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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9일 02시 1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에이미 추아 (Amy Chua),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계 미국인 2세다.

그의 부모 레온 추아와 다이애나 추아는 필리핀에서 자란 중국인이며 그녀의 아버지 레온 추아는 1961년 MIT로 유학, 굳은 의지와 근면함으로 인종과 언어를 넘어 UC버클리 대학의 교수가 된, 이민자의 나라, 기회의 땅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달성한, 성공한 인물이다.


어릴 적, 그녀의 부모는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에게 자신들이 전통뿐 아니라 혈통까지 이어받은 중국인임을 절대 잊지 말라는 사실을 늘 주지시켰다고 한다. 아버지는 집에서 절대 영어를 쓰지 못하게 했고 그래서 저자는 중국어 억양이 섞인 영어발음 때문에 놀림감이 되기도 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웅장한 중국역사와 중국문화의 우월성에 대해, 중국 혈통의 순수성에 대해, 그리고 그 혈통을 흐리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에 대해 늘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은 자신들의 존재에는 늘 모순이 존재했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했으며, 그녀는 핏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역사와 문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늘 서성이고 있다고 말한다. 또 그녀는 중국의 서예, 과학, 시, 경극, 철학, 자연주의, 유교에 매력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어릴 적 자신이 겪었던, 제3세계라는 절망적인 중국의 현실과 이 모든 것이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레온 추아의 카오스 이론 연구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면서 아버지를 따라 세계 곳곳을 여행하기도 했으며, 런던, 뮌헨, 로잔에서도 공부했다. 그 후, 198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듀크, 스탠퍼드, 뉴욕 대학교를 거쳐 2001년부터 현재까지 예일대학교 로스쿨에서 국제 계약법 담당 교수로 있다. 그의 여동생들도 예일대, 하버드대 출신 의사와 변호사 등으로 주류사회에 편입해 활동하고 있고, 그녀의 남편인 제드 러벤펠드 예일대 법대 교수는 유대계 미국인으로, 2006년 첫 출간돼 전 세계적으로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살인의 해석>의 저자이기도하다.


그녀는 1990년 초반에 멕시코의 시장 민영화를 컨설팅 했으며, 1998년에는 아시아 경제 위기 동안 세계은행에서 일하기도 했다.


추아 교수는 2003년에 세계화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불타는 세계>를 출간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불타는 세계>는 중화제국에 대한 추아가문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지극히 사적인 여행기로부터 시작되는데 친가가 속한 동남아 화교집단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세계화의 필연성을 분석했다. <불타는 세계>는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2003년 올해의 책’이 되었으며, 뉴욕 타임스는 “시장과 민주주의 확산이 세계평화와 번영에 필수적이라는 오늘날의 교의에 가장 극적인 반론”을 펼친 책으로 호평했다.


추아 교수는 그녀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한 지식인이면서, 미국의 엘리트 사회에 진출한 자신의 모습에서, 부모님의 모습에서, 가족의 모습에서 미국의 관용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2007년에는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를 시작으로 동양의 당과 몽골, 서양의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미국에 이르기까지 2500년 동서양 제국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의 제국인 미국의 일방적인 대권과 오만한 정책을 비판하고 미래의 제국을 예견한 책 <제국의 미래>를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녀는 제국의 역사에 관한 도발적인 내용을 담은 이 책의 출간으로 미국의 지성계를 뒤흔든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국제경영과 인종갈등, 국제관계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정계와 제계, 그리고 학술계를 대상으로 활발한 강연을 펼치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이 책은 초강대국을 다루고 있다. 분명히 밝히면, 단순한 대국이나 초강국이 아니라, 초강대국에 관한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강대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축적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극소수의 사회들(역사 속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사회들)을 이르는 것이다. (P6)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해당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모든 초강대국들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종교적?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쇠퇴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관용이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은 결국에는 극적인 변화 지점을 건드려서 반복과 폭력을 유발했다. (P7)


내가 이 책의 취지에 맞추어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취급할 나라 혹은 제국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단순히 특정한 한 지방 혹은 지역에서의 우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P8)


한 사회가 한 지방이나 지역이 아닌, 전 세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군사적 경제적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있어야만 한다. 어떤 역사적 상황이라고 해도, 세계 유수의 인적 자본이라는 것(지성이든, 신체적 강인함이든, 기술이든, 지식이든, 독창성이든, 연결망이든, 상업상의 혁신이든, 기술적인 발명이든 그 형태는 관계없이)은 어느 한 장소나 어느 한 인종 혹은 어느 한 종교 집단 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회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배경을 따지지 않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 (P9)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인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P10)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 세계적인 패권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절대적인, 영원불변의 기준으로 볼 때 관용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하는 것이다.

관용이 세계 제패에 이르는 충분조건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P11)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말하면,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P12)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559년경 키루스 대제가 세우고 2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다양한 문화와 개방적인 종교를 갖추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던 역사상 최초의 패권 국가였다. (P34)


 키루스는 사트라프 치하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이 고유의 신들과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했다. 다양한 언어를 허용하여 아람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이집트어, 그리스어, 리디아어, 리키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그는 각지의 법률을 성문화했고 각지의 행정기관을 적절하게 유지했다. 정복지의 고위 관리들이 아케메네스 치하에서 관직을 유지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키루스의 종교적 관용일 것이다. 그는 피정복민의 사원, 종교의식, 그리고 신들을 놀라우리만큼 존중했다. (P39)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의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 정책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키루스는 해당 지역의 신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P43)


키루스와 후대의 왕들과, 오늘날, ‘인권’으로서의 종교의 자유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관용은 그저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뿐이다. (P44)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리우스 대제 치세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리우스는 약 40년(대략 기원전 522년~486) 동안 통치하면서, 페르시아의 영토를 인도까지 넓히고 그리스에 발판을 강화했으며  동유럽까지 손길을 뻗었다. (P45)


그는 제국의 다언어 문화를 존중했다. 키루스와 마찬가지로 피정복민에게 페르시아의 신들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P47)


다리우스와 그의 통치를 받는 사트라프들은 해당 지역의 종교 예식과 신을 대단히 존중했다. “피정복민의 지배층은 대부분(이집트는 예외일 수 있겠지만) 페르시아 왕을 이방의 통치자나 압제자로 보지 않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사회질서를 지켜줄 인물로 보았다.” 다리우스가 이러한 관용적인 정책으로 얻은 이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피정복민들을 죽이거나 ‘페르시아화’하는 데 자원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기술과 재능, 자원을 이용했다. 그것이 다리우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제국의 수도들을 건설했던 비결이었다. (P48)


제국을 이루는 다양한 민족으로부터 최고의 인력을 동원하는 것은 다리우스만이 아닌 아케메네스 왕조의 모든 제왕들이 보여준 특징적인 전략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관용이야말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단을 꾸릴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이었다는 점이다. (P49)


아케메네스 왕조가 200년 동안 전례 없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관용 정책 덕분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인종이나 종교에는 개의치 않고 제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들, 사상가들, 노동자들, 전사자들을 활용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력과 국력의 원천으로 변화시켰다. (P52)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 후기가 불관용, 불안, 폭력의 증대라는 특징을 보인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 논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키루스와 다리우스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점이다. (P57)


페르시아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현대 국가들과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정체성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속히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종교나 언어, 또는 문확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피정복민들은 대부분 제국에 대한 특별한 충성심을 느끼거나 제국에 소속된 것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서기 4세기에 로마제국의 피정복민들은 제국에 대한 특별한 충성심과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에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의 규범을 옹호하게 할 만한 특성이 없었다. (P58)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계ideology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 (P59)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로마제국은 하나의 관념idea이었다. 로마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다. (P68)


로마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의 새로운 정점을 상징했다. 로마는 과학, 문학, 예술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1000년이 넘도록 이 분야에서 로마를 앞지르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P69)


페르시아제국이나 다른 고대의 제국들과는 달리, 로마제국에는 각 지역의 지배층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상한선이 없었다. 로마에서는 제국의 각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심지어는 황제가 되기도 했다. (P71)


최고 절정기의 로마는 “야만인이나 미개한 민족” 출신도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제국의 권력과 명성에 한 몫할 수 있었던 독특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P72)


로마제국은 관용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P73)


대제국 로마는 경제와 자유무역, 시장개방을 일치감치 실현한 본보기였다. 제국의 경계가 확정되면서, 로마는 대규모 자유무역 지대가 되었다. 로마는 공용화폐를 비롯한 여러 요인 덕분에 경재 강국으로 번창했다. 자유롭게 흘러든 것은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로마는 또한 아주 외떨어진 제국의 변두리에서 뛰어난 기술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냈다. (P82)


로마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P83)


로마 사람들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 다양한 ’야만인들’을 모조리 제국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야만인들의 재능을 활용하고 그들이 로마 내에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부분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로마 제국의 가장 흥미로운 면모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P86)


로마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에게 로마는 ‘코무니스 파트리아communis patria' 즉 공동의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정복된 민족의 지도 계층을 멸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로마 문화를 권력과 특권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했다. 로마인들은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 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모든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더 나은 관습이 눈에 띄기만 하면 서슴지 않고 자신의 관습을 버린 덕분이었다.” (P87)


로마 문명은 하나의 문화적인 용광로였으므로, 각 지역의 지도 계층은 엄청난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로마는 그리스 로마 문하를 성공적으로 수출하면서도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로마는 언어학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대단한 다양성을 아우르고 있었다. (P88)


로마 문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로마 시민권이라는 유혹이었다. 로마는 정복한 적들을 평정하기 위해서 시민권이라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내밀었는데, 이 전략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국의 통합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덕분에 로마는 이미 알려진 세계의 변두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P89)


주목해야 할 것은 출신 민족과 인종은 로마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로마의 적극성과 능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전성기 로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에 대한 코스모폴리탄적 관점이었다. 기번에 따르면, “로마 세계에 보편화되었던 다양한 신앙은 주민들에게는 하나같이 올바른 것으로, 철학자들에게는 하나같이 그릇된 것으로, 관리들에게는 하나같이 유용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관용은 상호의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화합까지 탄생시켰다. (P93)


로마 사람들은 각 지역의 신들을 제국의 종교 제도 안에 통합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P95)


관용은 로마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 (P99)


‘지나친 다양성’은 로마 쇠퇴의 부분적인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불관용은 로마 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기독교는 새롭게 시작된 불관용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불관용 정책의 표적이었고, 나중에는 불관용 정책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P100)


로마 몰락의 원인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불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켜왔던 동화 및 통합 전략을 훼손시킨 데 있다. (P102)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을 끌어 모으고, 동화시키고, 보상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때 로마는 번영했다.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P106)


3장) 중국의 황금기 - 당

당 왕조는 중국이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며 정치적 패권을 휘둘렀던 시대이자 문학과 예술의 전성기로서 이후 왕조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당 왕조는 또한 당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개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나라, 인종적?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나나였다. (P110)


중국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당 왕조는 야만인의 피가 섞인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창건되었으면서도, 세계주의,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외개방이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보였으니, 참으로 모순되는 일이라 할 만하다. (P114)


다의 군사적 성공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방 민족의 활용이었다. 이방 민족의 군대를 통합하고, 이방 민족의 지도자들이 군대 지휘권을 유지한 채 제국에 편입된 영토를 다스릴 수 있게 함으로써 정벌군을 꾸렸다. (P117)


태종의 꿈은 중국의 황제이자 돌궐족의 칸으로서 중국인과 야만인을 다스리면서, 중국인과 야만인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P118)


태종은 돌궐의 병력과 중국의 병력을 결합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전역과 파미르고원 너머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지역에까지 당의 지배권을 확장했다. 유목민 병력의 후원이 없었다면, 태종은 이런 정복의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종은 재위 초기부터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P119)


당 왕조는 300개가 넘는 나라 및 지역들과 공식적으로 교류했다. 외교와 통상은 맞물려서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P120)


더구나 태종은 외국인들과 외국인 유력자들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태종은 외국의 종교에 대해서도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P122)


태종은 불교뿐 아니라 훨씬 더 먼 서역에서 외국인들이 가져온 생소한 종교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P123)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정복 사업과 활발한 외교 정책을 병행했다. 외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그의 치세에 절정에 달해서, 카슈미르에서 한반도, 이란에서 베트남에 이르는 비중국인 민족들이 당의 패권에 포섭되었다. (P127)


장안은 다양한 분위기가 뒤섞인 화려한 도시일 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명황의 치세에 문학과 예술, 역사 이론과 미학 이론, 그리고 특히 시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장안은 대제국의 훌륭한 수도를 넘어서는 공간이었다. 장안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세계적인 도시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장안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문명을 전파시키는 중추적인 도시였다.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에게 관대하고,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 관대했다. (P128)


관용은 당 제국의 엄청난 영토 확장과 영향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동시에 제국 쇠퇴의 씨앗이었다. 당의 몰락 원인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부여받은 한 외국인의 반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P135)


당이 채택했던 전략적인 관용 정책은, 당이 중국인이 아닌 피지배민에게 한족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당 제국은 그 덕분에 크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당 제국이 ‘야만인들’과 중국인들을 한데 묶어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P136)


위대한 당 왕조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중화의 일부로 여긴 적이 없었던 외국인들 때문에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당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755년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이었다. (P137)


안녹산의 난은 당의 쇠퇴를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8세기에 이르자, 타민족과 외래 사조에 대한 당의 관용은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할, 불안정, 그리고 폭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P138)


중국은 로마와는 달리, 중국 민족과 비중국 민족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고, 똑같이 매력을 끌 수 있는 공민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을 통합시켰던 지배적인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은 중국인 고유의 것으로 야만인들은 배제되어 있었다. 제국 안에서 균열이 나타나고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 비중국 민족이 점차 위협을 가하자, 중국인들의 타고난 불관용이 급격하게 끓어올랐다.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다양한 인종을 감싸 안던 당의 세계주의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P140)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칭기스칸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거나, 당대의 통치자들과 비교해보아도 대단히 관용적인 정책을 취했다. 유럽인들이 이교도들을 말뚝에 묶어 불에 태우고 있을 때, 칭기스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공표했다. 그는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포용하고, 초원지대 사람들을 갈라놓던 부족 간 장벽을 용의주도하게 허물고, 피정복민들 가운데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골라 공직에 임용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 (P147)


주목해야 할 점은 칭기스칸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정령신앙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절대적인 자유를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P155)


칭기스칸은 몽골족이 지니지 못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진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렸다. 칭기스칸은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성벽을 두른 난공불락의 도시들을 함락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공성장비를 만들 수 있었다. (P159)


칭기스칸은 중국 북부에서 기술자들은 물론이고 연대 단위로 투항해 온 병사들과 장교들을 데려왔고, 곡예사, 악사, 가수, 무용사, 봉제사, 약사, 통역사, 도공, 보석 세공사, 점성가, 화가, 대장장이, 의사까지 데려왔다. 칭기스칸은 여러 민족 출신의 학자들을 기용했다.

칭기스칸의 종교적인 관용 정책은 계속 유지되어, 제국 건설의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P161)


몽골족은 전투에서 잔인하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종교적 열정이나 편협함 때문에 곤란을 겪은 일이 없었다. 민족이나 종교를 따지지 않았던 몽골인들은 자유롭게 피정복민들로부터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P171)


몽골인들은 종교적으로 볼 때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개방적이었다. (P174)


‘야만적인’ 몽골인들은 다른 문화에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몹시 세계주의적이었다. 예술, 과학, 학문, 그리고 행정 능력이 취약했던 몽골인들은 편견 없는 자기 태도로 자신들이 정복한 문명 민족들에게서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냈다. (P177)


쿠빌라이는 몽골인들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교양 면에서 훨씬 우월한 중국의 피지배민을 통치하기 위해서 기이한 인종 혼합 정책을 채택했다. (P181)


쿠빌라이는 중국인들을 행정부의 고위직에서 추방한 뒤 이 직위들을 몽골인으로 채우지 않고 다른 외국인들로 채웠다는 사실이다. 중국 같은 복잡한 사회를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재능 있는 위구르인, 거란인, 페르시아인, 중앙아시아인, 그리고 유럽인들을 중국의 지방관과 재상으로 삼았다. (P182)


쿠빌라이의 통치 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맹목적인 배외주의가 아니라, 소수에 불과한 몽골의 통치 계급이 어마어마한 중국 인구에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안한 정치적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쿠빌라이의 이런 정책 덕분에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가 멋지게 통합되었다. (P183)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이 지배하던 지역 어디에서나 일관된 특징이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공식적으로는 물론 몽골의 평범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P188)


다른 석국의 몽골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몽골 통치자들 역시 선조들이 지켜왔던 종교적 중립성을 내던져버렸다.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마지막 10년간은 퇴폐적이고 혼란스러웠다. (P189)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은 단기간에 네 개의 큰 덩어리로 갈라졌고, 각 덩어리는 갈수록 편협해지고 종교적 광신에 사로잡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몽골제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P191)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종교 공동체들이 특이하게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비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좀 더 세계화된 태도를 보였다. (P196)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관용이었다. (P197)


상대적인 관용 덕분에 스페인이 거둔 영토 팽창과 제국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도 손에 넣었다. 중세의 스페인은 마지못한 것이기는 했지만 유대교도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덕분에 엄청난 재정적 수익을 거두었다. 그들은 세계의 다이아몬드 산업을 장악하고 국제 금융의 초기 발전 단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P199)


이단 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은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당사자들에게 끔찍한 죽음과 고통을 안겨준 것은 차치하고라도 스페인의 종교 박해는 엄청난 자원 낭비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P205)


관용은 세계 제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스페인 왕국의 불관용이 번영을 가로막고 스페인의 깊은 쇠락을 재촉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P206)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작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다. (P218)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17세기에 유럽 전역에 종교적인 분쟁과 박해, 그리고 광신적인 행위가 퍼져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관용적인 정책은 특히나 놀라운 것이었다. (P219)


네덜란드 사람의 관용에는 예리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공화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던 정치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경제적인 이익을 기대하여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 수단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네덜란드의 관용 정책은 대단히 효과적인 것이었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네덜란드 남부의 개신교도, 프랑스의 위그노교도, 독일의 루터파,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세파르디 유대교도, 유럽 동부의 아슈케냐지 유대교도, 그리고 영국의 퀘이커교도와 필그램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인 망명객들을 줄지어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 (P221)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이 5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경제 각 분야에서 패권을 장악한 데에는 이주민들이 엔진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계적인 무역,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P222)


16세기말 막스 베버가 말했던 ‘자본주의 정신‘을 네덜란드에 들여오는데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대거 유입된 개신교 상인들과 숙련 노동자들, 그리고 생산업자들이었다. (P225)


이주민들은 대부분 네덜란드 북부로 옮겨가서 암스테르담, 라이덴, 하를렘에 정착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신봉했다. 그 가운데에는 세련된 전문성을 갖춘 고숙련 직물 노동자들이 많았다. 1590년대에 이르자, 앤드워프에 살던 부유한 개신교 상인들과 생산업자들 대부분이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새로운 기술들, 상업의 폭발적인 번창, 그리고 온갖 종교를 가진 개인들에게 열려 있는, 경제적, 사회적 기회에 이끌려 네덜란드에 정착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네덜란드가 앤드워프를 대신하여 직물 가공 분야에서 유럽 선두에 섰다는 점이다. (P226)


풍부한 은과 성능 좋은 선박, 그리고 발트해 연안과 유럽 북부에 형성된, 어느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무역 네트워크 덕분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의 상인이자, 무역의 중개인, 유럽의 중개인”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투자 자본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의 유력 상인들은 자신들의 부에 위협을 느끼자, 아예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제쳐놓고 동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의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연합 동인도회사와 후일의 서인도회사였다. 이 두 회사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세계적인 식민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P227)


네덜란드의 해외 진출을 주도한 것은 종교적인 열정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제국주의에 연료를 공급한 것은 칼뱅주의가 아니라 이윤 추구였다. (P229)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높은 임금은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터키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P238)


17세기의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비할 데 없는 문화적, 예술적, 지적 독창성을 분출했다. (P240)


네덜란드는 “철학자들의 은신처”로 알려지게 되었다. (P240)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세 초기의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던 네덜란드는 영토의 팽창이 아니라 상업의 팽창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P241)


이러한 관용 정책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집단 가운데 일부를 좁은 네덜란드로 끄어들여,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어내고, 부의 측면에서 대륙의 경쟁자들을 크게 앞지르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 부를 이용해서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했다. (P242)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관용 정책과 진취적인 금융업자들과 현대적인 ‘사업 방식’을 영국에 수출했고, 이로써 영국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대신하여 다양한 이주민들과 종교 교파들에게 자유와 기회를 제공하는 특별한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P244)


네덜란드의 관용 정책은 사실상 ‘국내’ 정책이었다. 네덜란드가 국경 내에서 펼쳤던 주목할 만한 종교적 관용 정책은 해외 식민지에서의 인종적 혹은 민족적 관용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나 실론 사람들을 위대한 네덜란드제국의 충실한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애초에 그런 제국을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P245)


7장) 불관용의 덫 -오스만, 명, 무굴

위대한 이슬람 제국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적 관용이었다. 8세기의 이슬람 통치자들은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에게 자유로이 원하는 신앙을 믿을 수 있게 했는데, 이런 관용 정책은 한편으로는 교활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서의 민족”을 보호한다는 이슬람의 원칙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통 위에 세워진 오스만 제국은 철저히 계산된 관용 정책을 토대로 인종적, 종교적 구성이 매우 다양한 지역을 다스렸다. (P248)


오스만의 관용 정책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슬람교 개종자들에 대한 포용 정책이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어떤 인종, 어떤 사회 계층도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아스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P252)


오스만 사람들은 전략적 관용 정책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슬람교의 인종적, 민족적 관용은 오스만제국의 대단한 전략적 자산이었다.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개종자들을 포용하는 오스만제국의 관용 정책 덕분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협조적인 피지배민들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농사를 짓거나 군대에서 복무할 인구가 늘러났을 뿐 아니라, 재능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핵심 세력이 형성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상대적인 종교적 관용은 개종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 (P255)


유럽의 유대교도들은 또한 오스만제국에 과학적, 의학적 지식과 무기 및 군수품에 관한 새로운 기술을 공급했다. 많은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레바논의 마론파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 교파들 또한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금융업, 조선업, 모직물, 담배 제조업, 그리고 사치품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P256)P


내란의 확산과 민족주의의 고조가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스만제국의 최후에는 험악한 불관용 형태가 발작적으로 벌어졌다. (P269)


몽골제국으로부터 통일된 나라를 물려받은 명의 황제들은 오스만제국과 유럽의 군주들이 다스렸던 피지배민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피지배민들을 다스렸다. 명대의 중국은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발명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 후진적인 유럽을 훨씬 앞서 있었다. 1421년에 이르러 명의 거대한 해군은 세계 모든 나라의 해군을 왜소한 난쟁이로 만들었다. (P260)


명의 거대한 선박들은 유럽에서 가장 큰 선박보다 400배나 많은 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P261)


15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쟁을 피했던 명왕조는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중국은 기술적인 면에서 서양에 뒤처졌고, 직접 발명한 것들조차 망각했으며, 유럽을 뒤바꾸어 놓은 것과 같은 과학혁명 혹은 산업혁명을 이룩하지 못했다. 명 왕조는 또한 거대했던 해군을 방치하여 고사시키고, 해외 진출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여러 대양에 대한 패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P265)


영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제국은 칭기스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전성기의 무굴제국은 인도 아대륙과 지금의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일부를 다스렸다. (P266)


무굴제국의 황금기를 이끌던 악바르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근대 이전 역사에서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관용 정책을 펼쳤던 통치자로 손꼽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P267)


아바르가 선택한 해결책은 한편으로는 외교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문화의 결합 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P268)


악바르는 온갖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후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악바르 자신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지만, 자신의 조정을 학식과 재주가 넘치는 사람들로 채우려고 애를 썼다. (P270)


악바르는 여러 종교의 교리를 비교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토론회 참석자 가운데에는 이슬람교의 성직자, 힌두교 성직자, 자이나교 수도승, 파시교 성직자, 그리고 포르투칼 식민지인 고아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관용적인 분위기를 타고, 펀자브 지역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여러 요소들을 혼합한 시크교가 출현했다. 대중문화에서도 여러 가지 관습들과 의식들과 신화들이 혼합되었다. (P270)


악바르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면 그는 저항하는 파벌들이 힌두교에 찬동하는 이슬람교에 찬동하든 개의치 않고 똑같이 잔인하게 진압했다. (P271)


그의 가장 큰 실패는 이슬람교와 힌두교,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요소들을 통합하여 ‘신성종교’라는 새로운 ‘신앙 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P272)


아우랑제브는 이전에 시행되던 종교적인 관용 정책들을 뒤집고 제국 전역에 샤리아(이슬람 법률)를 강요했다.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은 제국에 재앙을 몰고 왔다. 결정적인 사건은 힌두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상업이 위축된 것이었다. 게다가 아우랑제브의 이슬람교에 대한 광신은 무굴제국의 허약한 종교적, 정치적 통일성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P275)


8장)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영국

영국의 부상은 이 책의 논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 1689년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 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했다. (P280)


위그노교도들은 장인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부유한 금융업자들과 귀족들을 포함해서 사회의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P287)


위그노교도인 시계 제조공들 덕분에 런던은 세계적인 시계 제조 중심지로 변모했고, 위그노교도들은 종이, 유리, 레이스 장식, 인쇄, 금속 가공 분야의 기술까지 들여왔다. 위그노교도들은 영국에서 번영하면서 차츰 영국 사회에 동화?흡수되었다. (P287)


영국에서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공헌만으로 영국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바로 영국에 업청난 경제력, 지적 활력을 공급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었다. (P288)


잉글랜드의 정치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식민지 관련 업무를 맡기자는 전략적인 결정을 내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합병 이후에 “잉글랜드인들을 섬기는 노예신세”가 될 거라는 불길한 예상과는 달리, “전례 없는 인신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 (P293)


주목해야 할 사실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1830년대에 스코틀랜드는 철강 산업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고, 스코틀랜드의 조선 기술은 영국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인 증기 엔진은 영국의 산업가인 매슈 볼턴과 동업 관계에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 상대가 없는 해군력과 상업력, 그리고 금융력에 있었다. (P295)


특별히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영국에서 손꼽히는 금융가, 상인, 거부, 장군, 총독 가운데 대다수가 잉글랜드인이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과학 기술 분야에서 획기적인 약진을 이뤄낸 것은 스코틀랜드인들만이 아니었다. 파종기를 발명한 것은 잉글랜드인인 제스로 툴,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북직기와 수력 방적기, 정방기를 발명한 사람들 역시 잉글랜드인이었다. (P296)


19세기 대영제국의 관용은 단순한 전략적인 계산을 넘어선 것이었다. 영국은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계몽주의적인 관용의 개념은 채택하고, 다양한 인종 집단과 종교 집단에게 본토박이 잉글랜드인과 똑같은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가진 대영제국의 정식 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브리튼Britain‘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민족적, 인종적 경계를 뛰어넘는 개념이 되었다. 각기 고유의 국가적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세 개 이상의 다른 민족들, 즉 잉글랜드인, 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을 통합시킴ㅇ로써 탄생했다. (P298)


초기 영국의 정체성은 개신교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영국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종교의 특성은 불관용의 씨앗을 키웠고, 영국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P301)


아일랜드의 카톨릭교도들은 영국이 19세기에 새로 확립한 ‘관용’ 정책에 감동하지 않았다. (P303)


아일랜드에 대한 태도는 비극적일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카톨릭교도들에게는 같은 방식으로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영국인들은 점차 스스로를 식민지 주민들과는 달리 ‘백인’이며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카톨릭교에 대한 적대적인 편견이 아일랜드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인종적 오만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다.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제국의 보석’ 인도였다. (P305)


사티 금지법은 영국이 인도의 종교적 관습에 강경하게 개입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P309)


영국의 가장 큰 실수는 “종교에 간섭한 것”과 “사람들의 습관과 희망에 어울리지 않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P314)


한편으로 영국은 인도의 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P316)


영국식 교육은 양날의 칼이었다. 갈수록 많은 인도인들이 교육과정에서 배웠거나 해외에서 직접 보았던 각종 자유를 요구했다. 항의, 행진, 파업, 정치적 선동이 인도 아대륙을 휩쓸었고, 이따금 폭동이 일어났다. (P320)


영국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도를 근거지로 한 영국인 산업 공동체는 정반대로, 즉 극단적인 불관용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P322)


전성기 때 동인도회사는 인도인 기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맹을 맺었지만, 20세기의 영국 출신 이주민들은 토착 기업과의 협조를 고집스레 거부했다. 이런 공격적인 불관용 전략은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P323)


과거의 패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정책으로의 극적인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영국이 쇠퇴한 것은 국내에 불관용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325)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 제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소요된 막대한 비용, 정부 복지 예산의 급증, 엄청난 외채 부담, 파운드화의 평가 절하, 산업의 상대적인 정체,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증가,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에 대한 적의, 민족주의자들의 반란, 그리고 인종 혹은 종교와 관련된 폭동 때문에 빚어지는 비용의 증가 등을 꼽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영국이 쇠퇴한 것은 해외에서 관용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P326)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이 그랬듯이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 자원에 있다. (P331)


‘이민자들의 나라’는 피부색이 하얗고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 색슨족에 의해 세워졌고, 여러 세대가 흐르는 동안 정말로 이들의 나라라고 정의되었다. (P332)


미국이 인종적 차원과 민족적 차원에서 역사상 손꼽히는 관용적인 사회가 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미국의 지위가 이렇게 상승하게 된 것은 미국이 끊임없이 다양한 집단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흡입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후일에는 경쟁국과 개발도상국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발전과 기술혁신을 창출했고, 이것을 토대로 유례없는 최고의 부와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했다. (P333)


청교도들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전혀 너그럽지 않았다. 유럽에서 박해를 피해온 청교도들은 식민지 미국에서는 박해자가 되었다. 청교도들은 스스로를 선민, 즉 ‘참된 종교의 전파자’라고 여기고, 카톨릭교도와 유대교도뿐만 아니라 성공회교도, 퀘이커교도, 침례교도, 그리고 자신들의 신조에 따르지 않는 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P334)


그러나 차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700년대와 1800년대에는, 유럽 전역으로부터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상업이 번창하고, 여러 가지 이단적인 사상과 새로운 종교 교파가 유입되었다.

상업은 종교적 관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기폭제였다. 유력한 상인들은 배척하는 풍조는 사업에 졸지 않다는 이유에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 (P335)


건국의 아버지들은 종교와 관련된 자유로운 선택이야말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분파 간 충돌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1791년에 채택된 수정헌법 1조는 의회가 국교를 채택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자유로운 종교 행사를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P339)


한마디로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요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종교적 관용은 미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와 영국에게서 물려받은 후 계속 확장시키고 확대시켜온 정책이었다. 18세기 말 종교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종교적 관용을 인종적 관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P340)


미국의 이민과 동화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아도 인종차별이 특징으로 부각된다. 미국 최초의 이주민들과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서부 혹은 북부 유럽 태생이었다. 그들은 새로 밀려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외모와 행동이 자신들과 흡사하면 흡사할수록 더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P341)


이주민 대부분이 유럽의 공자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습득한 경험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의 미국 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P346)


유럽의 무수한 ‘두뇌 유출’ 덕분에 19세기의 미국은 기술의 벽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관용은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은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였다. 미국은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적 유동성, 언어적 다원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인들의 온갖 경험에서 비롯한 재능과 진취적인 동기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미국에서는 기회가 하늘 끝까지 열려 있었다. (P347)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가져온 것은 노하우와 사업 수완만이 아니었다. 19세기 내내 농지를 경작하고, 철도를 놓고, 오지에 정착하고,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P348)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핍박의 역사이기도 하다. 미국은 원주민에게 기대지 않고도 영토를 확장하고 정복을 진행할 힘을 확보할 수 있는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원주민이 아니어도 인구를 증가시킬 방법이 있었고, 덕분에 엄청난 규모의 인구뿐만 아니라 우월한 기술까지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선택적인 관용의  냉혹한 본성이다. 미국은 유럽 출신의 다양한 대중들은 환영했지만,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은 학살하고, 차단하고, 내쫓았다. (P35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미국 사회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었을 뿐 이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 있었다. 둘째, 민주적인 정부 제도는 부패하기는 했어도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쥐어주었다. 셋째, 활발한 자유 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 밖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이민지가 되었다. (P353)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세계의 강국으로서 첫 번째 경험을 했다. (P354)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분위기는 일시적인 유예기간을 제공했고, 기왕의 이민 공동체들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 사회에 흡수되고 동화될 수 있었다. 미국은 다시 한 번 세계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P356)


전쟁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유례없는 경제 발전에 엄청난 연료를 공급했다. 대공황에서 벅어난 미국 산업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급격히 성장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최대의 상품 수출국이 되었고, 세계의 총제조업 생산고의 절반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서양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관용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이 초강국으로서 지위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이전의 개방적인 이민정책 덕분에 미국은 인력 면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P357)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민자들이 이루었던 혁명적인 기술적 약진이었다. 이것은 미국을 군사적으로 월등한 지위로 끌어올렸다. (P368)


미국은 세계최초로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재능 있는 이민자들의 유입이 세상을 바꾸어놓을 만한 과학적 발전과 군사력의 우위로 변형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P359)


1990년과 1991년에 비교적 가벼운 침체기를 겪은 미국 경제는 다시 급등세로 돌아서서,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을 통해 엄청난 소득을 올렸고, ‘세계 역사상 최대의 부를 창조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나라이다. 미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심지어는 문화적으로도 경쟁할 상대가 없었다. 세계에는 새로운 초강대국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P366)


벤처 자본주의는 전략적인 관용이 20세기 후반에 창출해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의 벤처 자본주의가 이런 비상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배경을 가졌든, 가난하든 부자든, 백인이든 소수 집단이든, 본토박이든 이민자든 가리지 않고, 젊은 과학자들과 발명가들, 그리고 기업가들에게 품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엄청난 유인을 제공했던 관용 정책 덕분이다. (P370)


20세기의 마지막 1o년 동안 그로브를 포함해서 수많은 이민자 출신의 성공 사례들이 미국에 부를 긁어 들이고 미국을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 강국, 기술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P372)


다시 말해서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부상한 데에는 첨단 기술 경쟁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P374)


10장)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나치가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은 아리아인은 우월하며 “지배자 민족”으로서 세계의 통치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확신이었다. 나치는 유대인을 비롯한 여러 집단을 박해함으로써 부를 끌어 모으고, 독일의 군수품 확보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P380)


“나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군사적 승리보다 인종적 증오를 우선시했다.” 뿐만 아니라 나치는 수백만 명의 피정복민과 수십만 명의 독일 국민을 살해함으로써 수많은 인력을 놓쳐버렸다. 수많은 과학자들을 잃어버렸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미국은 바로 그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다. (P382)


히틀러는 영토를 병합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피정복민을 통합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P383)


나치는 서유럽에서도 협력 세력을 구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탐욕에서 비롯한 불관용과 잔인성 때문에 이 가능성을 날려버렸다. (P385)


일본은 나치와 마찬가지로, 피정복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목적은 해당 지역의 자원들을 뽑아가고, 원주민들을 가장 위험하고 천한 일에 동원하고, 정복한 영토를 인구가 과밀한 일본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데 있었다. (P392)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에게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힘을 안겨준 이데올로기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계 제패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추구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인종적 우월성과 인종 청소 따위의 이데올로기들은 청소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고, 그들로부터 귀중한 인적 자본을 확보하는 데에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관용뿐이다. (P399)


11장)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방식의 전략적인 관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관용의 방식은 미국이 사용하는 관용의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언뜻 보기에는 관용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관용의 방식이야말로 이 나라들의 두드러진 성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P401)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하나같이 깨닫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략적인 관용의 성공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을 단일한 정치적 정체성 안에 소속시키고 통합시켜온 것이다. 중국 문명 자체가 다양한 문화의 거대한 융합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언어적으로 심한 차이”를 보이며, 복식, 관습, 의식, 종교 면에서 심한 이질성을 가진 “복수의 집단들이 오랫동안 거주해온 땅”이다. (P405)


중국은 다양한 집단들을 정복하고 합병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나라다. (P406)


중국은 거대한 인구가 지닌 에너지와 재능을 이용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인간 재능의 미개척 분야에서 최첨단의 지위를 차지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까닭은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선수를 치고 한참을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어떤 시대가 된다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숙련되고 가장 진취적인 사람들이 모두 한 지역에서, 혹은 한 민족 안에서 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어떤 사회가 지역이 아닌, 세계를 제폐하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인적 자본을 유인하고 그들의 충성심과 동기를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 (P410)


중국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이민자 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회이다. 그들은 중국 국민이 되려는 의지가 없고, 중국 정부 역시 그들을 국민으로 받을 생각이 없다. 지금 중국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정부는 그들을 중국 사회에 통합하려 하거나, 그들에게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여기라고 권장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중국은 서양을 비롯한 모든 곳으로부터 최고의 과학자들, 기술자들, 사상가들, 그리고 혁신가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될 수 없다. (P415)


나의 논지를 따른다면,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은 세계 일류의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제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P418)


유럽연합의 영토 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 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한다. 이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 (P421)


유럽연합은 새로운 유형의 각종 자유와 경제적 유인책을 동원하여 ‘나라들’을 유인하고 있다. 유럽 사회는 복지제도와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미국보다 훨씬 우월하며 훨씬 너그러운 관용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럽 사회가 미국 사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P422)


인권을 존중하고 “다양속의 통일”을 지향하려는 유럽연합의 태도는 유럽의 새로운 도덕적 민감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자유 시장의 이윤 추구 논리를 따른 것이다. (P423)


유럽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이다. 유럽의 관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려는 전략일 뿐이지, 제3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 국가를 미국과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다. (P424)


유럽연합의 출현을 전후로 한 수십 년간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민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는 몹시 적대적이었다. (P425)


종교적 색채가 훨씬 덜한 서유럽 사람들을 이슬람교를 현대 유럽의 계몽주의적 정체성에 잠재적인 요소로 여기고 있다. (P427)


유럽의 관용은 이슬람교라는 잠재적인 장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또한 유럽 내부에 있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슬람 공동체들은 격화되는 민족적, 종교적, 인종적 갈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거의 모든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이런 문제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P428)


유럽연합은 외관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중한 인적 자본을 세계 전역에서 유인하여 활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P430)


인도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인도가 세계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인도는 미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이다. 인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용의 승리를 의미한다. (P437)


인도는 미래를 낙관할 만한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인도는 다음번 경제 성장을 이끌 준비가 된 학위 보유자들을 대거 확보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소프트웨어, 정보 기술, 미디어, 광고, 그리고 볼리우드 영화 산업 등 개인의 독창성과 재능에 크게 의존하는 부문이 크게 번차하고 있다. (P440)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똑똑한 인재들의 인도 이주를 유도하려면 인도는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들(농촌 지역의 궁핍, 질병이 만연한 도시 빈민촌, 뿌리 깊은 부정부패, 엄청나게 높은 산모 사망률 등)을 극복해야 한다.

초강대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P441)


12장) 제국의 미래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초강대국의 의미는 수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가장 단순한 관점에서 보면, 정복으로부터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변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내가 ‘접착제‘라고 표현했던 문제에 직면한다. 세계 제패의 본질이 변화된 오늘날에도 미국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던 접착제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21세기 미국의 권력에 대해 전망할 수 있는 열쇠는 이런 옛 것과 새 것의 결합에 놓여 있다.

미국의 세계 제패는 초강대국들의 역사에서 기나긴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P449)


존 스틸 고든의 말을 빌리면, “예전에 세계가 로마화 되었던 것처럼, 지금의 세계가 급속하게 미국화 되어가고 있다면, 그 까닭은 우리가 지닌 무기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원하고 그것을 가질 목적으로 자진해서 우리의 행동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영어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우세한 언어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결정적인 힘”은 17세기의 네덜란드연방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군사력에 있지 않고 부에 있다.”

부를 창조하는 가장 큰 동력은 약탈과 몰수가 아니라 교역과 혁신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또한 한 사회가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효과전인 방법이 정복이 아니라 이민으로 대체되면서, 전략적인 관용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P454)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로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일 뿐 아니라, 보편 선거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국가로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다. 이것은 우연히 나타난 결과가 아니다. 결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는 국력과 자유의 원천일 뿐 아니라 국외자들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매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과거의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이 그러했듯이, 민주주의 역시 미국에게 한계를 지우는 요소이다. (P455)


로마는 피정복민들을 로마제국의 일부로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미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의 주민들을 자국의 국민, 자국의 시민으로 만들려는 의사도 없고, 그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 (P456)


그러나 미국의 ‘민주적인 패권’은 반미주의의 만연과 폭발이라는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미국이 처해 있는 곤경이다. (P457)


미국은 국경 내부에서는 인종적,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고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배경의 개인들을 미국인으로 통합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인들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줄 정치적인 접착제는 미국의 국경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P458)


성장하는 강국이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국을 개방하고, 관용의 제도를 세계 모든 나라에게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패권 국가가 미국 시민권을 외국 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P461)


앞으로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접착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자국의 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국이 지배하는 전 세계 수십억 사람들과 공통의 목적의식, 혹은 공통의 정체성을 창조하고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의 성공과 지도력에 더 많이 개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P468)


한없이 많은 외국인들에게 수문을 열어주거나 그들 때문에 국가 안보를 희생시키는 것은 현명한 이민정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미국 국경을 폐쇄하는 지나친 대응은 잘못된 것이다. (P469)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은 미국과 비미국인 간에 호의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개방적인 이민정책은 온갖 배경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미국의 수용적인 태도를 알리는 신호이다. 유학 비자 프로그램과 같이 젊은 외국인들을 일시적으로 미국으로 유인하는 프로그램 역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P470)


과거에 세계를 제패했던 모든 강국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인적 자본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P471)


21세기 미국의 이민정책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미국의 초기 역사와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오늘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숙련도와 훈련도, 그리고 노하우를 갖춘 이민자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유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P471)


미국은 모든 계층의 이민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선착순 혹은 추첨 방식의 이민 경로를 대폭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 (P472)


아웃소싱되는 일자리들이 모두 한결같이 미국이 필요로 하는 접착제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 소유의 기업에서 높은 보수의 일자리를 확보한 외국인들, 특히 관리자나 임원이 된 사람들을 고려하면, 미국의 다국적 기업은 분명히 미국의 국경 밖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번영 덕분에 이익을 보고 있다는 느낌, 미국의 계속적인 성장에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미국의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P473)


미국은 여러 나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인 문제들에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환경보호는 공동 행동을 필요로 하는 대표적인 문제이다.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의 상호 협조가 필요하다. (P474)


또한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이와 비슷하게 국제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물자와 인간이 전례 없는 규모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일국의 조치만으로 조류 독감과 같은 전염병에 대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국은 이런 모든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과 조화를 이룬 다각적인 활동을 육성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P475)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축적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초강대국들,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를 시작으로 당과 몽골,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 이르기까지, 2500년 동서양 제국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통해 관용이라는 키워드를 도출해내고, 이들 각각의 나라들이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중국의 명나라, 거대한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과 무굴제국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불관용과 순수 인종주의라는 원칙 위에 세워진 두 강대국,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또 현재 쇠락해가는 미국의 주요한 경쟁자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 유럽연합, 인도의 출현을 통해 21세기 초강대국이 필요로 하는 조건과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초강대국의 성공비결이었다고 주장하는 관용,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관용은, 인권차원의 존중을 포함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용이며, 절대적인, 영원불멸의 기준으로 보는 관용이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보는 ‘상대적인’ 관용이다.


세계 최초의 패권 국가였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는 전략과 인종이나 종교에 개의치 않고 제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들, 사상가들, 노동자들, 전사들을 활용하여 민족과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고 통합?개발하는 전략적 관용을 통해 200년 동안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 패권 국가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히는 대제국 로마는 야만인이나 미개한 민족 출신도 정치과정에 참여시키고, 제국의 각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황제가 되기도 하는,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로마인들은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지 않았고,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오게 하는 매력적인 정책을 펼쳤다. 피정복민의 지도계층 남성들과 평범한 병사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러한 시민권에 부수되는 높은 지위와 특권을 주었고,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하지 않았으며, 각 지역의 신들을 제국의 종교 안에 통합하는, 종교에 대한 코스모폴리탄적 관점의 전략을 구사하여 제국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동화시키는 전략적인 관용으로 로마는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나는 저자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초강대국으로 다루고 있음에 주목했다.

고대의 초강대국들도 그랬지만, 전략적 관용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이 세계 제패에 이르게 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관용은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새로운,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고대 사람들에게 관용은 피정복민의 관습과 언어를 그대로 용인하고 그곳의 지도계층을 흡수하고 재능이 뛰어난 그곳의 장인과 전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 반면, 네덜란드의 관용은 네덜란드라는 땅덩어리를 피정복민들이 아닌, 유럽 전역의 박해받는 소수 종교적 난민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들의 피난처가 된 네덜란드는 이들 이민자의 기여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세계적인 교역과 산업,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고, 유럽 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여 의류, 모자, 가발, 시계 등의 제조업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유대인 이주자 스피노자, 영국에서 추방된 존 로크 등 위대한 사상가들이 정착한 네덜란드는 철학자들의 은신처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선박은 세계 구석구석을 다니며 유럽의 사치품 무역을 주도했고,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무역네트 워크 덕분에 네덜란드는 상업적 팽창과 엄청난 부를 쌓게 된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부상에 놀란 스페인이 네덜란드 선박의 입항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나, 많은 투자 자본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제쳐놓고 동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의 배를 보내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해운과 상업에서 전성기를 이루며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토의 팽창이 아닌, 상업의 팽창을 꿈꾸었던 네덜란드는 군사적 정복과 식민화의 역할이 크게 줄어드는, 새로운 관용의 개념을 끌어안고, 새로운 형태의 세계 패권에 이르는 길을 달렸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뒤를 이어 유럽에서 가장 관용적인 사회로 등장한 대영제국은 네덜란드의 계승자로서의 면모와 로마의 계승자로서의 면모를 함께 보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국내적인 관용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웃 국가에서 도망쳐온 이민자들을 끌어들이고, 이들이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비상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로마의 문명화와 팽창주의의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네덜란드와 달랐다. 대영제국은 정복한 방대한 영토 전부를 통치하고 장악하려 했다. 또한 인도를 비롯한 피정복 지역 출신의 병사 수십만 명으로 거대한 군대를 만드는 전략적 관용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제국 팽창의 고대적 공식을 복원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관용을 통해서 난민들을 비롯한 더 나은 기회를 찾는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이민자들에게 개방적인 나라였지만,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며, 이민자들의 나라로는 처음으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처음부터 미국은 이민 덕분에 인적 자본 면에서 다른 나라를 앞설 수 있었고,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데 있었다. 미국이 확보한 우수한 인적 자본은 산업 시대와 원자력 시대, 컴퓨터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편, 저자는 인종주의를 채택한 불관용 사회이면서도 부와 권력을 차지한 나라, 나치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 대해서는, 이 두 국가가 인종주의와 다른 지역의 피정복민들을 잔인하게 다루고 살해하는 만행으로 저항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앞으로 세계를 제패할 제국으로 중국, 유럽연합, 인도를 언급했다. 이미 국제무역 전쟁에서 현재의 초강대국 미국과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그러나 순혈주의와 민족주의, 이민자 사회와는 거리가 먼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연합은 이슬람교라는 잠재적인 관용에 부딪혀 여러 회원국가에 만연해 있는 이민자 반대운동이 유럽을 미국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강대국은 아니지만 오늘날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미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 수십개의 언어와 수천개의 종교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도를 향후 가장 주목해야 할 초강대국으로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그러면서도 이들 나라들이 강대국으로 등락을 거듭하는 가운데 초대강국은 존재하지 않는, 양극화된 혹은 다극화된 세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도 했다.


저자는 앞서 언급한, 각각의 제국들을 위대한 패권국가로 만들었던 관용이, 관용을 통해서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지금 쇠퇴의 길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한 원인을 관용의 상실에서, 불관용에서 찾고 있다. 성공한 제국들, 그들은 누구보다 더 다원주의적이고 관용적이었다. 독일과 일본의 실패 사례처럼 강력한 패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열쇠는 강요와 위협이 아니라, 타인을 모으고 끌어안는 종교적, 인종적 관용에 있었다. 그러나 제국들은 관용을 베풀면서 세계 패권을 획득하지만 동시에 관용을 상실하면서, 관용이 불관용의 씨앗이 되면서, 붕괴의 수순을 밟게 된다. 미국도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환영했지만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특정한 인종, 혹은 민족집단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불관용의 태도를 보여왔다. 토착민인 인디언들을 내쫓고, 흑인, 그 밖의 각종 유색인종에 대해서는 노예제도, 인종차별, 불공평한 시민권 부여 등으로 불관용이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다. 종교적 관용이 인종적 관용으로까지는 확대되지 못했고, 그들의 관용은 한편으로는 효과적인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예리한 계산이 숨어 있었고, 전략적이고, 냉혹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민자 문제, 중동정책, 환경문제 등에서 강력한 불관용 정책을 펼치면서 세계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은 강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더 다양한 이민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숙련도와 훈련도, 노하우를 갖춘 이민자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유인 전략을 추구해야 하며 환경오염이나 조류독감 등 여러 나라의 협력에 의해서 세계적인 문제들에 있어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미국과 이들을 결합시키는 접착제를 마련하고, 여러 측면에서 또 다른 전략적 관용을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나라마다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을 ‘관용’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이끔으로써 관용의 정신을 축으로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제국의 역사를 구체적인 방법으로 일목요연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나로서는 법학이 전공인 저자가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제국의 흥망성쇠를 밝힌 한편의 역사책을 써냈다는 게 놀랍고, 분량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일관된 주제 덕분에 방향을 잃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책 앞부분과 뒷부분에 중국계 미국인 2세인 저자의 개인사를 끼워 넣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우러난 관심과 문제의식을 객관화, 보편화시키려는 저자의 능력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에 독특함을 부여하고 싶다.


저자는, 지금은 세계 일류의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제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숙련되고 가장 진취적인 사람들이 모두 한 지역에서, 혹은 한 민족 안에서 출현할 수는 없다며, 앞으로 어떤 시대가 된다 해도 어떤 사회가 지역이 아닌, 세계를 제패하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인적 자본을 유인하고 그들의 충성심과 동기를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몇 일전, 미국 동부 명문대학 아이비리그 최초의 아시아계 총장으로 뽑힌 한국계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이 화제가 됐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 그곳에서 자란 이민 1.5세대로 의학과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결핵, 말라리아, 에이즈 등의 질병퇴치에 앞장서 온 인물이다. 다트머스대학측은 그의 배움과 혁신, 봉사와 관련해 세계무대에서 출중한 지도자의 길을 걸어온 점을 높이 평가해 총장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피부색, 인종 등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그들은 대학의 비전을 실천해 줄 최고의 적임자를 선택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고수해온 순혈주의와 단일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른 인종,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에 배타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의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도 이미 현실이 되어 있다. 지연과 학연, 종교, 인종, 피부색에 뿌리박은 편협한 선입견으로는 세계화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 우리도 대한민국을 기회의 땅, 매력적인 나라로 세계에 내놓으려면 다문화 시대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이질성을 포용하여 세계의 인재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문화 친화적으로 변해야 하며, 다민족 시대, 다민족 국가에 대비해야 한다. 한국계 미국인 김용 교수가 미국 사회에서 당당한 주류로 올라섰듯이, 언젠가는 외국인이, 외국인 이주민들이 우리나라 안에서 영향력을 갖게 될 시기가 올지 모르고, 이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고, 중심축으로 서게 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진정한 세계화란 서로 교류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제국의 미래>는 세계화 시대가 요구하는 관용을, 우리에게 요구되는 관용을, 전략적으로 제시해 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기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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