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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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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1일 06시 33분 등록

[북리뷰 10] 삼국유사

 

1. 저자(들)에 대하여

세 권의 책을 동시에 읽었다. 저자는 누구인가, 일연인가, 고운기, 양진인가. 고운기는 일연처럼 쓰고, 양진은 일연처럼 보았다. 글과 사진이 절묘하게 책 속으로, 신화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누구를 통해서 보고, 느낀다는 것. 작가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인 듯싶다. 1인칭으로 느끼고, 3인칭으로 보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2인칭을 통해서도 나를 읽어 낼 줄 알아야 할까보다. 그렇게 쓰여 지는 글의 저자는 누구인가.

 

고운기, 그는 누구일까.

 

양진, 그의 사진에는 고집이 있다. 하늘을 고집한다. 3분의 2가 넘게 하늘이 담겨져 있다. 파란색을 고집한다. 파란 하늘, 파란 바다. 자유를 꿈꾸는 이들의 눈은 하나같단 말인가. 삼국유사를 찍는 동안 그는 일연처럼 보려고 했고, 덕분에 그를 따라 훔쳐 본 나도 일연처럼 볼 수 있었다. 스스로를 ‘알바 사진가’라고 고집하는 그의 인생에는 고집이 있어 보인다. 그 고집이 엮어낼 그의 팔자와 그의 울음과 웃음을 떠올려 본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들어가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p3

 

무인들의 집권은 단순히 집권 자체로 끝나지 않았고 세계관에 변화를 주었다. 도저히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 p4

 

유학(儒學)을 기본으로 하는 선비들이야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한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 주는 데 반해, 승려들은 처움붜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禪宗)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먼저 이루어 사회로 퍼져나가게 했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 때 일연이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p5

 

곧 불교의 역사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자는 대목에서는 일치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 다시 말해 일연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설정된 부분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p7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유년한 몇 가지 점을 미리 밝혀 둔다.

첫째,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나는 그 배경을 설명해 주되,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둘째, 삼국유사에 실린 전체 조목 수는 약 140여개, 그것을 삼국유사의 순서대로 40개의 제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했다.

셋째,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은 삼국사기와 면밀히 비교해 보았고, 뒤는 승전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동안 삼국유사를 연구한 여러 선학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한편,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를 많이 참고했거니와, 여기에는 일본에서 정리해 놓은 여러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넷째, 삼국유사는 1290년경 일연에 의해 쓰여졌고, ... 그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국유사 본체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을 군데군데 설명하였다.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 그러나 최종적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다. 그런 사실을 명백히 해 두고, 삼국유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 p10

 

이 땅의 첫나라

그러나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챗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이야기가 책의 어느 한 구석에 밀려 있다면 첫머리에 실린 것과 의미가 다르다. p11

 

단군신화의 무엇이 그에게 그다지 중요했을까? 모두가 아는 ‘개천절 노래’의 첫 구절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고 쓴 이는 20세기에 들어 위당 정인보 선생이다. p11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 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가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유려한 한문으로 집필된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세월은 150여 년을 흘러야 했다. ... 크나 큰 나라 몽고와 20여 년에 걸친 전쟁도 겪었다. p12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다만 거기에도 무한정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p12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p12

 

그가 추구한 궁극의 이상은 한마디로 잘 나타나 있다.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이다. p16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p17

 

재미있게도 곰이 세운 치밀한 계획에 환웅이 한 발 한 발 말려들더니, 드디어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p18

 

 

 

그런데 일연은 기자가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거니와, 아예 ‘기자조선’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p20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는 그러한 상징이다. p21

 

우리에게 굳이 창세 신화가 없어서 서운하게 하기 때문은 아니다. 건국이냐 창세냐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관념의 소산이고, 그것은 특히 서양식 사고방식 아래서 그렇다. p21

 

삼국사기를 편찬한 다음 모든 자료를 없애 버렸다는 김부식의 행동 저편에는 이같은 의식이 잠재해 있을 것이다. p23

 

신라의 건국이다. ... 그러면서도 ‘삼국사기’는 바로 그 첫 부분에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울 무렵,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눠져 살고 있었다”고 적었다. 일연을 아쉽게 한 대목은 바로 거기였다. 김부식조차 언급한 그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p23

 

어쨌든 ‘삼국사기’가 외면한 이 책의 단군조선 부분을 일연이 관심 가진 것은 오직 여기서만 조선이 온전히 보였기 때문이다. p23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p24

 

13세기 이 나라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동명왕편’이라는 장편서사시를 쓴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p25

 

개성에서 강화도로 도성을 옮겨 몽고와의 전쟁을 치루던 고려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이다. 베이고, 불타고, 추위에 얼어 붙은 모습.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곳이 지금은 북한 땅인 개성 근방이다. (강화도) p27

 

위만이 연나라 출신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그가 본디 조선족 출신임을 더 내세우고자 한 것이고, 거기에 위만의 차림새를 굳이 내세우다보면 이러저러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일까?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p29

 

조선이라는 국호의 공통성 아래 어떤 끈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삼국유사’의 첫 부분을 대할 때 유의할 점이 여기에 있다. 일연이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이 땅의 첫 나라인 조선에 관한 대부분을 갈무리했다는 것이다.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중국 쪽 역사서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그것을 일연 나름대로 정리해 크게 두 개의 제목을 써서 정리한 것인데, 일관성과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p34

 

고구려와 북방계

조선의 시대 곧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여러 나라가 군웅할거하는 시대를 맞는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물리친 자리에 이른바 4군을 두는 때와 같은 시기인데, 나는 이것을 ‘한반도판 전국시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p35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p43

 

난생신화(卵生神話)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p43

 

신라와 남방계

본격적인 신라 이야기에 앞서 이런 내용을 붙인 것은 무슨 의도에서였을까? 아무래도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북방계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보이고자 해서인 것 같다. p54

 

하늘에서 알로 내려왔다는 혁거세의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선도산 성모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일연은 앞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조의 혁거세․알영부인 탄생이야기와 선도산 신모의 이야기를 하나로 붙여 보려는 것일까? p63

 

선도산 성모는 혁거세와 알영의 탄생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선도산 정상 부근에는 지금은 거의 부서졌으나 7세기쯤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이 있고, 바로 앞에 선도산 성모를 기리는 성모사가 있다. (사진설명) p64

 

선도산 신모는 어머니인 대신 다른 여자를 만들어 짝지어 준다. 그 여자가 곧 자신의 분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대체적으로 남쪽 지방의 산신 신앙의 구조가 이와 비슷하다고 할진대, 신라 왕조의 출발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명확해진다.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p68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어째서 탈해가 이토록 못난 인물로 그려지고 있을까?

사실 「가락국기」는 고려조에 들어 금관주 곧 지금의 김해 지방에 사는 문인이 가락국의 옛일을 적어 둔 것이다. 일연은 그것을 ‘삼국유사’에 옮겨 놓았을 뿐인데, 그러다 보니 수로를 추켜세우려 수로의 입장에서 전해져 온 이야기가 조금 과장되게 발전했을 수도 있다. 탈해를 한껏 낮추려 키까지 줄여가면서 말이다. p82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히미코라는 이름을 ‘삼국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신라본기’의 ‘아달라왕’조 20년(서기 173년)에, “왜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와 인사했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여기서 비미호는 한자가 조금 다를 뿐 바로 히미코다. 히미코는 누구일까? 일본 왕조의 계보에 나오지 않는 이 왕은 어디에 나라를 세우고, 이웃한 신라와 외교 관계를 가지려 했을까? p90

 

일본에서 히미코 신드롬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이씨는 소개하였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다. p91

 

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p92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다. 해와 달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느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p97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라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金現)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p101

 

일연은 귀비고, 영일현, 도기야의 작명 내력을 밝히며 끝을 맺는다. “비단을 왕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다.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이라 이름지었다. 또는 도기야라 한다”는 대목이다. 눈여겨보면 알겠지만, 이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한 곳의 이야기를 적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결법이다. p102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그래서 최근 세계 언어학계에서는 한국어를, 어족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말로 제쳐둔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뿌리 없는 말 취급을 받은 것 같아 꺼림직하지만 그다지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사실 그 지도에서 어족을 알 수 없기로는 일본어 또한 마찬가지로 그렸다. p103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바로 가서 율포 해변가에 이르렀다. 부인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올라타 있었다. 부인이 부르는 소리 간절하건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 뿐 머물지 않았다”고 일연은 쓰고 있다. p113

 

제상은 술을 가져다 미해에게 따라드렸다. p114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 쳐부숴야 할 구원(舊怨)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p119

 

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데로 향하여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걸리게 했다는 점만 유의하기로 하자. p119

 

밤에 찾아오는 손님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p121

 

이 유형의 이야기들이야말로 삼국시대의 비극적 영웅들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실감나게 전해 준다. 우리는 거기서 당대 사람들이 기이한 인물의 탄생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견훤의 탄생 설화는, 가까운 일본의 백제 영향권 아래의 지역에서 유포된 설화와 매우 비슷한 점을 보여, 설화를 통한 이동 경로를 추정하는 데도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p121

 

더욱이 두 사람이 합방하는 동안 “다섯 빛깔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는 것인데, 다섯 빛깔이 오방을 상징한다면 천하가 감싸준다는 것이고, 향기는 귀한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니,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징조다. 아니나 다를까, 천지가 진동하며 태어난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비형이다. p126

 

그런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달아나는 길달을 비형이 죽였다는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또다시 귀신 세계를 보는 당시의 사람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는 데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 p133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造化)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p134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커다란 지렁이와 연못의 용은 어떤 유사성이 있다. p135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p137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불교가 신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다. 「기이」편의 ‘거문고의 갑을 쏘라’조다. 소지왕 10년(488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교에 대한 신라인들의 거부감을 읽을 수 있다. p141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옹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p144

 

진자가 미륵상 앞에서 ‘부처님을 화랑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륵하생신앙인데, 화랑도에서 자연스럽게 불교가 접맥되는 순간인 것이다. p147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어떤 점에서 진지왕은 영민한 사람이다. p149

 

아홉 오랑캐를 무리치기 위해서 선덕여왕 대 만들었다는 황룡사 구층탑은 ...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사진, p151)

그는 터를 찍고 있지만, 그의 눈은 황룡사 9층 석탑을, 그 때처럼 바라보고 있는 일연의 눈으로 보고 있다. 먹구름 낀 파란 하늘에 찬란한 9층 석탑.

 

선덕여왕이 있는 낭산 신유림(神遊林)은 ‘신선들이 노는 곳’답게 ... (사진, P155)

소나무 숲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잘게 부서지는 햇빛에 눈이 간지럽다. 소나무 밭 향기가 베어난다. 사진에서 그의 땀 냄새가 묻어난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그런 영화배우 문희가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인 문희와 자꾸만 오버랩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야흐로 삼국 통일의 숨막히는 결전이 벌어지는 현장을 가며, 나는 뜻밖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P160

 

하지만 유신의 생각은 달랐다. 춘추의 왕위를 포기하자는 것도 문희와 결혼을 말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었다. 왕이 될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P171

 

두 남자 뒤에 숨은 한 여인의 그림자는 그만큼 짙어만 간다. 물론 이 여인은 문희다. 화려한 것을 받쳐줘야 하기에 속으로 인고하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 문희가 처음 여자는 아닌 것 같다. P175

 

그 여자가 춘추의 첫 부인일 것이다. 문희는 오라비의 어떤 계획에 따라 춘추와 맺어진 사이가 아닐까? 어쩌면 법민을 낳고도 정식 결혼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차가 있지 않을까?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벌인 해프닝을, 일연은 선덕왕 때의 일로 들었다 하고, 최재서는 진평왕 때라고 고쳐 놓았다. 문희의 뱃속에 법민을 품고 있을 때 이 일이 벌어지고 곧 결혼했다면 최재서의 정정이 옳다. 그러나 후처로 들어앉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 이제 웬만큼 힘을 얻은 유신이 끝내 처량한 동생의 처지를 참지 못하겠다고 나선 일이라면, 일연의 기록이 맞다. 상당한 시간이란 10년 남짓한 세월이다. 동생의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까?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기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 P177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푸른 달빛 아래 대왕암을 보게 되었다. 잔잔한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을 받으며 길게 누운 대왕암을 보는 순간 “아~”하는 작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사진, P188)

푸른 달빛 아래 대왕암을 보게 되었다. 잔잔한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을 받으며 길게 누운 대왕암 사진을 보는 순간 “아~”하는 작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이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보배’인지도 모른다. P189

 

권력의 끝

사마천의 사기에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 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모든 사냥개들이 다 잡혀 먹은 것은 아니었다. 사냥이 끝난 것을 안 지혜로운 사냥개들은 사냥이 끝난 후에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줄을 안다. 정치인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시대의 요구가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전쟁이 한창 일 때야, 일심단결 적을 때려 부수는 일이 우선이겠지만, 영원히 전쟁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일단, 그 순간이 오면 그 다음은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의 몫이지 군인의 몫이 아니다. 전쟁의 시기에 평화를 부르짖는 것이, 또 평화의 시기에 전쟁을 부르짖는 것이 비단, 옳고 그름을 떠나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목숨 걸어야 하는 일이지 않던가. 똑같이. 너무 억울해할 일만은 아니다.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신라 통일의 8할’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p205

 

더욱이 죽지랑은 성골,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특별한 집안 출신일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의 전쟁터를 숱하게 누빈 역전의 영웅이다. 그런 그에게 아간 벼슬아치가 대들고 있다. p211

 

신라 계급제 사회가 고착되어 병통을 보이는 후기에 이르면 급기야 육두품들이 반발로 나라가 바뀌게도 되지만, 효소왕 때라면 아직 제도와 기강이 튼튼한 전성기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설명하자니 이면을 더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화랑 출신들의 토사구팽이다. p211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p212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p219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p219

 

한마디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중구’란 곧 오늘날의 여론, 또는 민중의 소리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렇게 힘을 모을 방법으로 노래를 권하였다. p228

 

검푸른 동해 바다는 언제 봐도 시원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동해바다와 수로부인이 강릉까지 가며 보았던 그 바다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사진, p231)

 

첫 성전환증 환자

경덕왕이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감통」편의 ‘월명사의 도솔가’조를 읽으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문제를 던져 주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첫째, 월명사의 정체다. ... 그는 자신.. 화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승려가 된 것은, 통일 후의 화랑들이 신분 변화를 보이는 예 가운데 하나다. 둘째... 승려가 된 다음 굳이 인도식 염불을 외우지 않고도 승려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 그런데 굳이 향가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그것이 효과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라 불교의 주체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p240

 

구물거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ㅣ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p247

 

왕이 되는 자

같은 꿈을 놓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같은 뜻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왕위를 다투는 마당에 결과는 왕이 되거나 죽거나 어느 하나로 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는 길을 찾는 수 밖에. 여삼의 해몽이란 결국 살길을 찾으라는 말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p255

 

왕 즉위 4년에 실시된 독서삼품과는 그 대표적인 업적으로 볼 수 있다. 경전을 읽ㄱ 공부해 그 성취도에 따라 상,중,하의 3급으로 나누어 관직에 임명하는 이 제도는, 나중 고려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행한 과거제의 출발이나 다름없다. 골품제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는 집안의 신분에 따라 품계가 정해지고 관직에 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활 솜씨 하나로 사람을 선발했다고. 삼국사기에서는 말한다. ... 역시 기득권 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p261

 

나라가 망하는 징조

‘백제는 둥근 달이요, 신라는 새로 돋는 달’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입니다. 찼으니 이지러지지요, 새로 돋는 달이라는 것은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차 차오르지요.”

왕은 화가 나 그를 죽였다. 어떤 이가 말했다.

“둥근 달은 번성한 것이요 새로 돋는 달은 미미합니다. 아마도 우리 나라는 번성하고, 신라는 매우 미미하다는 뜻이겠지요.” 왕은 기뻐하였다. p270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객관적 사실만 나열시켜 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p272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77

 

처용은 정말로 용의 자식인가? .. 앞서 말한 무속적인 것 외에도 지방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 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두는 기인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 제도의 볼모다. 한편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p281

 

일연은 918년과 919년으로 나누어 훨씬 자세히 적었다. 게다가 ‘짖어대는 것 같은 소리’와 ‘짖었다’는 분명 다르거니와, 여기서도 삼국사기가 지키려는 합리적 사고 방식의 한 단면을 읽게 되는데, 기왕의 기이한 사건을 한층 극적으로 전하려는 데서 일연의 태도에 더 매력을 느낀다. p286

 

지는 해 뜨는 해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p287

 

연나라 단(丹)이 피 흘려 우니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鄒衍)이 스픔을 머금으니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네

이제 내가 길을 잃음이 예와 같으나

하늘은 어쩐 일로 좋은 소식 주지 않는가 p289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p289

 

배를 타고 가던 일행이 풍랑을 만나자, 일종의 제비뽑기로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요나 이야기와 닮았다. 물론 배를 타는 계기는 다르지만, 배를 탄 본디 목적과 다른 행로를 밟게 된 이 사람이 결국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비슷하다. p293

 

조의 제목에서 왜 굳이 이 시호를 쓰지 않고 김부대왕이라 하였을까?

견훤은 왕의 집안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경애왕의 시신이 서당에 안치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통곡해마지 않았다. 우리 태조 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p296

 

그러나 신라 왕조를 마감하는 김부식의 사론은 그가 감당하고자 했던 시대적 사명고 자신의 논리가 잘 들어가 있는 문장이다. 그에게는 그만의 고민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관점에서 내리는 평가란 또 하나의 주관적 주장이 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일연은 오히려 올바른 김부식의 팬이었다. 좋은 부분을 인용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놓고 비판하다거나 굳이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았다. 김부식의 이 사론에서도 일연은 필요한 곳에 적절히 옮겨다 쓰고 있다. p304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 이같은 현상은 사실 일연이 살았던 고려 말과 무척 닮았다. p304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고려시대 지식인들이 삼국의 적자로 신라를 인정했을 뿐, 그렇다면 다른 두 나라를 그 부속품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섭섭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p307

 

그러나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일까? 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우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 보면 사실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p309

 

1999년 말, 일본문화사 전공의 홍윤기 교수는 한일동족설을 주장하는 재미있는 글을 발표했다. .. 백제와 일본 왕실의 관계를 금석학 쪽의 자료를 가지고 매우 치밀하게 밝힌 것이어서 흥미롭다. p319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讖謠)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은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 놓기 십상이었다. p327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 첫머리다. 기이한 출생,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그 때문에 받는 고난 등의 배치가 그렇다. p329

 

일연이 적고 있는 ‘남쪽 연못가의 용’이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면, 용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법왕일 것이다. 왕족이긴 하나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닌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는 떳떳이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살지 못했으리라. 더욱이 과부의 신분으로 말이다. p329

 

이런 종류의 노래를, 어린 아이들이 불렀다는 데에서 동요,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목적한 상황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상정하고 있다는 데에서 참요 또는 예언요라고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동요요 참요라고 할 수 있다. p331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거기에 제3의 조력자로 지명법사가 등장한다. 그의 도움은 서동과 공주 두 사람만의 조화에서 공주의 부모까지 아우르는 화해로 확대되고, 왕이 되었다는 마지막 대목은 이런 것들의 조화가 빚어내는 당연한 결과다. 우리는 여기서 등장인물을 적절하게 배역시킨 완벽한 드라마를 볼 수 있다. p334

 

그러나 실은 무왕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이렇듯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것 또한 이 이야기가 설화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부분이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는 「숯굽는 부자 이야기」가 있다. ... 한편 중국에는 자기 복을 자기가 타고 났다고 말해 쫓겨난 공주의 이야기가 있다. p336

 

이야기의 사실성을 인정하는 쪽에 서다 보니, 삼국시대 말기에 발전하는 불교의 미륵 사상과 관련시켜, 서동의 선화공주 빼앗아 오기를 미륵보살 쟁탈전으로 해석하는 재미있는 견해도 나왔다. p338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p343

 

더욱이 선화공주가 미륵보살을 만나고 그의 발원으로 미륵사가 서는 데에 이르러 보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미륵상 셋과 회전, 탑, 낭무를 각기 세 군데에 세웠다’는 미륵사의 가람구조는 미륵 사상의 삼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 같은 구조는 황룡사의 조성으로, 다시 일본 나라의 동대사의 조성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p346

 

견훤, 비운의 영웅

첫째는 삼국사기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인데 본래 성은 이씨였지만 나중 견씨로 고쳤고, 아버지 아자개, 농사꾼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고기’다. 여기에 저 유명한 커다란 지렁이 설화가 나온다. p349

 

그것은 마치 초 항우와 한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하다. 역발산 기개세라 한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나 꼬리를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p358

 

가엾은 아이가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반역이 일어나던 당일 아침의 풍경을 그린 것이면서, 오늘날 우리가 ‘완산요’라고 부르는 노래의 출전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서 ‘가엾은 완산 아이’가 뜻하는 바는 참으로 여러 가지다. 앞서 견훤을 가운데 둔 3대의 불화를 서술했지만, 완산 아이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견훤일 수도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나 아들 신검 아니면 죽은 아들 금강일 수도 있다. 부자간에 벌어진 반역의 마당에 거기 가엽지 않을 이 누구이겠는가? 짤막한 노래 하나 등장시켜, 견훤의 말년을 실감나게 그린 일연다운 솜씨를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p360

 

신비의 왕조, 가야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p365

 

 

 

불교로 보는 역사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낙산사의 힘

 

운문사 이야기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의상, 화엄의 마루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밀교의 한 자락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숨어 사는 이의 멋

 

불교가 보는 효도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다음날 새벽 4시 3분에 도착. 대구 시내 사보이 호텔 사우나에서 몸을 씻음. 이것은 우리들의 성스러운 작업을 위한 재계행사. p743

 

닥치는 대로 타고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차가 없으면 무작정 걸으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7백년 전으로 돌아가 일연도 걸었을 그 때 그 길을 그려보기도 했고, 탑만 남은 빈 터에 절을 일으켰다가 허물기도 수 없이 했다. 물론 그보다 많은 시간을 서로의 옛 애인을 추억하며 술잔을 기울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3~4년을 쏘다니다가 나는 결혼을 했고, 카메라를 잠시 손에서 놓았다. p743

 

그로부터 몇 년 지나, 나는 ‘삼국유사’ 사진 찍기를 다시 시작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마음이 동하면 그 날로 길을 떠나 혼자 참 많이 다녔다.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 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 p743

 

지금 나는 사진 찍기와는 조금 떨어진 일을 하며 지낸다. 그래도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내가 즐기는 것 가운데 가장 신나는 놀이다. ... 일연의 글처럼, ‘솥 안의 국맛’을 책임지는 특별한 ‘한 점 고기’같은 사진 만들기. 희망사항이다. ... 나라고 못하란 법 없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날보다 카메라 가방 매고 쏘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이 책이 히트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p744

그로부터 8년, 양진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다행이다.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고, 지난 해에는 영남대학교에서 ‘길 위에 삼국유사’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도 했던 모양이다. 그의 팬이 될 것 같다.

 

 

3. 내가 저자(들이)라면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고, 어떻게 볼 것인지, 누구의 눈으로 보게 할 것인지. 일연의 눈처럼 보고, 일연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일연처럼 쓰려고 일연이 다닌 길을 더듬어 다니고. 글은 쓰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몸으로 배끼는 것인가 보다. 내 몸에서 나는 땀냄새를 통해, 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글이 써보고 싶다.

 

그는 천상 글쟁이인가 보다.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그는 일연이 어떻게 답사한 곳의 이야기를 매듭짓는 지를 유심히 보고 있다. 그가 일연이 되어 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글을 써보고 사진을 찍었다. 책 속에서 7백년 시간을 거슬러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는 그들을 길 위에서 만나고 싶었다. 경주에도 가고, 부석사에도 가고, 부여에도 다시 가고 싶어졌다. 마음이 바빠졌다.

 

나는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사진의 힘과 맛. 고운기, 양진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글을 시작하면서 그는 현실 속에서 독자들과 신화를 연결할 수 있는 친숙한 코드를 찾아 접근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히미코’라는 일본의 여자 프로레슬러 이야기가 그러하고, ‘문희’라는 60년대 후반의 여자배우 이야기도 그렇다. 이는 글을 독자의 눈높이에서 풀어가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어떤 의도가 담겨져 있어 보인다. 즉, 신화가 현실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일종의 메시지로 읽힌다.

 

하드커버, 가격, 표지디자인, 볼륨, 부록CD 어디까지가 작가의 영역인가?

 

 

 

IP *.186.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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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5.11 06:37:11 *.186.58.4
정해 준 시간을 못 지킬 것 같다... 그래도 즐기면서 보고 싶다. 
언제 다시 오게 될 줄 모르는 이 시간
두번 다시 지금처럼 느끼지 못할 거 같아서...
......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프로필 이미지
2010.05.11 09:39:30 *.106.7.10
화!이!팅!
양진 작가의 사진에서 새로운 감성를 읽어낸 오빠에게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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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5.12 23:09:54 *.34.224.87
독특한 시각,
신진철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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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8:22:44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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