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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8일 21시 06분 등록

제국의 미래

  - 에이미 추아 지음 / 순희 옮김 / 비아북

 


저자에 대하여

에이미 추아

그녀는 중국계 미국인 2세이다. 그녀의 부모는 필리핀에서 자란 중국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미국에 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으며 1961 MIT로 유학 온 그의 아버지는 굳은 의지와 근면함으로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71년 버클리대학 교수가 됐다.

그녀와 세 명의 여동생은 미국 중서부에서 자라면서 늘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장녀인 추아 교수는 87년 하버드대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예일대 교수가 됐고, 그의 여동생들도 예일대·하버드대 출신 의사와 변호사 등으로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대계 미국인인 제드 러벤펠드 예일대 법대 교수와 결혼했다. 러벤펠드 교수는 2006년 첫 출간돼 전세계적으로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살인의 해석>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아버지도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지냈다. 아버지를 따라 런던, 뮌헨, 로잔 등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다. 미국인으로서 성공하여 미국을 대표하여 해외에 나가 있을 때에도 그녀의 부모님은 중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유대계 미국인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달들이 중국표준어를 잘 쓰는 미국인으로 키웠다. 그녀는 미국에서 자라고 성공한 이민자이지만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은 가슴속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듯하다.

그녀는 199년 증조부의 고향 방문을 비롯해 몇 차례의 중국 방문에서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마을과 외국인을 구경하는 중국의 경직된 분위기에 실망을 하지만 그이 민족적 자부심은 13억 중국인을 대표하는 듯하다. 이 책의 주된 포커스가 미국의 미래에 대한 제안이지만 중국의 과거 제국이었던 당나라, 명나라를 고찰하고 21세기 새로운 미국의 경쟁자로 중국을 제시하면서 스스름 없이 중화민족우월주의를 제국의 되는 하나의 요소로 내세우고 있다.

 

그녀는 1987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듀크, 스탠퍼드, 뉴욕대학교를 거쳐 현재 예일대학교 법학 교수로 있다. 1990년 초반에 멕시코의 시장민영화를 컨설팅 했고,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 동안 세계은행에서 일했다. 국제 경영과 인종 갈등, 국제관계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이며, 정계와 재계 그리고 학술계를 대상으로 활발한 강연을 펼치고 있다.

2003년에 출간한 <불타는 세계>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2003년 올해의 책이 되었으며, 뉴욕 타임스는시장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세계 평화와 번영에 필수적이라는 오늘날의 교의에 가장 극적인 반론을 펼친 책으로 호평을 했다.<제국의 미래>는 제국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의 제국인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과 오만한 정책을 비판하고 미래의 제국을 예견한 책으로, 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이다.

 

그녀는 후기에서 <제국의 미래> 이 책을 무엇보다도 미국의 관용에 비치는 책이라고 했다. 미국은 여러 가지 결점이 있지만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을 이끌어온 나라,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번영하고 우리 방식대로 변화하면서 미국인이 될 수 있게 해준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떤 사회들이 손에 넣은 거대한 권력과 그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조건, 또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조건에 관한 연구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 책을 통해 미국이 자신의 성공비결관용을 지금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주요논문으로 <자유시장 민주주의의 패러독스: 개발 정책을 다시 생각함><시장, 민주주의, 민족: 법과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민영화ㅡ국유화의 순환: 개발도상국에서의 시장과 민족주의의 연관성> 등이 있다.

 

역자 : 이순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행복의 정복>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 <폴 브랜드 평전> <시누헤> 등이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세계 제패의 비결

초강대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축적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국소수 사회들을 이르는 것이다.[6]

 

이 책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해당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모든 초강대국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재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쇠퇴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관용이었다는 점이다.[7]

 

내가 세계적인 패권 국가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부터 밝혀두겠다. 이 책의 취지에 맞추어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취급 할 나라 혹은 제국은 다음 세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단순히 특정한 한 지방 혹은 지역에서 우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8]

 

이 책의 대부분은 초강대국이라는 조건에 부합하는 사회들을 고찰하고, 각각의 날들이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는데 할애될 것이다. 우선 관용이 왜 그렇게 중용한 것인지 미리 밝혀두고 싶다.[9]

 

한 사회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배경을 따지지 않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9]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인 의미와 관용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내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관용이라는 단어는 수단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든, 전략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든,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11]

 

이 책에서의 핵심은 상대적인관용이다. 세계적인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절대적인, 영원불변의 기존으로 볼 때 관용적이나 아니냐가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나 아니냐 하는 것이다. [11]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을 말하면, 부관용은 조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12]

 

미국은 처음부터 종교적인 자유에 대한 대단히 혁명적인 공약과 다양한 국적을 가진 온갖 계층의 개인들에 대한 유난히 개방적인 시장 제도를 통해서, 수천만에 이르는 이민자들과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활용했다.[12]

 

미국은 보편선거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최초의 초강대국이고, 인권과 모든 민족 자결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시대에 등장한 최초 초강대국이다. 또한 미국은 대량 파괴 무기를 휘두를지 모를 테러리스트 조직의 위협에 직만하고 있는 최초의 초강대국이다.[14]

 

미국제국이라는 개념은 미국이 국제적인 승인이 있든 없든 군사력을 공격적이고 개입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정권 변화와 국가 건설을 당하는 것, 즉 독재정권과 불량 국가, 그 밖의 여러 위협적인 정권들을 시장과 민주주의, 그리고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느 평론가에 따르면, 미국의 “21세기형 제 왕권은 자유시장과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꾸밈음을 내세우고, 이것들을 세계에 존재해온 군사력 가운데 가장 무서운 군사력을 동원해서 집행하는 권력이다.”[18]

 

지금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비록 새로운 형태이기는 하지만, ‘제국의 연륜만큼이나 오랜 경륜을 가진 문제, 즉 과거의 세계적인 패권국가들 대부분을 무너뜨린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는 더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문제를 접착제라고 부를 것이다.[17]

 

미국은 인종적, 종교적 측면에서 중립을 지키는 강력하고도 관대한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온갖 인종, 종교, 배경을 가진 개인들을 미국인으로 통합시키는 데 훌륭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데 있다. 미국은 미국인들에게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 상대가 없는 군사력과 엄청난 경제력,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다국적기업, 소비재브랜드들, 그리고 문화를 통해서, 미국의 패권은 세계 어는 곳에선 감지 된다. 국경 밖에서 보면, 미국에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는 접착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19]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외국 주민들의 충성,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0]

 

미국이 담당하고 있는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서의 역할과 스스로 공언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횃불이라는 역할이 서로 충돌하면서 광범위한 반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의 수십억 인구를 마주보고 있다.[21]

 

나는 선택의 영역을 최대한 넓혀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들의 위상에 부합하는 역사 속의 사회들을 모두 고찰하는 방식으로 선택적 편견을 피해가려고 노력했다.[21]

 

세계적인 패권 국가를 선택할 때 의도적으로 포함의 영역을 줄이는 대신 넓히려 했다. 이런 시도는 세계적인 패권에 대단히 근접했던 제국들 역시 관용에 의지 할 때에는 권력이 성장하고, 불관용에 의지할 때에는 권력이 쇠퇴하는 패턴을 따른다는 나의 논지를 뒷받침하고 있다.[22]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부는 근대 이전의 초강대국들에 대해 서술한다. 2장은 로마제국에 관한 내용이고 3장은 중국의 당 제국에 관한 내용이다. 황금기의 당 제국은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2부는 계몽화된 관용에 관한 내용이다. 5장은 계몽주의 이전의 대표적인 유럽 국가인 중세의 스페인을 간단히 고찰한다. 6장은 새로운 관용의 개념을 끌어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성장을 이루 최초의 유럽 국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에 관한 것이다. 1579년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포함시켰다. 네덜란드연방 공화국은 순식간에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 난민들을 유인하는 자석이 되었다. 7장에서는 서양에서 눈을 돌려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중국의 명나라와 거대한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을 간단히 살펴본다 8장에서는 다시 서양으로도 돌아가서 대영제국을 고찰한다. 3부 현대를 살펴본다. 9장 애송이 식민지였던 미국이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볼 것이다 10장에서는 불관용과 순수 인종주의라는 원칙 위에 세워진 두 강대국, 나치 독일과 국제주의 일본에 대하여 고찰한다. 11장은 미국의 주요한 경쟁자들에 대해 고찰한다. 12장은 21기에 시사점을 던져주고 과거의 교훈을 따져보고, 특히 미국제국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살펴본다.

역사상의 모든 초강대국은 하나같이 똑 같은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 왔다. 한가지는 자국의 성장에 연료를 공급했던 관용을 유지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서 충성심, 아니면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공통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문제이다.[22-25]

 

1. 고대 제국의 관용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만을 고대 국가로 간주 한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오아조의 페르시아제국은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어떤 제국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던 역사상 최초의 패권 국가였다.[34]

 

키루스가 썼던 전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수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지도력을 잘라내는 전략을 썼다. 키루스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고 그 대산 주 혹은 군을 다스리는 총독인 사트라프을 세웠다. 사프트라 치하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의 고유의 신들과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했다. 다양한 언어를 허용하여 아마어. 엘람어, 바일로니아어, 이집트어, 그리스어, 리디아어, 리키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39]

 

가장 놀라운 것은 키루스의 종교적 관용일 것이다. 그는 피정복민의 사원, 종교의식, 그리고 신들을 놀라우리만큼 존중했다.[39]

키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자마자,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르두크 신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바빌로니아 백성들이 신 마르두크의 선택과 도움을 받는 해방자인 것처럼 처신했다.[41]

 

카루스 실린더와 구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몹시 관용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에,오늘날의 일부 예찬자들은 그를 인권의 창시자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묘사는 잘못된 판단을 낳을 수 있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키루스의 정벌은 일부의 고대자료들이 밝히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훨씬 가혹한 싸움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의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 정책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루스는 해당 지역의 신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43]

 

캄비세스는 피정복민에게 페르시아문화를 강요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이집트 신들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이집트 파라오의 정당한 계승자로 부각시켰다. 캄비세스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카니키아, 리비아, 그리고 소아시아의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을 정복했다. 이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근동과 중앙아시아의 주요한 왕국들을 모두 차지하고, 페니키아 해군과 이집트 해군을 통합하여 세계 최대의 해군을 건설해 지중해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방대한 해상 전선을 장하게 되었다.[45]

 

다리우스는 왕위에 있는 동안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의 관용이 아케메네스 왕국의 전통을 존속시키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제국이 특별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제국의 다언어 문화를 존중했다.[47]

 

다리우스와 그이 통치를 받는 사트라프들은 해당 지역의 종교 예식과 신을 대단히 존중했다. 다리우스는 또한 각 지역이 사회구조를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다리우스는 각 지역의 법률을 성문화하고 집행에 옮기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다리우스가 이런 관용적인 정책으로 얻은 이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피정복민들을 죽이거나 페르시아화하는데 자원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기술과 재능, 자원을 이용했다. 그것이 다리우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제국의 수도들을 건설 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48]

 

병사들은 각자의 기술에 맞게 임부를 배정받았다. 예를 들어 숙련된 뱃사람들인 페니키아인들은 페르시아의 강력한 해군력의 원천인 아케메네스 해군에서 요직을 차지했고 페르시아 함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페르시아인들은 해양 민족은 아니었지만 해상업무를 육성했고, 페니키아 상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치세에서 번영했으며, 아케메네스의 통치자들 역시 통행세를 징수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냈다.[49]

 

아케메네스 왕조가 200년 동안 전례 없는 공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관용정책덕분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고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인종이나 종교에는 개의치 않고 제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들, 사상가들, 전사들을 활용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력과 국력의 원천으로 변화시켰다.[52]

 

아케메네스 왕조 후기가 불관용, 불안, 폭력의 증대라는 특징을 보인 것 여기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 논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페르시아통치자들이 불관용성이 강해짐에 따라 방대한 영토내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거나 여러 피정복자들이 장점을 활용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은 키리우스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는 점이다. 세계 최초의 패권 국가였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젝국은 그후 세계를 제패했던 강대국들이 직면했던 것과 똑 같은 문제에 직면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58]

 

페르시아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현대 국가들과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속히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종교나 언어, 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피정복자들은 대부분 제국에 대해 특별한 충성심을 느끼거나 제국에 소속된 것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서기4세기에 로마제국의 피정복민들은 제국에 대한 특별한 충성심과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58]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심에는 강력한 분열의 힘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 덕분에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해왔던 각자의 민족들은 페르시아제국에 대한 반감을 쌓아가다가 결국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59]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알게산드로스가 궁극적인 인류의 화합을 이룰 했는지는 모르겠다. 피터 그린이 쓰고 있듯이,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뜨거운 야망은 전쟁과 정복이었다. :”가장 뜨거운 야망은 전쟁과 정복이었다. 그가 인류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 꿈을 꾸었다는 주장은근거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고,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쌓아 올린 업적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관용이었다.[65]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 대륙, 여러 나라로 펴져 나갔다. 이집트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알레산드로스가 건설했던 여러 도시국가에서는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 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 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알렉산드로슨 엄청난 군사적 위협을 이루었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페르시아 왕들은 결코 이룩하지 못했던, 대륙을 가로질러 형성된 고도의 문화적 통일체였다.[66]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로물루스가 건설적인 도시국가 로마를 건국했던 기원전 753년부터 콘스탄디노플이 오스만튀르그에 함락된 서기 1453년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마의 영광은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네 황제(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아울렐라우스)의 재임기와 얼추 맞아 떨어진다. 이 시기에는 팍스로마나즉 로마의 평화가 이어지고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서아프리카의 농경 지역에 이르는 로마의 여러 속주들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19세게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어 몸젠은 세계가 이렇게 오래도록 질서정연하게 통치된 적은 없었다.’는 말로 이 시기의 본질을 요약했다.[70]

 

로마가 관용적인 입장을 택하게 된 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편협한 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을 분노를 일으켰고, 이것은 대부분 전쟁으로 이어졌다.[72]

 

로마제국은 관용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중 한 사람인 대법원 판사 제임스 윌슨에 따라면,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73]

 

로마제국이 건설과 로마 시민들의 명성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가 사바니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적들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여서라도 나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방 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75]

 

로마는 정복한 적들의 도시를 파괴하거나 약탈하는 대신 평화조약을 제시했으며, 그 조약이 거부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평화조약의 기본적인 틀은 단순했다. 정복된 도시는 자체가 법률에 따라 자체 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두 가지 조건만은 감수해야 했다. 첫째, 각 도시는 로마와는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으나, 상호간에는 자유롭게 교역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규모 도시국가들의 로마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이 급격히 심화되었다. 둘째, 각 도시는 로마에 병력을 공급해야 했다.[76]

 

로마황제들은 직접 통치를 하면서도,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의 생활에 거이 간섭하지 않았다. [77]

 

로마는 이런 군사 활동을 펼치는 동안에도 피정복민의 지도자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으며, 로마 법률에 저항하는 나라는 가혹하게 응징했다. 로마는 건국 후 6세기 만에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연안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여 지중해의 이름을 로마의 호수로 바꾸어 놓았다.[78]

 

로마의 전 지구적인 차원의 경제는 극동까지 뻗어졌다. 로마 상인들은 인도양을 건너고 실크로드를 거치면서 이국적인 향로와 향수, 온갖 비단과 화려한 옷감을 알렉산드리아, 로마, 런던의 시장을 실어 날랐다. 로마는 우리그릇과 금화, 그리고 멀리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수출했다.[82]

 

자유롭게 흘러 든 것은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로마는 또한 아주 외떨어진 제국이 변두리에서 뛰어난 기술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냈다.[82]

 

또한 로마는 특별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 [83]

 

로마에는 현대적인 그 의미의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옅은 피부색을 짙으니 피부색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거나 그 반대로 보았다는 증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한가지 지적하면, 로마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83]

 

로마사람들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 다양한 야만인들을 모조리 제국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야만인들의 재능을 활용하고 그들이 로마 내에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부분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86]

 

로마 제국의 가장 흥미로운 면모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브리티니아에서 이라비아에 이르기 까지 피정복민들은 하나같이 로마제국이 성원, 로마인이 되고 싶어 했다.[87]

 

로마는 정복된 민족이 지도 계층을 멸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로마문화를 권력의 특권이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했다. 정복된 민족들은 로마의 도시와 원형경기장 건설하는 일에 종사했으며, 대개는 두 세대도 지나기 전에 로마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였다. 각 지역의 지도 계층은 자식들을 로마에 있는 학교에 보냈고, 이 아이들은 자라서 로마 시민이라는 공동체의 충실한 성원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또한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 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습관을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모든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더 나은 관습이 눈에 띄기만 하면 서슴지 않고 자신의 관습을 버린 덕분이었다.[87]

 

그리스 문명을 본보기로 삼았던 로마제국은 도시 즉 폴리스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제국은 뻗어나가는 곳마다 로마식 이름과 로마식 건축법을 이용해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로마 문화는 또한 그리스의 문학, 미술, 조작, 건축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을 빨아 들였을 뿐 아니라 검투사 경기와 사냥 경기 따위의 대중이 좋아할만한 고유의 문화를 고안해 냈다.[88]

 

교육을 받은 로마인들은 누구나 라틴어와 그리스를 유창하게 했고, 그리스 로마의 위대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으며 자랐다.[88]

 

주목해야 할 점은 로마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출하면서도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로마는 언어학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대단한 다양성을 아우르고 있었다.[88]

 

지역 사회의 로마화는 귀족 계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공직자들은 대개 인종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당연히 로마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89]

 

피부색은 물론 계층을 구분하지 않고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은 로마의 문화와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91]

 

로마가 다른 민족들을 자국 내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추구했던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관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91]

 

요컨대 로마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의 전통을 존중하는 문화 상대론자들이 아니었다. 로마의 관리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도 계층에게 로마의 규격화된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 이에 순응할 경우에는 이를 보상해주는 경치. 경제제도를 만들어 냈다. 조목 해야 할 것은 출신 민족과 인종은 로마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으로 흘러 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로마의 적극성과 노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93]

 

로마 세계에 보편화되었던 다양한 신앙은 주민들에게는 하나같이 올바른 것으로, 철학자들에게는 하나 같이 그릇된 것으로, 관리들에게는 하나같이 유용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관용은 상호의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화합까지 탄생시켰다. 로마가 각 지역의 종교에 대해 요구한 유일한 조건은 로마 당국과 공식적인 의식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94]

 

로마 사람들은 각 지역의 신들을 제국의 종교 제도 안에 통합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유일신 종료로서 로마의 우상숭배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반경은 매우 격렬했다.[95]

 

로마 붕괴의 총체적인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 장의 주제와 벗어나는 일이다. 여기서는 이 책의 주제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분명한 사실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첫째, 관용과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99]

 

초기의 위대한 황제들은 이런 이질적이 요소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였고, 그들의 관용 정책은 전성기에는 로마에 이롭게 작용했다. 그러나 동쪽과 북쪽의 민족들은 로마의 관용정책 덕분에 예전의 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자율성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차츰 제국이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동하였다.[99]

 

지나친 다양성은 로마 쇠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진난 로마에서 종교적 발개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불관용은 로마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기독교는 새롭게 시작된 불관용 정책의 표적이었고 나중에 불관용 정책의 주요한 원천이었다.[100]

 

뜻밖에도 거대한 로마와 애송이에 불과한 기독교 교회 사이에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교회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짧지만 격렬한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서 제위에 올랐고, 서기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가 개종한 이유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의 개종과 함께 수백만 명의 기독교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끝이 나고, 기독교인이 아닌 주민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101]

 

로마 몰락 원인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불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켜 왔던 동화 및 통합전략을 훼손시킨 데있다. 첫째, 당시는 우상숭배가 너무나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쉽게 금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 이후의 황제들은 종교적인 통합이 제국을 소생시키고, 급증하는 야만인의 공격에 맞서서 제국의 힘을 강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우상숭배와 이단에 대한 공격은 자멸적인 결과를 낳았고, 야만인들의 침입을 촉진했다.[102]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을 끌어 모으고, 동화시키고, 보상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때 로마는 번영했다.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 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적인 불관용과 인종적인 불관용이 결합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고, 전쟁에 서도 내란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제국은 로마의 혈통, 문화,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이에 심혈을 기울였다.[106]

 

3장 중국의 황금기 -

세계적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중국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나라를 꼽으라면 당 왕조를 꼽는다. 당 왕조는 중국이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면 정치적 패권을 휘둘렀던 시대이자 문학과 예술의 전성기로서 이후 왕조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당 왕조는 당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중국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개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나라, 인종적,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나라였다.

 

시황제이 통치 기간을 짧았지만 그가 세운 강력한 원칙은 중국사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하게 된다.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 필요하다 것이었다. 그 후 2000년 이상 중국은 불관용은 인종 및 종교에 대한 산발적인 억압, 그리고 문화적인 숙청외국인과 외국의 사상에 대한 거부,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중화사상과 중국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단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112]

 

한 왕조의 몰락 이후로 중국의 관점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당 황제들이 통치권을 장악한 618년까지만 해도 불교는 중국의 유려한 종교였으며 토착 종교인 도교보다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불교는 중국의 특유한 요소들을 흡수하고 수용하고 중국에 맞게 변형되어 있었다.[115]

 

결국 중국 북부에서는 중국인들과 야만인들 사이의 구분이 흐려졌다. 한 왕조가 멸망했던 220년부터 수 왕조가 들어섰던 581년까지 무질서했던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야만인통치자들이 중국 북부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이 통치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중국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중국의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말을 탈 줄 알고 불교를 후원하며 중국어와 돌궐어를 동시에 구사할 줄 아는 혼혈 귀족으로 상승했다.[116]

 

이방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 중국 역사상 가장 관용적인 왕조가 탄생했다. 이런 관용적인 태도를 인격적으로 구현했던 인물이 바로 당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이었다. 태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중국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영웅적인 인물로 존경 받고 있고 일부 역사학자들로부터 당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로 대접받기도 한다.[116]

 

태종은 돌궐의 병력과 중국이 병력을 결합함으로써 중아시아 전역과 파미르고원 너머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까지 당의 지배권을 확장했다.

태종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규모나 인구, 군사력의 측면에서 당을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태종은 재우 초기부터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119]

 

당 왕조는 300개가 넘는 나라 및 지역들과 공식적으로 교류했다. 외교와 통상은 깊이 맞물려서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조공제도를 통해서 대규모 물자 교환이 이루어졌고 외국 승려들과 상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여행하고 했다.[120]

 

태종의 처세는 중국 역사상 종교 다원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시대로 손꼽힌다. 태종은 불교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먼 서역에서 외국인들이 가져온 생소한 종교들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태종의 치세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주로 외국인 신도들에 의해서 자유롭게 신봉되었다.[123]

 

태종의 통치는 중국의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가계도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종이 고위 대신들의 가문을 중국 최강의 벌족보다 높은 지위로 끌어올렸다는데 이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의미했다. 첫째는 학자출신 관리들이 단순히 귀족 혈통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었으며, 둘째, 과거제도를 중국 사회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아시아 사회에 변화를 몰고 오게 되었다.[124]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정복 사업과 활발한 외교정책을 병행했다. 외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그의 치세에 최고 절정에 달해서, 카슈미르에서 한반도, 이란에서 베트남에 이르는 비 중국인 민족들이 당의 패권에 포섭되었다. 황도 장안은 방대한 당 제국의 중심이었다. 장안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곳이었다.[127]

 

장안은 다양한 분위기가 뒤섞인 화려한 도시일 뿐 아니라 학문고 예술이 중심지였다. 명황의 치세에 문학과 예술, 역사, 이론과 미학이론, 그리고 특히 시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이백, 황유, 두보 등의 시인들은 모두 이 시대 사람이었다.[128]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외국인에게 관대하고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 관대했다. [128]

 

당은 당에 맞서려는 왕국들에 대해서 피비린내 나는 정복을 감행하기보다는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위협으로 외교술을 펼쳐 굴복시키는 전략을 많이 구사했다. 이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당을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고, 당의 패권이 외국의 왕들과 백성들의 충성심에 좌우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중국인들에게 자주 멸시당하던 외국 왕들과 백상들은 이런 치욕감을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으로 되갚았다.[134]

 

당의 몰락 원인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부여 받는 한 외국인의 반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제국의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 순간부터 불관용이 시작되었다. 당이 채택했던 전략적인 관용 정책은 당이 중국인이 아닌 피지배민에게 한족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당제국은 그 덕분에 크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당 제국에 야만인들과 중국인들 한테 묶어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안녹산의 난은 당의 쇠퇴를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이전 까지 당의 황제들은 중국인과 비중국인 간의 구분을 없애기 위해 혈통과문화를 혼합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오랜 세월 이 정책은 놀라우리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국은 영토를 점점 넓혀가면서도 외국인들이 중국 사회에 모든 영역을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생명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안녹산의 난 이후 완전히 뒤바뀌었다. 8세기 후반에 이르자 타 민족과 외래사조에 대한 당의 관용은 권력의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할, 불안정, 그리고 폭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138]

 

이슬람교가 당의 영토인 중아시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면서 결국 불교를 제치고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과거 당의 통치자들은 이슬람교를 인정해주었지만, 이제 이슬람교는 당의 패권에 맞서는 적수이자 위협이 되고 말았다.[139]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등불처럼 번지면서 다양한 인종을 감싸 안던 당의 세계주의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과거제도를 통해서 입신한 동남부 출신의 중국인 선비와 관리들은 야만인의 피가 섞인 타락한 북부 출신 귀족들 때문에 중국의 도덕과 문화가 오염되고 있다는 생각을 퍼트렸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 고유의 가치와 고대 중국의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141]

 

9세기에 이르자 당의 불관용 정책을 더욱 강화되었다. 836년 중국인들은 유색인들과 교류할 수 없다는 황제의 칙령이 공표되었다.[141]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사람들에게는 과학도, 공학 기술도, 고유한 문자도 없었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빵을 구울 줄도 몰랐다. 그러나, 바그다드, 베오그라, 부하라, 키예프, 모스크바, 다마스쿠스, 사마르칸트 등 당대의 거대한 도시들을 포함해서 다시 알려져 있던 세상의 절반을 다스렸다.[145]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공표했다.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포용하고 초원지대 사람들을 갈라놓던 부족 간 장벽을 용의주도하에 허물고 피정복민들 가운데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골라 공직에 임용했다.  두 세대가 지난 후 칭기즈칸의 손자인 몽케, 훌라구,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이 썼던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147]

 

테무친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늘 똑 같은 기본 전략을 사용했다. 그 패배한 부족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나 동등한 성원으로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켰다.[150]

 

여러 세대에 걸쳐서 초원지대 사람들은 부계혈통주의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두 남자의 촌수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서로에게 더 충실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테무친은 초원 지대를 분열시켜왔던 전통적인 씨족별, 혈통별 분할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서 몽골 군대를 재조직했다.[150]

 

테무친은 측근 가운데 믿음이 가지 않는 혈연은 주저 없이 몰아 냈다. 몰골의 전통과는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테무친은 애초부터 사촌들이나 형제들, 혹은 조카들을 군대의 고위직에 앉히지 않았다. 테무친이 혈연관계보다는 공로를 강조한 덕분에 낙타몰이꾼과 소몰이꾼들이 장군이 될 수 있었다.[151]

 

테무친과 함께 있던 부관들은 지휘관인 테무친과 끝까지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뜻밖에도 스무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이들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테무친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푸른 하늘과 부르칸 칼둔의 신산을 숭배하는 정령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도 있었다. 출시 부족도 가지가지, 종교도 가지가지이면서 형제의 맹세를 한 이들은 테무친이 칭기즈칸이 되어 얼마 후 건설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상징했다.[153]

 

칭기즈칸은 한반도와 시베리아에 사는 부족 등을 비롯한 열 부족들과 민족들을 대몽골국에 합병하는 사업을 계속 진행했다. 칭기즈칸은 민족간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부족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배치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피정복 부족장의 자식과 결혼시켰다. 그는 또한 다른 부족의 재능 있는 자들을 데려다가 몽골족이 지니고 있지 못한 재능과 기술을 전파하게 했다. 몽골족이 문자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런 경로를 통해서였다.[155]

 

칭기즈칸은 몽골족이 지니지 못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신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렸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성벽을 두른 난공불락의 도시들을 함락하는데 필요한 강력한 공성장비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무기들이 몽골 병기고를 채웠고, 그 무기들을 설계한 중국의 기술자들은 몽골 부대에 편입되었다. 승리를 거듭할 대마다 몽골의 무기는 점점 정교해지고 치명적인 위력을 갖추게 되었다.[159]

 

칭기즈칸은 목표를 당성하자 병사들을 이끌고 몽골의 초원 지대로 돌아갔다. 그는 위구르, 탕구트, 거란의 왕국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계속 곡물을 바칠 것을 전제로 하여 여진인들에게 대폭적인 자율권을 허용했다.[160]

 

더 중요한 전리품은 바로 인적자원이었다. 칭기즈칸은 중국 북부에서 기술자들은 물론이고 연대 단위로 투항해온 병사들과 장교들을 데려왔고 곡예사, 악사, 가수, 무용수, 봉제사, 약사, 통역사, 도공, 보석세공사, 점성가, 화가, 대장장이, 의사까지 데려왔다.[161]

 

칭기즈칸은 유럽에서는 신의 저주라고 불렸지만, 티베트에서 아랄해에 이르는 동양에서는, 중세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의 표현을 빌리면 주가 베푸신 자비이며 주가 내리신 은총이자 종교의 옹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161]

 

그의 초기 정복 활동은 주로 약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노년이 되자 그는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마음속에 목표를 새겨두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인생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167]

 

13세기 기독교권인 유럽은 십자군 전쟁, 종파 대립, 반유대주의로 산산조각 난 채 이교도 박해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럽 분열과 불관용은 몽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몽골족은 전투에서 전인하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종교적 열정이나 편협함 때문에 곤란을 겪은 일이 없었다. 유럽의 숱한 제후들이 숙련된 기술을 가진 비기독교도 주민들을 박해하고 추방하고 있을 때 만족이나 종교를 따지지 않았던 몽골인들은 자유롭게 피정복민들로부터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서기, 통역사, 건축가, 장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계층은 물론이고, 몽골의 초원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부를 캐낼 방법을 알고 있는 색스니 출신의 광부들까지 손에 넣었다.[172]

 

야만적인 몽골인들은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몹시 세계주의 적이었다.

이들 기술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포로인데도 대단한 존대를 받았다. 예술, 과학, 학문 그리고 행정능력이 취약했던 몽골인들은 편견 없는 태도로 자신들이 정복한 문명 민족들에게서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냈다.[177]

 

쿠빌라이의 예외적인 정책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그러나 반 중국적인 몽골 지상주의자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도 있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빌라이는 거의 전 생애를 중국에서 보내면서 중국의 세련된 문화와 중국의 아름다운 건축, 그리고 질서 잡힌 중국 사회를 거리낌없이 칭송했다.[181]

 

그는 고대 중국이 수도를 본보기로 하여 중국식 수도를 건축하고 중국식 황실의식을 따랐으며 근원혹은 위대한 시작을 뜻하는 아라는 이름의 중국왕조를 창시했다.[182]

 

주목해야 할 것은 쿠빌라이는 중국인들을 행정부의 고위직에서 추방한 뒤 이 직위들을 몽골인들로 채우지 않고 다른 외국인들로 채웠다는 사실이다.[182]

 

쿠빌라이의 통치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그것은 맹목적인 재외주의가 아니라 소수에 불과한 몽골의 통치 계급이 어마어마한 중국인구에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안한 정치적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83]

 

어떤 사람들은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던 세기를 최초로 세계화가 고조된 시기로 본다. 몽골의 치세에 교역로와 얌이라는 역참제도에 의하여 유럽과 극동 지역이 처음으로 연결되었다[185]

 

그는 피지배민족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거리낌없이 칭찬하고 현명하게 이용했다. 그는 모든 종교 교의들이 융성할 수 있게 했고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 문명에 인도와 이스람 지역에서 비롯한 지식과 기술을 주입하기까지 했다.[187]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이 지배하던 지역 어디에서나 일관된 특징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공식적으로는 물론 몽골의 평범한 주민들 사이에도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188]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 된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 들였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칸은 중국식 호칭을 만들고 중국왕조를 세웠으며 중국의 미술, 음악, 경극에 묻혀 살았다.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몽골의 칸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페르시아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했다.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191]

 

 2부 계몽화된 관용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중요한 것은 상대적 관용이었다. 끔찍한 폭력사태가 벌어지느니 경우가 있긴 했지만, 14세기와 15세기의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스페인은 서유럽의 비기독교도들이 거주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었고, 때로는 유일한 곳이었다. 스페인이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에는 고유의 종교를 믿고 고유의 법률에 의한 통치를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특별한 조약 덕분에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197]

 

스페인의 유대교도들은 대단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했다.

스페인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한 궁정 천문학자와 철학자, 지도 제작자, 그리고 의사들 가운데에도 유대교도들이 있었다. [198]

 

상대적인 관용 덕분에 스페인이 거둔 수학은 영토확장과 제국이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을 손에 넣었다.[199]

 

1478년 교황이 교서에 따라 스페인에 이단 심문소가 설치되면서 상대적인 관용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도미티크수도회의 주도로 무시무시한 권력을 장악한 교회의 이단 신문소는 이교도들이 사는 나라를 정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이하게도 여기서 이교도들은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공개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장한 기독교도들을 이르는 말이다.[200]

 

스페인 왕실은 공식적을 불관용 정책으로 선회 했는데 이것은 세계적인 패권 국가롤 성장할 꿈을 품고 있던 제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201]

 

새로 터져 나온 종교적 불관용의 스페인 전역에서 들 끊고 있었다. 1590년대에 활동을 멈추었던 이단 심문소는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라만차의 새내기 기독교도들은 채무자들에 대해 위장한 유대교도로 고발되어 박해, 고문, 처형당했다. ‘순수한 혈통이 다시 표어로 등장했고, 유대교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와 대학교, 군대와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 하는 과거의 법령이 부활했다.[203]

 

이단 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을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 주었다. 당사자들에게 끔찍한 죽음과 고통을 안겨준 것은 차치하고라도 스페인이 종교 박해는 엄청난 자원 낭비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은 25만 명에 이르는 모리스코스 공동체를 추방하기 위해서 해군과 민병대 전체를 동원해야 한다. 이단 심문소의 무수한 재판과 고민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 했지만 증오와 편집증만 빚어냈을 뿐 지식이나 부는 일체 창출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결렬한 광신주의가 고개를 들 때마다 스페인은 인적 자본, 금융자본, 그리고 사회자본이라는 가장 귀중한 자원들을 파괴하거나 몰아냈다. 결국, 스페인의 정화 활동은 농민과 장신, 의사와 과학자, 상인과 금융업자, 그리고 심지어는 가톨릭을 믿는 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을 파괴 했다.[205]

 

스페인이 관용을 지속했다면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지는 단언할 수 없다.. 나의 논지를 되풀이해서 말한다면, 관용응을 세계 제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스페인 왕국의 불관용이 번영을 가로 막고 스페인이 깊은 쇠락을 재촉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206]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17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기는 유럽의 사치품 무역을주도했고, 사향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210]

 

네덜란드의 국경과 정치적 구성은 세월에 따라서 크게 변해왔기 때문에 명칭에 관련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중세에는 지금의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서부, 그리고 네덜란드를 망라하는 영토를 저지국이라고 알려져 있었다.[211]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펠리페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네덜란드 말을 전혀 쓰지 않았고 저지국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그는 또한 매우 열정적인 카톨릭교도였다. 펠리페는 종교개혁을 막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신성한 사명이라고 여기고 유럽의 근대 초기 역사에서 손꼽힐 만큼 극적이고, 잔인하고, 혼란스러운 사건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216]

 

작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동시적으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이었다. 예컨대 스페인, 영국, 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이들 국가들을 전쟁터에 전념하게 하여 재정이 고갈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사람들이 스페인에 공격에서 벗어날 틈을 주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과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219]

 

17세기 유럽 전역에 종교적인 분쟁과 박해, 그리고 광신적인 행위가 퍼져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네덜란드 주 연합에는 국교를 없었다.[219]

 

실질적으로는 이단적인 교리와 관용이 널리 퍼져 있었다. 지역 교구들은 교리적으로 어는 정도의 순수함을 유지할 것이지 선택할 수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교구들이 융통성 있는 대안을 선택했다.[219]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 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계적인 무역,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222]

 

유대교도들은 네덜란드의 경제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사실 다른 집단과 비교하면 머릿수도 극히 적은데다 기여한 바도 미미했다.  16세기 말 막스베버가 말했던 자본주의 정신을 네덜란드에 들여오는 데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대거 유입된 개신교 상인들과 숙련 노동자들, 그리고 생산업자들이었다.[225]

 

네덜란든 사람들은 사치품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1598년 스페인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식민지의 생산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 선박의 입항을 금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투자 자본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의 유력한 상인들은 자신들이 부의 위협을 느끼자 아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쳐 놓고 동인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이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연합 동인도 회사와 후일 서인도 회사였다. 이 두 회사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세계적인 식민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227]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에 연료를 공급한 것은 칼뱅주의가 아이라 이윤 추구였다. 17세기 초 아프리카 서부의 부족민들은 네덜란드의 무역업자들에게 금이 당신의 신이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229]

 

1600년대 초에는 네덜란드의 상업주의와 식민주의가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전 세계를 휩쓸었다. 네덜란드는 1605년 인도네시아의 향료제도를 포르투갈에 모두 빼앗겼다. 동인도회사는 1610년 자바에 최초의 총독을 파견하고, 케르나테, 티도레, 암보이나등 인근 섬들에 교역소를 설치했다.[230]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설립자들은 동인도회사의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상대적인 종교적 관용 때문에 네덜란드연방공화국으로 이주한 부유한 개신교도들이었다. 따라서 서인도회사는 동인도회사에 비해서 호전적인 칼뱅주의적 경향이 훨씬 짙었다. 한편, 유대교도들은 동인도회사에서는 미미한 역할을 했지만, 서인도회사에서는 훨씬 큰 역할을 했다.[232]

 

17세기 황금기를 맞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전역에 기회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곳에는 극심한 가난과 불평등도 있었다. 1500년부터 1700년까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으로 밀려들어온 수천 명의 이주민들 가운데에 금융업자들 같은 거물급들 분만아이라 노르웨이와 스웨덴 출신의 부랑아들과 매춘부들, 무일푼의 선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네덜란드연방공화국에서는 미숙련노동자들조차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수준의 생활과 질 좋은 식사를 향유할 수 있었다.[234]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지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개방적이라는 소문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외국인 여행객들은 하인이 주인을 멸시하고, 아내가 남편을 멸시하고, 평민이 귀족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237]

 

네덜란드공화국에서는 부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제한이 없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높은 임금은 독일, 프랑스, 잉글랜,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터키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238]

 

중세초기의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던 네덜란드는 영토의 팽창이 아니라 상업의 팽창을 꿈꾸었다는 점이다.[241]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잔인한 종교 박해 때문에 1492년부터 1715년 사이에 숙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상 최대 규모로 이주를 감행했다.  200년 후에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네덜란드는 관용정책을 통해 유럽에서 박해를 받아 추방된 재능 있는 사람들을 유인했다. 이런 관용정책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집단 가운데 일부를 좁은 네덜란드로 끌어들여,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내고 부의 측면에서 대륙의 경쟁자들을 크게 앞지르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 부를 이용해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했다.[242]

 

네덜란드의 관용정책을 사실상 국내정책이었다. 네덜란드가 국경 내에서 펼쳤던 주목할 만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해외 식민지에서의 인종적 혹은 민족적 관용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수리남에서 자바, 그리고 아프리카 남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토착민들을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하게 여겼으며 노예제, 인종 격리, 그리고 문화 파괴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편협한 식민정책을 실시했다. 다시 말해서 네덜란드 국내에서의 관용 정책과 해외 식민지에 대한 관용 정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245]

 

7장 불관용의 덫 - 오스만, , 무굴

오스만튀르크족에 의해서 세워진 오스만제국은 대략 1300년경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지속되었다. 전성기 때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빈의 경계에서 홍해까지, 아프리카 북부에서 발칸제국까지 뻗어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적 관용이었다.[248]

 

이런 관용정책은 한편으로는 교활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서의 민족을 보고한다는 이슬람의 원칙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통 위에 세워진 오스만제국은 철저히 계산된 관용 정책을 토대로 인종적, 종교적 구성이 매우 다양한 지역을 다스렸다.[248]

 

종파 사이에는 호의적인 관계가 맺어졌고 다른 종교를 가진 가문들이 정치적, 상업적으로 동맹을 맺는 일은 흔했다. 이슬람교도들과 비이슬람교도들은 종종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50]

 

오스만 사람들은 종교에 근거한 뚜렷한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있었고 당연히 이슬람교가 으뜸가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나 유대교도는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으고, 출세를 해도 신분으로 따지면 이슬람교도보다 아래라고 여겼다.

사회적으로 열등한 신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비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직접적이거나 상징적인 방식으로 숱한 제한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 사항들은 대부분 무시되거나 느슨하게 집행되었다. 많은 비 이슬람교도들이 엄청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다.[251]

 

오스만제국에서는 어떤 인종, 어떤 사회계층도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아스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개종한 이슬람도 역시 타고난이슬람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출세에 거의 제한이 없었다.[253]

 

오스만제국이 전략적인 관용은 지금은 누구나 익숙해 있는 인권을 존중하는 태도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몹시 전근대적인 것이었다.[253]

 

이슬람사람들은 전략적인 관용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첫째, 그들은 전략적 관용 덕분에 트란실바니아에서 예멘과 이란고원에 이르는 피정복민족들로부터 협조, 아니면 하다 못해 묵인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피부색 따지지 않고개종자들을 포용하는 오스만제국이 관용 정책 덕분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협조적인 피비배민들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농사를 짓거나 군대에서 복무할 인구가 늘어 났을 뿐 아니라, 재능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핵심 세력이 형성되었다.[255]

슐레이만이 죽은 후 오스만제국은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7세기부터 현재까지 광신적인 유혈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257]

 

내란의 확산과 민주주의의 고조가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최후에는 험악한 불관용적 형태가 발작적으로 벌어졌다. 오스만제국은 1922년 완전히 붕괴하기 직전까지 격심한 인종적, 종교적 편협성, 분파주의, 폭력에 시달렸다. 불관용은 특히 발칸반도에 서 심했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교도를 공격하고, 그리스정교를 믿는 기독교도들이 귀일교회를 믿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했으며, 여러 교파들이 유대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살해했다.[259]

 

15세기 초반 명나라는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에게 28000명이 넘는 이원을 실은 300척의 거대한 보물성을 맡기도 일곱 차례에 걸쳐서 인도양을 누비는 웅장한 항해를 하게 했다. 당시 명 왕조는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세계를 제패하는 데 유리한 상황이었다.[260]

 

그러나 명 왕조는 세계 제패의 꿈을 꾸지 않았다. 1424년 이후 명의 황제들은 해군을 해제하고 외국과의 무역과 외국의 사상을 거부하면서 병적이라고 할 만큼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261]

 

영락제는 또한 국경을 넘어서 중국황실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몽골이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북쪽으로 군대를 보내고, 지금의 베트남을 정복하기 위해 남쪽으로도 군대를 보냈다. 수군 제독 정화에게 여러 대양을 탐험하면서 공물을 거두어 들이고,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명왕조의 권력과 위업을 세계에 알리는 특별한 임무를 맡긴 것도 바로 영락제였다.[262]

 

명이 쇄국으로 돌아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락제가 죽은 뒤, 몽골이 다시 군대를 모아 중국을 침입한 데 있었다. 1449년 몽골 군대는 베이징 인근 토목보에서 명의 군대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그 후 명이 황제들은 갈수록 외국에 대한 혐오가 깊어졌고 유일한 문명사회인 중국은 내놓을 만한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위험한 야만족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낡은 생각이 부활했다. 명의 황제들은 몽골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만리장성을 쌓고, 교역 등 외국과의 접촉을 금지함으로써 스스로 문을 닫아 걸었다.[265]

 

영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했던 무구제국은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다. 전성기의 무굴제국은 인도 아대륙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일부를 다스렸다.[266]

 

악바르가 선택한 해결책은 한편으로는 외교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문화의 결합 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그랬듯이 알바르는 정적의 가분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268]

 

악바르는 온갖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후원을 손길을 내밀었다. 악바르 자신이 글을 읽고 쓰 줄 몰랐지만 자신의 조정을 학식과 재주가 넘치는 사람들로 채우려고 애를 썼다.[269]

 

1679년 아우랑제브가 비이슬람교도들에게 부과하는 징벌용 세금인 지즈야를 부활시키자 제국 전역에서 거센 저항의 물결이 솟구쳤다.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은 제국에 재앙을 몰고 왔다. 결정적인 사건은 힌두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상업이 위축된 것이었다. 아우랑제브의 측근 한 사람이 수라트에서 흰두교도 점원에게 개종을 강요하자 흰두교를 믿는 8000여 명의 상인 대표들이 격분하여 항구 도시 수리트를 떠났고 이로써 상업을 완전히 중단되었다. 게다가 아우랑제브의 이슬람교에 대한 광신은 무굴 제국의 허약한 종교적, 정치적 통일성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275]

 

8장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영국이 부상은 이 책의 논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 1689년에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했다.[280]

 

영국은 프랑스보다 훨씬 쉽게 돈을 구할 수 있었다. 17세기 내내, 유럽의 군주들은 급증하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원들을 쉴 새 없이 긁어 보았다.

유대교도들은 특히 이런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국제적인 친족 연락망에 의지하여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283]

 

1984년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 인들이 개척한 개인적인 투자를 통한 현재적인 공채 제도를 기반으로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 영국의 새로운 유대교도 공동체는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84]

 

위그노교도인 시계 제조공들 덕분에 런던은 세계적인 시계 제조 중심지로 변모했고 코드베크라는 프랑스 마을에서 빠져 나와 모자 제조공들 덕분에 영국은 섬세하고 방수성이 강한 펠트 천을 만드는 비법을 개발하여 직접 코트베크 모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287]

 

디리엔의 참극은 스코틀랜드를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패터슨과 목숨을 건진 그의 동료들은 온갖 냉대와 수모를 견뎌야 했다. 1707년 기가 꺾이고 기근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합병조약에 서명하면서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290]

 

합병조약 이후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 인들을 안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찍어 누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다시 만하면, 그들을 통합시켜 충성심을 이끌어낼 것인지, 아니면 북부의 낳은 사람들이 겁내는 것처럼 그들을 억압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영국인들은 전자를 선택했고 그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292]

 

스코틀랜드 인들은 대영제국에 인력을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의 주도적인 사상가, 저술가, 발명가로 활동했다.[294]

스코틀랜드 인들은 영국이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1830년대에 스코틀랜드는 철강 사업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고 스코틀랜드의 조선 기술은 영국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295]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상태가 없는 해군력과 상업력, 그리고 금융업이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전함을 보유한 영국 해군 로열 네이비의 병력은, 버금가는 서너 개국이 해군을 합친 것도 더 막강했다.

 

우대교도들은 또한 런던주식거래소를 설립하고 영국에서 다이아몬드, , 은이 거래되게 했으며 런던을 암스테르담과 맞설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297]

 

한편 영국은 1830년 대에 수익을 남기건 노예무역을 폐지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처럼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침으로써 영국은 중요 경쟁국인 프랑스뿐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해서까지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299]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는 영국이 19세기에 새로 확립한 관용정책에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1801년의 합병조약을 포용일 아니라 아일랜드 의회를 없애려는 정치적 음모로 여겼다.[303]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는 언어적, 문화적, 민족적, 정치적 차이가 늘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이 아일랜드를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대한 태도는 비극적일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다, 마디로 영국이 아일랜드를 상실한 것은 관용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19세기 영국은 카톨릭교도 에게 상당 수준의 평등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미미하고 너무나 뒤늦은 조치였다.[304]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색인들이 거주하는 영국의 식민지에서도 똑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개신교가 19세기 영국의 정체성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제국이 세계적인 규모로 팽창함에 따라 영국인들은 점차 스스로를 식민지 주민들과는 달리 백인이며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305]

 

동인도회사는 인도 관리들과 지도 계층을 영국에 협조적인 기간 요원으로 선발, 훈련하여 영국인의 감독을 받으며 일상적인 행정사무를 담당하게 했다.[308]

 

더욱 운명적인 사건은 1829는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사티금지법이 통과한 것이다.

사티 금지법은 영국이 인도의 중요한 종교적 관심에 강경하게 개입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동인도 회사 직원들의 우려했던 대로 다수인 힌두교들 사이에는 강력한 분노가 솟아올랐다.[309]

 

19세기말 영국이 수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인종간에 불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국인들의 피부색이  검은 인도 주민들을 통치할 수 있는 선전적인 권리를 갖게 된 것이며 아울러 인도 회사 내부의 분열도 인종간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313]

 

또 다른 한편에는 자유주의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제국주의자였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말로만이라도 만민평등의 원칙을 칭송하고 때로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그들은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통치가 정당화 되는 것은 인도인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이유로 인해서 후진적이고 미개하고 가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313]

 

인도를 통치했던 90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끊임없이 흔들렸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 어느 쪽도 오랫동안 우세를 장악하지 못했다. 우선 두 개념을 표방한 두 정당은 런던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흔들어댔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우세한 경우에도 영국 출신인도 이주민 사회에 대한 그들의 자유주의적 정책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317]

 

이들은 자유주의 행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해 주던 인종적인 장벽이 허물려고 하지 격분했다. 1883년 자유주의적인 총독이, 인도인 판사가 백인 피고인들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일버트법을 통과 시키자 인도전역에서 영국출신의 이주민들이 항거했다.[317]

 

보수주의자들일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정책은 점점 강렬해지고 점점 확대되어가는 인도의 만족주의 운동에 직면해야 했다. 1898년에 총독이 된, 귀족적인 커즌경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 법률가 및 공무원 집단과 정면으로 맞붙었다.[318]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도가 받은 보상은 자치권이 아니라 가혹한 탄압과 지독한 억압이었다. 전후 인도는 소란스러웠다. 민족적 자각과 자부심이 자라나 전국에 스며들었고 인도의 부를 빼돌려 영국의 제국주의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늘어갔다.[320]

 

이런 모든 변화들은 영국출신 이주민 공동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멀리 떨어진 본국 정부가 진보적인 인도개혁 정책을 입안하고 있을 때 인도의 영국인 정부는 억압적인 롤래트법을 제정했고 원주민들에게 통행금지법을 내렸으며 시우의 권리를 박탈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3년 동안 계엄령을 유지 했다.[320]

 

1920년 간디는 중국정부에 대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펼치자는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인도 국민회의당은 간디의 의견을 좇았고 수 십 년 동안 이어오던 영국의 인도 통치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철회했다.[321]

 

인도의 영국인 정부는 인도 독립을 피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략적인 관용을 채택했다. 양차 대전 사이에 영국인들은 백인의 보루였던 인도 행정부의 상급 직위에 인도 군대의 장교 직위에 인도인도 임명했다.[322]

 

자격이 충분한 인도인들을 관리직으로 고용하라는 정부의 권유는 물리쳤다. 전성기 때 동인도회사는 인도인  기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동맹을 맺었지만 20세기의 영국출신 이주민들은 토착 기업과의 협조를 고집스레 거부했다. 이런 공격적인 불관용 전략은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323]

 

과거의 패권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관용의 정책으로서의 극적인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영국이 경쟁 상대도 없이 세계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시기가, 우대교도들, 위그노교도들, 스코틀랜드 인들이 국회의원, 수상 등 영국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참여했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유대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인들은 영국이 해외식민지를 정복하고 관리하는 일을 도와 주었을 뿐 아니라 영국 산업, 금융, 그리고 해상력에서 우위를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325]

 

인도인 지도자들이 독립에 전념하던 1931년 간디는 인도를 제국으로부터 어느 정도로 떼어놓을 생각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간디는 대답했다,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영국민족으로부터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인도가 비탄에 빠지지 않고 발전의 길을 걷기바라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영제국이 제국인 것도 바로 우리 인도 때문이다. 황제의 지배는 끝내야 하다. 나는 영국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대등한 파트너가 되고 싶다. 그러나 동등한 조건에서의 파트너여야 한다.”[326]

 

3부 세계 제패의 미래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미국은 온갖 종교에 대해서 동시대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미국은 1789년 종교와 자유를 인정했으며 더 나아가 국교를 두지 않음을 헌법상의 원칙으로 공표하는 대단한 혁명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대체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면서도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특정한 인종 혹은 민족 집단에 대해서 극단적인 불관용의 태도를 보였다.[332]

 

지역에 따라 종교적인 구성이 다르긴 했지만 식민지 미국 내의 종교적 자유는 우리 종교가 싫다면 다른데 가서 살아도 좋아라는 인색한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334]

 

상업을 종교적 관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기폭제였다. 유력한 상인들은 배척하는 풍조는 사업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335]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9년에 채택한 헌법은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열세명의 이주민 대표들은 영국의 관용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헌법을 종교적인 문서로 만들지 않고 어느 한 종교에 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종교를 공직 취임의 전제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뿐이었다. 헌법에 종교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않자, 신을 배신하는 사악한 행동이라는 비나니 여러 지역에서 들끓었다. 그러나 건국의 아버지들은 종교와 관련된 자유로운 선택이야말로 다원주의 시회에서 분파 간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339]

 

한마디로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종교적 관용은 미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와 영국에게서 물려받은 후 계속 확장시켜온 정책이었다. 18세기 말 종교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340]

 

미국의 이민과 동화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아도 인종차별이 특징으로 부각된다. 미국 최초의 이주민들과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서버 혹은 북부 유럽태생이었다. 이들은 새로 밀려 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외모와 행동이 자신들과 흡사하면 흡사할수록 더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341]

 

유럽의 무수한 두뇌 유출덕분에 19세기의 미국은 기술의 벽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관용은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뛰어난 기술과 발명의 재능을 가진 이민자들 가운데 태반은 종교적 혹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경제적인 성공을 노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은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였다. [347]

 

이주민의 꾸준한 유입이 없었다면 미국은 19세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 및 산업국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이주 미국인들이 서쪽으로 밀려들 때 유럽에서 온 가난한 이민자들은 도심으로 들어와 비숙련 노동자의 자리를 채웠다.[349]

 

이것이 선택적인 전략적 관용의 냉혹한 본성이었다. 미국은 유럽 출신의 다양한 대중들은 환영했지만,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은 학살하고 차단하고 내 쫓았다. 전략적인 관용의 혜택에서 배제 당한 사람들은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투표할 수 없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배제 되어 있었다.[353]

 

19세기 미국 사회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가지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 있었다. 둘째, 만주적인 정부제도는 부패했어도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쥐어 주었다. 셋째, 활발한 자유 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 밖의 기회를 제공했다.[353]

 

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세계의 강국으로서 첫 번째 시험을 했다 1917년 미국이 세계대전에 개입하면서 저울추는 연합국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고 미국은 세계 모든 나라들에게 자유를 얻을 방법을 제시하게 역할을 떠안게 되었다.[354]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많은 미국인들이 보였던 최초의 반응은 미국에 전쟁의 손길이 외국인의 손길이 닿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356]

 

전쟁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유례없는 경제 발전에 엄청난 연료를 공급했다. 대 공항에서 벗어난 미국 산업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급격히 성장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최대의 상품 수출국이 되었고 세계의 총 제조업 생산고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서양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약1,250 만 명이라는 엄청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357]

 

관용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이 초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이전이 개방적인 이민정책 덕분에 미국은 인력 면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357]

 

그들의 연구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발명으로 이어져서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재능 있는 이민자들의 유입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만한 과학적 발전과 군사력의 우위를 변형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359]

 

1980년대만 해도 미국의 산업계가 일본과 통일된 유럽과 경쟁할 수 있을까 하고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 미국 경제는 세계 모든 나라를 경이적으로 앞질렀다.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나라이다.

달러는 세계의 지배적인 화폐였고, 영어는 지배적인 언어였으며, 미국의 문화는 가장 많이 모방되는 문화였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러시아는 대혼란에 빠져들었고 유럽은 침체되었으며 일본은 후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으며, 미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심지어는 문화적으로도 경쟁할 상대가 없었다.  세계에는 새로운 초강대국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366]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로브를 포함해서 수많은 이민자 출신 성공 사례들이 미국이 부를 긁어 들이고 미국을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 강국, 기술 강국으로 끌어올렸다.[372]

 

이들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재산 증식은 본토박이든 이민자이든 관계없이 어떤 배경을 가진 기업과 인재들에게도 보상을 제공하는 미국 경제의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2000년에는 상위 400명의 부자 가운데 3분의2라는 압도적인 다수가 맨손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었다.[373]

 

10장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나치 정권의 본질을 불관용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 나치의 모든 정책에는 인종적 증오가 깊이 스며 있었다. 나치의 주용 공약은 게르만 민족주의를 본질로 했으며 경제 정책은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380]

 

나치의 광신적인 행동의 주요 대상은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 집시들, 폴란드인들, 동성애자들, 병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들이 제거 대상으로 추려져서 강제 수용, 강제노역, 임의적인 처형의 희생자가 되었다. 나치가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은 아리아인은 우월하며 지배자 민족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확신이었다.[380]

 

그러나 나치 정권은 열등한민족들을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당장 치명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다. 우선 새로운 질서안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처형을 집행하려면 막대한 자원과 시간, 그리고 인력이 필요했다.[381]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학을 부인하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브리튼 전투에서 연합국이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레이더 기술에서 뒤처졌다. 나치는 또한 자국이 과학 분야에게 우월하다는 맹신에 빠져 연합국이 자신들이 암호를 해독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382]

 

히틀러에게 국가 간의 관계란 기본적으로 공간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점철되어, “강한 쪽이 이겨서 공간을 차지하는 그 곳에서 인구를 늘리고, 그러고 나서 또 다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싸우는 것으로 규정되었다.[383]

 

아무리 많은 기술과 재주가 동원된다고 해도 피정복민 무자비하게 예속시키고 인종적으로 열등한 종국을 물리적으로 근절하고자 했던 히틀러의 만행을 세계를 일깨워 확고한 반대의 입장에 서게 했다. [386]

 

일본 사람들은 지배자 민족으로서 대동아공영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도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은 아시아를 매우 넓게 정의했다. 일본의 전시 지도 제작자들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아시아 대륙의 일부로 그렸고 일본관리들은 미국을 아시아의 동쪽 날개라고 일컬었다.[386]

 

일본은 국수주의 사상가들은 일본의 열등한 지위를 뒤집기 위해 신에게 비롯한 황실의 혈통, 일본 사람의 순수성과 미덕을 강조하는 정교한 신화적 역사를 고안해냈다.[387]

 

불관용이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다. 이슬람교의선정주의 같은 종교적인 근본주의를 제외한다면, 인종주의적 국수주의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제공하고 정체성을 창조하고 전재를 부채질하는 힘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들이 이처럼 난폭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 요소는 곧 그 영향력을 제한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398]

 

11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국은 이미 국제무역 전쟁에서 현재의 초강대국 미국과 격렬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갈수록 심해지는 세계적인 반감과 싸우느라 고전하고 있지만, 중국은 채무 탕감과 대외 원조를 활용하여 국제적인 이미지를 제고하고 차입 자본을 증가시켜가면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403]

 

중국이 차기에 세계 최대강국으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앞질러야만 한다. 하지만 중국은 전제주의적일 뿐 아니라 불량국가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404]

 

중국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략적인 관용의 성공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사실 중국은 3000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날 유럽 연합이 목표로 삼고 있는 성과를 이루어왔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을 단일한 정치적 정체성안에 소속시키고 통합시켜온 것이다. 중국문명 자체가 다양한 문화의 거대한 융합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것이다.[405]

 

단일한 언어가 거의 모든 중국 인구를 통합시키고 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인구의 92퍼센트 이상이 자신이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중국 민족, 즉 한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민족학 연구자들은 언어, 습관, 외모에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관둥 사람, 상하이 사람, 후난 사람 등은 스스로를 이질적인 인종 집단으로 보아야 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쓰촨 사람, 텐진사람, 안후이 사람 등은 많은 차이가 있고 서로에게 교만한 태도를 취하기만 하지만 그들 모두 자신들을 중국인이라고 여긴다.[406]

 

중국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카드를 적절히 이용하여 해외 중국인들의 자부심과 충성심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415]

 

중국이 초강국의 지위까지 상승하리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앞길에는 엄청난 환경오염, 부패, 지역간 경제 격차, 지나친 대량 소비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내부적인 도전들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나의 논지를 따른다면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세계일류의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이해 세계를 제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그러나 중국은 민족을 토대로 한 전형적인 비이민자 국가라는 점이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418]

 

유럽연합의 영토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 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한다. 이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421]

 

유럽연합은 다른 나라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하는 대신에경제적인 측면에서 당근을 흔들어댐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탈제국주의 강국이다. 유럽 연합은 다른 나라에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각국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유인을 제공한다.[422]

 

유럽연합의 진정한 목적은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힘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유럽연합이 채택한 관용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미국의 관용 전략과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424]

 

유럽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이다. 유럽의 과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는 전략일 뿐이지 제3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 국가를 미국과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다.[424]

 

유럽의 이슬람교도들은 고립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유럽이 다른 주민들과 물리적, 문화적, 심리적으로 격리되어있는 경향이 강하다.

 

유럽연합의 탈제국주의 강국이므로 단순히 영역을 확장하는 목적으로 러시아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통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극적인 세계질서를 복원하는 것이 유럽연합의 목적 가운데 하나라면, 앞서 말한 한계들은 그 목적의 달성을 가로 막을지 모른다.[433]

 

인도가 세계경제포럼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인도가 잠재적인 세계강국이라는 주장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인도는 과학 기술 분야에서 연간 40만 명의 학위 보유자들을 배출하고 있고 영어를 사용하는 다수의 전문가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최근 4년 동안 평균7퍼센트의 경제성장을 당성하고 있는 등 많은 학자, 정치인, 투자자로부터 21세기의 주목되는 나라로 평가 받고 있다.[434]

 

인도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인도는 미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이다.[437]

 

인도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용의 승리를 의미한다. 현대 인도 건축의 주역인 마하트라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는 20세기에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관용을 주창했다.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이들의 지도하에 다른 종교를 가진 국민들에게도 다른 규칙을 제공하는 다원 주의적인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종교적 다양성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437]

 

인도도 엄청난 진보를 이루고 있다. 인도는 독립 이후 100년의 역사를 가진 카스트제도를 서서히 폐지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다원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등 역사상 유례없는 성과를 이루고 있다.[441]

 

초강대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미국의 패권 역시 언젠가는 무너지지 않는다. 미국이 패권이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전제 한다면 단 한가지 궁금한 문제는 미국의 패권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냐 하는 점이다. [441]

 

12장 제국의 미래

문제는 미국이 해외에서 군사력을 사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군사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이 일반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하는지, 상대를 제압하려고 선수를 치는지 또는 다른 나라들의 주권이나 국제법에 구애 받지 않고 행동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447]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지지하는 주장을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그 주장 가운데에는 독재를 물리치고 자유 시장과 민주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 미국의 군사력을 사용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447]

 

 이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내가 접착제라고 표현 했던 문제에 직면 한다. 세계 제패의 본질이 변화된 오늘날에도 미국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던 접착제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21세기 미국의 권력에 대해 전망할 수 있는 열쇠는 이런 옛 것과 새것의 결합에 놓여 있다.[449]

 

미국의 민주주의는 국력과 자유의 원천일 뿐 아니라 국외자들 끌어 당기는 엄청난 매력의 원천이다. 미국의 민주정체는 무수한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공을 안겨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관용으로 특징 지어진다.

그러나 과거에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이 그러했듯이 만족주의 역시 미국에게 한계를 지우는 요소이다.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흔히 미국을 로마로 비유한다. 이런 비유는 여러 측면에서 맞아 떨어진다. 로마는 그 시대의 군사적, 경제적 거물이었을 뿐 아니라, 굉장히 다문화적인 사회였고 민족적, 종교적인 측면에서 최고의 관용을 베풀었다.

 

성장하는 강국이 박해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극을 개방하고 관용의 제도를 세계 모든 나라에게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미국 시민권을 외국 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461]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고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 또한 다른 사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467]

 

미국이 자국의 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국이 지배하는 전 세계 수십억의 사람들과 공통의 목적의식, 혹은 공통적의 정체성을 창조하고 다를 사람들에게 미국의 성공과 지도력에 더 많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이 집착의 문제는 오늘날 미국정치에서 손에 꼽히는 몇 가지 논쟁점의 근원이면서 결과다.  이민자의나라라는 유산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은 국경에서의 출입통제가 용이하지 않고 테러리즘의 위협과 남미출신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이 일고 있다. [468]

 

미국이 이민을 제한할 권리도 있고 그럴 필요도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한없이 많은 외국인들에게 수문을 열어주거나 그들 때문에 국가 안보를 희생시키는 것은 현정한 이민정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미국 국경을 폐쇄하는 지나친 대응은 세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것이다. 외국인 혐오감을 조성할 수 있다.

이미자들을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몰고 가거나 미국의 성공원인을 앵글로색슨과 개신교의 가치관에서만 찾으려는 시도들은 그릇된 것이고 또한 위험한 것이다[469].

 

둘째,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은 미국의 비미국인 간의 호의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개방적인 이민 정책은 온갖 배경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미국의 수용적인 태도를 알리는 신호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측면인데 과거의 세계를 제패했던 모든 강국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인적 자본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렀기 때문이다.[470]

 

미국의 초기 역사와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오늘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숙련도와 훈련도, 그리고 노하우를 갖춘 이민자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인 유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최첨단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이민정책의 유일한 강령으로 삼고 있는 독일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미국은 모든 계층의 이민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선착순 혹은 추첨방식의 이민 경로를 대폭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472]

 

미국은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외국인들에게 존경 받는 행정적, 군사적 직위를 주지는 못하지만, 미국 기업내의 직위를 줌으로써 존경과 수익을 보장 받을 수 있게 한다.

미국 소유 기업에서 높은 보수의 일자리를 확보한 외국인들, 특히 관리자나 임원이 된 사람들을 고려하면, 미국의 다국적기업은 분명히 미국의 국경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번영 덕분에 이익을 보고 있다는 느낌, 미국의 계속적인 성장에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미국의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473]

 

미국은 제국을 건설하는 자멸적인 모험을 피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나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 될 수 있는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474]

 

미국은 이런 모든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과 조화를 이룬 다각적인 활동을 육성할 방안을 찾아야 하다.  미국은 국제연합의 틀밖에 있으면서도 생각이 비슷한 다른 나라들과 쌍무적 혹은 다각적인 협정을 진행하거나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조할 수도 있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다자주의를 굴복이 아니라 기회로 여겨야 한다. 만일 미국이 스스로 세계적인 문제들에 원인을 제공했음을 인정하고 그 문제들이 해결될 경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국제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들에 대차한다면 미국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적이 초강대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적의식까지 창조할 수 있다.[475]

 

미국으로서는 단순한 강국이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 없다. 결국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이변이고 이득과 함께 희생까지 떠 안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여러 측면에서 전략적 관용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미국이 건국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재발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면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의 초강대국, 그것도 강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기회,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476]

 

 

내가 저자라면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군사력을 갖고 있으면서 국제사회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초강대국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경쟁자도 없이 미국이 그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9.11이후 돌아선 불관용을 관용으로 변화해야만 미국이 미래에도 초강대국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의 지위를 유기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현재의 미국의 겪고 있는 문제와 추구해야 할 바를 과거 역사의 최강대국의 사례를 들고 논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역사 속 강대국들의 흥망상쇠의 원인을 관용과 불관용의 측면에서 조명해보고 현재 강대국인 미국의 나아갈 바를 살피고자 하였다.

논지는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으며 모든 초강대국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재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중에서 핵심은 상대적인관용이다. 세계적인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절대적인, 영원불변의 기존으로 볼 때 관용적이나 아니냐가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나 아니냐 하는 것이다.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을 말하면, 불관용은 조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아케메네스, 로마, 중국의 황금기 당, 몽골, 네덜란드, 대영제국 등 역사를 되돌아 보며 세계적인 패권국가에 근접했던 이 제국들이 관용에 의지 할 때 권력이 성장하고 불관용에 의지할 때 권력이 쇠퇴했다는 것을 제시한다.

 

저자는 후기에서내 가족이 번영하고 우리 방식대로 변화하면서 미국인이 될 수 있게 해준 미국의 관용에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책을 통해 미국이 자신의 성공비결 관용을 지금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의 이민자들을 수요하는 관용의 정책의 수혜자로서 현재 군사력을 내세워 다른 국가를 제압하고 국제적인 반감으로 인해 테러의 위협이 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과거의 제국들이 관용정책일 때는 번창하였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불관용의 정책일 때는 사회가 불안해지고 쇠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미국도 초대강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는 이민 경로를 대폭적으로 개방하는 관용 정책을 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정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일방적인 군사력 사용보다 다국적 기업의 육성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주고 세계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다각적인 국제활동을 통한 관용을 요구한다.

 

이 책은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임에도 고대 제국의 관용, 계몽화된 관용, 현재인 세계 제패의 미래로 크게 3부로 나누고 12장으로 구성되어 큼직한 덩어리 속에 세부 내용을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근대 이전의 초강대국들, 최초의 패권국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과 로마제국, 중국의 황금기 당 제국의 종교와 인종에 대한 관용을 살폈고 2부는 계몽화된 관용에 관한 내용으로 계몽주의 이전의 대표적인 유럽 국가인 중세의 스페인을 간단히 고찰하고 새로운 관용의 개념을 끌어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성장을 이룬 최초의 유럽 국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에 관한 것이다. 1579년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포함시켰다. 네덜란드연방 공화국은 순식간에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 난민들을 유인하는 자석이 되었다. 서양에서 눈을 돌려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중국의 명나라와 거대한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을 간단히 살펴보고 서양으로 되돌아가서 대영제국을 고찰한다.

3부 현대를 살펴본다. 애송이 식민지였던 미국이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았다. 또한 불관용과 순수 인종주의라는 원칙 위에 세워진 두 강대국, 나치 독일과 국제주의 일본에 대하여 고찰하여 관용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며 뒤에 강조하게 되는 미국의 미래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해 준다. 11장에서 미국의 주요한 경쟁자들로 중국과 유럽연합, 인도를 새로운 도전자로 보고 이 나라의 장단점을 짚어 본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세계 강대국이 될 수 있는 면모는 갖추었으나 너무 민족주의거나 유럽통합의 경우 내부 통합적 관계로 강대국이 되기 어려움이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관용이 부족한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이라는 카드가 중국을 강대국으로 변모 시킬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중화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중국인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 같다. 마지막 장에서 미국의 21세기에 시사점을 던져주고 과거의 교훈을 따져보고, 특히 미국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진로를 살폈다.

 

결국은 3부 내용, 세계적으로 패권을 장악한 미국의 원동력을 찾고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미래에 대한 제안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고대 역사 속의 관용과 불관용의 사례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세기를 넘나들고 대륙을 오가는 역사적 제국들의 성장과 몰락을 관용과 불관용이라는 논지로 하나의 틀에 맞추어 풀어간다. 이러한 하나의 틀로 역사를 풀어가도 마땅한 것인지 이렇게 함이 역사에 왜곡은 없는 것인지 세계사에 밝지 않는 나로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참으로 명쾌한 주장이다. 많은 참고문헌이 말해 주지만 각 나라의 역사 속 고찰이 생생하고 제국의 종교, 문화, 인종과 주변정세를 파고 헤쳐나감에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 페르시아와 로마, 네덜란드를 고찰 할 때는 마치 큰 배를 타고 크루즈 여행을 하는 듯 했고 몽골을 고찰할 때는 기마병이 되어 초월을 누비는듯했다. 그만큼 저자의 역사를 아우름과 고찰이 흥미진진하다. 세계 국제 정세를 논하는 책이지만 세계사에서 제국의 흥망성쇠만을 묶어놓은 역사서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저자가 진정 바라는 것은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무거운 짐을 떠안고 가기보다 단순한 강국의 신분으로 남아 기회와 역동성을 제공하는 미국으로 남기를 소망함을 느꼈다. 또 초강대국으로 제국의 미래에 대한 제안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이 아니라 관용이라는 자체에 인간적인 면을 느끼며 안도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이것이 상대적인 관용이겠지만 제국 되기를 떠나서 우리나라, 우리 사회, 우리주변, 나 자신의 관용을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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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3.08 23:46:38 *.168.109.134
류춘희 선생님 4주간의 레이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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