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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0일 21시 38분 등록

신화의 힘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이끌리오)

 

I. 저자에 대하여

◆ 조셉캠벨 (Joseph Cambell, 1904~1987)

미국의 유명한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로서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

대표적인 저서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신화의 힘>등이 있다.

 

저자를 위대함에 이르게 한 7가지의 길

1. 우연이 운명이 되다 (터닝포인트)

신화와 만나다

캠벨은 1910 7살의 나이에 아버지, 동생 찰리와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Buffalo Bill's Wild West show'를 관람하며,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의 세계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또한 1913년 뉴욕으로 이사한 후 맨하튼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았고, 그 중 특히 박물관 한 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 이 두 가지 경험이 캠벨을 위대한 비교신화학자의 길을 걷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http://www.jcf.org/new/index.php?categoryid=11, 신화의 힘 39p)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비교 신화학자로서의 그의 운명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화와 인생 425p)

 

2. 재능이 감응할 때 결코 망설이지 않는다 (천복)

타고난 신화학자

공립 도서관 어린이 서가에 있는 인디언 신화에 대한 책을 전부 섭렵한 어린 캠벨은 11세에는 성인 도서 서가에 출입할 것을 허락 받고 혼자서 공부를 진행하며 신화학자로서의 타고난 가능성을 보인다. 또한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를 읽다가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그리고 이후에는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여러 민화와 아더왕 전설의 상징체계가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것을 발견함으로써 장차 그의 천복이 되는 비교신화학 연구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http://www.jcf.org/new/index.php?categoryid=11, 신화의 힘 39p)

 

신화의 세계로 이끌리다

1921년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던 캠벨은 2학년 때,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mance of Leonardo da Vinci'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한다. 1927년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번역자인 조지프 베디에르 아래서 로망스어, 문헌학, 고대 불어, 프로방스어를 배운다. 여기서 그는 현대 미술(피카소, 브라크)과 현대 문학(예이츠, 엘리엇, 조이스)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이후 뮌헨 대학으로 옮겨간 그는 산스크리트 문학과 인도 유럽 철학을 공부하였고, 프로이트, , 토마스 만, 괴테 등의 작품을 접하며 점차 신화의 세계로 이끌려 온다.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3. 내가 그린 삶에 대한 뱃심, 결코 물러설 수 없다 (용기)

익숙한 것과의 결별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1929년 유럽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콜롬비아 대학이 산스크리트어와 중세문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캠벨의 계획을 학교의 커리큘럼을 내세워 거절하자 그는 "저기요, 나는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한 마디를 내뱉고 스스로 대학을 나와 책의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몇 주 후 미국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대공황시기가 시작된다.

(신화와 인생 87p)

 

4. 침묵의 10, 일만 시간의 레이스를 통과해야 한다 (수련)

성소(聖所), 우드스톡에서 5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5년간이었다. 캠벨은 뉴욕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그저 책만 파고들었다.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 필기를 했다. 하루를 네 시간 단위의 네 번의 세션으로 나누고 그 중 세 번째까지는 독서, 그리고 나머지는 휴식, 이렇게 하루 9시간을 순전히 독서에 전념했다. 9×365×5=16,425 (하루 9시간씩 5) 그렇게 그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엄격한 규칙을 통해 1만시간 이상을 수련하며, 깨달아 알게 된 그것에 헌신했다. 우드스톡에서의 5년 후 그는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도약한다.

(신화와 인생 88p)

 

5. 고독을 견디지 못하면 존재를 지킬 수 없다 (철학)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캠벨은 자신이 말한 그대로 오직 자신의 기쁨으로 세상에 슬픔과 기쁨에 참여하는 삶을 살았다.

(신화와 인생 100p)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그게 가장 절실했다."며 우드스톡에서의 5년을 회고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기쁨을 따라 자신의 존재를 지켜냈다.

(신화와 인생 82p)

 

우드스톡에서의 5년 동안 그는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1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그 돈이 있는 한 자신은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대(Great)공황 속에서 위대한(Great) 신화학자로 거듭났다.

(신화와 인생 88~89p)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는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 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을 '~해야 한다'로 점철된 의무감이 아닌 있는 그대로(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태어난 그대로, 자신이 찾은 천복을 따라 살았다.

(신화의 힘 133p)

 

6. 스승, 그 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스승)

크리슈나무르티, 스무살 캠벨의 마음에 동양신화의 씨앗을 뿌리다

1924년 스무 살의 캠벨은 유럽을 향해가는 배 위에서 금세기 위대한 영적 지도자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당시 크리슈나무르티는 삶의 전망을 완전히 바꾼 신비 체험의 깨달음을 얻은 지 2년이 지난 스물 아홉의 청년이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캠벨에 가슴 속에는 힌두교와 불교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후 그 씨앗은 캠벨이 뮌헨 대학에서 산스크리트 문학과 인도 유럽 철학을 공부하며 싹 틔우게 되고,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은 힌두교, 불교 사상에 근거한 범신론의 형태를 갖게 된다.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신화와 인생 430p)

 

침머, 캠벨을 신화의 세계로 인도하다

그의 인생에 중요한 또 하나의 만남은 콜럼비아 대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Heinrich Robert Zimmer, 1890~1943)와의 만남이다. <신화의 힘>에서 캠벨은 "신화에 우리 삶에 유효한 메시지가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한 분이 침머가 아닐까 싶습니다. 침머의 말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느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어요."라고 이야기 하며 자신의 신화연구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신화의 힘 38p)

 

또한 <신화와 인생>에서는 침머를내 멋진 친구이며, 내 마지막 구루였던 하인리히 침머' 라고 표현하며 자신을 신화라는 타이틀을 갖고 데뷔할 수 있게 해준 스승에 대한 각별함을 표현한다. 침머는 캠벨에게 신화는 복잡한 현대 사회의 미로에서 그 스스로를 찾기 위한 심리적인 로드맵을 제공하는 개인의 멘토의 역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고, 이는 캠벨의 신화에 대한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신화와 인생 167p)

 

침머와의 만남은 그의 신화 연구가 세상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캠벨이 평생 몸담았던, 볼링겐 시리즈를 소개한 것도 침머였다. 캠벨은 194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의 대표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1949, 바로 그 볼링겐 시리즈의 하나로 출판되었고 그것은 국립예술문자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950, 드디어 그는 훌륭한 신화 강연자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캠벨의 신화에 혼을 불어 넣어준 스승들

신화와 인간의 영혼과의 관계에 대한 캠벨의 사상들은 정신분석 학자인 칼 융(Carl Jung)으로 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꿈의 해석과 집단무의식의 개념은 캠벨의 신화에 혼을 불어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혀 왕래가 없는 두 세계의 신화가 공통점을 가진 이유는 신화가 인간 본래의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원형이론이야 말로 캠벨이 융에게 가장 크게 영향 받은 부분 중 하나다. (신화와 인생 174~175p)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그는 '꿈은 인격화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라는 그의 주장은 융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캠벨은 <신화와 인생>에서 "내 생각에는 융은 영원에 근거하되 시간의 장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진과 나는 언젠가(1953) 융 부부와 함께 취리히 호수에 위치한 그의 거처인 볼링겐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함께 차를 마신 적이 있다. 정말이지 멋진 시간이었다. 당시 그는 침머의 독일어 유고 가운데 일부를 편집하고 있었고, 나는 일찍이 침머의 유고를 영어로 편집한 바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인사를 나누고, 굳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이런저런 것들을 즐길 수 있었다." 라고 회고한다. (신화의 힘 172p)

 

"소설(위대한 소설)이라는 것은 놀랍도록 교훈적입니다. 20대와 30대에, 심지어는 40대에도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은 나의 스승이었어요." 라며 그의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친 두 명을 기린다. 특히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신화와 인생 390p)",  "완전함을 향한 그의 의도 때문이었다. 완전함이야말로 예술에 함의된 성취이고, 그는 그것을 달성했다. 반면 불완전함은 곧 삶이다. 삶의 모든 형태는 불완전하고, 예술의 기능은 광휘가 불완전함을 관통해 나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화와 인생 390~392p)"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과 고뇌를 고스란히 감내하며 <율리시스> <피네간의 경야>를 저술한 조이스를 기린다. 뿐만 아니라 캠벨은 유럽 유학시절 클레와 피카소를 통해 현대미술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 사람만 붙잡고 늘어질 것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마음에 드는 작가를 하나 붙잡고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라고 충고한다. 그 작가가 쓴 것은 모조리 읽고 그 작가가 읽은 것까지 모두 읽는다면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그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또 다른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캠벨 또한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레오 프로베니우스와 칼융 등을 물고 늘어져서 캠벨 그 만의 색을 가진 독특한 관점을 얻게 되었다. 나 또한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부님에게 영향을 받아 이렇게 그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신화의 힘 190p)

 

7. 나를 넘어서는 더 커다란 것 (소명, 대의)

 

Follow Your Bliss, 자신의 천복을 따르라.

 

Tat tvam asi, 네가 바로 그것이다. (신화와 인생 7p)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신화와 인생 219p)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쁨 마음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신화와 인생 21p)

 

What myth does for you is to point beyond the phenomenal field toward the transcendent. A mythic figure is like the compass that you used to draw circles and arcs in school, with one leg in the field of time and the other in the eternal. The image of a god may look like a human or animal form, but its reference is transcendent of that.

- Joseph Campbell, Pathways to Bliss

 

신화는 당신에게 현상의 장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세상의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신화적 상징은 한 쪽 다리는 시간의 장에 걸쳐져 있고, 다른 쪽 다리는 영원의 세계에 걸쳐 있는, 그대가 학교에서 원과 호를 그릴 때 사용하던 컴퍼스와 같습니다. 신의 이미지는 인간과 동물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 조셉 캠벨, 천복에 이르는 길

(http://www.jcf.org/new/index.php?categoryid=11)

 

조셉캠벨의 다큐멘터리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 Hodges University에서 MBA과정을 밟고 있는 'matiasbarbero'라는 아이디를 가진 친구가 유튜브에 올린 자료이다. 10분의 짧은 자료지만 캠벨의 생애를 잘 요약해 담았다. 특히, 책에서 언급된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의 사진들이 많이 담겨 있어 캠벨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왜 조셉 캠벨이었을까? 왜 스승은 조셉 캠벨을 읽으라고 한 것일까? (나의 언어로 평가하기)

조셉캠벨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몰래 바라보는 것과 같은 설렘을 가져다 주었다. 책 곳곳에 묻어 있는 인간적인 그의 면모를 하나씩 발견할 수록 활자화 되어 있던 그가 책 속에서 홀연히 빠져 나와 내 앞에 마주 앉는다.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그의 육성을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으면, 나는 그가 말년을 보낸 하와이 해변가 시원한 파라솔 그늘 아래 그와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그와 공유할 수 있는 정신의 공간이 더 깊어질 수록,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가 사라진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이야기 꽃을 피운다. 이야기가 깊어갈 수록 모닥불 주위로 함께 자리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구본형 사부님, 모이어스, 캠벨의 사부인 침머와 융, 조이스, 그의 맘에 동양신화의 씨앗을 심어 준 크리슈나무르티, 에스키모 샤먼 이그쥬가르쥬크, 말을 타고 대초원을 가르던 인디언과, 캄캄한 어둠 속 고대 동굴 벽화의 동물 신들, 할례로 인한 고통으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사진 속 원시부족 아이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함께 하기 어려운 이들이 한 자리에 어우러져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다. 조셉캠벨, 그는 신화와 춤추며, 시처럼 살다간 사람이다. 그는 그 동안 내가 감히 한 데 모아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 - 신화, 종교, 철학, 심리학, 무속신앙, 토템, 힌두교, 불교 등 - 이 병존할 수 없는 이질 적인 것이 아니며,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곳은 같은 '다른 하나'라는 짧지만 심오한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융이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이야기 한 것처럼 캠벨은 인간의 언어와 인식이라는 가면 뒤에 있는 신과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캠벨을 읽고 들으며 나는, 내가 온 마음을 다해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스승의 마음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스승이 내게 알려준 위대함으로 이르는 7가지의 길. 그 길 위에 서 캠벨과 스승이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범례 : ■ 특히 좋았던 글귀, ■ 나의 소감과 해석)

옮긴이의 말 (개정판) - 신화는 힘이 세다, 그로부터 어언 10

한 문화 권역과 다른 문화 권역의 영웅, 혹은 구세주는 두 문화권이 교섭한 경험이 없는 경우에도 서로 비슷비슷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닥,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 '원형'이라고 부른 것이 서로 비슷비슷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 입니다. (5)

 

옮긴이의 말 (초판) - 희망의 신화학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는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고 이것을 분석하면서 신화와 종교에 관해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던 그가,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에 펴내는 이 '신화의 힘'에서는 바로 그 신화와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7)

 

그의 확신과 확신을 통해 이른 평화는 곧 신화가 우리에게 안기는 희망일 것입니다. (7)

 

빌모이어스의 서문 -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

그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의 '피네간의 경야'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침을 마련한 일이었다. 조이스가 말한, '참으로 엄연하고 항시적인' 인간의 고뇌에서 캠벨은 바로 고대 신화의 가장 주요한 주제를 읽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8)

 

캠벨 : , 이그쥬가르쥬크 말이오?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고.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 (9)

 

"왜 하필이면 신화 같은 게 필요하냐" (중략)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10)

 

캠벨 : 루카스는 시쳇말에다 옷을 입혔지요. 결국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 아니겠어요?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1)

 

캠벨 :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1)

 

캠벨 :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한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12)

 

아이러니컬하게도 캠벨에게 영웅 역정의 끝은 영웅의 자기 확장이 아니다. 어느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 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12)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

→ 아직 지금의 나는 내 삶을 감당하기도 벅차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일이 오지도 않은 먼 미래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스스로를 영웅이라 여기고 따뜻한 눈매를 나누고 더불어 살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평범한 영웅의 자세다.

 

조셉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 그는 박사 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12)

 

"우리는, 그분이 내주시는 일주일분의 독서량에 기가 막혔답니다." (중략)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평생 읽으라는 것이네." (중략) "그런데 저는 아직도 그 숙제를 끝내지 못했답니다. 어쩐지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그분의 인생, 그분의 작업 같지 않습니까" (13) → 변경연 연구원 제도에는 이처럼 캠벨의 정신이 오롯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은 아니라오." (14)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15)

 

그는 독서와 삶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살았는데, 이것을 슬쩍 내비치는 솜씨 또한 절묘했다. 매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서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 바로 캠벨이 그렇게 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15) → 바로 이것이 캠벨이라는 걸출한 비교신화학자가 자신의 천복을 따라갔기 때문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이다.

 

그는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 사상' '세계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고통 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그는 대답한다.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15) → 단 이 몇 줄에 캠벨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15)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16)

 

"그 아이를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그 몸짓에,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몸짓이 깃들어 있답니다." 캠벨은 이 이야기 끝에,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 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17) → 비록 작은 행위일지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마음에 신을 사랑하는 몸짓이 깃들어 있다. 신은 멀리 있지 않다. 내 삶 속에 늘 함께 있다.

 

영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인간의 믿음에 관련된 문학에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 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그이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18)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 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18) → 저마다 출발하는 지점은 모두 다르지만 이르고자 하는 곳은 모두 같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18)

 

나는 캠벨 만큼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원시 사회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하늘이라고 하는 거대한 지붕 밑으로 펼쳐진 광막한 들판으로 나가거나, 수목에 묻혀 있는 숲 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맛보고는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신들의 이야기가 왜 바람 속에서, 천둥 속에서 울려나올 수 있는지, 어째서 산자락의 시내라는 시내는 다 하느님의 육성을 내는지, 어째서 온 세상이 다 성소(聖所)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18) → 그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그와 나누는 정신의 공간이 깊어질 수록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며 그가 오래 전에 먼 곳을 떠난 사람이 아닌 언제든지 찾아가면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처럼 다가왔다.

 

캠벨은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머 존재하는 지혜의 해각(海角)을 믿는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린다. 이 지혜의 해각을 찾는 일은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의 중심과제'이다. (19)

 

그는 인간을 타락하게 한 것,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한 것들과 헤어지게 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 "우리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외적인 자연에 관한 지식은 물론 내적인 신비에 관한 지식을 겨냥한, 인류 정신의 가장 위대한 도약에 참여하고 있다"고 쓴 일이 있다. (19~20)

 

'강력한 복합 문화적 미래'는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까지 깨닫게 해주었다. (20)

 

그가 신화를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 신화의 당대적 역할을 지나치게 이념적, 치료적 기능에 국한시키는 듯 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20)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21) → 그가 언행일치, 지행합일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그가 이야기한 신화의 원형과 함께 열쇠의 반쪽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그는 신화학자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영적 스승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캠벨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었을까? 그렇다.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 사람이었다. (21)

 

그가 특별히 좋아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캠벨은 일본에서 열린 세계 종교학회에서 뉴욕의 사회철학자와 일본 신도의 신주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철학자가 신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신도의 종교 의례를 숱하게 보아왔고, 귀국의 성지도 여러 곳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신도의 종교적 이념을 모르겠어요. 신도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인 신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한 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응수했다.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21)

 

1. 신화와 현대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25)

 

캠벨 :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25)

 

캠벨 :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 (중략) 고전 이야기를 마음에다 담아 놓으면 그 이야기가 나날이 일어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런 게 없어진 것을 보니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걸 잃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문학을 대신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26)

 

캠벨 : 우리는 바로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6)

 

모이어스 :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26)

 

캠벨 : 토니어는 "작가는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28)

 

캠벨 :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중략)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28)

 

캠벨 : 고통이라는 거지요.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모이어스 : 인간적인 고통, 인간적인 분투, 인간적인 삶.

 

캠벨 : 거기에 그런 삶에 관한 지혜를 터득하는 젊은이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됩니다. (29)

 

모이어스 :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29)

 

캠벨 :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저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29)

 

캠벨 :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29) → 여기서 말하는 영적 잠재력이야 말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드러나지 않은 접혀진 질서가 아닐까?

 

캠벨 :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 →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떠올랐다. 불필요한 것에 벗어나 본질, 캠벨이 말하는 내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삶의 황홀을 찾는 첩경이다.

 

캠벨 :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중략)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0)

 

캠벨 :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중략)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중략)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겁니다. (31)

 

모이어스 :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겁니까?

 

캠벨 :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31) 3년 전 아내에게 첫 눈에 반해 첫 번째 연애 편지를 썼을 때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그대가 내게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첫눈에 반하나요?'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제 가슴이 제게 말해 준 것을 믿고 용기를 냈습니다.  저는 그걸 직관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살아오면서 가슴이 말하는 소리를 거부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찾고 드디어 '이게 맞다'는 답을 얻었을 때는 이미 그 기회가 물 건너간 뒤이더라고요. 그러나 가슴의 소리를 듣고 용기를 내어 도전을 했을 경우 성공확률은 반반이었습니다. 실패는 쓰라리지만 그 나름의 교훈이 있습니다. 지금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슴의 언어가 언젠가 시간이 흐른 뒤 옳다는 것을 제게 알려줄 것이라 믿습니다." 가슴이 말해준 것을 따른 덕분에 나는 제대로 된 상대를 골랐고, 내 아내로 맞이했다.

 

캠벨 : 이거다 하고 오는 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31)

 

캠벨 :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32)

 

캠벨 :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32)

 

캠벨 :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의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중략)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중략)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 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재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3)

 

캠벨 : 자기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의 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략)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 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33)

 

모이어스 :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34)

 

캠벨 : 중요한 것은 영적인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34)

 

모이어스 :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35) → 이성적으로 기능하고 어린 시절을 떠나는 것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일까?

 

캠벨 : 의례를 거치면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 의례라는 상징을 통해 단절을 경험해야 한다.

 

모이어스 : 롤로 메이는 오늘날 미국사회가 범죄가 이토록 많이 일어나는 것은 젊은 남녀에게 위대한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36)

 

캠벨 : 범죄가 많은 또 하나의 까닭은 미국에는 에토스(윤리적 겨레 정신)가 없다는 것이지요. (36)

→ 미국은 에토스(전통으로 이어온 암묵적 약속)가 없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법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법이 아니면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코리아니티가 떠오른다

 

캠벨 :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사항이 있어요. (36)

 

캠벨 :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37) →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오고 가는 대화 중 그 어떤 곳에도 '존재'에 관한 내용이 없다. 주가가 어떻고, 부동산이 어떻고가 이들의 주요 관심사이자 공감대이다. 그 속에서 나는 외로운 섬과 같은 고독함을 느끼곤 한다.

 

캠벨 : 가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다 새겨놓는 다는 겁니다. (38) →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 아이에게 종교를 갖게 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어머니께서 기독교를 싫어하셔서 교회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그 이후 내 안에 신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지금에 와서 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캠벨 :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 →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신화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의례이다.

 

캠벨 :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 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중략)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사는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 (43)

 

캠벨 : 그러나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 전혀 다른 신비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46) →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 지 모르는 배는 그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

 

캠벨 :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제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47)

 

모이어스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47)

 

캠벨 :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중략)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중략)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47~48) → 매일 새벽 출근 길, 퇴근 길에 걷는 2km의 거리, 그리고 일요일 새벽 걷는 15km의 중랑천 길은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캠벨의 말 대로 걷기 명상은 나의 의식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캠벨 :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48)

 

캠벨 : "기계가 인간성을 마모시킬 것이냐, 아니면 기계가 인간을 섬길 것이냐?"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중략)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54)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세계적 사격선수는 맷 애먼스는 마지막 한 발을 남의 표적에 쏴 금메달을 놓친 적이 있다.

 

모이어스 : 토인들은 선교사에게 "당신네 신은 문을 꽁꽁 처 닫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늙어서 병이라도 든 것처럼. 그러나 우리 신은 밀림에도 있고, 벌판에도 있고, 산꼭대기에도 있다, 비가 올 때도 있다" 이렇게 말했다지요. (중략) 서구에서는 특정한 집단 문화에 제국주의적 밀어붙이기를 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만물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밀어붙이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본성의 세계를 열게 된다면 가능성은 그 안에 있습니다. (59)

 

캠벨 :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59)

 

캠벨 :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1)

 

캠벨 :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유파가 있습니다. ①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②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중략) 성서적 전승은 사회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중략)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61~62) → 저자가 자연 지향적인 입장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캠벨 : 일본에서는 "파도와 함께 흔들려라" 라는 말이 있어요. (63)

→ 고교시절 슬럼프를 겪을 때 선생님께서 "파도처럼 출렁이는 사고를 해라"라는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모이어스 : 우리에게는 어떤 신화가 필요할는지요? (64)

 

캠벨 :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64)

 

캠벨 :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중략) 오류의 가능성에서 온전하게 해방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느님에 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65)

 

캠벨 : 우리는 더 이상 정점에 있는 눈의 원리를 상징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정치나 경제에 쏠려있지, 더 이상 이성의 소리에는 쏠리지 않습니다. (71)

 

캠벨 : 인류는 기원전 5백 년 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71) → 차축의 시대라 일컫는다.

 

캠벨 : 인도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71)

 

캠벨 :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의 네 가지 기능>

①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 :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 엄청난 이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74)

 

②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 :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 (74)

 

③ 사회적 기능 :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략)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75)

 

④ 교육적 기능 :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76)

 

캠벨 :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 지간이라는 것을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중략) 신이라는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 '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76) → 캠벨의 범신론적 사상이 드러난 대목이다.

 

캠벨 : 신화의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당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사상입니다. (77)

 

캠벨 : 시애틀 추장은 구석기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의 추장은 명문의 해답을 보냈지요. 이 서한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의 문제, 진짜 도덕의 문제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지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 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은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 사금,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 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 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이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 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돌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 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78~81)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3) →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바닥을 쳐야 위로 오를 수 있다.

 

모이어스 : 신화는 왜,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제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까?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이 저라는 존재의 바탕, 제 앞을 살던 모든 존재에게서 물려 받은 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서 그렇습니까? (83)

 

캠벨 :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85)

 

캠벨 :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6)

 

모이어스 : "어둠의 순간에 눈이 보기 시작한다"는 레트커의 시구처럼 말씀이지요? (86)

 

캠벨 : 나는 신화와 같이 삽니다. 신화는 나에게 늘 그런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 같은 순간에 은유적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문제이기도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86)

 

모이어스 : 그리스도와 시바 신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과녁인 천국도 우리 안에 있지요. (86) → 우주가 곧 신이라는 범신론

 

캠벨 :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중략)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 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86)

 

캠벨 : 우리는 고래 등에 서 있습니다. 만물의 바탕자리는 바로 우리 존재의 바탕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여기저기에 널린 온갖 잡사를 다 보고는 하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87)

 

캠벨 :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내면에 송두리째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프로이트는 더할 나위 없이 상세한 꿈도 실제로는 가장 상세할 수는 없다는 말을 했어요.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 (87)

 

캠벨 :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88)

 

모이어스 : 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캠벨 : 우리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모이어스 : 어떻게 하면 우리 꿈에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캠벨 :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 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 보는 겁니다. (88) Lucid Dream(자각몽, 꿈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꾸는 꿈)이 생각난다.

 

캠벨 :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

 

캠벨 : 그들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겁니다. (89) →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이와 같다. 그 동안 방패막이 되어주던 회사에 대한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고 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모험을 떠났고 관계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캠벨 : 영웅은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90) → 내가 아직 영웅의 면모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캠벨 : 나는 마음 말고는 꿈의 원천이 될만한 것을 알지 못해요. 꿈은 상상력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상상력은 우리 육신의 각 기관 에너지에서 흘러나옵니다. 인류 공통이지요.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 근거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정한 주제를 지닙니다. (91)

 

캠벨 :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사적인 꿈은 신화적인 테마를 표현하게 됩니다. (중략) 꿈이 신화의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올 때도 있습니다. (91) → 내가 체험한 내면의 우주

 

모이어스 : 우리 내면에 있는 원형적인 인격, 우리의 본질적인 원형적인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이군요? (91)

 

캠벨 : 이때의 시간은 사실은 시간이 아니고 존재의 상태 그 자체입니다. (91)

 

캠벨 :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2)

 

캠벨 : 뱀은, 과거를 벗어 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96)

 

캠벨 :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중략)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96)

 

캠벨 : 뱀은 시간의 장,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97)

 

캠벨 :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는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97)

 

캠벨 :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중략)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 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98)

 

캠벨 : 에덴동산 이야기에는 역사적으로 모신을 거부하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100)

 

캠벨 :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 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0)

 

캠벨 : 남성과 여성은 대극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 3의 대극입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대극은 남성, 여성의 대극, 신인이라는 대극입니다. 이 대극을 인식하게 되자 선악의 분별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101)

 

캠벨 : 초월한 존재는 기왕에 알려진 바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102)

 

캠벨 :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이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102)

 

캠벨 :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102) → 플라톤의 분여 이론, 이데아의 분여

 

캠벨 :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중략)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칸트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이 아니지요.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성을 초월합니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을 초월합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중략)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이랍니다. (103)

 

캠벨 :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은 한 원리의 두 측면에 불과합니다. 생명에 성별을 두는 것은 훨씬 뒤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103) → 결국 하나라는 의미

 

캠벨 : 초월성이라는 것은 초월하는 것,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104)

 

캠벨 : 밀교에 다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 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104)

 

캠벨 :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105)

 

캠벨 :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 경험입니다. (중략)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7)

 

모이어스 :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107)

 

캠벨 : '바탕이 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중략)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 입니다. (중략)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7)

 

캠벨 :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109)

 

캠벨 : 우리가 신화를 다루는 것은 신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09)

 

캠벨 :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 영원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중략)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렇게 근원에서 멀어진 것은 우리 마음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그 끊어진 밧줄을 다시 잇는 것이 되지요. (110)

 

캠벨 : 이 세계라는 대교향악단과 조화를 이루려면 우리 개인의 하모니를 이 큰 하모니에 맞추어야 하는 거지요. (113)

 

캠벨 :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113) → 사부님의 '시처럼 산다'가 떠올랐다.

 

캠벨 : 내가 ''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113)

 

캠벨 :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114)

 

캠벨 :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114)

 

캠벨 : 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중략)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 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 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115) → 기독교의 '원죄설'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긍정 심리학'이 떠올랐다.

 

캠벨 : 자연 종교가 사회적 종교로 변질하면 자연과의 관계를 제대로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115)

 

캠벨 :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116) → 캠벨이 방송에 나와 신화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에게 했다는 말 "그는 사슴과 같았다가 아니라 그는 사슴입니다. 이게 진정한 은유입니다."

 

캠벨 :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 입니다. (중략)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중략) 우리가 말의 진의를 좇으려고 할 경우에는 언어라는 껍질을 버려야 합니다. (116)

 

캠벨 :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17)

 

캠벨 :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그 신비는 바로 우리 자체입니다만)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 줍니다. (117)

 

캠벨 :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이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이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117) → 접혀진 질서, 씨앗, 잠세태, 포텐셜의 개념이 떠올랐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세상과 나 사이의 중간지점이 떠올랐다.

 

모이어스 : 재림 혹은 환생이라는 관념은 무엇을 암시하는지요?

 

캠벨 :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119) → 아!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

 

캠벨 : 귀를 여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귀라고 해서 다 경전을 불러주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120)

 

캠벨 :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120) → 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 웨이> '모닝페이지'와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떠올랐다. 그리고 시와 꿈을 읽을 수 있어야 은유를 배우고 익힐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캠벨 :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121) → 샤먼과 선견자는 오늘날 우리가 늘 마주하는 단어인 '리더'로 대체해도 무방할 것 같다.

 

모이어스 : 오늘날에는 누가 은유로 말합니까? (123)

 

캠벨 : 시인들이지요. 시는 은유의 언어니까요. (123)

 

모이어스 : 은유는 잠재적인 것을 암시하지요. (123)

 

캠벨 : 그렇지요. 그러나 가시적인 측면의 배후에 있는 실제성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123)

 

모이어스 : 체험한 사람은 체험한 것을 최선을 다하여 이미지에 투사시켜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기술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124) → 꿈 그려주는 '한정화 연구원'이 생각났다. 정화누나야 말로 체험을 이미지화 시키는 사람이다.

 

캠벨 : '초월자'라는 말의 본 뜻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자 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중략)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중략) 우리가 말하려는 존재, 생각하려는 그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127)

 

캠벨 : 동양 특유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을 수는 없는 거지요. (130)

 

캠벨 : 본질적으로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133)

 

캠벨 :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133)

 

캠벨 :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는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 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 → 와! 멋지다! 삶에 대한 저자의 태도와 철학을 보여준다.

 

캠벨 :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134) →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신화와 인생> 33p

 

캠벨 :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중략)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34)

 

캠벨 :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사랑과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35)

 

모이어스 : 뉘우쳐 깨달을 경우 이 순간의 세상이 곧 영원이라는 확신에 이르는 것 같군요. (138)

 

캠벨 : 내가 하는 말의 뜻이 바로 그겁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139)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이 동굴의 샤먼이 탈혼망아 상태에서 내려가던 우리 내면의 어둠이 어떤 어둠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서 더러 찾아가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내부에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141)

 

캠벨 :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1)

 

캠벨 : 나이를 먹어 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에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143)

 

캠벨 :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145)

 

캠벨 : 의례는 나는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147)

 

캠벨 : 대초원 사냥꾼들이 짐승을 보는 시각은 짐승을 하등 하게 보는 오늘날의 우리 시각과는 다릅니다. 이들에게 짐승은 적어도 동등한 존재, 때로는 우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151) →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가 생각났다. 대표적인 범신론 국가인 일본의 고대 신화를 모티프로 한 이 애니메이션에는 신이었던 짐승이 인간으로 인해 하찮은 짐승으로 폄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갑자기 순간 그 애니메이션의 웅장한 화면과 아름다운 선율의 OST가 떠올랐다.

 

캠벨 : 의례를 통해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들어간 곳을 통해 나올 수도 있게 됩니다. (155)

 

캠벨 :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159) → 성북동 '길상사'에 갈 때마다 이와 동일한 체험을 한다. 일주문 안팎은 이렇게 내게 다른 세계를 경험시켜 준다.

 

캠벨 :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162)

 

모이어스 : 고대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165)

 

캠벨 : 의례를 소중하게 재현시킴으로써 그 가르침이 살아 있게 해야 합니다. (166) → 의례는 형식이 아니다. 신성한 것과의 연계다. 어린 왕자의 여우의 '길들임'의 대화 중 여우가 말한 의례가 떠올랐다.

 

캠벨 :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 입니다. 예술가들의 기증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호화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68)

 

캠벨 :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175)

 

캠벨 :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175)

 

캠벨 :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175)

 

4. 희생과 천복(天福)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기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전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177) → 변화, 새로운 삶,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키드가 바로 희생(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과 천복이 아닐까?

 

캠벨 : 사는 곳을 성화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177)

 

모이어스 :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드러나는 관념적인 성소라고 하셨습니다만, 성소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쓰셨습니까?

 

캠벨 : (성소는)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중략)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 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79) → 나의 성소는 어디인가? 매일 새벽활동을 하고 있는 작은방 책상, 그리고 출근 후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사무실 책상, 매주 일요일 걷는 새벽의 중랑천 순례길이다.

 

캠벨 :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180) → 인디언이 '그것'이 아닌 '그대'라고 부르듯이.

 

캠벨 :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이지 ''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를 가슴으로 감지합니다. → 가식은 언제나 드러나게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왕자의 말이 떠오른다.

 

캠벨 :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줍니다. (187) → 나에게 이런 신성한 의례가 있는가? 나의 경우 새벽 기상 후 곧 바로 하는 모닝페이지 쓰기, 출근 후 내려 마시는 잎 차가 나의 의례다. 이러한 의례는 내 삶을 흐트러지지 않고 성성하게 만들어 준다. 캠벨은 <신화와 인생>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글을 쓰기 위해 그 방에 들어가면, 나는 지금껏 길을 찾는 데 있어 도움을 받았던 책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문득문득 그 중에서도 유난히 통찰력이 있었던 작품들을 읽는 순간을 상기하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나는 사소한 의례적 세부사항-즉 메모장은 어디에 두고, 연필은 어디에 두는 등-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만사를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모습과 똑 같이 만든다. 이 모두가 나를 해방시키는 일종의준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간이 특정한 종류의 행위와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 행위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행위는 곧 놀이다.”

 

캠벨 :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187)

 

캠벨 :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89)

 

캠벨 :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 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189)

 

캠벨 :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 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모이어스 :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189)

 

캠벨 :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190) →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신화와 교감하고 있다. 이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연구원 활동이 바로 이 활동의 연장선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캠벨 :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 줄줄 외고 다닐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은 안 됩니다. (190) → 바로 이 활동이 내가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1만 시간의 게이지를 채우며 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한 훈련과 기틀을 변경연 연구원 활동을 하며 다지고자 한다.

 

캠벨 : 샤먼은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을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191)

 

캠벨 :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193)

 

캠벨 :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194)

 

캠벨 :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194) 법정스님이 떠올랐다.

 

캠벨 :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중략) 숲과 농경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195)

 

캠벨 :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1)

 

캠벨 : 표면적인 이원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일성 관념입니다. 이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이 있어요. 예술의 기능은 창조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205) → 데이비드 봄의 '펼쳐지는 질서'가 떠올랐고, 데이비드 호킨스의 끌개패턴이 떠올랐다.

 

캠벨 :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209)

 

캠벨 :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편 에세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심 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연의 제일 가는 이법과 자기보존을 기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 → 타인을 위한 자발적 행위, 2차 레이스 2번째 과제인 '공감의 시대'와 통하는 구절이다.

 

캠벨 :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11)

 

캠벨 :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211) → 예수, 붓다, 간디, 테레사 수녀, 가까이는 일본 지하철 영웅 이수현씨도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다.

 

캠벨 : <신곡> 끄트머리에서 단테는, 하느님의 사랑은 지옥의 바닥에 이르도록 온 우주에 사무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11)

 

캠벨 :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해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길이 저 길 아니던가? 그러자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캠벨 :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213)

 

캠벨 :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모, 혹은 회심에 많은 고통이 따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군요. (213) → 메타노이아(Metanoia),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신적 변화, 회심. 첫 번째 칼럼의 주제로 활용한다. / 죽음은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다.

 

캠벨 :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215) → 전쟁도 그런 체험을 하게 해주지만 여행 또한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해준다.

 

캠벨 :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 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17)

 

캠벨 : 중세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미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열정(passion)'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18)

 

캠벨 :  "나는 평생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가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221) → 나의 부모님의 고단한 삶이 떠올라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캠벨 :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3)

 

캠벨 :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223)

 

캠벨 :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3)

 

캠벨 :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224)

 

캠벨 : 사람들은 늘 다른 일에 관심을 쏟지요.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끼어들거나 군대에 입대하여 흥미도 관심도 없는 전쟁터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천복을 붙잡기가 어렵습니다. 천복 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224)

 

캠벨 :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랄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들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5) → 사부님의 '위대함에 이르는 7가지 길 중 '침묵의 10년을 견뎌내라'는 가르침과 일치하는 구절이다.

 

캠벨 :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6)

 

캠벨 : 나는 살아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천복이라고 생각해요. (226)

 

모이어스 :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227)

 

캠벨 :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227)

 

캠벨 :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기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 캠벨의 '천복' 사상의 정수가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다. 나의 예로 단군프로젝트가 스승과 사우를 만나게 해 주는 문을 열어 주었다.

 

모이어스 :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227)

 

캠벨 :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227)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 조셉캠벨 (229)

 

캠벨 :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29)

 

캠벨 : ①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②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229)

 

캠벨 :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거지요. (230) →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캠벨 : 넓은 의미에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는 영웅이 아니어도, 누구나 내면을 향한 영적, 심리적 여행을 해야 할 테지요. (230)

 

캠벨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가져온 어머니 역시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231) → 어머니가 아이를 갖고 출산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영웅의 여정인 것이다.

 

모이어스 : 영웅의 시련, 시험, 난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233)

 

캠벨 : 굳이 말하자면, 이 사람이 정말 영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여부, 정말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 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누군가가 예비해 놓은 어던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233)

 

캠벨 :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지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 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233) → 결국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의식의 변모'이며 신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캠벨 : (의식은)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34)

 

캠벨 :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239) → 코엘료의 <연금술사> 처럼 '내 마음이 나를 자아의 신화로 이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재능과 기질, 강점을 탐색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캠벨 : 문제는 이카로스가 아니라 이 우주인을 바다에 추락시킨 날개 속에 들어 있는 태도인데도요. 산업과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힌두경전에는 "위험한 길을 이러하니, 면도날과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42~243) →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데 있도다.' 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캠벨 :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44)

 

캠벨 :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 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 놓는 목숨에서 생긴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의 길일 겁니다. (248) → 영화 '메트릭스'에서 주인공인 네오가 자신을 희생하여 기계와 인간의 평화를 이루어 내는 장면이 떠오른다.

 

캠벨 : 이 세계 모든 문화권, 많은 시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행동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체계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원형적인 영웅상은 하나밖에 없다고까지 말 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249)

 

캠벨 : 동화는 어린이들의 신화에요. 각 나이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신화가 있어요. 나이를 먹게 되면 튼튼한 신화가 필요해집니다. (253)

 

캠벨 : 잠깐만이라도 이 세상의 기원신화를 접어두고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5)

 

캠벨 : 광야에서 예수는 유혹을 받지요. ① 경제적인 유혹, ② 정치적인 유혹, ③ 영성의 과시 입니다. 석가 역시 유혹을 받지요. ① 탐욕, ② 공포, ③ 무리의 의견에 대한 복종에 관한 것이지요. (255~256)

 

캠벨 : "이 풋내기야, 오늘 조간도 못 읽어 봤어? 오늘 어떤 사건이 터졌는지 알기나 해?" 석가는 오른손 손가락 끝을 대지에 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그러자 지평선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우주의 어머니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에 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은 세상을 향하여, 줄 것을 다 주어버린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명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니 그만 두어라." (256) '조간 신문'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무찔러 왔다. 나는 되도록 신문을 읽지 않는다.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이 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내가 피하는 자리와 피하는 화두가 있다. 주식이 어쩌고, 부동산이 어쩌고를 논하며 그것이 마치 그 자신 인생의 지상과제인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과 한 자리에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죽을 때 주식과 부동산을 저 세상에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캠벨 : 아이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위험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고통이 오는 것입니까? (257) → 예전에 법정스님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못할 즐거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이 없으므로 아무런 즐거움도 따르지 않는다. 또한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못할 근심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이 없으므로 아무런 근심이 없다." 고통이 있는 만큼 그 반대편에는 즐거움도 따르지 않을까?

 

캠벨 : 종교는 그 종교의 영웅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모하메드, 예수, 석가 같은 우주적인 영웅은 이 세상 너머에서 인류에게 유용한 메시지를 가져옵니다. 제가 알기로 이러한 종교의 영웅들은 신의 신비를 가져오는 것이지 신의 청사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259)

 

캠벨 : 자아가 우리의 중심은 아니잖아요?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중략)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가로 선 아래에서, 즉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이런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에요. (261)

 

캠벨 :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3) → 아... 정말 그렇구나. 어른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다.

 

모이어스 :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캠벨 : ①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②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 법정스님, 구본형 사부님이 내겐 그런 분이다. 변화라는 분야를 천복으로 삼아 살아가고자 하는 나로서는 캠벨과 융의 사상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캠벨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 함으로써요. (265) → 이제야 알겠다. 나는 내 인생의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모이어스 : 컴퓨터를 그고, 기계를 끄고 너의 느낌에 따라 너의 마임이 가는 대로 하라 (265)

 

모이어스 : 벤 케노비는 "포스란 살아 있는 만물이 지어내는 에너지 장을 말한다. 포스는 우리를 감싸고 있고, 포스는 우리를 관류하다 이 우주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포스이다." 라고 말합니다. (267)

 

캠벨 : 낯선 사람은 주인공에게 물리적인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의지와 심리적인 중심 같은 것까지 가르치지요. (267) → 낯선 사람은 곧 스승이며, 스승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캠벨 : 의식적인 인격은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충전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웅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무서운 밤바다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밤바다 여행에서 이 어둠의 에너지를 극복할 방법을 깨닫게 되면 마침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지요. ((269)

 

캠벨 : 바로 이 자연의 힘이야 말로 우리 생명의 힘이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인도할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지요. (중략)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270)

 

캠벨 :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 → 언젠가 사부님의 칼럼에서 읽었던 서릿발 같은 구절이 나의 가슴 속을 무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타성에 젖은 나를 경책하는 글귀가 되어 주었다 "답을 얻지 못한 근본적인 질문은 반드시 되돌아와 험악한 얼굴로 책임을 묻는다."

 

캠벨 :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도 제자들이 자신 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 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271)

 

캠벨 :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 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272)

 

캠벨 :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선생님의 이른 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272)

 

캠벨 :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 Follow Your Bliss"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2) → 결국은 천복을 따르는 것이구나! 나는 지금 천복을 따르고 있는가? 그렇다! 좋아하는 책을 찬찬히 읽으며, 밑줄을 그으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 지금이 내겐 천복이다.

 

캠벨 :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2)

 

캠벨 :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 입니다. (273)

 

캠벨 :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273) → 불교 경전이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결국 가장 중요한 일은 혼자서 하는 것이다.

 

캠벨 :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 안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73)

 

모이어스 :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273)

 

캠벨 :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도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작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273) →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내가 지금 제대로 된 방향으로 걷고 있구나, 나 잘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성에 물들기 싫어 나의 길을 떠나왔다. 아직 적을 두고 있는 회사라는 조직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지 모르지만 나는 분명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캠벨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275)

 

모이어스 : 어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275)

 

캠벨 : 그 실이라는 게 찾기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아드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5) → 내가 스승을 통해 얻고자 함이요,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모이어스 : 다른 영웅들처럼, 석가 역시 진리를 바로 가르쳐주었던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었지요? (276)

 

캠벨 :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중략)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변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276) → 위대함의 이르는 7가지 길 중, 깨달음의 경지를 나눌 수 있는 어른을 만나야 한다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캠벨 :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79) →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가로 막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두려움 즉 공포다.

 

캠벨 :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9) → 승리의 영광을 해체하고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라

 

캠벨 : 욕망과 공포라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283)

 

캠벨 : 니체의 '영혼의 세 가지 변모

① 아이 → 낙타 : 책임 있는 삶, 복종의 시절

② 낙타 → 사자 : 짐이 무거울 수록 사자는 그만큼 강해진다.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비늘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의 미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요.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 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사자 → 아이 :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283)

 

캠벨 : 개중에는 날 준비가 끝났는데도 제자를 계속해서 학교에 잡아두는 스승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제자는 아주 다루기 까다롭게 되어 가면서 결국은 스승을 험담하게 되지요. 이건 전적으로 스승의 잘못입니다.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285) → 나의 상사들은 나의 재능과 강점이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5년 이상 머물렀다. 나의 재능이 조직에 더 크게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나를 놓아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한다.

 

캠벨 :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 밖에 없지요. (286)

 

캠벨 :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86) → 나의 천복은 무엇인가? 새벽, 명상, 독서를 통해 배운 것을 말과 글로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나의 천복이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캠벨 : 아무리 신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좇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행복을 좇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뿐이지요. (287)

 

캠벨 :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87) → 모험의 시작 '익숙한 것과의 결별', 모험의 완성 '낯선 곳에서의 아침'

 

캠벨 : 모험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중략) 원형적인 이야기가 이런 모험의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과연 무엇인가를 아는 데 약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291) → 단군 프로젝트에 반영된 영웅의 여정의 원형이 100일 과정을 겪는 참가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100일이란 시간 동안 그들이 겪는 알 수 없는 이유의 시련과 슬럼프, 자만과 방심으로 인한 실패는 영웅의 여정이라는 원형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했다.

 

모이어스 : 신화는 고통에 관해서 뭐라고 합니까? (294) → 우리의 부모님, 나의 누이가 겪은 시련이 떠올랐다. 신화는 고통이 피해야 할 것이 아닌 삶을 이루는 또 다른 요소라며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캠벨 :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296)

 

캠벨 :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열반은 천국 같은 것이 어떤 ''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그렇게 해탈을 하면 우리의 삶이 조화롭고, 중심이 온전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지요. (296)

 

캠벨 :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에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6)

 

캠벨 :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297)

 

캠벨 :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중략)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이 됩니다. (299)

 

캠벨 :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를 벗어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성취한 사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300)

 

캠벨 :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301)

 

모이어스 :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열 수 있습니까? (302)

 

캠벨 :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중략)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302) → 결국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좋은 스승을 만나거나 좋은 스승에 버금가는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이다. 변경연 연구원 제도가 지향하는 바가 이와 같지 않을까?

 

캠벨 :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03)

 

캠벨 :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303)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캠벨 : 결국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305)

 

캠벨 :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307)

 

캠벨 : 여성은, 칸트 철학의 입장에서 우리가 '감각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표상합니다. 여성은 시공 그 자체인데, 이 여성 너머에 있는 신비는 곧 한 쌍의 대극을 초월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309)

 

캠벨 : 원형질은 이리저리 흐르는 것 같은데도 실은 형상을 빚지요. 원형질은 어떤 형상을 빚어낼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요. (309) → 접혀진 질서, 잠세태, 포텐샬, 끌개 패턴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캠벨 : 나는 신화가 돌아오고 있다고 믿어요. 요즘의 젊은 과학자들은 형상을 낳는 장이라는 뜻으로 '형태 발상의 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이것이 바로 여신입니다. 바로 형상을 낳는 장입니다. (311)

 

캠벨 : 우리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311)

 

캠벨 : 정신의 발전 단계를 나타내는 인도의 관념체계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지요. 인도에는 척추에 있는 정신의 중심 체계 일곱 가지가 있어요. 이 체계는 바로 관심과 의식과 행동의 심리적 차원을 상징합니다. (318)

 

<신화와 인생>에 나오는 7개의 차크라

낮은 3단계의 차크라

① 제 1 차크라 물라다라, 뿌리받침, 척추의 맨 밑 직장에 있음, 분명한 사실들에 통제되는 활력 없는 유물론, 본능적 충동, 뱀으로 상징된다.

② 제 2 차크라 스바디슈타나, 그녀의 특별한 집, 성기단계, 생식의 충동, 프로이트적 리비도의 성격

③ 제 3 차크라 마니푸라, 빛나는 보석의 도시, 배꼽높이, 힘을 향한 의지

→ 낮은 단계에 있는 이 세 개의 차크라들은 소박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양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계들에서의 기쁨과 슬픔은 '저 바깥' 세상에서 성취한 것, 즉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작용한다. <신화와 인생> 159p

 

영적 차원으로 가는 관문

④ 제 4 차크라 아타히나, 부딪치지 않음, 심장의 높이, 영적 차원으로 가는 입구 모든 것이 신비의 은유

 

높은 3단계의 챠크라

⑤ 제 5 차크라 비슈다, 정화됨, 후두에 위치, 에너지가 유래하는 동물적 시스템을 물리치려는 영적 노력, 이제 전적으로 육체적인 목표가 아니라 영적인 목표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⑥ 제 6 차크라 아냐, 명령의 연꽃으로 미간에 위치, 천국의 차크라, 육신을 갖춘 형체의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차크라이다. 쿤달리니가 이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신을 볼 수 있다. '타트 트밤 아시', "네가 바로 그것"이 된다. 객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주체를 소유해야 한다.

⑦ 제 7 차크라 사하스라라, 즉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한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이다. 이 차크라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곳엔 오로지 분화되지 않은 의식, 즉 침묵이 있을 뿐이다.

 

→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곧 진정한 변모, 메타노이아를 의미한다. 이는 곧 정신이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궁금증이 차크라가 답을 해주고 있다. 서양에서는 매슬로우가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① 생리적 욕구 ② 안전 욕구 ③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④ 존경욕구 ⑤ 자아실현의 욕구

 

 

캠벨 :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 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320) →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이 중심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캠벨 :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320)

 

캠벨 :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에요. (320)

 

캠벨 :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이 보존을 위한 소산은 아니라는 겁니다. (322) → 인도의 차크라와 예수의 영적 탄생이 이렇게 연결되는 구나!

 

캠벨 :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22) →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두 번째 탄생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캠벨 :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가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333)

 

캠벨 :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335)

 

캠벨 :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336)

 

캠벨 :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336)

 

캠벨 :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337)

 

모이어스 :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337)

 

캠벨 :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337)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 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 귀로 드 보르네이유 (339) → 2008 10 4일 사무실에서 그녀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얼어붙었던 순간과 2009 3 7일 오후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결심했던 그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캠벨이 주장하는 사랑의 종류>

① 에로스적 사랑 : 생물학적 충동,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

② 아가페적 사랑 : 영적인 사랑

③ 아모르적 사랑 :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

 

캠벨 :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되니까요. 삶의 의지를 이렇게 짓밟아 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라는 겁니다. (344)

 

캠벨 :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344)

 

캠벨 :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45) → 즉 사랑은 영적 동일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육체는 그 다음이다.

 

캠벨 : 결국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중략) "죽음이라니. 이 사랑의 고통이 죽음이라면 그것도 팔자소관이지요, 죽음이라니. 이 사랑이 발각되었을 때 내가 받을 벌이 죽음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소. 그대가 말하는 죽음이 화염지옥에서 받게 될 영원한 벌이라고 해도 이 역시 나는 받겠소." (347) → 영화 <연애소설>에서 주인공들 사랑에 빠지면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프다! 계속 아프고 싶다!"

 

캠벨 :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47)

 

캠벨 :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349)

 

캠벨 :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349)  → 내가 이 세상 살면서 꼭 하나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바로 나만의 세계를 하나 갖는 일이다.

 

캠벨 : '용기' 없으면 생각도 못한답니다. (349) → 바로 이 용기가 새로 태어남의 구분점이 되어준다. 용기를 내어 결단을 내리는 순간부터 나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용기, 그 용기가 겉으로 드러난 결단이 모든 새로 태어남의 변곡점의 역할을 수행한다. 괴테가 이야기 했다. "우리가 결단을 내리는 순간, 그 때부터 하늘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캠벨 : 전쟁을 치르면 안 되지요. 상호부조 해야 합니다. 머리는 참가하고 가슴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겁니다. (351) →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조화와 균형'을 의미한다. 밥과 존재 사이의 균형, 개인과 조직 사이의 균형. 그러나 때로는 창조적 불화도 필요하다.

 

캠벨 :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 ① 절제 ② 용기 ③ 사랑 ④ 충성 ⑤ 예의 바름입니다. (351)

 

캠벨 :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 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353)

 

캠벨 : 성배는 한 쌍의 대극의 사이, 곧 욕망과 공포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로 난 영적인 길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356)

 

캠벨 : 성배는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358)

 

캠벨 :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조차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358)

 

캠벨 :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358)

 

모이어스 : 토마스 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358)

 

캠벨 : "모든 행동은 좋게도 결과하고 나쁘게도 결과하느니"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359)

 

캠벨 :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한적이 있습니다. (360) → 남성 안의 여성성인 '아니마', 여성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와 통합될 때 비로소 한 존재는 보다 성숙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캠벨 :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1) → 아! 내가 낙타의 삶을 영위하는 직장을 텃밭으로 삼아 인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캠벨 :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65) '성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 중 하나다.

 

캠벨 :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367) →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해준 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거야."

 

모이어스 : 사랑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라 슬픔도 깃들어 있다는 것이군요. (373)

 

캠벨 :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373)

 

모이어스 :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373)

 

캠벨 :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373)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상실'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자신보다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우리의 부모님들. 그들에 대한 상실감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이다. 아직 나는 가까운 사람에 대한 상실을 경험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그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저기 저곳에서 세상 모르게 순진한 얼굴로 잠들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가 내 곁에 없다면, 그리고 내가 먼저 그녀 곁을 떠난다면 어떻게 될까? 눈물이 나려고 한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지만,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참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 (375)

 

캠벨 :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375) → 일요일 새벽 아무도 없는 캄캄한 중랑천을 걷고 집으로 돌아올 때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군청색 하늘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다. 바로 그 때 나는 신의 일에 참여한 것이다.

 

캠벨 :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 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379)

 

캠벨 :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 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 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379) → 가면을 벗겨내고 본질을 바라보아야 한다.

 

캠벨 :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380)

 

캠벨 : 자비, 화합, 타자와의 동일성, 혹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자리잡게 된 바람직한 자아 초월적인 원리와의 동일성 체험은, 종교적인 삶과 체험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이라야 평생을 바쳐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완벽한 경험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 궁극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단계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이 허깨비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380) → 내가 어느 날 새벽에 바라본 내면의 우주가 바로 이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자신의 직접적인 종교적, 신비적 체험 없이는 진정 길을 떠났다고 할 수 없다.

 

캠벨 :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가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 버린 ''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신의 은유적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381) → 결국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신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한 순간에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깨달음의 일부가 분여가 되어 내 삶에 파고들 수도 있는 일이다. 이렇게 내가 알고 있는 내 존재를 초월하여 신과 합일이 되어 아무 것도 없는 공(), 무위(無爲)이 경지에 이르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길이다.

 

캠벨 :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382) →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렇게 불완전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캠벨 :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386) → 코엘료 <연금술사> 신은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다.

 

모이어스 : 그럼 삶의 본원은 무엇입니까? (387)

 

캠벨 : 남의 삶에서 ''의 삶을 인식하는 것, ''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378)

 

모이어스 : 그러면 종교는 무엇입니까? (387)

 

캠벨 : 상호 연결된다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388)

 

모이어스 :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중심을 우주의 중심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군요. (392)

 

캠벨 : 우리 삶의 에너지는 바로 이 무의식의 심층에서 솟아오릅니다. 그러므로 가마솥은 무궁무진한 근원, 중심,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샘인 것입니다. (393)

 

캠벨 : 무의식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깊은 골짜기이기도 하지요. 우리 삶은 어디에선가 쉴새 없이 솟아 오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내어 보내는 곳, 이곳이 바로 무궁무진한 에너지의 근원인 겁니다. (393) → 어느 날 새벽 내가 바라본 나의 내면의 우주, 그곳은 말 그대로 에너지가 중만한 그런 곳이었다. 군청, 검푸른 빛, 밝은 달과 별로 이루어진 이 내면의 우주는 순수 그 자체였다. 선과 악이 존재하지 태곳적 순수함이 살아 숨쉬는 그런 곳이었다. 처음엔 그런 신비 체험이 어떠한 것인지 몰랐다. 나중에서 그것이 융이 말하는 심연 속, 무의식의 한가운데에 있는 내 존재의 본질, '자기'였던 것이다.

 

캠벨 :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의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94)

 

캠벨 : 신은, 인류의 종국적이고 본질적인 관념일 것입니다. (394)

 

모이어스 : 이 고요한 중심에서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 고요한 중심은, 시간의 흐름과 영원의 흐르지 않음이 공존하는 바퀴의 굴대에 해당하겠지요? (394)

 

캠벨 :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점입니다. (395) → 앞서 말한 내면의 우주의 중심이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캠벨 : 중심의 에너지가 이 풀과 같습니다. 성배 이미지, 무궁무진한 샘, 무궁무진한 근원의 의미가 바로 이겁니다.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 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95)

 

캠벨 : (영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405)

 

캠벨 :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 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405)

 

캠벨 : 이웃을 사랑해보면 곧 이웃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지요. (407)

 

캠벨 :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409)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에 대해 스승이 아닌 인생을 먼저 살고 간 선배로서 해주는 따뜻하고 포근한 조언처럼 다가온다. 누구나 겪게 될 상실의 고통을 영원의 가치로 치환함으로써 나는 그들과 늘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모이어스 : 아름다움은, '살아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410)

 

캠벨 :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이 순간'이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410)

 

캠벨 :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411)

 

캠벨 :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문 <개인의 운명에서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어요. 그의 생각은 이래요.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411) →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마크툽'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기록되어 있다' 뜻으로, 종교적으로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있는 말이다' 라는 의미의 아랍어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다' 정도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의미다.

 

캠벨 : 꿈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 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411) → 신의 섭리에 의해 접혀진 질서가 펼쳐지는 것이다.

 

캠벨 :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의지의 동기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412) → 영화 <메트릭스> <인셉션> 등이 이런 상징을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캠벨 : 인드라의 그물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념을 대할 수 있어요. 인드라의 그물은 실과 보석으로 짜여진 그물입니다. 실과 실이 만나는 곳마다 보석이 달려 있는데, 각 보석에는 다른 보석이 비칩니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많은 사건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뒤에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의지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지요. (412)

 

캠벨 :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413)

 

모이어스 :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413)

 

캠벨 : 키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413) → 코엘료의 <연금술사> '표지'가 우리가 가는 길을 인도해 준다. 여행의 목적지가 희미해지면 그 여행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다.

 

캠벨 :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느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413) → 바로 이 순간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자 그 순간의 의미이다.

 

캠벨 : 시는 언외(言外)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말했습니다. 무상한 것은 모두 은유적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 (414)

 

캠벨 : ''은 우리 귀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중략) ''은 소리 나는 것, 곧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중략) '' '사대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셋 밖에 없는데 또 한 음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끝나고, 또 한 ''이 시작되기까지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것은 필멸의 팔자를 지닌 것, 저것은 영생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415) → 캠벨은 ''과 관련된 지혜를 융을 통해 알게 되고 인도 여행에서 과학자들이 경이로움에 탄식하며 ''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신화와 인생>

 

모이어스 :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415)

 

캠벨 :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415)

 

모이어스 : 그런데도 우리 하잘 것 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415)

 

캠벨 :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415)

 

 

III. 내가 저자라면

전체적 구성에 대하여

'신화이 힘'의 진정한 저자는 조셉캠벨이지만 이 책의 뼈대를 만들고 편집한 사람은 빌 모이어스이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과 이야기 전개를 논하기 위해서는 저술 당시 이미 고인이었던 캠벨의 철학과 사상은 논외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지금까지 총 3회 정독했다. 1회독은 말 그대로 문자를 읽는 수준에 머물렀고, 2회독 때 캠벨의 굵직 굵직한 사상인 천복, 의례, , 영웅이 여정, 메타포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3회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책의 많은 부분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고, 캠벨과 모이어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단순하고 간소하다. 이야기 전개 방식은 모이어스의 서문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캠벨과 모이어스와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캠벨사상의 정수인 천복 및 영웅의 모험 등 총 8가지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주제들 사이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떨어지고,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며, 사전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내용이 주제를 대변하지 못하고, 같은 이야기가 중복되는 곳이 많다'는 등의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대담자이자 편집자인 모이어스의 이야기처럼 이 책은 애당초 출판을 목적으로 구상된 책이 아니었고, 캠벨과의 PBS 대담 내용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게 되어 외부의 요청으로 엮인 데 기인한 것으로, 처음부터 큰 골격으로 목차를 잡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반 저서들과는 달리 이미 이루어진 대담의 내용을 쪼개고 분류하여, 임의로 구분한 8개의 테마 아래 모아 묶은 데서 비롯된 불가피한 한계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리 친절한 신화 입문서는 아니다. 캠벨과 신화에 대한 추가적인 공부를 통해 그들의 에너지 장에 들어서야만 그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조금은 높은 진입장벽이 있는 어렵고 난해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입장벽이 높은 '불편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오랜 기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역시나 대담자인 모이어스의 탁월한 질문 능력 덕분이다. 평소 신화에 대해 관심도 없고, 사전지식도 없는 나와 같은 독자들을 대변해 그는 대번에 캠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왜 하필이면 신화입니까? 우리는 왜 신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독자의 마음을 무찌르는 질문을 타고 우리는 그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모이어스의 이야기처럼 대담의 대상이 캠벨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높은 진입장벽을 넘어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고픈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불편한 구성'의 불가피 함이 난해함을 겪는 독자에 대한 충분한 변명은 될 수 없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것은 23년 전인 1988년이다. 이 책이 본래부터 사전에 계획된 구성으로 인해 편집된 책이 아닌 대담이라는 큰 덩어리를 쪼개고 분류하여 구성된 점을 감안한다면, 23년이란 시간 동안 캠벨에 관하여 심오하게 연구한 캠벨 전문가들에 의해 '불편한 구성'을 다시 본래의 하나로 통합하고 조각으로 해체하여 재구성을 했으면 어떠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감히 나는 캠벨 전문가가 아닌 캠벨 초심자의 입장에서 '신화의 힘'이라는 책을 재구성을 해 보고자 한다.

 

1부 신화란 무엇인가? (기존: 1. 신화와 현대사회)

   1. 신화란 무엇인가?

   2. 신화와 의례 (기존: 2. 태초의 이야기 꾼들)

   3. 신화의 기능

 

2부 신화와 무의식 (기존: 3. 내면으로의 여행)

   1. 신화와 메타포

   2. 꿈과 신화 그리고 무의식

 

3부 신화와 영웅 (기존: 5. 영웅의 모험)

   1. 신화는 만국의 공통언어

   2. 영웅의 여정

   3. 깨달음을 향한 길 (기존: 6. 조화의 여신)

 

4부 신화와 인생

    1. 희생과 천복 (기존: 4. 희생과 천복)

    2. 결혼과 사랑 (기존: 7. 결혼과 사랑)

    3. 신화와 예술 (기존: 4. 희생과 천복)

    3. 영원의 가면 (기존: 8. 영원의 가면)

 

※ 부록: 용어 사전 (새로 추가)

 

우선 8개로 된 큰 덩어리를 좀 더 잘게 썰어 독자의 입맛에 맞는 크기로 맞춘 후, 이를 다시 큰 맥락으로 묶었다. 1부는 도입부 기능을 하며 주로 신화의 개념, 우리의 삶 곳곳에 묻어 있는 신화와 의례에 관한 이야기,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에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구성한다. 2부는 신화와 무의식은 신화가 애매모호하고 어렵고 어지럽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메타포(은유)라는 신화 고유의 언어에 있음을, 그리고 '꿈은 인격화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란 맥락으로 신화와 무의식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내용들로 구성한다. 3부인 신화와 영웅은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관한 내용과 더불어, 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화의 여신'의 장을 이쪽으로 편입했다. 사실 이 장을 4부인 신화와 인생으로 넣을지 고민했는데, 영웅의 여정 중 '여신과의 만남'이 있음을 감안하여 3부로 편성했다. 4부는 신화가 우리의 짧고 덧없는 인생에 주는 메시지를 테마로 묶었다. 마지막으로 용어 사전을 추가 하여 생소한 용어(예를 들어 모듬살이, 공희제 및 분석심리학 관련용어 등)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독자의 갈증을 해소시켜 준다. 재구성의 포인트는 스프레드 식으로 광대하게 펼쳐진 캠벨 사상의 정수들을 기존의 구성보다 잘게 썬 테마 아래로 묶음으로써 그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진입장벽을 조금 더 낮추는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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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22:21:06 *.128.73.59
아직 책 정리 중인데여..살다보면..을 읽으면서 보통 내공을 지닌 분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이 글 읽고 나니..기도 살짝 죽고..
하여간 함께 소중한 1년을 함께 하고 싶은 분이란..생각이 듭니다^^ 완전 존경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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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23:59:44 *.166.205.131
깔끔한 정리와 단어 선택의 세심함이 느껴집니다.
'내가 저자라면'에서는 제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을 명확히 정리해 주셔서 '와!'라는 감탄이 절로 납니다.
동영상 올리는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근데 제가 찾은 것과 같은 다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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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12:45:03 *.137.221.167
 정리가 잘 된 북 리뷰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거 같네요
 경인님의 내공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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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23 01:51:46 *.180.75.152
경인아 사부님 지그시 웃고 계시는 모습 눈에 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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