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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7일 21시 28분 등록

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이경남 옮김, 민음사)

 

I. 저자에 대하여

◆ 제레미 리프긴 (Jeremy Rifkin, 1945~)

변환의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온 사회운동가이자 미래학자

 

Biography

- 1945년 미국 콜로라도 주 출생

- 1967Wharton School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서 경제학 학사학위 취득,

- 1969Fletcher School of Law and Diplomacy at Tufts University 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 취득

- 1977~ 'Foundation of Economic Trends (경제동향재단)'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이사장으로 있음

- 1993~ 'Beyond Beef Coalition'을 창립하여 운영하고 있음

- 1994~ The Wharton School's executive education program 부교수

 

대표저서

- Entropy (1980) <엔트로피>

- The End of Work (1995) <노동의 종말>

- The Biotech Century (1998) <바이오테크 시대>

- The Age of Access (2000) <소유의 종말>

- The Hydrogen Economy (2002) <수소 혁명>

- The European Dream (2004) <유러피안 드림>

- Empathic Civilization (2009) <공감의 시대>

 

 

◆ 저자를 위대함에 이르게 한 7가지의 길

1. 우연이 운명이 되다 (터닝포인트)

불의에 맞서다

1966년 대학 시절 그는 스스로 'party animal'이라고 표현하듯이 여느 대학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1966년 학생 운동에 참여하던 자신의 친구가 몰매를 맞는 것을 목격하면서 다음 날언론의 자유를 달라라는 운동을 펼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http://en.wikipedia.org/wiki/Jeremy_Rifkin#Biography)

 

1970 8월 그가 버트란드 러셀 재단의 일을 맡아 하고 있을 때, 모임에서 일부 미군 부대에서 저지른 양민학살의 잔악한 사건을 사진을 통하여 알게 되었고,  '시민위원회'를 창설하고 본격적인 반전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70년대 초 워싱턴 DC에 진을 치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먼저 결성한 조직은 1971년에 만든새로운 아메리카 운동이었으며, 이 조직은 다음해에 ‘200주년 국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 후국민기업위원회를 조직하여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하면서, 기존 경제 시스템의 민주적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을 시작한다. 리프킨은 77년에 현재 그가 활동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경제동향 연구재단을 세웠다. 그가 처음에 주로 다룬 이슈는 노동 문제였지만 그와 동시에 오늘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환경 문제, 유전자 변형/조작 문제, 그리고 에너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훗날 리프킨도 베트남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지금처럼 급진 운동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자에게 토로한 바 있다.

(http://www.wintersoldier.com/index.php?topic=Timeline)

(http://en.wikipedia.org/wiki/Jeremy_Rifkin#Biography)

 

 

2. 재능이 감응할 때 결코 망설이지 않는다 (천복)

행동주의자 (Activator)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직 행동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일은 행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행동만이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단 결정하고 나면, 행동해야 한다. (중략) 행동이야말로 최선의 학습 방법이라고 믿는다. 결정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를 보면서 배운다. (중략) 계속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계속 다음 단계로 전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신선하고 풍부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하는 일을 통해 평가를 받아야 한다."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 177p)

 

제레미 리프킨이야 말로 진정한 행동주의자이다. 그는 자신에게 옳다는 어떤 직관적 판단이 찾아오면 망설이지 않고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긴다. 극소수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회자되던 이슈들을 대중화시켜 공공적 이슈로 쟁점화 시킨다. 그렇게 사회운동이 점화되면 그는 뒤에 머물지 않고 선봉장이 되어 맨 앞에 서서 시민들을 이끈다.

 

미래지향 (Futuristic)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기를 무척 좋아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당신은 미래에 매혹된다. (중략) 당신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비전을 보며, 이러한 비전을 소중히 여기는 몽상가이다. (중략) 이러한 비전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활력을 줄 수 있다. (중략) 당신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그림을 그려줄 수 있다. (중략) 사람들은 당신이 가져다 주는 희망에 매달리고 싶어할 것이다."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 131p)

 

그는 표면적으로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공감의식' '엔트로피'를 엮어 인류문명과 사회적 전망에 대해 거시적으로 통찰한다. 그렇게 그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을 넘나들며 인간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의 전체상을 제시한다. 미래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 통찰력과 혜안이야 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재능 중 하나라 여긴다.

 

탐구하고 학습하는 행동하는 지성

그의 저서에는 엄청난 인용문이 등장한다. 그는 각각의 인용문의 퍼즐조각으로 활용하여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철학과 사상이라는 작품으로 완벽하게 재배열,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런 수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포진시킨 뒤 멋지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열정과 성실을 바탕으로 지독하게 탐구하고 학습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는 늘 탐구하고 학습하며 그것을 책으로 쓰고, 책으로 써낸 그 사상을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긴다.

 

 

3. 내가 그린 삶에 대한 뱃심, 결코 물러설 수 없다 (용기)

뜨거운 것이 좋다!

Wharton에서의 경제학, Fletcher에서의 국제관계학. 꽤 괜찮은 엘리트 코스이다. 평범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편안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대신 그는 화끈한 길을 택한다. 30년 이상을 시민운동, 법률소송, 불매운동 등 자신이 사랑하는 뜨거운 논쟁 속에서의 삶을 살아왔다. 용광로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열정이 26세의 젊은 리프킨을 시민단체 ‘새로운 아메리카 운동’ 창립자로 만들고, 200주년 국민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국민기업위원회’를 조직하게 한 원동력이 된다.

(http://www.foet.org)

 

 

4. 침묵의 시간, 일만 시간의 레이스를 통과해야 한다 (수련)

쓰고 또 쓰다

제레미 리프킨은 1980, 35세 나이에 <Entropy, 엔트로피>라는 책으로 "변환의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독보적인 사회사상가"로 유명해진다. 이는 1973, 28세 때 쓴 첫 저서 <How to Commit Revolution American Style>을 발표한지 정확히 7년 뒤의 일이다. 그는 그 사이 4권의 책을 써냈다. 그 중 유명한 책은 없지만, 거의 매년 1권씩의 책을 저술했다. 그렇게 보낸 7년 동안 그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가는 1만시간의 게이지를 충분히 채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http://en.wikipedia.org/wiki/Jeremy_Rifkin#Biography)

 

읽고 또 읽다

<공감의 시대> <소유의 종말>의 참고 문헌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독한 사람이지 알 수 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공감의 시대>에 달린 각주만 해도 1천 개가 넘고, 인용한 저서만도 300권을 넘는다. 꽤 긴 칩거기간 동안 그는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사상과 철학을 입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온 몸을 던져 실천하고, 지성에서 힘을 빌려오기 위해 미친 듯이 읽고, 써 내려간다.

 

 

5. 고독을 견디지 못하면 존재를 지킬 수 없다 (철학)

혹독한 비판을 즐기다

"() 지성적 프로퍼갠더를 교묘하게 구성하여 마치 학술적 저술이나 되는 것 같이 행세하고 있는 허울좋은 가식(假飾)일 뿐이다. 중요한 사상가에 의한 지적 저술이라고 판촉되는 책 중에서 이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를 나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만일에 리프킨의 주장이 서로 상반된 생각을 대비해 검토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좌파 대 우파의 대립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반지성적 형태의 낭만주의와 지식인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존중하는 지성적 입장과의 대립일 뿐이다. 내용이나 표현에 있어서 『알제니』는 지저분한 반()과학적 쓰레기에 속한다. 지적 사색을 통해 비판하기보다는 감정을 앞세워 어떤 것을 배척하자고 주장하는 운동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 스티븐 제이 굴드

 

생물공학에 반대하는 그의 열정은 현재의 과학은 이른바감성적 과학즉 소외된 인간이우리 환경과 참여적 관계를 갖게 되는 과학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그의 광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미래의 과학적 발견과 기술진보는 새로운 위험을 야기하고 또 새로운 윤리적 딜레마를 일으킬 것이지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자연을 대하려면 이런 문제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또 이를 해결해야 한다. 인간능력에 대해 신뢰하고 있는 낙관론자들은 리프킨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리프킨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재능인 지적 탐구를 포기하고 그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 인간형인 미지의 우주에 조용히 안주하는 겁 많은 인간형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로널드 베일리

 

과학계에서 가장 증오 받는 인물이라고 평가되며 시대의 저명한 물리학자, 생명공학자 들은 그를 감상적이며 인류를 나약하게 만드는 사이비 선동가라고 비하한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http://en.wikipedia.org/wiki/Jeremy_Rifkin#Biography)

 

탁월한 연대전술로 맞서다

환경운동단체, 동물보호단체, 평화단체, 여성건강단체, 생명권 옹호단체 등의 공감을 얻어내고, 심지어 그는 복음주의 교회와도 손을 잡는다. 홀로 맞서면 벅차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좌우파에 개의치 않고 그들의 어깨 위에 올라 다시 한번 통렬히 그의 신념을 외친다.

 

 

6. 스승, 그 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스승)

초시대적 인물 괴테

책과 인터넷을 찾아 보았지만 직접적으로 언급된 그의 스승을 찾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가 읽은 수천 권의 책들 속에 수 많은 그의 스승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적어도 <공감의 시대>에 나오는 '공감의식'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초시대적인 인물'이라 찬사를 아끼지 않은 괴테야 말로 저자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사해동포주의적인 세계관과 보편적 공감의 감수성을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몸으로 직접 구현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괴테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200여 년 전 괴테가 가졌던 세계관과 자연과 인간의식의 궤적에 대한 견해는 21세기의 매우 국제화된 세상을 사는 요즘의 밀레니엄 세대의 견해와 비교해도 스케일과 깊이에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가히 '초시대적인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감의 시대 385p)

 

"괴테를 통해 우리는 사회뿐 아니라 모든 자연까지 포함하는 실체적 경험에 담겨있는 공감적 충동이 세속화되는 과정을 본다. 공감에 대한 그의 의견은 실로 우주적이다." (공감의 시대 388p)

 

저자는 괴테를 비롯해 몽테뉴, 매슬로우, 윌리엄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등에 대해 극찬을 한다. 아마도 이들 모두가 저자로 하여금 '공감의식'을 인류문명 발전의 한 축으로 본 계기를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7. 나를 넘어서는 더 커다란 것 (대의, 소명)

 

문명의 풍요를 창출한 자원의 고갈 위기에 봉착한 인류에게, 자본의 논리 앞에 어느 때보다 자연과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 소외된 인류에게 당면한 생존의 문제를 제기하고 현실에 근거 한 희망의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의 그의 소명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자꾸 나와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책을 쓰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책을 쓰고 강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는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은퇴 후에는 워싱턴DC 교외에 봐둔 땅에서 아내와 함께 학대 받는 동물들을 위한 성소(聖所)를 만들어 그 짐승들을 돌보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뜻을 밝힌바 있다.

 

 

※ 제레미 리프킨 강연 동영상

<공감의 시대, The Empathic Civilization>, 제레미 리프킨이 직접 강연한 50분 분량의 동영상이다.

 

 

◆ 왜 '제레미 리프킨'이었을까? (나의 언어로 평가하기)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던 저자 중 한 사람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스승께서 연구원 수련에 단골로 초빙하시는 전임교수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법정스님이 사랑한 책들> '작은 행성을 위한 식사법'이라는 꼭지 글에 소개된 <육식의 종말>을 통해서다. 글의 주제는 "우리는 그릇되게 먹어서 죽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마음에 남는 바가 많아 책은 샀지만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공감의 시대>란 책을 받아 들고, 가장 먼저 책의 두께에 놀랐다. 저명한 저자이겠다, 제목도 멋지겠다 책꽂이에 꽂아 놓으면 지성적인 사람으로 보이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그러나 장식용으로 산 책이 아니므로 과감하게 분철을 했다. 3권의 책이 나왔다.

 

인류문명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한다는 사실에 엄청난 지적 호기심을 갖고 독서에 임했다. 두꺼운 분량과 다양한 주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인드 맵'으로 세세한 목차를 만들어 지금 있는 곳을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길고 긴 인류의 여정을 따라가는 시간여행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엄청난 인용문의 숲 속에서 저자의 숨은 의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잡기 위한 상투로 '공감의식' '엔트로피'를 잡고 갔다. 어떻게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념이 연관되는지를 찾으려 노력했다. 공감의식의 상승과 엔트로피 증가의 역설적 관계가 있다는 데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아쉽게도 그 두 가지를 잇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왜 스승께서 제레미 리프킨을 소개해주셨을까? 책을 읽고 난 뒤, 뒤에 있는 각주와 인용저서들을 보고 스승은 숨은 뜻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사상, 철학, 천복에 천착하여 어마어마한 독서와 자료 탐색을 통해 엄청난 것들을 쏟아내는 저자의 저력을 보고 배우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 또한 저자의 그러한 지독한 열정과 성실을 배우지 못하면 결코 평범한 지금에서 비범한 미래로 도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 (1941~)'가 생각 났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미래소년 코난> 등 인류의 어두운 미래 혹은 과거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망하고, 결국 해결책은 자연과의 조화, 공감에 이르는 길이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두 분의 나이 차이도 4살 터울인데, 두 분께서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면 멋진 작품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II.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범례 : ■ 특히 좋았던 글귀, ■ 나의 소감과 해석)

1부 호모 엠파티쿠스

1. 인류사에 감추어진 역설

2,000년 동안 우리는 인간이 타락한 세상에 사는 죄 많은 존재라고 믿고 살았다. (13) → 기독교의 원죄설, 스스로의 존재를 부종하는 어두운 패러다임의 근원이다. 나는 이 원죄설이 싫다.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플랑드르의 전장에서 수만 명의 병사들이 보여 준 행동은 원죄나 생산적 노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병사들이 서로에게 보인 우정을 통해 추구했던 쾌락은, 19세기 공리주의자들이 내놓은 쾌락에 대한 다소 피상적인 설명은 물론이고 프로이트의 에로틱한 충동에 몰두하는 인간에 대한 병리학적 설명과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플랑드르의 병사들이 보여준 것은 심오한 인간적 감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드러난 감정으로, 시대와 사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병사들의 모습에 왜 감동을 받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들은 인간이기를 택했다. 그들이 드러낸 인간 능력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공감이었다. 인간의 능력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면서도 소홀히 다루어졌던 공감능력은 사실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보편적 조건이다.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 핑계이고 억지이고 거짓일 뿐이다. (16)

 

공감의식의 발전과 자아의 개발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간의 여정을 이끄는 사회구조를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드는 현상을 수반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다. (18) →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

 

휴머니스트 심리학자인 칼 로저스에 의하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마치 자시의 것인 양 적극적으로 경험한다고 한다. 공감하는 사람은 분별없이 자의식을 내던지고 다른 사람의 경험에 빠져드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정보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들지도 않는다. (20)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만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쁨에도 역시 공감할 수 있다. (21) "자신의 기쁨으로 세상의 기쁨에 참여하라"

 

어떤 사람이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성의껏 들어 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 눈가가 촉촉해 진다. 다름 아닌 기쁨의 눈물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다 있군요. 이 사람은 마치 내 입장에서 본 사람 같습니다." (22) 
 

협력이 경쟁을 누를 수 있다. 음모와 조작을 부추기는 권모술수보다는 리스크를 분담하는 오픈 소스 협력 체제가 규범적으로 자리 잡았다. (26) 변경연은 경쟁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공헌이란 단어를 쓴다.

 

1,700년 동안 기독교 세계는 대대로 인간을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못 박았고, 여전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대의 관념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최근 두 세기 동안에도 인간은 스미스의 정의대로 자율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물질주의적인 존재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26)

 

인성은 자율, 즉 혼자만의 섬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의식과 애정과 친밀함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29)

 

자의식과 자아 인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이들은 보았다. 이때 우애적 유대감을 만드는 수단이 바로 공감이다. (29)

 

기피 인물이 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곧 비인칭적 인간이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연관을 맺는 인간이기 포기하는 것이다. 반면에 공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가 되어 의미 있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심리적 수단이다. 그런 초월적 개념은 자아를 넘어, 보다 더 큰 공통체에 참여하고 소속되며 보다 복잡한 의미의 그물을 끼어 묻히는 것이다. (30)

 

인간은 훨씬 더 오랜 기간을 서로 돌보고 함께 놀고 친 사회적으로 행동하며 지냈다. 구석기 시대의 인간은 동물을 죽였을 때에도 엄숙한 마음으로 자신들이 죽인 것을 추모하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다른 동물이나 인간을 죽이면 전체 자연의 계산과 균형이 흐트러지고, 그 균형을 맞추려면 장차 적절한 희생을 치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희생자의 '영혼'은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었다. (32)

 

우리가 세계적 차원의 공감의식에 바짝 다가선 만큼, 우리 자신의 멸종도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역설이다. (35)

 

인류사의 근간을 이루는 변증법은 공감을 확장하고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 사이에 놓인 끊임없는 피드백의 고리이다. (37)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렇게 지적한다. "유기체가 먹이로 삼는 것은 네거티브 엔트로피이다. 끊임없이 환경에서 네거티브 엔트로피를 끌어감으로써 (중략) 유기체는 쉬지 않고 환경에서 질서를 빨아들인다. (42)

 

생명은 비 평형 열역학의 일례라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즉 생명은 보다 더 큰 환경에서 공짜 에너지나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처리함으로써 평형상태, 즉 죽음과 거리를 두고 질서를 유지한다. (42)

 

버트런드 러셀은 "모든 살아있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자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환경을 그 자신과 자신의 씨앗으로 바꾸려고 한다." 라고 지적했다. (42)

 

진화의 사다리를 오르는 모든 유형의 생명은 비평형 질서 상태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 환경에서 더 큰 무질서를 초래한다는 말이다 에너지는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며, 높은 수준에 있는 시스템으로 들어가 그 시스템을 소모하여 더 낮은 상태의 시스템으로 만든다. (43) → 인간이 진화할 수록 엔트로피는 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조지 매커디는 <인간의 기원>에서 인간의 경험을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실제 사용량이 늘어나는 진화 과정으로 본다.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나 집단이 이룩한 문명의 정도는 에너지를 인간의 발전과 필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45)

 

문화의 기능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 (45)

 

하워드 T. 오덤은 '인간, 정신, 에너지'를 하나로 묶어 생각할 때, 인류 진보의 궁극적인 한계를 긋는 것은 인간의 영감이 아니라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46)

 

레슬리 화이트는 에너지 사용과 문화 진화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어떤 문화의 '진보'를 평가할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① 첫 번째는 "개인이 1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고,  ② 두 번째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일을 하게 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의 능률"이며 ③  세 번째는 "생산된 재화와 용역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화이트는 결론짓는다. "개인이 1년에 이용하는 에너지의 양이 증가하거나 에너지를 일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적 수단의 효용성이 증가할 때 문화는 진화한다." (46) → 문화의 진보 = 공감의식↑ ∽ 에너지사용↑ = 엔트로피↑, 여기서 저자는 공감의식의 증가가 엔트로피로 이어진다는 연결고리라고 이야기 한다.

 

에너지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에너지 혼자만으로는 설 수 없다. 역사상 위대한 경제 개혁은 새로운 에너지 제도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맞물릴 때 일어났다. (47)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방정식을 바꾸어 왔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소위 지휘-통제 메커니즘이 되어, 문명의 에너지 흐름을 편성하고 조직하고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47)

 

갈수록 복잡해지는 에너지 제도를 다루려면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필요하다. (47)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사회와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49)

 

각 단계에서 새로 나타나는 의식은 앞선 의식의 잔재를 한편에 지니면서도 보다 성숙한 공감 본능을 확대시켜 갔다. (49) → 공감의식도 진화를 해 왔다는 이야기다.

 

프리고진은 증가된 복잡성이 진화의 조건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50) → 인간의 진화와 엔트로피 증가는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게 된 진화적 존재라면, 그것은 분명 시간적, 공간적 관계의 현실을 열정적으로 추구하여 우주에 가담하려 애를 쓰는 그 자신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 이디스 코브 (52)

 

다른 사람도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잘살아 보려고 발버둥 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공감인식은 비로소 엔트로피 인식에 가 닿는다. 다른 사람의 곤란한 처지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공감하고 지지해 주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열역학법칙, 특히 엔트로피 법칙은 살아 있는 매 순간이 유일한 것이며 반복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갈 뿐 젊어질 수는 없다. (53)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알아낸 것이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너에게서 나의 일부를 확인하고 너는 내 안에서 너의 일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 찬궉번 (54)

 

근본적으로 정에 민감하고, 우애를 갈망하고, 사교적이며, 공감을 넓히려는 성향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공감-엔트로피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내어 생물권에 지속 가능한 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55)

 

2.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소설이 자아를 반성하는 도구였다면, 전화는 잡담을 나누며 여성의 공감대를 형성해 주는 도구였다. (68)

 

인쇄술과 전기통신 혁명은 여성들에게 마음과 지평을 넓히고 여성성을 찾을 수 있는 도구를 안겨주었다. (68)

 

이들(대상관계 이론 학자들)에게 대상과의 관계는 안락함을 추구하고 리비도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랑, 호의, 유대감, 인적 교제를 바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72)

 

리비도의 태도가 대상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관계가 리비도의 태도를 결정한다. - 페어베언 (72)

 

리비도의 목표 - 페어베언

① 리비도의 '목표'는 중요성에 있어서 대상관계에 비해 이차적이다.

② 리비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73)

 

인간의 파괴성은 아이가 적절한 공감(강조하지만 최대의 공감이 아닌)에서 비롯되는 반응을 원하는데도 자기대상이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경우에 생겨난다. - 하인즈 코후트 (75)

 

즉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서 만들어지지만, 하나의 개인은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 도널드 위니콧 (77)

 

엄마는 아기와 갖는 최초의 관계를 시작하는 방법을 통해 아기가 하나의 개인적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처음부터 관계가 개인을 만든다. - 도널드 위니콧 (79)

 

엄마와의 유대감이나 애정을 맛보지 못한 아기들에게는 살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 데이비드 레비 (85)

 

보울비는 아이가 엄마와 맺는 최초의 관계가 평생 동안 아이의 정서적, 정신적 생활을 좌우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의 일차적 충동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갓 태어난 아기는 이 사람과 저 사람, 심지어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첫 번째 생일을 맞을 때쯤이면 그 아기는 이미 사람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을 한눈에 구분하고, 낯익은 사람 가운데 좋아하는 사람을 찍어내기도 한다. 기분 좋게 인사할 줄도 알고 헤어질 때는 따라가려 한다. 그리고 없으면 찾고, 없어지면 걱정하고 당황한다. 다시 찾으면 안도하고 행복해한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아이의 이후 정서적 생활이 만들어진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앞으로 아이의 행복과 건강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 (87~88)

 

보울비는 애착과 독립 사이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찾아냈다. 아주 좋은 부모는 아이에게 "안정적인 기지"를 마련해 주고 "아이가 그 기지를 거점 삼아 마음껏 세상을 탐구할 수 있게 격려한다." (90)

 

→ 인간의 공감적 본능이라는 주제에서 깊숙하게 파고 들어온 세밀한 부분이지만, 곧 한 아이의 아빠가 될 사람으로써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인간의 발달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당신이 어떤 관계에 있다면 그 관계는 당신의 일부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줄 수 있을까? 공감은 가르치거나 훈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감해 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이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이가 어떤 관계를 경험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 앨런 스루피 (97)

 

까다로운 아이도 세심한 보호를 받으면 잠재된 본래 성격이 유리한 쪽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엄마가 포용력이 있으면 까다롭고 종잡을 수 없는 아기의 비위를 세심하게 잘 맞추어 줄 수 있고, 그래서 아이의 천성을 유리하게 발달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 나온 모든 연구결과 가운데 가장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 보울비 (98)

 

대상관계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인간의 본성 앞에 새로운 거울을 놓는다. 그리고 그 거울에서 그들이 본 것은 정이 많은 사회적 동물의 모습이며, 그것은 유대감을 갈망하고 고립을 싫어하며 생물학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기 좋은 모습니다. (100)

 

3.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감성적 해석

거울신경세포 때문에 인간을 비롯한 몇몇 동물은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명한 과학 전문기자들은 거울신경세포를 '공감 뉴런'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거울신경세포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이는 개념적 추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시뮬레이션을 통해서이다. 생각이 아니라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리촐라티는 말했다. (102)

 

거울 뉴런의 발견은 그 사회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탐구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103)

 

공진회로는 의도를 부호화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의 공감과 정서적 공명, 즉 마음이 서로 통한 결과로 나타난다. (103)

 

인간에게 공감은 내재되어 있으며, 공감이 우리의 본성이고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104) → 공감은 선천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거울신경세포는 문화의 진보에 확실한 생물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중략) 이제 우리는 거울 뉴런이 문화를 직접 흡수하는 현장을 본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같은 것을 공유하고 모방하고 관찰함으로써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이다. (107)

 

인간과 영장류에게 있는 거울신경세포의 발견은 양육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109)

 

공감의식을 가능하게 해 주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의 발견과 그 메커니즘을 활성화하는 문화적 기폭제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본성과 양육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며 '인간 본성'을 창조해 내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109)

 

개도 이해하니까 누가 어떤 것을 가리킬 때 다른 사람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손의 움직임은 손과 팔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다. (111)

 

다윈은 "고등동물에게도 대부분 우리와 공통되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 있으며 동물도 사랑할 줄 알 뿐 아니라 사랑 받고 싶어 한다."라고 썼다. (112)

 

성장할 때 놀이는 애착, 배려, 신뢰, 애정,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해 주는 수단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116)

 

놀이의 본질적 특징

① 놀이는 본질적으로 철저히 참여적이다

② 개방성과 관용은 놀이 환경의 본래적 부분이다

③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

④ 놀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시간과 공간개념이 없는 것으로 경험되는 경우가 많다. (117)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 정의한 것도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위징아는 모든 문화는 놀이에서 생겨난다고 간파한다. 그는 "이런 놀이를 통해 사회는 삶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드러낸다"라고 말한다. (118)

 

사회화 과정에서 놀이가 그렇게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놀이가 상상력의 고삐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118)

 

상상을 통해 우리는 실체적인 경험과 정서와 추상적 사고를 하나의 종합적인 앙상블, 즉 공감적 마음으로 모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정서적일 뿐만 아니라 인지적이다. 우리는 정서를 표현하고 동시에 추상적인 사고를 창조한다. (119)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인 한에서만 놀이를 하고, 놀이할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는 인간의 유대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적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 놀이를 한다. 놀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가장 심오한 행위이다. 놀이는 집단적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놀이하는 사람은 경계심을 풀고 잠깐이나마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함께 있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119) → 유독 저자가 놀이에 대해 강조하네. 나의 경우 우리 부서의 놀이문화(정말로 놀이를 통해 경계심이 사라지고 유대감을 가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골프나, 당구 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어린 시절 놀이에 대한 회상에 잠겼다. 그리고 조카가 어떻게 놀며 자랐는지를 떠올려 적용해 보았다.

 

자유와 놀이 역시 교집합을 갖는다. 진정한 놀이는 항상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놀이에 빠진다. 목표는 즐거움과 생명 본능의 재확인이다. 문화적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를 경험함으로써 사람은 동료 인간과 동등하게 마음을 열고 참여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몰입한다. 순수한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면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로 이해하고 그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때는 놀이를 한다."라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였다. 놀이할 때보다 더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가? 그때 놀이는 시시한 장난이 아니다. 놀이는 공감의식을 확장하여 진정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수단이다. (119) → 직장을 놀이터라고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을까? 많은 시도를 해 보았지만 쉽지가 않다.

 

영장류에게 공감은 본래적인 언어 이전의 형태로, 개체와 개체를 이어주는 연결 장치이다. 공감이 언어와 문화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 프란스 드 발 (121)

 

화해는 주로 사회적 조화를 되찾으려는 욕구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고 드 발 박사는 말한다. 반면에 위로는 다른 의도 없이 순전히 공감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으로, 단지 상대방의 곤경을 인정하고 달래기 위한 것이다. (123)

 

자신과 남을 잘 구분할 수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남을 위로할 수 있고, 자신의 느낌이 남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123) → 자기인식, 즉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어야 위로할 수 있다.

 

서로 털을 골라주든 인터넷을 통해 가십을 퍼뜨리든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수간을 통해 동료와 교류하려는 깊은 욕구와 사회적 본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127)

 

언어 능력의 형성은 공감의 크기와 범위가 확장되고 문화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몸짓으로 하는 의사소통 방식이 갈수록 복잡해져 가는 과정의 최종단계이다. (128)

 

데이비드 맥닐은 몸짓과 언어는 "손을 잡고 간다"라고 표현한다. "몸짓은 단어, 구절, 문장만큼이나 언어의 총체적 부분이며, 몸짓과 언어는 한 체계이다."라고 결론짓는다. (129)

 

다시 말해 손은 하나의 기관이 되고, 접촉하는 동작은 초기의 공감적 커뮤니케이션의 시발점이 된다. 털을 골라주는 행위가 이후에 추상적인 팬터마임으로 진화하고, 이어 상징적 원형 기호로 발전하여 신체적 느낌과 의도를 표현한 다음 공감적 결합으로 확대되었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129)

 

커뮤니케이션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반응하는 것이다. (130)

 

4.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

인간의식 발달의 여섯 단계 (스탠리 그린스펀)

촉각, 냄새, 소리, 장면 등의 감각을 체계적인 유형으로 짜 맞추는 단계

    - 대양적 느낌의 합일 (프로이트), 하나의 엄청나게 소란스러운 혼란 (윌리엄 제임스)

자신을 돌봐주는 어른과 처음으로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관문

타인을 향해 목적의식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그에 상응하는 피드백을 받는 단계

미묘한 행동신호를 근거로 상황을 짐작하기 시작하는 단계

이미지와 개념을 만드는 단계

개념과 정서를 하나로 묶는 단계

 

그린스펀은 자의식을 갖춘 정체성의 발달은 전적으로 "몇 년 동안 친밀감을 통해 양육된" 아이와 부모 사이의 공감적 관계에 달려있다고 단언한다. (136)

 

그리스펀은 본성과 양육이라는 이분법을 떠나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관찰을 한다. 아이의 몸은 감각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한편, 돌봐주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형성된 친밀한 관계와 정서적 경험은 아이의 신경 체계에 의해 추상화되어 기호화된다. 다시 말해 "생리적 구조는 경험을 조직하고 그 경험이 다시 생리적 구조를 조직하는 지속적인 상호교류를 통해 인식은 발달한다." (136)

 

그린스펀은 '개발된 의식'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발된 의식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속에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를 경험하고 가족과 사회와 문화와 환경의 맥락에서 이런 것들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137)

 

달리 말해 '개발된 의식'은 성숙된 공감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배려하고 동정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느낌을 고려할 줄 아는 능력은 스스로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줄 아는 아이의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정신 건강은 "인간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필요로 하며" 인간성은 "잘 발달된 공감 인식"을 필요로 한다고 그린스펀은 지적한다. (137)

 

공감적 각성의 다섯 가지 유형 (마틴 호프먼)

<언어이전-기계적, 무의식적>

운동성 모방

무의식적인 흉내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느낄 때 나타나는" 반사적인 과정이다.

- 제시카 래킨 (140)

 

마틴호프먼은 "울기 때문에 속상해지고, 두들기기 때문에 화가 나고, 떨기 때문에 무서워진다"고 보았다. 이것을 '구심성 피드백'이라고 한다. → 웃으니깐 행복해지는 것이다. 법정스님께서 생전에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니까 봄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140)

 

사람들의 눈만 보아도 그들의 관심이 무엇이며 다음에 무엇을 하려 하는지 대충 눈치 챌 수 있다. 아기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렇게 아기들은 우리 문화의 전문가가 되어간다.

 

고전적 조건화

직접연상은 다른 사람의 곤경이 관찰자에게 비슷한 과거의 경험과 그에 수반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 일어난다.

<상위유형>

매개된 연상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상대방의 정서상태는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역할취득 = 관점취득, 자기 중심적인 역할 취득은 가장 많은 공감적 고통을 유발했다.

 

아이들은 타고난 생물학적 충동을 어떤 방법에 의해 공감적 표현으로 받아들여 성숙한 공감의식으로 바꾸는가? 부모가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훈련을 통해 아이들은 세련된 공감적 표현 감각을 발달시킨다. (145)

 

아이에게 잠재되어 있는 공감능력을 일깨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추리를 유도하는 것이다 .추리 훈련을 통해 부모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강조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면서 아이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146)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사태를 바로잡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욕감을 주는 것은 그의 인간성을 빼앗는 행위이지만, 죄책감은 다른 사람과 깊이 맺어진 유대감을 상기시켜 사회적 결합을 회복할 필요를 느끼게 만드는 내면의 매커니즘이다. (149)

 

동정피로증, 끊임없는 공감 과잉은 정서적 고갈을 가져와 공감적 반응은 무뎌지며 정서는 메말라 간다. (156)

 

가장 성숙한 형태의 공감적 반응은 전체 집단이나 심지어 동물 전체의 고통을 자신의 고민으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다. (159) →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조셉캠벨)

 

우리는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기본 규칙을 설정해 주는 것은 경쟁보다는 협동심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때로 이익을 위해 경쟁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회적인 맥락 안에서 하는 경쟁일 뿐이다. 오히려 이기심이 사회적 단결을 해치는 수위에 이르면 도태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160) → 사우(師友), 스승이자 곧 친구.

 

사회성을 평가하는 능력이 다른 사람의 평가를 추리하는 능력보다 먼저 발달된다. (162)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미국문화에서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양육의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아시아 문화는 아이를 키울 때 자율적 개인보다는 더 큰 사회 속의 복잡한 관계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는 문화에서는 자존감 보다 자기비판 능력을 기르도록 강조한다. (168)

 

인간의 본성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 여정의 참된 의미를 재고하고, 아울러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온 것, 우리의 열망을 정의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의 삶을 선택하는 방법에 관해 가장 소중히 여겨 온 믿음을 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0)

 

5. 인류 여정의 의미를 재고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공감이란 영역을 개발하여 성숙한 사회적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느낌과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감정과 느낌이 없다면, 공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공감이 없는 것은 세상에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을 수 없다. (178)

 

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실체적 경험,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고 전제하면서, 그런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공감 능력, 즉 다른 사람이 자신인 것처럼 그의 마음을 읽고 반응하는 능력은 인간이 세계에 참여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만들고, 언어를 발전시키고, 설득하는 법을 배우고, 사회적이 되고, 문화적 설화를 지어내고, 현실과 존재를 정의하는 방법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한다. (179)

 

실체적 경험은 그렇게 인간을 매료시켰던 종전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은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신앙의 시대' '이성의 시대'에서 빼내어 '공감의 시대'로 데려간다. (179)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긴요한 일은 일상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복잡성, 나약함, 유한성, 그리고 독특함을 상기시키는 일일 것이다. (182) → 스스로 나약하며,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전대상피질이 손상되면 움직임, 감정, 주의력에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사고 과정과 행동의 움직임이 실질적으로 멈추면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184) → 결국, 감정기능이 손상되면 이성도 마비된다는 의미다.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항상 주변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 (185)

 

실체적 경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신생활이 예외 없이 관계적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알고, 네가 알고, 네가 안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정신이론의 진정한 개념이며 정신생활은 바로 이런 개념을 기초로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 그 자체의 발달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자신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다른 사람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경험한 부분에 속한 실체적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의 관계가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언어 자체는 단어로 생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생긴다. 사람과의 접촉이 없이 기계가 돌보는 아기는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개인의 정체성과 의식은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겪는 우리 고유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단순히 자율적인 나는 없다. 수 많은 우리라는 독특한 한 군집이 있을 뿐이다. (186)

 

생각을 실체적 경험으로 보는 학파들의 주장도 그렇다. 오히려 정체성에 대한 생각은 다른 사람과 주고 받는 경험과 관계에 따라 결정되며, 그런 경험과 관계가 각자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를 주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경험은 실체적이고 신체적이지만,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다른 존재와 함게 나누는 '교류'는 비물질적인 성격을 띠며 저장된 기억의 일부가 되어 우리 각자만의 고유한 역사와 정체성을 구성한다. (189)

 

지금까지 흔히 생각해 온 것과는 달리 이성은 비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성은 우리의 뇌와 몸, 그리고 몸의 경험이라는 실체에서 비롯된다. (중략) 우리에게 느끼고 움직이게 해 주는 것과 같은 신경적, 인지적 메커니즘은 또한 우리의 개념적 체계와 이성의 양식을 창조한다. (중략) 어쨌든 이성은 우주나 비실체적 정신의 초월적 특징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은 우리 인간의 몸이 갖는 특권과 두뇌의 신경구조의 뚜렷한 세부사항과 세계 속에 있는 우리의 일상적 기능의 특징에 의해 형태가 갖추어진다. (190)

 

우리 인간은 몸의 감각을 언어로 바꾸어 일차적 은유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은유는 더 추상적인 은유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191) → 신화, 선문답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신화의 힘에 나오는 말 마음은 우리 육체에 대한 내적 경험이다. 메타포가 바로 이와 같다.

 

은유를 통해 우리는 현실을 상상하고 만들어 간다고 레이코프는 강조한다. 은유는 몸의 경험을 풍부하게 해준다. 은유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써먹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준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 역시 모든 인간에게 한결같이 공통적인 몸의 공간적, 시간적 방향감각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191) → 바로 이 부분이 은유가 '공감의식'에 기여하는 부분이다.

 

은유적 언어를 사용하면 내면의 세계를 공유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모든 인간의 경험에 공통되는 보다 단순한 일차적 은유에서 점점 더 많은 추상적 은유를 쌓아 나가는 것이 서로 '현실'을 상상하는 핵심이다. 예를 들어 누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을 어김없이 '파악한다.' (192)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참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전환 하면서 공감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놓인다. 공감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중심에 있었지만 사회는 이를 한 번도 제대로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192)

 

우리가 참여적 세계에 살고 몸의 경험이 다른 사람과의 끊임없는 교분의 경험이라면, 공감은 서로의 삶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공감은 또한 우리 자신의 공동의 현실을 만드는 수단이다. (192)

 

실체적 경험을 중시하는 철학자들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리감을 두고 힘을 행사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뛰어들어 공감적 교제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좀 더 깊이 공감할수록 참여의 정도가 강해지고 넓어지며, 그럴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영역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보편적이 된다. 얼마나 마음을 열고 참여하느냐에 따라 현실을 이해하는 폭도 달라진다. 경험은 점점 글로벌 해지고 보편적이 된다. 우리는 세계인이 되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권 의식'의 시작이다. (194)

 

새로운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현실은 공유된 경험을 함께 만들어 나아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공유하는 공통의 이해에 관한 설명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거대한 도식 속에서 모든 관계가 썩 잘 들어 맞는 방법을 통째로 알려고 한다는 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보다 더 큰 그림에 우리가 속해 있는 방법과 속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195)

 

실체적인 인간의 경험은 소위 현실을 구성하는 모든 관계를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참여라는 순수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또한 새로운 현실을 부분적으로 창조한다. 몸의 경험과 상호 관계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현실을 만들고 모든 주변의 현실과 존재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적어도 그 진실은 한 인간의 게슈탈트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195) → 경험론에 치우치는 것은 아닌가?

 

생태학은 생물을 자율적인 동인으로 따로 떼어 놓고 분석하고, 환경을 단순한 배경이나 자원의 저장고로 보는 낡은 관념을 무너뜨린다. 생물권 과학은 실체적 경험, 종들끼리의 호혜관계, 그리고 종과 그들의 서식지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 보며 그들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고 영향을 주고 변화하는지를 살핀다. (196)

 

진리는 자율적 사실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진리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통의 경험적 기반을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이는 틈새 영역에 존재하는 이해이다. (196)

 

그때 모든 진리는 우리의 현존하는 관계와 공통으로 공유된 이해를 체계화하는 것이다. 존재는 관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존재의 진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적, 철학적 접근은 우리의 경험적 존재를 무시하는 신앙과 이성과의 근본적인 결별이다. (196)

 

실체적 경험을 내세우는 철학자에게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능한 한 존재의 현실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196)

 

자유는 인생의 충만한 잠재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것이고, 충만한 삶이란 우정과 애정과 소속감의 삶이며, 보다 깊고 보다 의미 있는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성을 찾는 삶이다. 공감적 기회를 보장해 주고 격려하는 사회에서 양육되고 성장할 때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197)

 

재산이 많고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외톨이가 되기 쉽고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도 어렵다. 그렇게 살면 더욱 고립되고 제약이 많아지며 더욱 외로워진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누구나 가족, 친구, 동료 등을 떠올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순간을 추억한다. 평생을 돌이켜 보아도 가장 오래 남는 기억과 경험은 공감을 나누었던 순간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세상을 살았던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끈끈한 정으로 함께 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게 해주는 순간이다. (197~198) → 두 번째 칼럼의 재료로 사용한다. 죽음의 편지를 쓸 때와 비슷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지금 내가 직장 내에서 가지고 있는 관계의 문제에도 이러한 공감의 공식을 적용시켜야 하는 것일까? 나는 폭 넓은 관계보다 소수의 깊은 관계를 좋아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인 듯하다.

 

진정한 용기는 자신을 숨김없이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실체론 옹호자들은 말한다. 용기는 자신의 삶의 가장 본질적인 세부 사항까지 상대방의 손에 맡길 의향이 있다는 말이다. (198) → 글쎄 나는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 할 수 없다. 이 말은 곧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알맹이 까지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인데, 나만의 고유한 영역, 나만의 여백이 있어야 그곳에서 내가 존재하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긴다. 사부님께서도 언젠가 '사랑하는 것을 아끼는 법'이라는 제목의 글에 "자기경영은 사랑하는 것을 가슴의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아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물을 가진 것을 떠드는 사람은 위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식이 소중하면 그 자식을 개똥이라고 부르며, 진짜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마음 속에 간직해 두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자유의 진정한 토대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다. 자유는 함께 나누는 깊은 경험이다. 서로를 믿고 마음을 열고 같이 누리고 번창하려 애쓰는 투지를 공유할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진다. 그때 신뢰는 공감의식이 확장될 가능성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 보다 허물없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199)

 

자유의 실체적 관념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개인으로 만들어 주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200)

 

심리학자들은 강인한 척하면서 개인적 권리를 극단적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보통 감정이 메마르고 동정심이 없는 편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종종 스스로 만든 강인함 때문에 두려워하고, 그래서 마초적 페르소나로 그 두려움을 감춘다. (200) → 아! 바로 내가 이런 사람은 아니던가? 회사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페르소나가 바로 이게 아닌가. '강인한 척 하면서 개인적 권리를 극단적으로 내세우는 사람' 이 말이 메아리처럼 계속 귓가에 울린다.

 

자신의 취약함과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취약함과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 (200) → 스스로 불완전 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게 나는 '용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용기가 발현되는 순간 나를 가로 막는 거대한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곤 한다. 어차피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니깐.

 

실체적 철학자들은 평등을 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정의한다. 그들은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공감적 확장을 커다란 수평기구, 즉 사람들을 '' '그것'으로 가라 놓는 수많은 형태의 신분과 구별을 무너뜨리는 힘으로 본다. (201)

 

확장된 공감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평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유일한 인간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할 때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고군분투를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하는 바로 그런 행동이 평등의식의 궁극적 표현이다. (201)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내 것' '네 것'이 없고 오직 '' ''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201) '신화에 힘'에서 조셉 캠벨이 이야기하는 인디언의 정서, '그것'이 아닌 '그대'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맥락의 의미가 아닐지. 칼릴지브란의 'I and Thou'를 참조하도록 한다.

 

평등의 느낌을 드러낼 때 그것은 법적 권리나 경제적 수준의 평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유하며 유한한 존재이며 잘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202)

 

공감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과정은 개인 각자가 고유한 존재이며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공감은 다른 사람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자신의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것은 그들의 실존적 고통과 유한성의 나약함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 (204)

 

공감할 줄 몰라 경험을 제한 받는 사람의 인생은 그만큼 충만하지 못하다. 인생을 구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단단히 묶여 산다는 것이다. 뚝 떨어진 혼자만의 삶은 그만큼 부족한 삶일 수 밖에 없다. (207) → 직장생활에서의 관계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그리고 따갑게 찌르는 말이기도 하다. 정말로 내 삶은 부족한 삶인가?

 

공감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초월한다. 실체적 경험이 현세 적 성격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허약함을 인정하고 삶을 최대한 누림으로써 초월한다. 완벽함에 대한 충동은 물러나고 자아실현에 대한 탐구가 들어선다.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최대화 하려 한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썼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칭송하는 자, 삶을 넓힌다." 프리드리히 헤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근본적인 존재로서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 탄생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다."라고 상기시킨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삶을 긍정한다. (210)

 

완벽한 존재에 공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위로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은 그들의 살아 있는 존재를 긍정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유대감을 공유할 대 살아 있다는 느낌도 강렬해진다. 공감하며 받아들일 때 살아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가? (210)

 

성숙한 공감은 살아 있고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만이 겪을 수 있는 현상이다. (210)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겁니다.' - 조셉 캠벨

 

공감의식이 번창하는 곳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세속적인 구원이나 현세의 유토피아를 추구할 때 생기는 죄책감도 수그러든다. 탈물질주의 세대의 젊은이 들이 공감적 성향이 강해지고 보다 영적이 되면서 오히려 종교적 성향은 약해지고 그 밖의 현세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비전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도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다. (211)

 

신앙이라는 개념을 해체하면 그 핵심에 세 개의 기본적인 기둥을 보게 된다. 경외감, 신뢰, 초월이다. (212)

 

결국 신앙은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다. (212)

 

신앙은 삶의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 덕택에 인간은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 신앙은 살게 만드는 힘이다. 무언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전혀 사는 것이 아니다. (213)

 

존재의 의미를 믿는 것만이 아니라 경외감을 지키려면 실체적 경험을 쌓고 공감의식을 키울 수 있는 교육환경이 있어야 한다. (214)

 

경외감은 인간의 모든 상상력에다 불을 지핀다. 경외감이 없으면 놀랄 일도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우리 자신의 삶인 '것처럼' 상상할 수도 없다. 공감은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상력은 경이 없이 불가능 하고, 경이는 경외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감은 경외심의 가장 깊은 표현이며, 당연히 인간의 가장 영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공감은 또한 신뢰를 필요로 한다. 신뢰는 우주적 차원과 우리 동료 인간들과의 일상적 차원 양쪽에서 존재의 신비에 스스로 굴복하는 의지이다. (214)

 

중요한 것은 이성이 경험과 떨어져 존재하는 비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을 이해하고 다루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216)

 

경험은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서 나오는 감각과 느낌으로 시작하여 이성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감정으로 묶이고 그런 다음 다시 한번 이성의 힘을 빌려 목적을 가진 행동적 반응으로 변화한다. (216)

 

공감은 우리의 신체성을 넘어 거대한 타자와 함께 한다는 목표를 지향하는 구조적 방법을 통해 마음과 느낌과 감정과 이성을 하나로 묶어준다. (216)

 

칸트가 대부분의 종교적 경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선한 행동에서 이기적 측면을 제거했다고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느낌'의 경험까지 제거해 버리고 말았다. (219)

 

인간 의식의 세 단계, 즉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초기 심리학적 단계라는 주류 정통사상에서 도덕적 권위는 몸의 경험을 타락하거나 불합리하거나 병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권위였다. (220)

 

존재와 당위의 간극, 즉 인간 행동의 실제 모습과 마땅히 해야 할 행동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221)

 

공감의식은 존재와 당위의 간극을 극복한다. 공감적 행동은 실체적이고 경외감으로 차 있으며 이성에 호소한다. 공감의식은 설명적이면서도 동시에 규정적이다. 실제의 모습과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 사이에 어떤 구분이 없다. 그 둘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221)

 

공감은 직접 느끼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의 비약적인 경험이다. (221)

 

인간이 선한 것은 처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명령이나 약속에 의해 도덕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곤경을 나의 곤경으로 느낌으로써 도덕적 행동을 실체화 한다.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고, 따라서 실체적 경험 속에서 도덕적으로 적절하게 되는 것이다. (222)

 

그 어느 때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엔트로피의 족쇄에서 벗어나 지구라는 별에서 우리와 더불어 사는 생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새롭고 보다 확고한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223)

 

인류 앞에 놓인 임무는 부담스러우리만치 막중하다. 처음으로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 자신의 역사에 도전해야 하고, 에너지를 덜 소비하면서 새롭고 보다 상호의존적인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공감을 계속 성장시키고 글로벌 의식을 확장시켜 가는 길 뿐이다. (223)

 

지난 세월의 인간의 의식을 재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의식의 향방을 재정립 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생존이 문제가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공감의식의 역사적 진화과정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문제에 계속 무심해도 좋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224)

 

 

2부 공감과 문명

6. 고대 신학적 사고와 가부장적 경제

커뮤니케이션 제도 역시 인간의 의식을 바꾼다. 구두문화는 신화적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경전문화는 신학적 의식을 낳고, 인쇄문화는 이데올로기적 의식을 수반한다. 반면에 1세대 중앙집중식 전기문화는 심리학적 의식을 만개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228)

 

의식의 각 단계들은 또한 '우리' '타인'의 경계선을 긋는다. 벽 저편은 인간이 사는 땅이 아니라 낯선 존재들의 거주지이다. 신화적 인간에게 낯선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나 괴물이다. 신학적 인간에게 그들은 이교도이며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이데올로기적 인간에게 그들은 야만인이다. 심리학적 인간에게 그들은 병자이다. (229)

 

대화를 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몰두할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나의 정체성도 더욱 확실해 진다. (231)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은 평화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 제롬 브루너 (232)

 

자의식은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스토리로 다른 사람을 고유한 개인으로 경험하고 공통의 정서적 기반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233) → 패러다임과 비슷한 의미인 듯하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의 핵심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어떤 정서적 반응의 표현이 담겨 있다. (중략) 이야기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을 연결하고 통합해 주는 수단이자,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인생사를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수단이다. 그것은 인생을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인생을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234)

 

함무라비 법전은 소규모로나마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적 자아를 독립된 존재로서 인정했다. (244)

 

예전에는 주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씨족이나 가까운 친척끼리만 가능했던 공감 충동이 갑자기 새로운 기회와 과제로 주어졌다. 닮지 않은 남에게서 닮은 점을 찾다 보니 공감적 표현이 깊어지고, 처음으로 혈연 관계를 뛰어넘어 공감을 보편화할 수 있게 되었다. (246)

 

신화적 의식에서 신학적 의식으로, 다시 일신교로 이어지는 전환은 인간 여정의 생산적 전환점이었다. 우주론은 인간적인 성격을 띠면서 세계의 거대한 계획 속에서 인간 자신만의 고유한 입지를 새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253)

 

청각은 참여적인 경험이다. 청각은 사람을 섬긴다. 우리는 소리에 빠진다. 이에 비해 시각은 친밀감이 가장 떨어지는 가장 추상적인 감각이다. 시각은 고립시키고 분해한다. 월터 웅에 따르면 "전형적인 시각 관념은 판명과 분석이다. 반대로 청각적 관념은 조화와 종합이다." (225)

 

언어로 감정을 묘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경험을 나누는 능력은 공감적 표현을 배가하고 심화시킨다. 느낌을 나타내는 어휘의 뉘앙스가 풍부할수록 상황이 깊은 의미를 더 잘 전달하고 그에 상응하는 감정적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그만큼 공감 충동과 반응을 불러일으키기가 어렵다. (258)

 

잘된 글을 대하면 가공의 인물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 것보다 더 실감이 나는 경우가 많다. (258)

 

상투적인 말은 그래서 고유한 상황의 핵심을 뚫지 못하고 따라서 진행되는 상황을 적절히 묘사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문자언어는 상투적 상호작용이라는 굴레를 벗겨 준다. 모든 문장은 상황의 특수성을 전달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조합된다. 커뮤니케이션은 개성적이 된다. (258)

 

일반화된 진부한 표현으로 깊이 있는 관계를 건드리지 못하는 상투적 구두 문화와 달리, 문자 문화는 글에서나 사교적 대화에서나 언어를 개성화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를 성장시킨다. 커뮤니케이션이 개성화되고 표현적이 될수록 공감도 더욱 확장되고 보편화되기 때문에, 공감적 감수성의 진화 과정에서 문자 문화의 탄생은 하나의 분수령이 된다. (259)

 

자기 분석적 사고와 범주적 사고는 문헌적 사고라고 월터 옹 교수는 지적한다. 글을 읽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글을 읽을 때는 대화에서 빠져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읽는다. 글을 읽을 때는 구두문화 같은 친밀한 참여적 특징을 살릴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생각을 혼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글을 읽을 때는 성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다는것은 혼자서 대화이 의미를 내면화 하는 것이다. (260)

 

쓴다는 것은 아는 쪽과 알려지는 쪽을 분리하여 더욱더 분명히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과 완전히 구별되는 외부의 객관적 세계뿐만 아니라 객관적 세계와 대립되는 내면의 자아에 대해서도 영혼을 개방하는 행위이다. (261)

 

역사라는 개념은 인간 의식의 갈래를 드러내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실제로 역사적 인식에는 여러 면에서 신학적 의식에서 드러나지 않은 언외의 의미가 담겨 있다. 신화적 의식에서 과거는 연대기적 시간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존재하고, 또 각각의 신화는 늘 현재형이고 영원히 순환적이지만, 이와 달리 역사적 인식은 '옛날 옛적에' 식으로 모든 사건과 개인의 이야기가 고유하고 유한하며 반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분명히 드러냈다. 역사적 인식은 개인의 삶과 시대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수준을 한 단계 높인다. 과거, 현재, 미래로 고유한 개인이 역사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은 자아의 발달을 암시하는 뚜렷한 징표이다. (263)

 

하나의 자아가 등장하게 되는 것은 고유하고 반복될 수 없는 개인사를 스스로 이해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신화적 문화에서 사람들은 끝없는 현재에 살며, 그 현재에는 개인의 역사도 존재하지 않고, 생활도 탄생, 죽음, 재탄생이라는 비좁은 시간적 주기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인류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가 말하는 영원한 회귀이다. (263)

 

자아와 개인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진행한다. 둘 다 어느 한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역사적 인식과 개인사로 비약적인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공감 충동의 출현도 앞당겼다. 공감적 고통이 공감의 표현으로 바뀌려면 자신이 고유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의식, 즉 개인의 역사가 있어야 하며 아울러 다른 사람도 고유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의식도 있어야 한다. (263)

 

역사의식이 개인의 삶을 고유하고 특별한 것으로 인식하는 보다 분화된 자아를 강조한다면, 모든 존재를 관장하는 보편적 유일신이라는 개념은 한층 더 개인을 집단에서 분리시켜 준다. (264)

 

차축시대 (카를 야스퍼스가 만든 용어로 기원전 800~200년에 고대 중국과 인도와 그리스 등 세계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의식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는 공감의식이 싹트는 시기였다. 이들 새로운 메시지는 예외 없이 사회적 동요라는 산고를 치렀다. (269)

 

하지만 삶에서 너무 등을 돌리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공감의 범위를 넓히기도 어렵다. (274)

 

붓다의 참선수행은 네 단계로 진행되었다.

모든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겪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서 '동정적 환희'를 경험하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두루 동정을 베풀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후 다른 존재를 향한 평정심을 경험하는, 보편적이고 사심이 없는 동정의 단계이다. (275)

 

붓다는 자율적 자아라는 개념은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욕망으로 이끄는 착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정체성은 늘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깨달음의 핵심은 ''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유일한 '우리'가 수없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276) →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불우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눈물 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진 한쪽 가지가 그렇게 아파하기 때문에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메아리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로움과 안정이야 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 법정(法頂) 스님

 

7. 국제 도시 로마와 기독교의 발흥

'단체정신'은 문호적 차이에서 오는 지역 감정을 무너뜨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시민권은 개인에게로 확대된 정치적 권리였다. 제국의 시민이 되면서 씨족이나 민족에 대한 충성심은 약해졌지만, 다른 수 많은 사람들과 같은 법적 지위를 누리게 되어 개인의식은 강화 되었다. (285)

 

예수의 공감본능은 당시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원수가 될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었고 자신의 약점을 보여 주었다. (292) → 기독교와 기독교의 역사 성경을 모르든 내게 가끔 보는 성경구절을 보며 잘 이해하지 못하곤 했는데,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그리고 그 시대의 배경을 통해 바라 봄으로써 예수그리스도가 왜 서양문명과 기독교의 유일신 문화에 중심에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약함을 모든 존재를 평준화시킨다. 우리는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해 가며 살지만,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나약함을 인정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처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295)

 

영지주의자들의 예수는 하나의 완성된 인간, 자기인식을 가진 인간이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향해 공감을 갖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로 그 공감을 확대시킨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299) → 불교도에 가까운 나에게는 영지주의가 더 친근하게 와 닿는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자아를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일 뿐이다. 따라서 각자의 신을 찾아내는 열쇠는 성찰을 통해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일레인 페인절스에 따르면, 영지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변화된 의식', 즉 깨달음이다. (300) → 불교의 깨달음과 너무나 흡사하다.

 

예수의 삶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동정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영감을 주었다. (301)

 

중요한 것은 그런 반성이 완전히 성숙한 개인의식의 개발과 공감의 확대로 이어지는 자기탐구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인간 의식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312)

 

로마의 유일한 에너지 체계가 고갈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문명에도 하나의 경고가 되는 대목이다. 우리도 산업사회를 지탱해 주는 값싼 화석연료가 소진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315) →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 내가 있는 곳 반대편에 인간을 위해 엄청난 양의 산소를 만들어 주는 아마존의 밀림이 계속 베어지고 있다.

 

인간의식의 변화는 공감의 물결을 증폭시키고 엔트로피 증가로 인한 피해를 증가시키면서 이 둘의 변증법을 전개해 나아간다. 그런 변증법 속에서 공감의 물결은 그 사회를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최고조에 이를 때 정상에 이르지만, 결국 에너지의 흐름은 감소되고 엔트로피에 의한 결손이 커지면서 공감의 물결은 잦아들고 만다. 겉으로 드러난 엔트로피가 그 사회의 인프라를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의 수치를 초과하게 될 때 그 문명은 쇠퇴하거나 사멸하고 만다. 경제 조건이 악화되고 정치가 불안해지고 절망적 분위기가 만연하면서, 공감의 장점은 둔화되거나 심지어는 단점으로 변한다. 결국 사회적 신뢰는 느슨해지고, 개인은 정서적 관심을 보다 작은 집단으로 되돌린다. (319)

 

공감의 물결과 엔트로피의 피해를 두고 전개되는 작용과 반작용은 몰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변치 않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잔재이다. 그리고 그 의식은 비록 미약하나마 한 걸음 진보하여 새로운 에너지-커뮤니케이션 제도가 출현할 때 부여잡을 수 있는 기억의 생명줄이 된다. (319)

 

8. 중세 말의 연()산업혁명과 휴머니즘의 탄생

중세 말의 공감의 물결은 농업기술을 혁신하고 생물학적, 무생물학적 에너지를 새로 이용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324)

 

자신의 느낌과 의도와 생각이 하나님의 계명과 성서에 부합되는지 알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 보고 자신의 의식적 존재의 깊이를 헤아려야 하는 것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결과였다. (330)

 

하나님 앞에 홀로 서라는 주문은 개인의 위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과 사연에 관심이 있으며, 가장 비천한 존재도 교황만큼이나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330)

원작자라는 개념은 개인을 고유한 지위로 격상시켜 공동체의 집단적 목소리에 따로 분류되었다. 원작자는 창조력을 가진 인물로서의 개인을 의미했다. 개인이 창조성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개념이었다. (중략) 개인의 창조성은 시적 영감으로 고무될 때에도 내면에서 오는 것이었다. 개인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은 자아가 숙성된 문화에서만 심리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 (332~333) →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이 별 어려움 없고, 당연한 일이라 여겼는데, 이런 당연한 현상조차 역사적 배경과 흐름을 가지는구나 라는 생각게 마음이 경건해졌다.

 

원작자라는 관념은 자기만이 언어를 가능하게 했다. 저작권법은 사람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상품화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과 언어가 있고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들을 때는 돈을 내야 했다. 인간관계의 역사에서 대단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334) → 내가 평생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작가'의 역사적 원류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인쇄 혁명은 보다 명상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혼자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의미의 프라이버시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자기반성과 성찰이라는 개념은 결국 자신과 세상을 생각하는 치유의 방법을 만들어냈다. (334)

 

활자화된 생각이나 이야기는 고정적이다. 책은 자신의 공간에서는 자율성을 갖고 있으며,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엄격하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책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이야기이고, 앞 표지와 뒷 표지로 묶여 있다. (334) → 책은 시작과 맺음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인쇄된 종이가 최종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일단 인쇄되어 대량으로 찍히면,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 인쇄된 본문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335)

 

인쇄된 문헌은 자율성과 불가침을 지닌다. 커뮤니케이션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쇄지향적 환경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성장하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읽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경험이고 대단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누가 끼어들면 집중력이 흩어진다. 읽을 때는 시간 가는 줄도,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를 만큼 몰입하게 된다. 읽을 때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 파묻힌다. 글을 읽는 경험은 그 자체로 폐쇄적이고 제한적이다. (335)

 

미국의 역사학자 아이젠슈타인은 읽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듣는 문화보다 더 원자적이고 개인적이라고 말한다. "사회를 개별적 단위의 묶음으로 보거나 개인이 사회집단에 선행한다고 여기는 생각은 듣는 사회보다 읽는 사회에 더 어울린다." (335) → 나는 어떤 사회에 어울리는가? 나는 읽는 사회에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다.

 

인쇄 커뮤니케이션은 오래된 공동체의 결속을 해체시키는 대가를 치르며 개인의 의식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보다 광범위한 시간과 공간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종류의 제휴와 관계 속에서 개인을 이어 주는 효과도 있었다. 인쇄는 유럽과 미국, 그 밖의 지역에서 새롭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도시 상업 문화의 '에너지 처리량'을 관리하는 중요한 지휘통제 메커니즘이 되었다. (336)

 

우선 새로운 인쇄매체는 지식을 체계화 하는 방법을 다시 정의하게 했다. (중략) 인쇄 매체의 등장으로 보다 이성적이고 빈틈없고 분석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다루는 것이 가능해졌다. 인쇄가 목차, 쪽매김, 각주, 찾아보기로 인간의 기억력을 대신하면서 더 이상 미래를 짐작하기 위해 과거를 더듬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인간의 진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열어 주었다. (336)

 

인쇄는 현상을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사고의 방법은 선적이고 순차적이고 인과적이 된다. 사고를 '구성'하면 생각은 주도면밀 하게 선적으로 전개되어, 하나의 생각에 다른 생각이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뒤를 잇는다. 군더더기가 많고 생각이 자꾸 끊어지는 구두문화의 사고와는 다른 유형의 사고이다. 구두언어의 군더더기를 없애고 정확한 측량과 묘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쇄는 근대 과학적 세계관에 기초를 놓았다. 정밀하게 현상을 조사하고 관찰하고 묘사 할 수 있었고, 정확한 기준과 계획 아래 실험을 반복할 수 있었다. 이 모두가 필사문화와 구두문화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성과였다. (중략) 인쇄는 세상을 살아가는 '부지런한' 방법에 대한 적절한 마음가짐과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337)

 

회의적 관용은 그 시대의 질서가 되었다. (339)

 

몽테뉴는 말 그대로 진정한 인간이었다. (중략) 몽테뉴는 자신이 인간이고 그래서 완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341) '진정한 인간'이라는 말에 저자의 각별한 대우가 묻어난다. 아마도 몽테뉴가 인문주의적 정신을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장절에 그 이유가 드러난다.

 

모든 인간의 경험과 몸과 정신과 영혼의 불가분성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중략) 그러나 몽테뉴는 금욕적 삶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육체를 혐오하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을 사랑하기가 힘들다. 몸으로 겪는 실체적 경험은 공감의 표현을 향해 열린 창이다. 다른 사람의 곤경과 고투를 경험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어려움인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 그들이 보다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다가가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보다 더 충만해지고 보다 더 인간적이 되고 더 깊은 실재와 연관을 갖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만물의 원대한 설계 속에서 우리가 처한 곳을 알게 된다. 공감은 전적으로 육체성을 입은 채 노래하는 삶의 예찬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감은 또한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수단이다. 몽테뉴는 그 점을 알고 있었다. (343)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와 마주했다. "나는 누구인가?"는 공개적 토론의 주제일 뿐 아니라 개인이 자신과 나누는 내면의 대화가 되었다. (343)

 

진실성은 중요한 것이지만 상황이나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페르소나를 바꾸게 되면 생각이 수월해지고 공감의 폭도 넓어지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외적인 가면은 진정한 자아를 속이거나 숨기는 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덕분에 다른 페르소나를 써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고 평상시 만나기 힘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346)

 

다른 사람이 될 자유가 생기면 다른 사람의 곤경을 자신의 것처럼 경험하고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주의적 행동의 의미이며, 그런 개방적인 태도를 통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환경과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역할에 편하게 적응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하고 더 많은 경험을 통해 폭 넓은 생각을 갖고 새롭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정체성도 풍부해진다. 그때는 속이는 것이 아니라 초연해진다. (346)

 

자의식적이 된다는 것은 분리 개념을 안다는 뜻이다. (347)

 

사적인 공간이 구분되면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개인성과 자율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사생활이라는 관념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자율적 개인을 검증해 주는 보증서가 되어갔다. 사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을 의미했다 사생활은 인간의 경험이 시작된 이래로 지배적인 사회단위였던 대가족 관계와 대립되는 개인생활이란 개념에 주어진 새로운 우선권의 징표였다. → 신화의 힘에서 읽었던 '성소(聖所)'가 떠올랐다.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 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신화의 힘 179p) 나의 성소는 어디인가? 매일 새벽활동을 하고 있는 작은방 책상, 그리고 출근 후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사무실 책상, 매주 일요일 걷는 새벽의 중랑천 순례길이다.

 

결혼에 관한 새로운 규범은 인간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애정과 우애를 바탕으로 하는 결혼에 대한 기대는 사회적 관계의 본질을 바꾸는 공감의 물결에 토대를 제공했다. 사랑하고 배려해 주는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공감하는 상대가 된다는 말이다. 공감을 하지 않고는 애정과 배려를 즐길 수 없다. (356)

 

교육의 첫 째 목적은 아이에게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고, 둘째는 아이가 자신감을 갖도록 해 주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을 넓힐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칭찬이다. (362)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칭찬은 한 인간의 가능성의 지평을 넓게 확장시켜주는 아름다운 가치다. 물론 칭찬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상대로부터의 긍정적 피드백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능성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소통의 방식이다. 저자는 이 점을 공감과 연결하여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생산이 자본에 예속되고 자본가와 생산자 사이의 이런 계급적 관계가 나타나는 현상은 구식 생산과 신식 생산 사이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66)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영토를 바탕으로 한 민족국가의 출현은 예전에 제 각각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국가가 운영하는 시장에 적응시키는 것만큼이나 여러 모로 중요한 부수 효과를 낳았다. 민족주의는 국가 자체의 새로이 확대된 국경만큼이나 공감 충동을 확대시켰다. (367)

 

근대의 모든 민족국가는 남녀 영웅이 등장하는 기원 신화를 만들고, 과거의 역경과 시련의 순간을 기념하는 의례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369) '신화의 힘'에 나왔던 '의례'의 힘은 공동의 정체성과, 공동의 운명의식을 심어줄 수가 있다. 그래서 근대 민족국가가 신화를 만드는 일에 천착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가 그렇게도 자신들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의 역사를 왜곡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민족국가는 결함도 많았지만 공감의 감수성을 크게 확장할 수 있는 온실이 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역사와 운명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같은' 시민들은, 애국심이 요구되는 순간이면 언제든지 '우리' '저들'을 가르는 선을 분명히 긋고 국경 안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공감을 크게 확장시켰다. (376) → 세계적인 공감은 아니다. 국가라는 울타리에 한정된 공감이다.

 

자서전, 신화, 소설 등을 살펴보면 근세 초의 변화하는 자아의 개념과 인간의식의 발달의 단서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인 지암비티스타 비코는 1728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인간의 본성은 신이나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어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삶과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꾸준한 진화 과정이라고 말했다. (378)

 

자서전에서 비코는 과거를 이해하고 인간 여정의 드라마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에 앞서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밝히려 애쓴 위대한 사상가의 영혼을 들여다 보는 것이라고 썼다. (378) → 스승이 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며,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에서 효과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이미 변화, 즉 깨달음을 이룬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그를 모델링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한 바 있다.

 

인생의 모든 면면은 현실에서나 기억 속에서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는 상황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379)

 

에드워드 기번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개인사도 하나로 모으면 결국 우리 인간의 집단의 역사가 된다. 비코처럼 기번도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개념을 싫어했고, 오히려 역사는 꾸준히 변하는 환경적 조건과 사회적 맥락에서 교차하는 우연한 만남, 우연한 환경, 그리고 개인의 특이성이 모여 만들어진 개인적 사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전적 의미로나 집단적, 역사적 의미로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며 살아간다. 인간의 개인의 스토리와 장대한 우주론적 신화를 만들고, 각자는 인간 역사 그 자체인 진화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주고 받는다. (379) → 이런 관점이 개인의 스토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계기로 개인은 더욱 더 자신의 삶과 스토리 내면 탐색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사부님의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에 나온 글귀가 떠올랐다.

 

루소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적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희망에서 자신의 영혼을 독자들에게 여과없이 보여주려 했다. 하나님에 대한 루소의 입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본래적 자아'에 충실하고, 또 본질적으로 자신이 궁극적으로 선하다고 믿었기 대문에, 그는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그런대로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고, 또 늘 그렇게 믿어 왔다." (380) → 수희향 누나가 예전에 사부님께서 칼럼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드러내지 않은 글은 완전한 글이 아니다. 세상과 너 사이에 글을 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이야기는 사장되고 만다. 세상의 네 이야기를 내 보이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 이런 뉘앙스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 또한 단군 프로젝트의 200일차가 되면서 단군일지를 일기와 같은 형식으로 작성한 바 있다. 그렇게 내면에 갇혀있던 나의 스토리를 외부에 드러냄으로써 어떤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아마도 나의 그런 내 활동이 루소의 그것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루소는 오직 근대라는 시대적 분위기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자아에 몰입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381)

 

루소는 <고백록>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털어 놓는다.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것이다." (381)

 

사해동포주의적인 세계관과 보편적 공감의 감수성을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몸으로 직접 구현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괴테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괴테의 사상은 대상관계이론가와 정신과의사, 애착이론가뿐 아니라 인식적 심리학 연구에서 선두를 달리는 실체적 경험철학자들의 이론과도 썩 잘 어울린다. 200여 년 전 괴테가 가졌던 세계관과 자연과 인간의식의 궤적에 대한 견해는 21세기의 매우 국제화된 세상을 사는 요즘의 밀레니엄 세대의 견해와 비교해도 스케일과 깊이에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가히 '초시대적인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385) →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저자가 스승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적어도 '공감의식'이라는 테마에 관해서는 괴테가 저자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시대적인 인물'이라는 표현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준 한 특정인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괴테는 자연에서든 사회에서든 한 사람의 개별성은 그를 둘러싼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우리 각자는 고유한 개인이지만, 그 고유성을 자율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 우리 주변을 채워 주는 특정한 관계와 만남을 통해 삶을 꾸려 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자연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질긴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자연을 우리 존재 속에 받아들이고 또 자연을 되돌려 준다. "우리는 자연의 품에 안겨있다. 자연을 벗어날 수도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없다." (386)

 

괴테는 모든 피조물이 고유하면서도 하나의 통일체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에 전율했다. "자연이 창조한 모든 것 하나하나가 자신의 개성을 갖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이다." (386) → 바로 내가 두 번째 칼럼에 쓰고 싶었던 메시지가 여기에 찾아와 주었다. 276페이지에서 인용했던 법정스님의 글이 여기에 더 어울린다.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불우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눈물 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진 한쪽 가지가 그렇게 아파하기 때문에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메아리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로움과 안정이야 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 법정(法頂) 스님

 

괴테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자연을 보았다. 자연은 항상 변하고 진화하며 새로운 형태와 현실을 만들어 낸다. 괴테가 경외감을 느낀 것은 자연의 불변성이 아니라 자연의 진기함이었다. 괴테의 자연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다. 자연은 창조의 원동력이었다. 생명은 신체적, 생물학적 규범에 제한을 받지만, 자동인형처럼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자유를 행사한다. 괴테는 자신이 아는 자연을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불변을 싫어하고 정체된 모든 것을 저주한다. (중략) 자연은 무()로부터 모든 것을 만들지만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저 흘러가게 할뿐이다. 하지만 자연은 경로를 알고 있다." (386) '변화'라는 화두를 평생의 천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고무적인 메시지는 없을 것 같다. 저자가 괴테는 초시대적 인물이라고 극찬한 것에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괴테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인간에게는 특별히 삶을 음미할 수 있는 고양된 의식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청지기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도 그런 맥락에서 보았다. 자연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판단을 보류한 채 자신의 삶을 꾸려갔다. 그가 아는 자연은 타락하고 더럽혀진 대상이거나 실용적이고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상호성이 지배하는 살아 숨쉬는 공동체였다. 인간은 자연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보다 큰 전체와 연결된다. (387)

 

관계를 심화시키려면 다른 존재의 고유한 개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울러 다른 존재가 우리를 어떻게 경험하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 다른 존재의 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387)

 

"다른 사람들은 그네들의 입장에서 세상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섰을 때 우리를 가장 잘 대해 주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우리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조심스레 관찰했다. 수많은 거울 속의 나를 보듯 다른 사람을 통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 자신과 나의 내면을 좀 더 분명하게 보고 싶어서 말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387)

 

괴테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은 곧 상호적 과정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상호적 과정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봄으로써, 인간적 존재의 특정한 방식을 이해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런 지속적인 공감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알고 자아를 형성하며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세계를 형성하도록 돕는다. 성찰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찰은 자연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는 더 깊은 현실에 닿으려는 더 큰 목표를 향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괴테는 초월이 아닌 퇴행으로 귀결되는 자아도취적 명상을 혐오했다. 그는 온몸으로 세상에 뛰어들기로 작정하고 이렇게 썼다. "그러나 세상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래서 세상에 '말을 거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인이다." (388) → 주옥 같은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홀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성찰은 이기적 퇴행이다. 온 몸으로 세상에 부딪히고 세상에 뛰어 들어라. 아…… 이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떠올랐다.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온 마음으로 참여하라는 캠벨의 말도 생각났다. 내면의 방한 구석에서 앉아 쉽게 인생을 이야기하려 하지 말 것. 과감하게 이 세상의 일에 참여하라는 천둥 같은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아……

 

괴테는 자신의 삶과 그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인간은 함께 할 경우에만 진정한 인간이며, 유일한 개인이라도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388) → 칼럼의 또 다른 인용문 후보다. 인간은 함께 할 경우에만 진정한 인간이다. 함께 하기 위해 세상에 나가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디를 가나 내게 온통 '용기'가 필요하다는 표지가 보인다.

 

괴테를 통해 우리는 사회뿐 아니라 모든 자연까지 포함하는 실체적 경험에 담겨있는 공감적 충동이 세속화되는 과정을 본다. 공감에 대한 그의 의견은 실로 우주적이다. (388) '공감'에 관하여 괴테가 저자의 스승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에리히 칼러가 지적한 대로 신화의 역사는 "내면화 과정"이며 "이야기되는 내용을 점차 현실화하여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는 과정이다." (388)

 

에리히 칼러는 교과서적인 분석보다 "신화가 상징적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정 스토리의 줄거리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이 사는 시대와 다른 시대를 비교해 보고, 그에 따른 정서적 반응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390)

 

9. 근대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사고

근대의 중요한 의문은 느낌과 생각,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가 하는 문제였다. 이 두 가지 양식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가?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좋은 의식수단인가? 어떤 정신활동은 '영혼'으로 통하는 진정한 창이고 어떤 것은 보조 수단에 불과한 열등한 개념이나 방해물인가? 이데올로기적 시대는 결국 이 두 가지 경쟁적 개념이 갈등을 빚은 시기였다. (398)

 

감정을 공공연하게 분출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중요한 문제였다. 사교에서 그런 감정이 정당화되었기에, 사람들은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 맞추어 행동했다. 그들은 자신의 기분을 알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탐구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기분에도 관심을 가졌다. 결과는 다름 아닌 의미심장한 공감의 물결이었다. (402)

 

오스틴의 소설은 이성과 감성, 지성과 느낌의 적절한 균형에 관한 이야기였다. 균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의식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한 지붕 밑에서 지내야 할 두 가지 실체가 분명해졌다. 첫째는 합리적인 계산이었다. 합리성은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방법으로 추측하면서, 이제 막 대두되는 산업적 방식의 삶을 꾸려 가는 데 필요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둘째는 감정적 충일이었다. 감정을 갈수록 차별화되고 개인화되어 가는 사람들의 공감적 닫집을 문화적 테두리의 외벽까지 확대해 덮어 주면서 결국 새로운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냈다. (404) '닫집'이란 말이 '집단'의 오타인 줄 알았는데 혹시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란 명사였다.

 

중세 말에 있었던 거울의 대량생산은 분명 자아를 의식하는 개인이 등장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412)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보다 넓은 땅에서 마음 놓고 숨통 트고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신세계'를 향해 떠났다.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는 철도와 증기선은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경제를 창안해 냈다. (419)

 

낭만주의는 사실상 이성의 시대를 지배했던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운동이었다. (중략) 낭만주의는 세계를 유기적 관계에서 바라보았고, 인간은 천성적으로 인정이 많고 사회적이라고 믿었으며, 진보란 상상력을 풀어 헤치고 자기만족과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는 인간의 창조력이라고 정의한다. (424~425)

 

낭만주의 운동은 하나의 철학이자 느낌이다. 낭만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수학에서보다는 자연에서 영감을 찾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계의 삼성에 운명을 맡기는 편이었고, ()범신론자를 자처했다. 이들은 자연만물에 신성한 빛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낭만주의 우주관에서 신은 자연의 창조주라기 보다는 자연에 깃든 영혼이었다.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처럼 그들은 하나님과 자연을 하나로 보았다. (425~426)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에 깊이 스며 있는 인간의 본성을 만끽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자연을 맞아들였다. 자연은 곧 선()이며 모든 창조성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주의자들은 깊은 자연 속에서 인간을 부각시키기보다 자연에 초자연적 성격을 부여하면서 자연 자체를 부각했다. 자연을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닌, 끊임없이 스스로 초월하는 새로운 창조적 힘으로 생각했다. (426)

 

낭만주의자들의 개인주의는 종류가 달랐다. 그들에게 개인은 창조적 잠재력을 부여 받은 고유한 존재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이었다. (427)

 

기독교 신앙이 초월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열어주고 이성이 계몽철학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면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상상력이 그 역할을 맡았다. 역사 이래 처음으로 인간의 상상력이 관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는 인간 의식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현상이었다. 상상력으로 각 개인은 자연의 창조력을 활용할 수 있고 자연과 더불어 세상을 함께 창조하며 신성한 과정에 참여한다. (427)

 

자아에 대한 낭만주의적 개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대담했다. 인간의 정신이 자연에 깃든 것처럼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어 있었다. 속박되었던 인간의 상상력을 풀어 놓음으로써, 각 개인은 만물의 자연적 도식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자연적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427)

 

창조적 천재성을 한 개인의 내면에서 세상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으로 믿게 되면서, 사회는 각 개인을 신과 같은 속성을 지닌 존재로 보기 시작했고, 그들을 남다른 경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천재숭배'는 낭만주의 시대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였다. 천재숭배는 '물병자리 음모'라는 뉴에이지 운동으로, 그리고 2000년대에는 또 다시 '새로운 문화적 창조력'이라는 화두로 변신을 거듭한다. (428)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곱고 선하며 다정다감하고 사교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존재의 본래적 상태를 다시 살려 낼 수 있는가 자문했다. (429)

 

다른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공감의 낭만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능력이 없다면 공감도 있을 수 없고 지상의 초월을 위한 낭만적 탐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429)

 

낭만주의 운동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이유로 공감의식의 진화라는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위치한다. (429)

 

낭만주의자들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신성한 상호 연관성에서 우주적 통일성을 보았다. 그들의 견해는 20세기 생태학의 비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431)

 

갈라진 벽에 피어 있는 꽃

그 틈에서 널 뽑았다

여기 내 손에는 뿌리까지 통째로 들려 있구나

작은 꽃, 하지만 너의 모습 그대로를

뿌리까지 통째로 이해할 수 있다면

신과 인간도 알 수 있으련만

- 알프리드 테니슨 (431)

 

낭만주의자들은 산다는 것이 곧 성장하는 것이고, 자연의 풍요와 더 많이 동화하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을 생활환경의 배경에 더 많이 투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서로 묶어주고 그들이 가장 고귀하게 드러나는 우주의 위대한 힘과 무한한 결속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한마디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높고 더 좋고 더 풍요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각자의 모든 에너지를 묶는 것이고 우주에 깃든 신을 그 자체로 깨닫는 것이다. (432)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인간은 자연의 모든 특징을 갖춘 채 훨씬 더 크고 더 다양한 사회에 묻혀 철저히 그런 관계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자연과 떨어져 살 수 없고 서로 얽힌 수 많은 관계에 힘입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형제애와 단결에 대한 관념을 확장해야 한다. (432)

 

쇼펜하우어는 당대의 모든 주류 사상에 맞서, 도덕성의 기초는 순수이성이 아니라 동정심이며 감정과 느낌이 동정적 본능을 활성화 한다는, 당시로선 대담한 주장을 내놓았다. (436)

 

그는 '동정심'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도덕적 소질이라고 주장한다. (439)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가운데 나는 그를 직접 겪으며, 평소에 나만의 비애를 느꼈던 것처럼 그의 비애를 느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나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것처럼 그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바란다. 어떤 순간에도 고통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따라서 그 안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우리는 그의 고통을 그의 것으로 느끼고, 그것이 우리의 고통이라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 쇼펜하우어 (440)

 

이 단 한 마디로 쇼펜하우어는 공감의 과정을 분명하게 정의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빠진 것이 있다면 공감이란 용어 자체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공감적 확대와 관련된 정신적 초능력뿐 아니라, 그로부터 자연스레 유발되는 행동, 다시 말해 도덕적 요소까지 풀어낸다. (440)

 

그가 실제로 설명하는 것은 공감의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동정은 행위 요소이다. (440)

 

쇼펜하우어에게 공감에 대한 인가능력의 기원은 불가사의였지만, 그 목적론은 분명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인 것처럼 느끼고, 위로의 손길을 뻗치고,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힘을 줌으로써, 우리는 우리 모두와 다른 사람, 그리고 모든 지구 위의 생명을 이어주는 통합의 실타래를 인식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쓴다.

 

"인정과 자애와 친절과 자비에 대한 모든 호소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저의가 아니라 바로 이런 지식이다. 왜냐하면 그런 호소는 우리가 모두 하나이며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점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441)

 

그들은 감정적으로 서로의 느낌에 동조하고 서로의 곤경을 자신의 곤경인 것처럼 공감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울메이트'였다. 상대방과 함께 울어주고 달려가 그들을 돕고 그들의 승리에 기뻐하고 그들의 성공을 상대방과 함께 축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낭만적 사랑의 본질이었다. (444)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지만 단지 방향을 잘못 잡은 문명 때문에 타락했다면, 사회부터 개혁하여 사람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아이다움과 아이 같은 자연적인 선을 회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자기만의 어린 시절을 가질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449)

 

사르트르는 존재의 감정을 이렇게 정의했다. "존재의 감정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다. 그 공동의 장소는 모두의 것이자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그곳은 모두의 것이다. 그곳은 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존재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보편성이다. 그것의 진가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다. 행동을 통해 나는 일반적인 것을 고수하기 위해, 일반적이 되기 위해 나는 나의 독자성을 벗어 던진다.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만, 정확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람의 체현이다." (455~456)

 

낭만주의자들의 여정은 인간 본성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었다. 그들의 그런 본성의 핵심으로 존재의 감정을 생각했고, 그 감정을 모든 생명과 연결되고 단합된 느낌으로 정의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공감충동이었다. (456)

 

낭만주의자들은 성장하는 공감의식의 변증법적 과정을 포착하지 못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구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성숙이었다. 우리 모두는 공감적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이러한 존재의 핵심은 문명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통합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진정한 공감의식을 전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456)

 

의식의 역사로 보면 낭만주의 운동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었다. (459)

 

10. 포스트모던의 실존적 세계에 담긴 심리학적 의식

전기는 연관성만이 아니라 유기적 성장, 창조성, 시간에 따른 변화도 환기시켰다. (, field)이라는 개념은 통일된 세계를 상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했다. 거꾸로 폴 길모어는 "우주를 하나의 통일되고 유기적인 전체로 상상하는 낭만주의 이론은 전기 실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론적 모델을 제공했다."고 썼다. (466)

 

생각 자체에 한계가 없다는 생각은 20세기 초에 정신세계를 다루는 문학에서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또한 그 같은 생각은 초창기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영향을 주어 공감의 감정에 개인에게 나타나는 경로를 찾아내고 개발하도록 자극한다. 결국 공감은 그 자체의 본성으로 자신과 상대방의 경계를 조금씩 허문다. 공감을 경험하는 과정은 비물질적이면서도 물질적이다. 비물질적 사고 매체를 수단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물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467)

 

나는 오히려 두 가지 힘, 즉 기술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가 처음부터 공생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 과정에서 초보적인 심리학적 의식을 낳았고, 그것이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479)

 

치유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현실이 다른 사람의 현실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며, 자신의 현실과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현실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480)

 

개인사의 고유한 본성을 강조하고 현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관용을 길렀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기꺼이 인정하면서 사람들은 각자 인간이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고유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고유한 개인사인 그들의 특이성과 유한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더 많은 공감적 반응이 촉발되었다. (480)

 

다각적 관점은 도덕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약점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스토리가 전부 타당하다면, 도덕적으로 적적하게 행동하는 것과 생긴 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를 구별할 근거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481)

 

다각적 관점이라는 문제 제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숨 막히는 대기에 불어 닥친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었다. 공격의 선봉을 맡은 것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한다는 계몽사상을 공격하면서 세상에는 다양한 관점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료 철학자들을 향해 "지식을 적용할 때 정서적인 해석과 다양한 관점을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런 철학적 방법을 '관점주의'라고 칭하면서 1887년에 그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 했다.

 

니체는 신학자와 합리주의자들의 뒷덜미를 잡고는 '절대 영혼'이나 '순수이성'이라는 환상을 버릴 때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원근법적 시각, 즉 하나의 원근법적 '인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사물에 관해 많은 감정을 말하도록 할수록, 한 가지 사물을 관찰하는 데 더 많은 눈, 다양한 눈을 사용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우리의 '개념', 즉 우리의 '객관성'은 더욱 완벽해질 것이다. (481)

 

가세트는 니체의 말을 받아 "이런 가상의 불변하며 고유한 현실은 (중략) 존재하지 않는다. 관점만큼 많은 현실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481)

 

세잔은 미술의 오랜 전통이었던 단일 시점을 깬 최초의 인물이었다. (482)

 

조이스를 통해 독자들은 처음으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의식의 흐름이란 마음이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을 떠돌 듯, 우리가 걷거나 잠자는 순간에도 불쑥 겪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의식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누구나 복수의 시점과 복수의 현실을 경험하며, 레오플드 블룸처럼 하루 동안에도 마음 속에서는 여러 곳과 여러 시간을 오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485)

 

"제임스 조이스는 실제로 인간의식의 새로운 면을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다. 프루스트나 화이트 헤드나 아인슈타인의 세계처럼, 관찰자가 달라지고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들의 눈에 비친 조이스이 세계도 변한다." - 에드먼드 윌슨 (485)

 

제인스 조이스와 마사 누스바움은 불완전하고 곤궁해도 생활의 평범함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공감할 정서적 수단과 공통의 인간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초월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불완전함을 용납하기 힘든 것으로,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폄하했다. 조이스는 이를 비판했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을 만나도 마법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486) → 조셉 캠벨이 조이스를 스승이라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서로에게 공감할 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상대방의 일상적 투쟁을 인정하고 좀 더 잘 살아 보려 애를 쓰고 자신을 초월하려는 서로의 욕구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을 괴롭히는 악마는 결함과 불완전성과 씨름할 때도 우리는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고지를 향해 오르려 안간 힘을 쓰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약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관용으로 감싼다. 이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무수히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조이스의 등장인물들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현실 속의 사람들이고 모순으로 가득 찬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애틋한 감상 따위가 없어도 그들과 공감할 수 있다. (486~487)

 

심리학적 의식의 여명기인 1890년대에 이미 '착한 성격'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했고, 그 보다는 '개성'을 가꾸는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492) →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여는 법이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이다.

 

개성이 있다는 것은 카리스마가 있고 여럿 가운데 돋보이며 관심의 중심에 선다는 뜻이었다. (493)

 

착한 성격이 멋진 개성으로 바뀌는 과정에는 또 다른 (공감의식 상승 기여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감정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494)

 

호감을 받는 것이 존재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실존적 외로움과 애정이나 우정에 대한 갈망을 보고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한층 더 쉬운 일이 되었다. (494)

 

정체성에 대한 윌리엄 제임스의 견해는 복수 시점을 강조한 미술의 관념과 복수 역할을 선호한 개성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를 아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사회적 자아가 있다."라고 썼다. (498)

 

자존감 = 성공/허세

제임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분자가 늘어나는 것보다는 분모가 줄어들어 분수가 커지는 쪽이 좋다. 허세를 포기하는 것은 허세를 만족시키는 것만큼이나 다행스러운 축복이다. (499)

 

개인적 정체성은 실제로 개인사를 구성하는 관계적 경험의 복합체라고 제임스는 말한다. (499)

 

전문적인 학술분야가 보통 사람들의 정체성까지 바꾸는 차원으로 나아가려면 비범한 스토리텔러가 있어야 했다. (중략) 프로이트는 문자 그대로 인간의 역사를 통째로 다시 썼다. (500)

 

태어나는 순간 죽을 때까지, 관계는 우리 생존의 핵심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면서 관계를 시작하고,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504)

 

결국 재활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힘은 회복 중인 사람과 중독자가 함께 참여하여 공감을 나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505)

 

오히려 모레노는 공감이야 말로 의식을 가진 책임 있는 인간을 만드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식은 '창의적 기능'을 촉발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의 창의적 기능은 '자기계발'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공감의 폭과 깊이가 클수록 자아개발은 더욱 탄력을 받는다. (507)

 

모레노는 정서적 잠재력을 긍정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사이코드라마는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특히 강조했다. 그런 요소가 일시적으로나마 서로의 마음을 이어 주고 현실을 초월하게 해 주어 해묵은 갈등을 해소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507) → 이런 우연이 있을까? 레이스 2주차인 2 23~24일에 1 2일의 회사 교육과정에서 사이코 드라마를 체험했다. 서로 다른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역할극을 통해 서로의 애환을 몸소 체험하고 공감했다. 그 속에 흘렀던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이해합니다'라는 진심 어린 표정과 그때의 따뜻한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다.

 

전체가 있지만, 개별적 요소의 행동이 전체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본질적 성격이 전체의 부분을 스스로 규정한다. - 막스 베르트 하이머 (509)

 

막스 베르트 하이머는 '게슈탈트'라는 용어로 현상의 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게슈탈트는 밑에서부터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509)

 

각 연기자는 보다 큰 스토리의 부분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있다. 음표가 단독으로 음악이 될 수 없고 오직 전개되는 악구의 부분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연기자들도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510)

 

흥미롭게도 집단역학의 기초에 깔린 가설의 핵심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다정다감하며 협동을 추구하고 공감을 표현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자연적 성향을 해체는 행동은 해로우며 궁극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사실이다. 감수성 훈련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기초를 이루는 공감적 본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513)

 

다양성을 지원하는 문화를 보유한 기업만이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514)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의도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로 이해한다. 즉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 말이다. 목적은 인생을 보다 더 큰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개인은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보다 더 큰 맥락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싶어한다. (518)

 

심리학적 의식으로의 전환은 역사적으로 가장 크고 단 하나뿐인 공감의 물결을 몰고 왔다. (522)

 

이런 다양한 노력을 추진하는 원동력은 이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심리학적 의식이었다. 이런 모든 운동은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개인은 소중하고 고유하고 죽을 수 밖에 없고 궁극적인 가치를 가진 존재이며, 계급의식을 둘러싼 추상적 이데올로기적 관심에 초연하며, 누가 생산수단을 통제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23)

 

"현실과 정신상태와 인간의 목적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쳐 가며 그렇게 철학적 깊이를 간직한 이슈를 제기한 저항은 일찍이 없었다.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가 그때까지 생산해 낸 문화적 가치를 재평가하기 위해 가장 야심 찬 의제는 바로 그런 상이한 의견의 불화를 통해 형성되었다. 가족, 직장, 교육, 성공, 육아, 과학, 진보, 성 문제, 남녀 관계, 도시집중 등 모든 것이 도마 위에 올랐다. 부의 의미, 인생의 의미, 모든 것이 검토 대상이 되었다. (527)

 

사람들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훨씬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면서도 글로벌 경제를 도외시하는 등 갈수록 개인화 되고 있지만 심리학적 의식은 그들로 하여금 더 넓은 존재의 전 영역에서 자신들의 중추신경계를 문자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떠오르는 글로벌 문명에 어울리는, 보다 더 보편적인 공감적 포용을 창조했다. (528)

 

 

3부 공감의 시대

11. 세계적 공감의 정상을 향한 등정

연구결과에 의하면 개인이 당하는 비극을 지켜볼 경우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공감하게 되며, 그런 일체감은 적극적인 구조 활동의 참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537)

 

2007년은 인류정착사에 거대한 티핑포인트로 기록되는 해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다수 인류는 거대도시에 살거나 도시권에 속한 거대도시에도 살고 있다. 1000만 명을 웃도는 도시도 적지 않다. 바야흐로 '호모 우르바누스 (도시형 인간)'의 시대이다. (539)

 

세계 각국에서 통상과 무역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겪으면서 상업적 유대뿐 아니라 공감적 유대까지 다졌다. (540)

 

코스모폴리타니즘은 공감적 감성과 상업적 감성이 번갈아 교차하는 민감한 줄타기 게임이다. 코스모뫂리탄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게 마음을 열고 다양한 문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541)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로 스며들 때, 자신의 모습의 절반은 잊히고 나머지 절만은 상대방의 문화를 바꾸어 놓는다. (544)

 

혼합된 정체성과 이중의 문화적 배경을 갖고 사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타니즘과 공감의 확장을 촉진시킨다. 다양한 문화를 몸소 체험하면 정체성도 다중적이 되고 따라서 주변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관용적이고 개방적이 된다. 다문화적인 정체성은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보다 풍부한 개인적 경험과 느낌의 저수지를 만들어준다. (549)

 

글로벌 문화의 디아스포라는 '우리' '그들'이라는 국가 정체성의 배척관계를 걷어내고, 다양한 문화 공동체로 구성된 글로벌 한 광장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경의 안과 밖은 더 이상 영토의 제한을 받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549)

 

겉핥기로나마 다른 문화와 접촉하는 것은 분명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는  체험이다. 그런 체험을 통해 관광객은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이 주는 문화적 선물을 접한다. (551) → 중국과 하와이 여행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대단히 많이 넓어졌던 경험이 있다.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보았다. 하와이, 이 말만 해도 그리움에 가슴 속에 북 받쳐 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생긴다. 아주 큰 그리움의 덩어리다. 그곳의 군청색 바다와 엷은 파도. 신비로운 할레아칼라. 더 쓰다간 자리를 박차고, 모든 것을 접고 하와이로 떠날 것 같다. 반드시 다시 가고야 말리다. 반드시 조만간 꼭.

 

한 번도 제 고장을 떠나 본 적이 없고 늘 보던 얼굴만 대하며 동질적 경험에 갇혀 살던 사람도 여행을 떠나게 되면 다른 삶의 방식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여행은 공감적 감수성을 넓혀줄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다. (552) 8월에 연구원들이 다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진정성은 충만하면서도 조건이 없는, 그리고 자연과 인간과 더불어 살려는 갈망을 의미했다. (553)

 

지역 주민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눈 대화와 짧지만 함께 지낸 시간을 통해 공감적 유대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그네가 해외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체험이다. (554) → 많지 않은 여행을 통해 나에게 그런 공감적 유대감을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을 깊이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와 그 사람의 인생을 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안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만의 스토리를 안다는 것이다. (557) → 지금 하고 있는 북 리뷰에서 '저자에 대하여'를 작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판에 박힌 저자 소개가 아니라, 저자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저자가 새로 태어난 터닝포인트는 어디였는지? 저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책이나 사상은 무엇이며, 스승은 누구였는지 알아가는 것. 그의 인생을 지금에 이르게 한 보이지 않는 뒤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사부님께서 연구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아니 사부님께서 연구원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구원 스스로가 갈구하며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우고 익히는 입장에서 책 속의 스승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한 탐색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채워졌을 때, 사람들은 가치관의 방향을 비물질적인 쪽으로 바꾸어 '삶의 질'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엄격했던 공동체의 속박은 보다 느슨한 협력적 결속으로 바뀌어 갔다. (560)

 

개인의 안정성이 공감을 증가시킨다. (563)

 

공감은 어느 문화에든 존재한다. 단지 공감을 얼마나 확장하거나 제한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564)

 

생존 가치에서 물질적 가치로, 그리고 다시 삶의 질로 가치가 옮겨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을 이루기 위해 지구의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착취했고 그 여파로 공감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565) → 저자는 공감의식이 생겨남의 원인이 엄청난 양의 에너지 자원의 착취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연결고리가 허술하다 여겨진다.

 

문제는 분명하다. 공감의 물결을 타고는 있지만 지구와 대다수 인류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선택받은 소수의 인류가 과연 그들의 탈 물질주의 가치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작전계획에 투입시켜, 더 늦기 전에 위기를 벗어나 그들 자신과 그들 공동체를 보다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미래로 향하도록 미리 손을 쓸 수는 있는가 하는 점이다. (565)

 

영성 훈련이 증가하고 종교 성향이 감소한다는 것은 개인의식과 자기 표현이 커진다는 징조이다. 젊은 세대들은 갈수록 고대로부터 내려온 종교적 교리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한다는 생각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의 영적 여정에 관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577)

 

살아 있는 모든 존재로 공감을 확장하는 것은 인간에게도 의미가 있는 획기적 사건이다. 동물 권리 운동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다가오는 공감의 시대를 여는 전초기지가 될 수 있다. (589)

 

'좁은 세상 이론'은 지구상에서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은 겨우 '여섯 단계만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가정이다. 가량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가 아는 사람과 한 단계 떨어져 있고, 그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과 두 단계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평균적으로 여섯 단계만 떨어져 있다. (590)

 

커뮤니케이션과 IT 기술은 이제 하나의 이론에 불과했던 좁은 세상 이론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전 세계에 깔린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 우리는 '공감의 증식 효과'를 꿈꾸게 되었다. 인류를 같은 인류나 동물로부터 갈라 놓았던 전통적 경계 전반에 새로운 공감이 스며들고, 그 공감이 무수히 많은 다른 존재들의 삶으로 퍼져 나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면 모든 인류는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의 공감으로 둘러싸이게 될지 모른다. (593)

 

경제 구조와 생활 방식을 지구의 생명권과 보다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는 쪽으로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과연 우리가 더 늦기 전에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기후 변화는 생명권 의식만큼이나 여러 면에서 가속화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구 온난화의 극단적인 영향이라는 위기를 과연 피할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593)

 

12. 지구촌 엔트로피의 심연

기후 변화는 다양한 생물종을 위한 지역의 적합성을 바꾸고 생태계 내에서 그들의 경쟁력을 바꾼다. 그래서 심지어 비교적 소규모의 기후 변화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생태계의 구성에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600)

 

기후 체계가 어쩔 수 없이 임계점을 넘어가면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가 일어나면서, 기후 체계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속도로, 그리고 원인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상태로 옮겨간다." → 지난해 보았던 영화 '2012'이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곳곳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쓰나미가 미국 대륙을 휩쓸고 지나가며 지구는 엄청난 기후변화에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는 내용의 영화다.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생태계는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606)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거의 빈사 상태에까지 갔던 핵 산업이 기후 변화를 핑계로 교묘한 경로를 거쳐 소생했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09)

 

유일하고도 진정한 해결책은 다가오는 세기 동안 인간의 의식을 대폭 재조정하여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지구에서 다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길 뿐이다. (615)

 

먼저 좋은 소식. 적어도 대다수의 인류는 보다 다양한 인간과 동물의 영역으로 공감의 범위를 넓히면서 코스모폴리턴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나쁜 소식. 새로운 국제적 감수성은 보다 복잡하고 밀집되고 독립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구조는 그 골격과 유통망과 공급사슬과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화석연료와 다른 자원을 집중적으로 소모해야 한다. 에너지와 자원의 흐름이 커질 수록 엔트로피의 수치도 높아져 지구온난화로 인한 가스 방출과 기후 변화로 이어진다. (615)

 

다시 말해 공감의식과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증진시키는 문제가 보다 강렬한 에너지 흐름에 달려 있다면, 각각은 다른 쪽을 상쇄시켜 인류가 역사의 먼지 더미로 전락한 후에 달콤 씁쓸한 세속적 지혜만 남을 것인가? 직감적으로 그렇다고 생각되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향하고 있는 길이라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제 우리에겐 최종 서명만 남았다. (616)

 

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인간 역사에서 기나긴 단계의 끝에 다가서고 있으며 그곳은 완전히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616)

 

근극상 집단은 자기 영속적이고 물리적 서식지와 균형을 이룬다. 개발 집단이나 불안정한 개척집단과는 대조적으로, 극상 집단에는 해마다 새로 축적되는 유기물질이 없다. 즉 연간 산출량과 수입량은 연간 집단 소비량과 수출량으로 평행을 이룬다. (617)

 

1980년대에 크게 유행한 '지속 가능한' 경제 개발이라는 개념은 성숙한 근극상 생태계의 작용을 그대로옮겨다 쓴 것이다. (617)

 

너무 가난하여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조차 구하기 힘들면 누구나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모든 연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똑같은 연구를 통해 이들은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이 충족되었을 때 그 이상의 재산 축적은 도리어 행복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냈다. 필요 이상의 재산은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 주고 우울, 걱정, 그 밖의 정신적, 신체적 질병에 걸리기 쉽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을 못 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620)

 

부와 소유의 추구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런 쪽에 그만큼의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보다 심리적으로 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620) → 필요이상을 갖는 것, 즉 분수 밖의 욕구는 탐욕이다. - 법정스님

 

결국 이 모든 연구들이 시사하는 것은 경제적 안락을 느끼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에 도달한 이후 평균 행복은 부의 축적이 증가할 수록 오히려 내려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21) → 그렇다면 평균 수준의 행복은 어느 수준인가? 과연 평균수준의 행복이 측정 가능한 것인가? 행복은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다기 보다는 주로 상대적이며 또한 개인적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내게 적용하기는 어려운 주장으로 여겨진다.

 

부의 소유는 결국 사람의 마음까지 소유해 버려,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621)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다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 진다. (622) → 법정스님의 수필에서 이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문구를 본적이 있다.

 

물질주의자는 세상은 얻지만 자신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충동, 즉 공감적 유대를 발휘하는 일에는 서툴다. (623) →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물질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리면 정작 인생의 중요한 질문에는 답할 수 없게 된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아포리즘 "답하여 지지 않은 중요한 질문은 나중에 험악한 얼굴로 찾아와 책임을 묻는다" 만약 내가 엄청난 금액의 로또에 당첨된다면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생기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행복감이 상대적 비교우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략) 개인의 부의 창출을 행복과 동의어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재산의 추구 자체가 치열한 경쟁이다. 사람들은 절대적 조건으로 자신의 행복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측정한다. (623)

 

많이 가질수록 없이 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623) → 많이 벌수록 많이 쓴다. 생활 수준, 지출의 규모를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기는 힘들다. 풍요 속의 빈곤이 그런 뜻 아닐까?

 

그래서 생활 수준은 알코올이나 마약과 비슷한 면이 있다. 새로운 행복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일종의 쳇바퀴를 타는 셈이다. '쾌락'이란 쳇바퀴를. 행복을 유지하려면 계속 쳇바퀴를 굴려야 한다. (624)

 

안락한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갖춘 상태라면 사람들의 재산과 수입의 격차가 비교적 크지 않은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624)

 

돈이 부유한 사람에게서 가난한 사람으로 옮겨가면,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 잃는 것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평균행복은 올라간다. 따라서 한 나라의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는 없겠지만 그 수입을 보다 균등하게 배분하면 평균 행복의 수준을 올릴 수 있다. (625) →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심히 공리주의적 입장에 치우친 주장이 아닐까?

 

결국 세금을 통해 부를 재분배하고 공공서비스에 투입하여 사회 전체에 혜택을 주면, 사람들 사이의 신분 격차를 상당 부분 좁힐 수 있다. (625) →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유러피안 드림을 주장하고 있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을 줄 모르고 관용이 부족하고 주변 사람들의 복지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공감할 줄 모른다. (627) → 자꾸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개척단계에서 근극상 사회로 옮겨가고,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시대를 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모가 자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얼마나 친 사회적 가치를 심어 주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가치관이 공감능력을 키우고 시장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628)

 

최소한의 안락한 생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인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다 많은 자원을 소모하고 보다 복잡한 사회구조를 세우고 엔트로피 수치를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개발 과정이 개인화, 자아의식의 출현, 공감의식의 확장, 보다 개방적이고 관대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부정적인 면은 보다 많은 에너지의 흐름이 지구의 남은 자원을 고갈시키고 온난화 가스 방출을 증가시켜 기후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63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과 지구와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할 수 있는가? (중략) 우리가 공감의식을 최대화하고 지속 가능한 글로벌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그 문턱에 섰을 때이다. (636)

 

13. 분산 자본주의 시대의 여명

정점 세계화는 배럴당 147달러 정도에서 일어났다. 이 지점을 넘어서면, 인플레는 지속되어 온 경제 성장에 방화벽을 만들고, 지구촌 경제를 제로 성장으로 되돌려 놓는다. 에너지 사용량이 줄어 에너지 가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지구촌 경제의 위축을 의미한다. (641)

 

각국의 정부는 미래에 대비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고 이산화탄소 제로 방출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 있는 새로운 경제 모델을 수립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643) → 엔트로피 감소를 위해 저자가 낸 궁극적 해결책이다.

 

태양에너지, 바람, , 지열, 파도, 바이오매스 등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3차 산업혁명을 떠받치는 최초의 기둥이다. (645)

 

② 이제 빌딩 산업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 그런 인프라를 설치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3차 산업혁명을 떠받칠 두 번째 기둥이다. (645)

 

③ 재생 가능 에너지의 저장법 (중략) 수소는 공급 면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하고, 전력 생산뿐 아니라 차량에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재생 가능 에너지를 '저장하는' 보편적 매체이다. (647)

 

④ 인터넷 망을 따라 파워그리드 형태를 바꾸는 네 번째 기둥은 유럽, 미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전력회사에서 실험 중에 있다. 네 번째 기둥이 세워지면 업체와 가정은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다. (648)

 

결국 핵심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 중심의 시스템이 한 국가나 글로벌 경제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전력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651)

 

3차 산업혁명은 민족과 국가를 전례 없는 새로운 차원의 협력 관계로 끌어들여 전력이 널리 분산되는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다. 지난 10년에 걸친 분산된 통신 혁명으로 네트워크 사고방식, 오픈소스 공유, 통신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3차 산업혁명은 에너지 민주화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생활 방식을 실천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갖추는 세계를 그리기 시작할 때이다. (652)

 

에너지의 민주화는 분산된 사회적 비전의 집결지가 된다. (653)

 

엘리트 화석연료와 우라늄을 기반으로 하는 에너지에서 분산된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옮겨간다는 것은 20세기를 특징지었던 '지정학적' 세계에서 탈피하여 21세기형 '생물권 정치학'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654)

 

보다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글로벌 경제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방향감각을 바꾸고, 기술의 차별화를 높이고, 자아의식을 심화시키고, 연결관계를 긴밀하게 만들고, 의식을 확장시키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생물권 덮개를 향해 나아간다. (654)

 

분산 컴퓨팅은 개인용 컴퓨터를 수백만 대 규모로 모집하여 인터넷에 접속하면 방대한 자료도 쉽게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사용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고, 사용할 때도 용량 전체를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착안한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컴퓨터 사용 시간을 기부해 주기만 한다면, 쏟아져 들어오는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655) → 인터넷 시대의 십시일반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만화 드래곤 볼의 '원기옥'이 떠올랐다. 원기옥은 주인공이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지구의 대자연과 인간들로부터 아주 조금씩 기를 받아 그렇게 모인 에너지 덩이다. 그 에너지 덩이로 손오공은 여러 번 적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왜 사람들은 아무 대가 없이 이런 프로젝트에 자신의 컴퓨터를 빌려주는 것일까? 동기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타심'이다. (656)

 

'위키노믹스'는 새로운 대규모 협업 모델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료를 수집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지식을 공유한다. 그리고 각자가 들이는 노력에 비해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위키노믹스의 강점이다. (656)

 

3차 산업혁명의 P2P 기술은 '분산 자본주의'를 낳고, 그 과정에서 그 동안 시장 자본주의를 지배했던 많은 핵심 개념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660)

 

분산모델은 애덤 스미스의 본성과는 전혀 반대되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 하나의 기회가 주어지면 다른 사람과 협력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도 웬만하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힘을 보태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공도의 선에 이바지 하고 있다는 기쁨 때문이다. 더욱이 집단의 행복에 보탬을 주면 자신의 이익까지 최대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분산 협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비극'을 개탄하는 사람들과 달리 소위 '디지털 공유재'를 높이 평가한다. 생태학자 개럿 하딘은 유명한 논문에서 이기심은 공동의 경제적 기업을 몰락으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가 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660)

 

경제 활동은 더 이상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전의를 다지고 벌이는 적대적 경쟁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통하는 선수들끼리 힘을 합쳐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모험이다. 나의 이익은 상대방이 손해를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고전적 경제 개념은 물러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나 자신의 행복을 증폭시킨다는 개념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게임은 빛을 잃고 윈윈 시나리오가 대세를 이룬다. (662) → 사부님께서 주장하신 '경쟁이 아닌 공헌'과 정확하게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대가는 이렇게 통하는 모양이다.

 

협업 경제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오픈소스로 내놓는 것이 협업의 출발점이다. 지식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은 협업을 가로막는 일차적 장애이다. (662)

 

개인의식과 자아의식이 심화되자 장대한 우주의 계획에서 차지하는 각 개인의 삶의 고유한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반면에 실존적 외로움은 더욱 커져갔다. 이런 심리학적 변화는 다른 사람의 고유한 존재성과 고립을 극복하려는 실존적 투쟁을 배려하게 했고, 동료 인간과의 관계를 추구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애를 쓰면서 공감충동을 재촉했다. (666)

 

인터넷 등 새운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인간의 중추신경계는 지구의 다른 모든 인간과의 접촉을 가속화 하면서 우리를 글로벌 한 공간과 시간의 동시적 장으로 몰아간다. 그 결과 21세기에 시장에서의 재산 교환은 갈수록 거대한 글로벌 네트워크에서의 접속 관계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667)

 

새로운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선형적이 아니라 인공두뇌적이다. 이것들은 사용하는 시간 동안 지속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시장 교환의 시작과 정지 메커니즘은 당사자가 시간을 매개로 지속적인 상업적 관계를 수립한다는 개념으로 바뀐다. (668)

 

순수 네트워크에도 재산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재산은 생산자의 것이고 사용자는 쪼개진 시간을 통해 접속한다. 구독제, 회원제, 임대, 시간 공유, 의뢰계약, 리스, 라이선스 계약 등이 새로운 교환의 매체이다 (668)

 

일정기간이나 시간을 통해 사용자와 상품화된 관계를 지속시키는 쪽을 선호한다. 이것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이다. (668)

 

모든 사람이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연결되고 정보가 거의 동시적으로 교환되는 세상에서, 시간은 가장 희귀하고 소중한 자원이 된다. (668)

 

맥퍼슨은 이제 재산에 대한 정의에는 "비물질적 수입, 즉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수입에 대한 권리"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런 수입은 만족스러운 사회적 관계에 참여할 권리"라고 주장한다. (672)

 

협업 경제에서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수립할 때는 배척의 권리보다 포함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 (673)

 

협동사회에서는 비물질적 가치, 특히 자아완성과 인격적 변화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충만한 인생'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 즉 접속의 권리는 가장 중요한 재산 가치가 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재산은 "개인이 충만한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해 줄 탄탄한 관계에 참여할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맥퍼슨은 주장한다. (673)

 

서열을 하찮게 여기고, 네트워킹 방식으로 사람이나 세상과 관계를 맺고, 협력이 체질화되어 있고, 자율과 배척보다는 접속과 포함에 관심이 있고, 인간의 다양성에 감수성이 강한 밀레니엄 세대는 역사상 가장 공감적인 세대가 될 확률이 크다. 분산적이고 협동적이고 비위계적인 사회가 곧 공감적인 사회이다. (674)

 

'뉴리더'에서 대니얼 골먼은 '투명성'은 정보 공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분과 신념과 행동에 대해 진정한 개방성"을 표현하게 해 준다. (675)

 

공감적인 사람은 고객과 하급자가 원하는 것을 간파하고 충족시키는 능력이 남다르다. (중략)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을 찾아내고, 상대방의 의도에 정확히 반응한다. (중략) 결국 성장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공감은 다양한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들과 사업을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능력이다. (676)

 

리더십 임무가 보다 복잡하고 협동적이 되기 때문에, 관계기술은 갈수록 중요해진다. (중략) 여기서는 마케팅, 저기서는 전략, 또 여기는 보완, 이런 식으로 동분서주해 가며 기능성이 떨어지는 낡은 탑을 무너뜨려 한다고 깨닫게 되면, 리더는 교차 기능적인 팀의 일부로 평상시에도 그들의 동료와 함께 일하게 된다. (중략)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정보를 쉽게 공유하고 효율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밀접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676)

 

사실 대부분의 종업원들은 상사의 배려와 새로운 공감적 유형의 관리를 더 신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677)

 

세계 기후 변화와 씨름하고, 생물권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다른 생물들을 보호하고, 안전한 사회를 유지하고, 누구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물질적인 것보다는 체험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하고, 문화적 다양성이 풍부한 사회를 만드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위상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677)

 

아메리칸 드림은 개인의 자율성과 기회를 중요시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물질적 이익을 강조한다. 유러피언 드림도 개인의 창의력과 경제적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문제에도 똑같은 비중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 유러피언 드림은 한 개인이 자율적인 고립상태에서 번창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사회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질은 사회 구성원 각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공동의 선을 강조한다. (678)

 

사이먼 쿠즈네츠는 "성장의 양과 질 사이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차이가 있다. (중략) '보다 더' 성장하려는 목표는 무엇을 성장시키고 왜 성장시켜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어조를 높이면서 GDP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했다. (679)

 

'3부문'이라고 폄하하여 시장이나 정부에 비해 대수롭지 않은 분야로 취급 받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시민사회는 '1부문'으로 불려야 마땅한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시민사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과 사회의 생활을 정의하는 설화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이들 설화는 문화적 공통기반을 조성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서적 유대감을 만들도록 해준다. 그리고 애정과 신뢰는 공감을 확장해주는 젖줄이다. (681)

 

시장과 정부가 확장된 것이 문화가 아니라, 문화가 확장된 것이 시장과 정부이다. 문화는 사회성이라는 공감적 외투를 만들어 내고, 그 사회성을 통해 사람들은 시장이나 정부 영역에서 서로 믿고 참여하기 때문에, 시장과 정부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1차적이 아닌 2차적 제도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682)

 

경쟁보다 협동이 대세를 이루고 접속권이 재산권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삶의 질이 개인의 재정적 성공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생각되는 분산 자본주의 경제가 자리를 잡으면, 공감적 감수성도 번영할 여지를 마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욕, 사리사욕, 실익을 인간경험의 중심에 놓는 인간 본성의 개념과 배타성의 경계, 그리고 위계질서는 더 이상 공감적 감수성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685)

 

14. 즉흥적 사회에서의 연극적 자아

연극적 의식은 심리학적 의식에서 직접 유래된 것으로 보편화된 역할연기 실험이다. 역할연기 실험은 야코프 모레노의 사이코드라마에서 시작되어, 20세기 T그룹, 대면 집단, 자조 집단이란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688)

 

이런 문화에서 긴박하게 변하는 모든 사회적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려면 비록 한계야 있겠지만 연극이나 소설, 상담 칼럼, 사회적 계발서의 커다란 흐름을 알아내야 한다. 결국 '가정생활'에서 수시로 부딪히게 되는 우연한 일에 대한 끝없는 탐색이 아니라면 연속극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바로 '자기계발 분야의 트랜드'를 탐색하고 이를 고객들에게 알려주는 일이다. 예전에 아는 형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런 책을 한 권 써보는 게 어때?"라고 하셨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인터넷 혁명은 준사회적 관계를 P2P 관계로 바꾸어 놓았다. 중앙집중식 상명하달, 1대 다자의 관계에서 오픈 소스, 수평적, 다자 대 다자의 관계로 바뀌면서, 신세대들은 자신이 쓴 대본의 배우가 되고 같은 마음을 가진 20억의 배우들과 글로벌 무대를 공유하여 모두와 함께 모두를 위한 연기를 펼친다. (691) SNS, 블로그 등이 바로 그것인데, 아직도 나는 페이스북 등의 SNS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지러워 하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수 많은 줄거리의 대본을 쓰고 자신의 연기를 감독하고 생활의 모든 면을 실제로 안무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로그온 하여 따라 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밀레니엄 세대에게 만큼은 '집단 친밀감'이란 말도 모순어법이 아니다. (691)

 

윌리엄 제임스는 연극적 의식의 이론가들이 등장하기 반세기도 전에 인간 행동의 연극적 본성을 예리하게 집어냈다.

 

"모든 개인은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적 자아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이들 다양한 집단에게 그 자신의 다양한 면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 보여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모나 선생님 앞에서는 얌전을 빼다가도 '터프한' 또래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해적처럼 상소리를 내뱉고 건들거리며 걷는다. 우리는 친목회에서 친구들을 대하는 식으로 자식들 앞에서 행동하지 않고, 부하 직원을 대하듯 고객을 대하지도 않으며, 가까운 친구들에게 하는 행동을 사장에게 하지 않는다." (694) → 아.. 정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장절이다. 나는 이런 내가 나쁜 줄 알았다.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이런 수 많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이야기 한다. 고마워요 제임스

 

오히려 자아는 "하나의 의식이며, 그 의식은 그것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부여 받은 것"이다. 그 때 자아는 데니스 브리셋가ㅗ 찰스 에질리가 <연극같은 인생>에서 말한 대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가ㅗ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로 나온 "일종의 허구의, 짜 맞춘, 합의에 의해 유효성을 갖는 자질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한 사람의 진정한 존재는 관계 네트워크의 또 다른 부분이 되어는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식에 달려 있고, 그런 관계가 그 사람의 자아의 일부를 타당하게 만든다. (695)

 

로버트 퍼린버네이어검은 "현실은 연극적이거나 드라마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현실로 여기거나 현실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이 연극적으로 실현되고 구축된다."고 역설한다. (695)

 

연극적 관점은 커뮤니케이션을 인간활동의 핵심에 놓고, 자아를 관계적 관점에서 다시 정의하며, 경험 그 자체를 연극적인 사건으로 만들고, 재산을 사람들이 자신의 많은 연극적 역할을 연기하도록 돕는 상징으로 변형시킨다. (696)

 

신화적 의식의 시대에 영웅은 한 인간의 척도였다. 그런가 하면 신학적 의식의 시대에는 신앙심이 기준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의식의 시대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성실하고 선한 성격을 가져야 했다. 심리학적 시대에는 남의 눈에 잘 보이려고 집착했다. 그러나 연극적 의식 속에서 자란 세대에겐, 진정성이 그 사람의 시금석이 된다. (699)

 

결국 속임수 없는 연극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른 가면, 즉 페르소나를 취하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의 한 가지 면에 대한 진정한 표현일지 모른다. 즉 우리 각자가 사실상 다양한 인격의 혼합물이라면, 그때 문제는 우리가 그 순간에 맡는 특정 역할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이다. (701) → 나도 나를 모르는데 과연 진정성이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우리는 페르소나를 가질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이라도 나를 온전히 보여주고 싶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공감은 보다 깊은 영역의 현실에 참여하는 수단이다. 현실은 우리가 시작하는 관계를 바탕으로 세계에 관해 우리가 시작하는 관계를 바탕으로 세계에 관해 우리가 창조해 낸 공유된 이해이기 때문이다. (706)

 

살아 있는 최고의 여배우이자 심층 연기의 대가인 메릴 스트립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에게 공감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706)

 

데카르트의 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인본주의 심리학자의 ② "나는 참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이제 새로운 명제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707)

 

거겐은 이렇게 경고한다. "이렇게 분열된 자아 개념은 단절되어 종잡을 수 없는 수 많은 관계에 상응한다. 이런 관계는 수 많은 방향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너무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도록 하기 때문에, 파악할 수 있는 개성을 지닌 '진정한 자아'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만다. 완전 포화 상태의 자아는 전혀 자아가 아니다." (708)

 

거겐은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믿는다. (709)

 

루이스 주커는 "하나의 객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개념을 버리고 자아를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자아는 "가장 광범위한 경험"을 향해 자신을 열고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 될 기회를 얻는다고 주장한다. (711)

 

자기 중심적인 체계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불가분의 관계성, 즉 너와 나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의식을 향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그는 내 비춘다.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공감 충동이 성숙할 수 있도록 ''라고 하는 확고한 자아의식을 보유할 때만 바랄 수 있는 일이다. (711)

 

자아는 한 개인이 평생 겪는 경험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며, 그가 속한 관계와 그가 겪는 경험이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그런 차별성을 놓치지 않아야 공감의식은 꾸준히 성숙하여 글로벌 의식을 위한 정신적, 사회적 접착제로 기능할 수 있다. (711)

 

공감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고유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의 부서지기 쉬운 유연한 본성과, 그 사람의 약점과 한 번뿐인 유일한 목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712)

 

블로그를 하는 일차적 이유로 개인의 스토리를 기록하는 것 외에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 블로거가 전체의 76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기에는 그들의 개인 생활이 대중의 관심을 끌고 많은 조회 회수를 기록할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720) →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2, 블로그가 활성화되기 전 '김경인닷컴'을 만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 나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내가 원하는 페르소나를 가지고 세상에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전문가들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에는 실존적 외로움과 인정받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숨어있다고 분석한다. 유명해 지려는 욕구는 삶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는 흔적만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 또는 수많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인정받고 축하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라도 유명해져야 한다.  <민물장어의 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기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중략)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란 가사와 사부님의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에 나오는 Me Story를 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세 번재 칼럼의 주제 '나는 무엇으로 특별해지고 싶은가'에 좋은 귀감을 주는 장절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학생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도 참지 못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패를 맛보았을 때 그 실패를 쉽게 처리하거나 극복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는 일에도 서툴다. (724)

 

X세대와 달리 밀레니엄 세대는 "자신의 집단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을 더 많이 느끼고 각 개인의 관점을 이해하려 한다." (725)

 

그들은 중앙집중식 지휘통제와 상명 하달식 권위 행사를 신뢰하지 않고, 리눅스나 위키피디아에서 볼 수 있는 오픈소스 모델처럼 수평적으로 참여하는 지식 수렴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725)

 

커뮤니케이션을 쉽고 빠르게 수집하고 저장하고 교환할 수 있도록 고안된 기술이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나 언로를 침묵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727)

 

우리는 지금 이순간 또 다른 역설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인터넷 망은 인류에게 무한한 지식과 소통의 통로를 제공하지만,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때문에 이해와 의미와 공감적 유대감을 높여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현저하게 줄일지도 모른다. (729)

 

재산의 양과 질보다 관계의 질과 의미, 즉 삶의 질로 관심이 달라지려면 먼저 시간과 공간의 방향성이 달라져야 한다. 사유재산 관계에 얽매인 배타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는 물러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글로벌 광장에 참여하는 포괄적이고 관계지향적인 자아가 들어선다.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시민관계를 심화시키고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시간을 공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회가 21세기 세계인의 꿈이고 상식이 된다면, 우리는 언젠가 공감이 증가하여 엔트로피를 밀어 올리는 역사의 불가피한 변증법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731)

 

15. 절정에 이른 경제의 생물권 의식

인간이 역사 속에서 받아들인 모든 단계의 의식은 정도만 다를 뿐 여전히 우리의 문화 속에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뿌리 깊은 역사적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신화적,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심리학적, 연극적 틀의 형태로 선조의 의식의 파편들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733) → 저자도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구나.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에 나오는 '의식의 데이터 베이스' 개념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반갑다.

 

갈수록 개체화는 뚜렷해지고 서로 다른 단계의 의식을 가진 인간이 공존하고 있는 세계에서, 생물권은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를 하나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진 유일한 배경일지도 모른다. (734)

 

"망치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겐,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개인용 컴퓨터가 전부라면, 온 세상은 관계의 네트워크처럼 보일 것이다." (734)

 

자연의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기계적이 아니라 조건적이고 고정적이 아니라 임기응변적이며 다른 현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변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변한다. (735)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낡은 관념은 그 부분이 속한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자율적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체계이론(system theory)'이라고 하는 이 새로운 과학은 자연의 성격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념에 의문부호를 붙인다. 아울러 체계이론은 수 많은 자율적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거리감을 두고 자신을 상황에 최적화시켜 자율적으로 기능하며, 각자가 개인적 효용성을 최대화 한다는 계몽적 사고를 무효화 한다. 체계화 이론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체는 전체의 차원에서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창조하는 부분들끼리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736) → 게슈탈트와 일맥상통

 

생태학은 희귀자원에 관심을 갖고 개개의 생물 사이의 경쟁을 강조하면서 다윈의 모델에 도전했다. 새로운 생태학적 모델에서, 자연은 다수의 공생적 상화의존 관계로 구성되며, 그런 관계에서 각 유기체의 운명은 어떤 경쟁적 이점만큼이나 상호적 참여에 의해 결정된다. 다윈의 생물학이 개개 유기체와 종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생태학은 환경을 소위 자연과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관계로 본다. (737)

 

1911년에 러시아의 과학자 브라디미르 버나드스키는 지구 전체를 포함하는 확장된 생태학적 관계를 다룬 논문을 발표하면서 '생물권(biospher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생물권을 설명하면서 "우주 방사선을 전기, 화학, 기계, 온도 등 효율적인 지상의 에너지로 바꾸는 트랜스포머가 점령한 지표상의 영역"으로 정의했다. (737)

 

생물권은 지구라는 행성을 어떤 형태의 생명체도 자연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 만큼 낮거나 높게 둘러싸고 있는 대기와 더불어 지구 주변의 덮개를 구성하는 종합적 생물계이자 생명유지 장치이다. (738)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과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걸리스는 브라디미르 버나드스키의 이론을 발판으로 '가이아 가설'을 내놓았다. 그들은 지구를 자체 조절기능이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았다. 동식물군과 대기의 지구화학적 구성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생명활동에 도움이 되는 비교적 일정한 상태로 지구의 기후를 유지한다. (738)

 

생물과 지구화학 내용물과 주기 사이의 꾸준한 상호작용과 피드백은 통합체계로 작용하면서 지구의 기후와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여 생명을 보호해 준다. 이처럼 지구는 생물 같은 존재로, 생명의 지속에 도움이 되는 일정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자기 규제적 실체이다. 가이아식 논리에 따르면, 생물 각 개체의 적응과 진화는 보다 더 큰 과정, 즉 지구 자체의 적응과 진화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지구의 생물권 덮개 안에서 살아가는 유기체와 개개의 종이 모두 생존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모든 살아 있는 생물과 지구화학 과정의 지속적인 공생관계이다. (739)

 

환경학자 버나드 피튼은 "생태학은 네트워크이다. (중략) 생태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740) → 여기서 '생태학' '관계'로 바꿔주면 2번째 칼럼인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 나온다.

 

이전의 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보는데 반해, 새로운 과학은 자연을 관계로 본다. 이전의 과학은 분리, 착취, 절단, 환원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새로운 과학은 참여, 보충, 통합, 전체론이 특징이다. 이전의 과학은 자연을 압도할 수 있는 힘들 찾는데 반해, 새로운 과학은 자연과 제휴를 모색한다. 이전의 가ㅗ학은 자연으로부터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데 반해, 새로운 과학은 자연에 다시 합세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새로운 과학은 자연을 강탈하고 노예로 삼아야 할 적으로 보는 식민지적 관점을 버리고, 양육해야 할 공동체로 품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자연을 일종의 재산으로 보아 착취하고 이용하고 소유했던 권리는, 이제 품위를 지켜주고 존중하고 대접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로 순화된다. 자연에 대한 공리적 가치는 자연의 본래적 가치에 자리를 내준다. (741)

 

환경과목이 아이들에게 지구의 생태적 연계성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감과목은 지구의 정서적인 연계성에 관심을 모아준다. (743)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던 그 학생은 잠깐 동안이지만 조그만 아기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경험했다. 아기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처음 겪었고 아기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대런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될 공감적 돌파구를 경험했다. 이를 고든은 "서로에게서 인간성을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745)

 

'공감의 뿌리'는 세계 시민을 만들어 내는 수업이다. 즉 모두가 같은 구명정에 탔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사회적 책임감과 공감적 윤리를 심어준다. 이 아이들은 장차 좀 더 남을 배려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를 세울 것이다. (746)

 

진리는 우리가 주변 사람이나 주변 세계와 공유한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의 차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교실은 경쟁보다는 협력과 공감을 강조한다. 교육은 개인적 추구라기보다 협동적인 모험에 가깝다.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목표는 실존적이다. (747)

 

협력적 학습 환경에서는 과정이 결론 못지 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위계적인 학습모델보다는 각자의 지식을 자 맞추는 네트워크 방식이 더 유리해진다. (749) → 협력적 학습을 통해 시너지, 공감의 가치를 학습한다.

 

괴테는 자연은 사심 없는 방관자로서보다는 참여자로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괴테는 그의 과학적 방법론을 "가장 내부 지향적인 방법으로 그 자체를 대상과 동일시하고, 그렇게 하여 실질적인 이론으로 성립하게 되는 민감한 경험주의"라고 정의했다. 괴테는 그의 "생각의 힘이 대상과 합일을 이루는 순간 활성화되고, 그때 생각은 대상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괴테는 진정한 통찰력은 초연한 관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현상에 깊이 참여 할 때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751)

 

정신분석이 과학적 사고에 기여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을 공감과 결합시킨 점"이라고 코후트는 생각했다. 공감을 "하나의 관찰 도구로서" 과학에 접목시키면 "과학적 원리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의 깊이와 폭을 증가시킨다."라고 코후트는 말한다. (752)

 

과학의 새로운 이상은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과학적 공감뿐 아니라 공감적 과학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코후트는 단언했다. (752))

 

"내 의도는 과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경험이냐 추상이냐를 놓고 선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둘을 통합하는 것이다. - 에이브러햄 매슬로우 (752)

 

매슬로우는 소위 지식에 대한 "수용적 전략"을 요구했다. 수용적 전략이란 "수용적 개방성, 사물이 스스로이고자 하는 간섭 없는 의지,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기 위한 지각표상의 내부구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아는 능력, 질서보다는 질서를 찾는 행위"를 말한다. (753)

 

"그러나 보다 과격한 질문을 던져 보겠다. 모든 과학, 모든 지식은 아는 사람과 알려지는 존재 사이의 상호관계를 사랑하거나 배려하는 결과로 개념화될 수 있는가? 이런 인식론을 '객관적 과학'을 지배하는 인식론과 나란히 놓아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인식론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모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유하게 해 주는 것으로 본다." 매슬로우의 '배려하는 객관성'이라는 개념은 그가 두 번째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요구에 처음 반영한 이후로 반세기 동안 더욱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754)

 

생물권과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은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느낄 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공감적 체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훈련을 통해 습득해야 할 체험이다. (755)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에 내장된 공감 성향은 우리의 인간성을 완성하게 해주는 실패 방지용 메커니즘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묶어주는 기회이다. 그래도 공감 성향은 꾸준히 연마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공감충동은 사회적 힘이 분열로 동요하는 결정적 순간에 종종 무시당한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런 순간에 다가서고 있다. 3차 산업혁명과 새로운 분산 자본주의 덕분에 우리는 세계화에 바짝 다가서고, 이번에는 특히 아래로부터의 대륙화를 강조하고 있다. 재생 가능 에너지가 세계 곳곳에 어느 정도 골고루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지역은 비교적 자족적이고 지속 가능한 생활방식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동력을 받고, 동시에 스마트 그리드를 통해 여러 대륙과 여러 나라와 여러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757)

 

3차 산업혁명은 곧 네트워킹이고, 그것이 수반하는 유통체계는 인접한 육괴 전반에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공유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758)

 

대륙화는 이미 새로운 통치 형태를 가져오고 있다. 1, 2차 산업혁명과 함께 성장하여 지표 차원의 에너지 제도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규제 메커니즘을 제공했던 민족국가는 생물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3차 산업혁명에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지능적 유틸리티 네트워크와 인공지능 유통망과 공급 사슬로 연결된 거대한 대륙 지괴 전반에서 지역단위로 생산되어 P2P 방식으로 공유하는 분산된 재생 가능 에너지는 대륙적 통치제도에 유리하다. (758)

 

통치 제도는 다른 통치 제도나 전체 통치 제도로 통합되는 관계의 협력적 네트워크 안에서 기능할 것이다. 이 새로운 복합 정치 기구는 그것이 몸담고 있는 생물권과 마찬가지로 상호의존적이고 호혜적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생물권 정치이다. (중략) 생물권 정치는 지구가 상호의존적 관계로 맺어진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우리는 우리를 포함하는 보다 큰 공동체를 보살핌으로써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삼는다. (759)

 

역설적이게도 기후 변화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성과 우리가 함께 겪는 난관을 피상적이 아니라 근본적인 방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참으로 우리에겐 이 지구에서 이번 삶이 전부이다. 어느 누구도 도망하거나 숨을 곳은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엔트로피 수치가 지구를 감싸고 대량 전멸이란 카드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760)

 

모두가 협력하여 생물권 전체와 집단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물권 의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760)

 

'공감의 문명'이 이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감싸는 거대한 생명권과 전체 인류에게로 공감의 범위를 바르게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감적 유대 관계를 다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기후 변화와 대량 살상무기의 증식이라는 형태로 무섭게 속도를 올리고 있는 엔트로피라는 괴물과 충돌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제때에 지구촌의 붕괴를 피하고, 생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 (761)

 

III.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 구성에 대하여

이 책을 이끌어 가는 중심 맥락은 서문에서 저자가 언급했듯 "인규의 공감적 특성이 진화해 온 과정을 들여다 보고, 지금까지 공감이 우리의 여정을 어떻게 꾸려 왔으며 앞으로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살펴봄으로써 문명사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인류의 문명사를 오른쪽으로는 '공감'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왼쪽으로는 '엔트로피'라는 렌즈를 통해서 들여다 보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공감과 엔트로피 사이의 역설관계를 설명하는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찾아내지 못했다.

 

1부는 '공감적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엠파티쿠스'라는 제목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본래 공감적이라는 논지를 전개해 나갔고, 2부는 인류의 문명사를 연대기적 흐름에 따라 단계별로 나누어 각 단계별로 공감의식이 증가와 엔트로피 증가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서술해 나갔다. 마지막 3부는 지구 생물권의 파괴를 배경으로 세계가 지금 벌이고 있는 공감을 향한 경쟁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했다. 아울러 '정점 경제'로 전환하면서 '생물권' 개념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과 '분배적 자본주의'가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제 3의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임을 피력해 나갔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살펴보면 이 책은 3부의 큰 줄기 아래 1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의 1부의 5개의 장으로 인간의 본성이 본래 공감적임을 피력했으며, 2부의 5개의 장으로 인류 문명의 역사를 통해 공감과 엔트로피(80:20 정도로) 를 서술했다. 마지막 3부의 구성이 애매했는데, 앞의 2개의 장을 통해 공감의식과 엔트로피가 정점에 이르고 있음을 피력했으나 내용이 너무 장황한 느낌을 주었다. 나머지 3개장이 이 책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데, 3의 산업혁명의 태동을 알리는 분산자본주의와 개인의식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한 '연극적 자아' 그리고 생물권 인식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얼굴이 너무 크고 꼬리가 작고, 뒷심이 흐려 모호함을 남기는 '용두사미(龍頭蛇尾])'의 느낌을 받았다.

 

1부의 구성이 필요 이상으로 깊숙이 들어가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를 들어 1 2장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가장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부분에서 아기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은 성적 리비도가 아니라 유대감과 사회성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결과를 제시했는데, 20페이지 분량으로 10가지 이상의 실험 사례를 들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2~3가지의 연구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 너무 많은 사례는 자칫 독자가 숲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 방향감각을 잃게 할 염려도 있다. 너무 방대한 인용문 또한 같은 맥락으로 역효과가 생길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며 빨려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각각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용문들이 '제레미 리프킨'이라는 연금술사를 만나 하나의 주제나 주장 혹은 사상으로 수렴되면서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든다. 본문에서도 그가 이야기 한 '게슈탈트'의 개념으로 주장을 펼쳐나가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각각의 인용문 조각들의 합이 책 전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맥락이 인용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구성을 이룬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4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미 저자는 서문을 통해 3부를 '공감의 정점과 엔트로피의 심연'과 이 책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 '3의 산업혁명의 태동, 분배적 자본주의, 연극적 자아, 생물권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저자라면 3부를 둘로 쪼개어 총 4부로 구성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힘겨웠던 부분이 1부 마지막에 편성되어 있는 '5장 인류여정의 의미를 재고하며' 였다. 저자가 이 장의 통해 이야기 하고자 했던 목적은 2부로 들어가기 전에 인류여정과 공감의 관계에 대한 거시적 조망을 위함인 듯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2부에 편성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앞의 4개의 장과는 다르게 대부분이 의견과 주장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일관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앞의 1~4장은 하나의 주장에 그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결과와 인용문을 근거로 활용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뒤에 나오는 6~15장도 1~4장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5장의 너무나 많은 주장과 의견은 정작 저자가 강조한 '공감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기 보다 억지로 주입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내가 저자라면 5장의 내용구성을 나머지 다른 장처럼 '주장 - 근거'로 수정하고 중복되는 듯한 뉘앙스의 여러 주장들을 가지치기 하여 2부 맨 앞에 편성할 것이다.

 

'' 사이에 1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들어가기 전에'라는 글로 전과 후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윤활유로 활용한다면 독자로 하여금 두꺼운 책의 방대한 숲에서 길을 잃지 않고 현재까지 걸어온 지점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와 옮긴이의 개인적 사연과 해석이 담긴 에필로그야 말로 독자로 하여금 책을 가슴 속에 갈무리 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사견이지만 에필로그가 없는 책은 아주 좋은 내용임에도 메마르다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내가 저자라면 개인적 소감이 담긴 에필로그를 추가하고, 옮긴이의 소감도 추가시킬 것이다. .

 

◆ 재구성 한 목차

서문

1. 인류사에 감추어진 역설

 

1부 호모 엠파티쿠스

* 들어가기 전에

2.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3.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감성적 해석

4.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

 

2부 공감과 문명

* 들어가기 전에

5. 인류 여정의 의미를 재고하며 (기존 1부 말미에 편성)

6. 고대 신학적 사고와 가부장적 경제

7. 국제 도시 로마와 기독교의 발흥

8. 중세 말의 연()산업혁명과 휴머니즘의 탄생

9. 근대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사고

10. 포스트모던의 실존적 세계에 담긴 심리학적 의식

 

3부 공감의 정점과 엔트로피의 심연 (기존의 3부 중 공감-엔트로피 역설부분을 분리)

* 들어가기 전에

11. 세계적 공감의 정상을 향한 등정

12. 지구촌 엔트로피의 심연

 

4부 공감의 시대 (기존의 3부 중 결론 부분만 따로 떼어냄)

* 들어가기 전에

13. 분산 자본주의 시대의 여명

14. 즉흥적 사회에서의 연극적 자아

15. 절정에 이른 경제의 생물권 의식

 

종문 (저자의 개인적 소감이 담긴 에필로그)

옮긴이의 글 (옮긴이의 에필로그)

 

 

 

IP *.109.8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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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희
2011.02.28 12:22:11 *.57.206.4
그 두꺼운 책을 읽기에 급급해서, 마감일에 어떻게라도 제출한다는 데 위안을 삼고.. 님의 글을 읽고나니,
어딘가로 숨고 싶습니다.
지난 번에도 그렇고,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나중에 꼭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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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영
2011.03.01 21:04:14 *.206.90.145
정말 깔끔하고 명쾌한 정리군요~
목차 재구성까지 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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