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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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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4일 11시 05분 등록
[강의] 

(신영복, 돌베개, 2004)


* 저자에 대하여


  ‘우리의 삶이란 흔히 여행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일생 동안 가장 먼 여행은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성과 감성의 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지식과 품성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긴 여정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발은 삶의 현장이며, 땅이며, 숲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여정이란 결국 개인으로서의 완성을 넘어 숲으로 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완성이 명목이나 낙락장송이 아니라 수많은 나무가 함께 살아가는 숲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역경을 견디는 방법은 처음의 마음을 읽지 않는 것이며,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처음’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신영복, <처음처럼> 중에서 -

  ‘처음’이란 누구나 설렌다. 오죽하면 ‘처음처럼’ 소주도 나왔을까. 초등학교 입학을 맞아 미리부터 가방을 둘러메고 까불대는 우리 둘째처럼 솔직하게 표현하진 못해도 새해, 새 출발은 무덤덤한 나도 설레게 만든다. 그래서 한비야님의 ‘새’자가 붙은 모든 순간에 새롭게, 다시 한 번 시작하면 된다는 말에 그렇게도 공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처음’에 이렇게 깊은 뜻을 담을 수도 있었다. 똑같은 1년을 10번 보내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늘려가며 보내는 10년이 필요한 것처럼. 수많은 처음이란, 단순한 ‘리-셋’이 아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내가 매일, 매 순간 나의 현재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초발심을 잃지 않는 것, 끝없이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처음’의 마음일 것이고 이것은 쉬지 않고 나 자신을 갈고 닦는 성찰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리라.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1963~65년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5~66년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1966~68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했다.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을 강의해 왔으며, 1998년 3월 13일 사면 복권되었고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명되었다. 2006년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옥중 서신을 엮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1995년 11월부터 96년 8월까지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엮은 우리나라 기행수필집 <나무야 나무야>(1996), 1997년 1년 동안 중앙일보에 연재된 세계역사기행문 <더불어 숲>(199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원본인 엽서를 그대로 복원해 낸 <신영복의 엽서>(1993),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2007), 청소년을 위한 수필집 <신영복>(2003), 육사교관시절 만났던 어린 친구들과의 추억을 담은 에세이<청구회 추억>(2008) 등이 있으며, 역서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 <사람아 아! 사람아>, <노신전>(공역), <중곡역대시가선집>(공역) 등이 있다.

  그 외 신영복 홈페이지 ‘더불어숲’에서 지은 <나무가 나무에게>(2001)가 있으며, 신영복 교수의 퇴임을 기념하기 위해 63명의 저자들이 함께 쓰고 만든 <신영복 함께 읽기>(2006) 등이 있다.


  특히 <신영복 함께 읽기>는 신영복 선생을 거울로 삼고 닮아가려는 사람들이 만든, 각자 나무로 살다가 선생과 함께 더불어 숲을 이룬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라는 점에서, 신영복 선생을 보다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은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도서관에서 간단히 흩어보는 것으로는 너무 아쉬웠던 책이었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오늘날의 여러 가지 당면 과제를 고전을 통하여 재구성해보는 강의였습니다.

부제 ‘나의 동양고전 독법’ [5]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


이 책이 고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6]


남이 써놓은 책을 말만 바꾸어 내어놓는 데에도 참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7]


1. 서론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유년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6]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17]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17]


국어사전 290쪽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 삶의 정직성! 우직한 삶, 정직한 삶. 내 앞의 현실과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지 않는 삶. 내가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는 삶. 내 발밑에 꽂힌 시각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는 삶.


화두와 ‘오래된 미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1]


기원전 7세기~기원전 2세기, 춘추전국시대

사회 변혁기의 사상

사회 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이 주류를 이룹니다. 주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의 종법 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무한 경쟁 시대입니다. 주 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흔치 축의 시대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사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재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23]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인도 서북부 티베트 고원의 라다크에서 17년 동안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24-25]


천지현황과 I am a dog

고전강독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론의 중심이 됩니다. ...

고전 원문은 그러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의 의미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25]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6]


어학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내용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27]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과거의 사상과 현대의 사상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사상의 시간적인 존재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시간적인 존재 형식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존재 형식도 갖습니다. [27]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28-29]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29]


고전 독법의 참여점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30]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경이적인 발전이 인간적 가치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요. ...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을 상실하고 무한 질주를 거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 제기의 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서양 문명의 구조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성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서구 문명의 기본적인 구조, 즉 과학과 종교라는 이원적 구조와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32]


모든 관점을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반론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33]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는 ...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4]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도외시한 이론에 관심이 없는 것, 자신이 주장하는대로 살고 있는 사람인지 중요한 것. 내가 현실주의자인 이유.


동양 사상이 비록 윤리적 차원의 현실주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주의가 곧 현세에 대한 탐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35]


체면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관계를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체면은 사회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형식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5]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은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36]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 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에 대한 애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6]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서 진리는 존재합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7]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38]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관계들의 총화” [38]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우宇는 물론 공간 개념입니다. 상하사방이 있는 유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宙는 시간적 개념입니다. 고금왕래의 의미,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39]

가정의 의미를 접목시킬 것.

가정은 별도의 공간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기가 모이는 곳.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생기의 장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현실적인 삶에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납니다.

동양 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9-40]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인성의 고양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외부에 어떤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 아래에 인간적 가치를 배치하는 그런 구도가 아닙니다. 최고의 가치가 바로 사람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0-41]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41]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41]


동양적 구성 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가 존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이존재’와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여하튼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42-43]


모순의 조화와 균형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43]

가정생활의 기본적 구성 원리 또한 조화와 균형이 되어야 한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고 주변의 숱한 사람들로 관계망을 구성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완성은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가정은 인간의 완성, 즉 인성의 고양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장임이 틀림없다.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문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 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이른바 감천역물 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노장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44]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44]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동同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의 논리를 화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46]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47]


2. 오래된 시와 언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49,77]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2]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53]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55]


<시경>의 이러한 사회시로서의 성격은 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로 <시경>의 가치가 인정되기도 합니다. [56]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57]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58]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이산의 아픔은 산업사회와 도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보편적 정서이기도 합니다. 고향 떠난 삶이란 뿌리가 뽑힌 삶이지요. 나는 사람도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59-60]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61]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초상지풍 초필언’ 草尙之風 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수지풍중 초부립’ 誰知風中 草復立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62-63]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법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4-65]

우리가 시를 배울 때, 이런 시의 가치에 대해서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5]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66]

시인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이야기. 자신의 진실한 경험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동시에 그 경험을 넘어서는 세상과의 소통. 그것이 글을 쓰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67]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사후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67]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68]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周公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

相小人 厥父母 勤勞稼穡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 乃逸 乃諺 旣誕

否則 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        ―周書, 「無逸」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70]


무일 사상無逸思想은 주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평가됩니다.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71]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2]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74]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75]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76]


<초사>의 낭만과 자유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78]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선언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81]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82]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83]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강인한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83]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84]


3. <주역>의 관계론


바닷물을 뜨는 그릇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87] 

‘패러다임’과 같은 의미인가?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 [88]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88]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89]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89]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91]


경經과 전傳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

텍스트로서의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미신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91]


효爻와 괘卦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이 있고 사물과 사물이 관계하여 이루어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상사태 또는 공황 상태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물이 사건으로 발전하고 사건이 사태로 발전하는 여러 가지의 경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효와 괘를 이러한 사물 또는 사물의 변화를 담지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93]


어느 경우든 우리의 인식 틀이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 구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논리로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5]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셋 중에서 언제나 소수가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98]


위位와 응應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0]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가 건물에 눌립니다. ...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101]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사상입니다. [102]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103]

<주역>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 ‘위’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보다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4]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德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5]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 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7]


천지비天地否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通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인 까닭, 그것이 비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119]


산지박山地剝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25]


화수미제火水未濟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127]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128]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129]

목표와 수단, 즉 과정이 부딪치는 수많은 갈등들. 거의 목표가 이기는 현실. 그 현실에 대한 명쾌한 설명.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다!’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1]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31]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역>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132]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춘추전국시대

배움과 벗

학습은 그 자체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142]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144]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145]


옛것과 새로운 것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147]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148]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149]


그릇이 되지 말아야


여기서 그릇(器)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의 품성에 관한 것이며 유가 사상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기도 합니다. [150]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151]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152]

그러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보통의 현대인들은 생계의 도구로서도 전문성이 필수적이다. 전문성을 가지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 것, 자신의 분야만을 아는 전문바보가 되지 않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덕성과 품성을 닦아 나가는 것.

그것이 보통사람들이 가야하는 길이 아닌가 싶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3]


덕치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의 학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는 난세의 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3]


사회의 지배 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 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司法 원칙이었습니다. ...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지요. 사회적 질서는 이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4]

가정에서의 질서의 의미.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의미. 각자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이라는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 질서.


물론 사회의 기본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54]


‘집단적 타락 증후군’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155]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6]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품성이란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도야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157]


공존과 평화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가장 일반적인 해석)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160]


(신선생님 해석)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3]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3]


낯선 거리의 임자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마음(心)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8]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신信은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인人+언言’의 회의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신信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言은 원래 신神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信이란 곧 신神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信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171]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爲之難 言之得無訒乎)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3]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知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174]

내가 배우고 공부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하물며 자기의 알몸을 보여줄 리가 없지요.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174-175]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이론과 실천의 통일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爲政」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179]


책을 읽는 것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의미 이상일 수가 없었습니다. ...

사思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81]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7]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191]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최소한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192]


광고 카피의 약속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거칠게 되고 형식이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면 공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195]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8]

진정한 만남, 사랑의 의미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199]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99-200]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200]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201]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공자의 모습


5. 맹자의 의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2]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19]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라는 안도감과 동감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마치 잉걸불처럼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켜주는 것이지요. [219]

결혼의 의미. ‘공감’ 의 의미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225]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사람의 소위所爲, 즉 하는 일에 따라서 그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입장에 따라 그 생각과 정서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

그 사람의 성선性善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術)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공자의 ‘성상근性相近 습상원習相遠’과 같은 의미입니다. 본성은 서로 차이가 없지만 습관에 따라 차츰 멀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229]


공자의 ‘이인위미’里仁爲美를 인용하여 어진(仁)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진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인里仁이란 인仁에 거居하는 것이라고 직역했습니다만 인仁을 삶 속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성을 어떤 순수한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선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230]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233]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42]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243]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245]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맹모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이 그것을 본받게 했던 것이지요. [248]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249]


6. 노자의 도와 자연


도道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3]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254]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反文化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비판 담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저항 담론과 대안 담론으로서 그 지반을 넓혀가게 됩니다. [256]


노자가 보이지 않는 <노자>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無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264]


<노자>의 제1장은 무無와 유有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關係論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無는 ‘제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라는 것이지요.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도가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 변화 발전하는 것 그것이 유有입니다. 형이상학적 체體는 무이지만 형이하학적 용用은 유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道無水有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인 도체道體가 유형인 도용道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270-271]


인위人爲는 거짓(僞)입니다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272-273]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277]


뼈를 튼튼히 해야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284]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

1.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284]


2.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284]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285]


3.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285-286]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1.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288]


2.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289]


빔이 쓰임이 됩니다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

그 자명한 사실의 배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292-293]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믿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지요. [296]


분명히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가기 때문이지요. [297]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300-301]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7.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09]


장자가 추구하는 문제는 더 근원적인 문제였습니다. 제도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310]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310]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311]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319]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27-328]

사랑의 최고.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331]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쓸모없는 나무와 울지 못하는 거위


빈 배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343]


나비 꿈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分別相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分別智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과 통일에 관한 것이며 앞서 읽은 방생지설方生之說에서 이야기한 모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6]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7]


혼돈과 일곱 구멍


참다운 지식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353]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득어망전得魚忘筌 득토망제得兎忘蹄’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 [355]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6-357]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학파 간의 차이는 그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학파 간의 차별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학파 간의 침투가 진행되는 것이 사상사의 일반적 발전 과정입니다.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되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침투합니다. [363]


묵자의 검은 얼굴

첫째로 하층민의 이미지입니다. ...

묵가墨家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형벌과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검은색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은색은 노역과 노동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와 허식을 배격하며 근로와 절용節用을 주장하는 하층민이나 공인工人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364]


당시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에서 묵가는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 조직의 좌파 사상이었으며 묵적이란 이름은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65]


둘째로는 근검 절용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모습입니다. 검소한 실천가의 모습입니다. ...유가가 주공周公을 모델로 했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나라의 우禹임금입니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그냥 지나간 것으로 유명한 임금입니다. [366]


묵자는 제자들에게 우임금을 배울 것을 주장하여, 거칠고 남루한 의복도 고맙게 생각하며 나막신이나 짚신에 만족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것을 근본 도리로 삼도록 가르쳤습니다. 우임금의 길을 따르지 않는 자는 묵가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묵가 집단이 이처럼 헌신적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몸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누구나 깡말랐고 살갗 또한 먹빛처럼 검었다는 것이지요. [366-367]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


현재의 통설은 묵자는 은나라 유민들의 나라인 송 출신으로 주 시대의 계급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고 우 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 평화, 평등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367-368]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有三患 飢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370]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天下之亂物 皆起不相愛        ―「兼愛」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74]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입니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相利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리의 관계는 개인의 태도나 개인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도적·법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75]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非攻, 즉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상이지요. 그런 점에서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전쟁을 용인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기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79]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묵자 사상의 근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용·절장節葬·사과 등 근검절약할 것을 주장하여 자연의 질서와 사회적 구조를 함께 온전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철학적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적 입장에 있어서 어느 학파의 사상보다도 관계론에 철저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이 겸애와 교리라는 사회적 가치로 구현되고 다시 이 겸애와 교리가 당대의 사회적 조건에서 반전 평화, 절용이라는 실천적 과제와 통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93]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은 하늘일뿐


일반적으로 유학은 객관파와 주관파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404]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 말기가 급격한 변혁기였음은 물론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法家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404-405]


인간의 능동적 참여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은 ‘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人定勝天)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408-409]


성악설의 이해와 오해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性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仁義와 법도法度를 알 수 있는 지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17]


예란 기르는 것이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됩니다. [419]


순자는 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

과도기적 성격 ...

순자의 제자 중에서 한비와 이사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자 사상은 현실 인식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420]


순자의 예론의 기본적 내용은 법과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법과 제도가 안정적으로 작동케 하기 위해서 교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421]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유명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학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철학의 선언입니다. [423]


예와 악이 함께하는 까닭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6]


순자는 법과 제도적 통제가 가져올 폐단을 경계했던 것이지요. 나아가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427]


10. 법가와 천하통일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431]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 또는 변화사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432]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438]


강한 나라 약한 나라


공경대부와 같은 귀족들은 예로 다스리고,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는 서민들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


법가는 주대周代의 이러한 예와 형의 구분을 없앱니다.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유가는 반대로 서민을 올려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써 다스리자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의 이러한 방식을 현실을 외면한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의 주장이라고 조소하는 한편, 유가는 법가적 방식을 비열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442]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와 불법 행위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경제사범·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 행위로 규정됩니다. ...

범죄 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합니다.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그 인간 전체를 범죄시하여 범죄인으로 단죄하는 데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그 사람과 그 행위를 분리하여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인정하는 정도입니다. [443]


임금의 두 자루 칼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야말로 난세를 평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입니다. [447]


한비자가 상賞과 벌罰이라는 이병二柄 즉 두 자루의 칼을 놓지 말 것을 강조하는 까닭은 군주가 신하들을 효과적으로 통어하기 위해서입니다. [448]


나라의 쇠망을 알려주는 일곱 가지 징표





탁과 발, 책과 현실

시장에 신발 사러 간 사람이 발의 본을 뜬 탁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

나로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

탁이란 책입니다. ...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452]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 부류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보다 못한 법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456]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58]


법가를 위한 변명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460]


천하통일과 이사


11. 강의를 마치며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覺)입니다. [472]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74]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475]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75]


우리는 우리의 한계 내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직하고 우리의 시공에 참여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79]


도전과 응전


<대학> 독법

 격물 -> 치지 -> 성의 -> 정심 ->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

개인個人, 가家, 국國, 천하天下(世界)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수양과 해탈도 전체 체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488]


 이 사물과의 관계, 즉 실천에 의한 사물과의 접촉을 인식의 제1보로 규정하고 격물을 전체 체계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최상층에 있는 평천하로 나아가는 제1보가 바로 격물인 셈이지요. [490]


<중용>의 독법

이학에 대한 심학의 비판

이 경우의 새로움이란 단지 이론에 있어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입장과 자세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創新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504]


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人은 인仁으로 나아가고 인仁은 덕德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治國으로 나아가고 치국은 평천하平天下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천하는 도道와 합일되어 소요하는 체계입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6]


가슴에 두 손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508]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09]


*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


1.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509]


2.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509-510]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510]



*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인 뼈대 & 보완점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를 읽으며 내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와 답답함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했다.


  ‘조화’와 ‘균형’이 새로운 내 삶의 지표가 되리란 확신이 들었지만 어떻게 그것을 실천해 갈 수 있는지, 또 새로운 삶이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참으로 막막했었다. 또한 성공과 물질이라는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겪었던 많은 혼란과 생각의 변화를 이야기하다보면 ‘그래, 이대로의 방법은 확실히 아니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라는 질문에는 중언부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야기한 나도 듣는 이도 답답함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 안에서의 나’와 ‘일과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생각하지만 때때로 흔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궁금했다.


  오래된 고전 속에서, 그리고 <강의>안에 펼쳐진 해설 속에서, 그동안 나를 지배해 왔던 ‘존재론’적 사고를 명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와 갈등이 바로 내가 겪었던 갈등과 한계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계론’이 나의 길고 길었던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동아줄임도 알게 되었다. 나를 끌어줄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를 발견한 기쁨이었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세상이며, 내 가족이 바로 온 우주라는 깨달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한 앞으로 세상 속에서 내가 살아갈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기쁨이었다.

  <맹자>가 고전 중 가장 추천할 만하다는 책 속의 한 구절 때문에 주저 없이 <맹자>를 다음 책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강의> 속에서 언급된 모든 책들을 다 읽고 싶다. 그리고 책으로 읽는 지식을 뛰어넘어 시서화의 세계, 정서와 감성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 <강의>는 나에게 이런 평생을 따라가야 할 길의 시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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