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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7일 03시 21분 등록
1. 하워드 가드너에 대하여

<약력>

1943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출생

미국 하버드 대학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 책임자, 운영위원장

미국 보스톤대학교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육심리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1.jpg  하워드 가드너2.jpg

 

심리학자이며 하버드 대학교 교수. 보스턴 의과대학 신경과 부교수. 인간의 사고 능력 배양과 창의성 개발을 목표로 하는 하버드의 연구 그룹 'Project Zero'의 책임자이며 유명한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 이론의 창시자이다. 총 18권의 책과 수백 편의 학술 보고서를 발표했고, 존 듀이 이후 최고의 교육학 이론가로 손꼽히고 있다. 1981년에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Prize Fellowship)을, 1990년에는 미국 교육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그라베마이어상(Louisville's Grawemeyer Award)을, 2000년에는 구겐하임 펠로십(Guggenheim Fellowship)을 받았다. 저서로는 [열정과 기질], [체인징 마인드], [마음의 틀], [다중지능: 인간지능의 새로운 이해], [비범성의 발견] 등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정치와 역사에 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신문과 시사 잡지를 탐독했고 뉴스도 열심히 청취하곤 했다. 리더십에 대한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아마도 역사와 뉴스에 대한 오랜 관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잠재 의식 속에서 이 책을 수십년간 준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통찰과 포용 (23쪽)-

 

가드너 부모는 일찍이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해 왔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즐겨 쳤으며, 이를 통해 많은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가드너는 1965년 하버드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대학의 경제학과에서 1년간 수학한 뒤, 다시 하버드대학으로 되돌아와서 발달심리학을 전공하여 1971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스톤대학에서 Postoc과정을 밟았으며, 이 과정이 가드너로 하여금 두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인지적인 문제들을 연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드너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과 그것의 발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피아제 이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피아제 이론보다 더 깊이 인간의 정신을 파고 들었다. 피아제 이론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를 너무 좁게 평가하고 있다고 재평가 하면서, 인간의 사고 전체를 이끄는 한 가지 형태의 인지는 없으며, 적어도 일곱 가지의 지능이 있고 이들은 마치 파이의 조각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1981년 가드너는  HPZ를 지원하기 위해 5년간의 Macauthur Prize Fellowship을 받는데 , 이 연구자금은 천재학자들만이 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연구 자금을 수여하는 재단에서는 가드너가 인지발달 부분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으며, 훗날 그의 연구가 널리 인정받는데 힘을 실어 준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부분 그의 연구의 대상은 두 부류인데, 첫째는 일반 아동과 영재아들이며, 둘째는 두뇌손상을 입은 어른들이었다. 가드너는 이 두부류의 특성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다중지능 이론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십여권의 책과 수백편의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저서는 21개 외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고 한다.

 

<다중지능 이론의 창시자 >

다중지능이론은 하워드 가드너 교수가 제시한 이론으로 인간은 IQ와 같은 한 가지 지능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지능이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도 2010년 EBS <아이의 사생활> 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다중지능이론의 실제 적용 및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 반향을 일으켰었다. 국내에 많은 다중지능 검사센터가 있으며, 사교육 시장에도 다중지능이론이 적용되어 교육시장에 퍼지고 있다.

여덟가지 다중지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인적으로 간단한 검사를 했을 때, 나의 결과는 <개인이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이 좀 높아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상외로 <자연관찰지능>이 높지 않았는데, 나의 바램과 실제 능력간의 차이를 알게해주었다.  

1. 언어지능

 : 말과 글이라는 상징체계에 소질과 적성을 보이는 능력

2. 논리수학지능

 : 숫자나 규칙 명제 등의 상징체계를 잘 익히고 창조하며 그와 관련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 내는 능력

3. 지각공간지능

 : 도형 및 입체설계 등의 상징체계에 소질과 적성을 보이는 능력

4. 신체운동지능

 : 자기 자신을 느끼고 이해하는데 예민하고 유능하며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잘 풀어내는 능력

5. 개인이해지능

 : 자기 자신을 느끼고 이해하는데 예민하고 유능하며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잘 풀어내는 능력

6. 대인관계지능

 : 타인의 기분이나 동기 바람을 잘 이해하고 그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

7. 자연관찰지능

 : 식물이나 동물 또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인식과 분류에 탁월한 능력

8. 음악지능

 : 가락 리 듬 소리 등의 상징체계에 민감하고 창조하는 능력

 

  

동영상은 다중지능 이론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방법과 한가지의 평가방법만을 가지고 교육을 하고 있는 교육 시스템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그의 신념을 느낄 수 있다.

 

<창조성 개발의 대가> - 교육이론가

현재 하버드 대학의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의 책임자이자 운영위원장인 가드너는 줄곧 인간의 정신능력 발달과 교육에 관한 일관된 연구를 진행해 왔다. 프로젝트 제로는 인간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의 발달 과정을 근본적으로 파헤치는 인간개발에 관한 야심찬 연구기관이다. 가드너는 25년이 넘게 이 연구소를 이끌어오면서 지능과 창조성, 교육방법론, 두뇌개발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들을 통해 인간의 창조적 기질에 관한 기본 틀을 제시하였다.

 

<참고 자료>

네이버 책소개 : 통찰과 포용(북스넛, 2006)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614053

열정과 기질, 북스넛, 2006

네이버,구글 검색 : 다중지능

하워드 가드너 개인 홈페이지 : http://www.howardgardner.com/

동영상 출처 : http://reoneco.blog.me/140116945219


2.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 귀

들어가는 글

13. 이 책은 내 연구의 정점이자 출발점이다.

 ☞ 나도 이런 말로 시작하는 책을 쓰고 싶다.

13.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 시에서 1950년대를 보낸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소년이었다. 내가 가장 흥미를 느낀 분야는 전기물과 역사였는데, 특히 내 가족의 출신지인 서유럽과 새로운 고향이된 미국의 전기물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14. 영국에서 연구생으로 지낼때 피아제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나는 여가 시간을 현대 사상과 현대 예술에 좀더 친숙해지는 기회로 삼았다.

14.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한다.

 ☞ 그의 인생의 특징을 본문의 7명의 창조적 인물들처럼 분석해 보아도 비슷하지 않을까?

15. 왜 어떤 아동들은 음악가나 시인, 혹은 화가로 자라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예술가가 되지 못하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예술적 재능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발되거나 혹은 위축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18. 이 책을 쓰는 일은 애정이 깃든 작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흥미를 느낀 사람들과 주제들 다루면서, 내가 사랑하는 예술 작품과 시간을 보내고 오랫동안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온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  단숨에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오랜 조사와 연구 작업을 통한 결과물! 나의 스타일.

19. 나는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스타일의 책을 쓰고자 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전문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고, 꼭 필요한 시각 자료만을 제시했다. 다루는 주제는 복잡하지만 간단명료하게 쓰고자 했다. 복잡한 주제를 쉽게 다루기 위해 중간 중간에 서술 내용을 요약 정리했으며,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른 곳에 세 개의 짤막한 해설(간주곡)을 삽입했다.

  ☞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번역자가 원작보다 더 어렵게 우리말로 푼 경향이 느껴진다.

 

제1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1장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30. "전시 취리히. 온갖 종류의 난민, 첩자, 망명객, 화가, 시인, 작가, 급진 분자들이 들끓는 장소."

31. 러시아의 지식인이자 예루가인 트리스탄 차라 :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지금까지 다들 예술로 알고 있는 예술 따위에 신경쓰면 안되지요. 바람직하지가 않습니다. ... 요즘에는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가 하며, 무엇이든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31.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 :  "그런다고 당신이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죠. 예술가란 불멸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마술사와 같습니다."

36. 이 책의 목표 : 첫번째, 대체로 1885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이들 각자가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두번재 창조적인 행위(기획)의 본질에 관해 대략적이나마 결론을 내리는 것, 세번째, 내가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에 관해서도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38. 나는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39. 혁신적인 인물이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간파하는 것도 창조성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창조적인 인물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터득하고 그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궁극적으로 그 분야의 성격을 쇄신하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에 주목할 것이다... 창조적인 인물들은 홀로 고립되어 작업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성장하는 기간 내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40. 프로이트는 하나의 새로운 분야, 즉 정신분석학 이론과 치료법을 창조했다고 말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42. 아인슈타인은 관습적인 설명 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기본적인 이해 방식을 찾았다. 그가 어린 시절에 품었던 수수께끼는 훗날 그의 가장 혁신적인 과학적 업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42. 피카소는 일찍이 눈부신 솜씨를 발휘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 된 '신동'에 대한 훌륭한 연구 대상이다.

43.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기꺼이 이주하는 것은 현대의 두드러진 현상

 ☞ 내가 간다면 세계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활동하고자하는 분야의 중심지는 어디인가? 파리? 서울? 당진? 지금여기?

49. 나는 시대정신, 즉 특정한 개인들이 우연히 그것을 일깨우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시대정신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신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역사를 우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실제로 가장 극적인 역사적 변동을 일으키는 요인은 빗나간 총탄이라든가 화산 폭발과 같은 우연적인 사건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시대를 포괄하는 정신이 작동한다는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다만 한 개인이 어떤일을 할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하는 편이 훨씬 신중한 의견이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작업이나 성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러한 상호 영향이 법칙이 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 사실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 시대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작업이 소통을 통해 서로에게 알려지고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설득력이 있다. 난 이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52. 파카소와 브라크를 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은 미술에서는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중요치 않다고 주장하면서 형태적 측면을 강조한 입체파 양식을 창시하고 순수추상 미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 스트라빈스키가 원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리듬과 다조성을 수용했다면, 쇤베르크는 지적인 특징을 지닌 12음 기법을 창안했다.

55. 1900년 무렵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 시기로서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중요한 창조자들은 공통의 역사적 힘과 사건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의 활동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 서양 중심에서 그렇겠지. 우리나라는 조선의 끄트머리,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던 시대가 아닌가.

 

2장 창조성의 연구방법

59.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자극을 받거나 문제를 보면 아주 다양한 연상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매우 유별나고 엉뚱하기까지 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59. 창조성은 지능과 다르다. 창조성 검사는 신뢰할 수 있지만, 별반 유효하지 않다. 다만, 인지과학 및 인접학문 분야의 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다.

62. 과학 문제를 푸는 인간은 문제 자체를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무한한 자료 가운데 문제 풀이에 적절한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료를 분석하는 방법을 확정해야 하고, 필요하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새로운 분석법을 스스로 고안해야 한다.

65. '창조적인 건축가들'은 그들보다 창조성이 부족한 동료들에 비해 독립성과 자신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기민함, 기꺼이 무의식에 내맡기는 성향, 야망,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의 성격적 특색이 훨씬 풍부했다.

66. 무의식 과정에 대한 프로이트의 명료한 설명은 창조적인 행동이 창조자의 사려깊은 의도를 직접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 그 핵심이 있다. 창조적인 행동의 원동력과 의미는 창조자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속한 공동체 사람들에게도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68. 사회심리학자 테레사 아마빌라는 고전적인 심리학의 설명과는 반대로, 사람들이 외적인 보상을 노릴 때보다 순수한 즐거움만으로 행동을 할 때 창조적인 해법을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69.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 몰입상태/몰입경험 --> 내재적으로 동기화된 경험에서 자신이 관심을 쏟는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고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76. 프로이트는 점차 교제 범위가 좁아지면서 결국 혼자가 된다. 이후에 그는 정신분석학의 핵심 교의를 발견하고 다시 많은 동료들을 얻게 된다.

78. 세상에는 정답이 하나밖에 없고 권위자들만 그 정답을 알고 있다는 고정 관념에 짓눌린 아이들은 자기만의 해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78. 창조적인 사람이 호기심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이유: 정해진 선을 넘지 않으면서 규칙대로 살아가는 대신 인생에 대해 좀더 모험적인 태도를 지니라고 격려하는 역할 모델을 적어도 한 명은 만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클것이다.

79.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하려면 아무리 열광적으로 몰두했더라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82. 보장된것은 아무것도 없고 믿을 만한 길잡이도 없다. 창조자는 자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고, 아무 보상도 없는 반복적인 실패에도 꿋꿋이 버텨야 한다.

82. 사례 분석에서 드러나는 발달상의 특징 : 1.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와 특별한 문제에 대한 유년 시절의 관심, 2. 처음 흥미를 느낀 문제를 탐구하다가 이 흥미를 이어받아 특정 분야를 마스터하겠다고 결심, 3. 선택한 분야에 정통한 후에 모순적인 요소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요소를 창조, 4. 창조자가 신기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탐구해가는 방식, 5. 고립의 시기에 주변 사람들이 행하는 격려와 지지역할 혹은 방해 역할, 6. 서서히 새로운 상징체계와 언어 혹은 표현 방식을 만들어가는 모습, 7. 관련 비평가들의 첫 반응과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반응이 변화하는 모습, 8. 보통은 중년의 시기에 이뤄내는 좀더 포괄적인 성격의 두 번째 혁신

83. 창조적 인물이란 어떤 분야에서 처음에는 참신하게만 여겨지지만 종국적으로는 특정한 문화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작품을 창조하고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는 사람을 말한다.

87. 이 때 물리학분야는 소수의 전문가 그룹으로 장이 이루어진 경우이고, 대중 연예분야처럼 장에 포함된 인원이 수백만 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90. 미술 분야는 장이 부당하리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다소 특이한 영역으로 보일지 모른다.

92.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장의 판단이 없으면, 어떤 사람이 '창조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가 없다.

92. 비동시성 (asynchrony)

 ☞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1930년 독일 사회를 규정하면서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가리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했다.

97. 도약의 시기에 적어도 일부의 창조자들은 아주 친밀한 동료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는 있었다.

98. 대체로 창조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특히 원만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려고 한다.

  ☞ 변경연 과정을 하면서의 내 모습이다. 오직 가정과 변경연 두개를 들고 가고 싶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어찌해야 하나. 적절한 타협은 없을까?

 

제 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장 지그문트 프로이드 : 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105. 수요심리학회 라는 모임은 프로이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06. 그는 빈에서 북동쪽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진 모라비아 지바의 프라이베르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08. 프로이트 "당시만 해도 의사라는 직업이나 의사가 하는 일에 특별히 마음이 끌렸던 것은 아니다. ... 나는 탐욕이라 해도 좋은 지적 욕구에 이끌렸을 뿐이다." 그는 8년동안 지식의 세계에 흠뻑 젖었다. 다양하고 폭넓은 독서를 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고, 스페인어를 배웠다.

109. "난 자연보다는 인간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다."

111. 프로이트는 언어 지능과 인성 지능이 우수했다. 즉, 언어와 인간을 다루는 분야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

118. 예전에 억압된 기억을 말로 풀어내면서 거기에 얹힌 묵은 정서를 발산하면, 증상을 없애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 "대화치료"

120. <히스테리 연구> : 강력한 정서를 마치 물의 흐름을 막아놓은 댐처럼 막아버리면 히스테리 증상이 생기는데, 이 때 증상은 정서를 억누르지 않았을 경우에 소모되는 에너지와 똑같은 양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치료는 카타르시스를 이용하는 방식인데, 억제된 에너지를 발산시켜 증상을 제거하려고 했다.

122. 한때는 세상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던 프로이트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걷기로 했다면, 그것은 그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125. 프로이트가 친밀한 우정과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몹시도 갈망하던 이 중년 초기는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 인간적인 한계가 왔다는 신호를 뚜렷하게 느꼈고, 경제적인 형편 역시 어려웠는데 환자들이 거의 오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 자랑거리가 될 만한 교수직도 점점 멀어져갔다. 아버지는 앓아누웠다가 1896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로이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1895년에 여섯 아이 중 막내가 태어났고, 이후에는 뭔가 결심한 듯 성관계를 그만두었다. 당시 그는 몸과 마음이 심하게 불안했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우울증, 니코틴 중독, 만성적인 위장 장애에 시달렸다.

 ☞ 프로이트의 위기

127. 다른 혁신가들도 위대한 비약을 이루기 직전의 정신 상태를 회고할 때면, 감정상의 절정과 추락이라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130. 1895년 6월 24일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가 꿈의 비밀을 밝혀내다.(농담) 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고 불렀으며, 그 비밀을 밝히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에 평생 한 번 허용될까 말까 한 통찰'이라고 불렀다.

131. 방어기제 : 억압, 승화, 반응형성, 투사, 전위, 금지...

135. 프로이트는 죽을 때까지 모든 심리 기제를 물질적인 기초 원리로 설명해야 한다고 믿었던 유능한 신경학자이자 신경해부학자였다.

137. 프로이트는 모든 꿈에는 모종의 소원이나 환상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되었다. 꿈은 억압된 소원이 위장 실현되는 과정이며, 예전의 결심이나 근심 혹은 욕망을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다.

139. 그는 '공감적인 청자'의 역할을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한 정신분석가에게 맡겼던 것이다.

143. 그의 사고가 출간 연도 1900년으로 표기된 대작 <꿈의 해석>에서 집대성되었다.

143. <꿈의 해석>에서 소름이 끼칠 만큼 가장 뛰어난 부분인 마지막 장에서 프로이트는 '꿈 과정의 심리학'을 설명한다.

144. 소원은 전의식으로 표출되고자 하는데, 낮에는 검열에 의해 왜곡되지만 저항이 약해지는 밤에는 다양한 위장과 타협형성을 통해 꿈으로 분출된다.

145. 프로이트의 저서는 거의 언어적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프로이트의 과학적 사유는 그 본질이 언어적이며, 공간적 요소는 거의 없고 논리적 요소가 얼마간 담겨 있을 뿐이다.

148. <꿈의 해석> 초판본은 처음 2년 동안 겨우 351권이 팔렸을 뿐이며, 곧 절판되었다.

148. " 아이들이 성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것, 보모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밤에 꾸는 꿈은 백일몽과 마찬가지로 소원 성취를 표현한다는 점도 다들 알고 있겠지."

149. 백년 전의 빈, 지적활기! 대단한 인물들이 이웃해서 살면서, 카페에서 허물없이 어울리고 회합에서 의견을 교환했다.

150. 프로이트의 사상은 그가 살았던 환경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또한 그런 환경에서 유기적으로 움터 나왔던 것이다. 성적인 문제에 고결한 체하는 모습은  빈의 중산층 사이에 만연한 태도였는데, 아마도 다른 계층 사람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152. 새로운 이론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프로이트는 그 이론을 평가하고 전파하는 지지 세력의 장을 창출해야 했다.

153. 프로이트는 자유 연상, 꿈 분석, 치료 개입 등 사람들을 돕는 데 실제로 사용되는 실천 기법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상을 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프로이트는 치유를 갈망하는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치유법을 알려준 것이다.

153. 변하지 않은 것은 프로이트의 왕성한 생산력이었다.

154. 별로 준비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각양각색의 청중 앞에서 역사와 예술, 당대의 독서물, 최근의 사건, 현재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의 관심사 등에서 적절한 예를 자유롭게 끌어들이면서, 친밀하고도 사려 깊은 태도로 폭이 넓은 강연을 할 수 있었다... 사색적인 많은 젊은이들이 설득력이 점차 높아지는 프로이트의 간단한 요약문이나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에 매료되어 정신분석학에 이끌렸다.

157.  이러한 갈등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갈등과 긴장 때문에 20세기의 처음 10년은 정신분석학이 눈에 띄게 성장하면서 서구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시기였다.

160. 하루에 여덟 내지 아홉 시간은 환자들을 보았고, 매일 산책을 했으며, 가까운 친구들이나 브나이 브리스의 동료들과 어울렸으며, 책을 읽고 고대의 유물을 수집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밤 11시에서 새벽 1시나 2시까지 글을 썼다.

 ☞  야행성이셨구나. 나도 지금 상황에선 그런데...

161. 그는 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60년 전에 '사정없이 억눌렀던' 철학적/문화적 성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 셈이었다.

164.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 대부분이 과학자 사회 외부에서 나온 것이며 엄격한 과학자들 대다수가 진지하게는 프로이트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  정신분석학은 대중의 욕구와 관심에 맞아 떨어졌다.

165.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 비밀스런 탐구작업

 

4장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영원한 아이

171. 물리학자 라바이 : "물리학자들이란 인간 피터팬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다.

172. 아인슈타인이 비교적 늦게 말문을 텄고 말주변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말을 잘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흥미가 많았던 프로이트와 달리, 어린 알베르트는 사물의 세계에 호기심이 많았다.

174. 철학과 과학 저서를 읽게 되면서, 어린 시절 종교에 심취했던 마음은 거의 사라졌다.

175. "그 학교는 나한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자유로운 정신이 가득했고,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교사들도 권위적인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라우 주립 학교-

176. 그는 오랫동안 흥미를 느낀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중적인 저서와 주변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 얻은 과학적 신념을 지녔으며, 가족 사업을 통해, 그리고 우호적인 분위기의 아라우 주립 학교에서 과학 분야의 일을 즐겁게 해본 경험이 있었다. 이미 아인슈타인은 어린이의 호기심과 감수성을 어른의 단계적인 방법론과 접목시킨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177. 이론 물리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공부했다.

178. 푀플은 역학이 물리학의 일부분이며, 역학을 탐구하기 위해선 철학적,인식론적 물음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인슈타인에게 일깨워 주었다.

180.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패러다임 이전'의 분야라 할 수있다.

183. 뉴턴이 보기에 절대적인 것은 대자연에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오직 신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절대적인 것은 우주에 존재해야 마땅했다.

184.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맥스웰-

190. 적어도 한 명의 젊은 과학자에게는 사고 방식이 광범위하게 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아마도 그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능력이 있으며, 물리학의 최신 성과물에 익숙해 있지만, 아직 현재 통용되는 관점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지는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이의 마음과 성숙한 어른의 마음을 모두 갖춘 사람일 것이다.

191. 아인슈타인은 객관적 사물 간의 관계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팔았으며, '나'와 '우리'의 세계에서 '그것'의 세계로 날아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좋은 친구들과 사귀었고, 말년의 프로이트보다는 훨씬 호감가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성 문제에 있어 금욕적인 모습을 보인 프로이트와 달리, 아인슈타인은 젊은 여성들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였고 이 여성들도 그에게 호감을 내비치곤 했다.

192.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작은 모임 :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이 "깊은 인상을 심어 주어서 우리는 몇 주 동안이나 숨조차 못 쉴 정도였다"고 솔로빈은 회고한다. 올림피아 성원들은 함께 도보 여행이나 캠피을 떠났고 수영을 했으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서로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유쾌한 농담을 나누었고 서로의 열망고 ㅏ두려움을 함께 얘기했다.

193. "나는 시골에서 고독하게 살았으며, 단조롭고 조용한 삶이야말로 창조적인 정신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아인슈타인은 회고한다. .."등대나 등대선에서 근무하는 것이 그런 직업이 아닌가 싶다."

  ☞ 발전소 CPP근무가 지금 나에겐 딱이다. 고독한 섬같은 이곳... 참 좋다. 누군가에겐 아니겠지만.

195. 그는 글도 무척 잘 썼지만, 언어 자체에는별 흥미를 갖지 않았다. 외국어를 익히고 용어를 정확히 외우는 데 서툴다는 한탄을 가끔 했을 뿐이다. 반면에 그는 논리-수학 지능과 공간 지능이 뛰어났다. 다른 과학자들이 설명 모델로 고안한 '심적 표상'을 쉽게 익힐 수 있었따.

197. 아인슈타인은 공간적 시각화와 상상력을 중요시 했디만, 마음속에 선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동시성의 상대성'과 같은 개념도 고안해 냈다. 실제로 그의 혁신적인 업적은 공간적 이미지와 수학 공식, 경험 현상 그리고 기본적인 철학 주제를 통합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 권위에 반발하는 기질을 타고난 아인슈타인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윗사람들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물리학 분야의 기존 문헌들을 세세히 알지 못한다는 점에 일종의 자부심까지 느낄 정도였다.

200.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존경하고 뉴턴의 사진을 자기 침대 위 벽에 걸어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202. 굳이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은 특허국의 이름없는 관리로 남게 될 가능성이 가장 컸던 것이다.

203.  아인슈타인은 각각의 논문을 우선 형식적으로 불균형한 진술, 혹은 심미적으로 부조화한 진술로 시작한다. 그런 후에, 관찰된 현상의 불균형을 단숨에 해소하고 설명의 장황함을 제거하여 하나 이상의 경험적 예측을 가능케 하는 우아한 원리를 제안한다.

 ☞  이게 무슨 말일까?

204. 아인슈타인은 풍부한 사색을 통해 얻은 결론을 자신이 보기에 가장 논리적이고 단도직입적인 방식으로 써내려갔다는 느낌을 준다.

205. 광원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면서 빛을 쏘는 경우에도, 관찰자에 대한 빛의 속도는 여전히 동일하다. 사실 어떤 물체도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207. 시간과 거리가 상대적인 개념이 되면서, 속도와 가속도, 힘, 에너지와 같은 물리학의 주요 개념들도 재고되어야 했다. 가령, 움직이는 물체는 관찰자에 대해 그 속도가 빨라지면 질량도 커진다.

209. 26살의 특허국 직원이 물리학자들이 현실에 대해 사고하는 방법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 일반사람들의 생각 마저도 변화시켰다.

209. 우선 특정 분야의 연구 결과와 원리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미 알려진 사실을 다시 발견하는 경우가 생긴다.

 ☞ 동시대 contemprary 의 것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 교류하고 동시대의 비동시적인 것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의 유물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211. 아인슈타인은 이들의 다양한 원리를 가설적 토대로 삼아서, 시간과 공간을 비롯한 여러 물리 개념에 대한 직관적 지식을 쇄신했다.

213. 1909년이 되자 그는 10년전에 조교 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취리히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 논문 하나로.

216. 토마스 쿤 : 새로운 혁명적 과학 사상이 기성 새대, 즉 장의 권위자들에게 수용되는 일은 드물다.

217. 심리학을 비롯한 미숙한 과학 분야는 장의 모든 성원들이 인정하고 참여하는 규범적인 패러다임이 나오는 대신 여러 학파들이 충돌하고 대립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218. 1912년에 아인슈타인은 벌써 프로이트를 비롯한 지도적인 과학자 그룹에 합류하여 형이상학을 반대하고, 철학은 과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에 지지 의사를 표했다.

220. 실제로 영향력이 더 컸던 '양자 이론'은 상대성 이론에 견줄 만한 대중적 추종자를 불러 모으지 못했다.

222.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조화로운 우주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순진하기 이를데 없는 이 조용한 사색가는 이제 세계의 상징, 폭넓은 존경과 뿌리 깊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222. 자신이 말한 상대성 이론의 요체(기자들에게) : 이전에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사라져도 시간과 공간은 그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역시 물질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지요.

225. 아인슈타인은 주로 직관에 의지하여 이론을 구상했다.

227. 공간은 이제 구부러진 형태로 생각해야 하고 중력장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시계는 질량이 큰 물체 근처에 놓이면 진행 속도가 느려지고, 광선의 경로는 휘어질 수밖에 없으며, 행성의 타원 궤도는 운동 방향으로 서서히 회전한다.

230. 보어는 조작적 의미만이 신뢰할 수 있고, 인과적 법칙 대신 개연성을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관찰자는 관찰 행위 자체가 관찰 대상에 미치는 효과를 인식해야 한다는 양자 역학의 기본 교의를 서술했다.

231. 일반 상대성 이론은 거시적인 규모에서 중력 작용과 우주론을 설명했지만, 원자나 원자 내부의 수준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양자 역학은 우주의 물질과 복사 에너지가 그로부터 구성되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들의 본성과 구조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이론이었다.

234. 그는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을 좋아했으며, 중세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에 호감을 보였다. ... 중년과 만년에도 계속해서 혁명적인 업적을 이루는 주된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체계가 느슨하고 발전 방향이 다양한 분야, 가령 사회과학처럼 아직 발전 도상에 있는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우이다.

235. 과학을 삶의 다른 영역에 연관시키는 면에서도 통찰이 깊어졌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보다 전반적인 사색가로서 끊임없이 성숙했다.

236. 직관과는 다른 이해 능력, 즉 성찰적 지혜라고 부를 만한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성숙한다.

236. 과학자와 예술가는 모두 일상에서의 도피를 추구한다는 점

237. 그가 음악가나 랍비 혹은 기술자가 되었어도, 항상 자신이 생각한 문제에 끈질기게 관심을 두는 모습과 삶의 다양한 영역들 간의 관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열망이 나타났을 것이다.

 ☞ 기질이 중요하다. 나머지는 상황과 선택의 문제

238. 그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 개발을 고무한 평화주의자였다. 한때는 과학의 근본을 바꾼 혁신가였으나 만년에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을 논박했고, 과학자이면서도 이론적 기준을 심미적인 아름다움에 두었다.

239. 뉴턴이나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은 조화롭고 통일된 우주, 물리적 인과성에 통어하는 우주에 대한 상을 간직했다.

239.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인으로서의 아인슈타인과, 놀랍게도 이방인을 잘 받아들이고 인류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아인슈타인 사이에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간주곡1

242. 인문학자들은 문학과 예술, 개인들의 생애, 역사적 사건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에 주목하고 이 분야에 어울리는 이론 모델을 활용한다.

243. 이미 다른 학자들이 제기한 문제의 해답을 마련하는 수준을 넘어설 때 과학자의 소명은 더욱 빛이 난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공식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탐구에서 보는 것은 이론 체계의 구축이다.

244. 아인슈타인은 언어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고 인성 문제에 대한 관심도 부족했다. 그는 물리학자로서는 유리하게도 시각적, 공간적 이미지가 풍부한 사고 실험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사고 실험의 내용을 수학 공식과, 엄밀한 논리적,수학적 구조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쉽게 변환시킬 수 있었다.

245. 두 사람 모두 위대한 도약의 시기에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론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받았다.

 

5장 파블로 피카소 - 신동과 천재

252. 어린 시절에는 나아갈 길을 닦아주고, 다양한 기회를 주고, 주변의 쓴소리에 대해 아이를 방어해 주며, 좌절하고 실패한 경우에는 아이가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고, 기력과 재능을 생산적인 방향에 쏟도록 인도해 주는 어른의 역할이 필요하다.

254. 특정 분야에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업적을 이루는 것은 그 분야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여 통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255. 피카소의 조숙함은 시각-공간 영역, 신체-운동 영역, 대인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256. 피카소는 특정한 학과목을 전혀 익히지 못했고 추상적 사유에 서툴렀다고들 말한다.

258. 피카소는 다양한 화면 구성을 시도하고 똑같은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그렸으며, 호소력 짙은 극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았다.

259. 피카소의 실험적인 성향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질, 미술 소재로 작업하는 일에서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 점점 커지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좀더 불행한 일이지만 미술 소재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고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지만 표준적인 학과 공부를 하는데는 어려움을 느끼는 능력 간의 불균형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260. 당시 피카소는 콘치타(누이)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겠다고 신에게 약속까지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신과의 거래'

264. 불필요한 정규 수업을 연이어서 받고, 평범한 교사들을 경멸하고, 사적인 갈등을 빚곤 하고, 이전 시기의 맘에 드는 거장들을 사숙하며 독학으로 기량을 연마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이 거의 비슷하다.

264. 보헤미안 기질의 젊은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의 회합에 들어갔다. 피카소는 재능과 기지, 매력적인 성품 덕분에 주로 '엘스 쿠아트레 가츠'라는 선술집에 모이던 테트툴리아라는 모임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265. 선원과 부두 노동자들의 내면 심리와 자연 풍경이나 거리 풍경의 저변에 흐르는 감정을 탐구했으며, 가족들의 삶이나 밤의 거리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사람들의 갈등과 긴장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 사진으로 더 명확히 볼 수 있을 것. 풍경에 흐르는 감정,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

266. 파리만큼 예술과 학문, 도시 경관, 낭만적 풍조 등이 멋지게 결합된 유럽 도시는 없을 것이다.

267.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으로서 그는 세계주의 풍조로 가득 한 파리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혼란을 겪었다.

269. 청색시대 그림 : 끔찍한 아름다움, 메마른 슬픔, 삶에 대한 비관적인 느낌

269. 피카소의 주된 주제는 이제 절대 빈곤에서 보헤미안적 예술가의 삶으로 이동했다.

270. 아폴리네르와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사고방식이 비슷했고, 서로 보완되는 관심사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적 노선이 비슷했다.

 ☞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촉매역할

278.  그는 화가라는 전문가로서나 사사로운 개인으로서나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에 맞서 새로운 경지에 오르고자 했으며, 전례가 없는 깊이에 도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와 같은 가차 없는 도전 의지는 이 책에서 다루는 창조적인 거인들 모두의 특징이며, 그들을 그들답게 만드는 특성이다.

280. 아비뇽의 처녀들 :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미술사에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간주한다. 피카소의 여타 대표작과 마찬가지로 <아비뇽의 처녀들> 역시 이전 시기의 작품을 결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이처럼 형체의 비틀림이 본질인 그림, 낫 모양으로 휘어진 선으로 부피감을 표현한 그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83. 그가 존경하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과거 작품을 수정하거나 변형했다. 피카소는 수십 년 전에 그가 보았거나 창작했던 작품 혹은 형태 실험을 했던 작품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288. 피카소는 결코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288. 조르쥬 브라크 : 서른 살도 되지 않은 두 화가가 유례없이 강렬하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공동작업을 한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입체주의 양식이 탄생했고 그토록 빠른 속도로 미술계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은 새삼 물을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293. "우리가 입체주의를 창시했을 때는 입체주의를 창안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295. 피카소는 브라크의 엄격한 태도가 없었다면 지나치게 왕성한 창작력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지 못했을 터이고, 브라크 역시 피카소의 창조적인 사례와 자극이 없었다면 온갖 종류의 대상과 시각 요소를 작품에 구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300. 피카소는 여러 차례 가벼운 여행을 통해 지친 심신을 달래고 낙천성과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았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경쟁이 치열한 도시 환경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302. 아무리 친밀하고 좋은 관계를 맺은 사이라도, 서로 떨어져서 자기만의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낡은 주제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는 법이다.

 ☞ 내 얘기구나

302. 미술 비평가들은 이내 입체주의의 중요성을 알아챘지만, 일반 대중은 이 새로운 시도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303. 피카소의 오랜 친구 아폴리네르는 여러 편의 글과 책을 써서 입체주의 미술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했고, 이 운동의 중요성과 입체주의를 창시한 두 화학의 업적을 옹호했다.

304. 20세기 들어 대중적인 평가의 장과 아방가르드적인 평가의 장은 점차 그 간격이 넓어졌다. ... 분명한 것은 입체주의 미술의 이미지가 상업 광고물에서 아류 모방작에 이르는 다양한 시각물에 스며들어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었음에도, 보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이미지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 그래 입체주의 이미지의 원천이 뭔데?

307. "화가란 결국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의 소장품에서 본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들고 싶은 수집가가 아니겠는가. 시작은 이렇게 하더라도 여기서 색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 사진가도 이미지 수집가가 아닐까.

309. "관람자에게 아무런 감정상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하고 관람자가 그저 대충 훑어보는 예술작품은 아무 의미가 없다. ... 관람자가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어떤 반응을 보이고 스스로 창조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 관람자를 마비 증상에서 일깨워야 한다."

 ☞ 미술관을 벗어나 보라. 거리와 삶으로 가라.

318. 부분과 전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방식

320. 이와 같은 다양한 변화는 피카소가 시각적 묘사라는 상징체계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321. 고전적인 구도와 어린아이 같은 이미지를 한꺼번에 드러낸 작품으로서 천진한 아이의 눈에 비친 혼돈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322. "그림은 집 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단이다."

324. 피카소의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정과 연인, 아이들 그리고 여름 휴양지를 찾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꾸준하게 새로운 양식과 대표작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325. 현재의 영예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피카소의 '퇴폐적인' 후기 작품에 쏟아질 수밖에 없었던 그런 비난의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329.  사바르테스는 "피카소는 그림을 그릴때 색깔을 고르듯, 시기와 목적에 따라 적당한 친구를 고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331. 이와 같은 완전히 자아중심적인 행동 방식을 차치하면, 그는 참으로 매력적이고 친절하고 관대한 인물이랄 수도 있다. .. 실로 작품에 방해가 되는 존재면 누구라도 희생시키겠다는 일념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가끔은 이런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 죄책감도 작품을 완성하려는 더 큰 열정에 흡수됐을 뿐이다.

 ☞ 작품에 대한 집중, 가정을 포기할 만 한 것인가?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 파우스트적 거래... 뭔가 해보려는 요즘 점점더 실감난다.

 

6장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음악가이자 정치가

334. "음악은 그 본질상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는 무기력하다." -자서전-

334. 스트라빈스키는 음악가라는 장인이 작업하는 소재인 가락과 리듬은 그 자체로는 목수의 대들보나 보석 세공사의 보석과 마찬가지로 표현할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335. 음악적 구상이 대중들에게 전달되기 우해서는, 연주자와 악보 출판업자, 공연 대행인, 입장권 판매업자 등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고, 악기와 공연장, 광고판, 공연 프로그램 같은 물질적인 요소도 필요하다.

337. 잘하든 못하든, 열의가 있든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든, 창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누구나 자신의 경력을 관리하는 일에 만만찮은 정력을 쏟아야 한다. 정치적 행위에 나섰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행위를 도외시하면 아무리 포부가 큰 예술가라도 영원히 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339. 결국 스트라빈스키는 연극성이 짙은 작품을 공연하면서 시각적인 요소를 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는 점에서 다른 작곡가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340.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꽤나 고독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만났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다.

342. "무엇을 배우든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 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삼아야 한다."

344. 디아길레프는 <예술 세계>라는 잡지를 창간했었고 이 잡지는 젊은 예술가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 이는 디아길레프 주위에 당대의 재능 있는 예술가와 작가들이 모여들게 하는 효과도 발휘했다.

346. 디아길레프튼 재능을 키워주는 역할에 자족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인물로는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1884~1947)... 이 소수의 예술 양육자들이 20세기의 예술사를 풍요롭게 키워낸 장본인이었다.

348. 공동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 하나는 마감 시한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상은 각기 다르면서 고집은 무척이나 센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타협을 이끌어내는 방법이었다.

351. 창조력이 풍부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다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바빳을 뿐이다.

 ☞ 칼럼하나를 끝내고 거기에 계속 매달리지 말고, 다음 책, 다음 칼럼으로 넘어가라... 계속 써라.

353. 엘리엇이 시 작품에 '우연히 얻어들은' 일상 대화를 삽입했을 때와 거의 동시에 이 작품이 창조되었음을 감안하면, 모종의 예술적 시대정신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355. 공전의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이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 이들은 본래부터 오류따위는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방식이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사실인 까닭이다.

 ☞ 또한 작품 자체를 다량으로 생산

356. 봄의 제전 : "이교도의 성스러운 제전이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마을 원로들이 빙 둘러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봄의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소녀가 춤을 추다가 죽어 갔다. .. 새 발레는 원시 부족의 제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름 밤에 벌어지는 제의는 다음 날 첫 햇살이 비출 때까지 이어진다. 의식 무용을 위주로 안무를 구성한 작품인데, 뚜렷한 극적 이야기 없이 원시 부족의 삶을 재현하는 첫 시도가 될 것이다. "

358. 스트라빈스키는 처음 작품을 구상하고 악보에 옮겨 적을 때 이미 작품 전반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 내 방식과 비슷하다. 난 공책에 대강의 구성과 흐름을 작성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362. 샹제리제 극장에 모인 청중은 서곡의 첫소절이 들릴 때부터 동요했다. 막이 오르고 무용수들이 도약하고 착지하는 모습을 보이자, 객석에서 야유와 고성이 터져나왔다. 공연 내내 소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고 발을 구르고 뿔피리를 불고 욕설을 퍼부었다. 청중의 동요가 너무 심해서 음악을 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무가 니진스키가 무대 옆에 서서 무용수들에게 큰 소리로 번호를 불러줘야 할 정도였다.

 ☞ 어째서 이런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이 나온것일까?

364. 다른 작품의 경우는 관객을 모욕한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도, 작곡가는 보통 아이러닉한 태도를 취하거나 관객에게 슬그머니 윙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봄의 제전>은 관객의 관습적인 이해 범위를 벗어났고, 그래서 무질서한 소동이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원시적인 희생 제의 라는 주제에는 심금을 울릴 만한 구석이 없었고, 그런 주제가 부드럽게 완화되기는 커녕 너무 노골적으로 묘사되었다. 게다가 그 내용이 구제불능이라 할 정도로 부도덕했다.

366.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약동하는 봄의 기운, 다시 태어나는 자연의 거침 없는 기세였다."

367. 드뷔시 : "기상천외하고 난폭한 음악이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모두 갖춘 원시 음악같다."

367. 초기의 청중을 괴롭혔던 불연속성과 단절, 반복, 자유분방함을 젊은 관객은 이 작품의 본질로 여겼고, 반복해서 <봄의 제전> 공연을 관람하면서 음악으을 새롭게 듣는 훈련을 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관객의 단절은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엘이엇의 <황무지>, 피카소의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과 <아비뇽의 처녀들> 및  초기  입체주의 회화와 같은 작품이 출현했을 때도 있었다.

368. 디아길레프는 분명히 이런 스캔들에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만년의 스트라빈스키 역시 이런 논란과 물의에서 나오는 배당 이익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 대중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372. 흥정이 격렬한 것은 짜낼 이익이 얼마 안되기 때문이다.

376. <결혼> : 일관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어떤 분위기만을 표현한 작품이다.

379. 처음 10년 동안 해동 분야의 지식과 기법을 완전히 터득하고 이후 대략 10년을 주기로 혁신적인 작품과 새로운 방향 전환을 이룬 작품(이론)을 창조한다는 법칙

380. 생애 내내 러시아적인 것과 현재성을 동시에 견지했다.

383.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한층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 만약 그들이 이런 식으로 과거와 유희하지 않았다면 훨씬 개인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은 창조했겠지만, 이는 기껏해야 창조력을 갉아먹은 곤란한 재주에 불과했을 것이다.

384. 스트라빈스키는 현대의 음악과 과거의 음악을 연관짓기 위해 신중한 노력을 기울였다. 엘리엇이 <황무지>를 창작할때처럼 그 역시 다른 시대의 음악 소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384. " 예술가는 이미 말해진 것을 그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387.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루에 적어도 열 시간 동안 일을 했다. 오전에는 피아노의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후 네댓시간 동안 작곡에 몰두하고, 오후에는 관현악편곡과 기악편곡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388.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

 ☞ 프로이트 :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 나간다."

 ☞ 일단 글을 쓰다보면 영감이 생기고, 새로운 시도의 용기가 생긴다. 찾아보고 몰두하다 보면 하나의 글이 완성된다.

390. "나의 행동 반경을 좁힐수록, 그리고 내 주위에 장애물을 더 많이 쌓아둘수록, 나의 자유 역시 더욱 커지고 풍부해진다. 속박을 없애면 그만큼 내가 발휘할 힘도 줄어든다. 더 많은 제한을 부과할수록 우리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에서 더 자유로와진다."

399. 스트라빈스키는 이 책에서 논하는 다른 창조자들보다도 유년기에서 흘러나오는 중요한 어떤 것을 간직할 줄 알았고, 또 만년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열매를 만끽할 수 있었다.

399. 스트라빈스키 역시 전 세계의 인정을 받는 대신 평온하고 애정어린 가족 관계를 잃어야 했던 것이다.

 ☞ 세계의 인정을 받기전에 가족관계를 잃게 생겼다.

 

7장. T.S. 엘리엇 -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403. 우호적이면서 솔직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 친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 것이다.

404. 여름철이면 메사추세츠 해안에서 독서와 항해를 즐기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거대한 미시시피 강 연안에서 살았던 경험도 그에겐 소중한 추억이었다. 훗날 그는 "커다란 강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뭔가를 품고 살아간다."고 썼다.

405. 재치 있게 모방하는 재능

407. 엘리엇에게 하버드는 무미건조한 곳이어서, 그는 인문학을 경시하는 대학 풍토에 고통을 느꼈다.

409. 그는 나이 든 여자들이 휘어잡은 집안에서 자란 사람답게 자기 또래의 여자들을 사귀는 법에 서툴렀고, 여자들에게 위협감을 느꼈을 뿐더러 성적 욕망을 해소하지 못해 좌절감을 느꼈다.

410. 엘리엇은 다른 세상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매력을 느꼈다. 훨씬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에는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411. 지식인들의 살롱이나 아방가르드 예술과 누추한 걸이의 가난한 모습 사이에 크나큰 대조가 있음에 충격을 받았다.

413.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리엇은 런던으로 되돌아갔고, 이후 20년 가까이 유럽에 머물게 된다. 목가적인 대학 캠퍼스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대도시에서 사람은 얼마나 더 자의식적인가?"라고 그는 공언했다. 이 무렵 그는 경계인의 삶에 만족했고, 작가로서의 삶에 운명을 걸고 이국 땅에서 성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414. "에즈라 파운드를 1914년에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416. 이들은 영어에는 능통했지만, 본래는 외국인인지라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감지하기 어려운 동향을 인식할 수 있었다.

417. 낭만적인 저녁과 마취된 환자를 무리 없이 병치시키는 시인의 목소리 , 부조화성에 매료되는 사람의 독특한 감수성

421. 엘리엇은 젊은 예술가가 대개 그렇듯이 낮에는 가르치고 밤에는 글을 쓰면서 힘들게 살아갔다.

423. 중요한 문학계 인사들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용의 주도하게 행동했다. 그는 이들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했고 나름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는데, 각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서 서신교환이나 만남의 횟수 그리고 교제기간을 적절히 조정했다.

427. 독자는 이제 곤혹스러운 중년 남자의 언어만이 아니라, 광대한 시공간에서 끌어온 다양한 인물의 의식과 사물을 반영하는 온갖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429. 이런 두 명의 훌륭한 편집자가 있었기에 엘리엇은 전반적인 시의 흐름과 특정한 행의 단어 선택에서 모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 에즈라 파운드 & 비비언 엘리엇, 어느 순간 까지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다음부터는 더이상의 충고가 필요없었다.

430. 타락하고 메마른 서양과 지혜롭고 평화로운 동양의 암묵적인 대조

432. 이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면, 하나하나의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엘리엇의 비감한 정서를 더욱 뚜렷하고 힘차게 느낄 수 있다.

433. 현대인의 삶과 감수성은 혼란스럽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시라면 당연히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435. 부분마다 장면마다 구어체 언어와 생생한 회화, 한결같은 자연 묘사, 신화적인 이미지, 재기 넘치는 대화, 애상적인 도시 장면, 이야기체의 소품, 음가를 이용한 언어 유희, 붉은 빛이 강렬한 스냅사진과 같은 이미지 등 수많은 특징이 두드러졌다.

436. 시인 데이 루이스 : "<황무지>는 전쟁 직후에 심리적 무력감에 빠진 지식인들의 정신을 진실되게 포착한 작품이다." 문학 비평가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평범한 독자들도 <황무지>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 현대 한국사회의 흐름을 읽어라. 보수와 진보, 이명박과 노무현, 세속주의, 여가, 청년실업... 젊은이들의 무력감... 답답함.

437. 시인은 젊었을 때 정점에 이른다.

 ☞ 젊은 사진가를 발견하라.

440. 이제는 평자와 후원자의 역할을 겸할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잘 어울리는 자리였다.

441. 엘리엇이 자기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한 것만큼이나 자기시대의 영국문학을 논하는 주요 논평가로 급속히 자리매김된 것도 참으로 눈부신 일이었다... 엘리엇의 설득력은 글의 내용보다는 글을 쓰는 방식에서 연유한 바가 크다.

  ☞ 방식, 형식의 중요성... 기획의 중요성

442. 자신의 판단을 언제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로 뒷받침한 것은 아니지만, 설득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수사적인 표현을 신중하게 구사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견해를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신중하게 제시할 줄 알았다. 권위 있는 판관 역할을 하면서, 그 때까지 무시되고 과소 평가된 인물이나 작품을 고평하고 기존의 선호도를 의문시했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작가들의 명성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문학의 보호가 임무인 사심 없는 관찰자의 자세를 견지했다.

  ☞ 사진평론가가 되려면 이런 자세를 잊지말자!

444. 시를 읽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가 개입하면 방해가 될 수 있는 정서적인 체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를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했다. 즉, 무의식의 리듬에 기반해서 창조되고, 그 리듬에 부합하는 시를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444. 엘리엇의 문학이론 : 객관적 상관물 - 시인은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해당 정서를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나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쓰지 말고,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사랑했을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 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형식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시고, 잊지 못할 음식을 드시고, 그 날의 기분과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 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형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 강의끝.
-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에서 -

449.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오랫동안 살아남을지 아니면 금방 잊혀질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느끼기엔 스텝 지방의 리듬이 자동차 경적과 기계 소음, 기어가 맞물리고 금속과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 지하철의 굉음 등 현대 생활에 미만한 거친 소리로 변형되고, 다시 이 절망적인 소음이 음악으로 변환된 것 같다."

 ☞ <봄의 제전>에 대한 엘리엇의 평가

455. 엘리엇은 중서부 출신으로 동부 지역의 하버드 대학에 진학했고, 자유주의적인 학생들 사이에서 보수주의를 견지했으며, 미국인으로서 영구적으로 해외에 정착해 살았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지식인, 반동적인 사상을 지닌 예술가, 방탕가들 사이에 끼어 있는 금욕주의자, 무신론자 가운데 있는 신자, 철학자 집단의 시인이자 시인 그룹의 철학자, 극적 시인이면서 시적인 운문을 쓴 극작가였다. 분명히 엘리엇은 경계인이 되고자 하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자 스스로 경계인의 위치로 나아간 것이었다.

 ☞ 엘리엇의 삶 : 경계인의 특성, 나? 발전소에 근무하는 사진가, 명상하는 생활인, 지금은 집없는 외톨이

456. "예술은 인간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기를 요구한다. 가족도 버리고 오직 예술만을 좇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예술은 인간이 어느 가족이나 계급, 당 혹은 동인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일 뿐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457.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457. 엘리엇의 뛰어난 작품은 경계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출현했거니와, 그런 빛나는 업적을 계속 쌓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지도 않았고 감당할 수도 없었더라도 경계인의 자리를 줄곧 지켰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간주곡2

459. 피카소는 젊음을 유지하고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가학적으로 대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친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법정 싸움의 불씨를 지피는 데 주저치 않았으며, 엘리엇은 프로이트처럼 금욕적인 삶을 선택하고 동시에 가학적이라 할만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했다.

461. 특정 장르에서 새로운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자신들의 변화하는 예술적 비전을 반영하는 창조물을 축적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이다.

462. 매일같이 작업실에 들어가 거의 홀로, 완성까지 몇 달 혹은 몇 년씩이나 걸리는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8장 마사 그레이엄 - 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469. 1894년 마사 그레이엄은 열네 살이 되던 해까지 펜실베이니아 주의 ㅇ래러게이니라는 마을에서 살았따. 피츠버그 인근 전형적인 미국 소도시, 화목하고 안락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471. 그레이엄은 1911년 4월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하우스에서 이국적인 춤을 추는 로스 세인트 데니스라는 무용가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를 보았다.

472.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473. 신체-운동 영역의 신동

474. 그레이엄은 대중적인 취향의 공연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삶을 접해보고는 이 길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혔다.

 ☞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나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475. 그레이엄은 푸른 색의 바탕에 붉은 물감을 튀기듯 칠한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하나의 해답을 얻었다. "나는 이 그림처럼 춤을 추겠다."

480. "오늘날의 삶은 신경을 자극하고 날카롭게 후비는, 뒤죽박죽 엉켜 있는 삶이다.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하다. ... 내 무용에 표현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삶이다."

481. 무용은 장식적인 요소를 없애고 간소한 형태가 되어야 했으며, 무용수들은 정서와 감정의 정수만을 추출하여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대 무용은 호화로운 발레와는 대조적으로 세속에 뿌리 박고 장식적인 요소를 떨궈내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다루었다.

 ☞ 대단히 엄격한 간소함의 시대가 온 것이다.

484. 테리: "순진한 사람들은 가혹하고 웃음기 없는 뼈만 앙상한 시기의 마사의 현대 무용을 관람하고는 이런게 현대 무용이라면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아, 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489. 그녀는 1930년에 뉴멕시코 주에 위치한 미국 원주민 지역을 방문했다. 피카소가 여름이면 고솔이나 오르타데 산후안과 같은 지역을 방문해서 새로운 기운을 얻었듯이...

  ☞ 나에게 이런곳은? 해남 땅끝 미황사, 대전 장대울 살림마을, 인도의 오로빌, 북한산...

493. <원시 제의> : 관객과 무용수들을 정신의 지극한 황홀경으로 고양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 이다.

496. 변경 지역에 사는 개척자의 세계는 위험하지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세계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섬뜩함으로 유명한 무용가가 이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했다.

 ☞ 미국 개척자들의 경험을 몸으로 표현한 작품

498. 손동작 자체만으로 얼마나 광대한 특성을 의미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 우리의 극적인 힘은 에너지와 활력에서 나온다.

504. 1940년에는 그레이엄의 주요 공연을 사진에 담은 바바라 모건의 기막힌 사진집이 세상에 나왔다.

505. <프론티어>가 그레이엄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작품, <애팔래치아의 봄>은 가장 의미폭이 넓은 작품.. 불후의 명성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작품

507. 전후기의 작품을 통틀어 그레이엄의 무용 대부분이 중심 인물의 감정과 관념을 표현하는 데 집중돼 있는 반면, <애팔래치아의 봄>은 인생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여준다.

509. 그녀에게 있어 공연이란 삶 자체였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삶이 요구하는 긴장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 모든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하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

513. 그레이엄은 신화적인 주제를 무용에 도입하면서 소위 신고전주의적인 국면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514. 그녀는 그리스 고전 및 고대를 다룬 많은 저작을 풍부하게 읽었을 뿐 아니라, 신화와 제의, 무의식을 다룬 저서, 특히 프로이트와 융 및 이들 학파의 저서를 탐독했다.

514. 드 밀은 그녀의 말투가 "생략된 부분이 많아 알아듣기 어렵고, 전혀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다."고 말한 바있다.

 ☞ 나구만, 행동이나 글로 표현하는게 편해...

517. 신체-운동 지능은 자립적인 상징체계를 통한 사유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 실험하고 여러차례 변형하는 과정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레이엄은 그녀의 몸이었다. 그 몸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강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단련시킨 덕분에 그녀는 그녀 자신이 된 것이다.

519. 관객에게 신체적 긴장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무용수가 매우 열의가 있고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으며 뭔가를 애써 추구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521. 학생들은 매일같이 '고문'같은 훈련을 받았으며, 점차 근육질의 강건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10년동안 훈련을 받은 후에 비로소 군무단을 벗어나 4인 그룹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521 "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차이점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있지 않다. 비밀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있따."

 ☞ 오든 : "시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522. "나는 무용을 삶에서 분리시킨 적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렝이엄은 다른 현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순수 추상의 세계에 매혹되지 않았다. "나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느끼기를 원한다."

523.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등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들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하게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고 물려줘야할 유산으로 여긴다."

525. 그레이엄은 인간의 의지력에 관해서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참고했고 무의식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저작을 읽었다.

527. 그레이엄은 주로 학생들과 동료들과 함께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와중에서 새로운 무용을 발전시켰다.

 ☞ 일상적인 활동... 사진을 배우고 나눌 동료들이 있으면 좋겠다. 글을 나눌 동료들은 생긴것 같은데?

530. "무용가의 도구는 탄생과 죽음의 운명에 매여 있는 그의 육체이다. 그가 사멸하면 그의 예술도 사멸한다."

533. 무용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그레이엄은 자선가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534. 20세기는 미국이 농업 위주의 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국으로 발전하고 세계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시기이다.

536. "엄청난 작품 목록이다. 한 명의 안무가가 창조한 작품으로는 그 규모가 최대이고, 그 독창성이나 다양성이 우리의 외경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 오직 희곡의 셰익스피어와 회화의 피카소만이 이와 견줄 만한 업적이다."

537. 과거의 고전 무용과 유럽의 최근 경향을 충분히 의식한 상태에서 미국적 풍광과 민주주의 이념, 현대적 생활 리듬이 자아나는 특별한 정취에 주목했다.

539. 비평가 조셉 캠벨이 자아의 전부를 인생에 바치는 것에 대해 말했을 때, 그레이엄은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만약 그런 길을 택했다면 나는 예술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 그녀가 맺었던 파우스트적 계약은 개인적인 행복감이나 친밀한 인간관계의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장 마하트마 간디- 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542. 1600년에 영국의 동인도 무역 회사가 설립되었고, 10년후에 영국의 왕은 아시아 전역에서 무역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이 회사에 부여했다.

542. 지역별로 사분오열된 인도아 대륙의 2억 5천만 인구가 몇 천 명에 불과한 영국의 상인들과 공무원, 군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따.

543.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한 후 250년 후, 그리고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지 겨우 10년 후인 1869년에 아라비아 해에 면한 포르반다르 지방에서 모한다스  K. 간디가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인도 사회의 중간 계층인 바이샤 계급에 속해 있었다.

544.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쾌념치 않는다. 지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성장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546. 조지오웰 :"담배 몇 가치, 고기 몇 점, 도둑질한 돈 몇 푼, 두어 차례 매춘굴 방문(두번 모두 '아무짓도 못하고' 나왔다), 플리머스항에서 어느 숙소 여주인과 벌일 뻔한 불륜 한 토막, 한 차례의 격한 감정의 폭발, 이것이 전부다."

546. 13살때 결혼했다.

547. 이미 결혼한 몸에 점점 가족에 대한 책임이 커져가던 평범한 학생이었던 간디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컸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간신히 합격한 간디는 1888년 바우나가르에 소재한 규모가 적고 학비가 싼 대학에 진학했다. 가족의 오랜 친구이던 마브지 다베는 영국에 건너가 법률을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조언을 했다 .다브지의 충고를 받아들인 그는 아내와 첫 사내 아이 하리랄을 떠나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게 될 여행길에 났다.

  ☞ 고향에 남은 젊은 아내에게는 삶에 대한 다른 욕망이 없었을까? 그녀는 간디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그녀가 현대적 여성이었다면 단박에 이혼을 했을 것이다.

548. 영국행을 결정한 것, 그러니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여러모로 심리적인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이 경험은 인도의 한 지방에 머물러 있을 때에 비해 훨씬 다양한 선택권을 간디에게 열어주었다. 유럽에 정착한 엘리엇이나 파리로 간 피카소처럼 간디 역시 먼 타향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웠다.

549. 전기작가 루이스 피셔는 "별다른 특징이 없이 평범하고 결점도 많고 허둥대는 변호사로 1891년에 런던을 떠났던 간디와, 수백만의 위대한(마하트마) 지도자" 사이에는 거의 닮은 점이 없다고 말한다.

549 해외에 거주하는 동안 간디는 엄청난 독서와 풍부한 산 체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549. 이런 경험을 통해 간디는 앞으로 그가 만나게 될 온갖 군상의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배웠고, 앞으로 그가 협상하게 될 영국 및 영국에서 교육받은 지도자들을 직관적으로 애해할 수 있게 되었다.

550. 서유럽에 살았던 적이 있는 중국의 지도자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소련의 지도자 레닌과 닮은 면이 있는 반면, 조국을 떠난적이 한 번도 없었고 다른 사회에 대한 직접 경험이 부족했던 마오쩌둥이나 스탈린과는 중요한 부분에서 서로 달랐다.

550. 간디 성격의 중요한 일면 : 그것은 기회가 문을 두드리면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야 하고 또 자신과 가족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해도 그 기회를 붙잡는다는 점이다.

552. 만년에 간디는 자신이 남은 인생 동안 매진하게 된 정치 운동이라는 사명의 기원이 마리츠버그의 기차역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새운 그날 밤에 있다고 회고했다.

553. 그는 모욕감을 깊이 느꼈다. 어릴 때부터 도덕심이 강한 소년이었던 그는 영국 생활을 통해 인권과 '교양'이 몸에 익었고 법률가 자격까지 갖추었던 터라 이에 용기를 얻어 몸소 행동에 나섰다.

554. 처음에는 모든 일이 서툴렀다. 배워야 할 모델이 업었기 때문에 스스로 공부하고 발견해 가면서 능력을 향상시켰다.

 ☞ 나도 사진과 글쓰기에 대해 모른다. 그것을 어떻게 알릴수 있을지도 모른다. 편집, 출판... 등등 모든것을 하면서 배워야 한다.

555. 힌두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른이 된 시기는 인간이 활동의 중심에 서는 시기이다.

556.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영국의 사회 이론가 존 러스킨과 러시아의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의 저서와 미국의 사회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에 관한 글을 읽어나갔다. 곧이어 간디는 적극적 실천가답게 자신의 사상과 종교를 직접적으로 실행할 길을 찾아 나섰다.

558. 그는 오직 작은 공동체에서만 실행이 가능한 단순한 삶,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금욕적인 삶을 요청했다. "진정한 치유는 영국이 이기심과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문명을 버리는 것, 아무런 목적도 없고 헛되기만 할 뿐인, 그리고... 기독교의 정신을 부정하는 그런 현대 문명을 버리는 것에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559. 추종자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이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가 단지 수동적인 저항에 그쳐서는 안 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명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559. 잦은 언론 기고(성명)과 시의적절한 전보

560. 간디가 남아프리카 거주 인도인의 처우 개선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룬 가장 커다란 성취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차원에 있었다... 그는 사상적인 입장을 정립하고 그것을 삶에서 그대로 실천했다.

560. 간디와 같은 정치적 창조자들에게 있어 창조적인 작업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보다 넓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도록 추동하는 능력에 있다.

563. "나는 영국 법을 어겨야 했다. 내가 복종하는 것은 그보다 더 높은 법, 내 양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영국에 대한 첫 번째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다."

566. 간디는 "말이 입으로 왔다"고 말했다.

 ☞ 아메다바드 운동에서 그의 단식 결심을 선언하는 순간의 경험

567. 아메다바드 운동의 특징 : 처음부터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 투쟁의 중심부에는 신성한 맹세가 있다는 것, 참여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자기수양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운동의 대의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린다는 것, 도덕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관련자의 사고를 자연스럽게 압박한다는 것, 그리고 관련자들 모두의 체면을 깍지 않는 선에서 타협안을 마련한다는 것 등이다.

569. 간디는 그의 '언어'를 친구와 적이 모두 이해한다고 확신했다.

571. 간디는 전례 없이 웅변적인 어조로 자신의 입자을 설명했다. 비폭력이 자신의 신조임은 분명하지만, 결국 일어나고야 만 폭력적인 범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기꺼이 가혹한 형량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573. 간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편에 독서와 저작과 성찰이 있고 다른 한편에 몸소 용기 있는 모범을 보이는 지도력이 있는 두 가지 활동의 항구적이고도 생산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575. 신조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 바가바드 기타에서 강조되는 진리와 도덕성, 그리고 영적인 갱생에 대한 추구가 자기 존재의 근본이라는 것이었다.

576. 따로 마음속에 심어둔 신학적인 믿음은 전혀 없었고, 주요 종교를 연구해서 각 종교의 장점과 한계를 식별할 것을 권장했으며, 만물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포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576. "나에게 있어 종교가 없는 정치란 우리가 피해야 하는 완전한 쓰레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는 실제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에는 별 관심이 없는 종교에 대해서도 그에 못지 않는 거부감을 표명했다.

577. 사티아그라하 : 진리파지지자, 참과 사랑에서 태어난 힘.

578. 간디가 공헌한 부분은 사티아그라하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상세한 실천 지침인데, 이는 적어도 영국에 지배되는 인도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는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

580. 도덕적 명확성이 결여된 상황, 규율바른 실천자나 추종자가 없는 상황, 반대파에게 공정성에 대한 분별이 없는 상황은 사티아그라하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사회운동이 지녀야할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

581. "만약 이 실험이 지금 성공한다면, 압제자들에 대한 아무런 적대감도 없이 자신해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수천명의 남녀가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다."

582. 어떤 조짐이 보일 때 운동 과정을 바꾸는 능력만큼이나 인성 영역에 대한 간디의 이해 역시 사티아그라하에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583. 삼등칸 기차 여행, 실 잣기, 지역 방언으로 말하고 글쓰기, 식이요법 감독 등 모든 일에서 그는 그것을 성찰하고 새로운 생활 방식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실험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했다.

584. "나는 아무런 재산도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은 참으로 여유있고 편안한 삶이다. ... 나는 가난한 탁발 수도승이다. ... 기도가 내 삶을 구원했다."

584. 의학 치료에 대한 이런 완고함이 필요한 의학 치료를 그가 못받게 했던 다른 가족에게는 불필요한 고통을 자아냈다.

586.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높은 기대를 품고 있었고 그들의 성숙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그들의 처지가 좋아지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부모를 연상시켰다. 언제나 스스럼 없는 태도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으며, 많은 군중 앞에서도 이런 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587. 완고한 구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각자에게 맞는 일을 적당히 찾아주고 유머 감각을 발휘했으며, 실수를 인정하고 마음을 바꿀 줄은 알았기 때문이다.

 

불편한 가족관계

589. 간디는 오랫동안 아내와 갈등을 빚었다. 아내에게 글을 배우라는 요구와 자신의 말을 듣게끔  하는 문제도 그런 갈등 요인이었다. .. 간디와 함께 한 그녀의 삶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590. 큰아들 하리랄은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아버지의 믿음과 실천에 반항했다.

590.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간디는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을 이상할 정도로 어려워했다. .. 친밀한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간디의 결함은 결국 가족 문제로 불거져 나왔다.

591. 하지만 가장 친밀한 인간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은 어쩌면 대중을 상대하는 일에 위대한 재능을 가진 자의 어쩔 수없는 부수물이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593. 간디는 완전히 부도덕하거나 아예 도덕관념이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593. 심지어 '나의 친애하는 친구에게'라는 인사말을 적은 편지를 직접 히틀러에게 보내서 그의 전술을 바꾸고 유대인을 용서하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히틀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 인간의 고귀함을 철저히 믿은 그의 종교적 신념

595. 피셔 "힘센 정부에 맞서 소금 한 줌을 집어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의 상상력과 위엄 그리고 약간의 쇼맨쉽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무식한 농부와 지식인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601. 간디가 회담의 실패를 통해 깨달은 것 : 하나는 영국이 도덕성이나 자비심으로 자발적으로 인도를 포기할 일은 결코 없고, 오직 인도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여러 파벌들, 특히 이슬람교와 힌두교 세력이 쉽사리 서로의 차이점을 묻어버릴 거라고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602. 새로운 인도에 대한 계획, 그가 '영적인 사회주의' 혹은 '건설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부른 계획을 상세히 마련했다.

602. 1936년에 어느 촌락에 정착한 그는 경작 기계와 토양, 소치기와 동물, 장인과 수공예 간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603. 그의 관심이 조국의 해방이나 전 세계의 개혁만큼이나 한 마을의 정화와 이상화에 쏠려 있었다.

604. 불세출의 이슬람 지도자 모하메드 알리 진나는 힌두교 일파가 지배하는 하나의 인도에서 자신과 이슬람 민중들은 살지 않겠다는 의사를 뚜렸이 밝혔다. 탁월한 전술을 구사하고 자신의 입장을 단호하게 지킨 진나는 결국 인도를 두 나라로 가르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인도 이슬람교도의 다수파는 파키스탄을 고국으로 갖게 되었다.

605. 간디의 도덕적 권위는 여전히 막강했고, 그의 적들조차 자신들의 빗나간 외고집이 간디가 단식으로 인해 죽게 된느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 광신적인 힌두교 신자인 나투람 비나약 고드세가 일흔아홉 살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권총을 쏘았다. 간디는 군중이 모여 있던 기도장소로 나가던 중에 고드세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607. 인도는 그저 그런 민주주의 국가로 남았고, 간디의 측근인사였던 네루의 후손들이 정치적으로는 간디와 관련이 있는 왕조를 얼마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티아그라하의 유산은 오늘날의 인도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 간디의 유산은 무엇인가? 그의 자서전에 담긴 그의 정치적 실험정신? 그런 사람이 살았다는 전설?

607 . 많은 인도인들은 한결같이 간디를 존경했지만, 그의 원칙은 오히려 미국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나 영국의 그린함 공조 행동 그리고 중국의 학생 저항 운동에 더욱 잘 적용되었다.

608. 그는 여는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그가 선택한 분야에서 조숙함을 보였고 그 분야의 거장이 되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할 줄 알았다. 신중하게 경계인의 위치를 견지한다거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도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데도 소홀함이 없었다는 점, 근본적으로 자기본위의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점, 정치적 효과를 위해 사적인 친밀성을 희생했다는 점, 사상이나 인품에 아이같은 요소가 남아있다는 점 - 창조의 거장다운 표지!

609. 어떤 인종이나 민족도 다른 인종이나 민족에 비해 우월하지 못하며,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고, 타협은 두 정파를 모두 강화한다는 근본적인 통찰이 그것이다.

609. "간디는 일반적인 권모술수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삶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정치 영역에서 더 높은 수준의 인간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싸운 유일하게 참다운 정치가였다." -아인슈타인-

"아마도 후세대인들은 이런 인물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으로서 이 지구상에 걸어다녔다는 사실조차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간주곡 3

610.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간디-

611. 간디와 그레이엄은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육체로서 창조 활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인 외양,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창조 활동의 핵심이다.

613. 간디가 사망하자 그가 평생을 바쳐 헌신한 운동이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다.

614. 그레이엄에게 공연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었던 반면, 간디에게 실행이란 정치와 사회 및 종교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614. 간디만이 어떤 집단이나 분야에 속한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제3부 창조성의 조건

10장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620. 개인의 발달에 초점을 맞춘 분석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우선 그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발휘한 창조성과 연관하여 각 인물의 유년기를 검토한다는 점, 생애 전반에 걸쳐 창조적인 능력이 발달하는 국면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 획기적인 업적을 내는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622. E.C(Exemplary Creator) 전형적인 창조자는 자신이 출생한 사회의 중심 지역, 권력과 영향력이 가장 많은 지역에서 다소 떨어진 지방에서 나고 자라지만, 가족기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아예 모를 정도는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다. 집안분위기는 반듯한 편이고, 자신의 생물학적인 가족에는 다소 소원함을 느낀다... 가족들이 자식들에게 거는 기대가 큰 편이다.

623.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안, E.C는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재능을 보이고 가족은 안정된 직업인이 될 수 없다는 우려를 하면서도 이런 관심을 고무한다... 한 때는 종교를 거부했다가도 훗날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

623. E.C.는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활동이 활발한 중심 도시로 과감하게 이주한다. 그는 대도시에서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한 젊은 동료들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만나게 된다.

624. E.C.는 이제 동료들과 고립되어 홀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 몰입의 경험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특별한 계약, 즉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으려 한다... 그는 인생의 완성보다 작품의 완성을 앞세운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잘못된 출발을 시정할 능력이 있으며 자부심과 엄격한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실수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 간디마저도 인생의 완성보다 정치적 신념을 앞세웠다는 관점이 새롭다. 그러기에 종교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서 온전한 사람, 깨달은 사람을 추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근데 그런 삶에 관심이 생긴다.

628. E.C. 유형의 인물들은 실제로 자신감과 기민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근면함,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을 지니고 있다.

629. 아이다운 특성이 순진함과 참신함으로 나타나면 긍정적인 색채를 띠게 되지만, 반대로 이기심과 보복심리로 나타나면 부정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632. 동등한 위치에서 상대를 대하고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타협을 통해 더불어 갱생을 도모할 수 있따는 사상이 바로 사티아그라하이다.

632. 한 동안 <황무지>보다 강렬한 작품은 나오지 않을 정도 였지만, 정작 그것을 쓴 당사자인 엘리엇은 아무런 활기도 없고 별 인상도 주지 못하는, 수줍고 쌀쌀맞은 인물이었다.

633. 가정의 분위기는 대개 엄격했다. 규율이 엄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가풍에서 자랐기에 어릴 때부터 해야 할 일을 반드시 지켰고, 학과 공부나 전문 지식을 빨리 습득했따. 이들은 모두 억압적인 통제에 반발했다.

635. '기성 체제'에 편입될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 진로를 바꿔서 최소한의 지적인 주변성(경계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635. 이들 모두가 단호하게 경계인의 위치에 있었고 이런 위치를 견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기꺼이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었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는 것은 아니다.

636. 첫째, 많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내던 시기에서 극도의 고립 속에서 중대한 발견을 이루는 시기를 거쳐 결국 나이가 들면 다시 더 크고 더 표용적인 세계로 회귀했다. 둘째, 극도의 고립을 겪는 시기에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그에게서 필요한 도움과 격려를 얻었다는 점이다.

637. 누구도 동료로 인정할 만한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637.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물론 분야마다 약간씩 기간은 달라도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었다.

637. 10년간의 견습 기간,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

638. 프로이트의 <프로젝트>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엘리엇의 <황무지>, 그레이엄의 <프론티어>, 간디의 아메다바드 파업을 결정적인 도약으로 간주한다.

638.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트라빈스키의 <결혼>, 엘리엇의 <4개의 사중주>, 그레이엄의 <애팔래치아의 봄>, 간디의 소금행진 등이 두 번째로 정점에 오른 도약이라 할 수 있다.

640. 그들은 매일 창조력을 발휘했다.

646. 20세기 초 주요 예술 장르에는 확고한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 분야는 '패러다임이 없는' 상태였고, 따라서 새롭고 유능한 패러다임이 등장할 여지가 많았다.

 ☞ 현대의 한국이나 동양의 예술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누가 전문가일까?

651. 물론 가족들과는 다소 불편한 사이였는데, 이는 간디가 대인관계에 서툴렀음을 반증한다.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 이런 면이 두드러졌다. 커다란 정치 세계의 거장이 사적인 대인관계에서는 구제 불능의 미숙아였던 것이다.

652. 엘리엇은 과거의 선배 문학인들에 대해서는 우상파괴적인 작업을 즐겁게 수행했다. 의식을 했건 안했건 그는 문학사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652. 간디의 경쟁자는 동시대의 주요 정치가인 레닌과 처칠 등이며, 또한 다른 시대의 탁월한 종교 지도자인 예수와 부처였다.

653. 창조적인 인물들은 주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는 점, 일찍이 신동의 재능을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점 등이 그런 예이다. 그리고 평생 동안 창조성을 발휘할 가능성이나 정치적분규의 불가피성 같은 문제는 분야마다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는 사실도 말해 봄직하다.

654. 개인과 분야, 그리고 장 사이에 일종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 개인의 창조성에 대한 궁극적인 결론은 내릴 수 없다.

654. 창조적인 인물의 특징적인 모습은 창조성의 삼각형에서 어떤 부조화, 혹은 부드러운 연결의 결여를 장점으로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655. 나는 몇몇 지점에서 비동시성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따르는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656. 창조적인 인물 가운데 경계인의 비율이 많다면, 이는 비동시성이 창조적인 업적과 관련이 있다는 통계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비동시성의 즐거움과 고통을 느낀 자는 다른 많은 이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주류라는 안락한 지위를 찾아 돌진하는 가운데서도 대개는 계속해서 비동시성을 추구한다는 사실도 그에 못지 않은 진실이다.

  ☞ 내가 인도에서의 경험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658. 한 발을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에 걸치고 있다는 점이 소속 사회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보다 훨신 변칙적인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얘기다.

659. 적정 수준의 비동시성이 바람직하다.

661. 무조건적인 지지로 격려하는 정서적인 차원이 있어야 하고, 혁신적인 도약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본질에 관해 유용한 조언을 해주는 인지적인 차원이 있어야 한다.

662. 창조적인 도약의 시기는 정서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매우 긴장이 높은 시기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유아기 이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 또한 창조적인 인물들이 분명치 못하고 어눌하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두뇌가 정상이며 마음 맞는 이들은 충분히 자기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시험하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663. 각각의 인물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과 계약을 맺은 것처럼 보인다.

664. <봄의 제전>을 완성한 바로 그 날 법률 문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은 그가 열성적인 혁신자이면서 동시에 법률 소송을 일삼는 사람임을 확실히 드러내는 증거로 보였다.

668.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도약의 성격을 갖는 다양한 창조성은 모든 사회의 모든 창조성 일반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 시대 서양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다면, 동양의, 동아시아의 특징은 뭘까? 전혀 다른 관점이 필요하고,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에필로그

670. 현대의 결정적인 국면이 20세기 중반에 절정에 오른 이후로 서서히 퇴조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미 포스트모던 시대, 혹은 아직 뭐라고 이름붙이기 어려운 인류사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상태이다.

675.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에서 당대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19세기말의 지난 20년 동안 기름처럼 매끄럽던 정신을 박차고 나온 뜨거운 신열이 갑자기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새로운 예술인지 새로운 인간인지 새로운 도덕인지 아니면 사회의 전면 쇄신인지 누구도 말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서 모두는 각자 자신이 좋아 하는 것만을 취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든 측면에서 옛 생활 방식에 투쟁하기 위해 일어서고 있었다... 예전에는 억압되었거나 공공 영역에 등장할 기회가 없었던 재능 있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676. <봄의 제전> 이 급진적인 작품은 마치 인생의 의미란 오직 죽음에서만 찾을 수 있고 죽음은 황홀경과 다를 바 없으며 창조는 파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676. 영국의 사회 비평가 레너드 호브하우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 우리가 허용했던 것보다 힘이 더 큰 역할을 하는 세상, 기본적인 안전성이 사라진 세상, 문명의 두터운 껍질을 뚫고 갑자기 권력에 대한 야만적인 욕망과 삶에 대한 냉담이라는 배후의 힘이 드러난 세상이 되었다."

677.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와 미국, 스페인과 러시아와 같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인물들이 하나의 세계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 전달 능력의 지속적인 발전, 전쟁 직전의 점증하는 불안감 등 많은 요인이 현대 거장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678. 현대 예술은 한때는 굳건하게 그어져 있던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680. 간디는 전통적인 힘의 정치를 거부하고 정치적 대결을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즉 벌거벗은 채로 서로를 마주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환원했다. 하나의 분야를 그것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환원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현대적인 기풍의 뚜렷한 징후이다.

681. 기본적인 형식과 구조에 대한 관심은 현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683. 프로이트를 매혹시킨 자유 연상은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상징체계를 습득해가는 아동의 자유 연상과 가장 많이 닮은 것이다. 또 다른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에 품었던 과학적 호기심을 탐구했고 주로 어린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고 실험을 즐겼다.

684. 어느 경우든 이런 유년기의 단편적인 특징이 담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종합적인 상상력, 아이들처럼 대상 전체를 종합적으로 느끼는 상상력을 요구했다.

685. 보들레르가 말한 대로 천재란 유년기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686.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고양으로 보는 관점, 두번째 관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전통을 거부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에 탐닉한다는 것이다.

687.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결정적인 특징은 의도적인 장르 혼용이다. 역사적 선례와 관습에 대한 과감한 무시이며, 모든 진지함에 대한 도전이고, 스타일과 외양 및 정체성의 변화무쌍이며, 혼돈스러운 표면 이면에서 어떤 의미나 구조를 찾는 노력의 포기이고, 창조와 해석의 무한한 자유이다. 그리고 도덕적 준거의 사라짐인데, <황무지>에는 이런 결론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그것을 미덕은 아닐지라도 어쩔 수 없는 조건으로 수용한다.

687.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에 도전하는 대신,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폐기된다.

687. 오늘날의 새로움은 내일의 상품 더미에 불과하다. 모든 권위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믿을 만한 준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688. 전통에 대한 반역은 전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나 의미가 있다.

  ☞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역, 저항이 의미가 있다.

688. 모든 것이 매너리즘과 스펙터클, 순간적인 인상에 불과하게 된다.

689. 철학자 스티븐 툴민의 견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한 감수성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적이고 관용적인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는 위계적, 엘리트적, 권위적이며, 이성과 감정 혹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근거 없는 이분법을 받아들인 시대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 같다.

690. 모든 문화가 서로 접촉하고 있으며 아이들이 일찍부터 세상의 신비와 경이와 공포에 접하게 되는 시대에는 어쩌면 아이다운 천진성은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많은 식자들이 '유년기의 사라짐'을 향수어린 마음으로 혹은 불안한 듯이 말하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690. 모더니즘은 자유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오직 역사와 선대의 속박을 인정한 상태에서 추구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와 유년기를 부인하고 모든 형태의 속박을 인정하지 않으며 과거의 뿌리를 모두 근절하려고 한다.

691. 인간이란 어쩌면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방향, 장르 혼융의 방향으로 무한정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혁신과 전통, 모더니즘과 역사주의, 창조적인 도약의 시기와 인간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정체 혹은 퇴행적인 시기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 모더니즘(신고전주의), 포스트모더니즘(해체주의) --> 다시 종교와 정치의 통합, 고전과 현대의 결합, 철학과 윤리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시대가 온다.

 


3. 내가 저자 라면

다중지능 이론의 영향

<교육이론으로서의 영향>

하워드 가드너는 80년대부터 지능을 평가하는 도구로 IQ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으며, 직관적으로 사람마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가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가설을 박사후 과정을 통해 연구하게된 영재아동과 두뇌손상을 입은 어른들의 연구를 통해 이론으로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자라면>의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기존의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을 분명히 반대하고 있다. 다양한 지능을 가진 아이들에게 어떻게 똑같은 것만을 가르치고,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는 의문을 제시한다. 실제로 다중지능이론을 적용한 국내 보고서에 따르면 학급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지는 현상이 보여진다. 이는 교육시스템의 획기적인 전환이다. 

시험을 보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교육, 학교 졸업과 동시에 학교에서 배운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버리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다중지능이론은 소개되었다. 국내에 관련 학회, 연구소들이 많이 생겼으며, 2010년 EBS의 <아이의 사생활>이란 기획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공교육에 대한 적용은 지지부진한데 비해 사교육 시장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얼마전 우리 동네에도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학습지 판매원들이 다중지능 검사를 들고 나와서 동네 아이들의 지능을 평가해주었고, 무슨 지능이 높고 이런 지능은 낮으니 이렇게 교육해야 한다고 엄마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이 방법이 엄청난 설득력을 지녔나보다, 엄마들 사이에서 이 평가가 화두가 되었고, 결국 몇백만워어치의 프로그램을 등록하게 했다. 문제는 국내에 이 다중지능이론을 들여온 학자들이 전체 교육시스템을 개혁하는데 에너지를 쏟기 보다는, 사교육시장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는데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교육문제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니 어느 한쪽을 비판할 수도 없는 문제다. 다만 다중지능이론의 원래 취지대로 교육 시스템의 전환에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

 

<하워드 가드너에게 준 영향>

다중지능이론으로 인해 하워드 가드너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교육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 책임자이자 운영위원장으로서 연구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지목한 대로 그는 교육학자들의 장(場 )에 소속되어 중심적인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그의 조력자이기도 하다. 그는 젊어서 심리분석적 역사와 전기를 읽었을 때 지적인 고향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14쪽) 그는 영국에서 연구생으로 지낼때 피아제를 집중적으로 읽었으며, 여가시간을 통해 현대 사상과 현대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피아제를 뛰어넘었으며, 그의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연구해 <창조와 기질>이라는 이 책으로 창조해 낼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책은 그의 창조다. 하워드 가드너의 삶을 그의 분석틀에 맞추어 해석해 보아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다중지능이론>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세상을 일깨웠으며, 그것을 발판삼아, 10년간의 축적된 노력으로 이 책 <창조와 기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들어가는 글 첫머리에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내 연구의 정점이자 출발점이다(13쪽)"

 

이 책의 특징

<가드너의 애정이 깃든 작업>

이 책은 하워드 가드너의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이다. 그가 빠져들었던 심리분석적 역사와 전기물 분야의 관심이 없었어도 쓰여질 수 없었다. 그의 연구는 젊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피아제를 파고들고 결국 피아제를 넘어선 질문을 던지고, 교육이론의 패러다임에 전환을 시도한다. 거기에 그의 개인적인 관심사들이 합해져 이 정점의 책이 쓰여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 책을 쓰는 일은 애정이 깃든 작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흥미를 느낀 사람들과 주제들 다루면서, 내가 사랑하는 예술 작품과 시간을 보내고 오랫동안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온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18쪽)

 

<홍보의 키워드, 창조성>

또 하나의 특징은 창조성이라는 키워드에 홍보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창조성은 무엇인가?' 라는 관습적인 질문에서 '창조성은 어디에 있는가?' 로 물음을 바꾸어 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홍보는 '창조성을 어떻게 하면 기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포장했다. 교육관련자들의 관심과 자녀를 둔 학부모, 자기계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표지에 쓴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고 발현되는가? 우리 사회는 창조적 인물을 길러낼 만한 역량이 있는가? 나는 얼마나 창조적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 옳고 그름을 떠나 800페이지의 이 책이 대중적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홍보 전략도 필요했을거라 생각해본다. 다만 하워드 가드너의 저술 의도가 읽지도 않은 이들에 의해 오해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쓴다면

<동양의 인물과 근대화라는 배경>

이 책은 서양의 20세기 초라는 배경을 가지고 쓰여졌다. 그 시대의 인물들을 분야별로 선정해서 조망하고 그 시대 자체를 읽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의 역사가 서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쓰여지지 않으면 역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동양의 중요한 시대를 선정해서 그 시대의 인물들을 분야별로 골라 조망하고 인물과 시대를 해석하는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이 산업화와 세계대전이라는 공통경험을 기반으로 한다면, 동양은 근대화와 식민경험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공통경험을 기초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가들의 성격과 작품>

사진의 역사는 19세기 초에 니에프스에 의해 찍힌 사진부터 시작되었다. 한 200년 정도 된다. 그 사진의 역사를 정리한 책들은 많이 있지만 그리 재미있는 책은 별로 없다. 먼저 사진의 역사의 과정을 통해 사진의 영역을 확장하고 새롭게 도약시킨 사진가들을 동서양을 망라해서 선정한다. 그 다음에 이 책처럼 그들의 일생과 개인과  장(場 )과의 관계, 사진분야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풀어가면 어떨까? 에니어그램의 8가지 유형 이나 MBTI 성격유형검사를 참고로 하여 이상주의자, 현실주의자, 외향적, 내향적, 직관주의자, 판단형, 감정형, 등으로 구분해서 그들의 작품세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다양한 성향의 사진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고,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진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지를 모색해보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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