년 빈 대학교에서 이론 물리에 대한 연구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유럽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 대학에 있으면서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소립자 연구를 계속했다.

젊은 시절부터 동양 철학을 공부했고, 자연과학은 물론 세계의 종교와 문화 전반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과학자이자 사상가이다. 따라서 그는 많은 물리학 분야 연구논문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현대과학의 철학적 의미를 주제로 폭넓은 글을 쓰고 강의와 강연을 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 살고 있으며,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Elmwood Institute) 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첫 번째 저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을 시작으로 하여,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히든 커넥션(Hidden Connections)> 및 1992 아메리칸 북 어워드를 수상한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Belonging to the Universe)> 등을 출간하였다.

그의 첫 저서인 이 책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은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우주상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것이 동양 고대 사상의 세계관과 유사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두 번째 저서인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는 그의 새로운 세계관이 여러 과학 분야로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제반 학문분야의 최근의 발전상을 살펴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은 미국 및 유럽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어 전세계의 과학계와 사상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신과학 운동, 신생활 운동 등을 촉발하게 되었다.


노먼 커즌스(Norman Cousins)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은 현대 사상의 진칫상이다. 거기에는 과학, 형이상학, 종교, 철학, 보건등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다, 이 자리에서 배부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극찬을 한 <탁월한 지혜 :1988>에서는 그의 신과학정신 배경에 있던 많은 선각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신과학 사상의 정리를 하고 있다. <탁월한 지혜>에 등장하는 인물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R. D. 랭, 제프리 츄, 그레고리 베이트슨, 헤이즐 핸더슨, 앨런 와츠, 크리슈나 무르티, 인디라 간디 여사 등이다. 


지구의 환경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는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 :1996>에서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통해 생명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그에 기반 한 framework을 제시하고 있다. 생명의 그물에서는 생명을 이해하기 위한 접근 방식으로 전 세계 저명한 학자들 즉 벨기에 브뤼셀 대학의 일리야 프리고진, 신티아고 칠레 대학의 움베르트 마투라니, 파리의 이공대학의 프란시스코 바렐라, 메사추세츠 대학의 린 마굴리스, 예일 대학의 브누아 만델브로, 산타페 연구소의 스튜어트 카우프만 등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생명의 구조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카프라 이전의 누구도 이들 이론을 통합하여 일반 독자가 읽을 수 있기 쉬운 수준으로 풀어쓴 사람은 없었는데, 카프라는 그런 작업을 통해 역학적 세계관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독자에게 심어준 수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히든 커넥션>(2002)에서는 복잡계 이론에서 밝혀낸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사회 분야로 확대하여, 생명의 생물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 그리고 사회적 차원을 통합시키는 개념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신부이자 수사인 슈타인들 라스트와 토마스 매스터와 공저로 출간한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에서는 두 사람과의 대화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과학과 신학의 접목을 시도한다. 공저인 두명의 수사 신부는 카프라의 생각들에 대한 선명한 해석으로 대화의 수위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며, 신과학운동이 적그리스도라는 비평을 조금이라도 적게 받을 수 있게 돕고 있다. 어차피 신과학운동 자체는 적그리스도라고 평가 받고 있고 신과학은 없다는 책마저 나오고 있으므로 신과학운동 자체를 맹목적으로 신봉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는 개인적으로 깊은 감동을 받은 책이라 종교와 과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카프라의 고마운 책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제 2 판 역자 서문

[P. 5-6] 그(프리초프 카프라)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현대 물리학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관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며, 그 새로운 세계관이 동양의 고대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비교하는데 주력한 것이다. 즉, 20세기에 물리학이 다루게 된 극대 세계와 극미 세계의 현상은 인간 경험의 좁은 영역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그 기계론적 자연관은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그는 역설한다. 기계에서는 정태적으로 분리된 각 부분의 작동이 전체의 기능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유기체에서는 역동적인 부분들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부분은 전체의 필요에 따라 역할하는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다.

[P. 6] 서구 문명을 과거 3백여 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주로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일에서 다를 보는 것이지만, 동양의 철인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했던 것이며, 시간의 축에서 생멸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로(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P. 6] 카프라 박사를 위시한 신과학 거장(巨匠)들은 동양 고대 사상의 자연관을 지적인 면에서 받아들일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동양의 가치관에 동조한다, 서구의 과학은 객관을 관찰하기 위하여 관찰의 과정에서 모든 주관적인 것을 배제했던 것이며 그 결과로 가치 중립(value neutral)의 과학이 되었던 것이다.

[P. 6] 이에 반하여 동양의 학문은 그 궁극적 목적을 선(善)의 실천에 두고 주관적인 마음을 항시 수련함으로써 도덕성을 함양하는 인격의 완성을 기하는 것을 학문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P. 6] 최근 물리학, 심리학, 생태학, 경제학 등등의 여러 과학 분야에서 이러한 종합적이며 통합적인 접근에 의한 새로운 학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역자 서문

[P. 8] 저자는 이책속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잇도록 현대 물리학의 개요와 그 물질관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동양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일치해 가고 있는가를 평이하면서도  치밀하게 설명한다.

[P. 8] 현대 물리학이라 함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P. 8] 라플라스는 인간이 우주의 현재의 모든 상태와 그 운동을 다 알게 되는 날에는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본문 71-72페이지 참조)

[P. 9] 고전 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인간은 전지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P. 9] 고전 물리학을 키워 기본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등등의 고전 물리학적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모조리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 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 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단순한 질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여지게 된 것이다.

[P. 9]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고전 물리학의 기본 태도는 순수한 객관주의였다. 관찰의 대상체는 주관과는 관계 없이 ‘거기 존재(存在)해’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객관적 존재의 불변적 특성인 수량적 제 속성의 파악에 물리학은 전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며....

[P. 9] 이와 반대로 불교등의 동양 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그 사변적인 방법으로 일(一)에서 다(多)를 보려 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데 반해서 동양사상은 그 직관적인 방법으로 다(多)에서 일(一) 을 보려하고 일체(一切)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즉 4차원 시공(時空)의 차원에서 보려한다. 

[P. 10]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으로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P. 10] 순수 객관주의의 물리학에 처음으로 관찰자의 입장, 즉 주관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은 더 깊고 더 넓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P. 10]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P. 10]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P. 11] 현대 물리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본질적으로 주관주의적 동양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등 양자 물리학의 거장들이 그 탐구의 과정에서 종래의 물리학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인과율을 본의 아니게 포기 하지 않을 수 없게 됨에 따라 그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며 심각한 사상적 고민 속에서 그들은 일찍부터 동양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P. 11-12] 저자는 이 책 속에서 힌두교, 불교, 도교, 역사상 등 동양 사상을 통틀어서 신비주의라고 했다.  4세기의 사리치우스는 “신비란 일어난 일이 없지만 언제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란 마술을 행하거나 기적을 바란다는 뜻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일 것이다. 일체(一切)를 시공 4차원적인 변화의 견지에서 보는 동양 사상은 3차원적인 논리로는 적절하게 해설할 수 없으므로 그로서는 신비주의라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P. 12] 물질의 궁극체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며, 물질적 존재란 전일적(全一的)인 것의 한 과정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현대 물리학의 자연관은 동양 사상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P. 12]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이론 체계가 동양에서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P. 12] 독자는 이 책에 일관되는 저자의 자연에 대한 친화감(親和感) 과 그 예술적 자태에 감명을 받을 것이다.

[P. 12] 선의 개오가 사물의 내면으로부터 보는 것이라면 시정신도 명상과 집중의 방법으로 사물의 내부에 침잠하고 동화함으로써 그 내부로부터 관조하는 것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P. 13] 서양예술의 주류가 동적인 것이라면 동양 예술의 주류는 정적인 것이다. 서양의 인물화가 정서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산수화는 그것을 침잠시키는 것이며 교향악이나 오페라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아악을 위시한 우리의 전통 음악의 주류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P. 13] 시에 있어서도 동양의 전통은 감상적이거나 극적인 것이 아니라 관조적인 것이 그 주류를 이룬다.

[P. 14] 고전 물리학을 뒤따른 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에 수반한 결정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경시하는 풍조를 일게 했으며,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심화되는 이 물심의 불균형은 드디어 현대 문명에 난치의 중병을 초래한 것이다.

[P. 14] 이러한 현대 문명의 중병을 진단한 어떤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서 조화를 되찾으라고 충고하지만, 이미 분별지를 발전시켜 고도의 기술 사회를 이루어 놓은 현대인에게는 낙원을 지키는 불칼이 없다 해도 자연의 동산에의 단순 회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심의 조화의 달성이 지난한 것이며 이에의 지름길은 없을지라도 물질관의 새로운 검토가 출발점은 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제2판에 부쳐

[P. 17]  내가 물리학자의 세계관과 신비주의자의 세계관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했을 때는, 그런 유사성이 그 전에 암시된 적은 있었으나 철저히 탐색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분명한 것이었고 장차의 상식이 될 것이라고 굳게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The tao of physics>를 집필하면서 때로는 내가 글을 쓴다기 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씌어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뒤이어 일어난 사건들은 이러한 느낌을 확인해 주었다.

[P. 18] 신비주의는 적어도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막연하고 불가사의하며 대단히 비과학적인 것과 잘못 연관되어 왔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개념과 신비주의 개념 사이에서 발견되는 심오한 유사성을 받아들이기를 꺼린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P. 18] 동양 사상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명상을 비웃거나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자세가 사라짐에 따라 과학계 내부에서도 신비주의를 진지하게 다루게 되었다.  

[P. 18] 나는 중국의 음양 사상이 그와 같은 불균형을 묘사하는 데 대단히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서양 문화는 꾸준히 양 또는 남성적 가치와 태도를 선호해 왔고, 그와는 상보적으로 대립하는 음을 가벼이 보았다. 서양인들은 융합보다는 자기 주장, 종합보다는 분석,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 종교 보다는 과학, 협동 보다는 경쟁, 보전 보다는 확장에 편중해 왔다. 이 같은 일방적인 발전은 이제 극히 위험한 단계, 즉 사회적, 생태계적,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P. 18] 그러나 동시에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하여 물러 난다”는 중국의 옛 격언을 예증하는 거대한 진화 운동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P. 19] 그들은 모두가 합리적 남성적 자세와 가치의 과대 평가에 대항하여 인간 본성의 남성과 여성적 측면 간의 균형을 되찾으려 한다. 이리하여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과 동양 신비주의의 세계관 사이의 심오한 조화를 깨닫는 것이 곧 보다 큰 문화적 전환의 뗄 수 없는 일부이며, 거기서 우리들의 사상, 지각과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게 될 새로운 실재관(vision of reality)이 출현하게 된다.

[P. 19]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이론이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은 이제 설자리가 없음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가치 중립적 과학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패턴은 그들의 정신 패턴, 즉 그들의 개념, 사상과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이룩하는 과학적 성과와 그들이 연구하는 기술 응용법은 그들의 정신 형태에 따라 조건지워진다.

[P. 19]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놓았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한길은 부처님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그것은 과학자 자신에게 달려있다.

[P. 20] 이 시대에 부처의 길, ‘가슴이 있는 길’(path with a heart)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P. 20] 동양 신비주의와의 유사성은 물리학에 그치지 않고 생물학, 심리학과 그 밖의 과학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주제들은 더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느껴진다. 물리학과 이들 과학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나는 시스템 이론(system theory)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개념을 다른 분야로 자연스럽게 확대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P. 20] 그에 따라 시스템 접근 방법이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의 유사성을 크게 강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P. 20]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는 자유 의지, 죽음과 탄생, 그리고 생명, 정신, 의식과 진화에 대한 어떤 아이들을 논의했다.



머리말

[P. 21-22]  나는 그 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Dance of Shiva)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 22] 나는 이론 물리학의 분야에서 오랜 수련 기간을 가졌고, 수년간 그 연구에 종사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양의 신비주의에 강렬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현대 물리학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양자 이론의 불가사의를 연상시키는 선의 불가사의함에 특히 이끌렸다.

[P. 22] 시초에는 마음이란게 어찌하여 자유롭게 유동하는가, 또 정신적인 직관이 어떤 작위적인 노력없이 의식의 저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떠올라 오는가 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준 ‘파워 플랜트’(power plant)가 내 사색의 실마리를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P. 22] 이와 유사한 경험들이 내게 잇달아 일어나 현대 물리학이 고대 동양의 예지와 조화를 이루는 일관된 우주관을 점차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수년간 적지 않은 노트를 기록하게 됐고, 계속 발견한 그 유사성에 관한 수편의 논문을 썼으며, 이제 그 경험들을 한데 묶어 이 책속에 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물리학을 꼭 알지 않아도 되는, 동양의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진 일반 독자를 위해 씌어진 것이다,

[P. 23] 그들은 이물질 세계의 가장 진보된 이론이 적응 됭 수 있는 일관성 있고 아름다운 철학적 체계를 동양의 신비주의가 마련해 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 23]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는 이러한 뛰어듦이 고도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 주는 일이다.



Ⅰ. 물리학의 길

1.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P. 27]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가지를 물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을 소용없는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환(Don Juan)의 가르침>

[P. 27]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영향권은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서 우주에 대한,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일대 수정을 가하게끔 했다.

[P. 28] 아원자 물리학에 있어서의 물질의 개념과 고전물리학에 있어서의 전통적인 실체관은 전혀 다른 것이다.  

[P. 28]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아이디어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P. 29]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있는 기본 이데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느냐, 또한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뚜렷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신비주의의 유상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것이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어느 쪽에서 한말인지 모를 지경에 까지 종종 이르게 될 것이다.

[P. 29] 이 책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세대와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이 지녀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P. 29] 신비주의가 서양에서는 언제나 방계적인 역할을 한데 불과하지만 동양에 있어서는 철학적 종교적 사상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데 동서양 신비주의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P. 30]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서구 과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고 다시 초기 그리스나 동양 철학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실험과 엄밀하고도 일관성 있는 수학적 형식주의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P. 31]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상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보았다. 이 대립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P. 32]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란 아이디어에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의 영혼과 윤리의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P. 32]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 되었는데, 그는 그 이래 2,000년 동안이나 서구 우주관의 기초가 된 한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P. 32]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중세를 일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이다.

[P. 32]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되었다.

[P. 33]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P. 34] 이처럼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다.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

[P. 34]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 35] 동양의 신비주의는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어떤 종파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 – 개오라고 부르는 –은 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체득이며 그 구경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대부분의 동양철학들은 본질적으로는 종교적 철학인 것이다.

[P. 35] 그러므로 동양적인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는 것이다.

[P. 35]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여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는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P. 36]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도(道)-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途程)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2. 아는 것과 보는 것

[P. 37] 허망한 것에서부터 진실한 것으로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어두움으로부터 밝음에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죽음에서 영생으로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브리하드 아라냐커 우파니샤드> 

[P. 37] 현대물리학과 동양의 신비 사상 사이의 유사성을 규명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현대 수학의 고도로 정교한 언어로 표명된 정밀과학과, 주로 명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들의 직관은 언어로써 전달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신적 수련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부터 다루어야 한다.

[P. 38] 사람의 마음엔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 가지 지식 또는 의식의 양태가 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과학과 종교에 연루되어 왔다. 서양에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때문에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지식이 자주 평가 절하되었고, 반면에 동양의 전통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와는 정반대이다.

[P. 38] 합리적 지식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 환경에서 그 대상과 사건들을 경험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식별하고 분리하여 비교하고 측정하여 범주화 하는 기능을 가진 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적 분별의 세계가 이루어지면 그것은 상호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립자의 세계로서, 불가에서는 이런 유형의 지식을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추상화는 이런 지식의 결정적인 특성이다.

[P. 39] 이렇게 추론적 지식이란 추상적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인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언어 활동의 전형을 이루는 직선적 연속적 구조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다.

[P. 39] 한편으로 자연계는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로서 거기에는 직선이나 완전한 정각형은 들어있지 않으며, 사건이 정연한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데 어울려서 일어난다. 

[P. 39]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P. 40] 불교의 선사들은 달을 가리키기 위하여 손가락이 필요한 것이지, 일단 달을 알아본 다음에는 그 손가락 때문에 마음을 써서야 되겠느냐고 말한다.

[P. 40]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 도가의 현자 ‘장주(莊周)’ >

[P. 40] 서양에서는 어의론자인 알프레드 코지프스키가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힘찬 슬로건으로써 똑같은 견해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P. 40]  이러한 체험에서 오는 지식을 불교도들은 절대지(絶對知)라고 불렀다.

[P. 41] 노자는 <도덕경>의 첫줄에서 똑같은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P. 41-42] 윌리엄 제임스의 말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우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통상적인 깨어 있는 의식은 실상 의식의 한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얇은 스크린에 의해서 분리된, 그 건너 저편엔 전혀 다른 의식의 잠재 형태가 가로누워 있는 것이다.” 

[P. 42] 물리학에서 지식은 3단계의 진행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과학적인 연구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다. 1단계는 설명해야 할 현상에 관한 경험적 실증을 수집하는 일이다. 2단계에서는 경험적 사실들이 수학적 상징으로 연관되며, 이러한 상징들이 정밀하고 일관성 있게 상호 연결되어 수학적 체계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를 보통 수학적 모형(model) 또는 그것이 더욱 포괄적일 때는 하나의 이론(theory)이라 부른다.

[P. 44] 언어가 기호로 대체되고 그 기호의 연결 작용이 엄격히 제약되는 수학에서 이 추상은 극대화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학자들을 정보를 하나의 등식으로 통상 언어로써는 몇 페이지나 필요할 것을 단 한줄의 기호속에 압축해 넣는 것이다.  

[P. 45]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P. 45-46] 만약 과학에 직관적 요소가 있다면 동양의 신비주의에도  또한 추론적 요소가 있다.

[P. 46] 다음과 같은 선의 명구가 있다. “네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 표적을 잃어버린다.”   

[P. 48] 동양의 신비가들이 봄(見)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시각을 포함한 지각의 한 양식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언제나 또 본질적으로 그것을 초월하여 실재에 대한 비 감각적인 경험으로 되는 것이다,   

[P. 48-49] 현대의 아원자 물리학의 실험을 반복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년간의 수련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 실험을 통하여 자연에 특정한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그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심오한 신비적 경험도 대체로 경험을 축적한 대가의 지도 아래 다년간의 수련을 요하지만 과학 수련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바친 시간만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누군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는 그 ‘실험을 반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경험의 반복이야말로 실제로 모든 신비한 수련에 필수적인 것이며, 신비가들의 정신적 지도의 목표인 것이다.

[P. 49] 대체로 심오한 신비적 경험은 오랜 준비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지만 직접적인 작관적 통찰은 우리 모두의 일상 생활에서 경험되는 바다.

[P. 49] 그러다가 우리가 그것을 단념해버리고 관심을 딴 데로 돌렸을 때 불현듯, 마치 섬광 속에서 처럼 우리는 그 잊었던 이름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여기엔 사고 과정은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직각적(直覺的)인 통찰이다.

[P. 49-50] 선불교의 학도들은 그네들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을 되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이 본래면목을 돌연히 ‘기억해 내는 일’ 이 곧 개오(開悟)인 것이다.      

[P. 50]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직관적 통찰의 또 다른 예로서 농담이 잘 알려져 있다. 농담을 이해하는 그 눈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개오’의 순간을 경험한다. 이 순간은 무의식중에 자발하는 것이어서 설명으로나 지적 분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살은 잘 알려져 있다. 직관적인 통찰이 익살의 밑바탕을 순간적으로 꿰뚫을 때에만 우리는 그 익살이 의도했던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통찰과 농담의 이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개오한 인사들에게는 틀림없이 잘 알려져 있을 터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대단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P. 50] <도덕경>에는 “그것이 웃음 거리가 아니라면 도가 되기에는 아직 불충분한 것이다”라는 일절이 있다.  

[P. 51] 노자는 학구와 명상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한다.

 “학문을 닦으면 나날이 지식이 늘고,

 도들 닦으면 나날이 준다.”

[P. 52] 헤아리는 마음이 숨을 죽이면 직관적 형태가 비상한 깨달음을 가져온다. 환경은 개념적 사고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경험된다.

[P. 52]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P. 53]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이런 경구를 말했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P. 55]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 따를 것 같으면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P. 57] 물질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양자장 이론의 어떤 국면에 의해 물리학자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시바신의 우주적 무도에 의해 전달된다. 춤추는 신과 물리학적 이론은 양쪽 다 마음의 소산이며, 그 지어 낸 이의 실재에 대한 직관을 기술하는 모형인 것이다.


3. 언어를 초월하여

[P. 59] 그 본질에 있어서 어의를 초월하고 있는 우리의 내적 경험을 전달하는 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범상한 사고 방식을 그처럼 당혹시키는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다. – 스즈키 다이세쓰

[P. 59] 언어의 문제는 여기에서 정말 심각한 것이다.

우리는 원자의 구조에 관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말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일상 언어로써는 아무래도 이야기할 수 없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P. 59]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원자와 아원자적인 실체를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P. 60] 우리가 처음부터 알고 있는 오직 한가지는 우리들의 통상 개념들이 원자의 구조에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P. 62] 다이토 대선사가 선 수업을 받고 있던 천황 고다이고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천 ‘칼(파kalpa)이전에 헤어졌지만
우리는 잠시도 떨어져 본적이 없소.

우리는 하루종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없소.

[P. 64]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 점을 신비가들은 언제나 인지해 왔지만 과학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문제가 되었다.

[P. 65]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자 물질의 궁극적 본질에 관한 질문을 실험으로써 다룰 수 있게 되었다.

[P. 65]  현대 실험 물리학의 정교하고도 복잡한 기구는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는 환경으로부터는 까마득한 자연의 영역인 미지적 세계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서 그것을 우리들이 감각에 와 닿게 한다.

[P. 66]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도 이제 비 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신비가들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 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


4. 새로운 물리학

[P. 67] 동양의 신비가에 의하면 실재에 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은 그 사람의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그것을 “경험의 모든 표준 형태를 뒤엎는, 인간의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고 하였다.

[P. 69-70] 이 절대적 공간, 절대적 시간 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뉴턴적 세계의 요소들은 물리적 입자들이었다. 수학적 등식에서 그것들은 ‘질점’들로서 취급되었고, 뉴턴은 그것들을 모든 물질을 만드는 작고 견고하며, 파괴할 수 없는 대상물이라고 간주했다.

[P. 70-71] 뉴턴 역학에서 모든 물리적 사건들은 상호의 인력, 즉 중력에 의해서 야기되는 공간에서의 물리적 점들의 운동으로 환원된다. 질점에 대한 이 힘의 효과를 정확한 수학적 형식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뉴턴은 미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과 수학적 기술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이것은 대단한 지적인 업적이었으며, 아인슈타인은 이것에 대해 “아마도 지금까지 한 개인이 이룰 수 있었던 사고의 최대 진전이었을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P. 72] 18세기와 19세기는 뉴턴 역학의 어마 어마한 성공을 보았다.

[P. 73] 그러나 그뒤 1백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뉴턴 모델의 한계를 나타나게 하고 그 모델의 어느 특성도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새로운 물리적 실재가 발견되었다.

[P. 76]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물리학자들은 상이한 현상들에 적용되는 두 개의 성공적인 이론을 갖게 되었으나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기 역학이 그것이었다. 이리하여 뉴턴적 모델은 더 이상 모든 물리학의 기초가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

현대물리학 

[P. 76] 금세기가 시작되고 처음30년 간에 물리학의 전 상황은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기본적인 고체 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 어느 것도 물리학이 현재 뚫고 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영역에로 확장될 수 없었다.

[P. 77]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의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관찰자들이 관찰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들은 사건들을 시간상으로 다르게 볼 것이다.

[P. 77]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P. 77-78]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 = mc2 에 의해 주어진다. 이 때, c는 빛의 속도다.

[P. 78]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2차원적인 평면 기하학이 구의 표면에 적용될 수 없듯이 평범한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러한 휘어진 공간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P. 80] 러더퍼드가 원자들에 알파 입자를 발사하였을 때, 그는 놀랍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고대로부터 믿어 왔듯이 원자는 딱딱하고 견고한 입자들이 아니라 극도로 미세한 입자인 전자들이 전기력에 의해 핵에 묶여져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광대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P. 80-81] 그러므로 원자는 거시적인 물체들에 비하면 극도로 미세한 것이나 그 중앙에 있는 핵에 비하면 대단히 큰 것이다. 우리가 상상해 본 버찌 크기만한 원자 형태에서도 원자핵은 너무 미세해서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P. 81] 성베드로 성당의 천장 한가운데에 있는 소금 한 알과 천장의 광대한 공간에서 그 주위를 맴도는 먼지들-이것이 원자의 핵과 전자들을 묘사해 볼 수 있는 모양이다.

[P. 81] 이러한 원자의 ‘유성’ 모델의 출현에 뒤이어 곧 원소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수가 그 원소의 화학적인 성질들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 81] 그러나 이러한 법칙들을 인지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 법칙들은 덴마크의 닐스 보어와 프랑스의 드 브로이,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슈뢰딩거와 파울리, 독일의 하이젠베르크, 영국의 디랙 등을 포함하는 물리학자들의 국제적 그룹에 의해서 1920년에 벌견되었다.

[P. 84] 두 번째 수수께끼는 원자들의 이상한 기계적인 안정성이다. 예를 들면 공기 중에서 원자들은 매초 수배만 번씩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매 충돌 뒤에는 그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P. 84-85] 양자론은 원자들의 이런 모든 놀랄 만한 성질들이 그 전자들의 파동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무엇보다 먼저 물질의 견고한 성질은 파동/입자의 이중성과 관련돼 있는 전형적인 ‘양자 효과’의 결과며, 이것은 거시적인 데서는 유사물을 찾을 수 없는 아원자적 세계의 특징이다.

[P. 87] 존재하려는 경향성, 제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움직이는 소립자들, 어떤 ‘양자 상태’에서 돌연히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원자들, 그리고 모든 현상들의 본질적인 상호 연관성- 이런 것들은 원자 세계에만 있는 몇 가지 특징이다. 반면에 모든 원자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아는 것으로서 거시적인 세계에서 경험될 수 있다. 그것은 양전하의 원자핵과 음전하의 전자들 사이의 전기적인 인력이다. 이 힘과 전자파간의 상호 작용은 우리 주위에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P. 88] 물질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즉 물질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 질량의 모두를 함유하고 있는 원자핵을 연구하여야 한다. 

[P. 97-98]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 유사성은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에서 분명해지며 이 두이론이 통합된 아원자적 물리학의 ‘양자-상대론적’ 모델에서는 한층 더 강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가장 놀랄만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동양 신비주의의 길

5. 힌두교

[P. 101] 동양 철학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고 이런 체험은 본래 종교적인 까닭에 그것은 종교로부터 따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P. 101] 힌두교는 하나의 철학이라 불릴 수도 없고, 또한 잘 정의된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종파와 의식과 철학적 체계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하고도 복합적인 사회 종교적 유기체이며,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잡다한 남신과 여신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교 의식과 예식 및 정신적 계율을 포함하고 있다.

[P. 101-102] 힌두교는 신화적인 영역과 심원한 개념들을 지닌 고도의 지적인 철학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의 단순 소박한 의식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P. 102] 힌두교는 그 정신적 원천을 <베다 경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베다의 ‘예언자들’인 무명의 현자들에 의해서 씌어진 고대의 성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P. 103] 대부분의 힌두교가 그렇듯이 크리슈나의 정신적 교시의 기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사물이나 사건들이 다 같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시일 뿐이라는 사상에 있다. ‘브라만’이라고 불리는 이 실재는 힌두교가 수많은 남신과 여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일원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통일 개념이다.

[P. 103]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만물의 영혼 또는 내적 정수로 이해된다. 그것은 무한하고 모든 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지성으로 이해될 수로써 없고 언어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도 없다.

[P. 104] 그러나 사람들은 이 실재에 관해 말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특히 신화를 좋아하는 힌두 현자들은 브라만을 신성하게 그렸고 신화적 언어 속에 담아 얘기한다. 그 신성의 제각기 다른 여러 모습에 맞추어 힌두교도의 숭배를 받는 다종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주어져으나 이런 모든 신들은 하나의 궁극적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경전은 분명히 하고 있다.

[P. 104]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 되는 것을 ‘아트만’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가장 순수한 정수- 온세상의 영혼, 그것은 실재다.

그것은 아트만이가, 그것은 당신이다.


[P. 104] 힌두 신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기 희생에 의한 세계 창조라는 주제가 반복하여 나온다. -‘거룩하게 한다’는 원래 위미에서의 희생에 의해서- 신은 이 세계가 되고, 종국에 가서는 또 다시 신으로 되돌아간다. 이 신성의 창조적인 활동은 ‘릴라lila’, 즉 신의 유희라고 불리며, 이 세계는 그 성스러운 유희의 무대로 간주되는 것이다.

[P. 105]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Karma’인데, 이것은 인도의 사상에서 또 다른 주요 개념이다. 이 카르마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것은  이 유희, 즉 활동하고 있는 전우주의 실천 원리인데, 여기에서 만물이 다른 만물과 역동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기타>경전의 말로 표현하자면,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

[P. 106]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mok놈’,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다.

[P. 106] 힌두교는 해탈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힌두교는 그 모든 교도들이 같은 방식으로 신성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각기 다른 깨달음의 양태에 맞추어 상이한 개념과 의식과 정신적 수련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의식 중에 많은 것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에 힌두교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브라만이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힌두교의 특성인 대자 대비한 관용과 포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P. 108] 힌두교에서 언제나 여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는 인간 본성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면이 전적으로 신성의 불가분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 풍부한 여신상들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힌두의 여신들은 성처녀로서 나타나지 않고 뇌쇄적일 만큼 아름다운 관능적 포옹상으로 나타난다.

[P. 108] 힌두교도들이 이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6. 불교

[P. 109-110]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이세계의 기원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인간적 좌절의 기원과 그 극복 방법을 교시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 마야, 카르마, 니르바나(nirvana) 등과 같은 인도의 전통적 개념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에 새롭고 생동하는, 막바로 들어맞는 심리학적 해석을 가하였다.

[P. 110]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 (Hinayana 소승불교)와 마하야나 (Mahayana 대승불교)라는 두 주류로 발전돼 나갔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반면에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P. 110] 인도 자체에서는 불교가 수세기를 지나면서 융통성 있고 동화력이 있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부처는 결국 여러 얼굴을 가진 비슈누신의 한 화신으로 간주돼버렸다.

[P. 110] 이들 철학이 그 높은 지적 수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대승 불교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상속에 결코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동양적 신비 사상 안에서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지성은 직접적 신비체험- 불가에서는 ‘각’이라고 부른다-에의 길을 밝혀 주는 한가지 수단으로 비쳤을 뿐이다. 이 체험의 본질은 지적인 분별과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아친탸(acintya)’ 즉 부사의(不思議)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실재가 분할되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 ‘진여’로서 나타난다.

[P. 111-112]  제 2 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trishna)’, 즉 집착 또는 탐욕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불교 철학에서 ‘아비댜(avidya)’ 즉 무명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무익한 욕심이다. 이 무명 탓으로 우리는 지각된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열된 사물로 쪼개고, 이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낳은 이 고착된 범주에다가 실재의 유동하는 형태를 붙잡아 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좌절에 좌절을 거듭 겪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이 불교에서는 삼사라(samsara), 즉 윤회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인과응보의 끝없는 사슬인 카르마 (karma/업)에 의해서 몰아쳐진다.

[P. 112] 제 3성제는 괴로움과 좌절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삼사라의 악순환을 초탈해서 카르마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마침내 니르바나(nirvara)라고 불리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경지에서는 개별적 자아라는 잘못된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생명이 전일하다는 감정이 지속된다. 니르바나는 힌두교의 모크샤와 동일어로서 모든 지적인 개념을 넘어선 의식 상태며, 그것은 그 이상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 즉 불성을 얻는다는 뜻이다.

[P. 112] 제 4성제는 일체고를 여의는 부처의 처방으로 불성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자기 계발의 팔정도다.

[P. 113] 마하야냐파는 신도들에게 불성을 얻는 매우 다양한 방법, 즉 ‘능한수단’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자칭 대승 불교라고 한다.

[P. 114] 여기까지 소개된 마하냐나 불교의 관점은 그것의 지적, 사변적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불교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이것을 보완해 주는 것이 불가의 종교적 의식인 믿음과 사랑과 자비다. 대승 불교에서 참으로 깨친 지혜, 즉 보리는 두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P. 115]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불교 사상의 절정은 동명의 수트라(sutra)에 기초를 둔 아바탐사카파 (Avatamsaka/화엄종)에서 달성되었다. 이 수트라는 대승 불교의 정수로 간주되고 있는데, 스즈키 다이세쓰는 다음과 같은 가장 열광적인 말로써 이것을 칭송하고 있다.

“아바탐사카 수트라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실로 불교 사상과 불교 감정, 불교 체험의 극치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세상의 어떠한 종교 문헌도 이 수트라에서 달성된 것과 같은 개념과 장엄함과 감정의 깊이, 웅대한 스케일의 구성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생의 영원한 샘이며, 이 샘은 그 어떠한 종교인도 부분적으로만 만족하여 목마름을 그대로 지닌 채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P. 116] 아바탐사카의 중심 주제는 모든 사물과 물건의 통일과 상호 작용으로서 이 개념은 동양적 세계관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는 세계관의 기본 요소의 하나를 이루기도 한다.


7장. 중국 사상

[P. 117] 중국의 현자는 오로지 이 높은 정신적 단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도 똑같이 마음을 준다. 그는 인간본성의 상보적인 두 면-직관적 지혜와 실용적 지식, 관조와 사회 활동-을 자기 안에서 통일하는데, 중국인들은 현자와 왕의 이미지로 이것을 연관시켰다. 

[P. 118]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 그것은 교육제도와 사교적 예절의 엄격한 관습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복합적인 구성과 조상 숭배의 의식을 지닌 중국 전통적 가족 제도에 윤리적 기초를 형성시켜주는 것이었다.

[P. 118]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 ‘도’를 찾아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P. 118]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상 경향은 중국 철학에서 정반대의 두 극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다 같은 인간성의 양극으로서, 그래서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다. 유교는 대체로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규율과 관습을 익혀야만 하는 아동 교육에서 강조되었고, 반면에 도교는 사회적 관습에 짓눌려 파괴되어 버린 원래의 자발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년층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11, 12세기에 와서 신유학자들이 유교, 불교, 도교의 종합을 꾀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모든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주희의 철학에서 절정에 달한다. 주희는 유교의 이학을 불교와 도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결합시킨 탁월한 철학자로서 자신의 철학적 종합 속에 이 세가지 전통의 모든 요소를 통합시킨 것이다.

[P. 118] 유교(Confucianism)란 명칭은 공부자(Confucius)에서 유래하였다.

[P. 118-119] 그의 가르침은 이른바 육경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 대의 철학적 사상서인 <예>, <악>, <시>,<서>,<역>, <춘추>로, 이것들은 중국 고대의 ‘성스런 현자’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P. 119] 그 자신의 사상은 <논어>, 즉 공자 어록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몇 제자에 의하여 편찬된 금언집이다.

[P. 119] 도교의 창시자는 노자다. 그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노대가’를 의미하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공자보다 연상인 동시대인이었다.

[P. 119] 중국에서는 그것이 대체로 그냥 <노자>라고 불리는데 서양에서는 <도덕경>, 즉 <길과 힘의 경전 Classic of the Way and Power>이라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P. 119] 두 번째로 중요한 도가의 책은 <도덕경>보다 훨씬 장문인 <장자>로서, 이 책의 저자인 장주는 노자보다 약 2백년 이후 사람이다.

[P. 119] 공자 어록인 <논어>와 <도덕경>은 중국적 사유 방식의 전형이라 할 간결하고 암시적인 스타일로 씌어져 있다.

[P. 120] 중국인들도 인도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관찰하는 삼라만상의 배후에 그것을 통일시켜 주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P. 121] 그들은 이 실재를 ‘도’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원래 ‘길’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주의 길이요, 도정이요, 자연의 질서였다. 후대에 와서 유가들은 여기에 다른 해석을 가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도, 인간 사회의 도에 관해서 맣라여Tdmaum 그래서 그것을 도덕적 의미에서 생활의 올바른 길로 이해하였다.

[P. 121] 그 원래의 우주적 의미에서 도는 궁극적이며 규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이런 점에서 그것은 힌두교의 브라만과 불교의 다르마카야 (법신불)와 가까운 것이다.

[P. 121] 도는 만물이 거기에 포함되는 우주의 진행 과정이며, 따라서 이 세계는 부단한 유전과 변화로 보이는 것이다.

[P. 122] 중국인의 견해로는 과다히 가지는 것보다는 과소히 가지는 것이 더 낫고 너무 지나치게 해버리는 것보다는 덜 된 채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낫다.

[P. 123] 중국적 관점에서는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러한 사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고, 한 쌍의 원형인 음양의 상징에 대해 여러 세대에 걸쳐 연구가 가해져 그것은 마침내 중국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P. 123] 오랜 옛적부터 자연의 원형적인 두 극은 명암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남여, 강약, 상하에 의해서도 표상 되었다. 양상, 즉 강하고 남성적이고 창조적인 힘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에 음, 즉 어둡고 수동적이고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요소는 ‘땅’으로 대표되었다.

[P. 123] 이 도표는 어두운 음과 밝은 양이 대칭적으로 배열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대칭이 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단한 순환 운동을 강하게 암시하는 회전적인 대칭이다.

[P. 124] 이 도표 가운데에 있는 두 점은 두 힘의 어느 하나가 그 극에 도달할 때 마다 이미 그 자체 안에 대립자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상징화한 것이다.

[P. 124] 음양론은 중국 문화에 두루 퍼져서 전통적인 중국 생활 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주요한 중심 사상이다. “삶은 음과 양이 고루 섞인 조화다”라고 장주는 말하고 있다.

[P. 124-125] 전통적인 한의학 역시 인체 내에 있는 음양의 균형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떠한 질환도 이 균형이 무너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체는 음과 양의 두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체적으로 얘기해서 신체의 내부는 양이고 표면은 음이다; 등은 양이고 앞은 음이다;  인체 내부의 각 기관도 음양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각 부분 사이의 균형은 ‘기’, 즉 활력 있는 에너지 흐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이 기는 경혈, 즉 침점을 간직한 ‘경락’의 계통을 따라서 흐르는 것이다.

[P. 125] 이 음과 양 사이의 흐름이 막히면 신체는 병들게 되고 따라서 그 질병은 경혈에 침을 놓아 기의 흐름을 자극하여 회복시켜 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P. 125] “이 <번역의 서>, 즉 중국의 <역경>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세상의 모든 문헌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이 책의 기원은 고대의 신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내에서는 오늘날까지 가장 탁월한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왔다. 3천년을 헤아리는 중국 문화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의미심장한 책이라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 책에서부터 그 영감을 취했거나, 아니면 거꾸로 이 책의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수천 년의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지혜가 <역경>을 만드는 데에 다 녹아 들어갔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P. 126] <역경>에 의탁하는 목적은 단순히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 상황의 소인을 찾아 적절한 행동을 취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역경>을 보통 점술서의 차원을 넘어 지혜의 서로 끌어올린 것이다.

[P. 127] 실제에 있어서도 <역경>이 지혜의 책으로서 쓰이는 바가 예언서로 쓰이는 것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더 크다.

[P. 127] 노자는 자신이 가장 심오한 경구 가운데 몇몇을 바로 이 원천에서부터 인용하였다. 공자는 이것을 철저히 연구해서 이 책에다 대부분의 주석을 붙임으로써 이 책의 후경을 완성시켰다. 이들 주역, 소위 십익은 육효의 구조적인 해석을 철학적 해설에 결합시킨 것이다.

[P. 127] “천변만화가 한 권의 책일지니

그것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네.

그 도는 영원히 변하나니

쉼 없는 변화, 움직임,

공허한 여섯 장소 속을 흐르나니,

고착된 법도 없이 생하고 멸하며, 강약이 서로 바뀌며,

하나의 법률 아래 얽매일 수 없으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것은 오직 변역일 뿐이어라.”


8. 도교

[P. 129] 중국 사상의 두 가지 주요 경향인 유교와 도교 가운데에서 후자는 신비적인 데로 나아가 우리가 현대 물리학과 비교하는 데 보다 적절한 바가 있다. 힌두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도교는 추론적인 지식보다 직관적인 지혜에 보다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P. 129] 중국 문화의 맥락에서 보자면 도교적 해방은 특히 인습의 엄격한 규율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P. 129] 인습적 지식과 이성에 대한 불신은 서양 철학의 다른 어느 학파에 있어서 보다 도교에 있어서 한결 강하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이 결코 도를 해득할 수 없다는 공고한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장주의 말로 하자면,

“아무리 넓은 지식이라도 도를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고, 이성이 인간을 현명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현자는 이런 방법들에 반대해 왔다.”

[P. 130] 장주의 책은 추론과 변설을 경멸하는 글귀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개가 잘 짓는다고 좋은 개로 인정받는 게 아니고,

사람이 능숙하게 말한다고 슬기롭다고 인정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논쟁은 분명하게 보지 못한 증거다.”

[P. 130] 도가에서는 논리적 추론을 사회적 예절 및 도덕적 규범과 아울러 작위적인 인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이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관조에 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P. 130] 도가의 현자들은 강한 신비적인 직관과 결합된 주의 깊은 자연 관찰로써 현대의 과학 이론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는 깊은 통찰에 이르렀던 것이다.

[P. 130]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P. 130-131] “만물이 변용하고 성장함에 있어서 그 모든 싹과 생김새는 각기 본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안에서 각기 성숙과 쇠잔이 있고, 변화와 변용의 분단한 흐름이 있는 것이다.”

[P. 131] 도가들은 자연 속의 모든 변화를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빚어 낸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떤 대립하는 쌍도 그 극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역동적으로 연관돼 있는 극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믿게 되었다.

[P. 131] 어떤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그 반대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 주고,

때려 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P. 132] 다른 한편, 당신이 무언가를 지니려 하면 그 반대되는 무엇을 그 안에 허용해야 한다.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울 것이니.

[P. 132] 이것은 높은 관점에, 즉 모든 대립자들의 상대성과 극관계가 명료하게 지각되는 어떤 조망에 도달한 현자의 생활 방식이다. 이런 유의 대립자 가운데에는 음양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 연관된 선악의 개념이 맨 먼저 포함된다. 선악의 상대성과 나아가 모든 도덕적 규범의 상대성을 깨달은 도가의 현자들은 선을 위해 분투 노력하지 않고 선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P. 133] 그리스의 ‘도가’는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였다. 그는 ‘만물은 유전한다’는 유명한 말에서 표현한 것처럼 부단한 변화를 강조한 점에서 노자와 궤를 같이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변화가 순환적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계질서를 “얼마 동안 타오르고 얼마 동안 꺼져 있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에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음과 양의 주기적 상호 작용 속에 그 자신을 드러내는 도의 중국적 개념과 참으로 유사한 이미지다.

[P. 133]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이 두현자의 세계관 사이에 보이는 이 커다란 유사성이 일반적으로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놀랍다.

[P. 134]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P. 134] 이러한 행동 방식을 도교 철학에서는 ‘무위’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글자 뜻대로 하자면 ‘비행동’을 뜻하는데, 조지프 니덤은 이것을 ‘자연에 어긋나는 행위를 삼가는 것’으로 번역하고 이 해석을 <장자>에서 다음의 한 구절을 인용해 와 정당화하고 있다.

[P. 134]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는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

[P. 135] 만일 사람이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고, 혹은 니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의 본성에 거스르지 않으면’ 그는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의 행동은 성공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처럼 당혹스럽게 보이는 노자의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라는 말이 뜻한 것이다.

[P. 135] 유교는 이성적, 남성적, 행동적, 지배적이다. 다른 한편 도교는 직관적, 여성적, 신비적, 순응적인 모든 것을 강조한다.

[P. 135] 노자는 말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도가들은 인간성의 여성적인, 순응하는 성질을 펼쳐 보이는 것이야말로 도와 조화된 완전히 균형 잡힌 삶으로 이끌어 주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믿었다.


9. 선

[P. 137] 기원후 1세기경 중국 정신이 불교 형태의 인도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두 가지 발전이 나란히 일어났다. 한편으로 불경을 번역하는 일이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하여 그들 자신의 철학적 조명 아래서 인도 부처의 가르침을 해석하게 하였다.

[P. 137] 다른 한편 중국 정신의 실용적인 면을 인도 불교의 실제적인 상에 집중하여 보통 명상으로 번역되는 찬 (ch'an: 선의 중국식 발음)이란 이름의 특별한 정신적 수련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도 불교의 영향에 대응했다. 이 찬 철학은 기원후 약 1천2백 년경 결국 일본에서 채택돼 젠(Zen: 선의 일본식 발음)이란 명칭 아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전통으로서 그곳에서 꾸준히 계발되어 왔다.

[P. 137] 선은 이처럼 상이한 세 문화의 철학과 특질이 독특하게 융합된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하나의 생활 방식이지만 여전히 인도의 신비주의, 도가의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사랑, 유교 정신의 철저한 실용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P. 138] 다소 특수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선은 본질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불교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적이 부처 자체, 즉 선에서 사토리(satori;각의 일본식 발음)로 알려진 체험적 개오의 얻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오의 체험은 동양 철학의 모든 학파의 핵심이지만 특히 선은 오직 이 체험에만 전념하고 더 이상의 해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P. 138] 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처의 깨달음과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정수다. 방대한 불경 속에 상술돼 있는 여타의 교리는 보충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P. 138] 선의 체험은 따라서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교리나 철학, 형식적 강령이나 독단적 교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고착된 신조로부터의 해방이 진실로 정신적이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P. 138] 동양 신비 사상의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선은 언어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역시 완고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도교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게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에 관해서 묻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답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장주는 말했다.

[P. 138-139] 그런데 선 체험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해질 수 있으며, 또 실제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선에 적합한 특수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네 글귀를 통해 선은 요약 기술되고 있다 :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

언어나 문제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P. 140] 선에 있어서 깨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섞여 드는 대상과 범사와 사람들이다. 이처럼 생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깊은 신비성을 여전히 띠고 있다.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

이건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나는 장작을 져 나르고, 물을 긷는다.

[P. 140-141] 그러므로 선의 완성은 일상 생활을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사는 데 있다. 백장이 선을 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잠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많은 선어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명백하게 들리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정신적 위업을 이루는 것이다. 유명한 선가의 말 중에,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개오를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P. 141]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선문의 강조는 확실히 그 도가적인 뿌리를 보여주고 있는 일이지만, 이런 강조의 기반은 엄연히 불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본성의 완전함에 대한 믿음이요, 개오의 과정이란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면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깨달음일 따름이다. 대선사 백장은 불성을 찾는 데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황소 등에 타고서 황소를 찾는 것과 너무나 같다.”

[P. 142] 깨달음은 나날의 범사에 나타나 보인다는 선문의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회화와 서도, 원예 등의 다양한 기예뿐만 아니라 다도, 꽃꽂이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 궁도와 검도, 유도와 같은 무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제각기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도, 즉 개오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선 체험의 다양한 특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마음을 수련 시켜 궁극적인 실재와 접할 수 있게끔 해준다.


Ⅲ. 대비 

10. 만물의 통일성


[P. 147-148]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그 본질이라고까지 말할수 있는 것-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으로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서 이해된다.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에서는 ‘범’, 불교에서는 ‘법신’, 도교에서는 ‘도’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그것을 일어 또한 ‘진여’라고도 부른다.

[P. 148] 영혼에 의해 진여로 의미지워지는 것은 만물의 전체작인 전일성, 즉 모든 것을 포용하는 거대한 전체다. 

[P. 148-149]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 그것은 원자의 단계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영역에까지 물질을 더 깊이 투시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통일성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철학에 관한 우리의 대비를 일관하는 하나의 반복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P. 149] 다음에 이어질 논의는 이른바 양자론의 코펜하겐 해석이라 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1920년대 말기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아직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델이다.

[P. 150] 코펜하겐 해석의 출발점은 물리적 세계를 관찰되는 세계 (‘대상’)와 관찰하는 체계로 나누는 것이다. 관찰되는 체계는 원자, 아원자적 소립자, 원자적 작용 등등이 될 수 있다. 관찰하는 체계는 실험 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나 몇 명의 관찰자를 포함한 것이다. 그 두 체계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이제 커다란 어려움이 발생한다.

[P. 150] 관찰되는 체계는 양자론에서 확률론에 의해 기술된다. 이것은 어떤 시간에 아원자적인 소립자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혹은 원자적 작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확실히는 결코 예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P. 151] 원자  에서 어떤 시간에 한 전자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를 확실히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위치는 그것을 원자핵에 묶어 주는 인력과 그 원자 안의 다른 전자들의 영향에 좌우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원자 내부의 여러 곳에 존재하려는 전자들의 경향을 표현해 주는 확률 모형을 결정한다.

[P. 159] ‘관찰 대신에 참여’라는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겨우 최근에야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생각이다. 신비적 견식이란 단지 관찰에 의해서만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의 존재 전부를 쏟아 넣는 전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따라서 참여자의 개념은 동양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이며, 동양의 신비가들은 이 개념을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주체와 객체가 불가분일 뿐만 아니라 구별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

[P. 159] 그들은 더 나아가, 깊은 명상 속에서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의 구별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고 차별이 없는 전체에로 용해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P. 160] 원자 물리학으로부터 도출되는 세계관을 요약하기 위하여 탄트라 승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아주 적절할 것 같다.

불교도는, 독립적으로 또는 외따로 존재하는 바깥 세계가 있어 그 역동적 힘 속에 자신을 삽입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는 동일한 직물의 양면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모든 힘과 사건들, 의식의 형태와 그 대상물의 실낱들이 서로 연관 지어져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끝없는 망으로 짜지고 있다.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P. 161] 동양의 신비가들이 모든 사물들을 기본적인 전일자(oneness)의 현신으로서 경험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물들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 모든 상이성과 대비점들이 일체를 포용하는 통일체 속에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든 대조적인 것들의 통일성이라는 것, 특히 대립자들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의식으로써는 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므로 그것은 동양 철학의 가장 난해한 특성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양인의 세계관의 바로 근원에 들어 있는 통찰인 것이다.

[P. 161] 대립자란 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개념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바로 그 우리의 행위 때문에 그 개념의 대립자가 생겨난다.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P. 162]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P. 162] “현세의 대립성을 넘어서, 영원한 진리 속에 안주하라!” 라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있으며, 한편 불교에서도 그와 같은 가르침이 불제자들에게 베풀어졌다.

[P. 162]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사실 동양의 모든 신비주의는- 지관(acintya), 즉 ‘무사의(無思議)’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절대적인 여실지견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모든 대립적인 것의 통일의 거기에서 하나의 생생한 체험으로서 성취된다.

[P. 162-163] 모든 대립적인 것이 양극적인 것이라는 개념-즉 광명과 암흑, 득과 실, 선과 악 등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동양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다. 따라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P. 163]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P. 163] 이러한 역동적 균형의 개념은 동양의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이 경험되는 방법상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정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언제나 두 극단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이 점은 중국의 현인들이 원형적 양극을 상징하는 음과 양으로써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음과 양의 배후에 놓여 있는 통일체를 ‘도’라고 부르고, 그것을 음양의 상호 작용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보았다. “지금 어두음이 되게 하고, 또 곧 빛을 나타내 주는 것이 ‘도’다.”

[P. 164] 인생에 있어서 주된 양극성의 하나는 인간성의 남성적인 측면과 여성적인 측면이다.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양극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들어있는 남성/여성적 양극성에 불안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적이든, 여성적이든 어느 한족 면을 두드러지게 취한다. 

[P. 164] 노자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깨달은 인간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P. 165] 동양의 신비주의는, 한사람 속에 들어있는 자웅 양태의 이러한 통일은 사고와 언어의 경계가 초월되고 모든 대리성이 역동적 통일체로 나타나는 의식의 보더 높은 경지에 서만 체험될 수 있다고 확언하고 있다.

[P. 165] 나는 이미 그와 유사한 경지에 현대 물리학이 도달하고 잇다고 주장한바 있다.

[P. 166-167]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인 세계는 힘과 물질이 통일된 세계다. 이곳에서는 물질이 비연속적인 입자들이나 연속된 장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P. 167] 물리학자들은 4차원의 공간-시간의 세계를 그들 이론의 추상적인 수학적 형식화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지만, 시각 상상-다른 모든 사람의 상상처럼-은 감각의 3차원 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P. 167] 우리의 언어와 사고의 패턴은 이런 3차원의 세계에서 계발돼 온 것이기 때문에 상대성 물리학의 4차원적 실재를 다루기에는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동양의 신비가들은 고차원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명상의 경지에서 그들은 일상적 삶의 3차원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 때 모든 다원적인 것이 하나의 유기적 전체 속으로 통합되는 전혀 다른 실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P. 171] 아슈바고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suchness/眞如)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P. 175]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사이의 불확실한 관계에 대한 정확한 수학적 공식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 혹은 불확정성 원리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는 결코 아원자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아주 정확히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 위치를 잘 알면 잘 알수록 입자의 운동량은 더욱더 애매하게 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이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양의 어느 한쪽에 대한 정확한 측정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다른 한쪽에 대한 것은 전혀 무지한 상태로 남겨둘 수  밖에 없다.

[P. 175] 이 한계성은 우리의 측정술이 불완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리의 한계성 때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P. 175] 우리가 만일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하면 그 입자는 전혀 정확한 운동량을 가질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성간의 관계만이 불확정성 원리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P. 176-177] 불확정성 원리가 지닌 근본적인 중요성은 그것이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전적 개념의 한계성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아원자 세계는 통일된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의 거미줄과 같은 관계로서 나타난다. 우리의 일상적인 거시적 경험에서 유래된 고전적 개념들은 이 세계를 기술하기에는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입자와 같은 하나의 개별적인 물리적 실체의 개념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 하나의 이상화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전체와의 연관 아래서만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연관성들은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확률성인 통계적 성질들이다.

[P. 177] 우리가 물질적인 ‘대상’에 하나의 개념을 부여하려 하면 할수록, 그 다른 개념은 점점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리고 그 두 개념 사이의 정확한 관계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주어질 뿐이다.

[P. 177] 상보성의 개념은 물리학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고방식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보어는 그것이 물리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역시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종종 암시해왔다.

[P. 177] 닐스보어는 자신의 상보성의 개념과 중국 사상 사이의 유사성에 관하여 너무 잘 알고 있었다. 


12. 공간 – 시간

[P. 181] 현대 물리학은 동양의 신비주의의 기본이 되는 사상의 하나를 가장 극적으로 확증시켰다; 그것은 곧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이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지도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지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다.

[P. 181] 어떠한 물리법칙도 그 법칙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제기된 이들 기본적인 개념들에 관한 일대 수정은 과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였다.

[P. 182] 플라톤은 “신은 기하학자다”라고까지 단언하였다.

기하학이 신의 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천국이 완전한 기하학적 형상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P. 183] 그리스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은 항상 공간과 시간이 마음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주장해 왔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다른 모든 지성적 개념들처럼 공간과 시간을 상대적, 제한적, 환상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P. 184] 고대 동양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상대성 이론의 기본 태도와 같은 태도를 이미 취하고 있었다.

[P. 184] 깊은 명상을 통하여 일상적인 (의식) 상태를 뛰어넘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통적인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궁극적 진리가 아님을 이미 깨달았다.

[P. 185]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나타난 공간과 시간에 관한 새로운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공간과 시간의 측정은 상대적이라는 발견 위에 기초하고 있다.

[P. 187]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관련되는 모든 측정의 그 절대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고, 우리로 하여금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방기하도록 하였다.

[P. 188] 그 관찰자는 움직임이 없이, 즉 파동을 형성함이 없이, 전후로 진동하는 전자장으로서 빛의 선속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P. 190] 빛이 태양으로부터 자구에 도달하는 데는 8분이 소요된다. 그런 고로 우리가 어떤 순간에 보는 태양은 8분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강 가까운 별을 보는 것은 4년전의 별을 보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은하계를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이미 수백만 년 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P. 193] 동양의 신비가들은 일상 생활의 3차원적 세계에서 초월하여 보다 고차적이고 다원적인 실재를 체험할 수 있는 비범한 의식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P. 195] ‘일반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확대되어 중력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의 영향으로 시-공은 만곡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지극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계란의 표면과 같이 휘어진 2차원 평면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3차원 공간 속에서 그처럼 휘어져 있는 표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차원적으로 휘어진 표면의 만곡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게 아주 명료하다. 그러나 4차원의 시공은 차치하고라도 3차원 공간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상상력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깥에서’ 3차원 공간을 들여다 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굽어질 수 있는가’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99]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은 시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만곡은 3차원 공간에만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4차원 시공에도 확대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예언하는 바로 그것이다.

[P. 201] 동양의 철인들 역시 세계에 관한 그들의 체험을 보다 높은 의식의 경지에서 확장해 나가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며, 그들은 이러한 경지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근원적으로 다른 경험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일상적인 3차원적 공간을 깊은 명상을 통해 초월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층 더 강력하게 시간에 대한 일상적인 인식까지 초월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P. 204] 이(양자장) 이론의 두 가지 독특한 특징들을 알아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첫째는 우리의 도표 속에서 광자의 흡인과 방출의 경우와 같이 모든 상호 작용은 입자의 생성 및 붕괴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둘쨋번 특징은 입자들과 반입자(antiparticle)들 사이에 기본적인 대칭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입자에는 같은 질량과 음전하를 가진 반입자가 존재한다.

[P. 209] 선사 도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은 현재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다고 하는 이 생각이 아마도 시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지나가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시간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P. 210] 많은 동양의 현인들은, 생각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지만 통찰력은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빈다는 “통찰력은 고차원의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P. 210] 그렇게 때문에 동양의 신비주의는 시간으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어느 면에서 상대성 물리학도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  역동적인 우주

[P. 214] 불교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글자 그대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삼사라(samsara)’라고 부른다; 또 그들은 이 세계에는 집착할 만한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하여 불교도에 앗어서 각자란 생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다, 선승 운문은 “도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간단히 “계속 걸어가라”라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불교도는 부처를 ‘여래(Tathagata)’ 즉 ‘왔다가 그렇게 가는 사람’ 이라고 한다.

[P. 216] 양자론에 따르면 입자는 동시에 파동이며 이와 같은 사실은 그것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원자적 입자가 작은 공간 영역에 제한될 때에는 언제나 빙빙 돎으로써 그 제한에 반응한다. 제한의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입자들은 그 속에서 더욱 ‘재빠르게’ 움직인다. 이러한 동작은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아원자적 세계의 독특한 모습이요, 전형적인 ‘양자 효과’다. 입자는 양자 이론에서 파속(wave packet)에 의해 표현된다. 그러한 파속의 길이는 입자의 위치에 관한 불확실성을 나타낸다.

[P. 217] 운동함으로써 제한에 반작용하는 입자의 성향은 아원자 세계의 특징인 물질의 근본적인 불안정성(restlessness)을 암시한다. 이 세계에서 물질적인 입자의 대부분은 분자, 원자, 핵의 구조에 묶여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고유의 경향을 갖고 있다. 

[P. 221-222] 허블(Hubble)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는 은하계의 거리와 그 퇴행 속도 사이의 관계로부터 우리는 팽창의 출발점을, 바꾸어 말하면 우주의 나이를 산출해 낼수가 있다. 결코 확실치는 않지만 팽창의 속도에 변화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1백억년 정도의 일정을 얻게되는게 이것이 우주의 나이다.  

[P. 225] 어떤 입자에 포함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은 그 입자의 질량 m에 광속의 제곱 C^2을 곱한 것과 같다

   E = mC^2

[P. 228] 동양의 신비가들은 그들의 비상한 의식상태에서 거시적 수준에서의 공간과 시간의 상호 관통을 깨닫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물리학자들의 아원자적 소립자에 관한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거시적 대상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불교에서 현저히 나타난다, 부처의 주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모든 목합된 사물들은 무상하다”는 것이었다.


14. 공과 형상

[P. 231] 고전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은 공허한 공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견고하고 파괴되지 않은 입자라는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은 이러한 상에 혁신적인 수정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입자들’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공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으로 철저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는 이른바 장 이론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중력을 공간의 기하학과 연결시킨 아인슈타인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그 후에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이 결합되어 아원자적 소립자의 역장을 기술하게 됨에 이르러 한층 더 뚜렷하게 되었다. 이 ‘양자장 이론’에서는 입자들과 그 주위의 공간 사이의 원래의 뚜렷한 구별은 사라지고 진공은 아주 중요한 역학적 양으로서 인정 받게 되었다.

[P. 235] 아인슈타인은 그의 말년을 그러한 통일장(unfied field)을 탐구하는데 바쳤다. 불교의 법신이나 도교의 도와 같이 힌두교의 범도 어쩌면 물리학에서 연구되는 현상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현상들을 나타내는 궁극적인 통일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P. 238] 중국 철학에서 공허하며 형체가 없으나 모든 현상들을 산출할 수 있는 도의 개념 속에 장의 관념이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의 개념에도 그것은 명백히 표시되어 있다.

[P. 238] 양자장처럼 기는 공간의 도처에 미만해 있으며 견고한 물체로 응축될 수 있는, 묽으며 감지될 수 없는 형태의 것으로 여겨진다.

[P. 239] 양자장에서와 같이 장 – 또는 기 –은 모든 물체의 기초가 되는 본질일 뿐만 아니라 파동의 형태로써 서로 상호 작용을 수행한다.

[P. 242]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모든 상호 작용들은 소립자들의 교환을 통하여 발생한다. 전자기적 상호작용들의 경우, 교환된 소립자들은 광자다; 한편 핵자들은 훨씬더 강한 핵력-또는 ‘강한 상호작용’-을 통하여 상호작용하는데, 그것은 ‘중간자’(meson)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소립자들의 교환으로서 나타난다.

[P. 246] <자연의> 법칙들은 사물들의 외부에 있는 힘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운동의 조화를 표현하는 것이다.
[P. 247] 어떤 핵자나 다른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소립자가 없더라도 가상적 소립자들이 허공으로부터 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하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을 때, 결국 물질과 빈 공간 사이의 구별은 버려져야만 했다.

[P. 247] 바로 여기에 현대 물리학이 동양 신비주의의 허에 가장 가까운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동양의 허와 같이 ‘물리적 진공’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 세계의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독립된 물리적 실체들이 아니라 단지 근본적인 허의 일시적 출현이다. 불경에서 말하듯 “색이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P. 248] 가상적 소립자들과 진공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적 관계다. 진공은 진실과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리듬으로 고동치는 ‘살아 있는 허’이다. 진공의 동적인 성질에 대한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최고로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P. 247]  “태허가 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대 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5. 우주적 무도

[P. 249] 에너지 모형의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입자들이 끝없이 생겨나고 소멸되는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입자 상호 작용들은 물질 세계를 형성하는 안정적인 구조를 낳게 하지만 그 물질계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동적인 운동을 하며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 우주는 끊임없이 운동과 활동을, 즉 에너지의 지속적인 우주적 무도를 하고 있다.

[P. 250] 모든 입자에는, 동일한 잘량을 가졌으나 반대의 전하를 가진 반입자가 존재한다. 광자는 그 자신이 반입자이고; 전자의 반입자는 양전자라고 불리며; 반양성자, 반중선자. 반중선 미자가 있다.

[P. 252] 대부분의 불안정한 소립자들은 인간이 가진 시간 척도에 비하면 1백만분의 1초보다도 작은 극도로 짧은 시간에만 존재한다.

[P. 265] 모든 양성자는 잠재적으로 즉 일정한 확률성을 가지고는 양성자와 중성의 파이 중간자로, 중성자와 양성의 파이 중간자로, 아니면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P. 267] 장이론에 따르면 각각의 입자는 ‘조밀하고 오묘한 형태’로 에너지의 율동적 모형(가상적 입자) 을 산출하면서 실로 ‘영원히 그의 노래를 부른다.’

우주적 무도라는 이런 은유는 그것의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힌두교의 무도 신 시바(Shiva)의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P. 270] 현대 물리학은 창조와 붕괴의 율동이 계절의 순환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기 물질의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밝혀 왔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물질의 구성 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케 하는 기본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입자들은 가상적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자체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은 모든 아원자적 입자가 에너지 무도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창조와 붕괴의 고동치는 에너지 무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16. 쿼크 대칭들 – 하나의 새로운 공안?

[P. 271] 아원자의 세계는 리듬과 운동과 연속적인 변화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임의적으로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뚜렷하고 명확한 모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P. 275] 입자 물리학에서 대칭이란 반사와 회전에 의한 것 이외에도 많은 다른 작용에 연관되어 있다. 즉 이런 것들은 통상적 공간(그리고 시간)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추상적 공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P. 275-276] 모든 과정에 있어서 관찰되는 듯한 네 개의 기본적 보존 법칙이 존재한다. 그것들 중 세 개는 일상의 공간과 시간의 간단한 대칭 작용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입자들의 상호 작용은 공간상에 옮겨 놓아도 대칭적이다.

[P. 276] 이런 대칭들의 첫째는 운동량의 보존에 연관되어 있으며 둘째는 에너지 보존에 연관되어 있다. ..... 세 번째의 기본적인 대칭은 공간에 있어서 방위에 관한 것이다.

[P. 282] 그리스 천문학자들은 천체가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원이야말로 지고(至高)의 대칭성을 지닌 기하학적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대칭에 대한 동양 철학의 태도는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극동의 신비적 전통들은 대칭적 모형들을 상징이나 명상의 방편으로 자주 활용하지만 대칭의 개념이 그들의 철학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17.  변역(變易)의 모형

[P. 284] 강입자와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묘사하는데 가장 알맞은 것으로 보이는 구조 체계는 ‘S 행렬이론’이다. ‘S 행렬’ 이란 기본 개념은 원래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1943년에 제기되었고 지난 20여년 동안에 복잡한 수학적 구조로 발전되어 왔는데, 이것은 강한 상호작용을 묘사하는데 아주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S 행렬은 강입자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반응에 관한 확률의 집합이다.

[P. 286] S 행렬 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새로운 개념은 강조점을 대상물로부터 사건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그 기본 관심이 입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반응에 있다는 것이다.

[P. 293] 불교도들은 대 상을 사건으로 여겨 왔지 사물이나 실체로서 여겨오지 않았다. 불교도들이 그들의 자연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현대 과학에서 실험과 수학적 이론을 통하여 재발견되어 온 것이다. 

[P. 302] 현대 물리학자와 동양의 신비가는 양편 다 변화와 전환의 이 세계에 있어서의 일체의 현상이 역동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갓을 깨달았다. 힌두교와 불교도들은 이러한 상호 관계를 우주적 법칙, 곧 업의 율법으로 보고 있지만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건들의 우주적 망 속에 들어 있는 어떤 특별한 모형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편 운동과 변화를 역시 강조하는 중국 철학은 도의 우주적 유동 가운데에서 연속적으로 형성되었다가는 다시 이산하는 역동적인 모형의 개념을 발전시켜왔다. 


18.  상호 관통

[P. 310] 부트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ㅡ대하여 최종적인반론을 제기하였다. 뉴턴의 우주는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기본적인 실체로부터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으므로 그 이상의 분석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P. 311] 이와 같은 부트스트랩 철학은 양자론에서 하나의 본질적이고 우주적인 상호 연관성을 깨달음으로써 발생하여 상대성 이론에서 그 역동적인 내용을 획득하고 S 행렬 이론에서 반응 확률에 의하여 형식화된 자연관에 있어서의 최고 정점을 나타낸다. 

[P. 311] 전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영원한 법칙, 즉 이성이

신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나니.

[P. 312] 이와 같이 물리학자들은 그들 이전의 것보다는 좀 더 정확한 일련의 부분적이고 대략적인 이론들을 세운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자연 현상에 고나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석이라고 표명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기술하는 모든 ‘자연 법칙’들은 없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그 이론들이 더 발전되었을 때에는 좀 더 정확한 법칙들에 의해 대체되도록 되어 있다.

[P. 313] 넓은 의미에 있어서 부트스트랩 사상은 비록 매력있고 유용하기는 하지만 비과학적이다. ....과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떤 의심할 수 없는 구조 체계에 기초를 둔 언어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의미론적으로 모든 개념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과학적이라고 불릴 수가 없다.

[P. 314] 사람은 땅의 밥을 따르고

땅은 하늘의 법을 따르고,

하늘은 도의 법을 따르고,

도는 그 본래의 자연의 법에 따른다.

[P. 314] 조지프 니덤은 “중국인이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들의 조화로운 협동은 외계에 있는 어떤 초월적 권능의 명령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것들이 우주의 모형을 이룩하는 전체 위계속에 들어있는 한 부분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나오며, 그리하여 그것들은 자체 본성의 내적인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P. 315] 동양 신비주의의 주요 학파들은 우주란 하나의 상호 연관된 전체고, 그 안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결코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은 다른 모든 부분의 속성으로부터 결정된다는 부트스트랩 철학의 견해와 일치하게 된다.

[P. 318] 초지성적 의식에서는 실로 어떠한 것도 유한하지 않다; 이러한 그것은 개개에 있어서의 전체, 그리고 전체에 있어서의 개개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P. 324]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그리고 한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하여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그리고 하나의 시간에 영원을 간직하라.

[P. 328] 부트스트랩 아이디어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물론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의 궁극적 운명에 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우리는 꾸준히 증가되는 정밀성을 가지고 자연 현상의 끊임없이 증대되는 영역을 총망라하는 미래 이론들의 조직 체계를 상상해 볼 수 있다.

[P. 328] 참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참 알고 있지 않다.    



맺음말

[P. 329] 내가 어느 정도까지 이룩하고자 바라는 것은 어떤 엄밀한 논증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주요 이론들과 모델들이 동양 신비주의의 견해들과 내용이 일치하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나에게 있어서는 끊임없이 환희와 영감의 근원이 되어 왔던 경험을 독자로 하여금 수시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P. 332] 우리는, 처음엔 완전히 관계가 없는 듯이 보였던 현대 물리학자와 동양신비가의 방법들 사이에 사실 많은 공통점이 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계에 관한 그들의 서술에 현저한 유사점이 잇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P. 334]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암시되고 있는 세계관이 현재의 우리 사회와는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형평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신물리학의 미래- 제3판 후기

현재의 진전 단계와 미래의 가능성

[P. 368] 내가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쓴 이래로 나는 이러한 진전된 새로운 단계에서의 물리학의 역할에 대한 중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다양한 과학분야에서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을때, 나는 그것들이 모두 뉴턴 물리학의 역학적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신물리학을 다른 분야의 새로운 개념들과 접근 방법을 위한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그러한 견해가 물리적 수준이 다른 수준들보다 기초적이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나는 신물리학, 특히 부트스트랩 이론을 살아 있지 않은 시스템을 다루는 시스템적 접근 방식의 특별한 경우로 보고 있다.

[P. 370] 20여년전에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쓰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직업적으로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막대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혼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유사한 과정을 밟고 있던 많은 나의 친구와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이제 우리 모두는 훨씬 강해져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내가 이른바 ‘떠오르는 문화’ -실재에 대한 동일한 통찰의 여러 다른 양상들을 보여주는 수많은 운동들- 라고 불러온 것에 대한 복합적인 대안 조직들을 갖추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사회변화를 가져올 강력한 힘을 결집해 나가고 있다.  



내가 저자라면


프리초프 카프라의 The Tao of Physics를 범양사에서 신과학 시리즈로 출간하면서 역자 이성범과 김용정 교수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김용정 교수는 도올 김용옥 교수의 친형이고, 연희 전문 출신인 이성범씨는 상선회사로 유명한 범양상선의 회장으로 그가 신과학관련 도서의 국내 보급을 위한 소명으로 특별히 범양출판사를 설립 본인이 직접 유수한 도서의 번역까지 한, 국내 신과학 운동 보급의 핵심 인물이다. 범양사의 도서는 신과학운동이라는 테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을 중심으로 출간되고, ‘과학사상’이라는 범양출판사의 계간지는 과학과 철학의 사상으로 확립될 수 있는 일반 기고보다는 수준이 높고 논문보다는 비 전문적인 많은 글이 실려있는 우수한 계간지이다. 그 모든 것이 이성범 회장의 신념에서 비롯된 결과이고 그로 인해 국내에 많은 신과학도서가 보급되었지만, 독자층이 얇은 탓에 그 출판사는 많은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은 프리초프 카프라의 첫 번째 저서이다.  젊은 시절부터 동양철학에 심취해있던 카프라가 동양사상과 자신의 전공인 물리학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기록했으며, 그 메모를 기반으로 출간한 것이 이 책이다.


역자 이성범이 말하듯 이 책은 현대 물리학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관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며, 그 새로운 세계관이 동양의 고대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비교한 연구와 사고의 결과를 기록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카프라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물리학이 다루게 된 극대 세계와 극미 세계의 현상은 인간 경험의 좁은 영역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기계론적 자연관으로는 설명 될 수 없으므로 그 기계론적 저연관은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데카르트와 뉴턴식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극대 세계를 연구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극미 세계를 연구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에서는 불일치가 발생하고 있고, 그런 일련의 증거와 동양사상과의 일치성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카프라는 이 책을 쓰면서 ‘앞으로 떠오를 문화’ 즉, 실재에 대한 동일한 통찰의 여러 다른 양상들을 보여주는 수많은 운동들을 현대물리학의 여러 이론들과 동양 사상 전반에 걸쳐있는 유사성을 찾는 시도를 했는데 이 책을 쓴 목적에 대해 본서 329페이지에서 “ 내가 어느 정도까지 이룩하고자 바라는 것은 어떤 엄밀한 논증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주요 이론들과 모델들이 동양 신비주의의 견해들과 내용이 일치하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나에게 있어서는 끊임없이 환희와 영감의 근원이 되어 왔던 경험을 독자로 하여금 수시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노트에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유사성들을 기록했었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이 책을 펴냈다고  22페이지에서 “이와 유사한 경험들이 내게 잇달아 일어나 현대 물리학이 고대 동양의 예지와 조화를 이루는 일관된 우주관을 점차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수년간 적지 않은 노트를 기록하게 됐고, 계속 발견한 그 유사성에 관한 수편의 논문을 썼으며, 이제 그 경험들을 한데 묶어 이 책속에 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물리학을 꼭 알지 않아도 되는, 동양의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진 일반 독자를 위해 씌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카프라는 첫 번째 저서인 이 책 이후 수많은 책을 출판했고, 그의 책들은 제3의 문화라고 불리는 새로운 조류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그리고 카프라는 신과학운동이라는 탈뉴톤주의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 책을 10년이상 전에 접했는데 읽다가 어려워 포기했었다. 그의 후속작에 많은 감동을 입은 나는 그의 첫책이자 가장 유명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꼭 읽어내고 싶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 덮어버리고 말았던 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읽지만 역시 어렵고 그 난해함 만큼이나 그의 지식과 탐구력에깊은 자극을 받았다. 역경, 노자, 장주, 불교사상 등을 인용해 내고, 이들 동양사상들이 갖는 특징과 차이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에서 그가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명상과 기수련을 했으며, 이론만으로서의 선이 아닌 실천에서 체득한 동양의 사상을 이미 그의 내부에 섭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의 목적에 대해 29페이지에서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있는 기본 이데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느냐, 또한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뚜렷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신비주의의 유사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것이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어느 쪽에서 한말인지 모를 지경에 까지 종종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을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방식으로 설명한 부분에서 나는 동양의 신비주의가 이미 미시물리학의 곳곳에 포진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프라가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의 과학이미지를 개선하겠다는 저술 의도는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는 동양적 지혜와 서양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을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途程)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말처럼 과학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된 점이 그의 저술의도가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3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물리학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현대물리학-마음을 담은 길, 아는 것과 보는 것, 언어를 초월하여, 새로운 물리학 이렇게 4개의 챕터로 되어있다.  제2부는 동양 신비주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힌두교, 불교, 중국사상, 도교, 선 과 같은 대표적인 동양사상들에 대해 설명하며 현대 물리학과의 유사성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 제3부는 대비라는 제목인데 여기에는 통일성,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공간-시간, 역동적인 우주, 공과 형상, 우주적 무도, 쿼크 대칭들- 하나의 새로운 공안, 변역의 모형, 상호 관통의 9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途程)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하고 있다.

물리학자의 저서답게 너무 어려웠으므로 이 책의 복잡한 계산이나 설명은 과감히 삭제하고 개념위주로 쉽게 썼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카프라의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이 해운대 백사장의 모래 한알보다도 못하단 생각이 들었다. 비단 이책 뿐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저서들을 13-14년 만에 다 꺼내 놓고 목차를 읽어보고 나의 무지를 다시 재확인 했다. 내가 아직 30대일때 나는 그의 글에서 감동하고 문장의 의미뿐 아니라 행간의 숨은 의미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또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매일 매일 깨달음을 얻어가던 그때가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진리를 탐구하는 연구를 하려고 했고 그래서 가르치는 직업이 아닌 연구를 위해 오랜 갈등을 하여 H대를 나왔는데.... 지금 나는 너무 스포일되어 있다는 생각을 10년도 지난 지금 카프라 책을 펴보면서 느꼈다. 다시는 펼쳐 볼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카프라 책들은 내 학문에의 열정을 다시 기억하게 만든 실마리가 되어 주었고, 갈 길이 너무나 먼데 이곳에서 감정 소모하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준 책들이다. 다시 그의 책을 한권 한권 차례대로 읽어야 겠다. 그리고 범양사의 숱한 신과학 총서 시리즈가 빼곡하게 꽂혀있는 내 책장을 바라보며 한때 신과학에 내 연구 미래를 던져 보겠다고 결심했던, 그때의 열정과 잃어버린 내 꿈에 대한 아련한 아픔이 밀려온다. 그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왜 나는 지금 감정소모로 지쳐가고 있는가? 다시 되돌아 갈 수 있을까? 

카프라는 잊고 있던 내 꿈의 아이콘이고, 80대 노년 로저 스페리의 날카로운 눈빛에 매료되어 나도 그리 살리라 맹세하던 그 옛날 나의 존재감을 다시 회복해 내야만 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게 되었다.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으로 읽어낸, 다 이해할 수 없는 프리초프 카프라.. 나는 그가 서 있는 곳으로 한발 다가가기 위해 다시 심호흡을 한다. 행복한 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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