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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5일 18시 48분 등록

1. 저자 '이순신' 대하여

 

[1] 내가 보는 이순신

 

무인 이순신. 그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군사전문가였다. 거북선의 건조를 주도할 정도로 함선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총포 및 함포를 개량할 만한 무기운용의 귀재로 보인다(정철총통은 이순신이 조총을 본떠서 승자총통을 개량한 소형화기_서해문집 난중일기 97페이지).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세를 통합하여 분산된 적을 공격했고, 화력을 집중하는 병법을 전개하여 적을 궤멸시킨 명장이다. 스스로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를 명하였듯이 항상 승리하기에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신뢰할 수 없는 정보라 생각하면 그것이 왕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따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지만 그는 전쟁 승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고집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 많은 자신의 전투에서 결코 패하지 않은 것이다. 임진왜란은 승전도 패전도 아니지만 이순신의 전쟁은 승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경천애인의 이순신. 이순신의 주위에는 유능한 부하장수가 많고, 백성들이 함께 했다. 이순신의 인격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상하, 민관이 화합된 전투력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일기 곳곳에서 묻어나는 경천애인의 사상과 더불어 공무를 함에 있어서 공과를 명확이 하고 상벌을 내림에 기울어짐이 없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하들을 대함에 때로는 추상같은 형벌로, 떄로는 따뜻한 사랑으로 부하병사들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들에 대한 사랑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홀로 앉아서 아버님을 그리워하니 떠오르는 온갖 회포를 막을 길이 없다.'

'아들 열이 길을 가는데 어떻게 견디었을까 염려되고, 더위가 너무 심하여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듯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아들 면의 죽음 앞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장수로서 자식의 도리를 부모의 마음을 다하지 못한 애탐이 얼마나 컸을지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원균에게 만큼은 보통사람. 난중일기의 처음과 끝은 원균에 대한 비난과 힐난이 그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원균을 가소로이 여겼는지는 원인이 참으로 궁금하다. 그 두 사람을 평생 갈라지게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지만 원인을 헤아릴 수가 없다.

다만 난중일기의 처음을 보면 임진왜란 초기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원균의 요청에 응하지 아니하고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지체는 결국 원균의 경상도 수군이 궤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원균은 적의 머리를 헤아리는....." 이미 원균에 대한 감정이 있었음을 어느정도 내포하고 있는 구석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의 눈에 박힌 원균에 대한 미운 털은 처음에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의 원균에 대한 미움은 그를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다. 어찌 보면 역사에서 없어도 될 그런 우여곡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난중일기를 통해 알게 된 이순신의 삶은 고통의 삶이다. 적과 대치하는 날 선 고통이요. 적의 칼에 천륜을 끊어내야 하는 애절한 고통이다. 비참함의 길 위에 있는 주군에 대한 신하의 애통(哀痛)이요. 암수(暗數)에 상처받은 고한(苦恨)의 삶이다. 외로운 삶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 세상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하며 탄식했다.

그의 삶에서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런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하였을까?

우리네 삶에서 고통은 무엇이며, 우리는 고통 앞에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 것일까?

 

[2] 유용원의 군사세계 : http://bemil.chosun.com/

손자가 생각한 최고의 전략가는 어떤 사람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能因敵變化而取勝者(능인적변화이취승자) 謂之神(위지신), 즉 “적의 형세에 따라 싸우는 방식과 작전을 변화시켜 승리를 거두는 장수야말로 군신이라고 할 수 있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번 승리한 방식과 작전은 거듭 사용하지 않고, 각각의 전투 상황과 형세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화시켜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야말로 군신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손자가 말한 군신의 칭호를 부여할 만한 전략가가 있다. 다름 아닌 이순신이다.

 

무적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치고 러일 전쟁(19041905)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는, 자신은 단지 이순신의 진법과 전술을 응용한 정자전법(丁字戰法)으로 승리한 것뿐이라면서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독이 있다면 바로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라고 칭송했다. 이순신의 병법과 전략이 신의 경지라는 관념은 임진왜란 당시부터 조선군과 일본군은 물론 명나라 군대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유성룡은 《징비록》의 이순신의 인품과 전공을 소개하는 곳에서, ‘遂不敢犯退走(수불감범퇴주) 諸將以爲神(제장이위신)’ 즉 “마침내 적군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나 달아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이순신을 신으로 여겼다”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3] 주간조선 2074(09. 9. 25) / 중국, 일본에서 더 존경 받는 이순신 장군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이 충무공은 불행하게도 내국인보다 외국인에게 더 높이 평가받았다. 충무공이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에 대해 타살을 가장한 자살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충무공에 대해 높이 평가한 외국인으로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들 수 있다. 진린은 처음에는 충무공을 작은 나라의 장수라며 얕보고 함부로 대했으나 충무공으로부터 목숨을 구원 받은 이후로는 태도가 180도 바뀌어 충무공을 존경하며 따랐다.

 

진린은 사람들에게이야(李爺)는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고 말했다. ()는 윗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으로 우리말로는어르신정도의 어감이다. 진린은 나라에 낸 보고서에서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다고 극찬했다.

경천위지는천하를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보천욕일은 설명이 좀 필요하다. 우선 보천욕일은어마어마한 공적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중국 신화에서 비롯됐다.

 

근세 이래 우리를 가장 괴롭힌 숙적(宿敵)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순신을 잊지 않고 존경했다. 일본에서군신(軍神)’으로 존경받던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러일전쟁 전승축하연에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 좌중을 경악케 했다. 문답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넬슨과 당신을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발틱함대의 3분의 1 규모로 싸워 이겼다.”(도고 자신이 더 낫다는 뜻)

 

조선의 이순신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내 함대를 갖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1905년이면 일본이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다스리던 시절이다. 식민지의 위인을 세계적인 위인보다 더 윗 반열에 올려놓은 도고의 발언은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세계적인 위인인지 짐작케 하고, 이런 훌륭한 조상을 비방하고 잊어버렸던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4] 이순신 장군의 생애

 - 네이버 백과사전 / 이순신 : http://100.naver.com/100.nhn?docid=126808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이순신 : http://people.aks.ac.kr

 - 네이버캐스트 / 이순신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10

 

충무공의 휘()는 순신(舜臣)이고 자는 여해(汝諧)며 성은 이씨이고 본은 덕수(德水)인데 충무는 1643(인조 21) 공이 순국 후 내린 공의 시호(諡號)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용력(勇力)과 문인의 재지를 겸비하여 문학을 공부하다가 뜻한 바 있어 22세에 들어서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하여 32세 때 비로소 무과에 등재하였다. 그래서 그 해 겨울에 일종의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되어 함경도에 부임하니 공으로서는 첫 벼슬에 오른 셈이다.

 

공은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지혜와 용맹이 특출하였으므로 다른 무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서예에까지도 실력을 겸비하였다. 소년시절부터 같은 동리(洞里)에서 자라온 유서애(柳西厓)는 그의 초인적인 능력을 일찍이 알아 왔는데 그때에 전랑(銓郞)(정부의 인사관)이었던 이율곡이 서애를 통하여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우리는 종친(宗親)이라 당연히 만나야 하지만 전랑으로 있을 때만은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니 이는 그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국경경비에 3년간 임하다가 훈련원을 거쳐 36세가 되던 해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되어 포구를 수비하였다. 그러나 공을 시기하는 무리들 때문에 모함을 받아 38세가 되던 해 만호에서 파직당하고, 이 과정에서 감사인 손식(孫軾)이 공을 불러다가 진상을 알아보던 중 병서를 강()하고 진도(陣圖)를 그리게 하여 공이 작도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공은 39세가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다시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하면서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 잡아 양민을 보호하였다.

 

42세 정월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었고, 43세에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 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 넓적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45세 겨울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해서 산적한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고 선정을 베풀어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럴 즈음 시국은 차차 어지러워 군란이 닥쳐올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공은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 좌수사가 되어 여수로 초임하니 47 2월 임진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였다. 공은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했다. 조정에서의 분당에 의한 의견 대립을 무시하고 자신의 권한과 범위 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였다.

좌수영 관할 아래 모든 장정의 군사훈련과 장비를 점검하고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무기였던 거북선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야말로 세계 철갑선의 원조요 임진란에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48세 되던 해 1592 4 13일 드디어 왜적이 부산에 상륙했다.

 

다음날 부산진이 무너지고 15일에는 동래성이, 5 3일에는 서울이 함락되었다. 공은 전라도 관할이지만 4 16일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제장(諸將)을 본영으로 소집하여 작전계획을 세우는데 모두들 "본도의 수군은 본도 만 지키지 경상도까지 가서 적을 치는 것은 우리 임무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유독 군관 송희립(宋希立)이 반대하고, 만호 정운(鄭運)은 동조하니 공이 대열(對悅, 크게 기뻐함)하여 "국가가 위급한데 어찌 타도(他道)라고 좌시(坐視, 앉아서만 봄.)할까, 이에 후퇴하는 자는 참징(斬懲, 칼로 벰) 하리라."고 엄하게 명하고 5 1일 제장(諸將, 모든 장수)을 모아 전함 24척을 당포 앞바다로 집결시켰다.

 

이 때 도피하려던 여도수군 황옥천을 참해서 효시(梟示)하고 옥포에서 약탈하는 왜적들을 무찔러 쳐부수니 이것이 5 7일 제 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이다. 그 다음 5 29일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하고 6 2일 다시 당포에서 승첩, 경상도 해상의 왜적들을 모조리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제 2차 당포해전 대승첩이다. 그 다음 7 8일 한산도 앞 바다에서 이른바 <학날개 전법>으로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 소탕하였으니 이것이 제3차 한산도 대승첩이다. 그런데 부산의 왜적은 더욱 강해져 기지화되었으므로 공은 부산 앞 바다에서 적을 공격하여 가장 큰 전과를 올렸으니 이것이 9 1일 제4차 부산 대승첩이다.

 

497 15일 여수 좌수영의 본영을 그대로 두고 전투본부를 한산도로 옮겨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삼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주장(主將)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공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시키니 이때가 8 15일이었다. 원균은 자기가 선배인데도 그 하위가 되었음을 부끄럽게 알고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공은 조금도 그에 개의하지 않고 군무에만 정진하여 수만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각종의 무기를 준비하였다. 50세 때에는 전염병으로 십 여일이나 고통을 당하면서도 군무에는 조금도 해태(懈怠, 게으름)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하고 또 글을 지어 제사해 주었다. 원균은 충청도에 가서 공을 비방하는 말만 퍼뜨렸으나 공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조금도 원균을 비방하지도 않으니 모두들 원균이 옳은 줄로 알았던 것이다.

 

52세 겨울 일본에서 다시 오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요격하라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밀청(密請)에 공은 불청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등(加藤)이 다음해 1 21일에 도래하니 조정에서는 2 26일 그 호기를 놓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원균이 통제사가 되었다. 이것은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역사의 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 이것을 본 많은 인사들이 상소문을 올려 출옥을 청하였다.

 

다행히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탈옥된 지 26일 만인 4 1일 석방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고 성복한 날에 백의종군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왜군이 다시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재란(1597)이라 한다. 삼도의 수군이 모두 적멸하고 원균도 패사(敗死, 패하여 전사)하였다.

 

그래서 공이 다시 통제사로 복직하여 여병(余兵, 남은 병사) 백 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盟誓)하였다. 그해 9 16일 울독목으로 가서 세계 해전상 유래 없는 12척의 전함만으로 330척의 적함을 격파한 이른바 명량해전 대승첩을 거두었다.

 

명량해전이 끝나자 공은 진을 목포 고하도(高下島)로 옮겼고 다시 고금도(古今島)로 옮기니 그때 수군의 병력이 팔천명에 이르렀다. 여기서 명나라 진도독(陳都督)이 오천의 군사와 함께 우리 수군과 합세하였다. 진도독도 충무공의 인격과 실력 앞에는 굴하여 "당신은 작은 나라 사람이 아니오"라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1598 8 17일 임진란의 원흉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撤軍)이 시작되었다.

공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지막 달아나는 왜함 500여 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다. 공은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셨다.(1598 11 19) 임종 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했으니 향년 54세였다.

 

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 척의 전함 중 겨우 50척만이 남해로 달아났다. 이로써 왜적은 완전히 의기소침하여 전의를 잃고 침략의 야욕을 굽히니 피비린내 나는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되었던 것이다. 공의 순국 후 선조는 공의 은공을 기려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하였고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5] 이순신과 원균은 라이벌인가 / 세계일보 2005. 04. 28

 

충무공 이순신의 대척점에는 원균이 있다. 충무공에 대한 숭모의 열기 한편에는 원균 명장론이라는 또 다른 기운이 공존한다. TV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원균을 용맹한 군인으로 그린다.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정말 역사의 라이벌인가.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지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부터 정유재란까지 기록인난중일기에는 원균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난중일기는 전체적으로 감정이 극히 절제된 기록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유독 원균에 대해선흉악하다’ ‘고약스럽다’ ‘음흉하다’ ‘가소롭다’ ‘믿을 수 없다’ ‘흉측하다’ ‘간흉하다’ ‘망령되다고 표현했다. 부정적인 표현 일색이다.

 

임란 초기 조정에 전공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원균 탓에 궁지에 몰렸던 감정이 남아 있는 듯하다. 원균도 마찬가지다. 직접 남긴 저작은 없지만 실록 등에 나타난 전언에 따르면 이순신에 대해 악감정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400년 전 두 사람의 반목이 최근의 원균 명장론을 잉태한 자궁이 아닐까?

 

KBS 드라마와 그 원작이 된 동명 소설은 이순신과 원균, 유성룡이 한 동네에서 자란 것으로 그리고 있다. 세 사람의 어린 시절은 이후 이야기 전개상 이순신의 원균콤플렉스, 유성룡의 반원균 감정을 뒷받침하는 설정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들의 유년 시절은 원균 명장론의 심리적, 정신적, 정서적 대전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신과 원균이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 1)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사한다. 원균은 경기도 평택 도일동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자랐다.

 

KBS는 두 사람이 한 동네에서 자랐다는 근거로 허균의 문집인성소부부고를 제시했다. 여기에서 허균이건천동에서 명인이 많이 배출됐다고 소개하면서 여러 사람과 함께 두 사람의 이름을 열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균 연구가인 강릉대 장정룡 교수(국문과)그것은성소부부고가 아닌성옹지소록에 있는 기록으로, 두 사람이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는 내용은 아니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관리들이 관아를 중심으로 살았는데 무관인 두 사람도 시기는 같지 않지만 훈련원 부근에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게 장 교수 설명이다. 원주원씨 종친회 원정식 부회장도한 동네에서 자랐다는 것은 소설 때문일 것이라며 “(원균이) 한양에서는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간 뒤에나 이순신을 만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멸의 이순신저자인 김탁환 한남대 교수(문예창작과)이순신과 원균이 한 동네에 살았다는 것은 소설적인 장치라며유비 관우 장비도 실제로는 도원결의를 한 적이 없지만, 소설(삼국지)에서는 도원결의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본인이 직접 쓴난중일기를 비롯해 상대적으로 관련 자료가 풍부한 이순신에 비해 원균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기록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기록을 남긴 자(이순신)와 그러지 않은 자(원균)의 승패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순신과 원균의 삶은 출생부터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이순신은 1545년 불우한 문관 가문에서 4형제 중 셋째로, 다섯 살 위인 원균은 1540년 무관 가문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순신의 형제 이름은 조부의 명에 따라 돌림자 신()에 중국 삼황오제의 이름에서 시대 순으로 희(), (), (), ()를 따왔다고 하니 유가적 가풍을 짐작할 수 있다. 선비 가문이었던 이순신 집안은 조부가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무신을 상대적으로 천시하는 당시 사회상에서 벼슬길이 막힌 이순신이 문과가 아닌 무과를 택한 것도 이 같은 집안 사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원균은 어떨까? 원균의 직계손인 원행의씨는 “(원균의) 집안은 대대로 무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원균의) 아버지도 무과에 급제한 뒤 병마절도사(2) 등을 지냈다고 말했다.

 

무과에 급제한 뒤의 행적도 차이가 난다. 이순신은 1576년 무과에 합격한 뒤 순탄치 않은 벼슬길을 걸었다. 권관(9)으로 시작해 훈련원 봉사(8) 만호(4)에 올랐으나 파면됐다가 다시 하위직인 봉사로 복직하는 등 우여곡절을 여러 번 겪는다. 강직한 성품 탓에 상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두 번의 백의종군도 이 같은 성품을 반영한다.

이에 비해 원균은 무과 급제 후 선전관 만호(4) 부사(3)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에 경상우수사(3)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는다. 처세에 능했다는 평가도 이 때문일까?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최대 논거가 바로 원균도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에 올랐다는 것이다. 재야 사학자인 이재범(1987년 사망) 1983년 쓴원균정론이 대표적이다. 그는 선조의녹훈봉작교서를 인용하며(원균)가 전사한 뒤 6∼7년이 지난 뒤 분명히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이 같은 사록(史錄)을 볼 때 원균이 이순신에 못지않는 명장이라서 해서 크게 지나치지 않다고 밝혔다. 선조실록이 수정되면서 원균에 대한 선조의 긍정적인 평가가 대폭 축소된 것에 대해서도 음모론을 제기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공(戰功)을 연구한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노영구 선임연구원은 다른 입장이었다. “당시 신하들이 공신록을 만들 때 원균은 원래 2등이었다선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하게 밀어붙여 전공도 없는 원균을 1등에 올렸다고 말했다.

 

노 연구원은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키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기용한 선조가 자신의 판단착오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선조는 또 기본적으로 조선 장수의 활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했다고 한다. 임란 당시 선조가 이룬 치적이라고 해야 명군의 파병을 이끌어낸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노 연구원은선조수정실록도 선조실록의 내용을 왜곡했다기보다는 당초 실록이 지나치게 선조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으려고 한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손자병법에서 장수는 지혜(), 신의() , 인애(), 용기(), 엄격함()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기준에서 두 사람은 어떤 장수였을까?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주로상사에 대한 강직성부하에 대한 신상필벌효율 극대화의 행정력유비무환의 준비성이 거론된다. 반면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원균에 대해서는 이순신을 모함한 악장(惡將), 전쟁터에서 도망간 겁장(怯將)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최근에는 이순신과 비교할 때 지장(智將)이나 덕장(德將)은 아니라도 용장(勇將)의 리더십을 갖췄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해 원균이 무모하게 전투를 벌여 많은 부하가 죽는 등 인명을 경시했다는 반론도 거세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 송찬섭 엮어옮김 / 서해문집 출판

[글을 시작하기 전에]

가잔 뛰어난 고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전에 잘 몰랐던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이었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이순신은 꿈에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가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아들을 보내놓고 걱정스럽다 못해 병이 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무인 속에 있어서 이름과 칭찬이 드러나지 않다가, 신묘년에 서애 유성룡이 정승이 되어 그를 쓸 만한 인재라고 하여 정읍 현감에게 차례를 뛰어넘어 전라 좌수사를 제수하니, 드디어 중흥의 제일 명장이 되었다. 아아, 지금 세상엔들 어찌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이 없겠는가. 다만 인재를 알아 추천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 이수광 <지봉유설>

정치는 현실과 뗄 수 없으니, TV와 신문 등을 통해서 나라일과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답답하다. 학벌로 보면 대한민국 1%를 한곳에 모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는 행태를 보면 하급수의 1%라 해도 그 말이 욕되지 않을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 일을 함에 있어서 인재를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가 보다.

 

이순신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진중에서 그는 늘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어머니로부터의 소식이 늦거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순신은 종종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 이순신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일기를 보면 그가 원균을 나쁘게 본 데는 대개 그럴 만한 근거가 따르기는 한다. 일기에 따르면 여러 지휘관들이 원균의 잘못이나 흉을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을 '가소롭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이순신이 몹시 못마땅할 때 쓰는 욕으로 대부분 원균에게 쓰였다.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이순신은 1591 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하였다. 그는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하였으며 이듬해 거북선을 완성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592 4월 마침내 우려했던 왜군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는 5월에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6월 당포, 당항포에서, 7월에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에 부산에서 연이은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이순신도 그 공으로 정2품까지 승직되었다.

 

16. 병선을 고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우후, 가수들이 또한 감독을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병선은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또한 짐작하겠다. (25)

 

10일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역하는 자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군사를 청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는 우리가 왜국과 함께 딴 뜻이 있는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 놈들의 흉악스러움은 뭐라 말할 수가 없다. 통역관들은 이미 잡아 가두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30)

나라의 꼴이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15일 새로 쌓은 해자가 너무 많이 무너졌으므로 석수장이들에게 벌을 주고 나서 다시 쌓게 하였다. (31)

이순신을 공무에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벌을 하는 내용을 빈번하게 나온다. 잘한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제대로 평가하고 상을 주는 것과 벌을 주는 것에 마음을 많이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5일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발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 (35)

책을 통한 배움.

 

4 15일 해질 무렵 경상 우수사가 통첩을 보냈는데,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하였다.

드디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경상 우수사가 원균이다.

 

16일 영남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17일 영남 우병사가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에...

18일 오후 2시께 경상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30일 이순신은 전라도 수군의 진을 조직한 뒤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구원을 나가겠다는 장계를 올렸다.

영남 우수사 원균의 공문 내용이 궁금하다. 빨리 와달라는 구원병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었을까? 이순신은 행정적인 절차로 장계를 올리고 임금의 영을 기다렸겠지만 백성과 부하들의 죽음 앞에 원균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이순신에게 감정을 가질 만하다는 생각.

 

1일 모두 기꺼이 싸움터로 나갈 뜻을 가졌는데 낙안 군수 신호만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했다. 한탄스러웠다. 군법이 있는데 설사 물러나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 (45)

 

29일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 명인지 알 수가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은 아니었다.(47)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전쟁의 무서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전장의 맨 앞에선 장수는 우리가 감히 짚어볼 수 없는 용기, 책임감, 나라에 대한 사랑 등 심오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5 5일 이순신은 새벽에 출발하여...당포 앞바다에 이르렀으나 경상 우수사 원균이 약속한 곳에 오지 않았으므로....이튿날 아침 8시에 원균이 자기 경내인 한산도에서 단 한 척의 전선만을 타고 왔다. (48)

이때 원균은 이순신에게 어떤 감정이었을까. 이미 영남 우수사의 군사는 얼마 남지 않고 거의 전멸된 상태라고 보면 뒤늦게 나타난 이순신에 대한 원망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48)

 

좌부장인 낙안 군수 신호가 왜의 큰 배 한 척을 깨뜨리고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배 안에 있는 칼, 갑옷, 의관 등이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하였다.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의 큰 배 한 척을 쳐부수고 우리 나라 포로 한 명을 구출했다. 전부장인 흥양 현감 배흥립은 왜의 큰 배 두척, 중부장인 광양 현감 어영담은 왜의 중간 배 두척과 작은 배.....쳐부수었다. (50)

이렇듯 이순신은 부하들의 공에 대해서 일일이 이를 기록해 두었다. 잘난 일은 모두가 자기 것이고 잘못된 일은 모두 남을 탓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 일에 그의 기록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본받을 일이다.

 

뜻밖에 본도의 도사 최철견의 첨정이 도착하여 비로소 임금께서 평안도로 옮겨 가셨다는 기별을 들었다. 놀라움과 분함이 극도에 달하여 하루 내내 서로 붙들고 오장이 찢어지듯 통곡하였다. (53)

 

원균은 싸움에 패한 뒤로는 군사 없는 장수로서 지휘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싸우는 곳마다 화살이나 탄환에 맞은 왜인들을 찾아내어 머리 베는 것을 맡아 하였다. (54)

역사적 평가에 따라 명장 이순신, 졸장 원균이지만 이때 원균의 심정은 어찌 했겠는가. 이순신은 아군이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철천지 원수와 같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유성룡의 천거로 몇 계단을 초고속 승진하여 자신과 동일한 직급에 까지 오른 이가 눈에 가시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이후 죽을 때까지 그들의 마음을 가른 것은 이런 상황들이 기초한 것은 아닐까.

이순신의 일기 초반부터 원균에 대한 질투심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양 현감 어영담도 먼저 진격하여 왜의 큰 층각선 한 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격파했다. 그는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화살 맞은 상처가 깊어 말도 못할 정도여서 죄를 묻지 않고 곧바로 베었다. (64)

적이지만 사람을 대하는 그의 마음을 조금 더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곳 백성 가운데 산골에 숨어 있는 자가 꽤 많았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륙을 당할 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67)

 

싸우고 난 다음 날이다. 또 한 번 쳐들어가서 적들의 소굴을 불지르고, 배들을 전부 깨부술까 하였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 차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부득이 수륙에서 함께 쳐야 섬멸할 수 있을 터였다. (75)

 

전날의 싸움에서는 적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왜적의 소굴에 4백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속으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내내 공격하여 적선 1백여척을 깨뜨려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덜게 하였다.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 보다 훨씬 더하였다.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였다. (75)

 

녹도 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적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세 번 싸움에 매번 앞장섰다. 부산 싸움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이 쏜 총알에 이마를 뚫려 전사하였다. 지극히 슬프고 가슴 아팠다. (76)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이런 분들의 죽음 위에 서 있는 것이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이순신은 1593년에 들어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시키고,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7월에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전쟁 물자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공에 힘입어 이순신은 8월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한산도는 그 뒤 1597년 파직 될 때까지 그의 활동의 중심지였다.

 

큰 적을 무찌르려 작전을 약속하는 이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 할 말이 없다.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 (84)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몬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 원 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87)

이순신과 원균의 서로에 대한 다툼이 끝이 없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94)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한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 (97)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98)

 

적의 무리는 사방에 흩어져 불태우고 분탕질하고 있으니 분하고 분하였다. 하루 내내 큰 바람이 불어 마음도 어지러웠다.(99)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01)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 5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 (105)

 

새벽 2시쯤에 경상 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진군하여 싸움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 음흉한 꾀와 시기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108)

 

아침에 희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우리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108)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아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올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 구나. (117)

그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장수의 외로움, 자장으로서의 외로움, 난장판 같은 정치판에서 충신으로서의 외로움 등등.

 

경상 수사와 우수사, 정 수사가 함께 도착했다. 같이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이 매우 흉악스럽고 속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사리 분별이 없으니 일을 같이 한다고 해도 뒷걱정이 없을까? (121)

 

새벽에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을 얻을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123)

 

또 원수사라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124)

 

[1594년 명, 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3월에 당항포 등 싸움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에는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공격하여 거제 장문포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럼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유정(1544-1610) 성은 임씨이고 호는 사명당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서산대사 휴정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4년에 국서들 받들고 일본에 가서 덕천가강을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38)

우리 백성의 포로가 이 정도였다는 것은 이순신이 해전에서 이겼다는 내용에 반하여 전체적인 전쟁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열세였고,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잃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승전과 패전을 넘어서.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해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140)

이순신의 뒤에 훌륭한 어머니가 있음을.

연구원을 하면서 읽은 책 모두. 주인공들의 삶에는 훌륭한 부모님이 계신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떼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 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151)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 진회(1090~1155) : 중국 남송 고종 때 사람으로 금이 쳐들어 왔을 때 항복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간신으로 꼽힌다. 무송(1103~1141) : 남송의 장군 악비의 호. 악비는 금이 침략했을 때 항목을 거부하다가 진회에게 죽음을 당했다. (152)

 

폐문을 받아다가 살펴보았더니, 명나라 도사부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심기가 매우 괴로워져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였다. (157)

 

몸이 매우 괴로워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문을 아래 사람을 시켜 만들도록 하였더니 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 수사에게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도록 하였으나 역시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별을 무릎 쓰고 일어나 내가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쓰게 하여 보냈다.  (158)

사람이 없을 때의 팍팍함이 느껴진다.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 전라감사가 일부러 나라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매우 유감스럽다. (169)

 

무덥기가 쇠라도 녹일 것 같았다. 아침에 울이 본영으로 갔다. 헤어질 때 마음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174) / 면의 병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어찌 이보다 더 기쁠 수 있겠는가.(182)

보통 아버지의 마음. 그도 호랑이 같은 장수였지만 아들에게는 길을 걱정하는 아버지이다.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어머니와 자식들의 생각과 걱정에 비하여 아내에 대한 사랑 혹은 걱정하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느낌이다. <난중일기> 전체 중에서도 거의 2~3곳에 짧게 언급하는 것 말고는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원수사의 일은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천년을 두고 한탄할 노릇이다. (194)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195)

이순신을 잘 표현하고 있는 글귀이다.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전쟁은 뜸했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였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령을 준비하고 배와 무기를 만들고 개비하였다. 활쏘기를 하면서 단련하기도 하였다. 아직 웅천 등지에 웅크리고 있는 적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였다. 그런 중에도 견내량 등지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213)

 

장흥부사가 찾아왔는데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이 하는 짓이 아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쓴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216)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하루 내내 주룩주룩 내렸다.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과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233)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의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39)

 

태구련이 만든 장검 : 길이 약 2m 되는 환도로, 한 칼에는 '삼척서천 산하근색' 다른 칼에는 '일휘소탕 혈염산하'이라 새겨져 있다.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243)

 

하루 내내 여러 장수와 같이 술에 취하였다. 밤에 희미한 달이 수루를 비추어서 누워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를 읖조리며 기나긴 밤을 지냈다. (246)

그가 좋은 시대에 태어났으면 좋은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늘의 이치를 알고 사람의 이치를 알고 자연과 풍류를 아는 좋은 그런 글쟁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한산도 제승당 수루에서 내려다본 견내량과 수루에 걸려 있는 현판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이순신의 시가 쓰여 있다. (251. 사진에 부쳐서)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는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251)

 

아버님의 제삿날이이어서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홀로 앉아서 아버님을 그리워하니 떠오르는 온갖 회포를 막을 길이 없다. (258)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3월에 이순신은 당항포 싸움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 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 거제현 장문포의 왜군을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았다. 이는 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왕이 내린 분부는 아직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두울 무렵에 서풍이 세게 불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였다. 봄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피곤하였다. (278)

 

보성 군수가 들어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가지 않았다. 기운을 차릴 수 없고 땀이 흐르니 이것이 병의 근원이다. (282)

 

아침에 남여문을 통하여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다만 믿기 어려웠다. 이 소문이 일찍부터 퍼졌는데 아직 정확한 기별은 오지 않았다. (294)

일의 최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장수로서 항상 정보의 객관성을 찾으려 하고 그것을 확신하였을 때 움직이는 이순신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부분이다.

 

가뭄이 너무 심하다. 말할 수 없이 걱정스럽다. (296)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296)

 

아침에 흐리더니 늦게 비가 세차게 내렸다. 농민의 소망을 채워 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296)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마당놀음 한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308)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적들이 일어나 홍산 현감이 잡히고, 서천 군수도 잡혀갔다고 한다. 바깥 도둑을 없애지 못한 이때, 안에서도 도적이 일어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09)

 

원균이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 (321)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은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초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7월에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모은 전선 13천으로 9월 명량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는 10월 고하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들고 와서 멀리 떠나는 길을 위로하였다. 인정상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335)

그는 백성에게 사랑 받는 리더였다. 요즘 저축은행사태, 복지정책 등등 나라 일을 뉴스로 보고 들으면서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이번 주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아서 더욱 그런 것 같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직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면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간 적으리라. (337)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다름이다. (338)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 만 같지 못하구나! (338)

어머니를 떠나 보내고 그의 심경이 격해진 시점이다. 신세에 대한 한탄의 뒤로 삶이 고통이 큰 강으로 깊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장군으로서의 모든 것을 버린 불명예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영전 앞에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이런 심적 고통 속에서도 그를 다시 길 떠나게 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이런 고통에서도 견디게 했을까?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도 결국은 당쟁과 모략으로 죽음 같은 고통과 함께 파()하였고, 섬김의 대상인 주군 또한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하여 벌하고 내치는 이런 상황 상황에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난중일기>에 대한 답답함은 이런데 있다. 좀더 깊이 있는 심정에 대한 기술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은 여전한 갈증으로 남는다.

만약 그가 이런 고통 속에서 스스로 기력을 포기하고, 삶을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면, 견디어 내고 스스로의 영광스런 죽음의 순간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의 이름은 지금과 다른 모습일 것이다. 스스로를 진정한 무인이라 생각했고, 무인의 진정성, 무인의 완성 즉 자기완성의 지점을 그려본 것일까?

<자기완성>은 백이숙제처럼 죽음을 선택하여 빛날 수도 있고, 사마천처럼 궁형의 굴욕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순신처럼 모든 것을 포기할 법한 상황에서도 뭔가의 한 끝을 부여 잡고 견디어 내는 것에서 다시 시작되기도 하는 듯 하다. 나는 <자기완성>을 위해서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엇을 선택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가. 주어진 고통에 어찌 대처하고 있는가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 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42)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어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 (343)

 

저녁에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와서 흉악한 자가 저지른 짓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하였다. (343)

이 시점에서 이순신은 원균을 흉악한 자라고 칭한다. 그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 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이것은 원수가 명령하였기 때문이었다. (344)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 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344)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써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348)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어지러우나 그렇지 않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돈과 뇌물의 힘은 여전한 듯하다. 사람에게 욕심이라는 본성이 있는 한은 영원한 우리의 족쇄 같은 것.

 

시국이 이미 그긋된 것을 무척 분하게 여기면 다만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349)

 

비가 쏟아졌다. 아침에 떠나려고 하다가 비 때문에 그만 두었다. 혼자 쓸쓸히 시골집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에 대한 슬프고 그리운 정을 어찌할 것인가 (349)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쓸쓸함, 외로움, 지침. 애써 산 삶이 참으로 궁색하다 아니 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의 마음 속이 참으로 궁금하다. 구국의 심정? 자기완성? 신체발부 수지부모하니 어쩌지 못해 사는 것? 궁금할 따름이다.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주었으나 나는 종들에게 먹지 말라고 타일렀다.  /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여 이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 (351)

백성을 대하는,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수군 20여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직을 들었다. 매우 분하였다. 막을 방책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367)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 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369)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369)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371)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개인적인 기록임을 감안하면 원균에 대한 감정이 어떠했음을 짐작해본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치게 한 장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타인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

 

병사가 거느렸던 군사가 모두 패하여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말 세필과 활, 화살 약간을 빼앗아 왔다. (375)

군대의 형편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살림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377)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에나 맞겠으며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 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못 만난 것만을 한탄할 따름이다. (382)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 (383)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우리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386)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이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390)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394)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안는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394)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하였다. (395)

 

어두울 무렵에 코피가 터져 한 되 넘게 흘렸다.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이제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었다. (396)

 

나는 웅크리고 배 밑창에 앉아 있었더니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한 해를 지내는 것 같았다. 이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399)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2월에 이순신은 다시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달았다. 7월에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이 내려와서 함께 연합 함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11월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 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턴에 맞아 전사하였다.

어쩌면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그는 스스로의 죽을 자리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스스로를 완성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순신의 죽음에서 아이러니하게 일본 작가 미시아 유키오의 단편 <우국_憂國>을 떠올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치열한 애착이 아슬한 경계 면에서 대치되었을 순간을 생각해본다. 살아남아서 생의 전체를 지탱해온 가치가 흔들리느니 차라리 삶의 가치와 명분을 위해서 할복을 선택한 군인 다케야마의 선택이 이순신의 죽음과 오버랩 되는 것은 <자기완성>이라는 이유 때문인 듯 하다.

 

 

3. 내가 역자라면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순신, 선조임금, 원균, 유성룡, 그리고 임진왜란에 대해서 몇 가지의 자료를 찾아보았다. 학교 교육을 통해 배운 것들이지만 그것은 각각의 편린으로써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지 못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의 자료를 추가하여 찾아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단편적이고 자료를 기록한 사람들의 주관에 따라 역사의 정오(正誤)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호한 것이 남아 있다. 역사의 기록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하는 여지를 남겨두기도 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역사기록이 부족하다 하여도 몇 가지 정설로 여겨지는 것, 혹은 대비되는 주장들을 좀더 객관화 시킨 자료가 이 책에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만일 내가 역자라면 나는 현재 책의 구성에 [쉬어가는 페이지]를 넣고 싶다. 이런 구성을 생각하면서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고운기님의 <정말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를 떠올렸다. 난중일기 또한 <정말 우리가 알아야 할 이순신과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역사적인 해석과 배경을 넣는 다면 난중일기의 원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순신을 배우고 해석하기에 더욱 풍성한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이순신은 1591 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하였다. 그는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하였으며 이듬해 거북선을 완성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592 4월 마침내 우려했던 왜군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는 5월에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6월 당포, 당항포에서, 7월에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에 부산에서 연이은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이순신도 그 공으로 정2품까지 승직되었다.

[쉬어가는 페이지]

1. 임진왜란의 배경과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

2.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은 누구인가?

 

[1593년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이순신은 1593년에 들어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시키고,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7월에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전쟁 물자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공에 힘입어 이순신은 8월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한산도는 그 뒤 1597년 파직 될 때까지 그의 활동의 중심지였다.

 

[쉬어가는 페이지]

1. 이순신과 유성룡

2. 이순신과 원균 - 그들을 가른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해석들

 

[1594년 명, 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3월에 당항포 등 싸움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에는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공격하여 거제 장문포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럼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쉬어가는 페이지]

1. 백성의 힘, 의병의 힘 - 곽재우, 휴정과 유정 등의 활약

2. 조선--일 삼국의 관계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전쟁은 뜸했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였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령을 준비하고 배와 무기를 만들고 개비하였다. 활쏘기를 하면서 단련하기도 하였다. 아직 웅천 등지에 웅크리고 있는 적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였다. 그런 중에도 견내량 등지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쉬어가는 페이지] 인간 이순신의 삶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3월에 이순신은 당항포 싸움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 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 거제현 장문포의 왜군을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았다. 이는 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쉬어가는 페이지] 전쟁학의 관점에서 본 임진왜란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은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초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7월에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모은 전선 13천으로 9월 명량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는 10월 고하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

 

[쉬어가는 페이지] 선조에 대한 역사의 해석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2월에 이순신은 다시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달았다. 7월에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이 내려와서 함께 연합 함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11월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쉬어가는 페이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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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05 21:12:23 *.35.19.58
오라버니, 북리뷰가 너무 알차고 좋네요.
저도 이런저런 자료는 찾아 보았는데 이렇게 정리는 못했네요.
이순신 장군님 참 매력적인 분이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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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6.07 08:14:45 *.219.84.74
귀가 닳도록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임진왜란'이라는 역사를 들었음에도.
이렇게 무지할 수가.
삼국유사에서도 느꼈던 부끄러움이 이번 주도 여지 없이...그래서 조금 힘들었던 한주.
도대체 얼마나 읽고, 정리하고....
언제 외우고, 연습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까 생각하면 더욱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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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6 05:44:35 *.109.24.41
네 형님! 특히 원균과의 관계를 다룬 내용이 제겐 참 흥미로왔어요.
대전을 오가며, 가족을 돌보느라 애쓰시면서도
좋은 리뷰 쓰셨네요. 고생하셨어요 형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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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6.07 08:18:06 *.219.84.74
너 보다는 내가 한가할텐데도, 북 리뷰를 보면 질투가 난다.
나는 겨우, 사부님이 지시한 포맷의 구색을 갖추려고 애쓴다마는,
너의 북리뷰에는 사부님이 요구하시는 것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탁월함이 있지.

너에 대한 질투가 나를 힘이 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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