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미선
  • 조회 수 292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1년 7월 4일 02시 4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러셀.jpg
지식을 향한 그의 열정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지식 탐구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 반전주의자라고 불릴 정도로 현실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1차세계대전 당시 평화주의자로 활동했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내며 핵무기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16년 영국 캑스턴 홀에서 진행한 <사회 재건의 원칙>이란 강연을 통해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철학을 드러냈다. 왜 우리는 국가에 순종하는가? 왜 교육은 희망 찾기를 못하고 두려움 벗어나기에 바쁜 것인가? 돈은 인간 본성을 어떻게 왜곡하는가? 등 8회에 걸친 강연에서 그는 자칫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인간의 행동은 욕구보다는 충동을 억제하고 창조적인 충동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강연은 전쟁으로 불안해하는 지식인들과 영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러셀은 전쟁 이전에 겪었던 정치적 경험만으로 영국 국민들이 열정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충동이 심화되어감에 따라 갈수록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1915년 중반에 사회적, 지적, 정서적 행동은 파괴 혹은 소유의 충동이나 건설 혹은 창조의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셀에 따르면 건강한 사회에 이르는 열쇠는 가족관계, 교육제도, 정치제도를 창조적 충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러셀이 98세를 일기로 작고하기 몇 주 전까지 검토했던 원고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중과의 소통을 고민했던 거장의 지적 정열과 인류를 항한 애정을 담았다. 러셀은 수학과 철학뿐 아니라 과학, 역사, 교육,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70권이상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진지했고 확고한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전통을 계승한 러셀은 합리적 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논리학, 수학기초론, 인식론, 존재론 등 다양한 철학 분야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특히 논리학 분야의 업적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학은 이미 확고한 학문이어서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칸트의 예언을 일거에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기호논리학이라고 알려져 오늘날 대학의 교양논리학 시간에 널리 배우는 새로운 논리학의 틀을 세운 러셀은 자신이 생각했던 논리학의 방법을 전통적 철학의 문제에 적용하여 20세기 철학에 이른바 분석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 러셀은 전통적인 철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글을 남겼다. 인식론, 형이상학, 존재론, 윤리학, 종교철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교육철학 등 그가 다루지 않은 주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셀의 방대한 저작 목록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없는 철학적 주제는 미학에 관한 것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과학적 세계관과 논리적 방법으로 철학에 접근한 그에게 미학은 적절한 관심을 끌지 못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의 관심으로 많은 글들을 써냈지만 그에게 진정 철학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작업은 윤리학, 정치철학, 교육철학 같은 분야의 작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적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철학은 논리적 분석과 관계된 학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면 윤리 이론이나 정치 이론같이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다루어왔던 문제들은 대부분 철학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러셀이 윤리학을 철학이 아니라고 단정한 것은 아니지만 윤리학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이 다루는 문장들의 논리적 분석과 관련된 경우로 국한되었다고 보았다.

10대 청소년 시절에 이미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에 일상적 관심 이상의 진지한 관심을 지녔던 러셀은 수학의 확실성을 자신이 발전시킨 논리학을 통해 확보하려 했고, 더 나아가 논리적 분석의 방법을 모든 철학의 문제에 적용시켜서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이성적으로 확실한 토대를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러셀의 기획은 전통적으로 철학이라고 여겨진 대부분의 것을 철학이 아닌 것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와 칸트로 이어지는 지식의 확실한 토대를 확보하고 그로부터 철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했던 과거의 위해한 철학자들의 생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러셀은 케임브리지 동료였던 무어G, E. Moore와 더불어 20세기 영어권 국가에서 주도적인 흐름이 된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통할 공간을 폐쇄된 학문 공동체로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중요한 업적을 포함하여 그가 지닌 확고한 신념과 세계관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글로 담아내어 관심을 지닌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천재의 오만함이나 귀족의 도도함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나 글이 경박하거나 얄팍한 것 역시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러셀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게 해주는 것이며,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면모라고 하겠다. 진정한 학자가 지녀야 할 덕목인 학문적 진지함이 반드시 엄숙함일 필요는 없다. 러셀은 이미 100년 전에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학자로서의 엄숙함이라는 옷을 벗어버렸다. 논리학과 수학기초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저술이자 러셀의 주저 중 하나로 평가되는 <수학의 원리>의 방대한 원고를 집필하는 시기에도 그는 사회적 문제를 멀리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1928년에나 주어지는 여성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그는 1996년 여성참정권협회에 가입하여 이듬해 하원의원직에 첫 도전을 했다. 또한 논리적 방법론을 철학에 적용하여 인식론과 존재론 분야의 저작을 왕성하게 집필하던 1910년대 중반 전쟁이 터지자 그는 징집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5개월의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에 대한 러셀의 관심과 행동은 그의 실천적 관심이 한물간 노회한 철학자의 매명(埋名)행위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가 어려서부터 가졌던 확실한 지식의 추구에 대한 관심이 수학기초론과 철학에서 구체화된 거소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실천적 삶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이나 예부터 내려오는 권위에 의해 사람의 삶이 움직여서는 안 되며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행동과 실천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총리를 지낸 할아버지와 진보적 정치인이었던 아버지를 둔 훌륭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서 사회봉사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탄 투하로 인한 참혹상을 목격하고, 냉전으로 접어들면서 강대국의 잇따른 핵무장으로 인류 파멸의 위기를 느낀 러셀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아인슈타인이나 사르트르와 같이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과학자, 사상가들과 연대하여 반핵운동에 매진하기도 했고, 1962년 쿠바의 미사일 위기 때는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에게 평화로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전보가 아닌 휴대전화와 인터넷 등 통신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한 오늘날 러셀 수준의 영향력을 지닌 실천적 지식인이 있었다면 국제적인 분쟁 해결과 사회 정의에 얼마나 기여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철학사는 인간과 사회의 세계에 관한 진지한 착상을 솔직하게 주장하는 일과 그에 대해서 엄격하게 비판하는 일이 진행되어 온 역사이다. 그러므로 철학사의 마지막은 탈무드의 끝이 여백이듯이 언제나 현재의 생장점이게 마련이다. [6]

소크라테스의 생애로 상징되는 철학 정신은 이성을 토대로 한 행복의 보편적 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열렬히 추구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서양 철학사에서 진정 체득해야 할 요체는 바로 이 철학 정신이다. [7]

지은이의 말

우리는 어떤 철학자를 제쳐 버리기 전에 그 철학자가 정말로 주장하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철학자가 들인 노력에 비해서 얻은 통찰은 미미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9]

머리말

철학은 일찍이 그리스 사라들이 그랬듯이 순전히 가보고 싶어서 하는 탐색 여행처럼 오직 알고 싶어서 기도하는 지적 모험이다. [12]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물음이 많이 있는데, 이런 물음은 과학이 답을 내놓을 수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자기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즉석에서 내놓는 답을 기꺼이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물음의 답을 탐구하는 일과 경우에 따라서는 그 중의 어떤 물음을 제거해 버리는 일이 철학의 의무이다. [14]
➜ 어쩌면 철학도 그 시작은 각자 마음의 탐구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언제나 공감이란 격렬한 감정과 정열에 들뜨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본질이 카타르시스, 즉 감정을 정화시키는 일이라고 설명한 건 정곡을 찌른 말이다. [21]
➜ 어떤 현상에 대해 격렬하게 공감하게 된다면 그럴 수 있는 원인은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을 통해 그때의 감정이 해소 될 수 있으니 감정을 정화시킬 수 있겠구나.

“이론”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어원이 애초에는 오늘날의 “관광”과 비슷한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헤로도투스는 “이론”이란 말을 이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격렬하면서도 순수한 호기심-즉 열정적으로 공평무사한 탐구에 몰두하는 마음-이것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21]
➜ 이론이라는 말이 관광과 비슷하다는 것은 관광하듯이 두루두루 호기심가는대로 살펴보다 한 곳에 몰두하다 보면 어떤 이론이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에서 일까?

철학에서 참으로 중요한 일은 답을 꾸며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물음을 제기하는 일이다. [29]

분별력이 둔한 자들을 업신여겨 조롱하면서 “말을 듣고도 귀머거리처럼 못 깨닫는 바보들에게는 말이란 저들이 있을 때 없다는 걸 증명해 주는 증거일 따름이다” 또한 “제 말과 글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을 가진 자들의 눈과 귀는 인간에 대한 사기꾼 증인이다”라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신랄한 어투로 경멸하고 있다. [36]

헤라클레이토스는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을 다해 많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 주려고 “금을 찾는 사람은 많은 땅을 파헤치고도 정작 금은 조금밖에 얻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일이 너무나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당나귀는 금보다 지푸라기를 원하게 마련이다”는 말로 깨끗이 처리해 버린다. 그렇긴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후세에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로 표현된 생각, 즉 사람은 알고 있는 걸 너무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로 예시하고 있다. “신은 인간을 어린애로 본다. 그것도 인간이 낳은 어린애로 본다.” [36]

그는 “숨은 조화가 노출된 조화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실제로 이루어져 있는 조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대립의 상태가 그대로 조화의 상태일 수 있는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건 활대와 활시위의 조화와 마찬가지로 서로 대립하는 긴장들의 조화다.” [37]

이 세계의 어떤 사물도 계속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사람은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새로운 물이 계속 흘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38]

비탈길은 그 길을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나에 따라서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된다. [38]
➜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이런 생각이 가장 또렷하게 표현된 진술들 중의 하나가 “선과 악은 하나다”라는 진술문이다. 이 말의 뜻이 선과 악은 그게 그것이라고 동일시해야 한다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이와 반대로 내리막길이 아닌 오르막길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악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선의 개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요컨대 산비탈을 없대 버림으로써 오르막길을 없앤다면 그와 동시에 내리막길도 없어져 버리는 법이다. 선과 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말일 것이다. [38]
➜ 당장 눈앞의 불편함을 참지 못해 그것을 없애 버린다면 그로인해 굳이 없애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을 언짢은 얼굴로 대하면서 “idiot”즉 바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어세서는 이 말이 “사사로운 이익에 사로잡힌 자”를 뜻한다. [51]

생명력이 넘치는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 자체를 자세히 뜯어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감이란 터무니없는 오만에 빠지기 쉬운 법이다. [54]

2. 아테네의 철학

그는(소크라테스) 언제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참다운 지식이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 참다운 지식을 찾으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81]
➜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예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 건 아닌지...

사람이 아는 것이란 극히 조금밖에 안 되고, 또 무한하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미지의 것에 비하면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밖에 안 된다. 이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누구나 사람이 안다고 할 게 없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81]

소크라테스는 델피 신전이 내린 신탁의 참다운 의미 즉 오직 신만이 현명하고 인간의 지혜란 하찮은 것이며,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지혜가 보잘것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83]

철학자는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고,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다. 예술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갓 의견(意見)을 갖는 데 그치는 반면,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식(知識)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지식은 반드시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91]

비판을 억압하는 처사는 그 사회에 활력 있는 통일된 목표를 창조해 내기는커녕 국가라는 정치적 조직체에 맥 빠지고 부서지기 쉬운 획일성을 강요할 뿐이다. [103]

교육에 있어서는 반드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양쪽 모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교육의 진행 과정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이다. [103]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린다는 건 그것이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른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옳은 판단과 마찬가지로 그른 판단 즉 오류도 전혀 무섭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독자는 놀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건 그 해답을 알기만 하면 이와 마찬가지로 무섭거나 신비로울 것이 전혀 없는 법이다. [117]

판단이란 이제 분명해진 바와 같이 옳거나 그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를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판단은 판단대로 사물들이 존재하면 옳고, 그렇지 않으면 옳지 못하다. 우리의 판단을 오류로부터 지켜 주는 형식적 기준은 있을 수 없다. [117]
➜ 내 안의 틀을 깨지 않으면 오류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40]

정의론이 현실에서 정의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든 무엇이 공정인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142]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충고를 구하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142]

비극의 궁극적 목적은 감정을 깨끗이 비워 버림으로써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어 “catharsis”(승화)의 의미다. 관객은 연극 중에 인물에 동화되어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경험함으로써 그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그런 감정의 짐을 실제로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극은 치료 목적을 갖고 있다. 방금 사용한 치료라는 용어는 의학에서 빌려 온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창적인 점은 가벼운 수준의 병을 앓게 함으로써 그 병을 극복하게 하는 치료방법 즉 일종의 정신의 예방 접종법을 가르쳐 준 데 있다. 비극의 목적에 대한 이런 설명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늘 지니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아주 당연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은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147]

결론적으로 수학이란 학문이 그 문제의 단순성과 그 구조의 명료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의 창조에 대해서도 상당한 안목을 갖추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강조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154]

3.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사실 세상사에 얽매이는 끈이 약하면 약할수록 상처받거나 실망할 가능성이 더 적어진다는 것은 옳은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인생에 대해 그 이상의 어떠한 고무도 얻을 수 없다. [160]
➜실망할 가능성은 적어질 수 있겠지만 동시에 수반되는 고립감은 어디에서 해소할 수 있을까?

엘리트의 의무들 중의 하나는 바로 공공사업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플라톤 역시 이러한 의무감에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동굴에서 빠져나온 철학자는 다시 동굴로 돌아가서 타고난 통찰력이 자기보다 모자라는 사람들이 동굴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플라톤으로 하여금 시칠리아 섬의 모험을 감행하도록 이끌었던 것도 바로 이 확신이었던 것이다. [163]

능동적 쾌락은 우리가 자기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한 욕구를 원동력으로 해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어떤 목적을 위해 분투하는 가운데 체험하게 된다. 일단 목적이 달성되어 더 이상 어떤 욕구도 없을 때 수동적 쾌락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수동적 쾌락은 포만의 상태에서 느끼는 취한 듯 열중한 상태이다. [163]

우주의 모든 진행 과정이 따르게 되는 법칙은 우주 역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절대적인 어떤 권위로부터 흘러나온다. 모든 것이 예정된 방식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나타난다. 제논은 최고의 절대적 힘 즉 신의 힘이 이 세계 밖의 어떤 것이 아니라, 모래밭에서 스며나오는 습기처럼 우주 곳곳에 두루 퍼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신은 이 우주에 내재하는 힘이며, 그 일부가 우리들 개개인 안에 살아 있는 셈이다. [166]

이 세상의 재화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어떤 폭군도 한 인간에게서 그가 소유하고 있는 외적인 것들은 모조리 빼앗을 수 있을지 몰라도 양도할 수 없는 내적 소유물인 덕만큼은 탈취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외부의 재화에 대한 그릇된 욕구를 거부해 버릴 때 마음을 쏟아야 할 유일한 대상인 덕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손상당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67]

스토아 철학이 정말로 정곡을 찌르고 있는 대목은 어떤 의미에서 덕이라는 내면적인 선이 다른 어떤 것보다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 본 사실이다. 물질적 재산의 손실은 언제라도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자존심을 잃는다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167]
➜ 가장 끝까지 나를 세우기 위해 절대 놓고 있지 말아야 할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확고한 기준 하나인간 보다.

그리스 사람들은 “공평무사한 탐구 그 자체”를 윤리적으로 선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 까닭은 인간은 종교적 신비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공평무사한 탐구의 성과를 이용해서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공평무사한 탐구의 전통에 더해서 그리스 철학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부정적 감정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맑고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81]

4. 초기 기독교 철학

기독교는 더욱 견교하게 기반을 확립하게 되자 구약 성서를 믿는 종교에 대해 몹시 사나운 적의를 드러내게 되었다. 유태인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고지한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족속이라는 이유로 악의 무리라고 단죄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로는 종교적 동기 이외의 다른 동기들도 가세하여 반유태주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기독교도의 열렬한 신심의 발로라고 존경받게 되었다. 어쨌든 한때는 처절한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가 일단 세력을 잡자 자기의 신념을 고수하려는 소수 사람들에게 일찍이 스스로 당했던 만큼의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 것은 이상한 일이다. [192]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시간은 삼중의 현재이다. 사실 정확하게 현재라 부를 수 있는 현재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으로 지금 살아 있고, 미래도 현재의 기대로서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이론의 초점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이 겪는 한 가지 정신적 경험으로서의 시간이 지닌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견해를 승인하면서 창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199]

5. 스콜라 철학

에이루게나의 실재론은 <자연의 구분에 대하여>라는 그의 철학적 주저 속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자연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창조하는 것인가 아닌가, 창조된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4가지로 구분 된다고 보았다. 첫째, 자연에는 다른 것을 창조하면서 그 자신은 창조되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신이다. 둘째, 그 자신이 창조된 것이면서 다른 것을 창조하는 것이 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형상론에 나오는 관념들이다. 이 관념들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면서 한편으론 개별자들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 관념들은 신 안에서 생명을 유지한다. 셋째, 공간과 시간 속의 사물들이 있다. 이것들은 창조된 것이면서 다른 것을 창조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완전히 한 바퀴 돌아 모든 것이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궁극의 목적으로서의 신에 이르게 된다. 신은 그 자신의 목적과 별개로 인식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바로 이 의미에서 신은 그 자신의 목적을 창조하지 않는다. [215]

사물의 본질이란 대체로 말해서 성질 즉 어떤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하는 것이다. 본질과 실존이 제각기 스스로 독립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두 용어가 추상(抽象)을 표현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체적 사물은 반드시 본질과 실존을 둘 다 갖추고 있다. [232]

신플라톤주의의 신은 어떻게 해서든 이 세계와 공존하는 신인데 반해서, 아퀴나스의 신은 아 창조된 세계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일종의 영적인 사제장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신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성질을 무한한 정도까지 소유하고 있는데, 이 성질들은 어떻게든 이 신의 질존 바로 그 사실로부터만 나온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신의 성질에 관해서는 “···아닌 건 아니다”는 식의 부정 진술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한한 인간의 정신 능력은 신에 관해서 긍정 진술을 통한 적극적 정의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234]

무릇 지식이란 본질에 관한 지식이며, 따라서 이 본질은 신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신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237]

우리는 어리석은 사고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연 속의 사물에 대해서 언급하는 진술과 사람의 말에 대해 언급하는 진술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경우처럼 이 세계의 사물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사용되는 어휘들이 첫 번째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논리학을 하는 경우처럼 사람의 말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사용되는 어휘들이 두 번째 목적으로 쓰이게 된다. 그런데 논증을 전개할 때에는 모든 용어가 동일한 종류의 대상을 언급하도록 한결같이 사용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원리에 입각해서 살펴보면, 유명주의자는 “보편자”라는 말을 두 번째 목적 즉 사람의 언어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39]

그리스 사람들 눈에는 사람이란 저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생활을 신들의 변덕으로 인해 구겨져 버릴 수 있는 불안정한 것으로 보았음에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의 이러한 곡절을 결코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해 당연히 치러야 할 적절한 보상이라고 해석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에는 속죄를 해야 한다든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문제는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 사람들의 윤리 사상은 전체적으로 보아 완전히 형이상학과 관련 없이 전개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특히 스토아 철학과 더불어 주어진 현실을 그저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특징이 윤리에 끼어들었고, 나중에 초기 기독교의 여러 종파에 전달되었다. 그렇지만 체계적으로 보면 그리스 철학은 신학적 문제들에 부딪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세상을 중시하는 성향을 철저히 유지하였다. [246]

6. 근대 철학의 발흥

인쇄술의 발명이 토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치와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쇄술의 혜택이 의심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허위도 진리가 쉽게 인쇄되는 그만큼 쉽사리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인쇄물에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승인만 해야 한다면, 독서 능력은 사람에게 거의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누구나 자기 의견과 비판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누군가의 주장을 인쇄하여 광범위하게 유포하는 일이 탐구를 향상시킬 것이다. 이러한 자유가 없는 경우라면 차라리 문맹의 상태가 더 좋을 것이다. 우리 세대에 와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한 문젯거리로 대두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제 인쇄물은 더 이상 대량 전달의 유일하게 강력한 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선 통신과 텔레비전이 발명된 이래로 이런 대량 전달의 매체들은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통제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게 되었으니, 이에 대한 통제가 없으면 자유가 전반적으로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253]
➜ 현재 쏟아지는 정보의 진실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어쩌면 아예 믿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이 사물들을 자유 재산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공동의 복지가 철저하게 존중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람들이 제 자신을 위해 재물을 소유하게 되면 재산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들이 분열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264]

결국에 가서 사람들은 종교적 투쟁이란 어느 편도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는 헛된 짓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진정으로 인정하는 관용심이 사람들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형성된 것은 이러한 부정적 체험으로부터였다. [269]

위대한 과학 발명이 시작된 것은 이와 같이 고대의 사고방식이 부흥된 결과였다. 과학 혁명은 처음에 다소 정통적인 피타고라스 철학에서 출발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하고가 천문학에 세워 놓았던 생각들을 점차 뒤집어엎고 나서, 마침내 형상들의 이면을 정확히 조사하여 무한히 일반적이면서 강력한 설명력을 가진 가설을 발견하고 끝나게 된다. 이 전체 과정에서 이러한 탐구를 진전시킨 학자들은 자신이 전적으로 플라톤의 전통에 서서 연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272]

한편으로 현상을 무시하는 일이 위험하다면, 다른 한편으로 현상을 맹목적으로 기록하는 일도 터무니없는 사변이 그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274]

귀납은 오히려 가설을 시험하는 일에 관련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일련의 관찰이 쓸모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관찰하는 사람이 관찰하기에 앞서서 예비적인 가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누구도 가설을 발견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일반적이 규범을 만들어 낼 수 없다. [280]

베이컨은 사람들이 네 가지 유형의 정신적 약점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들을 “우상(偶像)”이라 불렀다. 첫 번째 우상은 “종족의 우상”인데,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족이므로 바로 인간을 우상으로 받드는 경우를 말한다. 희망에 의거한 사고 즉 이랬으면 하고 바라는 생각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 경우가 실례의 하나라고 하겠는데, 특히 자연 현상에 실제로 실존하는 질서보다 더 위대한 질서가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 경우가 그렇다고 하겠다. 두 번째 우상은 “동굴의 우상”인데, 이는 개인이 자신의 잘못된 외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를 말하므로, 이 우상은 무수히 많다. 세 번째 “시장의 우상”은 사람이 언어에 현혹되는 경향으로 인해 일으키는 과오인데, 특히 철학에 만연되어 있는 과오이다. 끝으로 네 번째 “극장의 우상”은 사상의 체계나 학파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일어나는 고오이다. 그러고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헤어나지 모샇ㄴ 사람들은 이 종류에 속하는 과오를 많이 범했던 셈이다. [280]

데카르트의 방법은 그가 형이상학에 대한 사고를 진행시켜 나가자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감각 기관을 통해 마련되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수학까지도 정도만 가벼울 뿐이지 미심쩍다고 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국 의심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그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데카르트의 근본 명제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딛고 서 있는 기초이다. [286]

스피노자는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형성시키는 배후의 힘은 자기 보존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 순전히 이기적인 원리는 우리 모두를 자기 본위로 냉소나 일삼는 사람으로 떨어뜨려 버린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 버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머지않아 신과 사이좋게 살기를 열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294]

인간의 지성에는 이런 진리들이 우연 명제(contingent proposition : 우연히 옳은 명제)로 보일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과학을 이상적 형태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자가 이론을 세울 적에 하는 일은 우연 명제를 파악한 다음, 그 우연 명제가 실제로는 다른 명제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돈하여 제시함으로써, 처음의 우연 명제가 이런 의미에서 필연명제(necessary proposition : 필연적으로 옳은 명제)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301]

비코가 보기에 신은 자신이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세계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서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불완전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비코는 인간이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코가 설정한 인식 원리의 가장 근본적 취지를 간명하게 표현하면,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있거나 만들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실”이란 말을 본래의 의미 즉 신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기본 주장을 “진리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302]

7.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자유주의는 19세기에 산업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비참하게 착취당한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운동의 강력한 근원이 되었다. 이 역할은 나중에 더욱 투쟁적인 세력으로 대두된 사회주의 운동에 인계되었다. 자유주의는 전체적으로 보아 독단적 신조를 갖지 않은 사회 운동으로 계속되어 왔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 이후로는 불행하게도 자유주의가 정치 세력으로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정치적 신조에 확고하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용기를 갖지 못하게 된 사실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는데, 이는 20세기 국제 사회에 일어나 대파국의 결과일 것이다. [312]

엄격한 체계로 짜여진 선(좋음)에 관한 이론은 어떤 몽매한 전제 군주가 그 이론을 실천에 옮길 운명을 자신이 타고났다는 환상에 빠지게 되면 공포의 대파괴를 저지를 수 있다. 공리주의 윤리학이 행복을 바라는 속된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 때문에 공리주의 윤리학을 얕잡아 보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리주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상적 목표를 추구하는 준엄하고 거만한 개혁가보다 동포의 운명을 더욱 많이 개선시켜 준다는 건 아주 확실하다. 우리는 윤리학에서의 이와 같은 다른 관점과 더불어 정치학의 전개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다른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로크의 전통에 따르는 자유주의자들은 추상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추진하는 전면적 개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낱낱의 문제마다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밝혀지는 그 진가에 의거해서 취급되어야 한다고 본다. 대륙 사람들을 그처럼 노하게 만드는 것은 영국의 정부와 사회적 조치의 비체계적 성격이 아니라, 바로 이 점진적이고 시험적이며 반체계적인 태도인 것이다. [320]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내용은 낱말의 의미를 낱낱이 파악한 다음 그걸 염주알처럼 꿰어 놓은 의미들의 사슬이 아니라 그 이야기의 취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보더라도 언어적 표현의 의미에 관한 난점이 그대로 다시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관념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떠오른 어떤 명확한 관념을 다른 사람에게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전달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이런 조건 아래에서만 두 사람이 하나의 관념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24]

왜냐하면 그는 논의를 뒤엉키게 오도하는 방식들을 조리있게 해결하는 일이 철학자들의 일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이 문제에 관해 <인간 지식의 원리>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체로 나는 이제까지 철학자들의 흥미를 끌었고 또 지식에 도달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난점들은 그 전부는 아닐지라도 아주 많은 난점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 탓에 생겨났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먼지를 일으켜 놓고는 그 먼지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불평한다.” [327]
➜ 문제의 원인은 전적으로는 아니겠지만 자신의 탓도 어느 정도는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8. 계몽 운동과 낭만주의 철학

인생 자체와 인생의 문제들을 대하는 계몽된 태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난관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마련하는 데 막대한 도움을 준다는 건 옳은 말이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최종적으로 영원히 해결해 버리는 방도가 이 세상에 있을 수없다는 것도 명백한 일이다. [342]
➜ 알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길 너무 자주 기대한다.

칸트는 흄을 비롯한 경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은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긴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과는 달리 이 견해에 중요한 소견 즉 실제로 지식으로 만들어지는 재료와 그러한 지식이 취하는 형식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는 소견을 추가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획득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348]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목표는 선천적 종합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관련해서 칸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순수 수학의 가능성 문제인데, 그 까닭은 그가 수학적 명제들을 선천적 종합판단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칸트가 실제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명제는 다섯에 일곱을 더하는 산술학의 명제인데, 그가 이 예를 같은 수들을 사용하여 설명을 전개하였던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에테투스>에서 빌려 온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5+7=12라는 명제에 대한 칸트의 견해는 이 명제가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므로 선천 명제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12라는 개념이 미리 다섯, 일곱, 더하기라는 개념 속에 들어 있지 않으므로 종합 명제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근거로 칸트는 수학이 선천적이면서 종합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였다. [349]

지식론에 관한 칸트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했던 용어들의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는 지식의 형성 과정이 한편으로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경험의 충격을 받아들이는 일만 하는 감각 기관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감각의 여러 요소를 결합시키는 이해력 즉 지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지성은 반드시 이성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 지성과 이성의 구별을 후세의 헤겔은 자신의 관점에서 이성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인데 반해서, 지성은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이성적이거나 이성을 타고났다는 점에서는 평등하지만, 지성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이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지성은 참으로 사람마다 현격하게 활용의 정도가 실제로 다른 지능이기 때문이다. [351]

이제 내가 이웃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도와주고 싶어한다고 가정해 보자. 칸트의 원리에 의하면 이 행동은 내가 철저히 싫어하는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사랑의 태도를 보이는 경우와 똑같은 정도로 칭찬할 만한 행동이 못 된다. 이리하여 모든 도덕적 행위는 개인의 성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칙에 얽매어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의무를 다소 불쾌하고 지루한 기분으로 되풀이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어쨌든 칸트는 도덕적 행위의 주체는 선의지이며, 오직 선의지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였다. [354]

정치에 관해 좀 더 폭넓은 안목을 지닌 사람의 눈에는 어느 사회에나 시민들의 호전성을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배출구가 많이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보일 것이다. [363]

헤겔의 철학에서 실제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개념인 변증적 방법으로 되돌아 가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앞에서 변증적 과정의 한 주기가 어떻게 세 단계로 진행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세 단계는 우선 어떤 진술이 주장되고 나면, 그에 대립하는 주장을 하는 진술이 맞서게 되고, 결국에는 그 두 진술의 주장 내용이 절충되어 세 번째 진술로 정돈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 과정을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어떤 사람이 금은 귀중하다는 정명제를 주장했는데, 다른 사람이 이 명제에 대항하여 금은 귀중하지 않다는 반명제를 맞세웠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경우의 합명제는 금은 상황에 따라 귀중하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65]

모순이나 모순 관계는 의견을 교환하는 담화중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중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모순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진술이 다른 진술과 모순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훌륭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실의 세계에는 전혀 모순이나 모순 관계가 없다. 우리가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취하든 어떤 사실이 다른 사실과 모순을 일으키거나 모순 관계를 형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빈곤과 부유는 모슨 관계에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다. [366]

우리가 어떤 사물에 관한 모든 사항을 완벽하게 알고 있지 못할지라도 그 사물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모든 어휘를 알지는 못하면서도 어떤 어휘를 제대로 이해하여 사용할 수 있는 사실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헤겔은 조각 그림 맞추기 장난감의 한 부분으로서의 조작 그림이 원래의 그림 전체가 완성되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고집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주의자는 이와 반대로 낱낱의 조각 그림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한다. 실제로 낱낱의 조각 그림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면, 누구도 그 조각 그림들을 결합시키는 일을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371]
➜ 그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곧 그 조각하나하나에 해당하는 경험도 경험이 어떤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떤 철학 체계의 골격을 만들어 내는 논리에 관한 신조에 대한 비판은 윤리학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논리에 관한 신조가 올바르면 그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윤리 이론도 당연히 올바르다고 인정받는 이론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 문제는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미해결의 문제이다. [371]

키에르케고르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현저히 다른 실존적 사고방식 즉 실제의 상황을 내부로부터 파악하는 사고방식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예컨대 사람을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알려고 하면 사람 속에 있는 참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는 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한 사람이 지닌 생생한 감정은 실존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73]

9. 공리주의 철학과 그 이후

대체로 보아 인간은 보수적인 동물인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의 기술적 재능의 발달이 정치적 지혜의 터득을 앞질러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 인해 생긴 불균형을 인류는 아직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383]

모든 사회적 지병을 고치는 한 가지 중요한 치료약은 적절한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점에서는 개혁가들이 완전히 옳지는 못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읽기와 쓰기와 셈하기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사회적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전혀 논의의 여지없이 칭찬할 만한 이런 능력들이 산업 사회에서 각자 맡은 일을 하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말도 옳지 않다. 판에 박힌 전문적 작업은 이론적으로 문맹자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간접적으로는 도울 수 있는데, 때로는 교육이 곤경에 빠질 사람들에게 좀더 좋은 상황에 도달할 방도를 찾아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교육 과정을 통해서만 이러한 결과에 도달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건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이다. 한편 이와 달리 교육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 질서를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질서로 믿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입식 교육은 때로 아주 효과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문제가 되어 있는 상황을 공평한 태도로 폭넓게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개혁가들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에는 실제로 상당한 교육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385]

누구나 어떤 물체를 관해서 그것을 볼 수 있으면 보일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바람직하다”라는 말에는 애매성이 따른다. 만일 내가 어떤 것에 관하여 그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소박하게 내가 그걸 실제로 바라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의미로 말할 경우에 물론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대체로 나와 같다고 가정한다. 이 말을 이런 뜻으로 사용하여 바람직한 것은 사람이 바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와 다른 의미로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정직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런 예이다. 이 말은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이 경우에는 윤리적 진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밀의 논증은 확실히 부당한 논증인데, 겉모습만 비슷한 “visible"과 ”desirable"이 모든 점에서 같다는 전제는 참으로 피상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사실 명제, 즉 “이다(is)”를 포함하고 있는 진술에서 당위명제, 즉 “해야 한다”(ought)를 포함하는 진술을 연역해 낼 수 없다는 건 이미 오래 전에 흄이 지적했다. [390]

그러나 논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적에는 인간과 고등 원숭이의 조상이 같은가 다른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굉장한 감정 폭발이 일어났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과 원숭이가 공동의 조상을 가졌다는 주장이 원숭이에게는 틀림없이 모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오늘날에는 이런 주장으로 인해서 감정의 혼란을 일으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393]

그는 진리란 신중한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에 의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397]
➜ 진리는 단지 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서 몸으로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진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일까?

10. 현대철학

프로이트는 망각 현상에 관해서도 억압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과정에 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기억하는 게 두렵기 때문에 잊어버린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건망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기억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432]

야스퍼스는 자유롭다는 느낌이 불안한 느낌 또는 그가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빌려 온 용어로 말하면 두려움과 동반하여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니깐 일반적으로 말하면 객관적 존재의 수준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반면에, 자아-존재의 영역은 기분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443]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니 인생에는 전통과의 연결이아 개인의 생활에 이미 일어난 사건과의 연결은 전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셈이다. 그는 이 불쾌한 진리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계를 합리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자기 보호를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점에서는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이나 종교적 신앙에 의지하는 사람이나 똑같다고 본다. 그는 양쪽 다 실재로부터 도피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게도 과오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계는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것과 다르며, 종교를 보아도 신은 이미 니체 시대 이대로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니체의 초인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런 근원으로부터 자신의 무신론을 이끌어냈다. [444]

요컨대 이성주의자들은 자연의 진행 과정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데 반해서, 실존주의자들은 자신의 기분에 탐닉함으로써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445]

맺음말

정말이지 어떤 주제에 관해 그저 많이 읽기만 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주제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 건 아니다. 어떤 주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과 더불어 반드시 필요한 일은 그렇게 모은 가지각색의 자료에 대해 상당히 치밀하게 반성하는 것이다. [453]
➜ 치밀한 반성이 있지 않으면 그 지식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상식인은 물론이고 학자의 경우에도 때로 멀리 떨어져서 전체를 조감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 일을 위해서는 너무 부피가 크지도 않고 지나치게 내용이 상세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눈으로 전체를 조감한 개관이 필요하다. [453]

철학이 우리에게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은 경험적 탐구의 성과들을 통찰하는 방식, 말하자면 과학의 성과들이 어떤 종류의 질서를 드러내도록 정돈할 수 있는 틀이다. 관념주의 철학은 이 이상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는 참으로 철학의 고유 영역 안에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과학을 연구하려고 착수했다면 그가 이미 어떤 종류의 철학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상인의 상식적 태도는 실은 사물들의 본성에 관해서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일반적 가정들의 뒤범벅이기 때문이다. 아마 비판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공로는 상식적 태도의 이런 실정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일 것이다. [454]

우리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이 세계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과오와 환상에 빠지는 실수를 저지르며, 게다가 자신이 오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수가 흔하다. 이런 오류가 어떤 신념에 의하면 옳은 생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즐거움도 위안도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식의 믿음이 약간의 만족을 주기 때문에 자기는 무한히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고 살지는 모르겠다. 세상에는 실재로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은행을 경영하거나 법률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이런 식의 믿음에 따라 직무에 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탐구의 결과가 때로는 오류인 경우도 있지만, 이 사실이 탐구의 결과를 주관적인 성격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오류가 있다면 과오를 저지른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 그 자체는 과오를 범할 수 없다. 자연은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일 뿐이며, 사람이 명제를 언어로 진술할 때에는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이 항상 있는 법이다. [455]

탐구하는 사람은 이중의 의무를 떠맡게 된다. 탐구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신의 주제인 객관적 대상을 연구해야 한다. 탐구자는 연구의 성과가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가 불편하게 하는가에 전혀 개의지 않고 그 일을 수행해야 한다. 탐구의 결과는 윤리의 원리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듯이 전혀 개인의 감정을 존중할 의무가 없는 법이다. 다른 한편으로 탐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발견한 지식이 윤리적 의미에서 좋은 일에 이용되도록 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458]

관용은 탐구가 번창할 수 있는 사회에 미리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탐구자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를 성장시키는 위대한 촉진제이다. 자유로운 사회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이두가지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정도까지는 지금 관심의 대상인 지식이라는 좋은 것에 이바지 할 수 있다. 이 말은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누구나 똑같은 의견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어떤 방법도 강압에 금지되지 않도록 탐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사람에겐 살 가치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459]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오늘에까지 이른 서양의 문화적 전통에 흐르는 연속성을 강조하고 탈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양 철학을 개관하면서, 그와 더불어 서양 철학이 전개되어 온 역사적 상황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대로 사회적·정치적 시대 상황과 흐름, 철학자의 삶과 철학 요약, 비평, 영향 등을 세밀하고 깊게 서술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철학사의 흐름을 멈추지 않고 잘 집어간다. 이 설명을 입증하기 위해 인물, 장소, 문서의 사진들을 수집해서 실었는데, 사진들은 가능한 한 그 인물, 장소, 문서가 현존했던 당시에 만들어진 유물에 대한 사진들 중에서 선택하였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을 내 놓은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철학사의 내용들을 간명하게 집약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한 책이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늘날 사람들이 점점 더 전문적 지식으로 치닫는 경향에 휘말려 지적 유산을 남겨 준 선조들에게 진 빚을 잃어가고 있기에 그 기억을 되살려 놓기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목적이 있었기에 3000년에 가까운 인류철학사를 훑어가는 과정에서도 흐름을 놓치지 않았고 그 방대한 양을 단순 정리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도 덧붙여 가면서 앞·뒤의 맥락을 집어 주는 것 또한 빼놓지 않으면서 책을 써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수렵 채집민 생활에서 농경 정착민 사회로 전환되면서, 인류는 사회를 보다 다양하게 구성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문제해결 방식 및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언어를 발달시키고, 공동의 목적을 토론을 통해 도출하기 위한 과정에서부터 철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철학은 찬란한 고대 철학을 이룩하고, 암흑기를 거친 근대 철학의 부흥은 현재까지 이르게 된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새로운 학파가 생겨나곤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 사회가 그만큼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초기 철학자들의 탐구정신과 시대상 기초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철학자들이 모든 방면에 능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은 고대 철학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이 책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느 학문분야보다도 인간이 중심에 있고 인간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살면서 철학이란 분야를 한번쯤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내가 저자라면 시대상황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많이 할 것이다. 암흑시대, 종교개혁, 산업혁명, 자유주의의 시작과 같은 역사적으로 큰 맥락을 잡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먼저 서술한 다음 그 당시 새롭게 형성된 학파에 대해서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설명해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여기서 지금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열쇠를 각자의 방식으로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IP *.139.110.7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92 16. 철학이야기 - 윌 듀란트 file [1] 미나 2011.07.18 9075
2891 16. <철학 이야기> - 윌 듀랜트 file [1] 미선 2011.07.18 2638
2890 [리뷰] <철학이야기>_윌 듀랜트_동서문화사 file [2] 양경수 2011.07.17 4135
2889 [북리뷰 016] 윌듀랜트 <철학이야기> file [4] 김경인 2011.07.17 6527
2888 15. 서양철학사 – 버트런드 러셀 file 미나 2011.07.12 3632
2887 [리뷰] <서양철학사>_버트란트 러셀_을유문화사 file 양경수 2011.07.12 5532
2886 서양철학사 - 버트런드 러셀 루미 2011.07.12 2957
2885 15.<서양철학사> 버트란트 러셀, 을유문화사 file 강훈 2011.07.12 2945
2884 15th Review-러셀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지음/서상복 옮김/을유문화사) file [46] 사샤 2011.07.12 13171
2883 북 No.15 –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file 유재경 2011.07.12 5656
2882 15.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file [1] 미선 2011.07.11 2823
2881 [북리뷰 015]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file 김경인 2011.07.11 9653
2880 [북리뷰7]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1997 [2] 2011.07.05 3966
2879 서양의 지혜 - 버트런드 러셀 루미 2011.07.04 2458
2878 북 No.14 - 버틀런드 러셀 '서양의 지혜' file [2] 유재경 2011.07.04 5577
2877 14. 서양의 지혜 -버트란드 러셀 file [1] 미나 2011.07.04 2904
2876 14th Review-서양의지혜- B.러셀 지음/이명숙,곽강제 옮김/서광사 file [1] 사샤 2011.07.04 3221
» 14. <서양의 지혜> 버트런드 러셀 file 미선 2011.07.04 2920
2874 14.<서양의 지혜> 버트란트 러셀, 서광사 file [3] [6] 외로운늑대 2011.07.03 3650
2873 [리뷰] <서양의 지혜>_버트란드 러셀 file 양경수 2011.07.03 3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