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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9일 20시 42분 등록

북리뷰 76 : 신, 4부  5부 

***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4부 신은 인격적이다
 

 

"가장 비참한 비극은 신의 섭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요,
가장 큰 축복은 이 신의 섭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 요한 칼빈 '기독교 강요'

490. 전투복을 차려입은 네로는 자신이 무엇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모든 향락주의자들이 필히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불안과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는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491. 바울은 기독교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신이 택한 도구이었습니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의 ‘운명’ 

 

497.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황제의 명령이 전해졌을 때 세네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태연했다고 합니다. 세네카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친구들을 오히려 꾸짖었답니다.“그대들의 철학은 다 어디로 갔는가? 눈앞에 닥치는 불행과 맞서겠다던 그 결심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498. 평소 그는 인간의 삶을 연회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제 그가 연회를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새비지 랜더가 세네카의 죽음을 쓴 시입니다.


'죽음을 앞둔 어느 늙은 철학자의 말'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 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세네카에게 죽음은 로고스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로고스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섭리이지요. 이 섭리는 세계에는 자연법칙으로,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으로  작용합니다.

신의 법인 '자연법'이 인간들의 '실정법'보다 우선되는 것은 서구에 내려오는 오랜 전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 사상'이라고 부르는 이 전통은 "인간의 모든 법은 신의 법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한다" 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지요.

499. 안티고네가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식을 금한 테베의 왕 크레온에게 왕의 명령보다 자연법이 우월하다는 것을 내세워 오빠의 장례식을 치른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호소합니다.  

 

500.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항상 살아 있어서 왕의 법령이라도" 감히 어길 수 없는 하늘의 법, 곧 자연법입니다.

501. 로마의 절충주의 철학자 키케로는 "모든 사람의 전면적 동의는 자연법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보편적 법칙'과 자연법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지요.

 이후 로마의 법학자들도 자연법과 만민법을 동일시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이유로 자연법을 '영원법'이라 불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학대전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사물들의 실제적 주권자인 신 안에 존재하는 통치 개념이 자연법이다. 그렇다면 신의 정신은 시간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의 개념을 지니며, 그 법칙은 영원법이라고 불려야 한다. 현재 인간 이성이 도달한 구체적 결과들은 그것이 이미 진술한 자연법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에 '인정법'이라고 불린다.

502. 이처럼 서양문명에서 로고스는 신의 섭리로서 '영원법'이자 인간이 따라야 할 모든 법과 도덕의 근거인 '자연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근원적으로 자연법은 '정당하기 때문에 법'이고, 실정법은 '명령되었기 때문에 법'이라고 생각해 왔지요.

로고스는 또한 인간의 이성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로고스(이성)를 자기 정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 안에 있는 로고스, 곧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이었지요. "나면서부터 로고스를 나누어 가진 자에게는 올바른 이성도 법칙도 주어져 있다." 라는 것이 그들의 구호였어요.

 

그렇지만 그 이성에 의해 파악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의 법칙인 섭리는 인간이 부단히 따라가야 할 복종의 길일 뿐 인간의 삶에 깔려 있는 희망과 절망, 기쁨과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503. 세네카는 섭리를 따르는 일이 때때로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용기를 내서 참고 견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독일의 문화 철학자 요슈발트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 마지막 부분에서 인용한,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라는 세네카의 말도 그래서 나온 겁니다.

504. 고대철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도사린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을 무시해라.
태어날 때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을 무시해라.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을 무시해라.
죽음은 너희의 고통을 끝내 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 세네카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505.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세네카는 참된 스토아 철학자는 '신들 위의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죽음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해방시켜 신이 되게 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지요.

507. 세네카는 평소 친구들에게 “죽음 이라는 이른바 영혼이 육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 시간 자체가 너무 짧아서 그 과정을 느낄 수 없다”고 가르쳤지요. 그러나 그의 죽음은 에상과는 달리 그리 짧은 시간에 와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팔 정맥을 끊었습니다. 하지만 나이탓인지 피가 빨리 흘러나오지 않아서 발목과 무릎의 혈관도 잘랐지요. 그래도 바라던 죽음이 오지 않자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독약을 마시고 증기탕에 들어가 서서히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일흔하나였지요.

바울의 ‘예정’ 

 

511. 우리가 지금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바울 또한 이처럼 인간의 모든 일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며, 이에 대해 누구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512. 세네카와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닮았어요. 두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사성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론이 초기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513. 토머스 제퍼슨은 바울이야 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최초로 오염시킨 자"라고 공격했지요. 또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도 "예수의 정신에 바울의 정신적 결점이 덧씌워진 것보다 더 꼴사나운 덧씌우기는 여태껏 저질러진 적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때 이들이 '오염' 내지 '덧씌우기'라고 말한 것이 바로 바울의 가르침 안에 들어 있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지요.

 

514. 바울이 자기 사상으로 예수의 복음을 윤색해서 기독교를 일구었다는게 바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용어와 수사학적 표현 형식에서 그랬을 뿐이며 내용에서는 구약성서와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에 닿아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516. 세네카가 말하는 섭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칙일 뿐 우리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와 달리 바울이 말하는 섭리의 근원은 당연히 구약성서의 계시입니다.

 

517.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세네카의 섭리와 바울의 섭리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은 각각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인격적이냐 아니야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이라는 말이지요. 세네카의 신을 ‘아테네의 신’, 바울의 신을 ‘예루살렘의 신’으로 이름지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칼빈의 ‘섭리’  

 

518. 요한 칼빈은 바울을 따라 섭리와 은총을 자신의 신학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520.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했고, 라블레와 에라스무스의 저서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인문주의를 접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상당한 흥미를 가졌습니다. 회심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오직 성경으로" 라는 구호를 따른 엄격한 성서주의자로 살았지만, 동시에 뛰어난 인문주의자기도 했지요.

 

524. 회심이 신의 섭리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순간적일 뿐 아니라 점진적일 수도 있으며, 외적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칼빈은 자신의 개종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그렇듯이 자기 삶을 회상하는 글에는 언제나 그 삶을 바라보는 사람의 고유한 관점이나 사상이 담겨있게 마련입니다.

 

525. 칼빈은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자기 삶이 표면적으로는 제 자신이나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된 것 같지만 실상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 것임을 누차 강조했습니다.

528. 칼빈은 자신을 강제하는 신의 손을 ‘요망스럽게도’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신의 손에 맡겼던 것이지요. 그것이 그를 위대한 종교개혁자로 남게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네카와 바울, 칼빈을 통해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그 출생부터 죽음까지 '끊임없이' 인도하는 신의 어떤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신의 그 속성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선으로 이끈다는 것도 살펴보았지요. 그들이 '운명'이라 했든 '예정'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라고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계 내재성' 또는 '인격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의 인격성은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루는 근간이자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우리는 신의 인격적 속성을 통해서만 신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데 신에 관한 직접적 경험 없이는, 비록 신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신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철학자의 신과 종교인의 신, 아테네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이 판이하게 갈라서는 분기점이지요.

아테네의 신 

 

530.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부동의 운동자'로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부동의 운동자'는 언제나 있었고 또 언제나 있을, 영원히 세계에 작용하는 '원리'로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구별할 줄도 모르며, 또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물들을 돌보지도 않지요.

531.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가 계승하고 설파한 이른바 '걱정 없는 신'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신들은 쾌락 속에서 살며 더할 나위 없는 지복 속에서 쉬고 있고 다른 신이나 인간들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532.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세계를 돌보는 일이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 주어졌지요. 질송은 이 정황을 적절하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그리스인들은 다툴 여지도 없이 이성적 신학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상실해 버렸다."

'이성적 신학'을 학자들은 '자연신론'이라고 합니다.

 자연신론에서 신은 야훼처럼 창조주이며 세계를 초월하지요. 그러나 그는 야훼와는 달리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세계는 오직 그가 만든 자연법칙과 도덕 법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운행될 뿐이지요. 그래서 자연신론자들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매우 중요시 합니다.  

 

 

535. 인간은 오직 자기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로고스인 이성을 믿고 도덕법칙에 의지해야 하지요. 그에게는 그것이 신에게로 다가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섭리와 기독교의 섭리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여지 없이 갈라서지요. 

 

 

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536. 기독교 교리에서 인간이 자기이성에 의지해서 신에게 다가갈 길은 '원칙적으로'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신의 섭리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칼 바르트가 표현한 “눈얼음 계곡”, “황폐지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과장된 면이 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교부들이 이 눈얼음 계곡과 황폐 지대를 건너가는 건실한 '존재의 사다리'를 놓았으니깐요.  

 

537. 중세 신학자들이 “피조물의 사다리를 통한 정신의 신을 향한 상승”이라는 구호로 요약했고 존 밀턴이 <실낙원>에서 예찬한 이 이론을 카톨릭 신학자들은 “존재 유비”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릅니다. 신과 그의 피조물이 분여에 의해 양적으로만 다를 뿐 질적으로는 같다는 전제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생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존재의 유비 교리를 따르면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맡겨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이성에 달린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위험은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존재의 사다리' 개념이 기독교에 들어온 이래 항상 존재했어요.

544.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 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예루살렘의 신  

 

545. 히브리인들이 신앙으로 그 답을 찾았을 때 그들은 신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서에 기록된 계시지요. 신은 인간을 창조한 후 곧바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삶에 부단히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신의 참여와 인도를 근거로 인간도 신과 사귀고 신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고, 비로소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맺어지지요. 인간 스스로 신에게 나아갈 길을 연 것이 아니지요. 신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와 말 걸고 인도했다는 말입니다.

546. 그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부단히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2인칭의 신, 즉 '신적인 너'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언제나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 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요.

547. 히브리 인 들은 신을 '나와 너'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만 동시에 한 없이 두렵고 어려운 상대로 인식했습니다. 마르틴 부버도 '나와 너'에서 신을 "나의 나보다 더 나에게 가까이 있는" 완전한 자기( Das ganz Selbe) 라고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타자"이며 "나타나고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라고 고백했습니다.

549. 예수를 통해 신의 인격성이 강화된 겁니다. 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556.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 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신이 존재인 한 신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이 존재에 '이미 그리고 언제나'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이 생성, 작용하는 한, 신은 피조물들의 모든 변화를 '이미 그리고 언제나' 이끌고 있지요. 그럼으로써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희와 함께 하리라" 라는 단 한마디 약속으로 계시했습니다. '함께 하리라'가 바로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탁월한 성서적, 존재론적 표현이지요.  

안셀무스는 “최고의 본질(신)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최고의 본질이 다른 모든 것을 유지하며 초월하고 관통하며 포괄하는 분임이 명백하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그 섭리는 모든 것에 미친다.”라고 반복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희와 함께 하리라.(출애급 3,12)”라는 단 한마디로 약속을 계시했습니다. 함께 하리라가 바로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탁월한 성서적 존재론적 표현이지요.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560.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또한 신과 만나고 신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신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

562. 섭리는 삼위일체처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둘 다 기독교 교리들을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이지요. 섭리는 신이 인간과 교회 그리고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합니다. 이점에서 신이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과 신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간다는 '섭리'의 구별이 쉽지 않은데요, 사실상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입니다. 신은 미리 예정한 섭리를 통해 자신의 창조세계와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돌보며 구원하지요. 섭리에 의한 그의 강제적 사역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563. 기독교인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그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의 섭리가 때로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는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의 선한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과 뜻은 하나의 신비로 세상에 감춰져 있는데 그 신비 속에 후회하심이 없는 부르심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567.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568.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즉 감각적 지각도 이성적 관념도 다 버리고 완전히 순백의 상태에서 기도할 때, 온 영혼을 불살라 기도할 때, 그제야 모든 것이 신의 섭리에 의해 잘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강한 섭리, 약한 섭리 

 

570.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신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쳤지요. 예수는 물론 이 둘을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선후의 문제인 것처럼 교훈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우리의 가련한 바람은 이토록 끈질깁니다! 

 

571. 예수가 말한 신이 더해 줄 '모든 것'이란 '신이 보기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이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신은 오직 그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모든 것'을 더해 준다는 뜻이지요. '좋은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이 아니라 신이 생각하는 좋은 것입니다.

574.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지한 대로 된다" 라고 교훈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칼빈은 "모든 사건은 신의 감추어진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잘라 말했지요.

기도는 왜 하는가 

 

576.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 토마스 아퀴나스

"모든 사람은 기도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듣지는 않사오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에든 주님의 응답을 받사옵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원하려는 사람이 주님의 가장 훌륭한 종이옵나이다." - 칼빈

577. 알고 보면 신을 믿고 그의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디 극단적 자기 체념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교훈했지요.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별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부단한 자기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밀이 부서져 빻아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빵이 되겠습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의 절구에 자신을 집어 넣어 부서지고 빻아져서 (그러나 버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578.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과 도덕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요. 구원은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적 체념을 통해 마음의 평정은 얻을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이 얻는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지요.

579. "기독교가 아무리 스토아 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주적 체념을 감수하는 스토아주의와 우주적 구원을 믿는 기독교의 신앙 사이에 걸친 간격을 없이할 수는 없다" - 틸리히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580.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성숙 단계를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실존의 3단계설' 이라고 부르지요.

582. 첫 번째 심미적 단계입니다.

"인생을 즐겨라", "순간에서 순간으로" 또한 "향락에서 향락으로" 이러한 삶의 방식을 키에르케고르는 '윤작'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마치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위해 작물의 종류를 번갈아 경작하듯이, 심미적 단계의 사람들은 권태를 쫓고 쾌락을 얻으려고 대상을 자꾸 바꾼다는 뜻이지요. 이들은 향락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마저도 부단히 바꿉니다.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 방에서 고즈넉이 살고 싶어 하는 일종의 비겁이고 인간답지 못한 짓"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키에르케로르는 전능한 황제 네로를 "욕망의 지옥을 예감한 사람"으로 보고,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질은 불안과 두려움" 이었다고 진단했습니다.  

세네카는 네로같은 향락주의자들은 ‘살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죽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평했지요.

583. '뉘우침'이 심미적 단계의 인간을 다음 단계로 상승시켜 '윤리적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한 마디로 뉘우침이 인간을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 방'으로부터 해방시켜 윤리라는 햇볕 아래 서게 한다는 말입니다.

585. 힘과 건강과 부와 사랑 등 욕망 속에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비록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필경 절망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임을! "그러니 이제 그대여 절망하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오히려 권하지요.

586.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가 심미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많은 것을 필요하게 되고, 그런 것들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그는 죽는다. (이에 반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타개책을 갖고 있다. 일체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짓누르는 폭풍우가 어둡게 그를 감싸고 있어서 그의 이웃들마저 그를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그의 '자기'인 것이다.  

 

588.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적 단계에 도달한 인물의 예로 아가멤논과 옙다와 브루투스를 들었습니다.(캐릭터는 출전을 다시 찾아 읽으세요)

591. 일찍이 괴테가 적절히 언급했듯이 빛이 밝은 곳에서는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지요.

  

593.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마치 밤이 깊어야 이윽고 새벽이 오듯이 키에르케고르에게 "무한한 체념은 믿음에 앞서 있는 마지막 단계"이지요. 인간은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두려움과 떨림 

 

596. 이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무엇보다도 세계와 신의 모순성 때문에- 자신의 삶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리하고 있지요.

597. 고뇌는 내리쬐는 태양 아래 들끓었고 절망은 빛나는 별빛 아래 얼어붙었을 테지요. 또는 너무 오래 살았다고 질기고도 자기모진 목숨을 증오도 했겠지요.

 

601."아브라함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의 정점에 서있다.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최후의 단계는 무한한 체념이다. 그는 거기서 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에 이르렀다."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전부였지요. 또 그날 그 산에서 정작 아브라함이 불태워 신에게 바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마리 숫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지요. 아니,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안과 불신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해낸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  

투명한 모순과 불투명한 불안 속에서도, 몸서리치게 하는 공포와 치아가 맞부딪치는 전율 속에서도, 그는 신을 믿었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요. 아브라함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606. 제2의 인류는 무한히 자기를 체념하는 자기파괴자들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광기 있는 자들이고, 자신을 미워함으로써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며, 신의 섭리를 믿는 현명한 자들이지요.

608.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치레로 살지 말라!" 라고 외쳤지요. 인간이 되려면 인간답게 살고, 기독교인이 되려면 기독교인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609.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의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 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지요.  

 

 

610.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지요.  

 

헤르만 헤세 (1877-1962)'기도'

주여, 나로 하여금 나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당신에게는 절망하지 말게 하소서.
혼미한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소서.
모든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부끄러움과 욕됨을 맛보게 하시고
내가 나 자신을 가누는 것을 돕지 마옵시며
내가 뻗어나가는 것을 보살피지 마옵소서.
그러나 나의 모든 자아가 파괴되었을 때는
당신이 그것을 파괴하셨고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으신 사실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왜냐하면 나는 기꺼이 멸망하고
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만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부 신은 유일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바울, 에페소서 4,6

 

 

615. "내 영혼이 나의 육체로부터 벗어나 나의 다른 많은 것을 뒤로 하고, 오로지 순수한 자아만을 찾아 나갈 때 나는 경이롭고 위엄에 찬 아름다움을 발견했나니, 정녕 저 숭고한 영역에 속하는 찰나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삶에 확신을 얻고 마침내 신과 하나 됨에 이르더라" 플로티노스

 

 

617. 플로티노스의 관심은 온통 천상세계의 영혼과 영원한 시간에 쏠려 있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는 플라톤의 개념과 사상들을 자기 취향에 맞게 변형해서 가르쳤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의 핵심입니다.

 

618. 플로티노스는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소년처럼 명상 속에서 흘러간 시간들을 하나씩 마음에 모았습니다. 그는 항상 마음이 '시간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언제나 아직은 오직 않은 것 같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지요.

"죽음도 역시 다르지 않거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기쁘게 맞지 못하랴!"  

 

 

619. "무얼 염려했단 말인가. 우리의 영혼이 양생자임을 몰랐는가? 영혼은 이 세상을 사는 것처럼, 동시에 저 세상에서도 산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 영혼도 당연히 때마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이편 또는 저편에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플로티노스에게 영혼은 정신과 감각이라는 "이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겸비하면서 그 사이에 자리한다"

 

621. 기독교인이 "신은 유일하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뜻을 단순히 독선적인 종교의 오만한 선포나 배타적 종교관에서 나온 말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에는 플라톤의 '선자체'나 프로티노스의 '일자'가 가진 심오한 의미가 분명히 담겨있지요. 더욱이 그 말에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을 통해 부여한 고유의 의미도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622.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이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배타성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 참혹한 분쟁과 테러가 그치질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으니까요.

  

 

624. 한 세계를 지배하는 신 개념은 그 세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신 개념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자, 그 정점이지요. 바꾸어 말해 그 세계가 숭배하는 신 개념에 속하지 않은 세계의 가치는 없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다.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우선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규정한 일자의 의미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을 차례로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뿌리인지 아닌지를 자세히 알아볼 겁니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일자

 

627.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사물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단일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모든 이데아 중 가장 단순한 것조차 하나가 아닐 뿐더러 사실상 무한한 다수성을 포함한다는 점이 나타난다" 라는 질송의 말이 그래서 나왔지요. 그런데 이 말은 동시에 이데아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일자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궁극적 근거는 오직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지요. 둘만 되어도 그 둘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다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631. '선자체'는 모든 이데아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이데아 중 이데아'로 실체 중 실체입니다. 플라톤은 '선자체'를 태양에 비유했습니다. 태양이 가시적 세계의 만물에 생육과 자양을 주듯이 '선자체'는 가지적 세계의 모든 이데아에 존재와 본질을 부여합니다. 또한 만물은 변하지만 태양은 변하지 않듯이 이데아들은 인식되지만 선자체는 인식되지 않지요. 따라서 이에 대한 인식은 모든 변화(생성,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가장 훌륭한 것에 대한 관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선자체의 본성은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며, 언어 형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미"로 권능과 위엄에서 모든 이데아를 능가하지요.

633.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본질은 선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634. 플라톤 철학이 가진 이러한 구세적 성격은 나중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는 사도 바울의 '승리 찬가'로 불리는 기독교의 '섭리 사상'과 연결되어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서양문명을 이끌었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이 '연원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 있지요.

635. 만물의 궁극적 근거가 선이라면 인간은 당연히 선하게 살아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고대인들에게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지요. 플라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선자체를 보고 그것을 표본으로 삼아" 살아야 한다고 교훈했습니다.

636. 신의 선성이 도덕적 선의 '충분한 이유'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같은 플라톤 사상을 기반으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본래적으로 선한 신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 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이후 로마에 들어가 로마법의 기초가 되었고,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이 침투해 기독교 윤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요.

플라톤이 논리적 오류를 고의로 범하면서까지 일자와 선자체를 동일시한 것은 '존재론적 목적'이 아닌, 오직 '도덕론적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초월적인 '천상의 세계'만 동경하던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의 철학체계에서는 한갓 헛된 것인- '지상의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 철학자였지요. 그래서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를 선자체로 정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 선한 삶을 끌어내는 데 전념했던 겁니다. 플라톤 철학의 진짜 목적은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였던 것이지요.

637. 러브조이는 "플라톤의 역사적 영향에 관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유럽의 내세성에 특징적인 형식과 용어와 논법을 제공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적 경향 -즉 각별히 건전한 종류의 현세성 -에도 특징적인 형식과 용어와 논법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우리가 이른바 내세적 방향으로 정점에 이르자마자 제 스스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상 그 어떤 철학자도 따를 수 없는 플라톤의 위대한 면모입니다.

638, 질송은 "플라톤은 신비주의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일자  

 

639. 플라톤이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가진 종교인이었습니다.

640. 일자의 가장 두드러진 본질은 '첫째'가 아니라 '절대적 초월'이지요. 같은 말을 파울 틸리히는 "디오니시우스나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일자'에 대해 말할 적에 그들은 결코 '하나'라는 수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넘어서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일자의 '일'은 기수의 일도 아니고 서수의 일도 아니지요. 오직 유일하다는 의미의 '일'이지요. 이후 서양문명에서 말하는 일자는 곧 유일자입니다!

일자의 초월성은 오히려 모든 존재물을 포괄하는 바탕이자 존재에 대한 긍정이지요. 존재물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초월자이지만, 일자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포괄자 입니다. 요컨대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닥에 갈리는 심연이 되며,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개별적인 것들이 그 안에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포괄자에요. 기독교의 신이 갖는 유일성도 바로 이렇습니다.

641. "일자에는 개념도 없고 지식도 없다. 그래서 신은 정신의 저편에 있다고 말한다." 라는 플로티노스의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주목할 것은 일자에 관한 이런 사유가 기독교 사상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의 제일위인 성부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641. "그리하여 원의 중심(일자) 자체가 존재하는 한편 원의 반지름(정신)이 원의 중심점에 기초해서 존재하며 나아가 그 반지름에 기초해서 하나의 원을 구성하는 원의 둘레(영혼)가 존재하듯이 일자, 정신, 영혼이라는 세 자립체는 하나로 존재한다."  

 

643. 플로티노스의 일자에서는 정신과 영혼이 순차적으로 유출되었고 이것이 각각으로 분리된 채 하나의 자립체로 존재하기는 해도 어쨌든 일자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에 나타난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태초부터 동시에 하나로 존재하며 분리되지도 않고 서로 동등하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 차이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큰 논쟁이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652. 하이젠베르크는 잠세태라는 적절한 용어를 개발함으로써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는 드러나지만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를 보통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하지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학문에서'전문용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해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전까지는 누구도 하지 못한 발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는 전문용어를 개발하여 당시 기독교 신학계가 당면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물꼬를 텄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656. 테르툴리아누스는 '위격'과 '본질'이라는 법학 전문용어를 끌어들여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657. "신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사유와 언급이 기독교 신학 안에서 비로소 가능해졌으니까요.

658. '위격'이란 라틴어로는 '페르소나'인데, 당시의 법률적 용어로 '어떤 것이 법률상 밖으로 드러난 지위'를 말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페르소나'는 바깥으로 나타나는 신의 지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수브스탄티아' 라는 용어는 성부가 성자,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소유하는 신적 권능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곧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660. 본질적으로 하나인 신이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자신 안의 세 위격을 단계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듯이 창조의 순간 둘째 위격인 성자가 생겨나고, 이어 셋째 위격인 성령이 발출되었다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설명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을 오늘날 신학자들은 '경yun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부르지요.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662. 오리게네스는 평생 동안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담그고 살았지요.

663. 당시 순교자들의 대부분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므로 육체가 파괴될 때 비로소 영혼도 해방된다는 당시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을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66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계약을 제공하신 바로 그 하나님은 그리스인들에게 철학을 주신 자이며, 이에 따라 전능하신 자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을 받으셨다"라는 말로 그리스 철학의 진리성을 인정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672. 오리게네스에게 성부는 플라톤의 선자체, 알비누스의 제일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동일하고, 성자인 말씀은 플라톤의 창조주,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정신에 해당하며, 성령은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요.

673. 오리게네스가 '원리론'에서 한 일은, 테르툴리아누스 이후 당시 기독교 사회에 널리 퍼졌는데도 내용은 부실했던 삼위일체론을 중기 플라톤주의 사상으로 풍성하게 채우는 한편 체계화 한 것이었습니다.

"심리적으로 말해서 혹자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철학 할 수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신앙할 수 있다.

675.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은 처음부터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격렬한 논쟁으로 파급되었던 것이지요.

 

675. 오리게네스는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을 동시에 취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모두 취한 것이지요. 그래서 후일 그의 후계자들도 이 가운데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오리게네스 우파'와 '오리게네스 좌파'가 되어 서로 대립합니다.

 

신(로고스 또는 아버지)과 아들이 한 실체라는 동등성 등식이 도출되어 이것이 후일 서방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이 되었지요.

676.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이자 얼굴이며 본질이지만 아버지 자신은 아니며, 오직 구원 사역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경yun적 삼위일체론이 되살아난 것이지요. 여기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적 등식'이 성립해 후일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좌파'의 입장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677. 오리게네스는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했어요. 그는 상황에 따라 알맞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피조물들에게 성부는 존재를, 성자는 합리성을, 성령은 성결함을 부여하다"라는 식으로 삼위일체를 교훈했습니다. 이 말은 후에 동방과 사방을 막론하고 신학자들이 삼위의 역할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요. 예컨대 칼빈은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모사요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을 관장하는 분이시다." 라고 교훈했습니다.

 

 

삼위일체 논쟁  

 

679. 화약고에 먼저 불을 붙인 것은 오리게네스 좌파의 대표인 '아리우스'였지요. "아들은 시작이 있었으며, 아버지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 또는 조성된 것이라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일자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플라톤주의의 이론을 충실히 따른 셈이지요. 아들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그 자신은 아버지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피조물이고, 엄격한 의미에서는 신이 아니라고도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반인 반신의 존재이거나 양자 그리스도론 자들이 주장하던 존재라는 것이지요

.

682. 아나타시우스는 체구가 작았지만 용모가 수려했고 안광이 번쩍여서 대적들마저 그 앞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을 갖고 있었지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용기, 왕성한 활동력으로 신앙과 교회를 위해 싸워 "위대한 계몽자", "하나님의 모퉁잇 돌"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사람의 주장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아들은 구세주고,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신이다." 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신성화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신은 우리가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이 같은 주장이 '신의 세속화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라는 동방정교 신학의 중추가 되었지요.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타나시우스가 '사벨리우스주의자(또는 성부수난론자)'로 몰리면서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을 강조한 이유였고, 바로 이것이 그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사모사타의 바울주의자(또는 양자 그리스도론 자)'로 몰면서까지 반대했던 까닭이었습니다.  

 

 

686.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곧 일자=창조주 라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동등성 등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주목할 것은, 아리우스주의자 들은 모음 'i' 하나만 덧붙인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이라는 용어가 채택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니케아의 결정'은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를 택했다는 점이지요 철자로는 비록 모음 하나 차이였지만, 의미로는 지대한 차이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었고, 사상사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을 비로소 극복한 계기가 되었지요.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695. 문학에서든 미술에서든 결국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 였지요.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697.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가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혼란스런 용어 정리를 시작했지요. 이 세 사람이 과감히 나서서, 마치 현대철학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은 언어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는 것에 맞서는 투쟁"이라고 외치며 수행한 것과 똑같은 일을 고대신학에서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사로잡힌 우리의 정신을 파리통에 빠진 파리에 비유하며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 주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704.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가 바로 이러한 언어적 혼란을 정리했습니다. 그들의 원칙은 삼위일체를 단호하게 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시아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질'로, 히포스타시스는 플로티노스적 의미에서 '실체', 곧 '본체'로 확정하여, 신은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고 명백히 선포했지요.  

 

 

705.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는, 그들이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한 본질'이라는 새로운 정식을 구축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좌파와 마찬가지로 분명 신플라톤주의를 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정신을 해석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도 무시하지 않고 '신적 본질이 다른 세 가지 고유한 존재양식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삼위는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 있기 때문에 오직 서로의 관계에 의해서만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709.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본질과 실체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게 행동한다" 라고 서슴없이 말했지요.

 

710. "어떤 일은 함께 하시고 어떤 일은 따로 하신다면, 삼위일체는 불가분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실 것이다." 한마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음성을 냈으며, 함께 처녀에게서 그 육신을 창조했고, 함께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지요.

 

기독교 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진리를 언제나 좌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로도 기울지 않는 '황금의 중간 길'에서 찾곤 했습니다.

 

711. 삼위는 오직 '관계에서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만 연합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관계설'이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지요. 

 

 

712. "아버지와 아들 이 둘은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면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따로 떼어서 하나만 생각할 수는 없다."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 안에는 오직 관계에 따른 구분만 있을 뿐이다" 라고 선언했을 때나, 근대에 칼빈이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아들이라고 불린다" 라고 교훈했을 때, 그들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말했던 것이지요.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이' 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 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관계설의 핵심이지요.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715.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것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 들이 생겼다가 없어진다.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이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된 자신의 의지를 이루기 위해 출렁인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하는 동안에도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만 이끌려 간다. 이 무한하고 역동적인 바다가 바로 신이다.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 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 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718.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삼위일체 본성에서 사랑(성령)에 의한 동등한 사귐과 교제로서의 '인간공통체 원형'을 발견하고 주장했다는 사실이지요.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사회적 유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 독특한 사유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719. "성령은 두분(성부와 성자) 중 한 분이 아니시다. 두 분은 그(성령)로 말미암아 결합되며 ; 그(성령)로 말미암아 낳은 이가 난 이를 사랑하고, 난 이가 낳은 이를 사랑하며 ; 그(성령)로 말미암되 그것은 그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본질로 인함이며 ; 위로부터 온 은사로 인함이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 인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신다. 우리는 은총을 받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향해서 이 일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령은 무엇이든 간에 성부와 성자와 공통적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사귐 자체는 본질공동체적이며 영원동등적이다. 그리고 이 친교를 우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렇지만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그리고 이 사랑은 또한 본질적 존재다. 하나님이 본질적 존재시며, 성경 기록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공통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신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영혼 속의 기억, 이해, 의지의 통합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 이른바 '심리적 유비'가 그것입니다. 반면 그가 삼위일체로부터 '인간 공동체 원형'을 이끌어낸 '사회적 유비'는 거의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720.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바로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일을 한 겁니다.  

 

1500년이 더 지난 현대에 와서야 신학자들은 성령(사랑)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인간 공동체'의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호내주적ㆍ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722. 몰트만은 다원적 삼위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내세웠지요. 몰트만은 이 주장을 동방신학의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에서 가져왔습니다. 페리코레시스란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라는 다분히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용어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서로가 서로의 안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는 뜻이지요.

 

724. '페리코레시스' 라는 용어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진 통일성은 동일한 것이 모여 있는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 있는 '공통체성'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725. "그들의 영원한 사랑 덕분에, 신적 위격들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참으로 친밀하게 존재함으로써, 그들은 고유하고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통일성 안에서 자신들을 형성한다." 사랑이 바로 그런 일은 한다는 것이지요.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삼위를 하나로 묶는 이 사랑은 단순히 자신과 동일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종 사랑'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까지 받아들이고 포괄하는 '이종사랑'이라는 겁니다. 몰트만의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곧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복음적 사랑'이 플라톤이 규정한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 라는 전통적 주장과도 괘를 같이 하지요.

 

726. 아가페는 서로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 됨'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따라서 흔히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 또는 '신적 사랑'이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려 통일을 이루는 조화만 있을 뿐 합일을 위한 강제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요, 몰트만이 말하는 '이종 사랑'이 바로 이런 겁니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아가페는 용해를 넘어서서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존재들의 세계 속에서만 자리 잡을 수 있다." 요컨대 아가페는 (마치 여러 가지 악기가 서로 다른 자신들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 내는 교향악 처럼) 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이지요. 

 

 

728. 제레미 벡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신 것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될 것을 위해 기도 하셨다. 그들을 하나게 되게 하는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가 되도록 결합시키는, '서로가 스며드는' 사랑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했듯이 소리가 결합될 때 하나가 되면서도 각자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화음을 이루어 합창을 부르는 것이 기독교 전통에서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다.

 

729. "하나님의 세 인격이 상호내주를 통해 하나의 공동 공간을 형성하는 것처럼, 피조물 차원의 공동체 역시 상호 자기발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 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31.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 라는 겁니다.

732.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 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739. 예수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가르침으로 자신이 구약의 유일신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나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라는 교훈으로 자기가 믿는 신이 유일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741.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742.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

십자군을 일으키며 “신의 뜻이시다”라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했던 중세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방법이지만 동시에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745. 독일 베텔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 프랑크 크뤼제만은 '자유의 보존'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신이 유일자인 교설에서 신을 다신론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신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신'이라는 하나의 특정 맥락에서 이야기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요. 다시 말해 유일신에 대한 다신론적 표현은 신이 실제로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고대 히브리 인들이 신을 여럿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고대인들은 다신론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크뤼제만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세속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에 대한 인식은 각각 하나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세계, 내적인 경험의 맥락 속에서 얻어진다. 고대인들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우주와의 조우였다.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이 이러한 하나의 맥락 속에서 초월적 경험을 얻게 될 때, 이러한 개개의 현실 배후에 끝없는 심연과 내세적 은총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료해지고, 이러한 종교적 경험이 하나의 신적 형상에 대한 구체적 원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의도된 것은 경험된 내세였다. 이것에 이름 붙이고 이것을 숭배하기 위하여 이것을 신적인 형상 안에 압축시켰다. 이러한 경험들이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형상들 또한 존재한다."

 

당신을 찾는 이들은 모두 당신을 시험해 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은 이들은
당신을 형상과 모습에다 결박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치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성숙함에 따라
당신의 나라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허영 따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당신과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나를 위해 기적을 베풀지 마소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당신의 법칙을 바르게 따를 수 있도록.- 라이너 마리아 릴케 '순례자의 서'

 

749. 릴케는 우주가 곧 신이라는 범신론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신의 성숙과 생명 성장이라는 사변에 심취했다고 한다.

 

750.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이야기와 연관해서 해석한다면, 릴케가 말하는 신의 나라와 법칙의 성숙이 역사 안에서 인간에 의해 이해되는 신의 성숙일 뿐입니다.

 

751. '다른 신'을 질투하는 것으로 계시된 야훼는 야훼 그 자신이 아니고 단지 당시 히브리 인들에게 이해된 야훼이며, 마찬가지로 야훼의 질투 대상 역시 야훼의 입장에서 본 '다른 신'이 아니고 단지 히브리 인들에 의해 경험된 '다른 신'일 뿐이라는 이야기지요.

 

754.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76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유스티누스는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로고스가 만물을 창조한 '산출적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로 성육신 하기 이전의 그리스도인 '선재적 그리스도'라고 주장했지요.

 

762. "진리의 씨앗"이 "온전한 로고스"인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분여 되었다는 이야기였지요.

 

유스티누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겁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예수 이전에 살아서 역사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몰랐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로고스를 알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예컨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소크라테스처럼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라는 종료를 몰랐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지요.

 

769.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간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한마디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는 것이지요. 라너는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했지요.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771. 칼 바르트와 함께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쌍벽을 이룬 파울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하나님에 관한 유신론적 관념을 초월" 하려는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이 안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으로 인한 배타성 초월을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이 있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적 신은 "하나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아, 너와 관계 맺고 있는 나, 결과와 분리되어 있는 원인, 특정 공간과 끝없는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자" 입니다.

 

 

772. 틸리히; "그는 전능하고 전지해서 나의 주체성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 나는 여기에 반항하고 그를 객체로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반항은 실패로 돌아가고 절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은 건드릴 수 없는 폭군, 그 앞에서는 다른 존재자들이 다 부자유하고 주체성도 잃은 존재로 보이게 된다. ....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하나님, 절대적 지식과 절대적 지배의 단순한 대상이 되는 것을 (우리 중) 아무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죽여야 한다고 한 하나님이다. " 

탈리히는 객체로서의 이 신이 "무신론의 가장 깊은 뿌리"이자 신학적 유신론에 대한 반동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무신론의 근거이고, "실존주의적 절망과 널리 퍼져 있는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의 가장 깊은 뿌리" 라고 지적했지요. 따라서 "유신론적 하나님을 초월해야만 존재에의 용기가 회의와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을 포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774. 카잔차키스의 수도사의 우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신과 주체-객체 관계에 있는 한, 소외되고 절망하게 되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 줍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유신론적 신을 초월해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지요.  

 

 

775. 틸리히의 존재자체는 플라톤의 '선자체'나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그런 것처럼, 현존과 본질을 모두 초월합니다. 이런 이유로 틸리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부정하는 게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지요. 틸리히는 존재자체, 곧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객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라고 강조했지요. 이 말은 결국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신과 인간의 만남이 있는 곳에서는 (비록 감춰졌기는 해도) 어디에나 존재하지요. 그는 "존재한 것은 무엇이나 다 초월하는 존재의 힘"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존재한 것은 무엇이나 다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의 힘"이기도 합니다.  

 

 

776. 그러므로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경험되며, 허무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 안에 존재하며,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 안에서 작용하는"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삶의 무의미성과 죄책에 대한 불안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 곧 '존재에의 용기'를 우리에게 부여하지요.  

 

틸리히는 바로 이 같은 절대적 초월자이자 절대적 포괄자인 존재자체를 믿는 신앙을 '절대적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서 "존재자체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규정했지요. 그것은 한마디로 주체-객체의 관계가 없는 상태이며, 일체의 구별과 차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780.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불안, 공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예리하게 갈파한 대로, 이제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으며, 침실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지요. 우리의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과 항공기에도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과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있지요 바우만은 이처럼 낮에도 밤에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Liquid Fear)"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781.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종교들 사이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 - 한스 큉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른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많은 사람이 지적한 대로 세계 주요 종교들은 - 서구 크리스트교, 정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도교, 유대교 - 비록 인류를 분열시킨 측면도 있지만 핵심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면서 이어 간 다음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하지요.

 

"인간은 어떤 문명이 살고 있건 간에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게 되면 문명의 충돌 가능성이 줄어는 것은 물론 단일 문명의 실현 가능성도 높아진다. 단일 문명은 수준 높은 윤리, 종교, 학문, 예술, 철학, 기술, 물질생활이 복합적으로 섞인 상태를 의미한다."

 

 

782.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도 이제 세계 평화와 인류공존을 위해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하는 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가능한 한 덜' 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신앙을 '되도록 더' 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783.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ㆍ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지요.

과제는 주어졌습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교회의 전향적 선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행동과 조치가 뒤따라야 하지요.

 

 

784. 나는, 신의 삼위일체적 특성에서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방식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론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선포가 배타성과 폭력성 그리고 획일성에 대한 교훈이 아닌, 오직 포괄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백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요.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790. 미켈란젤로가 4년 넘게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천장화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메시지는 당연히 이렇게 정리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는 에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

 

 

792.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림의 오른쪽 하단(요나의 발밑)에 그려진 지옥의 장면입니다. 우선 슬픈 아케론 강에서 뱃사공 카론이 저주받은 영혼들을 저승으로 실어가 노로 후려치며 지옥으로 쫓아내는 모습이 보이네요. 

 

 

796. 미노스와 미다스를 결합한 악마의 얼굴에 체세나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의 분노와 저주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지요.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들아!...  

 

 

798.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 

 

 

799.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습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합니다. 또 논리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지요. 이미 수 차례 밝혔듯 어떤 것이 만물의 '궁극적 포괄자'라면 그것은 '유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것의 바깥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는 이미 '궁극적 포괄자'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신이 존재인 한 유일자라는 것은 존재론적 결론이자 귀결입니다.

 

 

800. 기독교에 말하는 신은 일자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성도 동시에 갖고 있지요. 일자성은 무규정성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지만,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 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맺음말-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802.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의 신, 창조주로서의 신, 인격자로서의 신, 유일자로서의 신을 그와 관련된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예술 등과 연계해서 살펴봤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에 대해서, 그뿐만 아니라 신의 침투로 형성된 서양문명의 심층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지요.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함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파스칼의 경구

 

803.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애석하게도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이제 신은 사회제도에서도, 관습에서도, 생활규범에서도, 학문에서도, 또한 문학, 미술, 조각, 건축, 음악, 공연 같은 예술로부터도 점차 분리되어 잊혀가고 있지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서양문명을 위기로 몰아가는 주된 원인입니다. 어디 서양문명뿐인가요? 그것이 보편화되고 있는 오늘날 '가치의 위기'는 범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통념이 되었고, 이에 대한 무관심, 방기, 폄하, 비아냥거림은 하나의 지적 유행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도 알고 보면 바로 여기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지요.

 

804. 니체가 선지자적 목소리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가 공공연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지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최고의 가치를 대체하고 마냥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세속적 가치(이성, 개인의 행복, 사회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들도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 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입니다.

 

805. 근대 이후 개발된 각종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적 지식들, 예컨대 계몽주의, 과학주의, 사회다윈주의, 자본주의, 헤겔의 변증법, 역사주의, 마르크스 주의, 정신분석학 같은 한갓 '작은 이야기'들이 진리로 정당화됨으로써 제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곧바로 보편성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각종 다른 영역에 침범하여 주인으로 행세하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이른바 근대성의 실체인데, 그것이 연출한 가장 비극적 장면을 우리는, 샤워실 안으로 가스를 주입한 아우슈비츠, 굴뚝으로 독극물을 투입한 구소련의 굴락, 여인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확인하고 전율했지요. 이후 라캉, 푸코,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을 시작으로 리오타르, 하버마스, 로티와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마치 프로크루스테스를 퇴치한 테세우스처럼 무참한 야수를 해체하려고 실로 영웅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은 미완입니다.

 

 게다가 새로운 위험들도 속속 자라고 있지요. 근래에 유전공학, 진화생물학과 함께 부활하고 있는 과학주의가 통섭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들이 다시 큰 이야기로 등극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작은 이야기들 역시 큰 이야기가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 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806.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막이 되어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서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 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 버렸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던 레닌의 팔은 잘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겁니다.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인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닙니다. 그래요. 바우만이 이름 붙인 유동하는 공포지요.  

 

 

807.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신을 불러와야 할까요? 아니면 다시 이성에 매달려야 할까요? 공인된 처방은 아직 없지만 나름의 약방문은 분분합니다. 바우만도 <모두스 비벤디>에서 대책을 마련했지요. 그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역사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각각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전근대는 자연이 사냥터이고 인간이 사냥터지기로 활동했던 시기입니다. 사냥터지기의 임무는 '자연적 균형', 즉 신이 지혜로 조화롭게 질서 지어 놓은 '존재의 대연쇄'를 보존하는 것이지요. 반면 근대는 인간이 정원사로 일했던 시기입니다.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을 설계한 다음, 그에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적합하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을 하지요. 그의 임무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지요. 사냥꾼은 "오직 한 명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또는 많은 무리 중 한 무리의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우리"로서 사냥터나 다른 동료야 어찌 되든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그만입니다. 그의 임무는 단지 살아남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 갑니다.

 

바우만은 세계가 이처럼 지옥이 된 원인이 "정원사가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그것을 되돌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약방문이지요. 처방에 의하면, "유토피아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원사"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시 정원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옥을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합니다.  

 

 

808. 그렇습니다. 그의 말이 일면 옳습니다. 오늘날에도 계몽, 연대, 혁명은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하지요. 그럼에도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근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훌륭한 정원사가 결코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적합한 식물들은 성장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잡초들은 제거하는 일에 우리가 소스라치게 폭력적이지요. 이를 통제할, 믿을 만한 처방 없이 다시 정원사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우리는 바우만이 간파한 대로 이미 사냥꾼이 되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세계화의 깃발과 함께 사냥나팔이 울렸고 사냥개들은 뛰기 시작했지요.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불변의 법칙이 있다면,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위대한 르네상스도 헬레니즘 시대로 고스란히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샤를 페로가 1687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당당하게 낭송했듯이, 그들은 아름다운 고대를 존경하면서도 무릎은 꿇지 않고 새 길을 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새 길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우리에게 그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809.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탐욕, 곧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끈질긴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모두 죄로 몰아 금하는 기존의 교리와 사뭇 다른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니다. 이 네 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내가 이 책에서 전개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뒤에 따르는 문제들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곧바로 예상되는 난제는 서로 상반, 대립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가, 충돌하는 가치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바우만의 표현을 빌려 바꾸어 보면 그 난해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 지옥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우리가 어떻게 사냥도 하면서, 정원도 가꾸고, 사냥터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810. 우리가 이 책에서 집요하게 천착해온 기독교의 신 개념은 애당초 상반, 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이루어 낸 최초이자 최고의 종합이었지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주축으로 한 서양문명이 종합을 통해 비로소 출발을 알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시 학자들이 이뤄 낸 놀라운 지적 노력을 추적하면서 상반,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다양한 기법들 (탈 시간화 시간화의 논리, 러브조이의 이중적 논법, 쿠사누스의 애립의 칠치,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몰트만의 해석 등)을 이미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찰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새로운 종합을 이룰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 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811.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새로운 종합이 될 것이며 새로운 르네상스가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 가운데 다음 구절을 소개하며 마칩니다.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떤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들 늦은들, 이곳인들 저곳인들 어떠리.
오늘 복 받은 자 온전히 복 받고 있느니라.
천 년 전부터 복 받은 자와 다름없이.                FINE

 

 

*** 내가 만일 저자라면 

 

다시 목차를 펼쳐본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의 ‘운명’

바울의 ‘예정’
칼빈의 ‘섭리’
아테네의 신
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예루살렘의 신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강한 섭리, 약한 섭리

기도는 왜 하는가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두려움과 떨림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5부 신은 유일자이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일자
플로티노스의 일자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 논쟁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상호내주적. 상호 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맺음말-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의 구성이 모두 5부로 나뉘어져 있고 전체를 이어 가며 9장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 방대한 책을 다시 읽을 때 기억하기 쉽도록 요약된 문단 제목이 나와있다. 이 책의 저자는 친절한 사람이다. 독자에게 섬세한 배려를 하고 있다. 어떤 부분이 어려울 때는 그 문단의 제일 마지막을 읽어보면 “자, 정리해 볼까요” 란 안내와 함께 반페이지 정도로 요약이 되어있다. 긴 책을 끊어 읽으면서 저자의 정리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4부와 5부는 신의 인격과 유일자에 대한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헤브라이즘이 어떤 경로를 거쳐 영향을 주고 받아왔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등장했던 탁월한 신학자들은 어떻게 논리를 발전시키고 통합했는지, 그리고 그 신과 관련된 문학 역사 과학 철학 예술을 연계해서 서양문명의 심층에 대한 이해를 작가가 도와 주었다. 사실 신학 전공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간, 그리고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는 인류 문명사 전반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따로 공부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면서 왜 지금 이순간, 다시 신앙이 필요한지 깨달아가는 것은 이 책의 용어로 말하면 신의 은총인 것 같다. 좀 무리하게 노력을 투자해야 했던 책이었지만, 그리고 리뷰였지만 그렇게 흘린 땀이 참 기쁘고 고맙다.

 

  맺음말에서 작가는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몇가지 안내를 하고 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고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고 파스칼이 말했다. 우리의 삶 제반에 폭력처럼 재앙처럼 닥쳐온 위기들을 풀어갈 지혜를 과연 독자인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찾았는가? 아니 어리둥절 헤매지 않고 적어도 나아갈 방향은 선택했는가? 그는 두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작은 이야기와 함께 큰 이야기들도 하며 살아가자는 것과, 사냥꾼이 아닌 정원사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가꾸어 나가자는 제안이다. 철학을 공부하고 인생의 이치와 자신의 존재 이유 알게 되면 태도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공부가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까? 

 

저자의 결론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가는 것이 희망이고 우리의 선택이다. 물론 여럿이 함께가면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끝에 기쁨도 있을 것이고 방향도 생길 것이다. 인문주의자로서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듯, 중세가 황혼에 물들때 르네상스가 일어나듯. 시대의 징표를 먼저 읽을 줄 알아야 공부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저자 특강이 동시에 소개 되었었다. 재야에 묻혀 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저자의 입에서 얼마나 신선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는지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의 강연을 찾아 들으면서 자신의 입장도 하나씩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그는 책을 써보려고 애를 쓰는 우리에게 “비록 작가가 아니더라도 마치 작가인 것처럼 ” 글을 쓸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세상에 쓸모있는 책을 만들어 달라는 당부도 했다. 만약 내가 책을 쓰기 시작한다면 당장, 나는 어떤 입장에서 어떤 주장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나는 과연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책을 쓰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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