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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4일 11시 28분 등록

[북리뷰 12] 열정과 기질 Creating Minds

 

1. 저자에 대하여

하워드 가드너 Haward Gardner, 1943~

다중지능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교육학자. 하버드 대학 교수.

꼭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아니어도, 굳이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근본적인 호기심에 대한 그의 위대한 연구 성과가 아니어도 「열정과 기질」은 익히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추천되었던 책이었다. 진작부터 한번 쯤 만나고 싶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는 학자로서 참 부러운 그의 경력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 예술의 다양한 장르에 걸쳐 그가 만나 본 사람들에 대한 해박한 그의 안목이 부러울 뿐이다. 특히 두 가지 이유에서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첫째, 그가 연구하고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처럼, 그 역시도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IQ 중심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주류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이다. 참 용기있는 일이다. 아마도 그도 나처럼 연구 대상자였던 사람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함께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리는 창조적인 위인들의 공통된 몇 가지 운명처럼 그도 그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홈페이지에 실린 그의 사진은 미남은 아니지만, 참 편안해보이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깊이를 담고 있어 보인다. 부럽다.

 

둘째,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쓰고 싶다는 그의 고집이 마음에 든다. 스스로가 이 책의 저술과정이 ‘애정이 깃든 작업’이었고, 그가 사랑하던 예술작품들과 오래전부터 흥미를 가졌던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분명 힘들었지만, 즐겼으리라. 그러면서도 자신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위해 전문용어의 사용을 절제하고, 꼭 필요한 시각자료만으로 편하고, 간결한 글을 지어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학자들의 글, 특히 이런 주제와 관련된 논문이나 연구보고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는 이유로 군더더기 같은 숫자와 표, 인용구절들을 동원한다. 뿐만 아니라 통상적이며,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들로 뒤범벅을 해놓는 경우들이 많다. 저술의 의도가 자신이 가진 생각을 함께 공감하겠다는 그의 일관된 의지와 고집이 그의 문체와 책의 구성에까지 세심하게 고려되었음이 느껴진다.

 

글을 보면, 책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하워드 가드너, 백년 후쯤이면 21세기의 창의적인 인물들에 대한 연구대상으로 그가 선택될지도 모를 일이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감역자의 글

아놀드 토인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된다”며 창조성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p5

 

이 책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p7

 

들어가는 글

내가 창조성 문제를 국외자 입장에서 참견하는 정도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입장으로 나아간 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내 연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 서로 비슷한 주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그룹에 내가 소속했다는 점이다. p16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스타일의 책을 쓰고자 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전문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고, 꼭 필요한 시각 자료만을 제시했다. 다루는 주제는 복잡하지만 간단명료하게 쓰고자 했다. 복잡한 주제를 쉽게 다루기 위해 중간 중간에 서술 내용을 요약해 정리했으며,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른 곳에 세 개의 짤막한 해설을 삽입했다. p19

 

자네 차례가 오면 자네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지키고

아무런 이유가 없을지라도 자부심을 느끼겠지.

소원은 이뤄질 테고, 그러면 자네는

연기와 안개로 짜여진 시간의 정수(精髓)를 갈망할 테지.

....

답을 찾았지만 해답 없는 인생을 살았을 뿐.

자네는 남쪽 도시의 거리를 걷게 될 거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황홀하게 바라보겠지

간밤에 내린 첫눈이 쌓인 하얀 정원을.

체스와프 미워시(Czeslaw Milosz) p21

 

제1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1.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요즘에는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무엇이든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조이스도 한 마디 한다. ... 예술가란 불멸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마술사와 같습니다. p31

 

일곱 명의 창조적인 사색가

현대는 20세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근본적인 사상들이 탄생한 시기이며,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관점에서 보면 빠르게 퇴색하는 시기이다. ... 「익살」은 우리 시대에 관한, 우리 시대의, 우리 시대를 위한 명확한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p36

 

나는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고유한 천재들은 어린 아이의 가수성을 체화하고 있었다. p38

 

구성적 주제

반면 정치와 종교, 교육, 상업, 임상 분야 등 ‘인간 관계’의 영역에서 창조성을 논하는 일은 왠지 가당치 않다는 느낌을 주곤한다. ... 정치를 비롯한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는 창조적인 도약이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어떤 특정한 창조적인 도약을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활약한 특정한 개인과 동일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p45

 

한 시대의 조명

(헤겔적 사고방식의 핵심만 간추리면) 역사에는 고유한 추동력이 있어서 일정한 시대에는 특정한 시대정신과 주제가 전면에 나서고 시대가 바뀌면 다른 시대정신에게 자리를 내주는 식으로 역사가 나선형적(변증법적)으로 진행한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특정한 시대정시을 예측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과거에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한 시대의 고유한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p49

 

현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이처럼 틀에 박힌 규범이 광범위한 도전에 직면했는데, 데카당스 풍조가 특히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정치(자유주의의 퇴조)와 인문학(니체의 니힐리즘) 분야에서도 뚜렷이 등장했다. 과학 분야에서는 뉴턴 역학의 세계상과 인간 행동에 대한 합리주의적 관점이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그 토대까지 흔들렸다. .. 일곱 명의 창조자들도 이 맹공격에 중대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p51

 

2.창조성의 연구 방법

창조성의 연구와 지능 연구

창조성에 대한 인지적 접근

‘점잇기’ 퍼즐도 선호되는 항목으로서, 피검사자는 연필을 종이에서 떼지 않은 채 3*3 행렬 모양으로 찍힌 점을 네 개의 직선만으로 모두 연결해야 한다. 이 경우 창조적인 방법은 점이 찍힌 모양, 즉 사각형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직선을 긋는 것이다. p61

 

몰입상태 혹은 몰입경험 ... ‘절정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 자주 창조 행위를 하는 사람드은 이러한 감정 상태를 추구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몰입순간’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훈련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의 고통까지도 감수하려 드는 것이다. p69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관습적인 물음을 “창조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좀 더 참신한 질문으로 대체하고자 제안한 것은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 세 가지 요소 (1) 재능 있는 개인 (2) 그 개인이 활약하는 특정 분야나 학문 영역, (3) 인물과 성과물의 질적 수준을 판단하는 장 ... 창조성은 이 세 요소가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볼 때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p88

 

도약의 시기에 받는 지원... 첫 번째 사안은 창조자가 가장 중요한 도약을 이루는 시기를 캄구하는 과정에서 표면에 등장했다. 이 시기에 적어도 일부의 창조자들은 아주 친밀한 동료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연구에서 드러난 사실은 좀 더 극적이었다. ... 우선, 창조자들은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의 정서적인 지원도 필요로 하고, 자신이 이룬 획기적인 도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인지적인 지원도 필요로 한다. .. 하나는 어린 아이와 보육자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좀 자란 후의 젊은이와 주변 친구들의 관계이다. p98

 

나는 각각의 창조자들이 모종의 거래나 계약, 다시 말해서 파우스트적인 협정을 맺은 것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이 협정을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오랫동안 발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 대체로 창조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특히 원만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려고 한다. p98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첫 제자들

수요 시리학회라는 모임은 프로이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 수요 심리학회의 정수에서 빈 정신분석학회가 태동했고, 여기서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가 탄생한 것이다. p105

 

프로이트의 다재다능함

프로이트가 수수께끼나 퍼즐과 같은 곤란한 문제를 푸는 데 몰두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분명 역설적인 문제에 골몰하는 것을 좋아했고, 해답이 풀릴 때까지 곰곰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p111

 

최초의 경력 : 신경학

내 두뇌 속에는 희한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오. .... 여기에 박테리아가 살면서 어떤 경우는 녹색이 되고 어떤 경우는 파란 색으로 변하는데, 바로 여기에 콜레라 치료약이 있다는 거요. 그럴 듯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아마 별 쓸모는 없을 거요. p112

 

 

 

 

고독, 그리고 친밀한 친구들

인생의 보다 이른 시기에 프로이트에겐 항상 가슴속의 생각과 두려움, 야심에 대해 털어 놓을 가까운 사람들이 한두 명 있었다. p122

 

프로이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1895년에 여섯 아이 중 막내가 태어났고, 이후에는 뭔가 결심한 듯 성관계를 그만 두었다. 당시 그는 몸과 마음이 심하게 불안했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우울증, 니코틴 중독, 만성적인 위장 장애에 시달렸다. 프로이트는 고독감과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이해 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다. p125

 

그 외로웠던 시절, 요즘과 같은 압박감이나 분망한 일이 없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영광스러운 ‘영웅시대’처럼 느껴진다. ... 다른 혁신가들도 위대한 비약을 이루기 직전의 정신상태를 회고할 때면, 감정상의 절정과 추락이라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p127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새로운 분야였다. 독일과 미국에서 심리학 연구소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870년대였다. p128

 

프로이트 이론은 바로 이 개념을 중심축으로 해서 여러 주요 개념들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 것이다. 그 핵심 개념은 억압이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방어기제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표상들을 의식 아래로 억누르는 심리 과정을 일컫는다. 프로이트 자신도 이 개념의 중요성을 확언한 바 있다. “억압이라는 교의는 정신분석학 이론 전체가 서 있는 주춧돌이다.” p129

 

신경증은 다양한 방어 기제에 의존한다. 방어 기제란 두려운 생각이나 정서적 불안을 야기할 만한 관념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심리 기제이다. p131

 

하지만 프로이트가 다양한 신경증의 병인을 성적 체험으로 확신하게 되고, 신경증의 기제를 심적 억압과 무의식 과정의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비교적 전통적인 이런 작업조차도 동료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되었다. p131

 

그는 당시의 전문 용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이론을 사유하고 있었다. 자기 생각의 요점을 부적절하거나 시대에 뒤진 용어로 번역하는 데서 생기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프로이트는 자신만의 언어와 도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자기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p135

 

도약을 이루기 직전에,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언어를 믿을만한 친구에게 시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자기가 아주 미친 것이 아니며, 정말 중요하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심정 때문일 것이다. 소통에 대한 이런 욕망은 인지적인 측면과 정서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창조적인 인물들은 학문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무조건적인 격려와 지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p136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소원이 위장되지 않고 명백하게 드러나며, 어른의 경우에는 대개 더욱 복잡하고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p138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네.” 아마도 이 무렵에 프로이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공감적인 청자’의 역할을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한 정신분석가에게 맡겼던 것이다. p139

 

프로이트는 꿈 분석을 통해 성적인 주제가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깔려 있으며, 방어 기제는 주로 불편하고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주제인 성적인 체험을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p140

 

아동 유혹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든, 아니면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하든,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사고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어느 경우든 마음 속에서 털어내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문제였다. p141

 

모든 아이들은 성 에너지가 특정한 신체 부위에 집중되는 일련의 리비도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는 것이다. 유아 성욕에 관한 이런 믿음 등으로 인해 프로이트는 사회에서 배척당했다. .. 단정하고 예절바른 빅토리아-합부르크 시대에 어떻게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들이 강한 성욕을 품고 있다는 말인가? p142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이 그의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저서임을 알고 있었다. “다른 어떤 나의 저서도 순전히 내 것은 아니며, 내가 직접 거름을 쌓고 묘목과 종자를 마련한 것은 아니다.” p143

 

프로이트는 두 개의 심리장치를 가정할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꿈 내용을 검열하는 기제이고, 다른 하나는 검열되는 꿈 재료이다. 그는 또한 지각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무의식과 전의식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심리 체계를 새롭게 설명한다. 꿈의 동인은 무의식에서 생기며, 꿈에는 무의식적 소원이 잠복해 있다. 소원은 전의식으로 표출되고자 하는데, 낮에는 검열에 의해 왜곡되지만 저항이 약해지는 밤에는 위장과 타협 형성을 통해 꿈으로 분출된다. p144

 

'꿈의 해석' 초판본은 처음 2년 동안 겨우 351권이 팔렸을 뿐이며, 곧 절판되었다. 몇몇 공감 어린 서평도 받긴 했으나, 가령 다윈의 ‘종의 기원’과는 달리 학자들이나 대중들은 이 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p148

 

프로이트와 맺은 인연으로 불운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 하나는 오랫동안 자기 생각을 발전시켰다는 점인데, 이런 혹독한 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다른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두 번 째로 프로이트는 남들이야 어찌 생각했건 자신은 다른 사람과 유대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했다. ...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 사령관으로 여겼다. p159

 

창조적인 인물은 한 분야에서 10년 정도 종사한 후 혁신적인 도약을 이루어내며, 이후에는 다양한 요인에 따라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 ‘꿈의 해석’은 그가 샤르코의 임상교실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한 지 거의 정확히 10년 만에 탄생한 업적이다. p161

 

처음엔 세상에 매료되었고, 다음엔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처지가 되어 비밀스런 탐구 작업을 계속했으며, 결국 다시 세상에 돌아와 다양한 집단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킨다. p165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영원한 아이

 

어린 시절의 수수께끼들

“물리학자들이란 인간 피터팬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다.” p171

 

어린 알베르트를 맹목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냉정한 구석’이 있었는데, 이런 면은 훗날 알베르트 역시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간혹 보이곤 했다. ... 비교적 늦게 말문을 텄고 말주변이 부족했다... 어린 알베르트는 사물의 세계에 호기심이 많았다. .. 뭐든지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 커다란 집을 지었고, 직소 퍼즐 풀기를 즐겨 했다. .. 수레처럼 뭔가 움직이는 부분이 달린 물체들을 아주 좋아했다. .. 일찍부터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곤 했다. ... 혼자서 걸었던 듯싶고, ... 혼자 놀곤 했다. .. 조용하고 신중한 편이었지만, 가끔은 엄청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해서 ... 아인슈타인 가족도 유대교 의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 꽤 진지한 마음으로 신을 믿고 종교적 가르침을 지켰다. p173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종교적 성향이 강했다는 점은, 그가 영혼의 진한 갈증을 느꼈으며, 궁극적인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고, 관습적인 지혜에 반발할 수 있는 능력(충동적인 반발이 아니다)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173

 

분야의 전문 지식 익히기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지리학과 금융시장, 스위스 정치, 인류학, 지질학, 괴테의 작품 등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주류 과학 강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p177

 

이 고집스러운 독학자는 하인리히 헤르츠와 헨드리크 A. 로렌츠가 맥스웰의 이론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재정식화한 글을 옆에 나란히 두고 맥스웰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리고 루드비히 볼츠만과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같은 이론 물리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공부했다. p177

 

학생이던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역학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나 복잡한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역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역학이 이루어낸 성과였다. p179

 

과학적 배경:갈릴레오에서 로렌츠까지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유명한 용어로 말하자면,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패러다임 이전(preparadigmatic)'의 분야라 할 수 있다. 즉, 공인된 지식 체계나 탐구 방법, 혹은 인식상의 발전을 나타낼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이다. 반면에 패러다임적 과학분야는 비교적 합의된 지식 체계와 문제 집합, 그리고 널리 인정된 접근 방법과 새로운 작업을 판단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p180

 

전기론과 자기론을 빛의 파동론과 결합시켰다. 이들의 공동 기여 덕분에, ... 뉴턴의 생각은 무너지고, 장은 근본적으로 변수(variable)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p184

 

아마도 그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능력이 있으며, 물리학의 최신 성과물에 익숙해 있지만, 아직 현재 통용되는 관점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지는 않은 사람일 것이다. p190

 

아인슈타인의 ‘객체 중심적인’ 정신

아인슈타인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팔았으며, ‘나’와 ‘우리’의 세계에서 ‘그것(사물)’의 세계로 날아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좋은 친구들과 사귀었고, 말년의 프로이트보다는 훨씬 호감가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성 문제에 있어서 금욕적인 모습을 보인 프로이트와 달리, 아인슈타인은 젊은 여성들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였고 이 여성들도 그에게 호감을 내비치곤 했다. p191

 

“나는 시골에서 고독하게 살았으며, 단조롭고 조용한 삶이야말로 창조적인 정신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아인슈타인은 회고한다. 곧이어 그는 향수 어린 심정으로 이렇게도 말한다. “현대의 여러 조직 중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노력을 하지 않고도 그처럼 고독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이 있다. 등대나 등대선에서 근무하는 것이 그런 직업이 아닌가 싶다.” p193

 

아인슈타인은 상이한 감각 체계에 기반을 둔 이러한 요소들에 주목하는 것 외에도, 상상과 공상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 자신과 나의 사고 방법에 관해 살펴보노라면, 공상하는 재능이 실증적인 지식을 흡수하는 재능보다 나한테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p196

 

아인슈타인은 어떤 문제에 관해 사고할 때 항상 이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식화해서 사고방식이나 교육 배경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p197

 

“신은 당나귀(자신을 고집이 세고 우둔한 당나귀에 빗대고 있다)를 창조하면서 두꺼운 피부를 만들어주었다.”라고 자신에 관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p198

 

권위에 반발하는 기질을 타고 난 아인슈타인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윗사람들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 “나는 나무 판자를 들고서는 제일 얇은 부분만 찾고 구멍 뚫기가 쉬운 곳에만 송곳을 들이대는 과학자들을 참기가 힘들다.” ... 자신이 원하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편집광다운 열정이 있는 과학자만이 과학적 발견을 할 수 있다고 친구인 베소에게 토로했을 정도이다. p198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나온 특별한 해

나중에 뉴턴은 “당시에 나는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나이였는데, 다른 어느 때보다도 수학과 철학에 전념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존경하고 뉴턴의 사진을 자기 침대 위 벽에 걸어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p200

 

아인슈타인은 1905년 논문을 혁명적인 성과물로 간주하기보다는 “그저 예전에는 서로 무관했던 가정들을 멋지게 요약하고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p207

 

 

상대성 이론:즉각적인 운명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관한 그의 논문을 혁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양자이론에 관한 자신의 ‘발견적’ 논문을 혁명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부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 논문이 관심을 끌고 어쩌면 격렬한 반론까지도 일으키기를 기대했고, 그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처음 얼마 동안은 「물리학 연보」에 아무런 논평도 게재되지 않자 꽤 실망했다고 한다. p212

 

로렌츠의 작업은 곳곳에서 실험적 사실이라는 암초에 부딪히고 군데군데 땜질 자국이 많은 배를 구하려는 영웅적인 선장의 행위와 같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작업은 뜻밖의 실험 결과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과는 상관없고, 기존의 교통 수단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다른 교통편으로 갈아 타는 창조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p216

 

새로운 혁명적 과학 사상이 기성세대, 즉 장(場)의 권위자들에게 수용되는 일은 드물다는 토마스 쿤의 주장에도 부합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수용되려면 입장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세대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p216

 

「종의기원」(1859)이 출판된 지 135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다윈의 종합, 신 다윈주의의 종합, 그리고 점진주의자와 불연속적 진화 주창자들 간에 벌어지는 현재의 논쟁을 거쳐 왔다. 이 점에서 생물학은 심리학보다는 물리학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p218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다:두 가지 특징

반면 아인슈타인은 화려한 대중적 명성에 편안하게 적응하지 못했는데, 일찍부터 명성과 인정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대중의 인정과 각광을 갈망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대략 40대 후반 이후인 남은 반생동안, 시간을 내달라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을 힘겹게 물리치면서 자기만의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물리학 분야가 양자 역학 방향으로 진행되는 추세를 바꾸기 위해서도 그만큼 인정사정 없는 투쟁을 벌여야 했다. p220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걱정없이 살아가는 낙천적인 아이(아이들이란 자기 행동을 규율하려는 사회의 관습이나 기성 세대의 잔소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카메라를 보기만 하면 얼굴을 찡그린다거나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이나 동물들과 함께 노는 모습은 상아탑의 교수에 대한 대중들의 고정 관념에 신선한 충격을 가했다. 이런 불경스런 이미지는 그가 죽은 지 벌써 반 세기가 지난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입는 티셔츠에 새겨진 사진으로 남아 있다. p221

 

연구 파견대의 실험 결과는 .... . 태양의 중력장으로 인해 태양 근처에서 빛의 굴절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을 틀림없이 입증하였고, 굴절 각도 역시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 요구하는 수치와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p221

 

위대한 사색의 모험이 마침내 무사히 해안에 닻을 내렸다. p222

 

제 대답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그저 농담 한 마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제 이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p222

 

히틀러의 군대가 서구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전쟁을 일으키자, ...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부치는 편지에 서명을 했는데, 이는 과학자가 행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p224

 

실제로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두루 알다시피 “왜 전쟁을 벌이는가?”라는 주제에 관해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 프로이트는 “그는 내가 물리학을 이해하는 만큼 심리학을 이해하고 있어서, 우리는 아주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라고 농담조릐 대답을 했다. p225

 

물리학의 주류를 거부하다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과학이란 가장 작은 세계에서도 질서를 가져야 했다. p230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서로를 무척이나 존경했고 30여년에 걸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상보성’과 ‘객관적 현실’에 관해 논쟁을 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상대방의 견해를 뚜렷하게 바꾸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진심과 성의로써 상대방을 대했는데, 이 점은 프로이트와 그의 적대자들 간의 관계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p230

 

아인슈타인이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 박혀서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고립과 소외를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처지에 관해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는 용감하게 노력했지만,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종합하는 통일장 이론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p231

 

아인슈타인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도그는 홀로였지만 결국 자신이 옳았다는 사실과, 모종의 장대한 설계도(비록 인간은 일시적으로, 아니 영원히 이 설계도에 접근할 수 없다고 증명된다 하더라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믿음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p231

 

직관적 지혜와 성찰적 지혜

젊음과 원숙함의 결합은 창조적인 과학 천재의 고유한 특징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그가 젊은 시절에 숙고했던 문제가 당시의 물리학에 적합했다는 점에서, 둘째 그가 공간적, 시각적 상상력에 재능이 있다는 점이 그의 과학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p233

 

물론 아인슈타인은 1929년 이후에는 물리학에 별달리 공헌한 바가 없었지만, 그의 업적에서 파생된 여러 이슈를 점차 분명히 이해했고, 과학을 삶의 다른 영역에 연관시키는 면에서도 통찰이 깊어졌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전반적인 사색가로서 끊임없이 성숙했다. p235

 

어린 시절의 천재란 주로 명민하고 신속하게 직관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직관과는 다른 이해 능력, 즉 성찰적 지혜라고 부를 만한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성숙한다. p236

 

나는 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지 알고 싶다. 이런저런 현상이나 이런저런 요소에 대한 각양각색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의 생각이다. skj지는 지엽적인 것이다. p236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세상 전체와 폭넓은 관계를 맺고 그 물리적 본성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스스로 맺은 이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열정적일 만큼 관심이 많은 데 비해, .... 협동 작업에는 익숙치 않고 혼자서 일하는 스타일이다. ... 이러한 고립은 때로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 여기에는 나름대로 보상이 있었는데, 나는 관습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변덕스런 토대에 내 정신을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p240

 

5.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신동과 천재

 

신동

신동이 재능을 보여주어야 하는 영역이란 이미 해당 문화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분야이고 최소한 그 아이의 행동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분야인 것이다. 만약 문상(文像, graphic) 표현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아이들의 서화가 간단히 무시되고 버려지는 문화권에서라면, 수묵화의 신동은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p251

 

신동의 출현은 특정 분야에 대한 어떤 문화권의 관심과 지원 이외에도, 언제나 여러 요인들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재능이 갖춰진’ 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 뿐만 아니라,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p252

 

하지만 일찍이 신동이었던 인물이 나이가 들어 특정 분야의 어른 신참자가 될 무렵이면, ... 누군가의 야망을 대신 실현해 주는 대리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런 주위 사람들의 야망은 그들 자신의 오랜 관심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해 나가야 하고, 이렇게 주도권을 되찾게 되면 지금까지 그들의 경력을 ‘관리’해 온 사람들과 여러모로 충돌을 빚게 된다. p253

 

카미유 생상스에 대해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미숙함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비꼰 바 있다. 특정 분야에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업적을 이루는 것은 그 분야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여 통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p254

 

신동 피카소

그는 시각적 세부와 색채의 배합을 알아내고, 공간 구성에 대해 사유하고, 현실적인 장면이든 그림 속의 장면이든 자신이 본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재능과 솜씨를 발휘했다. 다중지능이론의 견지에서 보면, 피카소의 조숙함은 시각-공간 영역, 신체-운동영역, 대인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p255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것을 어려워했고, 특히 숫자를 익히는 데 큰 곤란을 겪었다. ... “그는 숫자를 의인화했고, 자기만의 공상에 빠지곤 했다” ... 피카소는 특정한 학과목을 전혀 익히지 못했고 추상적 사유에 서툴렀다고들 말한다. .. 신기에 가까운 예술적 재능과 빈약한 학습 능력간의 불일치(내 용어로는 능력간의 비동시성asynchrony)는 분명 어린 피카소를 괴롭히는 문제였을 것이다. p256

 

한 예술가의 초기 작품에서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특정 분야에서 다소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존의 관습적인 실행 방법을 그대로 터득하는 젊은이가 낯서 방법을 실험하면서 그 분야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젊은이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p258

 

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고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하고 싶어 했다. 당시 피카소는 콘치타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겠다고 신에게 약속까지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거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미신적인 성향이 강했던 피카소는 전문 분야에서나 개인적인 삶에서나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느꼈고, 이런 만용에 가까운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 응분의 죄책감도 느꼈다. 이와 같은 ‘신과의 거래’는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의 삶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p261

 

파블로가 아버지의 성(姓) 루이스를 버리고 어머니의 이름인 피카소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p262

 

음악과 달리, 회화 분야의 신동은 없습니다. 어린 천재란 그저 유년기의 천재일 뿐이지요. 나이가 좀더 들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그런 아이도 미술가가 될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 아이다운 천진성이나 소박함이 없었던 거지요. ... 지금보면 충격을 받을 정도로 거의 똑같이 베끼다시피 했더군요. p263

 

그 나이 적에 이미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지만, 그 아이들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평생이 걸렸습니다. p263

 

파리의 젊은 예술가

피카소가 처음 인정을 받은 시기를 ‘청색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에 그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 거지들, 슬픔에 잠긴 부부, 가난한 가족... 그는 소외되고 외로운 사라들, 파괴된 가정, 북적이는 대도시에서 군중과 유리된 익명의 인물 등에 이끌렸다. ‘끔찍한 아름다움’ .. ‘메마른 슬픔’ 혹은 ‘삶에 대한 비관적인 느낌’이라 불렀다. p269

 

장밋빛 시대... 피카소의 주된 주제는 이제 절대 빈곤에서 보헤미안적 예술가의 삶을 이동했다. p269

 

특히 아폴리네르와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사고방식이 비슷했고, 서로 보완되는 관심사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적 노선이 비슷했다. ... “예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서로에게 촉매 역할을 했다.” p270

 

피카소는 긴 생애 내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을 아예 부정하려고 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입을 다물었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질병과 노화, 죽음을 야기하는 사람이나 요인을 두려워했다. p271

 

「아비뇽의 처녀들」:실험적인 양식을 향해서

아폴리네르는 두 부류의 예술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연에 의존하는 ‘모든 걸 한데 모으는(all-put-together)' 스타일의 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조립가(structurer)’형의 예술가이다. p279

 

초상화가 스타인을 닮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자 피카소는 세기의 농담이라고 할 만한 유명한 말로 대꾸했다고 한다. “별로 걱정할 필요 없어. 결국은 스타인이 저 그림을 닮게 될 테니까.” p279

 

하지만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영향을 미친 요소를 하나만 고른다면... 그것은 그들의 지계 선배 세잔의 작품이었다. 세잔은 소묘나 채색에 특별히 능한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20세기의 기준에 맞는 회화의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보았다. ... 그는 “자연에서 우리는 원통과 구, 원뿔 형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p282

 

초기 작품에는 찬탄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아비뇽의 처녀들」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당혹과 혼란에서 노골적인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오직 두 명의 화상,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와 빌헬름 우데만이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p286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 피카소는 대개는 적대적이었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길을 잃지는 않았어도 쓰라린 상처를 받았는지 어디론가 그림을 조용히 치워버리고 몇 년 간은 공개하지 않았다. p287

 

하지만 피카소는 결코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단지 입체주의라는 더 큰 게임으로 향하는 도정의 중간 지점에 불과했을 터이다. p288

 

입체주의를 낳은 동반자 관계

우리는 몽마르트에 살면서 거의 매일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 피카소와 나는 당시 누구도 말하지 않던 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리들한테는 참으로 즐거웠던 일에 관해 얘기를 주고 받았다. ... 같은 밧줄에 몸을 묶고 함께 산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 서로의 얘기에 푹 빠져 있었다. p290

 

프로이트를 다룬 장에서 나는 창조자가 낯선 영역으로 나아가는 모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해당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할 때는 이런 행동에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 인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어쩌면 꼭 필요할지 모른다는 점을 논의한 바 있다. p290

 

“우리가 입체주의를 창시했을 때는 입체주의를 창안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p293

 

엄격하고 절제된 화풍이 주도했던 시기로서 회화소재를 단색으로 처리했다. 대상을 구성 요소로 분해해서 자연적인 형태를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했으며, 이 형태를 더욱 잘게 분해하고 그 위치를 뒤바꾸면서 평면성을 강조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묘사 대상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에 대상의 현실적인 형상은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고, 앞선 시기의 회화에서는 명확하게 표현된 3차원적 공간이라는 환영도 화면의 깊이가 점차 얕아지면서 사라져갔다. p297

 

실제로 피카소는 여러 차례 이런 가벼운 여행을 통해 지친 심신을 달래고 낙천성과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았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경쟁이 치열한 도시 환경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p300

 

피카소는 시골 생활과 농사일을 처음 접했고, 초목은 무성하지만 메마른 석회암 산악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시간을 보냈다. ... 이러한 환경은 피카소가 10여년 후에 그리게 될 초기의 입체주의 회화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p300

 

하지만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지내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 두 화가가 1911년 여름을 세레에서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실수였던 것 같다. 고독의 시간은 친밀한 어울림의 시간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서로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성이 커질 즈음에서 브라크는 전장에 나갔고... “그 후에 나는 브라크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두 화가 모두 다른 화가와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지 못했고, 이후 작품에선 입체주의에 견줄만한 새로운 화풍을 강렬하게 주도하지 못했다. p302

 

분명한 것은 입체주의 미술의 이미지가 상업 광고물에서 아류 모방작에 이르는 다양한 시각물에 스며들어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었음에도, 보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이미지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p304

 

입체주의 이후 : 유명 인사로서의 삶

자신의 작품을 열광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조차 자신이 정작 성취하고자 했던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피카소는 스스로가 호기 있게 시도한 예술적 반역을 망각했으며 여러 악평들로 인해 마음이 흔들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피카소는 브라크가 전장으로 떠난 마당에 연인 에바까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상당한 일신상의 변화를 겪었다. p305

 

이제 그는 스스로 부유하고 성공한 화가이자 갈채를 받는 예술가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좀더 안락한 부르주아적인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삶의 선택은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피카소는 부유한 주택가로 이사를 했고 상류층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p306

 

내가 나 자신을 반복해서 흉내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과거는 더 이상 내게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나 자신을 베낄 바에야 차라리 다른 사람을 모방하겠다. 그러면 적어도 새로운 면을 추가할 수는 있을테니 말이다. 아무튼 난 새로운 걸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p307

 

이전에는 언제나 냉정하고 분석적인 자세로 그림을 그렸었고, 실제로 입체주의 시기에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사람’이라고 불렸다. 피카소는 이제 여자의 모습을 잔혹하게 그렸다. ... 피카소는 신화에 나오는 괴물을 작품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몸은 사람이고 얼굴은 황소인 미노타우로서를 많이 그렸다. 미노타우로스는 아주 애매한 형상이어서 사악한 강간자로 묘사되거나 냉정하고 순진하기까지 한 관찰자로 묘사되었고, 때로는 승리자의 형상으로 그려졌고 때로는 사악한 괴물의 희생자로 그려졌다. p308-309

 

피카소는 예술작품이 관람자에게 충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람자에게 아무런 감정상의 동요도 일이키지 못하고 관람자가 그저 대충 훑어보는 예술작품은 아무 의미가 없다. ... 관람자가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어떤 반응을 보이고 스스로 창조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 관람자를 마비 증상에서 일깨워야 한다.” 피카소는 확신을 갖고 이렇게 말했다. p309

 

피카소 스스로 걸작으로 인정한 작품 「게르니카」

운명이 등을 돌리고 정열이 퇴조하면 작품 활동에 위기가 닥치게 마련이다. 피카소 역시 이런 곤경에 처했다. 하지만 피카소의 성격 깊은 곳에는 ‘반항적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강한 충동이 뿌리박고 있었다. p309-310

 

“결국은 무언가에 거역하는 작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 나는 가슴을 찌르는 그림을 그린다. 폭력, 심벌즈의 쨍그렁 소리.... 폭발... 훌륭한 그림, 아니 모든 그림(!)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면이 있어야 한다.” p310

 

1937년 4월 26일 프랑코 군에 가담한 독일 폭격기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든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 수천 명이 죽었다. 세상은 경악했고 프랑코와 그의 군대에는 비인간성과 잔혹성이라는 낙인이 영원히 찍히게 되었다.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상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마음먹었다. 당시 스페인의 공화국 정부는 1937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장의 스페인 관에 장식할 벽화를 피카소에게 의뢰한 상태였는데, 피카소는 곧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 작품을 운명적인 작품으로 완성하리라고 결심했다. p313

 

예술가의 작품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언제, 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작업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언젠가는 과학이 존재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과학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터다. 창조적인 인물을 탐구해서 인간 일반에 관해 알고자 하는 그런 과학이다. p313

 

피카소는 모든 갈등, 스페인 내전으로 폭발한 사회적 갈등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과 성, 예술 창조에 관한 갈등까지도 화폭에 담아냈다. ... “정신적 가치가 삶을 영위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토대인 예술가들은 인간성과 문명의 가장 숭고한 가치가 위기에 처한 갈등 상황에 대해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를 보일 수도 없고 보여서도 안된다. P322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백치이다. ... 정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정열적이거나 행복한 사건에 민감한 사람이다. ... 그림은 집 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단이다. P322

 

노년기에 이른 신동

“피카소는 그림을 그릴 때 색깔을 고르듯, 시기와 목적에 따라 적당한 친구를 고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 “피카소는 결코 헌신적인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없는 사람이 못 되었다. 다른 누구보다 자기만을 추켜세울 수 있는 친구들을 원했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의 헌신적인 자세와 이해 능력, 그리고 인내심을 까다롭게 시험했다.” P329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의 수준을 뛰어 넘어 한 단계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P332

 

6.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음악가이자 정치가

음악은 그 본질상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는 무력하다. p334

 

예술 창조의 정치적 측면

스트라빈스키의 정신은 천재 음악가와 대금업자로 거의 정확히 양분된 것 같다. ... 1912년 11월의 어느날 아침 그는 「봄의 제전」을 완성하고는 투자 재산에 관한 편지를 쓰는 일로 오후 시간을 보냈다. p336

 

러시아인의 유년기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적 소양이나 지적 능력을 계발하는 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꽤나 고독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만났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다. p340

 

중심지의 음악

“무엇을 배우든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p342

 

초창기의 성공과 운명적인 만남

스트라빈스키는 디아킬레프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새롭고 신선한 구상을 단숨에 알아채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몸을 던질 줄 아는 대단하고 신기한 능력을 지녔던 사람이다.” p346

 

발레곡의 거장이 되다

「불새」의 성공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생 행로를 바꿔놓았다. ... 실로 그는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 러시아 작곡가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알려졌으며,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음악은 고향 러시아에서보다 서유럽에서 더 유명하고 진가를 인정받았다. p350

 

「불새」와 「페트루슈카」

이런 맥락에서 「별들의 왕」은 실패한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폐기처분된 「황무지」의 초고원고, 혹은 프로이트의 「프로젝트」와 비슷한 부류로 여겨야 한다. 새롭게 움트고 있지만 아직 분명하게 표현하기 힘든 예술적 이상을 서툴지만 진지하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체계로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였던 것이다. p355

 

「봄의 제전」: 공연과 그 여파

1910년 봄 「불새」의 스코어를 마무리하던 중에 스트라빈스키는 꿈을 꾸었다. “이교도의성스러운 제전이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마을 원로들이 빙 둘러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봄의 신(神)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소녀가 춤을 추다가 죽어 갔다. 이것이 「봄의 제전」의 주제가 되었다. .... 「봄의 제전」은 초연 당시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창적인 작품이자 현대 음악사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p356

 

드디어 오늘, 1912년 11월 17일 일요일에, 견딜 수 없는 치통을 앓으면서, 「봄의제전」을 끝냈다. 크라렝의 샤트라 호텔에서 스트라빈스키. p360

 

영국의 중견 비평가 어니스트 뉴먼은 「선데이 타임스」에서 ‘죽은 작품’이며 ‘실패한 허풍’이라고 비판했으며, “우리 시대의 음악 가운데 가장 우스꽝스러운 사기”였다고 말했다. p363

 

스트라빈스키는 「불새」이후로는 병치기법을 자주 활용했는데, 이번에는 불협화음과 불규칙한 리듬, 이국적인 음계, 변칙적인 강세 유형 등이 관객에게 마치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것이다. 갑작스런 중단, 재배열, 러시아 민요에서 차용한 단순한 ‘4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동기’의 치환 등을 특징으로 한 멜로디 전개 방식은 19세기 교향악 형식에 익숙한 관객의 귀에 충격을 가했다. p365

 

분명히 이 작품은 여러 이유로 처음 듣는 청중을 소외시킨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와 똑같은 이유로 결국에는 수용되고 인정받았던 것이다. 물론 변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장(場)이었다. p366

 

시학에서 정치로

폰 클라우제비츠와 마찬가지로 위협과 소송은 다른 수단으로 진행되는 협상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 스트라빈스키는 법적 다툼을 즐기고 생애 내내 소송을 일삼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p374

 

대부분의 창조적인 인물 역시 스트라빈스키처럼 법률을 중요시하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대규모의 공연을 해야 하는 예술가라면, 젊은 스트라빈스키처럼 직접적으로 참여하거나 혹은 만년의 스트라빈스키처럼 대리인이나 에이전트, 후원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어찌 됐건 정치적인 복마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p374

 

「결혼」: 또 다른 종류의 걸작

이들 작품의 양식적인 원천을 따지는 것은 그다지 실효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에서 우리는 스트라빈스키가 외부에서 받은 다양한 영향과 자기 내부에서 느낀 여러 종류의 압력을 조정하고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p379

 

과거의 음악으로부터 얻은 신선한 자극

두 사람의 생애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협력이었다. 스트라빈스키에 따르면 “피카소는 내가 음악 작곡을 맡기로 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풀치넬라」의 무대를 디자인해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냥 재미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p381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가 과거와 자극적인 대화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 만약 그들이 이런 식으로 과거와 유희하지 않았다면 훨씬 개인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은 창조했겠지만, 이는 기껏해야 창조력을 갉아먹은 곤란한 재주에 불과했을 jrt이다. p383

 

사고와 인격의 성숙

흥미롭고 우연한 일치로서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했을 때 엘리엇 역시 영국 성공회에 몸을 담았다. 개인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혼란스러운 시대에 전통적인 종교에 귀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 외에도, 혹시 이 두 명의 망명자들은 과거에 저지른 미학적 성상파괴주의의 ‘죄’를 씻기 위해 개종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물론 창조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신과 계약을 맺는다는 특성도 일부 있을 것이다. ... “나의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다. 나는 매일 그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어린 시절에 이미 이 재능은 내가 잠시 보관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때,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 맨 처음에 말한 생각이 중요하다.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라는.” ... 종교적인 음악을 작곡하려면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악마도 믿어야 하고 교회의 기적도 믿어야 한다.” p386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을 오랜 전통에 속하는 장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내가 가진 기질과 재능이라면 차라리 소(小) 바흐로 살아가는 편이 나았다. 가끔 교회와 신을 위해 곡을 쓰면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는 삶 말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상에서 만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고 견뎌냈다. 타락한 면이 없지 않은 출판업자나 음악 축제, 음반사, 홍보업계의 오랜 인습(물론 나 역시도 그런 인습에 빠져 있었지만)을 극복해낸 것이다. p387

 

그 자신은 스스로를 특별한 경우에만 격렬한 디오니소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본적으로 질서와 균형이라는 아폴로적 원리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루에 적어도 열 시간 동안 일을 했다. p387

 

스트라빈스키의 작업대는 작곡가의 작업대라기 보다는 외과 의사의 작업대를 닮았다. 음계 이름과 음, 쉼표 등이 모두 완벽하게 기재된, 깔끔하고 정확한 그의 스코어는 마치 지도와 같다. 그는 작곡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도구를 근처에 두고 이것드을 솜씨 좋은 장인처럼 능숙하게 활용했다. p387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 나는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 (프로이트 역시도,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 나간다.”) .. “뜻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메모를 해두고 적절할 때에 적절하게 활용한다.” p388

 

이 작품을 작곡할 때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손가락이 알아서 상이한 리듬의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 손가락을 얕봐서는 안 된다. 악기와 늘 접촉하는 영감의 원천이 바로 손가락이다. 그게 없으면 무의식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 사람들은 내가 베르디처럼 곡을 쓴다고 말한다. 헛소리다! 제대로 음악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를 고정된 위치에 못박아두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는 못 한다! 다음 곡을 쓸 때는 전혀 다른 것을 시도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터이다.” p388

 

스트라빈스키는 자기 내부에 존재할지도 모르고 초기작에 영감을 불어넣었던 혁명적인 충동을 자제하면서 그리고 초기의 걸작에 담긴 풍부한 감정 표현을 무시하면서, 관습과 전통의 중요성 및 자기 절제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그는 무질서와 방종, 자의성 그리고 혼돈으로 손짓하는 키르케의 유혹을 혐오했다. p390

 

마지막 업적

스트라빈스키는 20대에는 디아길레프와 교제하면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고, 중년에는 고전 음악을 사숙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며, 만년에는 음렬주의 음악을 접하면서 창조력의 원천을 얻었다. p394

 

이제는 삶을 즐기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사생활을 만끽하면서도 유명세에 시달리지 않는 요령도 체득했다. 무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는 당대의 극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에게 의미가 있었을 뿐 아니라 20세기의 음악사에 크게 기여했던 음악 형식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작곡가였다. p398

 

우리가 다루는 다른 창조자들도 대개 그렇듯이, 스트라빈스키 역시 전 세계의 인정을 받는 대신 평온하고 애정 어린 가족 관계를 잃어야 했던 것이다. p399

 

결국 그는 마지막 안식을 찾아 땅에 묻혔다. 그가 사랑했던 도시 베네치아에, 반세기 전에는 언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단체를 세우고 예술적 촉매 역할을 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와 화해를 원한다는 듯이 디아길레프 옆에 묻혔다. p399

 

7. T.S. 엘리엇 T.S. Eliot-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황무지」의 재발견

1968년 뉴욕 공립도서관의 버그 콜렉션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진 초고가 발견되었다. P402

 

45년 후에 초고가 발견된 일은 문학상의 미스터리를 밝혔음은 물론, 뛰어난 문학 작품의 탄생 과정을 통찰할 수 있는 값진 실마리를 제공했다. 즉, 우호적이면서 솔직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 친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 것이다. P403

 

엘리엇의 성장 배경

거대한 미미시피 강 연안에서 살았던 경험도 그에겐 소중한 추억이었다. 훗날 그는 “커다란 가 강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뭔가를 품고 살아간다.”고 썼다. P404

 

감각적인 인상에 이처럼 강하게 매료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유별난 일이지만,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능력이나 어릴 때 받은 인상을 시에 담아내려는 강한 성향은 더욱 더 유별난 점이다. P405

 

하버드 대학교와의 불화

재미있게도 엘리엇 자신은 융통성이 없고 짖궂고 매력적이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식으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묘사했다. p406

 

엘리엇의 하버드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서 시몬스(Arthur Symons, 1865~1945)의 <상징주의 문학운동(The Symbolist Movement in Literature)>을 만난 일이었다. 엘리엇은 산문적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예술을 일종의 종교로 간주하면서 시적 상징이 존재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는 영적인 비전을 추구하는, 나아가서 시란 외부와는 절연된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시몬스의 문학관에 열광했다. p408

 

한때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도시였던 보스턴이 이제는 활력을 잃은 무기력한 도시가 되었고 시민들은 긴장과 소외감 속에 억지로 살아간다고 그는 느꼈다. 너무 경건하긴 했어도 절도가 있었던 청교도적 삶이 이제는 조악한 상업주의와 황폐한 도시 환경에 포위되어 사라져갔다. 빈민가의 세계와 하버드 신사들의 세계, 가난한 자의 고통과 안락한 사교계의 위선이 마구 충돌하는 모습은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의 영혼을 깊이 흔들었다. p408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보스턴 거리를 배회하고 방황하고 있던 그는 거리가 수축하고 갈라지면서 자신이 거대한 정적의 심연 속에 빠져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환각적인 경험에 대해 훗날 엘리엇은 “신과 교감을 했다고 볼 수도 있고, 일시적으로 정신이 결정화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p409

 

그 때까지 그는 가족이 마련한 각본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공부도 잘했고 해야 할 일에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글쓰기에도 능숙했고, 학문이나 사교 면에서 별 어려움 없이 주위의 기대에 걸맞게 살아왔던 그였다. 철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하버드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철학 교수가 되리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엘리엇은 점차 소외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p409

 

엘리엇은 다른 세상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매력을 느꼈다. 훨씬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는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p410

 

새로운 삶

엘리엇이 또 다시 야심적이고 보수적인 교수직을 선호하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일종의 유예기 혹은 퇴행기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엘리엇은 유럽 체류 기간에 밤마다 끔찍한 ‘공포’에 시달렸다. p412

 

엘리엇과 브래들리는 둘 다 제의와 인간 실존에서 질서가 담당하는 역할에 관심이 많았고, 주관적인 체험에 흥미를 느꼈으며, 조화되지 못하는 신념들을 통합시키는 방도에 관심이 많았고. ... 엘리엇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를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즉, “아주 짧은 순간 환각을 체험하고 이를 상반되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문제였다. p413

 

두 시인이 힘을 합치다

젊은 엘리엇이 편안한 미국인과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삶의 포기하고 해외에서 예술가로 입신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만한 자신감이 필요했다. p413

 

“1914년에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 이후 몇 해 동안 엘리엇과 파운드, 그리고 영국의 작가이자 화가인 윈담 루이스는 새로운 표현 형식을 영국에 퍼뜨리는 데 힘을 모았다. p414

 

“1909년이나 1910년에 시가 처한 상황은 오늘날의 젊은 시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만큼 침체해 있었다.” 거칠 것이 없었던 이 젊은이들은 서로에게 기법을 배웠다. 가령, 엘리엇은 파운드의 에둘러 말하기, 이미지의 파편화, 독자를 충격하는 병치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p414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영국 문학계는 영국 태생이 아닌 작가들이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는 아일랜드에서 조셉 콘레드는 폴란드에서, 그리고 엘리엇과 파운드는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p416

 

엘리엇의 초기시 「프루프록의 연가」는 영국 문학의 현대화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주인공의 이상한 이름과 ‘연가’라는 낭만적인 제목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단테의 『신곡』에서 따온 이탈리아어 제사,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는” 여인들에 관한 후렴구와, 햄릿과 나사로, 영원한 종복, 어릿광대 등에 대한 언급은 작자가 매우 박식하고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임을 드러낸다. 하룻밤 묵어가는 싸구려 여관, 톱밥이 널린 식당, 머리 한가운데가 벗겨진 대머리, 가냘픈 팔다리, 마루에 끌리는 치맛자락, 접어 올린 바짓단 등을 다시의 속어로 언급한 것은, 작자가 길거나 뮤직홀 혹은 주점의 삶과 대화에 익숙했음(또는 불편했음)을 나타낸다. p417

 

마음 한 켠에는 엄격한 프랑스어 4행시에 파리 풍경을 담아내 프랑스에서 시인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초기 시는 또한 무거운 종교적인 주제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 형식과 이국적인 이미지, 직설적인 풍자를 실험적으로 다루었다. p419

 

다른 이들에게는 대단한 업적으로 비쳤을지 몰라도 엘리엇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한결같은 경계인답게 그에겐 젊은 시절의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 혹은 피카소가 지녔던 대단한 자신감이 별로 없었다. p420

 

유럽에 정착하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약해지긴 했어도, 말 몇 마디로 신경과민한 엘리엇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있었다. 엘리엇은 적어도 겉으론 아내를 잘 보살폈다. 불평에도 귀를 기울였고 아내의 상태에 꽤 신경을 썼으며 다른 맘을 먹지 않았다. 하지만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심한 괴로움을 겪었다. p421

 

「황무지」: 작시 과정과 배경

「황무지」로 완성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결정적이었다. 하나는 긍정적인 요인으로서, 엘리엇이 성배 전설에 관한 제시 웨스턴의 저서 『제식에서 로망스로(From Ritual to Romance)』를 읽었다는 점이다. ... 다양한 문화에서 취한 신비적인 탐색 주제를 풍부하게 서술한 웨스턴의 책이... 엘리엇에게 매력적이고 풍요로운 사유의 수단을 제공한 셈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일단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이었는데, 급속히 악화되는 엘리성의 건강이었다. p426

 

두 사람은 마치 어린 자식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부모처럼, 더 많은 독자들이 그의 지배적인 어조와 정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장황한 부분을 가지런하게 가다듬는 산파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 이번에도 역시 창조적인 인물이 자신의 가장 극적인 업적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부모 자식 간이나 동기 간에 버금갈 만큼 매우 친밀한 사이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p430

 

우파니샤드에서 빌어 온 ‘샨티(Shantihs)'라는 신비적인 결어의 삼창에서 보듯 타락하고 메마른 서양과 지혜롭고 평화로운 동양의 암묵적인 대조가 그런 예이다. p431

 

「황무지」에 대한 반응

「황무지」에 담긴 주제로는 풍요로운 다산성과 초목 제의, 어부왕 전설, 타로 가드, 성배 이야기, 고대의 다리와 교회가 있는 런던의 더러운 풍광, 주점의 농지거리, 상류 사회의 대화, 사랑 없는 정사, 구원의 가능성 긜고 동양의 사상과 종교의 매혹적인 반향 등이 있다. 이러한 중요한 모티프들이 주로 고전적인 오보격 시형식에 담겨서 강렬한 시행과 꾸밈 없는 진술로 표현되었다.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p435

 

「황무지」는 전쟁 직후에 심리적 무력감에 빠진 지식인들의 정신을 진실되게 포착된 작품이다. p436

 

20대 초반에 「프루프록」을 썼고, 30대 초반에 「황무지」를 썼다. 이번에도 앞서 말한 10년 규칙이 적용됨을 볼 수 있다.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엘리엇이 기념비적인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 설령 1923년 이후로 시쓰기를 그만 두었을지라도 ...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엘리엇이 1920년대 초반 이후부터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는 점이다. p437

 

대체로 시란, 특히 서정시란 젊은 시절에 문제작을 내는 경우가 많은 장르이다. 최근 숫기 동안 위대한 시인들 대부분은 20대나 30대에 대표작을 완성했으며, 이후에는 사망했거나 아예 시쓰기를 그만두었다. ...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 p437

 

공인으로서의 엘리엇

「황무지」를 탈고한 즉시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문학을 그만두고 은퇴할 작정이다. 내가 왜 시간과 피로와 병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지, 이 세 가지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모른 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p438

 

엘리엇은 개인적인 불행을 끊임없이 일에 몰두하는 방법으로 극복했다. ... 하루에 열두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을 일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며 밤 늦게까지 편지를 쓰고 책을 검토하고 글을 썼다. ... 일에 대한 이러한 열정은 야심과 욕망에서 나온 면도 있었지만, 손에 덜컥 쥐어지는 자유 시간에 대한 두려움과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한다는 공포에서 나온 면도 있었다. p438

 

그럼에도 종교 개종에 이어서 자신이 “문학에 있어서는 고전주의자, 종교에 있어서는 영국 국교도, 정치에 있어서는 왕당파”라고 선언했을 때는 많은 문학계 인사들이 충격을 받았다. p440

 

앞 장에서 나는 창조적인 인물들이 자신의 창조력을 잃지 않는 수단으로서 (신이나 자기 자신과) 모종의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는 성향에 대해 논의했다. 엘리엇은 스트라빈스키처럼 동료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고통을 받았고, 영국 성공회의 충실한 신자가 됨으로써 자신이 숭배하는 신과는 화해롭게 지냈다. 엘리엇은 또한 프로이트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60대를 넘어서 담배를 끊을 때까지 사탕 한 알도 먹지 않았고, 아내 면전에서 면도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이러한 자학적인 성향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도 할 법하다. p441

 

중년의 문학인

무엇보다 그는 영국 문학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라는 입장에서 말할 수 있었다. 시인이야말로 시를 논하는 데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시인이 아니면서 시를 평가하는 사람의 견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작품이나 작가의 수준을 판단하고 자신만만한 경구식 표현으로 결론을 내리는 데 특장이 있었는데, 이런 글을 보면 마치 그의 시에서 정교하게 다듬은 시행을 뽑아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p441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자신이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할 분명한 근거를 내세웠다. 오직 국외자만이 총괄적인 평가를 내리는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p443

 

엘리엇은 시를 정서나 개성의 표출이 아니라, 오히려 정서와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로 여겼다. 그는 개성과 정서를 소유한 사람만이 거기서 도피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완벽한 예술가일수록, 번민하는 자아와 창조하는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동시대 모더니스트인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의 견해에 공명하면서, 그는 미숙한 시인은 선배의 작품을 그저 모방만 할 뿐이지만 성숙한 시인은 그 핵심을 훔쳐내서 더욱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낸다고 지적했다. p443

 

시인의 마음은 무수한 감정가 말씨와 이미지 등을 붙잡아 저장해둘 수 있는 용기와 같다. 이러한 요소들이 무의식적이고 정리되지 않는 산만한 형태로 남아 있다가, 서로 융합하여 새로운 화합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p444

 

그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를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했다. 즉, 무의식의 리듬에 기반해서 창조되고, 그 리듬에 부합하는 시를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p444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정서를 명확히 표현하는 일련의 객관 대상이나 상황, 사건인데, 해당 정서를 환기하려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부적인 상(像)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객관적 상관물을 창조할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 “비상한 감수성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결합시킬 줄 아는 시인이 없다면, 우리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능력까지도 퇴화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p444

 

누군가 그에게 현대인은 고대인보다 아는 게 많지 않냐고 물었을 때 엘리엇은 수긍하면서도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가 아는 것을 그들은 체현한다(They are what we know)." p446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내가 계속 놀란 점이 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마치 희귀종 생물처럼 자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을 금방 찾아낸다는 점이었다. p446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들은 한 분야에서, 드물게는 여러 분야에게 기존의 업적을 완전히 배워 익힌다. 이미 당대의 첨단에 이른 자들은 한층 더 나아가기를 열망한다. 이들은 발달 과정의 중요한 시점에서 금방 동료를 알아본다. p447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고 다른 사람의 정치적인 지원이 필요 없게 되면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그들과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천성이 다시 강하게 나타났다. 오래 사귄 친구나 호감가는 젊은이들에게만 편안하게 속내를 드러낼 수 있었다. p448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오랫동안 살아남을지 아니면 금방 잊혀질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느끼기엔 스텝 지방의 리듬이 자동차 경적과 기계 소음, 기어가 맞물리고 금속과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 지하철의 굉음 등 현대 생활에 미만한 거친 소리로 변형되고, 다시 이 정말적인 소음이 음악으로 변환된 것 같다. p449

 

만년의 엘리엇

그는 전후에 11년 간 존 헤이워드(John Hayward)라는 병자를 돌봐주면서 함께 살았는데, 갑작스레 헤이워드와 헤어지고는 헌신적인 비서였던 발레리 플레처(Valerie Fletcher)와 결혼했다. 엘리엇은 이것이 자기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고, 만년에 얻은 행복이 이 두 번째 부인 덕분이라는 점을 모두에게 분명히 밝혔다. p450

 

언제나 과거에 큰 영향을 받았던 엘리엇이 이제는 아예 과거에서 살아가는 듯했다. 아마도 라포르그 같은 강력한 자극을 주는 시인이나 파운드 같은 날카로운 비평가가 없었던 탓으로 엘리엇이 퇴영적인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p451

 

확실히 엘리엇의 태도에는 안타까운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예이츠가 파스즘에, 피카소가 공산주의에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평화주의에 공감을 표시했다고 해서 그들의 업적이 손상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p454

 

특히 「황무지」는 이 시대의 인장과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엘리엇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20세기의 시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p454

 

경계인으로 살았던 엘리엇의 생애는 역설적이다. ... 그는 어쩔 수 없이 경계인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다.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일부러 경계인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 스스로 경계인의 위치로 나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경계인이라는 느낌은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함의한다.(공동체에 편안히 자리잡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경계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p455

 

분명히 엘리엇은 자신이 어떤 공동체의 아웃사이더, 타고난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해서 스스로를 일컬어 ‘이방인’이라고 자주 불렀다. 그는 일종의 파우스트적인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한다고 요구한다. 가족도 버리고 오직 예술만 좇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예술은 인간이 어느 가족이나 계급, 당 혹은 동인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일 분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p456

 

경계인이라는 느낌과 인생 전부를 걸고 경계성을 탐구하는 능력이 그에겐 있었다. 게다가 엘리엇은 저절로 경계인이 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생산적인 비동시성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경계인이 되기로 선택한 인물이었다. ...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궤적을 엿볼 수 있다.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을 오가는 모습이야말로 창조자의 생애에 긍정적인 비동시성과 부정적인 비동시성을 동시에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p457

 

발레리와 결혼했을 때 엘리엇은 마음의 평화와 만족감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문학적 생산 능력은 현저하게 퇴조했는데... 엘리엇의 뛰어난 작품은 경계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출현했거니와, 그런 빛나는 업적을 계속 쌓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지도 않았고 감당할 수도 없었더라도 경계인의 자리를 줄곧 지켰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p457

 

8. 마사 그레이엄 Martha Graham-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여러 예술 형식 가운데 오직 무용만이 주로 미국에서 선구적으로 현대화된 장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체 표현 양식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었다. p466

 

세기 전환기의 무용 분야

그러나 참을성이 없고 모험심이 강하며 불손하기까지 한 미국인들이 보기에 발레는 여전히 유럽의 폐쇄적인 무용 형식이었다. 또 하나의 주요한 무용 흐름은 비유럽인,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주민의 민속 무용이다. 대개 의식(ritual)에 기반한 이러한 무용은 수백 년 동안 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관습과 가치관과 감정을 반영한다. p467

 

흔히 이사도라는 신체를 무엇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로 여겼다고 한다. 그녀는 무용을 위대한 음악 작품의 반주에 맞춰 공연하는 진지한 예술 형식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신화와 예술 그리고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프리마베라」에서 영감의 원천을 발견한 이사도라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춤을 추었다. 그녀는 자연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몸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했다. 스카프를 두르고 맨발로 춤을 추었던 그녀의 무용은 특히 러시아에서(혁명 이전과 이후를 불문하고) 열렬하게 받아들여졌다. p468

 

이사도라의 성공 요인은 제자나 ‘양녀’들에게 전주해 줄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주로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와 ‘몸의 본능적인 움직임’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사도라는 통상적으로 새로운 무용 전통의 창시자라기보다는 고독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p468

 

무용이 진지한 예술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고, 미국인들이 몸과 아름다움과 기능에 대한 청교도적인 혐오감을 버리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의 특정 세부에 주목하면서 무용 동작을 통해 악기 소리와 리듬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p468

 

세기 전환기, 마사 그레이엄의 미국

「마일즈 스탠디스의 구혼(The Courtship of Miles Standish)」에서 불멸의 존재가 된 마일즈 스탠디스의 10대 후손이었다. p469

 

“마사는 부모의 성향을 고르게 물려받았다. 엄격하고 꿋꿋한, 신앙심 깊은 청교도 개척자의 후손이면서, 격렬하고 거친 성격에다 다소 침울하고 몽상적이며 불같은 성미를 가졌던 블랙 아이리쉬 교파의 후손이었다.” p470

 

어린 그레이엄은 거짓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집에 작은 무대를 마련해놓고 그레이엄에게 흉내내기 놀이를 시켰다. p470

 

“네가 거짓말을 하면 내가 모를 줄 아니? 네가 나를 속인다는 걸 항상 네 몸짓이 말해 준단다. 네가 말하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네 모습에 다 써 있어. 주먹을 쥐면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등이 뻣뻣해지고 발을 끌거나 눈을 내리깔고 있잖니. 몸짓은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란다.” 딸의 잘못에 대한 이런 통찰력 있는 부모의 대응은 나중에까지 커다란 의미로 남았다. p471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고 훗날 그녀는 회상했다. ... 아버지가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레이엄은 이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자유를 느꼈다. p472

 

새로운 경력

신속하게 자기 분야를 마스터하는 것은 거장들의 일반적인 특징인데, 그레이엄 역시 곧 주연 무용수가 되었고, 강사가 되었으며, 관능적인 무어인의 집시 풍 무용인 「세레나타 모리스카」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p473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나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p475

 

“하얀 드레스를 입고 금발 가발을 썼으며, 새침한 표정”이었고, “장식적이면서 예쁘고 편안하게”보였다고 한다. 어느 비평가는 “그녀의 모습은 로제티(Christina Rossetti)와 비슷했다. 가냘프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했다.”고 말했다. 훗날 그레이엄 자신은 ‘유치하고 끔찍한 무용’이었다고 회고했으며, 어느 우호적인 비평가는 “표현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대로 낭만적이고 절충적이었지만, 그 정신은 새롭고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처럼 신선했다”고 회상했다. p476

 

새로운 무용

1927년 그레이엄의 「반역(Revolt)」은 인간의 불의를 직접적으로 묘사해서 관객에게 충격을 가했다. 1928년에 그레이엄의 가까운 동료 루이스 호스트(Louis Horst)는 그레이엄이 이전에 창조했던 무용 「프래그먼트(Fragment)」를 위해 곡을 썼다. (이것은 이미 작곡된 음악에 맞춰 무용을 구상하는 일반적인 관행이 거꾸로 된 것이다.) p477

 

그레이엄의 무용수들은 성적 매력을 강조하지 않아서 화장도 안 했는데, 얼굴을 가면 같았고 입은 칸딘스키의 그림에나 나올법한 붉은 색 상처처럼 보였다. 머리카락 역시 뒤로 가지런히 넘겨서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p477

 

미라를 닮은 이 여인은 줄곧 낮은 무대에 머물면서 손을 어두운 옷감 깊숙이 찌르고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고통을 토해냈다. 감지하기는 쉽지 않지만, 마치 육체가 본래의 습관을 깨고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 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튜브 드레스는 몸의 중심을 가로질러 사선 무늬를 만들어냈다. 옷 모양 변화로 드러나는 이런 움직임은 몸으로 슬픔을 재연한 형상이라기보다 애절한 기도와 탄원 자체였다. p478

 

그들은 단 한 번 공연이 주는 인상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예술 장르 가운데 무용은 특히 언어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중요한 무용가와 무용을 만족스럽게 묘사한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나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한창 때(1950년 이전)의 마사 그레이엄을 볼 수 없었다. p479

 

현대 무용의 애매성

“오늘날의 삶은 신경을 자극하고 날카롭게 후비는, 뒤죽박죽 엉켜 있는 삶이다.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하다. ...... 내 무용에 표현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삶이다.” 현대 무용은 환상적인 의상과 무대 배경, 전통적인 이야기, 웅장한 합창이나 관현악 반주 대신 현대 생활과 사회적 불의 그리고 남녀 관계를 표현했으며, 서사적인 요소는 완전히 없애버렸다. p480

 

신들을 모방하고자 했을 때 우리는 신들의 춤을 추었다. 그런 후에 우리는 바람과 꽃과 나무 등 자연의 힘을 재현함으로써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했다. 춤은 더 이상 의사소통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다. .... 현대 무용은 고집스럽게 추함만을 그화하는 것도 아니고 신성한 전통에 타격을 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 표현주의적인 무용의 장식적인 형식에 대한 반역이 일어난 것이다. 대단히 엄격한 감소함의 시대가 온 것이다. P481

 

그레이엄은 어떤 춤을 어떻게 출지에 관해서 미리 정하는 법이 없었다. ... 그래서 공연 당일까지 프로그램이 계속 바뀌었다. 완벽주의와 혼란이 나란히 존재했다. 물론 공연 자체는 대개 강한 인상을 주었지만, 덕분에 막이 오르고 내리는 그 순간까지 전체 단원이 엄청난 긴장을 견뎌내야 했다. P482

 

현대 무용을 장려한 장

처음 그레이엄을 보았을 때는 그녀의 태도를 오해하고 그녀의 방식을 혼동해서 모두가 낡고 촌스럽고 요령부득인데다 별로 흥미도 없는 무용이라고 생각했다. ...... 이 고독한 무용가, 여자답지도 않던 그녀는 세련되지 않고 거만해 보였으며 스파르타의 여인 같은 무용수단원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도 내게는 그레이엄의 분신, 즉 철의 여인으로 보였다. P485

 

그녀가 고전 무용 형식에 무지하고 몸을 ‘추한 형식과 증오에 찬 정신으로’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그레이엄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P485

 

공동작업 시도

그녀의 삶에서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다.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오랫동안 데니숀 무용단의 반주자이자 작곡가 및 비공식적인 스승이었던 루이스 호스트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레이엄과 호스트는 데니숀 시절에 사랑에 빠졌다. 호스트는 무용가 베티 호스트와 부부 사이를 계속 유지했지만, 호스트와 그레이엄은 20년 동안이나 지속될 연인 관계를 맺었던 것이고, 직업상의 관계는 그 이상 지속되었다. P487

왜 20년만 지속되고 말았을까. 뒤에 나오듯 사소한 의견충돌과 다툼이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된 진짜 이유일까. 한 달 만에 호킨스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 마사는 행복했을까. 결별한 후에 호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유럽 음악, 그리고 독일인 루돌프 반 라반(Rudolph van Laban)과 마리 비그만의 선구적인 무용을 소개해 주었다. 니체의 철학에 접하게 해주었으며, 야구장과 권투장에도 데려갔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는 그레이엄의 후원자이자 공명판 역할을 했던 것인데, 그녀는 이런 호스트에게 자신의 꿈과 의혹을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고 긴장되는 창조의 순간에 곁에 있는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p487

꿈을 나눌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일까.

 

호스트는 그레이엄의 분신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정서적인 도움을 받았고 동료로서 매우 급진적이지만 아직 여물지 못한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 조언을 얻었다. 호스트는 그레이엄의 연인이자 조언자로서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에 걸맞는 이상적인 존재였다. p488

 

두 사람은 자주 격렬한 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레이엄은 “당신은 나를 망치고 있어요.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단 말예요.”라고 소리치면, 호스트는 조용히 대꾸했다. “젊은 예술가한테는 담쟁이처럼 타고 넘어갈 벽이 필요한 법이요. 나를 그 벽으로 생각하시오.” 가끔은 상대방을 때리기도 하였다. ... 매우 우울해하던 1930년대 초반의 어느 날... “이건 형편없는 작품이야. 내가 다 망쳐버렸어. 한 해를 몽땅 허송했어. 구겐하임 기금을 날려버린 거야.” 호스트는 그레이엄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진저리를 치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나중에 드 밀과 얘기하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을 좀 제대로 하려고 하면, 다른 무용가는 생각할 수 없어요.”

맞다. 주체하지 못한 열정을 가져 본 사람은 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려고 죽기 살기로 그 생각에만 몰입해 있는 사람은 안다. 연극이 오르기 직전까지,,, 담배로 피가 마르고, 오줌이 자꾸 마렵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그 때, 나도 어쩔 수 없는 변덕, 외로움, 괴로움... 아팠겠다. 얼마나 아팠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1930년대 초반의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환희에 넘쳐 뒤로 젖히는 모습이 특징이었다.

사람은 왜 환희에 젖으면, 왜 몸을 뒤로 젖히는 걸까?

 

그레이엄 무용단의 일원이자 나중에 그레이엄의 전기를 쓴 에르네스틴 스토델(Ernestine Stodelle)은 이렇게 쓴다.

독무가 마사 그레이엄을 기억하면, 거역할 수 없고 신비로운 감동의 영상이 되살아난다. 깊이 움츠렸다가 갑작스레 숨을 통해내는 듯한 간결하고 힘찬 몸짓, 팔다리의 가볍고도 신속한 놀림, 좌우로 급히 움직이는 동작, 군더더기 없는 착지와 빠른 자세 회복 등 신비스러울 만큼 매혹적인 동작은 우리의 신경계를 직접 자극한다. p494

 

마치 안락한 자궁 속으로 퇴행하고 싶은 통한의 몸짓 같았다. p497

보고 싶다. 어떤 몸짓일까. 자궁 속으로, 근원 속으로, 내가 시작하고, 내가 태어난 곳으로.. 그녀는 어떻게 담아냈을까. 그녀의 몸은 어떻게 말했을까.

 

“미국 무용의 문제에 대해 길을 찾아야 할 사람들 입장에서 내놓을 해답이란 이 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황량함고 비옥함이 참으로 흥미로울 정도로 대조를 이룬 이 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p498

영국에서 돌아오던 2005년 2월, 다시 전주에 몸담고 살기로 맘먹을 적에, ‘전주’는 그 이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가시내가 앵겨 붙듯이, 그렇게 나를 끌어당겼다.’ 여기 저기 전주의 지명을 찾고, 둘레길과 둘레산을 쫓으면서 새록새록 정이 솟았다. 볼수록, 살수록 ‘여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던컨이나 테니스에게는 팔을 들어올리는 것은 곡물을 재배하는 것을 뜻하고 손을 흔드는 것은 비가 내리는 것을 암시했다. 팔은 반드시 곡물이 되어야 하는가? 손은 반드시 비가 되어야 하는가? 손이 얼마나 멋진지, 손이 다른 어떤 것의 빈약한 모방에 불과한 게 아니라 손 동작 자체만으로 얼마나 광대한 특성을 의미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극적인 에너지와 활력에서 나온다. p498

 

“좀 유감스런 일이지만, 내가 하려는 일을 관객이 똑바로 보고 느끼게 하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관객의 머리를 해머로 내려치는 데만 익숙하지 않았나 싶다.” ... “이제 우리 현대인은 따뜻한 털옷을 입었던 시대를 이미 지나 왔으므로, 우리의 무대 공연에도 색깔과 따뜻함과 오락성이 있다는 점을 관객에게 보여줘야 한다. ... 관객에게 우리가 미국 공연 전통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야 한다.” p499

 

인생의 굴곡과 부침

어떤 분야에서든 미국에서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여성들의 권리가 얼마나 미약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레이엄이 스물여섯 살 때인 1920년에 비로소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p508

스스로를 ‘딴따라’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조직에서 권한과 책임을 맡기 시작했을 때, 사상투쟁을 했다. 내가 책임자로 있는 한, 그 누구도 ‘딴따라’라는 말로 문예일꾼으로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동료들을 비하하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후배는 물론이고, 선배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걸리면, 반쯤 죽었다.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집요했고, 효과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춤을 추었고, 박수를 받았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집회가 있었고 어떨 때는 사흘 전에 연락을 받기도 했지만, 즐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마지못해 동원되어 흥이나 돋구는 ‘딴따라’들이 아니었다. 후배들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고, 밤새워 창작을 하고, 끊임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때가 우리들의 전성기였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의 일이었다.

 

그레이엄은 여성 혹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옹호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겉으로 비치는 자기 모습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비판을 견뎌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창조활동에 전념했다. 무용단의 매력적인 지도자였던 그녀는 자기 주변 사람들이나 멀리서 알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업 분야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기에 회계 장부를 기록하는 일이나 무용단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은 기꺼이 관리인에게 맡겼다. p508

 

그레이엄은 쉴 새 없이 모든 일에 관여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활동 분야는 간디의 활동 분야와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간디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공연’을 했어야 했거니와, 게다가 후속적으로 생기는 일에 관해서는 그레이엄보다 통제력을 더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녀에게 있어 공연이란 삶 자체였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삶이 요구하는 긴장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p509

무대이든 마당판이건 때로는 길거리에서, 연극을 올리고 공연을 하면서, 이런 후배들이 꼭 있었다. 동료들과 마찰을 빚었다. 경험해본 선배입장에서 한 편이해가 가기도 하고, 다른 후배들도 이해가 갔지만, 조정을 하고, 무언가를 정리해줘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매번 나를 매우 곤혹스럽게 했다.

 

눈 먼 예언자 티레시아스의 모습이 희미하게 겹쳐진다. 그레이엄은 무용 동작의 성적인 함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요카스타가 자기가 저지른 죄의 극악함을 깨달을 때 입에서 나오는 울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부, 죄를 저지른 음부 자체에서 울음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건은 냉혹하게 전개되어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고 요카스타가 목을 매어 자살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p512

 

그녀는 그리스 고전 및 고대를 다룬 많은 저작을 풍부하게 읽었을 뿐 아니라, 신화와 제의, 무의식을 다룬 저서, 특히 프로이트와 융 및 이들 학파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레이엄의 독서와 사유에 대한 많은 증거는 이 당시에 기록한 노트에서 찾아볼 수.. 1973년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p514

 

나는 그레이엄의 노트가 시각적 신체 표현으로서 그녀의 무용이 발전해 온 과정에 대해 별달리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킨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마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다른 무용가에게 전달하는 일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 노트는 그레이엄이 자기 작품의 어떤 ‘공간’을 전개시킨 장소이다. 이 공간은 각 무용가의 동작에 대한 축어적이고 단계적인 설명과 그녀가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던 생각과 감정을 환기하는 문헌 자료의 인용 구절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p516

 

하지만 노트에는 빠진 부분이 있다. 그녀가 감행했던 창조적인 혁신의 중요한 부분이 누락돼 있는 것이다. 오만함이나 질투, 공포와 같은 강렬한 감정, 에밀리 브론테와 메디아와 같은 강한 성격, 미국 남부의 평원 지대나 뉴잉글랜드의 구릉 지대와 같은 인상적인 물리적 배경... 이 모든 것을 자신과 무용단원의 몸을 통해 실험함으로써 구상했던 듯하다. 혼자서 거울을 보며, 아니면 호스트나 호킨스와 같은 몇몇 신임하는 사람들 앞에서 실험했을 것이고, 마지마긍로다야한 부류의 관객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선보였을 것이다. p517

 

하지만 여기엔 기인한 점이 있었다. 엘리엇이나 스트라빈스키, 조이스, 피카소, 쇤베르크 등 다른 현대의 거장들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레이엄의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녀가 시도하는 일을 비난했던 것이다. p517

 

미스 그레이엄에 관한 기사를 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도 냉정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녀는 월요일 저녁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 아주 추한 인물이었는데 어느 순간 차갑도록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용가의 삶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갖추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니진스키는 단 한 번의 탁월한 도약을 위해 수천 번이나 도약 연습을 했다.” ....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차이점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있지 않다. 비밀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 “시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언어로 만든 것이다.” p521

 

원시가면 같은 얼굴, 홀쭉한 뺨, 뒤로 넘긴 머리, 신비할 정도로 차가운 표정 드이 그레이엄과 닮아 보일 정도였다. 금욕적인 삶은 필수 덕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용은 아무 것도 보상하지 않았고, 공연 시즌은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레이엄 자신이 절약과 희생의 삶을 믿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는 주요 역할과 동작과 의상을 마지막 순간에 바꾸기 일쑤였다. p522

 

“아무리 추상적인 작업을 할 때라도 거기에는 극적인 라인(dramatic line)을 넣어야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나는 무용을 삶에서 분리시킨 적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레이엄은 다른 현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순수 추상의 세계에 매혹되지 않았다. “나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느끼기를 원한다.” p522

 

“침대에 올려놓은 작은 탁자에 타자기를 놓고, 베개로 등을 받치고 밤새워 글을 쓰곤 했다.” 그녀의 영웅이던 세인트 데니스는 항상 글을 끄적거리며 시를 쓰곤 했고... 모든 것이 그녀의 시적, 신체적 상상력이라는 제분소에서 빻아지는 낟알이 되었다. p523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종이에 적는다. 어떤 책에서든 인상적인 구절이다 싶으면 바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출처를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실제 작업을 할 때 모든 과정에 대한 기록을 간지갛고 있을 수 있다. 내 무용에 대한 메모는 모두 갖고 있다. 특별한 기호는 쓰지 않는다. 내 생각을 그냥 적어둘 뿐이고, 나는 내가 쓴 글과 동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기 저기에 설명이 있다. p523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등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들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하게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고 물려줘야 할 유산으로 여긴다.” p523

 

“ 여러분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활기찬 인생을 사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나의 삶, 그리고 작품 활동은 필연입니다. ... 마치 동물처럼 다른 생각 하나 없이 오직 이 길을 걸아갈 뿐입니다. 선택은 없습니다. 동물이 일체의 속임수나 야망 없이 먹고 마시고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레이엄의 무용 대부분은 영웅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힘과 열정을 겸비한 저명한 여성, 한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다. ... 실제로 그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밤의 여행」의 요카스타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여자가 아침으로 무엇을 먹는지도 알고 싶다.” p524

 

“마사는 자신의 삶에서 모든 감정적 애착, 모든 집착, 모든 위안 그리고 여가 시간까지 배제시키려고 했다. 여기엔 가족과 아이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그녀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바쳤다. 일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p525

 

누구나 실패할 권리는 있다. 실패했더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용기만 있다면 실패를 발판으로 새로운 단계로 오를 수 있다..... 한 가지 대죄가 있다면 그건 범용(mediocrity)이다. 이게 내 믿음이다. p526

 

코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용단에 소속해 있으면, 마사는 당신을 위해 죽은 시늉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무용단을 떠나는 순간 당신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드 밀은 더욱 잔인하게 말한다. “그레이엄은 어떤 아이디어나 사람과 끝장이 났다고 생각하면 그것(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제거한다.” p526

 

쇠퇴와 갱생

마사 그레이엄은 여러 차례, 그러니까 예순이 되었을 때와 예순 다섯이 되었을 때, 심지어는 일흔이 되었을 때도 이제는 무대에서 춤을 추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믿었다. 그레이엄에게 이런 깨달음은 몹시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주 술을 마셨다. 가끔은 상당히 취할 정도로 마셨고, 그래서 무대에 오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p530

 

이사도라 던컨과 마찬가지로 마사 그레이엄은 화면상의 아이콘보다는 전설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늙은 무용가로 기억되는 것은 더욱 더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무용가의 도구는 탄생과 죽음의 운명에 매여 있는 그의 육체이다. 그가 사멸하면 그의 예술도 사멸한다.” p530

 

결국 그레이엄은 이 고통스러운 사건의 반전에 대해 냉정하게 숙고할 수 있었다.

그 결정은 내 몸을 아프게 했다. ... 누군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마사, 당신은 신이 아니예요.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해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살고 있던 사람한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p531

 

그레이엄의 업적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 참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마사 그레이엄은 이런 단점들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국적인 용모를 오히려 매력의 중심으로 삼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엄격한 청교도 유산을 때로는 모방하고 때로는 그 토대를 무너뜨리면서 무용의 민감한 주제로 활용했다. 과거의 고전 무용과 유럽의 최근 경향을 충분히 의식한 상태에서 미국적 풍광과 민주주의 이념, 현대적 생활 리듬이 자아내는 특별한 정취에 주목했다. 강인하고 재능이 뛰어난 여자들을 중심으로 무용단을 결성했고, 그 후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남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특별히 정치에는 관심을 쏟지는 않았으나, p538

 

그레이엄은 이렇게 몸이 중요한 분야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했고, 그래서 되도록 오랫동안 무용 현장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모든 증거를 통해 볼 때 감정과 사생활 면에서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런 가혹한 희생은 특히 선구적인 여성들에게 더욱 심하게 요구되었다. p539

 

조셉 캠벨이 자아의 전부를 인생에 바치는 것에 대해 말했을 때, 그레이엄은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만약 그런 길을 택했다면 나는 예술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비슷한 배경을 안고 태어난 수많은 선구적인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마사 그레이엄 역시 가족과 나라의 전통을 이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은 아마도 그녀가 이처럼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p539

 

9.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영국 통치하의 인도

역사가 윌리엄 쉬러의 말을 빌면, “이는 역사상 개인 소유의 무역 회사가 인구가 밀집한 광대한 아대륙을 철권으로 통치하고 사익을 위해 착취한 유일한 사례였다.” p542

 

하지만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영국이 영원히 인도를 지배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신념이 굳건한 한 명의 인도인이 동료시민들을 인도 독립의 길로 인도하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p543

 

도덕적인 소년 간디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괘념치 않는다. 지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성장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p544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좀더 세속적인 입장에서 젊은 시절의 이런 잘못을 이해하려는 글을 쓴 바 있다. “담배 몇 가치, 고기 몇 점, 도둑질한 돈 몇 푼, 두어 차례 매춘굴 방문(두번 모두 ‘아무짓도 못하고’ 나왔다), 플리머스항에서 어느 숙소 여주인과 벌일 뻔한 불륜 한 토막, 한 차례의 격한 감정의 폭발, 이것이 전부다.” p546

 

두 사람의 나이가 13살일 때 결혼했다. ... 결혼 생활은 반세기 이상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간디는 이 강요된 결합을 훗날 ‘조혼의 잔인한 풍습’이라고 부르며 많은 점에 대해 분개했다. p546

 

“오늘부터 이 아이는 파문이다. 누구든 이 아이를 돕거나 부두로 전송을 나가는 사람은 1루피 4안나의 벌금에 처한다.” p548

 

“별다른 특징이 없이 평범하고 결점도 많고 허둥대는 변호사로 1891년에 런던을 떠났던 간디와, 수백만의 위대한(마하트마) 지도자” 사이에는 거의 닮은 점이 없다고 말한다. p549

 

우리는 간디 성격의 중요한 일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회가 문을 두드리면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야 하고 또 자신과 가족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해도 그 기회를 붙잡는다는 점이다. p550

 

그는 자기 절제, 즉 브라마차리아 서약을 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소유물을 없애고 가난하게 살면서 성욕을 절제해야 했다. “아이를 낳고 돌보는 것은 공적으로 봉사하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 되었다”고 훗날 그는 회고했다. p557

 

고립된 작업을 하는 창조자들 역시 사적으로 이러한 맹세를 할 수 있지만, 대중의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직접 실행하면서 아주 공개적인 방식으로 파우스트적 계약을 실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p558

 

인도의 현지 사정을 알아가기

이러한 정치적 유예 기간은 간디에게 인도 전역을 여행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일부러 3등간 열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조국의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p561

 

“나는 영국 법을 어겨야 했다. 내가 복종하는 것은 급다 더 높은 법, 내 양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영국에 대한 첫 번째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다.” p563

 

사티 아그라하의 원칙

사람들 대부분은 간디를 주로 종교적인 인물로 생각하지만, 간디의 종교관은 오늘날 문제가 되는 일이 적지 않은 종파적인 편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종교적 피번을 갖는다는 것을 인간됨의 표지로 여겼다. 따로 마음속에 심어둔 신학적인 믿음은 전혀 없었고, 주요 종교를 연구해서 각 종교의 장점과 한계를 식별할 것을 권장했으며, 만물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포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p576

 

사티아그라하는 우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한 설득 노력으로부터 시작한다. 초기 단계는 화해와 타협을 허용해야 한다. p579

 

간디의 개인적인 측면

『진리실험』에서 정확하고 거짓 없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동기를 성찰했다. 이러한 고백적 글쓰기는 두 가지 효과를 자아냈다. 첫째, 이를 통해 간디는 자신의 역사와 현재 처해 있는 상황, 자기 및 인도 민중 그리고 인류 전체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온전히 작 lso부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p582

 

그는 세속적인 소유를 물리치고 검소한 식사를 했으며 알몸이나 다름없을 정도만의 옷을 걸쳐 입으며 되도록 안락한 삶을 멀리 했다. p584

 

인도의 독립을 촉구하는 운동 과정에서 간디는 단식을 정치적 설득의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단식은 적에 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 단식은 오직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이고, 오직 우리 자신의 복리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 단식에는 그 나름의 체계적인 수련법이 있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p585

 

게다가 간디에게 영향을 미친 스승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들은 톨스토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이며 예수나 부처, 마호메트와 같은 보편 종교의 창시자들이었다. 간디가 나누었던 가장 중요한 대화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신과의 대화였다. p591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폭력의 즉각적인 효용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 하지만 부처의 비폭력 행위의 효과는 오랫동안 유지되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진다.” p593

 

민족과 세계의 지도자

24일에 걸쳐 241마일을 걸었던 간디의 행렬은 드디어 단디에 도착했다. 그날 밤에 간디는 추종자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 4월 6일 아침 간디는 바다로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자연산 소금을 약간 집어 올렸다. 이 행동으로 그는 원칙상 범죄자가 된 셈이었다. p595

 

만년의 간디 : 인간과 전설

하지만 간디는 끝내 폭력을 멈출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 광신적인 힌두교 신자인 나투람 비나약 고드세가 일흔아홉살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권총을 쏘았다. 간디는 군중이 모여 있던 기도 장소로 나가던 중에 고드세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p605

 

제3부 창조성의 조건

 

10.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구성적 특-재론

본 연구에서는 전통적으로 특이성 중심적 방법과 공통성 중심적 방법으로 불리는 이러한 두 입장을 종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선택한 일곱 명의 인물을 자세하게 검토하는 동시에 이들 전부 혹은 적어도 대다수에게 해당하는 일반적인 사항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P621

 

전형적인 창조자(Exemplary Creator)의 초상을 묘사

집안 분위기는 따뜻하기보다는 반듯한 편이고, EC는 자신의 생물학적 가족에는 다소 소원함을 느낀다. ... 전형적인 부르조아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 EC는 엄격한 양심의 소유자로 자라나는데, 덕분에 스스로 가책을 받는 일이 많을 뿐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행실이 바르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입바른 소리를 한다. 그리고 한 때는 종교를 거부했다가도 훗날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 ... 이미 10년 이상 어느 분야를 완전히 통달하기 위해 노력한 상태이고 그 분야에서 거의 최전선에 와 있다. ...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뛰어난 젊은이들과 겨루고 싶은 시급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 그는 대도시에서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한 젊은 동료들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만나게 된다. p622-623

 

관심이 가는 문제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해당 분야를 전인미답의 경지로 추동하는 계기가 된다. 이 순간이 바로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이제 동료들과 고립되어 홀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자신이 도약의 문턱에 왔음을 감지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기 자신도 정확히 이해하자는 못한다. 놀랍게도 이 중대한 순간에 EC는 인지적, 정서적인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도움이 없다면 좌절하기 십상일 것이다. p624

 

EC는 혁신적인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흐름(몰입의 경험)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특별한 계약, 즉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으려 한다. EC의 이런 계약에는 메저키즘 및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행동거지와 관련이 있으며, 때로는 신과 직접 계약을 맺었다는 느낌을 수반한다. EC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면서 언제나 작업에 몰두하는 편이다. p624

미치겠다. 매주 한 권, 한 권의 책을 읽어가면서 내 생각의 뿌리가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이며, 나의 삶이 낱낱이 까발려 지는듯한 느낌들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엄청난 에너지와 헌신적인 노력이 있다면, 그는 첫 번째 혁신을 이룬지 10년쯤 후에 두 번째 혁신을 이룰 기회를 맞게 된다. 후속의 혁신적인 작품은 이전보다 근본적이지는 않지만 훨신 포괄적이고 이전 작품을 긴밀하게 통합한 작품이기가 쉽다. p624

 

신선한 자극을 받고 위대한 도전과 자극적인 발견에 수반되는 몰입 체험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경계인의 위치를 찾거나 비동시성의 긴장도를 높이는 방안을 찾는다. p625

 

지금까지 강조한 요소 중에 어떤 것도 창조적인 삶에 핵심적인 요소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창조적인 혁신을 이룰 가능성을 강조하려면, 이들 요소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p625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시기와 양상 역시 상당히 달랐다. 프로이트는 어릴 때부터 학문적인 문제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참다운 소명을 발견했다. 그레이엄은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무용을 하지 않았고, 간디는 정치적, 종교적 소명을 발견하기까지 이런저런 일에 종사했다. .. 다른 창조자들은 일단 어느 분야에 전념한 후로 무척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유별난 인물들이었다. p627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러한 성격적 특색이 전통적으로 너무 긍정적으로만 이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자신감은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즘과 합쳐질 수 있으며, 모두가 자기도취라 할 만큼 지나치게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편이어서 남을 희생하고라도 자신의 목적으로 완수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이다. p628

 

자기 주창(self-promotion)을 위한 노력... 일곱 명의 인물 모두 자신의 작품에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부모나 배우자 등 이런 일을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면 스스로 알아서 했을 것이다. 자기 주창은 대개 작업(작품)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p629

 

창조성의 현저한 특징은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의 결합에 있다. p629

 

프랑스의 소설가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남들은 도착이라 할지 모르나 나는 내 작품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마치 고행자가 배를 할퀴는 마모직 셔츠를 사랑하듯이 말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대개 엄격했다. 규율이 엄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가풍에서 자랐기에 어릴 때부터 해야 할 일을 반드시 지켰고,... 이들은 모두 억압적인 통제에 반발했다. p633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면 이러한 반항적인 태도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조상과는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재능과 솜씨가 뛰어났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년기에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모델을 만났다는 점이다. .... 젊은 시절에는 이처럼 가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러 면에서 경계인적인 삶이 그들 앞에는 기다렸다. 일부 창조자들은 탄생의 조건에 의해 경계인이 되었다. p634

 

이들의 유년기 교제가 어떠했던 간에 각자는 모두 선구적인 작품을 시도할 무렵에는 고립의 시기를 겪었다. p636

 

소용이 다했다고 생각되면 조용히 혹은 극적인 방법으로 동료들과 관계를 끊었다. ... 그가 고독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건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건 이런 파괴적인 일은 언제나 벌어졌다. p637

 

정당한 근거없이 숫자의 마술을 부릴 생각이 없었음에도 본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창조성의 10년 규칙을 발견했다. ... 10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일단 도약을 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p637

 

이어서 창조자는 자신의 혁신적인 도약과 타협을 한다. ... 두 번째 도약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창조자 개인의 재능과 포부보다는 해당 분야의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 ... 두 번 째 10년이 지난 후에는 다른 종류의 기회가 생긴다. p638-639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내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이 매일 창조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p640

 

마지막으로 간디의 저작과 담화는 자신의 집단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노력을 나타낸다. 그는 의례적인 실천에서 고도의 정치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행동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집단 내의 믿음과 행동을 바꾸는 모범뿐만 아니라 그 믿음과 행동의 모범을 마련했다. p643

 

하지만 그(간디)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몸소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추종자와 전 세상에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었거니와 바로 여기에 그의 창조성의 중심 요소가 있다. 양식화된 무용가나 극예술가와 달리 대의를 위한 실천가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와 건강 그리고 생명까지 거는 모험을 한다. 클리포드 기어츠의 유명한 말을 빌면, 이것은 매우 ‘심오한 연극’ 형식이라고 할 만하다. p644

 

비동시성 평가

서정시는 재능이 일찍 발견되고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젊은 나이에 시들어버리는 그런 장르이다.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순식간에 사위어가는 이런 유형에 예외는 거의 없다. p647

 

간디와 아이슈타인은 이 문제에서 예외적인 인물들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 이외의 사안에 관련해서 논란이 불거진 경우가 아니면, 자신의 이론을 둘러싼 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자기 입장을 변호하거나 남을 공격하는 일에 무심했다. 간디는...대인관계에 서툴렀음을 반증한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 이런 면이 두드러졌다. 커다란 정치 세계의 거장이 사적인 대인관계에서는 구제 불능의 미숙였던 것이다. p651

 

이렇듯 그(간디)는 인도 사회 및 인류 전체와 동렬에 서면서도 뚜렷한 경계인의 위치, 즉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이원적인 역할이 비동시성의 형태로 비칠 수도 있다. 즉, 한 발을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에 걸치고 있다는 점이 소속 사회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보다 훨씬 변칙적인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얘기다. p658

 

새로 발견한 주제

내가 이해하는 바처럼 이러한 관계는 유년기의 유대 관계와 관련이 깊다. ... 어머니가 아이에게 언어와 소속 문화의 규칙을 가르쳐주면서 나누는 대화이다. ... 친한 친구들, 혹은 형제들이 함께 낯선 세상을 탐험하고 자신들이 발견한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는 대화이다. 바로 이런 과정이 혁신적인 도약의 시기에 재연되어야 한다. p661

 

창조적인 도약의 시기는 정서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매우 긴장이 높은 시기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유아기 이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이 때 벌어지는 의사소통의 종류는 이미 동일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평범한 대화보다는 어릴 때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상황과 더 닮았으며, 그만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창조적인 인물들이 분명치 못하고 어눌하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두뇌가 정상이며 마음 맞는 이들은 충분히 자기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시험하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p662

 

나는 창조적인 인물들이 자신의 재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미신을 믿거나 비합리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에 상당히 놀랬다. 보통 그들은 창조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희생했다. 계약의 종류는 다양할지 몰라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모습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p663

 

흔히들 21세기는 지식기반 사회라고 말한다. ... 천재나 거장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의 총체적인 문화 역량이 축적되어 있을 때나 뛰어난 개인이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의 거장이 탄생하려면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와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p695

 

3. 내가 저자라면

 

작가의 안목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 초반을 이끌었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몇 가지 중요한 계기들과 기준,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가지고 분석해 들어간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가 최소한 작가만큼의 예술적, 과학적 심미안은 아닐지라도 해당분야에서 그 인물과 인물들의 행위가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평가해내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안목의 깊이가 절대적이라 할 것이다. 춤이면 춤, 미술이면 미술, 시면 시, 작가 자신만의 눈이 책의 깊이를 결정하게 될 것 같다.

 

저자는 1.특정한 문제풀이 2.일반적인 이론 체계 수립 3.작품 창조 4.양식화된 공연 5.대의를 위한 실천(실행)의 다섯 가지 활동방식을 염두에 두고, 다시 1.활용되는 특정한 상징체계 2.창조활동의 성격 3.창조적인 도약 과정의 특정 계기들을 요소로 삼아 도식화하였다.

몇 명의 인물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통합적으로 고찰하여 개별성과 공통성을 찾아가는 방법은 근대 학문에서 선호하는 일반적인 연구방법이다. 나는 이런 방식을 <평균내기> 또는 <공통점 찾기>라고 부른다. 그다지 재미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훨씬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직은 창조성에 대한 연구가 많이 활성화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좀 더 많은 사례 연구들이 더해지거나, 또는 좀 더 많은 요소들이 다양하게 적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MBTI나 에니어그램 또는 혈액형이나 유전자 연구 등의 요소들을 동원하여 사람의 기질을 연구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21세기를 비롯하여 각 시대별 조건과 분위기를 반영한다면 우리는 인간 개개인뿐만 아니라, 인류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의성에 대한 보다 더 폭넓은 연구의 성과를 기대하며, 아쉬움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은 저자가 이미 책의 말미에 정리해놓고 있다. 아마도 다소 주관적인 예술행위와는 달리 객관성이 필요한 연구조사 분야의 특성상 이미 많은 비판과 자기 검토들이 있었을 것이다. 합당한 인물을 선택했는지(서유럽문화권 위주 또는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 중심의 선택), 적절한 분야를 선택했는지, 지나치게 인지적인 측면에 주목한 것은 아닌지, 정말로 창조성에 주목했는지 등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20세기 초반의 인물들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 다양한 시대로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 많은 연구와 저술활동들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끝으로 개인적인 전망과 현재 하고 있는 일들과 관련하여,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창조성의 영역을 <정치>의 영역으로 확대시켜 이해한 것은 매우 큰 성과라고 공감한다. 사람간의 관계,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정치는 매우 세련된 기술과 함께 창조성을 요구받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때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창조성을 배양시켜 내기 위한 사회적 과제에 대한 제시나 언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창조성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지원을 매우 중요하게 지적하면서 출발하였다. 교양서이자 한편 실용서로 이해되는 이 책의 궁극적인 지향이 창조성이 잘 구현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에 있는 만큼 20세기 사회적 특징과 더불어, 현재의 특징을 비교해보고, 그에 따른 전망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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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2010.05.24 13:32:46 *.219.109.113
'저자에 대하여' 안 보이는 투명체로 쓴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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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5 21:23:59 *.168.168.31
글 올리신 것으로 보아 제게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책이라는 답이 내려져 버립니다..
철학적인것은 너무 어려워요.... 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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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5.27 07:47:06 *.186.58.25
세상에서 가장 먼길, 머리에서 가슴, 다시 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드디어 오늘, 1912년 11월 17일 일요일에, 견딜 수 없는 치통을 앓으면서, 「봄의제전」을 끝냈다. 크라렝의 샤트라 호텔에서 스트라빈스키. p360

“무엇을 배우든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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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8:19:02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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