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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8일 12시 38분 등록

북리뷰 75 : 신 , 3부  은 창조주다.

책: 서양문명을 읽는코드, 신.  김용규.  2010.

***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3부 신은 창조주다 
 

             “주여, 하늘과 땅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이까?”
                     -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

  239. 아들은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할 날이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해 어머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두 사람은 세상의 감각적 쾌락이 아무리 크고 물질적 풍요가 더없이 좋을지라도 신이 '진리의 양식'을 먹이시는 저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했습니다.  

240. 이 일이 있은 날로부터 보름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이 경건했던 어머니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곡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자신은 골방으로 들어가서 하염없이 통곡했지요. “주여 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평생토록 눈물을 흘린 어머니를 위해 제가 이렇게 운다고 어찌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들이 신에게 한 고백입니다. 

서기 387년 로마 인근의 항구도시 오스티아에서 이렇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경건한 여인 중 하나로 꼽히는 모니카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아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 이지요.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250. 십자가 곁에서 슬픔에 잠긴 성모가
죄없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처럼
바닷가에서 당신은
죄 많은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회의주의가 '이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 개인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준비단계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251. 384년 서른이 된 아우그스티누스는 로마를 떠나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로 다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마니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252.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의 한계가 신앙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 라는 암브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월성을 평생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암브로시우스가 그 말 바로 앞에 붙인 "신은 우리가 이성 없이 그분에 대한 신앙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라는 말을 따라 이성의 중요성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어요. 사실 그가 기독교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바로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일이지요.

254. 신플라톤 주의는 오리게네스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도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정립한 이성주의 세계관을 전하는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현대의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적 이성주의를 내세워 동방의 이원론인 마니교를 극복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대의 자연과학, 수학, 테크놀로지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서 삼십 대 초반은 마치 포도가 포도주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256. 그의 회심은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일어났습니다. "주여, 언제까지 진노를 그치지 않으시렵니까? 원하옵건대 지난날에 저지른 죄를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내일입니까?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안 됩니까? 왜 바로 지금 이 시간에 나의 더러움을 벗어 버릴 수 없나요?"

257. 그때 이웃집에서 “톨레 레게”라고 외치는 한 아이의 목소리가 되풀이해서 들렸습니다. “톨레 레게”는 ”집어서 읽어라“라는 뜻이었지요. 그래서 손에 잡히는 데로 성서를 펼쳐 읽은 것이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지요. 이윽고 회심한 그는 386년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둘이었지요. 

260. 387년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인 388년 아들마저 잃고 나서야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 카가스데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261. 392년 어느날 히포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감독(비숍)으로 34년 동안 방대하고 뛰어난 저술로 서방신학의 주축을 이루다가 43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학자들은 방대한 아우구스티누의 저술을 크게 세 단계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 시기에는 마니교를 논박하며 주로 인식론과 신론을 정리했고
두 번째 시기에는 도나투스 분파 문제에 골몰하여 교회론과 성례전을 정리했으며
세 번째 시기에는 페라기우스주의자들과 싸우며 은총론과 예정론을 확립했다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를 위해 꿀이 가득 찬 천국의 벌집을 짓는, 진실로 부지런한 하나님의 꿀벌입니다. - 당시의 주교 밀레비스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듯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고 말 할 수 있다. - 화이트 헤드

262. '신학계의 플라톤'이라고도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은 그 후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학에서도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합리론자들은 물론이고 칸트, 볼프, 헤겔을 포함한 독일 관념론자들도 인간정신의 내부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할 수 있다는 것과 ‘상기의 힘’이 있어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할 수 잇다는 것 등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덕을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서양문명을 읽는 기독교 코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상당 부분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고백인가, 증언인가 

264.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397년 그의 나이 마흔 셋에 썼습니다. 

265. 인간의 삶이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이처럼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모든 삶과,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세계의 모든 역사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고 인도된다는 교리를 기독교에 처음 정립한 사람은 2세기 루그두눔의 감독이던 이레네우스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의미로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우리말로는 보통 '구속경*' 또는 '신적경*'으로 번역하는데요, 신이 그의 섭리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간다는 뜻입니다.

신율은 자율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키지요. 요컨대 신율은 섭리에 의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성숙되어 초월적으로 실현되는 자율을 말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 곧 신율"이라고 규정하지요.

266. 신율이란 사실상 당사자만 느낄 수 있을 뿐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고백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삶을 신율적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정점에서 회고록을 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매개로 자기가 맡은 교구의 교인들을 교육할 신앙 간증서 내지 신학 교육서를 썼던 겁니다.

이처럼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단순히 그들의 사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신앙 체험을 기술하는 '고백문학'이 아니라, "영원의 섭리를 내가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옳음을 밝힐 수 있도록" 진리를 밝히는 '증언'으로 삼았지요.

268.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또한 어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도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269. 신율에 의해 그의 마음 안에서 점점 자라난 '진리의 빛'은 그 자신의 어둠을 밝혀주었습니다. 나아가 그 빛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갈 길을 몰라 헤매는 모든 인간에게 길라잡이가 되고 있지요.

270. 우리는 '고백론'을 읽으면서, 우리가 삶에서 경험했지만 놓쳐 버린 숱한 의미를 새롭게 회복시킬 수 있지요. 물론 그 일은 '다른 형태로' 이뤄지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에 의해 고대 히브리 인들의 창조설화가 이전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부활해 기독교 신학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예지로 가득한 그의 '창세기' 해석은 이미 과학적, 합리적 인간이라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조차 충분히 수긍할 수 있도록 놀라운 방법으로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게 물어보라, 하늘의 아름다움, 별들의 빛남과 질서,
낮의 태양과 달, 밤에 내리는 서리를 가진 세상에게!
땅에게 물어보라, 나무들과 식물들을 풍요롭게 하는,
온갖 동물이 서식하여, 인간을 위해 가꾸어지고, 마련된 땅에게!
바다에게 물어보라, 자기 안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로 충만해진 바다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나서 보라, 저마다의 것이 자신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감관을 통해 너에게 대답하고 있지 않은가 :
"신이 우리를 만드셨다." 드높이 숙고한 철인들이 이것을 물었고,
그들은 세계라는 예술품으로부터 신적인 예술가를 인식했다.

271. 이 글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술품 같은 자연으로부터 예술가적 창조주를 발견하고 감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개나 천둥, 그리고 폭풍 속에서
장엄한 힘으로 압도해 오는 존재를,
만발한 꽃의 향기와 온화한 바람의 산들거림 속에서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존재를
우리가 느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 괴테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275.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라는 말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시간상 '아주 오래 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으로 보았지요. 그는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 졌다" 라고 단언했습니다.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창조'라는 말은 신이 세계를 '시간 밖에서' 창조했다는 의미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태초에' 창조와 함께 시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지요. 5)

276. 천지를 짓기 전에 신은 안식하셨다는 겁니다.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 신은 시간 밖에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 밖에는 어떤 변화나 행동도 없습니다. 이 같은 논리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짓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라고 담대하게 답했지요. 요컨대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창조와 함께 시간이 생겼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신기하게도 천체물리학이 내세우는 우주론인 '빅뱅이론'과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빅뱅이론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주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277. 창조론과 빅뱅이론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립하는 두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 유신론적 성격과 유물론적 성격, 종교적 믿음과 이성적 사고가 여전히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서양문명의 이중적 성격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78. 우주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듯 생겨나 지금도 여전히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이론은 1920년대 벨기에의 성직자이자 과학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가 처음 제시했습니다. 그 후 1947년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가 이론적으로 정리했지요. 그 과정에서 가모브는 제자들과 함께 훗날 빅뱅의 결정적 단서가 될 우주배경복사를 예측했습니다.

279. 허블은 1936년, 지금은 고전이 된 저서 '성운의 세계'에서 자신이 발견한 적색편이 현상이 '팽창하는 우주'를 증명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지요.

파동을 발생시키는 파원과 그 파동을 관측하는 관측자 중 하나 이상이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 운동에 따라 나타나는 파장의 외형상 변화를 물리학에서는 도플러 효과라고 합니다.

280. '풍선 비유'에서 동전들 사이가 멀어진다면 풍선이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우주와 성운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색편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281. 우주배경복사란 빅뱅이 생긴지 약 38만 년 후 원자가 형성될 때 떨어져 나온 전기파로, 사실상 대폭발을 증명할 수 있는 "창조의 메아리" 입니다.

282. 우주배경복사가 폭발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적색편이 현상이 팽창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지요.

283.
특이점이란 천체물리학에서는 중력의 세기, 밀도, 온도와 같은 물리적 측정량이 무한대가 되는 하나의 점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어떤 기준을 상정했을 때 그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점을 뜻한다.

"이 우주를 출범시키는 데 필요한 정밀도는 우주의 순간순간 행동을 지배하는 동역학 방정식들(뉴턴, 멕스웰, 아인슈타인 등의)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준 놀라운 정밀도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빅뱅은 어째서 그렇게 정밀하게 계획된 것일까?"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285. 현대 물리학자들은 대개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나 '양자비약을 통해 최초의 물질 형식들이 생성된 양자 영역'을 무로 설정합니다.

286. 양자요동이 일어나는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나 '최초의 물질이 형성되는 양자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 무'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건 아직 모른다" 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 라고 말합니다.

287. 과학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요. 신학자들은 그때마다 "그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 원인 바로 신이다" 라고 답하겠지요.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대변하듯이 자기 자신을 정초하는 수학 이론은 존재할 수 없지만 신은 개념상 스스로 자신을 정초함으로써 모든 것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이 모르는 그 궁극적 원인이 바로 신이다" 라는 신학자들의 대답을 과학자들은 영원히 몰아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288. 우주가 탄생할 때 어떤 식으로든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일이 '적어도 한 번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지금 존재하는 이 우주의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289. 무슨 말인지 아마 이해가 잘 안될 것입니다. 나도.. 과학자들도... 그러니 우리는 우주가 어떤 특이한 한 순간에 탄생했고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292. "10-43초는 1초의 1조의 1조의 1조의 1000만 분의 1만큼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 시간 안에 어떻게 이 기막힌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우주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며, 그의 계획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과학자들은 '인본 원리'라고 부르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지적 설계론'이라고 합니다. 또 신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논증 형식으로 표현해서 신의 존재증명 가운데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부르지요.

종교 개혁자 칼빈의 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만물을 정하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유익과 은혜, 하나님의 권세와 은혜를 우리가 묵상케 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찾고 찬양하고 사랑하도록 자극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바, 그 사실을 그가 유지하는 질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293. 다중 우주 해석론 : 우주는 아주 작은 시공거품(space time bubble) 에서 시작합니다. 그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갑자기 팽창하여 하나의 우주가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포함된 전체 우주는 마치 부글거리며 끓는 죽과 같아서 이 같은 시공거품 하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이 생성되었다가 또한 소멸하는 카오스 입니다. 그것을 다중우주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 시공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 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생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95. 데카르트는 "신이 만물을 창조할 때 다른 목적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모든 사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음직한 일이 아니다" 라며 인본주의를 강력하게 거부했지요.

296. 여섯 개 최적의 숫자가 지금의 우주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한 마틴 리스도 우주 초기 상태에 그런 최적의 조율이 있었다고 해서 여기에 굳이 신의 섭리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무한한 다중우주가 존재하고 각각의 우주는 나름대로 고유한 특성과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우리의 우주는 우연히 여섯 개 최적의 숫자에 의해 우리가 살기에 적합하게 구성되었을 뿐이라고 믿고 있지요. 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주는 여러 집합체 중 하나일 수도 있다.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가 각기 다른 물리법칙을 따르면서 고유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중 우리가 속한 우주는 아마도 복잡성과 의식이 허용되는 우주일 것이다"

297. 다이슨은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현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앨렌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299.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세계 이전, 곧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창조했다는 말은 일단 신이 시간이나 공간 그 어느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독립성을 가진 '세계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의 '세계초월성'을 신의 '전지전능성'과 연결지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300.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신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그가 세계의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의지대로 생성, 소멸, 인도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이지요.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자를 살리는 일이 신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01.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이지요. 성서 텍스트의 '사실'은 예컨대 자연과학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세계의 사실입니다. 즉 창조, 신의 통치, 언약, 중생, 심판, 종말, 부활, 새 세상 등 성서의 언어로 구성된 '성서세계'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객관성이 보장되는 사실들이라는 이야기에요.

302.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역사,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지요. 그러므로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303.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 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고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305.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305.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저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07.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는 쿤의 '패러다임'보다 훨씬 유연합니다. 쿤의 패러다임이 상대적으로 '닫힌 체계'라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는 '열린 체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여러 차원 또는 여러 종류의 언어놀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즉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양식-를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삶의 양식을 갖고 사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언어놀이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언어놀이 문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이해의 진보를 가져와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오히려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308. 내가 언어놀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incommensurable)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 하자는 것이지요. 언어놀이 이론이 과학적과 종교의 소통을 막으리라고 우려하는 존 호트도 이 점에 대해서는 "과학과 신앙을 제멋대로 섞는 행위를 막으려면, 과학과 신앙의 만남은 신중하고 자의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309. 이때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상대의 주장과 그 주장이 나온 상대의 발화 환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찻잔의 손잡이는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어느 한쪽에 붙어 있다."라는 합의내지 일치가 가능하든 말든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상대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 같은 새로운 합의나 일치를 얻어 냈다면 당신은 비로소 '이해의 진보'를 이룬 것이고 그로써 상대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지요.

리오타르도 "합의는 낡고 의심스러운 가치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의는 그렇지 못하다." 라면서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합의와는 무관한 정의의 개념 및 실천을 위한 원칙을 다음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각각의 게임 그리고 여기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규정하는 규칙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면, 이 합의는 국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의는 현재의 파트너에 의해 이루진 것이며, 경우에 따라 쉽게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311. 이러한 다원적 이성에 의한 원칙들에 의해서 리오타르는 '지식에 대한 정당화'도 '사회적 정의에 대한 정당화'도 새롭게 구축되길 바라지요.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사유 모델이 오늘날 시도되고 있는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와 소통에는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종교가 대화와 소통을 통해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낸다면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급하게 서둘러야 할 목표는 아닙니다.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 입니다.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 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312. 과학과 종교 간의 바람직한 소통을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하지요.하나는 상대가 사용하는 전문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대화와 소통이 '상호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담론들을 하나의 문법으로 획일화하려는 야망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313. 나는 우리의 삶과 세계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은 마치 오늘날 영상기술자들이 3차원 영상을 만드는 방법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기술자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두 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실사에 가까운 3차원 영상을 얻어 내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우리의 작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14.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세계로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초월성과 세계에 부단히 참여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내재성을 동시에 지닌 유신론적 신입니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317. '태초'는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신이 '시간 밖에서' 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하이젠 베르크와 뒤르의 제자인 게르하르트 뵈르너의 말; "공간과 시간이 빅뱅에 의해서 발생하고 블랙홀들에서 소멸한다면, 공간과 시간과 시간 속에서 정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지만, 우리의 이론들은 경험들을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을 벗어난 개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생각만으로는 공간과 시간의 저편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심오한 물리학적 분석은 그런 가능성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들을 제거한다."

318. 뵈르너의 이 말은, 만일 공간과 시간이 빅뱅에 의해서 발생하고 블랙홀들에서 소멸하는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공간과 시간 속 사물들의 질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 자체가 가변적이라면, 우리가 표상할 수 없는 다른 질서,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지요.

319. '시간 밖의 시간' 이라는 말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규정한, 시간이 가진 성질이 아닌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무한하게 분산되며 미래에서 다가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부단히 흘러가는 성질이 아닌, 그와는 다른 성질을 가진 어떤 시간을 뜻하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영원이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신의 시간이라지요.

"주님의 연대는 불과 한 날이며 주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옵니다. 주님의 '오늘'은 내일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어제를 뒤좇지 않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영원'하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321. 따라서 바르트에게 창조는 "과거, 현재, 미래, 어제, 오늘, 내일은 연속적이 아니라 동시적인" 신의 시간, 곧 영원 안에 있는 신의 의지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인간의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즉 영원 안에 있는 창조가 시간 안에서 작동하면서 순차적으로 역사가 발생하지요.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머니의 팔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라고도 비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미래란 장차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시간적 과정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점차 자라나듯이 영원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시간인 역사로 순차적으로 "침입해 들어옴"일 뿐이지요. 따라서 그것은 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만물을 급진적이고 가차 없이 새롭게 합니다. 

322. 플라톤 철학에서 영원한 존재란 자기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전체성 안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현존하는 존재 곧 '불변하는 실재'를 뜻합니다. 시간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영원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언제나 자기동일적 현재만 있기에, 영원은 불변하는 실재이며 신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323. "영원이란 마치 하나의 점 안에 모든 것이 자리하듯이 그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동일성 안에 머물러 항상 자기이기에 언제나 변화가 없는 존재,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라고 하겠다."

플로티노스에게는 영원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존재, 즉 미래에 변모될 것도 없고 과거에 변화된 것도 없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325.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의 모상'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따르면 불변하는 이데아가 변하는 개별 사물 안에 부분적으로 들어(분여)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영원이 변하는 시간 안에 부분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325. 원형과 이를 본뜬 모상의 관계를 아는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의 다양한 주장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326. 영원의 분여에 의해 시간이 '비록 한정되니 이것으로나마' 지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식되며, 이름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모상" 또는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이라고 규정했어요.

플로티노스는 공간이 연장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란 지속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없다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마음 밖에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 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시간도 변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플로티노스는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학자들이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말하는 시간을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지요.  

327. 영원은 신에게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속하는 동시에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330.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도록 하는데요,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가능성이자 과정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이자 통로지요.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찾아낸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331. 일자, 곧 신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함! 바로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발견한 영원한 삶을 얻는 구원의 방법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적 언어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나이다" 라고 고백한 의도이며, 우리 삶에 주어진 시간의 궁극적 의미이고 가치이지요!

332.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각주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반복'에서 주장한 '반복'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미래를 향해 과거를 회복하는 것이다. 즉 미래를 기대하면서 과거를 상기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반복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성'을 갖는다. 이런 주장은 모두 과거가 기억으로 현전하고, 미래 또한 기대로서 현전하는 시간, 곧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가 흔히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과 연관된다.

334.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우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시간’을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신적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그는 보통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에 대해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마음(영혼)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335.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러한 힘을 '상기의 힘'이라고 불렀지요.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이렇듯 상기의 힘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적 차원에서든 모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갈린 심오한 사유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분여이론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시간론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단지 흘러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인식되던 인간의 삶과 세계 역사에 '비록 한정적으로나마'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구원했지요. 인간의 삶과 역사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구원과 영원으로 나가는 통로라고!

337.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 

342.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 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343. "프루스트의 사상에서의 '무의지적 기억'은 기독교 사상에서의 은총처럼 초자연적 역할을 한다. 기억은 실추한 인간의 본성,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원래의 본성에서 분리된 인간의 그 본성에 대하여, 일거에 전적으로 그 근본 조건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닌, 구령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효력을 발휘하는 그런 불가해한 현상이다.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 작품들에서 회상은 인간적인 동시에 초인적 형상을 띠고 끊임없이 나타난다."

역사란 물리적 시간에 의한 단순한 자연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연쇄적 또는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역사의식 없이는 역사적 사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를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344. "역사 기술이 시작되기 이전에 여러 민족에게 흘러가 버린 시간, 즉 여러 가지 혁명과 대이동 그리고 격변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를 시간을 우리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그들은 주관적 역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 역사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346. "시간이 경과하는 전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원 속에서 확실하게 인식한다. 그의 영원성은 현존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전체적 경과에 관계되고 이것을 초월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높은 망대 위에 위치한 어떤 사람이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동시에 직관하듯 신이 자신의 영원성에서 시작의 흐름을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 토마스 아퀴나스

물리적 시간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꾸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 곧 회심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무의지적 기억'을 통해 이룬 게 바로 이것이지요.

348. 시간의 선분 도식을 이용하면 왜 우리의 관점에서 진화로 보이는 사실들이 신의 관점에서는 창조인지, 왜 우리가 매 순간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사실들이 신에게는 예정된 사실인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천지란 무엇인가

349.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창조한 천지를 각각 '지혜의 하늘'과 '형상 없는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혜의 하늘은 무엇? :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이 아님. "하늘 들의 하늘"이라는 말을 인용해 표현한 그곳은 천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완전한 영역으로, 하나님 가까이에 있다고 했지요. 시간도 공간도 없는 어느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351.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이 우리가 보는 우주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 거처하는 '하늘'은 시공과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물리적 법칙을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소망들을 허용할 수 있는 신의 전지전능성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52. 형상 없는 땅 :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상 없는 땅'은 우주공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형성해 내는 원물질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형상을 얻어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를 형성하지만 원물질 자체는 빛깔도 형태도 성질도 없기에 가시적인 어떤 것이 아니지요. 즉 '무'는 아니지만 '무'에 가까운 것, 형상을 가진 물질과 무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353. "주님이 만드신 이 땅 자체는 형상이 없는 질료였나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가 없었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었나이다. 이 불가시적이고 형상 없는 당, 거의 무에 가까운 그 무형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은 변화 가능한 만물을 지어내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우주가 생겼나이다. 변화가 있기에 덧없는 것이지만 이 변화에 의해 시간과 시기가 관찰되며 우리가 그것을 계산할 수 있나이다.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355. 여기서 뒤르가 말하는 '장', 곧 '비물질적인 퍼텥셜'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불가시적이고 무형적인 '형상 없는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356.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창조자의 능력 자체는 사물의 이러한 자연적 운동과 진행과정을 넘어서서, 이런 모든 사물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의 종자적 이성(일반섭리)이 지니지 않은, (초자연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종자적 이성'이란 신이 창조 때 개개의 생물을 지금의 모습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때가 되면 '그것'이 되게끔 부여한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일반섭리에 해당한다.

357.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 바로 모든 양자 사건이 일어나는 퍼텐셜이라면 러셀의 이 같은 주장은 전통신학과 현대과학을 연결 짓는 매력적인 가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지'에 대한 해석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 청조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가 담겼기 때문이지요.

무로부터의 창조 

360. '무로부터의 창조' 는 기독교가 받아들인 히브리적 사고로, 신이 창조주이자 곧 절대자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교리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요, 바로 '신의 절대적 독립성'과 '전지전능성'입니다.

363. 신은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물질세계에 대해 '절대적 독립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그는 물질세계의 법칙을 초월해 신실한 자들에게 부활을 선물할 수 있는 '전능한 자' 다. 그러니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니라" 라고 '무로부터의 창조'와 연결하여 교훈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자연과학적 원리로 이해하지도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중략)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과학자가 기독교인에게 "도대체 무로부터 유가 나오는 일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며 맞서는 일은 부질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지요. 기독교인들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366. 세계가 아름답다는 이 주장은 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갈라서서 오히려 플라톤에게로 다가가는 심오한 사유임, 교리적으로는 마니교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사용했던 뛰어난 변증이기도 합니다. (366)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일자를 태양에 비유하여 '선의 이데아'로 규정한 다음, 그로부터 나온 물질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고 인정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바울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세계는 선자체에 의해 선하고 아름다운 성과물로 창조되었다'라는 플라톤의 사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육체는 전혀 악하지 않고 "영혼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타락 가능성"이며, 신은 오히려 "(인간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육체에 영혼을 부여한다" 라고 주장했지요. 아울러 물질과 육체가 악하다는 마니교도들의 주장을 반박했는데요, 바로 이때 '무로부터의 창조' 라는 교리를 사용한 겁니다. 그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367. "신은 그가 창조하지 않은 질료, 즉 마니교에서 말하는 악하고 추한 질료로부터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물질도 선하고 아름다우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세계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 한 마디로 창조는 그 근거와 결과가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었어요.

368. 차라투스트라가 그렇듯이, 고대의 신들은 악하고 추하며 두려운 면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초인'이라고 부르며 찬양했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적인 성스러움을 기괴하고 무섭고 불길한 것으로 묘사했지요. 하지만 기독교와 함께,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신적인 성스러움과 그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규정되면서 서양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369. 신은 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과 세계는 불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다우며,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

370. '불온전하게 됨', 이것이 타락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의미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함의지요.

예수가 구원받은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다시 온전해진 세계를 "천국"이라 칭하며 교훈했다는 것만 말해 두지요. 예수는 이런 가르침도 남겼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371. "모든 피조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를 인간과 세계의 선의 근거로 해석한 동시에 타락의 가능성으로도 파악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것을 신과 그 피조물을 철저히 분리하는 데도 사용했지요. 누구든 세계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신과 세계가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범신론에 빠지게 됩니다.

372. 신이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무로부터 창조된 인간과 세계 역시 (비록 불온전하지만)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 어떤 악마적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복됩니다. 인간은 기근, 전쟁, 질병 외에도 운명, 불안, 죽음, 허무, 무의미성, 죄책 같은 악마적인 것들에 속절없이 노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엾은 인간적 상황에서 '신과 세계의 선함'은 언제나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던져주지요.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일’인가 

373. 우리의 하루 개념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1회 자전으로 규정되는데, 창세기의 하루는 태양과 지구가 아직 생기기 이전이니 결코 같은 개념일 수 없지요.

374.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하루를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여섯 날 만에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적힌 구절들은 "먼저 창조를 전체적으로 제시한 후 신비로운 날짜 수에 따라 그 부분들을 순차적으로 집행하는 것처럼 묘사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다는 의미지요.

서양문명은 일찍부터 창조를 태초의 어떤 신비로운 시간에 의해 여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376. 슈뢰더는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해서 엄청나게 팽창해 가는 과정의 시간인 '우주의 시간'과, 아담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인간의 시간'을 구분합니다. 창세기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이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라는 뜻이지요. 초기 우주 상태에서는 중력이 막대하여 시간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느렸다는 겁니다. 슈뢰더는 "주의 목전에서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니라."라는 성경 구절이 설득력 있다고 주장했지요.

377. 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379. 신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성육신의 계시는 매우 신비롭고 특이합니다.

383. 성육신은 유대교 뿐만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도 매우 낯선, 기독교 고유의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연히 갈라서지요. 그만큼 성육신은 기독교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384. 구약성서에서는 신의 ‘말’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다바르사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 로고스, 즉 ‘말씀’으로 번역되지요.  

386. 다바르를 로고스로 표기한 요한의 작업을 통해 로고스의 의미가 다바르의 의미까지 포괄하여 더 확장된 것이지요. 즉 다바르에 내포된 동적, 인격적, 행위적 성격 그리고 비물질적 세계 초월성이 로고스에 담긴 정적, 지적, 이성적 성격 그리고 물질적 세계내재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387. 이는 마치 앞에서 든 비유처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두 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실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3차원 영상을 얻어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 결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와 같은 구약성서의 표현이 그리스 철학적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특성인 세계초월성과 세계내재성의 통일이 더욱 자연스럽고 분명해졌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행위로도'라는 구호로 압축되는 예수의 사역이 가진 성격도 함께 부각되었지요. 이 '말씀'은 발화와 동시에 언제나 그것이 뜻하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행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388.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된 성육신에 담긴 또 하나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로고스와 다바르의 이러한 종합은 정지적인 그리스의 존재 개념과 역동적인 히브리의 존재 개념이 종합을 이루어 영원불변 하는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기독교적 신 개념이 형성된 것과 궤를 같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변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신의 본질'과, '불변하는 진리'인 동시에 '창조하는 신의 말씀'이 가진 아름다운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지요.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풍요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393. 구약시대부터 창조는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시간에 따라 계속되는 '신의 역사'의 시작이자 일부로 이해되었습니다. 신은 피조물을 창조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또 끊임없이 인도한다는 것이지요.

창조가 태초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보존하고 인도하는 신의 사역으로 재차 강조되었지요. 보존은 구분되는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다.  

394. "인간의 마음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힘을 한때 깨닫고서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그러나 믿음은 진실로 그 지점에서 더 전진해야 한다. 믿음은 창조주로서 알려진 하나님을 영원한 통치자와 인도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의 움직임을 운행하시며, 작은 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시고 유지시키고 먹여 주신다."  

396.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신의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의 성격을 늘 갖지요. 창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창조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과 자연스레 연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은 무슨 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해서 보존하고 인도해 가느냐의 문제가 기독교 신학 안에서 이야기되었지요.

397. 롱사르는 신이 어떤 결핍도 없이 오직 자족과 풍요만 있었는데도 세계를 창조했다고 읊고 있지요. 이제 반해 노리스는 그렇다면 신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자족을 향유하지 않고 굳이 창조를 했느냐고 꼬집고 있습니다.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398.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를 이데아 중의 이데아인 ‘선자체’로 규정하고 이후 선을 ‘자족적 완전성’으로 파악했습니다. "선이란 그것을 소유한 존재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충족되며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설명했지요. '선자체'로서의 '일자'는 언제나 완전하게 자족적이기에, 그에게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400. 신은 도대체 왜 자족 상태를 향유하지 않고 물질세계를 창조했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플라톤은 한마디로 일자의 '자기초월적 풍요성'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을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요컨대 유한한 존재물을 생성시키는 원인은 무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적 풍요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자신의 본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402. 루터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일반에서는 창조가 ‘피조물과의 친교’를 위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칼빈 신학과 개혁파 교회 전통에서는 창조의 목적을 ‘신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뚜렸한 공통점은 신도 창조가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비록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실지라도 인간을 창조하는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둘 속에서 영광되게 하려는 것이다.

405. 도킨스는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이끌어 가는 신은 니체의 말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지요.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407. 오늘날 진화론은 그것이 아직 완벽한 완성을 이루지 않았는데도 일종의 종교처럼 신봉되고 있습니다. 다윈의 후계자들은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자연, 사회, 문화, 그리고 인간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414.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416. 다윈은 자연과학 이론인 자신의 진화론을 떠받치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각각 맬서스와 스펜서의 사회학적 개념들로부터 빌려온 셈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사소한 학문적 행위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회진화론과 연결되어 엄청난 사회적 불행을 초래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418.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이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원시적 공간이라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렇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인간사회가 자연의 일부라고는 해도 자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 동물로부터 왔다고 해도 동물로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사회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지요. '만들어 간다'는 데는 '잘 (또는 바람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가치 기준이 전제되어 있으니까요.

421. 사회학에서 나온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개념들이 다윈에 의해 비유적 의미로 자연에 적용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절대적 정당성을 인정받은 다음, 다시 사회학으로 당당하게 돌아오는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은 신의 빛을 드러내" 보이며 "그것은 분명하고 변함이 없으며 보편적인 빛" 이어서 자연의 법칙인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는 과오가 있을 수 없으며, 같은 이유로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와 믿음이 당시 서구사회에 만연했던 것이지요. 요컨대 19세기 서양 사람들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은 사회적이기도 하다(또는 사회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사회다윈주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근원적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은 사실상 신의 빛도 아니고, 분명하고 변함없는 보편적 빛도 아니지요.

424. 19세기 후반은 유럽만이 아니라 북미 대륙에도 사회다윈주의가 그 위세를 맹렬히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서양문명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자들은 무자비한 방임을, 자유주의자들은 무제한 경쟁을 요구했고, 우생학자들은 동족 내의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약자들의 합법적 제거를 부르짖었으며, 인종주의자들은 자국 내의 열등한 인종이나 외국인 추방을 외쳤고,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대륙을 미개지로 몰아 계몽 또는 선교라는 미명 아래 정복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하나 같이 사회다윈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지요.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건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나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살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후반 사회생물학에 바통을 넘겨주기까지는 사회다윈주의가 바로 그런 부당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425. 자연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는 분명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지요. 자연과는 달리 인간과 사회는 언제나 가치지향적이고, 또 항상 그래야만 합니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을 따라 인간사회에서도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와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지향하던 이성과 계몽의 역사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427. 경쟁이란 동물세계에서나 인간세계에서나 진화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물들 사이에서도 번식기 같은 극히 예외적 시기로 국한되며 진화의 더 나은 조건은 협동에 의한 경쟁 소멸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쁜 선택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요.

429.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이렇게 언제 어디에나 웅크린 채 숨어 있습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이 무사유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 보다 실천적 의미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회다윈주의자 들이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아렌트가 경악했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그 역사적 귀결이었어요.

다윈과 기독교  

430.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이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했음을 역설하고 멀지 않은 장래에는 문명화된 우세 인종이 야만적인 열등 인종을 대치할 것이라면서, 그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숨겨온 신념을 드러냈습니다.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이 일을 수행하면서 니체는 인간에 대해 다윈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도덕적 진화의 필수불가결성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433.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윈이 '인간의 유래'에서 밝힌 새로운 진리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구원이라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하찮은 동물로부터 우연히 진화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도달하는 결론은 뭘까요? 당연히 인간의 구원이나 부활에는 그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겁니다.

435. 오늘날 우리가 그렇듯이, 19세기의 유럽인들도 나날이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을 통해 현세에서는 물질적 삶을 충분히 즐기고,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종교생활을 통해 내세에서는 영원한 삶을 얻으면 그만이라는 세속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평생 온몸으로 저항하며 싸웠던 것이 바로 그러한 세속주의였지요. 그는 "대중과의 싸움, 평등이라는 폭정과의 싸움, 피상성, 난센스, 저열성, 야수성이라는 악동과의 싸움에 비하면 왕이나 교황과의 싸움은 오히려 쉽다"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436. 매슈 아널드에 따르면 당시 영국의 계급사회는 영적으로도 지적으로도 한심한 상황에 빠져 있었지요. 상류층은 야만적이었고, 중산층은 속물이었으며, 서민들은 누가 뭐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화론의 사회적, 종교적 함의를 당시 기독교인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근원적인 이유였지요.  

439. 진화론 외에도 이신론, 인류교, 자유주의 신학, 실증주의, 유물사관 등의 부단한 도전에 지쳐 있던 19세기 후반의 교회가 '약삭빠르게' 진화론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지요.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443. 존 호트는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당연히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여긴다." 이런 이유로 진화론에서 가차 없이 무신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448.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에 해당되는 '일자'는 전혀 변화하지 않아요. 따라서 창조에도 직접 관여하지 않습니다. 일자는 오직 자기로부터 유출된 '정신'과 '영혼'을 통해서 사물을 생성하고 사물에 작용하지요. 이 때 성자에 해당하는 정신은 신의 영원한 형상을 자신 안에 생성합니다. 이 형상이 자연물의 범형이 되기 때문에, 플로티노스는 그것을 '종자적 형상' 또는 '자연의 씨앗'이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성령에 해당하는 영혼은 그것들이 현실화 되는 '원리'이자 '운동능력'으로 작용해서 모든 물질세계를 순차적으로 창조해 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성부는 창조에 직접 개입하지 않지요. 창조를 하는 이는 성자인데,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성부의 영원한 형상들을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차례로 구현합니다.

449. 신은 세계를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 영혼(또는 성령)에게 '세계를 현실화하는 질서와 과정'을 부여해 그에 의해 창조가 차례로 일어나게 했다는 말이지요.

450.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세계는 태초에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지만, 이때 만물이 모두 '가시적으로 그리고 현실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지요. 특히 땅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은 '감추어진 씨앗'의 형태, 곧 "나무의 씨앗 속에 시간에 따라 점차 나무로 자라날 모든 것이 비가시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잠재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종자적 형상'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때문에 생명체들은 이후 신의 섭리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지요.  

454. 창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그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456.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일 기독교 어느 종파나 교파가 원하기만 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큰 틀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일 이론적 바탕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457.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기독교가 이미 오래 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은 문제

458.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 가운데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논란이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그것들이 지닌 경이로운 복잡성, 정밀성은 '태초의 6일' 이라는 어느 특정시기에 일회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부단히 진화한 결과라는 주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화가 어떤 외부적인 원인이 설계한 특별한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이고 '맹목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460. 신학은 특정 교리를 영구불변 하는 진리로 주장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그것의 시대적 해석이 적절한지 또는 수용가능한지를 늘 질문하면서 성서와 전통적 사상들을 통해 부단히 재고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461. 훌륭한 연설가가 청중을 미리 알고 자신의 연설을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듯이, 신이 계시를 할 때도 계시를 받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었다는 것이지요.

아놀드 토인비가 전체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인간의 문명처럼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 라고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요.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 마치 역사학이 그렇듯이 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석, 재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텍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462. 창조의 합목적성과 진화의 맹목적성(또는 우연성)을 조화시킬 만한 이론을 기독교는 확보하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바꿔 말하자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신의 필연적 계획 안에서 진화의 우연성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전통적 신학 이론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눈먼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 

467.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충하지 않고 양립한다는 말로,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논파함으로써 딜레마를 물리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행한다는 말도 옳고, 신이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말도 옳다는 내용이지요.  

468. 신이 어떤 일(A)을 일어날 것임을 예지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침해 받지는 않습니다. 이때 신은 그 일(A)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일(A)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예지하는 것이거든요.

신은 무한하므로 우리를 강제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허락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매 순간 자유의지로 행할 일들의 모든 가능성과 경우의 수를 미리 알아서 준비한다는 것이지요.

470. '프랑크푸르트 스타일' 이론의 핵심은 설령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크푸르트 스타일'은 우리에게, 양립주의가 모든 경우에 성립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특별한 조건' 아래에서는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 있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요. 즉 강제하는 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강제 당하는 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한정된 상황' 아래서는 양립주의가 문제없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과 인간 사이에는 실제로 바로 그런 특별한 조건이 성립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신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전제가 아니던가요!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 사이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가 아무 어려움 없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471. 복잡계란 무수한 요소가 상호작용해서 어떤 패턴을 형성하거나, 예상 밖의 성질을 나타내거나, 각 패턴이 각 요소 자체에 되먹임 되는 시스템이다. 복잡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에 있는 시스템이다.

472. 이미 주어진 저차원의 질서에서 이전에는 없던 고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을, 복잡성 과학에서는 '창발'이라고 부르지요.

473.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본능적 욕망이 만든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을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전지식을 갖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는 뱁새와 개미들의 본능적, 맹목적 행위들이 가져올 떼 이동과 둥지 건축이라는 창발적 결과나 목적을 미리 알 수 있지요. 또한 떼 이동이나 둥지 건축이 뱁새나 개미들에게는 단지 맹목적 적(또는 본능적) 행위가 낳은 우연적 결과겠지만, 우리에게는 합목적적 행위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우리는 뱁새나 개미와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무엇보다 지능적으로 전혀 다른 범주와 차원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474. 인간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극대화가 영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신)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목한 대로 신은 '시공 밖'의 존재이고 인간은 '시공 안'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유했듯이 "마치 높은 망대에 오른 사람이 여행자들의 여정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눈에 직관하는 것처럼" 인식하지요. 한마디로 신과 인간의 인식은 판단의 범주와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 바로 이겁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면, "그런즉 하나님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다" 라는 아우스티누스의 양립주의적 교훈을 수긍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476.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에보디우스 딜레마가 진화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 사이에서 생기는 딜레마와 똑같은 형식이라는 점에 주목하려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진화의 맹목적성은 둘 다 비결정적이라는 점에서, 신의 예지와 창조의 합목적성은 모두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두 문제는 똑같은 형식의 딜레마를 만들지요. 또한 인간과 자연에 그 같은 자유(인간의 자유의지, 자연의 맹목적성)를 허락한 것이 신의 사랑에서 기인했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당연히 그 해법도 형식이 같아야겠지요?

477.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의 모든 진행이 필연적이라면 진화는 맹목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부수는 '뿔로 잡기'를 시도합니다. 즉 신의 섭리에 의한 합목적적 예정이 자연의 맹목적 적 진화를 '반드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어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모든 미래사를 합목적적으로 예정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자연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당신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본래적 원인'이자 제1원인인 신은 '우연적 원인'이자 제2원인인 진화법칙에 자연의 창조와 진행을 맡겼지만, 제2원인 역시 제1원인에 의해 창조되고 조정된다. 내 말의 요점은, 우연성(맹목적성)은 제2원인의 속성이고 필연성(합목적성)은 제1원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제2원인과 제1원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합목적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고 말 할 수 있다."

478. 당신이 어떤 해법을 생각했든 공통점은 있습니다. 진화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은 같은 범주나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그런즉 하나님이 모든 미래사를 합목적적으로 예정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자연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다윈과 함께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479.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이 섭리에 의해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진화한다는 것도 옳고, 자연이 우연성에 의해 맹목적 적으로 진화한다는 것도 옳다'고 믿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신의 필연적 섭리와 자연의 우연적 법칙이 대등하게 옳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신의 필연성이 자연의 우연성을 창조하고 지배하며 이끌어 간다는 의미일 뿐이지요. 한마디로 '필연과 우연은 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니, 신의 뜻이 곧 운명'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인간이 진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담겨져 있지요!

창조의 목적은 구원

480. 전통 기독교 교리가 지지하는 창조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론이고, 동방정교와 서방 가톨릭이 고대로부터 취하는 일관된 관점은 창조의 목적을 구속사와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과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신성에 참여시키는 만물의 신성화를 위해 창조가 이뤄졌다는 주장이지요. 여기에는 분명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각함으로써 기독교의 창조론을 유대교의 창조 신앙과 구분 지으려는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481.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은 '만유'일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구분이 더는 없을 것이며 악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가 정화되고 깨끗이 된다. 이때 홀로 계시며 한 분이신 선한 하나님이 그 개인에게는 만유가 된다. 또한 소수의 개체나 다수의 개체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만유 안의 만유'이시다. 죽음과 죽음의 독침과 그 어떤 악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정말로 '만유 안의 만유'이실 것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482.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물의 궁극적 목적은 신의 선성이다. 창조된 모든 것에서 출생과 완전성의 목적은 행위 하는 자 또는 출생시키는 자의 형상이며, 그것들은 바로 그 형상의 유사성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제1 작용자, 즉 신의 형상은 그의 선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신의 선성과 닮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만들어졌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482. 불완전한 피조물이 신의 온전성에 도달하는 것, 신의 선성을 닮는 것, 곧 구원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생각은 문인들에게도 전해졌지요. 헨리 모어의 시 '영혼불멸'입니다. 

신이 행하는 일은 모두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서이며
(신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구하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대해 물방울 하나가 무엇이란 말인가?

칼 바르트도 창조를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이뤄지는 구원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으로 보았어요. 창조가 없었으면 구원 사역도 불필요했다는 게 바르트의 논리로, 그에게도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484.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485. 아우구스티누스의 증언입니다. 

당신께서는 지선하시니, 피조물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당신의 행복에는 아쉬울 것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다듬어 주신 것은
무슨 아쉬움 에서가 아니라 넘치는 선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당신의 즐거움이 그것들로 인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불온전한 피조물들이 온전하신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고,
도리어 그것들이 당신에 의해 완전케 되어야만
당신의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 내가 만일 저자라면

다시 세부 목차를 살펴보자.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고백인가, 증언인가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앨렌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영원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
천지란 무엇인가
무로부터의 창조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일’인가
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풍요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다윈과 기독교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은 문제
눈먼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창조의 목적은 구원 

3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신이 세상을 창조한  방법과 창조한 목적이다. 방대한 철학적 과학적  배경지식을 대중적 언어로 풀어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제법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그 감동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예술품이나 유적들 안에 자리하면서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어떤 위대한 정신적 가치에서 나옵니다. 미술이든, 건축이든, 음악이든, 공연이든, 문학이든, 학문이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하는 것들의 심층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가치들이 반드시 들어있지요. 서구문명에서는 그것이 지난 2,000년 동안 한결같이 ‘신’이라는 이름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하여 나타났는데, 내가 이 책에서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 2010년 10월 김용규 선생님의 휴머니스트 강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라는 말에 주목을 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시간상 아주 오래 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에게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서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태초에" 창조와 함께 시공이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된 농담 하나, 질문 "하느님은 천지를 짓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대답 "  그런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짓고 계셨다."

창조와 함께 시간이 생겼다는 것은 신기하게도 현대 천체 물리학이 내세우는 우주론인 "빅뱅이론"과 맞아 떨어진다.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용어로 말을 하고 있지만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한편 종교와 과학이 같은 용어로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많은 경우의 수를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독서와  긴 시간의 공부와 수련을 정리해서 오늘날 보통사람들도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게 , 같은 눈높이로 따라갈 수 있게  풀어서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가 들인 수고는 지극하다. 독자로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잇는지 물어보고 싶다. 4대째 기독교 집안의 대물림 신앙의 결실인지, 독특한 저자의 삶의 경험에서 피어난 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런 책이 독자로서는 참 고맙다. 

아아우구스티누스는 43세에 <고백론>을 썼다. 이 책은 그의 신앙고백의 진수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가 책을 쓸 때는 회고록을 쓰기에는 그가 너무 젊었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32세에 회심한 히포의 주교로서 그는  삶의 정점에서 회고록을 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매개로 자기가 맡은 교구의 교인들을 교육할 신앙 간증서 내지 신학 교육서를 썼던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모든 삶과,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세계의 모든 역사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고 인도된다는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고백론>은 자기의 작품을  "영원의 섭리를 내가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옳음을 밝힐 수 있도록" 진리를 밝히는 '증언'으로 남겨 놓았다. 

일견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수많은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두었으니 아마 토씨와 너무 복잡한 말들을 빼고는 거의 다 써 놓은 것 같다. 그러니 군더더기 같은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시간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넓힌것
언어를 매개로처해진 상황을 다시 이해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지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읽으며 주어진 질문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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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1.08.28 12:43:50 *.69.159.155
kyungyun이라는 단어가 걸림망에 걸린다고 하네요.
구속경*,신적경*은 구속경yun,신적경yun으로 읽으세요.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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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1.08.28 17:46:09 *.48.132.174

왕누님!  감사합니다. 잘 정리되어진 글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새롭게 합니다.  
써놓고 보니 소감문 치고는 좀 이상하군요  ^^

하나 속의 우주

  검을 잘 다루기 위해서 훈련을 한다. 훈련을 하는 목적은 훈련을 하지 않고 검을 잘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훈련을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검을 가장 잘 다루는 것은 검을 놓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검을 다루어 보지 않은 사람과 다루어 본 후에  마음으로부터 검을 놓은 사람의 차이는 다르다.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검을 놓지 못하면 손에서 검을 놓아도 놓은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부터 검을 놓는것, 그 두려움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검을 잘 다루는 것이다.

원래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그냥 거게에 있었다
그 마음을 다루기 위한 노력이 하루든 천년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인 것을...

내가 검을 다루어 얻은 세 가지의 결론
첫째, 그렇다 아니다. 나의 경험과 기억은 확고하게 답한다.
둘째,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전제와 가정을 통해 미래를 설정하고 현재를 결정한다.
셋째, 모른다. 그 때 가봐야 안다. 미래에 벌어질 가능성에 관한 일이다.

검이란 본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가 먼저 죽여 자신을 지키려 했으나 그 죽임이 자신의 죽음을 부르게 됐다
그래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죽이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검을 놓아야 된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 하는 그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놓을 수가 없다.
 그 마음이 해방되지 않는 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구원받기는 커녕 자신을 지킬 수 마져 없게 된다.
그 마음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것은 나 스스로에 의해서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죽으면 살리라’ 
내가 검을 통해 쌓은 모든 경험과 기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으니
나의 마음이 정녕 그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면 나는 살리라.

그 나의 마음의 구원은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누구도 나의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한 어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나 스스로만이 나의 마음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구원은 나 스스로 말미암는다.’

영원 속에 모든 순간이 있고 모든 순간속에 영원이 있다면 우주속에 내가 있으니  내속에 온 우주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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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9 09:03:29 *.69.159.155
백산,
<하나 속의 우주> 글 참 좋으네....
나도 이 책읽다가 정화스님과  얘기하고 싶어졌는데....
여러날째 종적이 묘연하시네....
혹시 이태리 가셨을까?
백산 돌아오면 ...얼굴보고 나머지 얘기도 하십시다.
남은 사흘 잘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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