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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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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31일 08시 52분 등록

1. 버트란트 러셀에 대하여 2

러셀BY~2.JPG

<미국 일러스트레이션 작가 노먼록웰의 그림>

윌 듀랜트가 본 러셀

윌 듀랜트는 <철학이야기>에서 러셀을 '유럽 사상가 중에서 가장 젊고 남성적인 사상가'라고 소개한다. 러셀의 나이 52세였다. 윌 듀랜트는 러셀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1차세계대전 이전의 러셀은 '논리학자'의 이미지이다. 추상은 총괄로서 유용하지만 논증의 수단으로는 경험과 해설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러셀이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러셀은 그리스도교 속에서 수학으로 나타낼 수 없는 많은 것을 발견하였으므로,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차라리 그는 자유인이기를 선택했다. 자유인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싸움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 후 러셀은 논리학,수학,인식론의 중압에서 빠져나와 불같이 타올랐고, 세계는 이 비쩍 마른 빈혈환자 같은 대학 교수가 대단한 용기의 소유자이며 인간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임을 알고 감탄하였다. 그는 교육에 대해 낙천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우리의 학교는 유토피아를 향해 열려진 문'이하고 했으며, '교육은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예술이 부 이상으로 찬미되도록 사람들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으며, 또 교육은 모든 창조적인 것을 촉진하여 소유의 주위로 모여드는 충동과 욕망을 감소 시킨다는 결의에 의하여 지도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술은 부에서 성장하는 꽃에 불과하며, 결코 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메디치 가는 미켈란젤로보다도 먼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아첨꾼이 아닌 틀림없는 학자이고 신사이며, 예수를 말하는 크리스천보다도 훌륭한 크리스천이다.

 

러셀은 왜 회의주의자가 되었는가?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28년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라는 책의 서문에 자신이 회의주의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원칙은 '옳다는 근거가 없는 명제는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열정적인 주장을 경계한다. 사실 열정이 있다는 것 자체가 냉정한 확신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믿음 조차 경계해야 한다. 믿음의 근거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 사람들을 열정과 믿음 때문에 타인의 불행을 추구해서 결국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차라리 합리적인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대하는 문제는 본능에 맡겨도 되지만, 우리가 증오하는 이들을 대하는 일은 이성의 영역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의주의는 시대적 요구였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의 명분을 막을 수 없다. 강력한 회의주의만이 진실을 가린 베일을 벗길 수 있다. 그는 희망을 가지고 주장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불행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이것은 내일 당장이라도 실현될 수 있는 꿈이다. ... 만약 실현되기만 한다면, 세상이 천국으로 바뀔 것이다"

 

러셀이 바라본 동양 (중국을 중심으로)

중국 문명은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에 왕성히 활동한 공자의 철학에 바탕한다. 전통적으로 동양은 배움을 최고로 여겼고, 그다음으로 학문과 연관된 세련됨이나 예의 등을 높이 샀다.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것이 '낙樂'이라면  서구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힘'이다. 서양이 원죄 의식에 물들어 있는 것에 반해 중국은 원죄 사상이 없기 때문에 편안하게 논쟁과 추론으로 의견 차이를 좁힌다. 서양 사람들에게 의견 차이는 '원칙'의 문제가 되어 버려 상대방을 사악하게 여기게 되는데, 하지만 중국에서는 의견 차이는 의견 차이일 뿐이다. 상대방이 죄인이 될 이유가 없다.

이와 같이 러셀은 중국 문명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나는 이와 같이 마음이 넓고, 현실주의적이고, 자진하여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뿐 그것을 구부려 특수한 형(形 )에 넣지 않으려는 문명을 아직 다른 곳에서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어쩌면 서양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중국문명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러셀의 자서전 서문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중략)

이것이 내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살아볼 것이다.

 

참고자료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동서문화사

버트란트 러셀,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푸른숲

버트란트 러셀, <레셀 자서전>, 사회평론

그림 출처 : http://blog.daum.net/rldud9704/16892015



2.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 귀

 동서문화사, 1판 1989 , 2판 2007, <서양의지혜/철학이란무엇인가/행복의 정복>, 정광섭 옮김

 

<보라색 : 두번읽기에서 들어온 글 귀 , 빨간색 : 처음과 두번읽기 모두 들어온 글 귀>

 

머리말

11. '큰 책은 큰 재앙이다' : 칼리마코스

11. 이 책의 목적은 탈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개설과 아울러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역사적 상황을 상기시켜 주는 몇 가지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다.

11. '철학 사상'이라는 것을 번역해서 도형으로 만들고, 기하학적인 은유를 사용해서 전달하려고 했다... 도형에 의한 설명은 잘 할 수만 있다면 특수한 언어에 얽매이지 않는 이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 시도는 좋았다. 그런데 번역이 한국말이 아니다.

12. 서양 철학은 모두가 그리스 철학이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와 우리를 맺어주는 유대를 단절하면서 철학 사상을 즐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12. 진정한 철학이 1921년에 시작되엇다거나 그 조금 전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철학의 문제가 느닷없이 무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프롤로그

14. 철학 자체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영혼을 구하지도 못한다. 그리스인들의 주장처럼 그 자체를 위한 일종의 관광여행이다.

  ☞ 철학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흔히 인식, 존재, 가치의 세 기준에 따라 하위 분야를 나눌 수 있다.

  ☞ philosopy : 지혜에 대한 사랑, 철학(哲學)의 '哲'이라는 글자도 '賢' 또는 '知'와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이 철학이란 그 자의(字義)로 보아서도 단순히 지를 사랑한다는 것일 뿐, 그것만으로는 아직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알 수 없다.

15. 실제로 미지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책을 바탕으로 신비적이거나 다른 근원적인 영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사색적 방법이다.

15.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철학을 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 철학하다? 무슨 말인가?

16. 어려운 문제를 연구할 때,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16. 결국 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

18.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은 그리스인이 발명한 것이다. 둑이 터진 것 같은 이 지적 활동을 낳은 어머니, 곧 그리스 문명의 발흥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눈부신 사건 중의 하나이다.

19. 메소포타미아, 종교 면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복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22. 종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면서도, 남을 환대하는 고루한 풍습은 뿌리가 깊었다... 전체적인 흐름은 통제가 잘 되어 있었다.

22. 한편에는 질서 바르고 합리적인 면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면이 있다. 전자는 철학, 과학, 예술을 낳았고, 후자는 풍년 기원과 결합된 비교적 원시적인 종교 속에 나타난다.

23. 니체는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어느 것이나 그 중 한 가지만으로는, 그리스 문화가 비상하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니체의 첫 저서 <비극의 종말>

24. 그리스어로 '사색'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무엇인가 '보고 돌아다닌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25. 살아남는다고 하는 문제는, 첫째로 인간이 자연의 힘을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6. 막다른 골목에 이르럿을 때, 우리의 선조는 이 문제를 완력으로 해결햇다. 일단 말 상대를 해치우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다. 때때로 그 대안은 토의로 문제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길이다.

27. 밀레토스의 탈레스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철학과 과학이 시작되었다.

29. 자세히 보면 마치 공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의 물질이 여러 가지 집합 상태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햇다는 것은 훌륭한 업적이다.

31. 아낙시만드로스: 인간이 바다의 어류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물고기의 화석을 관찰하고 상어가 그 새끼들을 기르는 방법을 관찰하여 이를 지지했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우리에게 물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32. 신비주의의 무게가 사회를 조금도 압박하지 않을 경우, 과학적 사변은 진보한다.

  ☞ 신비주의에 권위를 실지 말라는 말인가?

33. 철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길을 걸어갈 때, 그들이 살고 있던 도시의 국가 종교와 충돌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5. 올림픽 경기를 보러오는 사람 : 최하위층에는 물건을 매매하는 사람, 그 다음은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 마지막에는 경기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즉 문자 그대로의 이론가들이 있다. 이 마지막 층의 인간이 철학자에 해당한다.

 ☞ 철학은 세계에 대한 관조  

35. 피타고라스학파는 과학적인, 그중에서도 특히 수학적인 전통을 낳았다.

36. 음악상의 발견이 '모든 것은 수' 라는 관념과 서로 통했다.

36.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에서 수를 찾아내야 한다. 일단 수적 구조만 파악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37. 대각선은 변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후기 피타고라스학파가 세운 무리수의 이론이 필요하다. .. 이 학파의 한 학자가 이 비밀을 폭로했기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38.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이고, 완전하고 영원하며, 이에 반하여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겉치레뿐이고 불완전하고 순간적이라고 보는 관점까지 거의 다다랐다. 이것이야말로 피타고라스 학설의 직접적인 결과로, 그 후 이런 생각이 줄곧 신학은 물론 철학 사상까지도 지배했다.

  ☞ 관념론의 극단

39. 피타고라스, 그들이 믿는 최곡의 신은 아폴로. 아폴로적 성격이 유럽의 합리주의 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를 구별해 준다.

40. 피타고라스는 조화의 관념을 낳았다... 실제 세계는 대립하는 경향을 조절해서 평혀을 회복한다. 대립물기리의 다툼의 배후에는 규칙에 따라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하나의 조화가 있는데, 이것이 곧 세계이다.

  ☞ 조화라는 키워드로 뭔가 써보려면 '피타고라스'를 이해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40. 실제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조화는 눈에 띄는 것이 아닌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조화는 겉으로 나타난 조화보다 뛰어나다.' 사실 조화로운 존재가 간과되는 것이 보통이다.

41. 다툼이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추진 원리이다.

41. 헤라클레이토스 : "자네는 두 번 다시 똑같은 강물에 뛰어들 수 없다.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흘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은 유전하고 있다"

42. 우리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말은, 우리의 존재의 단일성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잇다는 말이다.

  ☞ <신, 84> "예컨데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습니다. 이때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입니다." 이렇게 용어에 대한 정의를 설명해주면 좋겠다. 개념 정립이 안되니 이해가 안된다. 이 책은 대중을 위한 철학서이지 않은가?

 42. '선과 악은 하나이다'라는 말... 이것은 분명히 선악은 하나요,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리막길이 없는 오르막길은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의 관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선의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44. 규칙은 한계를 넘지만 않는다면, 절대적으로 엄격하지 않다.

44. 마치 진흙 속에 빠져든 사람이 그 속에서 발을 씻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45. '많은 것을 배워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 지혜란 만물에 공통된 이 기본 공식을 파악하는데 있다.

45. 보편적인 공식, 즉 로고스는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에 눈이 어둡고 마치 각자가 자신들이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48.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이상이 파르메니데스의 논의의 전반적인 경향이다.

51. 엠페도클레스 : 물/공기/불/흙으로 구성된 유명한 4원소 이론, 이는 약 2000년 동안 화학을 지배했다.

  ☞ 뤽베송의 '제5원소'에서는 여기에 '사랑'이 추가되었다. 

 53. 전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옮아가는 일은 없다. 이사이 완전한 에레아학파의 유물론이다.

54. 사람들은, 오늘은 이런 의견, 내일은 그와 반대되는 저런 의견을 기꺼이 믿으면서도, 거기에 모순이 있다고는 의심해 보지 않는다.

  ☞ 이게 사실 아닐까? 믿음은 매 순간 변한다.

56. 레오니다스와 300명에 이르는 부하가 테르모필레에서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군에게 저항한 일은 역사상 기념할 만한 위업 중 하나로 손꼽힌다. 스파르타인은 병적으로, 감상적인 백성이 아니었다. 훈련은 엄했고 개인 감정은 억제 되었다. 기형아는 민족의 용맹성에 손상을 입히지 않기 위해 내다버렸다. 젊은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떠나서 군대 병사와 비슷한 훈련소에서 양육되었다.

  ☞ 영화 '300'

58.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대중들로부터 눈총을 받았고 '바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 지금은 그 반대의 분위기!

 58. 어떤 법률이 시대에 부합되지 않으면, 대중의 합의로 이를 개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법률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한, 사람들은 법률에 복종해야 했다.

  ☞ 이런 분위기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끌었다.

59. 델포이는 아포로신을 숭배하는 중심지였는데, 이 신은 빛과 이성의 힘을 대표한다.

60. 올림픽 경기 :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인간은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도 가지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정신과 육체의 수련! 내가 일상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61. 기원전 5세기의 가장 놀라운 사건은 지적인 실험과 발명이 둑이 터진 것처럼 갑자기 쏟아졌다는 점이다.

61. 사람들에게 선의 형상을 상기시킨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67.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무리수의 '무리'라는 말이, 피타고라스에게는 이성을 빼앗긴, 아니 측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67. 피타고라스 수학의 또 하나의 커다란 유산은... 이데아 이론이다.

68. 실제로 완전히 정확한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정확한 도형은 그릴 수 없다. 현실의 그 어떤 도형도 마음속 이미지의 충실한 모사일 뿐이다. 이것이 후기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 가운데 하나인 그 유명한 이데아 이론의 요지이다.

71. 변증법적 논증을 처음 체계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제논이다.

73. 어떤 공간이 더 큰 공간의 일부라는 견해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76. 이와 같이 제논은 피타고라스의 불연속량의 이론을 타파하고, 연속 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79. 원자는 끊임없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을 움직이고 있다.

  ☞ 어떤 것인가??

81. 원자론은 자연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영혼의 새로운 이론을 낳았다. 다른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82. 에피쿠로스 : 삶의 목적인 행복은 영혼의 균형된 상태에 있다.

83. 교수들에게 물질적인 문제를 잊도록 하기 위해 고용의 대가로 봉급을 지급하는 것이 대학의 전통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그것도 꽤 많이 준다.

85.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자든 궤변론자든 대중에게 동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85. 오늘날 철학자는 전통과 인습을 뒤집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과 견해에 무조건 동의하지 않는 비타협자로서 차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다.

  ☞ 합리적 회의주의자!

86.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 : 사색에 잠긴 고독한 인물의 모습이 나체인 것은, 인간이 내성적이며 자의식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제2장 아테네

89. 아테네의 정치와 문화는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의 수십 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

90.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제국주의를 시샘해서 일으킨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계속되었고, 아테네의 완패로 끝났다.

91. 소크라테스는 갑자기 아무데서 멈추어 섰고, 대로는 계속해서 몇 시간이고 사색에 잠겼다. 동시에 그는 몸이 튼튼했다.

92. 중용이란? 우정이란? 용기란? 이들 의문의 긍극적인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이들 의문을 던지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92. 소크라테스 : 무엇을 하든지 그는 절제했고, 육체에 대한 놀랄 만한 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93. 기독교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인데, 이것은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그리스 사상의 특징과의 차이점 : '선'은 지식이다.(그리스)

94. 소크라테스는 국가 종교를 신봉하지 않고 청년들을 가르쳐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다.

95. 신만이 현명하며, 사람의 지혜는 쓸모없는 것이며, 자기처럼 자신의 지혜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지혜자인 체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95. 소크라테스는 법정을 향해서 자기의 의무는 국가와 충돌하는 위험을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라는 신의 명령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98. 그 어떤 사람이라도 정당 정치의 틀 안에서는 자신의 독립심과 성실함을 오래 유지해 나갈 수 없다.

98. 아카데미는 중세 이후에 발달한 대학의 시초이다. 아카데미는 학교로써 900년 이상이나 유지되었다.

99. 수학, 2차원, 및 3차원 쌍방의 기하학, 천문학, 음향 또는 화성학이 기본 교과 과정이었다. ... 이 과정은 10년이 걸렸다.

100.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정신을 이성의 빛에 비추어, 혼자서 사물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는 일이었다. 직접적인 실용적 목표는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102. 실제로 철학적인 저서가 깊이가 있기 위해서는 문체가 난해하고 서툴어야 한다는, 거의 전통에 가까운 생각이 여기저기에 깔려있다.

 ☞  이 책의 번역이 요모양인것은 그 때문인가?

104.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구별을 잊지만 않는다면, 플라톤적 스코라테스가 철학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105. 이데아 이론은 원래 피타고라스의 것이다.

105.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106. 그리스어의 '이데아'는 '그림'이나 '형상'이라는 뜻이다.

106. 철학 없이 사는 사람들은 동굴안에 잡혀 있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사슬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몸을 돌릴 수가 없다. 그들의 뒤에는 불이 있고, 그들 앞에는 밋밋한 벽이 가로박고 있다. 그들은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이 벽면에 비치는 자기 그림자와 그들과 불 사이에 있는 물체의 그림자를 본다. 그들에게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 그림자가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 동굴의 비유

107. 우리가 철학을 모른다면, 우리는 동굴에 갇힌 죄수와 같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림자, 즉 사물의 가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자라면, 이성과 진리라는 햇빛에 비치는 바깥쪽의 물체를 보게 된다. 이것이 실재이다. 우리에게 진리와 아는 힘을 주는 이 빛은 '선'의 이데아를 의미한다.

110. 제아무리 열심히 정확한 직선을 그리려 해도, 그것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완전한 직선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112. 플라톤의 이상국가 관리자 : 그들은 정신과 육체 교육을 모두 받는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음악, 즉 뮤즈신이 지키는 예술을 가르쳐야 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는 '체조', 즉 팀이 필요 없는 운동을 가르쳐야 한다.

113. 관리자의 사회경제적 생활은 엄중한 공산주의어야 한다. 그들은 작은 집을 가지며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겨우 소유할 뿐이다...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데려가서 그를 낳은 부모가 누군지 모르게 하고, 집단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 개인 감정은 약해지고 공공 정신이 강해진다. 가장 뛰어난 사람은 철학 교육을 받는다. 이것을 습득한 자는 마침내 지배할 많나 자격을 갖게 된다.

114. 그리스어 뜻에서 본 정의는 조화의 개념, 즉 각 부분이 올바른 기능을 발휘해야만 전체가 원활하게 작용한다는 개념과 결부된다.

114. <국가론>에서 그려진 유토피아는 올더스 헉슬리의 <신세계>까지 길게 이어지는 환상의 효시를 이룬다.

  ☞ 김용규<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에 나옴.

115. 그 목적은 철 없는 군주를 ,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중요한 도시의 문제를 관리하기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사람으로 기르는 데 있었다.

118. 그들이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던 정치 생활은 정적이었던 데에 비해, 그들 주위의 세계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다.

  ☞ 그리스 정치 사상의 최대 약점

118. 교사의 역할은 학생이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다.

119. 대학은 독립적인 정신 습관을 길러주고, 시대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는 탐구 정신을 키워 주어야 한다... 대학이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주입식으로 교육하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119. 용기가 없든 훈련을 받지 못하든, 독립적인 사고방식이 사라진 곳에는 선전과 권위주의의 독초가 멈출 줄 모르고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을 억누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는 것보다 심각한 일이다. 사회가 통합해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는 커녕 국가에 맥 빠지고 깨지기 쉬운 획일성을 강요한다.

119. 교육이란 교사의 인도를 받으면서 혼자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121.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이란 넓은 뜻에서 영혼의 치료였다.

122. 헤겔은 자유란 사람이 필연적인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라 여긴다.

123. 에우티프론의 대답은 마치 누군가가 철학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라고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25. 우리는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법에 따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 오늘날 정치 지배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면 어떻게 될까?

127. 우리는 어떤 가정이나 가설에서 시작해야 한다.

128. 이론과학은 항상 보다 넓은 범위에 있는 보편성과 처음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여러 분야를 점차 통일해 가면서 움직인다.

129.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소원은 죽음, 즉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 마치 하나의 치료법이나 되는 것처럼, 친구 크리톤에게 말하기를 아스클레피우스에게 장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달라는 것이었다.

133. 지식이란 논증에 의해 지지된 올바른 판단이다. 논증이 없는 곳에 지식은 없다.

141. 철학자로서 플라톤만큼의 넓이와 깊이에 이른 사람은 없고,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도 전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142. 동물의 분류에 관한 그의 저서는 아카데미 시대의 것이다.

144.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는 지루하고 평범하다.

145. 플라톤이 연극상의 최대 걸작을 썼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적 논문을 완성했다.

145. 분명한 것은 그가 플라톤의 수학적 철학에 공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역시 이름 높은 생물학자였다. 반면 물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견해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145.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적 사상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아마도 논리학일 것이다.

 ☞  그의 책 <수사학>을 보자. 

148. 영혼은 육체에 형상을 부여하는 실체지만 물질적이지는 않다.

 ☞  실체가 물질적이지 않다는 것은? 정신적인 이데아를 말하는 것인가?

149. 이 실체는 차례로 현실이 되어 가는 일련의 성질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다.

150. 동방의 천문학자는 현상을 기록하는 일에 만족한 반면, 그리스의 사상가는 현상을 만족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152. 전제가 옳으면, 옳게 이끌어낸 그 어떤 결론도 옳다는 것이다.

153.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과학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진술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는 그것을 공리라고 불렀다.

155.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 형식의 연구를 분석론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검사를 위해 풀어헤치는 것이 논증의 구조이다.

159. 형상의 세 부분, 1, 한정된 의미에서의 형상적인 면, 즉 배치, 2. 방아쇠를 당기면 총이 발사되는 것처럼 변화를 현실에 나타나게 하는 동인이 있다. 3. 변화가 달성하려 하고 있는 목표 또는 목적이 있다.

162. 그러나 진짜 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을 거부하는 대신 그를 통째로 받아들이고 그를 나쁜 평판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그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이 끼쳤다.

  ☞ 건전한 비판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다가서라.

165. 오늘날에도 과학자가 무한 공간에 대해 불안을 느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무한 공간을 에테르와 같은 독특한 물체로 채웠거나, 그렇지 않으면 좀더 최근에 이르러서는 에너지의 분포로 채웠다.

167. 신은 스스로 움직이는 일이 없고, 세계에 그 근원인 추진력을 주는 제 1의 발동자이다.

168.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그리스인에게는, 사색적 삶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세상사에서 눈을 돌리는 일을 의미하지 않았다.

170.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정이란 자손심을 남에게까지 연장하는 일이다. 자기가 형제를 자기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다소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면이 있다.

 ☞  성경적인 사고 이기도 하다. '내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171.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 생활의 최고의 형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라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야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173. 아리스토텔레스는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 정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산출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유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열린 사유 재산권과 같으며, 소유자는 그 재물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이런 책임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이다.

174. 권력을 가진는 자는 선해야 한다.

174. 북방의 활력과 동방의 지성을 겸비한 그리스인

175.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모방이다.

177. 비극은 보는 사람을 수긍하게 할 만한 출발점을 갖추어야 하고, 합리적으로 발전해서 결정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 길이도 중요하다. 작품이 너무 길면 정신이 둔해지고, 너무 짧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177. 비극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감을 세탁해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다.

 ☞ 카타르시스 

179. 이데아론이 처음 나오게 된 것도 피타고라스학파의 수학 덕분이다.

180. 알렉산드리아만큼 책을 많이 수집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따. 불행히도 고대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킨 둘도 없는 이 중심 도서관은 줄리어스 시저의 군대가 기원전 47년 ,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181. 유클리드는 이집트 왕한테서 기하학을 알기 쉽게 몇 시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수학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유명한 말로 응답했다.

 ☞ 기억해둘 만한 일화

 183. 결국 로마인들은 시칠리아섬을 모두 정복하고, 그와 함께 시라쿠사도 정복했다. 이 도시가 기원전 212년에 함락되어 약탈이 한창일 때, 아르키메데스는 살해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자기 집 모래 위에서 어떤 기하학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 이름없는? 로마 병사의 손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183. 다른 과학 분야에서 그리스인이 거둔 가장 눈부신 성공은 아마도 천문학일 것이다.... 태양중심설의 발견

 ☞ 아리스타르코스

185. 지국의 직경은 정확한 숫자에서 80킬로미터의 범위까지 육박한 계산이 나왔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이 공적을 이루었는데, 그는 알렉산들리아의 도서관 사서였으며, 과학상의 관찰자로 유명하다.

186. 수학이 문제의 단순성과 구조의 분명성 외에도 미를 창조하기 위한 그 어떤 여지를 준다는 것은 아마도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 미학이라는 말은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이 처음 만들어 냈다. 키츠가 진리는 미라고 하는 말로 표현한 정감은 철두철미한 그리스적인 개념이다.

186. 이 분야에서 세밀함이나 자제심 같은 관념은 성격상 미적인 것이다.

 ☞ 나에게도 세밀하게 한땀한땀 정성으로 만든 작품을 보면 그 가치가 높게 느껴진다. 내가 하기 어려운 것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것들에 가치를 두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예술이라는 개념이 커지고 있다.

 

제3장 헬레니즘

189. 그리스에서 박트리아까지, 나일 강에서 인더스 강까지 세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알렉산더 한 사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는 그리스인에게 한낱 마케도니아의 군주에 지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그리스 문명을 짊어질 사람으로 보았다.

190. 국가로서의 알렉산더 제국은 허망한 것이었다. . 유럽 또는 안티고노스의 제국은 100년도 채 못 되어 로마인의 손에 들어갔다. 아시아 또는 셀레우코스의 왕국은 분열해서 서방 로마인과 동방의 파르타인과 다른 민족에게 인계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하의 로마령이 되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인의 정복은 그리스의 영향의 전파자로서 한층 성공을 거두었다.

 ☞ 당시 그리스어가 세계 공영어가 되었다. 이는 알렉산더 제국의 힘이다. 서양의 철학은 그렇게 퍼져나갔다.

190. 바빌로니아의 점성술, 과학은 발달했는데도, 헬레니즘 시대는 고전 시대보다도 훨씬 미신적이었다.

  ☞ 심리학의 시대는 후퇴를 의미하나? 무의식의 발견은 후퇴인가? 이성의 빛으로 무의식을 밝혀낸 것이니 진보인가? 이성은 진보이고 감성은 후퇴인가?

191. 끝을 모르는 불안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여와 지적, 도덕적 쇠퇴를 가져왔다.

192. 결국, 혼돈에서 질서를 잡고 그리스인의 문명을 후세에 전하는 일은 로마의 조직화된 능력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192. 아테네의 대철학자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특징으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대담할 정도로 밝은 생활태도였다. 세계는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다.

192.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확대된 결과, 이 충만한 생각은 일시에 분쇄되고 말았다. 당시의 철학 경향에는 이런 현상이 전면적인 비관론과 불안감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 시대의 분위기에 철학이 영향을 받는구나. 그렇다면 철학을 결정짓는 더 위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직관이나 감정... 또는 신의 뜻인가?

 193. 그는 시대의 풍습에 역행하여, 조직 국가의 인습과 제약의 구속을 받지 않는 원시적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디오게네스의 스승

 ☞ 안티스테네스, 현대의 '스콧 니어링'이 생각난다.

193.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193. 유대감이 약하면 약할수록 상처를 입고 실망하는 가능성도 적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데서는 그 이상의 깊은 힘은 기대할 수 없다.

  ☞ 상처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혼자 있는 것은 아닌가? 깊은 힘을 위해서 상처를 받아들이고 연대하라! 공동체를 두려워하지 말라.

196. 시대의 분위기는 결국 명확하고, 안정된 신념의 체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독단적인 사물의 관점이 나와서 차차 회의주의 철학의 뿌리를 빼앗아 갔다.

197. 에피쿠로스에게 최선의 선은 쾌락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선한 삶은 불가능하다.

197. 물론 소크라테스는 사색적 삶을 무엇보다도 최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완전한 초탈과 고고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엘리트의 의무 중 하나는 바로 공공적인 일의 운영에 자진해서 참가하는 것이다.

198.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하나의 '선'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근본적으로 옳았다.

199. 우리는 쾌락 중에서도 최고의 '선', 즉 흩어지지 않는 평형 상태에 이르기 위해 사려와 절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 쾌락주의도 사려와 절제를 주장했다.

200.  위험과 고뇌를 아랑곳하지 않는 용기와 물질적 환경에 대한 무관심 : 스토아철학자가 존중한 덕목

201. 초기 스토아 철학자 제논 : 엄연히 법칙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 최고의 힘이나 성스러운 힘은 세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에 스며드는 수분과 같이 세계에 고루 스며드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신은 내재하는 힘이며, 그 일부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부에 살아 있다.

  ☞ 동양의 불교에도 이런 관념이 있다.  <법화경>에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한다. 비슷하다. 근대의 스피노자의 철학적 저술

203. 물질적 소유물을 잃는 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까지 보상할 수 있으나, 자존심을 잃으면 인간 이하로 전락하고 만다.

205. 그의 제자 아리아누스 덕분에 그의 담화 몇 가지가 보존되어 있다.

207. 중동은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헬레니즘화 되었고, 서방에서는 로마가 그리스 유산의 전수자가 되었다.

209. 정복과 발전의 결과, 지배자 일족이 막대한 재산을 얻은 데 반해, 소규모 자유 소유권 보유자는 농토를 잃고 말았다.

210. 침입자가 개종자가 되어 교회는 어느 정도 그리스 문명의 지식을 간직할 수 있었다.

211. 해외 발전의 도래와 함께 많은 재물이 로마에 흘러들어오자 타락이 더욱 심해졌다.

211. 사람들이 이 세상의 운명에 충분히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힘에 자신을 잃게 됨에 따라, 비합리적인 힘은 우세를 나타냈다.

212. 동방에는 적어도 그리스도교만큼 진보된 종교가 있었는데도 스스로를 카톨릭, 즉 전세계라고 자칭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전세계적인 정치와 문명을 꿈꾸고 있었다.

212. 로마가 해낸 최고의 역할은 자기 문화보다 오래되고 뛰어난 문화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 행정관의 조직력과 제국의 사회적 단결력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달성되었다.

214. 제국의 주류는 스토아주의였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밝은 가르침이 아에 조금 가미되었다.

214.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이는 어떤 뜻에서 고대와 중세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 고대 철학은 종말을 고하고 중세 철학이 출발하게 된다.

215. 플로티노스 : 감각 세계와 그 비참함을 비실재로 보는 이데아론은 사람들에게 자기 운명을 체념하게 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삼위일체론- 일자, 누스(정신), 영혼

216. '일자'는 자기의 빛을 내는 태양과 같은 것이다. 이때의 빛은 '누스'이다. '일자'는 이 빛으로 자신을 본다.

217. 그리스도교는 정식으로 쾌락을 죄가 깊은 것으로 보는 기묘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218. 철학의 시작은 어려운 문제에 머리를 갸웃거리는 일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219. 쇠퇴가 시작했을 때가 아니면, 신비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띠지 않는다. 우리가 플로티노스를 논할 때 말한 것처럼 신비주의는 그리스 철학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220. 그리스인의 실패가 뛰어난 지력에서 생긴 일종의 자만심때문이었다고 하면, 로마인은 상상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220. 그리스의 철학 전통은 본질적으로 계몽과 해방의 운동이다. 정신을 무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스 철학은 알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세계에 접근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220. 사심을 떠난 탐구 자체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라 여기고, 종교적 신비보다도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선한 삶에 이른다는 것이다. 탐구의 전통과 함께 거기에는 감상적이 아닌 일종의 밝은 인생관이 있다.

220. 소크라테스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그만큼 러셀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서양 문명의 지적 틀 속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그리스 사상가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제4장 초기 그리스도교

222. 서방의 철학 활동은 교회의 지도와 보호하에서 번성했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후

223. 신의 대표자로서의 교황, 세상의 대표자로서의 황제, 천국과 속세, 정신과 육체

224. 서방을 지배하게 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와 동방의 종교가 섞인 혼합종교를 어느 정도 포함한 유대에서 나온 것이다.

225.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내세에 대한 관념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었다. 이 관념은 의로운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악인은 지옥의 불로 떨어진다며 그 속에 인과응보의 요소를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다.

225. 유대인의 '신'인 여호와는 처음에 셈족의 '신'으로서, '자신의' 종족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28. 초기 그리소도교는 사실상 개혁된 유대교로, 그것은 마치 프로테스탄티즘이 처음에 교회 내부의 개혁 운동을 벌인 것과 같다.

229. 초기 그리스도 교도는 너무나 배타성이 강한 나머지, 오래된 전통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231. 요한복음에 신학적 사고가 시작되어,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자신의 새로운 틀 안에서 그리스인의 형이상학을 조절하려 했다.

 ☞ 초기 복음서가들은 신학적 사고라기 보다는 예수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특히 마가.

233.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 그 옛날 로마의 원로원 의원 일족이 해왔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다수의 예속 평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아우구스티누스

234. 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의 가톨릭교의 신학적 뼈대는 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고, 개혁된 종교의 지도 원리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들었다. 루터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 사제였다.

238. 개인적인 면을 강조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선구자다.

239. 그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가르침과 플라톤학파의 철학적 유산을 화해시키는 데 있었다.

 ☞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키', 왜 이제야 이것을 알게 되었을까. 

239. 아우구스티누스 : "시간도 세계도 함께 만들어진 것"

241. 그리스인의 관점은 당연히 범신론으로 끝난다. 이 범신론에 입각하면, 신은 세계다. -->신비주의, 스피노자가 대표적.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은 세상 바깥쪽에 있다. 

241. 이 신은 시간을 초월한 영혼으로 인과율도, 역사적 발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을 때, 세계와 함께 시간도 창조했다. 우리는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물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 신은 세계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안에 있는가? 이 세계가 신인가? 나에게 묻는다.

246. 미신적 전통은 미신을 가지지 않는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할 것이다. 진취적 기상보다 금욕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에서는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건설적인 정치적 조치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철학 문제는 그 배후에 있는 역사적 학식의 모든 재료가 없어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49. 532년,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사원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의 손에 들어갈 때까지 비잔틴 교회의 중심이었다.

 ☞ 가보고 싶다. 성 소피아 사원

250. 중세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새로운 두 가지를 언급해야 겠다. 첫째는 서쪽에 수도원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로마 교황권의 권력과 권위가 증대했다.

252. 그 무렵에 읽고 쓴다는 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하는 특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254. 교회는 세속의 학문에는 거의 경의를 나타내지 않았고, 그레고리우스도 예외는 아니다.

 

제5장 스콜라 철학

256. 로마의 중앙 정권이 쇠퇴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의 여러 나라들도 미개 시대로 빠져 유럽은 전반적인 문화의 쇠퇴기로 들어갔다. 이른바 암흑 시대는 대체적으로 600년에서 1000년까지로 계산된다.

256. 서양 문화가 쇠퇴한 데 반해, 젊고 힘찬 회교 문명이 인도의 대부분, 중동, 북아프리카, 에스파냐를 둘러싸면서 번성했다. 더 멀리에는 당나라 때의 중국 문명이 눈에 띄는 문예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257. 교황이 서방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정치 상황이 진공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257.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특권 집단이 되었고, 스콜라 철학은 르네상스까지 아무런 경쟁상대가 없었다.

258. 한 수도사가 어떤 문서를 위조했는데,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교령으로 , 황제가 서로마에 속했던 모든 영토를 교황청에 양도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와 같이 해서 교회의 속세 권력이 확립되어 중세 내내 유지되었다. 이 위조의 정체가 폭로된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260. 속세의 권력과 종교의 권력은 숙명적인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충돌은 당연히 피할 수가 없어, 교황과 황제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주도권 쟁탈이 이어졌다.

 ☞ 이런 상황이 중세의 역사를 규정했던 것 같다. 끊임없는 교황과 황제의 갈등...

260. 교황권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 그 지배권은 종교 개혁에 의해 무너졌다.

262. 11세기와 함께 민족 대이동은 끝이 나고 있었다. 회교의 외적 위협도 가라앉고 있었다. 유럽은 공세로 전환했다.

263. 요하네스 : 상대방을 화나게 한 것은 상당히 심한 그의 펠라기우스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논하는 방법이 단지 철학적이었다는 사실

  ☞ 중세의 분위기

264. 요하네스 : 참다운 종교는 바로 참다운 철학이며, 반대로 참다운 철학은 참다운 종교다.

265. 신의 존재는 사물의 존재에 나타나며, 신의 지혜는 사물의 질서에 나타나고, 신의 생명은 사물의 운동에 나타난다.

267. 유리한 지위에 선 사람들에게 지침이 될 강력하고 유력한 도덕적 전통이 없으면, 그들은 딴 생각을 하여 남의 돈을 착복할 것이다.

270. 안셀무스 : 신의 존재의 존재론적 증명을 고안한 사람으로서 철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신은 최대의 사고 대상이므로, 존재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최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270. 회교 시대는 마호메트가 622년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간 헤지라부터 계산된다. 632년 그가 죽은 뒤, 아라비아인의 정복은 불과 1세기 만에 세계를 일변시켰다.

271. 마호메트가 선언한 새로운 종교는 몇 가지 점에서 신약성서에 첨가된 신비주의를 떨쳐 버린 채 구약 성서의 엄격한 일신교로 돌아갔다.

272. 마호메트의 사위 아리가 661년에 죽은 이후에 신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었다. 시아파는 아리에 충성을 바치는 소수파.

273. 페르시아에서 이슬람교는 인도의 수학을 가까이 했고, 원래 인도의 것이라고 불려야 할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했다.

273. 페르시아 최대의 이슬람교 철학자는 아비케나였다. 그의 커다란 철학적 관심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 개념이라는 영원한 문제로, 이것은 나중에 스콜라 철학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275. 헨리는 당시 로마에 있었는데, 교황을 위협해서 굴복시켜 손수 제왕의 왕관을 썼다. 그러나 그의 승리도 삼일천하였다. 11년 뒤인 1122년, 교황 칼리스투스 2세는 보름스 협약에 의해 다시 서임식의 권한을 손에 넣었다.

 ☞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

276. 결국 교회와 제국의 항쟁은 어느 편의 이득도 되지 않았다. 신흥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바로 북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였다.

277. 북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는 십자군의 선박과 보급품의 공급원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종교적 열정이 십자군 운동에 공헌한 원동력이었는지는 모르나, 경제적 동기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278. 13세기에 스콜라 철학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유럽 중세기의 절정

279. 교회가 속세 문제로 광범위하게 성공을 거둔 것이 오히려 이미 교황권의 쇠퇴를 나타내고 있었다. 교회의 세속적 세력이 튼튼해질수록 내세 문제에 대한 권위가 반대로 시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이 나중에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 날카로운 지적, 이런 것 때문에 러셀의 책을 읽는 구나.

279. 이슬람교와 비잔틴, 게르만인과 이탈리아인의 영향이 합해져 하나의 근대 문명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이탈리아 르테상스에 최초의 추진력을 주었다.

282. 초기의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둘 다 설립자의 계율을 지키고 있었다.

282.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그 제자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였으며, 로저 베이컨과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은 프란체스크 수도회 소속이었다.

282.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위에 확립하려고 했다.

  ☞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하구먼

284. 1309년, 그것은 도미니크 수도회 공인의 가르침이라고 선언되어, 그 뒤 1323년에 성스러운 책으로 인정받았다.

 ☞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 사람들은 그를 '천사 같은 박사'라고 불렀다.

286. 이성이 사실을 처리할 수 있는 곳에서는 계시가 덤이며, 계시가 사실을 처리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성이 덤이다.

288. 필연적 존재를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신이다.

289. 신 존재 증명 : 5번째, 자연계의 무생물도 세계에 질서가 넘치고 있는 이상, 그 어떤 목적에 봉사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든다. (질서가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가정 됨)

290. 아리스토텔레스가 르네상스까지 철학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아퀴나스의 번역 덕분이다.

290. 프란체스코 수도회 학자 집안 출신인 로저 베이컨은 형이상학적 사고와 대조되는 경험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프랜시스 베이컨'과 헷갈릴수 있다. 1561년 출생,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이다. 

292. 사람을 설득시키려면 실험이라는 시련을 견뎌야 한다.

292. 그는 감옥에서 15년을 보냈다. 1292년 석방되어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294. 최고의 힘이 신의 의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 안에서는 지식을 지배하는 것이 의지라고 둔스는 주장한다.

297. 오컴 : 그는 이성의 범위를 제한하고, 논리를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인 거추장스러움에서 해방시켜, 과학적 탐구에 대한 노력을 촉진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 오컴의 면도날 : 가장 간단한 최소한의 가설을 사용하라.

298. 신비운동 : 도미니코 교단의 성직작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였다. 그의 이론은 정통 신앙의 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기존의 교회에서 신비주의자가 자유사상가보다 더 위협적 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비슷한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1329년,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은 이단이라는 선언을 받았다.

  ☞ 에크하르트의 사상이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신비주의는 러셀의 관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니체와 융, 조셉 캠벨에 이르는 신비주의의 영향이 그간의 연구원 과정을 통해 드러났다. 그의 사상이 궁금하다. 찾아보면, 그는 설교자로서 알려지게 되었나보다. 그의 설교 내용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의 '영혼의 불꽃'과 신과의 합일(合一)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합일의 극치를 '영혼에 있어서의 신의 탄생'이라 하였고, 더구나 그 신은 삼위격(三位格)의 구별을 초월한 근원적 신성(神性)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모든 피조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벗어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단적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그의 저작물은 위험한 사상으로 낙인찍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

298. 가장 위대한 중세의 종합적인 사고는 단테(1265~1321)의 저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299. 그는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토스카나어)를 만인의 문학적 수단으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서 처음으로 천차만별인 지방 사투리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었다.

299. 모국어로 처음 글을 쓴 철학자는 데카르트인데, 그 후에는 드물었다. 라틴어는 차차 힘을 잃어 19세기 초기에 학자의 표현 수단으로는 모습을 감추었다.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세계 공통어로서의 이 역할을 맡은 것은 프랑스어였고, 현대에는 영어가 이를 대체하였다.

300. 중세의 생활은 걱정이나 미신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질서 정연했다.

300. 정치 이론 분야에서 이 전통은 마르실리우스와 오컴에 의해 무너졌다. 종교의 힘이 사람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걱정의 근원이 되었지만 교의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고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자, 그 영향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301. 중세 세계는 원칙적으로 중앙 집권화되어 있었으메 반해, 르네상스의 신흥 세력은 중세 사회의 일률적인 구조를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세계 통치라는 관념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연맹, UN 등 국제기구의 창설을 의미하는 듯

 302. 1300년, 교황은 성년을 선언하여, 이 해에 로마로 순례르 오는 신도에게는 누구나 면죄부를 준다고 했다. 이것은 교황의 종교적 권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로마 시민과 같이 순례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로 생계를 잇던 사람들의 호주머니도 두둑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자산도 크게 불려주었다. 성년의 성공은 대단하여 그 뒤 50년에 그해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정해졌다가 이어 100년, 또 25년으로 바뀌었다.

304.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는 마르티누스 5세를 임명하여 대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교회는 내부에서 자기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교황이 공의회 운동을 반대해서 더 잃지 않아도 좋을 교황권의 권위까지도 잃었다.

305. 위클리프는 교황을 그리스도교 반대자라고 선언했다. .. 보헤미아에서 그의 가르침이 후스파의 운동을 고무시켰고, 이것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307. 그리스 사상과 중세 사상의 주요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 사상에는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은 신학적인 문제에 부딪히지 않았고, 따라서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세속적이었다.

  ☞ 현대에 와서 니체나 '그리스인 조르바'같은 문학이 관심을 끌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는 것은 현대인을 짓누르던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신화에 대한 관심도...

307. 그리스도교가 서유럽을 장악했을 때, 윤리 문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308. 철학은 종교적 기능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중세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되었다.

308.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플라톤 철학보다도 훨씬 그리스도교 체계와 조화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308. 14세기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학자가 이 가능성을 부정하고 이성과 신앙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을 때, 중세적인 사고방식은 차차 쇠퇴하고 있었다.

309. 중요한 점은 종교적 원리와 탐구에서 발견한 것이 서로 용인할 수 없는 경우 종교는 항상 방어적인 입장에 있고, 그 입장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310. 가능한 한 종교의 교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스콜라철학은 가끔 비상한 창의성과 예리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 언어적 도구를 섬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반면 스콜라 철학의 결함은 경험적 탐구에 충분히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310. 르네상스의 사상가는 인간을 중심적 지위로 다시 끌어들인다. 인간의 활동이 인간의 활동 자체를 위해 존중되는 것도 이와 같은 풍조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과학적 탐구 또한 새롭고도 엄청난 발전을 거두게 되었다.

 

제6장 근대 철학의 융성

 312. 14세기에 중세적인 사고방식이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 오늘날의 근대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새로운 힘이 서서히 나타났다.

312. 첫째는 15, 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이다. 새로운 문화운동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새로운 영향력이다.

313. 북쪽 나라들에서의 휴머니즘 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동일한 시대에 일어났는데, 이것이 중세 세계를 바꾼 커다란 세 번째 힘이다.

313. 개신교는 휴머니즘 영향 덕분에 보편적인 성직자라는 개념을 수립했다. 모든 사람은 신과 직접적인 접촉 관계에 있고, 그리스도에게는 교황도 사제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중요한 발전은 오컴의 비판으로 시작되는 경험적 연구의 부활에서 직접 나왔다.

314. 서양 문명이 보급 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물질적 발전을 거둔 후에 결국 정치적 이상이 나타났다.

315.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자기 힘이 무한하게 보인다. 이 모든 계획이 인간의 노력을 수반하고 인간의 목적에 이바지 한다는 것은 자칫 잊히기 쉽다. 이 영역에서 현대 세계는 한도를 넘을 염려가 다분히 있다.

315. 과도기의 특징, 인쇄기의 발명->교회는 이제 신앙문제에 대해 보호자 역할을 그럴듯하게 유지할 수 없었다. 언론과 비판의 자유, 조선과 항해기술의 개선

317. 현존 질서를 수호하는 사람들은 전복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이견을 품는 사람에게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이 판결은 오히려 현존 질서를 유지할 지위가 얼마나 불안전 했던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318. 스콜라 철학자의 교회 문학과, 14세기와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각국어의 세속 문학 사이에 명확한 대조

318. 사람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은 먼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당시의 세속적 관심에 있었고, 다음에는 이상화된 고대 조각상에 있었다.

319. 이탈리아에는 지나간 시대의 상징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

320. 르네상스의 선두주자 피렌체, :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갈릴레이... 메디치가의 300년 이상의 도시 지배

320. 교황은 인본주의자들의 학자적 연구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어 미술의 훌륭한 후원자가 되었다. ... 한편, 신앙 기준이 느슨해지면서 교황권은 세속적인 일에 빠졌고 이 때문에, 정신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 종교개혁의 원인

321. 철학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전체적으로 보아, 위대한 업적을 낳지 못했다. 이때는 오히려 자료를 재발견하는 시대였다.

325. 인습적인 도덕 기준에 대해서 <군주론>은 지배자가 여기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동시에 지배자는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327. 북방의 인본주의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였다. <우신예찬>

328. 그는 본질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인간은 신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신학은 불필요하다고 했다. ... 그는 자기의 학자적 연구와 출판 사업에 관심을 두었고, 분열은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329. 그의 목표는 아카데믹한 전문가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독자 대중이었다.

330. <유토피아> : 조난당한 선원이 섬나라 사회에서 5년동안 살면서 쓴 보고서 형식을 취한다.

332. 종교개혁은 유럽에 영원한 종교적 분열을 가져왔기 때문에, 관용의 관념이 널리 퍼져야 했다. .. 그러나 16세기에 저마다가 종교적인 신념을 존중받을 수 있다는 관념은 사람들의 주위를 끌 만큼 색다른 것이었다.

332. 미국에서는 어떤 로마 가톨릭 교도도 미국 대통령직을 계승할 수 없다는 관습법이 1960년까지 남아 있었다.

333. 1517년, 그는 명확하게 의사를 표명하여 유명한 95개 조문을 선언하고, 이 문서를 비텐베르크성의 교회 문에 붙였다.

334. 예수의 가르침과 현존 사회 질서 사이에 중대한 간격이 있다는 것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었다.

336. 사람들은 종교 다툼이 쓸모 없고 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앗다. 결과적으로 이 소극적인 깨달음에서 사실상의 종교적 관용이 나오게 되었다.

336. 예수회(1540) : 군대식 원리에 따라 조직, 자유의지 강조, 전도사업과 이단근절, 에스파냐 종교재판소의 주요 설립자

  ☞ 종교재판소는 이탈리아의 과학적 연구를 수세기 동안 교묘하게 뭉개왔다.

337. 그 어떤 명확한 비례를 얻으면, 일종의 미적 만족이 생기는 모양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비례의 존재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완전함을 보장하게 된다.

339. 피타고라스학파는 신을 최고의 수학자로 보고 있었다. 인간은 어는 정도 그 수학적 기능을 사용하거나 연마할 수 있다면, 신의 지위에 한층 접근하게 된다.

339. 과학의 부흥은 르네상스의 피타고라스적 전통에 직접 입각한 것이다.

340. 15, 16세기 학예 부흥의 전파와 책의 보급, 특히 고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전통적 힘의 소생은 17세기의 위대한 철학 체계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

342. 케플러(1571~1630) : 그는 궤도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또 태양을 하나의 행성과 연결하여 행성이 일정한 시간 안에 반지름을 지나가는 넓이는 일정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태양에서 떨어진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대한 회전 주기의 제곱비는 모든 행성이 동일하다는 것도 알았다.

345. 정통 스콜라 철학자는 망원경을 비난했다. 망원경이 이와 같이 그들의 독단의 잠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 콩트는 현미경이 기체의 법칙의 단순한 형식을 뒤집었따는 이유로 이것을 비난했다.

346. 만유인력의 법칙은 물질의 그 어떤 두 분자 사이에는 그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 여기에 마침내 우주의 수수께끼를 푸는 수학적인 열쇠가 발견된 것처럼 보였다.

348. 삼단논법이라는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수단, 즉 오르가논은 과학의 진보에 봉사할 수 없었다.

348.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 : <학문의 진보>, 그는 지식의 범위를 넓히고 인간의 환경 지배력을 확대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349. 귀납법 : 그것은 연구 중에 있는 사물 중에서 주어진 성질을 공유하고 있는 사물의 목록과, 그런 성질을 약간 다를 정도로 가지고 있는 사물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350. 그것은 오직 분류에 의존하고, 자상한 구별을 충분히 세우기만 한다면, 올바르게 정리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는 관념에 의존한다.

351. 그러나, 가설에서 구체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수학적 연역법을 거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실험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다.

351. 우상 : 종족의 우상(우리가 인간이기 때무에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다. 동굴의 우상(개인적인 우상), 시장의 우상 (정신이 언어에 현혹되기 쉬워지는 경향 때문에 야기되는 오류, 극장의 우상(체계나 사상의 유파에서 일어나는 오류

351. 베이컨은 과학적 탐구에 그토록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자기 시대의 가장 중요한 새로운 국면을 모두 간과하고 있었다.

   ☞ 우리시대의 새로운 국면 : 기후변화, 온난화, 과학의 새로운 발견, 양자역학, 천문학, 생명공학, 미생물학...

354. 대학이 개선해야 할 주요 결점 가운데 하나가 '무의미한 말을 자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홉스

354. 홉스 : 사람들은 만인과 만인이 겨루는 전쟁 상태의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단결하고, 자기들의 권력을 중앙의 권위에 위탁한다.

355. 지배자가 선출된 가장 중요한 목적인 보호를 해줄 수 없는 경우, 비로소 사람들은 당연히 이 합의가 무효라고 선언할 수 있다. 이런 계약에 입각하고 있는 사회가 공화국이다.

356.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이 두가지 영향을 받고 이를 융합시켜 고대인과 같은 장중한 새로운 철학 체계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그는 마땅히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 수학과 생각의 방법 

356. <방법서설>, 어느날 평소보다 더 추워져서 데카르트는 어느 오두막으로 들어가, 타일을 바른 아궁이 옆에 앉았다. 적당히 몸이 따뜻해졌을 때 그는 명상을 시작했는데, 그날 그의 철학 전체의 윤곽을 분명히 마음 속에 떠올렸다.

357. 그는 무엇보다도,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논쟁을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357. <서설>, 굴절광학과 유성과 기하학에 관한 세 권의 책의 서문

357.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 의지가 견고하고 활력이 왕성한 여왕은 데카르트에게 아침 5시부터 철학을 가르치라고 일렀다. 스웨덴의 겨울이 한창 일 때, 한밤중의 이 비철학적 기상 시간을 데카르트는 견딜 수 없었따. 그는 병을 얻어 , 1650년 2월에 죽었다.

  ☞ 유머러스한 표현, 번역이 이를 제대로 담지 못해 아쉽다.

358. 그가 찾은 네 가지 법칙 : 1. 분명하고 명백한 관념 외에는 아무것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2. 우리가 하나하나의 문제를, 그 해결에 필요한 만큼의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 3. 사고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는 질서를 따라야 한다. 4. 우리가 빠뜨린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항상 철저하게 대조해 한다

359. 결국 의심하는 자가 인정하는 것도 자기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기본 공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바탕이 된다. 여기에 바로 형이상학의 분명한 출발점이 있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361.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초 조각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상이라는 유명한 예를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것은  외연으로, 이것이야말로 정신이 인식하는 타고난 관념이다.

361.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걷는다고 한다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361. 자기의 정신적 경험에는 다른 사건이 공유하지 못하는 독특한 확실성이 수반한다는 것은, 역시 진실이다.

363. 물리학과 생물학적 물질 세계에 대해 데카르트가 설명한 엄격한 결정론은, 18, 19세게의 유물론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고, 특히 뉴턴 물리학과 함께 이해될 때 더욱 빛을 발했다.

 364. 스피노자 : 라틴어, 렌즈를 닦아 생계를 유지하고 철학상의 명상에 잠겼다. 사람의 눈을 피해 살았는데도, 그의 명성은 급속히 올라가, 그는 그 후에 많은 유력한 심취자와 편질르 교환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츠 등)

  ☞ 현대의 공영어인 영어, 영어는 그래도 쉽다.

365. 스피노자의 저술은 많지 않지만, 전에 거의 볼 수 없었을 정도의 집중력과 논리적 엄밀성을 나타내고 있다. <윤리학>: 모든것은  증명가능하다.

368. 실체는 신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신과 우주, 즉 모든 사물의 총체는 동일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유명한 범신론이다.

369. "정신의 본성은 어떤 무시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369. 인간은 외부의 영향이나 원인에 좌우되는 한, 노예 상태에 있다.

370. 인간은 전체에 더욱더 순응해 가면서 그에 알맞은 자유를 얻는다.

370. 소크라테스와 달리 그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371. 스피노자가 극단적인 일원론을 주장했다고 한다면, 라이프니츠의 해답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무한한 실체를 가정한다.

376.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일상 세계보다 규모가 작은, 말하자면 하나의 전 세계였다. 이와 같은 고찰은 단자를 외연을 가지지 않는 궁극의 형이상학적인 영혼이라고 보는 관념과 통한다.

378.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실현될 수는 없다는 것에 유의하면서, 그 어떤 시기에 최대의 현실성을 발휘하는 세계가 결국은 존재하게 된다.

379. 비코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즉 만들 수 있는 것밖에는 알 수 없다.

379. 비코 : 대학의 수사학 교수, 이탈리아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철학에 반대하여 사유가 아니라 행위에 진리의 기준을 두었다. 그는 실재 세계와 관련되는 새로운 과학을 인간과 신이 협력하는 역사에서 찾아냈다.

 380. 사상이란 가끔 그 영향을 의식적으로 보지 않고 느낄 수 있다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비코의 저서는 그다지 널리 잃긴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철학의 많은 발전의 싹을 품고 있다.

381. 수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완전히 알 수 있지만, 실재와는 관련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만든 것이지만, 실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인간과 신이 협력하는 역사에서 찾아냈는데, 이것은 전통적 견해의 놀라울 만한 반전이었다.

382. 어떤 행동을 이지적으로 수행하면, 반드시 그 행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 연습이 완전하게 해준다! 매일의 힘! 수련! 매일 하자! 매일 쓰자! 깨어서 의식적으로 행동하라!

 386. 사회학에서 그는 이상적인 공화국이라는 합리론적인 개념을 없애고, 사회는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하는지를 연구하는 경험적 과제에 전념했다.

  ☞ 여기서 참다운 문명론이 나왔다.

 386. 진리는 행위이다. 라틴어로 말하자면 '진리는 사실'이다.

 

제7장 영국 경험론

389. 자유주의는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키고 있던 신흥 중산층의 소산물이기 때문에, 귀족정치와 군주정치의 특권층이 지배하는 전통에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본적인 경향은 관용이었다.

391. 데카르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공식은, 이 개인주의의 전형이다. 모든 사람이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의 개인적 존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391. 이 개인주의라는 이론은 대체적으로 합리론적 이론이며, 이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감정에 지배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야만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19세기 동안에 개인주의이론은 감정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낭만주의가 한창일 때는 강한 자의 뜻을 칭송하는 수많은 힘의 철학이 되었다.

392. 19세기 산업 사회의 발생과 함께, 자유주의는 심한 착취를 당하고 있던 노동 계급을 사회적으로 개선시키는 데 강력한 원인이 되었다.

392. 대부분의 사람들이 엄격한 정치적 신조를 갖지 않고는 살아나갈 용기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현대에 대한 슬퍼해야 할 논평이며, 아마도 현세기의 국제적 파국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394. 존 로크 : <인간오성론>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정신의 한계와,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탐구의 한계를 제시하려는 솔직한 시도를 보게 된다.

 395. 경험론의 새롭고도 특징적인 것은, 이들 감각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이다.

400. 로크 시대 이후의 일반적인 국가 권력은 개인이 희생한 대가로 방대하게 성장했다.

401. 근대 유럽 철학은 로크의 철학이 출현하면서 처음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대륙 철학은 전체적으로 대규모적인 체계 구축형이었다. 한편 영국 철학은 과학의 경험적 연구 방법을 더욱 엄밀하게 지켰다. 비교적 작은 수많은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고, 일반원리를 제출할 경우에는 직접적인 증거로 테스트를 받았다.

402. 이성론에서는 피라미드가 거꾸로 서있고, 경험론에서는 바로 서있다.

402. 단편적, 시험적, 비체계적이라기보다는 반체계적인 영국 정치의 성격이야말로 대륙인에게는 매우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404. 버클리 철학의 근본 논제는, 어떤 사물의 존재는 우리가 그 사물을 지각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406.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자기의 기본 공식을 조건도 타협도 없이 말하고 있다.

407. 버크리가 사물 자체 같은 건 전적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로크의 경험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거부하고 있는 점은 매우 옳다. 이것이 버클리 관념론의 요점이다. 우리가 정말로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신 내용뿐이다.

 410. 사람은 그의 눈으로 보는 것이지,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 그의 주장은 옳다. -버클리-

411. 로크의 경험론을 발전시켜 논리적 결론까지 끌고 간 인물은 흄이다. 결국 이렇게 해서 도달한, 무절제한 회의적 입장이 원래 이 가정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폭로한 셈이다. -에딘버러

 414. 관념은 인상의 색바랜 사본이므로, 우리가 사물을 생각할 때, 마음에 그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로 경험할 수도 없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417.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흄을 인용한 이유는 그의 문체에 기품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문제를 기술하는 방법도 흄만큼 뛰어나고 명확한 것은 없다.

  ☞ 러셀은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날카로운 면과 지적인 방대함이 대단하다. 문제는 문체를 한국말로 풀어내는 번역의 문제 일 수도 있다.

422. 흄은 마음이 어떻게 지식을 획득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뉴턴의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이상의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422. 과학의 목적은 결과가 원인에서 나온다는 연역적 체계에 의해 인과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422. 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상 그 어떤 견해라도 우리가 바라는 것을 자유롭게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는 우리가 채택한 것을 정당화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제8장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424. '계몽주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 다툼의 결과였다.

426. 종교 영역에서 신교가 만인은 자기가 직접 판단해야 한다는 관녀을 내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 분야에서도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자연을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예부터 내려온 기성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발언에 맹목적인 신뢰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과학의 발견이 서유럽의 삶을 바꾸기 시작하고 있었다.

427. 낭만주의 운동과 계몽 운동의 관계는 어느 면에서 아폴로적인 태도와 대조되는 디오니소스적 태도를 상기시켜 준다.

427. 낭만주의자들은 위험한 생활 방식을 사랑하고 있었따. 그들은 안정을 구하지 않고 자진해서 모험을 위해 나아갔다.

427.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특별한 미덕이었다. 빈곤이란 본질적으로 농촌적인 것이다.

  ☞ 우리나라의 귀농운동이나, 귀촌운동이 보여주는 모습

428. 국가는 그 어떤 의지가 부여된 대규모적인 개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429.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 : 1. 이성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 모든 어려움은 영원히 해결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 낭만적 합리론-->독일 관념론, 마르크스 철학, 2. 이성을 과소평가 -->비합리주의적 태도로 악명 높은 실존주의, 산업사회가 개인을 점차적으로 침해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반역

429. 이성을 과소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비합리주의적 태도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실존주의이다.

429. 바이런 : 그에게는 기존 인습에 대한 반역이 있고, 공공연한 무시와 멸시가 있고, 앞을 가리지 않는 대담함이 있고, 고귀한 행동이 있다.

430. <백과전서> : 세계를 과학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설명하여 이 저자들은 기존의 권위인 반계몽주의에 대한 강력한 투쟁 수단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디드로-

432. 삶과 삶의 문제에 대한 열린 태도는 적절한 조취를 취하여 어려움을 대처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총체적인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이고 영원한 해결책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432. <백과전서>는 여러 면에서 18세기 계몽운동의 상징이다.

433. 낭만주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이다.

  ☞ 후기 낭만주의 운동에 막대한 영향

435. 루소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데 반해, 이서은 우리를 현혹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며, 행위자에게 정서적인 뒷받침만 있으면 문자 그대로 어떤 행동도 좋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437. 임마누엘 칸트(1724~1804) :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로 승진하여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438. 그의 습관은 매우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가 지나각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한다. . 이와 동시에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그가 사교 모임에 나오면 모두가 기뻐했다.

438. 칸트는 흄이 한 것처럼 경험에 의해서 개념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개념으로 경험을 설명하려고 했다.

439.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 생기지만, 단지 경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감관 경험은 지식에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441. 칸트 이론의 이해를 위한 범주들

• 양

• 단위수

• 복수

• 전체수

• 질

• 참

• 거짓

• 한계

• 관계

• 실체성과 우연성

• 인과관계와 상호의존성

• 상호작용

• 양태

• 가능성-불가능성

• 존재-비존재

• 필연성-우연

   ☞ 언젠가 이 범주가 필요한 때가 올것 같다. 그래서 적어본다. 처음 두가지 것의 변증법적 발전이 세번째 범주라 한다.

443. 칸트는 이와 같은 경험의 근원을 가상 또는 현상과 대조시켜서 '사물 자체' 도는 '누메나(실체)'라고 부른다. 칸트의 이론은 사물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선험적 오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에

   ☞ 표현과 현실 : 도구는 그 성질상 한계를 갖는다. 사진은, 어던 정경을 특정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지, 정경 그 자체는 아니다. 이 생각은 인간의 경험에도 적용 된다고 칸트는 생각하였다. (사진은 그 사물 자체는 아니다.)

444. <순수이성비판> 그것은 인식에 한계를 설정해준다. 의지는 윤리학의 영역에 속하며,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어진다.

445. "의지를 인도하는 원리가 보편적인 법의 바탕이 될 수 있도록 항상 행동하라" 조금은 엄격한 이 발언은, 실제로는 남이 해 주었으면 하고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남에게 해 주어야 한다는 뜻의 그럴듯한 말일 따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 : 170페이지 참고, 비슷한 사고방식

448. 그의 시대에서 급진적이엇던 것은, 1795년에 나온 <영구평화론>이라는 팸플릿에 기술된 평화와 국제 협력에 관한 견해이다. 대의 정치 체제와 세계 연방은 그가 제시한 주요 개념이다.

453. 헤겔(1770~1831), 튀빙겐 대학, 헤겔 철학은 언어 자체이 뜻에서 실천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인간 노력의 역사와 그 역사적 성격이 크게 강조된다.

455. 전체만이 진실이다. 부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부분적으로밖에 진실이 될 수 없다. '절대적 정신'은 그 자체가 사고하는 관념이라고 헤겔은 생각한다.

456. 헤겔은 전체주의 조직의 국가에 호의를 나타낸다.

457. 그는 전쟁이 평화보다도 도덕적으로 우위에 선다고까지 말한다. 국민은 싸울 일이 없으면 도덕적으로 약체가 되어 퇴폐한다는 것이다.

457. 주어진 그 어떤 사회적 틀 안에서도 시민의 건전한 분노가 빠져 나갈 충분한 돌파구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대중문화, 스포츠, 성, 술, 마약  -->중독

458. 헤겔은 유기적 통합체에 의해서 사물을 생각한다... 개별적인 것은 전체와 관련해서 한 유기체의 각 부분처럼 자기의 완전한 실재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460. 헤겔은 인간과 신은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461.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든, 갑의 사실이 을의 사실과 모순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빈곤함과 부유함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를 뿐이다. 헤겔은 정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중대한 구별을 무시하려고 한다.

 463. 헤겔 <법철학> 서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어둠이 닥쳐오지 않으면 날지 않는다."

464. 헤게릐 철학은 철학사 전체를 통해서 몇 번이고 나오는 총괄적 원리에 영향을 받는다. 만일 우주를 전체적인 배경으로 보지 않는다면 세계의 부분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전체야말로 유일한 실재이다.

466. 나는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모든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시작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일을 하기 전에 반듸 하나에서 열까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466. 경험론자는 각 부분마다 그 자체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각 부분을 이어 맞출 수 없다.

466. 헤겔에게 국가란 본래 선이며, 시민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전체의 영광에 기여해야만 비로소 중요해진다.

468. 실존주의는 정말로 오컴주의식으로 의지를 이성으로부터 분리하여, 철학적 반성으로서가 아니라 의지의 어떤 자발적인 작용으로 인간이 행동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에 우리의 주의를 끌려 한다. 그래서 인간은 곧 간단히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유로운 의지가 작용해야 종교적 신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469. 실존주의 원리는 존재가 본질보다 앞선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처음에 하나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이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469. 개인의 특수한 감정은 실존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470 . 헤겔은 이성을 너무 존중해서 이성이 우주를 낳을 수 있다는 오류에 빠졌다. 키에르케고르는 정반대 의견을 내어, 이성은 우주를 파악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과학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 실존적 사고 양식을 가정하는 원리 자체가 이미 혼란에 빠진 낭만주의 개념.

  ☞ 실존주의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는건가? 하지만 러셀은 회의주의자니까. 이해가 간다.

472.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바이마르에서 괴테와 가가이 지내며 이도 신비주의 연구에 착수했다. 쇼펜하우어

473. 쇼펜하우어는 합리론 체계의 낙관론 대신에, 행복이 깃들 수 없는 아주 어두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

   ☞ 러셀은 신비주의나 비관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듯

473. 구별 : 언뜻 똑같아 보이는 것이라면 몇 번이고 복제 가능하지만, 하나하나가 다른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은 각각이 다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물건이 다른 물건과 다르기 위해서는 각각이 존재하는 시간 또는 공간이 달라야 하고 현상의 세계에 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474. 스피노자 같은 사상가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악을 보려고 하지 않은 데 반하여, 쇼펜하우어는 정반대로 그 어떤 것에도 선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474.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결국 세게와 세계의 분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라면, 니체(1844~1900)는 이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귀족적 휴머니스트

475. 니체를 기껏 겉으로만 이해한 사람들의 그릇된 행동까지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475. 그는 처음부터 건강이 좋은 때가 한 번도 없었으며, 이 종군 생활에서 끝내 회복될 수 없었다. 1879년 , 그는 그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나 상당한 연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편안한 삶을 보낼 수 있었다.

  ☞ 1889년 정신병이 발병, 말그대로 미쳤다. 마지막 11년간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476. 니체의 저서는 무엇보다 먼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특히 스파르타가 그린 이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최초의 저서 <비극의 탄생>1872, 그는 그리스 정신의 아폴로적 성향과 디오니소스적 성향 사이의 유명한 구별을 제시했다.

476. 올림푸스의 80만의 신들은 인간의 삶에서 적적함을 제거해 주는 일종의 조용한 환상이다.

477. <차라투슽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이론은 하나의 윤리적 선언문 형태로 기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문체상 성서를 모방하고 있다.

478. 니체가 무엇보다도 싫어한 것은 새로운 기술과 함게 성장한 새로운 형태의 대중의 출현이었다.

478.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인간형이다.

  ☞ 자기계발, 자기실현의 철학

 

제9장 공리주의 이후

480. 인간 쪽에서 보면, 산업주의 초기는 무시무시한 시기였다.

481. 많은 농민들이 특권을 침해받고 새로운 생게 터전을 찾으러 도시로 쫓겨 나갓다. 이들은 새로운 공장에 흘러들어갔다.

482. 기계의 작용이 개선될 때마다., 산업 노동자는 자기들의 생계가 끊기지나 않을가 하는 걱정에서 저항했다. .. 전자공학적으로 통제되는 기계류의 도입을 노동조합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본다.

  ☞ 지금도 그렇다. 제어계측의 발전으로 사람이 하는 일이 자동적으로 제어 가능하게 되고 있다. 구조조정은 시대의 흐름인가.

483. 애덤 스미스 <국부론> 처음으로 한 나라의 경제 생활에 각종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연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483. 분업의 원리는 산업 분야에 대규모로 적용되어 완전한 지지를 받는다. 전문화된 작업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일에 대한 인간의 흥미가 손상된다고 하면, 결국 고통받는 것은 노동자-->현대 산업의 주요 문제

484. 마르크스 이론의 목표는 폭력적 수단으로 현존 질서를 완전히 변혁하는 일이다.

485. 모든 사람에게 읽고 쓰고 셈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사회문제가 처리되지 않는다.

487. 제레미 벤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공리주의자들의 공통 목표!

488. 공리주의의 결론 : 만인에게는 한결같이 행복에 대한 강한 충동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만인은 모두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

489. 추론은 최대 행복은 사정이 안정되어 잇는 경우에만 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과 안전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해야 할 일이다.

489. 벤담은 현재의 희생 도덕은 지배 계급이 자기 손으로 가진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부과하고 있는 정교한 속임수라고 주장

491. 밀 : 무엇인가 바람지가다는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 러셀은 이 논리를 억지라고 했다.

493. 밀은 자유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494. 찰스 다윈은 <인구론>에서 자연도태의 원리와 생존경쟁이라는 관념을 얻었다.

495. 적자생존 이론은 정치 용어로 번역되어, 20세기 독재권의 정치적 사고의 몇 가지를 움직였다.

   ☞ 나치즘

497. 오언의 지도를 받아 확대된 운동은 공동 조합제도를 낳고, 초기의 노동 조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497.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바탕으로 햇고, 철학적 논의의 수단은 헤겔의 변증법을 바탕으로 했다.

499. 마르크스의 이론은 주로 헤겔적인 철학 이론과 매우 밀접, 마르크스주의가 영국에서 한 번도 유행한 적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 영국인은 전체적으로 철학에는 별로 감동하지 않기 때문.

499. 헤겔이 볼 때 역사 진로는 '절대자'를 향해 노력하는 정신의 점차적 자기 실현이다. 마르크스는 정신 대신에 생산 양식을 놓고, '절대자' 대신에 계급이 없는 사회를 놓는다.

500. 헤겔에게 지상의 왕국은 프러시아 제국이었지만, 마르크스에게는 계급없는 사회였다.

500.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물론은 기계론적이지 않다. 마르크스가 고집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다분히 비코가지 거슬러 올라가는 활동설이다.

  ☞ "철학자는 세계를 여러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참다운 과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

502. 변증법적 유물론은 경제적 영향이 사회의 생명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한 점은 가치가 있지만, 이 한 가지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에서는 잘못했다.

502. 하나의 신조를 수립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우리 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적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니다.

504. 세계의 산업 국가는 경제 분야에서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회 복지 계획을 도입하여, 적나라한 경제 투쟁을 완화시키는 법을 여러 가지로 고안했다. 혁명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유럽의 산업화된 지방이 아니라, 농업국가이던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504.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마지막 체계이다. 그 호소력의 크기와 영향 범위는 주로 그 행동 계획의 혁명적 요소뿐만 아니라, 그 유토피아적 예언의 종교적 성격에 의존하고 있다.

507. 논리적 순서는 인식 순서의 역순이다.

514. 합리론자의 이론은 물질적인 것을 희생하고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성격상 낙천적이며, 단일성을 구하고 실험을 무시하고 반성을 조장한다... 경험론적 이론은 물질적인 세계에 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비관주의적이고, 세계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고안보다도 실험을 좋아한다.

515. 프래그머티즘의 신앙의 힘 : 어떤 생각도 잘못이라고 증명되지 않는한 그것을 믿어서 은혜를 얻을 수 있다면 믿어도 좋다.

 516. 종교인이 종교적 신앙을 갖는 것은, 이들 신앙에 의해서 만족이 생긴다고 그가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가 행복한 것은 신앙 때문이다.

  ☞ 레셀의 날카로운 지적

 517. 너무 많은 비판을 받으면 상상력은 막히고 발명도 쓸모가 없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학문의 기원과 발달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사실이다.

 524. 철학자에게 문장이 어떻게 해서 구성되고,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조사할 필요성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제10장 현대 철학

527. 사건이 일어난 뒤에 알게 되는 것처럼 철학의 발전을 이해하기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변화의 중요성을 특이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더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헤겔적인 착가일 것이다.

 528. 오늘날 통용할 수 있는 기준은 단 한 가지 유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뿐이다.

529. 실험실과 아틀리에의 대조는 우리가 말한 단절을 충분히 말해준다.

531.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서 싫증나게 볼 정도로 대부분 일상사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사회는 한층 효율적으로 안정은 되지만, 하나의 기계가 될지도 모른다.

531. 탐구가 끝이 없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런 사정으로 우리는 결국 유토피아적 환상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꿈꾸는 것 같은 목표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

532. 그리스인이 전란시대에 저지른 가장 흉악한 범죄 중에 하나는 기껏해야 올리브 나무를 잘라 쓰러뜨리는 정도였다.

532. 우리 문명의 전체 역사상 모든 것이 끝난 것같은 사태를 맞았을 때, 꿈과 진취성 넘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세상을 정상으로 되돌리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536. 영국에서 '비'가 아일랜드 쪽에서 온다면, '관념론'은 독일에서 왔다.

   ☞ 또 나왔다. 러셀의 유머

539. 비코의 '진리는 사실'이라는 등식

540. 크로체,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541. 베르그송 : 한쪽의 생명력과 다른 한쪽의 물질력이라는 이들 두 가지 커다란 힘은 영원한 투쟁을 한다.

541. 삶의 힘은 그것이 작용할 때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는 모양이 만들어지지만, 행동할 때 기본적 자유의 특징은 잃지 않는다.

542. <창조적 진화>, 예술가가 그 어떤 창작 충동에 몰려 행동으로 옮기는 것처럼 자연계에 작용하는 삶의 힘도 마찬가지이다. 진화에 의한 변화는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특징을 지향하는 끈질긴 창작 충동을 통해 일어난다.

542. 인간은 진화를 거치면서 지능이 본능을 능가하는 동물이 되었다. --->불행한 것, 인간의 지능은 본능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고 말았다. 지능이 스스로 자기 개념적인 속박을 세계에 강요하여, 왜곡된 세계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

543. 베르그송은 이 직관의 진짜 시간을 우리가 합리적인 사고를 삼가고, 다만 나와 나의 몸을 시간의 흐름에 맡겼을 때, 우리를 압도하는 순수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하고 후기 실존주의자들이 수정한 존재론적 인식의 양식과 유사

544. 베르그송의 이론은 경험의 논리적인 특징보다도 오히려 심리적인 특징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545. 파블로프의 개와 같이 우리는 사고하기보다는 오히려 침을 흘리게 되어 있다.

546. 프로이트는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해서 결국 숨은 실재물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는 심리학으로 옮겼다.

546. 꿈을 꾸는 사람은 직접 경험에 근거를 갖는 각양각색의 요소와, 그날의 희망뿐만 아니라, 지나간 어렸을 적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희망을 자유롭게 섞어서 재건한다는 것만을 지적하면 충분하다.

547. 실제로 분석은 치료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이것 없이는 어떠한 시도도 전혀 할 수 없었다.

548. 물론 정신분석학이 의외로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 행동과 그 억압을 솔직하게 인정한 데 있었다.

   ☞ '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

550.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객관적 논리관이 서면, 순수하게 새로운 것은 하나도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불만이다.

552. 제1차 세계대전은 한 시대의 끝을 나타낸다.

552. 서양은 정치적으로나, 공업이 주는 물질적인 힘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나 단연 우세했다. 이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넘치는 자신감과 신도 진보편이라는 감정이었다.

553. 마르크스주의는 유연성이 결여된 채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유토피아적인 관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19세기의 유물이다.

553. 한 인물이 자기 노력에 의해 향상할 수 있다는 관념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것이다.

  ☞ 자기계발->자기실현->개성화

553. 중세에는 신이 정해준 지위에 모든 사람이 앉게 되고, 신이 정한 질서에 손을 대는 것은 죄를 저지르는 일이라는 관념을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이고 있었다.

554. 사회 복지의 규정에 대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묘하게도 비스마르크로, 그는 일종의 노동자 건강 보험을 도입했다. 이것은 반대당인 사회주의자를 앞지르기 위한 것이었다.

554. 오늘날 정부자체가 각종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 문제에 대한 전반적 태도에 영향을 끼친 결과이다.

555. 세계대전에 의해 이 파국으로 진보에 대한 확신은 희박해지고, 의심의 풍조가 나타났다. 이 풍조로부터 세계는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 지금은 의심에 대한 풍조를 지나 새로운 희망의 시대인가? 유러피언드림, 팍스차이나, 자본주의의 절정, 석유종말시대, 기후변화의 되돌릴 수 없음, 위기의 시대, 위험사회... 더욱 혼란스럽다.

55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낡은 '연맹'에 대치된 '국제연합'이 인간을 이 세상에서 멸망시키지 않도록 잘해 나갔으면 하는 소원이 간절하다.

557. 현대 사회는 훨씬 안정성이 없다.

558. 조직체가 현대 생활에서 압도적으로 중요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에, 비합리주의적인 철학적 사고방식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현대의 독재 체제를 움직여 왔던 권력 철학에 대한 반동이다.

559. 합리론자는 전반적인 기술은 주지만, 이것으로는 각 인간의 경험의 특이한 맛을 포착할 수는 없다... 합리론은 외부에서 세계를 다룰 때, 직접적인 생활 경험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이것은 내부에서 실존주의적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560. 인생의 목적은 될 수 있는 한 재미있게 사는 것이다.

560. 야스퍼스의 실존주의 철학 : 중심에 서는 것은 인간! 휴머니즘적, 그러나 실존주의는 기껏해야 주관적 휴머니즘을 제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561. 자아 존재, 즉 개인적 존재는 항상 자기를 넘어선 곳을 지향한다.

562. 야스퍼스, 철학이란 개인이 초월하려고 할 때의 노력이다.

562. 일반적으로 현존재의 단계가 이성에 지배되는 데 반해, 자아 존재는 기분에 지배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563. 사르트르의 경우,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관점은 극한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운명을 선택한다.(실존의 정의) 개인 삶에는 전통과의 연관성도 없고, 지나간 사건과의 연관성도 없다. 마치 모든 새로운 결단이 어떤 절대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564. 합리론자는 어떻게 자연이 작용하는지 인식할 때 자유를 본다. 실존주의자는 기분이 제멋대로일 때 자유를 발견한다.

565. 심리적 관찰을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나, 이 재료를 하나의 존재론으로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

566. 실존주의의 이론을 주장할 때 언어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느 쪽을 택하든,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얼마든지 이익을 가져다주는 샘솟는 시적 발로에 만족하면 된다.

 568. 실증주의 운동의 내부에는 한결같이 형이상학에 대한 멸시와 과학에 대한 경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571. 언어분석학파 : 논리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통적인 철학적 혼란은 언어의 조잡한 사용법의 결과라는 원리에 서 있다.

572. 앞에 아무것도 없는 시작을 구한다는 것은, 둥근 사각형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일단 이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지한다. 그런 일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기 때문이다.

  ☞ '세계는 처음에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찰

572. 비트겐슈타인 : 한 단어의 뜻이란 그 단어를 사용하는 방법

573. 아무리 해도 혼란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573.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말의 '문법'을 불완전하게 파악한 결과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단 규칙이 이해되면, 이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라는 에세이 75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언어의 한계에 대한 고찰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맺는말

575. 책을 한 권 숙도하는 것만으로는 그 범위가 제아무리 넓어도, 독자가 전문가가 되는 일은 없다. 실제로 단지 읽는 것만으로는 제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깊어지지 않는다. 지식의 습득 외에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이 자기 것이 된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진지한 숙고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575. 우리의 기술은 문자 그대로 백과사전적이지 않다. 사람도 사상도 부득이하게 어느 정도 선택했다.

575. 이 책은 역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상의 견해가 나온 배경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때때로 독자에게 역사를 상기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처음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문화적 전통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75. 동양의 지혜 : 두 세계는 따로 따로 나왔기 때문에 서양 사상만으로도 설명하는 데 지장이 없다.

576. 그리스 문명을 제외하면, 하나의 문명에서 철학의 움직임이 과학적 전통과 손을 잡고 나아가는 것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인의 진취적인 기상에 독자적인 활약 무대를 주는 것이다. 이 이원적 전통이야말로 서양 문명을 형성해 왔다.

576. 철학이 줄 수 있는 것은 경험적 연구의 결과를 바라보는 길이며, 이것은 과학이 발견한 것을 모아서 정리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틀이다. 관념론이 이 정도로만 제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한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577. 탐구의 대상인 세계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의 잘못과 착각을 만들어 내고, 때로는 자기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577. 어떤 신념이 옳다고 해도 이 신념은 우리에게 쾌락이나 위안을 주지 않는다.

577. 자연 자체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자연은 아무런 진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명제를 공식화하면서 오류에 빠진다.

578. 플라톤의 관점은 전체적으로 너무 낙천주의적이다.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때로는 이 지식을 악용하는 일이 있다. 여하튼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건, 그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578. 이성은 의지와 감정에 대한 억제력이나 지침으로서 작용할 수 있고, 실제로 작용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목적을 선택하는 것은 의지이다.

579. 중요한 점은 '당위'를 내포하는 전제가 없으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579. 실제로 사실 인간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만인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시야나 능력이 다르고, 다른 많은 면에서도 다르다. 그러나 윤리적 판단이 내려지는 한, 이것을 특수한 집단에 한정하는 것은 좋지 않다.

580. 자기 연구의 독립된 대상을 될 수 있는 대로 추구하는 것이 연구자가 할 일이다. 자기가 발견한 것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든 교란하든 상관 말고 탐구해야 한다.

580.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 1차세계대전 이후 그의 왕성한 사회활동을 떠올리는 구절이다.

581. 관용은 탐구가 왕성하게 되는 사회에서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탐구자를 진리가 이끄는 대로 가게 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위대한 추진자이다.

581. 인간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정말로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격언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로부터 내려온 서양철학의 흐름을 보는 듯하다. 

 

 

3. 내가 저자라면

다시 이 책을 읽으며

연구원 과정 중 가장 긴 책이었던 '서양철학사'를 읽어보려 했으나, 두번읽기 대상 책이 아니었고, 무작정 도전했다가 그 긴 여정에 질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신 러셀의 '서양의 지혜' 를 선택했다. 이번에는 이 책의 특징이었던, 철학을 도형으로 만들고, 기하학적인 은유를 사용한 삽화와 시대에 맞는 사진들을 유심히 보았다. 대중들을 위해 쉽게 쓰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두번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개별 철학자에 대한 설명이 아쉬웠다. 번역의 한계일수도 있으나, 철학자 마다 중요한 개념의 쉬운 설명이 빠져있어서 압축된 러셀의 해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주석이 없어 찾아볼 수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주석과 개념 설명은 <신>의 저저 김용규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것 같다.

하지만 가끔 등장하는 러셀의 날카로운 비판과 반어법을 사용한 유머는 역시 빛을 발했다. 그리고 합리적 회의주의자이길 자청한 러셀이기에 '신비주의' 냄새가 나는 철학은 폄하된 것 같다. '신비주의' 철학으로 소개된 에크하르트나 실존주의 철학이 가진 가치가 있을 듯 한데, 이 책에서는 짧게 지나갔다. 세계대전이라는 큰 인류의 재앙이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세계 평화를 위해 신비주의 보다는 이성의 힘에 의한 합리적 선택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철학사상사'를 쓴다면

<신>의 저자 김용규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를 '신'으로 봤고,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서양철학을 친절히 설명했으며, 나아가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의 전망까지 제시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동양문명을 꿰뚫는 코드는 무엇일까?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유교와 그에 대한 저항인 도교, 세상을 초월한 각성을 추구하는 불교. 이 세 가지 철학이 떠오르는데, 공통점은 아마도 '조화롭게 사는 삶'이 아닐까 한다. 서양이 개인주의를 지향한다면, 동양은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와서는 동양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건 그 이전의 이야기이다. 자연과의 조화와 안정된 사회를 위한 체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가 좀 다른 성격을 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불교가 끼친 사회적 역할은 다툼과 성취의 무의미함을 보여준 것이니 결국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동양 정신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철학사상삭를 쓴다면 이런 동양의 '공동체 지향성'를 중심으로 현대에 필요한 공동체 정신을 찾아보고 싶다. 끝없이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부족한 부분이 그 점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잘나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함께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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