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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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 을유문화사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20세기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철학자일 것이다.
러셀은 네 살이 되기 전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러셀의 양친은 자유 사상가였다. 2년 뒤 영국 수상을 두 번 역임했던 할아버지 존 러셀 백장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가 러셀의 양육을 맡게 되었다. 할머니는 정치에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겼으면서도 양심과 표준을 강조하는 청교도였다. 러셀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스위스와 독일과 영국 출신 가정교사의 지도를 차례로 받다가 1890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처음 3년은 수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철학을 공식적으로 공부한 것은 4년째부터 2년 동안이었다. 당시 케임브리지대학의 철학과 교수진은 공리주의자 시즈윅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헤겔-브래들리식의 일원주의적 관념주의 형이상학자들이었다. 러셀도 이 흐름에 휩쓸려 칸트와 헤겔에 사로잡혀 6년을 지냈는데, 이 시기에 러셀은 그의 말대로 제 몫을 단단히 하는 헤겔주의자였다. 그러나 러셀은 1898년 말부터 무어와 함께 칸트의 철학과 헤겔의 철학에 반란을 일으키고 다원주의와 경험주의로 전향하였다.
이때부터 생애를 마칠 때까지 러셀은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가 다룬 주제는 철학, 논리학, 수학, 도덕, 정치. 그 밖의 수많은 사회적 문제, 반전과 반핵 등 이루 다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러셀의 저작들은 크게 보면 두 갈래로 분명하게 나누어진다. 첫째는 순수한 학문적 저작들이고, 둘째는 일상의 사회적 문제들에 관한 저작들이다.
학문으로서의 러셀의 철학은 20세기 “분석철학”이 다루는 온갖 주제에 걸쳐 진행되었다. 처음에 논리학과 수학을 통해 얻은 “논리 철학”과 “수학 철학”에서 시작하여 “인식론” “언어철학” “과학 철학” “형이상학” “정신에 관한 철학” “윤리학” 등 철학의 거의 전 분야를 서로 연관시키면서 넘나들고 있다.
러셀의 삶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론과 실천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에서 시작해 구체적인 답을 찾아내거나,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해 추상적인 답을 찾아내는 것으로 어느 한쪽에 대해 답을 내기도 벅찬 문제들이다. 허나 러셀은 어디에서 질문을 시작하던지 어떤 답을 얻든지 그 둘을 통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통합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개의치 않고 신념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행복한 사람이었다.
1927년 그는 교육은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신념으로 쓴 <교육론>을 실제로 실험하는 비컨힐스쿨을 열었다.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나름의 학교를 세워보자는 것이었다. 자신의 아이들에겐 다른 아이들과의 교제를 통해 사회성을 길러야 하므로 학교라는 제도가 필요했던 것인데 기존의 학교에는 자신의 신념을 만족시키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첫째, 점잔을 빼는 교육, 종교 교육이 싫었고, 기타 전통적 학교에서 당연시되는 자유에 대한 무수한 제약들이 싫었으며, 둘째, 금욕주의적 교육을 중시하지 않거나 자제력 훈련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대부분의 현대교육가들에게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원했던 교육의 근본태도는 ‘자유와 훈련의 적합한 조화'였다. 그의 학교는 당시로는 새로운 독창적 자유주의 교육을 하였기에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10년쯤 후 이 학교에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의 원인은 학교 운영 원칙들의 몇 가지 실수와 러셀과 부인 도라와의 교육가치관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러셀의 교육이론에 대한 실천의 결과는 표면상으로 실패한 것으로 불 수 있다. 하지만 러셀의 삶 전체에서 이 경험은 성공적인 삶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의미있는 시도였다. 그는 <교육과 사회질서>를 출판하고 2년 뒤에 비컨힐스쿨을 떠나, 오로지 사회이론에 관한 저작만을 하였다. 교육이 때로는 정치적 권력에 이용되고 어린이는 그 도구가 되거나 특정한 신념을 주입시키는 경우도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교육을 시키는 주체가 될 수 있는 세상 구성원들 모두에게 올바른 사회인식에 근거한 지식을 가져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사회구성원들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진실과 허위를 간파할 수 있는 비판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자신의 다양한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도왔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인류역사상 힘든 시기를 거치는 데 러셀 개인적인 삶의 측면에서도 힘든 시기였다. 이른바 ‘버트란드 러셀사건’이라고 불리우는 러셀의 뉴욕시립대학 교수취임 발표에 대하여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종교관과 정치관 등의 세계관에 대해 당시 미국사회의 보수적인 잣대가 적용된 것이다. 결국 1940년 러셀의 교수임명은 무효가 되었고 이 소동은 러셀 개인의 문제를 떠나 별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문제를 남겼는데, 연구와 교육의 자유를 사명으로 하는 대학이 외부의 정치세력에 짓밟혔다는 사례로서 역사적으로 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 이 사건이후로 러셀은 한 동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의 나의 70세에 세 자녀를 포함 한 가족을 거느리고 실업자가 되었으며 ‘미국 모든 대학의 철학적 처치 곤란한 존재’라는 언론의 비난과 가십으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안팎으로 모진 역경을 어떻게 극복해 내었는가를 보면 우리는 러셀의 삶의 태도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는 아무리 고난과 불행을 만나도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타개해야 될까 골몰하는 불굴의 의지는 결코 시들지 않았다. 그는 영국 출판사에 연락하여 자신의 저서에서 발생할 장래 인세액을 계산하여 자식들이 미국에서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선불을 받았으며, 반즈재단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쓰기로 한 철학사 인세를 미국 출판사에서도 선불을 받게 되어 생활비와 교육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신 계약한 철학사를 정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이 파란 많은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난 걸작이 바로 <서양철학사>인 것이다.
러셀은 귀족가문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 표면상으로 보면 그는 우리가 쉽사리 범접하기 힘든 천재 철학자이다. 하지만 생애 전체를 통해서 그의 사상을 엿보면 그 또한 나와 같은 인간이자 따스한 인간애를 지닌 휴머니스트라는 점에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러셀이 자신의 자서전을 마무리하며 쓴 다음의 내용을 보면 ‘지식과 사랑’이라는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 싶어 했던 세기의 철학자의 다정한 인간애를 엿볼 수 있다.
“인류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너무 짧은 길로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세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세상을 앞당기는 것을 목표로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전을 좇아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을 좋아했고, 더욱더 세속화된 시대에 지혜를 줄 수 있는 통찰의 순간들을 두고자 했다. 사회적으로는, 개인들이 거리낌없이 성장하는 사회, 증오와 탐욕과 질시가 자랄 토양이 없어 죽어버린 사회의 탄생을 그렸다. 이런 것들이 내가 믿는 것이며, 비록 끔찍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세상이 나를 흔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지은이 서문 >
p.9 역사의 변화 과정에 통일성이 있으며, 먼저 일어난 일과 나중에 일어난 일이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하자. 이 점을 밝혀내려면 앞선 시기와 나중시기를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종합해야 한다.
p.10 나는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철학자를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문화적 환경이 산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공유되지만 모호하거나 산만하게 흩어진 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애쓰며 집중하는 한 인간으로 조명했다.
지금 내가 쓰는 책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상세히 다루지 않으면 빈약해져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 것이고, 상세히 다루다보면 과도하게 길어질 위험이 있다. 나는 어느 정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들만 다루면서, 근본적인 면에서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실례나 생동감을 전하는 설명으로서 가치가 있는 내용은 상세하게 언급하는 식의 타협점을 찾았다.
철학은 공동체의 삶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는 바로 이 부분을 고찰하려 애썼다. 이러한 관점이 바로 이 책을 장점이다.
< 서론 >
p.17 명확한 지식은 무엇이든 과학에 속하는 반면,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모두 신학에 속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 무인지대 No Man's Land가 바로 철학의 세계이다.
p.18 한 시대와 한 민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각각에 속한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철학을 이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철학을 거의 결정하며, 거꾸로 사람들이 형성한 철학이 환경을 거의 결정한다. 수세기에 걸쳐 양자간에 일어난 상호작용이 앞으로 본문에서 다룰 주제이다.
p.19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서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 연구자를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신학과 구별되는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종교와 과학이 그렇듯이 사회 결속과 개인의 자유는 전 시기에 걸쳐 갈등을 빚거나 불안정한 타협 상태를 유지한다.
p.28 기원전 60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발전을 거듭하면서, 철학자들은 사회 결속을 강화하려는 자와 풀려는 자로 나뉘었다.
한쪽에는 너무 강력한 규율과 전통에 대한 지나친 존경 때문에 경직될 우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개인주의 성향과 개인의 독립심 때문에 협동과 협력의 토대를 상실하고 결국 분열되거나 외부 세력에게 정복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p.29 자유주의 학설은 지금까지 말한 끝없이 반복되어온 동요 상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로서 등장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비합리적인 교의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서 사회 질서를 보장하는 동시에, 사회 보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개인을 구속하지 않고서 사회 안정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시도가 성공할지는 오직 장래에 일어날 일이 결정할 터이다.
<제1권 고대 철학>
<제1부 소크라테스 이전>
p.34 모든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 문명의 발생만큼 놀랍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은 없다.
그들은 순수한 지성의 영역에서 훨씬 비범하고 이례적인 업적을 성취함으로써, 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을 처음 만들어냈고, 단순한 연대기가 아닌 역사를 최초로 기록했다. 또 그들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에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계의 본성과 인생의 목적에 대한 사유를 자유롭게 펼쳐나갔다.
p.35 철학은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천문학자들이 기원전 585년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일식을 탈레스가 예측한 사실에 비추어, 그가 살았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과 과학은 원래 분리되지 않는 상태로 기원전 6세기초에 동시에 탄생했다.
p.42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의 알파벳 문자를 빌려서 그들의 언어에 맞도록 변경했는데, 자음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모음을 추가하는 중요한 언어상 혁신을 이루었다. 이렇게 편리한 문자 쓰기 방법을 습득함으로써 그리스 문명의 발흥을 더욱 앞당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문명에서 주목할 만한 최초의 결실은 호메로스였다.
p.43 호메로스는 원시성과 거리가 먼 검열관의 위치에서 고대 신화들을 정리한 18세기식 합리주의 해석자이며, 상류층에 어울리는 도시풍의 세련된 계몽적 이상을 간직했다.
p.45 더할 나위 없는 위업으로 평가되는 호메로스의 작품은 이오니아, 즉 그리스의 소아시아 일부 지역을 비롯해 인접한 섬나라들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호메로스의 시들은 늦어도 기원전 6세기 어느 시점에 오늘날의 형태로 고정되었다.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 수학도 바로 이 무렵 형성되었다. 기원전 6세기 문화의 근원이 된 중요한 사건들이 세계 곳곳에서 줄줄이 발생했다.
p.49 인간이 성취한 가장 위대한 업적에는 도취의 요소, 즉 사려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열정의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다.
p.50 사려와 열정 사이에 나타난 갈등은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어느 한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갈등은 아니다.
과학은 지식에 한계를 그을 수는 있지만, 상상력에 한계를 그어서는 안 된다.
p.57 그리스 문화를 지배한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열정을 중시하고 종교에 몰입하며 신비를 표방하고 내세를 믿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명랑하고 경험을 중시하며 합리주의를 내세우고 다양한 사실에 대해 지식을 획득하려는 경향이다.
p.63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격언으로 유명하지만, 이 가정을 오류이다.
p.75 누구나 알듯이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이다”라고 말했다.
p.77 나는 수학이 초감각적인 지성계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영원하고 정학한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발생시킨 주요 원천이라 생각한다.
인간을 철학으로 이끄는 깊은 본능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존재를 추구하는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은 당연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나 위험을 피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불운이 겹치는 격변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영원한 존재를 추구하는 본능이 더욱 열정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p.92 그리스인들은 이론에서든 실천에서든 온건한 입장이나 주용을 취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변한다고 주장했고, 파르메니데스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맞받아쳤다.
p.105 엠페도클레스가 과학 분야 밖에서 보여준 독창성은 4원소설을 내놓고 사랑과 다툼이라는 두 가지 원리를 이용하여 변화를 설명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일원론을 거부했으며, 자연의 변화 과정은 목적이 아니라 우연과 필연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p.108 아테네는 단지 위대한 두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철학에 이바지했다.
p.113 처음으로 아테네에 철학을 전파하고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철학자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p.124 테모크리토스는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고대 후기와 중세 사상을 타락시킨 특이한 결점을 보이지 않은 마지막 철학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철학자들은 모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했다. 그들은 세계를 이해하는 일을 실제보다 더 쉽게 생각했지만, 이러한 낙관주의가 없었던들 그들은 감히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로 당대의 편견을 그저 답습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진정으로 과학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과학적인 태도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넘치고 원기왕성했으며 지적 모험에서 얻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들은 일식과 월식, 물고기, 회오리바람, 종교, 도덕 등 모든 것에 흥미를 느꼈으며, 날카로운 지성과 아울러 아이들 같은 호기심도 지녔다.
p.130 그는 주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즉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한다는 척도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척도이다”라는 학설로 주목받는다.
<제2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p.151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만큼 충분한 지식을 이미 가졌지만 사고하는 도중 혼란에 빠지거나 제대로 분석하지 못해서, 즉 이미 아는 지식을 논리적으로 능숙하게 이용하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들은 소크라테스식 방법을 활용하여 적합하게 다룰 수 있다.
p.153 스파르타는 그리스 사상에 이중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현실과 신화가 제각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p.160 사람들의 상상 속에 면면히 이어진 스파르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한 스타르타가 아니라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묘사한 스파르타와 플라톤이 <국가>에서 철학을 통해 이상화한 스타르타이다. 수세기에 걸쳐 젊은이들은 <영웅전>과 <국가>를 읽으며 리쿠르고스가 되거나 철인 왕이 되려는 야심을 불태웠다. 이상주의와 권력애가 통합된 결과로 인간은 몇 번이고 길을 잃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헤매고 있다.
p.166 플라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이상향으로서, 기나긴 역사 속에 등장한 최초의 형태에 속한다. 둘째는 이상이론으로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보편자 문제를 다룬 선구적 시도로 평가된다. 셋째는 영혼 불멸을 지지하는 논증이고, 넷째는 우주론이며, 다섯째는 지각이 아닌 상기로 간주되는 지식 개념이다.
p.170 <국가>는 플라톤의 가장 중요한 대화편이며 대략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부분에서는 이상 국가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이상향의 역사 속에 등장한 최초의 형태에 속한다.
이상 국가론에서 도출된 한 가지 결론은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가>의 명목상 목적은 ‘정의正義’라는 말을 정의定義 내리는 것이다.
p.188 플라톤에게 철학은 일종의 통찰, 곧 ‘진리통찰’이다. 철학은 순수 지성의 활동만이 아니다. 철학은 지혜일 뿐만 아니라 지혜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며, 이러한 사유와 감정의 친밀한 합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신에 대한 지적 사랑’과 거의 같다.
p.200 <파이돈>은 소크라테스 생애의 마지막 순간, 곧 독배를 마시기 직전부터 독배를 마신 다음 의식을 잃을 순간까지 나눈 대화를 묘사한다. 여기서 최고 현명하고 선하며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플루톤의 이상적인 인간형이 등장한다. 플라톤이 묘사한 죽음 직접의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면에서 고대에나 근대에나 위대하다고 평가되었다.
p.211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여러 세대에 걸쳐 후대 철학자들에게 추앙받은 모범이다. 소크라테스의 어떤 면을 윤리적이라고 평가해야 할까? 소크라테스의 장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속세에서 추구하는 성공에 관심이 없었으며, 임종하는 순간에도 평온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기지를 발휘하여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바를 더 염려했다.
p.217 나는 위에서 인용한 아주 어려운 구절을 완벽하게 이해한 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말하는 이론은 기하하적 반성에서 생겨났음이 틀림없으며, 기하학적 반성은 산수처럼 순수 이성의 문제로 드러나지만 감각계에 속한 공간과 관계가 있었다. 대개 후대 철학자들과 유사한 점을 찾아내는 일은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누구나 자신의 것에 친근감을 느끼듯 칸트가 앞서 말한 공간론을 틀림없이 좋아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p.211근대인들은 대부분 경험적 지식이 지각에 의존하거나 지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플라톤이나 다른 특정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 사이에는 ‘지식’이라 부를 만한 지식은 감각에서 유래하지 않으며, 유일하게 진정한 지식은 개념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전혀 다른 학설이 존재한다.
“제게는 무엇을 인식하는 사람은 인식하는 사물을 지각하며, 지금 아는 한도내에서 지식은 지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듯합니다.”
p.233 17세기가 시작된 이래 지성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거의 모든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논리학의 경우 이런 경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p.239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자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은 플라톤의 이상 이론에게 한 단계 진보한 이론이라 확신하며, 철학의 진정한 문제를 다룬 매우 주용한 이론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p.248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제시한 견해는 주로 당시 교양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된 의견을 대표한다. 그의 견해는 플라톤과는 달리 신비 종교가 스며들어 있지 않으며, <국가>의 재산과 가족에 대한 논의에서 나타난 정통에서 벗어난 이론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예의바름의 정도가 떨어지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은 사람들, 곧 품행이 바른 시민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원칙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보게 될 터이다.
p.274 아리스토델레스가 <정치학>에서 제시한 근본 가정들은 어떤 현대 저술가와 비교해도 차이가 뚜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의 목적은 교양을 갖춘 신사, 말하자면 귀족다운 심성과 아울러 지식과 예술에 대한 사랑도 지닌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p.277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삼단논법 학설이다. 삼단논법은 대전제, 소전제, 결론 세 부분으로 구성된 논증이다. 삼단논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각에 스콜라 철학자들이 붙인 이름이 있다. 가장 친숙한 삼단논법은 ‘바르바라’라고 부르는 형식이다.
p.288 도토리는 도토리나무의 ‘가능태’라는 말이다.
p.292 수학적 증명 방법의 기원은 거의 다 그리스인에게서 시작한다.
제3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
p.316 철학은 이제 용맹한 소수의 진리 탐구자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불기둥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학은 생존 투쟁의 흔적을 뒤따르며 병약자와 부상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 같은 역할을 하게 한다.
p.348 스토아 학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은 주요 하설은 우주에 관한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p.369 로마 제국은 다방면에 걸쳐 각각 다른 방식으로 문화사에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로마가 헬레니즘 사상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이다. 이 영향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깊숙이 파고들지도 못한다. 둘째는 그리스와 동방 세계가 로마 제국의 절반을 차지한 서방 지역에 미친 영향이다. 이 영향은 그리스도교를 포함했기 때문에 깊고도 지속적인 것이었다. 셋째는 문화를 널리 보급하고 사람들이 단일 정치와 결합된 단일 문명이란 생각에 익숙해지도록 기여한 로마의 오랜 평화기가 갖는 중요한 가치이다. 넷째는 헬레니즘 문명을 이슬람교도들에게 전하고. 마침내 서유럽에 전달한 역할이다.
p.401 플로티노스는 끝이자 시작이다. 즉 그리스인의 관점에서는 끝이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관점에서는 시작이다.
제2권 가톨릭 철학
p.405 고대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중세 세계의 특징은 가지각색의 이원성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성직자와 속인의 이원성. 라틴족과 튜튼족의 이원성. 신의 왕국과 현세의 왕곡의 이원성, 정신과 육체의 이원성이 나타난다. 이런 갖가지 이원성은 교황과 황제의 이원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제1부 교부철학>
p.414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시기를 전후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p.430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유대교의 개혁을 목표로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설교한 가르침이었다.
p.436 아우구스티누스의 젊은 시절이 성직자들 대부분과 달리 더 많이 알려지게 된 이유는 그가 자신의 <고백록>을 통해 말했기 때문이다. <고백록>을 모방한 여러 책 가운데 특히 루소와 톨스토이의 작품이 유명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전에는 비견될 만한 수작이 없었다.
p.458 그리스도교 신학은 두 부분야로 나뉘는데, 하나는 교회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영혼과 관련된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속에서는 두 분야가 동등하게 조화롭게 공존한다.
p.468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에서 시간을 마음과 관련시킨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이론은 분명히 진지하게 고찰해볼 만한 뛰어난 이론이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이 그리스 철학에서 시간을 주제로 다룬 어떤 이론보다 훨씬 앞섰다는 말도 당연히 해야 하겠다. 또 그의 시간 이론은 칸트의 주관적인 시간 이론보다 더 우수할 뿐만 아니라 명료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으며, 칸트 이후 철학자들이 수용하게 되는 이론이다.
p.495 6세이 이후 수세기에 걸친 끝없는 전쟁으로 문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던 시기, 무엇보다도 교회는 살아남은 고대 로마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다루는 시가에 나타난 교회의 세 가지 활동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수도원 운동이다. 둘째는 교황 체제의 영향, 특히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재위 시절이 두드러진 영향이다. 셋째는 선교를 통한 이교도 야만족들의 개종이다.
<제2부 스콜라 철학>
p.525 ‘암측기’라는 말로 600년부터 1000년에 이른 시기를 가리키는 관행은 서유럽에 집중하는 부당한 처사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경우 이 시기는 당 왕조 시대로. 중국 시문학이 꽃을 피운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이다.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이슬람교 문명이 번성했다. 이 시기 그리스도 세계는 문명을 잃어버리기는커녕 그와 정반대였다. 아무도 서유럽이 후대에 권력과 문화를 장악하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유럽 문명이 곧 문명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협소한 견해이다. 우리 문명의 문화에 속하는 내용은 대부분 동부 지중해 연안, 그리스인과 유대인에게서 유래한다. 권력의 측면에서 서유럽은 포에니 전쟁부터 로마의 몰락까지, 대략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400년까지 6세기 동안 우위를 차지했을 따름이다. 이후 서유럽의 어떤 나라도 권력으로는 중국, 일본, 이슬람교 국가를 따라잡지 못했다.
p.536 유럽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1세기 처음으로 후대에 잃어버리지 않는 급속한 진보를 이룩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동안 그렇게 진보하기는 했으나 견고하지 않았다. 11세기에 이룩한 개선과 진보는 오래 지속되었으며 다채로웠다. 이러한 진보는 수도원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 다음 교황 체제와 교회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1세기 막을 내릴 무렵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p.551 이슬람교의 기원 헤지라는 622년에 일어났으며, 무하마드는 10년 후에 죽었다. 그가 죽은 직후 아랍인은 정복을 시작하여, 엄청난 속도로 정복 사업을 이어갔다.
p.562 우리의 흥미를 끄는 12세기의 네 가지 양상은 다음과 같다. 1. 황제권과 교황 체제의 계속되는 갈등 2. 롬바르디아 도시들의 발흥 3. 십자군 4. 스콜라 철학의 성장
p.578 중세 시대는 1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로마의 몰락 이후 점차 형성되기 시작한 종합은 도달 가능한 수준만큼 완결되었다. 14세기에 여러 제도와 철학 체계들이 해체되고, 15세기에는 우리가 지금도 근대적 특징으로 간주하는 제도와 철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3세기의 위대한 인물들은 정말 위대했다. 인노켄티우스3세, 성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 2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유형에서 최고 권위를 갖는 대표자들이다.
p.591 토마스 아퀴나스 1225또는 1226~1274는 스콜라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철학을 가르치는 모든 가톨릭 교육 기관에서는 단 하나뿐인 옳은 체계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1879년 레오 13세가 내린 교서 이후 규칙이 되었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지 역사 속 인물로서 관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과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는 철학자이며, 사실 뒤의 두 학자보다 영향력이 더 큰 인물이다.
p.604 아퀴나스 철학 체계 안에 진정한 철학 정신을 드러내는 부분은 거의 없다. 그는 플라톤 대화편 속의 소크라테스와 달리 논증이 이끄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따라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탐구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는 철학을 시작하기 전에 벌써 진리를 알고 있다. 진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선언된다. 만약 그가 신앙의 어떤 부분을 지지하기 위해 분명한 이성적 논증을 찾을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나은 철학을 하게 되었으리라.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는 그저 계시로 후퇴하는 길밖에 없다. 결론이 미리 주어진 논증의 발견은 철학이 아니라 특별한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아퀴나스가 그리스 근대 양 시대의 최고 철학자들과 어개를 나란히 견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3권 근현대 철학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까지>
p.638 보통 ‘근대’라고 부르는 역사적 시기의 정신적 전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중세에 속한 사고방힉과 달랐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은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과학의 권위가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그 밖의 다른 특징은 이 두 가지 특징과 관련이 있다. 근대 문화는 성직자보다 속인의 삶과 관계가 더 깊다. 국가의 힘이 점점 터지는 가운데 문화를 조정하는 정부 권력 기구가 교회를 대체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p.642 근대세계는 요즈음 고대와 비슷한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즉 사회 질서는 힘에 의해 재편되어 보통 사람들의 희망보다는 오히려 강자의 의지를 대변한다. 지소 가능하고 만족스러운 사회 질서를 실현하려면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법체계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제시한 이상주의를 결합해야만 가능할 텐데, 이를 성취하려면 새로운 철학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p.643 중세적 사고방식과 대립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p.654 르네상스기에 중요한 이론 철학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지만, 정치철학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린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출현하였다.
p.664 유럽 북부 여러 나라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이탈리아보다 뒤늦게 시작되어, 곧 종교개혁과 뒤얽혔다.... 북부 르네상스는 여러 면에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아주 달랐는데, 무정부 상태를 야기하지도 비도덕성을 조장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경건한 신앙심이나 공공의 덕과 결합되었다. 북부 르네상스의 선구자들은 학문연구의 표준을 성서에 적용하거나 불가타성서의 원본보다 더 정확한 원본을 입수하는 데 더욱 흥미를 느꼈다.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들보다 화려한 면은 부족했으나 기초가 튼튼하고 충실했으며, 개인의 학문적 성과를 내세우기보다는 학문을 가능한 한 널리 보급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 경, 두 사람은 북부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맞다.
p.677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둘 다 문명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이 지적인 문명의 발전이 앞선 이탈리아의 지배에 맞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p.681 근대와 근대 이전 시대의 차이는 17세기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서 비롯된다.
과학에 도입된 새로운 개념은 근대 철학에 광범위하면서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근대 철학의 정초자로 평가받는 데카르트는 바로 17세기 과학을 창안한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p.695 과학의 발전이 초래한 다른 결과는 인간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사고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일이다. 중세의 세계관에 따르면 지구는 하늘의 중심이며, 만물은 인간과 관련된 특정한 목적을 가졌다. 뉴턴의 세계관에서 지구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앟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며, 천문학적 거리는 너무나 고아대해서 지구는 상대적으로 핀 끝만큼 작아 보였다. 거대한 우주 체계가 전부 핀 끝 위의 작은 인간을 휘해 계획되었다는 생각은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과학의 일부가 되어버릴 정도로 친숙한 목적 개념은 과학적 탐구 절차에서 제거되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하늘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을지도 모르지만, 천문학적인 계산을 할 때 종교적 믿음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세계에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과학적 설명을 할 때는 목적 개념이 더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p.699 베이컨 1561-1626의 철학에 불충분한 면이 많다고 해도, 베이컨은 근대 귀납법의 창시자요, 과학적 탐구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려 노력한 선구자로서 영원히 기억할 만하다.
p.717 홉스의 정치사상의 장점은 이전 정치 이론가들과 대조해 보면 대부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미신적 요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서 탁한 시기에 아담과 이브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는 명료하고 논리적인 철학자이다. 그의 윤리학은 옳든 그르든 간에 완벽하게 이해되며 진의가 분명치 않는 모호한 개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지성 능력이 훨씬 모자란 마키아벨리를 제외하면, 홉스는 근대 정치이론을 세운 명실상부한 저술가이다. 그가 틀린 주장을 했다면 지나친 단순화 때문이지, 사유의 기초가 실제와 동떨어져 환상에 빠져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그래서 홉스는 여전히 논박해볼 만한 이론가이다.
p.719 르네 데카르트 1596-1650는 흔히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는데, 내 생각에도 옮은 평가이다. 그는 고도의 철학적 능력을 갖춘 최초의 인물로서, 그의 철학관은 새로 등장한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는다. 스콜라 철학의 잔재가 어느 정도 보이기는 해도, 데카르트는 선대 철학자들이 닦아 놓은 기초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완전한 철학 체계를 새롭게 구성하려 노력했다. 새로운 철학 체계의 구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일어난 적이 없던 일로, 과학의 진보로 생겨난 새로운 자기 확신의 표시이다. 그의 철학 저술에는 플라톤 이후 저명한 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신선한 면이 드러난다. 중간에 등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철학자라는 직업에 종사한, 전문능력을 찾춘 우수한 교사들이었을 따름이다. 데카르트는 교사가 아니라 찾아낸 진리를 전달하려는 열망을 품은 발견자이자 지적인 탐험가로서 저술에 임했다. 그의 문체는 쉬우면서 현학적인 티가 나지 않아서, 학생보다 오히려 세계의 지성인에게 말을 건다. 더구나 문체가 유별나게 탁월하다. 근대 철학의 선구자가 격찬을 받아 마땅한 문학적 감각을 소유했으니 대단한 행운이다. 뒤를 이은 후계자들로 유럽 대륙에서나 영국에서나 칸트에 이르기까지, 작업상의 굴레에서 벗어난 데카르트 철학의 특성을 이어받는데, 그들 가운데 몇몇은 문체의 유려한 면의 활용할 줄 알았다.
p.838 흄1711~1776은 매우 중요한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로크와 버클리의 경험주의 철학을 발전시켜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냈고, 일관성을 보여줌으로써 경험주의 철학이 대단한 사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경험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기 때문에 흄이 제시한 방향을 따라 앞으로 나가기는 불가능하다.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p.858 18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술, 문화, 철학, 심지어 정치학도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 운동의 특징인 감정이나 격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초기 낭만주의 운동은 철학과 아무 관련도 없었으나, 오래지 않아 철학과 연결되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또한 루소에 의해 처음부터 정치학과 이어져 있었다.
p.870 루소 1712-1778는 18세기 프랑스어의 의미에 따르면 계몽철학자였으나 오늘날 말하는 의미의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문학, 취미, 예법. 정차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무시하지 못할 만틈 강한 영향을 주었다. 루소가 사상가로서 지닌 장점에 어떤 의견을 갖든, 그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 중요한 인물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주로 루소가 가슴, 당시의 용어로는 감수성에 호소한 데서 기안했다.
p.895 칸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순수이성비판>이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의 지식이 경험을 초월할 수 없지만 일부는 선험적이어서 경험에서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지식의 선험적인 부분은 논리뿐만 아니라 논리의 한계 내의 귀납법에 의해 도출되거나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없는 것도 많이 포함한다.
p.922 인간관계를 다루면서도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현대에 어울리는 윤리 체계를 세우려면,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사람들 상호간의 권력 행사에 바람직한 한계를 긋는 일도 필요불가결하다.
p.923 헤겔 1770-1831은 칸트와 더불어 시작된 독일 철학 사조의 정점에 위치한 철학자이다. 헤켈은 자주 칸트를 비판했지만, 칸트가 없었던들 자신의 철학 체계를 결코 세울 수 없었을 터이다. 오늘날 권위를 잃기는 했어도, 헤겔의 영향력은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나 주로 독일 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로 이어졌다.
내가 믿는 바에 따르면 설령 헤겔의 학설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거짓이라고 해도, 그는 역사적인 면에서 중요할 분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는 정합성과 포괄상이 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철학 체계를 세운 자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p.924 헤겔 철학은 난해하며 위대한 철학자들 전부를 통틀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철학이다.
p.942 헤겔은 만약 어떤 사물을 다른 모든 사물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사물의 모든 속성을 논리에 의해 추론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인데, 이러한 오류에서 헤겔 체계의 당당해 보이는 전체 구조가 형성된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 진실, 즉 논리가 형편없을수록 거기서 생겨난 귀결은 더욱 흥미롭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p.943 바이런의 감수성과 인생관은 외국에 전해져 발전하고 변형되면서 널리 퍼져나가, 중요한 대사건을 발생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p.952 쇼펜하우어는 19,20세기에 유학한 철학의 큰 특징인 의지를 강조하고 철학적으로 부각시켰는데, 그에게 의지는 형이상학의 근본이자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악이다. 이러한 대비는 염세주의자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에 속한다.
p.961 니체는 당연히 자신을 쇼펜하우어의 후계자로 여기지만, 여러 면에서 특히 학설의 일환성과 정합성의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보다 뛰어났다.
니체는 대학 교수였으나 전통에 얽매여 학문에만 몰두한 철학자가 아니라 문학적 성향이 짙은 철학자였다.
p. 987 나는 마르크스를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그가 다른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만을 다루려 한다. 이 점에서도 그는 분류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는 어떤 면에서 호지스킨처럼 철학적 급진파의 영양으로 성장한 철학자로서 급진파의 합리적 성향과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이어받는다. 다른 면에서 보면, 그는 유물론을 부화시킨 학자로서 유물론을 새롭ㄱ 해석해서 인간의 역사와 새로운 방식으로 관련시킨다. 한편 마르크스는 위대한 체계를 구성한 마지막 철학자이자 헤겔의 후계자로서 헤겔처럼 인간서의 진화를 종합하는 이성의 정칙이 있다고 있었다.
p.1008 베르그송이 이 세상에 실현되기를 소망한 선은 활동을 위한 활동이다.
p.1009 윌리엄 제임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철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하나는 과학적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관심이었다.
p.1019 존듀이는 1859년에 대어났으며 일반적으로 미국을 이끄는 살아있는 철학자로서 인정받는 인물이다.
나는 그가 제시한 많은 견해에 거의 완전히 동의하는 편이다. 듀이의 친절을 몸소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존경하고 경애하기 때문에 완전히 동의하기를 바라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가장 독특한 학설, 말하자면 논리학고 인식론의 근본 개념으로서 ‘진리를 ’탐구‘로 대체한 학설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p.1038 광신 행위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갈등을 빚는 혼란한 상태에서 통일을 이루어내는 소수의 힘들 가운데 하나가 과학적 진실성으로서, 이는 우리의 믿음을 가능한 한 지역적 편견이나 기질적 편견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관찰과 추론에 바탕을 두게 하는 습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덕을 철학에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철학이 열매를 맺을 수 잇는 강력한 방법의 고안은 내가 속한 분석철학 학파의 주요한 장점이다. 객관적인 철학 방법을 실천에 옮기면서 획득한 주의 깊게 진실을 말하는 습관은 인간 활동의 전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으며, 객관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어느 것에서나 광신 행위는 감소하고 공감 능력과 서로 이해하는 능력은 증가하게 될 것이다. 철학이 독단적인 일부 주장을 포기한다고 해서.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 일까지 멈추지는 않는다.
3. ‘내가 저자라면’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역대 철학자의 학설을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정치 및 사회적 배경과 아울러 철학사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도록 하려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시도이다.
이 책은 광범위한 영역의 서양철학사를 고대철학, 가톨릭 철학, 근현대 철학으로 나누어 단 한명의 저자가 서술하고 있다. 철학사를 서술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철학사를 전적으로 해설적으로 서술하면서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저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후자는 해설에 어느 정도의 비판을 더해 철학상의 논의가 어떻게 나아갔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은 후자의 입장에서 철학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이 때 작자는 자신이 수용하고 싶지 않은 사상가이더라도 객관적인 사실을 명확하게 기술하여 그의 사상에 오해가 없도록 하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작자의 폭넓은 서양철학사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하나로 꿰뚫는 통찰이 겸비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러셀은 비교적 훌륭하게 서양철학사를 서술하는 작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아마도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러셀이기에 가능했던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자는 각각의 철학사상을 논하기 전에 반드시 사상이 등장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기술하고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사유의 과정이라고 볼 때 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언급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철학의 문제가 느닷없이 무(無)에서 생긴 것이 아니므로 그 근간이 되는 철학이 태동하게 된 시대의 흐름을 아는 것은 필수이다. 특히 서양철학의 근간인 고대철학과 가톨릭철학(중세철학)에 비중을 두고 책을 서술한 것은 마땅하다. 그리고 그리스시대의 철학사상이 이후의 서양철학사상 전반에 적용됨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각각의 철학사상 마다 제시하는 그의 통찰력과 분석력에 감탄한다.
대체로의 철학사를 서술한 책들은 전자의 서술 방법을 이용하여 철학사의 객관적 기술에만 그치고, 독자는 그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러셀은 철학사의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적용을 전제로 한 철학자의 중요한 논제를 제시하면서, 그 논제에 대한 촌철살인 같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 매우 참신하다. 이 책은 작자가 강의를 하는 내용을 서술하는 형식을 취고 있다. 그래서 한 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을 하고 강의하는 사람의 생각을 밝히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학생이 강의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그 철학사상에 대해 강의자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 지가 더욱 궁금할 것이다. 작자가 의도한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철학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철학사상을 통해 철학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 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 작자의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과연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하는 등의 스스로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비판정신을 기르도록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러셀의 서술에 있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내 주장에 대해 책임진다.”라는 뉘앙스를 느낀다.
작자가 독자들의 철학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대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기술한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형식상 아쉬운 점은 해당 철학사상에 대한 역사적 배경 설명이 작자가 대략적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한 것은 같으나 지나치게 길어지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철학사상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전에 읽는 흐름에서 지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지금 제시된 자료보다 간략하게 전반적 경향의 개요를 제시하는 정도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구성을 바꿔 예를 들어 고대철학의 부분에서 철학사상가나 그의 사상이 등장할 때 마다 기술했던 역사적 배경을 따로 떼어 앞부분에 고대철학의 흐름 전반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먼저 기술한 후에 철학사상에 대한 내용만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물론 역사와 철학이 같은 흐름 속에서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지만, 처음 철학을 접하거나 철학이라는 것 자체를 삶과 분리시켜 어려워하는 대중을 위해서는 일단 영역을 나누어 이해를 돕고 나중에 통합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일 것이다.
내용상 아쉬운 점은 작자가 분석철학의 대가이기 때문인지 제3권 근현대 철학에서 실존철학에 대한 제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를 다루었다면, 실존철학 경향의 선구자로 19세기에 활동했던 철학자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서술이 함께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사 전반에 대한 객관적 개관을 통해 독자들의 철학적 사유를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면, 자세한 서술은 아니었어도 제21장 19세기 사상의 흐름에 간략한 언급정도는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