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미나
  • 조회 수 4552
  • 댓글 수 5
  • 추천 수 0
2011년 3월 13일 10시 14분 등록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1.     저자에 대하여 김용규
kyk.JPG

저자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서울 한가운데이지만 꽃나무, 과일나무들로 둘러싸인 벽돌집에서 궁금한 것이 유난히 많은 딸,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함께 알콩달콩 살고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자택에서는 차분한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10년 전 50만원을 주고 산 오디오라 스피커 한 쪽이 잘 안 나오는 것 같다며 응접실로 다과와 커피를 내오는 저자는 스스로를 전업주부라고 소개했다. “저는 불편한 거 싫어합니다. 보내주신 질문지에 대한 답변은 이미 정리해 놓았으니, 그냥 편안하게 대화나 나누다 가시죠그의 집안 풍경과 가족의 모습 그리고 짧은 대화에서 느껴지는 저자 김용규는 왠지 자상하고 재치있고, 가부장적인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남편이자 아버지일 것 같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어느 날, 아내가 피아노를 치고 옆에서 저자와 사랑스러운 딸이 함께 노래를 무척이나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가족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규정되어진 을 싫어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인 듯하다. 본인을 전업주부로 소개한 대목을 읽자마자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중 다윈의 진화론에 관련하여 저자가 썼던 부분이 생각났다. 진화론이 나와서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던 당시에 자연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해 악용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부분들을 정당화했다는 사실을 말할 때 느껴졌던 저자의 분노,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한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었던 그의 진보적 가치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 요청을 해온 대학생들에게 나는 그렇게 나설만한 사람이 아닙니다며 인터뷰 요청을 사양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그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과 없는 종합대학의 대학생들에게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요청까지는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취업 문제에만 매몰돼 인문학적 가치를 잃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에 대한 인터뷰 요청을 허락했다는 점에서는 역시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회에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고자 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고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철학이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에 철학은 잘만 받아들이면 여전히 우리의 삶과 사회를 크게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을 가진 저자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대학생 기자의 질문에도 여러 가지 예와 이야기를 들어 대답을 하는 것 보며, 정말 이 사람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구나란 생각과 그래서 책도 그렇게 이해하고 읽기 쉽게 쓴 것이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임금과 신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마주 대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의 의미와 가치도 함께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어떤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을 과학, 그 어떤 것의 의미와 가치를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 더 넓게는 인문학이다.‘ 이 대답을 들으니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에서 왜 그토록 수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등장을 했고, 그들이 했던 논쟁과 생각들에 대해 독자들을 이해시키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자는 관계 맺기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인간은 하나의 존재물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물들은 무엇이라는 본질과 있음이라는 존재로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물 중 오직 인간만이 무엇-사회적 지위, 재산, 명예, 등 자기 자신을 말해주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누군가가 못생겨도, 성격이 나빠도,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이 없어도 있음그 자체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 무엇이 아닌 존재자체로 맺는 관계가 올바른 관계라고 얘기한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아마 존재일 것이다. 신의 존재,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증명, 증명의 과정에서 오고 가는 다양한 논리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저자의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존재로 인간관계를 맺는 저자의 주변에는 왠지 좋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저자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전문가들과의 논담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폭넓은 만남이 바로 그가 책을 집필하는 이유이다.

 

책을 읽으며, 그리고 읽고 나서 나는 저자를 만날 수 있어 정말 기뻤다..

 

<참고자료>

1)     포카라의 실전투자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김용규’ http://bit.ly/eJqP1L

2)     사진출처 : 단국인의 소통공간 dvoice ‘자유기고가 김용규, 철학을 말한다()’ http://bit.ly/hFmpO6

3)     단국인의 소통공간 dvoice ‘자유기고가 김용규, 철학을 말한다()’ http://bit.ly/eaRbLZ

4)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저자 소개

 

2.     내가 저자라면

1)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       디아트리베 수사법의 사용 : 지은이의 말에서 저자는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겠다고 한다. ‘이게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본문을 읽는 순간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책을 읽고 있지만, 마치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이런 전개방식 덕분에 8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이 술술 읽혔다.

-       인용문으로 시작 : 각 부를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       각 부의 시작에 나오는 이야기와 주제의 환기 : 각 부의 첫 부분은 종이색을 달리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는 항상 이어질 주제에 대해 정리하고 요약해 준다. 이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동시에 주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줌으로써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       다양한 예시의 활용 : 저자는 예시를 정말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활용한다. 성경 구절, 신화이야기, 신체를 활용하는 것, 이미 알려진 소설이나 영화 등의 적절한 예시를 많이 썼다. 신기하게도 이해가 좀 어렵다는 느끼는 시점에는 늘 예를 보여줘서 이해하기가 매우 쉬웠다.

-       질문하는 화법 : 이미 담화를 나누는 식이기 때문에 중간중간 정말일까요?’, ‘궁금하죠?’ 등의 질문들이 나오면 진짜 저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고, 궁금해지게 만든다.

-       요약/정리 그리고 연결 : 각 부의 마무리는 늘 그 부를 시작했을 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요약 및 정리해주고, 다음 부에서 어떻게 내용이 연결될 것인지 혹은 왜 다음에서 이 내용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개연성을 말해 준다. 이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 : 중간에 그림이 몇 장 나오는데, 다른 책들과 달리 저자는 그 그림과 관련된 배경지식과 그림의 해석 등에 대해 꽤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그림과 제목 정도만 보여주는 것에 좋은 것 같다. 제목만 있었더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그림인데, 설명을 읽음으로써 그림을 다시 보게 된다.

-       각주의 활용 : 다른 책에 비해 각주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책이나, 도시 등등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는 각주를 많이 활용해서 설명한다. 이는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생소한 많은 단어들과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       큰 글씨 : 다른 책에 비해 글씨가 크다. 처음에는 ‘800페이지를 언제 다 읽지?’라고 걱정을 했었는데, 읽다 보니 저자가 워낙 쉽게 책을 쓰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책 읽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이것은 글씨를 크게 해서 한 페이지에 많은 글자를 넣지 않은 덕분이기도 한 것 같다.

-       카테고리의 세분화 : 5, 9, 그리고 장 내에 더 세분화된 카테고리로 나뉘어져 있다. 생소하고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세분화한 것이 나처럼 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도 접해보지도 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2)     책을 읽으며 좀 아쉬웠던 부분

-       기됵교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성경 구절들이 크게 와닿지가 않았다. 물론 책을 전개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아는데, 지은이의 말이나 책의 첫머리에서 성경구절이 많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한번이라도 언급 해 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덕분에 성경 구절을 많이 읽어보고 그에 대한 해석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       책의 주된 목표였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 급수펌프, 정수장을 파악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더불어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과 이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후자에 관심이 좀 더 있어서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을 만들고 있느냐에 대한 내용이 기대보다 심층적으로 다뤄지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3)     내가 저자라면

-       신으로부터 시작해 서양문명을 인식하는데는 지금의 카테고리가 매우 훌륭한 것 같다. 아쉬운 부분에 얘기했듯이 서양문명이 현재에 어떤 문제들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 지금처럼 중간에 스치듯 쓰는 것이 아니라 카테고리 하나를 두고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서 적고 싶다. 서양문명이 우리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미쳐왔고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해결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정리를 해주면 좋을 것 같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도 없습니다.!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하지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1), 존재와 존재물의 속성에 대하여(2), 창조주와 피조물의 의미에 대하여(3),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기헌신에 대하여(4), 신의 유일성과 인간의 연대성에 대하여(5) p9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32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천지창조>가 그리스인들의 신화가 아닌, 히브리인들의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p39

 

<에로스의 날개>

한마디로 말해 인간답게 묘사하되 동시에 이상화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견지한 최고의 규칙이었습니다. p43

 

<신인동형설>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이지요.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매우 독특한 신론에서 그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 안에 존재하며, 그에 의해 인도되는 피조물로서- 모든 인간은 당연히 그의 말과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교리가 자연스레 파생된 것이지요.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선하게 이루어져 그것을 복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역하면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자기파멸을 인간은 벌이라는 형태로 경험하게 되지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이러한 주장의 부단한 반복입니다. p56-57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p60

그리스 신들의 이러한 개인적 애증이나 개별적 청탁에 의한-다시 말해 보편타당한 이유가 없는-편애와 편증의 경향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p64

이 종교의 신이 자기 자신을 존재로 계시했고 또 신학자들도 그렇게 파악해 왔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이어지는 2부에서 우리가 기독교적 신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풀어 가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 사용하려는 이유입니다. p65

 

2부.           신은 존재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 것은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존재론 전통에 의하면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신에게는 이름도 없고 또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p83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입니다.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p84

따라서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신은 무규정자이자 무한정자여야 하며, 당연히 그에게는 그를 규정하거나 한정할 어떤 본질이 따로 없습니다. p85

 

<지성도 넘고 신비도 넘어>

하나님을 지성주의나 신비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것들은 거부되었다.

이름 없는 신으로 나타내는 신비주의 같은 잘못된 신앙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일종의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신이 자기 이름을 계시한 것은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는 마지못해 그런 것입니다. p90

모든 시원이 그렇듯, 출발에서 벌어진 미세한 틈새가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간격이 되는 법입니다. p93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신은 그 어떤 본질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무규정성, 무제약성이 드러나며, 또한 신이 가진 절대적 독립성, 궁극적 포괄성, 유일성 등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p95

어쩄든 신이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계시했으므로 신은 이름을 갖게 되었고-좋든 싫든-하나의 존재물처럼 인식되는 일 또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p96

신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이고 가장 능력 있는 자이며 가장 지속적인 자’,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무규정자이고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신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 존재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존재란 무엇일까요? ‘존재물과는 과연 어떻게 또 얼마나 다르며, 이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p102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바로 이 같은 방법-즉 신을 존재로 그리고 존재를 신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떄문입니다. p103

 

<그리스인들과 존재>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받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얻게 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p110

단지 부분적으로만들어 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데아론을 분여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결과 개개의 사물은 그 본질에서 불완전하고, 존재에서도 실재성이 적지요. p112

분여이론을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자연에 왜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질적 차이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인간 세상에 왜 가치의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요. p113

이 이론은 현실세계와 가치 세계의 다양한 질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사다리존재의 사다리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서 고대와 중세의 교회제도를 확립하는 데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p114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신이 계층적 질서를 통해 자연의 사다리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맞춰 우리의 지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단계적으로 설정했으니까 그것을 따르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p120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를 신이 부여한 세계의 본성이자 가체체계로 인식했던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은 사회적질서도 그것에 맞춰서 정립했습니다. 예컨대 교회에서는 크게 나누어 평신도 사제 주교 교황이라는 교회제도를 확립했고, …

이들 제도가 피라미드식 계층 구조를 따른다는 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지위나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황과 국왕의 권위가 신성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 적어도 프랑스대혁명(1789)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진리였습니다. p125

자연과 사회 안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신이 정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이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이지요. p127

 

<존재는 창조주다>

사물들이 왜 본질들을 통해 인식되는가 하는 이유가 되는데, 사실상 본질들 각각이 하나의 한계 혹은 이른바 하나의 형상을 갖기 때문이다. p135

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이다. p136

인간의 영혼은, 신들이 공간에 매달아 놓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거울로 묘사되어 있어요. p138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 사유들은 사실 오늘날 우리

에게는 무척 생소합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당신에게 애써 소개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러한 사유가 기독교에 들어가서 서양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독특한 사변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서양문명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p139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정신,영혼은 영원불변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p141

초이성적 계시를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플라톤주의 철학은 더할 나위없이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p142

 

<히브리인들과 존재>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입니다. 이 실재의 생성과 작용이라는 활동을 통해 모든 존재물은 그의 피조물로 창조되고, 또한 그의 백성으로서 행복과 구원으로 인도되지요.

 

그리스인들에게 존재란 영원불변한 것이었습니다.

영원불변한다는 것은 …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p146

 

존재하는 것은 변홪하지  않고 변화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히브리인들은 haya라는 한 개념안에 존재,생성,작용을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Haya에 들어 있는 생성,존재,작용의 통일성이 우리들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들의 사유가 가시적 사물들에 의해 그 방향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p147

인격은 끊임없는 생성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작용하는 존재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p148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존재와 생성의 종합이 가진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시간에 있습니다! p150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불변하는 존재란 변화하는 존재의 시간 밖에서의 모습또는 탈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바로 그런 예이지요.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변화하는 존재란 불변하는 존재의 시간 안에서의 모습또는 시간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p151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논리학은 이처럼 철저하게 탈시간화되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논리학의 전통이자 한계이며, 그것을 통해 사유해 온 서양문명이 탈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독특한 사유 방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의 속성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며, 나아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데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죠. p153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p154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종교적 미덕이라고 여김으로써, 신에 관한 개념이 인간정신으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더욱 탁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p155

 

<존재의 바다와 퍼텐셜’>

존재의 장이란 양자물리학자들이 퍼텐셜이라고 부르는 소립자의 장을 말하는가?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야말로 바로 그것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고 존재하며 소멸하는 장이 아니던가?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들은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물질이라기보다는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도 했습니다.

스스로 물질이 되는 능력을 가져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이 비물질적 장을 양자물리학자들은 퍼텐셜이라 부르고 신학자들은 신의 숨결이라 부른다 p160

신의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지만 무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무에 가까운 어떤 원물질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에요. p163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라고 표현했는데, 내 생각에는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했다는 뜻이니까요. p165

 

<신의 모습 상상하기>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p166

어떤 식으로든 신을 인식하지 못하고야 어떻게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갈구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가엾은 실존적 상황이지요. p167

신은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한없이 지혜롭고 거룩해서 만물을 오직 자신의 뜻과 의지로 이끌어 간다는 섭리의 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p171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새롭고 흥미로운 주제로 뛰어들게 됩니다. p173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나>

하나는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이지요. p           177

=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가 말한 큰 것이란 물체가 차지하는 어떤 공간적 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가치적 크기를 뜻하는 것이지요. p180

설령 누군가가 모든 재물과 행복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지만 누구도 본 적이 없어서 사라진 섬이라고 불리는 가장 완전한 섬을 상상한다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 섬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p182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징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들이 모두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 방법에는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자연의 사다리또는 존재의 계층구조라는 형이상학이 깔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p189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옹호하며 칸트에 대해 재반론을 펼치틑 가톨릭 신학자들과, ‘자연의 사다리를 여전히 굳게 믿는 일반인들이 더 많았어요. 서양문명에서 가톨릭교회의 옹호 아래 적어도 1500년 이상 이어 내려온 존재의 계층구조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강한 것이어서 그리 수비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p193

신의 현존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려는 논쟁은 결코 쉽게 끝날 일이 아니니까요. 사실 이 공방은 그때 이후 지금까지도 멈춤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이 논쟁에 관심이 없다면 이 부분은 건너뛰어도 좋습니다.
정말 솔직하다. 사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진짜 건너 뛰고 싶었다..ㅋㅋ.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페일리의 논증은 유비추론 형식을 취하는데, 유비추론은 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도 결론이 확률적 참또는 간으적 참일뿐 필연적 참또는 가능적 참일뿐 필연적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지요.

페일리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사성이 낮고 논거가 약하다고 주장했지요.

결론이 충분히거짓일 수 있다는 말이지요. p199

예증법은 수사학적 논증법 가운데 설득력이 가장 강해요. 그래서 동서고금의 성현들은 모두들 예증법을 즐겨 사용한 것이고, 사실상 그 분야의 천재들이었습니다.

예수도 당연히 그들 중 하나였지요. p200

적절한 예 하나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교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수사학적 논증법으로서 예증법이 지닌 힘이지 페일리의 논증이 가진 설득력의 비결이지요.
이는 실제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도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말 저자의 예시들을 쓰는 능력에 '예증법 사용의 종결자'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이 책이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예증법의 힘 덕분일 것이다.

수사학은 어디까지나 대중을 위한 설득의 기술일 뿐입니다. p201

페일리의 시계 유추를 비판한 흄, 칸트, 밀 같은 철학자들은

각각 제 역할을 하기에 그토록 적당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진 까닭을 페일리가 논증했듯이 설명해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때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것입니다.

진화가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존경쟁을 하는 가운데서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종만 살아남는 방향으로 충분히 오랫동안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p202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p203

다윈은 페일리식 논증을 깨부수고 무신론을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해 준 최초의 인물입니다.

당시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언제나 외부에 있는 다른 종교들뿐 아니라 존재하는 이단들과  싸워 왔는데, 모든 일에서 그렇듯 안에 있는 적이 더 위험한 법입니다. p204-205

지금도 기독교인들을 만나다 보면 이단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다. 물론 정말 비정상적인 짓을 하는 말도 안되는 이단들도 있겠지만, 때로는 정말 성경의 해석을 달리할 뿐인 이단들도 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단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잣대의 기준은 도대체 뭘까?하고 궁금하다.

 

3 <신은 창조주다>에서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어느 기독교 종파나 교단이 원하기만 한다면 진화론을 큰 무리 없이 창조론의 일부로 수요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논쟁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겁니다. p207

 

<마야의 찌지 못하는 베일>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론적 차이점과 그 의미입니다.

안셀무스가 플라톤,플로티노스,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진 존재론의 영향 아래 있었던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에요. p208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입니다. p209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위대한 두 거인의 이러한 학문적 취향이 그들 이후의 서양 학문을 크게 두 줄기로 갈라놓았지요.

플라톤 에리우게나, 안셀무스, 베니딕토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 선험적 인식 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합리론자들은 플라톤의 후예들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 로스켈리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도미니크 수도회 로크, 버클리, 흄 등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정신은 아무것도 씌지 않은 빈 서판과 같아서 그 안에 선척적 인식 능력이란 전혀 없고,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경험론자들에게는 신에 대한 관념이 우리의 정신 안에 있다고 해서 감각적 경험 없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도 보지 못한 인어나 페가수스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p210-211

오랜 세월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은 플라톤의 후예들을 반박하고, 플라톤의 후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에게 재반박을 가해 왔습니다.

논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이가 18세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났지요. 이마누엘 칸트가 바로 그사람입니다. p212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p213

한마디로 요약해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없다는 이야기지요. p215

19세기 신학자들은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인간은 그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방어 무기가 된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지요.

인간이 무한성에 이를 수 없음을 가장 명확하고 예리하게 보았던 철학자가 바로 칸트였기 때문입니다. p216

동방정교에는 플라톤이, 가톨릭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프로테스탄트에는 칸트가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유구하고 무익한 오류들로부터 신학을 지켜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지요. 이로써 신학은 20세기에 칼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p217

 

1076«프로슬로기온»을 발표할 당시 안셀무스가 놓인 상황이 바로 1916년 아인슈타인, 1930년의 디랙과 같았습니다. p218

 

현존은 일차적으로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지요. 그래서 이야기는 이제, 우리가 경험을 통해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를 지나다니다 보면 ㅇㅇㅇ의 간증집회라는 것들을 하나보다. ‘이란 존재를 어떻게 경험했는지, 각자의 신기한 경험들을 나눔으로써 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랄까??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그 어떤 형로든지 신적인 것에 대한 어떤 경험이 없다면 종교란 아예 시작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앙은 언제나 경험으로부터 시작했지요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지요. p220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느낌이 종교의 심층적 요소다. 철학적 신학적 공식은 하나의 교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처럼 이차적 산물이다.”

종교적 경험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진술이나 추론, 비판, 반성 같은 지적 활동의 산물인 철학적 신학적 이론은 부수적 요소라는 말이지요. p221

하나는 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 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지요. 신비롭거나 기적과도 같은 종교적 경험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데 많은 학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습니다. p222

합리적 주장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내에서조차 종교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세력들이 일어났습니다.

후기 이신론자들은…… 모든 비이성적 요소를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p223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공적으로는 기적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비적 형태의 경험들은 대부분 매우 주관적이고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p224

그것이 우리에게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집족을 주는 무엇으로 경험되기 때문이지요. p225

한 인간의 판단 기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입니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어떤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종교적 깊이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성스러운 경험을 말합니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가치체계이자 동시에 문제해결방법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 p227

하나의 패러다임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경험은 서로 엉켜 있어서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입니다.

완전 공감.. 사실 우리가 말하는 것, 느끼는 것들은 모두 내 경험에서 나온다. ‘경험이라는 것은 같은 상황을 보더라도 그것을 보는 각 개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다르게 만드는 녀석이다.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주만물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들 모두가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참여와 인도를 표상하는 증거들인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의심할 수 없는 논거들인 것입니다.

숱한 변형을 거친 다음에 그가 기독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기독교인이 보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반응하듯 반응하게 된 다음에야 가능해지지요. p229-230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겁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외치는 신학자들의 주장이나, 그 반대로 과학적 관찰을 근거로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외치는 과학자들의 선언이 모두 부질없고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신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p230

 

<메타노이아-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우리는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되는 사건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적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p232

크고 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신과의 만남신의 존재에 대한 실증적 경험이 되는 겁니다. p234

어떻습니까? 신은 실제로 존재할까요? p235

 

3부.         신은 창조주다

3. 창조론이 왜 «고백론» 안에 있나

 

<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라고 믿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안달이 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p252

진실이란 언제나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지요. p260

따라서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서양문명을 읽는 기독교 코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상당 부분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p262

 

<고백인가, 증언인가>

모든 것이 하나같이 훗날 그가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가 되는 데 필연적인 준비 과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p264

인간의 삶이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p265

«고백론»은 비록 회고록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눈물로 쓴 기나긴 신앙 간증이자, 탁월한 신학자가 쓴 성서 해석서가 되었습니다. p297

그의 영혼도 본디 칠흑처럼 깜깜했고, 그 안에서는 세속적 욕망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을 읽으면서 그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p269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이 같은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의 종교와 과학이 한편으로는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p277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이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p287

 

<앨런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미인이라는 말에 그 시대의 풍습, 제도, 역사, 문화에 의한 삶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삶의 양식이 벼하자 언어놀이가 변했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의 의미가 변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대한민국 내의 지방사람들끼리 만나도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 같은 단어의 다른 의미로 사용 혹은 같은 의미인데 지방 특색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지방의 경우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그 지방에 살지 않으면 평생 가도 못 들어볼 단어들도 있다. 가끔 여러 지역에서 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런 것 때문에 즐거워 진다. 작은 한국 땅에서도 이렇게 서로 다른데, 몇천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 국가간에 서로 이해를 하려면 정말 그 나라에 대해 다양하고 살아 있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더군다나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세계 어디든 하루만에 갈 수 있는데, 옛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싶다.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p302-304

우리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p307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언어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자는 이야기는 과학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평화로운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언어놀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지요. p308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상대의 주장과 그 주장이 나온 상대의 발화 환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당신이 상대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 같은 새로운 합의나 일치를 얻어 냈다면 당신은 비로소 이해의 진보를 이룬 것이고 그로써 상대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지요 p309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합의와는 무관한 정의의 개념 및 실천을 위한 원칙을 다음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 첫번째 단계 :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 / 합의는 현재의 파트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경우에 따라 쉽게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 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p310-311

바람직한 소통을 위한 선행과제 상대가 사용하는 전문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 / 대화와 소통이 상호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함.

진리 또는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담론들을 어느 하나의 문법으로 획일화하려는 야망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진리라는 생각,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기인한 만행에 불과합니다. p313

 

<영원이란 무엇인가>

물론 생각만으로는 공간과 시간의 저편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다.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시간 밖의 시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규정한, 시간이 가진 성질이 아닌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p318-319

우리는 사고의 영역을 부단히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p320

 

<시간이란 무엇인가>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

영원은 신에게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속하는 동시에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p327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끊임없이 분산되는 수많은 찰나들, 즉 지금.지금.지금.지금이 무한히 계속될 뿐이지요 p333

우리의 마음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p337

 

<보시기에 좋았더라>

불온전하게 됨’, 이것이 타락의 기독교적 의미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 함의지요

단지 여기서는 구원받은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다시 온전해진 세계를 천국이라 칭하며 교훈했다는 것만 말해 두지요 p370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인가>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p388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자신의 본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p400

한없는 자애로움이 넘쳐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원초의 기쁨을 주위에 퍼뜨리려고 p401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이 책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만한 장점이 적어도 두 가지는 있어요.

«종의 기원»이 내포하는 유물론적. 실증주의적 경향이 당시 지식인들의 취향과 맞았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서술 방식과 관련되는데, 풍부한 사례와 뛰어난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한 다윈의 표현 기법이 대중을 매혹시키는 데 충분했다는 점입니다.

다양한 증거 자료를 먼저 제시한 다음 모든 자료가 보여주는 불가피한 결론으로서 모든 생물은 진화한다는 식의 귀납법을 활용했지요 p413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원칙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이라 할 수 있는 다윈의 진화론을 우파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 사회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p422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사회다윈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지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자연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는 분명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지요. 자연과는 달리 인간과 사회는 언제나 가치지향적이고, 또 항상 그래야만 합니다. p425

 

<다윈과 기독교>

다윈은 곳곳에서 진화가 인간을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더 나은 존재로 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지요 p431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이던 매슈 아널드도 영구사회의 이 같은 속물근성을 비판하며 그것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교양을 강조했습니다. p436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 때문에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불신자는 지옥에 간다는 복음주의 교리에 대해 자주 분노했지요. p437

다윈은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처음에는 기독교인에서 유신론자로, 그리고 다시 불가지론자로 서서히 바꾸어 갔습니다. p438

교회는 기다렸다는 듯 진화론 과 기독교 교리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요. p439

창조의 힘은 부자연스러운 구식 개념인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역사한다” p440

 

<창조의 목적은 구원>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고백록» 전체를 꿰뚫는 주제 p484

 

4부.         신은 인격적이다.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 황제는 희생양을 만들어 대규모의 계획적이고도 철저한 처벌을 감생했다. p490

마치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네로 황제때보다 지금은 어떤 사건을 덮거나 희생양을 만들어 내기에 너무 쉽다. 각종 언론 매체들을 통해 지금도 정치하는 이들은 무엇을 덮기 위한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사건들을 하나씩 빵빵 터뜨려준다. 그리고 다행인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다양한 매체가 나오면서 시민들끼리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창구도 열렸다는 것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의 운명>

그대들의 철학은 다 어디로 갔는가? 눈앞에 닥치는 불행과 맞서겠다던 그 결심은 또 어디로 갔는가? 그토록 오랜 세월 함께 닦아 온 철학과 결심들이 사라졌단 말인가? p497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 p503’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떄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지요.

스토아철학자들은 이런 사유를 근거로 그들 자신이 신이 되거나 그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p505

인간의 이성(또는 도덕)에 의한 인간구원신의 은총에 의한 인간구원을 적어도 19세기까지 부단히 위협했다는 뜻입니다. p507

 

<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기독교인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그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p563

 

<강한 섭리, 약한 섭리>

실존적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갈급하고 곤궁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나약한 우리에게, 구하는 대로 이루어 준다는 예수의 교훈은 더할 수 없는 위로를 주기 때문이지요. p569

신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데도 우리가 신의 섭리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지식과 선함과 의지에서 무한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다는 전제 때문이지요. p572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p574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세계로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p585

 

<두려움과 떨림>

부조리란 말 그대로 조리에 맞지 않음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 ‘비합리적임을 의미합니다. p595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 p604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이지요. p609

 

5부.         신은 유일자다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이 유일자라고 말할 때 그것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요?

이 같은 물음의 배경에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의 유일성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의 근거가 되는가?’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예나 지금으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이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배타성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 참혹한 분쟁과 테러가 그치질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으니까요. p623

유일신 종교들이 주장하는 신의 유일성이 곧바로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을 의미한다면, 도킨스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억지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유일성이야말로 지난 2000년 동안 서양문명을 암울하게 만든 가장 해악적인 요소라고 단정지어야겠지요.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p624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로티노스의 일자>

플로티노스는 먼저 일자는 어떤 존재하는 사물일 수 없으며 모든  존재자에 우선한다라며 일자가 어떤 것 하나’, 즉 그 어떤 존재물 가운데 하나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p639

일자는 절대적 초월자, 초존재자지요 p641

성부,성자,성령은 태초부터 동시에 하나로 존재하며 분리되지도 않고 서로 동등하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 차이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큰 논쟁인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입니다. p643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페르소나 어떤 것이 법률상 밖으로 드러난 지위, 한 개인의 법률상 자격이나 지위 p658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는 평생 동안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담그고 살았지요. p662

위험을 무릅쓰며 신앙입문학교에서 성경과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p664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동정해야 한다. 그들을 저주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p666

 

<삼위일체 논쟁>

삼위일체 논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렇게 벌어진 논쟁은 차츰 교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갔습니다. p679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진리를 언제나 좌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로도 기울지 않는 황금의 중간길에서 찾곤 했습니다. p710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 안에는 오직 관계에 따른 구분만 있을 뿐이다” p712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페리코레시스란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라는 다분히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용어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는 뜻이지요. p722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서양음악 사이에는 예사롭지 않은 구조적 유사성이 존재합니다. p726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요. 이 같은 내용이 우리가 나누는 이 이야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이 장의 서두에서 신의 유일성이 곧 배타성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만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p732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인 신인가, ‘신약의 신인가>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위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인면수심의 만행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에서 나온 배타성과 폭력성으로 비판받는 사례지요. p741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사랑이 넘치는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던 것은 신이 그렇게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 p748

결과적으로 이라는 단어에는 변하지 않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기보다 서로 모순되고 심지어는 상호배타적이기까지 한 의미들이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어떤 하나의 생각이 의미나 적절성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조용히 폐기처분되고 곧바로 새로운 신학으로 대체되었다. p751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현대신학에서는 유스티누스의 이런 포용성을 이어받은 학자가 없을까요? 사실 가톨릭교회가 취하는 포용주의가 바로 그런 것이지요. p769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틸리히에 의하면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적 신은 하나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아, 너와 관계 맺고 있는 나, 결과와 분리되어 있는 원인, 특정공간과 끝없는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p771

우리가 신과 주체-객체의 관계에 있는 한, 소외되고 절망하게 되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 줍니다. p774

플라톤의 선자체나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그런 것처럼, 현존과 본질을 모두 초월합니다. 이런 이유로 틸리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부정하는 게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지요. p775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불안, 공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우만은 이처럼 낮에도 밤에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라고 불렀습니다. p780

기독교도 이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해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하는 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신의 유일성을 근거로 하여다른 종교와의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 낼 것인지에 모아져야 합니다. p782

이들의 이론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선포가 배타성과 폭력성 그리고 획일성에 대한 교훈이 아닌, 오직 포괄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백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요. p784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p798

이 같은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p79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 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을 이루는 이종사랑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p800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그것이 보편화되고 있는 오늘날 가치의 위기는 범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통념이 되었고, 이에 대한 무관심, 방기, 폄하, 비아냥거림은 하나의 지적 유행이 되었습니다. p803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사회적 재난들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p806

우리는 다시 정원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옥을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합니다. p807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으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거지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 첫째, 신 둘째 우리 자신 , 셋째 우리 옆에 있는 이웃 , 넷째 아래에 있는 물질 p809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p811

IP *.246.17.67

프로필 이미지
범해
2011.03.13 11:49:51 *.67.223.154
미나씨,
7기 레이서들이 "김용규"구간을 어떻게 달릴지.....매우 궁금해서 와보니
일등으로 달리고 있군요. ㅎㅎ
이 글잘쓰고 내용있는 작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글도 잘 읽었고요,
이제 ,
고된 집중끝에 얻은 황금같은 시간을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 화려한 휴가를....
프로필 이미지
미나
2011.03.13 23:25:59 *.104.209.51
감사합니다...^^
고된 집중 끝 황금같은 시간.. 이란 말이 참 와닿네요..ㅎㅎ
화려한 휴가라는 것도.. 부족한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프로필 이미지
2011.03.13 21:05:32 *.109.25.139
미나님 ^^
지난 4주간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정말요!
이제 일요일 밤 푹 잘 수 있는 거지요?
직장 생활과 레이스 이 두가지를 함께 병행하는 게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완주하신 것 정말로 축하드려요!
새로운 한 주도 활기차게 시작하시구요! ^^*
프로필 이미지
미나
2011.03.13 23:27:52 *.104.209.51
경인님..
경인님도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두 가지를 함께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는 않은듯 하네요.^^
완주 한 것 축하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경인님도 새로운 한 주..(조금은 가벼운?) 즐겁게 시작하시길!!!^^ 경인님도 완주 하신 것 너무 축하드려요~!!! ㅋ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90632
278 [7기지원] 3주.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구본형 file [4] [2] 강훈 2011.03.06 6286
277 [7기]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file [2] 이루미 2011.03.07 4381
276 [7기 연구원지원]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읽고 file [2] 박주선 2011.03.07 4455
275 [예비7기] 3주차_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_구본형 file [2] 김서영 2011.03.07 4477
274 [7기 연구원 지원]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북리뷰 [2] 이현정 2011.03.07 4409
273 [먼별3-28] <이부영의 "그림자"> 무의식 세계로의 첫걸음: ... [5] 수희향 2011.03.09 5470
» [7기 레이스_4주] 서양문명을 읽는코드, 신 -김용규 file [5] 미나 2011.03.13 4552
271 [7기지원] 4주.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 김용규 file [8] [1] 강훈 2011.03.13 4830
270 [7기 레이스]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file [3] [1] 김경인 2011.03.13 6518
269 [7기 레이스]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아래... file [13] [2] 김경인 2011.03.13 7323
268 4.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file [4] [16] 미선 2011.03.13 4491
267 [7기 연구원-지적 Race]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리뷰 [4] 장윤영 2011.03.13 4331
266 [7기도전-북리뷰]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file [6] 유재경 2011.03.13 4434
265 4주차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file [3] 전민정 2011.03.13 4570
264 [7기리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_김용규 file [7] [1] 양경수 2011.03.14 4745
263 4차 Book review _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file [3] 오경희 2011.03.14 6863
262 [7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file [3] 이루미 2011.03.14 4921
261 [예비7기] 4주차_서양문명을 읽는 코드-신_김용규 file [1] 김서영 2011.03.14 4365
260 [7기 연구원지원]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읽고서 file 박주선 2011.03.14 4340
259 [먼별3-30] <헤르만 헤세의 "인생"> 헤세가 말하는 인생이란... [2] 수희향 2011.03.16 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