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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1일 03시 44분 등록

《신화의 힘》을 읽고

강정자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대담이지만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 형식을 빌렸지만, 빌 모이어스의 역할은 조셉 캠벨의 사상을 도출하기 위한 산파와 유사하므로 이하에서는 실질적인 저자라고 할 수 있는 조셉 캠벨에 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1> Joseph Campbell

그는 1904년 뉴욕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신화에 관심을 가져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었다.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이를 보고 인디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진 것이다. 이후로 그는 인디언에 관한 책을 사보고 아메리칸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께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는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찾아갔으며, 그곳에 수집된 토템 기둥들에 매료되었다.

그는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중세 문학을 전공하고 1925년에 학사, 1927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와 뮌헨의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면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외국에서 그는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의 그림,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의 소설,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 연구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 만남들이 모든 신화들과 서사시들을 인간의 영혼 안에서 연결하는 캠벨의 이론으로 이끌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신화들과 서사시들은 사회적, 우주론적, 영적 실재들을 설명할 보편적 필요성을 나타내는 문화적 표현들이다.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이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 그리고 습작에 몰두한다. 그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스를 만났던 캘리포니아 시기를 거쳐, 캔터베리 대학에서 가르쳤고, 그 후 1934년 미국의 명문 여자 대학인 사라 로렌스 대학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한다. 그리고 그 사이인 1938년에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한다.

1940년대와 50년대에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또한 인도 예술과 신화, 철학 연구가인 독일학자 하인리히 치머의 연구들을 편집했다. 1944년 헨리 모톤 로빈손과 함께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맞쇠>를 간행했다. 그의 첫 번째 저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1949년에 나왔고, 곧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은 고전으로 환영받았다. ‘영웅 신화’ 연구를 통해 캠벨은 영웅 여행의 단일한 양식이 존재하며, 모든 문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영웅 신화들은 이 본질적인 양식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영웅 신화에 대한 그의 책에서 캠벨은 원형적인 영웅 여행의 기본 조건들, 단계들, 그리고 결과들을 요약해 보여주었다. 이후 그는 주저인 4부작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 5권의 《세계신화지도》(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조셉 캠벨은 1987 10 30,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대담 이후로 그의 독자는 수백만으로 늘어났다.

 

조셉 캠벨 재단 웹페이지를 방문하면 그에 관한 소개 글 상단에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일본 속담을 빌어 왔는데 인생 마지막 지점에 관한 그의 지론은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문에서 봤던 글과 유사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이의 인생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 주제넘게 끼어들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이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There is a Japanese saying I recall once having heard, of the five stages of man's growth. "At ten, an animal; at twenty, a lunatic; at thirty, a failure; at forty, a fraud; at fifty, a criminal." And at sixty, I would add(since by that time one will have through all this), one begins advising one's friends; and at seventy (realizing that everything said has been misunderstood) one keeps quiet and is taken for a sage.

 

그는 평소 ‘그 날’이 도래한 듯이 현재 속에서 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사회가 영웅을 이끌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조적 영웅인 우리 자신이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세계관을 잠깐 엿볼 수 있는 동영상을 하나 소개해본다. <On Becoming an Adult>라는 제하의 이 동영상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회구조와 신 앞에서 두려워하던 소년이 어떻게 이런 세계와 싸우며 어른, 청년이 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어린 소년이 부모의 안일한 품을 벗어나 새롭고 확장된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명료하게 전하는 현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즐거움을 누려보기 바란다.

 

http://www.youtube.com/watch?v=aGx4IlppSgU&feature=player_detailpage 


출처: 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 캠벨, 도서출판 해바라기, 2004, pp286~287)

신화와 인생(조셉 캠벨, 갈라파고스, 2009, 앞날개 및 뒷날개)

신화의 힘(조셉 캠벨 모이어스, ()이끌리오, 앞날개, p39, p41)

서울고검블로그(http://blog.naver.com/hpros?Redireict=Log&logNo=10097718417)

Joseph Campbell Foundation(http://www.jcf.org/new/index.php?categoryid=11)

 

<2> Joseph Campbell Foundation

그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평생의 열정을 기울인 방대한 양의 출판물들을 남겨놓았다. 그가 남긴 출판물에는 ‘인류의 위대한 한 가지 이야기’라고 불렀던 전 세계의 신화들과 상징들의 수집물이 가득하다. 아직까지도 발표되지 않은 글들과 노트들, 편지들, 일기, 오디오나 비디오로 녹음된 강연들도 상당히 많다. 조셉 캠벨 재단은 캠벨의 저작들을 영구 보존하고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1년에 그의 아내인 진이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설립하였다. 재단은 캠벨의 글들과 녹음들을 디지털 형태로 보존하고, 구할 수 없었던 자료들이나 절판된 작품들을 ‘조셉 캠벨 전집’으로 출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재단은 신화학과 비교종교 분야를 탐구함으로써 그의 연구를 계속하는 비영리 단체이다. 이 재단은 세 가지 주요 목적들에 의해 운영한다.

첫째, 캠벨의 선구자적 연구를 보존하고 보호하며, 영구적으로 지속시킨다. 이 일을 위해 그의 작품들을 목록화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하며, 그의 작품들에 기초한 새로운 출판물들을 개발하고, 그의 간행된 저작들의 판매와 보급에 힘쓰며, 그의 저작들의 저작권을 보호하고, 이 재단의 웹사이트에서 디지털 형태로 접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의 저작을 널리 알린다. 둘째, 신화학과 비교종교 연구를 촉진시킨다. 이 목적을 위해 다양한 신화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지원하며, 일반 대중의 각성을 증대시키는 행사들을 지원하고 후원하며, 캠벨의 문서화된 작품들을 기증하고, 재단의 웹사이트를 문화들 사이의 관련된 대화의 장으로 이용한다. 셋째, 개인들이 일련의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지구적 인터넷에 기초한 관련 프로그램, 지역적, 국제적 신화학 원탁회의 연결망, 그리고 조셉 캠벨과 관련된 정기적인 행사들과 활동들이 있다.

 

출처: 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 캠벨, 도서출판 해바라기, 2004, p5, pp288~289)

신화와 인생(조셉 캠벨, 갈라파고스, 2009, 뒷날개)

 

<3> 내가 만난 조셉 캠벨

그는 삶에 대한 사랑과 깊은 애정으로 점철된 이였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를 깨친 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어떤 편견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사료에 입각해 구축한 자신의 의견을 따듯한 시선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그는 자신이 열정을 품은 대상, 신화라는 한 길만을 걸어간 외골수적인 면이 있었고, 사랑에서도 이런 그의 성격은 드러났다. 그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6개월 동안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현대무용가이자 자신의 제자인 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전한다. 졸업을 앞둔 그녀에게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을 전하면서. 그는 결혼이 ‘인생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결혼한 이라면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둘의 관계’로 옮기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여성은 역사 자체‘라는 슈펭글러의 말에 공감하면서 여성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것‘, 어머니 지구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그가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을 때는 이러한 조건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등장한다. 이렇게 여성 친화적인 그의 품성은 38년간이나 여성 대학에서 젊은 여성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다듬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의 고매한 인품을 잘 드러내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혼의 정수는 유년시절 사고의 토대가 되었던 가톨릭, 이후에 그의 열정을 쏟아 부은 동서양의 각종 종교와 신화들과 잘 버무러져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있기에 신앙인에게도 별 무리 없이 다가간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0> 빌 모이어스의 서문

p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p9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p11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15

독서와 삶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살았는데, 이것을 슬쩍 내비치는 솜씨 또한 절묘했다. 매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p16

원초적인 사회의 생업이 사냥에서 곡물의 경작으로 바뀜에 따라 삶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는 그들의 이야기 꼴도 바뀌게 된다. 곡물의 씨앗이 영원한 주기를 표상하는 고귀한 상징이 된다.

 

p17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p18

그의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진리는 하나‘라는 말을 하면서 ’삶은 苦가 아니다‘라는 대행스님의 법어를 건네준 동료가 있었다. 그 때는 막연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던 말을, 1년이 지나 이제 가슴으로 끄덕일 정도가 되었다. 진리가 둘 일 수 없기에 진정한 현자는 자신이 사고하는 바와 다소 다른, 생소하고 이질적인 언어로 이를 표현하는 이를 만난다 하더라도 배타적인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보다 이를 넓은 가슴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리라.

 

p19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투자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과학자 중에 신을 믿는 자들이 꽤 많다. 과학이 합리주의에 기반하고 있기에 차갑고 딱딱할 거라는 선입관은 과학자들의 삶을 그려낸 몇 권의 책을 만나면서 변하게 되었다. 우주 만물의 원리와 법칙을 규명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결국 신의 섭리와 자연의 오묘함을 깨닫는 귀결을 보이곤 한다. 세상 만물을 자각하는 내 존재, 외부에 어떠한 표상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내가 없다면 무의미한 것. 그렇다면 만물은 나의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 자신은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20

그가 나에게 주었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뒤적거렸다. 그러면서 내가 처음으로 신화적 영웅의 세계를 만났던 시절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중략) 우리가 주일 학교에서 들은 이야기가 사실은 고도로 영적인 모험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던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하느님이라는 궁극적인 실체를 깨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와 동일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중략) 이른바 ‘강력한 복합 문화적 미래’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까지 깨닫게 해주었다.

 

p21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글을 잘 쓰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가슴과 영혼을 울리는 호소력은 멋진 필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내뱉는 말과 글이 그의 인생에 녹아날 때, 우리는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그의 글에 느낌표를 찍게 된다. 이 책에 드러난 그의 삶이 그러했다. 나도 그와 같은 삶의 경로를 걷고 싶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 진정성이 충만한 내밀한 삶!

 

<1> 신화와 현대 세계

p25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p28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집에 있는 세 아이들과 함께 요즘 사사건건 나와 마찰을 빚고 있는 내 막내 아이,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내 시선으로는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 그렇다면 그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는 나도 마찬가지일 것. 완벽해지려고 애쓰기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자. 가족에게,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p29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p31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과연 연애와 결혼이 무관한 것일까? 연애하듯이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는 것일까? 풀기 힘든 이 숙제를 꼭 마치고 싶다. 숙제 검사를 해주실 분은?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제 바로 결혼이라는 겁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마지막 장, <향연>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최초 인간이 완전한 원을 형성하는 이중의 등과 옆구리를 가진 둥근 모양을 한 여성, 남성, 양성(여성, 남성이 혼재)이 있었는데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방종함에 벌을 내리기 위해 양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잘려나간 절반을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꽤 흥미로웠고 동성애자자들이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태생적인 본능의 발로라는 것을 뒷받침할만하다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의 112쪽에 다시 이 이야기가 등장한다. ^^

 

p36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p37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문에는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 보입니다.

 

교육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일인으로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삶과 앎이 일치하는 학문, 통섭…….

 

pp38~39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나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p47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캠벨: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저엔트로피 사회를 꿈꾸며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제러미 리프킨은 명상을 권했다. 명상을 위한 별도 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이 된 이후에 수시로 짧은 명상을 즐기게 되었다. 나와의 대화, 사소한 것에의 기쁨과 감사, 반성. 삶의 질이 높아짐을 느낀다.

 

p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p54

모이어스: 제 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뭐”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가까이 하게 되면서 그 좋아하던 텔레비전을 떼어버리고 산 지 어언 1년이 지났다. 상식 수준인 국민 드라마, 연예인 이름조차 알지 못해 일상의 소통에 애를 먹고는 한다. 대중문화를 가까이하는 동료들과 괴리감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픈 욕망에, 내 자신의 삶이 보다 고급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자만심에 빠지곤 하였다. 이런 내 어리석은 생각에 일침을 놓는 모이어스 아들의 말. 내 동료들도 그들만의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

 

캠벨: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기계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p58

서양의 3대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받고 합니다. ?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회로인 것이지요.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이 개신교 신자다. 가톨릭 신자가 된 나를 비판하면서, 친구관계가 단절되어도 좋으니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몰아 세웠다. 그 친구의 지나친 열정이 부담스러워진 나는, 그 뒤로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대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는 여호와의 증인이다. 10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를 한 후, 훌훌 접고 평생 봉사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과연 그 친구들이 폐쇄회로에서 벗어나 예전처럼 내 곁에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날이 도래할까?

 

p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p74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p78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이런 나라가 필요하다고, 온 세계가 평화와 일치, 화합 속에 하나로 묶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작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을 읽고 나니 이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선만이 존재하던 사회에서 악이 탄생하고 결국 세상은 혼란 속으로 다시 빠져든다.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도 유사한 결말을 선보인다. 오버마인드의 도움으로 잠재적이고 무한한, 죽음을 넘어선 존재가 된 인간이 결국 선택하는 것은 지구의 해체가 아니었던가.

 

pp78~80

시애틀 추장은 구석기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명문의 해답을 보냈지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밝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의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중략)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중략)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그렇다. 세상 만물이 반야줄로 묶인 한 존재인 것을. 물질계와 정신계, 온갖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의 염주알처럼 꿰어져있다. 분에 넘치는 수혜를 받고 사는 우리 인간에게는, 그래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반성하는 삶이 더욱 필요한 것!

 

<2> 내면으로의 여행

p85

흡사 한 연극 대본이 각기 다른 곳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과 같지요. 말하자면 지방에 따라 그 지방 연기자가 그 지방 옷을 입고 나와서 똑같은 옛날의 연극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p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살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귀한 시간을 허비하며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내 주변 사물과 사람들은 그대로인데, 나 혼자 마음에 지옥을 만들면서 살고 있었다. 그 뒤로 ‘현재, 내가 있는 곳을 천국으로 만들면서 살아보자‘고 마음을 바꾸며 노력했다. 그랬더니 항상 말썽만 피우던 아이가,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존재로 보였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 같던 동료는 내 단점을 예리하게 지적해주는 고마운 이로 승화되었다. 물론 나의 ’천국 만들기‘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형이기에 수시로 펑크가 나곤 한다. 하지만 내 몸 안에 성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만으로도, 내 야심만만 프로젝트는 충분히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p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p91

꿈이 신화를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꿈꾸는 시간이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시간은 사실은 시간이 아니고 존재의 상태 그 자체입니다.

 

pp91~92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중략)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제러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세상의 창조물을 먹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일”이라고 평했다. 언젠가는 채식주의자가 되겠노라는 생각해왔던 나는, 며칠 전 조셉 캠벨의 《신화와 인생》에서 ‘도망칠 수조차 없는 것들만 먹는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단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냥 지금처럼 세상의 온갖 창조물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고통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일에 적극 동참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pp97~98

성서적 전승에 나오는 인류의 타락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자연은 썩은 것, 섹스도 썩은 것, 섹스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여자는 더욱 썩은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왜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에덴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살던 꿈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p100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여성은 역사 자체다‘라는 슈펭글러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곳입니다. 이 낙원에서 남성과 여성은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도 실제로는 같습니다. 하느님은 석양의 서늘한 바람을 쏘이려고 이 남성과 여성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남성과 여성이 사과를 먹습니다. 이 사과가 바로 대극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둘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p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pp103~104

캠벨: 하느님을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게 참 우스꽝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의 권능은 성별에 우선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모이어스: 하지만 인간으로서 이 어마어마한 존재를 더듬기 위해서는, 초라하지만 언어의 도움을 빌려 남성신이다, 여성신이다 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캠벨: 그렇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남성이니, 여성이니 해서는 그 존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초월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도약대라고는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초월하는 것,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 언어가 있기에 인간의 존재가치가 있지만, 언어 또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를, 우리 마음대로, 인간의 편협한 사고와 언어의 틀 속에 가둬놓고 재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p105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랍니다. (중략) 치료 과정 중 환자 중 일부가 환각 상태에서 탄생의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런데 이 재경험의 첫 단계는 자궁 안에 태아 상태로 있을 때의 경험이래요. ‘나’라든지, 존재라든지 하는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조이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terror)와 두려움(fear)을 구별해서 정의 내렸다고 한다. 지고의 존재에 대한 고요한 경험을 공포라고 했다던데. 캠벨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은 것인가?

 

p107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p109

인도에는 참 아름다운 인사법이 있어요. 두 손을 모으고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겁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나요?

 

왜 우리도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잖아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p112

아리스토파네스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조사하고 있는 그리스 전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태초에는 지금으로 보면 두 사람이 합쳐진 것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 있었어요. 이런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었어요.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남성과 남성이 합쳐진 것, 여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그런데 신들이 이것들을 각각 둘로 갈랐어요. 하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들은 끊임없이 그 짝을 찾아서 원초적인 합일 상태를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도 원래의 반쪽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을 진력한다는 겁니다.

 

p114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배울수록, 공부할수록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를 절감하면서 산다. 그래서일까?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진부한 말도 새삼스럽게 가슴에 새기게 된다. 부디 내가 손바닥만큼 알고 있는 이 알량한 지식과 정보를 내세우지 않기를. 겸허한 삶. 가난한 마음.

 

p115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p118

40년 전에 발굴된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내 입을 통하여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역시 그와 같이 될 것이라.” 이것은 영락없는 불교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샘 해리스는 《종교의 종말》에서 “이성을 위한 리트머스 테스트는 명확해야만 한다. 물질적 관점에서든 영적관점에서든 세상을 알기 원하는 누구라도 새로운 증거에 열린 상태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편견과 아집을 버리기. 항상 깨어 있기.

 

p124

사제와 샤면의 차이는, 사제는 기능적이지만 샤먼은 경험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 전통에 따르면 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수도사입니다. 사제는 사회를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고요.

내 친구 중 하나가 로마 가톨릭 명상회가 연 국제 모임에 참석했어요. 내 친구는, 가톨릭 수도사와 불교의 스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두 종교의 사무직 성직자들은 서로 도저히 꼴을 못 보더라면서 웃더군요.

 

이해인 수녀님의 글 중에 보성 대원사 현장 스님의 재치 넘치는 구절이 있다. ‘길에서 태어나신 부처님을 따르는 길동이네 식구와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따르는 말동이네 식구들이 사이좋게 만나는 날’이라는 농담으로 시작하는 스님의 법어가 그것이다. 다른 종교, 무신론자들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던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 종교를 초월해 진정 진리를 깨달은 이들은 이처럼 포용의 자세를 보인다.

아쉽게도 이처럼 진리를 깨친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적지 않은 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것과 ‘다른‘ 종교를 ‘틀린’ 것으로 매도하기 일쑤다. 마치 지하철을 탄 현각스님이 ‘사탄’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듯이. 이런 부끄러운 한국의 자화상을 빨리 벗을 수 있기를…….

 

p124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경험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p125

종교는 신비 체험을 이야기하는 대신 사회적 문제, 윤리적 문제를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지요.

교회는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상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체험하는 거지요. 성찬식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다릅니다. 내면을 향하고 있지요.

 

내 삶 중 가장 경건한 한 때를 꼽으라면, 미사 중 영성체를 모신 후 내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를 드릴 때다. 그때 내 마음은 온전히 내 안의 성스러운 면을 향해 있다. 성체를 모시지 않더라도 수시로 내 안의 성소를 떠올리며 살아야하는데…….

 

p127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p133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로 흘러들어 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p134

캠벨: “나는 이 삶에 참여하겠다, 군대에도 가겠다, 전쟁터에도 가겠다“, 이것일 뿐입니다.

모이어스: “최선을 다하겠다“이겠군요?

캠벨: “시합에도 참가하겠다. 시합이라는 것은 멋진 것이다. 다치지만 않는다면…….” 이런 태도가 되겠지요. 단언은 어려워요. 우리는 늘 조건을 붙여가면서 단언하지요.

 

p138

만물을 긍정한다는 주제를 놓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우리가 누구를 비판한단 말인가, 하는 확신이 생깁디다.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도 이것이 아니었던가 싶군요.

 

죄 없는 이는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세상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취하다보면 자칫 세상사에 무관심해지면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도 소극적으로 움츠려들곤 한다. 비판과 자신의 목소리를 피력하는 것과의 균형점 찾기. 올해 나의 과제.

 

<3>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2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p143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p146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p165

모이어스: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결국 ‘나’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p166

한때 우리의 내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의례는 이제 껍데기만 남았어요. 사회의 의례도 그렇고 개인적인 결혼 의례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한 쌍의 새로운 출발을 마음껏 축하해줘야 하는 장소에 가서, 언제부터인지 축의금을 내고 재촉하는 아이들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졌는데 이제는 당연한 듯이 식당으로 가서 마련된 화면으로 흘깃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곤 한다. 의례 본연의 뜻을 찾을 수 있도록 의례에 있어서 불합리한 인습의 양태는 줄이고, 의미를 살릴 수 있도록 재구조화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p168

샤먼은 남자든 여자든 소년기 후반, 혹은 청년기 초반에 심각한 심리적 격동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해버린 사람입니다. 이 격동은 일종의 정신분열증적 해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샤먼의 무의식은 늘 열려 있습니다.

 

작년에 내 흥미를 잡아끌었던 에드거 케이시, 묘심화씨도 현대판 샤먼일까?

 

p 174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을 한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시간이 갑자기 멈추면서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이 빠르게 재생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영적인 능력이 뛰어난 몇 몇 이들은 유체이탈도 경험한다. 이들은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지구 밖에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을 바라보고는 한다. 숭산 스님, 셜리 멕클레인의 삶에서 이런 장면을 읽었다. 죽기 전에 신화체험 해보기, 내 꿈 목록에 추가해야 할 듯 싶다.

 

p175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 희생과 천복

pp180~181

모이어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모세도 다른 영적인 지도자들이 백성에게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 땅의 연고권을 주장한 것입니다.

캠벨: 야곱의 꿈 이야기를 기억하지요?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그 자리는 베델, 곧 하느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연고권을 주장한 셈입니다. 이로써 그곳은 하느님이 에너지를 쏟아 부은 곳이 됩니다.

 

p185

샤르트르 대성당에 가면 성당의 영적인 원리가 사회의 삶을 버티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마천루가 사회의 무엇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중세 도시에 가보면 성당이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18세기에 조성된 도시에서는 정치가 벌어지던 장소가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현대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은 누가 차지하고 있지요? 당연히 경제생활의 중심인 업무용 건물이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층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pp186~187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p190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서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을 다시 보는 듯 했다. 대학원 때 친구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 교수님으로부터 후생가외라는 칭찬을 들었던 이다. 그 친구가 어느 날 ‘독서는 삶의 변경의 초소이며 모든 무지와 독단에 대한 십자군이어야 한다’는 제하로 자신의 독서 여정을 정리한 글을 보내줬다. 그 친구의 독서법도 조셉 켐벨의 방법과 유사했다. 프로이트 전집부터 브레이트, 보들레르, 미셀 푸코, 라깡, 들뢰즈, 마루야마 마사오, 아사다 아키라……. 그 친구가 좋아했던 작가 중 불행히도 나와 친한 이는 아무도 없다.

 

이제라도 그 친구의, 아니 조셉 캠벨의 책 읽는 방식을 따라 하고 싶다. 그런데 나는 이 분이 쓰신 작품을 이제 겨우 3편을 읽었을 뿐이다. 이 분의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들을 따라 읽으려면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퇴사의 변’이라도 던지고 전업 독서가로 나서야 할 듯 싶다. 구본형 선생님도 대가를 베끼고 모방해서 통째로 삼킨 후에 자신만의 색채로 토해내라고 강조하셨는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지. 이렇게 새벽시간 쪼개서 매진하다보면 잦은걸음으로도 내 꿈을 이룰 날이 오겠지?

 

p194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최초의 경작은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고급한 문화 체계에서 쟁기가 발명되는 것은 훗날의 일입니다. 쟁기가 만들어지면서 남성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지요. 쟁기가 대지를 가는, 말하자면 남녀의 성적 결합 시뮬레이션도 신화 이미지가 됩니다.

 

p195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식물은 매년 죽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구본형, 낯선 곳에서의 아침, p106)

 

p200

천녀 모티프는 주로 수렵 문화권에 속합니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천녀 대신 땅에서 솟아나온 여자가 등장하지요. 쌍둥이는 상반되는 두 원리를 의미합니다. (중략) 성서를 보면 ‘싹’은 카인이고, ‘부싯돌’은 아벨입니다. 성서에서는 아벨이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양치기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양치기와 농부는 서로 반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하는 것은 농부입니다. 이것이 농경 문화권을 정복하고, 피정복자인 농경민들을 욕보인 수렵 민족, 혹은 유목 민족의 신화입니다.

 

pp200~201

성서 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 아들이에요. 나중 온 자. 히브리인을 상징하지요. 둘째 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 문화를 상징하지요.

 

미사시간이나 교리 시간에는 전혀 들어볼 수 없었던 은유로 접하는 구약 내용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p201

모이어스: 수많은 문화권에는 동정녀가 영웅을 낳고, 영웅은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뭘 말하고 있는 겁니까?

캠벨: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모이어스: (전략) 이 지구의 적도대 문화의 특징은 희생 제물을 바치기에 광분해 있다는 데 있다.

 

p203

그리스도는 ‘성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났지요. 이 ‘성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중략)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의 나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p211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p211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세히 보면 우리 사횡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장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영웅이 사람들이 선망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존재가 아니라 대중이 지나갈 길을 먼저 걷고 지름길을 안내하는 선지자, 인도자?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빨리 읽어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듯 싶다.

 

pp211~212

《신곡》 끄트머리에서 단테는, 하느님의 사랑은 지옥의 바닥에 이르도록 온 우주에 사무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의 같은 이미지입니다. 보살은 자비의 원리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치유의 원리에 다름 아닙니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비가 있기 때문에 계속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에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중략)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이 말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삶이라는 분열된 현장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인 것이지요.

 

p213

《신약성서》는 자기를 버릴 것을, 이 세상과 세상의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글자 그대로 죽음의 고통을 당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건 밀교적인 표현법이예요. (중략) 융 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p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중략) 이 세상에는, 고통의 영적인 기능이라고 하는 신비스러운 관념이 있어요.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받는 자는 인간을 조잡한 육식동물에서 참 인간으로 바꾸어놓을 만한 어떤 본을 보이기 위해 우리에게 옵니다.

 

p220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 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항상 반성하고 또다시 죄를 저지르는 미숙한 내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일말의 안도감을 보내본다. 하느님, 제가 당신의 무한대 자비심을 시험하는 건 절대 아니랍니다. 제 마음 아시죠?

 

p222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따르라‘는 그의 말은 이해했다. 그런데 사회적 규범과 종교적 교리를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도덕적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이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은 어디에 있을까? 신앙을 가진, 세 아이 엄마로 너무 위험한 발상일까?

 

p227

모이어스: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중략)

캠벨: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있습니다. (중략)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음녀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진부한 표현을 가져와본다. 그러기에 현재를 ‘선물(present)'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내 주변에 나쁜 영과 선한 영이 감돌고 있다고 믿는다. 그네들은 내 마음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나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나를 잘못된 길로 오도하기도 한다.

1차 관문을 뛰어넘은 것을 확인하고 관련 게시 글을 출력해서 금과옥조처럼 간직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마감기한을 잘못 알고 있었다. 과제 제출일이 수요일까지인 줄 알고 마음 놓고 주말을 보내다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일요일 오후에 느릿느릿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장소로 향했다. 밀린 독서 요지를 정리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신화의 힘》을 정리하다 우연히 들어간 연구소 웹사이트를 방문하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과제를 올린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게시 글을 다시 확인했다. 아뿔싸. 과제 제출이 바로 월요일 정오까지였던 것이다. 하마터면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낙오될 뻔 했던 나에게 끊임없이 경종을 불러 일으켜 준 선한 영에게 감사를 드린다.

지금 열 두 시간째 꼬박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물론 이 중 절반은 다른 책들을 정리하며 보낸 시간이다. 새벽 2시가 훌쩍 넘은 이 시간, 그러나 허투루 내 글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내 욕심, 내 자존심이 천복을 좇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한계로, 나는 나를 지켜주는 절대적인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그 분은 이미 내 길을 <작가와 강연가>로 준비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이 연구소에 지원하게 된 것도 이런 나의 예정된 시나리오의 필연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5> 영웅의 모험

p244

초월적인 에너지의 원천은 분명히 있습니다. 물리학자는 아원자 입자를 관찰하다가 스크린에 나타나는 어떤 흔적을 본다고 합니다. 이 흔적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난다는군요. 우리 역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는 합니다. 모든 생명은 다 그렇지요. 이 에너지가 만물의 에너지의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화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다 말을 거는 겁니다.

 

‘과학의 최첨단은 대부분 초자연적 신비’라고 말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이 떠오른다.

 

p258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 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 그리스도와 석가는 죽음 너머에 있는 구원을 찾아서는 광야에서 돌아와 제자들을 뽑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집니다.

인류의 우대한 스승들(모세, 석가, 그리스도, 모하메드)의 메시지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한 환상여행은 동일합니다.

 

내가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 아이들, 부모님……. 이게 전부?

 

p261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p262

아이의 기억에는 우리가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붙박이 행동체계가 있어요. 우리는 이걸 본능이라고 하지요. 이게 바로 생물학적 기반입니다.

 

p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중략)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p273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은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중략)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p278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p279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중략)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p283~284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일종의 우화 수법으로 ‘영혼의 세 가지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가 낙타의 변모, 어린아이와 소년의 변모입니다. (중략) 짐이 실리면 낙타는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광야로 나가는데, 낙타는 여기에서 사자로 변모합니다. 등짐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사자가 해야 할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입니다.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사자는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흡사 굴대를 떠난 바퀴처럼 말이지요. 이제 이 아이에게는 복종해야 할 법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필요에서 제정된 법률도 없고, 지역 사회를 위해 제정된 법률도 없습니다.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내 단계는? 용을 제압하는 중. 그렇다면 곧 있으면 아이, 그 좁은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아이가 되는 것인가?

 

p293

달라이 라마에게서는 원망이나 미움과 관계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그 교파의 구성원들은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오늘날에 살아 있는 참 종교가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바로 우리 운명을 빚는 도구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넬슨 만델라는 27여 년 간을 감옥에 있으면서 간수들조차 감화시켰다. 평화라는 힘으로 호전적인 평범한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원수가 없으면 내 존재의 가치도 약해진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더욱 밝게 보이는 것이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한 태양만 있는 곳에서는 별이 있어도 볼 수 없다.

 

p296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자비는 고통을 해소시킵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삶이라는 인식을 통해서. 그래요…

. 해소시킵니다.

 

p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지금 내 상황을 잘 반영한 적합한 표현이다. 불완전한 가정을 받아들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이 역설적인 상황.

 

p297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니체의 운명에의 사랑은, 혹시 루 살로메? 에로스적 사랑에 너무 집착하는 걸까?

 

pp297~298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신은 사랑하는 이에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 일생동안 흘릴 눈물의 양은 정해져 있다. 힘들 때마다 내가 곱씹었던 말들이다. ‘삼일만 걸을 수 있다면‘이라는 간절한 희망을 긍정의 눈과 입으로 부르짖었던 장윈청, 호주의 오체불만족 닉 부이치치. 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맞다. 고통 앞에서 울고 좌절하는 시간이 짧을수록,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힘이 강할수록, 그는 더 큰 복을 받게 된다. 자신 안에 더 이상 갇혀 지내지 않겠다는 강인한 정신력은 보너스로 주어진다.

 

p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중략)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p302

캠벨: 내가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종교와 예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얽힌 숲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모이어스: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것을 열 수 있을까요?

캠벨: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대부분 위대한 이들은 독서가 생활화되어 있었다. 이지선 씨 같은 이는 캠벨이 말하는 것처럼 큰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화상을 심하게 입고 새로운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기에 내가 독서를 통해, 평생 대학을 다니고 싶은 이유다.

 

<6> 조화여신의 은혜

p309

원형질은 늘 움직입니다. 흐르는 것이지요. 원형질은 이리저리 흐르는 것 같은데도 실은 형상을 빚지요. (중략) 각각의 형상은 모두 나름의 의도와 가능성을 지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형질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p318

먹기 전에 감사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에게 음식을 준, 성서에서 나온 이에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신화를 보면 사람들은 먹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기꺼이 희생됨으로써 우리의 먹거리가 되어준 그 동물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식사 전 기도를 다시 떠올려본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정말 기도문 안에는 주님에 대한 감사와 내 건강을 비는 염원만 담겨있다. 앞으로는 기도를 하면서, 아니면 식사를 하면서라도 내 입으로 들어가는 식물과 동물들에게 감사를 표해야겠다.

 

p322

로마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마리아의 처녀성은 복원되었어요. 그러니까 마리아에게는 육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가진 지 반년이 지났지만, ‘마리아가 동정녀인 것이 어떤 의미가 있지?’라는 다소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맞지만 <동정>인 것을 그토록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작년에 읽었던 《종교의 종말》도 한 몫 했다. 샘 해리스는 예수의 생애를 구약의 예언과 일치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인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저자들은 그리스어로된 이사야서 7:14에 의해 마리아가 처녀(그리스어로parthenos)의 몸으로 잉태되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alma(그리스어 parthenos는 이 단어의 오역)는 처녀성에 관한 암시는 전혀 배제된 채, 단지 젊은 여자를 뜻할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 처녀 탄생에 관한 기독교 교리성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히브리어를 잘못 번역한 결과라는 것이다. 어쨌든 동정이 갖는 신화적인 의미를 알게 되니 지적 호기심이 다소 해소되어 즐겁다.

 

p334

어머니의 사랑에는 자식의 성격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지요.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기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여성, 남성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여 성격을 흑백논리로 나눈다는 것에 논리의 비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성별을 따진다는 점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하느님은 여성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듯.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진정성을 갖고 고백을 한다면 다 받아들이시니.

 

p337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39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중략)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귀로 드 보르네이유-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슴 떨리게 하는 단어 중 가장 으뜸이다. 주파수가 잘 맞고, 영혼이 통한다는 느낌인 들면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눈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 농도가 짙어지면 자연스러운 감정의 이끌림이 생긴다. 화학적 반응이 격렬해지면 사랑에 빠진다고 표현한다. 아련한 기억.

 

p341

캠벨: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중략)

모이어스: 결국 에로스적 사랑이 충동에 따르는 것이니까 개인적인 열정이라고 할 수 없듯이, 아가페적 사랑도 사랑이라기보다는 자비에 가깝겠군요.

캠벨: 그렇지요. 타인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일이니까, 에로스적 사랑이 그렇듯 이것 역시 개인적인 사랑이 못 되는 거지요.

모이어스: 아가페적 사랑은 종교적인 충동이겠군요.

캠벨: 하지만 아모르적 사랑 역시 종교적 충동이 될 수 있어요. 결국 음유시인들은 아모르를 가장 고귀한 정신적 경험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에로스의 체험은 일종의 사로잡히기예요. 사랑의 신이 쏜 화살에 맞으면 누구든 육체적심리적 폭발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와 달리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웃을 내 몸처럼 대하듯 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이성이라면 에로스적 사랑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지 않을까? 아모르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의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p358

토마스 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이 만나기 때문이다.

 

p359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p360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p368

모이어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문득, “나는 이 사람을 전부터 알고 있다”, 혹은, “이 사람을 좀 더 알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자기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지요?

(중략)

캠벨: 미래에 대한 반응인 것 같아요.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의 모습은 이럴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준다는 거지요. 시간의 신비, 시간의 초월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굉장히 심오한 신비와 만나게 되지요.

 

p369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성실한 태도가 분산되니까요. 그러나 결혼 관계에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서 이 성실 자체가 다른 데 대한 애정,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금지시키지는 않아요. 중세의 연애 이야기를 보면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른 여성과의 관계, 자기에게 성실한 여성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런 건 그런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결론은? 캠벨 자신의 예에 따르면 결혼한 사람은 훌륭한 연애가 불가능하다고? 그런데 중세 시대에는 가능했다고? 그렇다면 중세 시대 로망스 기준으로는 ‘또 다른 남편이 생긴 아내’가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인가?

 

p370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하지요.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사랑은 곧 신의 임재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신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곧 신이 아닙니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사랑은 고통을 모른다”고 했어요. 이 탈은 트리스탄의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기꺼이 받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트리스탄은 사랑을 경험하지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사랑을 말하고 있잖아요?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p371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이걸 사탄의 이기심 탓이라고 합니다. 사탄은 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신에게만 절을 할 뿐 인간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탄은 첫 번째 규칙에 열중했던 나머지 도저히 이것을 어길 수 없게 됩니다.

이 세상에도 지옥은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탄이 신의 애인이었다는 페르시아 신화를 좋아하는 겁니다.

 

p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8> 영원의 가면

p378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p379

분석 심리학자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신비가 일련의 개념이나 관념으로 환원되어버린 지금, 이 개념이나 관념을 강조하다보면 언어 밖에 있는 초월적인 체험에는 단락이 생깁니다. 우리는 강렬한 신비의 체험을 궁극적인 종교적 체험으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 버릴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p380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p381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p383

나는 이 20세기를 줄기차게 살고 있습니다만, 어릴 때부터 우리의 원수라는 것은 있지도 않고, 있었던 적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특정한 대상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공격을 정당화시키자면, 증오와 오해와 멸시의 공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공작의 메아리가 지금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들리고 있군요.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사회가 당위론적으로 규정지어 놓은 우매한 흑백논리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멋진 멘트다.

 

p386

토마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p387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영적인 원리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니까 모이어스 씨가 그 깨달음의 수레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씨가 곧 정신의 광휘인 것입니다.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

 

애들러에 따르면 인생은 장애물과 싸우는 것, 이로써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도 완벽한 인생일 수 있어요. 신들 중에도 이런 삶을 표상하는 신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건 동물의 수준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다른 종류의 인생이 있어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p389

원은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원의 공간적인 측면일 것입니다. 원에는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어딘가로 갔다가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pp395~396

캠벨: 비교신화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약간 두려워했어요. 학생들의 종교적인 신앙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나 아닐까. (중략) 그런데 학생들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이미지를 비교하다가 종종 자기네 종교의 이미지가 지닌 전혀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다른 문화권 이미지에서, 자기네 이미지 이상의 내적영적 의미를 해석해낼 수 있을 때 특히 그렇지요.

 

나도 두려웠다. 아직 신앙의 토대가 견고하지 못한데, 자칫 충동과 과격함이 불쑥 고개를 내밀곤 했던 무신론자의 예전 삶으로 회귀하는 건 아닐까 싶어. 그런데 그의 말대로 오히려 내 신앙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종교 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 비교종교학은 신앙 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 겁니다.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앎에의 갈망을 체험하고, 인류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신앙을 돈독하게 할망정 신앙에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p405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중략)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p409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어느 날,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필멸의 팔자와, 우리 안에 있는 초월적 영생불사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육체는 필멸이나 영혼은 영생불사. 떠남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pp409~410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삶의 모든 문제는 ‘존재하기’와 ‘되기’를 맴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캠벨: ‘되기’라는 것은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p412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누가 나에게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p413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p415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이 책은 다 읽은 후, 나도 ‘아’라는 짧은 한마디에 불과했다. 그리고 평소에 나와 영혼이 통한다고 여겼던 이들에게 이 책을 권했다. 내가 느꼈던 기쁨을 그네들도 함께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제 나는 내가 느낀 이 감동을, 내밀한 실천으로 옮기는 숙제만을 하면 될 터.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정교한 목차가 없다. 하지만 큰 골격은 있다. ‘신화와 현대 세계, 내면으로의 여행, 태초의 이야기꾼들, 희생과 천복, 영웅의 모험, 조화여신의 은혜, 사랑과 결혼 이야기, 영원의 가면‘이라는 8개의 큰 카테고리가 그것이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평소에 조셉 캠벨이 생각하고 있던 바에 대해 모이어스는 예리하게 질문하고 멋진 대답을 이끌어낸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이러한 산파술을 쓰면서 자신의 지혜를 나누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훌륭한 교사는 질문을 잘 이끌어내는 이이다. 이런 점에서 캠벨은 모이어스로부터 시의적절하면서도 썩 수준 높은 질문을 잘 유도한다. 그래서 이 책은 체계적인 목차가 없고 읽기 편한 구조가 아님에도 강하고 순수한 지적 욕구를 지닌 이들에게는 꽤 만족스러운 책이다. 지루할만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배치된 삽화와 그림도 맛깔스러웠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조금 보인다. 무엇보다도 모이어스의 질문에 근거해 캠벨의 의견을 듣다보니 아무래도 모이어스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영역의 지점들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그 경계 범위 내에서만 담론이 이뤄지곤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깊이 있는 내용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이는 이 책이 여러 주제를 포괄하고 있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라 필연적인 귀결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책은 신에 대해서, 그리고 진실한 삶에 대해서 고민한 이들에게는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지만, 이런 치열한 고민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자칫 읽기 불편한 자료의 나열에 그칠 수 있다. 대화라는 형식을 빌어서 구성했다는 태생적 한계 상 정치한 논리구조라기보다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쓰여 졌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고의 흐름을 중요시하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구조였지만, 대주제와 소주제로 깔끔하게 정리된 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읽기 녹록한 책이 아니었을 게다.

 

전 세계를 넘나드는 신화 거장의 작품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점이 불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 괜찮은 책이 될 수 있도록 미력을 보태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하는 오만한 마음도 가져본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이 분이 쓰신 《네가 바로 그것이다》와 《신화와 인생》을 읽었다. 두 작품을 읽다보니 《신화의 힘》에서 읽었던 구절과 유사한 대목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도서관에 예약도서로 찜해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어도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리라.

이 책은 ’신화와 현대 세계‘와 ’내면으로의 여행‘, 그리고 ’영웅의 모험‘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희생과 천복‘도 이에 상응할 정도의 양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태초의 이야기꾼들‘, ’사랑과 결혼 이야기‘, ’영원의 가면‘은 40여 페이지 안팎에 불과하며 ’조화여신의 은혜‘는 20페이지를 조금 넘길 뿐이다. 대담을 옮긴 책이므로 크게 이를 손본다는 것이 책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 책의 저자라면 책의 균형이라는 면과 내용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해서 ’태초의 이야기꾼들‘과 ’조화여신의 은혜‘를 묶어서 한 장으로 처리하고, ’사랑과 결혼 이야기‘와 ’영원의 가면‘을 한데 모아 조화롭게 정리할 것 같다.

그리고 저자가 평소에 강력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임에도 대담이라는 형식의 한계 상, 실시간으로 담지 못해 누락된 부분들은 깔끔하게 정리해서 매 장의 마지막 부분이나 유관한 부분에 미적인 요소를 고려해서 포함하고 싶다. 한 가지 더. 저자의 가치관과 인생관에 큰 반향을 일으킨 구루, 하인리히 침머나 크리슈나무르티, 토마스 만, 슈펭글러, 칼 융과 같은 이들에 대한 간단한 토막상식도 그들이 등장하는 한 귀퉁이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면, 이런 류의 책을 처음 접하는 이들도 별 부담 없이 선뜻 집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IP *.128.7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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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영
2011.02.21 12:55:58 *.29.142.122
정리를 참 잘 하셨네요.
과제 책을 읽으ㄹ시고 두 권의 책을 더 읽으셨다니 대단하세요~
프로필 이미지
예서
2011.02.21 15:19:12 *.250.142.157

   레이스 기간동안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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