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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0일 23시 0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은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이며,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그는 1904년 3월 26일 미국 뉴욕 시에서 전형적인 중산계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생동안 계속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캠벨의 관심은 여섯 살 때 부친에게 이끌려서 메시든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를 보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조셉 캠벨은 열 살 무렵 지리적으로 뚝 떨어진 지역의 민담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조셉은 어린이 코너에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모든 책을 읽었고, 성인을 위한 코너, 사실상 민족학이라 분류된 곳의 모든 책들을 읽었다. 그는 조가비 벨트를 두르고 그 자신의 “종족”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처음 거주하게 된 Delaware 종족이며 후에 "Lenni-Lenape"이라 이름 붙여진) 을 만들고, 자주 그를 매료시킨 토템기둥과 가면이 있는 자연사 American 박물관에 갔으며, 박물관의 거대한 컬렉션의 탐험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가 처음 신화에 이끌리게 된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신화가 많다는 것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를, 독일 뮌헨대학에서 산스크트어를 공부했다. 그는 한 때 뉴욕시 최고의 육상 선수였고, 색소폰 주자였으며, 대공황이 닥치자 5년 가까이 우드스탁의 숲 속에 은거하며 독서와 개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재즈밴드에서 색소폰을 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식비를 조달했다. 이 시기가 그에게는 공부의 ‘황금시기’가 되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학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마친 캠벨은 생물학, 수학, 신화학, 종교학, 영문학 같은 다양한 학문을 그만의 방식으로 쌓기 시작한다. 캠벨은 이 시기를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고 회고한다. 캠벨은 모두 인류가 빚어낸 모든 문학과 지식을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은 신화학자이다. 그는 이 우주의 기원과 인간 종의 탄생과 고대 신화와 다양한 대륙의 역사를 두루 망라하면서 책을 쓴다. 그는 이성적, 과학적 언어로써 반과학적인 종교적 교의를 거부하고 신화를 객관적인 사실과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화는 인류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타워즈 감독 조지 루카스는 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조셉 캠벨”이라는 사람에게 많은 빛을 졌다고 언급한다. 그는 스타워즈를 만들기 전부터 캠벨의 강의에 열광하던 대학생이라고 한다. 스타워즈는 보편적인 신화이며, SF인 동시에 판타지이고, 무엇보다 신화적인 모험물이었다.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하는 인간성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루카스는 영화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고, 고양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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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벨은 신화를 살아가면서 그 적합성을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확인한다. 신화의 힘이 인류의 처음으로 돌아가 인류가 애초에 품었던 꿈, 애초에 기대되어왔던 도덕률, 인간의 본성을 거르지 않는 삶의 방식임을 알려준다. 또한 우리가 혼자 끙끙거렸던 문제들의 답을 신화를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 자신의 천복을 따라 가며서 평생을 신화에 몰두 하며 살았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게 천복을 향해 살았던 그의 인생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개인이 공부했다고 하기엔 방대한 범위를 넘나들며 학문에 열중했던 것은 캠벨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 보기도 한다. 인류가 공동으로 꾸는 꿈은 신화를 통해 인류가 맞고 있는 위기를 극복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천복을 따라가는데 이 마음도 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캠벨이라면 ‘신화의 힘’ 마지막 문장에 언급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 할 수 없다는 이 한 마디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주 하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
http://blog.daum.net/jidam55/14563587
http://blog.ohmynews.com/booking/263881
http://cafe.naver.com/0zeropoin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28http://
www.jcf.org/new/index.php?categoryid=11
yes24, 교보문고 저자 소개
책 안에 쓰인 저자 소개

2.‘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신화와 현대세계

한 문화 권역과 다른 문화 권역의 영웅, 혹은 구세주는, 두 문화권이 교섭한 경험이 없는 경우에도 서로 비슷비슷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닥,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 ‘원형’ 이라고 부른 것이 서로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입니다. - p.5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隱居)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p.9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p.10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1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을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p.12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 많은 구도자들이 존재해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있느라 영웅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 바늘하나 들어갈 틈조차도 없는 건 아닌지...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p.28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p.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p.29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p.31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p.32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雜學家)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 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학자들은 이렇게 부르면 큰일납니다만)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도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p.38
→한 곳에만 너무 집중하다보면 오히려 그 안에 갇혀버리게 되 좀 더 폭넓게 자신의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더불어 갈수록 편협해져 가는 세상도 이에 일맥상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p.48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神話化)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p.48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다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p.61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19세기 학자들은 신화나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기도(企圖)라고 생각했지요. 그거야 미술이지 어디 신화나 종교이겠어요?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배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집니다. -p.62
→어느 순간부터인가 세상은 자연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에 자연은 자신을 봐달라며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지만 세상은 그것을 그냥 가벼이 넘기고 있다. 아무리 자연을 되돌려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도 결국 하는 짓이라고는 자연을 더 짓밟는 행위일 뿐임을... 왜 인간은 자연과 손잡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p.65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p.71
→우리는 그 탐욕으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추잡해 질 수 있는지를 쉽게 볼 수 있다. 열정이 없어 삶이 무기력하게 흘러가는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열정이 없음에 한편으로는 마음에 짐을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73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p.74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화도 있고, 단혼(單婚)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이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p.75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 줄 수 있어요. -p.76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가 쉬울 겁니다. 이것이 곧 이 땅의 눈이요, 이것이 곧 이 땅의 음성입니다. -p.77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p.77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요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이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p.78 →입으로는 지구촌이라고 떠들면서 과연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지금 이 순간도 세상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몫으로 더 많은 것을 착취할 수 있을까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나의 잣대를 내려놓고 순순한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게끔 우리를 이끌어 주는 신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p.80

2. 내면으로의 여행

“이 신화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말을 건단 말이야. 신화라고 하는 게 말이지. 내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내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단 말이야.” -p.83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된 모든 사상(事象)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p.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6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p.86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原型的)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이 두 단계(개인적인 단계와, 개인적인 문제가 하나의 본보기가 되면서 일반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단계)는 이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p.88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p.89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다른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89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p.92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p.96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 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p.102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大宗敎)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言表)될 수 없습니다. 차상(次上)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場)이랍니다. -p.103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p. 107
→인간의 마음은 같지만 그 원형이 각기 다름으로 인해서 인간의 세계사는 서로 죽고 죽이는 장이 되었던 것일까?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담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p.114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p.118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p.120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면이나 선견자(先見者)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p.121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26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 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p.133
→나 혼자만 고고하게 다른 이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 아님을 처절히 깨닫고 나서야 다른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개선의 여지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닫게 된다면 세상을 조금은 덜 무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이니 일부입니다. -p.134

선악을 논하기 전에 , 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견댈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p.136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룰 수 없습니다. -p.138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p.139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41

어디에선가, 가시적인 우리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불가시적인 삶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테마를 이루는 관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우리 자신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신화, 다시 말해서 부족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현실의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습니다. 현실 사회는 그 부족의 목적지에 있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아요.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p.145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적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성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능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일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요. -p.158

마흔 다섯이 되었는데도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분고분한 남자가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정신분석의를 찾아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분석의가 처방을 내려줄 테지요. -p.162

원시사회도 문제아(말하자면 순수한 자연의 충동을 그대로 표현하는 아이들)를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별 수를 다 썼지요. 그런데 사회는 규칙에 따라오지 않는 문제아들을 견디지 못했어요. 그런 아이들을 용인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사회가 그들을 죽여 버렸던 겁니다.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p.173
→철저히 내 안에 갇혀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체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자신 스스로가 하늘에서 똑 떨어진 존재가 아닌 어느 한 사회의 중요한 소속원임을 일깨워주는 의례가 필요하다는 것이 절실해 보인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靜的)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에서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p.175

4. 희생과 천복

사는 곳을 성화(聖火)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p.177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179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p.183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 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p.190

가치, 즉 평가의 결과는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사냥꾼의 의식은 늘 외계의 동물에게로 쏠립니다. 그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 지향적입니다. 사냥꾼에게는 동물이 신화를 촉발합니다. 권능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동물이 나타나 권능과 지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p.194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땅에 쓰러진 고목과 떨어진 잎에서 새싹이 나온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이 솟고 죽음으로부터 새 삶이 비롯됨을 깨닫게 한다. 어설프게 결론을 내려 보자면, 생명이 늘어나려면 죽음이 늘어나야 한다. -p.201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일상의 삶과 이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 사는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p.204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의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겁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란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하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세히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장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말입니다. -p.211

아르벨라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救主)가 되었다는 겁니다. -p.213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를 명상하는 것입니다. -p.213
→시간은 모든 것을 잊게 한다는 것, 내가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현재이고, 모든 시간의 흐름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을 견뎌가며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213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2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p.224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생전 안 하던 경험을 하니 대단하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227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정말 맞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찾는다. 현재에 100%로 충실할 수 있다면,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느라, 다가오니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현재에 온전히 집중해 살아간다면 나의 천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이끌어 줄 그 무언가를 만나게 될 수 있으리라...

5.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p.229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시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브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30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만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 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p.233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p.234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나폴레옹은, 20세기 히틀러의 19세기 판입니다. -p.235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지요. 물론 반대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옹호하려는 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일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이것은 반대편 입장에서 보아서 그럴 뿐입니다. 반대 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니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p.235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p.237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놓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肉化)’의 길인 겁니다. -p.248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p.254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p.262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p.263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p.265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p.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0
→귀를 기울이지 않기도 하지만 또한 그만큼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는 것을 두려워해서이기도 하지 않을까?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자신이 없어 실패할까 두려워서 말이다.

영적으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을 위하여 육체적 욕망과 공포를 희생시키는 일……. 바로 이거 아닙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에서, 육체가 우리의 깊디깊은 삶의 정체를 깨달아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조만간 무엇이, 이 이승의 삶이라는 꽃을 잘 가꾸는가를 알아내어 그것에 헌신해야 합니다. -p.271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p.273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 사회를 보면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과자 같아요. 이런 사회 구성원의 의무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날 도리가 없지요. -p.277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p.278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79
→삶에 대한 집착을 온전히 놓아버릴 수 있다면 모든 순간순간이 환희로 가득차 있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져 그것들로 인해 더 나아가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겠지요.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다시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흡사 굴대를 떠난 바퀴처럼 말이지요. 이제 이 아이에게는 복종해야 할 법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필요에서 제정된 법률도 없고, 지역 사회를 위해 제정된 법률도 없습니다.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p.284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p.284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87

그런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버려요. -p.292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p.296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 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p.297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단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p.298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어디에선가 전쟁이 터지면 젊은이들은 징집을 당하겠지요. 그러면 바로 이 우연지사와 함께 5~6년은 족히 썩어야 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내가 충고해주고 싶은 것은, 징집 당했다고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의지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p.299
→매 순간 맞이하게 되는 모든 삶의 경험들을 환경적 요인에 의해 내가 당한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맞아들인 것이라고 여기면 살 수 있다면 삶이 풍성해지고 그 안에서의 깨달음으로 내 안의 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이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개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p.301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즉, 살아있음의 모험이지요. -p.303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예요.

우리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우리라는 것이군요. -p.319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절대로 하나도 놓지 않고 더 가지려고 눈에 불을 켜가며 사는 삶이 당연시 되는 요즘 자연과 우리가 하나임을 잊게 되기에 우리는 이와 같은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연히 우리를 향해 복수하기 시작한 지금에도 아무런 자각도 하지 못한 체 말이다.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 말씀이 빛줄기로 들어갔다는 것이군요. -p.320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깐 성(性) 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깐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p.332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근본으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곧 어머니 원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일이 생겼으면 조겠다고 하는 우리의 기대는 우리 인간의 정신에 어떤 변화가 와야, 이로써 사회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회, 그 사회의 어떤 무리와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특정 무리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p.334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p.337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결국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전통에 반하는, 다시 말해서 교회 전통에 반하는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들게 했겠군요.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p.343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p.350

사람들이 교회 조직의 권위에 몹시 염증을 느끼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세 사람들은 자기네가 참여하고 있는 사회를 대단히 존중했어요. 모든 것은 규칙에 따라 결정되었지요. 가령 두 기사가 격투를 할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는 할망정 규칙을 어기지는 않았어요. 이러한 예의 바름은 우리가 유념해야 할 미덕입니다. -p.351

어떤 종류의 사랑 놀음이든,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규칙의 체계를 따랐던 것입니다. -p.352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은 곧 ‘자비’를 수용할 만한 마음인 것이지요.

어떤 의미에서의 ‘자비’를 수용하는데요?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그러니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한 겁니다. 그러므로 중세의 사랑 놀음은 욕정의 놀음이 아닌 겁니다. -p.353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p.356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開花)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p.358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p.359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 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p.365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보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p. 365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예요.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p.366

사랑은 곧 신의 임재(臨齋)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이게 곧 음유시인들의 생각이기도 했고요. 신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곧 신이 아닙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는, “사랑은 고통을 모른다.”고 했어요. 이 말은 트리스탄의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기꺼이 받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p.370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믿어보면, 지옥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던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p.371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p.373

8. 영원의 가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우리 마음속에서도 전쟁이 터집니다. 우리가 내릴 가능성이 있는 결정은 네댓 가지는 됩니다. 물론 내 마음속에 있는 가장 힘센 신의 영향력이 바로 나의 결정을 주도하게 되겠지요. 그 힘센 신이 잔인하다면 나의 결정은 물론 잔인할 테지요. -p.376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p.379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p.380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p.381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삶이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 그런 삶의 본원은 무엇입니까?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p.387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 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p.395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 수는 없어요. 어떤 사고 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신이 끼어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p.397

수도하는 자가 자기의 자아와, 고통과 기쁨이 함께 하는 속세의 일, 그 달콤하던 삶에 연연할 경우 신이 나타나되 분노로 치를 떠는 측면을 보이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아를 잊고 자신을 포기하면 다 같은 부처라도 이번에는 천복을 주는 부처로 나타납니다. -p.403

영원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까? 다른 곳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p.404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상적(地上的)관계의 체험 속에서도 그 영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p.409

시간의 단편을 통하여 원초적인 존재의 광대무변한 힘을 체험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술의 기능입니다. 아름다움은, ‘살아 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순간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이 연속이어야 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p.410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특정인은 때로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는 우리 모르게 그 특정인을 중요한 인물로 인식하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p.411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p.412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를 여는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p.413

3. ‘내가 저자라면’

 캠벨과 모이어스의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총 8장으로 되어있으며 주로 빌 모이어스가 질문을 하고 조셉 캠벨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그리스 신화, 아메리칸 인디언 신화, 인도 신화, 불교 사상, 중국의 노자사상을 아우르며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지혜를 보여준다. 신화가 무엇인지에 관해, 신화가 현대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앞으로 신화가 우리에게 좀 더 영향력을 미치려면 어떤 새로운 신화가 필요한지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 모두를 위한 신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책의 서문을 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단순 설명방식이 아닌 대담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금은 더 가깝게 신화에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이 책의 큰 특징으로 보인다. 챕터 시작마다 그 챕터의 주제겪인 문장들이 편집되어 있어 전개될 이야기에 대해 가늠해 볼 수 있는 점 또한 책을 읽는데 도움을 준다.

이 책 전반부는 신화가 어떻게 태동되었고 신화가 우리 삶에 녹아들어가게 된 방식과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 각자는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신화의 영역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점점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으며 우리가 천복을 찾아야 되는 필요성과 그 방법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후반부에는 이 세상을 살아갔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게 되는 영원과 사랑, 그리고 결혼에 관한 이야기 등이 신화와 함께 이야기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신화를 빗대어 설명해 주고 그것에 대한 해결점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특히 천복과 사랑에 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왜 자신의 천복을 찾아야 하는지 그것을 찾지 않는 삶이 어떠한지, 찾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결혼은 평생의 약속이므로 가장 큰 관심사로 쳐야 한다는 사실에 관한 이야기에서 직업과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 문제임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해결점 또한 아주 턱별한 것이 아님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워 낙 방대한 양을 다루다보니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일일이 문장 마다 주석을 달아놓을 수는 없지만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한다고 첫 장에서 캠벨이 언급했듯이 신화의 가장 중점적인 면이라 할 수 있는 신화의 교육적인 부분에 대한 대담을 따로 구성해 보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신화의 전반부를 아우르는 것도 좋지만 현재 우리가 당면한 주요 문제점에 관한 부분들을 짧게라도 각각 챕터별로 엮어보면 어떨까 한다. 가령 결혼에 관한 부분, 천복을 찾아야 되는 이유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연과 인간이 하나인 것에 대하여 그것이 왜 중요한지와 같은 부분들은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면 현실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신화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이 재편집해 본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2. 태초의 이야기꾼들
3. 내면으로의 여행
4. 영웅의 모험
5. 조화여신의 은혜
6. 영원의 가면
7. 희생과 천복
8. 사랑과 결혼 이야기

IP *.205.6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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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13:32:49 *.124.233.1
안녕하세요 미선씨 ^^
리뷰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미선씨 말대로 캠벨이 그 광범위한 신화를 아우를 수 있었던 건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남은 과제도 즐겁게 하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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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15:24:00 *.205.67.118
먼저 아는 척하려다 쑥쓰러워서 가만히 있었는데...^^;;
경인씨 리뷰보고 내공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남은 레이스도 열심히 즐겁게 고고씽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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