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이루미
  • 조회 수 4464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1년 2월 21일 04시 52분 등록

신화의 힘

저자에 대해서

조셉 캠벨.

 

원명 Joseph Campbell 
1904년 3월 26일 뉴욕 출생 
1925년 콜럼비아 대학교 졸업 
1927년 콜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발표 
1959~1967년 <신의 가면> 1~4 권 집필 
1987년 10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

- 조선영, 네이버지식인

이것이 가장 간단하게 그를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위의 말로는 그의 전부를 표현할 수 없다. 그는 미국의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로써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일컬어진다(『신화의 힘』저자소개). 하여 많은 이들의 독서평에서 신화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말 그대로 그는 신화를 연구하고 세계 각국의 신화의 공통점을 찾아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에 멈추지 않고 신화를 현실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를 감명깊이 기억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 이다.

다음은 그의 책을 접한 사람들이 혹은 그를 접한 사람들이 기억하고 평가하는 그의 모습이다.

저자 캠벨은 고대 정보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메시지를 쏙쏙 뽑아내었다. 인간의 성장, 사회, 사랑, 결혼 , 종교, 학습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화체험은 즉시 실험할 만큼 흥미로웠다. -네이버 블로거 바람처럼

내가 그에게 특히나 매력을 느낀 점은 그가 지독할 정도로 연구에만 몰두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학자라는 점도 있었지만, 정규학위과정을 무시하고 홀로 연구를 진행할 정도로 자신이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소신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에만 의존한 묵묵한 그의 연구 스타일 또한 마음에 들었다. -최코치의 코칭 & Life log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 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신화의 힘』빌 모이어스의 서문 중에서

조셉 캠벨은 자신의 삶에서 특별히 신화적인 부분을 끄집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이 위대한 신화를 닮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중심사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영웅의 여정’이라는 조셉 캠벨의 사상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겸손한 많은 사람들을 위대한 삶이란 궤도로 이끌었다.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톰 버틀러 보던

조셉 캠벨은 어린 시절 인디언들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자신의 관심 영역을 넓혀 신화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의 관심을 직업을 삼을 수 있었던 연구하고 살 수 있었던 복을 지닌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저 “복 받았네.”라고 말하기엔 그의 연구량은 엄청나다. 심리학, 역사, 종교학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양한 방면의 전문서적을 읽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자신이 얻게 된 바를 소개했다. 그 연구과정에서 그가 직접 깨닫게 된 사실이기 때문에 그의 말이 오래 동안 우리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말은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옛것을 바탕으로 오늘날에 접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을 더욱 귀담아 듣게 하고 우리가 찾아 헤매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1900년대를 살아가면서 연구한 그의 행적들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지침이 되어주고 있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 연구해온 것들이 결국은 시대를 뛰어넘은 것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물질화, 문명화된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인간적인 것들을 찾아 헤매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을 잡학가라고 표현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잡학가가 아니다. 그는 한 분야의 학문을 위해서 여러 분야를 함께 공부한 진정한 의미의 학자이다. 실제로 한 분야를 공부하다보면 그 분야가 여러 분야와 맞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신화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다양한 학문의 분야를 폭넓게 연구했다. 그로 인해 그의 이론의 깊이는 깊어지고 넓이는 넓어졌다. 보다 많은 문화권의 사람들이, 보다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그의 책을 스스럼없이 읽고 그의 이론을 당연한 듯이 흡수하게 되는 건 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ㆍ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29

ㆍ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 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

살아있음에 대한 황홀. 살아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 흔한 말로는 사는 맛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렇게 본다면 그다지 거창하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많은 순간에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샤워 후 마시는 여름날의 맥주 한 잔에서도, 겨울날의 따뜻한 차 한잔에서도 아이의 뽀뽀 한 번에도 느껴지는데.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고 사는 것이 나는 가장 좋은 듯 하다.

ㆍ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례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35

ㆍ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맞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성년의 의례가 있었다. 관혼상제의 관이 의미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를 지나고 나면 어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주변에서도 한 사람의 어엿한 성인으로 대접을 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거추장스럽기만한 의식에 불과하지만 개인에게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버리고 어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이 의식이 행해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어린아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인이 가지게 되는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이 성년의 의례가 가지는 영향력은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인임을 스스로 인식해서 성인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개인을 종용할 수 있고, 주변에도 내가 성인임을 인식하게 하여 나를 여타 성인과 동등하게 대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몸은 어른이지만 아직 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나이는 성인의 나이를 넘겼으되 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이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어린이의 방법이 통하지 않은 사회에 부딪혀서 쉽게 좌절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색 방법을 생각하나 이도 어린아이의 마음이라 쉽지 않고 잘못된 방향이 설정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의례 한 번으로 글 하나로 이런 모든 부분들이 해소되는 것이라 하기에는 힘든 부분이지만 이 의례나 글이 어린이를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ㆍ기도할 때 손바닥을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져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 답니다. -109

내 안의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 이 말은 먼저 내 안에도 신이 있다는 것, 그 신이 타인의 신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것. 무학도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했다는 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가 생각나게 하는 글귀이다.

ㆍ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토요일마나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되면 한 주일 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 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 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115

몇 년 전 우리나라를 전 세계를 강타했던 『시크릿』을 생각나게 한다. 원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그 책의 전반적인 주제였는데 이 말 역시 그 의미를 보다 쉬운 예로 풀어내고 있다. 어린 시절 성당에 다녔을 적이 생각난다. 고해성사는 주일마다 하지만 꼭 해야하는 시기가 있는데 나는 이 때 신부님께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해야해서 엄마가 적어주신 쪽지를 씩씩하게 읽고 나왔는데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계시던 분들이 이를 듣고 웃어주셨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고해하는 의식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의식적으로 의미도 모르고 따라가는 것은 별로라고 생각한다.

ㆍ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방살이라고 볼 수 있지요.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 이예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133

무서운 이야기다. 인생은 이대로라니, 개선하거나 바로잡는다거나 할 수 없다니. 하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셉 캠벨이 했던 이야기처럼 우리는 그냥 여기 있는 것 뿐이다. 인생이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는 나 하나만 달라지면 간단할 일이다.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누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파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133

어린 시절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듣고 자라지만 과연 우리는 어린 시절 우리가 배웠던 착한 사람이 되어있을까? 아이러니이지만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 줄기 위로가 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때로 현실에서 누군가를 배려하자니 다른 누군가에게는 해악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선택은 할 수 밖에 없고 상처는 줄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마음이 편안해 지지 않을까? 물론, 모든 상황에 억지로 끼워맞춰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되겠지만.

ㆍ“그렇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한두의 사고 체계에 따르면 이 우주의 만물은 모두 신의 현현(신이 스스로를 들어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하여 ‘아니’라는 말을 할 수있겠습니까? 폭력에도, 우둔함에도, 비천함에도, 사려분별이 없음에도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이럽디다.

“선생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만물을 긍정한다는 주제를 놓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우리가 누구를 비판한단 말인가. 하는 확신이 생깁디다.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도 이것이 아니었던가 싶군요.-138

누군가를 비판하는 글을 보면 조금은 거북해진다. 확신에 찬 비판글을 보면 그에 반한 의견을 마구 쏟아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른 방향에서 이런 방향에서 생각한다면 이러한 의도가 보이지 않느냐는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는냐는 그런 식의. 이런 의견 역시 비판이겠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겪어온 삶에서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고 자신의 환경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고 행동한다. 물론 그 사고나 행동이 항상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지 않다고 해서 돌은 던져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보면 노승이 깨진 독에 물 붓기를 시키는 장면이 있다. 결국 속된 말로 깡패들이 이 문제에 해결하는데 그 방법은 그 깨진 독을 연못? 호수? 안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노승은 그것을 보고 말한다. “봐라. 저 독에서는 물이 차다 못해 넘치는구나.” 깨진 독이지만 더 큰 물을 만나 안을 가득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런 비판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들을 가득 채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내가 그들을 가득 찬 존재로 볼 수 있을 테니.

ㆍ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들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도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 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에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랍니다.-156

며칠 전 안철수씨가 나온 무릎팍도사를 보았다. 그 방송에서 그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항상 자신에게 존댓말을 써왔다고 말했다. 학교를 갈 때에도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존댓말을 쓰지 않는 상황이 더 거북하다 말했다. 존중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 존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모든 것을 “그대”라 칭함으로써 자신들도 “그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것”이라 칭하는 자는 자신이 칭한 “그것”들에 둘러싸인 하나의 “그것”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ㆍ방법을 가르쳐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 행위를 통해서 일정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90

자기반성이 드는 구절이다. 나는 항상 당시에 흥미를 유발하는 것들을 좇아서 이리저리 옮겨 다녔었는데. 결국 얻은 것은 레저에 관한 한 맞장구를 쳐 줄 수 있는 짧은 단편적인 지식들.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이 독서법을 항상 실천하기는 매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 이라던지 본받고 싶은 분야의 사람이 있다던지 하는 경우에는 실천해 봄직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 사람의 생각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고 그 사람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면 따라하기도 쉽지 않을까. 그렇게 따라하다보면 나 역시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보면 내가 원하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니까.

ㆍ신 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을 따릅니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어느 땅에 들여온다고 한 들 그 신은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합니다.-193

멋진 말이다. 절대적인 신 관념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수년을 한 문화에서 교육받아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요건을 바로 버린 채 신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큰 예로 천주교의 우리나라식 제사를 묵인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교리에 대한 지식이 넓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초기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유교식 문화에 젖어있는 우리나라의 제사를 묵인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주교에서 묵인해준 부분은 조상을 기리고자 하는 우리네의 마음이지 귀신숭배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종교는 그들의 문화를 안아주면서 신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신들도 서로를 배척하는 모습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ㆍ신화를 읽다보면 가장 놀라운 게 바로 그 점이지요. 나는 평생 이 짓을 해왔습니다만,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 밖에요? 차이가 있다면 옥수수와 야자의 차이 정도라니까요.-198

나는 항상 불교와 교회가 비슷하게 닮아왔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종교를 가던지 착하고 바르게 살기를 바라지 나쁘고 악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다는 점은 같다. 결국 불교에서 발하는 ‘자비’와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은 너무 닮아있기도 하다. 우리가 믿는 신과 구체적인 말씀이 다를 뿐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는 바는 무서우리만치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회에 가면 하느님께 인사를 드리고 절에 가면 부처님께 절을 드린다. 교회에서는 하느님이 절에서는 부처님이 가장 큰 어른이신데, 그 집에 놀러갔다면 응당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 방식의 문화적 상대성이다.

ㆍ그렇기는 하지만 이 세상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네 민족의 이름은 인류를 의미하는 단어로 부르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는 ‘웃기는 얼굴’이라느니, ‘비뚤어진 코’니 하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붙인다는 겁니다.-200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자신들의 민족의 시작은 신화에 기인하고 있다.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인 단군이 내려와서 퍼뜨린 사람들이 우리 민족에 기원에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쉽사리 발견된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각 국가들은 선민사상이 담긴 개국 신화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자신들이 선택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선택받지 않은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ㆍ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런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던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거는 일도 곧잘하게 됩니다. 하와이 경찰관은 자기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던 청년이 누구인지도 몰랐어요. 쇼펜하우어는 자세히 보면 우리 상회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장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211

ㆍ자살 역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될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자살인 겁니다.-213

자살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쩌면 삶에 대한 기대치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한 층 더 높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더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삶은 자신이 꿈꾸어온 혹은 자신이 원한 삶이 아니기에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아닐까. 이 세상은 나와 맞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인정하고 다른 세상을 향해가는 사람들. 하지만 우리가 별 생각없이 버린 물건들도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이 오기도 하는데.....

ㆍ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고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에도 성할때나 아플때나 넉넉할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중략) 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라. 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겁니다.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겠습니까?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이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것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 밖에는 없어요.-223

그래. 테를 잡고 있으면 당연히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있을 수 밖에 없지. 누구든 다 굴대를 잡고 싶을거다. 어떤 사람은 추락하더라고 한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높이 가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굴대를 잡고 중심에 서서 달려가고 싶은 거라 생각한다. 이 굴대를 잡은 것이 자신의 천복을 찾는 것이다. 천복을 찾으면 굴대를 잡고 있을 때처럼 중심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천복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마태 복음에 나온다. 이 말은 영적으로 깨어있으라는 말이다. 어떤 기회가 오고 있어도 깨어있지 못한 자는 그 기회를 알아볼 수 조자 없다. 덜 깨어있는 자는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다. 완전히 깨어있어야 그것이 기회인 줄 알고, 그 기회를 잡고, 그 기회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ㆍ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나는 창세 때부터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는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227

12월 말 사무실에서 인터넷 서핑 중 책을 한 권 발견했다. 그 책을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거기서 구본형의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을 알게 되었다. 마침 연구원은 모집중이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쉬워 보이는 단군에 지원했다. 청룡인가? 현무인가? 하다가 현무 부족이 되었다. 당당히 연구원에 지원한다는 김이미나님을 보게 되었다. 그래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슬금슬금 미나님의 단군일지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결국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점차 이 시간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결국 하던 공부를 접고 몰입하게 시작했다. 연구원 1차에 합격하고 2차 과제가 시작되는 시점에 맞추어 일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불과 두 달 사이에 내게 일어난 일들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나를 이리로 이끌었고 드디어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일을 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옷은 마치 내 옷이 아닌 것처럼 크고 헐렁거렸거나 작아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옷을 버리고 새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 옷은 정말 잘 맞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말이다. 과연 옷이 잘 맞게 만들어질 것인가 하는 의문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옷 만들기를 예전과 다르게 즐길 수 있다면 맞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처럼 빨리 입고 싶어서 재단을 대충 하지도 않을 것이고, 대충 박음질을 끝마칠 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의 옷 만들기는 어떤 옷이 완성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에 잘 맞을 것이다. 한비야는 자신의 저서에서 말했다. 두드려라. 열릴때까지. 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ㆍ‘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229

ㆍ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있느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사람의 범위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매세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헝ㅇ되어 있는 정신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모험의 구조와, 모험이 지니는 영적인 요소는 태고의 성인식에서 충분히 예고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성인식을 통하여 아이는 아이의 시절을 포기하고 어른이 되기를 혹은 유아기의 인격과 정신을 버리고 책임있는 어린이 되기를 강요당하지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과정이며 정신적인 변모과정입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감독아래 의존적인 상태로 줄잡아 12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냅니다. 박사학위를 얻고자하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35년 쯤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요. 이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만, 대신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에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브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되는 것이지요.-229

ㆍ천만에요! 그렇지가 않아요 스스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소수겠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것에 반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가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와 같아요.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어요.*-271

ㆍ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 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존재라는 말도 된다. 세상은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니까. 주는 만큼 받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서면 세상도 바로 서게 되고 우리가 비뚤어지게 선다면 세상도 비뚤어지게 될 것이다. 호수에 떨어진 작은 돌은 작은 원형을 그리지만 결국 그 원은 점차 커져서 호수의 끝에 닿기에 이른다. 먼지가 올라오는 버섯구름을 본 적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택을 철거하며 나타난 구름이었는데 뚜렷하고 작던 버섯 모양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며 팽이버섯이 영지버섯처럼 되는 것이었다. 물론 먼지의 색 또한 옅어졌지만. 우리가 우리 안에 생명력을 발견해서 그를 간직한 채로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사람을 산다면 우리를 보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들만의 생명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사람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요즘의 인터넷의 영향처럼 이는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세상을 바꾸는 일이 이처럼 쉬울 수도 없다.

ㆍ그 실(아리아드네의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275

학원강사로 일했을 때의 나는 중학생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가지고 있었다. 한 순간에 나는 지나가는 언니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그들에게 나는 문제를 맞출수 있는 기법을 전수해주는 비법 전수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노력 뒤에 오는 환희와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그리 되지 못했다. 한 문제를 더 맞아서 대학을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그리하지 못했다. ‘아리아드네의 실’이 단어만큼 선생의 역할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는 듯하다. 적어도 지금의 내 생각으로는. 선생님이 된다면 이런 선생님이 되고 싶고 선생님을 만난다면 이런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선생이라 불리는 사람이 선생이 아니라 이 실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선생님인 것이다.

ㆍ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는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279

요즘말로 긍정종결자. 죽음까지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디언들의 마음가짐이 부럽다. 죽음은 항상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어떤 세상이 펼쳐지는 것인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지의 세계란 사람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두 손에 꼭 쥔 채로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우리가 해 보고 싶은 그러나 아직 하지 못한 일이 세상에 많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소원하던 것이 이루어 졌을 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그 날 우리가 이승에서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죽어도 좋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충실히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다칠까봐 혹은 죽을까봐 움츠러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말을 남겼나보다. 후회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일을 웃으면서 반길 수 있는 여유이다.

ㆍ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296

딸아이를 보면서 나도 생각한다. 이 아이는 고통 없이 아픔 없이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노라고. 하지만 나고 살아봐서 알지 않은가. 인생이란 어느 정도의 고통은 따라오는 것이다. 그 정도만 다르고 개인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를 뿐이다. 어느 날 부잣집 딸아이가 아끼던 곰인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별 일이 아니지만 그 개인에게는 크나 큰 고통일 수도 있다. 우리가 성공했다고 생각되어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인생 안에는 어느 정도의 행복과 어느 정도의 고통에 항상 공존하며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인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아이에게 고통 없는 인생을 선사해 줄 수 없다면 고통과 친구하는 법을 배우고 그를 이겨내는 방법을 배워서 그를 가르쳐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고통 없이 살아가는 법이 없음을 잘 알기에 시대를 지나도 모든 이야기, 드라마, 영화에 기, 승, 전, 결의 구조가 통용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ㆍ나는 보통 사람이라는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사람, 보통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301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평범하다라고 얘기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평범이란 무엇일까? 우리 부모님께서도 나에게 그런 말을 많이 하셨다. 제발 평범하게 살라고. 평범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난하게 학교를 나와서 적당한 자리 취직을 해서 그렇게 비슷게 살아온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보통의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것이라 한다면, 과연 누가 그렇게 살고 있는 건가? 무난하게 학교를 나오다니. 개인적으로는 다들 사춘기의 방황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극복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면서 학교를 졸업하는 거다. 적당한 자리에 취직이라니. 어느 자리가 적당한 자리인지 기준이 있는 건가? 어떤 사람이든 결혼할 당시에는 열정적으로 사랑을 했건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건 각자의 이유가 절실해서 결혼한 것이 아닌가? 과연 우리는 보통이라는 기준을 어디에다 잡을 수 있는 걸까. 나는 보통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게 식사때의 기준량 처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마다의 개인의 과거를 가지고 있고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개인의 생각이나 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물론 같은 문제를 보고 같은 결론을 내는 경우는 흔히 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한 데로 모아지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같다고 해서 사고의 체계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모로 가도 서울이 나올 수 있는 법이다. 개인은 모두 저마다의 생각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오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획득한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해서 사고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만인이 있다면 만인이 다 다를 수 있다. 대한민국 남자면 거의 다 가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보면 어느 누구하나 쉬이 다녀온 사람이 없다. 한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자며 누군가는 쉽게 생활했을 법도 한데 아무도 쉽게 생활한 사람이 없다. 세상의 거의 모든 여자가 출산을 경험한다 해도 그 출산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특별한 경험 속에 살아온 개인이 보통이라는 것, 평범하다는 것은 조금 힘들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보통사람, 보통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 본 적이 없다.

ㆍ모이어스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예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320

신. 내가 이런 대단한 존재라는 거지. 신화를 글자 그대로 한자한자 뜯어내어 본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 있겠냐마는 조셉 캠벨의 말처럼 은유, 메타포로서 이해한다면 한곡의 노래로 인식한다면 이 말은 충분히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을 보자면 하느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라고 부르니 우리도 그 자식인 셈이고 신의 자식은 신이고, 부처는 불도를 깨달은 성인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니 우리도 불도를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셈인데, 불도 또한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구하는 것이라 하니 내 안에는 신이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단 이는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신성을 발견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성은 어떻게 우리가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만 남은 셈인데 내가 이 분의 책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나 나름대로의 결론은 이렇다. 조셉 캠벨은 이 책에서 천복에 대해서 말했다. 천복이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고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사회에도 공헌할 수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본 “아라한 장풍 대작전”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즐겁게 즐기는 유쾌한 영화였는데 엔딩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는 우리는 일상에서도 많은 도인을 만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나래이션이 나오면서 비춰지는 모습에는 양손에 수많은 구두를 들고 가고 있는 구두를 닦으시는 분, 엄청난 양의 짐을 자전거에 싣고 가고 있는 할아버지 등이었다. 결국 도인이란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는 흔히 지나쳐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장풍을 날리는 사람이 아닌. 결국 이 영화에서 말하는 도인과 조셉 캠벨이 말하고 있는 신에게서 비숫한 느낌을 받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까.

ㆍ‘passion’은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n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가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r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에도 ‘삶’이라는 글자에는 사람이 들어가 있다.

ㆍ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예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5

결혼은 생각보다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의식을 올리는 것 부터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생활을 유지해나간다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결국 우리는 결혼을 하고도 자신이 혼자 가져왔던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 둘이 하나가 되어 관계를 새로이 할 필요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대로 혼자 유지해왔던 관계 안에 한 명을 끼워넣고자 했다. 그게 이유였다.

ㆍ그런데 자식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나머지 이들은 그만 자식을 삼켜버리지요? 그러자 신은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99퍼센트, 혹은 10분의 9쯤으로 줄어벼렸지요. 부모가 자식을 삼켜버리지 못하게 말이지요. -372

딸아이는 정말 예쁘다. 웃을 때도 예쁘지만 울면 귀여움을 더한다. 삐쳐서 새초롬히 있는 모양에는 매력이 있다. 머리카락도 사랑스럽고 못난 새끼발톱까지 귀엽다. 지저분하게 밥을 먹는 모양도 대견하고 내 말을 알아듣는 양 대답을 할 때면 벅차오르곤 한다. 10분의 9밖에 남이 않은 사랑도 이렇다. 온전히 남아 있는 사랑이었다면 정말 먹어버렸을지도. 내 사랑이 아이를 좀먹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

ㆍ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381

ㆍ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예요. 그러나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채랍니다. -394

우리는 많은 것에 자기를 불어 넣는다. 가장 먼저 나의 몸의 그러하다. 이 몸을 자기라 생각하기에 자신의 몸이 받는 불편을 견디지 못한다. 운전할 때의 차가 그러하다. 내 차에게 불편을 가져오는 자가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어 경적을 울리곤 한다.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이 그러하다. 그 가방이 마치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좋은 가방 명품 가방을 원하고 있기도 하다. 며칠 전 사진작가 스콧 슈만은 서울 여성들의 옷차림을 보고 경쟁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 옷차림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저마다 경쟁적이 되어 버린다는 느낌이다.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나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부터 두려움과 욕망이 생긴다. 내가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다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길 바라고 그로 인해 두려움이 생긴다. 나의 몸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욕망이 자란다. 결국 진정 내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넘어선다면 욕망도 공포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ㆍ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이다. -413

여행을 가기 위해 우리는 준비를 많이 한다. 우리가 어떤 유적지나 박물관을 찾아가 보고 싶어한다 치자. 결국 그것을 보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에만 희열을 느낀다면 인생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너무 짧다. 어떤 것이 되었던지 준비하는 과정까지 즐길 수 있어야 한다.

ㆍ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커다란 듯한 세상을 바꾸기에는 나는 너무 미약한 존재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개인을 바꾸기에는 내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세상을 세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에덴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나는 에덴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에덴에 살고 있다면 에덴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에덴에 살고 싶다면 그리하면 될 일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구성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담 형식이다. 이 글은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가 했던 대담을 글로 옮겨놓은 것이다. 하여 독자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 신화라는 주제는 어떻게 보면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접근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담이라는 형식의 구어체 문장의 글은 독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게 한다.

이 책은 옮긴이의 말과 빌 모이어스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서문치고는 장황하다는 느낌을 주는 빌 모이어스의 글은 이 책에 대한 내용과 자신이 본 조셉 캠벨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특히 그가 인용한 조셉 캠벨의 말인 “이 시각에도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화신과 <미녀와 야수>의 속편은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교통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는 문장은 이 책이 단순히 그 옛날 신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신화를 오늘 날로 불러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서문은 그가 본 조셉 캠벨과 책과의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우리에게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기에 적절하다. 또한 이 서문을 읽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대략적으로 캠벨과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빙산의 일각일지라도.

전반적인 책의 흐름은 현대세계와 신화의 연관성으로 시작하여 점차 신화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물론 대담이 그렇게 이루어졌기에 그리 쓰여졌을 수도 있지만 만약 책이 무작정 신화의 세계를 펼쳐보였다면 거부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현대와 신화와의 관계(?)를 표현해 보였기에 우리는 거부감없이 “이런 문제가 신화에 나온다고?”하는 의문을 가지고 점차 점차 깊은 신화의 매력에 빠질 수 있도록 된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젖어들어 가기에 1장을 읽을 때보다는 2장을 읽을 때가 그리고 3장, 4장으로 가면서 더한 재미를 느끼고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2장에서 빌 모이어스와 조셉 캠벨이 <창세기>와 다른 신화를 비교하는 부분은 너무 유사해서 입이 벌어지는 부분이다. 아주 간단한 몇 개의 문장으로 신화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열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것은 낫다는 말처럼 유사성이 있다는 외침보다 더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그가 느낀 바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조셉 캠벨이 하나의 신화를 인용하기보다 여러 신화를 인용함으로써 더욱 그 믿음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대담 형식의 글은 접근성은 쉬우나 자칫 잘못하면 조금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사람은 말을 하다보면 순간 이상한 흐름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10분 전과 10분 후가 다른 이야기의 흐름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책도 그런 부분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하여 조금만 다른 생각에 빠지거나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서 책에서 눈이 떨어진다면 흐름이 끊기게 된다. 잠시 생각을 해주어야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졌기에 주제 자체를 전달하기에는 조금 모호한 부분이 생기는 느낌이다. 대화는 한 주제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론 우리의 대화도 그렇다. 그렇기에 대담을 옮겨놓은 이 책도 그리 쓰여졌을 것이다. 글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아! 그렇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많이 있으나 각 장의 주제로 잡아 놓은 것을 과연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든다. 질서정연하다라는 느낌이 조금은 덜 하다는 것이다. 신화는 나에게는 조금 생소한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느낌을 더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화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려고 한다면 각 주제를 설정하고 그 주제 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명시해야만 글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도도 더 높이고, 저자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이글을 읽고나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독후감을 조금 더 덧붙일까 한다.

이 책은 나에게 어려웠다. 나는 지금껏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을 많이 접해왔다. 이 책은 초반부터 단어의 정확한 뜻을 궁금하게 하는 책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해보지 않았던 짓. 결국 나는 네이버 사전을 뒤적여가며 글을 읽었다. 물론 연구원 2차 레이스에 충실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고 잘 쓰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별로 어려워보이지 않는 책이었지만 처음부터 부담감을 가지고 시작한 책이었기에 접근하기에 더 어려웠음을 나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신화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또한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결국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등대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신화를 학문으로 연구했던 저자이지만 결국은 그가 말한 모든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와 지혜를 나눠주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매력이다. 자신이 주장했던 바를 자신이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문제와 동떨어짐 없이 매끄럽게 신화와 우리를 잘 엮어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글을 잘 써서 말을 잘 해서가 아니라 그가 영웅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본 영웅처럼 모험에의 소명을 받아서 신화를 연구하는 길을 떠나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고 결국은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여정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그가 현실에 있다가 떠났고 깨달음을 얻었고 현실로 다시 돌아왔기에. 경험한 자의 말이기 때문에 더욱 그의 말들이 우리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그는 마치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의 문제들을 옆에서 본 바와 같이 시원하게 답을 내어 주고 있다.

그가 얘기한 바에 의한다면 나도 ‘신’이고, ‘영웅’이다. ‘나’ 라는 육신을 떠나서 생각한다면 나 역시 대 우주의 의식을 가지고 있음이다. 그리되면 나는 ‘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영웅’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통해서 나의 삶을 나 보다 더 큰 곳에 바쳐야 하는가.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남은 화두이다.

책이란 것은 저자가 말하는 바가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보고 싶은 부분을 확대해서 보는 경향도 있는 듯 하다. 결국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들도 내가 느끼는 것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이 될 수 있고 내가 평소에 해왔던 생각들이니 말이다. 노트까지 펴 놓고 메모해가면서 책을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조금 어려워보이는 책을 읽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IP *.23.188.173

프로필 이미지
김유진
2011.02.21 09:45:42 *.5.147.52
루미님!! 첫번째 북리뷰~~잘 읽었습니당^-^*
저는 처음부터 연구원 도전을 목표로 하신줄 알았는데..단군 하면서 더 확신을 얻으신거였군요!
멋지세요emoticonㅋㅋㅋ
다음 북리뷰도 기대할께요!
프로필 이미지
2011.02.22 16:58:11 *.236.3.241
재밌어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90649
518 몸과 마음이 아플 때 [1] 한수진 2011.02.25 11044
517 [먼별3-23]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칼 융의 무의식세계 입... 수희향 2011.02.23 8145
516 [7기 연구원-지적 Race]조셉캠벨의 신화의 힘 리뷰 file [1] 장윤영 2011.02.21 4408
515 [7기연구원지원-첫주] 신화의 힘을 읽고서 file [5] 박주선 2011.02.21 4345
514 [7기 연구원 지원] <신화의 힘> 북리뷰 file [1] 이현정 2011.02.21 4394
513 [예비 7기] 1주차_신화의 힘_조셉 캠벨 file 김서영 2011.02.21 4355
512 [7기 지원] 신화의 힘 리뷰 file 전민정 2011.02.21 4320
» 7기 "신화의 힘" 리뷰 file [2] 이루미 2011.02.21 4464
510 지적 Race_신화의 힘_을 읽고 [2] 힐데가르트 2011.02.21 4544
509 [7기지원] 1주.신화의 힘 / 조셉캠벨, 빌 모이어스 file [3] [4] 강훈 2011.02.20 5522
508 1. 신화의 힘 file [2] 미선 2011.02.20 4485
507 [7기 도전-북리뷰] 조셉 캠벨 '신화의 힘' [2] 유재경 2011.02.20 4420
506 1차 Book Review_ 신화의 힘 file [2] [3] 오경희 2011.02.20 4713
505 [7기 레이스] 조셉캠벨 <신화의 힘> [4] [2] 김경인 2011.02.20 6976
504 [7기_1주차]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 리뷰 [1] 미나 2011.02.19 4352
503 [7기도전] <신화의 힘> 내가 저자라면 양경수(양갱) 2011.02.19 4443
502 [7기도전] <신화의 힘> 저자에 대하여 file [5] 양경수(양갱) 2011.02.19 5542
501 [7기도전리뷰] <신화의 힘> 조셉캠벨&빌모이어스_내마음을무... 양경수 2011.02.19 4351
500 <북리뷰>자본주의, 너는 누구냐?-『자본주의 : 어디서 와서 ... 구름을벗어난달 2011.02.17 4423
499 [먼별3-21] <자크 아탈리의 "살아남기 위하여"> 미래사회 7... 수희향 2011.02.16 4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