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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3일 23시 42분 등록

신화와 인생 / The Joseph Campbell Companion : Reflections on the art of living.

 

 

1. 저자 조셉 캠벨(1904~1987) 대하여

 신화와인생.jpg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신화의 힘>이라는 책을 읽고 그에 대한 느낌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었다.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는 선생님의 입을 바라보는 어린이마냥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아는 이야기 꾼이고 우리시대에 올바른 가치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삶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진리에 대한 말과 글이 넘쳐난다. 많은 이야기들이 삶을 이야기 하지만 공허하고, 교의를 이야기 하지만 범부의 마음보다도 더 편협하고, 진리를 이야기 하지만 울림이 없다. 하지만 그의 글과 그의 이야기에서는 삶의 오의(奧義)를 느낄 수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본인의 삶을 통해서 얻은 진실함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시선은 삶의 껍질, 세상의 껍질에 머물러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무심하고 둔감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하고 나니 나무에 부는 바람 조차 저 멀리 태고에서 불어오는 신화 속 영웅의 숨결인 듯 그 느낌이 다르다. (2011. 2. 19)

 

캠벨은 정통 학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매력이 더욱 커 보이는지 모른다. 기존 제도와 권위에 따라가는 것이 아닌 생각한 삶, 살아보고 싶은 인생을 사는 것, 그가 말한 천복을 위해 실천하는 삶이 그의 신화를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국립자연사박물관에 갔다가 북미대륙 원주민 문화에 매료되었다. 그 이후 그는 북미 원주민 신화와 그 문화에 정통하게 되었고 다른 문화간에도 유사한 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그의 삶의 궤적을 일대기별로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       1921(17) 코네티컷 주 뉴 밀포드(New Milford)의 캔터베리(Canterbury) 학교를 졸업

-       다트마우스(Dartmouth)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 전공

-       1924(20) 가족과 떠난 유럽 여행길에서 크리스나무티(Jiddu Krishnamurti)를 만남

동양 철학에 관해 논의할 기회를 얻게 되게 되고 그 후 그는 힌두와 인도 사상에 대해 평생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고 카톨릭 신앙을 버리게 됨.

-       1925(21) 콜롬비아 대학교에 진학하여 영문학사 학위

-       1927(23) 동대학교에서 중세 문학 학사 학위 취득

-       1927(23) 콜롬비아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학교지원을 받아 유럽으로 건너감

프랑스 파리대학과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함.

이 시기에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모던 아트를 접하면서 폴 클레(Paul Klee)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에 매료되었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Karl Jung)의 세계에 빠져듬

-       1929(25) 유럽에서 돌아옴. 콜롬비아 대학교 박사 학위 취득을 포기함

학교에 산스크리트어, 모던아트 그리고 중세문학을 연구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이에 대한 지지를 받지 못하자 박사 학위 취득을 포기함.

-       1929(25) ~ 1934(30) Great Depression

이 기간 동안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함. 이 이간 중 캘리포니아 여행에서 작가 존 슈타인벡(John Steinbeck)과 해양 생물학자인 에드 리켓츠(Ed Ricketts)와 교류하였으며, 1933년에는 캔터베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함.

-       1934(30) 사라 로렌즈 대학(Sarah Lawrence College)의 교수가 됨

-       1938(34) 자신의 제자였던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진(Jean Erdman)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으며 49년 동안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생활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아파트를 장만해 뉴욕과 하와이에서 지냄.

-       1955(51) ~ 56(52) 인도학자인 하인리히 짐머(Heinrich Zimmer)의 저서 ‘The Art of Indian Asia, its Mythology and Transformations’의 마지막 편을 출간했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으로부터 안식년 휴가를 얻어 생애 처음으로 인도와 일본 등지를 여행함.

이 시기의 여행은 캠벨이 아시아 종교와 신화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하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비교신화학 강의의 필요성을 깨달음

 

널리 알려진 그의 일대기를 나이와 비교해서 보면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7살이라는 나이에 시작된 그의 관점도 놀랍지만 이후로도 지속되어 평생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의지적 삶은 경이라고 할만하다. 이십 대 초반에 보여 준 삶에 대한 그의 성숙한 판단과 명예와 명성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본질을 위해서 선택한 길들은 허투루 마흔을 넘게 산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내 삶은 한 가지 직업, 한 명의 아내, 한 명의 이미지였다. 바로 성배다." 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정직하며 강인하게 자기결정권을 실천한 삶이며 자신의 희열을 따라갔던 모범이 되었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사전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2. Joseph Campbell Foundation / www.jcf.org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 켐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바로 이 장이라는 곳이 동양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과학이 만나는 곳이다.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캠벨 철학의 근간이다. 물질이란 없다. 모든 것이 장이다. 그러한 구별과 제한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 뿐이다. (7)

 

자기 자신을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구별하는 것 - 가령 ",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달라" 하고 말하는 것 - 은 스스로를 전체성에 대립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폭을 좁히고 우리 자신이 들어갈 감옥의 벽을 만든다.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원성(duality)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7)

 

이 책의 나머지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각각은 의식의 세가지 층위 또는 단계에 상응한다. (8)

-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 : 조지프는 돈, 이성, 노년의 양상, 죽음, 결혼, 전쟁, 출산, 제의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 폭을 제한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9)

-       두 번째 단계(깨달음을 향한 길) : 우리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희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캠벨에 따르면 여기서 희열이란 우리의 가장 높은 종교적 열광을 의미한다. '엔테오스(entheos)'라는 단어는 '신으로 가득 찬'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 최종 목표는 이 세계를 바로 잡기 위해 바깥으로 투사되었던 그 에너지를 안쪽으로 돌려 스스로를 바로잡는 스스로의 진로를 따라 나아가고 여러 세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춤추는 바로 그 경지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9)

-       세 번째 단계(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환영(마야)의 차단막을 걷어 올리고 지상에 펼쳐져 있는 아버지의 왕국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천체의 리듬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우주의 박동이 우리의 것이 된다.(10)

 

상징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은 "기껏 식당까지 찾아가서는 메뉴판만 먹어 치우고 정작 메뉴판에 나온 진짜 음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과 같다.(10)

 

우리 각자의 희열을 따르는 것은 방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여러분의 모든 신체 구조는 이것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임을, 그리고 여러분이 제공해야 할 최상의 것을 이세상에 주는 방법임을 알고 있다. 지금도 각자를 위한 길이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일단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이전까지는 열리지 않았던,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열리지 않을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며, 심지어 어머니 대자연 역시 그 여정을 도울 것이다. (11)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한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딛어야만 한다. 영웅의 여정은 탄생에 비유되어 왔다. 처음에는 안전한 장소에서 따뜻하고 아늑한 상태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신호가 오고 그것이 점점 강렬해지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지나도록 거기 머물러만 있으면 썩어 버리게 된다. 피와 찢어짐과 고통이 없다면 새로운 생면도 있을 수 없다. (11)

스스로를 사랑하고 살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떠나야 함을 알려주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는 생각. 그것은 형태는 무수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영웅의 첫 번째 과제일수 있겠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곤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11)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12)

 

조지프는 우리가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혹은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이라곤 의식의 전환 뿐이다.(12)

다이달로스의 미궁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아드리네드이 실이라는 것을 .....

 

“자기발견의 사자(獅子)는 사사건건 ‘너는 할지니’라고 주문하는 그 용을 죽여야 한다”(13)

내가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도덕률, 진리라는 것 조차 나의 것으로 녹아들지 않으면 한낱 '너는 할지니'의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젖어들 수 있는 진리를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나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다.

 

도입의 단계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 in the field

(전체 글 모두가 감탄이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긴다. 페이지는 생략)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전사(戰士)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단히 잘못 짚은 셈이다. …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치려 하기 전에 이해하는 것, 공감하는 것, 그것들 속에서 나를 인식하는 것

 

우리는 스스로가 계획해 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팽개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니까

 

낡은 허물을 벗어 던져야만 새로운 껍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전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상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썩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지금이 초라하고, 미래 또한 보장되지 않으니 과거에 있었던 화려한 대목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지옥이란 말라붙은 삶이다.

! 나는 지옥에 살고 있었다. 무서운 것은 그곳이 지옥인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욕심꾸러기, 뭔가를 고수하려 하고 붙들어 놓으려고만 하는 우리 안의

그 욕심꾸러기를 반드시 없애 버려야만 한다.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기왕에 갖게 된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에 대한 인식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데미안의 알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흙이 부서져야만 한다.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빵이란 결국 밀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한 것이다.

 

자신이 살 만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가치를 기꺼이 취하라.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어떤 것에 대해 (의례적으로) 공정한 태도를 지니는 것은

곧 그것을 모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자신의 길을 따라 삶을 계속해 나아가는 동안에는

혹시 새똥이 떨어진다 해도 그걸 닦느라 신경 쓰진 마라.

중요하지 않은 것, 사소한 것들로 인해서 내가 걸어가는 것을 방해 받지 말자. 장애라는 것, 방해라는 것도 결국은 내가 수용한 것이다. 용기 있게 거부하고 과감하게 받아 들이자.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영원은 여기와 지금으로 이루어진 차원이다.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여러분의 진정한 의무는 공동체로부터 멀리 떠나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두려운 것이 많은 길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희열을 찾을 수 있다. 희열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움을 포용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나의 2010년 그러했다.

 

“너는 할지니”라고 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니체의 정신 변화 3단계를 정리해보자. 의무를 넘어서야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깨뜨리고 나옴은 (남이 보여준) 희열의 모범을 따르고, 옛 장소에서 떠나고,

여러분의 영웅여정을 시작하여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는 것이다.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날을 내팽개쳐라.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라. 영웅적인 삶은 각자만의 모험을 실행하는 것이다.

 

모험으로의 부름을 따르는 것에는 마무런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미리 안다면 그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부름을 거부하는 것은 부패를 의미한다.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부정적으로 경험될 것이다.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보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 여정에 담긴 목표는 영혼에서 여러 층위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파헤쳐 마침내 여러분 자신이 붓다의 의식이며 그리스도라는 신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 여정이다.

 

그것은 바로 몰입이 물방울처럼 떨어져 내리는 여러분의 마음 속 정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심연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우리는 삶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보물이 묻혀 있다.

여러분이 차마 들어가기 겁내던 바로 그 동굴이, 여러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그 무시무시하던 저주 받은 것이 바로 그 중심이 된다.

 

여러분은 보석을 발견하고, 보석은 여러분을 끌어당긴다.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여정의 목적은 공감이다.

여러분이 여러 대립자들을 지나쳐 왔을 때, 여러분은 이미 공감에 도달했던 것이다.

 

목표는 보석을 다시 이 세계로 가져오는 것이고, 그 두 가지를 서로 합치는 것이다.

 

겉으로는 따로따로인 듯 보이는 사물들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에 불과하다.

대립자의 세계 너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경험되는 통일성과 동질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여러분은 반드시 희열을 느끼고 돌아와 그것을 통합시켜야 한다.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거대한 풍파 속에서도 신과 같은 침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마치 디오니소스가 표범에 올라타고도 갈가리 찢기지 않은 것처럼.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 Living In the World

-     현세에서의 삶 : 조지프는 돈, 이성, 노년의 양상, 죽음, 결혼, 전쟁, 출산, 제의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 폭을 제한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9)

 

1.

두 사람은 하나님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했고, 그리하여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남자는 여자를 비난했고, 여자는 뱀을 비난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훨씬 더 큰 저주를 내렸다. 남자의 처벌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그저 일하고 땀을 흘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반면에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아야만 했고 뱀은 평생 배로 기어 다녀야 했다. 하나님은 이들을 동산 밖으로 쫓아냈고, 그 문 앞에 두 케루빔을 문지기로 삼아 불타는 칼을 들고 서 있게 했다. 이것이야 말로 왜 우리가 오늘날 동산 대신 이 추운 바깥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43)

 

기독교와 유대교는 귀양살이의 종교다.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43)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지구상 어디에도 에덴 동산은 없었고 뱀이 말할 줄 알던 시절도 선사시대의 타락도 동산에서의 추방도 대 홍수도 노아의 방주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된 서양 종교의 역사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종교들 역시 이 같은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느 전설이나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43)

 

이렇듯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의 몸뚱이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즉 서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나머지 절반입니다.(46)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외로움은 우리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2.

나 자신의 그런 투사의 배후에는 뭔가가 있었다.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서 이런 투사가 나온 것일까? 그 투사는 내 깊은 삶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고, 바로 그것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투사는 여러분 자신의 삶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다. 내 삶이 그 투사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에너지의 잠재성이 성취된 것이다. (47)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시간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다. 꾸준히 구축되는 것이 어느 시간이 되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에너지의 잠재성이 성취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마치 그 아들에게 있어서는 투사 형성 요인의 최초 보유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그 딸에게 있어서 그렇다. 여성은 남성적 요소에 의해 보충되며 따라서 그녀의 무의식은 이른바 남성적 각인을 지니게 된다. (48)

 

나는 여성에 있어 투사 형성 요인을 정신이나 영혼을 의미하는 아니무스라고 불러왔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아니면 아니무스는 강력한 검을 뽑고 아니마는 환상과 유혹의 독을 내뿜는다. 그 결과는 항상 부정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둘은 나란히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49)

 

그것이 바로 아니무스의 방식이다. 여성 자신도 할 수 있지만, 대신 남성에게 위임하는 그 어떤 일을 투사하는 것이다. 존재 가치로는 여자에 비해 그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자는 특화된 신체를 지닌 기계나 다름없어서, 그런 일을 너끈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49)

남자들에 대한 지적 열등감이나 아니면 반대로 지나친 동경이 여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여자들만이 지닌 아름다움을 시기한 열등감 지닌 남자들이 자신의 지적 경험을 무기로 여성을 은연중에 공격하는 사례 또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굳이 페미니즘이나 여권이니 하는 전사적 용어를 꺼내지 않더라도 유교적 억압과 남존여비나 샤머니즘의 전통적 시야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역시 외모나 내면이나 또는 더 나아가 사회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 해결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그 시작이다.

여성에 대한 인식과 해석. 단지 남성의 상대개념 혹은 결여된 부분을 보충하는 관계로만 여성을 보는 것에서의 탈피하는 것이 올바른 관계, 올바른 사랑의 출발인 것이다. 여성의 남성인식 또한 그런 것이다.

 

3.

우리의 신학자들이 여전히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하여 그리고 그 둘의 근본적 대립에 대하여, 마치 그 둘이 사랑이라는 원리의 궁극적인 표현인 것처럼 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가페는 자비요 신적인 사랑이자 영적인 것이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한 것이며, 에로스는 욕정이요 자연적이자 육적인 것이고, 섹스의 충동, 욕구, 기쁨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두 가지와 대비되는 제3의 선별적이고 차별적인 원리 아모르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아모르는 오른쪽 길도 아니요, 왼쪽 길도 아니며 바로 앞에 있는 길,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 이다.(51)

 

이렇게 사랑은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은 마음의 정찰병으로서 마음이 즐거이 가지고자 하는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눈과 마음이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

이 둘이 하나의 결의로 단단하게 뭉칠 때,

그때 눈으로 들어와 마음으로부터 환영 받는 것에서 완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이렇게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태어나거나 시작되지 않으면

사랑은 다른 방법으로는 태어날 수도 시작될 수도 없다.(51)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 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 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53)

 

참다운 사랑에 대한 해석인가. 이야기의 일관성에서 주제를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 꼭지이다. 마지막 부분은 특히 사랑과 관련하여 운명이 어떻다는 것인지 해석하기 난해하다.

 

4.

깨어진 직후, 그러니까 아직 새로운 관계에 몰두하기 전, 삶에서 그 모든 가능성들이 박탈되었을 때 고통스러운 반응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야 말로 위험한 시기가 된다.

 

영혼은 상처의 치유법을 알지만, 그 치유법은 아픔을 준다. 때로는 애초의 상처보다도 그것의 치유가 더 많은 아픔을 주지만, 만약 그걸 견딜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전념한다는 것은 범위를 좁히는 것이며, 그런 전념이 실패로 끝나면 여러분은 보다 넓은 기반으로 물러나, 그걸 부여잡기 위한 힘을 얻는 것이다.

니체는 내게 그와 같은 일을 해 준 사람이었다. 그의 삶 가운데 어떤 순간에 이르러운명적 사랑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여러분의 운명이 무엇이건 간에, 그 어떤 곤란을 겪건 간에,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필요로 하던 것이다.” 파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기회인 양, 도전인 양 다가가라. 여러분이 그 순간에 사랑을 가져온다면, 여러분은 힘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마치 어마어마한 실패인 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 준 사건들이었음을,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자면)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지나야 곧이어 계시가 나타난다. (55)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마음은 둘 곳을 모르고 너무나 슬픈 생각 뿐 얻고 싶었던 사랑을 끝내는 잃어버린 채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진실을 알게 했어요] 구창모의 노래가 생각나는 글이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가 생각나는 글이다. 다만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인지 삶의 고난을 극복하는 운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혼란스러움.

 

5.

결혼 생활을 하면서 감정과 지성 양면에서 일종의 교류를 가진 결과, 이른바 하나이지만 둘이며, 둘이지만 하나인상황을 경험하게 되었다. … 그것은 괴테의 말마따나 금혼(金婚)’이며, 그 느낌이 삶에서 명백한 사실로 굳어질 때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56)

 

신화학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 자신의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 에너지의 신비를 깨닫게 해 준다.

그 안에 여러분의 영원이 놓여 있다.(56)

신화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미래의 이야기, 앞으로 존재할 이야기라고 했다. 신화는 사람의 내면을 향해 말을 걸어오고 영혼의 중요한 부분을 건드린다.

 

신화의 이미지에 별자리처럼 박혀있는 그 오랜 깨달음들의 한 가지 훌륭한 점은, 그 깨달음들 덕분에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신화학이란 특정한 시대 / 특정한 문화에서 인간 영혼의 / 경험, 행동, 성취에 관한 은유를 /

간직한 이미지들이 조합된 것이다. (56)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56)

 

단테는 연옥을 통과해 나오면서 그곳의 강물을 마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죄를 기억 밖으로 씻겨 나가게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 주는 강물을 마셨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심지어 죄에 대한 기억조차 완전히 망각해야 했던 것이다. (59)

 

추억하는 것, 기억하는 것 그리고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 역시 주제를 파악하기 어려운 글이다. 부분은 이해가 되는데 전체를 놓고 보면 헤매게 된다.

 

6.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것은 율법의 종교가 하는 방식이며, 그런 종교에는 수많은 계율들이 있다. 이것은 두려움의 종교다. 여러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아직 자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헌신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60)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두 번째단계의 사랑의 모델은 친구 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가 단순히 율법과 명령의 계율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할 때 종교적 체험은 크게 저하되고, 여러분은 시키는 대로 기꺼이 행동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60)

 

세 번째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 대 친구의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기독교 체계에서 이 사랑의 이미지는 성탄구유, 즉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올 예수를 상징하는 그 아기가 태어난 장소이다. (61)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신을 발견하고, 이제는 이 친밀하면서도 가장 오래 지속되는 종류의 관계 속에서도 신이 발견된다. 이러한 종류의 경험을 갖게 되는 기회는 단 한 번이다. (62)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 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62)

 

다섯 번째 단계의 사랑에 도달하면 사랑 이외의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만 있을 뿐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잊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 여러분 중 일부는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63)

 

사랑에 대한 단계에서 나는 어떤 사랑을 해보았는가?

 

7.

힌두인들이 제공한 이 작은 척도에서 우리는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과대평가할 위험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 경험을 완화시키면 마치 뭔가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그럴 완화시켜야 한다. 여러분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65)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완화시키는 것,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분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멋지고 작은 의식으로 바꿀 수 있고, 인생은 그런 크고 작은 행사들 위에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삶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결혼을 깨는 요인인 것 같다.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 성찬식, 또 다른 삶에 참여하는 은총이다. (66)

결혼은 어려운 의식이다. 굳이 사랑 앞에 상호이해라는 것 앞에서 노력이라는 말을 붙이지 아니하고, 손익과 자존을 따지지 않는 그런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런 사람들이 만나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 움직인다.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함께 이끄는 것이며 열려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67)

 

여러분이 사랑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실상은 욕정이었을 경우 그것은 단순히 어떤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시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67)

 

내 생각엔 여기서 '고결한 마음'이란 것은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한 일종의 단서가 아닐까 싶다. 고결한 마음이란 발상은 그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책임감이 없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뭔가를 하는 것이다. (68)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책임이 사랑의 구성요소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책임감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단지 소유물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구축하려 하는 것인가? (68)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즉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69)

결혼은 사랑에 기반해야 하고 나아가 가족의 기본도 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고 살았다. 이렇다 보니 결혼생활은 사랑이 외에도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것을 많이 느꼈다. 그런 사랑의 개념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관계에 헌신해야 했다.

 

만약 결혼이 오히려 해독을 끼친다면, 여러분은 그 상황을 전환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만 한다. 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 여러분은 필요한 에너지를 상대방에게 가해 변화를 유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일종의 개인적 훈련을 통해, 사랑과 신뢰와 협동의 분위기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여러분의 삶이나, 심지어 여러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며, 그 상황이 변화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그렇게 헌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상대방과의 관계를]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결혼 그리고 배우자와 관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배우고, 그것을 서로가 공유, 공감할 필요가 있다. 헌신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8.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72)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73)

명언이다. 맞다. 나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부부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계속 갈등만 있을 뿐이다. 인생 최대의 실수를 꼽으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꼽았다고 하니... 결혼에서 조차 손익을 따지는 이기적인 마음.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73)

 

내부에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다면, 바깥에는 무엇이 있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75)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느끼고 또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75)

 

내가 보기에 공감이란 말 그대로이다. 즉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본인의 안전을 망각하고,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는 정도로 말이다. (75)

진심 어린 공감은 그런 것이니 인위적으로 그런 척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눈에도 그 만큼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의 공감을 돌아보면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기적인 공감이다. 한쪽의 뺨마저 내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행동이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77)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77)

 

자아를 무너뜨리는 것, 관계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공감하는 것이 삶의 명제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총합이 우리라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제는 규범적이라기보다 동어반복적이고 설명적인 명제가 된다. 깨달음의 핵심은 ''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유일한 '우리'가 수없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공감의 시대-에서]

 

9.

자기 몸의 고결성에 대한 갈망, 원상회복의 환상, 내적이고 외적인 '나쁜' 힘에 대한 보호와 불가괴성에 대한 은밀하고도 깊은 요구가 심성을 형성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후일 성인이 된 다음 신경증적이거나 정상적인 일상 생활, 정신적인 노력, 종교적 신념, 제의적 관습에 결정적인 인자로 그대로 남게 된다. (78)

 

신화는 우리 안에 있는 힘들을 합쳐줄 수 있는 실마리다. (79)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79)

 

마지막으로 신화는 우리가 출행에서 사망에 이르는 삶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준다. (80)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겐 반드시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어머니는 자연을 표상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사회적 관계로 인도한다. (80)

여러분은 어머니로부터 여러분의 몸을 얻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사회에서의 역할을 얻는다.

 

유아의 발달에 있어서 신화적인 상징, 그리고 자녀들이 듣는 신화의 역할, 신화는 교육적으로 필요한 이유. 하지만 신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아버지, 어머니 존재에 대한 후반의 이야기는 상관관계를 읽기 어려움.

 

10.

돈은 응결된 에너지이므로 돈을 포기하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경제중심적인 사회에서 삶의 가능성이란 사실상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82)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83)

복권을 살 때도 그렇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이 앞서 있을 때도 그렇다. 그 돈이 생기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슴 설레게 하는 대답을 찾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필요이상의 돈을 왜 가져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다. 다만 이 사회에 존재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궁색하지 않으려 하니 많을 수록 좋은 어떤 그런 대상이 되어버린 듯 하다.

 

삶의 에너지로서 경험되는 돈은 실제로 명상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을 축적하는 대신 흘려 보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한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돈에 몰두한 삶으로부터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매우 놀라웠다.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행동을] 촉진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돈이 있다는 것은 마치 차에 기름이 있는 것과도 유사해서 만약 기름이 없었더라면 결코 갈 수 없을 장소에 갈 수 있는 것이다.(83~84)

 

여러분이 하나의 문턱에서 또 다른 문턱으로 움직일 때에는 차라리 점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아래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이 피어날 것이다. 여러분의 중심으로부터의 잠재력은 다음 모험에 필요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84)

 

삶의 본질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시작하는 것

 

11.

여러분이 단순히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면 그런 열등감은 벗어 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86)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87)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 책임질 일이 없는 상황을 의지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가족이 없던 젊은 시절 그저 속절없이 술에 취해 살지 말고 삶의 의미에 취해서 살았으면 하는 때늦은 후회.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강요할 갖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길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길 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87~88)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살필 줄 아는 삶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 위해서 실재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인식이라 생각한다.

 

물론 가끔은 나도 거의 -정말‘거의’-‘젠장, 차라리 누가 나보고 뭘 해야 한다고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이 열망하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어떤 것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89~90)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내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그 삶 자체가 어떤[일관적인] 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 겪어온 과정을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 뒤에 또 뜻밖의 일이 뒤를 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론은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 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90)

 

자신을 아는 것, 살고 싶은 삶을 인식하는 것,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추구하는 것....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고 삶인 것이다.

 

12.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92)

 

어쩔 수 없었지만, 즐거웠던 그의 삶의 일화.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순간 쳐들어온다. 그러니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하지 말자. 완벽할 수도 없다. 두렵거든 '또 왔구나' 하자.

 

13. 발췌 없음

 

14.

여러분이 경험하는 삶도 바로 그런 식이다. 그 무엇도 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97)

 

나는 오로지 내적으로 이치에 닿는다고 느껴지는 일만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책을 읽는 게 최고인 거다. (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한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99)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99)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자리를 인식하는 것부터가 선행되어야 한다. 멀리 있지만 그래서 앉아 있을 수 없지만 나의 자리를 인식한 요즘은 그것이 있어서 행복하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100)

 

그렇다. 쉽지 않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집어치우는 것이 몸을 마음을 가볍게 한다.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변경연 면접여행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내가 스스로를 가둔 자아라는 벽 때문이다.

 

15.

궁극적으로, 파르치팔의 경우처럼, 내부의 안내자는 자신의 고귀한 마음뿐일 것이며, 외부의 안내자는 그의 마음에서 아모르를 깨어나게 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 신성의 광채가 될 것이다. ‘만유의 과정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 그의 본성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내적인 곳에 있는 씨앗은그렇게 생겨난다.” 삶을 창조하는 이 모험에서 성취의 기준은 여기서 검토한 이야기 각각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더불어 과거의 진리들, '의미'에 대한 교조들, 은총들을 버리는 용기가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 죽고 내부로부터 태어나는 용기가 될 것이다. (103)

 

성배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높은 영적 성취이다, 각자의 삶에는 여러 가지 높은 성취들이 있으며 그 각자의 삶은 성배로부터 은총을 부여 받는다. 어떻게 하면 거기 도달할지, 그리고 거기가 어디일지에 관한 단서를 어느 정도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테마다. 그것은 붓다가 극복했던 것과 똑같은 유혹을 극복하는 것과 관련이 잇다. 바로 여러분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이러 저러한 또는 다른 삶의 자질구레한 것에 대한 집착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104)

 

무엇이 여러분을 영적 성취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가? 나는 내 삶이 언제 중심에서 멀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바로 내 삶의 진정한 중심잡기로부터 나를 탈선시키는 어떤 업적이나 시스템과의 관계에 내가 과도하게 집착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언제 정도를 걷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 속에 가진 것 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지는 것들과 만사가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이다. (104)

 

인류 보편의 성배가 있겠지만, 그것이 나에게로 왔을 때는 변용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의미와 가치 있게 만드는 자신 만의 성배가 어떤 것인지 정의할 수 있어야 하겠다. 사람만큼의 성배.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 역시 내게는 황무지이다. 이것은 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이 내게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껏 자 자신의 소망에서 비롯된 충동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온갖 종류의 행동에 관해서는 강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을 일종의 지침으로 삼아 왔다. (104)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며, 황무지를, "너는 할지니“의 세계를 회피하게 될 것이다. (105)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105)

 

결국 모든 삶은 전체의 실현, 즉 자아의 실현이다. 때문에 그 현실을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삶은 그것을 실현하는 각각의 운반자에 매여 있으며, 운반자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운반자는 개별적인 운명과 목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 (107)

 

살아있다는 느낌이 있는 삶. 그런 삶이 어떤 것이지. 내가 나의 주체로서 사는 것.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신화의 힘-에서]

 

16.

동양과 서양을 막론한 모든 종교 체계에서 공인된 신화의 형태는 의식을 통해 제시되며, 개인은 헌신과 믿음의 경험을 통해 이에 반응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그렇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 신화적이고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형태의 전통 전체가 그 사람 속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어떤 진정성 있는 반응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가장 일반적인 해결책은 위장하는 것, 자신의 부족을 탓하는 것, 믿는 척하는 것, 믿디 위해 분투하는 것, 그리고 남들을 모방하면서 진정성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등이 있다. 반면 진정으로 창의적인 방법이 하나 있으니, 나는 이를 종교와 반대되는 예술의 방법, 다시 말해 이러한 권위 있는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법이라고 지칭한다. (108)

나의 이야기.

 

영혼에게“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하는 그물이라도 또 다른 사람, 즉 자신의 한가운데[중심]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향후의 모험을 위해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옷이 된다.(108)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천국에 올라가 그분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이란 여러분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그것은 영원히 여러분 자신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그것이 바로 환희이다. 그 다음 현세의 삶은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과 봉사, 즉 여러분과 만물 내에 존재하는 삶의 에너지를 생성할 것을 요구한다. (109)

 

내 지론은 여러분도 거기 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 이미 거기 도달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거기서 내쳐지지가 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러분이 뭔가를 하도록 원하고 있는 반면, 여러분은 이 세상이 원하는 바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내적 만족을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을 (성에서) 내 쫓기지 않게 만들어 주는 행동의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다. (110)

 

17.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너는 지금 ‘잠든 땅’에 있다. 깨어나라 여행을 떠나라 저곳에 너의 의식의 또한 너의 존재의 온전한 측면이 있건만 아직 한번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냥 머물 것이냐? 그렇게 하는 건 너에게 충분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여정이 시작된다.(111)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은 상태가 되며, 스스로가 그렇게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떠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대,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위험한 모험이니, 이는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관한 지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111)

 

우리가 [부름에 응답해 여정을]떠나지 않을 어떤 이유를 생각해 낸 다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경우, 그 결과는 부름을 따랐을 때에 생기는 결과와 판이하게 달라진다.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은 [지금 본인에게] 요구되는 모험이 끝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여러분이 따르는 모험이 본인의 진정한 모험이라면,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돕기 위해 마법의 인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올해는 모두들 이 여행을 나설 예정이라고 하니, 나도 그냥 따라가야지” 하고 말한다면, 인도자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모험을 향한 부름이며,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런 안전도, 아무런 규칙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12~113)

 

여러분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며, 밤바다로 출항을 개시하는 것이다. (113)

 

여러분은 손발이 잘릴 수도 가진 것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이 어머니-즉 세상-를 더나 아버지 -즉 영-에게 간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고래뱃속에 들어간 요나이며 이때 고래의 아가리는 바로 대립자의 쌍이다. (113)

 

여러분은 자신이 계속 해서 매달려 왔던 것들을 점점 더 많이 포기해야만 한다. 그 마지막은 완전한 포기, 전적인 양보이다. (114)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116)

신화는 미처 몰랐던 인생의 복잡한 진실을 깨닫게 해주고, 인간이 살면서 어느 시점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탄생과 성장, 사랑과 이별, 기다림, 배신, 복수 욕망에 눈먼 어리석음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통찰이 숨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황무지에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성 없이 살아가는 곳으로.

 

그 선물을 도로 가져와서, 그것을 합리적인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오히려 지하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여러분이 반드시 가지고 돌아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에 결여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걸 가지러 간 것이다. (116)

 

귀환했을 때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첫 번째 가능성은. 여러분은 은둔해 버린다. 이것은 귀환의 거부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여러분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영리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다. 여러분은 공무를 담당하게 되고, 보석을 포기하게 된다.

세 번째 가능성은 여러분이 되돌아온 그 영역 중에서, 여러분이 주려는 것을 최소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면을 일부나마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맞추거나 그것에 비례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른바 삶의 은혜로 가공하고 전달할 수단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하다. 벽에 금 간 곳을 찾아낸 다음, 오로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여러분의 보석을 주는 것이다. (117)

 

이 세계가 마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을 때, 여러분 자신의 희열에 매달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남는 삶이니. (118)

 

영웅의 여정에 대해서, 귀환에 대해서

 

18.

일본 속담 중에 인간의 성장에 있어 다섯 단계를 설명한 것이 있다. “열 살에는 짐승, 스무 살에는 미치광이, 서른 살에는 실패자, 마흔 살에는 사기꾼, 쉰 살에는 범죄자.” 나는 여기에 덧붙여, 사람이 예순 살에는 [그때까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칠 것이므로] 친구에게 충고하기 시작하고, 일흔 살에는[그 동안 들은 것들이 모두 오해였음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고 현자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싶다. 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든 살에 나는 나의 자리를 알고 굳게 섰다. (120)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또는 힌두인들이 말하듯 “마르가[marga]'를 따라가서”-여기서 ‘마르가’란 길, 즉 여러분이 겪은 인간 경험이 발자취를 말한다. 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120)

 

삶의 첫 4분의 1은 학생의 삶이며, 그 다음 4분의 1은 순종-단테의 말마따나 “외모의 버젓함과 품행의 선량함”-으로, 이는 사회가 요구하는 유형에 대체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간은 니체가 낙타의 기간이라 부른 것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낙타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자기 등에 짐을 실어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4분의 1은 집주인의 삶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성인의 삶의 책임 속으로 움직여 간 것이다. (121)

 

이 기간은 [니체식으로 비유하자면] 용의 시기에 해당되며, 그 모든 척도는 “너는 할지니” 라는 말로 장식된다. (122)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잔뜩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가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 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중년이 되어서까지도 여전히 착하게 굴면 이득을 얻고, 나쁘게 굴면 벌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뒤처진 것이다. 그들의 유아적 자아 중년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적절치 않다. (122)

 

19.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든지 옛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123)

 

이 중에서 가장 권할 만한 것은 점진적 출가다. 이는 여러분이 하던 일을 천천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중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불가피한 경우, 여러분은 몇 가지 작은 책임을 여전히 지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거기 다른 책임들을 덧붙여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여러분이 거기 다른 책임들을 덧붙인다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분의 새로운 족쇄가 될 것이다.

 

20.

“허약해지면[늙음으로 허약해지든, 병으로 허약해지든]사람은 망고나 무화과나 딸기가 가지에서 놓여나듯, 그렇게 사지四肢에서 해방된다. 이제 그는 다시 근원의 문과 그 근원 자체를 경유하여 삶으로 되돌아온다. (127)

 

21.

여러분은 차라리 자신의 삶을 위한 의례를 갖추어야 한다.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뿐이다. (128)

 

의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알려 준다.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기도는 지금 먹게 될 음식이 한때는 살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준다. (128)

 

여러분 또한 기꺼이 먹힐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도 음식 재료이기 때문이다.

 

22.

나는 여성 특유의 경험이란 이처럼 뭔가를 견뎌 내야 하는 것임을, 따라서 거리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인내, 즉 견디는 힘임을 깨닫게 되었다. (134)

 

소년은 남자임을 '드러내야만'한다. 반면 소녀는 여자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삶이 그녀를 압도하는 것이다. (134)

 

23.

각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하는 순간 ‘모크샤(moksa)’ 즉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137)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을 실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138)

 

24.

종말이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난다는 뜻이다.(139)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140)

 

다만 변화를 위한 노력의 근저에는 ‘마음 편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40)

 

육신이 전구라면, 그리고 전구가 나가 버린다면, 더 이상은 전기가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에너지의 원천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육신을 내버리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바로 원천이기 때문이다.(141)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 모든 사람의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결코 죽지 않는다. [......] 그것은 무기로도 베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도 태우지 못한다. 그것은 물로도 적시지 못한다. 그것은 바람으로도 말리지 못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같다. [......] 모든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피조물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 <‘바가바드 기타> (142)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 잘린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오비디우스- (142)

 

25.

오직 탄생- 낡은 것의 탄생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 만이 죽음을 (진정으로)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의 내부에 끊임 벗는 ‘탄생의 재현’이 있어야 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144)

 

26.

하라키리(할복)을 실시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를 불명예에서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명예로운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

 

27.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으로선 차라리 지금, 바로 여기서 행복한 편이 더 낫다. 여러분으로선 영원한 지금, 바로 여기를 경험하는 것이 더 낫다. ...영원한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지금, 여러분 안에 여기 있기 때문이다.(149)

지금을 살아라. now!!!

 

죽음에 대한 저항은 여러분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150)

 

여러분이 공감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의 죽음을 고통으로 느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의 집착은 그 관계에 있어 일시적인 국면이다. 오히려 여러분의 공감이 바로 영원한 국면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모든 것이 상실되고 나서도 결코 상실되지 않는 어떤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상실감을 상쇄시킬 수 있다. 그 상실되지 않는 어떤 것이란 바로 여러분의 몸과 모든 것을 형성하는 의식이다. 분화되지 않은 의식으로의 돌아감이야말로 귀환이다. (151)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 Coming Into Awareness

-     두 번째 단계(깨달음을 향한 길) : 우리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희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캠벨에 따르면 여기서 희열이란 우리의 가장 높은 종교적 열광을 의미한다. '엔테오스(entheos)'라는 단어는 '신으로 가득 찬'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 최종 목표는 이 세계를 바로 잡기 위해 바깥으로 투사되었던 그 에너지를 안쪽으로 돌려 스스로를 바로잡는 스스로의 진로를 따라 나아가고 여러 세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춤추는 바로 그 경지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9)

 

1.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

명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으로 하나의 이미지나 생각에 집중하려 해도 몇 초 만에 이미 그것과 관련된 다른 생각들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훈련 되지 않으면 정신은 가만히 있질 못하는데, 요가는 그런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155)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려고 해야 하는가?

마음은 바람에 물결이 이는 연못에 비유할 수 있다.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면 그 물결은 빛과 그 그림자까지 깨뜨리고 흩어 놓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흐트러진 형태로 서로 부딪친다. 물이 잠잠해져서 침전물들이 깨끗이 가라앉고 수면이 맑게 빗나는 거울처럼 되어야 흔들리는 물결 위에 흩어졌던 그림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저 높은 곳의 구름과 맑은 하늘, 물가에 서 있는 나무의 그림자, 잠잠해진 맑은 물속 깊숙이 모래 바닥과 물고기들의 모습까지도 그러고 나면 물결치던 수면에서 조각조각 왜곡된 파편들에 불과하던 것이 오직 하나의 이미지로 지각될 것이다.(156)

 

요가의 목적은 그 깨달음과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이다.(156)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요가 수행자는 자신의 온 영혼을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니, 말 그대로 물을 잔잔하게 하는 것이다.(156)

 

여러분이 상위의 차크라들에 도달하려면, 처음 세 개의 차크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생존, 섹스 그리고 힘이.

여러분이 4층으로 올라가려 한다면,

그 건물의 아래쪽 세 개 층을 허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61)

 

객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주체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놓인 최후의 장벽은 여러분이 신이 되는 것을 막는 장벽이다. (163)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신에 관한 속된 관념 - 신에 대한 교리적 관념, 즉 여러분이 신에 관해서 배운 바 - 을 버리고, 신이란 은유로 표현되는 초월적인 것을 취한다는 의미다. (164)

 

신을 버리고 신을 취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보기에는 매우 또렷한 표현이다. (164)

 

2. 발췌 없음

 

3.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167)

 

잔잔한 연못이란 인도에서 흔히 요가라는 관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요가의 첫 번째 잠언은 다음과 같다.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인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168)

 

이것이 구루가 하는 일이다. 내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나하고 똑같이 되거라. 이는 혼자 하는 수행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 (169)

 

진정한 가르침과 마주하고 캑캑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호랑이는 그것을 자기 핏속에, 자기 몸 속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먹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올바른 본성을 건드려 주었기 때문이다. (169)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 모두가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라는 것이다. (170)

 

4.

꿈은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너무나도 유치하고 기괴하며 비도덕적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서 우리는 기만에 찬 우리 삶에 대해 얼굴을 붉히게 된다. - (175)

꿈을 근사하게 표현한 구절.

 

꿈의 비밀이란 주체와 객체가 똑같다는 것이다. 무의식과 자아의식의 관계이다. 자아 의식은 무의식에 관해 알아야만 하며, 꿈은 의식하는 마음을 향해 무의식이 하는 이야기의 어휘다. 하지만 꿈에서나 환상에서나 주체와 객체는 똑같다. (175)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176)

 

5.

모든 인간에게는 자동 본능시스템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179)

 

훈련이나 실험은 필요하지도 않다....전체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고...(182)

삶은 고달픈 것이다!(182)

 

6.

나는 어렸을 때 숲 속을 거닐다가 철조망 담을 발견했는데, 그 옆에는 나무가 한 그루 기대어 자라고 있었다. 그 나무는 철조망을 자기 줄기 속으로 흡수해서 거의 말끔히 삼켜버린 참이었다. 그 나무 안에 의식이 없다고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의식을 지닌 가장 하등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184)

 

어떤 것을 가리켜 그것이라고 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원성을 지니게 된다. 반면 나와 너는 이원성이 안다. 그것은 비 이원적인 자각이다. 그러한 자각을 가지고 일을 하면 온 세상은 삶과 기쁨으로 환해진다. 만물을 너로 파악하여 그것들의 삶을 깨닫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종교적인 명상에 함축되어 있는 최고의 진술이다. 이것은 기계론적 과학자들이 거부하는 시각이다. (185)

 

7.

융은 영혼의 구조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를 외부세계와 연결해 주는 심리학적 기능 네 가지를 구분한 바 있다. 바로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감각이란 뭔가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사고란 그게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감정이란 그 가치를 우리에게 평가해 알려 주는 기능이다. 직관이란 우리가 그 대상이나 그 상황에 내재된 가능성을 예측하게 해 주는 기능이다. 따라서 감정은 가치에 대한 내부의 안내자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보통 외부적인, 경험적인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188)

 

상징학이 놀라운 까닭은 융이 말한 그 네 가지 기능이 거기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융은 다섯 번째의 것, 즉 그 한가운데 있는 것을 가리켜 '초월적 기능'이라고 지칭한다. 상징은 여러분이 바로 이 기능을 공략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189)

 

8.

윌리엄 제임스 : “진리란 곧 유용한 것이다. (190)

 

절대 진리, 바로 이거야! 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니체의 말마따나 '개념의 간질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즉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됨으로써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다. 여러분이 절대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광기의 일종이다.(190)

반지의 제왕

 

이상은 위험하다 / 그러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 이상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수 있으니

 

여러분의 악덕을 포기하지 마라. 그 악덕이 여러분을 위해 일하게 하라.

여러분이 오만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오만을 없애지 마라.

그것을 여러분의 영적 탐구에 활용하라. (192)

 

불완전에 대해 충실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낸 다음, 여러분의 길을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192)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역사의 수수께끼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 해야 한다. 절대진리라는 것은 없으므로.

 

9.

힘과 공간 두 가지가 숭고함을 연출하며,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 자아는 위축된다. 이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여러분 자신이 더 작아질수록, 여러분은 더 많은 숭고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93)

 

10. 발췌 없음

 

11.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 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 가지의 한계도 똑같다. (201)

 

여러분이 하나님을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말을 상기하라.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202)

 

12.

케루빔은 중요한 상징이다. 순수와 자발적 삶의 동산, 대립자의 쌍에 관한 지식 이전의 단일성의 동산이 시간과 역사적 이원성의 세계, 즉 동산의 문에 케루빔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불칼이 장치된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즉 여러분은 그곳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케루빔과 동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204)

 

하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표상하고, 하나는 삶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204)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여러분의 두려움과 욕망이다.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대해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205)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5)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나 구원의 관념은 어딘가를 통과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205)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 로렌 아이슬리 (206)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이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208)

 

만약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의 전통에 집착하여 여러분 혼자만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제거한 셈이 된다. (209)

 

꼭지12의 생각. 구원을 위해서, 해방을 위해서, 초월을 위해서 우리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 자아의 대표적인 얼굴을 두려움과 욕망이다. 구원을 원하면서 스스로를 붙드는 인간의 모순.

 

13.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211)

 

전사(戰士)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의 어떤 사소한 세부사항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는 셈이 된다. 여러분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그 소멸에 대해서도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212)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 종교는 전도를 목적으로 한다. 삶의 목표와 전사의 방식...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글.

 

14

사탄은 뭔가를 범할 수 있는 자아의 축도다. (214)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215)

 

내 생각에 성령에 반대하는 죄는 바로 절망이다. 성령은 여러분이 깨닫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며, 절망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도록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지옥이다. (216)

 

기쁨이 있는 장소를 찾으라. 그러면 기쁨이 고통을 태워버릴 것이다. (216)

 

15.

당신이 오로지 흑인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만 흑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직 인간이 되지는 못한 셈이죠. (217)

삶에 대해서, 태어남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의 나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 그리고 나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볼 것. 나에 대해서 너무 작은 잣대로 평가하고 있지나 않은지.

 

자기만의 지옥. 그는 자신의 한계라고 스스로 설정한 것 너머를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다.(218)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악의? 무지? 오만? 사랑?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것. 진정으로 진심으로 사랑으로 자신을 찬찬히 살피고 정의하는 것. 나는 나를 무엇으로 실현할 것 인다. 스스로 지어놓은 멍에와 한계는 어떤 것들이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존재하는가?

 

16.

영지주의의 <도마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장작을 쪼개면 그곳에 내가 있고, 돌을 들어 올리면 그것에 내가 있느니라." 역사적 예수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 이것은 붓다의 의식이다. 그는 자신의 자아로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살아간 것이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중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광휘는 이미 모든 것 속에 편재했다. (221)

 

문턱에는 항상 위험이 있게 마련이다.(221)

 

‘악마’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222)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을 의식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222)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 역시 닫힌 분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린 대문으로의 변화 가능성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리라. (223)

 

여러분을 가로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할 수 없다. (223)

 

장애의 극복, 내적 상징의 이해, 용해에 대해서

 

17.

상징이 구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것으로 해석될 때 그것들은 계시를 낳게 된다. (225)

 

18.

회개란 여러분이 그 죄를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여러분은 결코 다시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여러분이 그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 여러분은 그러지 않겠다고 진정으로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228)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 권위자가 되었을 때, /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230)

 

19.

즉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237)

 

20.

부활절 또는 부활에 있어서 항상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힘이다. 여러분이 부활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은 그 관계를 강조하지는 못하고, 대신 그 사건의 참화를 강조하기만 했다. (241)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이 사람이 숨쉬는 기본적인 방식이듯이 새로이 살고자 한다면 기존의 주어진 욕망들을 버려야 하고 나로부터 새로이 움트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 그가 아버지에게 간 것, 성령, 이 모두는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 (241)

 

왜 구세주가 그냥 이 세상에 올 수 없었던 걸까? 왜 그는 굳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것일까?

이것은 세계의 고통에 관한 기쁜 긍정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이 세계의 고통과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와중에 신성한 존재의 광휘를 간파하는 것이다. (242)

 

이제는 오로지 인간 자신만이 중대한 신비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그 낯선 존재, 즉 그를 통해 이기주의 힘이 반드시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존재이며, 그를 통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의 이미지 속에서 사회가 개혁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로서가 아니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종족이나 인종이나 대륙이나 사회 계급이나 세기의 그 어떤 이상이나 일시적 제도조차도, 소진됨이 없고 다방면에 걸친 놀라운 신성한 존재, 즉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삶의 척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44)

 

21.

오해는 다름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화적인 상징을

마치 그것들이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고 독해함으로써 생긴다.(246)

 

22.

우리가 과거를 놓아 버려야만 한다.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실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시대적인 종교에 대해 거듭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의 질서에 대해 태어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지평선도 없다. 이것이 우주 시대의 의미이다. 우리는 신비스러운 미래 속으로 자유낙하를 한다. (247)

 

자기보존은 그저 삶의 제2법칙에 불과하다. 삶의 제1법칙은 여러분과 타인이 하나라는 것이다. (248)

 

23.

반면 「도마의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나이까?” 하고 묻는다.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되,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249)

 

이는 이른바광야에서의 시험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광야에서 40일을 지낸 다음 - 이는 히브리인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맨 것을 축소해서 모방한 것이다 - 돌아와서 그때부터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253)

 

이는 붓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붓다 역시 집을 떠나 당대의 주요 스승들 밑에서 배우고, 고행에서 이들을 모두 넘어선 뒤에 깨달음을 얻고 다시 돌아왔으니 말이다. 이 두 사람에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른 모든 스승들을 뛰어넘는 한 스승의 신화는 표준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253)

 

24.

여러분만의 작은 예배당, 즉 여러분 자신의 성스러운 공간을 직접 만드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257)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 - 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즉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 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본인이야 알건 모르건 간에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258)

 

우리 모두에게는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 이후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지속적이고 늘어나는 기쁨이 된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260)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긴장, 정직의 결여, 그리고 비현실적인 감각은 여러분 삶의 잘못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 (261)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성스러운 공간의 정신은 바로 시바춤이다. 모든 의무를 벗어 던진 것이다. (262)

 

향후 집을 지을 계획이다. 그곳에는 반드시 나만의 성소를 만들 것이다. 비울 수 있는 공간을.

의식의 변화를 꿈꿀 수 있는 곳. 그래서 내 삶의 중심으로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는 그런 곳.

 

25.

이틀 뒤 나는 구루를 만나 보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여러분이 제대로 된 길로 접어든 경우에는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기적적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다.

책에서 존재하던 사부님을 실제로 뵈었으니, 그리고 앞으로 많은 시간을 같이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나 또한 그런 기적을 경험한 셈이다. 잘 가고 있는 것이다.

 

26.

붓다의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조각된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명상의 도구이며, 꿰뚫어 봐야 할 무엇이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불성에 관한 명상을 지원하는 도구이지 '저 바깥'에 있는 어떤 실제의 붓다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273)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신을 죽여야 한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모든 고정관념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 (274)

 

27.

'삼사라' 라는 단어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며, 오고 가는 모든 것들과 함께 디오니소스적 시간의 경과에 참여하는 것을 지칭한다. 시간을 형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상을 가져오며, 열분 역시 그런 형상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277)

 

여러분은 삶을 산다. 여러분은 죽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결과에 따라 여러분은 지옥이나 천국 둘 중 한 곳에 가고, 그곳에서 다시 다음 삶으로 돌아온다. 동양의 체계에서는 이 모두가 '삼사라', 즉 존재의 순환이다. '니르바나'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277)

니르바나는 결국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28~29. 발췌 없음

 

30.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 - 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 - 은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의 주위를 밀폐 봉인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니르바나'를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무엇에나 정점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정점에 있을 때, 여러분은 최대한도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286)

 

31.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켜 “저편 물가(彼岸)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정상적인 삶의 경험과 니르바나의 저편 물가 사이를 가르는 강물을 건너갔으며, 모든 대립자의 쌍을 넘어섰으며 모든 둘 됨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289)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290)

 

32.

여러분의 종교는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유대인이나 가톨릭신자가 되는 법을 말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되는 법을 말하는 가? (295)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깨달음 속에 있다. 우리 이웃 속에 적들 속에 자신 속에, 편재하는 신들의 현존에 관한 깨달음 속에.(296)

 

33.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 즉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바의 의미는 "여러분의 합리 체계를 더나 항상 만물 사이로 움직여 나가는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리라. (297)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을 경험하고 또 영과 의사소통한다.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영을 완전히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곧 죽음임을 안다. (297)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이 문제는 내가 항상 와이프와의 약속에서 겪게 되는 사건이다. 다른 시각으로 볼 것.

 

이것은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게 바로 그것이다! 이게 바로 삶이다! 바라보라! 기운이 넘치지 않는가?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아내를 기다리는 것도 더 이상은 지루하지 않다. 심리학적 변화란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경뎌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299)

 

34.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300)

 

일시적으로나마 삶을 뒤로 함으로써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바치는 것이다.(300)

 

두려움과 욕망이 사회적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회가 그런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301)

 

의무는 여러분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여러분에게 부과할 뿐이다. 의무는 곧 다르마다. 다시 말해 다르마는 사회적 다르마로 이해해야 한다. (302)

 

여러분의 판단이 오는 곳에서부터, 여러분의 한계도 온다.(302)

판단에 대한 이면을 보는 통찰.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304)

 

35.

여러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낮은 체계에 헌신하도록 한다. (305)

 

만약 내 안에 이런 종류의 힘, 즉 역사의 물결에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나는 그[역사의 물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니체는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305)

 

다른 사람들이 시킨 일만 하게 되면, 여러분의 자아는 발전하지 않는다. 결국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자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개인적 가치평가라는 것도 없다.(307)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 (논의해 볼 것)

 

여러분이 자기 속에서 성스러운 장소의 대응물 격인 중심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굳이 숲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그 중심으로부터 여러분 자신의 평안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닐 수 있다. 결국 여러분은 그 중심에 근거하고 살아가면서, 여전히 이 세상과 관계하며 남아 있을 것이다. (308)

 

36.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10)

 

37. 발췌 없음

 

38.

남성 = 사회의 질서 / 여성 = 자연의 질서

남성의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은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319)

 

남성의 기능은 행동하는 것이다. 여성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그것’이다. 여성은 어머니 지구이다. (320)

 

39.

신화의 그림 언어에서 여성은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전체성을 표상한다. 영웅은 그것을 결국 알게 된 자이다. (322)

 

40.

할머니 - 새로 나타난 삶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존재(326)

 

그들은 결코 예술 분야의 여성들만큼 풍부한 성취를 거두지는 못한 것 같다. 그들의 성취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반면, 예술가의 성취는 오히려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41.

남성은 반드시 행해야만 한다. 남성은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곧 고통의 길이다. 여성은 그저 있기만 하면 된다. (330)

 

42.

남편이 원하는 대로 굴복하겠다고 선택을 내릴 경우, 그녀의 모험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다른 무엇이든지 대체물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목표는 여러분 자신의 모험에 나서는 것이어야지, 대체물을 지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332)

 

남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334)

 

완전 무장한 기사가 위험한 침대를 향해 다가간다. 그 안에 누우려고 할 때마다, 침대는 펄쩍 뛰고 반항하며 움직인다. 위험한 침대는 여성의 기질을 표상한다. 만약 남성이 그냥 매달릴 수만 있고, 남성이 견딜 수만 있다면, 그 침대는 얌전해지고, 남성은 그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335)

 

43,

어머니는 곧 우리 본성의 어머니다. 따라서 소년이 입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떠나 남자들만의 캠프로 가고, 거기서 입문 의례를 치러야 한다. (337)

 

44.

그 모두가 사랑일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342)

 

 

의식의 세 번째 단계: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 Living In the Sacred

-     세 번째 단계(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환영(마야)의 차단막을 걷어 올리고 지상에 펼쳐져 있는 아버지의 왕국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천체의 리듬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우주의 박동이 우리의 것이 된다.(10)

 

1.

우주 기원의 본질이자 여성성과 개인성의 본질인 마야는 다음의 세 가지 힘을 갖는다.

1. 차단하는 힘 : 사물의 실재적, 내적, 본질적인 성격을 감추거나 은폐하는 힘이다. 어느 산스크리트 경전에서는그는 모든 생물체에 들어 있으며, 각각의 아트만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2. 투사하는 힘 : 환영으로서의 인상과 생각을, 그와 결합되는 욕망이나 혐오와 함께 방출되는 힘이다. 무지(차단하는 힘)가 실재를 은폐한다면, 상상력(투사하는 힘)은 현상을 전개한다. “이 투영하는 힘은 모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을 창조한다. 그것이 신의 모습이건,우주의 모습이건.

3. 드러내 보이는 힘:미술과 조각 그리고 의례와 명상의 기능이며, 곧 뭔가를 알게 하는 기능이다. 마술의 기능이란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에 봉사하는 것이다. (346-347)

 

예술의 첫번째 기능은 내가 일찍이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이라고 명명한 것과 정확히 똑같다. 즉 경험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동산 문의 수문장들 -욕망과 두려움-을 지나쳐 그 안에 위치한 깨달은 삶의 나무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 효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단 한 올의 터럭 속에서 '수천 마리의 황금 사자'를 인식하는 기쁨이다. (348)

 

하나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은 아마 태어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거야.(349)

역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따라서 우리는 어느 한 순간 존재감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가치평가되지 않은, 방해받지 않은 시적 삶의 순간이다. 즉 생각과 감정 양자 모두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코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명제에 의해 소통될 수가 없고, 단지 예술에 의해 암시되기만 할 뿐이다. (351)

 

삶의 목표는 환희다. /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351)

 

2.

미학에 대한 배움 - 전체를 다시 한번 읽어볼 것 (362~356)

존재로서 인식하는 것, 그런 눈을 갖는 것, 기존 개념을 벗는 것, 만물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보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예술가의 눈이고 마음이다. 나는 너무 세속적이고 외설적이며, 이기적인 심상을 가지고 있다.

 

3.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 물론 여기서는 두 가지 자연이 모두 관계된다. 하나는 자연,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358)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 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 - 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광휘 - 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358)

예술이란 삶과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일반 사람들이 미처 깨닫고 파악하지 못한 부분들을 다른 진실의 눈으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과 형식으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함으로써 마음을, 감성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자연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다. 우리 안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었던 자연인 것이다. 그러한 조화는 이러한 리듬의 첫 단계이다. 이것이 바로 기초다. 추상적 예술 또는 모든 종류의 예술은 이러한 리듬의 견지에서 생각되어야 한다.(359)

 

그리고 이런 조화로운 리듬을 막는 두 가지 운동은 붓다의 두 가지 시험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는 욕망으로 여러분이 대상을 소유하게 만들며, 또 하나는 혐오 또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이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그리고 심미적 도취, 즉 마음이나 영이나 또는 그 무엇-욕망이나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의 상태는 나무 아래의 부동지점에서 붓다가 경험한 바에 정확히 상응한다. 그것은실제로부동지점이다. (359)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동일하게 느껴지는 어떤 순수한 황홀의 경험이 나타난다. 그러한 충격은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거에 비추어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옭아매는 신경망에서 생겨나는 온갖 걱정으로부터, 즉 즐기고 싶고 이기고 싶고 예의범절을 지키고 싶은 온갖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신경망에는 오로지 생명,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만이 남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선사들은 이 상태를무심(無心)’의 경지라고 불렀다. (360)

 

4.

조이스가 말한 심미적 이론을 마야의 관념과 결합시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놀라운 깨달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세상에, 무려 80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군.” 나는 심미적 도취의 함의 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마야의 관념과 연관시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러분이 [마야의] 투사하는 힘을 경험하는지, 또는 드러내 보이는 힘을 경험하는지 여부는 여러분의 정신적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361)

 

내적 깊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삶의 목표를 완전히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자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성스러운 공간은 입문과 명상을 위한 장소다. (362)

 

이런 내적 깊이를 달성하면 온 세상이 열리고, 여러분이 삶에서 하던 놀이는 이 광휘로 가득 차게 된다. 성배의 성은 장()-심미적 도취를 경험하는 방법에 의해 탐험되는-속에 있는 것이다. 성배는 여러분이 이런 밀폐 봉인된 장을 경험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완전한 환희와 영적 성취의 감각이다. (362)

 

정지에서 운동으로의 의식의 변화는 곧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이다. 붓다가 벗어난 그 구속들-욕망, 두려움 그리고 사회적 의무-은 그저 일시적인 문제들이다. 여러분은 자발적으로 거기 속박될 수 있지만, 강제적 속박은 마야와 연관된다. 여러분이 이걸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달은 셈이다. (363)

 

내 삶은 한 가지 직업, 한 명의 아내, 한 명의 이미지였다. 바로 성배다. (364)

 

5.

미술이란 동정녀의 매개다. 미술은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의 수단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초월로 나아가는 수단이다. 미술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항상 여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68)

 

설교대는 무기나 다를 바 없었다. 거기에는 힘을 위한 예술이 있었다. 바로 그것의 배치 자체가 그 예술이었다.(369)

 

6.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370)

 

행동에 있어서는 가령 여러분이 의도하는 바가 단순히 행동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유능하게 행동하려는 것인지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긴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잘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피카소처럼 유능한 화가가 되려는 것인가? 여러분이 삶에서 달성하려는 목표가 바로 가기 인가? 그것이 진정한 삶의 희생이다. (371)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 간에 거기에는 학습과 분석의 기간이 있으며, 여러분이 행동하고 있지 않을 때, 여러분의 몸은 움직이고 있지 않은 셈이다. (371)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 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372)

 

책을 한 권 쓰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또한 운동에서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나면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일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여러분은 아직 자신에게는 자발적이지 않은 몸을 움직이기 위해 규칙에 따라야만 한다. (373)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난 다음에야, 여러분은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되고, 그 모두를 깨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73)

 

가령 소네트를 쓰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많은 연습을 하고 나야만 그런 종류의 구조는 단순히 뭔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정도에 도달하게 되며, 실제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정도가 된 다음에야 소네트 형식 없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73)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374)

 

여러분이 학교로 돌아가려고 시도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374)

 

7.

춤이란 / 생명 그 자체의 / 지고한 상징이다. (376)

 

예술은 / 우리를 스스로의 얽힘에서 / 벗어나게 해 주는 한 쌍의 날개다. (377)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379)

 

8.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거야"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직업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지혜가 한 가운데를 가리킨다. 젊음은 가장자리를 가리킨다.(380)

 

그리고 나서 여러분이 직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여러분의 고용주는 여러분을 더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려 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직업에 바쳐야 하며, 여러분은 더 많은 봉급을 받겠지만, 새로운 책임으로 인해 여러분의 자유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381)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381)

 

그러기 위해서는, 즉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 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두어야 한다. (382)

 

이는 마치 훈련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훈련에 돌입할 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며,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다. 여러분의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382)

 

9.

"당신의 문제는 시적 요소가 그 스스로를 드러낼 기회조차 갖기 전에 비판적 요소를 끌어냈다는 점입니다."(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3)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385)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된다.(385)

아들과 "L"이 떠오른다.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386)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386)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일을 비판의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 1인치도 더 움직일 필요가 없다. 기억하라 붓다의 세 번째 시험은 바로 “다르마” 즉 의무이며 남들이 여러분에게 하라고 기대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것은 검열에 대한 두려움이다. (387)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면 후회하리라. (388)

 

10.

여러분이 마을 안에 머무를 경우, 마을이 여러분을 돌봐 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모험을 떠날 경우, 시의적절한 때에 가는 것이 분별 있는 행동이다. 여러분이 삶에서 무엇인가 뒤늦게야 압도된 경우라든지, 불이 켜졌을 때 이미 여러 가지 책임을 떠맡고 있을 경우라면, 이것은 진짜 문제가 된다. 자기 삶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의 삶까지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고갱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그가 산산조각이 난 반면, 그의 예술은 더 훌륭해졌다. 그는 45세가 될 때까지 그림에 진지하게 빠져 들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그의 삶은 그의 그림 속에 있었다.

 

그의 여정은 영웅의 여정이었지만, 그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는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여러분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예술가로서는 승리를 거두었다.(389)

 

그런 다음에는 여러분이 보석을 갖고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 보석을 원치 않는 경험이 생긴다. 이른바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마라는 종류의 일이니, 혹시나 사람들이 여러분을 적대시할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대개는 기다리는 군중이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여러분은 이른바자기 시대를 앞서 나간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즉 한 세대하고도 절반이 지난 다음에야 격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리라. (389)

 

상업예술가들은 그런 말을 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재능의 수용은 다음과 같은 뜻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그걸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390)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390)

 

11.

실러는 두 가지 종류의 예술가를 구분했다. 하나는 그가 감상적인 예술가라고 부른 쪽이고, 또 하나는 그가 '소박한' 예술가라고 부른 쪽이다. 그는 괴테와 자기 자신을 그 모범으로 삼았다. 본인은 바로 감상적인 예술가, 다시 말해서 큰 수입이 없고,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심을 쏟지 않는 예술가다. 왜냐하면 예술은 곧 자신의 삶이며, 그 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그의 예술로 들어가는 것이다. 반면, 괴테는 소박한 예술가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그 지역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예술이란 단지 그의 삶에서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남들보다 더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지만 괴테의 경우는 놀라우리만큼 탁월한 직관, 대단한 정력, 그리고 활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최고의 예술가일 수밖에 없었다. (397)

 

12.

“예술가의 방식과 신비주의자의 방식은 비슷한데 다만 신비주의자에게는 기예가 결여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400)

 

13.

진정한 상징은 우리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가며, 원주의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상징을 통해서 인간은 효과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다른 사람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404)

 

신들의 현시는 편재하고 있건만,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못 볼 뿐이다. 상징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준다. (404)

 

때로는 상징조차도 우리의 눈을 열어 주지 않고, 오히려 닫아 버린다.

우리가 상징을 구체화하면 우리는 거기 집착하게 된다. (405)

 

14.

뱀과 달은 모두 옛 것에 대해서 죽고 각자의 그늘을 벗어 던지고 다시 태어난다. (407)

경외심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409)

신화의 신들은 우리 주위의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409)

 

신들과 여신들은 불멸의 존재의 영약의 화신이나 관리자로 이해되지, 결코 그들 자체가 최상의 상태에 처한 궁극으로 이해 되지는 않는다. 영웅이 그들과의 교통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따라서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은총, 즉 그들을 유지티켜 주는 물질의 위력인 것이다. 이는 기적의 물질이며, 오로지 이것만이 불멸이다. (409)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409)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라.”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주의를 집중하려는 신들에 상응하는 의식의 층위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410)

스스로 자격을 갖추는 것, 스스로를 통해서 이루는 것.

 

15.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분명한 교훈은 삶의 경이와 수수께끼의 지고하고도 신성한 상징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삶의 괴물 같은 성격과 그런 특징에 있어서의 영광을 인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413)

 

모든 사회는 악하고, 슬픔이 가득하고, 불공평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되는 즐거운 슬픔과 서러운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413)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413)

 

시애틀 추장의 편지 (415~418)

 

16

우리는 스스로를 이 지구에서 작동하는 귀와 눈과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귀와 눈과 정신이 우리 몸에서 작동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구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420)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신성화하는 것이다.(420)

 

어떤 미약한 물건도 우주의 수레바퀴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나는 모든 남녀에게 말한다.

백 만개의 우주 앞에서라도 냉정하게 침착한 영혼을 세우라고

...

왜 오늘보다 더욱 많이 신을 보려 하나?

나는 스물네 시간의 모든 시간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신의 어떤 면을 보고 있다.

남녀의 얼굴에서 신을 보고, 거울 속 내 얼굴에서도 본다.

나는 거리에 떨어진 신의 편지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에 신의 서명이 있다.

나는 그 자리에 놓아둔다. 어디로 가든

딴 편지가 틀림없이 영원토록 올 것을 아는 까닭에.(422)

 

17.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425)

 

거대한 풍파 속에서도 신과 같은 침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마치 디오니소스가 표범에 올라타고도 갈가리 찢기지 않은 것처럼. (425)

 

신화는 또는 달리 말해서 신화와 종교는 위대한 시이며, 그와 같이 인식할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물과 사건을 관통해서 서로 완전하며 전체인 어떤 '존재' 또는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이런 기능에 있어서 모든 신화, 모든 위대한 시,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은 합치한다.

 

따라서 모든 신화가 삶을 현대의 삶에 맞도록 가공하기 위해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첫 번째 조건은 한때는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었던 우리 자신과 우주 -우리가 곧 그 귀와 정신으로 작용하는- 의 경이를 향한 지각의 문을 정화하는 것이다.(426)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426)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 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 -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 없이] 하나가 되어-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427)

 

 

3. 내가 저자라면

 

사부님의 말씀과 같이 스승을 앞에 모시듯이 캠벨의 책을 펼쳤다. 신화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 속의 신화의 의미에 대해서 좋은 가르침을 구하는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었다. <신화와 인생> <신화의 힘>에 이어 내가 두 번째로 읽은 캠벨의 글이다. <신화의 힘>은 빌 모이어스가 TV대담 내용을 요약, 편집하여 책으로 출간한 것이고, 이번에 읽은 <신화와 인생>은 다이앤 K. 오스본이라는 저자가 출간한 책으로 캠벨의 세미나를 기초로 하고, 오스본의 기록을 편집해서 만들어졌다.

 

먼저 책의 물리적인 구성에서 두 가지 부분이 책을 집중하여 읽는 것을 어렵게 했다. 첫 번째는  책을 읽는 중에 활자가 이탤릭체인지 정체인지를 구분해야 했다. 왜냐하면 오스본은 캠벨의 저서에서 가져온 인용문들은 이탤릭체와 삽입문의 형식으로 구분하여 기록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중에는 캠벨의 이야기에서 오스본의 이야기와 생각을 짚어가면서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냥 모든 것이 캠벨의 이야기로 이해되어 버렸고 구분하여 기록한 그의 노고는 나의 독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석이 책의 뒷부분에 하나로 정리되어 있는데 책을 읽는 중에 찾아가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절차였다. 최근에 읽었던 김용규 선생님의 책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_>에서 보여준 주석과 참고문헌을 구분하여 주석은 각 페이지의 하단에 기록하고 참고문헌은 뒤쪽에 일괄적으로 배치한 구성은 그런 면에서 매우 탁월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은 책의 내용적인 적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다섯 개의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도입의 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하지만 읽는 중에 지금 내가 어디에 어떤 내용을 읽고 있는지 전체적 맥락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이해력이 부족함에도 기인하겠지만 책의 세부적인 장에서도 두 세 가지의 주제가 한 꼭지 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있었고 이런 경우에는 저자의 생각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짐으로써 몇 번을 되 집어 읽어보아야 했다. 책을 엮은 오스본이 좀더 단계적으로 각 꼭지 별로 작은 제목을 달아 주었으면 하는 그런 초보적인 생각을 했고, 아마도 작은 제목을 붙였더라면 지금의 구성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신화와 인생’은 신화를 통한 인생의 입문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신화에 대한 캠벨의 철학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일과 돈에 대한 자신의 철학, 사랑과 관계에 대한 식견, 결혼과 여성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읽는 나의 삶을 풍요로운 가능성으로 인도하고 있다.

 

떠나라고 한다.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멍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 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다독거리면서 떠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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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 재혼가정의 적극적은 부모역할 왕참치 2015.02.17 4053
717 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 file [3] [2] 숙인 2010.03.31 4055
716 북 No.33 - 장자철학우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file 유재경 2011.12.12 4056
715 39. 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 받는 기업으로 철학하는 인사쟁이 2012.01.22 4056
714 율리시스 - 제임스 조이스 file [1] [4] 학이시습 2012.05.21 4060
713 [4] 생각의 지도 홍승완 2005.04.15 4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