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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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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5일 11시 50분 등록

[북리뷰 5]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

 

1. 저자에 대하여

 

이런 선견자는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합니다. p121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이들의 운명이 현실 세계에서 어찌될 지를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와야 했다. 잔인한 운명에 맞서, 영웅이 되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증거 해 보였다. 실로 새로운 신화를 쓴 것이다. 스스로가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더러 말한다. 스스로의 삶 속에서 주인공이 되라고. 설명하지 않고, 은유로 말하고, 말로 시키지 않고, 그냥 살아서 보여줄 뿐이다. 어차피 못 보는 이는 눈이 있어도 못 볼 것이지만, 그는 확신하고 있다. 그가 진정으로 소통해야 할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인디언들의 신화와 아더왕의 전설에 눈뜨면서 시작된 신화에 대한 그의 여정은 그의 말처럼 운명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자연사 박물관의 토템 기둥에 매료되고, 결국에는 신화와 상징에 매료되는 자신의 세계에 매료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신화와 관련된 그의 이야기는 곧바로 그의 자서전처럼 읽힌다.

 

여전히 내게 캠벨은 힘들다. 한. 자. 한. 자.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배껴 적고, 그것도 모자라서 결국은 공책을 펴들고야 만다. 그러기를 한참, 이미 여러 차례. 하룻밤에도 벌써 몇 번째. 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을 조금이라도 가늠해본다면, 나의 이 공력은 공력이랄 수조차 할 수 없겠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던 해, 그가 돌아왔다. 영웅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를 가지고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돌아오듯이, 갈매기 조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비록 필멸하는 그의 육신은 1987년으로 매듭지었지만, 불멸하는 그의 삶은 지금 여기에 나와 우리들의 가슴에도 함께 하고 있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빌 모이어스의 서문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

그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經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마련한 일이었다. 조이스가 말한 ‘참으로 엄연하고 항시적인’ 인간의 고뇌에서 캠벨은 바로 고대 신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읽었다.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p8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隱居)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p9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1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 영웅의 역정을 용기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p11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p12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p14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p15

 

그는(캠벨)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p15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이다. p15

<코란>에 나오는 말, “너희는, 선인(先人)이 겪은 것과 같은 시련을 겪지도 아니하고 지복(至福)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를 인용하고는 한다. p17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즉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라는 ... p17

 

신의 이미지...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이 ‘영원의 가면’은 그 ‘영광의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고 감추기도 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 -창세, 처녀수태, 신자성육,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야기-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p18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신화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p19

 

그가 우리에게 열어 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정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 p21

 

1 신화와 현대 세계

우주의 의미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p30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p31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p32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p33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3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 p34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p34

 

나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p38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 나는 뉴욕의 51번가와 5번가를 지나 성 패트릭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나는 대단히 번잡한 도시,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가장 첨예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p47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곳, 그러니까 영화가 나타내고 있는 상황을 체험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지요. 영화배우가 극장으로 들어서면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그 영화배우를 봅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진짜 영웅입니다. p50

 

시인 예이츠는 우리가 위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주기를 산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재림(再臨)> “빙글빙글 하늘을 돌고 또 돌면서도 / 매는 매잡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중심이 잡아주지 못해서. / 세상에 흔한 것은 무질서 / 피거품이 번진다. / 그리고 도처에서 / 순진무구한 의례(儀禮)가 익사한다.” p51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인간은 이승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데, 뱀이 이승의 속박을 상징한다면 새는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하지요. p53

 

<스타워즈>에는 신화적인 원근법이라고 할 만 한게 있습니다. ...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p55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p55

 

컴퓨터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신들을 섬기듯 섬기고 있어요. 신들과 동일시하는 것이지요. 이 기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금제(禁制)만 잔뜩 요구할 뿐 자비로운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한 군데도 없는 <구약성서>의 신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p55

 

태초에는 하느님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이 센 하느님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의 하느님은 어떤 동네의 종족신(種族神)이었답니다. 그런데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救主)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합니다. p57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왜?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p58

 

토인들은 선교사에게 “당신네 신은 문을 꽁꽁 처닫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늙어서 병이라도 든 것처럼. 그러나 우리 신은 밀림에도 있고, 벌판에도 있고, 산꼭데기에도 있다. 비가 올 때도 있다” 이렇게 말했다지요? 사실인 것 같습니다만. ... 사실이지요. p58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학은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사회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없어요.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p61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 솥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p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p61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p62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p63

 

그러니까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는 너와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네 개의 꼭지점은 하나가 되어 만나고, 이 만나는 자리에는 활짝 열린 하느님의 눈이 있습니다. // 이것을 제정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신이었지요. // 그렇지요. 미합중국은 이 세계에서 전쟁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최초의 국가입니다. p64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믿는다”는 구절이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이것을 제정한 양반들은 에덴의 낙원 이래의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제2의적인 관심과 현세적 관심에서 초탈한 이간의 마음이, 하느님의 이성적인 마음이 비치는 맑은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p65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랗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p65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轉機)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p71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p71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땡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p74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은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p76

자연을 신으로 파악하면 자연에 대한 정복이 불가능해질테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을 죽이지 않고는 나무도 자를 수 없고 땅을 갈 수도 없고 강을 부동산으로 만들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 이것은 현대의 미국에만 국한되는 상황은 아닙니다. 어쨌든 하느님은 자연에서 분리되었고, 자연은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창세기’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지요. p77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p77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p78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p80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여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3

 

“이 신화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말은 건단 말이야, 신화라고 하는 게 말이지. 내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내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단 말이야” p83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흙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6

 

우리가 자신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 같은 순간에 은유적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문제이기도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p86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p88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90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름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힙니다. p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비입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뱀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 뱀은 시간의 장(場),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p97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처럼 흐르는 것 같지요. 혀를 보세요. 불꽃 같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물과 불이라고 하는 한 짝의 대극(對極)을 뱀에게서 발견합니다. p97

 

기독교 이야기에서는 뱀이 유혹자로 등장하지요.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p97

 

여자를 죄인이라고 보는 관점은 다른 신화 체계에도 있습니까?

내가 아는 한은 없어요. 가장 가까운 것이 아마 판도라의 상자... 이로써 생긴 것은 죄악이 아니라 말썽일 뿐이지요. p97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超時間帶)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곳입니다. p100

 

대극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저희가 서로 다른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황급히 부끄러운 곳을 가립니다. 보세요. 그전에는 서로가 대극 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대극은 남녀뿐이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은 대극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3의 대극입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대극은 남성․여성의 대극, 신인(神人)이라는 대극입니다. 이 대극을 인식하게 되자 선악의 분별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는 이원성(二元性)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p101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p102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p102

 

하느님을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게 참 우스꽝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신의 권능은 성별에 우선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p103

 

밀교(密敎)에 따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p104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나위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p105

 

인류가 놀랍게도 공통의 신화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서 모든 이야기에 여자라는 금단의 과실 모티프가 등장한다는 점을 신화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랍니다. ...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p106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p107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p107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p107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일시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차이점이지요. p107

우리도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p109

 

태초에는 하나였는데, 이 하나가 분리되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생기고, 여자와 남자가 생겼다는 아주 기본적인 신화 모티프는 도처에 있습니다. ...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다. ... 그런데 이와는 다른 테마도 있어요. 인간은 천신(天神)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주제이지요. p110

 

이들이 밧줄을 당기면, 투욱, 밧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근원에서 멀어졌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렇게 근원에서 멀어진 것은 우리 마음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그 끊어진 밧줄을 다시 잇는 것이 되지요. p110

 

신화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가령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의 신화이지요. ... 창조 신화를 지어낸 아득한 옛날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지닌 은유적 성격을 지각할 만한 직관이 있었다는 것인지... 그럼요. p111

 

대개의 문화권에서 창조 신화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두세 개가 있어요. 사람들이 하나로 다루기는 하지만 <창세기>에도 사실은 두 개가 있지요. ... 이것은 아주 오랜 옛날 수메르에서 차용한 이야깁니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신들은 누군가가 동산을 볼보고 필요한 먹거리를 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사내를 창조합니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신화의 배경은 바로 이 수메르 신화인 것이죠. p112

 

아르스토파네스가 플라톤의 <향연(饗宴)>에서 조사하고 있는 그리스 전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태초에는 지금으로 보면 두 사람이 합쳐진 것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 있었어요. 이런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었어요. 즉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남성과 남성이 합쳐진 것, 여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이 그것입니다. p112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서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p114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p114

 

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p115

 

저는 이따금씩, 북아메리카 평원의 인디언이 미켈란젤로의 그림<천지창조>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퍽 궁금해지고는 합니다. p115

 

모든 종교에는 일장일단이 있지요.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 p116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의 진의를 좇으려고 할 경우에는 언어라는 껍질을 버려야 합니다. ... 천문학과 물리학은 하늘을 문자상(文字上)의, 단순한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p116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알파요 오메가인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p117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p117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 ...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p117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p118

 

예수는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했지만, 만일에 우리가 이런 소리를 한다면 참람(僭濫)한 독신(瀆神)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약 40년전에 이집트에서 발굴된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내 입을 통하여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역시 그와 같이 될 것이라.” 이것은 영락없는 불교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토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사고방식에서 보면 독신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노시스파 기독교나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기독교의 정수이기도 합니다. p118

 

재림과 대응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정죄(淨罪)입니다. ... 이 약점이라는 것이 곧 죄악입니다. 죄악은 의식을 한정시키고, 의식으로 하여금 온당하지 못한 조건에 얽매이게 하는 약점인 것입니다. 동양의 메타포에 따르면, ... 환생의 모나드는 동양 신화의 주인공인 셈이지요. p119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先見者)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p120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선견자는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합니다. p121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p122

 

상징의 마당은 백성 무리의 경험을 그 바탕으로 합니다. 특정한 사회, 특정한 시공(時空)을 함께 하는 무리는 같은 상징의 마당을 공유하지요. 신화는 문화와 시간, 장소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p123

 

시인들이지요. 시는 은유의 언어니까요. p123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p124

 

종교는 신비 체험을 이야기하는 대신 사회적 문제, 윤리적 문제를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지요. p125

 

이 성찬식에서 신도들은, ‘이것은 구세주의 살이고 피’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면을 향합니다. 그 내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역사(役事)하는 거지요. 교회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상을 가르칩니다. p125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적인 존재’라는 말은, 자연계 너머, 혹은 자연계 밖에 있는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뜻합니다. 이것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말로는 지나치게 유물적(唯物的)입니다. 하느님이 바깥 어딘가에 있는 일종의 영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p126

 

그러나 ‘초월자’라는 말의 본뜻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26

 

그노시스파 기독교에 따르면 야훼가 지닌 문제 중 하나는, 자기가 메타포라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훼는 자신을 메타포가 아닌 실체하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그가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했을 때 문득, “사마엘이여, 그건 오해니라”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겁니다. ‘사마엘’이라는 말은 ‘장님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음성은 야훼에게, 야훼가 영원한 광명의 국지적, 역사적 현현이라는 사시에 캄캄하다는 것을 지적한 거지요. 물론 이것은 야훼(스스로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한)에 대한 독신적인 에피소드로 유명합니다. p127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p132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으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들어 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p133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 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p133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p134

 

실제 행동의 장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뱀이 사람을 물려고 하면 우리는 뱀을 때려 죽이고 맙니다. 이 경우 우리가 부정한 것은 뱀이 아니라 그 상황입니다. p136

 

스승 되는 사람은 찾아오는 사람에게 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들은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p138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p139

 

3 태초의 이야기꾼들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41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p143

 

그리스 신화와 성서 신화를 떠올리지요. 이 두 문화권의 신화에는 신화의 인간화 경향이 있어요. 말하자면 인간에게 아주 큰 엑센트가 주어지지지요. 특히 그리스 신화는 인간성과 젊음의 아름다움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요. p143

 

사람은 죽임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관계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p145

 

따라서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p147

초기 신화는, 삶에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지요. p148

 

고대의 암벽화가 있는 동굴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요. 이러하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p156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p158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 형상은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형상이 전하는 메시지이지요. p159

 

어머니 젖으로 자라난 아이가 여기에서는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겁니다. 이로써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p160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를 일상성의 마당에서 ‘몰아낸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사제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곳, 그곳이 제단입니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제와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외계를 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제들이 성소를 돌려놓아 버렸어요. 세상과 오순도순 지내보자는 거겠지요. p166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神話化)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168

 

전통 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 민중의 문하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p168

 

샤먼은 남자든 여자든 소년기 후반, 혹은 청년기 초반에 심각한 심리적 격동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해버린 사람입니다. 이 격동은 일종의 정신분열증적 해리현상(解離現象)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샤먼의 무의식은 늘 열려 있습니다. 샤면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무의식에 빠져들 수 있지요. p168

 

우리가 신들림 혹은 빙령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체험합니다. ... 이런 것이 골반 근처에서 척추를 지나 머리로 올라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p170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를 몰아내지 않도록 주의하라 - 니체 p173

4 희생과 천복(天福)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177

 

그 안에 조그만 침대가 있고,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등이 있습디다. 조그만 문을 통해서 밖을 내답았더니 ‘검은 마돈나’가 그려진 채색창이 보이는 거예요. 그 양반은 그런 데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곳에 끊임없이 명상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었던 거지요. p185

 

그런데도 계속해서 성당에 가는지요? ...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줍니다. p187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p189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p190

 

그러나 샤먼의 권능은 그가 거느린 친교영신(親交靈神), 즉 샤먼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신들로 상징됩니다. 샤먼의 권위는 그 자신의 심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회가 부여한 성직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p190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샤먼은... 부족의 정주(定住)가 시작되면 샤먼은 무력(巫力)을 잃지요. p191

 

왜 유일신입니까?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요.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 사회 신을 중시한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은 자기네를 보호해주는 사회에만 헌신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父系)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母系적입니다. p193

 

인류의 농경화로 고대 사회의 재배와 수확에서 맡게 되는 여성의 몫이 커짐에 따라 여신 숭배 종교가 대두되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p193

 

그런데 이게 여성에게로 넘어옵니다.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p194

 

금수의 권능을 찾아서 씨 뿌린 대지를 찾아서 천상의 빛을 찾아서 사람을 찾아서 같은 말로 나타내려고 하신 것은 신화에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였겠군요? ... 바로 이 상징체계를 통하여 어떤 시대의 정상적인 인간 조건이 상징되고, 조직되고, 나타나는 것이지요. p194

 

인류의 생활 양태가 동물 사냥에서 식물 경작으로 바뀌면서 신화적 상상력에는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대단히 극적이고 전반적인 변화가 생기지요. 신화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p195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p195

 

그래서 소년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사냥하러 나가시지 않아도 됩니다”하고 말합니다. 이 부족에게는 바로 이 순간이 엄청난 깨달음의 순간이었을 테지요. 그러니까 소년의 환상 속에서는, 옥수수가 자라려면 먼저 그 젊은이가 땅에 묻혀야 했던 것이군요? 그래야 몸이 썩으면서 거기에서 옥수수가 자라 나올테니까요. p197

 

문화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같은 이야기가 퍼져 있을 수 있는 것이군요. ...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 밖에요. ... 농경문화권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인간이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표현입니다. p198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인류라면, 이들의 두 아들이 장가가게 될 즈음에는 이 세상 인구는 넷밖에 안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담의 며느리가 될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인간이 창조되는 것과 저쪽에서 인간이 창조되는 것은 별개인 모양입니다. p199

 

이 세상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네 민족의 이름은 인류를 의미하는 단어로 부르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는 ‘웃기는 얼굴’이라느니, ‘비뚤어진 코’니 하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붙인다는 겁니다. p200

 

이로쿼이즈 인디언 이야기에도 쌍둥이가 등장하는데, 이들 중 하나는 ‘싹’ 혹은 ‘나무 아이’이고 또 하나는 ‘부싯돌’입니다. ... 그런데 성서를 보면 ‘싹’은 카인이고, ‘부싯돌’은 아벨입니다. 성서에서는 아벨이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양치기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양치기와 농부는 서로 반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하는 것은 농부입니다. 이것은 농경문화권을 정복하고, 피정복자인 농경민들을 욕보인 수렵 민족, 혹은 유목 민족의 신화입니다. p200

 

그런데 성서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 아들이에요. 둘째아들은 나중 온 자 아닙니까? 즉 히브리인을 상징하지요. 둘째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 문화를 상징하지요. p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p201

 

이렇게 신을 죽이면, 바로 이 신, 바로 이 구세주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이지요. 미사의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구세주의 피요, 살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내면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 역사는 것이지요. p202 (뉴기니아에서 벌어지는 남성 비밀결사의 의례, 성년식)

 

그리스도는 ‘성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지요. 이 ‘성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긜스도 자신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던 두 번째 금단의 나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첫 번째 나무의 과실을 따먹자, 하느님은 이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 버리지요.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녀의 선악과 신인(神人)이라는 이원적인 구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永生)의 나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p203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p204

 

조화시켜야?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肉)으로는 죽고 영(靈)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p205

 

마야족의 공놀이, 마야 인디언은 의례의 마당에서 농구경기 비슷한 시합을 합니다. 승패가 결정되겠지요? 그러면 이긴 팀의 주장은 진 팀의 주장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물로 희생됩니다. 목을 잘리는 거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p205 cf. The winner takes it all.

 

선생님께서는 정말 목숨을 버리는 자가 새 삶을 얻는다고 믿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아닙니까.... 믿어요. p206

 

(17세기 동부캐나다로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의 보고, 적의 포로가 된 한 젊은 이로쿼이즈족 청년의 이야기) 이와 아주 흡사한 광경이 요한이 쓴 <경외 사도행전>에서 벌어집니다. 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이지요. ... 그러나 요한의 <경외전>에는 찬송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어요.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뜰로 나가기 직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말합니다. .. 나는 먹고 또 먹히리로다! ... 이 춤이 끝나고 뜰로 나가자 예수는 잡히는 몸이 되고, 곧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p208

 

이 세계는 원으로 되어 있다. 이 컬러 도판에 나오는 모든 원형 이미지는 마음(정신)을 상징한다. p209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인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하지요. 놀라운 것은 말이지요. 죽음의 신이자 생성의 신이기도 한 이런 신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해간다는 것이에요. ...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p209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편 에세이를 통하여... “사심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연의 제일가는 이법(理法)과 자기 보존을 기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가? p210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211

 

<신약성서>는 자기를 버릴 것을, 이 세상가 세상의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글자 그대로 죽음의 고통을 당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건 밀교적인 표현법이에요. 그런데 자살 역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p213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p217

 

제임스 조이스, <피네간의 경야>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로마서 11장 32절. 그리고 1132

 

중세에는, 이런 걸 체험한 사람은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했어요. 서구의 이단 중에서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이단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말을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어요. p221

 

신비주의자가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을 금욕과 죽음을 통하여 반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정통 신앙 사회의 기능이다. p221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2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일자리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런데 내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p225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6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긷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p227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227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조셉 켐벨 p229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p230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p230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p233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p237

 

옛날의 세계는, 영웅이 대적하러 달려나가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영웅의 영적인 준비에 반응하는 세계였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지금은, 우리의 물리학, 마르크시스트 사회학, 행동심리학 등을 통해 해석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p240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44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전형적인 모티프 중에 괴물을 죽이는 모티프가 있어요. ... 출발, 성취, 귀환...... 이것이 영웅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적이이죠. p249

 

예수이야기, 먼저 그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시대 정신의 극단으로 갑니다. 다음에는 현세이 문턱을 넘어 광야로 나가 40일을 견딥니다. 유태 전승에 따르면 40은 신화적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숫자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맸지요? 예수도 광야에서 40일을 견뎠어요. p255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신하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p263

 

<스타워즈>의 등장인물들이 쓰고 있는 가면은 현대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진짜 괴물스러운 힘을 상징합니다. 다스베이더의 가면이 벗겨졌을 때, 우리에게는 아직 완전한 개인으로발달하지 못한 미숙한 인간이 보였지요. ... 다스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것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p265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p265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p266

 

요나와 고래

고래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 이야기는 세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화 테마의 본 같은 겁니다. 물고기가 삼키는 바람에 영웅이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변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래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즉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의식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 즉 죽음과 부활의 테마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p268

 

또 하나의 유형에서 영웅은 어둠의 힘과 만날 경우 그것을 죽여버립니다. 용을 죽이는 영웅 지그프리트 이야기, 역시 용을 죽이는 영웅 성 게오르기우스 이야기가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하지요. 지그프리트는 용의 힘을 자기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용의 피를 마셔야 했지요. p270

 

저 위에 있는 늙은이는 바람에 날려가고 없어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p271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p273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p273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3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p273

 

그가 가진 것은 실밖에 없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 우리는 우리를 구해 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p275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p278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79

 

예술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호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p285

 

주님, 가야 할 때가 되면 일러주소서 p286

 

니르바나,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p296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p296

 

니체,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만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p298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p298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p299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p301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열 수 있습니까? p302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05

 

십자가로 다가감으로써 예수는 어머니를 이 땅에다 남겨두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대지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머니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도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p306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07

 

우리는 고대 유럽의 신석기 시대 조상을 무수히 발굴했지요. 다 여신상입니다. 남성상은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황소나 멧돼지나 염소 같은 동물은 남성적인 힘의 상징이지만, 이것을 시각화한 일은 별로 없어요. 시각화된 이미지는 오로지 여신 이미지뿐입니다. p308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 대신에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p312

 

제국주의 나라의 국민의 특징은 침략한 나라의 지역 신을 우주의 어정쩡한 촌뜨기로 만들어버린다는 거예요. p313

 

원초적인 존재의 몸을 잘라 우주를 빗는다는 이야기는 조금씩 모습이 다를 뿐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티프입니다. p313

 

성서에서는 여자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신명기>에는 여자에 관한 구절이 더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이방인에 관한 한 사정이 없지요. 그러나 위에서 재인용한 구절은, 사회 위주의 신화 체계 전통 중에서도 극단에 속하는 언명이지요. 말하자면 사랑과 자비는 무리 내적으로, 무력과 비방은 무리 외적으로 투사하라는 겁니다. p315

 

히브리인들은 여신에 대해 굉장히 강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구계 신화 체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인구계 신화를 보면 제우스는 여신들과 결혼합니다. 이로써 이 양자는 함께 신 노릇을 하는 겁니다. 성서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로서, 우리 서구인들의 여성 경시 풍조는 다분히 성서적 사고의 산물일 겁니다. p316

 

히브리 전통에는 처녀 수태 관념은 그리스 전통에서 기독교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처녀 수태가 언급된 복음서는 <누가복음>뿐입니다. 누가는 그리스인이에요. ... 레다는 백조를 통해서 수태하고 페르세포네는 뱀을 통해서 수태합니다. p318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p320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 p320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처녀성은 복원되었어요. 그러니까 마리아에게는 육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p322

 

오시리스의 죽음은 나일강의 연례적인 범람과 상징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땅은 바로 이 나일강의 범람을 통해 한 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을만큼 비옥해집니다. 그러니까 오시리스는 자기의 시체를 썩힘으로써 그 땅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p324

 

신의 죽음과 재생 이미지는 어느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이미지입니다. p328

 

바로 이 시점에 카톨릭 전통 속으로 히브리의 구세주 관념과 그리스의 구세주 관념이 흘러들어 옵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권능과 세속적인 권능의 통합을 상징하는 가부장제적이고 유일신적인 히브리의 구세주 관념과 처년신의 몸에서 태어나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하는 위대한 여신의 아들이라는 그리스의 고전적인 관념이 만나는 겁니다. 그리스는 부활하는 구세주 모티프가 굉장히 많은 곳이랍니다. p330

 

에게해에서 인더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광대한 지역에서 이 모신 이미지가 인류를 주도하지요. 그런데 북쪽으로부터 인구인들이 페르시아, 인도, 그리스, 이탈리아로 내려오면서부터는 남성 위주의 신화가 태동합니다. 남성 위주의 신화가 대두되는 지역은 인구인들이 내려온 지역과 거의 일치합니다. p331

 

“지구를 살리자”는 말이 곧 우리 자신을 살리자는 말일 수 있는 것이군요. p334

 

그러나 여신은 다릅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p336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 귀로 드 보르네이유, p339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 ... 하지만, 아모르적 사랑 역시 종교적 충동이 될 수 있어요. 결국 음유시인들은 아모르를 가장 고귀한 정신적 경험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p341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 p343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 크레도에 대한 리비도의 승리. p343

 

이 교리가 이번에는 무거운 짐이 되어 개인을 짓누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불복할 수도 없지요. 그것은 죄악이 되니까 개인의 내적인 면에도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되니까요. 삶의 의지를 이렇게 짓밟아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라는 겁니다. ...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p344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5

 

AMOR라는 단어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뜻하는 로마, 즉 ROMA를 거꾸로 쓴 것이 되고 말았네요. p346

 

그대는 죽음을 마셨다. p346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347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그러자면 용기가 필요했겠지요?” ‘하지요’ p349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p350

 

음유시인들의 의도는... 오히려 그들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간을 정제하 힘으로, 인간을 더 높은 존재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대놓고 찬양했다. 그들은 그 힘이, 사랑을 통하여, 개인의 고뇌와 기쁨을 통하여 마음을 인간 존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락으로 여는 것이라고 믿었다. p354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이 승화에의 의지예요. p355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p356

 

성배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관심이 떠나 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니다.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 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 <황무지>를 통해서 앨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p357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p358

 

유럽의 마음, 유럽의 삶은 바로 이 이분법에 의해 거세를 당하고 맙니다. 말하자면 물질과 정신의 화합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정신성은 죽음을 당하고 만 겁니다. p358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토마스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p358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것입니다. p359

 

그는 다시 성으로 돌아와 왕을 치료하려면, 병든 사회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질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입니다.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겁니다. p360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p360

 

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공존할 수 없을까요. .. 유럽 역사의 근본적인 충동은 권력충동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종교 전통으로 흘러 들어 왔어요. p362

 

세 번째 시대는 성령이 개인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시대라는 겁니다. 이 시대에는 말씀으로 된 메시지를 육화시키거나, 그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다 동등한 존재가 된다. 이게 바로 이 세 번째 시대의 핵심입니다. p363

 

토마에 의한 그노시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또한 그가 될 것이라.”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성배 전설은 바로 이러한 관념에서 출발합니다. p363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p365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p365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예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p365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p365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p369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하지요.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p370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곧 신의 임재입니다. / 사랑은 고통을 모른다. /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기꺼이 받겠다. /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딘다. p370

 

이 세상에도 지옥은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탄이 신의 애인이었다는 이 페르시아 신화를 좋아하는 겁니다. p371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p373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 p375

 

신비를 체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차원이 있다는 걸 압니다. ... 해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축,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p375

 

물론 지금은 천사나 마귀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죠. 천사나 마귀란,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충동을 의인화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p377

 

서구 사람들에게는 신을 인격화시키고 신에게 인간성을 보려 하는 경향이 있어요. <잠언>을 보면, 야훼만 해도 분노하는 신, 정의와 징벌의 신, 우리 삶을 버티어 주는 인정 많은 신 등으로 인격화하지요. 그러나 동양의 신들은 더욱 본질적이고 덜 인간적이에요. 동양의 신들은 서양의 신들보다 훨씬 자연력에 가깝지요. p378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 p379

 

우리가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p379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싲가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수태입니다. 이 처녀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p380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 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 p382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기독교인일 것 같습니까? .. 우리가 아는 종류의 기독교인은 아닐 겁니다. 명상을 통해서 고도로 영적인 신비와 만나는 은수사나 수녀들이 있는데, 예수도 아마 그런 기독교인이 될 겁니다. p383

 

베드로가 칼을 뽑아 하인의 귀를 자르자, 예수는 “베드로, 칼을 칼집에 다시 꽂아라”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칼을 뽑았어요. p383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기독교인일 것 같습니까?

명상을 통해서 고도로 영적인 신비와 만나는 은수사나 수녀들이 있는데, 예수도 아마 그런 기독교인이 될 겁니다. p383

 

토마의 복음서에는 “아버지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p386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p387

 

온 세상이 원입니다. .... 원은 한편으로는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 안에 드렁 있는 것은 모두 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원에는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디나고 갔다가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닏.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가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원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요. p389

돌고, 돌고, 또 돌 뿐이지요.

 

결혼반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둘을 서로 엮는다는 뜻입니다. 결혼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p391

 

신화를 읽다보면 문화권도 다르고 시간과 공간도 다른데, 늘 똑같은 이미저리가 떠오릅니다. ... 우리의 정신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 창조이야기, 같은 처녀 수태이야기, 죽었다가 부활하는 구세주 이야기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p393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 신은 인류의 종국적이고 본질적인 관념일 것입니다. ... 우리는 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원형이에요. p394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p395

 

종교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 비교종교학은 신앙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 겁니다. 왜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기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p396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작품이란 액자에 넣어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 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399

 

예수는, 자기는 이 세상에 칼을 가지고 왔노라고 합니다만... 저는 그의 칼을, 자아를 절개하는 칼로 이해하는데요. 그러니까 예수는 “너 자신에게 묶여 있는 자아를 잘라 자유롭게 하려고 칼을 가지고 왔다” p403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p411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p411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p412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p413

 

아버지의 왕국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 p413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p415

 

3. 내가 저자라면

 

1) 서문의 형식을 통해 저자를 잘 알고, 저자의 생각을 쉽게 소개하고자 한 점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에 독자로 하여금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2) 방송 대담형식으로 주제를 정해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서술한 점은, 방송국 대담이라기보다는 잘 짜여진 연극 대본 같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모이어스는 캠벨의 의견을 끌어내기도 하고, 장단을 맞추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주제의 본질로 이끄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군데군데,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준비된 질문들을 섞어가면서. 그 때문인지 책은 쉬운 주제가 아니면서도 매우 대중적인 눈높이와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 쉽게 읽힌다.

3) 1달러 지폐의 문장에 담긴 이야기, 예수의 승천이나 성찬식의미의 재해석 등은 대중적인 관심을 쉽게 끌어낼 수 있는 소재이면서도 그 해석의 깊이에서 캠벨의 지적 내공의 깊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1인 독백식의 책 구성보다 훨씬 박진감 넘치는 진행이 가능하게 하는 장치라고 읽힌다.

 

4) 그럼에도 다소 아쉬운 점은 좀 더 풍부한 상징과 기호를 통해 다양한 신화의 진수들이 소개되도록 구성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후속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각 주제별로 엮은 각 민족과 나라들의 신화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여행이 될 것이다.

 

5) 구조적인 약점이 있다. 넓게 다룰 수는 있지만, 심층적인 접근을 어렵게 한다. 아마도 이것은 대담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을 의식한 방송물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6) 아직 나는 <천의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일정한 신화의 모티프를 주제별로 다양한 신화 속에 나오는 공통점을 소개하는 방식은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조셉 켐벨에게 기대하는 진수는 거기에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사실 비교신화학의 정수가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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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선
2010.04.05 23:39:14 *.106.7.10
공책을 펴들고 한자 한자 꾹꾹 눌러쓰는 진철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
공력이 한자 한자 쌓이는만큼 우리의 마음도 한켜 한켜 깊어가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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