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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일 01시 2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듀랜트..JPG
 
 1913년 뉴욕 시 페레 모던 스쿨에서 교수활동을 하던 중 제자 에이다 코프먼과 결혼했다. 후에 그녀는 남편이 사용하던 애칭 에어리얼로 개명한다. 그 이후 그들은 1935년부터 75년까지 전11권으로 구성된 <문명이야기>를 차례대로 발표하였다. 에어리얼은 <문명이야기> 각 권마다 집필에 참여하였지만, 7권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가 출판된 1961년에야 그녀는 작품의 공저자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 그녀는 공동 집필자로서 나머지 작업을 계속했고, 제 10권 <루소와 혁명>은 남편과 공동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이들 부부는 1977년 발간된 <두 사람의 자서전>에서 자신들의 공동 작업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집필에 참여했지만 자신의 존재는 숨겨야 했던 에어리얼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묵묵히 남편을 도와 6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그녀의 존재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꾸준한 모습으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갔을 것이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퓰리처상을 공동으로 수상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공동 작업에 관한 책도 내지 않았을까 한다. 멀고도 가까운 무촌사이인 부부가 11권의 책을 내면서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에어리얼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에 듀랜트는 세상에 한 점을 남기는 책을 발간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한 조각의 지혜도 영원한 기쁨이다. 라고 말 했듯이 누구보다 지혜롭게 자신을 그리고 부부사이를 가꾸며 살았기에 결코 쉽지만을 않았을 11권의 공저 작업을 멋지게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명 이야기>
 
고대 인류 문명의 기원에서 시작해 서양사를 꿰뚫고 나폴레옹 시대까지, 그리고 1930년대의 인도, 중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1만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역사책이다. 이 책의 방대한 분량과 철학을 했던 사람 특유의 사변과 통찰로 듀란트는 동서양을 통섭하면서 다채롭고 풍성하게 역사서술을 이끌어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백과사전에 버금가는 역작'이라는 평을 듣는다.

 듀란트는 서문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선을 긋듯 역사를 나누어 서술하는 통상적인 방식은 인류 삶의 통일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다"며 "역사는 통시적인 동시에 공시적으로, 분석적인 동시에 종합적으로 서술돼야 마땅하다"고 피력했다. 듀란트는 이 책에서 기존 역사서들이 범하고 있는 서구 중심적 편견을 극복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대부분 그리스, 로마로부터 시작하는 서양의 보통 역사책과 달리 먼저 인간이 어떤 단계를 밟아 야만성을 벗고 문명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탐색에서 출발해 문명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지는 근동을 천착하고, 바로 이어서 인도와 중국, 일본의 문명사를 서술함으로써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서구만의 산물이 아님을 먼저 밝힌다. 듀란트는 "우리의 서양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며 "이는 단지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 동양의 문명들이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 같은 성찰을 바탕으로 서구의 퇴조와 중국을 비롯 아시아의 부상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시대를 앞서 예견하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듀란트는 서문에서 "지금 우리는 유럽의 패권이 급격한 종말을 맞고 아시아가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어, 동양과 서양 사이의 전반적 갈등이 20세기의 주요 테마가 될 수밖에 없는 듯 보이는 역사적 순간에 와 있다"고 예견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글-철학의 효용에 대하여

우리가 지혜를 찾을 수 있다면 그 밖의 모든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14] ➜지혜를 통해서 모든 것이 나에게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것들에 집착하며 내가 정말로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나보다.

과학은 어떻게 치료하고, 어떻게 죽이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사망률을 줄이는가 하면 전쟁에서 사람들을 대규모로 죽입니다. 오직 지혜-모든 경험의 빛 속에서 조절된 욕구-만이 우리에게 언제 치료하고, 언제 죽어야 하는지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과정을 관찰하고 수단을 구성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모든 목적을 비판하고 조정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15]

에머슨은 “제군은 참다운 학자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누구에게나 내가 배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의 학생이다” 라고 말합니다. [17]

플라톤

그는(소크라테스) 일을 하지 않았으며, 내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이 식사에 초대하면 언제든지 가서 먹었다. 그가 생리학적인 영양의 모든 지시를 주었으므로 제자들은 그의 참석을 즐거워했는지도 모른다. [22] ➜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내일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언제나 그의 지혜를 얻고자 그를 초대하는 것을 기꺼이 즐겨 했으리라.

‘불가지론(不可知論)’ 즉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한 가지만을 안다’ [23]

철학은 사물의 의심, 특히 자기가 소중히 마음에 고수해 온 신념, 즉 교리나 원칙을 의심하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들 신념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확고한 것으로 되었는지, 또 남모르는 소망이 사상의 옷 갈피에 욕구를 집어넣어 어느새 그 확실성을 만든 것이 아닌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검토하기 전에는 진정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23]

➜ 철학도 나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되어 하나씩 범위를 넓혀가는 것임을 철학의 지식만을 쌓아놓고서 논쟁을 위한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충격만큼 우리를 교육하는 것은 없다. 조용한 농업국민을 신권(神權)정치로 통치하는 학식 계급에 대한 기억은 플라톤의 사상에 생생하게 남아서, 그가 유토피아(<국가론>)를 쓰는데 큰 역할을 했다. [30]

우리는 단순한-이를테면 제화공 같은-어떤 일에 특별한 훈련을 거친 자만이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정치에서도 투표를 많이 얻을 수 있는 자만이 도시나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줄 안다고 플라톤은 탄식하였다. 우리가 병들면 용한 의사-전문 분야에 의술이 보증되는 경력을 가진 의사-를 부르지, 잘생긴 의사라든가 말 잘하는 의사를 부르지는 않는다. 국가 전체가 병들었을 때 왜 좀 더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의 봉사와 지도를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일까? [37]

➜ 이 당연한 것을 우리는 아직도 표면적인 것에 휩쓸려 내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발등을 찍는 투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무능과 부정을 공무에서 몰아내고 공동의 복리를 위해 통치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준비할 방법을 강구할 것, 이것이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37]

우선 ‘열 살 이상의 도시 주민을 모두 시골로 보내어 그들이 양친의 습관에 머물지 않도록 할 것’ (<공화국>)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소년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을 본받아 끊임없이 타락한다면 우리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다. [39]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우리들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는 용기를 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도 준다. 신앙을 가지고 싸우는 자는 이중으로 무장되어 있는 셈이다. 비록 어떠한 신앙도 증명되지 않고, 신은 결국 우리들의 사랑과 희망이 의인화된 이상(理想)에 불과하며, 영혼은 칠현금(七絃笒)의 소리와 같아서 외형인 그 악기와 동시에 죽는다 해도 신앙이(이것이<파이돈>이나 파스칼의 의론(議論)과 비슷하지만) 우리를 해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며,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수많은 이익을 줄 철학일 것이다. [42]

플라톤이 말하는 귀족정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을 특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46]

관직은 ‘교육에 의해 선출된다’는 균등한 기회를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계급의 차별도, 지위나 특권의 상속도 없으므로 가난한 인재의 등용을 막는 것은 없다. 통치자의 자식도 구두닦이의 자식과 같은 평민에서 출발, 같은 취급을 받고 같은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47]

‘평화란 단순한 어휘에 지나지 않는다.’ [51]

완전한 사회란 모든 계급과 모든 구성원의 본성과 재능에 가장 적합한 일을 하고 있는 사회이며, 어떤 계급이나 어떤 개인도 서로가 남을 방해함이 없이 모두가 조화된 전체를 산출하기 위해 저마다 협력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가일 것이다. [52]

이 정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으며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다. 올바른 사람이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보상에 맞는 가치를 대신 주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52]

정의란 영혼의 여러 부분의 그 질서와 미(美)이므로 정의와 영혼의 관계는 건강과 신체와의 관계 같은 것이다. 모든 불행은 부조화, 즉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그 사람 자신 사이의 부조화이다. [53] ➜ 나와 나 자신과의 부조화를 지혜롭게 조화시킬 수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조화도 조화시킬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안의 여러 모습들과 나를 조화시키는 작업 안에서 수많은 나와 만나게 되고 그 모습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보이게 될 것이다. 사람과 자연과의 부조화는 사람이 자연을 훼손시키려 들지만 않는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진리는 자주 그 옷차림을 바꾸지만-아름다운 여인이며 누구나 그렇듯이-그 몸은 언제나 같다. [53]

그의 국가는 정적(靜的)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창의를 적대시하고 변화를 증오하는 완고한 노인들에게 통치되는 구폐(舊弊)한 사회로 될 가능성이 많다. 이 국가에는 과학이 있을 뿐 예술은 없다. 이 국가는 과학적 정신의 중요한 질서를 찬양하고, 예술의 혼인 자유를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美)를 숭배하면서도 오직 미를 창조하는 예술가를 추방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스파르타나 프러시아 같은 나라가 될 수는 있지만 이상국가는 될 수 없다. [58]

이 세상이 원하는 것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통치이다. 그의 사상을 우리들 자신의 시대와 제한에 적용시키는 것은 우리들이 할 일이다.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플라톤이 말했듯이 선거권을 제한할 수는 없으나 관직의 획득에 제한을 가하여 플라톤이 바라는 민주정치와 귀족정치의 혼합을 확보할 수는 있다. 정치가도 의사처럼 철저한 전문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두말없이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59]

➜ 철저한 훈련은 필요하지만 과연 그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도대체 언제쯤 제대로 된 정치가들이 나라를 이끄는 것을 볼 수 있으려나.

그 자신도 달성하기 어려운 이상을 그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러한 욕망을 그리는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보다 나은 세계를 상상하여 적어도 그 일부분이나마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계획하는 동물이다. ‘우리는 앞뒤를 살펴보고 없는 것을 간절히 동경한다.’ [60]

비록 우리가 이상하는 바를 그려만 놓는다 해도 그 그림은 우리들의 행동목표와 모범이 되어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빛을 좇는다면 우리의 유토피아는 언젠가 지상에서 실현될 것이다. [60]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과학

간단히 말하면 논리학이란 정확한 사고의 기술과 방법이다. 그것은 모든 학문과 과학 및 기예(技藝)의 방법이며, 음악 속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올바른 사고 과정은 어느 정도까지 규칙에 환원할 수 있으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므로 논리학은 하나의 과학이다. [71]

‘만일 나와 얘기하고 싶거든 우선 당신의 용어에 정의를 내려 주시오’ 하고 볼테르는 말했다. 논자들이 용어에 정의를 내려두기만 한다면 아무리 많은 논쟁이라도 짧은 말로 압축될 것이다. 진지한 의론에서는 중요한 모든 용어를 엄밀히 음미하고, 정의를 내려 두어야 된다. 그것은 논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논리학의 진수(眞髓)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며 사람의 정신을 가차 없이 시험하지만, 그러한 작업이 끝난 뒤부터는 편하다. [71] ➜ 이럴 수 있다면 사람간의 오해도 줄어들 것이고 제대로 된 논리학이 이루어지며 토론 또한 말꼬리 잡기 식이 아닌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말이라는 것이 의사소통에 꼭 필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오해들이 생겨나게 되는지. 때론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간단한 제스처하나에 모든 것이 명확하게 소통되는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스스로의 비난거리를 항상 많이 가지고 있다. 비슷한 것이라도 대조해 보면 차이가 확실히 나타나는 것처럼 오로지 비슷한 자들만이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며, 가장 무서운 전쟁은 목적이나 신앙의 극히 적은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73]

자기 저서의 서문에 있는 주제에 대한 선인(先人)의 공헌에 대해 역사적인 스케치를 하고, 그 공헌의 어느 것에나 지독한 논박을 가하는 것은 우리 철학자의 습관이다. 바로 이 동포 살해광의 덕분으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지식을 대부분 얻고 있는 것이다. [77]

무엇을 물을 줄 아는 것은 이미 반은 안 것이다. [80]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불사(不死)를 주기 위해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불사의 영혼은 현실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고’이다. [83]

가장 고상한 예술은 감정에 호소할 뿐 아니라 지성에도 호소한다. - 예를 들면 교향악이 화성(和聲)과 반복 진행에 의해서 뿐 아니라, 구성과 발전에 의해서 호소하듯이 - 그리고 그 지적 쾌락은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환희의 최고 형식이다. [84]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의 작용은 카타르시스, 즉 정화에 있다. 사회적 구속의 압력으로 우리들 내부에 축적되어 있다가 비사회적인 파괴 행위로서 폭발하기 쉬운 감정은 무해한 극적 흥분으로 정화되는 것이다. [84]

겁과 경솔함의 사이에 용기가 있고, 인색과 낭비 사이에 관대가 있으며, 게으름과 탐욕 사이에 명예심이 있고, 비하(卑下)와 거만 사이에 즐거움이 있으며, 비밀과 누설 사이에 정직(正直)이 있고, 무뚝뚝함과 익살 사이에 즐거움이 있으며, 호전성과 아첨 사이에 우정이 있으며, 햄릿의 우유부단과 돈키호테의 행동력 사이에 극기가 있는 것이다. [86]

중용은 수학의 평균처럼 정확하게 산출할 수 없다. 중용은 각국면(各局面)에 부수하는 상황에 함께 동요하고 오직 원숙하고 순응하기 쉬운 이성의 눈에만 보인다. 탁월은 배움훈련으로써 얻어진 기술이다. 우리는 덕 혹은 탁월을 가지고 있으므로 바르게 행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게 행위 했으므로 덕 또는 탁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86] ➜ 바르게 행위했으므로 해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일상의 행동 하나 하나에 좀 더 신중을 기해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느 순간에서도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상당한 정도의 재산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가난은 사람을 인색하게 하고 욕심쟁이로 만들지만, 재산은 사람에게 ‘귀족적인 침착한 태도와 매력의 원천인 걱정과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87]

‘친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친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완전한 우정으로서는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될 수는 없다.’ [88]

큰 소리나 급한 걸음은 근심이나 불안에서 온다. [89]

덕이 없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최악의 적으로서 고독을 두려워하나, 그는 자기 자신의 제일 좋은 친구로서 은둔을 즐긴다.[89]➜ 혼자서는 뭔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고독을 견대지 못하는 것은 그 만큼 자신과의 소통이 어렵다는 말이 아닐까

‘복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자는 좋은 명령자도 될 수 없다. [94]

‘인간은 완성되면 가장 선한 동물이 되나 내버려두면 가장 악한 동물이 된다. 왜냐하면 부정이 무장되면 점점 위험해지는데, 인간은 날 때부터 극히 나쁜 목적에도 사용할 수 있는 지성과 성격상의 특질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덕(德)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동물 중에서도 가장 맹악(猛惡)한, 탐욕과 육욕의 덩어리이다. [94]

예술품을 잘 평가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예술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때도 있다. [96]

‘다수 쪽이 소수보다도 부패되기 어렵다. 대량의 물이 소량의 물보다도 썩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은 노여움이나 그 밖의 격정에 지기 쉽고 그 경우 그 판단은 필연적으로 정도를 벗어난다. 그러나 다수의 인간이 모두 격정에 휩쓸려 동시에 길을 잘못 들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96]

종합적 사고와 통일적 철학의 결핍 때문에 항상 새로운 이론이 늘어나고, 우리의 정신은 혼돈된 특수과학에 압도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인간 가능성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99] ➜ 한 조각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이 거대한 줄 알고 더불어 나아가기 보다는 독자노선을 걷기를 더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가치는 결코 절대적이 아니고 단순히 상대적이다.······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성질은 당연히 있어야 할 만큼 풍부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가치를 두고 ······· 그것을 조장하고 양육한다. 이 평가의 결과로서 우리는 그것을 덕이라 부른다. 그러나 만일 같은 성질이 남을 정도로 풍부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악덕이라 부르고 그것을 억압하려 할 것이다.’ [104]

프란시스 베이컨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라고, 로마의 스토아 학파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다. [108] ➜ 만족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얻게 됨으로써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안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며 그럴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물은 머무르지 않고 모두 흐르네. 조각은 조각에 붙어 물건이 되니

우리가 인정하고 이름 지어 줄 때까지 사물은 점점 녹고 남는 것은 없어라. [109]

머무르는 것은 하나도 없나니, 너 바다는 사라지고 부드러운 아지랑이가 되어

달 밝은 모래펄도 너의 행방을 모르고, 곧 새로운 바다가 나와

하얀 파도는 낫으로 목장의 풀을 베듯 만(灣)을 깨문다. [110]

사람들은 미지의 것을 숭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려고 생각했다. 생생한 모든 정신은 새로운 확신에 자신 만만했으며 장벽은 무너지고 인간의 활동을 제한하는 아무런 구속도 느끼지 않았다. ‘저 작은 배가 한 개의 천체와 같이 지구 전체를 한 바퀴 돈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행복이다. 이러한 시대야말로 고대의 사람들이 non plus ultra(더 앞으로 가지마라)고 한 데 대하여 plus ultra(더 앞으로!)라고 정당하게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것은 성취·희망· 및 활력의 시대,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시와 진취 시대, 하나의 소리를, 즉 시대의 정신과 결의를 요약하는 종합적인 인물을 고대했던 시대였다. [113]

“학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나태이다. 학문을 너무 많이 장식으로 쓰는 것은 허식이다. 학문의 척도로만 판단하는 것은 학자 기질이다.······교활한 사람은 학문을 욕한다. 단순한 사람들은 학문을 감탄하다. 총명한 사람은 학문을 이용한다. 학문은 학문의 용도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학문 이외의 지혜, 즉 관찰에 의해서 얻어진 학문 이상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118] ➜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을 쌓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지혜는 등한시 하고 지혜의 부족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삶의 어려움 앞에서도 적장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혀로 맛보아야 할 책도 있으며 꿀꺽 삼켜 버려야 할 책도 있으나,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할 책은 적다.’ [119]

무감동(무관심) 때문에 노후한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21]

‘본성은 가끔 은폐되고 압도될 수 있지만, 소멸되는 일은 드물다. 강압은 그 보복으로 본성을 한층 광포하게 한다. 가르침이나 설교는 본성이 귀찮게 조르는 것을 조금은 누를 수가 있으나, 오로지 습관은 본성을 개조하고 정복하다.······그러나 인간으로 하여금 본성에 대한 승리를 과신케 하지 마라. 왜냐하면 본성은 오랫동안 묻혀 있겠지만, 가끔 유혹에 따라 소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처녀로 둔갑한 고양이가 정숙하게 식탁 앞에 앉았다가 쥐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쫓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전혀 그런 기회를 주지 않거나 자주 기회를 주어 마음이 너무 움직이지 않도록 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를 해야 할 것이다.’ [121]

“젊은이들은 판단보다 발명에, 상담보다 실행에, 기초가 잡힌 일보다 새로운 계획에 알맞다. 왜냐하면 노련함은 그 연령의 범위 내에서 그들을 지도하지만, 새로운 일에서는 그들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평소의 행동 방법이나 처리를 보면 손에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끌어안으며(...) 노련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의를 지나치게 제기하고, 상담이 너무 길며, 모험이 너무 적고, 후회가 너무 빠른데다 웬만해서는 일을 완전히 완결 짓지 않고 흔히 중도에서 만족해 버린다. 어떻게 해서든 양쪽을 결합하는 일이 좋을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양자의 장점이 서로의 결점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4]

‘최선을 택하라, 습관은 그것을 유쾌하게 하고 용이하게 할 것이다.’ [124]

왜냐하면 ‘습관은 인간생활의 제일이기 때문이다.’ [124] ➜ 습관은 나의 일상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일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몸에 익숙해진 나의 습관이 생활의 척도가 되어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남의 마음의 자물쇠를 여는 가장 확실한 열쇠는 그들의 기질과 성질 그리고 목적과 계획을 검토하는 일이다. 비교적 약하고 단순한 사람은 그 기질을 보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고, 비교적 세심하고 주의 깊은 사람은 그 계획을 보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 [129]

때때로 꿀과 가시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자유로 관대한 마음의 불꽃을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30]

‘겉치레는 정치상의 결함이기보다 도덕상의 결함이다.’ [130]

‘과학이 조금밖에 전보하지 못한 데는 또 하나의 유력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 그 자체가 올바른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로를 바르게 달릴 수 없다.’ [130] ➜ 아무리 빠른 속도로 전력질주 하여 나아간다고 해도 목표가 올바른 위치에 놓여있지 못하다면 삶 또한 어긋나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작은 한 조각의 지혜도 영원한 기쁨이다. [131] ➜ 지혜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한 조각 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나보다.

베이컨이 말하는 우상이란-이것은 아마도 프로테스탄트가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을 반영하고 있겠지만-현실로 보여진 그림, 또는 실체를 잘못 본 사상이다. 오류는 이러한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으로써, 논리학의 최초의 문제는 이 오류의 근원을 규명하여 그것을 막아 버리는 일이다. [134]

이 오류 중 첫째는 종족의 우상으로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오류 추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은 사물의 척도라고 잘못 주장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지각은 감각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인간과 관계있는 것이며 우주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울퉁불퉁한 거울이 그 자신의 성질을 각기 다른 대상에 주어 그 대상들을 왜곡하고 추하게 하는 것과 흡사하다. [134]

그의 오류 중 두 번째 오류를 베이컨은 동굴의 우상이라고 부른다. 개인 특유의 오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동굴로써 자연의 빛을 굴절시키거나, 혹은 변색시키다.’ 이것은 본성 및 교육과 심신의 기분 내지 상태에 따라 형성된 각자의 성격이다. 어떤 마음은 날 때부터 분석적이어서 곳곳에서 그 차이점을 보고, 어떤 마음은 날 때부터 종합적이어서 곳곳에서 유사점을 본다. [135]

세 번째 오류는 시장의 우상으로 ‘인간 상호의 교섭 및 교제에서’ 생기는 우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에 의해서 통하지만, 언어란 인간의 두뇌에서 만들어졌으므로 나쁜 말이나 마땅치 못한 말은 정신에 놀랄 만한 지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35]

나의 견해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는 철학 체계는 모두 비현실적이고 극적인 형식으로 그들 자신이 만든 세계를 묘사하는 무대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 철학의 극장에서 상연되는 극에서 여러분은 시인의 극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대용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역사적 실화보다도 잘 짜여져 있어 기품도 높고, 우리가 바라는 것에 한층 가깝다는 것을.

플라톤이 묘사한 세계는 단순히 플라톤이 생각해 낸 세계에 불과하고, 현실의 세계를 묘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플라톤 자신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136]

최후의 순간까지 연구에 종사하였는데, 말하자면 전장에서 쓰러지고 싶었던 것이다. [148]

수필 <죽음에 대하여>에서 그는 ‘상처를 입고 따뜻한 피가 흘러도 상처를 입은 순간에는 거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저처럼 그도 자기의 숙원을 이루었다. [148]

스피노자

“비록 내가 때때로 나의 자연적 오성으로 수집한 결과가 진실이 아님을 발견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불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 자체가 유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나날은 탄식과 슬픔속이 아니라 평화와 밝음과 환희 속에서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160]

그것은 단순히 면학과 충실한 교수만으로는 좀처럼 생계를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가마리엘(바울의 스승인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이 말했듯, 노동은 사람을 유덕하게 한다. 그러므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학자는 결국 부랑인이 되고 만다’는 이유에서다. [160]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학자들이 그의 지혜 때문에 그를 존경했듯이, 순박한 사람들은 그의 다정함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철학자나 주회 의원들이 서민의 열(列)에 함께 서서 그를 최후의 휴식처로 보냈다. 그리고 갖가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묘소에 모여들었다. [164]

마음은 알면 알수록 자기의 힘과 자연의 질서를 더욱 잘 이해하고, 더욱 자기를 잘 지도하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음은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쉽게 자기를 무용한 사물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68]

철학서에는 뛰어넘어 읽어서 손해가 없을 만한 곳은 거의 없다. [171]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도 되고 악도 되며, 선도 악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음악은 우울증에는 선이 되고 애도자에게는 악이 되면, 죽은 사람에게는 선도 악도 아니다. [175]

‘모든 사물은 될 수 있는 한 자기의 존재를 고집한다.’ ‘모든 사물이 자기의 존재를 고집하려고 하는 노력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에 불과하다.’ 사물이 자기를 고집하는 힘은 그 존재의 핵심이며, 본질이다.(...) 우리는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려 하는 것이다. [179]

기쁨은 완전성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인간이 옮겨 가야 할 완전성을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났다면 인간은 기쁨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격정은 이행이며, 모든 감정은 완전성과 힘에서 생기며, 그것은 또한 완전성과 힘을 얻으려는 움직임이다. [181]

‘덕의 기초는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며, 행복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데 있다.’ [181]

후회는 덕이라기보다는 결함이다. ‘후회하는 사람은 이중으로 불행하며 이중으로 약하다.’ [182] ➜ 후회라는 것이 과거의 나의 선택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그 선택을 할 때는 시간이 흘러 나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않고 당시에는 좋은 선택을 한다고 한 것 일거다. 시간이 흘러 그 선택이 후회가 되면 그 때의 그 선택을 한 나를 그리고 그 순간을 후회하고 있는 나에게 두 번 실망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를 더욱 보잘 것 없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지 않을까?

‘자기를 헐뜯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에 가장 가깝다’고 스피노자는 말하고 있다. [182]

‘오만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과 남의 결점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이나 공적을 감탄하는 열등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기뻐하고, 끝내는 자기를 가장 잘 칭찬해 주는 사람들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오만한 사람만큼 아첨하는 말에 사로잡히기 쉬운 자는 없기 때문이다.’ [182]

그는 미움이란 어떻게든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마음이라고 믿었다. 미움은 미움으로 갚는 것보다 사랑함으로써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간단하다. 왜냐하면 미움은 보복 당한다는 감정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미워하는 상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는-스피노자는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믿고 있는 것 같으나-사랑은 사랑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는 관계상 미움과 사랑과의 감정적 갈등에 고민한다. 그 결과 미움은 무너져 힘을 잃는다. 우리는 이길 자신이 있는 적을 미워하지는 않게 되므로, 미움이라는 것은 자기의 단점과 두려움을 자백하는 것이 된다. ‘바르지 못한 보복적인 증오로써 복수하려는 자는 비참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미움을 사랑으로 쫓아버리려는 자는 기쁨과 확신으로 싸운다. 그는 상대가 한 명이든 많은 사람이든 똑같이 대항하며, 거의 행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정복된 사람들은 기꺼이 그에게 복종한다.’ ‘정신은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너그러움에 의해서 정복된다.’ [182]

‘감정은 반대의 한층 강력한 감정이 아니면 저지할 수도 제거할 수도 없다.’ [183]

위대하다는 것은 인류의 위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없는 편파와 공허를 극복하여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185]

‘자유인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186]

조지 엘리엇의 이른바 ‘명성에 의한 영생’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우리의 사상과 생활 속의 가장 이성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영원한 영향력을 갖고 살아남는다고 한다. [187]

모든 고귀한 것은 희귀한 것과 마찬가지로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189]

볼테르와 프랑스의 계몽주의

그는 펜 끝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상대가 화해할 것을 제의해 오면 즉시 무기를 거둬 버리는 매우 모순에 찬 사람이었다. [199]

‘나의 직업은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것은 항상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말한 것은 언제나 비할 데 없이 훌륭하였다. [200]

‘일을 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게으른 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은 선하다‘라고 그는 말했다. [200]

‘철학을 하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204]

‘아무 결과도 생기지 않는 하나의 사건과 역사의 관계는 알맹이 없는 배낭과 군대처럼 방해물인 것이다. 우리는 사태를 크게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정신은 대단히 작아서 사소한 사건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219]

도덕은 신학이 아니라 사회학을 기초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변천하는 사회의 필요가-변함없는 계시나 교의가 아니라-무엇이 선(善)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229]

비록 철학이 몽테뉴의 “Que sais-je?"(내가 무엇을 아는가?) 라는 완전한 회의로 끝난다 하더라도 철학은 인간의 가장 크고 고귀한 모험이다. [232]

허위는 상상에서 새로운 체계를 계속 엮어 나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식의 새로운 진보에 만족할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232]

과거는 문으로 쫓아내면 창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문제는 어떠한 변화에 의하여 우리들이 그 속에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불행과 부정을 감소시킬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일이다. [243]

이것은 옛날부터의 악순환이다. 인간이 제도를 만들고, 제도가 인간을 만든다. 어떤 변화가 이 테두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볼테르와 자유사상가들은, 이성은 인간을 교육하고 변화시킴으로써 서서히 평화로운 가운데 이 테두리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테두리는 본능에 의한 격정적 행동이 모든 낡은 제도를 타도하고, 정신의 명령에 따라서 자유, 평등 및 우애가 지배하는 새로운 제도를 세우지 않는 한 깨뜨릴 수 없다고 루소와 급진론자들은 생각했다. 아마도 진리는 둘로 나누어진 두 진영의 사이에 있다. 따라서 본능은 만물을 파괴할 것이 틀림없지만, 이성만은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있다. [245]

‘보잘것없는 나의 선행은 나의 최상의 사업입니다.······나는 공격을 받으면 악마처럼 싸웁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좋은 놈이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웃고 맙니다.’ [246]

칸트의 독일 관념론

60년간에 걸쳐 그는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실제로 그의 기본 방침 중의 하나는 보통의 능력을 가진 제자를 좀 더 잘 돌보다 준다는 것이었다. 둔재는 도와 줄 길이 없고, 천제는 자력으로 해나갈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260]

진리는 그 필연성을 우리 정신의 내적 구조에서, 즉 우리들의 정신이 그렇게 밖에는 작용할 수 없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방식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은-이것이 결국 칸트의 최대의 논제이지만-경험이나 감각이 그 절대적인, 그리고 변덕스러운 의지를 새겨 놓는 수동적인 밀초도 아닐 뿐 아니라 정신의 여러 상태의 계열 내지 집단에 대한 단순한 추상적인 명칭도 아니다. 모든 감각을 틀에 넣어 조정하여 관념을 만드는 능동적인 기관이며, 이 기관은 경험의 혼돈된 다양성에서 사고의 질서 정연한 통일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64]

감각 또는 관념의 연합은 단순히 공간적, 시간적 접근에 의해 일어나는 것도, 경험의 유사·새로움·빈도·강도에 의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의 목적에 따라 결정된다. 감각과 사고는 하인처럼 우리가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가 부르지 않는 한 오지 않는다. 그들의 주인이며 그들을 선택하고 지휘하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266]

관념론(Idealismus)이란(...)모든 대상의 대부분이 우리들의 지각과 오성의 형식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270]

우리가 종교의 기초로서 필요한 도덕적 명령은 절대적 명령, 즉 정언적명령(定言的命令)이어야 한다. 우리들의 모든 경험 속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다른 것이 아닌 우리의 도덕의식, 즉 유혹에 직면하여 이것이 나쁘다든가, 저것이 좋다든가 하는 피할 수 없는 느낌이다. 우리는 유혹에 굴복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느낌은 남는다. ‘아침에는 훌륭한 결심을 하고 저녁에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 [273] ➜느낌이 남아있다는 것은 자각은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자각을 확장시키면 훌륭한 결심도 실행으로 옮겨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결심을 새롭게 한다. 후회의 쓴맛을 주어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정언적 명령, 즉 ‘그대 행위의 격률(格率-주관적 원리)이 그대의 의사에 따라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는 우리들 양심의 무조건적 명령이다. [273] ➜ 요즘 과연 사람들의 마음속에 양심이 얼마나 살아있는지 아니 양심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잊어버릴만 하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막말녀·남 사건부터 묻지마 폭행까지 세상이 갈수록 왜 이렇게 험해 지는지 그렇기 때문에 작은 나눔들이 더욱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그대의 행복을 걱정하지 마라! 그대의 의무를 행하라. ‘도덕이란 결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을 알게 되는 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남을 위하여 행복을 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완전성을 구해야 할 것이다.-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거나 고통을 가져오게 할지라도 너 자신 안에 완전을, 다른 사람들 안에 행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너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나 모든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 그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결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동하라’ [274] ➜ 행복은 어떻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인 것 같다. 그러면 시선을 달리하고 세상 곳곳의 내 주의 곳곳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깐.

인생은, 악인이 반드시 벌을 받고 덕행은 반드시 보답 받는다는 대중이 즐기는 저 연극 같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는 뱀의 지혜가 비둘기의 온순함 보다 더 필요하며, 도둑은 훔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274]

진정한 교회는 아무리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할지라도 공통되는 도덕법칙의 숭배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같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살았으며, 또 생명을 버렸던 것이다. [276]

‘그리스도는 신의 나라를 지상에 접근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해하여 우리들 사이에 신의 나라가 아닌 성직자의 나라를 건설했다.’ [277]

인간은 화합을 원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류에게 무엇이 좋은가를 더 잘 알고 있다. 거기서 자연은 인간이 힘의 긴장을 새롭게 하도록, 따라서 자연적 소질을 더 발전시키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불화를 원한다. [279]

‘인간은 반드시 그 자신이 절대적 목적으로서 존경되어야지 다른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이용됨은 특유한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더럽히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281]

<논리학>은 추리방법의 분석이 아니라 추리에 사용되는 개념의 분석이다. [291]

우리들의 모든 사고에 늘 쓰여지는 이 기본개념을 세밀히 분석하는 일, 그것이 철학의 기초이다. 이들 개념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관계의 개념이다. 모든 표상은 관계의 집단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다른 것에 연관시켜 그것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인식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어떠한 종류의 관계도 없는 표상은 공허하다. [291]

쇼펜하우어

위대했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나는 이처럼 철저히 끝나 버린 세계 속에서 내가 지금 젊지 않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고 괴테는 말했다. [297]

어머니의 사랑을 몰랐던-그보다 더욱 곤란한 일은 어머니의 미움을 받았던 것이다-사나이가 이 세상을 좋게 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301]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소음의 양(量)은 그 사람의 정신능력에 반비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양은 정신능력의 척도라고 볼 수 있다.’ [301]

“사람이 후세에 속해 있으면 있을수록, 다시 말하여 인류 일반에 속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시대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낳아 놓은 것은 특히 그 시대를 위해서 바쳐진 것이 아니라, 즉 시대 자체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시대라는 것이 인류의 일부분인 경우에만 이 시대에 소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또 거기에는 시대의 빛깔이 칠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02]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평범한 것뿐이다. [305] ➜평범한 것뿐이기는 하지만 그 평범한 것이 채워진 다음에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

진리는 언제나 오직 소수의 사람들의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범한 사고방식으로 음미할 소수의 사람이 나타나 주기를 침착하고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그러나 인생은 짧고 진리는 멀리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가. [305]

“우리는 결코 외부로부터 사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설령 아무리 탐구한다 하여도 우리는 고작 심상이나 명칭밖에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입구를 찾아 성곽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그 장면을 스케치해 놓는 사람과도 같다.” [307]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만약 우리들 자신이 정신의 궁극적 본성을 규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외계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게 될 것이다. [307]

우리는 욕구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면 어떤 것을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그 욕구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308]

“우리가 남과 다투고 있다고 하자. 여러 이유와 설명을 들어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애쓰는 데도 결국 상대방에게는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문제는 상대방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화나는 일은 없다.” [308]

언제나 지성은 욕망에 예속하고 욕망의 앞잡이인 것처럼 보여 지성이 의지를 대신하려고 하면 혼란이 일어난다. 오직 반성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사람만큼 과오를 범하기 쉬운 사람은 없다. [308]

신체의 모든 부분은 의지의 표현인 모든 중요한 욕망에 대응할 것이며, 그러한 욕망들의 가시적 표현일 것이다. [309]

지성은 지치는 일이 있지만 의지는 결코 지치지 일이 없다. 지성은 수면을 필요로 하지만 의지는 수면 중에도 활동한다. [309]

의지는 살려고 하는 의지이고, 이 의지는 영원한 적은 죽음이다. 의지는 어쩌면 죽음조차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12] ➜ 의지는 죽지 않는 이상 늘 우리들 마음 안에 살아있다는 말인데, 각자 안에 숨어있는 그 의지를 깨울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지 않을까?

‘만족은 행복보다도 불행을 낳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만족의 요구는 흔히 그 사람의 개인적 행복과 그것을 뒤엎어 버릴 만큼 강하게 충돌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체는 그 안에 분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즉 만족된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고 그것이 충족되면 또다시 새로운 욕망이 생긴다. 이렇게 하여 무한에까지 이른다. [317]

한편 인생은 악이다. 왜냐하면 고통이 인생의 기초적 자극이고 실상이며, 쾌락이란 단지 소극적인 고통의 정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17]

만일 모든 악이 제거되고 투쟁이 모두 그쳤다면 권태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같은 관계로 인생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인간이 모든 고통과 번뇌를 지옥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천국의 손에는 권태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들은 성공하면 할수록 권태를 느낀다. [318]

살려는 의지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먹고 살고 있는 것이며 여러 가지 형태로 자기 자신의 영양이 되고 있는 것이지만, 결국 인류는 다른 일체의 것을 압도하는 관계상 자연을 자기가 사용하기 위한 제품으로 보게 된다. [319]

인생의 전경은 바라다보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럽다. 인생은 우리가 그것을 잘 모르고 있을 때만 살 수 있는 것이다. [319] ➜ 모르고 사는 게 속편하지가 괜한 말은 아닌 거 같다.

‘모든 개인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살펴 가장 중요한 특징을 찾아보면 그 본래는 언제나 비극이다. 그러나 세부에 들어가 보면 그것은 언제나 희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320] ➜누구나 삶에 희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나보다. 그러면 삶의 여정 또한 그 희극적 요소를 찾고 그를 통해 행복을 발견해 가는 것이 아닐까.

마치 신학이 죽음의 불안으로부터의 피난처인 것처럼 정신병은 고통으로부터의 피난처이다. 광기는 괴로움의 기억을 피하는 수단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의식의 끈을 끊어버리는 구원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경험 또는 공포를 망각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321]

사람은 인생의 목적 및 그 목적을 달성시키기에 필요한 수단이나 기술을 터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 그 자체가 자신의 소유물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한다는 것이 확실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신의 수양을 쌓는 것보다는 부를 획득하는 일에 천 배나 더 힘을 쓰고 있다.’ ‘정신적 욕구를 갖지 않은’ 인간은 ‘속물’이라고 불리며, 속물은 자신의 여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 한가하면서 마음이 고요하기는 어렵다. 그는 욕심이 많게 이리저리 새로운 감각을 찾아 헤매며 결국 할 일 없는 부자나 분별없는 난봉쟁이에 가해지는 천벌, 권태에 정복된다. [323] ➜ 한가운데서는 생각을 정리가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오만 생각이 다 떠오르니 생각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온 사방을 헤매며 생각하기 전보다 더 많은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채우곤 한다.

우리가 자기의 격정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격정이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적어지고 ‘자제만큼 우리를 외적 강제에서 지켜주는 것은 없다.’ 모든 불가사의 중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복자이다. [324]

➜ 자신을 알면 알수록 내 감정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인지 알면 알수록 나를 조종하기가 더 수월해 지겠지. 말은 쉽다만 참 어려운 일이다.

철학이란 경험과 사고로 해석해야 하며 단순한 독서나 수동적 공부로 알아서는 안 된다. [324] ➜ 어떤 분야든 경험이 따르지 않는 한,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듯.

독서한다는 것은 남이 자기를 생각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단순히 남의 정신적 과정을 반복하는 데 불과하다. ······그런 이유로 하루의 대부분을 독서로 소비하는 사람은 ······서서히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기의 경험은 일종의 본문이고, 성찰과 지식은 그 주석(註釋)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험이 적고 성찰과 지식이 많은 것은 가 페이지에 본문은 두어 줄 뿐인데, 주석은 마흔 줄이나 되는 책과 같은 것이다. [324]

그리하여 첫째 권고는 책보다 생활이 먼저이고, 둘째 권고는 주석보다 본문이 먼저라는 것이다. 해설자와 비평가의 것보다는 창작자의 것을 읽어야 한다. '철학사상은 오직 그 사상을 만든 사람에게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철학의 불멸의 스승을 그 스승들의 저서(著書)라는 조용한 성소(聖所)에서 찾아야 한다.‘ 천재(天才)의 한 권의 책은 천 권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324] ➜ 천권의 주석서를 읽지 않으려면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찾을 줄 아는 눈이 필요할 듯.

우리들의 행복은 우리가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명성도 허무맹랑한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의 거처로서 남의 머리는 참으로 한심한 장소이다.’ [325] ➜ 행복의 기준을 타인의 기준에 두지만 않는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애써 모은 재료 수집과 신중한 논증에 의거하여 진척되지만, 예술은 직관이나 직감에 의해 일시에 그 목표를 달성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재능으로 할 수 있으나 예술에는 천재성이 필요하다. [327]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면 시나 회화같이 개인의 의지를 섞지 않고 대상을 관조해야 한다. 예술가에 있어 라인 강(江)은 황홀한 전망의 연속이며 그 경치의 아름다움은 감각과 상상력을 일깨우지만,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나그네에게는 ‘라인 강의 둑을 단지 하나의 가로줄로, 그 위에 걸려 있는 다리는 단지 이 가로줄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선(線)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328]

정말 한가한 중에는 마음 편안하기는 어렵다. 그는 한가한 날을 보낼 만큼 돈이 있었으며, 부단함이 끊임없는 일보다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철학자들이 우울해지는 경향은 앉아서 일한다는 부자연성에 기인하는 것으로써, 너무 자주 인생에 공격을 퍼붓는 것은 배설(排泄)의 기술이 상실되었다는 증거이다. [333]

행복이라는 것은 서로 나누어 갖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333]

비극 없는 인생은 인간답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335] ➜ 한 없이 고요하기만한 인생은 그 고요함에 질식하기에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생존에 대한 혐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은연중 가리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즉 잘못하여 생활을 그르쳐 버렸으므로, 변명할 혀를 갖고 있지 않은 환경과 세상에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다. [334]

호레스 월포울이 말한 것처럼 ‘세계는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지만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334] ➜ 느끼는 사람은 사건들이 생생하게 다가설 것 같다. 먼 나라의 사건들도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처럼 느낄 것이고.

전혀 싸우지 않는 것보다는 싸워서 진편이 낫다. [335] ➜ 되도록 충돌은 피하고 싶었다. 그 불편한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내가 이기지 못할까 그게 싫어서 충돌을 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기지 못하면 내가 초라해질 거라는 생각에... 어쩌면 그만큼 그 충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건강한 사람은 행복을 구하는 것보다 자기의 능력을 드러낼 기회를 구하려고 애쓴다. [335]

우리는 비행기나 새와도 같이 비상하기 위하여 저항을 필요로 하고 힘을 강하게 하고,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335] ➜ 인생에 어떤 장애물도 없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비극 없는 인생은 인간답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335]

물론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죽음의 공포 대부분은 정상적인 생활을 했을 때는 사라진다. 올바르게 죽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불사(不死)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즐거운 것일까. 그것은 인간에 있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며, 무한한 생을 부여받은 ‘영원한 유대인’의 운명을 누가 부러워하겠는가. 생이 감미로우니까 죽음이 두려운 것이지, 생이 감미롭지 않다면 왜 죽음이 두렵겠는가. [336]

염세관은 자의식이 많고 자존심이 강한 청년기의 사치품이다. 청년기는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품에서 개인주의적 경쟁과 끝없는 이욕의 차가운 분위기 속에 들어가 어머니의 가슴을 사모하는 시기이며, 세계라는 풍차의 화근(禍根)에-돈키호테처럼-미친 듯이 덤벼들어 슬프게도 유토피아와 이상의 껍질을 해마다 벗어 버리는 시기이다. 그러나 스무 살 이전에는 육체의 기쁨이 있고, 서른 살 이후에는 정신의 기쁨이 있다. 스무 살 이전에는 보호와 안전의 향유가 있고, 서른 살 이후에는 자신의 가정과 자식의 기쁨이 있다. [337]

스펜서의 불가지론

그 옛날 더비의 철학회(哲學會)를 위하여 부친이 받아 보던 여러 가지 잡지를 통독했을 때처럼-이용할 수 있는 모든 사실에 살쾡이처럼 눈을 번득이면서-앞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생각하였다. [347]

그 뒤 그는 중추가 된 진화의 개념을 발견하기에 이르자 그의 두뇌는 중요한 재료를 끌어들이는 자석이 되었으며, 그의 사고에서 유례없는 질서감은 이 재료를 입수하는 대로 거의 자동적으로 분류했다. [347]

‘나쁜 일 속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 속에 진리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고 있다.’ [353]

우리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죽음의 일은 죽음에 맡기는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삶의 일을 생각하는 편이 좋다. [358]

전쟁이 추방되고 극복될 때까지 문명은 파국에 낀 불안한 막간의 만담인 것이다. ‘고도한 사회상태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전쟁의 소멸에 달려있다.’ [365]

“사회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노동의 통제는 강제에서 벗어난다. 여기에 우리는 협동노동과 모순되지 않는 강제가 최소한도까지 축소된 형태를 발견하게 되며, 각 성원의 대다수에 의해 세워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규칙에 따를 뿐이다. [367]

진정한 ‘인권’이란 대체로 생활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및 만인과 평등한 조건 아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이다. [372]

만일 누구나 모든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도 타인의 이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중하게 사양하는 도가니 속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372]

이타적 행위는 사회적 효용의 덕택으로 자연도태에 의하여 본능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본능활동과 같이 강요되는 일 없이 유쾌한 감정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사회의 자연적 진화는 우리를 끊임없이 완전한 국가로 접근시킨다. [373]

어느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단언은 이미 어느 것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374]

‘어떠한 사람도 스스로가 쓴 책만큼 훌륭하지 않다’ [379]

프리드리히 니체

인생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절이 아니라 힘, 겸손이 아니라 긍지, 이타심이 아니라 확고한 지성이라는 것, 평등과 민주주의는 도태의 본질에 반대된다는 것, 민중이 아니라 천재가 진화의 목표이며, ‘정의’가 아니라 권력이 모든 싸움과 운명의 심판자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384]

니체에게는 이 이 뻔뻔스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385]

1871년 보불전쟁의 승리는 독일의 혼에 어떤 불별 없는 자만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것만큼 정신적 성장에 해로운 것은 없다. [390]

‘나는 자기에 대한 성실과 결부되어 있지 않는 어떤 위대함도 인정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발견하자마자 인간의 성공 따위는 나에게는 전혀 무가치하게 되어 버렸다. [392]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나의 정식(定式)은 운명애다. ······필녕적인 것을 단지 참고 결딜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394]

사실 그는 소박하고, 감격하기 쉽고, 낭만적이고, 우직할 만큼 상냥했다. 이 상냥한 천성에 대한 그의 투쟁이 바로 괴로운 환멸과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가져다 준 그 미덕을 몰아내려는 노력이었다. [394]

나는 앉아서 기다렸노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면서.

선악의 저편에 때로는 광명을 때로는 그늘을 즐기면서.

지난날은 오직 호수와 한낮과 끝없는 시간뿐.

그때 돌연히, 벗이여, 하나는 둘이 되어

차라투스트라 내 곁을 지나가도다. [395]

‘무엇이든지 네 능력 이상을 탐내지 마라. ······네 능력을 지나쳐서 유덕(有德)한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확신에 반대되는 일을 자신에게 요구하지 마라.’ [398] ➜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능력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무엇을 하느냐, 너의 할 말을 하라, 그리고 깨끗하게 부서져 버려라!’ [399]

‘······사랑은 모든 감정 속에서 가장 이기적이다. 따라서 상처를 입었을 때는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 진리애 속에서마저 진리를 소유하려는 욕망, 대개는 최초의 소유자가 되려는 욕망, 즉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진리를 발견하려는 욕망이 움직이고 있다. 겸손은 권리에 대한 의지의 보호색이다. [401]

혁명의 선이라는 것은 투쟁의 시대가 개인에게 충분한 자극과 기회를 주어 개인의 숨은 위대성을 표면에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동에서 반짝이는 별은 생기고, 프랑스 혁명의 동란과 우행 속에서 나폴레옹은 생겼고, 르네상스의 폭력과 무질서 속에서 유럽이 지금까지 거의 몰랐던, 그리고 이제는 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개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406]

아마도 우리들 중의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은 될 수 없는 자(즉 초인)의 예언자는 될 수 있으므로, 그의 오는 길을 준비해줄 수는 있다. 우리는 어디에 살거나, 어느 때에 살거나 이 목적을 위해서는 설령 아무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공통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숨은 조력자-즉 초인의 이러한 애인들-의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고뇌 속에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 오늘 고독을 느끼는 자, 그대들, 격절(隔絶)된 자여, 그대들은 언젠가 하나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선출한 그대들 속에서 하나의 선민은 태어나고, 그 선민 속에서 초인은 태어나리라.’ [407]

‘현재 모든 국민들의 광기를, 그들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여 부자가 되길 원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맹수가 되어 서로 틈을 노리고, 무엇인가를 빼앗는다.-그리고 그들을 이웃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온갖 쓰레기에서 사소한 이득이라도 주우려고 한다.’ [412]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기를 바라며, 그런 후에 몰락해 가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423]

‘난 인간이 왜 웃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423]

그는 언젠가 누이동생이 자기를 보고 울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물었다. “리스베드, 왜 우느냐?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느냐?”

어느 날, 그녀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들렸다.

그러자 그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기쁨에 넘친 어조로 말했다. “아! 나도 좋은 책을 몇 권인가 썼었지.”-그리고 맑은 정신의 순간은 지나가 버렸다. 니체는 1900년에 죽었다. 자기의 천재성 때문에 이토록 높은 대가를 치른 사람도 없을 것이다. [424]

현대 유럽의 철학자들

1. 앙리 베르그송

지식이 너무 많으면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고, 나이가 젊은 신봉자는 대개 배신자가 되기 쉽다. 젊었을 때의 죄인이 늙어서 성자가 되듯이 말이다. [428]

‘지속이란 과거가 미래를 갉아먹고 살이 쪄서 나아가는 연속적 진전이다.’ 그것은 ‘과거는 그 전체가 현재 속에 연장되어 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과거 어느 작은 부분만을 가지고 사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전체를 가지고······욕망하고 뜻하고 행동한다.’ 시간이 쌓여 있는 이상, 미래는 결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발짝마다 새로운 축적이 생기므로 ‘한 순간도 단순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아직 예견하지 못한 어떤 것이다.[429]

‘의식적 존재자에 있어 존재란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이란 스스로를 무한하게 형성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을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모든 사상(事象)은 시간과 지속, 생성과 변화일 것이다. [430]

삶은 목표, 유전적 성질 및 기억이 풍부해짐에 따라 자유스러운 선택의 영역이 넓어져, 여러 반응방법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의식이 생긴다. 의식이란 반응의 예행연습이다. ‘의식은 생물의 선택 능력에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식은 행동을 둘러싼 가능력(可能力)으로 범위를 비쳐 준다. 의식은 하고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간격을 막는다.’ [430]

선택은 창조적 활동이며 창조적 활동은 힘들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며, ‘편안히 자족하는’ 동물들의 선택이 없는 기계적인 생활을 힘없이 부러워한다. 그러나 당신 밑의 개가 공자님과 같은 태평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그것이 철학적 평정, 즉 깊은 연못의 조용한 수면은 아니다. 그것은 본능적 확신이며 선택할 필요도 없으며 선택할 수도 없는 동물의 평온이다. [431]

지성은 고정된 것들 사이에 있는 것이 편안하며, 생성하는 모든 것을 존재와, 상태의 연속이라고 봄으로써 사물을 결합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노끈, 즉 사물의 참된 생명인 지속의 흐름을 지나쳐 버린다. [432]

우리들이 1마일을 생각해 내는 것은 반마일을 생각해 내는 것과 똑같이 쉬운 일이며, 사고의 일순간은 전 세계를 일주할 수도 있다. [433]

불과 천년 동안에 생명과 정신이 유럽과 미국의 삼림을 어떻게 해놓았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생명의 창조력에 제한을 가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동물은 식물을 발판으로 하고, 인간은 동물을 의지하고 있다. [440]

우리의 오류는 뒤로 돌아서가 아니라 앞으로 향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441] ➜뒤를 바라보면서 바로 잡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을 다시 바라보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언제는 시선은 앞을 향하여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생명이란 창조적인 힘, 즉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고집함으로써 기관을 형성해 나아가는 힘이다. [442]

2. 베네데토 크로체

역사를 적는 철학가는 우주의 계획을 뒤쫓을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관계를 발견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리고 또 역사를 적는 철학자는 현대에 의의가 있고, 현대를 계발하는 과거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역사가들이 역사를 자연의 묵시(黙示)로 하여 인간의 거울로서 서술한다면, 역사는 마침내 나폴레옹이 이름 붙였듯이 ‘유일한 진리의 철학 및 심리학’이 될 것이다. [448]

예술은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대상을 확실하게 현실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지 않고, 대상을 규정하지도 정의하지도 않고 느낌으로써 표현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 [449]

예술의 불가사의는 사상의 외적 표현이 아닌 사상을 잉태하는 데 있다. 외적 표현 따위는 기계적인 기교 문제, 손재주 문제에 불과하다. [449]

3. 버트란드 러셀

결국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과 만물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자유인은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자유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기지는 못하지만 그는 적어도 싸움을 누릴 수가 있는바 이것은 자기 자신의 폐배를 예시하는 인식에 의해 자신을 파멸시킬 맹목적인 힘보다 우월하고, 그가 고생하여 이룩한 모든 가정을, 그리고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이 잔인한 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에 직면하여도 여전히 싸움으로써 상하기 쉬우나 적어도 수세기 동안 유지되는 회화나 조각의 아름다움을 낳고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는 지난날의 장엄한 파르테논을 건설한 저 내적인 창조력을 숭배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버크란드 러셀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철학이었다.[456]

자유는 가장 좋은 선이며, 자유 없이 인격은 있을 수 없다. 생활과 지식은 오늘날 매우 복잡해졌으므로 다만 자유 토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오류와 편견 사이에서 진리인 그 포괄적인 관점에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람들은 -교사들까지도- 제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하여도 상관없다. 이렇게 정반대의 견해로부터 소신의 이성적 상대성은 생기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쉽사리 무기(武器)에 호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증오와 전쟁은 주로 교정된 사상이나 독단적인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시원한 바람처럼 ‘현대’정신의 노이로제와 미신을 날려버릴 것이다. [458]

지력 없는 인간의 현저한 특징은 의견이 경솔한 것과 그 의견을 절대시하는 점이다.[458]

만약 훌륭한 학교, 또는 대학 조직이 적절하게 발달하고 그에 적합한 교사진이 구성되어, 인간의 성격을 개조하는 방향으로 현명하게 지도한다면 인간이 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경제적 욕심과 국제적 잔인성을 벗어나는 길이지, 폭력혁명이나 지상(紙上)의 입법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일체의 생명 형태를 지배하게 된 것은 인간이 성장을 위하여 오랜 시간을 소비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오랜 시간을 소비하여 그 시간을 좀더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인간은 필경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자기를 개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학교는 유토피아를 향해 열려진 문인 것이다. [459]

현대 미국의 철학자들

1. 조지 산타야나

‘사람들이 다른 사고방식을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결코 나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만일 자기가 할 수 있으면-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조망이 더욱 선명하게 전개되도록 마음의 창문을 잘 닦아야 한다.’ [466]

나는 토론할 때 이외에는 믿지도 않는 견해에 찬성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내걸고 생활하는 것과 다른 의식에서 싸우는 것은 부정직하고 비겁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므로 내 눈으로 볼 때 스피노자를 제외한 근대의 저작가들은 모든 철학자가 아니다. [467]

우리가 사람인 것은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필경 꽃과 그 종자, 아이와 그 웃음은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기계보다 그 이상으로 우주의 신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아마도 자연을 죽음의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생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470]

‘참으로 이성적인 도덕이라든가 참으로 이성적인 사회제도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 도저히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자들의 사치품이다. [474]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전혀 맹목적이고 타성적인 것이 아닌 이상 나라의 현재 상태와 나라 고유의 이상과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474]

우리는 너무나 많이 생산하여 자기가 만든 것에 압도되고 있다. 에머슨의 말과 같이 ‘물질이 인간을 말로 만들어 타고 다닌다.’ [476] ➜ 가진 것이 넘쳐남에도 늘 부족하고 느끼는 이유는 뭘까? 새로운 것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고 늘 새로운 것들이 가지고 싶어진다. 그 욕심을 줄일 수만 있다면 훨씬 더 많은 나눔이 이루어 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오래되고 가장 훌륭한 철학에 따라서 살아가는 용기를 필요로 할 뿐이다. [477] ➜ 시대를 거스를 수 있는 용기를, 남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이 보다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가장 필요한 전제이다. 만약 그렇게 전제되지 않는다면, 도저히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을 수 없을 것이다.’ [478]

‘지혜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묻고,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한쪽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세상을 적대시하지 말고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 아름다움도 고통도 순식간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순간의 고통을 슬피 탄식하는 것.’ [478] ➜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있되 나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살기 위해서는 죽음보다 생을 생각하고, 완전한 것의 까마득한 희망뿐 아니라 바로 눈앞의 현실도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476]

2. 윌리엄 제임스

철학의 최고 원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망과 가장 깊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희망을 저지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둘째, 철학이 우리의 적극적 모든 경향을 반대하는 것보다 더 곤란한 결점은 그것에 아무런 대상을 부여하지 않는 점이다. 철학의 원리가 우리의 가장 내적인 모든 힘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항에 있어 그것들의 힘에 어떠한 의의도 인정되지 않고, 그것들의 힘의 동기가 한꺼번에 절멸하는 것 같은 철학은 염세주의보다도 인기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항상 일반에게 승인되지 않는 이유이다. [485]

Muliverse는 결정된 다음 번복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행위가 중대한 관계를 갖는 세계이다. 일원론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죽은 세계이다. 완성된 Universe에서는 개성은 망상이다. 우리는 모두 ‘정말은’-하고, 일원론자는 우리에게 보증한다-어느 하나밖에 없는 모자이크 풍의 실체의 한 조각이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는 자기가 연출하는 역할의 몇 행은 자기가 쓸 수 있고,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를 어느 정도까지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일 수 있다. 그것은 기회의 세계이지 숙명의 세계는 아니다. 무엇이나 ‘말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의 존재와 행위는 이러한 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487]

‘결론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결론을 도대체 누가 끄집어냈는가. 말할 수 있는 예언도 없으며, 들려줄 조언도 없다. [490]

실용주의는 평범한 일을 논설할 때만 정당한 것이다. [490]

3. 존 듀이

어떤 의미에서 학교는 정신적 성장의 수단을 제공할 뿐이고, 나머지 일은 경험의 흡수와 해석에 달렸다. 참다운 교육은 우리가 학교를 졸업한 위에 시작되는 것이니, 우리가 죽기 전에 교육을 그만둘 이유는 전혀 없다. [492]

변화와 성장을 인식할 수 있는 한계는 없으며, 사고가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은 없다. [494]

나쁜 인간이란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리 선하였더라도 현대 타락하고 있는 -즉 선인이 아닌- 사람이다. 좋은 인간이란 비록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무가치했더라도 현재는 좋아지고 있는 사람이다. [495] ➜ 모든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지만, 나부터도 얼마나 많이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있었던가 생각해 보게 된다.

또 선량하다는 것은 단지 온순하고 사람이 좋다는 것만은 아니다. 능력 없는 선량은 절름발이며, 만약 우리에게 예지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덕도 우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무지는 지극히 덕이 아니라 무자각(無自覺)이며 예속이다. 다만 예지만이 우리를 자기의 운명 형성의 협력자로 하는 것이다. [495]

우리는 일반적인 이론으로써가 아니고 특수한 가설을 가지고 하나하나의 문제와 맞서야 한다. 이론은 촉수이며, 유인한 진보적 생활은 시행착오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497]

장래의 철학 과제는 시대의 사회상 및 도덕상의 싸움에 관하여 사람들이 지녀야 할 관념을 명백히 하는 일이다. 철학의 목적은 인간으로서 될 수 있는 한 이들 알력을 처리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일이다. ······서로 다투는 생활의 모든 요인을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일반적인 선견지명이 있는 이론, 그것이 철학이다. [498]

우리가 자유를 부(富)와 마찬가지로 존경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도 르네상스는 올 것이다. [499] ➜ 자유는 늘 가지고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기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그 큰 자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함으로 인해 누리고 있지 못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저자 윌 듀랜트는 이 책의 저술을 위해 자료 수집과 분석 등의 준비 기간 11년을 거쳤으며, 이후 집필에도 3년이 넘는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그는 중요한 철학자들을 소개할 때에도 거의 그들 자신의 말, 곧 원전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이 책은 ‘철학 명저 해설’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위해 쏟았던 시간이 있었기에 이 책은 국경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듀랜트는 뛰어난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슬기로운 해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의 학설을 빌려서 쓴, 듀랜트의 ‘인생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철학이 결코 인생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인생을 보다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후편으로 한 명의 저자를 더 선정하여 한 철학자를 두고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는 형식을 취해보고 싶다. 듀랜트의 경우 부인 에어리얼과 작업을 같이 많이 했으므로 서로의 철학에 관한 관점을 주고 받는 형식으로 책을 썼어도 대중에게 사랑받는 또 다른 철학서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냉정과 열정사이' 처럼 철학서도 그렇게 소설 형식으로 다양한 철학가들의 사상을 넘나든다면 철학의 높은 담장이 조금씩 낮아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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