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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4일 16시 09분 등록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여행자로서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빈의 상징 슈테판 성당을 중심으로 시청, 국회의사당, 국립오페라하우스 등 화려한 건물들도 많고, 국제적인 미술관과 박물관도 여러 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들(호프부르크, 벨베데르 궁전, 쉰브룬 궁전)만 돌아본다 해도 하루 일정으로 빠듯하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의 빈숲, 칼렌베르그 언덕, 호이리게(와이너리를 갖고 있는 술집) 그리고 남쪽의 온천 지방도 추천할 만하다. 욕심이 많고 관심사도 많은 나는 모두 가 보고 싶었다. 빈에서는 5박 6일을 머물렀지만, 또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제한된 시간은 내가 빈의 모든 관광 명소에 갈 수는 없음을 알려 주었고, 관광 명소에서 나타나는 나의 반응은 모든 곳에 갈 필요가 없음을 알려 주었다. 빈을 하루 동안 여행한 후, 우선순위를 정했다. 내가 특히 즐거워하는 주제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 때 가장 흥분하는지를 돌아보았다. 첫째로는 역사와 문화였다. 선사 시대 그 이후의 역사, 특히 근대 이후의 역사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옛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만들어낸 문명의 이야기를 접할 때 나는 열정을 느꼈다. 호프부르크 왕궁에 갔을 때에는 시간이 부족할 만큼 관람하느라 넋이 나갔고, 걸출한 위인들의 기념관에 가면 나는 신이 났다. 가장 큰 몰입을 경험한 곳은 작가나 대문호들의 기념관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호프부르크 왕가에 대한 책과 괴테, 카프카의 저서들을 읽을 것이다.


둘째로는 건축이다. 도시마다 만나게 되는 건축물과 그 건축에 관련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건축 양식에 대한 관심이 많음을 느꼈다. 바로크 양식, 고딕 양식, 로코코 양식 등이 어떠한 모양인지 알고 싶어 유심히 건물들을 지켜보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면 그 모양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이 모든 과정들은 즐거웠다. 건축을 향한 관심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건축 자체보다는 건축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건축에 대한 책을 읽으면 이 관심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다. 셋째로는 음악이다. 빈은 음악의 도시다. 지금 여행하고 있는 독일은 고전 음악의 나라다. 역사와 문화, 건축물들을 감상하고 나서 시간이 허락되면 나는 음악가들의 자취를 쫓거나 음악회, 재즈카페를 찾아 나섰다. 프라하에서는 드보르작 기념관에, 빈에서는 모차르트 하우스에 갔었다. 이것은 20여 일 동안 여행하면서 발견되는 습관 같은 패턴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포기한 것은 미술이었다. 나는 이미지보다는 텍스트에 훨씬 자연스럽게 반응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먼저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품이나 그림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텍스트다. 일부러 노력해야 이미지를 주의 깊게 볼 수 있다. 텍스트를 오래 읽을 수는 있지만 그림을 오랫동안 주시한 적은 없었다. (나는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잘 배운다.) 빈에서도 유명한 회화박물관이 있었고,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나는 포기하고 다른 일정을 선택했다. 나의 강점도 아니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점점 더 분명해져서 즐거웠던 차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괴테의 말에서 확인하고는 더욱 신이 났다. 다음은 괴테의 여행 이야기를 들은 에커만과 괴테의 대화다.


나(에커만)는 그(괴테를 말함)가 여행에서 온갖 것에 관심을 갖고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서 유쾌하다고 말했다. 즉, 산맥의 형태나 위치, 그 암석의 종류, 토양, 강, 구름, 바람과 날씨, 거기에다 도시와 그 형성과정 및 연속적인 발전과정, 건축술, 그림, 연극, 도실의 설비와 행정, 산업, 경제, 도로건설, 다양한 민족, 생활양식, 독자성 또한 정치와 군사 문제, 그 밖에도 수많은 대상을 말이다. 이에 대해 괴테는 이렇게 응답했다.

"그렇지만 음악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을 걸세. 음악은 내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네. 누구든지 여행을 할 때는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이 자기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하네."

-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p.86


삶은 여행이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이 자기에게 중요한지를 아는 것은 삶에서도 중요하다. 책상에 앉아 자기의 재능과 관심사에 대하여 고뇌하라는 말이 아니다.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더욱 말리고 싶은 일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무언가 시도해 보라는 말이다.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모르던 사실을 여행을 하면서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깨닫는 것이지, 깨닫고 난 후에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몰라도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삶이 먼저다. 사유는 그 다음이다. 몰입이 먼저고, 성찰은 그 다음이다. 순서가 뒤바뀌면 힘들어지지만, 만일 하나가 빠지면 삶이 정체된다. 자신에 대한 지식은 책상 앞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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