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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일 08시 59분 등록

황야의 이리

세상에, 깜빡 속을 뻔했다!

헤세에게 목이 졸린 체 책장 맨 마지막까지 끌려가며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천 개의 영혼"을 미친듯이 헤집는 "고독한 이상주의자" 헤세때문에 이 책이 구원에 대한 책인걸 모르고 숨만 헐떡이며 책장을 덮을 뻔했다. 마치 포탄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전장터의 뿌연 먼지때문에, 엄청난 소음때문에 정신을 잃고 정작 산 위의 정상에 걸쳐있는 무지개는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나는 독자들에게 나의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정해주고 싶지 않고 그렇게 할수도 없다. 각자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기를! 그렇지만 만약 독자들이 "황야의 이리"가 병적인 것과 위기를 묘사하고 있음에도 죽음이나 몰락으로 치닫지 않고 반대로 치유에 이르고 있음을 알아차려 준다면 기쁠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이 책의 주인공 "황야의 이리"란 어떤 존재일까?

"그는 성자 쪽으로도 탕아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어딘가 허약한 구석이 있어서 혹은 게으르기 때문에 거친 세계로 도약할 수 없고 시민 사회라는 무겁고 버거우면서도 포근한 별에 사로 잡혀 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있는 그의 상태이고, 그가 세상과 얽혀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인한 자들만이 시민의 땅의 대기를 뚫고 우주에 닿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체념하거나 타협하고, 시민 사회를 경멸하면서도 거기에 귀속되어서, 결국은 살아남기 위하여 그 사회를 긍정함으로써 시민사회를 강화하고 찬미하고 만다 (77쪽).

그러니까, 황야의 이리란 내면 깊숙이에는 야성의 본능을 갖고 있지만, 시민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야성을 꾹꾹 누르고 이성과 지성으로 무장하고 사회적 계약을 맺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얼핏 누구라도 "지킬과 하이드 박사"가 떠오를 것 같다. 하지만, 헤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천개의 영혼"으로 한 걸음 더 내면 탐구를 더해 들어간다.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고대 아시아인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요가에서 개성이라는 망상을 폭로하기 위한 정확한 기술을 발명했다 (86)."

헤세는 이처럼 자신이 정작 하고 싶은 "치유"에 대해서는 책 속 사이사이 끼어넣어두는데, 그 위를 천개의 영혼이 춤추듯이 너풀거리고 있어 처음 읽으면서는 알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의 자아란 이처첨 본성과 이성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래서 더욱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는 내면 탐구를 해야 한다는 헤세. 그러나 내면탐구가 그리 쉬운 일일까.

"그는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기가 너무나도 두려운, 자아라는 저 거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80)."

헤세조차 두렵다고 말하는 자아탐구를 왜 해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왜..?

"당신이 찾는 것은 당신 자신의 정신세계라는 것도 아십니다. 당신이 동경하는 저 다른 현실은 오직 당신 자신의 내면에만 있습니다. 나는 당신 속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열어드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의 영혼의 화랑뿐입니다 (248)."

결국 우리 인간들이 현실이란 세상 속에서 일생 찾아헤매는 그 무언가는 우리 안의 내면 깊숙이. 오직 거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그 누구도 찾아줄 수 있지 않고 오직 우리 스스로만이 찾을 수 있다고.. 세상을 찾아나서기 전에 우선 나를 먼저 찾아야 세상과 한바탕 즐겁게 유희를 벌일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한 우리들은 세상과 즐거운 춤사위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끌려다기만 하니 말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런 다음 다시 죽음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거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보잘것없는 인생도 어느 순간 그렇게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거에요 (168)."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말처럼 죽음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뿐. 그 죽음을 또 하나의 경계를 넘어가는 순환과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삶은 더욱 타오를 수 있는 건데 말이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별이었다 (200)."

어떻게 별을 딸 수 있을까? 어떻게.. 죽음의 경계를 넘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그 별 말이다..

"이것이 삶의 기술이라고"그가 강의하듯이 말했다. "당신 자신이 인생이라는 판을 마음대로 짜고,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소. 헝클어뜨릴 수도 풍요롭게 할수도 있는 것이요. 그건 당신 손에 달렸소. 높은 의미에서 보면 광기가 모든 지혜의 출발점이듯이, 정신 분열은 모든 예술, 모든 환상의 출발점이오 (274)"

내면으로 들어가 자기해체를 시작하라고 한다.. 그렇게 내 자신을 객관화하기 시작함으로 내 인생의 판을 새로이 짤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죽어있는 삶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 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08)."

이렇게 헤세는 그의 마지막 작품 "유리알 유희"를 품기 시작한다. 인생이란 여행 앞에서 어떤 경로를 갈지는 내 주머니 속 구슬에서 내가 어떤 것을 꺼내는지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떤 구슬을 꺼낼지를 결정하는건 철저히 나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헤세에게 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너의 이원성을 다원화하고, 너의 복합성을 훨씬 더 고도화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마침내 평온에 이르기 위해서 너의 세상을 좁히고, 너의 영혼을 단순화하지 말고, 더욱 많은 세계를, 결국은 이 세계 전체를 너의 고통스럽게 확장된 영혼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부처를 비롯한 모든 위대한 인간들은 이 길을 걸었다 (91)."

"모든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것, 고통스런 개성화를 지양한다는 것, 즉 신이 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다시 포용할 수 있을만큼 정신을 넓히는 것을 의미한다 (91)."

책을 읽는 동안에는 데미안에서 싯다르트에 이어 쓴 이 작품이 그 맥락을 달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영혼들의 출현. 하리 할러 속의 영혼들과 그가 끄집어낸 복잡한 영혼들. 그러나 인용문을 정리하며 다시 살펴본 거기 그 곳에는 싯다르타에서의 주제가 다른 모습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농도진한 향을 뿜으며.. 자칫 그 향에 취해, 자칫 그 겹겹의 꽃잎에 가려져 본질의 아름다움을 놓칠 수도 있었다. 꽃의 향기에 취했었다면, 이제 한걸음 떨어져 전체를 한번 더 감상할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그만큼 헤세의 내면탐구는 깊고 오묘하다.

니체와 동양사상을 탐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정신적 방황을 하다 칼융의 제자로부터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며 집필한 또 하나의 작품이다. 헤세 스스로의 치열한 자기구도적 자전적 소설로 고전이 어째서 고전인지를 현대인들에게 또 한번 각인시켜주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북리뷰를 끝내는 지금 문득, 오래 꿈꾸었던 동남아 조용한 곳을 찾아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히 인다. 거기 그 곳에서, 나의 "미니멈"이 어디까지인지 관찰해보고 싶다. 모든 겉치레를 다 털어버리고 나의 "미니멈"을 깨치면 어쩐지 나도 가장 아름다운 구슬들로 인생의 장기판을 다시 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꼭 공간의 이동을 행하지 않더라도 창 밖의 눈을 바라보면서라도 게을리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결국 헤세의 말처럼 각자의 별을 발견하고, 그 별을 쫓는 이는 철저히 내 자신일테니까 말이다.

흔히들 말하는 소설의 성공요소인 캐릭터와 풀롯 등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혼이 담긴 작품이 주는 묵직한 울림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다가옴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추운 겨울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뚫고 다가오는 묵직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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