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1년 1월 7일 20시 41분 등록

북리뷰 66 :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 김용규

책: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김용규지음. 이론과 실천. 2004.

*** 저자에 대하여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책은 철학과 인문학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어, 현대인의 삶과 인문학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지식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과 『다니』는 철학과 사회 사상, 과학지식, 진화론, 인류학 등 다양한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소설은 그에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 외에도 독특하고 다양한 맛의 지식을 철학과 함께 버무려낸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을 빌려 철학의 이해를 이끈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키우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자기계발 팩션『기적의 양피지 캅베드』등의 저서가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Arsenyevich Tarkovsky) 영화감독

출생-사망
1932년 4월 4일 (러시아) - 1986년 12월 28일

*** 마음을 무찔러든 글귀

책을 펴내며

5. 영화 <매트릭스>에 관한 글을 쓴 킹스대학 철학과 윌리엄 어윈 교수는 “어째서 매트릭스와 같은 대중문화에 대해 글을 쓰는가?” 라는 질문에 “그곳에 사람들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광장에 나간 바로 그 이유이다.

영화는 본래부터 철학적이다. 영화가 어떤식으로든 인간의 삶과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또 그럼으로써 다시 인간의 삶과 세계를 새롭게 구성해가는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영화는 철학적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고대로부터 철학에게 주어진 주요 업무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다양성 속에서 또한 영속하는 시간 속에서 부단히 명멸하는 환영들을 관통하며 불변하는 ‘그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데아를 상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삶과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리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주장하는 바로는,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타르코프스키는 “감독은 일종의 철학자가 되었을 때만 비로소 예술가가 되며, 그의 영화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일’이 곧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想起, anamnesis )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 영화, 특히 소위 예술영화는 단순히 우리의 삶과 세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그 숱한 환영들 속에 불변하는 이데아들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화작가들은 작품의 주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눈부시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시각적, 청각적 지각( 앞으로는 후각, 촉각적 지각)에까지 확장된 자기 자신의 언어와 미장센, 몽타쥬 같은 고유한 화법들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이데아들을 매번 나름대로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 이데아를 상기할 수 있는 ‘통각의 심화’를 가져다준다. 그 결과 관객들은 마치 우리가 둥근 사물을 보고 원의 이데아를 떠올리듯이 사실인즉 자신도 모르게 ‘영화를 통해 철학을 보기’ 또는 ‘철학을 통해 영화를 읽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는 언제나 철학을 보여주고 철학은 항상 영화를 읽어 준다. 따라서 철학과 영화 사이의 관계는 마땅히 ‘영화 읽기- 철학 보기’ 라는 말로 표현되어야 정당하다.

7. 벤야민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영화는 우리 주변 사물들을 클로즈업하고, 익숙한 사물의 내부사항에 초점을 맞추고 카메라의 정밀한 안내를 따라 진부한 주위환경을 탐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성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또한 우리가 예상치 못한 광대한 활동공간을 보장해준다. ...술집과 메트로폴리스의 거리, 사무실과 가구를 갖춘 방, 기차역과 공장 등의 장소들은 생겨남과 동시에 우리를 꼼짝없이 가두어놓았다. 그러다 영화가 등장했다. 이것이 1/10 초의 속도로 폭파되는 다이너마이트로 감옥 그 자체인 이 세계를 산산조각 냈으며,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사방에 흩어진 잔해와 파편들 사이에서 여유자적 모험을 떠난다.”

8. 이 모험의 끝에는 언제나 삶의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타르코프스키 작품들을 보고 읽는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당신도 이 즐겁고 여유 자적한 모험에 동참하지 않겠는가?

2004년 봄, 청파동에서
                           김용규

* <안드레이 루블료프>

하르트만은 “충분한 근거, 또는 객관적인 확실성을 가진 눈뜬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 인격의 모험이 없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관건이다.” 라고 했다.

같은 말을 키에르케고르는 “부조리의 힘으로 믿었다” 라고 했다. 우리는 15세기 러시아 상화상(Icon)화가인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생애를 다룬 이 작품에서 인간에게 신념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본다.

추락과 파국으로 곤두박질치는 서막

75. 영화 < 안드레이 류블로프 Andrei Rublyev> 는 먼저 추락과 파국에서 시작한다. 한 사나이가 쪽배를 서둘러 저어 강을 건너와서 피륙과 천으로 짜 만든 기구를 조립하여 그것을 타고 서둘러 하는로 오른다. 그리고 그는 끝없는 벌판을 가로질러 반짝이며 굽이쳐 흐르는 강물들, 그 위를 지나는 작은 배들, 돌로 지은 성당, 작지만 아름다운 그 땅의 마을들을 굽어보고, 뛰노는 말과 바람의 자유, 해탈, 행복을 맛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을 건넌 기구가 펄에 처박히며 모든 것이 끝난다.

76. 알고 보면, 그것은 실낙원에서의 추락과 파국! 그리고 그 사건이후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꿈들과 더불어 일어난 알려지지 않거나 잊혀진 수많은 인간적 파국과 절망을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극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의 전체, 특히 전반부를 지배하는 메타포이다.

78.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오직 추락과 파국이었다. “그의 추락, 땅위에서의 박살, 그리고 죽음, 이것이 구체적 사건이다. 하나의 인간적 파국이다.”

여기서 “예술은 사실의 반영이 아니고 진실의 창조”라는 타르코프스키가 가진 예술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80.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추락과 파국을 보여줌으로써 수도원에서 속세로,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가는 것을 상징하는 이 서막은 , 마치 종소리가 흙에서 나와 바람 품에 안기듯이 삶의 비참함에서 예술의 숭고함으로, 현실에서 구원으로 다시금 상승하는 마지막 에피소드의 기반이자 짝이다. 추락해야 다시금 상승하지 않겠는가?

81. 타르코프스키가 파악한 성상화가 루블료프의 생애는 “잿더미 속에서 부활할 수 있기 위하여 실제적 현실의 삶 속에서 우선 일단 불태워질 수밖에 없었던” 불사조의 “미리 주어진 그것”이었다. 그는 천상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우선 지상으로 내려가야만 햇고, 숭고함에 이르기 위하여 속세의 비천함을 먼저 보아야 했으며 불후의 명작 <삼위일체>를 그리기 위해 일단 그림을 버려야만 했다.

83. “성화상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줍니다.”

84. 물론 성화상을 통한 계시로서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금욕과 명상이 요구되지만, 성화상은 ‘거룩한 모범’으로서, 다가올 세상의 거룩함의 예시로서 성찬예배와 금욕, 명상과 함께 동방교회 신앙생활의 핵심인 것이다.

88. 신학적으로 삼위일체설(trinitas)이란 삼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은 그 본질(서고 의지 행동)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인간과 세계를 다스리고 구원하기 위해 밖으로 나타난 바가 셋이라는 교리이다. 때문에 그 핵심은 신이 인간과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여 항상 그의 가정처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방정교에서 삼위일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성물, 곧 성당 내지 성화상들이 가진 특별한 의미가 발생한다. 그것은 신의 사랑이자 손수 보살핌이다. 즉 삼위일체라는 말이 붙은 성물들은 그 어떤 악한 세력이나 증오와 폭력이 더 이상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는 성스런 장소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89. 헨리 나우엔도 이같은 의미에서 “나는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위대한 러시아 성인 세르게이를 추모하기 위해 그1425년 그린 <삼위일체> 아이콘 만큼 ‘사랑의 집’을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 아이콘을 묵상하는 것이 나에게는 미움과 공포가 충만한 우리 세상에서 계속 몸 바쳐 투쟁하면서도 저 신적인 삶의 신비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해주는 길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진리란 체험을 통해서 사는 것, 그러므로 싸울 준비를 하라.

91. “진리란 체험을 통해 사는 것이지 배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싸울 준비를 하라!”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이 말이 루블료프의 묘비명이 되어야 한다고 타르코프스키는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는 ‘체험을 통한 진리의 획득’을 위해 루블료프를 속세로 내몰았던 것이다.

93. 러시아는 1240년 이후부터 몽고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1380년 돈 강 부근의 쿨리코보 벌판의 전투에서 타타르족의 ‘황금 기병대’를 격파하고 승리함으로써 루블료프가 살았던 15세기에는 몽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때이다. 때문에 이 기간은 한편으로는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과 전쟁 그리고 사회적 불안이 가득했던 암울한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재통일과 민족 재기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던 여명의 시기이기도 했다.

루블료프의 <삼위일체>성화상이 가진 사회적 의미와 함께 역사적 의미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의 성화상은 사회적으로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당시 사람들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주는 신적 사랑의 상징이었고, 역사적으로는 그리스풍의 성화상 기법을 탈피하여 러시아 고유의 기법을 개발하였다는 점에서 러시아 부흥의 문화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94.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서는 예술가란 시대의 산물이며 민중의 대변자이다.

97. 이러한 일들을 통해 루블료프는 인간의 더러운 탐욕, 끔찍한 살상, 예술품을 파괴하는 잔인성 등을 보면서 신과 그의 선함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게 된다.

수도사이자 성화상을 그리는 화가인 루블료프는 살인을 하고나서 스스로 완전히 황폐화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 그를 지탱해오던 모든 것은 무너졌다. 신, 인간, 예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그의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98. 그리고 그는 스승의 입을 통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리들의 죄를 통해 악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왔다네. 악과 싸운다는 것은 인간성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지. 신은 용서할 걸세. 그러나 스스로는 용서하지 말게나! 앞으로는 신의 용서와 자네 자신의 고뇌속에서 살아가게.”

이때부터 루블료프는 묵언에 들어간다. 이후 15년간이나 지속되는 그의 침묵은 그가 이제 더 이상 신성한 것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다시는 신성한 성화상들을 그릴 수 없다는 것, 그러한 그 자신이 무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고뇌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예술”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타르코프스키 예술관의 독특한 일면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예술가는 유일무이하게 자신의 창조적 의지를 결정해줄 수 있고 제어할 수 잇는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이를 외면해서도 안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예술가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 믿음이 없는 예술가는 마치 장님으로 태어난 화가와 같다. ”

신념 - 재가 된 불사조가 부활하는 법

101. 여섯 번째 에피소드(1412년)에서, 기근이 전국을 휩쓸자 카릴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오고 루블료프는 비침한 삶을 이어간다. 루블료프는 백치소녀를 데려다가 보호하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타타르 기마대가 지나가다 소녀에게 개밥으로 쓸 고기를 먹이는 등 그녀를 농락하다가 이내 데려가 버린다. 하지만 이제 모든 신념을 잃어버린 루블료프는 이 모든 광경을 그저 처참하게 바라만 볼 뿐 속수무책이다.

신념이란 믿음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에 근거한 믿음’이다. 개인적 신념이든, 정치적 신념이든, 도덕적 신념이든 그것의 일차적 근거는 ‘자신’이다.

102. 신념이라는 것은 종국 자기자신을 보증하며 자기가 장래에 취할 태도를 예정하며, 자기의 힘으로 능히 좌우할 수 있는 미래를 보증하며, 따라서 필경 주어진 순간을 넘어서 자신을 보증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힘을 말한다.

103. 그러므로 신념을 잃은 인간이란 자기 자신과 또한 그의 미래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 인간이다. 루블료프는 철저히 세속화됨으로써 신념을 잃었고, 그 결과 자기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게 된 인간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과 같은 예술과도 단절했고 인간의 마지막 보루인 언어마자도 스스로 단절한 루블료프의 삶을 성공적으로 구성했다. 이로써 서막에서 보여준 ‘추락과 파국’ 또는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다시 살기위한 ‘불사조의 죽음’을 철두철미하게 완성한 것이다.

104. 마지막 에피소드는 종 만드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종을 만드는 장인 니콜라이를 찾아 시골을 뒤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니콜라이를 비롯한 다른 장인들은 이미 죽고 , 니콜라이의 어린 아들인 보리스카만 살아남았다. 홀로 먹고 살 것이 막막한 이 소년은 오직 살기위해서 자신이 아버지의 종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리하여 1년여에 걸친 종 만드는 대역사가 소년의 지휘로 시작된다. 그러나 종 만드는 비법을 알 리가 전혀 없는 소년은 하루하루 날이 가고 종이 점점 완성되어감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106. 아브라함은 어린 아들을 나귀에 싣고 그를 바칠 모리아 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의 고뇌는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들끓었고 빛나는 별빛 아래서 얼어붙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평생을 의지하고 믿어온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토록 오래 살아온 질기고 모진 자신의 목숨을 증오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움에 온 몸과 온 영혼이 송두리째 떨렸을 것이다.

107.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노인을 짓누르던 공포와 전율이야말로 종이 점점 완성되어 갈수록 그만큼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소년의 그것과 다를 바 전혀 없다.

루블료프는 이 소년의 절대적 고독과 두려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바라본다. 마침내 종이 완성되고 그 타종을 위해 대공을 비롯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자 소년의 두려움은 절대적 정점에 다다라 그는 탈진하여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 순간 종은 신기하게도 맑고 우렁차게 울렸고 군중들은 환호한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타종이 끝나고 신명난 군중들이 물러난 자리, 소년이 진흙 위에 주저앉아 그제야 온 몸으로 전율하며 울고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어요. 그 늙은이는 비밀을 안고 무덤으로 들어갔어요.” 루블료프는 소년을 껴안는다. 그리고 15년간의 침묵을 드디어 깨뜨리고 소년을 감싸 안는다. “가자, 가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너는 종을 만들자.”

108. 보지 않고도 믿는다! 여기에 “신념의 신비”가 있다. 그리고 루블료프가 종장인 소년으로부터 배운 것은 바로 이것이다.

109. 소년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종 만드는 비법에 대해 들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념을 가졌다. 비록 그것이 상황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지만, 그래서 목숨을 건 모험이었지만, 실로 죽을 것 같은 공포와 전율이 있었지만 소년은 오직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 하나에 그의 모든 것을 맡겼다. 이런 의미에서 신념, 곧 “보지 않고 믿는”신념은 그 자체 일종의 신앙이다.

110. 이 기묘한 이야기는 삶에 절망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들에게 -절대 절명의 순간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113. 땅에서 만들어져 하늘로 올라가는 소년의 종은 ‘근거없는 신념’ 또는 ‘눈먼 믿음’이 이루어낸 위대한 기적이었다. 루블료프는 이 기적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

보았다. 세속적인 것들의 처참함 때문에 성스러운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그의 눈으로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신념이 인간과 세계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알았다. 신념으로 오직 신념만으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그는 드디어 깨달았던 것이다.

이에 화면은 그 칙칙하고 어둡던 세계를 벗어나 순간 색채로 변하며, 숯덩이들이 타다 남은 성화상 조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잿더미 속에서 부활할 수 있기 위하여 실제적 현실의 삶 속에서 우선 일단 불태워질 수밖에 없었던” 한 불사조의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비상’이 시작된 것이다.

114. 성당, 당나귀, 그리스도 환시, 제자들이 뜰에 모여있는 장면, 땅바닥에 엎드린 막달레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둘기들, 마리아와 동물들이 함께 있는 구유, 그리고 마침내 떠오르는 파랑과 노랑과 연홍의 위대한 <삼위일체 성화상>!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다! 뒤이어 따라오는 - 타르코프스키가 그리도 사랑하던 - 초원에서 빗속을 거침없이 달리는 말의 연상, 곧 자유, 평화, 그리고 삶의 기쁨!

타르코프스키는 솔제니친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래서 솔제니친은 이것을 보았을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보았다.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자유와 평화 또한 삶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가를!

“눈뜬” 믿음 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 인격의 모험이 없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관건이다. N. 하르트만.


*** 내가 만일 저자라면

우선 이 책의 목차와 구성을 살펴보자.

1. 이반의 어린 시절
 - 브르통의 '초현실'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르쿠제의 '유토피아'

사르트르는 이 작품을 사회주의적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 정당성은 단지 1929년 브르통이 발표한 '초현실주의 제2선언'에 입각해서 말해질 때에만 그리고 동시에 마르쿠제가 주장한 유토피아론과의 연관 속에서만 보장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해석하며 브르통의 '초현실'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르쿠제의 '유토피아'를 본다.
 
2. 안드레이 루블료프
- 하르트만의 '신념'으로,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으로

하르트만은 "충분한 근거, 또는 객관적인 확실성을 가진 눈뜬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인격의 모험이 없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관건이다"라고 했다. 같은 말을 키에르케고르는 "부조리의 힘으로 믿었다"라고 했다. 우리는 15세기 러시아 성화상(Icon)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생애를 다룬 이 작품에서 인간에게 신념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본다.

3. 솔라리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양심

하이데거는 양심을 불안 속에서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본래적 자기에로 돌아가라고 '탓하는 부름'이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름의 소리는 오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안에서만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솔라리스>를 해석하면서 인간에게 시간이 무엇이고, 양심이 무엇인지를 본다. 나아가 스스로 이러한 양심의 부름을 듣길 원한다.

4. 거울
 -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싸우는 라캉의 '거울 이미지'

인간의 욕망이란 상대의 인정을 받기 위한 욕망이라는 사실 때문에, 라캉의 '거울 이미지'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손잡는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에서는 이 둘은 저항하고 투쟁한다. 타르코프스키 작품 중 가장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자전적 작품을 해석하며 우리는 오히려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듣는다. "행복하려고 욕망하는 자는 바로 그것을 위해 행복하고자 하는 그 욕망을 초극해야 한다"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5. 잡입자
- 플로티누스의 '비행'을 위한 칸트의 '도덕'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인간들 가운데 신을 닮은 행복한 자의 삶이란 낯설고 세속적인 것들과의 부단히 이별하는 것이며, 세속적 쾌락을 초월하는 것이고 단독자의 단독자로의 비행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수확에 대한 기대 없이도 씨를 뿌리라는 칸트의 도덕이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 도덕적이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잠입자>를 통해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전부인가? 전부이다.

이 책 이전에 <영화관 옆 철학카페>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한결같이 모든 책에 똑같이 독일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것과 피아니스트인 부인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외동딸을 위해 책을 쓴다는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청파동에서 글을 쓰고 글을 쓴 시간만을 기록해두고 있다. 별다른 공식적인 그의 채널에 접속을 할 기회가 그동안은 주어지지 않았다. 스피노자 읽느라 끙끙대는 내게 선생님은 저자의 신간 <서양문명을 읽는코드, 신>이란 책을 먼저 읽기를 권하셨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덕에 이 멋진 영화를 마음으로 보았다. 아직 영화를 구해볼 수는 없었으니 이미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인생이며 곧 철학이라는 것을.

저자 김용규가 철학과 신학을 배경으로 책을 쓰고 이야기하는 방법은 독특하다. 그것은 디아트리베 ( DIATRIBE) 라는 수사법으로 사도 바울이 글을 쓰거나 설교를 할 때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다. 즉 “기분풀이‘ 내지 ’환담‘이라는 뜻을 가진 디아트리베는 심오한 변론이나 사상도 전문용어를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방법을 회피한다. 디아트리베는 비속하지만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그 내용을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전개하는 수사법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철학과 신학이 마치 소설처럼 술술 읽히고 이해가 된다. 적어도 그가 설명을 해주는 범위 안에서는. 이 책이 마치 그와 카페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기분풀이 수다를 떠는 것과 같지 않느냐고 그는 다시 내게 물어온다. 그렇다. 갑자기 그가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고 뭐든지 물어보면 그가 어렵게 배워 익힌 것을 모두 다 매우 친절하게 가르쳐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어려운 신에 관한 얘기로 그를 만나보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영화로 시작하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는 “꿩먹고 알먹고” 신나는 시간이다. 나는 영화 잡지 “시네 21”의 애독자이다. 창간호부터 오늘까지 계속 정기구독 해오고 있다. 물론 내 이름으로 주문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집으로 매주 배달된다. 이 잡지를 통해서 이진경, 진중권, 강유원 같은 매우 개성있는 책을 쓰는 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 잡지를 아주 조금만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대체로 내게는 아직 이 영화라는 종합예술을 이해하는 수준이   어린아이의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는듯,  나름 문화적 콤플렉스를 겪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영화 세미나”에도 나가보고, 나름 영화책을 많이 집어들어 보고 영화제에도 가보고 국제 여성영화제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언제나 난 정말 무식하고 예술에 대한 이해에는 멀어도 한참 먼 곳에 서있구나..라는 통한만 남아 씁쓸히 되돌아오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 미술사 강좌를 하나 들었다. 그리고 도상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해졌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직관에 대한 감각을 좀 키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면무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오는 찰나에 만나게 된 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참 시의적절한 만남이다. 잠시, ‘작가 김용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 빼어난 예술가의 생애가 부각되었다.

이 책은 사실, “철학을 위한 주제별 영화 강의”의 결과물이다. 먼저 2002년에 <영화관 옆 철학카페>라는 책이 나왔고 그후 2004년에 다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만을 뽑아 이 책을 간행했다. 물론 새로운 작품들이 추가되었다. 나는 “솔라리스”라는 영화의 시간 개념이 궁금했지만 먼저 이 “루불료프”를 북리뷰한다. 나의 신앙과 관련된 오랜 기억이 이 영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하는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집 대문 앞에는 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라는 아이콘(성상화)이 있다. 이 그림은 구약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천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의 집을 방문한 세 천사를 극진히 대접한다. 그 손님들은 바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느님이었다. 나는 이 그림을 “나그네를 잘 대접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하며 집 의 문 앞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과 헨리 뉴엔이 이콘을 묵상한 소책자가 있다. 결국 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대한 김용규의 탁월한 해석을 읽고나니 이제야 그 퍼즐이 온전하게 맞추어진 것 같다.

그 깨달음이 너무나 반가워서 우선 이 대목만 함께 나눈다. 공부라는 것이 정말 흙에 묻힌 감자 넝쿨을 걷어내는 것 같다. 하나를 알게되면 그 줄기에 이어진 감자 열매를 땅의 사과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게되니 그 수확이 즐거워 또 책에 코를 파묻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책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삼독을 해야 하겠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또 나를 읽어내야지. 이 세 번째 과정이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구비구비 어려운 고비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즐거운 시작을 하며 나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는 이 모든 원망은 나를 이 책으로 인도한 우리 선생님 탓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잠시 떠올랐다. 우히힛~

그러나 그 문제는 그때 생각하기로 하고 천재들의 퍼레이드에 속하는 영화이야기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좋은 영화카페의 이야기꾼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이 땅의 사과인 감자를 최고로 맛잇게 요리해 보여주고 싶은 소망하나를 다시 마음에 품게 되었으니 살아있는 철학 만세! 영화 만세! 인생 만세! .......만세 삼창으로 이상 끝.

IP *.67.223.154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11.01.08 01:00:20 *.160.33.89
좌샘은 물귀신이군요.  그러나 맞는 말이군요.  선생은 잘못 가르친 것에 책임이 있고, 잘못 추천한 책에도 책임이 있지요.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 울면 웃어줘야지.   그건 선생의 크나 큰 기쁨이니. 

좌샘의 두번째 책은  book reiew 모음 이면 좋겠군요.    이미 쓰여졌네.
그렇지요.  선생의 신념은  근거없이 제자를 믿는 것이지요.  수확에 대한 기대없이 씨를 뿌리는듯이.  
그러나 나는 그런 신념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해요.  그래서 이렇게 외치며 책을 못낸 제자들을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  아고라로 가라. "  
"자기 믿음을 가져라.  그러면 듣게할 수 있다"
어떻게 ?  그리고 가장 그럴 듯한 말.  헤세의 패러디.
"진리란  체험을 통해 사는 것이지,  배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삶을 통해 말하라. 그것이 작가다"   
프로필 이미지
범해
2011.01.08 23:55:18 *.67.223.154
우리 선생님은 범해가 쓴 첫 책이 많이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연구원 선대로 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북리뷰 100 과 칼럼 100을 채우면 책은 저절로 따라나온다기에.....
우직한 범해는  전설의 고향에 나와  열연을 하고 있었지요.  물귀신이 다  되도록 ~ 우히힛~          

연구원 2년차,  벼랑 끝에서 스승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습니다. (회초리는 싫어용)
" 책 빨리  써서 사람이 되거라. " 

간절함이 하늘에 닿아  책이 되는 마법을  기대합니다.
부지깽이가  마술 지팡이로 보이는 그 순간  ...물귀신은 사람이 되어있겠지용 ~
영원한 마법사 우리의 부지깽이 선생님 ! 
눈먼 믿음으로 열심히 써볼게요. 책 다 쓸 때까지..... 변함없이.... 속까지  좀 다 뒤집어주세용~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북리뷰 66 :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 김용규 [2] 범해 좌경숙 2011.01.07 7933
131 마음을 비추는 거울/ 신봉승 박혜홍 2019.02.24 7941
130 #48. 글로벌 소프트웨어를 말하다 - 지혜편 불씨 2019.03.03 7971
129 [북리뷰 010] 이순신 <난중일기> file [4] 김경인 2011.06.05 8017
128 학문의 즐거움 - 히로나카 헤이스케 著 - 허성일 2004.10.12 8026
127 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박혜홍 2019.03.03 8032
126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 프리초프 카프라> [1] 김연주 2010.11.29 8067
125 [18]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 폴 D.티저와 바버라 배런- 티저 [11] 써니 2007.07.28 8112
124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file [3] 장재용 2012.05.15 8113
123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_존브래드쇼 [2] 양갱 2012.07.03 8158
122 9월 1주차_융_기억 꿈 사상 (9기 유형선) file 유형선 2013.09.02 8234
121 아직도 가야 할 길-스캇펙(完) [5] [2] 오병곤 2005.10.04 8237
120 [북리뷰 015]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file 김경인 2011.07.11 8244
119 즐거운 지식 - 니체 file [10] 학이시습 2012.10.22 8272
118 [2-19] 국립자유경제고등학교 세실고 - 양혜석,타파리 file [2] 한정화 2013.11.06 8289
117 파우스트-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정서웅 옮김 file [4] 학이시습 2012.06.18 8325
116 53. 비폭력 대화 – 마셜 B. 로젠버그 file [1] [1] 미나 2012.05.01 8373
115 인연 - 피천득 수필집 [1] 장우석 2004.10.14 8398
114 북리뷰 67 :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 - 헨리 나웬 [1] [2] 범해 좌경숙 2011.01.11 8441
113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손원일(plus3h) 2004.10.11 8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