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유재경
  • 조회 수 373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1년 4월 24일 21시 5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에 대해서는 이미 두 차례나 조사를 했기 때문에 지난 번 북리뷰에서는 라마크리슈나, 우파니샤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는 중요한 개념 몇 가지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다.

 

C. G. 융의 <원형심상>

 

원형심상이란 신화의 구성물인 동시에 무의식에 기원을 둔 토착적, 개인적 산물로서 세계 도처에 나타나는 집단적 성격의 형태나 이미지를 말한다. C. 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전집 vol. II, New York and London, 1958) par. 88. 원저가 1937년 영어로 저술됨. Jung Psychological Type의 색인도 참조할 것.

 

융박사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이 원형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다. 니체의 다음 글과 비교해보자. <잠잘 때나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인류 문화의 이런 상태로 데려가고, 그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Freidrich Nietzsche, Human all too Human, vol. I, 13;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par. 89, 각주 17에서 인용했음)

 

루돌프 바스티안의 인종적 <기본관념 elementary ideas>이론과 비교해보자. 이 기본 관념은 최초의 심적 성격(스토아적인 생산적 로고스)과 일치한다. 그는 전체 사회적 구조를 유기적으로 발전되어 나온 <영적, 혹은 심적 근원적 경향>으로 파악해야 하고, 따라서 귀납적 연구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Ethnische Elementargedanken in der zLehre vom menchen (Berlin, 1895), vol. I, p. ix)

 

프란츠 보아스경과도 비교해보자. 그는 인류의 단일성 문제에 관한 바이츠의 전반적 검토가 있은 이후, 인간의 정신적 특성이 전세계에 걸쳐 대체로 동일하다는 논리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The Mind of Primittive Man, 1911, p. 104) 그는 또한 바스티안은 지구 위 어느 곳에 있든지 인류의 기본적인 관념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주장했으며 유사한 관념의 패턴은 어떤 유형의 문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주장과도 비교해보자. <고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현대에서 있지만, 우리 역시 서양인들의 동양의 고대 문명으로부터 죽음, 부환하는 신이란 개념, 그리고 이런 개념이 경배자들의 눈앞에 극적으로 진열되는 엄숙한 제의를 차용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양 종교와 서양 종교에서 더러 발견되는 유사성은 다른 나라, 다른 하늘 아래서도 인간의 마음은 유사하듯이 유사한 동기에서 비롯한, 우리가 줄잡아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 아니다.>(Golden Bough, 1922, p. 38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비교해 보자. <나는 처음부터 꿈 상징의 정체를 알았다. 그러나 내가 안 것은 단편적인 정도에 불과했는데, 경험이 늘어가면서 나는 그 범위와 의미가 얼마나 엄청난가를 이해했다. 이것은 빌헬름 슈테겔 덕분이었다. 슈테켈은 직관의 이해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 직관을 통해 상징의 해석에 도달했다. 우리의 환자들은 정신분석의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이런 종류의 꿈 상징을 놀라운 정도로까지 스스로 해석해 보였다. 이 상징은 비단 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관념 작용, 특히 사람들간에서의 무의식적 관념 작용의 특징이다. 이러한 상징은 민담이나 신화, 전설, 관용어, 잠언적인 결귀, 농담 따위에 꿈에서보다 더 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The Interpretation of Dreams, James Strachey (Standard Edition), V. pp. 350-351)

 

융박사는 <원형>이란 말을 고전, , 키케로, 플리니 연금술 대전, 어거스틴 등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바스티안은 자신의 <기본 관념> 이론이 <생산적 로고스>의 스토아적 개념에 대응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Subjectively known form>의 전통은 신화의 전통과 공존하는데, 앞으로 논의하게 되겠지만 이것은 신화의 이미지의 이해와 이용에 필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천의 얼굴을 한 영웅> P31-32

 

할례 (割禮, circumcision)

 

할례는 남성의 성기 일부, 특히 포피를 의례적으로 절제 또는 절개하는 습속으로 여성의 음핵 또는 소음순의 절개도 포함한다. 할례의 기원은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한다는 점과 대체로 금속제보다 돌로 만든 작은 칼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습속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도유럽어계, 몽골어계, 우랄어계의 민족 사이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할례가 전통적인 의식으로서 이른바 통과의례로 존재하는 곳에서는 주로 사춘기 전이나 사춘기에 시행하고 있으나, 아랍 민족처럼 결혼 직전에 실시하는 곳도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BC 4000년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며, 남자는 보통 6-12세에 할례를 받았다. 이슬람교도, 유대인, 에티오피아인이나 약간의 다른 민족은 출생 직후에 행하였다.

 

유대교도는 남성의 할례를 가장 엄격하게 실시했는데, 구약성서의 창세기 제 17장에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표시로서 아브라함이 99,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 13세 때 일가의 남성이 할례를 했다고 되어있다. 이때 하나님은 계약의 표시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할 것을 명령하고, 이것을 어기는 자는 계약을 깨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개종의 전제로서 할례를 실시했으나 바울로 등이 할례 없이도 개종을 인정함으로써, 이교도들은 50년경부터 할례없이 개종이 가능했다. 할례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성년식 또는 입문식이다. 몇 살 때 하든 그것은 개인이 어떤 집단에 가입하거나 또는 어떤 지위를 획득한 데 대해서 정식으로 승인하는 것을 뜻하며, 할례 의식으로 사회적 지위와 그에 수반하는 권리와 의무가 명확해진다.

 

할례의 목적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이 있다. 신들에 대한 피의 제물이라는 공희설과 그 밖에 고통을 견디는 수단, 결혼 준비, 성기의 신성화, 성교의 위험에 대한 상징적 인지, 위생상의 수단, 상징적인 거세, 혹은 생명을 준 신에게 남성을 보상하기 위해 바치는 희생이라고 하는 설 등이다.

 

미개사회에서 할례는 성년식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예컨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성년식에서는 모든 부족이 할례를 하는 것은 아니며 문신이나 이빨을 빼는 것으로 대신하는 부족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의 어느 한 가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참고자료]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86882

 

신화에 나타난 뱀의 이미지

 

구약성서 <창세기>의 뱀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하와에게 먹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때문에 뱀은 평생 기어 다니고 흙을 먹는 벌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뱀을 악마(사탄)의 상징인 매우 부정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뱀에 대해서 다양한 이미지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간략히 정리해보자.

 

미래의 부처 고타마가 부동의 자리에 앉아 해탈에 이르기 위한 명상을 할 때 폭풍이 이레 동안 휘몰아치는 시기가 있었다. 그 때 뱀의 왕이 뿌리에서 나와 넓은 덮개로 부처를 가려주었다. 부처는 이윽고 이레 동안 네 번째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만끽했다.(P48) 가슴 부분이 넓은 코브라같은 대왕뱀 아래에서 눈을 감고 명상하는 고타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때 뱀은 고타마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함께 하는 조력자로 그려진다.

 

황금 공을 가지고 놀던 공주가 이를 샘에 빠뜨리자 개구리가 건져 나온다. 이 작은 용인 개구리는 머리로 세계를 버티는 심연의, 생성적, 조물주적 힘을 상징하는 지하 세계 뱀의 유아기적 대응물이다.(P72) 이 유아기적 뱀인 개구리는 전령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물로 공주가 곧 자아의 각성 단계에 이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위대한 아버지 뱀이 등장하기도 한다. 위대한 아버지 뱀의 부름은 아이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P204) 성년식을 치르는 아들은 이제 아버지 뱀을 두렵지만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 고비를 넘겨야 유아에서 성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은혜를 갚는 뱀의 이야기도 나온다. 사를마뉴(742-814) 황제는 심판의 나무아래서 뱀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는데, 뱀은 이를 고맙게 여겨, 그에게 이미 죽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부적을 주었다. 그런데 이 부적은 엑스에 있는 우물에 빠졌다. 사라센, 섹슨, 슬라브,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던 이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잠을 자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다시 깨어난다. 중세말, 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사자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 있다.(P404)

 

반면 두려움의 상징으로도 그려진다. ‘머리에다 꽃을 꽂은 처녀는 벼랑 위에서 청년에게 손짓하며 올라오는 길이 있으니 따라 오라오라고 한다. 청년은 그 처녀가 자기 마을 아니면 이웃 마을 처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청년은 그 처녀가 필시 메 Mae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춘 채 망설인다.’(P112) 메는 무서운 존재다. 섬 사람들은 이 뱀은 자기를 본 사람의 친척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을 만나야 한다.

 

세계의 종말에도 뱀은 등장한다. 고대 마야인들이 사용했다는 고문서의 마지막 쪽에는 세계 종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엔 뱀이 이 세상을 뒤덮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늘에 가로 걸린 채, 물을 쏟아 붓는 비의 뱀이 여기에 등장한다.(P469)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머리말

 

P5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P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의 뜻을 거기에다 싣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이렇게 모어 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 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서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P6 일단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P13 변화 무쌍한 듯 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 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일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P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P14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P14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 것? 신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P15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데 이르면 견해가 다소 다를 수 있고, 특정 사례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지만,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을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46)

è  캠벨은 <신화와 인생>에서 여러분들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신화다.’라고 말했다. 나의 무의식 속에도 인류의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나의 꿈이 신화의 구조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P16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주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P16 인간은 너무 발리 모태를 떠난다. 미완성인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주는 방벽은 어머니이고, 이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궁 내 체재기간은 연장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 상황을 형성한다. 양친이 곁에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유아는 긴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 충동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P17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틈입자다. 따라서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유아는 <좋은 것>, 혹은 어머니의 (정상적인) 속성인 옆에 있고, 먹여주고, 보호해 주는 대상에게 애정을 쏟는 한편, 원래 <나쁜 것>, 혹은 <어머니가 없는 상태>에다 쏟던 공격의 화살을 아버지에게로 돌린다. 유아가 죽음과 사랑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오이디포스 콤플렉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P18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P18 많은 사람이 저 자신과 어머니가 짝이 되는 꿈을 꾸었거니와 이에 괘념치 않는 자, 그 팔자가 순탄하리라. – 아버지는 보호자로, 어머니는 유혹자로 체험된다는 지적도 있다. 오이디포스에서 햄릿에 이르는 과정이 그러하다. <신이여, 악몽만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견과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무한 공간의 왕으로 행세할 수 있겠나이다> (Hamlet, 2 2). 프로이트 박사는 <모든 신경증 환자는 오이디포스와 햄릿을 겸한다>고 쓰고 있다. 딸의 경우(이 경우는 한층 더 복잡하다)는 아래에 소개하는 정도로 짚고 넘어가자. <어젯밤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가슴을 찌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꿈은 바뀌어 아버지와 여행길에 오르는 듯했는데, 나는 그때 몹시 행복했습니다.> 이것은 스물네 살 난 미혼 여성의 꿈이다.

 

P19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47)  

è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진리의 발견이다. 그러나 그 진리가 항상 환영 받을 것만은 아니다.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눈 뜨게 되는 것이다.

 

P21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 분석학은 이러한 이미지가 스스로 가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 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감시안 앞에서 저질러진다. 이 전문가가 시험과 비전을 관장하는 원시림 성소의 주의, 즉 고대 비법 전수자나 영혼의 안내자로서의 역할과 성격을 떠맡게 된다. 의사는 신화 영역에 관한 현대의 명인이며, 그 비방과 영험이 있는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P21 이런 이미지에 유념하고 원시 종족 사회나 과거에 융성했던 문명 세계로부터 보고된 갖가지 제의를 검토해 보면, 우리는 이러한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원시 사회 생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통과 제의(출생, 명명, 성인, 결혼, 장례 의식 등)는 이런 단계의 마음가짐이나, 애착이나, 생활 패턴으로부터 심적으로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형식상으로 특이하고 극히 가혹한 단절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은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입문자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좇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었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P23 아득한 옛 비의의 상징이, 여기에서 해방되는 순간에 놓인 환자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P24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잇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 G.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데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염증이 이미 심장을 죄고 있었을 테고 한때 사람의 유혹이었던 지복의 약속으로 부르는 것은 삶이 아니고 죽음일 터이다. 우리는 자궁이라는 무덤에서 무덤이라는 자궁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그것은 꿈의 본질처럼 눈 앞에서 곧 녹아버릴, 견고한 물질의 세계를 향한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흐름이다.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일 뿐이다.

 

P26 문제의 수소는 옛날 미노스가 형제들과 왕위를 겨눌 당시 해신 포세이돈이 보내준 것이었다.

 

P27 왕이 된 이상 한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수소의 재등장은, 맡은 역할의 기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상징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를 자기 소유로 하는 행위는 이기적인 자기 강화에의 충동을 나타낸다.

 

P28 권력 망자(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화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내민 그의 손길이 시들어버린 생명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구축한 문명의 넓이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만에 빠진 폭군의 자아는 그의 사업이 제아무리 번창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 그의 말에 저주를 내린다.

 

P28 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안지도 못한다. 산 속에는 적막조차 없이 마른 천둥만 우르릉거리고 산 속에는 고독조차 없는데 갈라진 흙담 문간에 비웃으며 으르렁대는 시뻘건 얼굴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1)

è  자기 극복을 한 사람이 영웅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기 극복, 그 무엇보다 쉽지 않은 길이다. 개인적인 욕심을 누르고 대의를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토인비 교수가, 6권에 달하는, 문명의 영고 성쇠의 법칙에 대한 연구서에서 지적했듯이, 영혼의 분열, 사회적 무리의 분열은 세월 좋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계획(회고주의)으로도, 이상적으로 설계된 미래를 보증하는 예정표(미래주의)로도, 심지어는 악화된 요소를 다시 접합시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2)

è  제대로 죽어야 새로 태어날 수 있고 새로운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얼마 전 부활절을 앞둔 교회 마당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죽어야 탄생할 수 있고, 탄생해야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죽음의 끈질길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 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P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데 <해탈> <변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중략)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과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 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 G. 융의 소위 <원형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

è  가끔은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고 살고 싶은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웅이라면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과감히 뛰어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닥쳐오는 난관들은 자기 방식으로 헤쳐가야 할 것이다.

 

P32 우리가 찾고, 동화해 나가야 할 원형은, 인류 문화의 연대기를 통해 제의, 신화, 그리고 상상력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촉발해 온 기폭제다.4) 이러한 <영원한 꿈들>은 악몽이나, 고통 받는 개인의 광기에서 나타나는, 마구잡이 상징적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5)

è  꿈과 신화에 유사한 인류의 원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P33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6)

è  국어 사전의 영웅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캠벨은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을 뛰어 넘어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형태로 환원시키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일컫는다. 그런 의미라면 인류 전체를 위한 모험의 완성을 한 남녀만을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도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 토인비 교수는 기독교를, 이 두 번째 과업을 가르치는 유일한 종교라고 선전함으로써 신화의 내용을 그릇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단된 그의 살수는, 오늘날 같은 세계 상황에서의 구원은, 로마 가톨릭에 귀의해야 가능할 것이라는 가정으로 비화한다.

 

P35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P35 놀라운 것은 이 꿈에는, 영웅이 체험하는 모험이 지닌 보편적 신화 양식의 기본적인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P36 은밀한 부름에 귀를 기울이고, 그 길을 따르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고 외로운 횡단 여행, 즉 건너기 어려운 날카로운 칼날 / 시인은 노래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P37 이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 자아 발견과 자아 발전을 꾀하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37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7)

è  나의 아리아드네는 누구일까?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건네줄까? 나의 미궁에서 나 또한 길을 찾고 있는 중이다.

 

P37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8)

è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미궁을 나올 수 있는 단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하찮은 물건일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그것이 단서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주위에 있는 사람들, 물건들을 주의 깊게 봐야겠다. 그것이 나를 미궁에서 꺼내줄 실타래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P38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P38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다.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9)

è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모든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험길을 망설이는 우리, 추악한 것이라 생각한 곳에서 신을 발견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 나를 죽이고, 밖이라 생각했던 곳이 내부였고, 외로우리라 생각한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외롭지 않게 되리라. 나 역시 그랬다. 나를 막다른 골목까지 내 몰았던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였다. 타이틀을 버리면 초라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멋진 타이틀을 얻은 빛나는 얼굴을 한 나를 만났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밖이 보이기 시작했다.

 

2.     비극과 희극

 

P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P39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P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10)  

è  연민과 공포, 내가 가지고 있는 주된 감정인 것 같다. 그런데 이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기 보다는 나에 대한 연민, 외부의 것에 대한 공포라기 보다는 내부의 것에 대한 공포인 듯 싶다.

 

P41 현대 문학은 우리들 앞에, 우리들 주위에,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담하게 부서진 형체를 직시할 용기와 눈길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P42 이 모든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성취한 보잘 것 없는 이야기는 얼마나 초라하고 눈물겨운가. 우리는 실패와, 상실과, 환멸과, 냉소적 무위의 쓰라림이 이 세상의 선망받는 자들의 피를 말린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P42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 있다.

 

P43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 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P44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 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 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여느 때에는 막막한 물질로 뒤덮인 생명의 심연에서 보이지 않게 타오르던 불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되어 비치기 시작한다. 저 무서운 단죄의 손길은, 그제서야 우리들 마음 속의 불멸하는 우주의 그림자로 비친다.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계는 더할 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 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11)

è  신화적 영웅의 길은 내적인 길이고 심연으로 뚫린 길,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고통이 사라지고 생기를 얻는다. 불길이 빛이 되고 하늘의 노래가 들린다. 나도 영웅의 길을 걷고 모험을 완성하고 나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3.     영웅과 신

 

P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46 수자타라는 소녀가 와서 그에게 금 그릇에 떠온 우유죽을 바쳤다.

 

P47 미래의 부처는 한 손을 움직여 손가락 끝을 대지에 갖다댐으로써 땅의 여신에게 거기 앉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시키려 했다.

 

P47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든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람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 정각수(보리수) 아래의 부처와 십자가 나무(구원의 나무) 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 모티브를 통합한다. 부동의 자리와 갈보리산은 세계의 배꼽, 혹은 세계 축의 이미지다.

 

P48 부처는 이윽고 이레 동안 네 번째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얻은 소식을 남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다가 당분간은 홀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 브라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처는 그 말에 승복, 자신이 깨친 도리를 전파하기로 작정하고는, 자신이 속인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정도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했다. – 중요한 것은 Buddahood, 즉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 오직 정각에의 방법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현자를 Muni, <조용한 자>라고 한다. Sakyamuni(고타마 부처의 다른 이름)<Sakya족의 조용한 자, 혹은 현자 Muni>란 뜻이다. 부처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종교를 세웠지만 그 가르침의 궁극적인 요체는 침묵 속에서만 전수된다.

 

P50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끼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았다.

 

P50 장소가 어디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모험의 고전적인 단계를 두루 꿰는, 수많은 영웅적인 인물을 따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P51 <회귀와 사회화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웅이 부처처럼 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정각 상태에 들어버린다면 이 경험의 만족감이 세상의 슬픔에 대한 그의 기억과 흥미와 희망을 없앨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경제적인 문제에 발목을 잡힌 사람들에게 이 깨달음을 전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P52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P53 <우주 발생적 순환>은 성공한 영웅에게 계시로 하사된 세상의 창조와 멸망의 엄청난 환상을 펼쳐보인다.

 

P54 우주 발생적 순환은 모든 나라의 신성한 문헌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고, 그것은 영웅의 모험에 새롭고 흥미로운 전기를 부여한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P54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12)

è  누구나 내부에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가 있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P55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P55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을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4.     세계의 배꼽

 

P58 이 분류는 보이지 않는 원천, 우주라는 상징적 원의 중심인 입구, 불교에서 말하는 부동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데, 세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한다고 일컬어진다. 이 자리 밑에는, 심연의 물을 상징하는 용, 즉 우주적인 뱀의 머리가 있는데, 심연의 물은 생명을 창조하는 신적인 에너지이며, 불멸하는 존재의 세계 형성자인 데미우르고스다.

 

P58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에 어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61 전세계의 회교도 사회에서 하루에 세 차례씩 행해지는 기도도 세계라는 바퀴의 살처럼 일제히 카아바를 향한다. 카아바는, 개인 및 전부를 알라의 의지로 <굴복 islam>시키는, 살아 있는 거대한 상징이다.

 

P62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P62 닮지 않은 것은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P63 그는 한쪽은 붉은색, 다른 한쪽은 흰색, 앞은 초록색, 뒤는 검은색인 모자를 썼다. 이 네가지 빛깔은 세계의 네 방향을 나타내는 빛깔이다. 즉 에드슈는 중심, 즉 세계의 축, 혹은 세계의 배꼽의 화신이었다. – 따라서 록-, -, -, -북이 서로 대응하니, 이 기원전 중국의 오행사상은 에드슈 이야기와도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

 

P65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은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Departure

 

1.     영웅에의 소명

 

P71 이 동화는 모험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이끌어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P72 갑자기 등장한 세력 집단의 예비 선언처럼, 기적같이 등장하는 개구리의 존재는 <전령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개구리가 등장하는 운명의 갈림길이 곧 <모험에의 소명>인 것이다. (중략) 전령관은 귀한 역사적 사명의 수행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의에서 알 수 있듯이,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동화에 나오는 공주의 경우, 전령관의 등장은 사춘기의 도래를 뜻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크든 작든, 삶의 단계나 정도가 어디에 이르러 있든,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P72 작은 용인 개구리는, 머리로 세계를 버티는 심연의, 생성적, 조물주적 힘을 상징하는 지하 세계 뱀의 유아기적 대응물이다.

 

P73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13)

è  새로운 출발을 할 때는 불안하다. 이 불안은 어쩌면 설레임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이것은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P73 동화에 나오는 징그럽고 욕지기나는 개구리나 용은, 태양을 입에 물고 솟아오른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지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정이며, 트리톤이며, 물의 수호신들이 사는 우화에 나오는 용궁의 진주며, 지하의 도깨비 나라를 밝히는 보석이며, 뱀처럼 땅을 괴고, 땅을 감싸는 불사의 바다에 있는 불씨며, 불멸의 밤을 꽃피우는 별이다. 용이 지키는 금 덩어리며,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금단의 능금이며, 황금 양털의 보풀이다.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P77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놀랍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 버리는 경험을 한다. (중략) 그 뒤, 주인공은 잠깐이나마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오나, 생의 의미는 느끼지 못한다. 이때, 어떤 힘에 대한 일련의 조짐이 나타난다.

 

P80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이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중략) 그러나 이곳에는 항상 변환 자재하는 존재, 다형태를 취하는 존재, 뜻밖의 고통, 초자연적인 행위, 그리고 초현실적인 환희가 있다.

 

2.     소명에의 거부

 

P81 현실생활에서는 자주, 신화나 민간 전승에서도 드물지 않게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를 우리는 만난다. 다른 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P82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P82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이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을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 파멸하기도 한다. 48)

è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나를 지옥에 가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P87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14)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è  그렇다. 주저한다고 길을 잃는 것은 아니고 멈춘다고 뒤쳐지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멈춘다고 그 동안 내가 이루어놓은 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멈추면 다시는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알고 있다.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P87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P88 신경증적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 보면 전자는 자기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자는 평균적인 유형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자기를 현재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균적인 유형은, 의지력으로 자기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다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있다. , 자기 자아를 자진해서 다시 다듬는 이 작업에 있어서 신경증적인 유형은 파괴적인 예비 작업을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업은 자의적인 창조 과정은 분리시키고 이를 이념적인 추상성으로 변용시키지 못한다. 창조적인 예술가 역시자신의 재창조 작업에서 시작, 이념적으로 자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자아는 자기 속의 창조적인 의지력을 그 자신의 이념적인 추상으로 변화시켜, 객관화시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내적인 문제에 국한되며, 건설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측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생산적인 작품치고 <신경증적> 성격의 병리적 위기가 없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P92 부정직인 길을 따르는 영웅이나 여걸,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이 두 예화에서 운명지워진 이 한 상의 결합을 완성시키는데 기적이 필요하다. 얼마를 기다려야 삶을 부정하는 마법을 깨울 힘이 생겨 두 아버지의 분노를 삭일 수 있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세계 전역의 모든 신화에도 두루 통용된다. ‘코란에는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문제는 어떤 기적의 힘이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3.     초자연적 조력

 

P93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를 준다.

 

P95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손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럼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 – 꽃가루는, 서남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 믿어지는 심적 에너지의 상징이다. 이 꽃가루는 의식에서 악령을 몰아내고, 삶의 상징적인 길을 알아내는데 널리 쓰인다.

 

P95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테세우스가 미궁의 모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단테의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와 성모라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그레첸, 트로이아의 헬렌, 그리고 성모로 나타나는, 영웅의 보호령이다.

 

P98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4.     첫 관문의 통과

 

P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P107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P111 영웅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 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49)

è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위험한 존재,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꼬리를 감추고 만다.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그 존재의 환영만 보고 미리 겁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수호자는 어쩌면 조력자가 되어 줄지도 모를 일인데….

 

P113 이 두 이야기는 영웅이 겪는 복잡한 관문 통과의 다의성과, 영웅의 공포는 완전한 정신적 무장 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이 관문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잇다.

 

P118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 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분이었다.

 

P119 이 여섯번째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황을 일전한다. 타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신적인 정령)이 된다. 종국의 이름과 형태가 아닌, 마음 속의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단순한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 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P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 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5)

è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영웅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아를 버린 영웅은 한결 강하고 신념에 가득 찬 인물이 되어 있지 않을까

 

5.     고래의 배

 

P120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 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P122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중략)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신전에 접근하거나 들어가는 자들이 기괴한 괴수, 즉 용, 사자, 마검은 든 괴물 살해자, 욕지기 나는 난장이, 날개 달린 소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정 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의 세속적 성격을 사라진다. (중략)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P124 아난다 쿠마리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16)

è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더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이 심오한 말의 뜻은 무엇일까?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는 드높은 이상을 획득할 수 없다는 뜻일까?

 

P124 자아에의 집착을 끊는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에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17)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다.

è  집착을 버리면 가벼운 몸과 마음이 될 것이고 보다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이고 이 힘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제2장     입문 Initiation

 

1.     시련의 길

 

P128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P129 <어려운 임무>라는 모티프의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잃어버린 애인 쿠피도(에로스)를 찾는 프쉬케의 경우일 것이다.

 

P132 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커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P133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인 것이다. 글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P139 우리들이 이어받고, 세계 각처에서 수집된 신화와 전설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은 인간임을 보여주는 조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P143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P143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을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하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2.     여신과의 만남

 

P144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 천경,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점,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방 속에서 위기를 맞는다.

 

P14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야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대문이다.

 

P148 아르테미스(디아나)가 젊은 사냥꾼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잇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P152 여신은 또 때가 되는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P152 지난 세기의 위대한 힌두 비법 전수자인 라마크리슈나(1836-1886)는 우주의 어머니께 새로 지어 바친 캘커타 교외의 다크쉬네와르 신전의 사제였다. (중략) 이 여신은 다름 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P153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다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게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을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 보는 자에 의해 추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P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159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P160 현대의 정신분석가 진료실에서는, 영웅 모험의 각 단계가 환자의 꿈과 환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조력자, 즉 입문식의 사제가 되어 환자의 무의식의 바닥의 깊이를 잰다. 그리고 최초의 단계가 끝나면 환자의 모험은 항상 어둡고, 무섭고, 욕지기나고, 마술 환등 속에서 보는 듯한 공포의 여행으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P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160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가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4.     아버지와의 화해

 

P170 두려워 말라, 모두가 신 안에 거하리니. 오고 가는 형상(그리고 육신 역시)은 춤추는 내 팔다리의 한순간 휘저음이다. 나를 아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P170 <화해 atonement>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초자아로 보이는 용과 죄악 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을 사라진다.

 

P177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 <>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즉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딸은 섭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삼는 것이다.

 

P178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중략)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P183 이 유서 깊은 정신적 유산의 체계를 오늘날까지 상속시킨 그들의 상징적인 의식과 그 의식의 광범위한 흔적이 인도양 저쪽 땅과 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우리 문화권으로 여기는 고대 문화 중심지의 유습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중략) 오스트레일리아의 제의 형식을 우리가 익히 아는 고급 문화의 제의 형식과 비교해 보면, 이 위대한 주제, 영원한 원형, 그리고 그 원형의 작용이 우리 영혼 속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P190 비라코차는 만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자다. 그런데도 지구에 내린 그의 모습을 전하는 전설에는 그가 누더기 차림에 손가락질이나 받는 거지로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베들레헴 여관 문전을 기웃거리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문전에서 걸식하던 제우스와 헤르메스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장난꾸러기 신 에드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신화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는 주제다. ‘코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신이 계시도다>라는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 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그노시스 파의 격언에 따르면 <지팡이를 쪼개어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

 

P191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불멸의 존재가 내뿜는, 망상을 쫓는 빛은, 창조하는 빛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P192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P193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중심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P194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벽한 현현이다. 18)

è  마흔 고개를 앞두고 있자니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아버지가 그 시절 왜 그러셨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이제 내가 갖게 되었다. 내 아이를 생각하니 고뇌가 마음 속에서 자란다. 그런데 행복을 기다리는 현존의 완벽한 현현은 아직 아닌 듯싶다. 내 아이가 헤쳐나갈 인생의 시련들이 보이니 걱정이다.

 

5.     신격화

 

P195 티베트, 중국, 일본의 대승 불교에서 가장 영험이 있는 분으로 믿어지고 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은 연꽃을 들고 다니는 관세음보살이다. 이 분은 존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주>라고 불린다. 티베트의 <기도구>와 징소리에 맞추어 수백만 번이나, 되풀이 되는 기도인 <옴 마니 밧 메 훔(연화 속에 보석이 있다)>도 그 보살을 향한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 소승불교(싱가폴, 버마, 그리고 샴 지방에 남아 있는 불교)는 부처를 인간적인 영웅, 대성인, 그리고 현자로 모신다. 그러나 대승불교(북방의 불교)에서는 부처를 구세주인 대각자, 우주적인 정각 원리의 화신으로 파악한다.

 

P198 보살의 양성구유적 성격, 즉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P199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 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도 지어> 내시었다. 그렇다면 하느님 형상이 어떠했느냐는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찬양할지라, 거룩하신 이께서 첫 사람을 지어내실 때, 그를 양성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여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P205 종족 및 인종적 토템과, 공격적인 집단 행위를 겨냥한 제의는 사랑으로 증오를 정복하는 심리적 문제의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는 부분적으로밖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에고는 이러한 토템과 제식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된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헌신할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그러니까 인류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 그 구성원들의 동정과 보호와는 상관없는 세계로 밀려난다. 왜냐하면 나머지 세계는 그들이 믿는 신의 보호권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랑과 증오의 두 원리가 서로 헤어지는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인류의 역사에는 이러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면 이간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대신 세계를 정화하고 싶어진다. 성도의 율법은 이제 구성원의 집단(종족, 교회, 국가, 계층)에만 적용되고, 이윽고, 재수가 없어서 이웃이 된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 이교토, 토인, 혹은 이방인에 대한 성전의 기치가 오른다.

 

P205 세계는 서로 싸우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가 토템, 국기, 그리고 집단의 숭배자들이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도(세계의 구원자를 따르기는커녕) 지엄하신 그들의 주가 가르친 에고, 에고의 세계, 그리고 에고의 종족 신의 정복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식민지주의적 야만성과, 너 죽고 나 죽다 식 전쟁의 선수로 역사에는 더 잘 알려져 잇다. 그렇게 주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P206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P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 진다. 50)

è  김용규 선생님의 저서 <서양 문화를 읽는 코드, >의 내용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다. 자신의 종교만이 옳다고 생각해 타종교인을 탄압하고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는 모습들은 진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P207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을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19)마태 22:37-40, 마가 12:28-34, 누가 10:25-37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되> (마태 28:19)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윽박지르거나 약탈하거나 속권에 넘기지는 말라고 일렀다.

è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된 해설서와 함께 성경을 꼭 읽어봐야겠다. 제대로만 해석한다면 정말 소중한 지혜가 담긴 책이 성경일 수 있을 것 같다.

 

P207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립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서양 신학자들은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무슨 중요한 종교 문제인 양 덤빈다)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가르치는 일 자체에 부수적인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현학적인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 칼 메닝거 교수는 유대교 랍비, 개신교의 목사, 가톨릭의 신부가 이따금씩 개괄적인 그들의 이론적인 차이에서는 화해하는 일이 있으나, 영생과 관련된 종규나 규정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면 그만 사정없이 갈라서고 만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라마크리슈나가 이미 내린 바 있다. <신은 각기 다른 신도, 시대, 국가에 맞추느라고 서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 그 교리에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 그러나 길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심 전력으로 어느 길이든 따라가면 누구든 신에 이를 수 있다. 얼음 과자를 가로로 먹든 모로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 먹든 달콤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è  김용규 선생님의 <>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가톨릭교회는 1965년에 개최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했지요.’(p769) 라마크리슈나의 해답이 참으로 통쾌하다.

 

P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을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인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0)

è  우리의 기를 꺾는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고, 그 도깨비는 이제 내 안에 있고, 나는 도깨비 안에 있다. 도깨비 때문에 모험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벽을 넘으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나니.

 

P211 우리의 보호자인 사랑하는 어머니는 우리를 저 위대한 아버지 뱀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준 필멸의, 현실적인 육체는 그 무서운 힘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의식이(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P213 보살에 대한 첫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여신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입문자는 남성과 여성은 둘이 아니라 <쪼개진 완두의 두 쪽>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화해 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성을 선행하며 <>라는 대명사는 말의 방편이고, 지도적 원리로 확립된 부자 관계의 신화는 말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살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것이다. 21)

è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불은 어떻게 꺼야 하는 걸까?

 

P214 프로이트 학파의 용어에 따르면, 삶의 욕망(불교의 <카마> <욕망>과 일치하는 <에로스> 혹은 <리비도>)과 죽음의 욕망(불교의 <마라>, <적의와 죽음>과 일치하는 <타나토스> 혹은 <데스트루도>는 내부에서 인간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주위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두 개의 추진력이다.

 

P214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으로 빗나간 욕망과 적의 때문에 비현실적인 공포와 애증의 이중 감정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해주는 기술이다.

 

P215 불교의 팔정도는,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정견,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 진실한 지혜로 구업을 닦는 정어,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정업,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정명, 꾸준히 매진하는 정정진,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정념,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정정이다.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22)

è  <생각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다. 형체도 없는 이 생각이라는 놈이 나를 참 괴롭혔는데.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며 이런 경지에 들면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나도 그런 경지에 오르고 싶네.

 

P217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 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P217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을 이루어졌다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23)

è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 어떻게 나를 불편하게 할 수 있을까?

 

P222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이다.> 24)

è  대추에게서 배웠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가 없고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가 없다.(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하물며 사람인들 어떠랴. 담쟁이에게서 배웠다.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절망의 벽이라고 부를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여럿이 손을 잡고 올라간다.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

 

P222 보살 신화의 세번째 경이로움은, 첫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번째 경이로움(찰라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P223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5)

è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였구나. 내가 그 것에서 생겨나 낳아져 자랐구나. 이제야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네.

 

P224 <말씀은 곧 육신이다> <보석이 연화 속에 있다>인 것이다.

 

6.     홍익

 

P226 꿈은 개인의 삶이 비분화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p233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화는 다분히 황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독서가 위험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235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신학의 분위기에서와는 달리, 익살은 철두철미 신화적인 것의 시금석이다.

 

P248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P248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혜할 무기, 혹은 자신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P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3장 귀환 Return

 

1.     귀환의 거부

 

P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 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연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P256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6)

è  마치 나의 고백을 듣는 것 같다. 멈추지도 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고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고 신기루를 샘물로 알고 살았네. 내 것이 된 순간부터 불길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네.

 

2.     불가사의한 탈출

 

P257 승리한 영웅이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 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P261 영웅의 도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뒤에 남은 다른 사물들이 영웅 대신 대답하여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2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P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P269 이 극동의 전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의 오리페우스와 에우뤼디케 신화,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채집되는 수백 가지의 비유적인 전설들은, 영웅에게 실패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관문 건너쪽에서 애인과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P269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     외부로부터의 구조

 

P275 일본의 미카도는 아마데라스 손자의 직계손들이며, 아마데라스는 황실의 여자 선조로서, 지금도 거국적인 신토 전통에 의해 최고신의 하나로 섬김을 받고 있다.

 

P277 동지에 집 안에다 나무를 장식하는 풍습은, 현대 독일어로는 여성 명사인 <태양 Sonne>을 섬기던 게르만 이교도들 제사에서 유래한 유쾌한 풍습이다.

 

P280 서로 멀리 떨어진 문화권에서 채집한 이 세 가지 예화(라벤, 아마데라스, 그리고 이난나)는 외부로부터의 구조 상황을 충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세 예화에서 초자연적인 힘은 주인공의 시련에 끝까지 동참하다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 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 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P280 신화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4.     귀환 관문의 통과

 

P281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P281 개인의 개성화 상실의 이 공포는, 자격 미달인 개인에게는 초월적인 경험이라는 만만치 않은 짐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영웅에 값하는 인간은 대담하게 쳐들어가 마귀 할멈이 여신이 되고, 용이 신들의 번견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

 

P282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다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27)  

è  나는 아직 무언가를 성취해 귀환해야 하는 영웅은 아니지만, 직장 복귀의 의지가 점점 작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왜 그런 세상으로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까? 출퇴근 전쟁을 해야 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해야 하는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으니 어찌할꼬.

 

P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P290 라이든 병의 전기가 양도체와 접촉하는 경우에 방전하는 것처럼, 신성한 인물 속에 충만한 이 신성성, 주술력도, 훌륭한 양도체와 다름없는 대지와의 접촉으로 방전, 고갈되어 버린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 인물이나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은 이 신성성, 주술력이 방전, 고갈되지 않도록 땅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P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28)

è  분명 충격이 올 것이다. 자신의 모험을 완성한 영웅이라 할지라도 귀환한 세계는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도 이 영웅은 그것을 견질 저력이 있을 것이다. 모험을 완성한 영웅이 아닌가?

 

P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남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P294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니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5.     두 세계의 스승

 

P297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은, 한곳에 붙박혀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가볍게 떠돌아다닌다고 주장한다.

 

P298 이 영원의 순간이, 자기 개인의 운명에 대한 카마르 알 자만의 로맨틱한 자각 너머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두 세계의 문턱을 넘나드는 훌륭한 통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심연을 꿰뚫어보는, 심오한 참으로 심오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

 

P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P305 성 코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케나 우파니샤드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29) 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è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알면서 다 아는 체 하는 사람이 많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파다보면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P306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다기건 거기에 몸을 맡겨 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6.     삶의 자유  

 

P307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30)

è  캠벨이 그랬다. ‘암브로시아가 솟아 오르는 나만의 성소는 어느 경지에 오르면 어디든 될 수 있다고.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독방이 성소가 될 수 있지만 나중에는 내가 있는 그 곳이 바로 성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P307 영웅이 불가사의한 여행을 끝내고 귀환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P307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중략)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P307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을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P313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략) <원래의 형태를 보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31)

è  사부님의 커리큘럼은 참으로 절묘하다. 캠벨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했듯이 절묘하게 이전 책과 지금 책, 미래의 책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비디우스의 변신개념을 이 책에서 만나니 반갑다.

 

4장 열쇠 The keys

 

P316 영웅의 모험은 앞의 도표로 요약될 수 있다.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絶大)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神格化),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모습을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

P317
유입되는 신화는, 이를 유입하는 지방의 풍경과 관습과 신앙에 따라 윤색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틀거리가 빗나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재연되다 보면 고의적이든, 우연히든 와전과 전위가 불가피하다.

 

P318 이런 식으로 불을 일으키는 행위는 성적인 행위를 상징한다. 두 개의 막대기(암막대기 수막대기)는 각각 여성과 남성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불빛은 새롭게 잉태된 생명이다. 영웅이 고래의 배 안에서 불을 일으키는 행위는 성스러운 결혼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P319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야 한다.

 

P321 성령이라는 남성적인 불에 영적으로 응감된 여성적인 물은, 모든 신화의 심상적 체계에 익히 알려져 있는, 기독교식 변형의 물이다. (중략) 이 세례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뜻하며, 그 표면을 휘젓는 것은 밤-바다로 열린 문턱을 넘는 것을 뜻한다. 물이 머리에 뿌려지는 순간 아기는 상징적으로 그 여행을 경험한다. 이때 아기를 인도하는 것은 사제와 대부모다. 이 여행의 목적은 부모와 함께 영원한 자아, 성령, 그리고 은총의 모태를 방문하는데 있다. 이 상징적 행위가 끝나면 아기는 다시 육신의 양친에게로 되돌아 온다.

 

P322 세례에 대한 일반의 해석은 <원죄를 씻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석이다.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장  유출 Emanations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P325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C. G. , 빌헬름 슈테켈, 오토 랑크, 카알 아브라암, 게자 로하임,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활약한 많은 학자들은 꿈과 신화 해석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P325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P326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 온 심리학이다.

 

P326 그러나 이러한 자료의 가치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화가 꿈과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화와 꿈은 같은 근원(즉 환상이라는 무의식의 샘)에서 유래하고 그 문법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P327 그들은 불합리하게 신경증적 투사라는 방법을 통해 무의식을 실제 행위에다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완숙하고, 온당하고 실재적인 이해를, 엄격한 통제 아래 유아기적 원망이나 공포로 되돌려놓는 것일 뿐이다. (중략)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살을 버티고 철학, ,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전교한 우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 채용되었던) 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승된 시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간단하게 공식화한 이 보편적인 교리는, 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사물과 존재)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멜라네시아인들은 <마나>,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며 우주의 변화인 것이다.

 

P330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331 정신분석학자들은, 천국, 지옥, 신화적 시대, 올륌포스 산 및 그밖의 신들의 거처는 모두 무의식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 = 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이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전후항을 바꾼, <무의식=형이상학적 영역>이라는 등식이다.

 

P331 우리가 우주적 근원은 보지 못하고 그 능력에서 투사된 현상계의 형태만 볼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응축되었기 때문인데, 이 의식의 응축 현상은 초의식을 무의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징표로서 세상을 창조한다. 구원은 초의식으로의 귀환과, 이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이것은 주주 발생적 순환, 세계 현현의 신화적 이미지, 그리고 비현현 상태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중요한 테마 및 공식이다.

 

P331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32)

è  깨달음을 얻은 이상 모험을 미룰 수는 없었다. 나 또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모른 척 하려고 애썼지만 깨달음은 어디든 불쑥불쑥 나타나 질문을 던졌다.

 

P332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33)

è  현재의 자신을 재물로 바쳐야 영혼이 깨어날 수 있다. 재물로 바쳐진 나는 죽지만 이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2. 우주의 순환

 

P333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P333 아즈테크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4(, , 공기, )가 각 세계의 주기를 끝맺는다. 즉 물의 시기는 홍수로, 흙은 지진으로, 공기는 바람으로, 그리고 현재의 주기는 불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P335 자이나교도들은 시간을 끝없는 순환으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12개의 살, 혹은 시대를 가진 바퀴로, 12개의 살 또는 시대는 여섯씩, 두 작의 시대로 나뉜다.

 

P338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 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34)

è  이 문단의 뜻을 잘 모르겠다.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겠지.

 

P339 힌두교에서는 < AUM>으로 이 신비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A>는 깨어 있는 의식을 나타내고, <U>는 꿈 의식, <M>은 깊은 잠을 나타낸다. 이 음절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은 미지의 것으로, 그저 <네번째>로만 불린다. 이 음절 자체는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 신을 뜻하나, 침묵은 순환의 개방 및 폐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영원한 신이다.

 

P340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3. 허공에서 공간

 

P342 모든 신화의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펴져 있다.

 

4. 공간의 내부에서 생명

 

P353 공간은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존재하지 않는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P354 한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라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오면 <, >라는 말로 서두로 삼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P355 그는 불행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로 인함이다. 그는 짝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남녀가 부둥켜 안고 있는 형상만큼 커졌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인 이 형상을 둘로 나누었다. 형상은 남편과 아내로 나뉘었다. 그래서 이 인간의 몸은(아내를 얻기 전에는) 쪼개진 강낭콩의 반쪽 같았다. 35)

è  세상에 혼자라면 불행하겠지만, 항상 사람들 속에서 사는 사람은 나만의 고요한 시간도 필요한 법인 것 같다. 결혼은 나의 반쪽을 만나 완전한 인간이 되는 길인가 보다.

 

P357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5.     하나에서 여럿으로

 

P358 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주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후자의 신화 양식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오랜 원초적 암흑이 계속될 동안, 창조된 자식이 주주적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P365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창조의 민화

 

P366 미개한 종족의 신화들 가운데 단순한 기원 설화는 우주 발생적 순환을 깊이 암시하는 신화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신화 체계는, 우주 장막 배후의 신비를 캐려는 시도가 없었던 덕분에 오늘날까지 분명한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명실상부 원시적인(수렵, 사냥, 채근, 채집하는) 집단의 신화 체계와 어림잡아 기원전 6천여 년경부터 농업, 낙농, 목축 기술로 대두된 문명인의 신화 체계는 구분이 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시적인 종족이라고 부르는 집단은 대개 식민지 주민들이다. 말하자면 고급 문화 중심에서 소외도어 보다 단순한 사회에의 필요를 느낀 집단이다.

 

2장  처녀 잉태 The virgin birth

 

1.     어머니 우주

 

P375 창조자의 부성적 측면보다는 모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신화 체계에서 이 원초적 여성은 태초의 세계를 지배하면서, 남성에게 맡겨졌을 법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원초적 여성은, 배우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처녀다.

 

2. 운명적 모태

 

P380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P389 사람들은 이 영혼과 육체가 더불어 뒤틀린 세계에서 다시 한번 화신한 심상의 시가를 읊어줄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우리는 우리의 전승 신화에 버릇 들어져 있다. 신화는 어느 곳에든, 갖가지 얼굴로 존재한다.

 

4.     미혼모의 민화

 

3장  영웅의 변모 Transformations of the Hero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P396 이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당한 뒤로 창세기가 그러했듯이, 창조 신화가 전설에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형이상학은 선사학에 자리를 물린다.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P400 초기 우두사신의 문화 영웅은 자연계의 창조 능력을 타고났다. 그의 형상이 초자연적인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영웅은, 후세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하강>해야 한다. 그러나 전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에 국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을 제한하는 지평을 넘어갔다가, 보통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신념과 용기로 선약을 얻어 돌아오는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을 만든 사람들에겐 탄생의 순간, 심지어는 잉태의 순간에 영웅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생애는, 그의 모험을 절정으로 하는 엄청난 장관으로 그려진다.

 

P400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중략)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36)

è  누구나 내부에 전능한 자아, 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P400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 예수를 인간의 전형으로 모방하거나, 그를 신으로 묵상하는 문제에 대해, 기독교도들이 갖는 태도의 역사는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사를 단념함으로써, 스승으로서의 예수를 곧이곧대로 따른 시대(원시 기독교)

(2)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내재적인 신으로 묵상하고, 세상에서의 삶을 신의 종으로 살던 시대(초기 및 중세 기독교)

(3)   묵상을 고무하는 모든 수단을 거부하면서도, 세상에서의 삶을 이제는 보이지 않는 신의 종 혹은 전달자로 사는 시대(프로테스탄트 기독교)

(4)   예수의 고행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인간 존재의 전형으로 해석하는 시대(개혁 기독교)

 

P401 1 <영웅의 모험>에서 우리는 심리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첫 번째 관점에서 그의 구원적인 행적을 검토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두번째 관점에서 이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두번째 관점에서 영웅의 행적은, 형이상학적 비의의 상징이 된다.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영웅 자신의 행적이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P402 영웅의 첫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 자재자가 되는 것이다.

 

P409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P411 그이 입안에는 <삼계>인 우주가 통째로 들어있었다. 양어머니는 홀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아들을 삼계의 주재자라고 생각하다니, 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인가

 

P413 유아기 이야기는 영웅의 귀환 혹은 그의 정체가 드러남으로 그 결론에 이른다. 즉 오랫동안 묻혀 지내던 영웅의 암흑기가 끝나고 그의 진정한 성격이 노출되는 것이다.

 

3.     전사로서의 영웅

 

P419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P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을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다.

 

4.     애인으로서의 영웅

 

P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이 여성은, 수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구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P431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를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가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37)

è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하고 자기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조력자가 나타나고 어려움이 비켜가게 된다고 한다. 나 자신이 스스로 구를 바퀴가 되어야 한다.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P432 행동하는 영웅은 우주 순화의 주체이며 처음으로 이 세계를 움직였던 추진력을 생생한 사건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P432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첫번째 영웅의 상징이 명검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상징은, 권위의 홀장, 혹은 율법서다. 첫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를 얻는 것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P434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6.     구세주로서의 영웅

 

P437 아버지의 집에서는 두 단계의 이니시에이션이 구분된다. 첫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 이 두번재의 보다 높은 자각에 이른 영웅은 구세주, 한 차원 높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지고한 존재의 화신이다. 그들의 신화는 우주적인 조화를 지향한다. 그들의 언어는, 권위의 홀장과 율법서의 영웅이 뱉어낸 어떤 말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

 

P440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38)  

è  소유할 수도 없고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다.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일 분이다.

 

P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 시험자, 무섭과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P442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39)

è  자아를 내어 던지지 않으면 욕망의 노예가 되어 폭군이 될 수 있다. 자기극복이 영웅의 1단계 소명일 것이다.

 

P442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P442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종말 그리고 재개의 비밀이다.

 

7.     성자로서의 영웅

 

P443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P443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서왔고, 가르쳐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 것 없다. 이제 바라건대,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

 

 

8.     영웅의 죽음

 

P445 영웅의 전기 마지막 장은 영웅의 죽음, 혹은 (저승을 향한) 떠남의 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전생애가 요약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P448 아브라함이 죽음에게 말했다. 죽음의 자기 배덕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머리가 둘인데, 하나는 뱀의 얼굴이요, 또 하나는 칼날 같았다.

 

P449 샤를마뉴처럼 영웅은 잠을 자다가도 운명의 때가 되면 일어난다. 그는 다른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있다.

 

P454 위대한 신화가 다 그렇듯이 이 이야기는 꽤 유머러스하면서도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깨어있다.

 

P456 제형이 무상하구나. 태어난 것, 모습을 나타낸 것, 죽기로 마련된 것들이 어찌 이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구나.

 

P456 축복받은 자는 첫번재 무아에 이른다. 첫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두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두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세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세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네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네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의식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무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으로 들어간다. 지간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이른다.

 

4장  소멸 Dissolutions

 

1.     소우주의 끝

 

P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40)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이것은 바로 개인이 소멸되는 순간, 사자의 머리맡에서 들여주는 기도다. 즉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è  개인은 놀랄만한 권능을 가진 영웅이다. 내부를 들여다 보면 그 가능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을 깨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일깨운 사람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P459 허약해지면(늙음으로 허약해지든, 병으로 허약해지든) 사람은 망고나 무화과나 딸기가 가지에서 놓여나듯, 그렇게 사지에서 해방된다. 이제 그는 다시, 근원의 문과 그 근원 자체를 경유하여 삶으로 되돌아 온다.

 

P462 단테의 신곡은 이 단계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옥편>은 육신의 욕망과 행위에 얽매인 영혼의 참담함을, <정화편>은 육신의 경험이 영혼의 경험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천국편>은 정신적 자각의 단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2.     대우주의 끝

 

P468 십만 년이 지나면, 우주의 순환 주기는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가 되면 육감적인 쾌락에 빠진 천상의, 로카비유아스라는 신들은, 머리를 풀어 바람에 흩날리고,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빨갛게 물든 옷을 어지럽게 입은 채 세계를 방랑한다.

 

469 세계의 종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엔 뱀이 이 세상을 뒤덮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늘에 가로 걸린 채, 물을 쏟아붓는 비의 뱀이 여기에 등장한다.

 

P471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è  마치 현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 정말 세계의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는 것일까?

                  

P473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들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Myth and society

 

1.     변신 자재자

 

P477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신화 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 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 타오르는 불꽃에게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41) 

è  신화의 해석은 끝없이 변신하여 다른 모양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P477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P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2)

è  세계의 석학들이 신화 체계를 다양하게 정의했지만 모두 관점의 차이인 것 같다.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P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 밖에 없다. (중략)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P479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무명의 세포가 사라지듯이, 개인이 속한 세대는 사라지고, 시간을 초월한 형상만 남는다.

 

P479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P480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43)

è  그렇다. 제대로 존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P481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P482 중세의 성직자들 및 인도의 요기들의 고행, 헬레니즘 문화의 비의, 고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은, 개인의 의식적인 관심을 그 외부적 의상에서 돌리는 기술이다. 명상에 드는 입문자는 준비 작업으로서 자기 마음과 정신을 세속적인 사건에서 분리시키고, 자신을 존재의 핵으로 몰고 간다.

 

P482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그 경지에서는 되돌아나올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경지에서 미합중국, 어디어디에 사는 모모 씨라는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사람도 없다. 요컨대 사회와 의무는 분리된다.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

 

P482 이것이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내려다보는 단계이며, 부처가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필요한 단계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끝나면 입문자는 본질 자체처럼, 고삐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뿐인가? 세계라는 것 역시 그 본질이다.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이 둘은 하나다. 이때부터 은거, 운둔은 필요없다. 영웅이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의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그에게 세상을 보는, 완전성에 이른 눈이 있기 때문이다.

 

P483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44)

è  시련은 어쩌면 훈련일지 모른다. 나를 단련시켜 내부에 존재하는 신을 찾아내기 위한 훈련이 바로 시련인 것이다.

 

3.     오늘날의 영웅 

 

P483 그러나 모든 것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요원하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의 민주적 이상,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발명,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변형시킨 나머지 저 유서 깊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상징의 우주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토해 낸 신기원을 예고하는 숙명적인 선언처럼, <신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수천 가지 장법으로 우리에게 들려왔다. 그것은, 현대의 영웅 이야기, 인류가 성숙하기에 이르기까지의 신기한 이야기다. 전승의 굴레인 과거의 마력은 확실하고 강력한 타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되었다. 신화라고 하는 꿈의 집은 이제 무너지고 없다. 마음은 깨어 있는 의식 쪽으로만 열려 있다.

 

P484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볼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P485 오늘날의 사회는 지구지, 경계선에 갇힌 국가가 아니다.

 

P485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종교도 일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교들도, 선전과 자화자찬의 도구로서, 갖가지 도당짓기의 요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P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은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45)

è  이 책의 결말 부분이다. 영웅이 할 일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저자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역자후기

 

P489 <명저>에 걸려 있는 고압의 전하가, 여유로운 정신으로 사상을 대하여야 할, 그러니까 사상이 덜 여문 독자와의 만남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전 현상을 일으키고, 이 방전 현상의 체험이 독자로 하여금 그 감독의 여신으로만 가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적 색안경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략) 역자가 말하는 <명저의 해독>이란 명저에 대한 심술궂은, 극단적 찬양이 될 터이다.

 

P489 ’우주와 역사, ‘샤마니즘, ‘인간과 상징,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같은 저자의 4권으로 된 주저, ‘신의 가면이다. 이러한 책들을 신화학, 종교학, 심리학적 관심을 두루 싸잡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것을 앞세워 관심하는 분야의 책이다.

 

P489 이 연구를 집성한 노작이 바로 4부작으로 된 그의 주저인 신의 가면인데 본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바로 이 주저의 서곡인 셈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융파 심리학의 입장(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을 고유하는데, 꿈의 구조물인 원형 패턴은 곧 고대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는)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인간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려는 한편 현대 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 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야심적인 작품이다.

 

P491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바 <꿈의 작업>, 즉 응축, 치환, 형성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웅이 공유하는 경험인, 비정상적인 탄생, 어린 시절의 고난, 방황, 조력자와의 만남, 기적적인 권능의 획득, 귀환의 도식이 캠벨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P491 그는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지 않고, 우리가 나날의 생활에서 만나는 문제와 관련시키거나, 세계 여러 나라의 예화를 넉넉하게 소개함으로써 독자가 시적 상상력으로 이를 그 나름대로 해석하게 한다.

 

P492 오랜 세월, 우리 숨줄이 닿아 있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중략)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도 좀 기웃거려 보는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3.    내가 저자라면

 

기존에 읽었던 <신화의 힘> <신화와 인생>의 경우 캠벨의 저서가 아니라 대담 혹은 강의 내용을 제 3자가 엮은 것이라 책의 구성 면에서 다소 아쉬운 점들이 있었다. 캠벨이 직접 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전세계의 영웅 신화의 유사성을 비교 분석한 것으로 그의 신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그 깊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저서이다. 캠벨은 이 책에서 성경, 불교 경전, 남아라비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즈텍, 고대 일본, 인도 힌두교, 폴리네시아, 웨일즈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신화, 민담, 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흥미롭다. 이 책이 후에 나올 <신의 가면>의 서곡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수많은 오탈자들과 생소한 낱말들 때문에 캠벨의 이야기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우선 오탈자들부터 정리해 보았다.

 

1)     차례의 두 번째 페이지에 <2부 영웅의 모험> <2부 우주발생적 순환>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본문의 내용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2)     P6 네 번째 줄의 <실는> <싣는>의 오기다.  

3)     P31 주석 네 번째 줄의 <씌어진> <쓰여진>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또한 중간에 있는 루돌프 바스티안의 언급에 <,> <>이 아닐까 싶다.

4)     P73 열 두 번째 줄의 (<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에서 <은 삭제되어야 한다.

5)     P95 맨 아랫부분의 띄여쓰기 <파우스트 에서는> <파우스트에서는>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6)     P103 일곱 번째 줄의 <빛은> <빚은>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7)     P125 첫 줄의 <스무 나흩날> <스무 나흘날>로 표기되어야 한다.

8)     P133 일곱 번째 줄의 <주술사란, 이하에서 >가 없다.

9)     P167 밑에서 여덟 번째 줄의 <버로> <바로>로 수정되어야 한다.

10)  P177 첫 번째 줄의 <요비스> <죠브시>로 수정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또한 밑에서 두 번째 줄의 <> <>으로 수정되어야 맞다.

11)  P178 일곱 번째 줄의 카텍시스 설명에서 (가 없다.

12)  P193 밑에서 여섯 번째 줄의 <> <할 수>가 맞다.

13)  P194 열 네 번째 줄의 <> <>가 맞다.

14)  P198 열 한 번째 줄의 <층면> <측면>이 맞다.

15)  P269의 여섯 번째 줄의 <한 다>는 띄어쓰기 오류다. <한다>가 맞다. 같은 줄의 <불가능하게 하게>에서 뒤의 <하게>는 삭제 되어야 한다.

16)  P278 열 번째 줄의 <아난다> <이난다>가 맞다.

17)  P300 밑에서 일곱 번째 줄의 <주님게서는> <주님께서는>이 맞다.

18)  P306 중간에 self-atonement에서 >이 빠졌음

19)  P317 밑에서 두 번째 줄의 <고위적> <고위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20)  P332 두 번째 단락 끝부분의 <편의수단일 분> <편의수단일 뿐>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21)  P489 열 세 번째 줄의 <자못> <잘못>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자못>생각보다 매우의 뜻으로 문맥에 맞지 않는다.

 

1985년 초판이 나왔고 1999년 개역판이 나왔는데 이 수많은 오류들을 왜 찾아내지 못했는지 의아하다. 또한 역자 이윤기는 이 책으로 <11회 오늘의 좋은 책> 번역상을 탔다고 하는데 심사위원들이 이 책을 꼼꼼히 읽어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책의 교정이 책의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정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 책은 실밥이 너덜너덜 정리되지 않고, 보풀과 주름으로 가득한 명품 양복 같은 느낌을 준다.

 

다음은 생소한 용어들의 의미를 정리해 보았다.

 

1)     직심스럽게 : 한번 먹은 마음을 굳게 지켜 나가는 성질이 있다.

2)     호부 : 액막이, 부적, 주부로서 주력 또는 영위를 지니고 있어 소유하거나 휴대하는 사람을 비호한다고 믿어지는 물건

3)     허섭스레기 : <허접쓰레기> 표기가 오류다. 좋은 것이 빠지고 난 뒤에 남은 허름한 물건을 뜻함

4)     부시 :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어나게 하는 쇳조각

5)     번견 : 집을 지키거나 망을 보는 개

6)     운두 : 그릇이나 신 따위의 둘레나 둘레의 높이

7)     야회복 : 밤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입는 서양식 예복

8)     헌헌장부 : 외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당당한 남자

9)     갈마듦 : 교체반복

10)  배덕 : 도덕에 어그러짐

11)  제행 :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몸, , 뜻으로 행하는 모든 선행

12)  적멸 : ()의 세계를 영원히 이탈한 경계, 곧 열반

13)  번제 :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시대에 야훼신에게 올린 가장 일반적인 동물의 희생의식

14)  사자후 :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라는 뜻으로 석가의 설법에 모든 악마가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말. 진리나 정의를 당당히 설파하는 것 또는 크게 열변을 토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서 전등록에 나온다.

15)  비루하다 :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16)  시살 : 부모나 임금을 죽임

17)  고구 : 자세히 살펴 연구함

18)  틈입자 : an intruder, a trespasser

 

역자 이윤기는 순우리말과 한자에 조예가 깊은 듯 하다. 1947년 생이니 한자를 읽고 쓰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한자를 배운 70년대 생인 나도 이 책에서 언급한 한자들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보다 젊은 세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주석에 그 뜻을 간략히 언급해 주는 어떨까 한다.

 

내가 읽은 캠벨의 두 저서에 비해 이 책은 캠벨이 쓰는 문장의 특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내가 파악한 그의 문체의 특성은 매우 길고(한 문장의 경우 6줄이 넘는 것들이 많음), 쉼표(,)로 연결된 것이 많았다. 이러한 문장의 경우 오역의 가능성이 높은데 역자 이윤기 역시 쉼표(,)를 이용해 최대한 캠벨의 문체를 살리려 노력한 것 같다. 하지만 간혹 너무 많은 쉼표로 인해,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직역 보다는 의역에 무게를 둔다면 긴 문장을 잘라서 그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는 것을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텍스트 중간에 신화와 관련된 그림이나 조각상의 사진이 나오는데 해당 본문과의 관련성을 찾기가 힘들다. 사진이 글과 연관된 곳이 배치되면 독자들의 이해를 더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제1부 영웅의 모험은 출발-입문-귀환을 거치며 영웅의 모험이 완성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제2부 우주발생적 순환은 키 메시지를 간파하기 어려웠다. 2부의 3장인 영웅의 변모의 경우 영웅의 종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제1부 영웅의 모험 전으로 위치를 바꾸면 어떨까 싶다. 제목에 충실해 영웅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용이 쉽지 않은데다 시간에 쫓겨 캠벨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주에도 캠벨과 함께 신화의 세계를 거닐어 봐야겠다.

 

두 번 읽어도 이 책은 여전히 어렵다. 내가 저자라면 더 쉽게 쓰겠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쓰기는 쉬우나, 쉽게 풀어 쓰기는 매우 어렵다. 다시 한번 <>의 저자 김용규 선생님의 지식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의 경우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고대-중세-근대-현대까지 인류의 전 세대를 엮어내느라 너무 장황해져 버렸다. 이 책의 경우 신화에 나타난 영웅의 이미지라는 주제에는 매우 집중하고 있으나 그 설명과 풀이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왜 여자 영웅의 이야기는 없을까?’ 캠벨은 그의 저서 <신화와 인생>에서 이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룬 작품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 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각하느냐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은 이렇다. 여자 영웅의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 영웅이 수없이 많았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영웅으로 추대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며, 여자 영웅이 존재했다 해도 후세를 위해 글로 남겨지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캠벨에게 딸이 있었다면 여자 영웅 이야기를 찾아내어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이 바로 여자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IP *.35.19.5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72 #17-도덕경 [2] 왕참치 2014.08.03 3732
871 #37. 끌림(이병률) 땟쑤나무 2014.02.24 3734
870 변신이야기1,2 (2) file 세린 2012.04.18 3735
» 북 No. 4 -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두번읽기> 유재경 2011.04.24 3735
868 바라는대로 이루어진다 [11] 한명석 2007.10.18 3738
867 [38]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2] 2009.01.11 3742
866 (No.1) 구본형 [익숙한것과의 결별] 생각나무 - 9기 서은경 file [7] tampopo 2013.05.05 3742
865 대산주역강의 &lt;1&gt; [3] 정경빈 2006.07.19 3744
864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김연주 2010.08.02 3748
863 #33_장자 임동석역 동서문화사 서연 2012.12.17 3749
862 '선비답게 산다는 것' - 안대회 희산 2010.01.12 3750
861 어제까지의 세계 앨리스 2014.11.11 3757
860 [리뷰] 현대인도 못알아먹는 현대미술_조영남 file [2] 양갱 2012.01.02 3758
859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존 코터 외)-完 오병곤 2005.09.27 3761
858 [명상록] -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 저/ 천병희 역-도서출판 솔 김연주 2010.11.07 3762
857 [양갱]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file 양경수 2011.09.06 3764
856 북 No.46 - 알랭 드 보통 '불안' file [1] 재키 제동 2012.03.12 3767
855 (17) 영적 비즈니스 -아니타 로딕 [3] 이한숙 2008.09.09 3773
854 &quot;88만원세대&quot; 승자독식게임의 시대 [5] 김나경 2007.10.28 3775
853 가지 않은 길 ; 인문적 스포츠 교육론 서설 [1] 백산 2009.12.28 3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