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강훈
  • 조회 수 5329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11년 2월 28일 09시 33분 등록

1. 저자 제러미 리프킨에 대하여

JEREMY~1.JPG
(1943~)

[1]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3 1월 26~ )은 워싱턴 경제동향연구재단(Foundation on Economic Trends (FOET))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으로서 미국 및 국제적 공공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쳤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나들며 자본주의 체제 및 인간의 생활방식, 현대 과학기술의 폐해 등을 날카롭게 비판해온 세계적인 행동주의 철학자이다. 전 세계 지도층 인사들과 정부 관료들의 자문역을 맡고 있으며 과학 기술의 변화가 경제, 노동,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활발히 집필 작업을 해 왔다.

 

리프킨은 경제학국제관계학을 전공했을 뿐 정식적인 과학 교육은 받은 적이 없다. 그의 저작 중 하나인 《엔트로피》는 엔트로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타임>지에서는 "과학계로부터 가장 증오 받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출처 : 인터넷 검색 kr.wikipidia.org 에서]

 

[2]

1945년 출생 / 1967년 펜실베니아 대학의 와튼 스쿨에서 경제학 학사학위 취득 / 터프스 대학의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 취득 / 1977~현재 'Foundation of Economic Trends (경제조류재단)'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이사장으로 있음 / 1993~현재 'Beyond Beef Coalition'을 창립하여 운영하고 있음 / 1994~현재 워튼 스쿨 경영대 최고경영자과정 교수로 재직 중

 

미국의 경제학자, 미래학자, 환경학자, 운동가, 저술가. 제레미 리프킨에 대한 평가는 항상 극단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너른 시야로 지구적 구조와 미래를 바라보는 탁월한 사상가이자 활동가로 추앙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과학계에서 가장 증오 받는 인물'이라는 「타임」지의 표현대로 그를 사이비 저술가, 기껏해야 영향력 있는 선동가로 본다.

리프킨에 대한 이런 엇갈린 평가는 그의 30여 년간의 활동이 언제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열렬한 것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77 '경제조류재단'을 창설한 이후 리프킨은 십수권의 논쟁작을 썼고, 전세계 20개국 500여개 대학에서 강연했으며, 미국정부의 각종 환경.경제정책 방향에 입김을 넣었다.

그가 가장 천착하는 문제는 기술이 환경 및 제반 사회구조에 미치는 영향. 환경과 경제가 일정하게 통합된 구조임을 역설한 <엔트로피>는 그의 초기 대표작이자 8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논쟁작 중 하나이다. 이후 리프킨은 광범위한 현실분석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작업에 매진하여, <노동의 종말>에서는 정보화로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인간의 노동이 서서히 제거되어 나갈 것이라는 노동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바이오테크 시대>에서는 산업시대와 비견될 만큼 중요한 '유전자의 시대'가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라는 전망을, <소유의 종말>에서는 문화마저 자본에 잠식되어 모든 경험과 시간이 상품화되는 '접속 시대'의 그림을 펼쳤다.

또한 부인 캐롤 그룬왈드 리프킨과 함께 열정적으로 펼치고 있는 채식운동과 녹색생활운동도 그의 활동 궤적에서 빼놓을 수 없다.

 

리프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주로 그의 과학적 엄밀성을 문제 삼는다. 리프킨은 경제학과 국제관계학을 전공했을 뿐 정식적인 과학 교육은 받은 적이 없다. 비판자들은 그 점을 꼬집으며, 리프킨이 몇몇 과학적 사실을 수집하여 망상적인 종말론을 구성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리프킨의 초기 저작들은 '사이비 과학'이라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다. <엔트로피 2>로 번역된 <Algeny>는 영적인 세계관을 역설하여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로부터 "학문으로 가장하여 교묘히 짜집어진 반() 지성적 프로파갠다"라 비난 받았다. 이후 <바이오테크 시대> 등에서 드러낸 유전자 공학에 대한 반감 탓에 '기술혐오자', '-러다이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추종자나 비판자 모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대중설득가로서의 그의 역량. 우리나라에서도 바람을 일으켰던 '종말' 시리즈를 비롯한 그의 책은 새롭지 않은 주장을 풍부한 실례로 뒷받침해 인상 깊게 제시한다. 효과적인 선전선동술을 무기로 미국 정부의 정책결정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그 과정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퍼뜨린다.

[출처 : 인터넷 서점 김명남(starla@aladdin.co.kr) ]

http://www.aladin.co.kr/artist/wprofile_author_detail.aspx?AListType=4&AID=40561

 

[3]

제러미 리프킨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경제,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특히 <노동의 종말_1995>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노동 시간 삭감을 위한 사회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바이오테크 시대_1998>는 생명공학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환기시켰다. <소유의 종말_2000>에서는 '소유의 시대'는 가고 '시간과 체험의 상품화'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으며, 혁명적인 수소에너지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수소혁명_2002>은 경제, 정치, 사회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소 에너지 체계의 미래를 진단하고 그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유러피안 드림_2004>은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고하며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보여 주었다. 종합적인 사고와 신선한 시각으로 세계의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리프킨이 이번에 선보이는 <공감의 시대>에서는 생물권 붕괴, 피크오일과 정점 세계화가 초래한 위를 타계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우리 시대의 독보적인 사회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리프킨이 이번 저서를 통해 또 한 번 미래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보이고 있다.

[출처 : 공감의 시대. 민음사 저자소개에서]


[4]

Jeremy Rifkin is the most widely read columnist in the world today. His opinion pieces and essays appear in quality newspapers and magazines in 25 countries around the world. The articles address topics of universal concern to the human community and touch upon the major issues of the day, with an eye to future trends and big-picture analysis.

Major theme areas relate to:

l  The European Dream: Cross-cultural understandings between Europe and America and the attendant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impacts

l  The Hydrogen Economy: The energy crisis, climate change, and the future in renewable hydrogen technology and infrastructure

l  The Age of Access: Exploring the economic shift to global commercial networks and its outcomes

l  The Future of Work: Issues surrounding employment in an increasingly automated, borderless and highly mobile global economy

l  Science and Technology in the 21st Century: Analysis and critique of developments in the biotechnology, nanotechnology, advanced IT, and the cognitive science fields.

[출처 : http://www.foet.org/JeremyRifkin.htm]

 

[5]
제레미리프킨.jpg.png

[출처 : FORA.tv - Jeremy Rifkin: The Empathic Civilization (Animated)]
http://fora.tv/2010/05/06/Jeremy_Rifkin_The_Empathic_Civilization_Animated

 

[제레미 리프킨에 대한 나의 생각들]

<공감의 시대>로 그를 처음 접했다. '저자에 대해서' 몇몇 자료를 찾다 보니 평가절하하는 내용들도 쉬이 접할 수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나는 판단하지 못한다.

<공감의 시대>라는 책을 통해 처음 내가 생각하는 제레미 리프킨은 창조적며 독창적인 사람이다. <공감>을 집대성하여 그의 논리로 그것을 새로이 해석하고 창조하는 독창성(originality)에 대해서 부러움을 갖는다. 그가 저술한 책들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만의 오리지낼러티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 그에 대한 생각은 '고집스러움'이다. 엔트로피가 불러온 과학계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감의 시대>에서도 그것을 책의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고집'을 설명하고 남는 부분이다. 저명한 잡지, 전문가 집단으로부터의 혹평을 받고 나면 그것에 대한 입장이 순화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을 감안해 보면 그의 고집은 '아집''용기' 그 사이 어디쯤 있는 그의 개성이리라. 더불어 800여 페이지의 책을 집필하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와 관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어디 나만이 책의 분량이 많다고 생각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읽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여 어디 한두번만 '줄이자'는 제안을 했겠는가? 그는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담아내지 않았을까? 그이 고집스러운 모습을 짐작해본다.

 

그의 고집이 책의 분량에서 '읽는 나'를 힘들게 했지만 열린 세상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나름의 생각을 확신을 가지고 많은 독자들을 만나는 그의 용기와 고집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인류사에 감추어진 역설

자아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으면, 공감을 제대로 성숙하게 표현할 수 없다. (16)

 

공감이라는 용어는 1872년에 로베르트 피셔_Robert Vischer가 미학에서 사용한 독일어 'Enifuhlung_ 감정이입'에서 유래되었다. 감정이입은 관찰자가 흠모하거나 관조하는 물체에 자신의 감성을 투사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용어로 실제로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즐기는 원리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09년에 미국의 E. B. 티치너는 'Enifuhlung' '공감empathy'으로 번역했다. 티치너는 유럽에 있을 때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빌헬름 분트와 연구 작업을 함께했던 심리학자였다.(19)

 

수동적인 입장을 의미하는 동정과는 달리, 공감은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하여 관찰자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경험에 대한 느낌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20)

 

인간은 자연에서 고립될수록 심리적 박탈감은 물론 신체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다.(23)

 

1,700년 동안 기독교 세계는 대대로 인간을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못 박았고, 여전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대의 관념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최근 두 세기 동안에도 인간은 스미스의 정의대로 자율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물질주의적인 존재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인성에 관한 두 가지 낡은 견해에 깊은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와 전혀 다른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본성이 과연 공감이라는 본성일까? 우리가 일차적이라고 여겨 왔던 악행, 폭력, 탐욕, 공격성, 이기적 행동 등 다른 모든 충동은 실제로 이차적 충동이며, 그런 것들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억제하고 부인하는 것에서 비롯된 병리적 파생물인가?(27)

이 책을 쓰게 된 저자의 기본적인 관점, 세상을 바라보는(해석하는) 저자의 동기적 사고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애정의 변수로서 양육의 일차적 기능은 아기와 엄마의 빈번하고도 친밀한 신체 접촉을 보장해 주는 기능이다. 사람이 젖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28)

 

유대감이 우리의 기본적 본성이 아니라면, 고립이나 왕따를 그렇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기피인물이 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곧 비인칭적 인간이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연관을 맺는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반면에 공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가 되어 의미있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심리적 수단이다. 그런 초월적 개념은 자아를 넘어, 보다 더 큰 공동체에 참여하고 소속되며 보다 복잡한 의미의 그물에 끼어 묻히는 것이다.(30)

 

프로이트는 아기의 만족을 유예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 본능적 충동을 억누르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규범에 순응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사회화는 그 자신이 궁극적으로 파괴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했던 기본적 충동을 억누르는 것을 의미했다.(30)

 

소나 그 밖의 많은 동물들을 길들이는 요령을 터득했고, 그래서 최초로 중요한 잉여에너지와 최초 형태의 자본을 만들 수 있었다. '가축cattle' '자본capital'은 어원이 같다. 가축은 재산이었다. 가축은 최초의 움직이는 재산이었고, 서로 교환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표준 매체였다.(33)

 

동물은 자본과 힘의 원천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기원전 4000년쯤, 중동 지역에는 수천 명의 인간을 거대한 노동집단으로 전환하여 운하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최초의 대규모 관개농업 문명이 형성되어 있었다. 루이스 멤퍼드가 '거대기계'라고 이름 붙인 위계조직이 나타나면서 사회는 빠른 속도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부계형태의 가족관계는 새로운 가부장적 형태의 권력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 통치개념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단 한 명의 지배자의 손에서 추상적인 지배가 이루어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런 권력은 수만 명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했고, 넘쳐나는 자원을 캐내고 더 큰 잉여가치를 창출하면서 제국의 영역을 확대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 즉 문명의 여명기이다. 그것은 분명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모순 위에 세워진 가슴 부푼 희망의 이야기면서도 슬픈 이야기이다.(33)

 

열역학 제1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 엔트로피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 1법칙인 에너지 보존법칙은, 에너지는 새로 만들어지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전제한다. 우주 전체의 에너지 총량은 태곳적부터 정해졌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한 치의 변함이 없을 것이다. ...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을 '엔트로피'라고 한다.(37)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일정하며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법칙이다. 오직 형태만 바뀔 뿐이다. 2법칙은 에너지는 한쪽 방향으로만 변한다는 법칙이다. 즉 사용할 수 있는 것에서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질서에서 물질서로 변한다. 2법칙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시작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용할 수 없는 흩어진 에너지로 변한다. 엔트로피는 우주의 어떤 하부 조직에 있는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변형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41)

 

사람 한 명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1년에 송어 300마리가 필요하다. 300마리의 송어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먹어야 한다. 그리고 개구리는 2,700만 마리의 메뚜기를 그리고 메뚜기는 1,000톤의 풀을 먹고 산다.(43) 엔트로피 증가를 이해하기 쉬운 예시

 

관개시설의 도움으로 이들의 농사는 소모되는 노동이나 인간 에너지의 단위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인간이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사회계급이 나타났고 하는 일이 차별화되었다. 임무의 차별화와 전문화는 새롭고 더 복잡한 제도 장치를 낳았고, 그 덕에 에너지의 흐름은 더 많아지고 원활해졌다.(44)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방정식을 바꾸어 왔다.(47)

 

인간이 의식을 가지게 된 진화적 존재라면, 그것은 분명 시간적, 공간적 관계의 현실을 열정적으로 추구하여 우주에 가담하려 애를 쓰는 그 자신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을 확대할 필요성, 즉 살고 숨쉬고 존재하기 위해 창조해야 할 필요성은 실제로 개인적인 생존 기능으로서의 자기 증식의 필요성에 앞설 뿐 아니라 당연히 그런 필요성을 초월한다. (53)

 

인간이 본래 철두철미하게 물질주의적이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며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하면,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을 해결할 가망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에 민감하고 우애를 갈망하고 사교적이며, 공감을 넓히려는 성향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공감-엔트로피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내어 생물권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55)

저자는 앞으로 약 760여 페이지를 통해서 인간은 공감적 본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방대한 내용으로 증명하려 했는지 책을 읽은 후에도 쉬이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1부 호모 엠파티쿠스]

 

2.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프로이트의 세계에서 인간의 다른 모든 정서는 단지 성적 충동과 죽음 본능에 억눌린 잔재일 뿐이다. 사랑이나 다정함 조차도 에로틱한 충동이 억압되고 약해진 상태로 표현된 것이라고 그는 본다. 문명에는 오직 한가지 목적이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들고 물질적 이익을 증진시킴으로써 리비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그런 목적의 수단이 곧 문명이다.(65)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설화는 남자 주인공을 인류사의 중심 인물로 못 박아 놓으려는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극장용 소품이었다.(67)

 

소설과 전화라는 매체는 남성의 감시의 눈초리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해 주는 기폭제가 되었다.(68)

 

페어베언의 도식에서...유아는 끊임없이 애정 관계라는 목적을 향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만드는 데 몰두한다. 이것이 현실 원칙의 모든 것이다. 사회화의 일차적 목표가 좌절되고 에고가 적절히 성숙되지 못할 경우, 쾌락 원리는 볼품없는 대안이 된다. (74)

 

파괴적 충동은 인간을 구성하는 본래적인 요소가 아니며, 오히려 신뢰할 만한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불만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75)

 

수티는 "타고난 유대감에 대한 요구"를 유아가 자기보존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보았고 그것이 인간 본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80)

 

인간의 아이나 동물 새끼들은 유별날 정도로 호기심이 많고 묻기 좋아한다. 그래서 보통 애착 대상에서 자주 떨어지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탐구적 행동은 애착행동과 정반대이다. 건강한 개인이라면 보통 이 두 가지 행동이 번갈아 나타난다.

보울비는 애착과 독립 사이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그의 이론을 형성하게 된다. 아주 좋은 부모는 아이에게 "안정적인 기지"를 마련해 주고 "아이가 그 기지를 거점 삼아 마음껏 세상을 탐구할 수 있게 격려한다."(90)

 

에인즈워스...안정적 애착관계, 회피적 애착관계 그리고 두 유형의 중간인 양가적 애착관계(95)

 

[2의 요약. 인간본성에 대하여 저자는 인간은 사랑(애정)을 본능적으로 원하는 동물이며, 그런 애정적 관계가 안정적인 상황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욕구, 성적욕구, 경쟁 욕구를 인간의 기본욕구로 간주하는 기존의 이론들을 반박하고 있다.]

3.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감성적 해석

뇌의 특정 부분이 마치 자기가 손을 움직이고 얼굴 표정을 짓는 것처럼 같은 부위에서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97년 자고모 리촐라티 팀이 이 뉴런을 '거울신경세포'라 이름 붙였다....과학전문기자들은 거울신경세포를 '공감뉴런'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거울신경세포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이는 개념적 추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시뮬레이션을 통해서이다. 생각이 아니라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라촐라티는 말했다.(102)

 

인간과 영장류에게 있는 거울신경세포의 발견은 양육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거울뉴런회로는 생물학과 심리학을 연결하는 매우 복잡한 미로의 실마리가 되고 있다.(109)

 

인지학자들은 다른 동물의 느낌과 의도를 읽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09)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거울실험을 통과한 동물이 얼마 되지 않고, 거울신경세포가 발견된 동물도 지금까지 몇 종 되지 않지만 그래도 동물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에게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110)

인간에게 부여된 귀한 능력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다윈은..."충동이 항상 예상된 쾌락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 근거로 다윈은 모르는 사람을 구하려고 불속을 뛰어드는 행동을 예로 든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리적 보상에 관한 생각도 없이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다윈은 그런 행동은 쾌락을 위한 충동보다는 더 깊은 곳에 뿌리 박고 있는 인간의 충동, 즉 사회적 본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115)

 

놀이를 통한 공감...놀이가 없는 공감 발달은 상상하기 어렵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 정의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118)

 

언어의 공감적 뿌리...영장류에게 공감은 본래적인 언어 이전의 형태로, 개체와 개체를 이어 주는 연결 장치이다. 공감이 언어와 문화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121)

 

마이클 아비브 같은 학자들은 기능적인 거울뉴런시스템이 없으면 언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거울뉴런시스템 없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도 반응할 수도 없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반응하는 것이다. (130)

 

[3의 요약.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공감하여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인 본능을 만드는 선천적인 요인인 것이다.]

 

4.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

누구에게나 애정을 주고 서로 배려하는 능력이 있고, 혼자 외톨이가 되거나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싫어하는 성격은 늘 예외적인 경우이고 어떤 문화에서도 정상으로 취급 받지 못한다. 우리는 양육되기 위해 태어난다.(131)

 

그린스펀은 자의식을 갖춘 정체성의 발달은 전적으로 "몇 년 동안 친밀감을 통해 양육된" 아이와 부모 사이의 공감적 관계에 달려있다고 단언한다.(136)

 

흉내, 조건화, 직접 연상은 모두 무의식적이고 다소 원시적인 공감적 각성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공감을 표현하는 기능이 인간이라는 동물에 생물학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다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입증해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정서를 우리의 정서인 것처럼 실감 나게 경험하도록" 만들어졌다.(144)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사태를 바로잡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욕감을 주는 것은 그의 인간성을 빼앗는 행위이지만, 죄책감은 다른 사람과 깊이 맺어진 유대감을 상기시켜 사회적 결합을 회복할 필요를 느끼게 만드는 내면의 메커니즘이다.(149)

 

죄책감 문화는 수치심 문화와는 매우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낸다.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의적 죄책감은 수치심에 비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도의적 죄책감은 보상이 가능하고 한 사람의 내면의 총체성을 더럽히지도 않는다. 도의적 죄책감은 자신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고양된 정서이다. 도덕성은 금지시키고 숨 막히는 규율을 들이대며 완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해주면서 그래도 세상에는 용서라는 자비심이 있다고 말해주어 아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치 있고 관심 어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인간적 결함이 세상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150)

 

우리는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에 내재되어 기본 규칙을 설정해 주는 것은 경쟁보다는 협동심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때로 이익을 위해 경쟁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하는 경쟁일 뿐이다. 오히려 이기심이 사회적 단결을 해치는 수위에 이르면 도태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160)

 

[4의 요약. 사람은 성장과 함께 공감능력이 발달한다. 더불어 인간의 본성은 경쟁보다도 협력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이타심을 인간은 가지고 태어난다.]

 

5. 인류 여정의 의미를 재고하며

물방아, 풍력의 이용...로마제국 몰락 이후 기술은 도시생활에 침투....기술의 진보로 사람들은 합리적인 생각을...13세기의 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은 자신만의 생명력을 얻어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개선하고 현세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꾸려 가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속적 합리성은 은총 및 구원의 세계관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173)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이성은 성령으로 감화된 합리적 우주에서 신이 인간에게 신앙을 강화할 수 있도록 마련해 준 선물이다. 그러나 이성은 신의 원대한 계획을 향해 '계시'가 열릴 때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두 가지 종류의 진리, 즉 계시와 이성과 관련하여, 이성은 항상 두 번째 자리로 밀려난다.(174)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이성과 신앙)두 가지 설명 모두 존재의 가장 깊은 실재는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신앙과 이성의 이야기에서 흥밋거리가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실체적 경험'이다.(177)

 

육체의 존재를 경시하거나 육체의 중요성을 부인한다. 아브라함 신앙에서 육체는 타락한 것이고 악의 원천이다. 육체의 존재는 인간 본성의 악행을 끊이지 않고 부추긴다....육체는 젊은 시절에는 욕망의 대상으로 사용되고 늙어서는 기운이 다하고 땅에 묻혀 썩어 가는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전락한다....그 중에도 외부 세계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반응할 때 나오는 감정은 특히 믿을 수 없다. ..... 우리도 "감정적으로 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감정이 이성보다 못하다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감정은 너무 세속적이고 동물적인 열정이어서 진지하게 여길 만한 것이 못 된다. 더구나 감정은 이성이 가는 길을 더럽힌다. (178)

 

신앙적 인식과 합리적 인식은 둘 다 존재에 대해 비실체적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공감이란 영역을 개발하여 성숙한 사회적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느낌과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178)

 

인간의 모든 활동이 실체적 경험,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고 전제하면서, 그런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공감 능력, 즉 다른 사람이 자신인 것처럼 그의 마음을 읽고 반응하는 능력은 인간이 세계에 참여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만들고 언어를 발전시키고, 설득하는 법을 배우고, 사회적이 되고, 문화적 설화를 지어내고, 현실과 존재를 정의하는 방법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한다. (179)

 

실체적 경험은 인간을 매료시켰던 종전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은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신앙의 시대' '이성의 시대'에서 빼내어 '공감의 시대'로 데려간다.(179)

 

데카르트...데카르트는 육체와 분리된 정신을 구상하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며 외연에 의해 자연체를 지배한다는 그림을 완성했다.(180) / 데카르트적 인간은 신의 현세적 대리인이다. 신이 활기 없는 물질세계를 질서정연한 기계로 짜 놓고 순수한 정신의 활동으로 움직임을 주는 하나의 비물질적 본질인 것처럼(신은 결국 우주 최고의 정신이다.) 인간은 이성을 갖추고 육체를 포함하여 수동적인 물질을 움직여 운동과 일을 하게 함으로써 지상에서 신과 같은 일을 하는 신의 청지기이다.(181)

 

사고작용은 감각, 감정, 느낌 추상적 논리 등을 실체적인 방법으로 결합한다. "나는 참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는 저 높이 뚝 떨어진 곳 위에서 생각하며 경험의 신체성에 의해 훼손되는 법이 없는, 데카르트의 편견 없는 자율적 정신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명제이다. (184)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항상 주변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185)

 

생각 그 자체의 발달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다른 사람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경험한 부분에 속한 실체적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의 관계가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 즉 우리 개인의 정체성과 의식은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겪는 우리 고유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단순히 자율적인 나는 없다. 우리라는 독특한 군집이 있을 뿐이다. (186)

 

우리 '내면'의 삶의 내용은 개인으로서 우리의 '내부'에 철저히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은 우리의 삶을 사는 '가운데'있고,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른 것에 대해 그때 그 순간 대응하는 방식 ''에 있다. (187)

 

칸트...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18세기의 위대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역시 실체적 지식이라는 관념을 어불성설이라고 보았다. 칸트는 아프리오리하고 선험적인 범주가 있으며, 그것이 인식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순수 형상이라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개념이었다. 순수 형상은 일종의 관할 구역에서 살아가는 혼란스러운 신체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칸트는 일상의 경험의 기만적 세계와 대비되는 이런 고착화된 영역의 숭고한 질서를 예찬한다. (187)

 

데카르트의 아프리오리한 비실체적 진리가 '이성의 시대'에 지식 기반을 제공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계시와 신의 은총이 '신앙의 시대'를 위한 배역을 정해 주었다면, 실체적 경험이라는 개념은 '공감의 시대'에 튼튼한 지적 뼈대를 제공한다.(192)

 

진리는 자율적 사실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진리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통의 경험적 기반을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이는 틈새 영역에 존재하는 이해이다. 그때 진리는 우리의 현존하는 관계와 공통으로 공유된 이해를 체계화하는 것이다.(196)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레 인생의 어떤 목적이나 방향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그 목적과 방향에 맞출 수 있는지 알려고 하게 된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궁극적인 목적은 천국에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신의 은총을 믿고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었다. 합리주의자라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쾌락을 최대로 늘이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다윈주의자에게 인생의 목적은 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적 경험을 내세우는 철학자에게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능한 한 존재의 현실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가능한 한 폭넓게 그 경험을 구가하는 것이다.(196)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같은 지평 위에 있지 않으면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201)

 

공감 의식이 성숙할수록 삶의 참여도는 더 막역하고 보편적이 되고 겹겹의 현실감은 더 깊어진다. 공감할 줄 몰라 경험을 제한 받는 사람의 인생은 그만큼 충만하지 못하다.(207)

(경험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 것이 공감인가?)

 

완벽하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성에 주어진 공간적,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207)

 

능률은 불멸성을 보장하는 현세의 도구가 된다. 능률적일수록 생산적이 되고 더 많은 부가 축적되고 허비하는 시간은 줄어들며 열역학법칙과 두려운 엔트로피 상태를 초월할 수 있다. 능률은 이제 '시간을 버는' 수단이 되었다. ...... 능률은 학교, 공공생활, 심지어 가족 관계에까지 스며들었다. 능률은 근대 인간의 최고 미덕이 되었다. 그런 열광의 밑바닥에는 보다 능률적이 됨으로써 시간을 저축하여 죽음을 늦출 수 있으리라는 무의식적인 희망이 깔려 있었다.(208-209)

 

공감의식은 천국이나 유토피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유한한자의 고통이 없는 곳에 공감적 유대감은 없다. (211)

 

범신론은 신의 초월성과 신의 내재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방법이다. 범신론에서 말하는 신은 '저 어딘가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범신론panentheism의 그리스어 어원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pan' '모든 것'을 의미하고, 'en' '', 그리고 'theos' ''을 뜻한다. 신은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이지만,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따라서 신은 내재적이다. 범신론에서 신은 '바로 여기에 right here' 있고, 그래서 신은 또한 '바로 여기에'있는 것을 넘어선다.(215)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세계 유수 종교들의 중심 설화는 여전히 실체가 없는 탈속적 내용이 대부분이며, 그래서 공감을 확대하고 유대감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가로막고 신의 내재성을 차단한다.(215)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그 동안 인간 행위의 지배자로서 감정에 사로 잡히지 않고 작용했던 '합리적 정신'이라는 개념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원시적인 리비도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곳은 쾌락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드id의 영역이다.(220)

 

인간이 선한 것은 처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 적절한 행동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곤경을 나의 곤경으로 느낌으로써 도덕적 행동을 실체화한다.(222)

 

[5의 요약. 신앙의 시대, 이성의 시대 그리고 그와 차별되는 공감의 시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각 시대가 이야기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 함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존재의미에 대해서 기본적인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2. 공감과 문명]

 

6. 고대 신학적 사고와 가부장적 경제

구석기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조차 다른 생물이나 자연의 힘에 비추어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독특한 존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은 자주 열등감에 사로 잡혔고, 그래서 다른 동물을 경배하거나 반인반수 같은 혼혈 신들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았다. ..... 고대인들은 매 순간 그의 존재에 영향을 주는 주변의 만물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251)

 

히브리 사람들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화적 의식을 단숨에 신학적 의식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신화적 의식에서 신은 집단적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지만 신학적 의식에서 신은 유일하고 보편적인 강력한 힘을 앞세워 각 개인과 대화를 시도한다.(265)

 

히브리 사람들의 우주관은 집단이라는 '안개' 속에서 탄생하는 개인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눈을 뜬 자의식은 인류사에 처음으로 진정한 공감의 물결을 예비했다.(266)

 

우리의 정체성은 늘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총합이 우리라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제는 규범적이라기보다 동어반복적이고 설명적인 명제가 된다. 깨달음의 핵심은 ''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유일한 '우리'가 수없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276)

 

자기 인식과 초보적인 개인의식은 거대한 관개농업을 기반으로 한 제국 시대에 출현했고, 그와 함께 원시적 공감은 보다 발달된 공감의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감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과정은 개인 각자가 고유한 존재이며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 국제 도시 로마와 기독교의 발흥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보편적이고 형상도 없으며 초월적인 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각 개인이 하나님과 고유한 실존적 관계를 갖는, 보다 국제적이고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그들의 스토리는 로마의 신성한 공식 종교들을 완전히 흡수할 힘이 있었다.(287)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의 믿음 때문에 독재가 앞에 끌려 나갔고,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처형되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사랑을 설파했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의 권세는 야수 같은 힘을 휘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나약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나왔다. ... 그리스도 이야기는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감정적인 평등의 스토리이다.(292)

 

그리스도 이야기에서 나약함은 특히 중요한 주제이다. ....나약함은 모든 존재를 평준화시킨다. 우리는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해 가며 살지만,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나약함을 인정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처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294)

 

예수의 삶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동정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영감을 주었다.(301)

 

아브라함은 유대인 족장으로...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버지 신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아내와 아이들도 가장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부권계보의 첫 고리가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302)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보편성을 내세우는 종교를 로마제국의 보편 종교로 탈바꿈시켰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영적 합법성과 후원까지 허락했다. .... 그 과정에서 예수의 모습도 새롭게 바뀌었다. '예수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의 신, 이적을 행하는 자, 구세주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스스로를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 보았듯이, 하나님도 천국의 황제로 물러났다.'(308)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탄생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에 관을 씌웠고 주교들은 이 세상에서 신의 목소리를 내는 자로 스스로 관을 썼다.(309)

 

로마 멸망의 원인을 말할 때면 흔히들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 노예 노동력의 착취, 야만족의 우월한 전술 등을 지적한다. 이런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토양의 비옥도가 나빠지면서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 데서 찾아야 한다.(314)

 

역사가들은 흔히 로마제국의 흥망을 거대한 정치적 현상으로 다뤄왔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로마제국의 흥망은 새로운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체제가 만든 시너지 효과가 보다 복잡한 사회 제도를 조장하고 그 제도가 인간 의식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역사에서 반복되는 테마의 고전적 사례일 뿐이다. 인간 의식의 변화는 공감의 물결을 증폭시키고 엔트로피 증가로 인한 피해를 증가시키면서 이 둘의 변증법을 전개해 나아간다.(319)

 

8. 중세 말의 연산업혁명과 휴머니즘의 탄생

 

장칼뱅은 자신의 처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며,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끊임없이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지 그 조짐은 알아낼 수 있었다.(331)

 

프로테스탄트들은 끊임없이 자기 분석에 골몰해야 했다. .... 초기 프로테스탄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매일 손익계산서로 작성하여 따져 볼 수 있는 일기장이라는 도구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이었다. 일기장은 자신이 한 행동을 '읽어보고'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장부였다.(332)

 

16세기...북유럽 르네상스 / 르네상스라고 하면 보통 고대의 철학, 정치학, 문학 작품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었던 문화 운동과, 14세기 후반 피렌체, 베네치아와 그 밖의 북이탈리아 도시의 예술에서 발견되는 뉴리얼리즘과 정서주의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정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16세기 후반 북유럽을 무대로 일어난 후기 르네상스이다.(338)

 

16세기에 자아라는 개념이 나타나면서 자신의 생각과 의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344)

 

진실성은 중요한 것이지만 상황이나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페르소나를 바꾸게 되면 생각이 수월해지고 공감의 폭도 넓어지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외적인 가면은 진정한 자아를 속이거나 숨기는 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덕분에 다른 페르소나를 써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고 평상시 만나기 힘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346)

 

18세시 들어서며 적어도 유복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생활이란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 자신만의 공간과 소유물을 주장했다. 중세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사적인 공간이 구분되면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개인성과 자율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348)

 

유럽에 의자가 널리 소개되면서 근대의 자율적 개인이 출현했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싶다.(349)

 

길드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시장의 힘이 아니라 관례였다. ... 길드는 공개시장, 자유, 노동, 토지의 영리화, 경쟁가격 등 근대 경제의 기본을 이루는 모든 징표를 거부했다. (365)

 

생산이 자본에 예속되고 자본가와 생산자 사이의 이런 계급적 관계가 나타나는 현상은 구식생산과 신식 생산 사이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366)

 

민족국가는 나중에 시민이 될 백성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 앞에 놓인 미래에 대해 유토피아적 비전을 제시하고 납득시켜야 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더 이상 불멸의 길이 아니라면, 적어도 재산을 축적하고 교환하는 형태로 무한한 물질적 부를 마음껏 추구하는 것만이라도 대안이 되어야 했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충성도는 그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그리고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국가가 자유시장에서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교환할 권리를 보호해 줄 때 그 계약은 유지된다.(369)

 

베스트팔렌 조약은 모든 국가가 자주권과 독립권을 갖고 있으며, 각 국은 정해진 영토 내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373)

 

민족국가는 결함도 많았지만 공감의 감수성을 크게 확장할 수 있는 온실이 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역사와 운명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같은' 시민들은 애국심이 요구되는 순간이면 언제든지 '우리' '저들'을 가르는 선을 분명히 긋고 국경 안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공감을 크게 확정시켰다.(376)

 

근대적 사고로의 변화...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영혼은 집단적 의지와 구별되지 않은 채 천국의 문에서부터 지옥의 불구덩이까지 이어지는 '존재의 대사슬'에서 미리 할당된 자리에 매달려 있는 순종적인 하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주권을 가진 자율적 개인으로 같은 경기장에서 상호 관계를 통해 우애와 결속을 과시하고 개인의 행복과 끝없는 진보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376)

 

루소..."나는 내가 만난 어느 누구와도 다르게 생겨먹었다. 감히 말하지만 나는 어떤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더 못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적어도 나는 다르다." "평범한 사람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모든 인류에게 잊히는 편이 낫다."(381)

 

괴테는 데카르트, 뉴턴, 그 밖의 계몽사상가들과 결별했다. 그들은 세계를 순수한 존재로 보았으며, 정해진 수학 공식에 따라 엄밀한 기계론적 원리에 의해 추진되는 것으로 그렸다. 그러나 괴테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자연을 보았다. 자연은 항상 변하고 진화하며 새로운 형태와 현실을 만들어 낸다. 괴테가 경외감을 느낀 것은 자연의 불변성이 아니라 자연의 진기함이었다.(386)

 

괴테.."자연은 불변을 싫어하고 정체된 모든 것을 저주한다. ....자연은 무로부터 모든 것을 만들지만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저 흘러가게 할 뿐이다. 하지만 자연은 경로를 알고 있다.(387)

 

괴테..."세상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래서 세상에 '말을 거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인이다.(388)

 

독자들은 돈키호테가 어처구니없는 몽상가이면서도 자신의 삶을 통해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눈치챈다.(391)

삶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것,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주어진 일을 하며 사는 것보다, 고통이 수반될 지라도 나를 설명하기 위한 삶의 오디세이를 가져보는 것...하지만 멋 훗날 그저 몽상가로 해석되어 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9. 근대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사고

근대의 여명기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수많은 관념이 쏟아져 나왔고, 그 관념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새로운 우주관으로 인정받기 위해 다투어 경쟁했다. 바야흐로 '이데올로기적 의식'의 시대였다. (397)

 

근대의 중요한 의문은 느낌과 생각,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가 하는 문제였다.(398)

중세는 '신앙과 이성'의 대결이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느낌과 생각'의 대결이 인간 자신에 대한 본성 탐구를 위한 여정이었음.

 

느낌과 감정은 종교개혁가들에게는 타락한 것이고 계몽철학자들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이었다.(399)

 

감정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이성적sensible'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변해 가는 과정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이 단어는 원래 지각과 반성 능력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18세기에 이 단어는 '감성sensibility'이란 단어에서 보듯, 순화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감정을 가리키는 말로...(400)

 

미국 독립전쟁이 시장에서 개인의 기회와 해옥을 추구할 권리를 강조한 반면, 프랑스 혁명은 동포애를 더욱 강조했다.(405)

 

산업혁명시대...교육의 사명도 철학과 신학적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인문주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근대 공교육을 통해 국가의 교육자들이 제시하는 목표는 막 발흥하기 시작한 국가 경제를 끌고 나아갈 '생산적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과 에너지 혁명이 결합하면서 지구의 천연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역사상 가정 복잡하고 능률적인 사회구조가 만들어 졌다.(421)

 

낭만주의 운동은 하나의 철학이자 느낌이다. 낭만주의 운동은 본지적으로 수학에서보다는 자연에서 영감을 찾았다. 계몽철학자들의 '신은 우주 시계의 태엽을 감아 놓은 다음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 시계 제작자'였지만 .... 낭만주의자들은 자연계의 감성에 운명을 맡기는 편이었고, 범신론자를 자처했다. 이들은 자연 만물에 신성한 빛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426)

계몽주의철학자의 신에 대한 개념을 비유해 놓은 표현이 멋있지 않습니까?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계몽철학자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유용한 자원으로 여겼지만,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은 곧 이며 모든 창조성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426)

 

프로테스탄트 개혁가와 계몽철학자들처럼 낭만주의자들도 개인주의를 강조했지만, 낭만주의의 개인은 그들처럼 구원을 찾아 신과 단독으로 대면하지도 자신의 이익을 좇아 시장에서 홀로 서지도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의 개인주의는 종류가 달랐다. 그들에게 개인은 창조적 잠재력을 부여 받은 고유한 존재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초월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열어 주고 이성이 계몽철학자들의 길잡이 역할 했다면,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상상력이 그 역할을 맡았다. 역사 이래 처음으로 인간의 상상력이 관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427)

 

낭만주의의 대부 루소는 누구나 자연 상태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타락한 문명이 방해꾼이 되어 개인의 자연적 성향과 가능성을 억누른다고 주장했다.(428)

 

끊임없이 무언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인생의 짧음을 절감한다는 것이다.(434)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815)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도덕성의 기초는 순수이성이 아니라 동정심이며 감정과 느낌이 동정적 본능을 활성화한다는 주장.(436)

저자가 '존재와 당위의 간극'에서 주장했던 "우리의 공감의식은 주어진 도덕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인 환경에 의존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의 근거와 도덕적 감수성은 유아 시절부터 양육해 주는 부모, 가족, 이웃의 환경에 얼마나 밀접하게 소속되는가에 따라 개발되는 정도가 달라진다라는 주장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기인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쇼펜아우어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설득력이 없다고 단정한다. 어떤 보답이나 벌이 없다면, 인간은 아프리오리한 도덕적 규약을 떠받들어야 할 의무만으로 사심 없고 도덕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438)

 

인간을 도덕적으로 선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없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칸트의 말대로 아프리오리하게 존재하는 어떤 도덕적 규약을 순수한 의무감으로 따르겠는가? 그렇게 해서 어떤 보상이나 벌이 따르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439)

보상이나 벌, 즉 인간의 규범적 장치를 인간이 도덕적으로 되는 것의 원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앞에서 주장했던 "인간이 선한 것은 처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명령이나 약속에 의해 도덕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곤경을 나의 곤경으로 느낌으로써 도덕적 행동을 실체화한다."라는 주장과는 상충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지엽적인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낭만주의자들은 존재의 적을 소유라고 생각했다. .... 소유에 집착할수록 소유가 우리를 규정하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존재와 멀어진다. 우리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만다.

마르크스는 산업화의 공세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회에 주목했다. 그는 "경제학자들은 삶과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돈과 부라는 형태로 그것을 되돌려 준다."라고 썼다.(456)

 

10. 포스트모던의 실존적 세계에 담긴 심리학적 의식

철도는 일괄적인 운행을 위해 표준 시간대를 도입했다. ... 1884년에는 영국의 그리니치를 경도 0으로 하는 세계 표준 시간대가 설치되었다.....표준화와 자동화...(473)

 

20세기 전기는 미국과 세계를 석유 시대와 자동차 시대, 2차 산업혁명으로 몰고 간 통제 메커니즘이자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었다.(475)

 

사회 계급의 타파, 복수의 시각, 경험의 민주와, 다양한 사람들과의 첩촉, 이 모든 것이 심리학적 의식의 시대와 거대한 공감의 물결을 예비하는 발판이 되었다.(489)

 

심리학적 의식의 여명기인 1890년대에 이미 '착한성격'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했고, 그보다는 '개성'을 가꾸는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었다.(492)

 

착한 성격이라는 개념은 세계가 유일하고 보편적이고 기계적인 공식에 따라 움직인다는 계몽주의적 관점과 썩 잘 어울렸다.(493)

 

개성personality의 등장은 사람들의 의식이 갑작스레 변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사람들은 도덕적인 고매함보다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것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493)

 

사람마다 개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 개인의 나약함이나 그들만의 포부에 보다 민감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495)

 

자존감selfesteem = 성공/허세

제임스는 분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분모가 줄어들어 분수가 커지는 쪽이 좋다. 허세를 포기하는 것은 허세를 만족시키는 것만큼이나 다행스러운 축복이다.(499)

 

[3. 공감의 시대]

 

11. 세계적 공감의 정상을 향한 등정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곤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공감의 강도가 줄어들면서 지켜보는 재미만 남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딱한 처지도 너무 자주 보면 둔감해지고 심지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보았을 뿐'이라며 선을 긋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뾰족한 방법이 없다.(537)

 

<인류의 도시화_페이지 537~539>

인류의 정착은 기원전 9000년경 유라시아에 소규모 농경사회가 형성되며 나타났고 처음으로 원시적 촌락이 세워졌다. 관개문명은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도시인을 만들어 냈고, 작은 도시에도 수만 명의 주민이 살았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의 대제국들은 인구 5만에서 10만을 헤아리는 거대한 수도를 형성했다. 고대 예루살렘의 인구는 한창때 6만 명을 헤아렸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그리스 도시국가에는 10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살았다. 고대도시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곳은 1,2세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로마제국이 유일했다.

인간의 생활이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복잡하고 밀집된 도시 중심으로 바뀐 것은 불과 200년 전의 일이었다. 인류의 도시화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저장된 태양에너지, 즉 땅 속 깊은 곳에 석탄과 석유와 천연가스의 형태로 감추어진 주라기 때의 매장 자원이었다. 증기기관과 내연 기관에 의해 동력화되고 전기로 바뀌어 송전선으로 보급되는 이 거대한 화석연료라는 보물은 아무리 써도 닳지 않는 무한정한 양의 에너지를 제공할 것처럼 보였다. 화석연료로 동력을 얻은 경제활동의 속도와 흐름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농작물의 생산량은 갑자기 증가했다. 제조 상품의 대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경제활동으로 신흥 부르주아들은 몇 세기 전의 왕족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전례 없는 생산성 증가는 인구의 대량 증가와 세계의 도시화로 이어졌다. 산업혁명에는 집중화된 생산 시설과 많은 근로자가 필요했다. 세계 최초로 산업화를 이룩한 영국은 1820년에 100만 명이 넘는 최초의 근대 산업 도시를 자랑했다. 1900년엔 인구 100만 명을 초과하는 도시가 열한 개에 달했고, 19050년엔 일흔다섯 개, 1976년엔 191개의 도시가 100만 명 인상의 인구를 거느렸다. 오늘날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 414개에 달하지만 인간의 놀라운 성장 속도를 생각할 때 도시화로 향하는 길은 끝이 없어 보인다. 지금도 지구에선 매일 34만 명의 생명이 새로 태어난다. 2042년이면 세계 인구는 90억 명이 넘을 것이고, 다들 대부분은 도시 밀집 지역에 거주할 것이다.

 

상업적 유대와 공감적 유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얼핏 역설로 들리겠지만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분명 공생적이다.(540)

 

글로벌한 문화적 디아스포라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었다. 이민자는 가상공간과 실제 공간에서의 이동을 즐기고 다중적 환경에서 사업을 벌이고 교제 활동을 벌인다.

디아스포라라고 하면 유랑하는 유대인이나 집시나 이주 노동자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런 고대적 개념의 디아스포라는 이제 글로벌한 현대적 개념으로 바뀌었다.(548)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은 여행과 관광 체험이 착취적 상업 행위로 변질되는 역효과를 낸다고 지적한다. ... 토착민과 토착 문화가 관광객의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한 상품이 되는, 일종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과 토착민의 관계는 새로운 유형의 식민적 성격을 가진 '체험 상업'으로 전락하여 돈을 주고 경험을 사면, 주인 문화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토착민들은 돈을 받고 연기를 하는 식이 된다. 그들이 하는 일은 무대화된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토착 문화는 격이 떨어져 가벼운 오락이 되고, 즐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판다.(551)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생각의 기준이 바뀌고 사고의 틀이 넓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이국적이고 낯선 곳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552)

 

예상했던 대로 가난한 농업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생존 가치가 우세했고, 사회생활에서 종파와 가족의 결속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흥미로운 것은 신진화된 산업 국가의 경우 4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합리적인 물질주의에서 자아 표현과 삶의 질 쪽으로 가치관이 급격하고 변화고 있다는 사실이다. (561)

 

생존가치에서 물질적 가치고, 그리고 다시 삶의 질로 가치가 옮겨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을 이루기 위해 지구의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착취했고 그 여파로 공감의식이 생겨난 것이다.(565)

 

공감의 물결을 타고 있지만 지구와 대다수 인류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선택 받은 소수의 인류가 과연 그들의 탈물질주의 가치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작전 계획에 투입시켜, 더 늦기 전에 위기를 벗어나 그들 자신과 그들 공동체를 보다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미래로 향하도록 미리 손을 쓸 수는 있는가 하는 점이다.(565)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선에 대한 추구는 가능할까? 최근에 글로벌 경제에서 탄소에너지 절감을 두고서도 많은 국가들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은 각 개인의 이기주의적 본성이 지역의 님비현상으로 그리고 나아가서는 국가적 이기주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우리 인간의 본성이 '나라는 이기'를 넘어 '우리라는 공감'에 있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내가 쉬이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회 곳곳의 우리의 얼굴 때문이 아닐까.

 

인터넷의 발달 속도를 생각하면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세계인의 의식에서 티핑포인트나 사고의 패러다임에 어떤 전환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다.(589)

이집트와 리비아의 변화의 물결이 예사롭지 않다.

 

12. 지구촌 엔트로피의 심연

석유와 석탄과 천연가스는 꾸준히 일정 분량의 에너지를 제공하지만, 화석연료 중독에 대한 총 비용이 세계 경제의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황혼기에 이미 접어들었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595)

 

이들 지구온난화 가스는 주로 대기에 집중되어 지구에 도달한 태양의 복사에너지가 만든 열이 다시 우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놓는다.(597)

 

10년 내에 지구온난화 배출 가스를 줄이려는 일관되고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다급한 경고로 결론을 맺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지구는 막다른 길에 갇혀 인간의 문명과 우리 인간과 지구상의 다른 형태의 생명체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607)

 

필요 이상의 재산은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 주고 우울, 걱정, 그 밖의 정신적, 신체적 질병에 걸리기 쉽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을 못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 부와 소유의 추구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런 쪽에 그만큼의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보다 심리적으로 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620)

 

그래서 생활수준은 알코올이나 마약과 비슷한 면이 있다. 새로운 행복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일종의 쳇바퀴를 타는 셈이다. '쾌락'이란 쳇바퀴를. 행복을 유지하려면 계속 쳇바퀴를 굴려야 한다.(624)

 

팀 케이서는 양육을 소홀이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소비를 통해 행복과 안정감을 찾으라고 유혹하는 광고 메시지에 특히 약점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627)

 

부유한 사회에서 행복은 평준화 되고, 심지어 삶의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한계 이상으로 수입이 늘어나면 행복은 오히려 줄어든다.

'상대적 부'에 대한 관념을 버리고 각 개인의 필요에 따른 '절대적 부'를 정의해 보는 것은 한 개인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절대적 부'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가령 나는 왜 돈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13. 분산 자본주의 시대의 여명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새로운 에너지 제도로 수렴되어 전혀 다른 생활 환경을 만들어 낼 때 거대한 경제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언급했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런 수렴의 꼭짓점에 있다. 21세기의 분산 에너지 제도로 지난 20년의 분산된 정보통신 혁명이 한곳으로 집중되고 있다.(644)

 

집단적 지혜와 협업적 학습의 위력(657)

향후 내가 특정주제를 연구하여 책을 준비할 때 좋은 아이디어로 활용해 볼 것.

 

'접속권'을 확보하려는 21세기의 개인이나 집단의 투쟁은 재산권을 확보하려 했던 19세기와 20세기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게 될 것이다.

 

N세대net generation. 서열을 하찮게 여기고, 네트워킹 방식으로 사람이나 세상과 관계를 맺고, 협력이 체질화되어 있고, 자율과 배척보다는 접속과 포함에 관심이 있고, 인간의 다양성에 감수성이 강한 밀레니엄 세대는 역사상 가장 공감적인 세대가 될 확률이 크다. 분산적이고 협동적이고 비위계적인 사회고 곧 공감적인 사회이다.(674)

 

아메리칸 드림은 개인의 자율성과 기회를 중요시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물질적 이익을 강조한다. 유러피언 드림도 개인의 창의력과 경제적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문제에도 똑같은 비중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678)

 

14. 즉흥적 사회에서의 연극적 자아

역할 연기는 더 이상 치료기법이 아니라 X세대와 밀레니엄 세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의식 형태이다. (688)

 

이제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배우이다.....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연기하고, 역사상 가장 크고 지속적인 연기 속에서 새로운 역할과 페르소나를 실험한다.(691)

 

신화적 의식의 시대에 영웅은 한 인간의 척도였다. 그런가 하면 신학적 의식의 시대에는 신앙심이 기준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의식의 시대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성실하고 선한 성격을 가져야 했다. 심리학적 시대에는 남의 눈에 잘 보이려고 집착했다. 그러나 연극적 의속 속에서 자란 세대에겐, 진정성이 그 사람의 시금석이 된다. (699)

표면연기는 속임수에 의존하고 심층연기는 상상력에 의존한다.(701)

 

데카르트....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자....나는 참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708)

 

역할 연기는 그와 대립되는 '실질적 자아'가 보장되어야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자아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식이 없다면, '역할 연기'도 의미가 없다.(701)

 

우리 각자는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한 성분이지만, 그것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구분하는 관계적 경험의 고유한 집합체이다. 자아는 한 개인이 평생 겪는 경험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며, 그가 속한 관계와 그가 겪는 경험이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그런 차별성을 놓치지 않아야 공감 의식은 꾸준히 성숙하여 글로벌 의식을 위한 정신적, 사회적 접착제로 기능할 수 있다.(711)

 

무차별적으로 글로벌하기만 한 '우리'에 파묻히면, 모두 균일한 존재로 돌아가고 만다. 그때 우리는 무차별적인 신화적 안개에 갇혀 자아의식도 없고 오직 생물학적으로 만들어진 공감적 고통에 대한 초보적 의식만 갖게 된다. 차별화된 자아의식이냐, 아니면 세계를 하나로 둘러싸는 통합된 관계적 웹이냐를 놓고 둘 사이에서 변증법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의 생존에 대한 미래의 전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대이다.(712)

 

15. 정정에 이른 경제의 생물권 인식

갈수록 개체화는 뚜렷해지고 서로 다른 단계의 의식을 가진 인간이 공존하고 있는 세계에서 '생물권'은 하나의 종으로서 인류를 하나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진 유일한 배경일지도 모른다.(734)

 

뚜렷한 목적도 없이 70억 이라는 개개인을 하나로 연결하는 네트워크는 쓸모 없는 에너지의 낭비처럼 보인다.(734)

 

공감의 문명이 이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감싸는 거대한 생명권과 전체 인류에게로 공감의 범위를 빠르게 넓혀 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감적 유대 관계를 다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기후 변화와 대량살상무기의 증식이라는 형태로 무섭게 속도를 올리고 있는 엔트로피라는 괴물과 충돌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제때에 지구촌의 붕괴를 피하고, 행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761)

 

 

3. 내가 저자라면

 

내가 저자라면 책의 분량을 줄일 것이다.

 

저자는 '공감'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역사를 보고 심리학과 철학의 발전사를 후대적 입장에서 살펴보고 정리하고 있다. 한가지 거울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뛰어난 통찰력'에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일부이기는 하지만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내가 저자의 생각에 보조를 맞추지 못해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는 부문은 이렇다. '공감의 물결은 북부 르네상스와 16세기 인문주의 시대의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18세기 감성의 시대에 힘을 결집하여 구시대의 인습을 서서히 몰아냈다.'라는 부문과 같이 저자는 역사발전, 인류진화의 동인을 '공감'으로 주장하고 있다. '인류 진화와 역사의 진보를 '공감'이라는 창을 통해서 보니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하는 관점과 '인류 진화의 동인은 공감'이다라고 하는 관점은 다르지 않을까. 저자의 주장에서 왠지 전말이 바뀐 것 같은 어색함을 느낀다.

 

책은 방대한 심리학, 철학, 역사학, 과학을 그의 탁견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부분부분을 읽을 때는 재미와 함께 유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주제로 돌아오면 그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함을 느끼게 된다.

공감이라는 인간과 삶에 대한 본성에 대한 이야기 인지, 에너지와 자원의 무절제한 낭비를 일삼는 우리를 꾸짖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인지 나는 그것의 사이에서 책을 읽는 내내 길을 찾게 된다. 저자는 아마도 그것의 두 가지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듯하지만 그 두 가지가 내 안에서 하나된 소리로 울리기에는 둘을 연결하는 고리가 느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자는 이런 나의 의문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는 듯 "더 이상 지구를 쓰고 버린 에너지로 채울 것이 아니라 동정과 아량으로 채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의식이 장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어떻게 발전하여 그 어느 때보다 더 복합적인 에너지 소비 문명을 이어받게 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지난 세월의 인간의 의식을 재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의식의 향방을 재정립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라고 이 책의 목적과 지향하는 바를 직접 이야기 하고 있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리고 다시 되집어 보는 이 시간에도 그런 일섬(一閃)의 깨침이 전달되어 오지 않는다.

 

인간문명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겨우 생명권의식에 도달할 것인가? 인류가 역사의 먼지 더미로 전락한 후에 달콤 씁쓸한 세속적 지혜만 남을 것인가? 하는 저자의 날카로운 물음에 '공유지의 비극'을 떠올리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사해동포적인 공감'의 시대에 아직도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구시대적인 나만의 에토스인가?

 

 

[기타. 재미있는 부문들]

1. 해리 하로 교수의 원숭이 실험_철망으로 만든 어미원숭이 VS 천으로 만든 어미원숭이(27)

2. 에이즈워스의 3가지 상황에 따른 아기들의 행동유형(95)

3. 거울실험. 침팬치, 코끼리, 돌고래를 통한 거울실험_자기정체성의 확인(110)

4. 스탠리 그린스펀의 인간의식 발달의 여섯단계(132~133)

5.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이라는 책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403)

6.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의 이념적인 차이점(405~)

7. 플랜시스 골턴의 소 몸무게 실험을 통한 '대중의 지혜'(657)

8. 사유재산의 인식에 대한 변화 (665~667)

IP *.163.164.178

프로필 이미지
우산
2011.03.04 12:57:49 *.146.26.24
와~ 잘하고계시는군요..
삼겹살이 눈에 아른거려요..
12주 후에 뵐 수 있으면 1기와 함께해주세요. 꼭이요...
프로필 이미지
yves saint laurent
2011.05.31 17:48:35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90711
538 3.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2] 미선 2011.03.06 4512
537 [7기]Book_review 3차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file [2] 오경희 2011.03.06 4345
536 [7기 레이스_3주차]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구본형 file [2] 미나 2011.03.06 4454
535 유명과 무명 사이 [2] 임수경 2011.03.06 4411
534 [7기 연구원-지적 Race]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리뷰 [2] 장윤영 2011.03.04 4421
533 가르침과 배움 [2] 지수원 2011.03.02 4493
532 [먼별3-25] <헤르만 헤세의 "예술"> 헤세는 예술이 뭐라 생... [2] 수희향 2011.03.02 4368
531 [7기 연구원 지원] <공감의 시대> 북리뷰 [2] 이현정 2011.02.28 4357
» [7기지원] 2주. 공감의 시대 / 제레미 리프킨 file [3] 강훈 2011.02.28 5329
529 [7기 지원] 2주차 공감의 시대 file [2] 전민정 2011.02.28 4591
528 [예비7기] 2주차_공감의 시대_제레미 리프킨 file [1] 김서영 2011.02.28 4444
527 [7기]Book_review 2차 공감의 시대 file [1] [2] 오경희 2011.02.28 4901
526 [7기 레이스_2주차] 공감의 시대 file [1] 미나 2011.02.27 4594
525 [7기도전-북리뷰] 제러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4] [3] 유재경 2011.02.27 5192
524 [7기 연구원-지적 Race]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리뷰 [3] 장윤영 2011.02.27 4548
523 2. 공감의 시대 [1] 미선 2011.02.27 4657
522 [7기 레이스] 제레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file [3] [33] 김경인 2011.02.27 9452
521 [7기리뷰] 공감의 시대_제레미 리프킨 file [1] 양경수 2011.02.27 5810
520 [7기 연구원지원] 공감의 시대를 읽고서 [3] [2] 박주선 2011.02.27 4398
519 [7기] 공감의 시대 file [1] 이루미 2011.02.27 4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