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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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 을유문화사 / 2007
<저자에 대하여>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1948)는 여사는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윈 뒤 뉴욕 주의 외가에서 경영하던 농장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학교 선생님이 된 어머니를 따라서 미루리 주와 미네소타주로 옮겨다니다가 열두 살이 되던 해부터 그녀는 뉴욕 주의 버팔로로 전근을 한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후 베네딕트 여사는 성년이 되기까지 도서관 근무를 한 어머니와 함께 여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1909년 어머니의 모교이던 바사 대학을, 전미국 대학의 우등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파이 베이터 캐퍼(Phi Beta Kappa)상을 받고 졸업하고 이듬해까지 장학금으로 유럽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나중에 코넬 대학의 교수가 된 스탠리 R 베네딕트와 결혼한다.
그러나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았던 탓으로 결혼한 지 15년 만에 별거하게 된다. 한편 그녀는 그에 앞서 결혼 생활 7년을 지나던 해에 뉴욕에 있는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 입학하여 인류학을 공부하게 되고 미국 인류학의 중흥조인 프란츠 보아스 교수와도 만나게 된다. 이것은 자식도 없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던 베네딕트 여사로서는 운명의 전환을 의미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시작한 만학으로 현대 미국 인류하그이 여걸이 탄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학파의 거인 제인 해리슨(Jane Harrison), 그리고 베네딕트 여사와 함게 보아스 교수에게 배우면서 베네딕트 본인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은 마가레트 미드, 이들과 함께 베네딕트 도한 현대 인류학의 여걸로 길이 그 이름이 기억될 것이다.
베네딕트는 보아스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종교와 주술이 지닌 문화적 특색의 분포를 조사한 “북아메리카의 수호 신령의 개념”(1923)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어서 1930년과 1932년에 각각 “남서부의 문화가 지닌 심리적 패턴”과 “북아메리카의 문화의 통합” 등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앞의 논문은 푸에블로 인디언의 조사를 통해서 특징 있는 문화적 요소를 선택하고 연관지우는 일이 민족에 따라 그 패턴을 달리함을 밝혔거니와 그 이후 그녀는 이른바 “문화의 패턴”에 관한 관심을 표면화하고 그것이 뒤의 논문에서 더욱 발전되어 마침내 유명한 <문화의 패턴>(1934)이라는 한 권의 책을 낳기에 이르른다.
문화의 패턴이라는 개념은 가령 베네딕트와 함께 보아스 교수 밑에서 배우되 박사 학위는 그녀를 앞질러 받은 클라이드 클럭혼(Clyde Kluckhohn)교수의 “나바호 족 무노하의 패턴화”(Patterning in Navaho Culture)에도 보이는데, 한 스승 아래서 자란 두 학자가 더불어 같은 문제를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바 보아스 학파가 지닌 공통의 특색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녀의 유명한 저서인 <문화의 패턴>은 이미 현대 인류학의 한 고전이면서 문화와 인간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다시없는 필수적 교양 서적으로 한 자리를 굳게 차지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한 그녀의 학문적 노력은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항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 이외에 <종족>(1940)과 만년의 명작인 <국화의 칼>이 있다. 이는 1944년 6월 미 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인데, 저자 자신은 일본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쪽이 오히려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 저서는 입증하고 있다.
*참고자료*
<문화의 패턴>-루스베네딕트/도서출판 까치/199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서문
p4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 일본인(平均的日本人:average Japanese)의 행동과 사고(思考)의 틀(形:Pattern)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지(恥:수치 부끄러움)’에의 인식에 놓인 문화다.
p5 저자 자신은 일본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쪽이 오히려 보다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 저서는 입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부분적 체험은 전체적인 방법론을 망쳐 놓기 쉬운 것이다. 이 저서가 허다한 나름대로의 기행문이나 그것에 준하는 저널리스틱한 일본 인상기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으리라.
* 제1장 연구 과제 - 일본
p10 문호가 개방된 이래 75년간 일본인에 대해 씌어진 저작에는, 세계 어느 국민에게도 일찍이 쓰인 바 없을 정도의 기괴하기니 짝이 없는 ‘그러나 또한(but also)'라는 표현이 연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p11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菊花)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에 관한 책을 쓸 경우, 동시에 이 국민이 칼을 숭배하며 무사(武士)에게 최고의 예의를 돌린다는 사실을 기술한 또 다른 책에 의해 그것을 보충하는 그러한 일은 일반적으로 없다
p11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는가 하면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인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또한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또한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르게 될 때는 범죄의 유혹에 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p13 우리는 일본인의 사상·감정의 습관과, 그러한 습관에 잠긴 문화의 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행동이나 의견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을 알아야 했다.
p14 전쟁 중에는, 적을 나쁘다고 철저하게 깎아내리는 일은 용이하지만, 적이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보는가를 적 자신의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해야만 할 일이었다.
p14 문제는 일본인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에 있었지, 만일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일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있지 않았다.
p14 나는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을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문제로 바라보아야 했다.
p16 일본에 관해 쓰는 일본인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를, 그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흔하며 보이지 않게 때문에 빠뜨려 버린다. 미국인이 미국에 관해 쓸 경우도 마찬가지다.
p19 인류학자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문화와 다른 문화간의 차이성에 익숙해져야 한다.
p23 이 책은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룬 책이다.
p23 어떤 국민이 자기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다른 국민이 사용하는 렌즈와는 다르다.
p25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심한다. 그들은 차이를 존중한다. 그들의 목표는 차이가 있더라도 안전이 확보되는 세계, 세계 평화를 위협함이 없이도 미국이 철저히 미국답고, 같은 조건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일본은 일본이 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p26 이 책은 일본에서 예기되고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는 습관에 관해 기술한 것이다.
p27 이러한 연구의 목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태도를 기술하는 데에 있다.
28. 타국을 이해하려 할 때는, 그 나라 사람들의 습관이나 가정에 관한 질적 연구를 조직적으로 행한 연후에야 비로소 여론 조사를 유효하게 이용할 수가 있게 된다.
p29-30 일본인이 사용하는 범주와 상징에 관해 조금만 이해한다면 흔히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의 많은 행동적 모순은 이미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했다. 어찌하여 일본인 자신은 어떤 종류의 급격한 행동 전환을 일관된 하나의 체계의 뗄 수 없는 부분으로 간주하는가를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이유를 드러내어 보일 수가 있다. 나는 일본인과 처음 작업을 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어구나 관념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마침내 중요한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친 감정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개달았다. 덕과 악덕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체계는 전혀 독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유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제2장 전쟁중의 일본인
p32 일본은 전쟁의 원인을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보았다. 각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 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된다. 일본은 계층제도(hierarchy)를 수립하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인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p34 일본은 승리에 대한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바탕 위에 놓고 있었다. 일본은 정신력은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p34 일본의 정치가도 대본영도 군인들도 이 전쟁은 군비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인의 물질에 대한 신앙과 일본인의 정신에 대한 신앙과의 싸움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p36 가미카제라는 것은 13세기에 칭기즈 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케 하여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가리킨다.
p40 “기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우연히 부딪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시기를 당해서는 반드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p41 미국인은 생활 전부를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세계에 맞게 조정한다. 그리고는 그 도전을 방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본인은 오히려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정해진 생활 양식에서만 안심을 얻을 수 있으며, 예견하지 못한 일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p42 그들이 시종 입에 올린 문구는, “세계의 눈이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인은 충분히 일본 정신을 발휘해야 했다
p44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어떤 사람들은, 천황에 대한 모욕적인 말이나 공공연한 공격만큼 일본인을 노엽게 하고 그들의 전의를 선동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p44 일본에서 산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의 천황 숭배는 나치스 당의 성쇠를 점치는 척도이며 파시즘적인 계획의 모든 악과 결부된 하일 히틀러(Heil Hitler) 숭배와는 함께 논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했던 것이다.
p45 천황은 모든 사람에게 전부였다.
p46 천황은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다. “천황이 없는 일본이란 진정한 일본이 아니다.” “천황이 없는 일본이란 생각할 수 없다.”....“설령 일본이 지더라도 일본인은 열 명이면 열 명 다 천황을 계속 숭배할 것이다.”
p46 패존 때에 천황 비판의 초월성이 일본의 목소리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p48 천황의 뜻에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어느 쪽으로도 쓸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다.
p51 일본군들은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이며, 우리 미국인같이 환자를 충분히 간호하는 것은 전투기의 구명 도구처럼 영웅적 행위를 해치는 것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p53 일본인에게 명예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p57 그것은 마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새로운 페이지에 씌어진 구절을 한결같이 충실하게 실천하였다.
p57 일본인의 행동은 어떤 하나의 행동 방침에 모든 것을 걸며, 만일 그것이 실패할 경우 다른 방침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제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take one’s proper station)
p59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 제도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자유 평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 가족, 종교, 경제생활 등과 같은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 있다.
p66 머리를 수그리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 뜻대로 처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에 있어서 상대방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권리를 승인하는 것이며, 절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 지위에 당연히 돌아가는 어떤 책임을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성별과 세대의 구별과 장자 상속권에 입각한 계층 제도가 가정 생활의 근간인 것이다.
p66 효도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 중국과 공유하고 있는 숭고한 도덕률이어서, 효도에 관한 중국인의 가르침은 일찍이 6세기에서 7세기경의 중국 불교, 유교의 도덕설, 세속적인 중국 문화와 함께 일본에 들어왔다. 그러나 효도의 성격은 불가피하게 중국과는 다른 일본의 가족 구조에 적합하도록 개조되었다.
p69 일본의 ‘효도’는 직접 얼굴을 마주치는 한정된 가족간의 문제이다....이렇게 직접 얼굴을 대하는 좁은 집단 내부에서 ‘알맞은 위치’를 규정하는 규칙은 참으로 엄밀하다.
p70 알맞은 위치라는 것은 단지 세대 차이만이 아니라 연령의 차이에도 적용된다. 일본인은 극단적 무질서 혼란 상태를 표현할 때, 이런 일이 “난형난제(難兄難弟)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들의 “물고기도 아니고 새도 아니다.”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p76 세계사에서 주권 국가에 의한 계획적인 문명수입이 일본 만큼 훌륭하게 수행된 예는 찾기 어렵다.
p80 상인 계급은 천민 계급의 바로 위에 놓였다. 이 사실은, 미국인에겐 참으로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것이나, 봉건 사회에 있어서는 매우 실정에 맞는 일이었다. 상인 계급은 늘 봉건제도의 파괴자였다. 실업가가 존경받고 번영하게 되면 봉건 제도가 쇠퇴한다.
p83 도쿠카와 시대의 사무라이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무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점차로 그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고전극이나 다도 같은 평화로운 예능의 전문가가 되어갔다.
p89 천황이 정치적으로 무력하였고 이른바 대원수의 국사범 같은 존재였을 때에도 일본인의 정의에 따르면 계층제도에 훌륭하게 ‘알맞은 위치’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p90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미리 규정되어 있어서 각자의 사회적 지위가 정해진 세계 속에서 생활하도록 조건지워져 왔다.
p94 일본 방방곡곡에서 터져나온 절규는 ‘잇신 一新’, 즉 과거로 복귀하자는 이른바 유신維新이었다. 그것은 혁명과는 거의 정반대로, 진보적인 것이 아니었다.
* 제 4장 메이지 유신
p97 일본의 근대화 초기의 절규는 손노조이(尊王攘夷), 즉 ‘천황을 복벽하고 이적을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을 외국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는 것과 함께, 또 천황과 쇼군의 ‘이중 통치’속에 있었던 10세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
p100 이토록 철저하고 평판 나쁜 개혁을 단행한 ‘정부’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특수한 일본의 여러 제도가 이미 봉건 시대부터 육성해온 하층 사무라이 계급과 상인 계급의 ‘특수한 연합세력’이었다.
p101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하였다. 이들은 왕제복고를 계층제의 정점에 두고 쇼군을 제거함으로써 계층적 질서를 단순화시켰다.
p103 윗사람에 대한 전통적 의무, 특히 천황에 대한 전통적 의무는 일본의 큰 장점이다.
p103 그들은 근대적 세계에서 ‘알맞은 위치’를 지킴으로써 얻은 이익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계층 제도의 관습을 무너뜨릴 생각이 없었다.
p110 ‘웃어른’에게는 서고 문화보다도 더 큰 존경 - 따라서 더욱 큰 행동의 자유 - 을 주지만, 웃어른들도 그 지위를 지켜야 한다. ‘모든 것을 그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
p110 메이지 정치가들은 종교분야에서 정치에 비해 훨씬 기묘한 형식적 제도를 만들어 냈다. 국가는, 특히 국민적 통일과 우월의 상징을 선양시키는 종교는 국가 관할에 속하게 하고 다른 모든 종교는 개인 신앙의 자유에 맡겼다. 국가의 통제를 받는 영역이 바로 ‘國家神土’이다.
* 제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p124 서구인이 조상숭배라 부르는 것은 동양인에게는 실은 숭배가 아니며, 도한 조상 숭배라 하더라도 전적으로 조상들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체에 대해 인간이 지니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p124 더구나 동양인이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나날의 접촉 모두가 현재에 있어서의 그의 채무를 증대시킨다. 그의 일상적인 의사 결정과 행동은 틀림없이 이 부채로부터 발생된다. 그것은 기본적인 기점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렇게 소중히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혹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단순한 사실 자체까지도 모두 세상 덕이기 때문이다.
p125 온(恩)의 여러가지 용법 전부를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그리고 윗사람이 아니거나 또는 적어도 자기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 행위는 불쾌한 열등감을 준다. 일본인이 ‘나는 누구에게 온을 입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누구에 대하여 의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그들은 채권자나 은혜 입힌 사람을 온진(恩人)이라 부른다.
p127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의 습성 속에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129 '온의 힘‘은 항상 단순한 개인적인 기호를 짓밟을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p130-131 일본인은 우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음으로써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사람에게 온을 베푼다“는 말을 한다. 그것에 가가운 영어 표현은 ”타인에게 무엇을 강제한다“이다.
p142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기에 존중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은 데에는 더할 수 없을 만큼의 타고난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 제6장 만분의 일의 은혜갚음
p143 온은 부채이기 때문에 갚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보은은, 온과 아주 별개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p143-144 일본인에게는 온이라고 불리는 중요하고도 결코 소멸할 수 없는 채무와, 일련의 다른 개념에 의해 이름 지어진 적극적이고도 지체할 수 없는 변제와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사람의 채우(온)은 덕행이 아니다. 변제가 덕행인 것이다. 덕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보답 행위에 몸을 바칠 대 시작된다.
p147 일본인은 양에서나 기한에서나 무제한적인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과 똑같이 갚고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義務)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p153 일본의 조상숭배는 최근의 조상에 한정되어 있다.
p154 일본에서는 제도화된 집안의 범위를 뚜렷이 제한하고 있으므로, 이 기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수효도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
p157 메이지의 정치가들이 해결해야 했던 것은, 모든 일본인이 마음속에서 무조건적인 최고의 덕인 주를 천황에 대하여 바치도록 하는 일이었다.
p158 정말 큰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정신적 영역이었다. 주는 최고 사제이며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인 신성한 수장 곧 천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해야하는 의무가 되었다.
p162 일본인은 미국인을 준법 정신이 결여된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미국인은 일본인을 민주주의의 관념이 결여된 굴종적인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양국 국민의 자존심은 각각 다른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는 말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p163 일본을 분석하던 미국은 주를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다.
p163 외국인 기자 한 사람이 서술한 바와 같이, 아침에는 소총을 겨누면서 착륙했지만, 점심때는 총을 치워 버렸고, 저녁때는 이미 장신구를 사러 외출할 정도였다. 일본인은 이제 평화의 길을 따름으로써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 했던 것이다. 1주일 전까지는,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기 위해서 죽창으로라도 이적을 격퇴키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했었다.
p164 일본은 일본 고유의 강점, 즉 아직 전투력이 분쇄되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항복을 수락한다는 막대한 대가를 주(忠)로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능력을 사용하였다. 일본인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지불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 대신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복의 명령이긴 했지만, 그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
*제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p165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義理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란 기무(義務)를 갚아야하는 것처럼 기리를 갚아야한다. 그러나 기리는 종료가 다른 일련의 의무이다. 영어에는 이것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p167 기무는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반면 세상에 대한 기리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p174 기리의 규칙은 엄밀히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느 갚음의 규칙이다.
p174 일본인은 가끔 “나는 기리 때문에 기(義)를 지킬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또는 기리의 규칙은 이웃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본인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자발적으로 관대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요구치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 기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p178 기리에 몰리는 인간은 때때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커진 부채의 변제를 강요당한다.
* 제8장 오명을 씻는다
p179 이름名에 대한 기리義理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에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p183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스토이시즘, 즉 자제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이다.
p184 이름에 대한 기리는 또한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이 기를 잃게 되면 그는 스스로 존경할 권리를 잃는다.
p187 모든 종류의 직업상 채무에도 이름에 대한 기리가 수반된다. 특별한 사정에 의하여 누군가가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일본인은 때때로 엄청난 요구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해-화재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지만-모든 교실에 걸려 있는 천황의 사진이 타 버렸다는 이유만으로 자살한 교장이 많이 있다. 이 사진을 구해내기 위하여 불타는 학교 건물로 뛰어들다 타 죽은 교사들도 많다. 이들은 죽음으로써 그들이 이름에 대한 기리와 천황에 대한 주 忠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증명하였던 것이다.
p187 전문가로서의 이름에 대한 기리는 일본에선 대단히 엄격한 것이지만, 반드시 그것은 미국인이 고도의 전문적 능력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유지될 필요는 없다.
p189 우리는 경쟁을 '좋은 일'로 생각하고 크게 의지한다. 심리 테스트는 경쟁이 우리를 자극시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극이 있는 경우는 작업 능력을 향상시킨다. 우리는 혼자서 일을 할 때에는, 경쟁자가 있는 경우만큼의 성적을 올릴 수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테스트 결과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p191 일본인은 예부터 늘 무엇인가 교묘한 방법을 궁리하여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려 하였다.
p195 일본인은 분명히 예의바른 국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은 비방에 대한 그들의 민감성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인은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욕을 하곤 한다. 그것은 일종의 유희 같은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일본인이 왜 아무것도 아닌 말을 그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p199 일본인은, 사람이란 스스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모욕받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당자로부터 나오는 것’뿐이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윤리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p206 근대에는 자살은 죽음의 선택이다. 사람은 때때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대신 폭력을 자기 자신에게 행한다. 봉건 시대에는 용기와 결단의 최후 표명이었던 자살 행위가 오늘날은 스스로 선택한 자기 파멸이 되었다.
p206-207 승리를 자신의 편으로 이끌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쓰여지는 자살-이것은 봉건 시대뿐 아니라 현대에도 행해지는데-까지도 이상과 같은 방향으로 변해 왔다.
p215-216 일본인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존경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보답이 된다. 그래서 기리를 모르는 인간은 아직도 비열한 놈이 된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경명을 받고 추방된다.
* 제9장 인정의 세계
p217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p218 미국인은 쾌락을 일부러 배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이 관능적 쾌락에 빠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별로 배울 필요가 없는 이미 알고 있는 유혹을 극복하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쾌락을 의무와 마찬가지로 배운다.
p218 일본인은 육체적인 쾌락을 일부러 함양한 후에, 엄숙한 생활 양식에서는 쾌락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을 제정해 인생을 곤란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나서 쾌락의 맛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p218일본인이 가장 즐기는 소박한 육체적 쾌락은 온욕溫浴이다.
p223 일본인의 생각에 따르면 먹고 싶은 것을 참는 단식은 얼마나 달 단련이 되어있는가를 아는 특별한 감별법이다.
p225 일본인들은 아내에 속한 영역과 성적 향락을 위한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한다.
p226 일본인은 미국인처럼 연애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이상을 내걸지 않는다. 우리는 연애를 인정하여 그것이 배우자 선택의 기초가 된다. ‘연애하고 있다’는 것이 dfl에게는 가장 훌륭한 결혼의 이유가 된다.
p226 일본인은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갖는다. 배우자의 선택에 즈음하여 청년은 부모의 선택에 따라 맹목적으로 결혼한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매우 완고한 형식을 지켜야 한다. 확목한 가정 생활 속에서조차 아이들은 부모가 성애를 표현하는 행동을 볼 수 없다.
p227 중국에서 전통적 관습으로 굳어진 일부다처제는 전혀 일본적인 것이 아니다. 일본인은 가족적 의무와 ‘인정’을 공간적으로도 구별한다.
p233-234 일본에서는 인간의 성질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의 나쁜 반절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창문을 깨끗하게 하고, 경우에 따라 알맞은 행위를 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것이 ‘더럽혀졌다’하더라도, 더러움은 용이하게 제거되며, 인간의 본질인 선이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p234 악은 인간의 마음에 원해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p235 일본인 관중에게는 화면에 나타나는 인물이 모두 전력을 다해 은혜를 갚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 제10장 덕의 딜레마
p239 일본인의 인생관은 그들의 주忠, 고孝, 기리義理, 진仁 , 인정人情 등의 표현에 나타나 있는 대로이다. 그들은 인간의 의무의 전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명확하게 구별된 몇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p240 어떤 사람이 이기적이라든지 불친절하다든지 하고 비난하는 대신에 일본인은 그 사람이 위반한 법도의 특정 영역을 명시한다. 그들은 지상 명령이나 황금률에 호소하지 않는다.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은 그 행동이 나타나는 세계와 상대적이다.
p240 우리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그 인품에 맞게 행동한다.
p242 서구인은 일본인이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도 하나의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가능성은 우리의 경험에는 없다.
p242 서구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일본인이 생활을 구분하고 있는 '세계' 속에는 '악의 세계'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나쁜 행동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생을 선의 힘과 악의 힘이 싸우는 무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p243 각자의 영혼은, 원래는 새 칼과 마찬가지로 덕으로 빛난다. 다만, 그것을 갈지 않고 있으면 녹이 슬게 된다. 그들이 곧잘 말하는 '자기 자신이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칼과 마찬가지로 녹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하더라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 번 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p255 일본인은 각기 자신의 생활, 혹은 자기가 알고 잇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만일 의무의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
p261 근대 일본인은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 가지 덕목을 들 때는 성실을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p266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하여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는 열의이다.
p269 일본에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항상 스스로가 주의 깊은 경기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다.
p272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도 수치의 중대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p273 '수치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몰론, 신에 대해서조차도 고백한다는 습관은 없다.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은 있으나 속죄 의식은 없다.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하여 선행을 행하는데 비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하여 선행을 한다.
p275 일본인이 생활에서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행동에 해단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p278 한번 직접 대지에 옮겨 심어진 분재 소나무는, 절대로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은 이미 도저히 저 일본 정원의 장식이 될 수는 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옛날의 요구에 응할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첨단적인 형태로 일본인의 덕의 딜레마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 제11장 자기 수양
p279 어떤 문화의 자기 훈련은 항상 다른 나라에서 온 관찰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p280 미국은 자기 훈련을 위한 특별한 전통적 방법이 비교적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p281 그들의 자기 훈련 개념은 능력을 주는 것과 그 이상의 것을 주는 것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이상의 것;을 나는 숙달이라 부르기로 한다.
p283 미국인에게는 자기 희생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p286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구어 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물론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p291 무슨 일을 하거나 어차피 부처가 되는 것이라면 사람은 굳이 한평생 육체를 괴롭히고, 절대적 정지 停止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대립되는 교의이다.
p302 고안公案의 의의는 그것이 일본인이 진리의 탐구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점에 잇다. 고안은 '문을 두드리는 벽돌'이라고 불리고 있다. '문'은 눈앞에 있는 수단만으로 과연 충분할까 하고 지레 걱정을 하고, 자기의 행동을 혹은 칭찬하고 혹은 비난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감시의 눈을 번쩍이고 있다고 망상하는, 어리석고 우매한 인간성의 주위에 둘러쳐진 벽에 붙어 있다. 이 벽은 모든 일본인이 대단히 절실하게 느끼는 하치 恥(치욕)의 벽이다.
p307 소양인과 동양인의 심리적 차이를 실로 명료하게 엿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인이 양심을 갖지 않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행에 당연히 수반되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된 인간을 말하는 것인 데 비하여, 일본이 동일한 표현(무심, 무념무상 등)을 사용할 대에는 이미 굳어지지 않고 방해받지 않게 된 인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악인의 뜻이고 일본에서는 선인 즉 수행을 쌓은 인간,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p308 일본인의 자기 훈련의 철학은 일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개개의 일본인의 생활 체험에서 떼어 내어 고찰하는 한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다. 그들이 '보는 나'로 귀속시키고 있는 이 '하지'의 의식이 얼마나 무겁게 일본인을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지만, 그들의 정신 통어 철학의 참된 의미는 일본의 어린아이 양육법을 설명하지 않는 한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 제12장 어린 아이는 배운다
p309 일본의 아이는 사려깊은 서구인이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름 방식으로 양육되고 있다.
p310 일본의 생활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과 정반대로 되어있다. 그것은 저변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최저선에 달한다.
p311-312 일본인이 아이를 원하는 것은 단지 정서적인 만족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혈통을 잇는 데 있다. 만일 혈통이 끊긴다면 그들은 인생의 실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본 남자는 아들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매일 불단의 위패 앞에서 명복을 빌어 줄 자식을 필요로 한다.
p333 아이들은 8,9세가 되면 가족으로부터 정말로 배척받는 수가 있다. 교사가 아이가 불복종 또는 불손한 태도를 취한 것을 보고하고 품행에 낙제점을 주면 가족은 아이를 따돌린다. 상점주인으로부터 무언가 장난을 쳤다고 비난을 받으면 그것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 된다.
p335-336 계집아이의 유년기는 사내아이의 생활에서 배척됨으로써 끝난다. 앞으로 몇 년의 세월 동안 그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오로지 ‘자중에 자중을 거듭하는’ 것 말고는 없다.
p339 일본의 소년도 이런 방법으로 원한을 풀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장 고나심을 갖는 것은 직접적인 복수이다. 괴롭힘을 당한 인간은 괴롭힌 인간에게 복수를 할 때야만 '시원한 기분'을 느낀다.
p340 여자아이들이 존중해야 할 처세술은 공공연히 자기 주장을 할 특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갓난아이 적이나 유년 시절에는 여자아이들도 사내아이와 함게 일본 어린아이의 특권적 생활을 즐길 수 있다.
p348 종래 모든 서구인이 묘사한 일본인의 성격의 모순은, 일본인의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것은 일본인 인생관에 그 어떤 측면도 무시할 수가 없는 이원성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해서 그 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도,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 때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래에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천국을 과거에 가지고 있다. 그들이 인간은 본디 선하고 신들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비할 바 없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유년 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p353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의 행동적 모순은 그들의 어린 시절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으로 덧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속에는 그들이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작은 신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p356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많은 요구를 한다.
p356-357 스스로를 존중하는(자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표 삼아 그 진로는 정하며, 세상 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버린다. 이러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고 한없이 신중하고도 훌륭한 인간이다. 이러한 사람이야 말로 자기 가정에, 자기 마을에, 또한 자기 나라에 명예를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여 빚어지는 긴장은 대단히 큰 것으로서,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로 만들며, 세계의 일대 강국으로 만드는, 그러한 고상한 대망으로 나타난다.
p360그들이 몸에서 나온 녹은 그들 자신이 처리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자기 책임의 태도이다 이 비유는 자신의 신체와 칼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칼을 찬 인간에게 칼이 녹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은 각자 자기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p360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p361 일본적인 의미에서 일본인은 여전히 자칫하면 녹이 술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
*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p371 일본이 평화 국가로 출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 방침에 대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일본인은 양자택일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다.
p383 물론 그들은 확실하게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지만, 일본인은 누구나 그들이 일본에서의 ‘부끄러움(하지 치(恥))’의 역할에 의문을 품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국민 가운데에 새로운 자유가, 즉 ‘세상’의 비난과 추방을 두려워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자라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해설: 죄의 문화와 수치 문화 - 이광규
p386 인류학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한다. 인류학은 행동과학(behavior science)인 것이다. 다.
p391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과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일지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394 이처럼 개별적인 것에 치중한 대표적인 예가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과 <국화와 칼>이다. <문화의 패턴>에서는 민족마다 다른 개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p394 루스 베네딕트의 또 다른 유명한 저작이 바로 <국화와 칼>이다. 이것은 미 국무성에서 베네딕트에게 요청을 해 쓰여지게 되었다. 당시 일본과 전쟁중이던 미국은 미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을 연구하고자 했다. <국화와 칼>은 일본인의 독특한 행동, 가치관을 그들의 입장에서 올바로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p395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한다. 처음 <국화와 칼>을 읽으면 일본이 우리와 아주 비숫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고 두 번 읽었을 때쯤에야 비로소 일본과 우리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396 비유럽인 일본과 전쟁을 하면서 일본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 <국화와 칼>의 집필 배경이 되었다.
p396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을 통해 일본 사람들의 이중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p397 베네딕트를 계기로 인류학의 연구 대상이 대중 문화, 잡지, 신문 영화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것도 베네딕트가 남긴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p397 베네딕트가 충과 효, 의리, 은혜 사상을 밝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양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이 은혜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p398 같은 동양권의 일본은 우리와 많은 것이 같으면서도 다른 점 또한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 사람들은 충과 효를 같은 의식선상에 둔다는 점이다. 충과 효가 대치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일본인들은 둘 중에 충을 선택하지만, 우리는 효를 선택한다.
p399 일본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토착 신앙을 기초로 신토이즘을 만들고, 서양에서 교육 제도를 받아들여 교육칙령을 만들었고, 그 교육칙령을 쓴 사람이 <해석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퇴계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바로 메이지유신 시대의 교육헌장이다. 우리는 그 백년 후에 이퇴계 선생 사상 근처에도 가지 못한 국적 불명의 교육헌장을 만든다.
p399 일본은 거기서부터 우리와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일본보다 백년 늦게 같은 유신이라는 말을 썼지만 우리의 토착 신앙을 다 때려부수었고, 한문권에서 이탈하고, 차(茶)의 세계에서 이탈한다.
p400 근래에는 중국의 홍차와 일본의 녹차 사이에 패권 쟁탈전이 한창이다. 일본의 녹차는 한국에서 불교와 함께 가져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를 억압하면서 차도 억압했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커피를 제일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다. 이제 우리는 문화의 고아가 되어 버렸다.
p400 서양 사람들에게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양심이다. 양심이 절대 진리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동양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행동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이목이다.
p401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의 일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일본의 종합적인 면을 파악하는 데는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서양인의 한계일 것이다.
p402 근대 사회와 봉건 사회의 차이점은 봉건 사회 하에서는 주어진 신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즉 생득 지위였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노력 여하에 따라 지위를 성취할 수 있는, 즉 성취지위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생득 지위가 우세하고 그 대표적인 예가 재벌들이다.
p403 우리는 일본과 숙명적인 관계이다. 다라서 일본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일본말을 아는 것과 일본 문화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일본 문화에 대해 많이 알고 또한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우리가 일본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저작임에 분명하다.
<내가 저자라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방문하지 않고 이 글을 썼다는 것에 놀랐다. 요즘처럼 다양한 미디어 자료도 부족하고 인터넷을 통한 교류가 전혀 없던 시절에 미국에서 얻은 일본에 대한 자료만으로 이런 정도를 일본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자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제목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중적 특성을 확실하게 꼬집는 “국화와 칼”이라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저자는 책을 통하여 일본인의 문화와 가치관 전반을 분석하는 것을 통해서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며 동양문화 속에서 또 다른 일본의 문화와 미국의 문화를 비교하고 있다. 50년이 훌쩍 넘은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동양과 서양, 일본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확연하게 정리하여 준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저자가 분석한 일본의 문화적 특징을 접하면서 같은 동양문화의 일원으로 참으로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양인인 저자가 충, 효, 의리, 은혜 등의 동양적 가치관을 분석해내고 그것을 서양인의 입장이 아니라 동양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같은 동양인인 나도 일본을 대할 때 동양의 문화를 공유하는 동양인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이성인 아닌 감정이 개입된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제 감정적인 관점은 더 이상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문화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벌써 많은 이들이 일본문화를 분석한 자료를 쏟아내 놓고 있다. 하지만 베네딕트만큼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한 책은 드물다. 물론 그녀가 서양인으로서 일본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제한 적인 상황에서 일본에 대한 분석이 부족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까지 서양인과는 다른 동양속의 일본인만의 독특한 문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해설’부분의 이광규 교수의 글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일본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를 비교해 놓은 부분을 보면서 같은 동양 문화이면서 확연하게 다른 서로의 특질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앞으로의 일본과의 교류에 활용하여야 함은 자명한 일이고 이미 그러한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의 문화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원자폭탄의 위력이 크겠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일본의 차이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것을 연구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신적인 승리를 예고한 것일지 모를 일이다. 일본을 <국화와 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뚝배기와 냄비> 정도의 제목으로 한국의 문화를 분석해보는 것을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면서도 한문적인 것에서 비롯된 동양문화의 정신과 풍습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반면, 우리는 동양적인 것은 구식이라 재미없고 현대를 살아가는데 필요없는 것이고 서양적인 것은 신식이라서 배워야하고 수용해야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잃은 세계화를 진행 중이다. 이렇게 우리의 문화를 홀대하고 우리 스스로도 우리 것을 사랑하지 못한 대가를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끼어 우리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현실을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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