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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6일 13시 42분 등록
암울했던 한 시대를 온 몸으로 저항했던, '진실의 펜으로 이성을 깨운' 리영희 선생님께서 영면하셨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끝끝내 한 길을 걸으신 분의 높은 뜻을 기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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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서평은 4년전에 선생님의 저서를 읽고 올렸던 내용입니다.
다시 한번  그 분의 마음가득 절절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통일에 대한 열정을 기리고자 합니다.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이 1999년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20세기 인문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이란 조사에서 선정된 5명의 국내학자 중 1위로 꼽힌 리영희 선생의 일생에 관한 대화형식의 자서전이다. 국외학자로는 프로이트가 1위였다. 위 조사에서 선생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1970~80년대 한국 변혁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상황에 맞서 싸웠고, 70년대의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은 학자” (731p)

2000년 말 선생은 뇌출혈로 쓰러졌다. 70을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선생의 의지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지적활동과 글 쓰는 일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몇 년이 지나는 사이 서서히 몸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온전치 못한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후사에 대한 냉철한 정치적·사상적 분석가이자 뛰어난 문학비평가인 선생의 10여년 후배인 임헌영씨의 도움으로 일제점령기에서부터 한국 근대사와 최근 90년대까지의 냉전, 극우, 반공, 군부독재, 제국주의세력에 대항해 싸워온(선생의 표현대로) 평화적, 객관적, 통일지향적인 어느 지식인의 70년 삶을 조망한 글이다.

언론인과 대학교수, 사회비평가와 국제문제 전문가로서 활동한 선생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 이념은 자유(自由)와 책임(責任)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에서 단순 기능적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을 거부하고 시대의 고민을 자신의 고민으로 일체화시킨 지성인으로서 부단히 투쟁한 역사가 그려진 대작이다.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1942년 경성공립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 국립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에 입대하여 유엔군 연락장교를 근무하면서 7년 동안 근무하고 공로은성훈장도 받았다. 제대 후 합동통신사에 근무하면서 ‘워싱턴 포스트’지의 한국통신원(익명으로 근무)으로 활동하였고 미국의 진보적 평론지 ‘뉴 리퍼블릭’에 기고도 하였다.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중 몇 차례의 투옥과 해직을 경험하였다. 1972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탁월한 국제정세분석으로 본격적인 연구의 길로 들어선다. 1974년 46세 되던 해 한국지식인 사회의 불후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간하고 49세 되던 해에는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을 잇달아 출간한다. 80년 광주항쟁의 배후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날조되어 다시 구속과 영어의 생활이 계속되었으며 복직 후 ‘중국백서’, ‘10억인의 나라: 모택동 이후의 중국대륙’,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 전쟁에 관한 명저 ‘베트남 전쟁: 30년 베트남 전쟁의 전개와 종결’,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한양대 논문집)’,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전환시대의 논리 그 후’ 등 수많은 논문과 책을 저술하였다.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였고, ‘단재상(학술분야)’ ‘늦봄 통일상’ ‘만해상(실천분야)’ ‘언론자유상(주한 외국언론인 협회)’ 등을 수상하였다. 일본 동경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초빙교수, 하이델베르크대학교와 독일연방교회 사회과학연구소 공동초청 초빙교수,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대학교 아시아학과 부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 소감

내 인생에서 많은 영향과 감동을 준 책이 열 권 가량 된다. 내가 감동이나 영향이란 단어를 차용하는 기준은 최소 한 권당 세 번 이상을 읽은 경우와 그 책의 내용이 일상적 삶의 준거에 해당하는 ‘생활적 판단개념’이나 ‘행위의 기준’이 되었을 경우를 말한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3까지 거의 5번 이상을 읽었을 ‘삼국지’(사실 나는 삼국지의 거의 전 부분을 기억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다)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조자룡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고, 구 선생님의 ‘월드클래스를 향하여’와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는 마흔의 성장통을 치료해 주었다. 최소 세 번 이상 읽었을 뿐 아니라 하루 이상의 여행 시 꼭 가방에 포함시키곤 한다. ‘학문의 즐거움’ ‘영혼이 있는 승부’ ‘Good to Great' '류비세프’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 ‘대한민국 희망보고서: 유한킴벌리’ ‘돈 버는 식당, 비법은 있다’ 등의 책이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책들이다. 이 책들에 이어 ‘대화’가 앞의 자리를 차지할 것 같다.

애초 ‘대화’는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의 겨울방학 교양도서목록에 있는 것을 ‘열정과 기질’을 읽고 난 후 잠시 머리를 식히고자 책을 들었다가 거의 20시간 가까이 투자해 읽게 되었다. 총 73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기도 하지만 일제시대 에서부터 해방공간, 민족상잔의 6·25전쟁, 4·19혁명과 5·16혁명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흐름, 그 사이에 끼어진 한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을 향한 연구와 역정, 70년대의 암울한 시기와 80년 서울의 봄을 잃어버린 뒤 이어진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한 투쟁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나의 지난 경력이 말해 주듯이 당연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고개를 저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선생의 책은 어떤 내용이던지 깊이가 있고 핵심을 포함하지 않는 글이나, 피상적인 관찰로 끝나지 않으며 지식은 아무리 많아도 ‘의식’이 없으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는 선생의 신념을 글을 쓰는 우리들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이었던 80년 대 어느 쯤엔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당시 운동권내에서 이 책은 필독서로 꼽히기에는 고리타분한 서적이었다. 오히려 ‘철학에세이’나 ‘자본론’이 교양서적이었다. 북한바로알기 바람이 불어 ‘피바다’같은 소설류와 ‘주체철학’같은 북한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출간된 이적출간물들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다. 얼핏 읽어본 생각밖에 나지 않고 지금은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조차도 가물 하기만 하다. 당연히 리영희 선생에 대한 기억 역시 386 운동권내에서는 함석헌 옹이나 신동엽 시인, 장준하씨 정도의 한 시대의 역사적이었던 지식인쯤으로 취급되었다. 이 얼마나 우매한 어리석음이었던가!

책을 읽으면서 선생에 대한 인식의 재발견 정도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선각자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원주에서 카톨릭 공동체 활동을 했던 장일순 선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진 것이다. 선생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살아있는 노자’ 그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 한국 기독교 신자 가운데 어쩌면 제일 예수에 가까운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장일순 선생은 그의 삶에 녹아있는 동서의 성현들의 원리를 터득한 사람으로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하다)라는 노자의 정신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방금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라는 책이 ‘대화’와 같은 대화체로 되어 있다고 한다. 스스로 작위함이 없이 살면서도 천주교 개혁과 나아가 한국 기독교의 병폐와 고질을 바로잡는 교회 내부운동의 원천이 되었고, 사회문제에 대해서 설교 같은 언사를 전혀 말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은연중에 한국 온누리에 번졌다고 선생은 말하고 있다. 또 한 명의 사상가를 만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선생의 글을 쓰는 철학(이라고 까지 하기에는 뭣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철학처럼 들렸다)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구 선생님과 시대와 사상을 넘어 통하는 바가 있다고 느껴졌다. 데카르트적 방법론 같은 형태라고 하는데 선생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나는 현학적인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런 현학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인용한 누구의 이름에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허영에서 출발해요. 자기의 지식이 돼버린 것은 굳이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대신 뼈를 깍는 노력을 통한 철저한 ‘자기화’가 필요하지. 나의 수많은 논문과 평론, 심지어 신문, 잡지에 발표한 평범한 주제의 글도 다 이정신과 방법으로 쓴 것입니다.” 선생은 학문연구의 주체의식이 희박해 자기 나름의 문제의식이나 분석방식 없이 남의 이론을 빌려서 자기의 권위로 이용하는 작태를 멸시한다고 말했다.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는 저렇게 말했다는 식보다 검증하고 소화하고 머릿속에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충분히 반죽해서 자신의 누룩을 가미하여 발효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말이다. 인용이 필요한 부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인용을 명시해야 할 만큼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 것이 안 됐다는 증거라고 질타한다. 책 속에서 또 만난 스승의 다른 모습과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3. 인용

태평양전쟁이 격화된 이후 영어가 적성국 언어라는 이유로 폐지되고 미국이나 영국과 관련된 것은 과학기술, 문화 등 모든 것을 배척했어요. 완전히 현대판 분서갱유 정책이었지.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어. ······ 이런 문화적 편협성은 많은 문명적·문화적 후퇴를 겪어야 했던가하는 사회 경험의 본보기가 되지요. ······ 사상적 자폐증은 곧 자살이오. (49p)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소년은 쉬 늙지만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한치의 시간도 허비하지 마라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어린 시절 집뜰에서 놀던 꿈이 깨지 않았는데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집 앞의 오동나무 잎에서는 벌써 가을소리가 나는구나
-주희의 권학문(57p)

해방되던 그때 적어도 조선인의 절반 정도는 일본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거요. 그러니까 그 중에서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으면서 울었거나 눈물 흘린 사람도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은 완전히 일본인이 된 이광수나 그 밖의 적극적인 친일파와 같은 상부계층의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하층 조선인들 사이에도 많았어요.(68p)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영국의 타임스가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기다리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논평한 유명한 말이 전 세계에 퍼진 계기가 됐어요.(132p)

전쟁이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인간집단들이 그 갈들을 최후의 수단으로 결판을 내는 살육행위(167p)

사격술에서 거의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니까 나의 내면에 한 종교적 깨달음과 같은 ‘관(觀)’이 생기던군. 어떤 종류의 ‘기술’이든 모든 기술은 그 기술 속에 종교적 승화의 원리가 잠재해 있습니다.(181p)

부정과 부패로 할 수 있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 ‘마소를 갓고깔 쒸워 밥먹이랴다르랴’겠지요. 선생님의 올곧으신 삶이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합니다.(213p)

노신의 첫 작품 ‘광인일기’와 그 뒤에 쓴 ‘아Q정전’은 처참하리만큼 중국민족의 약점과 치부를 드러낸 작품이 아닙니까? 이 작품들은 그 당시 중화사상과 한민족 우월주의 또는 타민족 열등관의 오류에 푹 빠져서 ‘자기만족’의 꿈을 꾸고 있던 중국 지도층, 지식인과 4억 인민의 심혼을 뒤흔들었고 맹렬한 정신문화혁명의 열풍을 불러일으켰어. 그것으로 해서 중국미녹은 혁명적 자각을 하게 되고, 마침내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정신적 번신을 이룩하지 않았어요?(239p)

취재기자는 세 가지 스타일이 있어. 발로 뛰는 기자. 남의 기사들을 모아서 쓰는 기자, 안건의 연구를 통해서 접근하는 기자. ······ 미리 외교관계 돌아가는 상황을 관찰하고, 지금 이런저런 문제들이 걸려있다는 것을 알아요. 도서실에 가서 관련 참고자료와 서적들을 보고 메모해놓고, 문제가 제기돼 현실적으로 그 단계가 왔을 때 그 메모를 기초로 해서 기사를 보충·작성하는 거지.(316p)

모든 형태나 관계나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법이예요.(374p)

중공혁명은 19세기 중엽에 사실상의 농민 주체적·공산주의적 국가와 정권을 수립했던 태평천국혁명이라는 역사적 업적의 유산입니다. ······태평천국은 완전 평등주의에 입각한 공상적 공산주의사회를 목표로 했고, 또 중국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그 이념과 꿈을 16개 성의 광대한 영토에 국가와 정권의 형식으로 구현했던 농민혁명입니다. 그들의 이념과 덕성과 정치적 목표와 같은 것을 알면 알수록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요.(443p)

자기 자신에게 규율을 가하고, 그 규율이 자기 삶에 의미 있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남이 준 것으로 인해 자유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오히려 자신에게 제약과 규율을 가하는 속에서 그것이 보다 더 의미 있고 높은 정신성으로 자신을 승화시킨다는 진리를 터득했어요.(488p)

신이란 것은 원시시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공포심’과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생존의 공포심, ‘인간의 한계를 충족해 줄’ 어떤 존재로서 신을 창조했고 또 ‘신을 필요로 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필요 때문에 신을 ‘창조’했다고 나는 믿어 있어.(508p)

만약에 예수교가 상정하는 신(하나님)이 전지전능한 권능을 지닌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창조했다면, 어떻게 자기를 믿는 예수교가 아닌 다른 많은 인간들이 또 다른 ‘절대적 권능’을 가지고 ‘오로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신’을 각기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허용했을 것인가? 현대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어떻게 예수교 신의 제자들이 알라 신의 제자들인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을 그토록 학살할 수 있는가? 또한 유일신이 말 그대로 하나뿐이라면, 어떻게 자기가 창조한 똑같은 자식들이 다른 절대자의 이름으로 서로 살육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511p)

기독교는 신(하나님 또는 하느님)의 성격규정상 ‘선(善)’인 신의 존재조건으로 ‘악(惡)’과 악의 존재를 설정해요. 선의 하나님을 긍정하려면 ‘부정돼야 할’ 존재로서의 ‘악’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이것은 ‘유일신’ 도는 ‘절대존재’라는 기독교 신의 규정이나 개념과 모순돼요. 따라서 그 신은 ‘다수의 신’들 중의 하나이며 ‘악’적 신에 대한 상대적 존재라고. 그런 까닭에 기독교가 ‘선’과 ‘정의’를 자처하는 한, 선과 정의가 ‘쳐부수고, 승리하고, 멸망시키고(시켜야 하는)’ 어떤 악적 대상을 설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믿는 사람에겐 항상 전쟁이 ‘필요’하고 ‘승리’가 필요한 거요.(513p)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 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현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패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 생각합니다.(523p)

친구를 사귀는 일종의 기준인데, 나는 20년을 사귀어야 그 사람을 웬만큼 알았다고 생각하고, 30년쯤 험난한 행보를 같이해야 믿을 만한 벗으로 생각하는 거야.(560p)

하반신적 욕구우월주의가 자본주의고, 상반신적 도덕우선주의가 모택동 사회주의이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그 두 요소와 건전한 인간의 생명유기체처럼 잘 통합되어서 균형적으로 유지되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그 충족의 순서는 동물적·하반신적 충족이 앞선다.(569p)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인간의 ‘신격화’는 인간소외의 한 형태(584p)

민중의 사랑을 받는 쪽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594p)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675p)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물적 속성 그 자체이며, 그런 속성은 제도나 교양교육을 통해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구한 속성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었어.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기어 다니는 갓난아이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한번 쥔 것은 절대로 놓지 않고, 다른 아이와 나누려 하지 않아요. 어쩌면 이것이 인간종의 정신작용의 원초형태가 아닐까? 욕망의 충족 뒤에는 나눔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한, 자기만이 소유해야 한다는 욕심, 배타적 소유욕, 그리고 이기심이 원초적 인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본주의는 인간의 속성인 ‘이기심’에 호소하는 방법과 제도로, ‘물질적 생산력’을 극대화시켰고 그것으로 승리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인간과 인류의 진정한 승리는 그것과 다른 의미의 절반의 승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지요.(684p)

국가정권이라는 높은 권위 집단에서건 시정잡배의 깡패집단에서건, 변절자와 배신자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한 존재요. 변절자의 일시적인 약간의 효용가치가 사라지면 자신을 팔은 상대에 의해서도 버림받게 마련이지. 그러면 그 인간은 주체적으로나 객체적으로 파멸의 운명을 맞는 거지. 우리는 어느 사회의 역사와 현재적 생활 속에서 이것을 확인하는 바요.(709p)

나는 인간 행위에서 절제를 미덕으로 여겨요. 사람들이 각기 남을 배려하면서 자신을 절제하는 곳에 아름다운 인간적 덕성·화합과 평화가 꽃피니까요.(726p)

나의 글을 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노신의 그것이예요. 글 쓰는 기법, 문장의 아름다움,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요·운유·풍자·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 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729p)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성현의 가르침은 지금 바로 나에게 한 말이라 생각하게 됐어요.(733p)

4. 다시 선생을 그리며

조만간 선생의 저서를 읽어야겠다. 시골집 어디엔가 뒹굴고 있을 ‘전환시대의 논리’부터 시작해서 ‘우상과 이성’, ‘베트남 전쟁’, ‘自由人, 자유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중국백서’ 등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지성의 애한과 역정이 서린 글을 되새기고 싶다.

1년 전 어느 때인가 도정일 선생과 최재천 선생의 ‘대담’을 읽고 난 다음 구 선생님께 이런 류의 책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기억난다. 지금도 변함없이 그 심정을 그대로 옮겨 한국 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면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선각자들과 함께 숨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책의 힘이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이 겨울이 떠나기 전에 또 다른 책속으로 걸어들어 가야겠다.


삭제 수정 답글
2007.02.13 18:25:49 (*.116.34.182)
부지깽이
선생은 용감한 분이다. 행동도 그렇고 사상도 그렇다. 힘든 길을 걸으셨고 그래서 투사다. 그대가 인용한 글이 좋다.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성현의 가르침은 지금 바로 나에게 한 말이라 생각하게 됐어요 "

나이들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훌륭하다. 그대는 힘껏 따라 배우도록 해라.
IP *.166.10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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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2010.12.06 15:04:23 *.19.222.3
인터넷으로 리영희 선생님의 영면뉴스를 보고 제목만으로 일순 가슴이 막혀왔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통해 머리만이 아니라 온몸이 깨어지던 감격을, 그것도 한순간이 아니라 오래도록 누려왔으니 지나치게 행복했던 셈입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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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12.06 15:33:01 *.97.72.68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신문의 기사를 읽으며 희석이가 자주 올리던 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대도 올렸구려.

프로필 이미지
2010.12.06 17:17:38 *.93.45.60
자로 선배님 감사합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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