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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5일 20시 52분 등록
북리뷰 74:  서양문명을 읽는코드, 신 ; 1부와 2부

책;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 지음 . 휴머니스트. 2010. 


*** 저자에 관하여

이미 김용규 선생의 글은 여러번 북 리뷰를 했다. 저자를 두번 작은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으며, 그는 글과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용규의 글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빼어나다. 작정하고 읽으면 아무리 어려운 주제도 일단 이해가 된다. 얼마나 깊이있게 저자가 하고자하는 말에 공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개인차가 심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없이 철학과 신학을 저자의 안내를 따라 시작해 볼 수 잇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모쪼록 저자에게 편안한 시간이 주어져서 약속한대로 이 책의 나머지 편들이  계속 집필 출간되기를   학수고대 할 뿐이다.

***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9.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는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 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하지요.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 파스칼,< 팡세> -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그림;미켈란젤로 <천지창조>중 아담의 창조. 1508-1512 

25. 하지만 아담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날아오는 한 노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지엄한 신입니다. 한 점 욕정도 없고 오직 성스러운 의지로 충만하여 더없이 숭고한 신은 백발과 흰 수염을 휘날리고 잇는데 무척 건장하지요. 범선의 돛처럼 부풀어 오른 커다란 망토 속에 아기 천사 푸토들을 데리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모습이 역동적입니다. 

27. 결론부터 말할까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렇지요. 

28.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신의 영성(靈性)에 대한 상징적 묘사일 뿐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종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도 신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또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로 표현됩니다.  

31. 아무리 그래도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35. 르네상스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36. 고대 그리스ㆍ로마인들에게 신은 인간을 이상화 하거나 그 능력을 극대화한 존재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7.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지요.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40.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가진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였습니다. <천지창조>를 완성한 후 거의 30년이 지났을 때, 미켈란제로는 또다시 성 시스티나 성당 정면의 벽에 가로 12미터, 세로 13미터의 거대한 나체 성화를 그렸습니다. 1541년에 완성된 <최후의 심판>입니다. 

에로스의 날개  

40.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의 미', 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可知的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43.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44.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여인의 얼굴이나 신체와 같은 감각적 대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들은 단지 매개체일 뿐이지요.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곧 '이데아의 미'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의 눈이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감각적 대상들을 통해 이데아의 미를 받아들이면, 영혼에서는 "이를 가는 아이들에게 이가 나기 시작할 때처럼 열이 나고 근지러움과 불편함이 느껴지면서" 날개가 돋기 시작하지요. 이것이 이른바 영혼의 상승을 이끄는 '에로스의 날개'입니다.  

45.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이로써 에로스 자신도 신적 존재가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47.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규칙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모방했습니다.  

신인동형설  

50.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축약해서 보통 '부동의 운동자' 또는 '원동자' 라고 하지요.

'운동'이라는 말은 장소의 변화뿐 아니라 질적, 양적, 실재적 변화를 동시에 의미하지요. 중세 신학자는 물론, 서양 근대 철학자나 신학자의 글에서도 '운동'이란 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변화'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풀어보면 '부동의 운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는 '자기는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의 근원이 되는 자' 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요.  

53. 구약성서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들 만들고"의 '형상'과 '모양'은 신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하는 것이다.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55.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 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 종합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분명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이지요. " 

56.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 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신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 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 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 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60.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65.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 할 이야기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같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그 관계도 분명치는 않으니까요.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후자를 견지합니다만 , 이 문제는 차치해두고 일단 알아 봅시다. 

이제부터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의 신, 창조주로서의 신, 인격자로서의 신, 유일자로서의 신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면서 그 개념들이 서양문명 안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조명해 볼겁니다..  

2부 신은 존재다 

     '있는 자(Qui est)' 라는 이 명칭은 신의 가장 고유한 이름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69. 중세의 황금기였습니다.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아퀴노라는 마을에 롬바르디아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란돌프 백작가문이 있었지요. 

71. 이 청년은 1256년에 신학박사가 되었고, 얼마 안가서 파리대학 신학교수로 임명되어 이름을 날렸지요.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학자였지만 항상 겸손해서 논쟁을 할 때조차 평온함과 객관적 태도를 유지했지요. 그래서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의 학식에 대한 찬사와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무척 유쾌한 성품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천사적 박사'라고 불렀습니다.  

72. 반세기쯤이 지난 1323년 교황 요한 22세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습니다.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1225-1247)입니다.

75. 1880년 교황 레어 13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앙과 이성의 권위를 각각 높이면서도 둘을 친밀하게 결합함으로써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불화를 일소에 해소했다" 며 칭송하고 가톨릭학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포했습니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해 오던 질문, 즉 "신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신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지, 셋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칙에 따라 신에 대해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 나갔는데요, 그가 내린 최종결론은 신은 '있는 자' 또는 '존재 자체' 라는 것이지요.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인 명칭은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81. 고대사회에서 이름이 지닌 특별한 의미를 독일의 구약학자 발터 아이히로트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신이 무엇인지 알려면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고 토마스 아퀴나스 가 말했습니다.

83.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 것은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84.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 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지요.

지성도 넘고, 신비도 넘어

87. 우리가 무규정자, 무한정자라고 부른 것을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곧 무한자 라고 불렀고 그것이 만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신이라고 했습니다.
아페이론은 우선 시간적으로 "변화를 통해 형성된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죽음도 쇠퇴도 모르고,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지요.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너무나 광대무변하여 크기를 측정할 수 없으며, 만물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페이론은 신적인 것으로서 만물을 포괄하고 횡단하며 보호하고 조종하지요."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개념을 통해서 신의 무한성을 처음으로 규정한 철학자인 것입니다.

88.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일자이고 흔들림 없이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론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 또는 '선자체'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습니다.

플로티노스도 '일자'를 신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말하는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닥에 깔린 심연이며,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것의 바탕이지요.  

89.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신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만들어서 알린 것은, 예컨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이 추상적 신으로 표현하는 지성주의나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같이 이름 없는 신으로 나타내는 신비주의 같은 잘못된 신앙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일종의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93.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가 곧 실체다. 예컨대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형상은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실체다. 그래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본질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은 그런 이유다.

기독교 교리란 기독교를 다른 이교도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하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리는 그 발생부터가 이미 배타적이거나 방어적인 성격을 띤다. 이에 비해 기독교 사상이란 기독교 교리보다 폭넓은 의미로서 기독교적 삶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상과 다양한 주장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신학과 교리의 발생, 인정, 진행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97.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
" 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며, '신'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인 까닭인 것입니다.  

98.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여기서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요.  

99.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 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 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100.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일찍이 모세가 구분한 존재와 존재물 사이의 엄연한 차이를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상이성" 또는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실존철학을 쌓아 올리는 초석으로 삼았지요. 또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같은 말을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라고 선포하고, 그 사이에는 "눈 얼음 계곡", "극 지역", "황폐지대"가 놓여 있다고 비유했습니다. 그 역시 이를 자신의 초기 신학이 발 딛을 기반으로 삼았지요.

102. 신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이고 '가장 능력 있는 자'이며 '가장 지속적인 자', 곧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만물의 궁극적인 근거로서 무규정자이고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신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 '존재'지요.  

편의상 그리스적인(또는 철학적인)존재 개념과 히브리적인(또는 종교적인)존재 개념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스인들과 존재

104. 소박하게 생각하자면 다양한 모든 존재물이 근원적으로 가진 공통요소가
, '있음' 곧 그것의 '존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생각이 서양철학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지요.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 두 주제인 '본질'과 '존재' 중 하나인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이 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으로 단번에 뛰어든 것입니다.

106.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그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인식과 존재는 동일하다" 라고 주장했지요. 이처럼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진리'와 '거짓'을 이분법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한 일,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서양철학사에 남긴 공적입니다.

108. 플라톤에 의해 이렇게 그 실재성이 부정된 것들이 사실상 우리에게는 바로 현실적 실재의 유형이라면서 그에게 맞서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제거되어야 할 기본적 환영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그가 '있다는 것(영원불변 하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한 반면, 우리는 그에게 '현존한다는 것(세상에 가시적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109.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이 철학적 사변이 후일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 안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도 진실하고 참된 세상은 우리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어떤 다른 세상이지요. 곧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였던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天國)'입니다 

111. 플라톤은 불변하는 실체인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있습니다. 이 '들어 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 받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얻게 됩니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부여하는 실체지요.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데아론을 '분여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결과 개개의 사물은 그 본질에서 불완전하고, 존재에서도 실재성이 적지요.  

113. 플라톤의 분여이론에 의해서 '존재와 존재물' 간의 차이와 상호관계가 분명해졌다는 점이에요.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 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존재만이 진리의 근거입니다만, 존재물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를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 더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완전하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언급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고 단지 불완전한 지식, 곧 플라톤이 말하는 '사견'이지요.

114.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 하며 우주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 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서양문명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난 2500년 동안 서양문명 전반에 이것보다 더 크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철학이론은 없습니다. 이 이론은 현실세계와 가치세계의 다양한 질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사다리'와 '존재의 사다리' 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서 고대와 중세의 교회제도와 사회제도를 확립하는 데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서양문명을 일구고 지탱해 온 허리뼈가 된 것이지요.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116.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데아를 향해 올라가는 길을 '층계길'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층계는 위로 올라갈수록 질적으로 더욱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지요. 하지만 양적으로는 그만큼 더 적어져서 맨 나중에는 단일한 것이 됩니다.

118.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분여를 기독교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이 존재하듯 최고의 존재로서 부여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에게는 더 큰 존재를 부여하고 어떤 사물에게는 더 작은 존재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존재들의 자연 본성을 계층으로 질서 지어 놓았다.

123.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짛케, 최고 진리 등등 어떠어떠한 가치들의 정점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이 바로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며,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인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라는 말의 시원이 바로 여기지요.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129. 서양의
'자연법사상' 안에는 플라톤과 플라티노스로부터 뻗어 나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며 서양문명에 고착된 '존재의 대연쇄' 라는 형이상학이 뿌리 깊게 들어 있었습니다.

130. 존재가 영원 불변하는 실재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플라톤과 플라티노스를 거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존재는 -그것을 플라톤처럼 이데아로 부르든, 플로티노스처럼 정산으로 부르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말씀으로 부르든 간에- 불변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진리의 근거입니다.

131. 바로 이곳이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이 상충하는 지점이에요. 히브리 인들의 존재개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는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리 개념 역시 불변성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 소멸하는 작용, 곧 변화시키는 본성을 근거로 하지요. 천지를 창조한 '신의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의 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고 의롭게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라는 것이 히브리 인들의 생각입니다.

존재는 창조주다

132.
플로티누스의 일자 형이상학. 일자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인 근거이자 그 모두를 포괄하는 자이지요.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무한자로서 모든 한정되고 규정된 것들의 궁극적 근거가 되지만, 그 자신은 어떤 것에도 포괄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자입니다.

133. 영원불변하는 일자가 어떻게 다른 어떤 것을 생성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플로티노스는 유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유출은 마치 빛이 발광체의 주위로 번지듯이, 뜨거운 물체가 주변으로 열을 퍼뜨리듯이, 향기가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가듯이 매우 신비롭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빛을 발하지만 어두워지지 않고 샘물이 시냇물을 흘려 보내지만 마르지 않는 것처럼 일자의 유출은 일자 자신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지요. 플로티노스는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고,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134. 정신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그것이 인식하는 것은 오직 그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그밖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은 스스로가 '인식하는 자'인 동시에 '인식되는 자'이지요. 하지만 자기 안에서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로 분리되기 때문에 이미 일자가 아닙니다.

정신은 이러한 자기직관을 통해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부른 것, 측 세계 창조를 위한 모든 참된 '형상'을 자기 안에 만듭니다. 이 말을 플로티노스는 "정신 자체에 정신이 나누어 줄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표현했지요. 한 마디로 플로티노스에게는 정신이 곧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데 모범이 되는 틀입니다.

136. 영혼이란 흔히 말하듯 불멸의 실체라기 보다는 정신 안에 있는 형상이 현실화되는 '현실화의 원리'이자 '운동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영혼에 의해 모든 물질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이 '창조주'이기는 해도 다만 '창조의 틀'로만 작용할 뿐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영혼이 합니다.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하지요.

물질세계를 생산해 낼 때, 영혼은 정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들이 물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영혼이 하는 일은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촉매 작용입니다. 이를 플로티노스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인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이다"

140. <최고 신>으로부터 <정신>이 생기고, <정신>으로부터 <영혼>이 생겼다. 그 다음으로 이 영혼이 모든 잇단 사물들을 만들어 내고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 하나의 빛이 모든 것을 밝히며, 한 얼굴이 줄지어 있는 여러 거울에 비치듯이, 사물의 하나하나가 비치고 모든 사물은 연이어 계속 되고 그 연속의 밑바닥까지 이르게 된다. 따라서 주의 깊은 관찰자는 <최고 신>으로부터 사물의 맨 나중 부스러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각 부분의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호메로스의 '황금사슬'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신>이 명령하여 천상에서 지상까지 늘어뜨린 것이다. 

141.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 정신, 영혼은 영원불변 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창조와 관련해서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지요.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됩니다.

히브리인들과 존재

144. 스웨덴의 신학자 보만의 저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를 보면 그리스 언어가 정지적인 데 반해 히브리 언어는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46. 히브리 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 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존재란 영원불변 한 것이었습니다. 무언가가 영원불변 하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존재는 논리적으로는 결코 변화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이 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변화하도록 만들 수도 없지요. 다른 무언가를 변화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존재의 자기동일성이 깨지고 말지요.

148.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불변과 변화', '존재와 생성'이 더는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개념 쌍이 아닙니다. 존재는 생성 작용할 때에만 존재일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변화할 때에만 불변할 수 있다니...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150. 존재와 생성의 종합이 가진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가시적 또는 사물중심적 사유냐, 아니면 심리적 사유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에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공간적(탈 시간적으로)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강하고, 히브리 인들은 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 시간화 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 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지요.

153.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논리학은 이처럼 철저하게 탈 시간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전혀 다룰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시작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논리학의 전통이자 한계이며, 그것을 통해 사유해 온 서양문명이 탈 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가 만나 형성된 기독교와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서양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재적소에서 그때마다 시간화와 탈 시간화의 마술 -즉 그리스적 사유를 시간화 하거나 히브리적 사유를 탈 시간화 하는 별도의 작업- 이 필요합니다.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 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 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154. ‘신은 안식하면서 부단히 활동하신다‘라는 말은 즉,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시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모순되는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 사용하는 이중적 논법은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유를 종합한 기독교적 신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스스로 생성, 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 YHWH)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 인들이 하야(haya) 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158. 중세신학자들이 이해한 '존재자체' 라는 개념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는 존재지요. 명사라기보다 동사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나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고 묘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유에도 이러한 역동적인 신 개념이 들어 있지요.

존재의 바다와 ‘퍼텐셜’

159. 존재의 장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우주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물이 여기서 생겨나고, 여기서 존재하며, 여기서 소멸하는 무한한 신적 근원을 뜻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한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라는 비유에 해당하는 셈이지요.

현대의 양자물리학자들도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장과 유사한 이야기를 퍼텐셜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하지요. 예컨대 독일 뮌헨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 소장 한스 페터 뒤르는 고전물리학자들과 달리 세계가 원자와 같은 입자들이 모여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플로티노스의 일자처럼 아직 나뉘지 않은 '온전한 무엇'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분화해서 하위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믿지요. 그리고 그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들은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물질이라기보다는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통상적 의미에서 보면- 비물질적인 '소립자의 장'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고 지금도 유지되며, 매 순간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160. 신학자 판넨베르크와 나눈 대화에서 뒤르는 스스로 물질이 되는 능력을 가져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이 비물질적 장을 양자물리학자들은 '퍼텐셜'이라고 부르고 신학자들은 '신의 숨결'이라 부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학자가 '신의 숨결' 이라고 일컫는 것에는 자연과학을 기술할 때 볼 수 있는 과정과 동일한 기본구조가 내포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양자 물리학은 '비물질적인 기본구조'를 상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이 비물질적이라고는 하지만 물질에 반대되는 무엇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실은 '신의 숨결'이니까요. 그렇다면 물질적인 것이란 '신의 숨결'이 응결되면서 아직 생명을 갖추지 못한 '물질'이 형성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숨결'입니다.

162.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은 물질에 부단하고도 압도적으로 작용하지만 철저히 비물질적이지요. 영 그 자신은 전혀 물질이 아니고 물질로부터 어떤 작용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움직이는 신적 원리이자 의지입니다. 따라서 똑같이 '프네우마' 라는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스토아 철학과 성서가, 또는 물리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다른 대상에 대해 같은 용어를 사용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오해 없는 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용어들의 조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163. 사실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은 '존재의 장'보다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언급한 '형상 없는 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만물을 무에서 창조했지만 무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무에 가까운 어떤 원물질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에요.  

무와 물질의 중간에 있는 이 무형의 원물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165. 누군가가 퍼텐셜이 곧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이 믿는 신, 곧 우주와 하나인 범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일지언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 라고 표현했는데,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이는 마치 물 위에 뜬 물방울들을 물이 포용하듯 안팎으로 침투해서 포괄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안셀무스는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 안고, 관통한다" 고도 묘사했어요.  

요컨데 최고의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의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 는 겁니다.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신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신이 모든 시간 안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항상' 있다고 표현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지요.

신의 모습 상상하기

166. 신은 무한하고
, 인간은 무한한 어떤 것을 상상하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가진 능력을 현저히 벗어납니다. 오죽하면 칼 바르트가 "모든 인간적인 것과 무한한 질적 차이로 대립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알고 체험하고 경배하는 것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 분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래서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168.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커다란 바다'라고 기록한 표현을 빌려 '존재의 장'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대강 이렇게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시작도 끝도 없는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습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겼다가 없어지지요.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만은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출렁입니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할 뿐인데도 그 동안 오직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 이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강력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존재의 바다가 바로 신 '야훼'이지요. 그리고 그에 의해, 그 안에서 생겼다가 잠시 후 없어지는 물방울 들이 곧 존재물 들입니다. 야고보가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묘사한 인간은 물론이고 광활한 우주마저도 이 바다에 잠시 생겼다 없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지요.

169. 곧 모든 것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온전하게 알게 되는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겨우 비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비유를 통해서' 신에 대해 상상하고 말할 수 밖에 없지요. (고린도 전서 13,12)

171. 예컨대 우리는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바다가 우주마저 포괄하고 초월할 만큼 무한하다는 점에서 '신은 없는 곳이 없다'는 오랜 주장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요. 동시에, 신이 유일하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포괄하며 그의 바깥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물방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우주만물이 신에 의해 생겨나서 그 안에 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사라지는 피조물이라는 교설이나, 신이 우리의 시작과 끝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늘 헤아린다는 교훈 역시 자연스레 수긍할 수 있게 됩니다. 물방울이 어찌 바다를 벗어나서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사정이 그러하니, 신은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한 없이 지혜롭고 거룩해서 만물을 오직 자신의 뜻과 의지로 이끌어 간다는 섭리의 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172. '존재의 바다'라는 이 비유는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이 '나뉨 속에서 연합해' 있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분되는 셋'이라는 신의 삼위일체 속성을 어려움 없이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나

177. 두 가지 질문으로 접근해 봐야죠.
하나는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이지요.

178. 실존은 어의만 보면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이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이후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있게 산다' 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하게 사용했습니다.

하이데거의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만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까닭에 실존주의 이후부터 실존이라는 용어는 두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는 기존의 의미대로 신이 실제로 존재함'을 표현할 경우에는 현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지요. 요컨대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신의 실존하는가? 묻지 않고 신은 현존하는가?’라고 묻겠다는 말입니다.

184. 르네 데카르트 :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의 완전성인 현존을 '필연적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의 현존이 그분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명백하다" (184)

이마누엘 칸트 : '순수이성 비판'에서 안셀무스와 데카르트식의 신 증명을 "존재론적 증명"이라 이름 붙이고, 가우닐로의 논박을 더욱 세련되게 보강해서 데카르트의 주장을 반박했어요. 그의 반박은 두 단계로 수행되었습니다.

185. 첫 번째 단계는 '개념의 영역'과 '현존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존재'의 현존이 개념상 필연적이라 해도 실제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삼각형은 필연적으로 세 각을 갖지만, 그것은 개념적 필연성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삼각형의 현존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신의 완전성은 필연적이지만, 그것에서 신의 현존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칸트가 볼 때 존재론적 증명에는 이처럼 개념의 필연성을 뜻하는 '논리적 술어'와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실재적 술어'에 대한 혼동이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칸트는 '신은 현존한다' 라는 명제는 이 명제를 부정한 모순명제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논증만으로는 그것의 현존을 증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186.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다'라는 명제의 모순명제인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자체적으로 모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각형이 실제로 세 각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경험적으로 검증해보지 않고도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삼각형이라는 주어 개념에 '세 각'이라는 술어 개념이 이미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이성적 진리', 흄은 '관념들의 관계에 관한 명제', 칸트는 '분석판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컨대 '이 사과는 빨갛다' 라는 명제를 볼까요? 이 명제의 모순명제인 '이 사과는 빨갛지 않다' 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과'라는 주어 개념에 '빨갛다'라는 술어 개념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그 사과는 녹색이거나 황색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이 사과는 빨갛다" 라는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지요. 이 같은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사실적 진리',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명제', 칸트는 '종합판단'이라고 불렀지요.

187. '신은 현존한다'라는 명제의 모순명제인 '신은 현존하지 않는다'가 그 자체로 모순을 포함하나요?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판단 명제가 아니고 종합판단 명제입니다. 당연히 논증의 타당성만으로는 그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칸트는 이렇게 했습니다. "현실적 대상은 나의 개념 중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나의 개념에 종합적으로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말도 덧붙였지요.  

"최고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

188. a) 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들이 있다.
b) 그런데 세계의 모든 일반적인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이 때문에 무한 소급해 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c) 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189. 지상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빈틈없이 연결된 존재의 대 연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를 통해 형성된 이 형이상학적 사다리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중추지요.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195. a) 세상의 모든 자연적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한 각각의 목적 때문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b) 그런데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물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깨달은 어떤 존재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면 과녁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c)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질서 지어주는 어떤 지적 통치자가 존재한다. 그 존재를 우리가 신이라고 한다.

200. 페일리의 논증이 인기를 얻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적어도 두 가지는 있습니다.

먼저 이 논증이 고대 수사학에서 흔히 '예증법' 이라고 부르는 유비추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수사학'에서 자신이 개발한 삼단논법보다 예증법이 훨씬 설득력 있는 논증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성현들은 모두들 예증법을 즐겨 사용한 것이고, 사실상 그 분야의 천재들이었습니다.

201. 적절한 예 하나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교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수사학적 논증법으로서 예증법이 지닌 힘이자 페일리의 논증이 가진 설득력의 비결이지요.  

203. 다윈은 토머스 헉슬리를 따라 신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견지했지요.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204.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에서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하지 않는다. 전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통찰력도 없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한다" 라고 주장했지요.

당시 정통적 신학자들이나 신실한 성직자들은 차라리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페일리식의 자연신학은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언제나 외부에 있는 다른 종교들뿐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이단들과 싸워 왔는데, 모든 일에서 그렇듯 '안에 있는 적이 더 위험한 법'입니다.

근래에 지적 설계론을 두고 과학자들과 기독교 지식인 들이 벌이는 논쟁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206. 페일리처럼, 또는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처럼,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연신학적 주장들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예나 지금이나 적극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페일리의 논증을 상대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과학자들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해줍니다. 허수아비 논증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형식의 논증인데, 그 내용을 불문하고 논리적 오류에 속하지요. 도킨스가 페일리의 논증 내지 지적 설계론이 마치 기독교가 지지하는 정통 이론인 것처럼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운 다음, 그것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를 이미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207. 어쨌든 이같은 이유로 패일리의 시계 유추 논증, 목적론적 증명, 물리신학적 증명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번째 길’은 19세기에 이미 철학적으로 논리학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도 거부되었습니다.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208.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론적 차이점과 그 의미입니다
.

210.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입니다.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위대한 두 거인의 이러한 학문적 취향이 그들 이후의 서양 학문을 크게 두 줄기로 갈라놓았지요.

212. 오랜 세월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은 플라톤의 후예들을 반박하고, 플라톤의 후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에게 재 반박을 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2000년은 족히 이어지던 해묵은 논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이가 18세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났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이마누엘 칸트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매우 간단하고 무척 허무합니다. 요컨대 신의 현존에 대한 논증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일종의 오류라는 것이지요! 신은 우리의 감성으로 파악되지 않아서 그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단지 공허한, 즉 '내용 없는 사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 같은 '내용 없는 사고' 들이 떠도는 영역을 '폭풍이 이는 광대무변한 바다' 또는 '가상의 본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가상'의 사전적 의미는 '주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는 않는 거짓 현상'이지요.

213. 감성을 통해 경험되는 대상이 현상체이고, 감성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 곧 가상체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영혼이나 신에 대한 사고가 가상입니다. 이런 대상도 사고될 수는 있고 또 사고되어야 하지만 인식될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핏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이로써 칸트가 신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에 준 타격은 치명적이었어요. 이에 대해 윌 듀랜트는 자신의 친근하고 재치 넘치는 책 '철학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에 입각해서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가상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바로 그 뒤에서 우리의 이성이 저지르는 온갖 오류가 생겨나지요.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벋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고들은 '진리의 땅'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내쫓겨,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를 떠돌게 되지요.

215. 논증만으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일체의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이성을 신학에 단지 사변적으로만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전혀 무익하며 내적 성질에 비추어 보아도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이성의 자연적 사용의 원칙들은 신학에는 전혀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도덕법칙을 기초에 두지 않거나 또는 실마리로 잡지 않는다면, 이성의 신학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해,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없다는 이야기지요.

217. 칸트가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유구하고 무익한 오류들로부터 신학을 지켜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지요. 이로써 신학은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칸트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른바 '진리의 땅'에서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로' 내쫓아 버림으로써 근대신학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철학의 망령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격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218.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현대 논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규범은 신의 존재와 법칙을 찾는 신학보다는 자연에서 그것들을 찾는 자연과학에서 더욱 강하게 요구되었어요. 과거의 자연과학과는 달리 현대과학이 찾는 대상의 존재와 법칙은 신의 그것에 못지 않게 형이상학적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천체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은 특히 그렇지요.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220. '신에 대한 경험
' 또는 '종교적 경험'이란 가능한가에 대한 학자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 입니다. 종교적 경험이란 본디 모든 종교의 근원이지요.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 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지요. 신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 인들에게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건 논증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어요. 기독교에서도 신에 대한 모든 지식은 인간이 철학과 같은 '초등학문'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고 오직 신과 인간 사이의 쌍방적 인격관계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강력했지요.

22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라디아4,9)

"타오르는 것은 아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 성 베르나르두스

"느낌이 종교의 심층적 요소다......철학적, 신학적 공식은 하나의 교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처럼 이차적 산물이다" -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진술이나 추론, 비판, 반성 같은 지적 활동의 산물인 철학적, 신학적 이론은 부수적 요소라는 말이지요. 요컨대 종교적 경험은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 현상이 생겨나게 하고 종교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살아 있는 샘물'인 것입니다.  

222. “이 사람아 그건 상관없으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

224. 종교적 경험의 형태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와 일상적 형태입니다.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환상, 마음의 소리, 괴이한 감정,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공적으로는 기적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멘, 누미노제 그것은 ‘굉장한 신비’로서 ‘전율과 외경을 불러 일으키는 굉장함’, ‘압도적 권위와 위엄’,‘절대 타지로서의 신비’등을 말하지요.

225. '신학대전'은 중세에 쓰인 그 어떤 저술보다도 선명하고 정교한 논리적 구조물로서 마치 해맑은 수정 덩어리들을 지상에서 하늘까지 쌓아 올린 거대한 성전과 같은 느낌이지요. 그랬기에 그가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26.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 축하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중간 갑자기 어떤 것에 의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는 무엇인가를 보고 들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심히 영향을 미쳤고 그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레기날드, 난 할 수가 없네.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된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지네."  

227.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어떤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종교적 깊이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성스러운 경험을 말합니다. 영국의 종교철학자 윌리엄 템플은 이것을 "종교적 인간의 총체적 경험" 또는 "종교적으로 삶을 경험하는 형태" 라고 표현했지요. 설명하자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신과 연관해서' 살펴보고,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의 틀이고 삶의 태도예요.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정의한 '패러다임'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쿤에 의하면
,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과 '가치체계'이자 동시에 '문제 해결 방법'입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패러다임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228. 오리 토끼 그림- 우리가 '무엇을 보는(또는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또는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입니다.

등고선 지도를 보면서 학생은 종이 위에 그어진 선들을 보지만, 지도 제작자는 지형에 관한 그림을 본다. 거품상자의 사진을 놓고 학생은 혼란스럽게 끊어진 선을 보지만, 물리학자는 낯익은 원자핵 내부의 사건 기록을 읽어 낸다. 그러한 시각적 변형을 숱하게 거친 다음에야 학생은 과학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과학자가 보는 것을 보고 과학자가 반응하듯이 반응하게 된다. - 토머스 쿤

230.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내가 명확히 아는데 그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사실 그들이 그런 논증을 펼친 것은 그걸 통해서 신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신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메타노이아-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232. 종교적 경험에 관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교훈은 그것의 '신비적 형태'가 '일상적 형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되는 사건' 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응하는 신약성서의 용어가
'메타노이아(metanoia)'입니다. 어의적으로는 '나중에 생각을 바꿈', '달리 생각함', '정신적 가치지향을 변화시킴'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지만, 기독교 용어로는 이전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에서 '회개'나 '회심'이라고 번역하지요.

회심이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요. 쿤도 패러다임 전환을 '종교적 개종' 또는 '정치적 혁명'에 비유했을 정도입니다.

233. 진정한 회심은 인간으로 인해 수없이 진노한 존재, 인간을 어느 때나 정당하게 멸할 수 있는 보편적 존재 앞에 인간이 스스로를 무로 만드는 데 있으며, 그 존재 없이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한 그에게서 버림받음 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여타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과 구분할 길이 없으며, 나아가 그 자체가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무의미 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속에서는 개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개별적 사건뿐 아니라, 세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신과의 만남' 즉 '신의 존재에 대한 실증적 경험'이 되는 겁니다.  

234.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아닌 것이지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 전서 13,1-2) 

235. 파스칼의 <팡세>에서.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목차를 먼저 훑어보자. 

지은이의 말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에로스의 날개 신인동형설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2부 신은 존재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지성도 넘고, 신비도 넘어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그리스인들과 존재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존재는 창조주다히브리인들과 존재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존재의 바다와 ‘퍼텐셜’신의 모습 상상하기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메타노이아-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고백인가, 증언인가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태초는 언제인가?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앨렌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영원이란 무엇인가시간이란 무엇인가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천지란 무엇인가무로부터의 창조보시기에 좋았더라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일’인가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풍요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다윈과 기독교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은 문제 눈먼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창조의 목적은 구원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세네카의 ‘운명’바울의 ‘예정’칼빈의 ‘섭리’ 아테네의 신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예루살렘의 신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강한 섭리, 약한 섭리기도는 왜 하는가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두려움과 떨림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5부 신은 유일자이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플라톤의 일자 플로티노스의 일자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 논쟁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유일신이 왜 질투하나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맺음말-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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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를 뚫어져라 살펴본다. 좋은 책을 많이 쓴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기록한 책을 그가 어떻게 구상했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총 863페이지. 모두 5부로 나뉘어 있다. 저자가 서문에 밝혔듯이

1부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2부는 존재와 존재물의 속성에 대하여
3부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의미에 대하여
4부는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기헌신에 대하여
5부는 신의 유일성과 인간의 연대성에 대하여 쓴 글이다. 

이 주제를 세분화한 목차를 다시 한번 보자.
우선 1부는 분장하지 않고 바로 5개의 주제로 풀어놓았다.
2부는 두 개의 장으로 나누고 1장은 신의 존재에 대하여, 2장은 신의 존재증명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2부까지 읽고 난 이후 다시 목차로 돌아와 요약을 해보려고 하니 대체로 굵은 생각들은 기억에 남아있다. 우선, 여기까지는 참 좋다. 

이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 간헐적으로 이 책을 읽어 왔지만, 이번 여름에 르네상스를 테마로 변경연 여름 연수를 가면서 특히 이 책을 함께 모시고(?) 갔다. 가끔 딸아이가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갈 때 반은 옷이고 반은 책인 여행 짐 속에 꼭 들어가 있던 칼 막스의 자본론이 생각이 났다. 아무리 놀리고 아무리 말려도 그 아이는 두껍고 무거운 자본론을 꼭 가지고 갔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책이 언제나 읽고 있지만 미처 소화가 되지 않아서 시간이 날땐 제일 먼저 읽어내고 싶던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엔 내가 그랬다. 노트북을 빼고 그 자리에 대신 이 두꺼운 책을 들고 항상 같이 다녔다. 

책을 읽다보니 어쩌면 신이 나로 하여금 삶의 태도를 바꾸고 이젠 그만 내게로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낸 일이 내가 스스로 이 책을 정성껏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과 맞물려 일어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책 속에는 이번 여행에서 만난 직접 그림들이 제법 들어있다. 또한 르네상스에 대하여 보다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역사적 철학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특히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설명이 고마웠다. 오랫동안 정말 공부해보고 싶었던 철학자들이었기에 특히 플라톤을 전공한 작가의 설명은 참 고마웠다. 김용규 선생은 쉽게 설명하고 또 반복하고 다시 결론을 정리해주는 강의법 을 정석으로 실행하고 있는듯 했다.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어쩜 나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남는 지식이 있다.  

전보다 고요하게 내게 침참할 수 있었던 여행이기도 했지만 특히 아씨시에서 한밤중에 깨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았을 때 나는 정말 신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란걸 느꼈다. 그 밤에 어찌나 감사하던지 눈물이 솟아나서 한참을 별빛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친구와 산책길에서 헤매다가 다시 다른 일행을 만나 글라라 성당으로 가서 새벽미사를 잠깐 참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은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은 바로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우연히 다가온 이런 사건에는 분명히 신의 손길이 함께 했다는 것을 오늘 이 책의 2부 2장을 읽으며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무릇 독서를 함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자신을 읽는 것이라 했다. 이 책을 읽으며 한꺼번에 이 3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일인지 체험했다. 잠들 수 없는 밤, 깨어 이런 북리뷰를 해보는 것이 참 즐겁다. 물론 이 글은 책을 끝까지 다 읽은 후 다시 다듬어져야 겠지만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저금을 해 두는 심정으로 쉽고 편하게 기록을 해둔다.

 

IP *.69.15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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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1.08.27 09:06:52 *.39.96.224
왕누님!
뭐라고 한 참 썼는데요,,, 확 지워져버리네요..

여기 왕창 더운거 아시죠?
땡볕에, 열대야 같은 밤에, 

이 메일을 본지라, 왕누님의 글이 눈에 들어 왔을까요?
어쨋든 이 글을 읽느라고,,, 
운동전에 읽다가  갔는데, 돌아와서도 무심결에  찾게 됐는데...

근디, 한참 거시기 하고 있는디,
갑자기 천둥치고 비가 내렸습니다....   하고 많은 순간에 하필이믄 이 때, 
뭔일이다요? 

그 동안 줒어 들은 풍월은 있어서 말귀를 알아 먹기는 하겠는데,
저자는 신을 경험한 적은 없는 것 같군요.

전 늘 그게 궁금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을이 자신을 알게 하는데 그렇게 어렵게 했을까?
라는 좀 유치한 질문말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러시더군요
'깨달은 자는 지나가는 파리 하나로도 충분히 온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

누구 말대로 신끼가 좀 있어서?! 인지   맛이 좀 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글을 읽다보니 머리속에서 맘대로 해석을 ...  ㅎㅎㅎ

오래전에 이태리를 여행할 때도 누군가 그랬습니다.
거대한 성당의 현판에그렇게 쓰여 있다더군요 
 '왜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갖는가?'
그 질문이 지금 제게는
'왜 인간은 신에 대해 관심을 갖는가?' 로 들리는군요
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었기때문이라는 그 가이드의 대답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하는건가요 ?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는건가요 ?

그거 아세요?  꿈 벗 여행에  제 주제가  르네쌍스 였다는거... ㅎㅎㅎ

좋은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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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1.08.27 11:48:26 *.69.159.123
 방가방가...
이태리 남자보다 더 잘생긴 르네상스맨 백산
오늘도 열심히 읽고 쓰고 있군요.
난 잠깐 잠깐 나갔다 와야 하는게.....문제야.
집중해서 이 책 리뷰를 끝내고 싶은데...
나가면 다 까먹고 .....들어오면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몬살겠당, ㅋㄷㅋㄷ

백산, 어쩌지...
나는 번개에서도 비에서도 ...그리고 지나가는 파리에서도
그 분의 숨결을 느껴보려고 애쓰는 중인데..... 
아자,가자.... 계속 자기 앞의의 길로 나아가다보면 .....
언젠가 목적지에 이르겠지......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인생이...말이에요.

여기 서울도 오늘은 쨍쨍 구름 높고...가을의 문턱에서....곡식들이 잘 익어야 할텐데...
이태리의 그 뭉게구름 흰구름 두둥실 떠가네....
.백산은 베로나에서 바로 돌아올 건가요?    쥬리엣을 잘 달래주고 와용.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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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1.08.27 18:01:07 *.48.137.246
돌아가야죠.,... 머무는 곳이 집이라면 온 세상이 다 내집인 셈이지만....

내안에 숨겨져 있는 신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제 문제가 잘 풀릴까요
제문제를 잘 풀면 신의 문제도 풀릴까요
천년 고적 앞에서 나는  일 초도 안 되는 시간때문에  성질부리고 있네요
무엇을 찾아 이렇게 헤매이는지 죽어야 사는 것을
 날선 칼 날 앞에서 천년을 헤매고 있는 듯 하네요...

아레나에서  피흘리는 검투경기 대신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았는데요...
아따,, 줄리엣 죽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30분이나 걸렸는데
검투로 치면 1분깜도 안 되는 것이...
오메 오메...  아시죠,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거...  또... 30분....
9시에 시작해서 11 시 쯤 죽을 줄 알았는디 
 새벽 한 시가 되서야  겨우 죽었데요.... ㅎㅎㅎ

르네쌍스가 신을 죽이고 인간마저 파괴하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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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범
2011.08.28 15:53:39 *.69.159.155
우와 매우 중요한 인간이었구나...쥬리에또는....
총한방 맞고 한꺼번에 깨갱 죽어 넘어져야 하는 엑스트라 
 하고는 출연료뿐만 아니라....죽어가며 독점하는  시간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나지요.

지금 세네카가 죽는 장면을 읽고 있는데.....
네로가 자결을 강요해서 ...팔정맥을 잘랐는데
피가 빨리 흘러나오지 않아서 ......  결국은 소크라테스처럼 죽었다고 하네요. 

그의 아내 파우리나는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정맥을 자르고 기절한 사이 옆에 있던 병사가 노예를 시켜
그녀의 팔에 붕대를 단단히 감아주어 남편을 따라가지 못했다네요.

근데 백산 우리가 지금 뭔 얘기를 나누고 있당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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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8.28 12:38:54 *.95.177.135
두 분 대화의 깊은 뜻을 저는 감히 이해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느껴 보려 하겠습니다.
여행에서 다녀와 김용규 선생님과 아씨시의 별빛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것 또한 신의 뜻이 있으시겠지요.
 
좌선생님, 9월 4일 오프수업 마치고 땡7이 번개한번 치겠습니다.
그 때 다시 한번 이탈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아요.
아,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백산 선배도 모시고 싶네요. ^ ^
그의 홀로 남겨진 이탈리아 체류기도 들어보고 싶으니까요. ㅎㅎ
아, 이번 참에 땡7이와 코드가 제법 잘 맞을 것 같은 5기 선배님들을 초대할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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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2011.08.28 15:27:43 *.95.177.135
신곡 땜이 아니라 50페이지의 미스토리 기한이 8/31까지라서요.
거기다 9/4 오프수업 준비도 해야 하구요.
보고 싶어도 쪼매만 참으이소~~
저도 밀땡 좀 해볼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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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8 15:15:46 *.69.159.155
재키,
신곡땜에 도서관엘 가있는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 신곡....에궁 불쌍해라.

그나저나 7기 발등에 불이 잔뜩 떨어졌을텐데....우찌할거나....보ㅗㄱ싶어 죽겠는데...
내 생각엔 에~또....이 밤이 지나고 그대들이 올려놓는 "고해"를 함보고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감히 내가 땡칠이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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