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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5일 22시 43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올림,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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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저자에 대하여

◆ 이순신 (李舜臣, 1545~159)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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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및 임진왜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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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저자를 위대함으로 이끌었는가?

 

깨우침, 나를 부르는 '칼의 노래'

아주 오래 전부터 내 꿈에는 늘 칼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왔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무로 된 칼을 허리춤에 비껴 차고 아이들과 함께 전쟁놀이를 즐겨 했다. 돌멩이로 군문을 만들고 진을 치면 내 가슴 속은 뜨겁게 타올랐고, 나는 생사가 오가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다. 너무나 그 순간에 몰입한 나머지 내가 만들어 놓은 작은 군영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활로 상대의 눈을 쏘고자 했다. 그래서 감히 어른들도 나를 꺼려 내 군영의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문신(文臣)의 집안이었다. 형 희신, 요신, 우신 그리고 나 순신의 이름엔 위대한 왕의 뛰어난 신하가 되라는 아버지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우리 형제의 이름의 앞 글자는 그 옛날 위대한 성군이던 복희씨, , , 임금의 이름에서 따왔고, 돌림자인 신(臣) 그런 성군의 위대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을 따라 오랜 시간 문과 응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문(文)의 세계에 천착할수록 나의 내면의 칼의 노래는 점점 더 크게 울며 나를 불렀다. 내 나이 스물 여덟(1572년) 그 울림을 따라 훈련원의 별과 시험에 응시하였다.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묵묵히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끝까지 과정을 마쳤으나 낙방하였다. 다시 4년 간의 와신상담 끝, 서른 둘(1576년)의 나이에 병과에 합격했다. 그렇게 칼의 울림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언제나 나를 이끌었고, 나는 늘 그 울림을 따라 나섰다.

 

 

견딤 하나, '마땅함'을 따르다

서른 다섯(1579년), 시련이 찾아왔다. 함경도의 거친 환경에서도 꿋꿋이 버틴 나이지만 그런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부패된 상관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병조정랑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여 그의 뜻에 반대하였다. 직후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되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른 여섯(1580년), 나의 올곧음을 아는 서애(유성룡)의 청으로 나는 발포(전남 고흥) 수군만호로 임명되었다. 수군과의 첫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전라 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자 나는 이 나무가 나라의 물건이므로 사사로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며 제지하였다. 성박은 크게 부끄러워 하며 나에게 오히려 미안해 하였다. 서른 여덟, 훈련원 시절 나를 강등시켰던 서익이 발포로 감사를 나왔다가 내가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 조정에 보고하였다. 나는 다시 파직되었고, 좌천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딱한 처지를 안타까워 한 나머지 같은 가문의 어른이자 이조판서였던 율곡 이이가 서애(유성룡)를 통해 나를 만나자는 뜻을 전해왔다. 나는 완곡하게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지금 그는 나라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그와의 사사로운 만남은 나와 그 모두에게 좋지 못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서른 아홉(1583년), 나는 다시 최전방인 함경도로 배치되었다. 그 해 여진족이 침입하였고 나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 해 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3년 상을 치렀다. 그리고 다시 복직하였다.

 

견딤 둘, 첫 번째 '백의 종군'

마흔 셋(1587년), 서애의 천거로 조산보(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 녹둔도(두만강 하구) 둔전(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병사들이 경작한 토지)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 둔전관의 경험은 추후 왜란이라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군량을 마련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이 되어주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나와 이경록은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내 생애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이듬해(1588년)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 전에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벗어났다.

 

이때부터 나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마흔 다섯(1589년) 2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마흔 여섯(1590년) 7월에는 서애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에 임명되었으나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 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 왜란이 일어나기 정확히 14개월 전인 마흔 일곱(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칼의 노래를 따라 병과에 급제한지 정확히 15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견딤 셋, 이어지는 승전 그리고 두 번째 '백의 종군'

나이 마흔 여덟(1592년) 임진년의 어느 봄날 왜의 무리가 나의 조국의 산하대지를 피로 물들였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두 만에 조국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그 해 5월 7일 옥포 해전부터 계유년(1598년) 11월 18일 노량 해전까지 23회의 전투를 치렀고, 모두 승리하였다. 그 승전들은 패색이 짙었던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마흔 아홉(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나라는 계속하여 전란에 휩싸였고 나는 국운을 책임진 수군의 수장이 된 자로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하였다.

 

그렇게 전란이 일어난 지 여섯 번째가 되는 해 (1597년) 1월 나는 왜의 무리를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왜의 계략임이 분명하였으며, 계략에 말려들어 수군을 잃게 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늘과 같은 군왕과 조국의 산하대지 아래 신음할 백성의 고통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명령 불복종과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사형을 선도 받았다. 우의정 정탁의 변호하여 한 목숨 부지하며 두 번째 백의종군을 명 받았다.

 

종군을 시작하며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가던 중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떠나신 어머니 곁에 3일도 채 지내지 못한 채 나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것은 살아 있는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후임자 원균은 그7월 칠천량에서 왜에게 대패하며 수군의 대부분이 궤멸되었고, 나는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다. 왕께서는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넘어섬,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옵니다

내게는 단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달 뒤(9월) 함대를 이끌고 명량으로 나아갔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였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다음 날 나와 나의 수군은 결사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하여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늘이 도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느 날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 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뉘게 의지한단 말인가.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이듬해(1958년)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왜와 혼전을 벌이다 적이 쏜 유탄에 맞았다.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것은 파란만장했던 54년 간의 삶을 마무리 하며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무릇 장수의 그릇으로 태어나 장수가 되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큼 위대한 영광은 없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처음 나를 이곳으로 이끈 칼의 노래를 따라, 그 울림 시작된 그곳으로 나 다시 돌아가리라.

  

 

※ 동영상

세계 속의 영웅 이순신 장군

 

 

 

※ 자료 출처

1)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서해문집)

2) 이순신 세계화 사이트 (http://yisunsinkr.prkorea.com/)

3) 네이버캐스트 '인물과 역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10)

4) 동영상 (http://channel.pandora.tv/)

5) 사진 (http://photo.naver.com/view/2009090310450504780)

 

 

 

◆ 내 가슴 속의 영웅 '이순신'

 

5월 30일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 속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승화한 영웅의 이야기를 읽는다. 영웅은 나의 상상 속의 존재하던 그런 영웅이 아니었다.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약한 인간 그 자체였다. 그 삶에서 배우고자 한다. 두렵다. 힘겹게 쥐고 있는 세상을 향한 한 가닥 끈을 놓아버릴 까봐. 그러나 나의 독한 근성은 결코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런 지독하게도 생생한 시련은 거름이 될 것이다. 훌륭한 거름이 되어 나의 꽃이 보다 선명한 색을 띠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5월 31일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새벽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난중일기를 읽으며, 이렇게 매일 남기는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하루 적어도 두 꼭지의 글을 써온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이런 활동들은 뭔가를 누적적으로 채운다는 성취감 보다는 쌓여 있는 것들을 쏟아낸다는 느낌으로 썼다. 아마 이런 활동들에 어떤 의도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면 아마도 오래가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이렇게 써 놓은 글들은 잘 갈무리해 두었지만 다시 꺼내 읽어 보지는 않는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읽는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6월 1일

밤샘 작업으로 새벽 4시가 다 되어 집에 들어왔다. 2시간 남짓 눈을 붙이고 다시 일어나 출근했다. 조금이라도 잠을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번 주 과제 도서인 <난중 일기>를 읽고 있다. 전쟁이 거의 마지막까지 왔다. 솔직 담백한 문체들 사이에 있는 여백들에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기억들을 메워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경험하려고 한다. 어렵다. 오래 전에 봤던 드라마라 기억이 가물거린다. 잠시 짬을 내어 동영상으로라도 봐야겠다. 동영상이 방아쇠가 되어 묻혀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줄지도 모른다.

 

6월 2

집에 들어와 <난중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나간다. 명량해전을 읽다가 자꾸만 책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존경하는 사람. 그렇게 존경하게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 동영상으로 보고, 음악을 들으니 마치 내가 장군이 되어 달 밝은 수루에 우뚝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 고뇌, 두려움으로 인한 압박감을 견뎌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김훈의 <칼의 노래>도 읽고, 드라마도 죄다 다시 보고 싶다. 꼭 그렇게 할 것이다.

 

6월 3

이른 아침 사무실에 도착하여 <난중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두 읽었다. 노량해전 전날까지만 기록이 남아 있다. 당연한 일, 다음날 적의 유탄을 맞고 전사하셨으므로. 1주일간 투명인간이 되어 이순신 장군의 곁에 머물렀다. 연인과 헤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짠하고 애틋하다.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불멸의 이순신> 동영상을 봤다. 어제 저녁은 '명량해전', 오늘 점심은 '한산도대첩'을 봤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연구원 과정이 끝나면 꼭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어볼 것이다.

 

<난중일기>를 읽고 난 다음인지, 수련일지의 문체가 <난중일기>의 문체를 약간 따르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내 삶, 내 행동에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깊은 향기에 흠뻑 젖어 있다 나오는 기분이다. 한 번쯤은 남해에 있는 한산도를 찾아, 장군님이 하셨던 것처럼 수루에 올라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시름에 젖어보고 싶다.

 

6월 4

장군에 대한 존경심으로 마음을 들끓어 오르지만 마땅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들끓는 내 마음을 명쾌하게 표현해준 장군에 대한 여러 사람의 평을 찾아보았다.

 

평생 장군의 지음(知音)이 되어 장군을 후원하였던 서애 유성룡의 평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해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뱃속에는 담기가 있어 자신을 잊고 국난에 몸을 바쳤으니 이는 평소 수양을 많이 쌓은 데 그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일본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茶)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남긴 <난중일기>에 대한 평

"코피를 쏟고, 식은땀을 흘리고, 환청에 시달리는 기진맥진한 수군통제사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적탄을 맞은 어깨가 덧나 욱신거리고 정치적 모함으로 고문 받은 허리와 무릎이 견딜 수 없이 시려올 때, 그래서 그가 자신의 몸을 적과 임금이 동거하는 몸으로 인식할 때, 알 수 없는 적들의 적의와 기댈 곳 없는 썩은 정치판 속에서 그 어느 쪽으로도 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한 무인의 운명을 나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싸운 것은 '세상의 무의미'였으며, 희망 없는 세상을 돌파해 나가야만 하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이었다.

 

그 싸움에서 무인인 그가 기댈 수밖에 없는 최후의 수단은 칼인데, 이러한 헛것은 베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칼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칼에 새긴 검명처럼 적의 피로써 산하를 물들이고자 했던 그의 소망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의 놀라운 문장들은 여기에 기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 칼과는 달리 인간은 특히 그 몸은 생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그가 마침내 견딜 수 없어 그 흔적을 드러낼 때 나는 함께 울었다."

 

<여해 이순신 : 너라야 세상을 화평케 하리라>의 저자 김종대의 평

“그러나 공의 일생을 찬찬히 한 번만이라도 살펴본 사람이라면 공은 그냥 명신이나 명장수, 전쟁 영웅으로 불릴 사람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충무공은 왕이 삼고초려 해서 군사 혹은 승상으로 모시고 받드는 복된 환경에서 적과 싸운 사람이 아니다. 개인적인 허물을 감싸주고 힘껏 싸우도록 온 나라가 보필하는 가운데 적과 싸운 사람도 아니다. 그는 왕이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죽이려고 까지 했던 기막힌 상황 속에서도 한 번 세운 충을 굽히지 않았다. 왕과 그를 모함하는 세력들이 자신을 파면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했으나 그들을 원망한 일이 없었고, 그들 때문에 자신이 수년을 두고 일궈온 수백 척 전함이 모두 부서져 바다 속으로 던져지고 겨우 열두 척만이 남아도, 또 자신이 키워낸 수만의 수군이 몰살되고 백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원망과 격분으로 일을 그르치지도 않았다. 조정에서는 싸울 전선과 병사들을 모조리 없애놓고 그 열 배, 백 배가 넘는 적의 수군과 싸우라며 뻔뻔스러운 재임명의 교서를 내려도 불평은커녕 배가 열 두 척이나 남아있으니 괜찮다면 담담히 그 명을 받들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었고, 권세를 잃고 백의족군 신세가 되어서도 원망과 타락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에는 진실로 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냥 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뚜렷한 사생관으로 생사를 초월한 도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원망하고 화내는 경지를 넘어 능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대인격을 갖춘 성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II.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내마음을무찌르는글귀_난중일기.doc

 

 

 

III.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일기다. 자유롭게 쓰는 일기에 어떤 구성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순신 장군이 왜란 중 매일 쓴 일기가 모여 <난중일기>가 되었고, 연암 박지원이 중국을 다녀오며 쓴 일기는 <열하일기>가 되었다. 스승의 일기는 <일상의 황홀>이 되었다. 나 또한 매일 빠짐없이 1페이지 이상의 일기를 쓴다. 후대에 내가 남긴 일기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 것인가?

 

6월, 연구원 과정 세 번째 테마는 '그들이 본 그들'이다. 선배 연구원 들의 글 속에서 스승의 의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제 개인의 역사, 즉 개인사로 들어 갈 것이니 한 개인에게 투사된 그 시대를 집어보라. 그리고 그대에게 투사된 현대를 그려보라. 끊임없이 연결하라. 책과 책을 연결하고 사상과 사상을 연결하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그들과 그대를 연결하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과거의 경우 많은 사가들에 의해 연구되어 다양한 관점을 통해 객관화 하여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역사는 이미 그 속에 함몰되어 있다는 주관성으로 말미암아 객관적인 시선을 갖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자신의 시대를 살다간 한 개인의 자서전을 통해 우리는 그가 자신이 시대를 바라본 관점 하나를 터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유추를 통해 나는 오늘날 내가 살아가는 현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얻게 된다.

 

6월 한달 간 나는 이순신, 카를 융, 괴테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본다. 나의 눈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나의 삶을 바라본고, 나의 눈으로 나의 삶을 바라본다. 나아가 우리의 눈으로 나의 미래를 바라볼 것이다. 나의 6월의 책 읽기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첫 번째 만남, 이순신의 <난중일기>. <칼의 노래>의 저자 김훈의 말처럼 이순신의 시대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평화의 시대가 아닌 전란의 시기, 세상이 어지러운 난세의 시기였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지만 그 영웅이 겪는 하루하루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단하다. 밖으로는 칼로 베어야 하는 실상의 적이 있었고, 안으로는 왕의 시기, 경쟁자의 견제와 음모 등 칼로도 벨 수 없는 적들로 가득했다. 죽음이 두려웠을 것이고,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막중한 책임감에 버거웠을 것이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된 하루하루를 견디었고, 시련을 극복했으며 스물 세 번에 전투에 임했고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눈물도 많고, 몸도 약한 그저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이순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시대를 이끌어간 영웅으로 거듭나게 했을까? 그는 쉬지 않고 관찰했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기록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료하게 구분하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위치해야 할 곳에 위치했고,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해냈다. 한산도에서는 학의 날개를 펼쳤고,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스무 배가 넘는 적의 배를 격침 시켰으며, 노량에서는 자신의 죽음마저 숨기며 승리를 이끌었다. 왕은 끊임없이 자신을 견제하고 종국에는 버리고 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며 신하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고, 종국에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왕이 원하던 왜란의 종결을 선사해 주었다.

 

나라면 어땠을까? 과연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더라면 그와 같은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현대로 소급하여 생각해 보자. 만약 지금이 전란의 시대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목숨을 바쳐 지키고 싶은 무엇이 나에게도 있을까?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앞으로 돌진 할 수 있을까? 두려워서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회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작은 삶조차 버거워 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이 시대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위치해야 하는 곳은 어디이며, 그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펼칠 학의 날개는 어디에 있으며, 必死卽生, 必生卽死  즉 목숨 바쳐 돌진할 나만의 그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달 밝은 밤, 수루에 기대어 시름에 잠길만한 그것이 나에게도 있는가? 그의 검에 새겨진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글귀처럼 그렇게 피로 물들여서라도 구하고 싶은 세상이 내게도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래야 '그저 하면 좋은 것 같은' 것들 뿐,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늘 탐색 중, 진행 중이다. 내 나이 서른 둘, 그가 병과에 합격한 나이와 같다. 그의 삶도 그 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삶도 지금부터 시작이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다면 그저 굴러 보아라. 길이 안보이거든 일단 주어진 일을 해라. 좌천도 당해 보고 백의종군도 해보아라. 그렇게 거칠게 구르며 절차탁마 하다 보면 내가 목숨 걸고 지키고 싶은 뜻, 내 세상 하나 생길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 하나, 온 마음을 다해 살아라. 절체절명의 순간은 언제고 찾아온다. 그것은 영광 직전의 순간일 수도 있고, 죽음 직전의 순간일 수도 있다. 명량 해전에서 그가 도망가려는 부하를 붙들고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라고 했던 그 부르짖음을 스스로에게도 외쳐라.

 

IP *.109.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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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05 22:56:33 *.35.19.58
경인이가 난중일기를 마음으로 읽었구나.
경인이가 피로 물들여서라고 구하고 싶은 세상을 어서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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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6 05:49:08 *.109.24.41
참 여운이 오래도록 남네요.
어서 구해서 누나 맛난거 사드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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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6.07 08:10:39 *.219.84.74
경인아.  '무엇이 위대함으로 이끌었나'하는 꼭지의 포맷은
나도 욕심이 나서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다. 이런 것에는 어느정도 시간과 마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니?

제대로 보는 것,
제대로 자신에게 대입해 보는 것,
제대로 정리하는 것.
이런 것들이 아주 제대로 박자를 맞추게 하는 능력이 그대에 있음을...

언젠가는 경인이가 '펜의 노래'를 장엄하게 부르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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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7 18:31:51 *.124.233.1
와.. 펜의 노래.. 멋진대요 형님?
나중에 꼭 이 제목으로 한 꼭지 써야겠습니다.
시간은 3~4시간 이상은 쓰는 것 같아요.
순수하게 쓰는데 걸리는 시간이구요.
책 읽을 때도 생각하려고 하고, 선배들 글도 많이 참고 하구요.
이게 처음부터 빡쌔게 시작하다 보니
품질을 낮추기가 어렵더라구요..;;;
그게 좋은 면도 있더라구요~ㅎㅎ
부족한 아우의 글 좋게 봐주어서 늠 고마워요 형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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