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2010년 5월 14일 06시 35분 등록
 

카를 융 기억 꿈 사상-20100514



1. 저자에 대하여


카를 구스타프 융(Jung, Carl Gustav)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케스빌~1961년 6월 6일 퀴스나흐트. 스위스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Carl Gustav Jung은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케스빌(Swiss Kesswil)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양친의 조상들은 모두 다 학자였다. 그는 그의 고향 도시인 바젤(Bassel)에서 학교를 다녔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바젤대학교(1895~1900)와  취리히대학교(1902 의학박사)에서 공부한 후 1900년 그는 취리히대학교 부설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당시 이 병원의 원장이었던 오이겐 블로일러는 오늘날 정신병의 고전적 연구로 평가되는 심리학적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부르크횔츨리에서 융은 이전의 연구자들이 시작한 연상검사를 매우 성공적으로 응용했다. 후에 그는 이 대학병원 정신과 과장이 되었다.

그 후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아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웠고 외향성·내향성 성격, 원형(原型), 집단무의식 등의 개념을 제시하고, 발전시켰다. 그의 업적은 정신의학과 종교·문학 관련 분야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연구로 융이 정신과 의사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후, 그의 연구는 프로이트의 많은 생각을 확증해 주었고 1907~12년 두 사람은 공동 작업을 했다. 융은 정신분석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사람들은 그가 정신분석을 창시한 프로이트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기대는 그들의 관계가 틀어짐에 따라 무산되었다. 성격과 견해 차이 때문에 그들의 공동연구는 5년 만에 끝났다. 그들의 관계가 깨어지고 난후 융은 한동안 학자들 간에서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아야했다. 융은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나, 1914년 이 학회에서 탈퇴했다.


융은 자신의 견해, 특히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발전시키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는 심리치료자가 치료를 성공적으로 하려면 옛 거장들의 작품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융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심리치료법을 개발하고 이를 이론화했을 뿐 아니라, 이른바 연금술의 전통에 새롭게 중요성을 부과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의식의 발달에 필요한 역사적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지주의파에서 시작해 연금술에 이르는 이교도 운동을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적절히 표현되지 못한 무의식의 원형적 요소들이 표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특히 현대의 꿈이나 환상에도 연금술에서와 같은 상징들이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연금술사들이 집단무의식에 대한 일종의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융의 역사 연구는 중년과 노년, 특히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환자들을 도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위치를 평가하게 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믿음을 상실했는데, 융은 그들이 꿈이나 상상을 통해 표현되는 그들 자신의 신화를 발견한다면 더 완전한 인격체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과정을 개체화라 불렀다.

개인적 경험, 계속된 심리치료,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인해 그는 시사논평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고 한다. 1918년에 이미 그는 독일이 유럽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나치 혁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견해를 많이 피력했기 때문에 나치 지지자로 잘못 평가되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그는 단순한 것들, 즉 그가 자란 스위스의 시골, 농부, 전원생활 등을 사랑했다. 그와 아내 에마는 취리히 호숫가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에마는 저명한 방문객들의 안주인 노릇을 했고 남편의 연구를 도왔으며, 그녀 나름의 독창적인 일도 했다.


융의 사상 중 특히 동양사상과 심리학의 연관성을 연구한 부분은 내게 흥미를 끌었다. 융은 동서양의 종교와 학문에 대해 “서양이 하나의 새로운 병인 학문과 신앙 사의의 갈등을 만들어 냈지만 동양에서는 종교와 학문사이의 갈등은 없다”라고 했다. 이미 융이 동양 사상의 통합성에 대해 심취되어 있었고, 우수성을 이해한 듯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동양에서는 어떠한 학문도 사실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어떠한 종교도 단순한 믿음을 근거로 하지 않아서 동양에는 종교적 인식이 있고 인식하는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어느 동양인 학자 못지않게, 오히려 그 이상으로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깊이 있게 잘 이해했던 듯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易經>에 관해서는 책표지가 헤어질 정도로 읽었고, <도덕경><티베트의 사자>그리고 요가나 禪에 관해서도 철저히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융은 영국 BBC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그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질문 “융,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나는 신을 안다”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융의 이 대답에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이런 대답을 한 것은 믿음의 완성이 궁극적으로는 앎의 완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해온 동양사상의 입장에 이미 깊이 심취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대답이 아니었을까? 하고 유추해본다. 


대표적인 저술로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황금꽃의 비밀』 『 정신의 에너지에 대하여』 『심리학과 종교』 『심리학과 연금술』 『아이온』 『욥에의 회답』 『인간과 상징』 등이 있다.




2. 내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 서문


[P. 8] 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융이 한문장 한문장 손을 보았으므로 거의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 8]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精髓)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P. 9]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한 마디로 규정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자기 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그와 같이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4세 무렵에 꾼 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대목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P. 9] 이 책은 한 인간의 정신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깊고 넓을 수 있는가를 인상 깊게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의 존재를 심리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저서라고 할 만하다.

[P. 10]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섣불리 신에게 접근했다가는 어떤 위험스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그렇게 위험스럽긴 하지만 신은 탐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위험’인것이다.

[P. 10] 카를 융이 죽기 2년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융에게 신을 아느냐고 물었다................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P. 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selbst: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P. 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P. 12] 그래서 이제 나이 83세에 나는 내 생애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일을 감행하게 되었다. 나는 단지 직접적인 진술, 즉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들이 사실 그대로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나의‘ 옛이야기, ’나의‘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P. 13] 인간의 생애는 일종의 애매한 실험이다, 그것은 숫자상으로만 보면 거창한 현상이다.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며,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

[P. 14]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무제에 고나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는 외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빈약한 편이다. 

[P. 15]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일생을 사로잡은 꿈 : 유년시절

[P. 23] 나의 기억은 두세 살 적부터 시작되다.

[P. 23] 아마도 내 생애에서 최초라고 할 만한 한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 기억은 자못 흐릿한 인상으로만 남아 있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 유모차에 누워 있다.

[P. 26] 그 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감을 뜻하기도 했다.

[P. 30] 반복되는 이런 생각들은 내 의식의 첫 외상(Trauma)으로 이어졌다. 

[P. 31]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초의 꿈을 우연히 꾸었다. 그 꿈은 이를테면 일생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서너 살이었다.

[P. 50] 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기독교적 의미로 종교적이었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 학창시절

[P. 53]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P. 56] 이러한 갈등에서 행방되기 위하여 나는 좋든 싫든 부모님을 판정해야 하는 상위의 중재재판관 역할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일종의 자만심이 야기했다. 그 자만심은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는 자존심을 부추기기도 하고 동시에 약화시키기도 했다.

[P. 61] 아무도 나에게 수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는 그러한 의문을 조리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나의 어려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P. 67]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만,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P. 73]따라서 나는 항상 무엇이 내게 닥치는지,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알고 싶어했다. 아마도 이것은 수개월 동안 나를 버렸던 어머니와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P. 74]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인가? 살인? 아니다. 그것일 수 없다.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죄를 짓은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P. 81] 내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는 체험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로, 아버지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깊은 신앙심을 내세워 그 의지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의 기적을 아버지는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성서의 계명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성서에 씌여짔고, 조상들의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서 직접 임하시는 하느님, 성서와 교회를 넘어서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느님, 당신의 자유를 인간이 누리도록 촉구하고, 당신의 요청을 무조건 실현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와 신념들을 버리도록 강요할 수도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P. 81]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P. 82]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느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P. 84]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샅샅이 뒤져 하느님 삼위일체 영혼, 의식 들에 관한 책이면 무엇이든 읽어나갔다. 그 책들을 모조리 탐독했으나 그것으로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또다시 ‘이 사람들도 모르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P. 87]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P. 91] 나의 전생애에 걸친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간의 대립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 말하는 그런 ‘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즉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제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제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P. 91-92]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 92] 악마는 오랫동안 내 생각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P. 93] 하느님 이외에 그 누구도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P. 95]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P. 96]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증명되었다. 나는 확신을 붙든 적이 없었으나 확신이 나를 붙들어주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신념에 종종 대항하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P. 10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안간적인 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P. 109-110]나는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 나의 의지보다 강한 의지가 그 둘을 나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그럼 자연이 내 안에서 그랬던 갓인가? 그러나 자연은 창조주의 의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P. 111]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113] "하느님의 초세계적 속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첫째 부정적인 표현: 하느님이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등등 둘째 긍정적인 표현: 하느님이 천국을 거주지로 삼고있다 등등"

[P. 114] 하느님은 그 전능한 힘으로 피조물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P. 120]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어는가? ......... 그 어느것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로부터 나의 관념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 즉 생각해서 고안해낸 어떤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상상하고 생각해서 고안해내고, 그러고 나서 믿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어떻게 하느님이 나에게는 자명(自明)한 것이 되었을까?

[P. 121]그 무렵 나는 하느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경험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P. 124]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왜 학식있는 책들 가운데 여기에 관한 것은 없단 말인가? 내가 그런 경험을 한 유일한 인간이란 말인가? 왜 내가 그 유일한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가? 내가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P. 128] 나자신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이 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별들과 끝없는 우주의 장엄한 세계의 숨결이 나에게 닿은 것 같았으며, 또한 오래전에 죽었으나  아직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게 몰래 방안으로 들어와 있는것 같기도 했다. 일ㄴ 종류의 급전은 누멘의 후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P. 133] 그런데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이것들을 다른 모든 사람은 거의 주목하지 않은 것 같았으며, 항상 조화와 이해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P. 134] 그가 사용하는 ‘의지’라는 말이 사실은 신과 창조주를 뜻한다는 것과, 그가 이를 ‘맹목적’일고 일컫는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때 신은 어떤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어둠과 불경스러움도 갖도록 신성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할 수 잇다는 것을  알았다. 

[P. 136] 나 자신이 바라는 바를 알고 그것을 붙잡으려고 했다. ....또한 나는 확실히 붙임성이 있고 속이 트인 사람이 되었다. ..........행복과 불행은 용돈의 액수보다 더 깊은 원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내 발을 받쳐주는 훨씬 든든한 기반을 느끼며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고 후회하게 되었다.

[P. 138] ’신‘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P. 156]'정신'이란 물론 내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마음 속 갚은 곳에서는 아주 희석된 공기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다.

[P. 157] 이와같이 환상에 빠져 수개월을 매우 즐겁게 지내다가 결국 싫증이 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환상이라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시간들 : 대학시절

[P. 164] 아버지가 무척 걱정하며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나 자신이 무엇을 할지는 모르고 있어.” 나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P. 166] '결코 따라해서는 안된다'이것이 나의 신조였다.

[P. 166]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내게 확고했으나 다만 어떻게 공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P. 167]제1의 인격의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보통 수준의 재능을 갖춘 청년으로, 허황된 야심과 세련되지 못한 기질, 모호한 태도 들을 지니고 있었다. 즉시 천진난만할 정도로 흥분하는가 하면, 또 금방 변덕스럽게 유치한 실망에 빠지기도 했다. 깊은 내적인 본질로는 세상에 등을 돌린 반계몽주의자였다.

[P. 167]제2의 인격을 제1의 인격을 까다롭고 배은 망덕한 도덕적 과제, 종결되어야 할 일종의 숙제로 여겼다.

[P. 170] 나는 제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 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P. 173-174]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불확실감이 생겨난다.

[P. 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P. 176]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P. 178] 어떤 특별한 것이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으며, 짐작컨대 그것은 아버지의 종교적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일련의 암시들을 통해 그것이 종교적인 회의라는 것을 확신했다. 필요한 체험이 아버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여겨졌다. 

[P. 186]나는 궁핍한 시절을 굳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시잘에는 하찮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언젠가 여송연 한통을 선물로 받은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왕자가 된듯한 기분이었다. 그 여송연은 일요일에만 한 대씩 피웠기 때문에 1년이나 피웠다.

[P. 193]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마음이 언급된 곳에도 마음에 관한 진정한 지식은 없었다.

[P. 199]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트라였다.  [P. 199-200] 니체는 인생 후반, 그러니까 중년을 넘기고서야 제2의 인격을 비로소 발견했으나, 거기에 반해 나는 제2의 인격을 이미 소년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니체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되는 아르헤톤에 대해, 마치 만사가 순조로운 것처럼 순진하게 조심성없이 말했다.

[P. 200]그는 제2의 인격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에다 그것을 거리낌없이 앞뒤 재지도 않고 밝혀버렸다.

[P. 201]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P. 201]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P. 201] 나는 새로운 관념이나 단지 특이한 측면까지도 오직 사실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실들은 남아있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책상 밑에 버려져 있지 않고 언젠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만나게 되고, 그는 자기가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P. 202] 나는 더 나은 방법이 정말 없어 사실들을 제시하는 대신 말만 늘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사실들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중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전보다 더 경험주의로 치우치게 되었다. 나는 철학자들을 좋지 않게 여겼다.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P. 210]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P. 211]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P. 213] 나의 첫 저서는 조발성치며(정신분열증)의 심리학에 헌정되었다. 그 책에서 내 인격이 선입견을 지닌 채로 이러한 ‘인격의 병’에 대하여 대답을 한 셈이다.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그런데 치료자 인격이라는 것도 병든 인격과 마찬가지로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P. 221]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의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은‘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화급한 의문이었다.

[P. 221] 정신의학강의가 목표로 하는 것은 병든 인격에 관해 소위 추상화를 하고 진단과 증상의 기록, 통계로 만족하는 정도였다.

[P. 222]프로이트 자신은 정신의학자가 아니고 신경학자였지만 심리적인 문제를 정신의학에 도입했다.    

[P. 225-226]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환자는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의사를 단지 그 비밀스러운 사연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를 터득해야만 한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P. 235] 살인범은 이니 자기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셈이다. .......... 부인은 살인으로 인해 심지어 동물에게도 소외되었고, 견딜 수 없이 고독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P. 236] 임상적 진단은 어떤 방향설정을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P. 241]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 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P. 247] 그후 나는 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들의 내적 체험의 의미있는 현상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 249]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된다.

[P. 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P. 250-251]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를 주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P. 251] 교육분석에서 의사가 개념체계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의사는 피부석자로서 분석이 바로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P. 252]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P. 253] 나는 의사로서 환자가 나에게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 항상 자문해야 한다. 환자가 나에게 무엇을 예시하는가? 환자가 나에게 아무것도 예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공격목표가 없는 셈이다. 의사는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할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이다. ‘상처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나는 나의 환자들을 진지하게 다룬다. 아마 나도 그들과 똑같은 문제 직면해 있는지 모른다. 환자가 의사의 약한 부분을 덮어주는 적절한 고약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P. 253] 모든 치료자는 제3자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관점도 가지게 된다.

[P. 254] "당신은 분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선 자기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P. 259]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P. 260]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P. 261]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아고 있었던 셈이다.

[P. 264]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P. 270] 우리시대에 이와같이 마음의 분열로 희생된 자들은 단지 ‘스스러 택한 신경증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발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P. 272] 나의 환자들과 피분석자들은 나를 인간적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여, 그것에 관한 본질적인 것들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심리적 수준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유명인사들과의 단편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P. 275] 나의 정신적 발달을 향한 모험은 정신과의사가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채 나는 정신병 환자를 임상적으로 밖에서부터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성질의 정신 과정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기록하고 분류했지만 그 내용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P. 276]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고 나는 억압기제가 연상장애에도 작용하고 있으며. 내가 관찰해온 사실들이 그의 이론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프로이트의 논지를 단지 지지할 수 있었다. 억압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P. 277-278] "네가 그와 같이 프로이트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 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사람은 인생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다.“ 그리하여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후로 나는 공공연히 프로이트 편에서서 그를 위해 싸웠다.

[P. 282-283] 심리적으로 강력한 공포의 대상에 ‘신적’이거나 ‘악마적’d;s 속성이 부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에게는 ‘성적 리비도(Lobido)’가 ‘숨은 신’의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P. 284] 자기가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어 있을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P. 287]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 :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P. 288] 모든 것이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P. 295]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P. 307] 마음을 탐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너무나도 인간적인’것 외에 다른것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P. 308] 인간은 어떤 삶의 방식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다.

[P. 311]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신경증 환자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들의 독특한 개인적인 심리를 파고들어간데 있을 것이다. 



내 안의 여인 아니마

[P 315]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얼마동안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방향상실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완전히 허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P. 315-316] 나는 이론적인 관점을 모두 접어두고 환자가 꿈의 이미지를 스스로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나는 꿈을 다룰 때 이와 같은 방식을 꿈해석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바로 그것이 꿈이 의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사실이다.

[P. 320]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P. 326]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나의 실험을 통해 나는 감정 배후에 숨은 이미지를 의식화시키는 것이 치료의 관점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P. 327-328]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돕는 자가 환자 옆에 있지 않느냐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소위 돕는 자인 나는 환자의 황상 내용을 나 자신의 견지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거기에 대해 쓸모도 별로 없는 몇 가지 이론적인 편견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나 개인뿐 아니라 나의 환자를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자청해서 한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게 했다.

[P. 332]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도 그와 같이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P. 334]살로메는 하나의 아니마 형상이다.

[P. 339]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내가 아닌 어떤 하나의 인격을 이루었고, 그것이 자신만의 고유한 견해를 말로 표현하는가 보다.“

[P. 341]“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P. 341]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의 내용을 이를테면 격리를 시켜야 한다. 극서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 내용에서 힘을 행사하게 된다.  

[P. 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P. 343]그런데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이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P. 345]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P. 372]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었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나의 세계였다. 이것은 물론 나에게는 바람직한 발견이었다. 이것으로 내 무의식의 심리학은 역사에서 대응물을 만나게된 셈이었다. 이제 나의 심리학은 역사적 토대를 얻게 되었다.

[P. 376-377] 심리학도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취급한다. 말하자면 강도의 측정, 양의 많고 적음을 다룬다. 그런데 나타나는 형태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리비도를 에너지로 본다면 일종의 통일된 관점을 갖게 된다. 그러면 리비도의 성질에 관한 논쟁적인 질문, 즉 그것이 성이냐 권력이냐 배고픔이냐, 그밖의 것이냐 하는 질문들은 별로 주요하지 않게된다. 

[P. 388] 상처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P. 394]인간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 398]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P. 401]학문적 탐구를 통해 나는 차츰 나의 환상과 무의식 내용의 토대를 세울 수 있었다. 

[P. 417-418]집단적인 문제가 집단적인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을때는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처럼 보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 정신영역에서 뭔가 혼란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P. 420-421]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P. 421]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않는다.

[P. 422]“모든 성급함은 마귀에서 나온다.”

[P. 422-423] '이 책에서 나는 나 자신의 주관적 세계관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세계관은 내가 이성적으로 궁리하고 자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반쯤 감은 눈과 반쯤 닫은 귀로 존재의 형상과 소리를 보고 듣고자 시도할 때 생기는 하나의 환상이다.



여행

[P. 431] 우리가 사하라로 들어갈수록 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 시간이 거꾸로 가도록 위협 당하고 있는듯했다. 열기가 진동하며 점점 높아지는 바람에 나는 그만 몽롱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P. 434]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P. 452]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P. 453]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것은 모두 좋다. -루소 

[P. 457]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내가 보이지 않게 창조행위를 하고 있는 그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로 완성되도록 해주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창조주의 몫으로만 돌려왔다. 

[P. 458] 인간의 의식은 비로소 객관적 실재와 의미를 만들어냈으며 이로써 인간은 그의 위대한 존재 확립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P. 463] 나의 흑인들은 대부분 뛰어난 성격감정가임이 증명되었다. 그들의 직관적인 인식방법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말씨, 몸짓, 걸음걸이를 기가 막히게 흉내내면서,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데 놀랐다.

[P. 491]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P. 491]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P. 495]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P. 507]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先史)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의 선사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P. 508] 사람들이 이미 있던 무의식 내용을 의식에 통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환상들

[P. 515] 내가 마음 먹고 바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세속적 생활의 모든 환각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거나 제거되었다. 그것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그런 중에도 뭔가 남는 것이 있었다. 

[P. 525]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도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P. 526-527] 병을 앓은 후에 나에게는 왕성한 연구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많은 주요저작이 그후에 비로소 출간되었다. 만물의 종말에 관한 인식 내지는 직관으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나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리하여 문제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무르익으면서 형상화되었다.

[P. 527]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P. 527]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길은 죽은 자의 길일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P. 527-528]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P. 533]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애말로 쓸모없는 사변일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P. 535] 우리가 어떤것을 알수 없는 경우에 우린ㄴ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 

[P. 536]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을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틈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P. 543] 무의식의 형상들도 ‘정보를 잘 받지 못 한다’, 그래서 ‘앏’네 이르기 위해서는 의식과의 접촉이나 인간을 필요로 한다.

[P. 547] 사후에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인류의 의식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의식은 높은 수준이긴 하지만 그때그때 한계가 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미치지 못한 채 남아 있을뿐만 아니라, 특히 생존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P.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 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P. 555]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된다. 물리적인 사건뿐아니라, 물리적인 사건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P. 561] 내가 살아가면서 감당하고 있는 카르마가 내 전생의 결과인지, 혹은 내 속에 유산을 모아 남겨둔 조상의 소산인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나도 답을 모르겠다. 

[P. 562]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아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P. 572] 그러므로 무의식의 통합성은 나에게는 모든 생물학적, 정신적 현상의 고유한  영적 인도자로 여겨진다.

[P. 573-574] 인간의 과제는 이를테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무의식에서 밀려오는 것에 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의식을 형성해가야 하는 그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의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무의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듯 우리 의식의 증가가 무의식에 작용한다는 사실까지도 추정해볼 수 있다.


만년의 사상

[P. 577] 기독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기독교의 도그마 속에 신성의 변화과정, 즉 ‘다름측면’에서의 역사적 변형이 예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P. 584] 신화가 생동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신화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P. 592]과학은 정신의 실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장신을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인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P. 597]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P. 597-598]그 말씀은 우리에게 닥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견디느라 고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각한 불확실성에 내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신의 경우 대극의 복합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진실과 허구, 선과 악이 다 될 수 있다.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P. 604]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도 집단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P. 608]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며 의식을 규정하는 원형들은 실제적인 역할로 출현한다.

[P. 609-610]정신이란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있는것에 불과하다

[P. 613] 일반적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진술은 정신에 의해 as들어진다. 정신은 특히 역동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 역동적인 과정은 정신의 대극성과 그 내용의 토대에 기인하며 양극간의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P. 613] 정신은 자신을 뛰어 넘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정신은 절대적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고유한 양극성이 진술의 상대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P. 619]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고린도 전서> 13:7).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P. 620]그가 한줄기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점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태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회고

[P. 623]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P. 624]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배후의 과정을 인지하는 편이어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이끌어 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적이다.

[P.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P. 624-625]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P. 628] 나는 내 인새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P. 629] 많은 일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으나 항상 나에게 이로운 것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이 저절로 숙명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P. 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 흐리멍덩하구나"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자기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이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P. 630]노년이란 그런 것이면서 또한 하나의 제약이다.


[편집자의 말]

[P. 631] 그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지러웠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별자리처럼 보였다. 그는 세계 속에 감추어진 세계를 그의 의식에 보태었다.

[P. 639] 융은 자기 자신을 무엇보다도 의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치료에 있어서 종교적인 태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P. 641] 학자로서 융은 경험론자인 셈이다. 융이 회상록을 위해서 개인적인 종교적 느낌과 경험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이 그의 주관적인 경험의 여로를 기꺼이 따라오리라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이 융의 주관적인 진술이 자기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P. 642-643] 자서전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은 빛에 비추어 살펴본 나의 생애입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나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글로 써온 내용의 정수이며 그 반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와 내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노력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서전은 단지 소문자 아이(i)의 윗점, 즉 전체를 완성하는 최후의 한 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책의 개요>

이 책 ‘기억 꿈 사상’은 융의 제자이면서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간 대담을 한 결과를 엮은 융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대필이 아니라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에 거의 융의 집필이라고 봐도 된다고 역자는 말한다.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야 한다는 융의 뜻에 따라, 그가 만 85세의 나이로 죽은 다음해인 1962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융은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의 자신의 정신세계를 차례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환자를 분석하는 의사 시절의 기억은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사고를 일갈한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그리고 자신 속에 들어있는 여성상 아니마에 대한 고백, 연금술로 표현한 분석심리학에 대한 견해 , 카르마를 이야기하며 보여주는 동양 사상에 대한 자신의 사고, 무의식과 그 현상에 관한 연구를 위해 원주민을 직접 만난 여행이야기, 꿈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신화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원형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만년의 사상인 집단 무의식과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 이런 순으로 책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사람의 기억력이 이렇게 정확히 수십년을 지속할 수 있을지 그의 기억력이 놀라웠다. 어떻게 80세가 넘은 나이에 2-4세 무렵에 꾼 꿈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유모차에 누워 있었던 기억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우유를 처음 먹었을 때 기억을 해내는 융이 우리와 다른 머리 구조를 가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 조차 꿈으로 기억하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많은 것을 평생 기억하고 있는 그가 미치지 않은 게 기적 같다.  


 그런데 야페가 쓴 서문에 보면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외적 사건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내적인 큰 의미를 가질 때 그의 기억에 남고, 그 기억은 평생을 관통하며 그의 사상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람의 정신의 깊이와 넒이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을 자서전 문학의 백미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이 어려웠다. 한번 읽어서는 어림도 없고 너댓 번을 읽어야 그나마 남는 게 좀 있을 것 같다.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정리했다.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데 융은 꿈의 분석을 통해 ‘자기’를 참 모습을 찾아내 ‘자아’에게 전달하려 한 것 같다. 이 자서전은 융이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작업을 해가는 과정과 그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융에게는 매우 명료한 작업이었겠으나 읽는 나는 이해의 부족으로 모호했다.


<편집의 장 단점>

이 책의 편집자는 책의 끝부분에 융의 분석심리학 개념과 용어에 대해 정리해 두었다. 상당히 상세하게 정리해 놓아 개념정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중간 중간 용어 설명이 등장하는것도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아쉬웠다면 융의 사진과 아내의 사진이 몇 장 삽입되어 있었는데, 혹시 그의 사진 자료가 더 있다면 많이 삽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그의 연구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융은 " 자서전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은 빛에 비추어 살펴본 나의 생애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내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나는 정말 이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이해가 턱 없이 부족하다. 몇 독을 더해야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 또 한명의 천재를 만났다.

IP *.250.138.49

프로필 이미지
청강 헉헉~~
2010.05.14 06:42:24 *.250.138.49
밀린 숙제 끝..emoticon
지난 5주동안 일주에 2세트씩 올리느라고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역사속의 영웅들>을 읽기 시작해야 겠습니다 휴~~~
프로필 이미지
헤~~
2010.05.14 12:13:50 *.145.204.123
emoticon쑥스럽게~~
프로필 이미지
2010.05.14 10:02:59 *.106.7.10
왕언니, 최고 !emoticon
프로필 이미지
윤인희
2010.05.14 11:13:07 *.142.217.241
고생하셨군요.
잘하고 계시네요.
경숙이님의 무궁무진한 역량에 존경을 표합니다.
건강조심하시고 화이팅 하시길
프로필 이미지
청강 경수기
2010.05.14 12:14:33 *.145.204.123
인희님의 성실함에 비할수야 없겠지요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이은주
2010.05.14 22:04:39 *.219.109.113
앗 ! 거북이가 토끼와 한 라인에 선 이 시점 . 추카  추카
이제 같이 가는 길은 힘들지도 외롭지도 않겠지요?
사이좋게 같이가요. 룰루 랄라~~~~~~~
프로필 이미지
청강 경수기
2010.05.15 08:13:16 *.250.138.49
먼저간 분들이 있어서 뛰어가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감사드리고.....
앞으로 가는 길에 동무하나 늘었다고 기뻐해 주시는 웨버님 그리고 유끼님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10.05.15 11:24:46 *.36.210.2
 융의 역사 연구는 중년과 노년, 특히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환자들을 도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위치를 평가하게 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믿음을 상실했는데, 융은 그들이 꿈이나 상상을 통해 표현되는 그들 자신의 신화를 발견한다면 더 완전한 인격체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과정을 개체화라 불렀다. 

 “융,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나는 신을 안다”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융의 이 대답에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이런 대답을 한 것은 믿음의 완성이 궁극적으로는 앎의 완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해온 동양사상의 입장에 이미 깊이 심취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대답이 아니었을까? 하고 유추해본다. 

이 책에서 융은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의 자신의 정신세계를 차례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환자를 분석하는 의사 시절의 기억은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사고를 일갈한다.

그런데 야페가 쓴 서문에 보면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외적 사건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내적인 큰 의미를 가질 때 그의 기억에 남고, 그 기억은 평생을 관통하며 그의 사상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한 마디로 규정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p9


무엇에 방향을 두고 읽어야 하고 읽을 것인지, 자신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느꼈는지가 잘 표현되었네. 아울러 우리가 왜 여기 모여 이렇게 생 고생을 자처하며 즐겁게 부대껴 보려하는지가 잘 나타나네.

일상은 통속하지만 개인사는 통섭한다. 10년에 한 번씩 다시 쓰는 자서전의 의미가 이것은 아니겠는가. 시시콜콜한 일지야말로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를 내면화 시켜가자는 뜻이요, 외적으로는 책이라는 성장 마디로 나타내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매일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쉼 없이 흘러가야 아름다운 생의 성장이 되는 것이란 걸, 우리라는 변경의 공간을 통해 깨우친다. 성실한 리뷰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함께 좋은 일상으로 흐르고 성장시켜나간다.

새로 리메이크된 영화, <하녀>를 보았다. 극 중에는 여사라고 호칭되기도 하고 아줌마라고 불리기도 하는 집사겸 찬모가 있다. 권력자와 천민사이의 중간관리자. 세상과 환경사이에서 이중인격이 되어버린 존재, 제작사와 배우사이의 관객의 위치 이기도 한. 우리들 대부분의 인생도 중간에 선, 그녀의 입장과 다를바 없지 않나 생각되었다. 누구나가 한 번씩 통과해 가는 중년의 보통사람들은 어떤 삶의 혁명을 요하는 것일까? 문득 영화가 떠올라 함께 적어본다.

청강을 자처해 박박기며 새롭게 꿈을 피어올리는 그대여, 오래 한썽실경으로 기억되기를. 나는 그대가 이땅의 좋은 아줌마임을 기억하고 싶다. ^-^*
프로필 이미지
청강 아줌마~~
2010.05.15 15:06:19 *.250.138.49

써니언니~~

댓글이 너무 길어 깜짝 놀랐습니다
1, 이렇게 긴 글을 달아주시니 일단 몸둘 바를 모르겠고
2. 이렇게 꼼꼼히 읽으시고 계신줄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후회되고
3. 뭔지도 모르고 지르기만 한 5주가 부끄럽고
4. 앞으로 할 북 리뷰가 더 무섭고...
언니가 하시는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격려로 생각해서 감사드리고 싶고
채찍질로 생각해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함께 하고 싶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yves saint laurent
2011.05.31 18:22:18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90631
558 [8기 레이스 - 2주차 독후감] 구본형 '깊은 인생' file [1] 이준혁 2012.02.27 4430
557 9기 북 리뷰 - 강종희 - 그리스인 이야기 file [1] [1] 종종걸음 2013.02.04 4430
556 내가 뽑은 최고 글빨의 작가 [4] 이희석 2010.05.16 4431
555 9기 북리뷰4주 <솔로몬 탈무드>-용경식 file 엘모99 2013.02.24 4431
554 죠셉 캠벨과 홍승완이 말하는 글쓰기 [2] 승완 2010.02.26 4432
553 필살기, 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의 강연 요약 [9] 윤인희 2010.04.21 4434
552 [7기도전-북리뷰]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file [6] 유재경 2011.03.13 4434
551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기회를 볼 수 있고, 준비된 이는... [5] 승완 2009.08.20 4437
550 비극 속에서의 낙관(Optimism) [2] [2] 승완 2009.10.12 4437
549 북리뷰 4. <기억 꿈 사상> [2] 이선형 2010.03.04 4437
548 이경희, 에미는 괜찮다 명석 2012.05.30 4438
547 <9기 레이스 북리뷰 3주차-닥터 노먼 베쑨-박진희> file 라비나비 2013.02.18 4438
546 [예비7기] 2주차_공감의 시대_제레미 리프킨 file [1] 김서영 2011.02.28 4439
545 중립지대, 변화를 위한 내적 과업을 수행하는 시기 승완 2009.11.05 4440
544 <9기 레이스 북리뷰 1주차-그리스인 이야기-박진희> file [3] 라비나비 2013.02.04 4440
543 선의 황금시대를 읽고 [2] 김홍영 2009.03.02 4441
542 [7기도전] <신화의 힘> 내가 저자라면 양경수(양갱) 2011.02.19 4441
541 <북리뷰>구글드,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 [1] 구름을벗어난달 2010.09.10 4442
540 제국의 미래 [1] 정철 2009.03.09 4443
539 땅에 내려와 살라 현운 2009.12.04 4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