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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6일 02시 50분 등록

1. ‘저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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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이순신은 전쟁을 가장 앞장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무장이었다. 그가 돌파해야 할 역경이 가혹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거대한 운명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인간의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만하다.
 
무관으로써 장군의 길은 평탄치는 않았다. 상관들의 모함으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 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은 실제 전투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최선을 다해 참여하였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을 맞아 싸운 명량해전의 일화는 유명하다. 엄청난 적 앞에 조선수군의 장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싸움을 망설이자, 장군은 부하장수들을 꾸짖으며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함대의 선두로 나아가 전투를 이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에 조선수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였으며 마침내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전투에서 항상 솔선수범하여 최선을 다하는 장군의 모습은 많은 부하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들 또한 장군처럼 전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임하기전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전투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줌으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불패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 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년(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위험에서 구했지만 선조는 자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옥고를 치르게 한다. 그 시점에서도 이순신은 담담히 그날의 일들을 감정을 배제한 채 사실만을 입각한 채로 글을 써 나간다.

 
이순신 장군은 일평생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관으로서 항상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상관이나 권력자에게도 서슴없이 오류를 지적하는 직언을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여러 차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늘 정의를 삶의 핵심가치로 삼고 온전히 실천하였다.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장군은 타인보다 본인에게 더 엄격하였다. 1593년 8월 일본의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정철총통을 제작을 아뢰는 장군의 장계에는 군관 정사준을 비롯하여 대장장이와 천민인 종들의 이름까지도 세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수하 하나하나를 챙기는 모습에서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리더인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한 장군은 해전에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부하장수들에게 골고루 주고, 이를 엄격히 평가하여 해전의 상황을 아뢰는 장계에 상세히 기록함으로 각자 공적에 따라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당시 천대받던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까지도 고루 기용하고, 이들의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창의력은 21세기의 핵심 가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온 많은 리더들은 이미 훌륭한 창의력의 소유자들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16세기 이순신 장군 역시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리더였다. 거북선을 비롯한 장군이 제작한 여러 무기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해전술, 군 경영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까지 모두가 장군의 기발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순신은 리더로서의 많은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아무리 작은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도 세심하게 살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본인의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고,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으며, 항상 전략을 위한 짜기 위해 끊임없이 휘하의 장수들과 토론을 하였으며,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곁에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 어록 및 시작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 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경상도로 출전하여 처음으로 전개한 옥포해전을 치르면서 한 말씀

한 번 승첩하였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위무하고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변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여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1592년 6월 14일 제4차 당항포 해전을 승리하고 나서 한 말씀.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1598년 11월 19일(약력 12월 16일) 이른 아침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시며 하신 말씀.

죽은 군졸들을 제사하는 글 (祭 死 亡 軍 卒 文)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觀 上 事 長)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爾 盡 其 職)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抗 ? ? 疽)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我 乏 其 德)

그대 혼들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招 魂 同 榻)

여기에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設 奠 共 享.)

진에서 읊다. (陳 中 吟)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蕭 蕭 風 雨 夜)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耿 耿 不 寐 時)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恢 痛 如 ? 膽)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마음 (傷 心 似 割 肌)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山 河 猶 帶 慘)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노나 (魚 鳥 亦 吟 悲)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國 有 蒼 黃 勢)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人 無 任 轉 危)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恢 復 思 諸 葛)

내달리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長 驅 慕 子 儀)

몇 해를 원수 막이 해놓은 일들 (經 年 防 備 策)

이제와 돌아보니 임만 속였네. (今 作 聖 君 欺)

갑오년(1594년 : 선조27) 9월 초 3일 지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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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면서

그가 이처럼 승전을 거듭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항상 죽기를 각오하고 임전(臨戰)하였으니, 이른바 견위수명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5]

임진년 1592년

정월[임진년]

2월

해운대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다. 침렵치를 구경했는데 매우 조용했다.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이 시 절구를 읊었다. [20]

석공들이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많이 무너졌기에, 석공들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20]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 섬인지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의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참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늦게 배를 타고 경도에 이르니, 아우 여필과 조이립군관, 우후 등이 술을 싣고 마중 나왔다. 함께 즐기다 해진 뒤 관청으로 돌아왔다. [24]

3월[임진년]

몸이 불편하여 아침 내내 누워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28]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30]

4월[임진년]

5월[임진년]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39]

➜ 탄환이 등을 관통했는데도 저리 담담히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6월[임진년]

새벽도 되기 전에 출항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하였다. [42]

서풍이 차겁게 부니 , 나그네의 심사가 화평하지 않았다. 이 날은 꿈자리도 몹시 어지러웠다. [43]

새벽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드디어 좋은 것이었다. [43]

큰 적(왜적)이 각 도에 가득하니 무고하게 당한 백성은 몇 십만 명인지 알 수 없지만, 모두 그 독해(毒害)를 입었습니다. 종사(宗社)와 도성(都城)도 보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면 애통함이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과 같습니다. [45]

계사년1593년

바다와 맹세하니 어룡이 느끼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네, 한산도 군영에서 쓰고 칼에 새김. 여해 [50]

2월

종일 비가 내렸다. 배의 뜸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61]

➜ 안으로 들어가 쉬지 않고 배에 앉아 있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긴장감을 어떻게 견디며 살았을까...

3월

임금님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가고 백성은 짓밟히고 살육을 당했으며, 연이어 삼경(三京)이 함락되고 종사(宗寺)가 폐허가 되니, 오직 우리 삼도수군은 의리를 떨쳐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는 이가 없건만 기회가 알맞지 않아 뜻한 바램을 펴지 못하였다. 이제 다행히 명나라 조정이 천아 대장군 도독 이여송을 파견하여 10만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왜적을 소탕하여 멀리 쫓아내고 이미 삼도를 회복하였다고 하는 바, 신하된 자는 너무 기뻐서 날뛰며 무어라 말할 바를 모르고, 또 죽을 곳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67]

더위가 혹심한데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근심과 걱정이 과도하니 그 병환의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그리운 마음 담아두기에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69]

가뭄과 더위가 이렇게 심하여 강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더욱 적을 도와주게 되었으니, 드디어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은 촛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이며,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72]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이 지금의 급무이지만 몸의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때면 다만 스스로 눈물을 드리울 뿐입니다. [74]

낮이나 밤이나 시름하느라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입니다. 다만 더욱 사또께서 한번 실수를 과오라 여기지 마시고 회복을 도모하는 계책을 장구히 생각하여 빨리 종사(宗社)[종묘와 사직]를 되찾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李), 백(白) 두 장수의 [충성된] 죽음은 모두가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兵家)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75]

교전할 때에 격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뛰어들다가 거기서 적의 탄환을 맞은 것이 매우 컸습니다.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그 뒤로 연일 갑옷을 입고 적과 싸웠으니, 탄환 맞은 구멍이 헐어 뭉그러져 고름이 흘러 나와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연일 밤마다 씻어도 아직 차도가 없고, 여러 날을 치료했어도 아직 신속하게 진군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근심스러울 따름입니다. [78]

➜ 상처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데도 연일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그는 진군데 대한 근심만을 하고 있다. 나는 그저 이런 생각만 든다. 내 몸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데 다른 이에게 자리를 넘기고 싶지 않았을까?

(...) 어깨뼈를 깊이 다쳐 아직도 활시위를 당길 수 없으니 장차 몸을 버리게 될까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78]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라 일에 있어서는 어찌 하오리까.[82]

5월[계사년]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祝壽)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84]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89]

어찌 세상사가 이리 가혹한가. 장사는 누가 맡아서 치렀을까. 대진(大進)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 더 애통하다. [89]

종 목년(木年)이 해포에서 왔는데, 이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답장을 써서 미역 5동과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90]

➜ 종의 이름도 빼지 않고 적는 그에게서 세심함이 느껴진다.

비가 내려서 사람들의 바람을 크게 흡족 시켰다. [92]

수사 원균이 경략 송응창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기에 병사의 공문을 통해서 나누어 보내라고 하니까, 그는 공문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많이 했다고 한다. 가소롭다. 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무기인 화전(火箭)1,530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한다니 그 잔꾀가 심하여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97]

저녁에 조봉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할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부터도 그러하니 어찌하랴! [97]

6월[계사년]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을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02]

➜ 흰 머리카락을 뽑으면서도 어머님을 생각하는 그에게서 그의 효심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해본다.

소문에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 하지 참으로 불쌍하다. [103]

제삿날이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105]

7월[계사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110]

남해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분탕(焚蕩)질 당했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으니 뼈속까지 아파와 말을 할 수 없었다. [113]

이 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13]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116]

8월

이날 밤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회포를 견디기 어려웠다. [126]

9월

해가 저무니 답답하고 열이 나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바람을 많이 쐬어 머리가 몹시 아플 것 같다. 걱정스럽다. [130]

칼날 휘두르며 이르는 형세가 비바람과 같으니 흉도의 남은 넋들도 달아나 숨고, [...]

척검(尺劍)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없네.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 렇게 하리라. [138]

한창 명나라 군사의 거마소리를 기다리느라 하루를 1년같이 여겼지만, 적을 쳐서 무찌르지 않고 화친을 위주로 하여 우선 흉악한 무리를 퇴각만 시키고 우리나라가 수년 동안 침입 당한 치욕을 씻지 못했으니, 하늘에까지 미친 분함과 부끄러움이 더욱 간절하다. [138]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어서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39]

유기(劉錡)는 문에 땔나무를 쌓아두고는 파수꾼에게 경계하기를, “설령 □하지 않아 곧 우리 집이 불태우는 일이 있을지라도 적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139]

갑오년 1594년

1월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141]

어머니께 가서 뵈니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143]

아침식사 후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 고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143]

원수사의 군관 양밀(釀蜜)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말안장, 해산물, 귤, 유자 등을 가지고 왔기에 바로 어머니께 보냈다. [148]

몸이 불편하여 저녁에 누워서 신음했다. 큰 바람과 파도로 배들이 안정되지 못하여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149]

2월

새벽꿈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며 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다. [152]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154]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며 애쓰는 일을 들으니 감개함과 그리움이 끝이 없다. [156]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싸움이 평정될 리가 만무하다. 천장만 쳐다 볼 뿐이다. [158]

암행어사 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눈앞의 임시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고 변명하는 말만 들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秦檜)가 무목(武穆)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158]

3월

봉은 몹시 아파서 돌아간 것이니 밤새도록 걱정을 하였다. [168]

4월

혼자 배 봉창 아래 앉아 있었으나 저녁 내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172]

➜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늘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텐데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답답한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

곤양군수가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마구 해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173]

5월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침침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도 같기도 했다. [176]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수많은 우리 배들이 바다에 깔려 있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만하다. [176]

비가 종일 걷히지 않았다. 아들 회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176]

저녁에는 큰 비가 내려 밤새도록 지붕이 새어 마른 데가 없었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하는데 고생스러울까봐 매우 걱정되었다. [177]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179]

활을 쏘며 하루 종일 술에 취하고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180]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180]

6월[갑오년]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할 때 마음이 아득도 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저녁 바람이 몹시 사나워져서 걱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183]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편지에는 면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 [184]

7월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염려하여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정승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무척 좋았다. [191]

이별주 7잔을 마신 뒤 뱃줄을 풀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 번 세 번 아쉬운 뜻을 보이며 전송하였다. [194]

8월

초하루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부안 사는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버렸다. [198]

저녁에 피리를 불고 노래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는데, 미안한 일이 많았다. [202]

9월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구나. [204]

10월

11월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226]

무제시(無題詩)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며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느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요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郭子儀)를 사모하네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며 잠 못 이룰 적에,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찢긴 듯

쓰라린 가슴은 살을 에는 양,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린 듯,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양, 산하가 참혹한 빛을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우누나, 태평세월 2백년에, 화려한 문물은 3천모양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평정을 맡길 인재 없네, 여러 해 방비 할 계책 세우노라니

중원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郭子儀)를 사모하네 [233]

을미년[1595년]

정월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239]

➜ 너무나 많은 것을 믿고 같이 추진할 사람 없이 혼자 해 나가기엔 그것이 주는 중압감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 중압감으로 인해 그는 자주 아플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2월

3월

4월

여러 가지 장계와 단오절의 진상품을 봉해 올렸다. [255]

5월

오늘이 어머님의 생신인데, 몸소 나아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가슴에 품은 생각을 어찌 다 말하랴. [259]

혼자 대청 가운데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배영수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260]

➜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서 온갖 생각을 정리하며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이순신을 그려본다. 마음이 답답하다. 뭐하나 시원스럽게 되는 것이 없다. 거문고 소리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을 지도 모르나, 그도 잠시 뿐이다.

6월

오늘이 권언경[권준] 영공의 생일이라고 해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몹시 취했다. 거문고 소리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270]

7월[을미년]

혼자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둘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71]

8월[을미년]

9월[을미년]

우수사와 경상우수가 함께 와서 이별주를 같이 나누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선수사[거이]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하더니,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오늘 밤 달빛 아래 한잔 술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료 [287]

홀로 배 위에서 온종일 앉았다 누었다 하였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289]

10월[을미년]

일찍 다락방으로 올라가 종일 공사를 감독하였다. [291]

저녁에 달빛을 타고 우수사 이억기에게 가서 전별했다. [291]

11월[을미년]

아버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그리워하니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달랠 길 없다. [296]

동짓날이라 새벽에 임금께 하례하는 숙배를 올렸다. [297]

병신년 1596년

1월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흥수를 불러서 글 읊조리는 소리를 듣다가 밤 10시경에 잠들었다. [308]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또 여벌로 옷 한 벌씩 더 주었다. [311]

순찰사가 나와 함께 활쏘기를 겨루다가 7푼을 졌는데, 섭섭한 기색이 없지 않았다. 우스웠다. [312]

2월[병신년]

이날 밤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318]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봄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노곤하였다. [318]

3월[병신년]

몸이 노곤하고 땀이 흐르니, 이것은 병이 날 원인이다. [323]

아침에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매었다. [328]

4월[병신년]

5월[병신년]

이 날은 어머님의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을 한 잔도 올리지 못해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가지 않았다. [339]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생각에서였다. [340]

울과 김대복이 같은 배로 나갔다. 비가 크게 쏟아졌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 걱정했다. [340]

6월[병신년]

7월[병신년]

아침 식사 후에 경상도의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같이 이야기했다. 한참 뒤 새 정자로 올라가 앉았다. 편을 갈라 활을 쏘는데, 경상순찰사편이 162점이나 졌다. 하루 내내 매우 즐겁게 지내다가 불을 켜들고 돌아왔다. [351]

➜‘즐겁게 지내다가’. 그래도 다행이다. 많은 걱정들을 내려놓고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끔이지만 가질 수 있었기에.

어둬질 무렵 항복해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354]

이날 저녁 바다의 달빛이 하도 밝아서 혼자 수루 위에 기대었다. 밤 10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355]

이날 아들 회가 방자[하인] 수에게 곤장 쳤다고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로 불러다가 잘 타일렀다. [356]

8월[병신년]

이날 늦게 송희립과 아들들을 시켜 이름이 기록된 황득중, 김응겸에게 허통(許通)하는 증명서를 만들어 주게 했다. [360]

늦게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몰랐다. [361]

어둬질 무렵 달빛은 비단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 갈래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363]

아침에 우씨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지낼 물건을 약간 보냈다. [363]

식사 후에 활터 정자에 가서 아들들에게 활쏘기를 시키고 말달리면서 활 쏘는 것도 연습시켰다. [365]

윤(閏) 8월[병신년]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렸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드렸다. [369]

9월[병신년]

나라제삿날[세조의 제사]이라 아침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올랐으나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373]

아침식사 후 영광에 가다가 도중에 신경덕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덕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내월산도 와서 만나고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누워서 자는데 어찌됐든 좋았다. [374]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내 옷을 벗어주었다. 종일 이야기했다. [375]

10월[병신년]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하루 내내 어머니를 모셨다. [379]

정유년[1597년]

한산도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을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382]

4월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387]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바랄 뿐이다. [388]

➜ 억울하게 잡혀 들어가 옥고를 치르고, 어머님의 상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다시 또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그의 마음이 감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5월[정유년]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닭이 울 때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394]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4]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 는 것이리라. [401]

➜ 돈으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나보다. 그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씁씁한 마음이 든다.

6월[정유년]

이날은 여필의 생일인데 혼자 변방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408]

늦게 승장 처영이 와서 보고 부채와 미투리를 바치므로 다른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410]

오늘은 보름인데 몸이 군중에 있어서 영위를 베풀고 곡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을 어찌하랴. [411]

7월[정유년]

오늘은 곧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영에서 복무하고 있으니 인간사가 어찌 이러한 것인가. [419]

새벽에 앉아 있느니 싸늘한 기운이 뼈 속에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 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419]

이 밤은 달빛이 대낮 같이 밝아서 어머니를 그리는 슬픔으로 울다가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루었다. [421]

➜ 시원하게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울음을 삼켜가며 우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분노는 철저히 배제하지만 그래도 슬픔을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표현할 수 있었기에 그가 버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새벽에 열과 변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구례에서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된다. [421]

열이 어떻게 갔는지 염려하는 마음을 견디기 어렵다. 더위가 극심하여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422]

8월[정유년]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430]

9월[정유년]

이 말을 비록 다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므로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어 피난민들을 즉시 육지로 올라가도록 일렀다. [439]

10월[정유년]

아,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이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했던가. 대저 신화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宗社)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균[3만근]을 매단 것과 같아서, 이는 바로 신하된 자가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떠난다는 말은 진정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떻게 입 밖에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쇠함 몸으로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되 일의 형세가 여기까지 왔으나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 주장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화친]을 따라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일을 낱낱이 꾸며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길을 구한다면, 혹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않고 떠나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내맡기고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할 수 있겠는가. [445]

속(屬) 정유년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448]

8월

점심 식사 후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곳에 이르니 길가에 노인들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452]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452]

거짓말을 한 두 사람의 목을 베어 매달아 널리 보이게 하였다. [455]

9월[속 정유년]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의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460]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형세가 장차 어찌될 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고 하였다. [461]

➜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는 어찌 이와 같은 인물을 역사 속에 묻어두려고 했던 것일까?

10월[속 정유년]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70]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470]

➜ 자식을 앞세우고도 마음 놓고 한번 울지도 못하는 아비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읅까?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을 추슬러가며 전투에 임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때를 두르고 있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470]

어두울 무렵 코리를 한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이제는 죽은 혼령이 되었으니 불효를 이토록 저지를 줄을 어찌 알 것인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수가 없었다. [471]

➜ 제대로 쏟아내지 못하는 감정들이 몸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저 앉아서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그도 때로는 세상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바람이 몹시 차가워 뱃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마음 놓이지 못했다. [472]

11월[속 정유년]

아산의 집으로 편지를 쓰려고 하니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죽은 아들 생각하는 정을 누르기 어려웠다. [480]

12월[속 정유년]

오늘밤은 한 해를 끝마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486]

무술년 1598년

정월

9월[무술년]

10월[무술년]

11월[무술년]

부록·다른 문헌에 남은 이순신의 최후 기록

이날 밤 삼경(三更)[자정 경]에는 이순신이 배 위에서 꿇어앉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 라고 하였다. 축원을 마치고는 스스로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노량으로 진군하였다. [502]

적이 도독을 매우 급하게 포위하자, 공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리고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쓰러졌는데,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麾下)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 고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져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남민(南民)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수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적에는 남중(南中)[영남]의 선비들이 제문(祭文)을 지어와서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계상[고을 경계 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503]

3. 현씨[현덕승]에게 보내는 편지

이 혼매한 자는 구차하게 세월만 끌면서 천지에 울부짖고 오직 스스로 피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선산이 가까이 있어 심정은 조금 놓이지만, 이로부터 죽게 된다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509]

저는 날마다 공무를 일삼아 눈살을 펼 겨를도 없으니 스스로 가엽게 여긴들 어찌하겠습니까. [512]

길이 멀지 않으니 혹 왕림해주시어 저의 산더미 같은 일들을 한번 엿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의자의 먼지를 떨어 신선을 환영할 따름입니다. [512]

꽃과 버들의 계절과 단풍과 국화의 시절 중 어느 것이 가장 좋습니까? 저와 같은 속리는 분주하게 쉼 없이 일하느라 함께 구경할 방도가 없으니, 지난번 저에게 신선이 될 소질이 없다고 기롱한 것은 참으로 명답이셨기에 껄껄 웃었습니다. [514]

➜ 이 책에서 껄껄 웃었다는 표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농담도 즐길 줄 아는 때로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겠지...

3. ‘내가 저자라면’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일기이기는 하지만 뭐 이런 것 까지 쓰나 해서 안 쓰는 것들도 세세하게 꾸준히 적어 놓으면 그것이 쌓이게 되어 나의 역사가 되어 주겠구나 라는 생각을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성웅 이순신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과 고뇌를 드러낸 난중일기에서 우리는 인간적이고 때론 연약함 마저 느끼게 되는 여린 감정들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이순신을 만나게 된다. 바쁜 공무 와중에도 한시도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일기로 대신 표현하고, 모함으로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의를 보여주고 있다.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하면서 선조에게 올리는 전과보고에는 이름, 직책, 역할, 부상정도 등을 자세히 보고하고 있는데, 싸움에서 죽거나 다친 천민들의 이름을 적어서 임금에게 보낸다는 것은 당시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적 앞에 한없이 용맹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온순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가 김훈은 한 강연에서 "해군총사령관을 잡아다 고문하고 계급장을 떼고 무등병(無等兵)으로 전쟁터에 나가라고 내보냈는데 이순신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장계나 일기 어느 곳에도 불만을 한 자도 적지 않았지요. 그 침묵으로 정치권력보다 더 위대한 인간, 완성된 인간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옥문을 나와 일기를 썼을 때 그는 어떤 분노나 억울함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하루, 하루 일어난 사건들을 써내려갔을 뿐이다. 그 침묵이 있었기에 죽음을 삶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옥문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전쟁터에서 아끼는 막내아들을 앞세우고 나서도 흔들리지 않고, 삶에서 한 인간으로서, 전쟁터에서는 많은 장병들을 이끄는 장군으로서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보완점
 
일기만으로는 유추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부분에는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한 설명을 달아주면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이 문초를 겪고 옥문을 나오게 되는 날 같은 경우에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됐는지 알게 된다면 책의 이해를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일기의 많은 부분에서 원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데 원균에 대한 인물 소개와 더불어 이순신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들어가면 더 좋을 것 같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라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연일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그 이상의 정보들도 쏟아져 나온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도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쟁터에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대상으로 어느 것이 나에게 유익하며 어느 것이 나에게 불이익을 줄지 가늠해야 하는 정보의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제대로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고 그것은 나에게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매일의 정보 안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취했으면 그런 것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예시들과 다양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많은 정보를 어떻게 걸러내서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을 취합해 같이 묶어보고 싶다.

IP *.139.1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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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6 06:03:11 *.109.24.41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매일의 힘이 <난중일기>를 탄생시킨 배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낙숫물이 모여 바위를 뚫고, 나무 위에 사뿐이 내린 눈이 쌓여 가지를 꺽기도 하지.
매일매일 열심히 수련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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