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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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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일 17시 0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오소희

아이와 함께 한 여행의 기록,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등의 여행기들로 엄마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 여행 작가. 1971년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광고회사를 두루 거쳤으나, 한 번도 삶에 안착하지 못하다 20대 후반, 계룡산 자락에 3년간 정주하며 자연을 알게 되고 아이를 낳아 유년을 두 번 살면서 비로소 삶에 닻을 내렸다. 그녀의 육아 방식은 ‘따로 할 수 없다면 함께 즐겨라.’이다.

지금은 '사람' 여행을 하고 있다. 평범한 만남에서도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 경험을 깊고 따스한 울림으로 전한다. 세 돌 된 JB와 단둘이 터키로 떠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라오스, 시리아, 탄자니아 등 우리와 다른 속도로 사는 이들 사이를 아이와 함께 느릿느릿 거닐고 있다. 현지인이 바가지를 씌우면 기꺼이 속아주기도 하고, 초대를 해주면 천연덕스럽게 한 밥상에 앉기도 한다. 그들이 펼쳐 보이는 애잔한 사연들을 낮은 자세로 공유하고 섬세하게 기록한다.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사랑하며 그 순간 마음으로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가장 바른 나이듦이란 생각을 한다.

저서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하쿠나마타타, 우리 같이 춤출래?』, 『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 『사랑 바보』가 있다.
                                                                                                                              [YES24 제공]

2년전인 걸로 기억한다. 둘째아이를 낳고 출산휴가를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으니까. 아이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부족한 엄마인 내가 나를 엄마라 부르는 또 하나의 작은 생명체를 덥썩 품에 안아버린 여름. 한번 뉘어놓으면 제 힘으로는 방향조차 바꿀 줄 모르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역시 아이는 정말 예쁘구나..그치만 아! 다시 시작되는 거겠지. 온몸을 닫고 살아야하는 꼼짝마의 세월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쪼개 출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어리석은 나에 대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둘째 아이는 한순간도 품에서 내려놓기 싫었다. 아이의 리듬에 따라 자고 먹는 시간들 속에서 간간히 주어지는 해방의 시간. 그러니까 아이가 엄마보다 깊은 잠에 빠져주는 고마운 시간엔 짬짬히 책을 읽으며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충족되지 않는 갈증을 채워가며 여름을 보내고 있을 무렵에 만난 두 권의 보석.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였다.

어느 기관에선가 ‘비전필독서’로 선정한 책중 가장 두꺼워보였던 몇권을 소화해보겠다는 야침 찬 계획과 함께 시작한 출산휴가였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 사놓은 책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꼬물거리는 아이의 체온을 느끼는 순간 머리보다 피부가 먼저 체감한 현실이 자꾸만 움직이라고 선동하는 책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한참을 읽지 않던 성장소설들에만 눈길이 맺혔다. 그날도 그런 가벼운 책들을 찾을 양으로 ‘성장’을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다. 자는 아이의 숨소리를 살피며 이리저리 서핑을 하던 중 발견한 카피. ‘세살박이 아이와 함께 떠난 첫 배낭여행지. 터키. 세상과 호흡을 맞춰가는 1.5인의 성장여행기.’ 흡.. 이건 뭐지?

넘어가는 책장만큼 설레임이 차올랐다.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거구나. 원하는 마음이 주저하는 마음을 넘어서기만 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다다른 곳에 몸을 보낼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다면 어떤 순간에도 문은 나타나고 또 열리는구나. 완벽한 타이밍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욕심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불완전한 시간으로 만들고 있었구나. 완벽한 역할을 수행해 내겠다는 욕심이 오히려 충실한 역할행동을 방해하고 있었구나. ‘따로 할 수 없다면 함께 즐겨라.’ 이 얼마나 명쾌한 지침인가. 나는 왜 항상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게임만 고집했던 걸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와 또 그만큼이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여행 사이의 아름다운 삼각관계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한 엄마 여행작가 오소희. 아이를 희생하지 않았기에 더 뿌듯한 여행이었을 것이고,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기에 더 애뜻한 엄마와 아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와 아이의 느린 보폭을 따라가며 즐기는 터키도, 또 그녀와 아이 사이의 사랑스런 줄다리기를 관전하는 재미도 이미 기대를 훌쩍 너머서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흔든 것은 역시 작가의 라이프스타일 자체였다. 그녀는 터키 여행이후로도 매년 아들과 함께 마음이 가는 곳에 머물다 돌아와 그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내고 있었다. '여행'과 '아이'라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두 가치를 조화롭게 소화해낸 그녀의 삶 자체가 독자의 마음을 끌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열심히 풀어냄으로써 '밥'이라는 또 다른 숙제를 저절로 해결해 낸 셈이다. 아~! 부러워라.

근데..그녀에게 가능했던 일이라면 내게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녀가 만들어낸 세상이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였다면 나는 또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면서 출산과 육아로 탈진해있던 내 눈에도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장을 덮을 무렵 뚜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건져낼 수 있었다.

2014.7.25

 

시원한 그늘, 가끔씩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탄력 쨍쨍한 햇살과 함께라 더 고마운 터키의 아침.

이곳에 머문지도 벌써 엿새째. 어느새 이 아침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창훈이는 해먹에 누워 책장을 넘기다 그대로 잠이 들기도 하고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스케치북을 찾기도 한다.

 창훈이는 이번 여행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녀석이 없는 새 살짝 컨닝한 스케치북안에 그려진 세상에서

 훌쩍 커버린 아이를 본다.

 

 서영이는 마당에서 펜션손님들과 놀고 있다.

 바다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제 입맛에 맞았던 식당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또 그들이 이곳까지 오는 길에 보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마치 제가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사람 한사람 세심히 살피는 모습이

 제법 어른스럽다.

 

엄마는 테이블에 앉아 그런 서영이를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신다.

테이블위에는 이곳 풍경을 담은 예쁜 엽서들이 흩어져있다.

엄마는 지인들을 떠올리며 정성스레 엽서를 쓰고 계신다.

머무는 곳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는 엄마만의 의식이다.

작년엔 엄마의 주요 수신인이셨던 아저씨 한분이

엄마의 여행 엽서를 엮어 책을 내주시기도 했다.

 

워서 보는 하늘은 온통 나뭇잎이다.

잎이 흔들릴 때마다 빛이 그 사이를 파고들며 부서진다.

아~!! 이 순간의 감동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서둘러 일어나 노트북앞에 앉았다. 

 

오늘은 남편이 오는 날이다.

일때문에 모든 일정을 함께 할 수 없는 남편은

주말이 되면 우리가 머무는 곳으로 바로 날아온다.

남편이 오면 꼭 바다에 데려가야지..

쏟아질듯 빛나는 밤별을 그와 함께 느껴봐야지..

보고 싶다.

그리고 2011년 5월. 터키도 아니었고, 마음 내키는 곳에서 한참을 머물 수 있는 자유로운 일정도 아니었던데다, 남편과의 상봉도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아이들이 너무 어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모든 글들을 알뜰히 채집할 수 있는 여유 따윈 없는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참 좋은 시간들이었다. 아마 2년전 그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기획조차 되지 않았을 그런 여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내게 끼친 영향은 ‘여행’만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자연인으로서의 나의 욕망과 엄마라는 역할이 아름답게 조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신의 삶으로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바로 다음에 만난 책이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었다면 오소희. 그녀도 언젠간 내 인생으로 초대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예감이 든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프롤로그

처음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법, 주저했던 나를 나보다 더 믿고 등 떠밀어주었던 남편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5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이는 많지만 정작 떠나는 이는 적다. 일상의 짐을 내려놓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떠나지 못할 나름의 이유가 반드시 있다.

Mommy, is it Christmas Eve?

십년이 다 된 고물차를 끌고 다니면서도 여행 적금을 들었다 13

영어란 더 넓은 세상의 많은 것들과 ‘소통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는 주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14

잠든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나자, 비로소 내게 말할 수 없는 평화와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14

사람이 있는 곳, 그랑바자르 12

나는 익숙한 대로 그의 접근을 상행위와 연관지어서만 생각했다 ...나는 비로소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사심이 없는 눈. 그의 눈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꼬셔볼 ‘여자’도 물건을 팔아줄 ‘돈지갑’도 아닌, 그저 사람. 사람 대 사람. 왜 이렇게 간단한 공식이 생경한 것일까. 어쩌면 나의 삶이 그만큼 비인간화된 공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23

원하는 것 앞에서 돌아서는 법 18

여행의 패턴이 정해지고 그 용량을 알아내면, 그 용량만큼만 담으면 된다 33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본다 30

그래, 느긋하자, 나는 주문처럼 되뇌인다 42

나는 내가 아이에게 요구할 것이 있을 때는 단호하게,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설득해야 함을 깨달았다 43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45

나를 무장해제시킨 하렘 48

하렘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은 오스만 제국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퇴학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50

한참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부터 이런 식으로 울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항상 ‘나 이상’으로 강해야 했고, 거기에는 나 하나만을 위해 열린 감수성 같은 것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나라는 개체만을 위한 욕구, 내 안의 여성으로서의 욕구, 이런 것들은 아이의 목마르다거나 춥다는 말 한마디에 정신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던 것이다 51

그런데 지금 이 눈물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나는 오늘 아이나 가족과는 무관한 것, 그럼에도 그 자체로 아주 아름다운 것 앞에서, 한 아이의 어미가 되기 이전처럼 흔들렸고 흔들려서 행복했다...나는 비로소 온전히 부드러워졌고 열렸으며 행복했다. 그리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52

베이코즈의 골목에서 잃어버린 유년을 찾다 58

스케줄이 빠듯하여 아이에게 소홀히 한 게 있던가? 계속해서 명령조로 말하고 있었던가? 두 번째 질문은 확실히 ‘Yes"다. 나는 아이 옆에 같이 드러누워 최대한 다정을 가장해본다 58

규칙도 없고 스케줄도 없는 아이가 바쁜 순간에 제동을 걸 때, 일단 귀 기울여 보면 예상치 못한 소득을 얻게 될 때가 있다. 아이의 신선한 발상이 바쁜 아침, 내게 작은 휴식을 선사한다 59

터키 남자와는 연애만 하라 72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들어줘요. 그 눈빛이나 손길이 얼마나 다정다감한지, 마치 공주가 된 기분이죠.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끝이에요 76

영리한 그녀, 야스민이 빠진 덪 84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문제들은 자꾸 쳐다보고 해결하려 애쓰는 것과 상관없이 아주 느리게, 눈에 띌 듯 말 듯 좋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그 문제에의 처방은 기다림과 되풀이 외에 달리 없다는 것도 터득했다 86

뭐든 빨리 배우고 터득하는 야스민네 가족이 영악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방식이 나는 피로했다 89

“당신은 이미 이곳에서 부자잖아요. 쓰지도 못할 만큼 바쁘게 돈을 벌고 있잖아요. 한 호흡마나 늦춰요. 조금만 덜 일해요.”

그래도 그녀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덜’ 일할 수 있는지 방법에 있어서는 묘연해할 것이다. ‘느리게’‘덜’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덫이기 때문이다 90

한국인이여, 인디림은 이제 그만 94

계획에 예산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산에 계획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101

레일라가 정말 열두 살일까요? 108

미안하지만, 나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120

무엇을 아끼는가. 살아서 다하지 못하고 아껴두는 것, 유보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집마다 일일이 손으로 빨아 넌 커다란 이불을 보며 내가 자신에게 하는 반성이기도 하다. 안전하게, 안락하게, 게으르게, 주어진 생을 ‘덜’ 살고 있는 내 자신...128

동굴집의 빈민, 파트마의 초대 134

우리는 바람에 날아간다, 에이르디르 152

버스에서 내릴 때 아이가 잠결에 내리지 않겠다며 발버둥을 쳤고, 그 와중에 영국인 노교수의 어깨에 발도장을 찍었다. 노교수는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어깨를 털어냈다 154

여행을 할 때, 내겐 나름대로 지키고자 애쓰는 원칙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최대한 걷는 것이다 159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뒤로 나는 아이에게도 혼자 걷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무척 노력했다. 어떤 엄마들에게는 가베나 오르다 같은 것이 중요한 교육적 선택이 되는 시기에, 나는 아이를 부단히 데리고 다니며 걷게 했다. 열을 오를 때에도 졸음이 쏟아질 때에도 아이는 더 걸을 수 없을 때까지 제 힘으로 걸었다. 같이 놀던 제 또래 친구들이 모두 엄마에게 안겨 걸을 때에도, 아이는 묵묵히 혼자 걸었다. 그때 내가 해준 것은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벌써 큰 형아가 다 되었구나, 하는 속삭임과 뜨거운 포옹뿐. 아이를 번적 들어 안아주면 훨씬 수월한 상황에서도, 나는 일단 아이와 내 자신에게 인내할 기회를 먼저 주었다 159

투명함은 투명함끼리 통한다 168

사실 여행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게 “You are brave!"를 외쳤다. 특히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랬다. 외국에 나가면 어린아이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하는 서양인 가족을 만나는 것이 그리 드문 일만은 아닌데, 그럴 경우엔 항상 엄마와 아빠가 함께하고 유모차나 캐리어 등 만반의 ‘물적’ 준비를 갖추는 여행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과연 내가 용감한가? 그건 아닐 것이다. 가끔 세상물정 모르고 겁 없이 덤빌 때는 있지만, 그건 용기와는 또 다른 것이다. 아이와 어차피 하루 24시간을 같이하고, 시장에도 같이 가고, 공원에도 같이 간다면, 터키에 같이 못 갈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Why?'에 대해 생각했겠지만, 사실 내가 생각한 것은 ’Why not?'이었다 169

호수에서 자란 고귀한 영혼의 아이 182

물질이 개입되면, 아이들의 세계도 어른의 세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배고프지 않은 자는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고픈 자가 자신의 부족한 양식을 더 굶주린 이와 나누는 어른들의 현실 말이다 184

아직 그는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알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한 사람이 가진 우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나아가 더 진한 애정의 세월이 흐르면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그 모든 과정을 그는 아직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주의와 태만으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젊음을 잃는 것 또한 사실이다 190

여성을 억압하는 나라의 젊은 남성들이 대게 그러하듯, 여성은 그들에게 대게 성적인 대상으로 존재한다. 여성과는 지적인 대화를 할 수도 없을뿐더러, 만약 하더라도 그것은 섹스를 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하다. 여성과 토론을 한다거나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긴다거나 하는 식의 다양하고 건전한 활동들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여성에 대해 갖는 환상은 오로지 가장 낮은 차원의 관계, 섹스로만 고착되어 있다 191

그러나 이들의 접근이 끈적끈적하게 느껴진 적은 있어도 폭력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들의 노골성은 다분히 이들의 단순한 여성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특유의 진한 눈썹과 강렬한 눈빛으로 의중을 전달한 뒤, 아니면 그걸로 ‘땡’이다. 눈빛으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밀폐된 공간에서는 범죄자로 돌변하는 강간율 세계 3위의 한국에서 자란 여성들이 터키 남성들의 ‘의사가 분명한’ 접근을 두려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좀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곤 했다. 왜냐하면, 노출된 위험보다 감춰진 위험이 항상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출된 위험은 보이는 대로 막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터키 남자들의 작업 걸기에는 강하게 ‘NO!'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9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 198

마음의 평화가 깨어진 나는 결국 중빈을 성공적으로 놀이터에서 끌어내는데 실패했다. 아이는 크게 울음을 터뜨리면서 막무가내로 앞장서는 내 뒤를 마지못해 따랐다. 나의 언성도 높아졌다... “엄마도 네가 힘든 거 다 알아. 힘들어서 떼쓴 것도. 우리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자.” 나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는다. 그러자 아이의 눈에 다시 서러움의 눈물이 맺힌다. “엄마, 그래도 나 섭섭해.” “그래, 그럼 한 번 더 끌어안자. 사랑해.”

아이의 눈은 득도한 자의 눈이다. 우리가 관계를 맺음에 있어 존재의 본질(개)보다는 본질을 수식하는 일시적인 현상(입가에 똥이 묻은)에 집중하는 반면에, 아이들에게는 생래적으로 본질이 비본질에 우선하는 힘이 있다. 즉, 비본질은 이후의 성장 과정에서 학습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열심히 방황하고 탐구하는 자만이 다시 모든 것을 한데 아우르며 본질을 식별해낼 수 있는 노년의 혜안을 갖게 되는 듯하다 207

여행이라는 건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여행을 하는 거겠지만, 이 꼬마 녀석과의 여행, 정말 할 만 하다 208

가엾게도, 한국인들은 노예로군요 210

많은 노동 뒤에 오는 짧은 휴식조차 스스로 주관할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예의 삶일 것이다 216

“엄마, 오늘 참 재밌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내심 최악의 장소라고 생각하는 이곳 대형 관광지 안탈랴에서, 아이는 여행의 절정에 올라 이렇게 나를 북돋는 것이다. 계속 가라고, 이제부터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원한다면 내가 너를 데리고 가주겠노라고...218

고통이 없는 삶은 비어있는 삶 226

낯선 사람을 향해 극히 사적인 화제로 바로 돌입하는 것,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모자라거나 용기있거나. 나는 어쩌면 그녀가 매우 용기있고 열려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229

내가 가진 전부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 남편, 집, 심지어 나의 인생까지, 어떻게 하루아침에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뒤바뀔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요. 나는 계속 성실하게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다른 생각은 한 번도 한적이 없었거든요. 다른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어요. 그래서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죠. 남편은 그게 싫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그런 무신경이...? 230

그녀의 드로잉에는 ‘느낌’이 있었다. 그저 여백일 뿐인 흰 종이에 느낌을 담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 생의 무게가 텅 빈 종이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231

올림포스가 내 안으로 들어오다 238

누워서 보는 하늘은 온통 나뭇잎이다. 잎이 흔들릴 때마다 빛이 그 사이를 파고들며 부서진다 238

아이와 함께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그리고 아직은 모르는 게 좋다. 어쩌면 결혼과 육아 모두에 대해 끔찍한 선입견을 갖게 될지도 모르므로 240

녀석, 머리와 손 사이를 잇는 연결 신경이 필요에 따라 붙었다 덜어졌다 한다 242

도시에서의 삶이 나를 지치게 했던 것은, 원하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던 까닭이었다 243

벌들이 나를 좋아하나봐 254

“엄마, 이것 봐.”

아이가 비밀을 털어놓듯 내게 속삭인다. 아이의 통통한 발과 다리 위로 서너 마리의 벌들이 앉아 있다. 물기를 찾아 해안에 내려앉았던 벌들이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다가, 온기가 느껴지는 아이의 다리로 몰려든 것이다. 햇빛도 거의 없고 날개는 물에 젖었으니, 벌들에게는 환하고 따뜻한 아이의 다리가 태양이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벌들이 나한테 왔어.”

아이는 벌들을 위해 최대한 다리를 내어주면서 혹여 그들이 날아갈까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를 좋아하나봐.” 25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친구다. 일방적으로 대화한다는 것, 그러기도 쉽지 않는데 중년의 나이에 복사판처럼 똑같은 눈빛을 가졌다는 것, 둘 다 혐오감을 주면서도 눈치없이 여자를 밝힌다는 것 260

영원히 계속되는 것, 우리를 스쳐가는 것 268

“당신은 굉장히 특별해요. 알고 있나요?”

80년대에 태어났을 이 청년이 내게 호감을 가져주는 건 정말 영광이지만, 그의 호감을 애써 모른 체하며 마음씨 좋은 누나 노릇으로 일관하는 것이 쉽지 만은 않다. 이 맑은 영혼의 소유자는 너무나 크고 선한 눈을 지녀서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 그 아주 작은 파장 하나도 제대로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고마워요. 그런데 뭐가 특별하다는 거죠?”

“모두 다요. 당신의 모습, 당신이 하는 말, 아이와 놀 때의 에너지...모든 것이요. 나는 당신처럼 생기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유습은 참으로 좋은 청년이다. 이런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가능한 축소해석하되 그가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일 것이다 269

나는 중빈이 아기였던 시절, 그 시기를 ‘분석이 없는 시기’라고 불러요. 그런데 그 분석이 없는 시기가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면, 그 시기를 통화하는 동안 분명히 진화했거든요.

작고, 느리고, 지루한 것들을 반복해서 무비판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나는 조금 따뜻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전엔 남과 다른 것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남과 같은 것에도 진심으로부터 눈물이 나올 때가 있어요. 어머니라는 자리가 준 선물이죠. 그리고 따지고 보면, 열심히 분석했던 시기에도 대단한 분석을 해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한 사람의 생의 내용이 항상 같다면 그 사람의 삶은 죽은 것과 같은 걸거예요. 우리의 변화, 그 변화를 초래한 애초의 결심, 행동, 이런 것들이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오겠죠... 272

누구나 그러하다.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며, 그 말을 듣기 위해 털어놓은 것이다. 이 무용한 듯 보이는 고백의 행위는 우리가 그것을 꾸준히 계속한다면 언젠가 순도 높은 자기성찰의 지점에 우리를 내려놓아진다. 물론 그 지점에 도달하는 시기는 말로써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본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273 _ 그러고 보면,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이 ‘무용한’고백의 한 형태인 모양이다.

조건없이 행복해진다는 것은, 무한정 열려 있거나 한없이 낮게 엎드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물젖은 꿀벌을 위해 한 시간 내내 다리를 내어주고 움직이지 않는 네게 누군들 친구 되기를 마다하겠느냐 278

진정으로 운이 좋은 사람만이 생애에 단 몇 번 결경을 경험하며 산다. 지금 이순간 나는 그중 하나에 도달해 있다. 자연이, 온 우주가,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 가장 깊은 속살을 숨김없이 내주는 순간 280

아니, 그렇지 않아. 내 나이가 되면 영원히 계속되는 것과 스쳐지나가는 것을 구별하게 돼 280

나는 실로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고 ‘살아 있음’의 감각을 음미했다. 홀로 잠들어 있는 아이마저도 그 축복의 시간에 끼어들지 못했다 281

당신이 거기 있으면, 나는 행복해져요 284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관계의 많은 부분이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자신이 희생하는 것들과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무언가’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부턴가 나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얻을 수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오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하지도 않는 것이다 286

이제 너는 나를 떠나 안식을 구하지 못하리라 298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 사라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더 아름다운 이성들이 모두 무의미해진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 사람 외의 것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다. 실제로 더 멋진 사람이 옆에 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도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뒤늦게 알아버렸다. 내가 올림포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올림포스가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이것이었다 305

한평생 번 돈, 길에서 다 쓰고 죽을 거야 308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가 몽동이처럼 둔탁한 영어 실력과 괴나리 봇짐처럼 작은 배낭, 믿을 수 없이 형편없는 사진첩 하나만을 들고 세계 구석구석을 거침없이 누비는 것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러면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흔히 늙음에 대해 가지게 되는 초라하고 우울한 기분, 그리고 지금 당장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생활자의 고민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간단히 짓뭉개버리며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가능한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네가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312

Mommy, I made it! 322

‘여행을 한다’라는 것의 정의를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본다면, 그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는 것이 ‘다른 것에 대한 체험’이다. 그러니 여행지에서 익숙한 것을 고집하거나 자신과 다른 것을 무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익숙한 것이 좋으면 떠나지 않으면 될 일이다 324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 334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마치 ‘이 세상 모든 곳이 다 내가 거할 곳’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336

‘이해’란 경험을 통해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체화’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부모가 쑤셔넣기에 어쩔 수 없이 토해내는 것을 이해라 할 수 있을까? 340

부모가 어린아이의 교육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미래에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갖기 힘든 것을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이를테면, 고갈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사랑, 열등하고 약한 것을 보호하고 배려해주는 마음, 고마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 혹은 어떤 상황에서도 좋으면 ‘YES!' 싫으면 ’NO!'하고 말할 수 있는 투명함 같은 것들. 정말로 늦어지거나 실기하면 그 사람의 영혼과 인격 밖으로 걸어 나가 되돌아오지 않는 것들, 필생의 숙제가 되는 것들... 부모가 따로 시간과 돈과 품을 내어 아이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영혼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340

아들아, 세상에는 유희가 생략된 유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단다.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네게는 세 살부터 시작된 이런 여행이, 한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사치가 되는 사람들이 많이많이 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들을 부단히 많이 보아서,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되는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융숭 깊은 사람으로 자라주렴. 네가 살아 있는 한 온 세상이 너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담그고 느끼거라. 그 안에 네가 안아줄, 너를 안아줄 모든 것이 다 한데 어우러져 있단다 342

모든 여행에는 질문과 답이 있다. 사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공히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 질문과 답 사이의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이라는 틀을 꿈꾸고 떠난다. 먼 곳을 돌아 다시 제 안의 것을 들여다볼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 이것은 수많은 예술 장르에서 차용된 서사 구조이기도 하려니와 탄생과 성장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생이 최초에 의도된 구조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여행이라는 틀로써 일상의 틀을 부수고 나가는 것을 꿈꾸지만, 이 또한 커다란 생의 구조 속에서는 ‘작은 일상’일 뿐이다 345

‘나’라는 것 외에 ‘너’가 있는 ‘우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경계를 설정하는 일인 동시에 그 경계를 너머 꿈꾸는 일이다 345

모름지기 나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채우는 것보다는 비우는 것에 중점이 주어지지만, 잘 비우는 것도 얻는 것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감히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나는 조금 더 잘 보인다’고.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일이다. 나는 터키 여행을 통해 아이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보았다. 샴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던 시기를 마감하고, 둘 사이의 적정한 간격을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른 중반을 향해 가는 생에서의 현재 위치를 보았다. 그러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더 잘 보였다.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고 싶은 것만이 분명해졌다.

나는 더 떠돌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출산과 모성이라는 진한 삶의 경험은 그 이전에 내가 했던 여행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전에는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세상을 들여다 보았다면, 이제는 거울에 비춰진 ‘나’라는 반영을 부수고 판단없이 세상을 향해 뛰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대로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 가운데 아프고 힘든 이들을 안아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떠돎의 종착지가 어떤 것이 될지는 미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행은 늘 나를 능가하는 현명함으로 나를 데려다주었으므로.. 347

3. ‘내가 저자라면’

꿈, 자유, 가족, 여자로서의 삶, 관계...등등. 그간 내 몸안에 머물며 모였다 흩어졌다를 거듭하던 키워드들이다. 그 순간 내 안의 단어들이 이뤄내는 조합의 형태가 나의 존재의 양상을 결정했다고 말해도 그리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참 좋은 중간점검이 된 셈이다. 각각의 요소들은 열흘 남짓 온전히 함께 하면서, 혹은 완전히 분리되면서 나름의 방법으로 각각의 존재감을 부르짖었다.

이렇듯 의미심장한 여행을 어떤 형태로든 갈무리해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책꽂이에 없는 듯 꽂혀있던 이 책을 꺼내들었다. 이 책은 여행지에서 생긴 ‘작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사적인 감상을 묶어 만든 책이다. 지도와 이동루트가 깔끔히 표시되어 있고 여행지의 사진이 상당 분량 들어가 있긴 하지만 여행안내서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이다. 엄밀히 분류하자면 이 책은 여행기라기보다는 작가의 삶에 대한 ‘시선’ 자체를 주요상품으로 내 놓은 에세이에 가깝다. 굳이 더 세분화하자면 ‘육아 에세이’정도. 자기 스타일을 가진 삼십대 초반의 엄마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옵션들속에서 자신의 것을 골라가는 작가의 삶 자체를 포장해 놓은 책이라는 느낌이다.

이년만에 꺼내 든 이 책이 새삼 반가워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부담없이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축으로 일어난 이야기와 그에 대한 감상을 풀어내도 꽤 읽을만한 글이 되는구나. 작가 자신도 부담없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실렸다.

벌여놓은 소설도 있는데..이걸 어쩌나 하는 갈등 가운데도 왠지 여행기를 쓰다보면 체증처럼 가슴을 꽉 막고 있는 그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드니, 어쩌겠는가? 쓰는 수 밖에. ^^*

IP *.237.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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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1.06.05 08:52:32 *.108.80.74
 
세 돌 된 아이와 배낭여행... 남들이 한 번도 못 해 본 착상, 이어지는 실행, 그것을 책으로 남기는 일,
거기다 그것으로 유명해지고 '밥'까지 해결하게 되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하나의 길을 보여주다니  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요!

 이런 일을 하기에 박묙이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져요.
묙의 뛰어난 성찰과 표현력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나는 '안' 소설인 것에 한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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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6 05:52:33 *.237.209.28
선배님..emoticon
제가 만들고 싶은 저의 모습을 어쩌면 이리도 명료히 그려내시는지...
보약도 이런 보약이 있을까요?
선배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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