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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6일 20시 4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처음읽기에서 이순신에 대해서는 알아본 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이순신과 중요한 관계에 있었던 선조, 유성룡, 권율, 원균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선조(1552~1608)

 
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 바로 14대왕 선조였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생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받았던 봉작은 하성군으로 원래 이름은 균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친부인 덕흥군은 덕흥대원균으로 추존되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득세로 왕댜운 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던 명종에게는 순회세가 있었지만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명종은 왕손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는데 하성군을 총애했다고 한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조정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기묘사화 이후 물러나 있었던 인물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기 시작했다. 명종이 불러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퇴계 이황이 선조가 즉위한 다음 달에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로 인명되었고 조강조의 제자인 백인걸이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명종의 고명을 받은 이준경과 인순왕후의 아우로 외척을 대표하는 심의겸과 이종정랑 오건이 신진사림을 대표해 추천한 김효원이 대립하면서 선배사림과 후배사림의 분열이라 일컬어지는 동서분당이 이어졌다. 김효원은 서울의 동쪽에 있는 건천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동인(유성룡, 김성일, 이발, 이산해, 이덕산 등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음)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서쪽의 정릉에 살았기 때문에 추종세력을 서인(정철, 송익필, 윤두수, 신응시 등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많았음)이라 불렀다. 동서분당 이후 율곡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조정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실해하고 이이가 죽은 뒤로는 동인천하의 세상이 되었다. 동서분당 이후 일어난 최대의 옥사가 정여립 반역사건을 기화로 일어 났으니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기축옥사로 약 1천 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은 대부분 이발과 같이 선조의 실정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

 

1592년은 조선이 건국된지 200년이 되는 해였다. 200년간 조선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이러한 평화는 국방체계를 무너뜨리고 국력에 기울여야 할 에너지를 정권 다툼에 쏟아 붓고 있었다. 이때 16세기 후반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을 표병하고 1592 4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일본은 순식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궁궐이 있는 수도까지 올라 오고 있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명하고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았지만 신립의 패보를 접한 후 피난을 결심했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는 순간, 분노한 백성은 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을 방화하고 형조에 보관하던 노비 문서를 소각했다. 선조의 통치권을 사실상 마비되었고 한양과 개성에 이어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채비를 갖추었다. 의주로 가기 전 선조는 광해군에게 종묘와 사직을 받들도록 햇고 이후 광해군의 분조는 이로부터 16개월간 지속되었다.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무렵 육지에서는 의병이 봉기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이 해상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고 이에 명나라 지원군이 참전하면서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기세가 꺽인 왜군이 화의에 응하면서 전쟁은 2~3년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화의가 결렬되면서 1957년 도요토미는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였고 이순신이 재등용되어 명량해전에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도요토미가 사망하였고 1598 11 18일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완전히 패전하였다. 임진왜란 후 국가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조선은 원천적인 쇄신 없이 이어져 갔고 재배세력들은 기득권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경기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목릉 선조대왕릉.jpg
경기 구리시 선창동에 위치한 목릉 선조대왕릉

 

네이버 캐스트 선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321

 

서애 유성룡(1542~1607)

 

본관은 풍산, 자는 이현, 호는 서애, 시호는 문충으로 의성 출생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64(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 등을 거쳐, 156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문제로 서인 정철이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사,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력,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가 되어 <기효신서>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선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55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와 맞대결한 유시훈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배록> 등이 편서에 <황화집> <정충록> 등이 있다.

경북 안동시 풍천명 하회리에 위치한 유성룡의 종책인 충효당.jpg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위치한 유성룡의 종택인 충효당

 

네이버 백과사전 유성룡 http://100.naver.com/100.nhn?docid=122383

 

권율(1537~1599)

 

권율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금산군 이치싸움, 수원 독왕 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해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전공을 세웠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 모악, 시호는 충장이다. 1582년 신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고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전랑, 호조정랑, 경성판관에 이어 1591년 의주 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천 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 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착하여 지구전과 유격전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관 선거이에게 시흥 금주산을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 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국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권율 동상.jpg

 

네이버 백과사전 권율 http://100.naver.com/100.nhn?docid=24332

 

원균(1540~1597)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평중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가 되어 북방에 배치되어 여진족을 토벌하여 부령부사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천거되었으나 평판이 좋지 않다는 탄핵이 있어 부임되지 못했다. 159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침입하자 경상좌수영의 수사 박홍이 달아나버려 저항도 못해보고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가 퇴각했으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 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원군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5 2 20일만에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5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순신보다 경력이 높았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두 장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철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상당산성을 개축하였고 이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쳐들어오자 수군이 앞장서 막아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이를 반대하여 출병을 거부하자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기문포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안골포와 가덕도의 본진을 공격하는 작전을 투고 육군이 먼저 출병해야 수군이 출병하겠다는 건의를 했다가 권율 장군에게 곤장형을 받고 출병을 하게 된다. 그해 6월 가덕도 해전에서 패하였으며, 7월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래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은 재해권을 상실했으며 전라도 해역까지 왜군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승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에 추증되었다. 선조가 그를 선무공신으로 책록한다는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 교사는 보물 제 1133호로 지정되었다. 이 교서는 왜적을 격퇴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데 대하여 공을 기리고 포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있다.

경기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한 원균 장군의 묘.jpg
경기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한 원균 장군의 묘

 

네이버 백과사전 원균 http://100.naver.com/100.nhn?docid=120173

 

<난중일기> <칼의 노래>를 다시 읽으며 이순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궁금했다. 힘있는 신하를 두려워해 끊임없이 죽였던 무능한 군주였던 선조가 궁금했고, 이순신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유성룡이 궁금했고, 원균을 곤장을 쳐 전쟁터로 내 몬 노장 권율이 궁금했고, 난중일기에 가소로운 사람으로 숱하게 등장하는 원균이 궁금했다. 이순신과 이 네 명의 남자는 얽히고설키어 시대를 풍미했다.

 

서애 유성룡은 풍산 유씨다. (아는지 모르지만 탤런트 유시원이 유성룡의 13대 손이다.) 나는 문화 유씨 충경공파 38대손이다. 풍산 유씨는 문화 유씨에서 나왔다. 따라서 유성룡은 나의 먼 조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충무공이 더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유성룡 역시 당쟁에 휘말리고 전쟁의 와중에서 등용과 파직을 반복하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지만 유성룡은 이순신과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유성룡은 <징비록>을 남겼다. 기록의 힘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예전 내 글에 재수없는 인간으로 등장했던 모 팀원처럼 원균은 충무공의 일기에서 아마도 최다 등장인물이 아닐까 싶다. 원균이 나의 학창시절 단골 소풍장소였던 상당산성을 개축했다는 사실도 신선했다. 유성룡과 이순신, 원균, 그리고 나가 하나의 줄고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또 한가지. 10여 년 전 결혼 허락을 받을 당시 할아버지는 남편(능성구씨 판안동파 26대손)과 우리 집안이 혼일할 수 없는 사이라고 하시며 결혼을 반대하셨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서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있어 혼인하지 않는 집안이라 하셨다. 그때는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했는데 선조시대 동서분당에 대한 글을 읽으며 그 말이 근거있는 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우리 집안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 중기 선조시대 당쟁의 한 가운데에 있는 조상들의 얼굴을 보게 되지 않을까? 역사란 멀리 있지 않는 것이다. 나의 핏줄을 타고 면면히 이어져 항상 현재를 산다. 역사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탐구를 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싶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글을 시작하기 전에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이었다. 그는 단순히 군사를 호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쳐부순 무패의 장수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부하였던 이의 궁핍한 사정에 기꺼이 옷을 벗어 주고,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고, 부하가 다른 장수를 욕하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오랜 싸움에 몸져눕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난중일기> 친필 초고는 아산 종가가 보존해 오던 것을 현재 국보 제78호로 지정하여 아산 현충사로 옮겨 와 보관하고 있다. 이것은 정조 19(1795)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편집, 간행한 <이충무공전서>에 실렸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때 편찬자에 의해 편의상 붙여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친필초고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차이가 있다. 그것은 베끼는 과정에서 글의 내용을 임의로 요약하거나 실수, 의도적 누락과 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1545~1598)은 본관이 덕수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곤궁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흔히 이순신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아산은 이순신 어머니의 고향으로 이순신이 자란 곳이다.

 

이순신은 늘 걱정이 많았다. 그는 오랜 진중 생활 중 때때로 부하들과 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하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다. 전쟁 중이라 바다 위 생활을 오래 하고, 육지에 내려오기가 무섭게 배를 만들고 군비를 정비하고 틈틈이 둔전까지 경영하는 동안 이순신은 병이 끊이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배가 아프거나 구토, 설사, 식은 땀이 온몸을 적시는 일 또한 한두번이 아니었다. 때때로 잘 못 먹는 술에 흠뻑 취하여 고통을 겪는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일기를 읽다 보면 이순신이 점을 치는 장면이 많은 것도 드러나는데, 그가 점을 많이 치는 것도 힘들고 고독한 가운데 스스로를 위로받고자 했던 것 같다.

 

이순신의 용맹과 지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북 모양의 돌격용 전선은, 사실 조선 초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전래의 거북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으로 만들어 실용화한 것은 이순신이다.

 

1592(임진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이순신은 1591 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하였으며 이듬해 거북선을 완성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592 4월 마침내 우려했던 왜군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는 5월에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6월에 당포, 당항포에서 7월에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에 부산에서 연이은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이순신도 그 공으로 정2품까지 승진하였다.

 

1, 임진년의 아침이 밝아 오다.

 

P25 방답진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고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우후, 가수들이 또한 감독을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병선은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또한 짐작하겠다. 성 밑에 사는 병졸 박몽세는 석수장이인데 선생원에 쓸 돌 뜨는 데로 가서는 동네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2, 좌수영에 속한 다섯 진포를 순시하다.

 

3, 거북선 대포를 시험하다.

 

P34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게을리 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매를 때렸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와,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전했다. 매우 다행스럽다.

 

4,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다.

 

P39 밥을 먹은 뒤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팠다. 하루 내내 아픔이 계속되었고 또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5, 옥포에서 처음으로 적과 싸우다.

 

P45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군관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남해 현감과 미조항 첨사,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왜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죄다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12시경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작전을 짰다. 모두 기꺼이 싸움터로 나갈 뜻을 가졌는데 낙안 군수만 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했다. 한탄스러웠다. 군법이 있는데 설사 물러나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

 

P47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사부와 격군 가운데에도 탄환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

 

P48 적선이 있는 줄을 알고 이순신은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하였다.1)

è  충무공의 태산같이 무거운 명령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P52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므로 사정이 안타깝고 포로가 될 것이 염려스러워서 데리고 다니겠노라고 하였더니, 어머니와 아내를 찾아야 하므로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분하게 여겨서 서로 돌아보았다.

 

6, 다시 당포에서 싸우다.

 

P55 적의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였다. 배 위에는 누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됨직하였다.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가 퍼붓듯 마구 쏘아 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순간 모든 왜적이 놀라서 한꺼번에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 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남김없이 모조리 무찔렀다.

 

P59 그 가운데 나이가 대략 24,5세쯤 되어 보이는, 풍채가 건강하고 의복이 화려한 왜장이 칼을 짚고 혼자 서서 지휘 했는데 남은 부하 여덟 명과 함께 대항하면서 끝내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왜장을 향해 힘껏 쏘아 맞히니 화살을 10여 대 맞은 뒤에야 소리를 지르며 바닷물로 떨어졌습니다.

 

P64 그는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화살 맞은 상처가 깊어 말도 못할 정도여서 죄를 묻지 않고 곧바로 베었다.

 

방답 첨사 이순신도 왜의 큰 배 한 척을 잡고 왜적 머리 넷을 베었는데, 다만 활을 쏘아 죽이는 데만 힘쓰고 머리 베는 일은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P66 내가 수군을 학의 날개처럼 벌리고 앞서 나가며 경상 우수사는 뒤따라오게 하였다.

 

P67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2)

è  이순신의 백성에 대한 배려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8, 다시 부산으로 출정하다.

 

P73 여섯 군데로 나뉘어 진을 치고 우리를 내려다보며 총과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 댔다. 편전은 우리나라 것과 같고, 때로 큰 철환을 쏘기도 했는데 크기가 모과만 했다. 또 때로는 돌덩이를 던졌는데 크기가 주발덩이만 하였다. 여러 개가 우리 배를 맞추자, 여러 장수들이 더더욱 격분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다투어 뚫고 들어갔다. 천자포, 지자포와 그 외 여러 종류의 화살, 철환 등을 일제히 쏘면서 하루 내내 싸움을 벌였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P75 관사는 전부 헐어 버리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었는데 이미 그 수가 1백여 호나 되었다. 성 바깥 동쪽과 서쪽 산기슭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연달아 있는 것도 거의 3백 호였는데 이것이 다 왜인들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 차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중략) 전선을 수리하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한 다음에, 또 육전이 또 크게 벌어지는 날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네 차례 출전하고 열 번 싸워서 모두 다 이겼다. 그러나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따진다면 이번 부산 싸움에 비길 것이 아니다. 전날의 싸움에서는 적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왜적의 소굴에 4백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속으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내내 공격하여 적선 1백여 척을 깨뜨려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게 하였다.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하였다.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였다.

 

1593(계사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이순신은 1593년에 들어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시키고,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7월에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전쟁 물자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공에 힘입어 이순신은 8월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한산도는 그 뒤 1597년 파직될 때까지 그의 활동의 중심지였다.

 

2, 웅천의 적을 좇아 출격하다.

 

P84 그런데 전라 우수영 우후가 술주정하며 마음대로 지껄여 대였다. 그 짓이 입에 담을 바가 되지 못하니 어찌 모두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P87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원 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P88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덕 첨사의 탐색선 두 척이 섬 사이를 들락달락하였다. 그 하는 꼴이 황당하여 잡아다가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내었다. 그 본래 뜻이 군관으로 하여금 고기잡이 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P89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배를 덮는 누추한 뜸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3, 웅천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되고

 

P89 온갖 생각이 마음에 떠올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번잡하고 어지러웠다. 이응화를 불러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순천 부사가 탄 배에 보내어 병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이영남과 이여념이 와서 원균의 비리를 전하였다. 깊이 탄식할 따름이다.

 

5, 다시 경상도로 출격하다.

 

P93 간사스럽고 거짓말을 되풀이하는 놈의 말이라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바른대로 말하라고 엄하게 형벌을 내리며 캐물었으나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뜻이 매우 흉악하므로 팔다리를 찢고 목을 베었다.

 

P95 명나라에서 나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라는 작위를 주었다고 하나 아마 잘못 전해진 소문일 게다.

 

떠날 때 즈음 발포에서 도망갔던 수군에게 군법을 집행하였다. 병역에 관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순천 이방에게도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P97 피난 중에 계신 왕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로다!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한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3)

è  시름에 가득 차 뒤척이는 나약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 충무공에게서도 보인다.

 

P98 이 편에 피난 중인 왕의 사정과 명나라 군대가 하는 짓을 들었다. 애통하고 애통하였다!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영산령이 취하여 넘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니 우습다.

 

조금 지나서 윤동구가 그의 대장이 올린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왔다. 그가 속임수 쓰는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P99 고성 현령이 군관을 보내 문안하고 술과 쇠고기 꼬치와 꿀통을 보내왔다고 한다. 상중이라 받아 두기가 미안하였다. 그렇다고 정성으로 보낸 것을 되돌려 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닌 까닭에 군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배 안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 일찍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 네 알을 먹었다.4)

è  충무공은 평생 위염에 시달렸다고 한다. 강인한 체력을 가진 무관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모습을 <난중일기>에서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P100 여러 장수가 애써 권하여 몸도 불편한데 억지로 고기를 먹게 되니 매우 마음이 슬펐다.5)

è  주변의 권유에 억지로 고기를 먹으면서 슬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보인다.

 

P101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è  이순신은 원균이 어린 서출 아들을 전장에 데리고 다니며 공로를 세운 것처럼 보고했다는 장계를 상부에 올리게 되고 이로 인해 원균을 모함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한다. 성웅 이순신도 미운 사람을 못 견뎌 하는 인간이었구나.

 

P102 오후 2시쯤 명나라 관리 양보가 진 앞에 도착하였다. 우별도장 이설을 마중 보내어 배까지 데려왔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내 배에 오르도록 청하고 황제의 은혜에 여러 번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마주 앉기를 권하였으나 굳이 사향하고 앉지 않아서 서서 오랫동안 이야기하였다. 그는 우리 전함의 위용이 대단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예물을 주었더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받고는 매우 즐거워하면서 거듭거듭 고맙다고 하였다.

 

P104 원균이 송경락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고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 5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6월 한산도로 진을 옮기다.

 

P107 옥과현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

 

P108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하루 내내 배에 누워 있었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다. 사량 만호가 다녀갔다. 10시쯤 변존서와 김양간이 들어왔다. 행궁 기별이 들으니 동궁이 편찮다고 한다.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유정승과 지사 윤우신의 편지도 왔다.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 하니 참 가엾다.

è  어머니에 대한 효심, 실존적 고독, 인간에 대한 연민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7, 진주성이 함락되다니

 

P114 밤기운이 매우 서늘하여 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아 있으니 가슴속의 생각이 만 갈래나 되었다.

è  뜸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 중년의 외로운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P117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득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6)

è  하늘과 바다에 달이 둘 떠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뱃머리에 앉은 초로의 장군의 수염을 날린다. 그의 생각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고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은 새벽을 향해 달린다. 수사를 배제한 전형적인 무인의 문장이 대부분인 그의 일기에서 이런 문장은 우연히 찾아 낸 보물과 같이 반갑다.

 

P120 몸이 매우 불편하여 하루 내내 신음하였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P121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였다.

 

경상 수사와 우수사, 정수사가 함께 도착했다. 같이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했는데 원수사의 하는 말이 매우 흉악스럽고 속임이 있다. 이와 같이 사리 분별이 없으니 일을 같이 한다고 해도 뒷걱정이 없을까?

 

P123 사도 첨사가 매복을 섰을 때 사로잡은 포작 10명이 왜인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는 짓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다그쳐 물었더니 경상 수사가 시킨 것이고 하였다. 발바닥을 10여 대씩 때리고는 놓아주었다.

 

새벽에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을 얻을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8, 아들 염의 병을 걱정하며

 

P124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했다.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적의 형세는 벌써 사그라졌다고 말하며 서로 실정을 의논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꿈이 깼다.

è  이 꿈을 꾼 날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고 그 자리에 이순신을 임명했다.

 

원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이 어떠한지도 모른 데다가 적에 대한 소탕도 늦어져서 마음이 무거워 밖으로 나가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염이 아픈 곳에 종기가 생겨 침으로 찢으니 나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며칠만 늦었어도 치료하기 어려울 뻔했다고 한다. 놀랍기 그지없다. 이제는 조금 살아날 길이 있다고 하니 다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의사 정공의 은공이 참으로 크다.

è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엿보인다.

 

P126 몸이 몹시 불편하여 누워서 하루 내내 끙끙 앓았다. 식은 땀이 때도 없이 흘러서 옷을 적셔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늦게 비가 오다가 개다가 하였다.

 

P127 몸이 매우 불편하여 혼자 배의 뜸 아래 앉아 있으니 가슴 속에 품은 생각이 만 갈래로 일어났다.

 

달빛이 대낮 같고 물결이 비단결 같아서 가슴속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7)

è  이순신은 가슴 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일기에도 털어 놓지 못한 그의 마음이 궁금하다.

 

P128 원수사가 말하는 가운데 음흉한 일이 많았다. 그의 속임과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원균의 형제가 돌아간 뒤 천천히 노를 저어 진영이 이르렀다.

 

P129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측한 말을 마구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다.

 

원수사가 와서 흉악하고 속이는 말을 마구 하였다. 지극히 해괴하였다.8)

è  충무공이 원균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들을 읽으며 직장 다닐 때 나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 직원 생각이 났다.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공명정대하고 원칙에 입각해 모든 일을 처리했던 충무공마저도 그에 한 마음은 다스리기 힘들었나 보다.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P130 아침을 먹은 뒤 우수사의 배로 건너가서 하루 내내 이야기를 나눴는데, 원균의 흉악한 일을 들었다. 또 정담수가 근거 없는 말을 날조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소로웠다. 바둑을 즐기고 돌아왔다.

 

P131 저물 무렵에는 가슴 속이 답답하고 열이 나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바깥 바람을 쐰 탓에 머리가 몹시 아팠다. 걱정스럽다.

 

1954(갑오년) ,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3월에 당항포 등 싸움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에는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공격하여 거제 장문포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럼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1,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P140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셨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해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9)

è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도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 했을까? 귀한 아들을 치마 폭에 감추어 두고 사람들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P141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에서 모집해 왔는데, 이 편에 들으니 원수가 방해하려 했다고 합니다.”하였다. 우습구나,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함이 이러하니 한탄한들 어쩔 것인가!

 

2, 거제로 모여드는 적을 무찔러라.

 

P146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

è  정신분석학적으로 이 꿈을 분석한다면 이순신의 무의식에는 무엇이 잠재되어 있는 것일 것 궁금하다.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의 저자 박종평에 의하면 이 꿈은 이순신의 은폐된 정치적 욕망을 상징하는 꿈이라고 한다.

 

P149 바다 위에 뜬 달이 맑아서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인데,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물었다.

 

P150 밀지는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를 위해 수고하니, 내가 항상 잊지 않노라. 공을 세운 장병인데 큰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을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중략)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마움과 그리움이 끝이 없다.

 

그에게 전하기를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들어가서 치면,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합니다. 잠시 늦추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면 기회를 보아 완전히 무찌르도록 서로 작정합시다.” 하였다.

 

P151 흥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è  선조 집권시기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료에 의하면 선조는 고종과 함께 조선 왕 중 가장 무능했던 왕으로 꼽히는 자라고 한다.

 

P152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è  이순신은 특정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난중일기>에 솔직히 기술해 놓고 있다.

 

P153 몸이 불편하여 하루 내내 나가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여 하루 내내 끙끙 앓았다.

 

3, 당항포에 웅크린 적선을 불태우다.

 

P157 나는 심기가 매우 괴로워져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였다.

 

P158 몸이 매우 괴로워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문을 아래 사람에게 시켜 만들도록 하였더니 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수사에게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도록 하였으나 역시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내가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쓰게 하여 보냈다.

è  이순신의 완벽주의적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인 듯싶다.

 

병세에 별 차도가 없고 기운은 더 축나서 하루 내내 끙끙거렸다.

è  이 무렵 충무공은 전염병에 걸려 10일간 고생했다고 한다. 일기에는 초7일부터 23일까지 몸이 불편하다는 언급이 있다.

 

오후에 원수사가 와서 자기 잘못을 털어 놓았다. 그래서 장계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원사진, 이응원 등이 가짜 왜적의 목 베어 바친 대목을 고쳐 보냈다.

 

P160 다만 산소가 모두 들불에 타 버려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하니 슬프기가 이를 데 없다.

 

저녁에 우신과 봉이 같이 돌아갔는데, 봉이 몹시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걱정으로 밤을 새웠다.

 

4, 조방장 어영담이 죽다니

 

P162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이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P163 술이 세 차례 돌아가니 원수사가 크게 취해 주정을 하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마구 하니 순무어사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원수사) 하는 짓이 매우 흉악하였다. 삼가 현감이 돌아갔다.

 

P165 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하루 내내 고통스러웠다. 밤새 앓았다.

 

병세가 매우 심해져서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5, 바다에 더 있는 수많은 우리 배를 바라보며

 

P167 기운이 나아진 듯하였다. 침을 16곳이나 맞았다.

 

원수의 군관 병응각이 원수의 관문, 장계 초본 그리고 왕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겁을 먹고 도망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비가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10)

è  그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괴로웠을까?

 

새벽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았더니 수많은 우리 배가 온 바다에 깔려 있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오더라도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

 

6, 명나라 수군이 오다.

 

P172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에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è  왕의 분부에 장수들 사이의 화목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니다.

 

10시경 급창 금산과 처자 세 명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앞에 두고 부리던 자가 하루 저녁에 죽어 버리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è  이순신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듯싶다.

 

P174 밤이 깊어 해가 부는 피리 소리와 영수가 부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è  해와 영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무인일 가능성이 높다. 무인의 피리와 거문고 소리가 어떠할지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아침에 울이 본영으로 갔다. 헤어질 때 마음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었다. 오후 늦게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어대니 걱정이 앞서 마음이 더욱 무겁기만 하였다. 충청 수사가 왔기에 활쏘기를 하다가 같이 저녁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옥피리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11)

è  두 무인이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옥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P175 아내의 편지에는 면이 더위를 심하게 앓는다고 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7, 유성룡을 걱정하는 마음

 

P177 배응록이 원수가 있는 처소에서 왔다. 원수가 자기가 한 말을 뉘우치면서 보냈다고 하니 우스웠다.

 

P178 잔뜩 취하여 수루에 올라갔다.

 

하루 내내 궂은 비가 내렸다. 몸이 좋지 않아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P179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친다.

 

P180 순변사에게 유정승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비가 계속 내렸다.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정승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바다가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쳐 보았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좋았다. 저녁 내 비가 내렸다. 혼자 앉아 있노라니 외로운 심정을 이길 길이 없었다. (중략) 비가 갤 것인지를 점쳤더니, 뱀이 독을 내뿜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큰 비가 올듯하여 농사가 매우 걱정스러웠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배렸다.

è  이순신은 척자점을 쳤다고 한다.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의 저자 박종평의 견해에 의하면 그가 친 척자점은 네 면에 각각 1, 2, 3, 4를 새긴 하나의 나무 막대인 윤목을 던져 괘를 만들고, 괘를 찾아 길흉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척자점은 윷점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았지만 고서 <소강척자점>을 통해 독자적인 점법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점이 꼭 맞으니 절묘하다. 충청 수사와 순천 부사를 불러다가 장기를 두게 하고 그것을 구경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근심이 마음 한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조금이라도 편할 수 있을 것인가.

 

P184 점심을 들고 나서, 경상 원수사가 혼자 한 잔을 올렸는데 상은 매우 요란한데 집어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P186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머리를 풀고 통곡하였다. 이것은 매우 길한 징조라고 한다. (중략)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는데도 몸이 좋지 않았다. 밤에 꿈을 꾸었다.

 

8, 원수 권율과 만나다.

 

P187 초하루 한밤중 꿈에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해 보니 낳을 달이 아니므로, 꿈에서도 쫓아 버렸다. 몸이 좀 편안했다.

 

P190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이 없어서 바다는 잔잔하였다. 해에게 피리를 불게 하였는데 밤이 깊어서야 끝냈다.

 

P191 12시께 사천에 도착한 원수(권율)는 군관을 보내어 만나자고 청하였다. 나는 곤양 현감의 말을 빌어 타고 원수가 주둔한 사천 현감의 거처로 갔다. 교서에 절한 뒤 원수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오해가 많이 풀어지는 기색이었다. 원수가 원수사를 심하게 꾸중하니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가지고 갔던 술을 내놓으며 마시기를 청하였다. 여덟 순배를 돌리고 나니 원수가 많이 취하여서 그만 자리를 파했다.

 

P192 아침에 각 고을과 진포의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장흥의 군사 30여명이나 몰래 자신의 배에 싣고 도망친 죄로 흥양의 포작 막동이란 자의 머리를 베어 달았다.

è  <난중일기>에는 군령이나 규율을 어긴 자들을 엄히 다스리는 충무공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P193 도적 세 명 가운데 장손에게는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얼굴에 먹물로 도둑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è  어머니에 대한 근심은 자주 일기에 비쳤으나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나오는 듯 하다. 이순신은 본처인 상주 방씨로부터 아들 회, , 면과 딸 하나를 얻었고 첩인 해주 오씨로부터는 아들인 훈, 신과 딸 둘을 얻었다. 또한 부안 여인이라 언급하는 첩이 있었고 최귀지와 여진이라는 여인 또한 가까이 했다고 한다.

 

김양간이 서울에서 돌아왔다. 그가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화를 내는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수사의 일은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천년을 두고 한탄할 노릇이다.

 

9, 왕은 싸우지 않는다고 독촉하니

 

P194 앉았다 누웠다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촛불을 켜 놓고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서 아내의 병세를 점쳤더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 어떤지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것도 오늘 안으로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다.

è  다음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가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운이 몹시 약하다고 하니 매우 걱정이다.’ 척자점의 정확도 꽤나 높은듯하다.

 

P195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대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è  선조는 전란을 빨리 끝내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있었나 보다.

è  노승석이 옮긴 민음사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12) P219 : 이는 <손자의 모공편 3>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피리를 불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 자리를 파했는데 또 미안한 일이 있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닭이 운 뒤 머리가 가려워 견딜 수가 없어서 사람을 시켜 긁게 하였다.

 

P196 순천 부사가 진중에 있을 때 거제에 부하들을 사냥보냈는데 모두 적에게 사로잡혔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그 사정은 보고하지 않으니 매우 놀라웠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 그 사실을 지적하였다.

 

P198 혼자 앉아서 간밤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놈이 화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가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다.

 

P200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적을 토벌하는 점을 쳤다. 첫 점은 활이 화살을 얻는 것과 같다고 나왔고, 다시 점쳤더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나왔다.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10, 수륙 양군이 호응하여 장문포 적을 공격하다.

 

P202 아침 일직 선봉 부대를 장문포 적의 소굴에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다 꽂아 놓았는데, 거기에는 왜국이 명나라와 바야흐로 화친하고자 하니 싸울 필요가 없다고 쓰여있었다.

 

P203 새벽에 꿈을 꾸었다.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구멍이 여섯 개가 있는 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으며, 말을 전해준 자는 이름이 김서신이라고 하였다.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

 

11, 항복한 왜인을 훈련시키다.

 

P208 저녁에 윤연이 그 누이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거짓된 말이 많아서 가소로웠다. 버리고자 하여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부모가 죽은 후에 남은 자식들이다. 남은 아이 셋은 끝내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밤에 달빛이 대낮같이 밝아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뒤척뒤척거리다가 밤을 새었다.

è  아이를 키우는 아비로 부모가 죽은 후에 남은 자식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보인다.

 

아버지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으니 슬픈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P209 새벽 꿈에 이일과 만났다. 내가 말을 많이 하였는데 국가가 위험한 때를 당하여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면서 어찌 보답할 마음은 가지지 않고, 음탕한 여자를 거느린 채 관사에는 들어가지 않고 성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각 고을과 진포의 수군에게 육전에서나 쓸 군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 또한 무슨 이치인가?”하였다. 순변사는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를 캐고 일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è  이순신은 청렴과 절제를 상당히 중요한 가치로 여기로 있는듯하다. 특히 여색을 탐하는 관리에 대해서는 매우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는 대목이 많이 보인다.

 

1595(을미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전쟁은 뜸했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였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령을 준비하고 배와 무기를 만들고 개비하였다. 활쏘기를 하면서 단련하기도 하였다. 아직 웅천 등지에 웅크리고 있는 적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였다. 그런 중에도 견내량 등지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1, 나라와 여든 살 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P213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밤새 온갖 생각이 떠올라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P216 장흥 부사가 찾아왔는데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이 하는 짓이 아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쓴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2, 둔전을 경영하여 군량에 쓰다

 

P217 저물녘에 임금의 분부를 받았는데, 둔전을 잘 살펴서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도양에 있는 둔전의 조세 3백석을 실어 와서 각 진포에 나누어주었다.

è  전쟁이 길어지면서 둔전 경영을 통한 군량의 확보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듯하다.

 

P219 우수사, 장흥부사, 신조방장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들은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전하였다. 놀라울 따름이다.

 

원균이 포구에서 교대하려고 도착하였기에 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라고 하였는데 불평하는 기색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여러 번 타이른 뒤에야 억지로 행하였다고 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

 

3, 풍신수길이 바다를 건너오려고 하다

 

P220 사도시 주부 조형도가 와서, 좌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항복한 왜적이 보고한 내용을 전하였다. 내용은 풍신수길이 침략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끌어 모아 부산포에 진영을 설치하려고 3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고 한다.

 

P221 그에게 들으니 전 충청수사 이순신이 군량 2백여 섬을 감춘 일이 조도어사 강첨에게 들키는 바람에 붙잡혀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또 새로 부임한 충청 수사 이계훈이 배 위에서 실수로 불을 냈다고 한다.

 

수사 이계훈이 실수로 불을 내고는 자신을 물에 빠져 자살하고, 군관과 사공 모두 1 40여 명이 타 죽었다고 하였다. 놀랍고도 놀라웠다.

 

P223 저녁부터는 몸이 매우 불편하였다. 닭이 울 무렵에야 잠시 열이 내리고 땀이 흐르지 않았다.

 

10시경 동쪽이 어둡다가 갑자기 밝아졌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4, 웅천에는 아직 왜적들이 웅크리고

 

5, 왕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크다

 

P229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다. 직접 잔을 올리지 못하고 먼 바다에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 속에 품은 생각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몸이 춥고 불편하였다. 심하게 토하다 잤다.

 

종 춘세가 실수로 불을 내어 10여 집이 탔다고 한다. 어머님이 살고 계시는 집에는 미치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스러웠다.

 

P230 새벽 꿈자리가 아주 어지러웠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소식을 듣지 못한 지가 벌써 이레나 되어 몹시 마음이 탔다. 아들 해가 잘 돌아가긴 했는지 모르겠다.

 

P231 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는 평안하시지만, 아내가 불이 난 다음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았고 담과 기침도 심하다고 한다. 매우 염려스러웠다.

 

P232 아침에 나가 공무를 보고 있자니 항복한 왜인들이 와서, 동료 왜인 산소가 아주 흉악한 일을 하므로 베어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è  <난중일기>에는 항복한 왜인에 대한 언급이 간혹 보인다. 이들 간에 갈등도 꽤 있었던 듯 보인다.

 

P233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6, 강화가 결정되었다니

 

P235 몸이 매우 불편하여 누웠다 앉았다 하며 신음하였다.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 한다. 걱정스럽다.

 

새벽에 울이 들어왔는데 어머니의 병환이 좀 나아지셨다고 한다. 그러나 구순 노인이 이렇게 위독한 증세를 얻으셨으니 근심스러워 눈물이 흘렀다.

 

새벽에 경상 수사 배설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P237 혼자 수루에 앉아 있는데 잠깐 졸았다. 꿈속에서 아들 면과 윤덕종의 아들 운로가 같이 와서 어머니 편지를 전했다. 병세가 나아진 것을 알았다. 천만다행이었다.

 

P238 경상수사가 보러왔다. 오늘 이언경의 생일이라 한다. 그래서 국수도 만들어 먹고 술에 흠뻑 취하였다. 거문고 타는 소리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 무렵에 헤어졌다.

 

7월 거제의 적이 철수하다

 

P239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13)

è  노승석이 옮긴 민음사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P219’ 위태로운 나라를 걱정하는 충무공의 충심이 보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다. 슬픔에 젖어 생각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P240 경상 우병사에게 내린 유지가 다음과 같다. “나라에 재앙이 심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땅에 가득하고 하늘 끝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아직껏 요사스런 기운을 재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있어 고통스럽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군들 팔을 걷어붙이고 마음을 썩이면서 원수의 살점을 저미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대는 적과 마주하고 있는 장수로서 어찌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함부로 말을 늘어 놓았는가. 그대는 여러 번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적에게 아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 강화하자는 마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까지 그 말이 들어가게 하여 치욕을 남기고, 험담을 늘어 놓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군율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관대하게 용서하고 돈독하게 타일렀다. 그런데도 마음을 단정히 하기는커녕 고집을 더욱 심하게 부려서 스스로 죄 구덩이로 빠지니, 나는 매우 놀랍고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이에 비변사 낭청 김용을 보내어 내 뜻을 구두로 전하니, 그대는 마음을 고치고 후회를 남기지 말지어다.” 이를 보니 놀랍고 황송함을 이길 수가 없다. 김응서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만약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P241 10시쯤 바다의 달이 수루에 가득 차니 생각이 아주 어지러워 수루 위를 돌아다녔다.

 

몸이 매우 불편하였다. 늦게 우수사와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량이 떨어졌다는 말을 많이 하였으나 달리 계책이 없었다. 매우 걱정스럽다. 박조방장도 왔는데 술 몇 잔을 마시고 아주 취하였다. 밤이 깊어 수루에 등을 대니 초생달 빛이 수루에 가득 차서 갖은 생각을 이길 길이 없었다.

 

8, 제찰사 이원익과 만나다.

 

P242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 만호 송여종을 시켜서 죽은 군졸들의 제사를 지내도록 백미 두섬을 주었다.

 

P243 아침밥을 먹은 뒤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 수사와 두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눠 보냈다.

è  태구련이 충무공에게 만들어 바친 장감은 길이가 약 2m 되는 환도로, 한칼에는 삼척서천 산하근색다른 한 칼에는 일휘소탕 혈염산하이라 새겨져있다. ‘석 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는 뜻이다.

 

P245 몸이 불편하여 혼자 수루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만 갈래로 떠올랐다.

 

P246 하루 내내 여러 장수와 같이 술에 취하였다. 밤에 희미한 달이 수루를 비추어서 누워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를 읊조리며 기나긴 밤을 지냈다.

 

P247 제찰사와 만나 조용히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이 있는 것 같았다.

 

9,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며

 

P250 우수사와 여러 장수가 일제히 모였다. 본영 군사에게 떡 한 섬을 나누어 주었다.

 

비 오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P251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는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한산도 제승당 수루에 걸려 있는 현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14)

è  내가 유일하게 외우는 한시. 충무공의 외로운 마음이 느껴진다.

 

P252 혼자 배 위에 하루 내내 앉았다 누웠다 하였더니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10, 바람이 싸늘하여 잠 못 이루고

 

P254 아침 일찍 수루에 올라가서 일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수루 바깥 서까래에 흙을 올려 발랐다. 항복한 왜적들로 하여금 흙을 운반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11, 권준이 경상 우수사가 되다

 

P257 항복한 왜적들에게 술을 먹였다.

 

P258 항복한 왜적 여문련기, 야시로 등이 와서 왜인들이 도망치려 한다고 보고하였다. 우후에게 잡아 오도록 하여 그 가운데 주모자 준시 등 두 명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12, 다시 제찰사를 만나다

 

1596(병신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3월에 이순신은 당항포 싸움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 거제현 장문포의 왜군을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았다. 이는 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1, 왜적이 나올지 점을 치다.

 

P267 아침 일찍 항복한 왜인 다섯 명이 들어왔다. 항복한 까닭을 물으니 저희 장수의 성질이 포학하고 일도 너무 고됐기 때문에 도망 나와서 항복했다고 하였다. 그들이 가진 크고 작은 칼을 거두어 수루 위에 간직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부산에 있는 왜적이 아니고 가덕도에 있는 심안둔의 부하라고 하였다.

 

P268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어떨지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치니 임금을 뵙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좋은 괘라고 모두 기뻐하였다.

 

새벽 2시쯤 꿈을 꾸었는데, 잘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이 다 의관을 벗어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았다. 그러는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퍼부어서 계속 함께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재빠르게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빈다면 임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되풀이하여 걱정하다가 할 말을 잊었다. 이전에 영의정이 천식으로 몹시 편찮다고 들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글자로 점을 쳐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신홍수를 불러서 퉁소 소리를 듣다가 밤 10시쯤 잠이 들었다.

è  충무공은 음악을 즐겼던 것 같다. 거문고, 피리에 이어 퉁소도 등장했다.

 

P270 늦게 대청에 나가 공문을 처리한 다음 항복한 왜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P271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è  충무공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는 사람이었다.

 

2, 둔전에서 수확을 거두다.

 

P274 웅천 현감 이운룡이 손인갑과 좋아 지내던 여인을 데려왔기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 몇 곡조를 들었다.

 

P276 해가 질 무렵 영등 만호가 그 소실과 함께 술병을 들고 와서 마시기를 권하였다. 꼬마 아이도 함께 왔는데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

 

P277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15)

è  달 밝은 밤, 이순신의 외롭고 심난한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P278 밤에는 달빛이 대낮처럼 밝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너무 취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났다 누웠다 하면서 밤을 밝혔다. 봄철의 노곤한 증세가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봄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피곤하였다.

 

P279 새벽에 이곳의 왜인 난여문 등을 시켜 경상도 진에 있는, 항복한 왜인들을 붙잡아다가 목을 자르게 하였다.

 

P281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인가.

 

P282 몸이 좋지 못하여 밤새도록 식은 땀을 흘렸다.

 

3, 잦은 병으로 고생하다.

 

P282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가지 않았다. 기운을 차릴 수 없고 땀이 흐르니 이것이 병의 근원이다.

 

P284 아침을 먹고 우수사를 만나 잘못된 점을 다시 말하였더니 우수사는 모든 것을 사과한 다음 술을 내어 함께 마셨다. 잔뜩 취해 돌아오는 길에 이정충의 장막에 들렀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술을 마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è  술을 많이 드시고 난 뒤에는 땀을 흘리며 몸이 좋지 못하신 듯하다.

 

땀이 계속 흘렀다.

 

새벽에 땀이 흘렀다. 머리를 한참 빗었다.

 

P285 개가 같이 잤다.

è  는 누구일까? 이순신의 본가에 속한 종으로 보이는데 혹 여진이나 귀지처럼 여인은 아닐까?

 

때도 없이 식은땀이 났다.

 

아침을 먹은 뒤 노곤하여 잠깐 잠을 잤다.

 

P287 몸이 몹시 피곤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자정쯤 비가 많이 쏟아졌다. 낮에는 피곤해서 머리를 빗었다. 식은 땀이 한없이 흘렀다.

è  피곤할 때 머리를 빗어 긴장을 풀었나 보다.

 

P288 밤에 식은땀이 등을 흠뻑 적셨다.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몹시 좋지 않았다.

 

밤에 바다 위에 뜬 달은 희미하게 비치고 밤기운이 몹시 추워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하였다. 몸이 좋지 않았다.

 

아침에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매었다.

 

식은 땀이 옷과 이불을 적셨다.

 

초저녁에 곽란이 나서 한참이나 구토를 했는데 자정이 되어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몸을 뒤척거리다가 일어났다 앉았다 하였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매우 한스러웠다.

 

P289 방 밖에 나가서 산보를 하였으나 몸이 몹시 피곤하였다.

 

아침에 종 금이를 시켜서 머리를 빗게 하였다.

 

오전 4시쯤 몸이 편치 않아 금을 불러 머리를 긁게 하였다.

 

자정쯤 옷이 식은 땀에 흠씬 젖어서 갈아입고 잤다.

 

어두워지자 매우 피곤하고 때도 없이 식은땀이 흐르니 이는 분명 비가 올 징조다.

 

P291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 낮부터 식은땀이 옷을 적시더니 밤에는 두 겹으로 입은 옷을 다 적시고 다시 방바닥에까지 흘렀다.

è  식은땀이 옷 두 겹을 적시고 방바닥에까지 흘렀더니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리셨을고. 그의 오한이 느껴진다.

 

4, 왜가 철수한다는 소문이 돌다

 

P293 습열 때문에 침을 20여 군데나 맞았다. 속에서 마치 신열이 난 것처럼 가슴 속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하루 내내 방에 들어앉아 나가지 않았다.

 

P295 밥을 먹은 뒤 목욕탕에 들어갔다 나와서 여러 장수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è  24일부터 30일까지 7일간 매일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5, 장수들끼리 씨름을 하면서

 

P296 술이 몇 차례 돌고 나서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노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P297 몸이 몹시 불편하여 두 번이나 구토를 하였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가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여 하루 내내 누워서 앓았다.

 

P298 날이 어두워진 뒤에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잤다. 바다 위에 뜬 달은 매우 밝고 바람 한 점 없었다.

 

P299 수루에 기대어 혼자 시를 읊조렸다.

 

어머니께서는 안녕하시지만 음식을 전처럼 잡수시지 못한다고 하니 매우 답답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땀이 온몸에 배었다.

 

P300 10시쯤에는 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6, 더위 속에서 활 연습을 하다.

 

P301 새벽에 태어난지 대여섯 달 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를 직접 안았다가 도로 내려놓는 꿈을 꾸었다.

 

P302 왜의 조총 값을 주었다.

 

남도호 만호의 소실인 목표 사람이 허가의 집으로 뛰어들어가 투기 싸움을 하였다고 한다.

è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P304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같은 왜인인 신시로를 죽이자고 청하기에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7, 적은 도망가고 괴수를 잡아들이는 꿈을 꾸다.

 

P307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두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P308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è  항복한 왜인들에게도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음이 보인다.

 

P309 바깥 도둑을 없애기 못한 이때, 안에서도 도적이 일어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항복한 왜인 연은기, 사이여문 등이 흉악한 음모를 꾸며서 남여문을 죽이고자 했다는 이야기를 저녁 무렵에 들었다.

 

남녀문이 연은기, 사이여문 등의 목을 잘랐다.

è  항복한 왜인들간의 갈등이 심했었나 보다.

 

P310 밤 마음이 어수선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중까지 앉아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P311 종 경이 심하게 앓는다고 하니 매우 걱정된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영의정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었다.

 

8, 제찰사 이원익을 만나다.

 

P312 수루에 앉아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느라고 바람이 몸이 상하는 줄도 몰랐다. 늦게 대청에 나가서 활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만두고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거북이처럼 움츠러들기에 곧 두꺼운 옷을 입고 땀을 내었다. 저물녘에 경상 수사가 문병 왔다가 갔다. 밤에는 낮보다 곱절이나 아파서 끙끙 앓으면서 밤을 보냈다.

è  4일부터 16일까지 몸이 불편해 신음했다는 언급이 보인다. 육체의 괴로움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P314 어두워지자 달빛은 비단 같고 나그네의 생각은 만 갈래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16)

 

P315 새로 갠 하늘의 달빛이 하도 밝아서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10시쯤 가랑비가 다시 내리는 것을 드러누워 지켜보았는데 조금 있다가 비가 그쳤다. 땀이 줄줄 흘렀다.

 

8, 전라 일대를 돌아보다.

 

P319 하루 내내 노를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 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P321 원균이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

è  어떤 짓을 했기에 적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을까?

 

9, 순시를 계속하다.

 

P323 다시 말을 빨리 달려서 임치진에 다다랐더니 여덟 살 먹은 이공헌의 딸이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과 함께 보러 왔다. 공헌을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수경이는 누가 내다 버린 아이인데 이염의 집에서 데려다가 길렀다.

è  강인한 무인이지만 그는 한없이 약한 마음을 가진 것 같다.

 

P324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è  군색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는 사람이 이순신이다.

 

P325 최씨의 딸 귀지가 와서 잤다.

è  민음사 출판 <난중일기>에는 9 12, 14, 15여진과 함께 했다라는 언급이 있다. 김훈은 자신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여진을 관기로 등장시켜 이순신이 품은 여자로 그려냈다. 최귀지 또한 이순신의 여인인 듯싶은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10, 어머니를 모시고 즐겁게 지내다.

 

P327 아침 일직 어머니를 위해 수연을 베풀면서 하루 내내 매우 즐겁게 보냈다.

 

1597(정유년) 백의 종군에 나서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은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초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7월에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모은 전선 13척으로 9월 명량해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10월 고하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

 

4, 겨우 풀려났으나 어머님을 돌아가시고

 

P331 1일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 집에 이르러 봉, , ,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량 이순지가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술을 마셨더니 몹시 취하였다. 이순신도 술병을 차고 또 왔으므로 같이 마시면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의정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휘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술에 취하여 담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

è  풀려난 첫날의 일기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는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사실만 기록하려고 애쓴 듯싶다.

 

P334 해가 뜰 때 길을 떠나서 바로 아산에 있는 선영에 이르렀다. 그간 두 번이나 들불이 나 나무가 타고 말라 비틀어져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산소 아래에서 곡을 하며 절하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저녁 때가 지나서 외가로 내려가 사당에 절하고, 그 길로 큰 조카 뇌의 집에 가서 선조들의 사당에 곡하면서 절하였다. 또 들으니, 남양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저물어서야 집에 이르러 장인 장모의 신위 앞에 절하고 바로 작은 형님과 아우 우신의 부인 되는 제수의 사당에도 다녀왔다. 밤에 자리에 들었으나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P335 홍군우가 노래를 부르고 이 별좌도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즐겁지가 않았다.

 

P336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è  이순신은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나 보다.

 

P337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호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17) 곧 해암으로 다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늦게 어머니의 시신을 관 속에 모셨다. 친한 오종수가 맡아서 정성껏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못마땅한 점이 없으니 이는 다행이다. 천안 군수가 들어와서 상여를 준비하였다. 전경복이 매일같이 정성을 다해서 상복 만드는 일을 돌봐 주니 슬픈 가운데도 감사하여 무슨 말을 할것인가.

 

배를 끌어 중방포 앞에 옮겨 대어,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비오다. 하루 내내 비가 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빈도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P338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18)

è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다가 백의종군하는 것도 억울한진데 어머니를 제대로 떠나 보내지 못하는 아들의 마음은 어찌할까? 그의 울부짖음이 귀에 울리는 듯 하다.

 

P339 밤중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슬픈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P340 밤에 앉아 있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렀더니 원수가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또 안부도 묻는데 위문하는 말이 매우 극진하였다. 저녁에 이 고을 수령이 보러 왔다. 정사준도 달려왔는데 원균이 망령되고 못된 짓을 하였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문안하며 전하되 상중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회복 되는대로 나오라하였다. 그라고 또 이제 들으니 가까운 군관이 통제사 처소에 있다고 하므로 편지와 공문을 보내서 나오게 하여 거느리고 가서 수발하게 하라하면서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왔다.

 

5, 순천에서 백의종군을 하다

 

P341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에 울의 이름을 열이라고 고쳤다. ‘은 음이 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어서 글자 뜻이 매우 좋다. 늦게 강소작지가 보러 와서 울음을 터트렸다.

 

P342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다. 닭이 울 무렵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새벽 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 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냐? 통곡을 하더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또 남원의 추수 일을 감독하는데 대해서도 걱정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은근이 걱정하여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슬픔이 한결 더했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

 

저녁에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와서 흉악한 자가 저지른 짓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다.

 

아침에 정혜사의 승려 덕수가 미투리 한켤레를 바쳤으나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래도 따라다니면서 여러 차례 졸라 댔다.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사고는 그를 보냈는데 미투리를 정원명에게 주었다. (중략) 안괄이 구례에 갔을 때 수절을 하고 있는 조사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매우 놀랐다.

 

P344 새벽 꿈에 사나운 범을 때려 잡아서 껍질을 벗겨 휘둘렀는데, 이게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이것은 원수가 명령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와서 음흉한 원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많이 말하였는데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팔아 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겁탈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악을 쓰면서 말을 듣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하는 이야기도 전했다.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 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P345 장님 임춘경이 내 운수를 점쳐 가지고 왔다.

 

장님 임춘경이 와서 운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è  장님 임춘경은 충무공의 운수를 어떻게 점쳤을까? 노량해전에서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신홍수가 와서 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둔인데 천풍구로 변하였다. 용이 체를 이기는 것이어서 크게 흉한 징조다.

è  이 점의 괘대로 원균은 약 두 달 뒤 칠천량해전에서 참패 후 목숨을 잃는다.

 

P346 어젯밤 부찰사의 말이, 체찰사가 편지를 보냈는데 영공의 일에 대해서 여러 차례 탄식하였다고 한다.

 

바위 위에 올라가서 혼자서 한참 동안 곤하게 잠을 잤다.

 

P347 나의 행색이 낭패를 봐서 민망스럽다.

 

그가 아침에 술에 취해 날뛰니 매우 밉살스러웠다.

 

P348 밤이 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일찍이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그 속에 거북한 말이 많아서 마음 속으로 의심스럽고 그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또 말하되 음흉한 사람 원균은 무고하는 짓이 매우 많지만 하늘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하겠습니까?”하는 것이다.

 

또 과천 좌수 안홍제 등이 이 상공에게 말과 스무살 먹은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하였다. 본시 안홍제는 죽을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여러 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뇌물을 바친 다음에야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써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 온다.’는 것이리라.

è  현대와 다를 바가 없구나. 500년 전에도 이 땅은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세상이었나 보다.

 

P349 혼자 앉아 있자 어머님 생각에 슬프고 비통하여 견디기 어려웠다.

 

혼자 쓸쓸히 시골집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에 대한 슬프고 그리운 정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 길을 가기 어려워 엎어지며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 이정란의 집에 이르렀는데, 이 집은 문을 닫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집 뒤에도 기와집이 있어서 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집을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조금 뒤에 돌아왔다. 이정란의 집은 김덕령의 아우 덕린이 빌어 사는 집이었다. 나는 아들 열을 시켜 간청하여 겨우 들어가서 잤다.

è  백의종군 중 사람들에게 홀대당하는 충무공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6, 다시 초계로 옮겨 종군하다.

 

P351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주었으나 나는 종들에게 먹지 말라고 타일렀다.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여 이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

è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별하는 충무공의 모습이 보인다.

 

P353 조금 있다가 원수가 박성이 사직한다고 올린 글의 초본을 보여 주었는데, 박성은 원수의 처사가 소홀하다는 언급을 많이 하였다. 원수는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체찰사에게 글을 올렸다고 한다.

 

어려서 죽마를 타고 나하고 같이 놀던 서철이 합천 땅 동면 율진에 사는데,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보러왔다. 서철의 아이 때 이름은 서갈박지였다.

 

P354 아들 열이 곽란을 앓아 간밤에 내내 신음하여 걱정으로 속이 다 탔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열이는 닭이 울어서야 차도가 조금 있어 잠이 들었다. 아침에 한산도 여러 곳에 가는 편지 14장을 썼다. 경의 어미가 편지를 보냈는데, 지내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며 도둑이 또 일어났다고 하였다.

 

P355 늦게 승장 처영이 보러 왔다. 부채와 짚신을 바치기에 나도 다른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è  간혹 승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다지 우호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 것 같다. 최대한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보인다.

 

P346 오늘이 보름인데도 군중에 몸담고 있는 탓에 위패를 모시고 곡할 수가 없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P357 아들 열과 이원룡을 불러들여 책을 매어서 변씨 족보를 쓰게 하였다.

 

서늘한 기운이 들어와서 밤에는 더욱 쓸쓸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노라니 솟아나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침을 먹은 뒤 원수에게 갔더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여 주는데, 원균의 장계에는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다음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으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하였고,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직 안골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합니다. 수군 여러 장수들은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므로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라고 하였다.

è  원균은 이 일로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칠천량전투에 임하게 된다.

 

P358 원수가 원균에 대하여 통제사의 일은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소. 조정에 청하여 안골, 가덕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그럴싸하게 기대어서 싸우지 않으려는 뜻에 지나지 않소. 그래서 나는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를 독척하여 진격하도록 할 예정이오. 통제사는 내가 지휘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P359 새벽 꿈이 덕, 율온, 대 등이 보였다. 모두 인사하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아침에 초계 현감이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하였는데 오만한 빛이 역력했다. 그의 처사가 예를 잃었음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P361 새벽에 꿈자리가 매우 어지러웠다.

 

7, 우리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다니

 

P362 오늘 밤에는 가을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어머니에 대한 슬프고 그리운 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송득운이 원수의 진을 왕래하다 보니 종사관 황여일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듣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인데, 이렇게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비통한 마음이 갈수록 더하였다.

 

P363 빈방에 혼자 앉아 있자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생각과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것인 것.

 

꿈에 원균과 한자리에서 있는데 내가 원균 위에 앉아서 음식상을 받을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è  원균이 칠천량 전투 패배를 예견하는 꿈이 아닐까?

 

밤에는 달빛이 대낮같이 밝아서 어머니를 그리는 슬픔으로 울다가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일찍 아침을 먹은 다음 솟구치는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중략) 저녁에 혼자 빈방에 앉아 있었더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거렸다.

 

P365 혼자 빈방에 앉아 있으니 어머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겠다. 슬프고도 슬프다.

 

종 평세가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와서 열이 잘 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슬프고 한탄스러운 일이야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체찰사와 함께 한 곳에 다다랐더니 많은 실체가 널려 있기에 밟기도 하고 목을 베기도 하였다.

 

P367 달빛이 낮보다 훨씬 더 밝아서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늦게 변의정이라는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모습이 어리석으나 용렬해 보았다. 두메에 박혀 사는 사람이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또한 소박하고 인심이 후한 모습이다. 낮이 이희남을 시켜 칼을 갈게 하였는데, 아주 잘 들어서 적장의 머리를 벨만하였다.

 

P369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함께 와서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오전 10시께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어떻게도 의견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해안 지역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반가워하였다.

 

P371 모든 사람들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 이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눈병을 얻었다.

 

아침에 배설이 보러 와서 원균이 패하여 죽은 사실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P373 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도 없고 활도 없었다.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8,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P373 혼자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어머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è  충무공의 꿈은 미래를 예언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충무공은 다음 날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임금의 교지를 받는다.

 

P374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와서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교서에 절을 한 뒤에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P377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P378 저녁 때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치는 것을 보았으나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

 

P379 배설은 교서와 유서에도 예를 올리지 않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포구가 좁아서 해남 땅 이진 아래 창사로 진을 옮겼는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새벽 3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대변도 보지 못했다.

 

병세가 매우 위험해져서 배에서 머무르기가 불편하였다. 실제로 싸움터도 아니기에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아침을 먹을 때 당포의 포작이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 와서 잡아먹으려고 거짓으로 왜적이 왔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배를 굳게 매고 움직이지 않았고 그자들을 잡아 오게 했더니 과연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렇게 해서 군중의 인심은 안정시켰으나 배설은 벌써 도망쳐 버렸다. 거짓말을 한 두 사람의 목을 잘라 매달아 널리 보이게 하였다.

 

P380 배설이 보러 왔는데 두려워서 떠는 빛이 역력하였다. 내가 불쑥 말하기를 수사는 어디로 피해갔던 것 아니냐?”하고 캐물었다.

 

9, 명량 싸움으로 적의 기세를 꺾다.

 

P382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에나 맞겠으며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못 만난 것만을 한탄할 따름이다.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 하였다.

 

배의 뜸 아래 앉아서 괴로운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P383 꿈이 이상스러웠다. 임진년 크게 승리할 때의 꿈과 대체로 같았다. 무슨 조짐인지 알 수 없었다.

 

P385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19)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밤에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시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하였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에 군법에 줄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 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종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하였다.20)

 

10, 막내 아들 면이 죽다니

 

P390 아산 집이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P391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을 새웠다.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혼자 뜸집에 앉았으니 생각이 만 갈래로 일어났다. 10시께 식은 땀이 흘러서 몸을 적셨다.

 

P393 새벽 꿈에 우의정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략)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혼자 뱃전에 앉으니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뒤척거리며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게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è  이 꿈은 아들 면의 죽음을 암시하는 꿈인 듯싶다.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면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 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21)

è  <난중일기>중 가장 애절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보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더 할 것이다.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는 아비의 모습이 보이는듯하다.

 

P395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하였다.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하였으며 흰 띠를 매었다. 이 슬픔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새벽에 고향 집의 종 진이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통곡을 하였다.

 

P396 어두울 무렵에 코피가 터져 한 되 넘게 흘렸다. 밤에 앉아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이제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었다.

 

P397 10시께 땀이 나서 등을 적셨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P398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혼자 앉아 있었다.

 

10시쯤 식은 땀이 흘러서 몸을 적셨다. 방 온돌이 너무 뜨거웠던 까닭이었다.

 

11, 고하도에 진영을 마련하다

 

P399 나도 웅크리고 배 밑창 방에 앉아 있었더니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한 해를 지내는 것 같았다. 이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P401 밤 자정께 면이 죽는 꿈을 꾸고는 목 놓아 울었다.

 

새벽 2시쯤 꿈을 꾸었는데 물에 들어가 고위를 잡았다.

 

P402 군공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았더나 거제 현령 안위가 통정대부가 되고 그 나머지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았으며, 내게는 은자 20냥을 상금으로 보냈다. 명나라 장수 양 경리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다 붉은 비단을 걸어주고 싶으나 멀어서 갈 수가 없었다고 전하였다. 영의정의 답장도 왔다.

 

P403 아산 집에 편지를 쓰려하니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정을 누르기 어려워서였다.

 

12, 권도를 쫓아 나라를 구하라!

 

P405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다.

è  전쟁에서 용감하기 위해 고기 반찬을 먹으라는 왕명을 받은 이순신의 마음이 어찌했을까? 진정 비통하고 비통할 것이다.

 

P407 오늘 밤은 한 해를 끝마치는 그믐밤이어서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1958(무술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2월에 이순신은 다시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달았다. 7월에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이 내려와서 함께 연합 함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11월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1, 7년째 전쟁이 계속되다.

 

9, 명나라와 연합하여 적을 공격하다.

 

10, 명나라 제독 유정이 싸움을 회피하다.

 

P415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기를 유 제독이 달아나려고 합니다.”하였다. 분하다, 분하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11, 마지막 싸움 노량해전!

 

P416 왜선 두 척이 강화를 하자고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왔다.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맞이하여 붉은 기와 환도 등 물건을 조용히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11 17일 마지막 일기가 보인다. 18일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지 않았다면 일기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를 두 번째 읽으며 김훈의 <칼의 노래>와 박종평의 <이순신, 꿈속에서 걸어나오다>를 중간중간 함께 보았다. 김훈이 난중일기의 어떤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장면을 그려나갔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점과 꿈의 해석이 현실로는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아울러 이순신과 중요한 관계 속에 있었던 선조, 유성룡, 권율, 원균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조망해 보았다.

 

동서분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왜란 중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무능한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 이순신은 천거했지만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불신과 의심 속에서 노심초사했을 유성룡의 불안감, 전장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을 노장 권율의 고독, 그리고 자신보다 경력과 나이가 적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마음 고생한 원균의 마음이 느껴졌다. 정여립과 이몽학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과 힘있는 신하를 두려워한 선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김덕령의 이야기가 들렸다.

 

이순신의 리더십과 그의 충절과 기개에 대해서 조망해 보는 것도 좋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이번 주 칼럼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이순신이란 제목으로 풀어보았다. 신화, 역사, 자서전의 달을 넘어오면서 나는 내가 유달리 역사에 끌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역사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의 정신과 육체에 그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괴테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의 시대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역사 속에서 존재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틀어 버렸다.

 

하나의 테마를 정해 역사 속의 인물들의 생애를 탐구해 공통점을 찾아내는 과정도 흥미로울 것 같다. 내가 상상력이 뛰어나고 문장력이 좋다면 김훈처럼 역사의 인물을 소설로 극화하는 글도 써보고 싶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난중일기>를 남겼고 정경부인 남평 조씨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병자일기>를 남겼다. 병자읽기를 읽으면 당시 여인들의 생활상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역사는 기록한 자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글을 통해 역사를 조망해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난중일기>를 세 번째 읽게 되면 또 이순신의 어떤 모습이 보일지, 어떤 사람들이 내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올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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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희
2011.07.05 21:51:03 *.105.125.156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이순신 장군입니다.
나의 고향이 아산 현충사 부근이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고, 더욱 그 분을 존경하게 된 것은 KBS에서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김명민 배우)을 감명깊게 본 후입니다.

우리 웨버님도 충무공을 많이 존경하는 듯 보입니다.
명랑해전 출정 전에 연설하시는 부분을 나도 매우 좋아하는데, 지난 오프수업 때 웨버님이 발표하는 것을 들으니 더욱 새롭더군요.

우리 웨버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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