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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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78 : 소멸의 아름다움
책: <소멸의 아름다움> 필립 시먼스. 김석희 옮김. 나무심는사람. 2002.
원제: <Learning to fall> The Blessing of an imperfect Life. Philip Simmons. 2000.
*** 저자에 대하여
필립 시먼스 1958년 뉴햄프셔 지방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물리학과 영문학, 창작을 공부했고 영미 문학의 전통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일리노이 주의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평론과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등 주목받는 활동을 해왔다. 35세에 루 게릭 병( 근 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았다.
유대인 아버지와 카톨릭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고 25년 동안 동양 종교의 전통과 실천을 행하며 살았다. 그가 발병하고 난 뒤 글을 쓰고 낭독회를 하고 강연과 예배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필립과 캐스린의 친구들”이란 모임을 만들어 시먼스 부부를 지원했다. 아들 애런과 딸 에밀리아와 필립의 부모님은 정성을 다해 필립을 사랑했다. 이 책은 그 사랑의 열매이다. 작가는 친절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소멸의 아름다움을 기록함으로써 세상을 다녀간 흔적을 남겼다.
2002년 7월 27일 그는 마침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 마무
감사의 말
10.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은 내가 교수로 재직하던 9년 동안 나의 직업적 개인적 성장을 아낌없이 후원해 주었고 안식년 휴가를 주어 이 책의 대부분을 쓰게 했다.
11. 이 책은 현재의 모습으로 환생하기 전에 여러 번의 생을 거쳤고 그때마다 너그럽고 헌신적인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일리노이 주 디어필드의 북해안 유니테리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거기서 한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결국 이 책으로 성장한 것이다.
머리말
14. 이 책은, 인생이란 우리가 소망한 것보다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오래 산 이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제 3의 길, 상실을 ‘지나’ 이제껏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완전함과 풍요로움과 심오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15. 고작 서른 다섯 살에 루게릭 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서 몇 년안에 죽세되리라는 소식.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예언보다 오래 살았고 내가 유별난 곤경에 빠져 있다는 느낌도 사라졌다. 삶이란 어차피 죽음을 앞둔 상태다.
내 삶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내 서랍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인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을 좀 더 충분히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좀 더 충실한 삶으로 나를 이끄는 최고의 안내자였다는 점이다.
16.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거나 가장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잇는 거을 내 이야기에서 끌어낸다는 것을 알았다.
17.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필요와 재능과 감성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상실을 이겨내고 풍요롭게 사는 법을 배우려고 애쓴다. 나는 그것을 “낙법 배우기 Learning to fall"라고 부른다.
18. 낙법을 배우면 우리가 평소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우리의 성취, 계획,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 자신- 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결국 가장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을 놓아버리면 좀 더 충실하게 우리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다.
22. 유머는 기분을 달래주고 위안을 준다. 웃지 못하면 진정으로 진지해 질 수도 없다. 달라이 라마, 그는 자주 웃었고 대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웃었다.
24. 인생은 우리가 소망했던 것보다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다. 우리가 알았던 것보다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희극은 행복으로 끝나고 비극은 지혜를 낳는다. 우리는 행복하게 현명하고 현명하게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우리의 불완전한 삶의 충만한 축복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낙법 배우기
28. 그후 나는 계속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상처투성이의 의식적인 삶 속으로 떨어져 고통과 슬픔과 상실을 알게 되었다.
32. 나는 숭고하고 장엄한 것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나는 나지신의 죽음을 언뜻 보는 듯한 특권을 누린 것 같았다.
34. 인생은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문젯거리가 아니라 신비이기 때문이다.
36. 여섯 살배기 딸아이를 차에 태워주고 오솔길을 내려가려고 돌아선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 것이다. 나는 잠시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얼굴은 감각을 잃고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가슴은 타박상을 입었다.
38. 우리는 어디에서 떨어지는가? 떨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내버리는가? 우리는 에고를 내버리고, 애써 쌓아올린 정체성과 평판과 소중한 자아를 내버린다. 야망을 내버리고 탐욕을 내버리고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이성을 내버린다.
40. 넘어지는 법을 배우면 우리 인간의 타고난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41. 우리는 모두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높은 곳에서 떨어져 깊은 곳을 향해 한창 하강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고통과 나약함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즐거움과 강력함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우리가 죽음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삶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2. 아침에 일어나기
43. 왜 오늘 내가 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지금 내가 직면해 잇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달라질 건 없잖아?
자연계의 질서에서 우리가 놓여있는 처지를 완전하고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것. 우리는 언젠가 죽어야할 생명체다. 이런 사실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 , 우리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52.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유를 깊이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다. 우선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 명성 물질적 소유 우리의 육신- 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자유를 가져다 준다. 끝으로 우리의 가장 고귀한 본성에 따라 행동할 자유.
55. 거북은 다리 가장자리에 이르자, 자기가 다리 위에 잇는 줄도 모르고 다리 가장자리 너머로 몸을 기울여 자기가 떠나온 시냇물로 곤두박질 쳤다. 그때 거북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내 기분은 끔찍했다. 나는 그 헛수고에 낭패감을 느끼느라고 바빴고 거북의 추락을 내 인생의 어설픈 시작과 갑작스러운 종말의 표상으로 만드느라 바빴지만 그동안 거북은 냇가로 헤엄쳐 나와 다시 저 높은 강둑으로 기어오르는 고행을 시작하기 위해 물에서 제 몸을 빼어내느라 바빴다. 거북은 거기에 멍하나 서서 감상과 한탄에 잠겨잇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봤어? 내가 어떻게 춤을 추는지 봤어? 내가 어떻게 해냈는지 봤어?”
3. 불완전한 삶의 예찬
60. 겨울 내내 너도밤나무들은 나뭇잎 몇 닢을 매단 채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상기 시킨다.
63. 곤충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도 추구하는 것이다. 먹히기 전에 먹는 것, 새끼를 많이 낳아 번성하는 것, 곤충이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64. 내 삶의 상황이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나를 떠밀어 미흡한 삶이 어떻게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는지, 깨진 꿈이 어떻게 우리를 완전히 깨어나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65. 내가 이끈 워크 샵에서 종교를 버린 이유를 변명하는 사람들은 세계나 개인의 고통을 에로 드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는 전쟁을 종식 시키지 못했다.
67.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느님한테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받는다 하겠소?”
70. 물을 가득 담고
어두운 우물에서 끌려 올라와
밝은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두레박이 되어라. -루미
74. 우리는 탐험을 그만두면 안 된다.
모든 탐험의 목적은 하나다.
우리가 떠난 출발점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그곳을 아는 것이 탐험의 목적이다. -엘리엇
75. 나도 그렇게 출발점으로 돌아와, 다시 어두운 두 번째 길을 추구하게 되었다. 나는 완전함을 의심하게 되었고 완전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우리는 잠자라가 춤추고 햇빛이 일종의 은총처럼 내려오는 그 숲속의 빈터에 들어가면 누구나 마술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처럼 눈부시게 밝은 순간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 때문이다. 빈터는 숲을 필요로 한다. 나는 숲의 어두운 그늘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76. 꽃과 햇빛과 폭포에 대해 나에게 말하지 말라. 지금 여기는 평범하고 불완전한 곳이다. 삶이 성취의 씨를 뿌리는 땅은 바로 이곳이다. 불완전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낙원이다.
4. 미완성된 집들
79. “사람은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정착하지 않은 동안에만 희망이 있다.” - 에머슨
86. 나는 내 집을 사랑한다. 커피 잔을 들고 탁자 앞에 앉아서 밖에서는 거센 눈보라가 들판을 휘몰아치고 있는데 우리 집을 빛으로 가득 채워주는 1월의 낮은 태양을 쬐고 있으면, 나는 이 얼어붙은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다.
우리의 집은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결코 완성되지 않고 결코 고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죽음 자체뿐이다. 이 삶에 지나치게 정착하는 것은 에머슨이 말한 의미에서 산송장으로 사는 것, 아직 살아있으면서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히 살기 위해 영원히 정착하지 말자.
89. 오린, 그는 주말에 혼자 집을 지었고 평일에도 틈틈이 일을 했다. 일흔 살이 훨씬 넘은데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노인네가 은퇴한 뒤 평생 살 집을 손수 짓고 있었던 것이다.
90. 그것은 영생을 누리려는 헛된 노력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순수한 경의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그에게 일은 곧 예배였다. 그런 힘든 일은 우리가 짓는 모든 것의 덧없음에 바치는 경의이기 때문이다.
92. 더 나은 삶에 대한 환상에 열중하면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에 얽매이고 다가오는 불행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면 우리가 갖고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 최고의 선물-을 잃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순간이다.
93.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여기, 현재라는 미완성된 집에 머물러 잇다. 기쁨은 집짓기 자체에 있다.
94. 몇 해 전에 부모님은 아내와 나에게 몇 에이커의 땅을 주셨다. 우리는 그 땅에 집을 지었고, 부모님 댁과 가까운 그 집에서 그 긴 겨울밤동안 웅크리고 앉아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추운 겨울밤에는 난로에 불을 지펴놓고 아내와 나란히 누워서 프로스트가 묘사한 “나무들의 울부짖음과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 밤, 지금 이 순간, 이 미완성된 집에서 편안함을 느낄 기회를 얻은 데 감사한다.
5. 야생동물
102. 우리가 야생동물 한테서 가장 흔히 관찰하는 것은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목적을 가진 의식, 부러울 정도로 기민한 침착성이다. 인간은 재미로 살상을 하지만 동물은 덜 폭력적인 놀이에서 재미를 찾는다. 그래서 육식동물은 게으름뱅이로 이름 높다. 사지는 거의 온종일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코요테는 요들 송을 부르고 올빼미는 늦잠을 잔다. 우리의 목초지 위를 맴도는 매들은 먹잇감을 찾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저 하늘 높이 날고 있을 뿐이다.
104. 기온이 섭씨 0도 가까이 떨어지고 진눈깨비가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동물이라는 것은 위험으로 가득 찬 상근직이고 대개는 짧게 끝난다. 많은 동물이 야생상태보다 동물원에 갇힌 상태에서 더 오래 사는 것이 서글픈 사실이다.
105. 사실 동물은 무죄도 아니고 유죄도 아니다. 순결하지도 타락하지도 않앗다. 이런 것은 인간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106. 우리 삶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고 동물처럼 사는 것... 그 목적과 하나되어 사는 것을 의미힐 것이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동은 우리 안에 닛는 가장 고귀하고 진실한 것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107. 행복하고 즐거운 생각을 하다가도 길모퉁이만 돌아서면 거기에 숨어서 기다리고 잇는 두려움과 자기 판단이 우리를 덮친다. 가뜩이나 힘든 판에 그런 것에까지 시달리면서 견딜 재간이 없다.
요즈음에 나는, 글쓰기가 내 삶의 목적 가운데 일부를 성취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좀 더 우쭐한 기분이 들 때는 내가 죽은 뒤에도 내 말은 살아남을 거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덧없이 사라지고 우디 알렌의 말이 떠오른다.“나는 일을 통해 영생을 얻고 싶지 않다. 나는 죽지 않음으로써 영생을 얻고 싶다.”
108. 자신의 야성을 키우려면 우선 실제 경험을 가져야 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연습해야 한다. 생각은 자신의 본분을 갖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
109. “판단하지 않는 자기 관찰이야말로 가장 높은 경지의 정신 수양”이라고 말했다. 연습의 방법과 목표는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태도로 그 순간과 우리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다.
112. 우리는 ‘아니마’속에서 , 영혼 속에서 좀 더 완전하고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 야생을 훈련한다. 우리는 인생의 덤불 속에 우리의 야성적 자아를 위한 빈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빈터에서 우리는, 설령 혼란과 걱정에 직면해도, 실패와 상실에 직면해도, 죽음 자체에 직면해도, 달을 향해 코를 쳐들고 노래를 부를 것이다.
6. 동굴 밖으로
117. 자기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118. 우리는 고독을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식을 키우고 직업적 성공을 추구하고 더 넓은 세게에 참여하고 남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한다. 우리는 “비타 믹스타”를 추구한다. 비타 믹스타는 활동과 명상이 조화를 이룬 생활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진리에 대한 사랑은 경건한 고요함을 요구하고, 사랑에 대한 필요는 당연한 분주함을 받아 들인다.”
120. 나는 인간관계나 가족이나 공동체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잘 수양된 고독이라고 대답하겠다. 외톨박이는 늘 사람들에게 의심과 조롱을 불러 일으켰다.
121. 자신의 자아인식, 자유, 고결함, 사랑하는 능력을 심화시키지 않은 채 남이나 세상을 위해 활동하거나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은 남에게 줄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강박관념, 공격성, 이기적 야망, 목적과 수단에 대한 그릇된 신념, 교조적인 편견과 사고방식만을 남에게 전달할 뿐이다. - 토마스 머튼
127. 이렇게 우리의 고귀한 본성과 접촉하여 다시 완전해진 상태로 마음을 선함으로 가득 채우고 동굴을 떠나면, 두려움이 줄어들고 최고선을 위해 좀 더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 갈등은 사라지고, 관계는 꽃피우고, 공동체는 번영하고, 사랑은 더욱 커진다.
128. 신의 출구는 신의 입구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때에만 남을 낯선 이방인으로 본다.
131. 남의 행동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해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통제할 수 있다.
134. 여러 해 동안 나는 정기적으로 동굴 속에 들어갈수록 이런 대아의 순간을 더 자주 갖게 되었고 실제로 그런 순간이 점점 더 일상적이 되었다.
7. 진흙의 계절
136. 진흙탕은 우리 차의 옆구리를 뒤덮고 , 옷에 튀고, 구두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물론 이곳 아이들은 진흙탕 전문가이다.
139. 진흙은 위험한 갈망을 부추기고 잊고 싶은 것들을 상기시킨다. 문명의 전체 방향은 진흙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도로포장 비율로 발전 정도를 가늠한다.
141. 모든 진흙의 계절은 일종의 죽음이고 그 반대쪽에는 부활이 있다.
145. 진흙의 계절에는 온 땅이 다가오는 변화를 외치고, 예수는 자신이 자연, 우주의 섭리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돌멩이들도 그의 도착을 소리쳐 외칠 거라고 느꼈다. 나중에 예수는 이 야생상태에서 성전을 정화시키고 결국 죽음을 향해 간다.
148. 나는 거의 평생 동안 몇 가지 간단한 규칙에 따라 만족스럽게 살아왔다. 집 안에 흙을 묻혀 들이지 말 것. 스스로를 잘 돌볼 것. 남을 도울 것. 되도록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 것. 주행거리 5천 킬로미터마다 엔진 오일을 교환할 것. 하지만 깨달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149.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진흙길이다. 죽음은 진흙처럼 수많은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모든 죽음은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서는 ‘놓아 버리는 것’이다.
151. 믿음이 없는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고 슬픔이 없는 행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부활로 가는 길이 진흙탕인 것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만 비로소 필요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몸을 티끌로 돌려보내시고
우리의 생명을 촛불처럼 훅 불어 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서둘러 몰아내십니다.
우리는 한포기 풀처럼 갑자기 스러집니다.
아침에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우리의 삶은 환상처럼 사라지고
연기처럼 공기 속으로 흩어집니다. - 스티븐 미첼
8. 세상을 선택하기
156. 우리는 초월적 신의 개념에서 벗어나 우주에 편재하는 내재적 신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잇는 가시적인 세계와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신에게로 옮아 간 것이다.
159. 판도라의 상자; 욕망의 대상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욕망 자체가 애당초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세계에서는 죽음과 쾌락이 우리 집에 함께 들어온다.
161. 하지만 세상을 선택할 작정이라면, 우리에게 맡겨지는 사람들한테서 신을 발견해야 한다.
162.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다. 만화 <피너츠>에서
9. 겨울의 마음
176. “말하기 전에 그 말이 침묵보다 나은지를 먼저 생각하라.”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고, 따라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절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 풍자 묘비명 “1932년 출생. 나불나불나불. 1995년 사망.”
178. 침묵은 우주의 배경음처럼 항상 존재한다.
180. 생명이 사라지기 직전에 생명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더욱 강렬해진다.
187. 내가 말하는 떨어짐은 인생의 비참한 내리막을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와중에 평온함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떨어질 준비를 한다.
188. 우리는 숨결로 돌아감으로써 영혼으로 돌아가고 겨울 바람소리를 듣고 겨울의 마음으로 우리를 진전시킬 수 있고 공으로 떨어질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 공에 도달함으로써 우리는 근원에 도달하고 매 순간 우주가 흘러나오는 원천인 창조력에 도달한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190. 모든 사물과 모든 행동을 “공”이라는 빛나는 배경에 비추어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191. 수다를 떨 시간이 있거든 책을 읽어라.
책을 읽을 시간이 있거든 산과 사막과 바다로 걸어가라.
걸을 시간이 있거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춤 출 시간이 있거든 조용히 앉아 있어라.
행복하고 운 좋은 바보야.
10. 무위의 기술
194.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게으름과 동일시하고 한가한 손은 악마의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195. 미국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칭찬을 받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거기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프로테스탄트의 노동관은 건전한 노동을 신의 선택을 받아 구원받은 사람의 대열에 오른 증거로 여기는 칼뱅의 그 독특한 병리학에서 유래했다.
198. 분주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양적인 분주함과 질적인 분주함이다.
실로 훌륭한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고 놓아둔 일도 없다.
어리석은 자는 항상 일을 하고 있지만
하지 않고 놓아둔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 도덕경
201. 우리의 분주함이 남을 피하고 친밀한 교류를 피하고 우리 자신을 피하는 수단인 경우가 많다는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과 외로움, 자기 회의, 목표와 목적에 대한 의문을 밀어내기 위해 몸이나 마음을 계속 바쁘게 움직인다. 우리는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느끼고 싶어 하고, 자신의 삶이 가치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을 확신하지 못할 때에는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고 그만큼 더 많이 걱정한다.
202. 나는 어둠 속을 내다보지만 보이는 것은 밤바람에 흔들거리는 베고니아의 풀잎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망상에 빠져 있다. 그 망상 밖에 있는 베고니아의 존재는 “세상은 너의 두려움 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세상은 우리를 꾀어내어 선입관과 걱정과 해야 할 일의 목록과 온갖 의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두려움은 줄어들고 사랑이 커진다.
203. 친구가 앉아서 커피나 한잔 하지고 권하면 당신은 좋다고 말하고 스스로 놀란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항상 필생의 사업을 찾고 자신의 일과 자신의 존재를 가장 중요한 목적과 일직선상에 놓고 싶어 한다. 필생의 사업은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볼 때 바로 거기에 존재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받고 다시 세상에 돌려주는 호흡에 존재한다.
205. 내가 말하는 무위는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지금보다 일을 줄일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창 일을 하고 잇을 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정지된 중심에서 모든 행동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 엘리엇이 “회전하는 세계의 정지된 중심점”이라고 부른 것을 우리 자신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206. 스즈키 선사는 “무언가를 할 때는 자신을 모닥불처럼 완전히 불태워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연기를 뭉게뭉게 내뿜는 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재밖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도록 자신을 완전히 불태워야 한다” 고 말한다.
209. 나는 장애가 점점 더 심해져서 대학 교수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9년 동안 산 집을 떠나 이곳 여름 별장으로 가재도구들을 옮겼다.
11. 고향으로 돌아가기
212. 나는 아침마다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얼마 후에는 좀 더 남쪽으로 이동한 해가 우리 집을 빛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본다. 목초지에는 하얀 서리가 반짝거린다. 아내는 커피를 끓이고 아이들은 침대를 정리한다. 누가 불평할 수 있겠는가?
213. 우리는 온갖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이야기하고 전략을 짜고 미래를 통찰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헌신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대부분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짜는 계획은 뜻밖의 불행과 행운으로 끊임없이 뒤집혀 엉망이 된다. 인생을 “마음대로”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215. 우리는 재난과 기쁨에 직면해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우리 존재와 행위의 확고한 바탕인 집, 시간과 운명과 변화와 변덕을 견뎌내는 가정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초월될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이미 고향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하여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실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우리 내면에 있다.
219. 룻은 모압에서 태어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땅으로 여행하고 잇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그곳이 우리 마음 속에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인생에서 고난이 되풀이되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되풀이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갑자기 망치가 꽝! 망치가 엄지 손가락을 내리치고,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일들이 갑자기 엉망으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대부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220. 품성은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우리의 자아”를 담기 위한 그릇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닥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발언권이 없지만 자기 품성의 모양새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품성은 대부분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가족과 공동체와 문화를 통해 우연히 형성되는 것이다.
221. 우리가 맨 먼저 시작하는 주사위 놀이가 품성의 초기 모양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품성을 선택의 문제로 보게 된다. 우리는 품성을 형성하는 습관과 원칙을 선택함으로써, 튼튼한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약한 그릇을 만들기도 한다.
222. 인생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일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인생길을 걸어 가는가. 룻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그 여행에 가져가는 에너지와 연민과 고결함의 양을 조정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나 -실망과 노여움에 직면해도, 재난과 환희에 직면해도- 우리의 진정한 자아와 최고의 본성으로 귀향할 수 있는 능력이다.
224. 우리는 윤리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우리 아이들과 우리 공동체의 삶을 향상시킬 의무가 있다. 이 사명을 완수하려면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더 나은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한다.
226. 히치하이킹을 하려면 오는 차는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무조건 타야 한다. 그리고 온갖 부류의 사람과 붙임성 있게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사실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지연이나 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227. 그 가을의 귀향은 수많은 귀향 가운데 하나였고, 이제 나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 하얀 소나무와 달빛에 싸여 있다. 그때보다 스무 살을 더 먹었지만 아직도 눈을 기다리고 아직도 귀향하는 기술을 연습하고 있다.
228. 진흙을 놓아주고 진흙이 스스로 물레의 중심을 찾게 해야 한다. 억지로 물레의 중심에 놓으려하면 단지는 비틀거린다. 이것이 우리 삶의 리듬이다. 우리는 잡아당기기, 즉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며, 삶의 진흙으로 형태를 갖출 필요가 있다. 우리가 형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해체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진흙에서 생겨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불행과 기쁨은 우리를 중심에서 떼어내고, 우리를 형성할 것이다.
12. 가장자리에서 살기
230. 나는 언제나 가장자리를 좋아했다. 땅에서 빛깔이 사라져 가는 밤의 가장자리, 고정 관념들이 다른 관점들을 받아들여 거기에 순응하는 논쟁의 가장자리, 피부가 공기나 내 손길과 만나는 몸의 가장자리, 내가 가장자리를 좋아하는 것은 가장자리가 유리한 위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33. 해마다 이맘때면 세상은 자신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 같다. 그래도 역시 가장자리에 대한 내 관심은 개인적일 것이다. 나는 질병 때문에 짧아진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서 끌려 나가 나의 상실을 슬퍼하고 두려움을 만날 수밖에 없다. 나는 뛰어난 훌라 춤 솜씨를 잃어버린데 한숨짓고, 라임 젤리를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도 없게 될 날을 두려워한다.
234.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이다. 지금 이 순간 속에 완전히 들어가면 그것이 영생으로 가는 관문이다. 일상의 신비주의는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상상력, 평범한 것에 대한 사랑과 관심, 신의 은총에 대해 기꺼이 놀라는 마음 뿐이다.
235.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 낡은 구두와 장미꽃이 있는 세계에 있으면서, 내가 영원을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영원을 찾고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생명이 끝나기 전에 지금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42.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이 덧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면 은총을 받기가 훨씬 쉬워진다.
246.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기꺼이 가장자리로 다가가고, 일부는 가장자리로 떠밀려가고, 일부는 어느새 가장자리에 가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가장자리에 가게 되고 ,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의 문간을 통해 그 너머에 잇는 무언가를 언뜻 보게 된다. 그럴 때는 마음을 열고 경이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자신을 내맡기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문지방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 내가 저자라면
목차
감사의 말
머리말
1. 낙법 배우기
2. 아침에 일어나기
3. 불완전한 삶의 예찬
4. 미완성된 집들
5. 야생동물
6. 동굴 밖으로
7. 진흙의 계절
8. 세상을 선택하기
9. 겨울의 마음
10. 무위의 기술
11. 고향으로 돌아가기
12. 가장자리에서 살기
너무나 아름다운 머리말이어서 여기에 그 전문을 옮겨 놓는다.
이 책은, 인생이란 우리가 소망한 것보다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오래 산 이들을 위한 책이다. 우리는 지상의 즐거움을 알았다. 방금 깎은 잔디밭에 내리쬐는 햇빛, 빗줄기에 흔들리는 나뭇잎, 아이들의 웃음소리, 욕조에서 나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 우리는 결혼 생활이 쉰내를 풍기고 사회적 출세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보았다. 자식들이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죽어가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진수성찬과 굶주림의 이중성 너머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도 언뜻 보았다. 그것은 말라죽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처럼 불완전한 삶에서 떨어지는 축복이다. 우리는 어두운 숲을 알지만 밝은 달도 알고 있다. 이 책은 이 제3의 길, 상실을 '지나' 이제껏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완전함과 풍요로움과 심오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인간은 고집스러운 동물이라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려면 강한 충격이 필요하다. 내 경우 그 충격은 고작 서른다섯 살에 ALS(일명 루게릭 병)라는 불치병에 걸려 몇 년 안에 죽게 되리라는 소식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예언보다 오래 살았고, 내가 무척이나 유별난 곤경에 빠져 있다는 느낌도 사라졌다. 삶이란 어차피 죽음을 앞둔 상태다. 언젠가 우리는,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1865∼1939)가 말했듯이, 개개의 영혼이 "죽어가는 동물과 묶여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자각하고 있든 아니든, 늦든 빠르든,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우리들 대다수가 회피하는 질문-"내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에서부터 "내 서랍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을 새삼 다급하게 물어볼 기회를 가졌다. 그 질문을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을 좀더 충분히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좀더 충실한 삶으로 나를 이끄는 최고의 안내자였다는 점이다.
여러분은 아마 육체적 또는 감정적으로 무언가를 상실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행복에 대한 견해도 각자 나름대로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무엇이든, 어떤 필요성 때문이든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이나 우연 때문이든, 여러분이 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과 좀더 깊이 연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나는 몇 주 전에 이곳의 한 지방 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목사는 아니지만 예배가 끝난 뒤 교회 정문 앞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틀 뒤에 어떤 여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녀는 내 설교도 뜻 깊었지만 예배가 끝난 뒤에 나눈 대화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제가 교회 문간에서 말을 걸었을 때, 당신은 '신을 찬양하라'고 하셨지요. 그 말씀은 감탄이 아니라 명령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신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결코 '신을 찬양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할 만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대학에서 가르치고 수많은 청중에게 내 글을 읽어주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거나 가장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내 이야기에서 끌어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결과는 내가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실은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는 교사나 독자들의 반응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작가에게는 실망스러운 교훈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필요와 재능과 감성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상실을 이겨내고 풍요롭게 사는 법을 배우려고 애쓴다. 나는 그것을 '낙법 배우기(learning to fall)'라고 부른다.
나는 명령을 하거나 조언을 하거나, 영적으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제시하거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적절한 타개책을 수학 공식처럼 깔끔하게 정리해서 제공하는 사람은 아니다. 조언이나 해결책은 어느 정도까지만 도움이 될 뿐이다. 예컨대 우리는 무언가를 잃었을 때,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되새기는 방법으로 상실감을 달랠 때가 많다.
쉰 살 나이에 갑자기 암으로 아내를 잃은 남자에게 친구들은 말한다. "자네는 아직 건강하고, 아이들도 있고 직업도 있잖아." 이런 위로의 말은 물론 도움이 된다. 나 자신도 그런 위로를 자주 필요로 했다.
나는 높은 언덕을 더 이상 등산할 수 없지만, 휠체어를 타고 산길로 나가서 전나무 냄새를 들이마실 수는 있다. 그것은 모두 미래에 대한 전망의 문제일 뿐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싶어 한다. (달팽이가 거북의 등을 타고 있을 때 뭐라고 말할까? "우와, 신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제공하는 위안이 초콜릿을 먹을 때 얻는 찰나적 황홀감과 비슷하다는 것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그 순간이 지나면 나는 신경과민과 우울증에 빠지곤 한다. 그보다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은 더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설(逆說)에서 생겨난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가장 효과적으로 상실에 대처할 수 있다.
낙법을 배우면, 우리가 평소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우리의 성취, 계획,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 자신-을 놓아 버리기만 하면 결국 가장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을 놓아 버리면 좀더 충실하게 우리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다.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그 주제를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다루고 있고, 낙법에 대해 저마다 다른 가르침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내가 '가르침'이라는 낱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기술이나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해 이 책을 읽으라는 뜻은 아니다. 기술과 정보는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남을 가르치려는 노력을 그만둘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성숙한 어른이 된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니, 누구보다도 '특히' 우리 자신에게 적용된다. 나는 나 자신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사실 내 성격은 거의 굳어 버렸고, 내가 설령 건강하다 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솔직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 책상은 늘 어질러져 있을 것이다. 나는 남들이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앞으로도 계속 짜증이 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여는 서투른 음악회를 절대 '귀엽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코를 후빈다. 나는 아름다운 여자들을 눈여겨본다. 나는 육체적ㆍ도덕적ㆍ지적인 게으름을 참지 못한다. 나는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감상적인 장면이 나오면 운다. 나는 내 딸이 머리 빗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면 만사를 다 제쳐놓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이런 것들은 고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를 통째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불쾌한 점과 유쾌한 점, 사랑스러운 점과 고약한 점이 뒤섞인 자신을 통째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의 광기와 폭력만이 아니라 세상의 음악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는 팔이 약해져서 코를 풀기 위해 휴지 한 장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겹다.
하지만 아직은 내 아들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목초지 위를 맴도는 매를 바라볼 때 그 아이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머물러 있고 싶은 세계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의 신비 속에서 풍요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실히 세상에는 고칠 필요가 있는 것이 많고, 타인들의 행동 중에도 바로잡고 싶은 것이 많다. 하지만 남을 교정하러 나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고 측은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잡기'가 아니라 단순한 친절 베풀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을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보지 않고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고통의 신비에 마음을 열면,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곳-사랑으로 변형된 세상-에 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명령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 불교 철학이나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1879∼1955, 미국의 시인)의 시나 거북이의 행동에 대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글을 읽고 여러분 자신이나 남을 더 측은하게 여기게 된다면, 내 글은 나름대로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우리는 정중한 대화를 나눌 때 가급적 종교 문제를 화제로 삼지 않는다. 불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견해를 요청받았을 때, 남의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으면, 종교 자체보다 '영성(靈性)'에 관해 이야기하는 편이 안전하다. 하지만 내 책은 종교 문제를 다루고 있고, 나는 종교 문제에 대한 내 접근방식에 대해 말할 것이다.
농담 같은 이야기가 있다. 중서부의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내가 이 책의 원고를 낭독한 뒤, 그 대학의 교수인 세 사람-가톨릭 신자와 이슬람 신자와 불교 신자-이 강의실을 나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나한테는 가톨릭 교리처럼 들리더군" 하고 가톨릭 신자가 말하자, "천만에. 수피즘(금욕적ㆍ은둔적ㆍ신비주의적인 이슬람교의 한 종파-옮긴이)의 신비주의처럼 들리던데" 하고 이슬람 신자가 말했고, 그러자 불교 신자는 "천만에. 그건 불교야" 하고 말했다. 세 교수 중의 하나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무척 기뻤다. 다른 청중들과의 경험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개신교도와 무신론자, 유대교도, 교회를 도중에 그만둔 사람, 정신적 혼란에 빠져 있는 보통 사람들까지도 이 글이 자신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에 대한 내 접근방식은 절충적이고 포괄적이다. 특별한 배경이나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나는 영미 문학의 전통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또한 유대인 아버지와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물려받은 유대-기독교적 유산과 25년 동안 공부한 동양 종교의 전통과 실천에 확고한 기반을 가진 사람으로서 글을 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의 기술을 의식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이례적인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으로서-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아들, 형제, 친구로서-글을 쓴다는 점이다.
나는 어디에서 통찰을 얻든지 간에 거기에 감사한다. 현대시든 물리학이든 코란이든 구약성서든 초기 기독교 교부의 말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입수할 수 있는 모든 통찰의 원천 중에서도 특히 종교에 의존한다. 인간이 단장의 아픔으로부터 기쁨을 지키는 그 괴로운 일을 탐색할 때 가장 일관되고 엄밀하고 강력한 수단이 되어준 것은 종교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머에도 의존한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유머는 기분을 달래주고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유머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웃으면 뇌 속에서 몸에 좋은 화학물질이 생성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웃지 못하면 진정으로 진지해질 수도 없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추구할 때면, 우리는 종종 '영악한 토끼'를 쫓는 '엘머 퍼드Elmer Fudd'(1940년대에 제작된 만화영화 시리즈의 주인공. 토끼한테 늘 봉변을 당하는 사냥꾼 캐릭터이다-옮긴이)와 비슷해진다. 엽총을 들고 사냥감에 살금살금 다가가는 불운한 엘머 퍼드를 생각해 보라. 진실을 추구할 때의 진지함 자체가 우스꽝스러울 수 있다.
나는 학창 시절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가 우리 대학에 강연하러 왔을 때 처음으로 이를 깨달았다. 당시 나는 달라이 라마의 중요성을 막연하게 밖에 인식하지 못했고, 그가 세계 평화에 대해 한 말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주 웃었고, 대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웃었다. 조국이 중국에 의해 강점된 상황에서 그 자신은 망명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그는 분명 세상을 사랑했고 평화로웠다.
살아가는 동안 웃을 일을 많이 찾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지금도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진지해지고 있는 것을 깨달으면 그가 보여준 모범을 기억해 내려고 애쓴다. 내가 평화를 찾으려고 애쓰는 과정에 뉴햄프셔 주의 화이트 산맥 남쪽 기슭의 작은 숲속 산장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행운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지난 3년 동안 이 책을 썼다.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에세이는 내가 쓴 순서대로 배열된 것이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산을 오르던 내가 차츰 약해져서 휠체어에 올라앉는 과정도 보게 될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이곳-화강암과 솔송나무, 모기와 폭풍우, 코요테와 사람들-에서의 내 기반은 여전히 확고하고, 내가 쓰는 모든 글의 특징을 이룬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아주 바쁜 여름에 틈틈이 짬을 내어 이 머리말을 썼다. 이제 어느덧 8월 말이다. 밤에는 서늘하고, 들판에는 귀뚜라미가 가득하다. 단풍나무에서는 벌써 마른 잎이 붉게 타오른다. 충만의 계절, 달콤한 동경의 계절이다. 올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계절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자기가 죽는 계절을 미리 정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마지막 오후의 황금빛 햇살을 언뜻 보는 것이 결국 우리의 최후가 되리라는 사실이다.
인생은 우리가 소망했던 것보다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알았던 것보다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희극은 행복으로 끝나고, 비극은 지혜를 낳는다.
우리는 행복하게 현명하고, 현명하게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우리의 불완전한 삶의 충만한 축복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 8월
미국 뉴햄프셔 주 샌드위치에서
이 책이 나의 책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노총각이 결혼하고 싶었던 최초의 여인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전환점을 발견한 것처럼....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얼굴도 아름답고 마음은 훨씬 고운 나의 베아트리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고 싶은 그런 만남, 독자로서 일생에 이런 책 한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참 좋은 인생일 것 같다. 갑자기 파우스트적 거래를 하고 싶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더라도 이런 책 한권을 쓸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이 생각은 내가 처한 상황이 절박해서 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1년 반전에 우연히 발견하고는 깊이 넣어두고 아껴왔다.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아름다운 숲과 들판을 산책하고 있을 작가에게 우선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싶다. 그의 말처럼, 나마스떼~ 나는 당신한테 절을 한다. 그것은 당신과 내 안에 있는 생령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뜻이다. 이 책을 만난 날부터 나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 듯, 이 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읽고 또 읽고 , 아끼고 또 아끼다가 오늘, 마지막으로 내 보물 창고를 열어 보이듯, 이 사람과 이 책을 소개한다.
나는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책을 덮는 순간에도 마음이 설레인다. 설레인다는 표현은 좀 부족한 것 같다. 마치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느끼는 장엄한 분위기...살면서 몇번 본 적이 있는 그런 광경을 머리속에 떠 올려야 겨우 위로가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이다. ...울고 싶기도 한 것 같고 또 그대로 두면 정말 울 것 같은 이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제는 잘 알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섬광처럼 뇌리에 닿은 말 한마디.
“말하기 전에 그 말이 침묵보다 나은지를 먼저 생각하라.”
이제 이 말은 남은 나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될 것 같다. 오늘의 북 리뷰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책을 여러분 앞에 펼쳐 보이는 것으로 끝내고 싶다. 침묵보다 나은 말을 찾을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