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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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피어슨, 내 안엔 6개의 얼굴이 숨어 있다, 사이 2007
마음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 안에 있되 나를 넘어서며, 나를 주도하고 흔들며, 때로 변덕맞기도 해서 종잡을 수가 없는 것. 하지만 마음이란 것을 그처럼 난해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마음의 유형과 구조를 알 수 있다면 진정한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런 것처럼.
이 책은 바로 그 ‘마음’의 근본 구조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융의 원형 이론을 차용하여 고아, 방랑자, 전사, 이타주의자, 순수주의자, 마법사의 원형을 살펴보고 있다. 융에 의하면 원형이란 ‘인간의 정신에 깊이 뿌리 박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일정한 양식’을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원형의 이야기는 많지만 이 여섯 가지 만큼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여섯 가지 원형 중에서 ‘고아’에 접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고아 원형은 마치 엄마 없는 아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하고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온 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며, 삶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에 때로 자신에게 행해지는 학대까지 감수한다. 대학동창 중에 고아 원형을 강하게 표출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으면서도 늘 외로워하고 불안해했다. 나는 비굴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관심에 매달리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으니 마음을 열 수도 없어서, 그녀가 내미는 손길을 번번이 거부하곤 했었다. 그뿐이랴. 내 느낌을 직설적으로 퍼 부운 적도 있었으니!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한 짓이 부끄러워 가슴이 내려앉았다. 고아원형은 내가 가장 적게 가진 성향이지만, 앞날은 모르는 것이다. 좀 더 나이가 들고도 내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내가 고아원형에 점령당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요즘도 가끔 불안에 빠질 때면 그런 태도를 갖곤 하지 않는가. 내 안에도 있는 요소를 누군가 더 많이 지녔다고 해서 경시하는 것은 도저히 어른스럽지 못한 짓이었다.
20대의 내게는 방랑자 원형이 두드러졌었다. 방랑자 원형은 자신을 탑이나 동굴에 갇힌 포로라고 느낀다. 사회적 역할과 제도, 가족, 기존의 관습 및 조직 체계가 자신을 가두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또 타인과의 너무 큰 친밀감은 오히려 위협으로 느낀다. 지금의 나는 순수주의자적인 원형과 이타주의자적인 원형을 기본으로 하고 전사원형도 가지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마법사 원형을 지향한다. 참고로 전사원형은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며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무엇보다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다른 이들에 비해 더 경쟁적으로 자신이 ‘최고’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강박관념에 싸여 있다.
마법사 원형은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만 탓하지 않는다. 마법사 원형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능하다. 감상이나 낭만에 빠지지 않고 주위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언제고 자기 자신부터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순수주의자와 같지만, 더 많은 힘을 갖고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타인들도 변화를 일으키도록 촉구하며 자극한다.
그런데 마법사 원형은 중년이 되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평소의 내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이론적 근거에 접하니 기분이 좋았다. 중년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크나큰 전환기이다. 이 시기에는 체험과 자기성찰이 맞물려 전격적인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 마법사 원형이 자아의 연금술- 먼저 자신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행하니 어지 그렇지 않으랴.
원형이론은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앞서 얘기한 동창처럼 우리 주위에서 어떤 원형이 활동하게 되면 우리는 그 원형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을 받는 셈이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억압을 받는다면 우리는 고아의 원형을 상대해야 한다. 삶이란 결국 사람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는 것이 아니던가.
거만함을 떨쳐버리고 우리 모두가 공동체를 이루는 일부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가진 다양한 재능과 목소리를 공유할 수 있다. 당신은 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나는 당신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장해 나가는 방식이자, 우리 시대에 주어진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태도가 거만함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좋고 싫은 사람이 너무 분명하여 좋은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쏟아 붓고, 싫은 사람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는 내 습관이 그저 취향의 문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좋은 것이 지나치게 분명하다는 것은 싫은 것에 대한 경멸이 숨어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껏 내 눈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근거 없이, 나보다 훨씬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내가 적절하게 도움을 받았듯이, 원형이론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의 내면 여행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이 중에서 가장 훌륭한 원형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원형 모두를 조화시키고 균형을 잡는 일이 더 중요하다. 원형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한 원형 속에서 심리적 딜레마가 발생했을 때 다른 원형의 도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 성취하는 데만 몰두하느라 다른 사람을 도울 마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당신은 능력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한다 해도 정서적인 친밀감이 없이는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버릇, 좋고 싫은 것을 너무 가리는 경향, 관계증진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전무하다는 것... 관계에 있어서는 고아라도 된 듯 한심하게 느껴지는 나를 저자는 계속해서 쪼아댄다.
우리는 개인으로서도 약속의 땅에 들어설 수는 있지만 혼자서 이런 의식 상태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그 경험을 오랜 시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행은 나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합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서 여행의 규칙을 어기는 건 아니다. 그들 없이 홀로 여행을 계속하기보다는 기다렸다 함께 가는 편이 더욱 나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좀 더 관계에 다가서게 되었으며, 마법사 원형에 대해 강한 애정을 느꼈다. 한 가지 미흡한 점이 있다면 이 여섯 가지 원형이 그다지 포괄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무언가 중요한 원형들이 대거 빠진 느낌이랄까. 그래도 저자가 생각하는 방식은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모든 생각의 근저에 여러 원형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그 속에 내재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즉 더 이상 한 가지 관점에 빠지지 않게 되면,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방식이 효과가 없을 때 사고 모형을 바꾸어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 있게 된다. 한 가지 원형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으면 오늘날 살아가는 이 거대한 세상의 문제를 도저히 풀 수가 없다.
모처럼 좋은 책을 발견했다. 이론은 물론이요 관점이나 문체가 어찌나 합리적이고 매력 있는지 모른다. 도처에 외워두고 싶은 아포리즘이 즐비하다. 그 중 가장 멋진 아포리즘 하나를 그대에게 선물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둥글다.
모서리가 없는 만큼 발을 헛디뎌 떨어질 일도 없다.
용기를 내라.
** 빨간 글씨는 본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