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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6일 02시 14분 등록

1. 이순신에 대하여

불멸의~2.JPG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2011년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6주년 되는 해이다.

 

이순신과 어머님의 깊은 정

임진왜란 중에 이충무공 어머니가 살았던 곳이 전남 여수시 웅천동(고음내, 古音川) 송현마을이다. 그분은 1593년 6월부터 1597년 4월까지 4년 가까이 사셨다. 아들며느리 방씨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충무공은 전라좌수사 시절 좌수영본영에서 20리 떨어진 이곳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러 왔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변씨는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에서 살다가 1593년 6월에 여수로 거처를 옮긴다. 이순신이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2년 4개월만이다.1592년(임진년) 정월 초하루에 쓴 일기에 어머니를 뵙지 못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수가 없다." 어머니를 가까이 뵐 수 있는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충무공이 1593년 7월 15일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불과 한 달 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한산도 통제영에서 수군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여수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1594년 1월 11일에 쓴 일기에 이런 고충을 적고 있다. "어머님께 가니 어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시어 일어나지 않으셨다.웅성대는 소리에 놀라 깨어 일어나셨으나 기운이 어렴풋하시어 앞이 머지 않으신 것같다. 오직 눈물이 흐를 뿐이다. 말씀은 착오가 없으시다. 적을 치는 일이 급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바로 다음날 일기에는 어머니의 큰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다. 1596년 8월 12일 일기에는 모자간의 깊은 정이 듬뿍 묻어난다."종일 노젓기를 재촉하여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더니 백발이 아주 무성하셨고, 나를 보시더니 놀라 일어나셨다. 기운이 흐려지셔서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려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도록 위로하며 어머님의 마음을 풀어드렸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순신의 부친인 이정은 벼슬을 하지 않고 평민으로 지냈는데, 이로 인해 집안 형편이 점차 기울어져 갔다. 한편 이정이 하급 무관인 교위(校尉)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정규관리가 아닌 군대 동원시의 임시 벼슬이나 명예직이었던 것 같다. 이정은 이순신이 함경도 건원보(乾源堡)의 군관으로 있던 1583년 11월,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부친의 부고는 다음 해인 1584년 1월에 전해졌고, 뒤늦게 고향으로 내려간 이순신은 3년 상을 치렀다.

조부였던 이백록(李百祿)은 1534년(중종 29년) 경에 성균관 생원이었으나 이후 평시서 봉사(平市署 奉事)를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중종실록』과 『명종실록』에 의하면 중종의 상중에 아들의 혼인을 성대히 하였다는 누명으로 처벌된 것 같다. 이 사건은 후에 이순신의 부친인 이정(李貞)에 의해 억울함이 밝혀졌지만 이 일로 이순신은 집안은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생애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원균에 대하여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어 북방에 배치되어 여진족을 토벌하여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천거되었으나 평판이 좋지 않다는 탄핵이 있어 부임되지 못했다. 1592년(선조25)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침입하자 경상좌수영의 수사 박홍이 달아나버려 저항도 못해보고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가 퇴각했으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원군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5월 2일 20일만에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합포해전·적진포해전·사천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순신 보다 경력이 높았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두 장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청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상당산성을 개축하였고 이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옮겼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쳐들어오자 수군이 앞장서 막아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이를 반대하여 출병을 거부하자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기문포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 본진을 공격하는 작전을 두고 육군이 먼저 출병해야 수군이 출병하겠다는 건의를 했다가 권율 장군에게 곤장형을 받고 출병을 하게된다. 그해 6월 가덕도해전에서 패하였으며, 7월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은 재해권을 상실했으며 전라도 해역까지 왜군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선조 36)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崇錄大夫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이 추증되었다. 선조가 그를 선무공신으로 책록한다는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 교서'는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이 교서는 왜적을 격퇴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데 대하여 공을 기리고 포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있다.

백의종군에 대해

백의종군은 조선시대에 중죄를 지은 무관에게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참전케 하는 처벌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1588년에 두만강 북쪽 녹둔도에 침공했던 여진족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에 백의종군으로 참전했고, 이후 임진왜란 기간 중에 두 번째의 백의종군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 무관에 대한 처벌이었던 ‘백의종군’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전에는 이순신이 두 번 겪었던 백의종군은 ‘장수가 병졸로 신분이 강등되어 복무하는 치욕적 형벌’이라는 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백의종군은 ‘단순한 보직 해임조치로서 장수의 신분을 유지한 채 복무하는 처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있는데, 1588년 1월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이 지휘한 여진족 토벌전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상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육군박물관 소장)라는 제목의 기록화이다. 이 전투 기록화에는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 장수들 전체의 명단과 직책, 편제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데, 이순신을 비롯한 50여 명의 참전 장수가 확인되고 있다. 이순신은 1차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뒤 4개월 뒤에 이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뒤 백의종군의 처벌에서 사면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2,700여 명의 군사를 셋으로 나눠 전투를 수행했는데, 이순신은 해임되어 현직이 없었지만 ‘우위(右衛),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서 우위장이었던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 장수로 참전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종성부사였던 원균도 ‘우위, 일계원장(一繼援將)’으로서 참전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순신은 원균은 동급의 ‘장수’ 신분으로 편성되어 전투에 참가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백의종군은 중죄를 지었지만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내린 보직 해임조치로서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은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 처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의 수군

9세기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청해진(淸海鎭)을 완도에 설치하여 수군 기지로 삼았으며, 10세기 초 고려는 강력한 수군을 보유하여 서해안을 제압하고 남쪽에 있던 후백제의 영토[羅州]를 점거할 수 있었다. 고려 말에도 수군의 활동은 왕성하여 14세기 후반 최무선(崔茂宣)은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화약무기를 개발, 진포(鎭浦 : 지금의 錦江 입구)에서 왜선 500여 척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제도적으로 해상 방어를 전담하는 수군이 확립되어 육군과는 다른 형태의 독립된 군대로 정착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다. 그 이전까지의 수군은 육군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군이 발전하게 된 것은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수군이 재정비되었던 데서 비롯하였다.조선 건국 초에 수군은 선군(船軍) 또는 기선군(騎船軍) 등으로 불리면서 그 군액(軍額)이 차츰 확장되었다. 세종 때에 이르면 군액과 함께 병선(兵船)ㆍ각포설진(各浦設鎭) 등으로 수군 규모와 편제가 제도상으로 정비되었다. 이후 조선 최대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연전연승을 거둬 조선이 전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과 더불어 조선 수군의 전선(戰船)과 화기(火器)가 일본 수군보다 우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조선 수군은 경상ㆍ충청ㆍ전라 3도의 수군을 통합하여 함대를 편성해야 할 필요에서 전란 중에 통제영(統制營)을 설치하고, 수군통제사의 지휘를 받는 연합함대를 편성하였다. 이러한 수군 제도는 1627년(인조 5년)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도에 설치한 통어영(統禦營)과 함께 후기까지 존속하였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수군의 병력은 48,800명으로 연해민만 아니라 산군인도 충원되었으며, ‘2번1삭상체(二番一朔廂遞)’에 의하여 1개월 교대로 1년에 6개월을 복무하였다. 병선은 수군의 해상근무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로서, 병선의 건조를 위해 초기에는 전선사를 두었으나 뒤에는 비변사에서 이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의 성능이 월등하기도 했지만,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한 조선군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이와는 반대로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연전연승을 구가하였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천 ‧ 지 ‧ 현 ‧ 황자총통 등 우수한 대형화포를 거북선과 판옥선에 장착하여 운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형화포는 대형 화살(箭)과 다수의 탄환을 발사하여 원거리에서 적선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지녔던 것이다. 당시 일본 수군이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뱃전을 붙이고 백병전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전함의 전후좌우에 각종 화포를 장착하여 함포전술을 구사하였다. 따라서 조선군이 사용한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육전과는 달리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1.GIF

왜적이 본 이순신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가신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패하고 이런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 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참고자료

충무공 탄신 466주기 CBS특별기획 [충무공의 숨결따라]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17004네이버 백과사전 : http://100.naver.com/100.nhn?docid=126808 , http://100.naver.com/100.nhn?docid=120173

와키자라 야스하루라의 이야기 : http://www.high1story.com/983

이순신 홈페이지(경남도청 관광진흥과 제작) : http://www.yi-sunsin.com/main/



2.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 귀

-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이순신, 송찬섭 편역 -

글을 시작하기 전에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이었다. 그는 단순히 군사를 호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쳐부순 무패의 장수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부하였던 이의 궁핍한 사정에 기꺼이 옷을 벗어 주고,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고, 부하가 다른 장수를 욕하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오랜 싸움에 몸져눕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10여 년 전 당시에는 한문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풀어 써야 한다는 생각에 '격군', '사부' 등의 용어를 '곁꾼', '활꾼' 등으로 우리말로 고쳤었는데, 지금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 어휘라는 점 등을 무시할 수 없었던 탓이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간 나라를 지킨 명장 이순신(1545~1598)이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끝나던 해인 1598년 까지의 일을 일기 속에 꼼꼼하면서도 간결하게 담아 냈다.

<난중일기> 친필 초고는 아산 종가가 보존해 오던 것을 현재 국보 제78호로 지정하여 아산 현충사로 옮겨 와 보관하고 있다.

그 뒤 1935년 일제 시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처음으로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초서로 쓰여 있던 것을 탈초하여 활자화하고, 주를 달아서 <난중일기초/임진장초>를 간행하였다. 1960년대에 이은상 씨는 이 책에 근거하여 한학자들을 모아 번역에만 집중하여 <난중일기>를 처음 간행하였다.

11.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복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16. 거북 모양의 돌격용 전선은, 사실 조선 초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전래의 거북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으로 만들어 실용화한 것은 '이순신'이다.

17.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1월 16일  맑다...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병선은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또한 짐작하겠다. 성 밑에 사는 병줄 박몽세는 석수장이인데 선생원(길목 여관)에 쓸 돌 뜨는 데로 가서는 동네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2월 초1일  때마침 수장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어 왔기에 그물을 쳐서 2천여마리를 잡았다. 그 모습이 볼 만하였다. 그대로 배 위에 앉아서 우후(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함께 새 봄의 경치를 즐겼다.

2월 초10일  통역하는 자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군사를 청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는 우리가 왜국과 함께 딴 뜻이 있는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놈들의 흉악스러움은 뭐라 말할 수가 없다. 통역관들은 이미 잡아 가두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2월 19일  순천 부사 권준이 그의 아우와 함께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또한 왔다.

2월 22일  흥양 현감과 능성 현감 황숙도 그리고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셨다.

 ☞  술 마신날도 어김없이 일기를 쓰신다. 그것도 길게 쓰신다. 이 꾸준함이란.

2월 25일  흐리다. 방비가 다섯 진포 가운데서 제일 못한데도 순찰사가 잘 되었다고 장계를 올렸다니... 죄를 제대로 검사하지 못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3월 초3일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게을리 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매를 때렸다. ..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

 ☞ 좌의정 유성룡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  이순신을 알아준 사람 유성룡. 그의 계속되는 지원과 관심.

3월 21일  맑다. 심기가 편안하지 못하여 아침 내내 누워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 일을 보았다.

3월 24일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 김수가 편지를 보내어 '대마도주의 공문에 이미 배 한 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일 귀국에 다다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파선 한 것이리라.; 하였다니 그 말이 극히 음흉하다.

4월 초8일  늦게 우신이 떠나갔다. 혼자 창가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 이순신의 자녀 : 회,열(울),면,훈,신

4월 15일  맑다. 나라의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 나라 제사날에는 일을 안하는 구나. 그런데 왜이리 나라 제삿날이 많냐. 언제 일하는지... 예전엔 주말이란게 없어서 제사날이라도 쉬라고 그랬나?

4월 16일  부산과 같은 큰 진이 벌써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3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4월 29일  새벽 2시쯤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남해현 성 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은 거의 비어 있고, 집안에서 밥 짓는 연기도 나지 않으며, 창고의 문은 이미 열려 곡식은 흩어졌고, 무기고의 병기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마침 무기고의 행랑채에 사람이 하나 있기에 그 사유를 물어보니 '적이 급박하게 닥쳐오자, 온 성 안의 사졸들이 소문만 듣고 도망했으며, 현령과 첨사도 따라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돌아오다가 또 한 사람을 보았는데, 쌀 한 섬을 진 채 장전을 가지고 남문 밖에서 달려나오다가 장전의 일부를 소인에게 주었습니다." 하였다. 그 장전을 살펴보니, '곡포'라고 새긴 것이 분명하여, 성을 비우고 도망했다는 말이 그럴듯 했다.

 ☞ 임진왜란 초의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문장이다. 관청부터 시작해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고 창고와 무기고까지 버려둔 상황.

5월 초2일  왜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죄다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모두 기꺼이 싸움터로 나갈 뜻을 가졌는데 낙안군수 신호만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했다. 한탄스러웠다. 군법이 있는데 설사 물러나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

5월 초3일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적의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도망갔으므로 이를 잡아다가 목을 베어 내다 걸었다.

5월 초8일  (장계)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귀화한 자) 이신동이란 자가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산꼭대기에서 어린애를 업은 채 울부짖으면서 내려왔다...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므로 사정이 안타깝고 포로가 될 것이 염려스러워서 데리고 다니겠노라고 하였더니, 어머니와 아내를 찾아야 하므로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분하게 여겨서 서로 돌아보았다.

 ☞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품이 넓은 사람.

5월 초8일  임금께서 평안도로 옮겨 가셨다는 기별을 들었다. 놀라움과 분함이 극도에 달하여 하루 내내 서로 붙들고 오장이 찢어지듯 통곡하였다. 어쩔 수 없이 각자 배를 돌렸다.

5월 29일  나는 모든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었다.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통을 마치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 전쟁이 난지 한달 반만에 임금마저 피난을 갔다. 6.25전쟁때도 이승만은 몇칠만에 국민들보다 먼저 피난을 갔다지. 목숨걸고 내 아내, 자식들, 집, 땅을 지키려는 자가 없으면 적들이 와 분탕질을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철저히 대비하고, 준비하며, 적의 침입시에는 머뭇거림없이 목숨걸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6월 초1일 (장계)  원균은 사움에 패한 뒤로는 군사 없는 장수로서 지회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싸우는 곳마다 화살이나 탄환에 맞은 왜인들을 찾아내어 머리 베는 것을 맡아 하였다.

7월 초4일 (장계)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좇아왔다.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바다 한 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하였다.

 ☞ 바다위 배에 앉아서 어떻게 진을 치는 명령을 내리는지 궁금하다. 깃발? 나팔? 연기? 뭘까? 깃발이구나. 밑에 나옴.

7월 초9일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륙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시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8월 28일  맑다. 새벽녘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았다. 밤에는 나쁜 꿈인 듯했으나 곰곰 생각하니 도리어 길한 것 같았다.

 ☞ 그도 꿈을 꾸었구나. 게다가 그 꿈을 생각해보고 적기까지 하였구나. 그는 자신의 무의식과 깊이 만나던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꿈이 기억조차 잘 안나니... 왜일까?

9월 초1일 (장계)  우리 군사의 위세를 가지고 지금 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적이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생길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 싸움을 독려하는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하였다... 적들은 우리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더니, 우리가 곧장 앞으로 쳐들어가자 배 안, 성 안, 산 위 굴속에 있다가 총과 활을 모두 챙겨서 산으로 올라갔다.

9월 초2일 (장계)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 차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 나라 구석구석이 분탕질 당하고 있겠구나. 아이고 백성들 삶이 말이 아니겠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1월 12일 (장계)  배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꾀었으나 적은 끝내 바다에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웅포까지 쫓아갔으나 그래도 잡아 무찌르지 못하였으니 어찌할꼬? 분하고 분하였다.

1월 14일 (장계)  큰 적을 무찌르려 작전을 약속하는 이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 할 말이 없다.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

1월 20일 (장계)  해가 질 무렵 소진포에 이르러서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사슴떼가 이리저리로 달아났는데, 순천 부사가 한 마리를 잡아 보내왔다.

1월 22일 (장계) 발포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걸려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상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심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1월 30일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배를 덮는 누추한 뜸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뜸 : 짚, 띠, 부들 따위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것으로 비, 바람, 볕을 막는데 쓴다.

1월 11일  맑다. 아침을 먹은 뒤 수사 원균과 이억기가 같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셨다. 원균이 매우 취하여 동헌으로 돌아갔다.

 ☞ 아침먹고 술에 취하다니....쯧쯧 , 이 달은 술먹고, 활쏘고, 바둑두고, 돼지 잡아 먹고 노는 달

3월 22일 (장계)  그 뜻이 매우 흉악흐므로 팔다리를 찢고 목을 베었다.

5월 초4일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5월 초 10일  갑자기 선전관 고세충이 임금의 교지를 가지고 왔다. 부산에서 돌아가는 적을 토벌하라는 내용이었다.

 ☞ 평안도에서 임금의 교지가 오려면 몇칠이나 걸릴까? 내용은 왜이리 단순한가. 그저 돌아가는 적을 토벌하라니...

5월 13일  맑다. 밥을 먹고나서... 더불어 편을 갈라 겨루었다. 해가 질 무렵 배로 내려왔다.

 ☞ 이순신장군은 놀기도 잘 하시는 구나. 하루종일~ 바둑, 활쏘기, 음주가무... 나도 일상을 남들과 즐길꺼리가 있어야겠다.

5월 14일  술이 여러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왓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영산령이 취하여 넘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니 우습다.

 ☞ 장군들이 술을 감당 못할정도도 마셔대니 참 꼴이 우습다. 우리나라 술문화가 이랬구나. 밥먹듯이 술마시고, 취할때까지 마시고...

5월 18일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였다. 바로 답장을 써서 미역 다섯 다발과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을 함께 부쳐보내는 마음씀.

5월 24일  명나라 관리에게 예물을 주었더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받고는 매우 즐거워하면서 거듭거듭 고맙다고 하였다.

 ☞ 그려 뇌물도 잘써야해~

5월 30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6월 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리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다.

6월 23일  맑다. 아침 일찍 목수 등을 점검하였더니 한 명도 빠진 자가 없었다. 새 배의 밑판을 다 만들었다.

 ☞ 평상시 불시 점검 등 군기를 잡은 것이 군대의 힘으로 실전에도 빛을 발한 것이 아닐까.

6월 24일  "적의 배 5백여척이 23일 한밤중에 소진포로 모여들었는데 그 선봉이 칠천량에 이르렀습니다."하고 보고하였다.

7월 초9일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 시적인 표현이구나. 단순하고 사실적인 문장 속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니 더 좋다.

8월 초1일  맑다.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했다.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8월 초6일  일을 의논하는 가운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8월 18일  제만춘을 불러와서 문초하니 분통 터지는 말이 많았다.

 ☞ 제만춘은 원균의 군관으로 있다 왜군에 잡혀 왜국까지 끌려갔다 돌아왔다. 이순신의 장계에 의해 사형을 면하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군관이 되었다고 하니, 이순신이 사람을 품는 배려가 큼을 알 수 있다.

8월 30일  원수사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다만 일고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1954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월 12일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해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 이때 어머님이 이순신에게 가지말고 나랑 조용히 살자고 붙들었다면 어찌했을까. 이순신이 이순신일 수 있었을까.

1월21일  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 둘이 원 수사의 진영에서 와서 적의 정세를 자세히 말하였다고 하나 믿을 수가 없었다.

 ☞ 좌,우도사가 서로 믿지 못하니 안타깝다.

1월 24일  문서가 제멋대로 꾸며졌다고 한다. 놀랍고 놀라울 뿐이다.

 ☞ 한문 문서로 보고하니 그 와중에 더하고 빼는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직접 확인할 수도 없고...

2월 초1일  왕의 분부 "경상 감사 한효순이 급히 보고한 가운데 좌도의 적이 거제로 모여들어 장차 전라도를 침범하려고 꾀한다 하였으니, 그대는 3도의 수군을 합하여 왜적을 모두 무찌르라."

 ☞ 모두 무찌르라는 명령은 내리기는 쉽다. 순진한 왕인가.

2월 초3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2월 초5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다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로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

 ☞ 여자가 그리웠나. 그도 남자니까. 이런 꿈 이야기도 쓰는 그의 솔직함이 멋지다.

2월 초 6일  저녁 무렵에 흥양 현감 김방제가 노란색의 유자 30개를 가지고 왔는데 금방 딴 것같이 싱싱했다.

2월 초 9일  또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인데,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물었다.

 ☞ 그런데 매일 술드시다니. 술좀 줄이세요.

2월 13일  그에게 전하기를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들어가서 치면,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합니다. 잠시 늦추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면 기회를 보아 완전히 무찌르도록 서로 작정합시다." 하였다.

2월 16일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 암행어사의 밀계 초본을 보고 이순신이 평한 말이다. 암행어사가 사사로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 분노하는 모습.

2월 19일  하루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물 무렵에 숙소로 내려왔다.

3월 13일  오후에 원 수사가 와서 자기의 잘못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장계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원사진, 이응원 등이 가짜 왜적을 목 베어 바친 대목을 고쳐 보냈다.

3월 19일  맑다. 몸이 불편하여 하루 내내 끙끙 앓았다.

4월 초4일  장흥 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져와서 하루 내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 하루종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겨하는걸 보니, 외향적인 성격이 분명하다. 내향적인 난 몇시간 이야기를 나눈후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월 21일  비가 오다가 개다가 하였다. 혼자 배 뜸집 아래 앉아 있었으나 저녁 때까지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5월 초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

 ☞ 수군을 이끄는 자로서 왕이 거제의 적을 겁을 줘 도망가도록 하라는 유지를 보내 그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이런 심란한 상황이 된 것같다.

5월 20일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 전라 감사가 일부러 나라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매우 유감스럽다.

6월 초4일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 왜이리 원균과 사이가 좋지 않을까. 임금이 알 정도이니 참 둘중에 하나를 짤라야 하는거 아닌가?

6월 초6일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친다.

6월 12일  순변사에게 유 정승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이 이길 길이 없다.

 ☞ 실제로도 유성룡은 1607년에 죽었다한다.

6월 19일  경상 원 수사가 혼자 한 잔을 올렸는데 상은 매우 요란한데 집어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 밥상 타박까지?

8월 17일  교서에 절한 뒤 원수 권율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오해가 많이 풀어지는 기색이었다. .. 여덟 순배를 돌리고 나니 원수가 많이 취하여서 그만 자리를 파했다.

 ☞ 이 시절에는 주량것 마시는 주도가 아닌가 보다. 무조건 한 순배씩 원샷을 한게 아니었을까.

8월 18일  간단한 술자리를 만드는 바람에 크게 취하여 돌아왔다. 원 수사는 취하여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누워서 가려 하지 않았다.

8월 27일  아침에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심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회를 내보냈다.

 ☞ 아내 얘기가 처음 나온듯. 신선한 회를 보내신건가? 날씨가 더울철인데 어떻게 배송했을까.

8월 29일  도적 세 명 가운데 장손에게는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얼굴에 먹물로 도둑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8월 30일  그가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화를 내는' 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 수사의일은 놀랍기 그지 없다. 내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천년을 두고 한탄할 노릇이다.

9월 15일  우수가가 오겠다고 미리 약속하고도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으니 한심스럽다.

9월 20일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가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놈이 화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갔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9월 22일  원수의 밀서가 도착하였는데, 27일에 군사를 출동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11월 25일  흐리다. 새벽 꿈에 이일 순변사와 만났다. 내가 말을 많이 하였는데 "국가가 위험한 때를 당하여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면 어찌 보답할 마음은 가지지 않고, 음탕한 여자를 거느린 채 관사에는 들어가지 않고 성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각 고을과 진포의 수군에게 육전에서나 쓸 군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 또한 무슨 이치인가?" 하였다. 순변사는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 하고 싶은 말을 못했었나 싶다.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1월 21일  장흥 부사가 찾아왔는데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이 하는짓이 아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쓴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 문득 드는 생각. 무슨 마음으로 매일 일기를 꾸준히 쓰셨을까? 난 이렇게 꾸준히 한 일이 있는가? 내 역사를 한 글자라도 남기려는 노력. 나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올곧게 세우려는 노력을 해 보았는가.

3월 11일  풍신수길이 침략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끌어 모아 부산포에 진영을 설치하려고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고 한다.

3월 17일  충청 우후가 급히 보고하기를, 수사 이계훈이 실수로 불을 내고는 자신은 물에 빠져 자살하고, 군관과 사공 모두 1백 40여 명이 타 죽었다고 하였다. 놀랍고도 놀라웠다.

4월 11일  맑다. 우수사가 찾아와서 함께 활쏘기를 하고는 하루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 싫어하면서도 함께 잘 노시는구먼.

6월 26일  오늘 이언경의 생일이라 한다. 그래서 국수도 만들어 먹고 술에 흠뻑 취하였다. 거문고 타는 소리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 무렵에 헤어졌다.

 ☞ 생일파티를 거하게 하셨구나! 재밌게 사시네~

7월 초7일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만약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7월 초10일  군량이 떨어졌다는 말을 많이 하였으나 달리 계책이 없었다. 매우 걱정스럽다. 박 조방장도 왔는데 술 몇 잔을 마시고 아주 취하였다.

8월 초7일  선전관 이광후가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원수는 3도 수군을 거느리고 곧장 적의 소굴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8월 23일  맑다. 제찰사와 만나 조용히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이 있는것 같았다. 호남 순찰사가 헐뜯으려 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9월 14일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순신의 시.

11월 21일  밤에 이종호가 곡식과 바꾸려고 청어 1만 3천 40두름을 받아 갔다.

 ☞ 과메기를 먹으셨구나.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1월 13일  신홍수를 불러서 퉁소 소리를 듣다가 밤 10시쯤 잠들었다.

2월 23일  맑다. 일찍 아침을 먹고 관청에 나가서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를 다시 되질하였다. 새로 지은 창고에 쌓아 둔 것이 1백 67섬이었는데 다시 담으며 줄어든 것이 48섬이다.

2월 24일  둔전서 받아들인 벼를 되질하여 1백 70여 섬을 창고에 들였으니 줄어든 것이 30여 섬이다.

 ☞  이순신장군의 꼼꼼한 면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2월 28일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인가.

3월 초5일  아침을 먹고 우수사를 만나 잘못된 점을 다시 말하였더니 우수사는 모든 것을 사과한 다음 술을 내어 함께 마셨다. 잔뜩 취해 돌아오는 길에 이정충의 장막에 들렀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술을 마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큰 비가 쏟아져서 내가 먼저 배로 돌아왔다. 우수사는 취해 쓰러져 작별 인사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으므로 그냥 오게 되어 어처구니없었다.

3월 초8일  하루 내내 취하도록 마신 뒤 헤어졌다.

3월 초9일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잤다.

3월 초10일  아침에 이별의 잔을 나누며 전송하였다. 하루 내내 크게 취하여 나가지 못하였다. 때도 없이 식은땀이 났다.

 ☞ 연일 술잔을 기울이시더니 술병이 나셨구먼. 이달은 거의 매일 술 얘기가 들어가 있다. 너무 많이 자주 마시는것 같다. 술 없이는 모임이 안되는 분위기인가 보다.

4월 초8일, 16일, 23일  술을 마셨다.

4월 25일, 26일, 28일, 29일, 30일  목욕을 하였다.

5월 초5일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 역시 좋은 리더는 풀어줄때는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5월 13일  부산 허내은만이 보낸 고목이 도착하였는데 "가등청정일란 왜적이 벌써 10일에 제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에 있는 왜적들도 장차 철수할 것이며, 부산의 왜적들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러 건너가려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5월 18일  저녁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는 안녕하시지만 음식을 전처럼 잡수시지 못한다고 하니 매우 답답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5월 30일  늦게 우수사를 찾아가서 만나고 하루 내내 매우 즐겁게 지내다가 돌아왔다.

 ☞ 우수사 원균을 찾아가서 만나기도 하셨구나. 즐거베 지내셨다니 왠일?

7월 초2일  한참 뒤 새로 지은 정자 위에 올라가서 편을 짜서 활을 쏘았는데 경상우도 순찰사 편이 1백 62점이나 졌다. 하루 내내 아주 즐겁게 지내다가 불을 켜 들고 돌아왔다.

7월 초10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7월 13일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7월 17일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적들이 일어나 홍산 현감 윤영현이 잡히고, 서천 군수 박진국도 잡혀갔다고 한다. 바깥 도둑을 없애지 못한 이때, 안에서도 도적이 일어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 큰 도적이 이몽학이란다. 본래 왕족의 서얼 출신이었고 임란중 장교로 있다 7월 7일 승려와 속인, 군사 등 1천여명이 홍산과 충청도 여러 군, 홍주까지 쳐들어갔다 한다. ,<그르믈 벗어난 달처럼>이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1592년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임진왜란의 기운이 조선의 숨통을 조여 오고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가던 선조 25년. 정여립, 황정학(황정민 분), 이몽학(차승원 분)은 평등 세상을 꿈꾸며 ‘대동계’를 만들어 관군을 대신해 왜구와 싸우지만 조정은 이들을 역모로 몰아 대동계를 해체시킨다. 대동계의 새로운 수장이 된 이몽학은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고 친구는 물론 오랜 연인인 백지(한지혜 분)마저 미련 없이 버린 채, 세도가 한신균 일가의 몰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란의 칼을 뽑아 든다. 한때 동지였던 이몽학에 의해 친구를 잃은 전설의 맹인 검객 황정학은 그를 쫓기로 결심하고, 이몽학의 칼을 맞고 겨우 목숨을 건진 한신균의 서자 견자(백성현 분)와 함께 그를 추격한다.  15만 왜구는 순식간에 한양까지 쳐들어 오고, 왕조차 나라를 버리고 궁을 떠나려는 절체 절명의 순간. 이몽학의 칼 끝은 궁을 향하고, 황정학 일행 역시 이몽학을 쫓아 궁으로 향한다. 포화가 가득한 텅 빈 궁에서 마주친 이들은 운명을 건 마지막 대결을 시작하고 이몽학은 한신균의 서자 견자에 의해 죽게 된다." 혁명가로서의 이몽학이란 관점이 있을 수 있겠다. 이순신은 관군이었으므로 도적이라 여겼다. 자신이 선 위치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언제나 자신의 발 밑을 살펴야 한다. 내가 제자리에 와있는지.

7월 20일  충청도 도적 이몽학이 이시발의 포수가 쏜 총에 죽었다고 한다. 다행스러웠다.

8월 초9일  마량 첨사 김응황이 근무 성적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떠났다.

 ☞ 이 때도 근무 성적 평가를 했구나. 경쟁은 국가주의 사회에서는 필수인가 보다.

8월 24일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균이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

 ☞ 더 무서운 표현이다.

8월 21일  이 고을 수령이 술을 권하므로 잠깐 취하고 끝마쳤다.

(당쟁의 희생으로 전라 충청 통제사 관직에서 파직되고 서울 감옥에 갇힌다. 약 한달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초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9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일기가 빠져있다.)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4월 초1일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술을 마셨더니 몹시 취하였다. 이순신도 술병을 차고 또 왔으므로 같이 마시면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4월 초9일  인정상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 정이 많으셔서 술을 거절 못하셨나보다.

4월 13일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4월 14일  관은 감영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 것으로 조금도 흠이 난 데가 없다고 한다.

4월 15일  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못마땅한 점이 없으니 이는 다행이다.

4월 19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4월 26일  고을 현감이  급히 보러 왔다. 나를 대하는 것이 몹시 극진하였다.

 ☞ 극진히 대접하면 그도 나를 극진히 생각하고 배려한다. 공경의 법칙..자연의 법칙..

5월 초7일  맑다. 아침에 정혜사의 승려 덕수가 미투리 한 켤레를 바쳤으나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래도 따라다니면서 여러 차례 졸라 댔다.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사고는 그를 보냇는데, 미투리는 정원명에게 주었다.

 ☞ 불교를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가. 승려가 대접받지 못하는구나.

5월 초8일  "원균이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팔아 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겁탈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악을 쓰면서 말을 듣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5월 15일  주인집이 너무 허름하고 형편없어서 파리가 벌 떼같이 들끓어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5월 21일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5얼 26일  간신히 악양 이정란의 집에 이르렀는데, 이 집은 문을 닫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집 뒤에도 기와 집이 있어서 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집을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조금 뒤에 돌아왔다. 이정란의 집은 김덕령의 아우 덕린이 빌어 사는 집이었다. 나는 아들 열을 시켜 간청하여 겨우 들어가서 잤다. 짐이 모두 젖었다.

 ☞ 잘 곳이 없어 헤매는 모습이 처절하다.

6월 초3일  비가 계속 내렸다. .. 그에게 물어보니 길을 다닐 수 없는 정도라고 하기에 그대로 묵었다.

6월 16일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7월 16일  늦게 변의정이라는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모습이 어리석으나 용렬해 보였다. 두메에 박혀 사는 사람이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또한 소박하고 인심이 후한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7월 18일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지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였다.

 ☞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의 순간

7월 21일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 원균은 전사했으나 1604년 권율,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에 올려졌다. 하지만 후대인들은 이순신을 위대한 장수로 받든다. 무슨 차이일까.

8월 초4일  오후에 곡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관청과 민가가 온통 비어 있었다. 이 고을에서 잤다.

8월 초5일  맑다.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옥과현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로 길이 가득 찼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위로하며 달랬다.

8월 초7일  "병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떠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까닭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 지킬 수가 없으니 남아있는 곡식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까봐 불을 질렀을 것이다. 안타깝다.

8월 21일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해서 소주를 마셔 취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8월 28일  배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을 명령하였다. 하는 수 없이 여러 배들이 회피하지 못하고 적선을 쫓아 단숨에 영암 땅 갈두까지 나갔다.

 ☞ 이순신 장군의 전투 스타일이 이러하리라. 적에게 뒤를 보이지 않고 절대 물러섬이 없는 모습 .

9월 초8일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에나 맞겠으며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못 만난 것만을 한탄할 따름이다.

9월 15일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9월 16일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모메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밤 10시쯤 비가 내렸다.

12월 초5일  왕의 분부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어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

 ☞ 상제라고 하여 고기를 안 먹고 나물 반찬만 먹는 것을 뜻한다.

12월 24일  밤에 나덕명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싫어하는 것을 모르고 머무르고 있으니 한심하다.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1월 초4일~8월까지 일기가 빠져있다.)

2월 17일  이순신은 강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7월 16일  명나라 수군 도둑 진린이 5천의 병력을 끌고 왔다.

7월 18일 적선 1백여 척이 녹도를 침범했다.

8월 18일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조선에서 철병할 것을 명령했다.

11월 초8일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 도독이 "순천 왜교의 적들이 초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습니다.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읍시다." 하였다.

11월 초10일  좌수영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쳤다.

11월 초13일  왜선 10여척이 순천 땅 장도에 나타났다.

 ☞  명나라 도독의 정보가 맞았구나.

11월 17일  어제 복병장인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나갔던 일을 보고하였다. 왜적은 한산도에서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

 ☞ <난중일기>의 대단원의 마지막 일기다.11월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24일 3진으로 나누어 부산에서 철수하였다.

 

3. 내가 저자라면

7년간의 일기

<난중일기>는 임진년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임진왜란 기간동안 명장 이순신이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이순신은 임진년 초하루부터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초하루의 일기는 여느때와 비슷하게 하루의 일상과 어머님을 두고 설을 보내는 슬픔에 대해 써있다. 매일 써오던 일기를 계속 쓴 느낌이다. 그는 꽤 오랜시간 동안 일기를 습관처럼 남겨왔을 것이다. 아마도 군에서 보고를 위한 장계를 쓰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보고서를 통해 평가받고 처벌과 상을 받던 시기였으니 기록은 그의 공무 중에서도 꽤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난중일기>는 정조 19년(1795)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편집, 간행한 <이충무공전서>에 실렸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때 편찬자에 의해 편의상 붙여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순신의 일기와 보고서인 장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부터의 일기를 모아 '난중일기'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자신의 역사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본형은 'me-story'를 남기자고 제안하며 연구원 모집과정에 '개인사' 쓰는 것을 중요한 과정으로 넣고 있다. 개인사를 써보며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자신을 알게되어 미래의 되고싶은 자신의 모습을 의지대로 선택할 추진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질 인생을 위대한 인생으로 꿈꿔보게 만드는게 '개인사'쓰기다. 그 기초가 되는게 <난중일기> 같은 매일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일상의 사실, 느낌을 솔직히 남기다 보면 그것이 쌓여 기록이 되고 유산이 된다. 이순신은 그 치열한 해전의 한 가운데에서도 일기를 남겼다. 한가할때 보충하며 문장을 다듬었을지라도 매일 기록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7기 연구원들도 자신들의 카페활동을 통해 '수련일지'를 남기고 있다. 몇 명 꾸준히 하는 동기들의 노력이 존경스럽다. 그렇게 습관처럼 자신의 일상과 생각, 느낌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결의를 세워본다.

 

내가 이순신이라면

자신의 맡은바 역할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기록에 남기는 것. <난중일기>가 작가를 꿈꾸는 연구원들에게 보여준 메세지가 아닐까한다. 자신의 뚜렷한 역할없이 생각만으로 글만써서 뭔가 되려는 이들은 글을 쓰기 어렵다. 진짜 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에게나 가능한 글쓰기일 것이다. 변경연이 지향하는 글쓰기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기록을 남기는 것, 살아있는 글쓰기를 하는 것, 그렇게 자신의 역사를 남기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생각일 뿐이고 실제로 난 7기 카페에 쓰는 '수련일지'에 내 직장의 일상을 써본적이 없다. 발전소의 콩팥의 기능을 하는 CPP제어실에서 일어나는 일들, 내가 하는 일들, 결제받고 보고하는 일들, 설비문제시 작업요청서 작성과 작업사항에 대한 처리, 직장내에서의 편안한 만남과 대화, 저녁시간의 회식때 이야기... 쓸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은데 그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다. 이 일상을 떠나 여행을 갔거나, 특별한 사건, 또는 먼 과거의 이야기에서 글감을 끌어올려고만 한다. 살아있는 글쓰기가 안되어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렵게 되는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내 지금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사부님은 '특별한 하루가 모여 특별한 인생이 된다' 하지 않았는가. 이순신은 자신의 꿈조차도 꼼꼼히 기록해 놨다. 난 꿈은 커녕 일상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 작가로서의 자세가 안되었다. 길게보고 꾸준히 써야한다. 매일 규칙적인 시간에 규칙적으로 쓰면 더 좋겠다.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밤시간이 될것이다. 교대근무를 하는 지금의 나에겐 가족들이 잠든 10시부터 12시까지가 나만의 시간이다. 화사한 아침과는 다른 묵직하고 몽롱한 분위기이지만 규칙적인 반복이 중요할 것이다.

이순신이 그랬듯이 나란 존재는 역사속의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남긴 기록은 후대에게 역사를 밝혀주고, 그 정신마저 기억하게 하지 않는가. 문장의 깊이를 더해 내 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남기면 더욱 좋겠다는 것이 바램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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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6 05:54:54 *.109.24.41
원균에 대한 이야기, 백의 종군과 조선 수군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형!
특히 왜란 초기 원균의 지원 요청에 이순신이 응하지 않은 부분을 보며
바로 이 지점이 원균과 이순신이 앙숙이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게 되네요.
타임머신타고 한산도대첩 보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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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6.07 08:31:44 *.219.84.74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의 배경이 그것이었구나. 재미있냐? 한번 봐줄까?

기록에 대한 양갱의 결의가 그냥 단순한 흘러가는 글위의 결의가 아니길...
양갱의 모닝페이지가 써질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칼럼에 달아 놓은 너의 댓글에 나의 모페 추천사를 읽어주소)
하지만 모페는 후대에 남겨 줄 수 있는것인지는 한번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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