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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3일 20시 13분 등록

 1.‘저자에 관하여’
김용규저자.jpg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저자는 철학자의 눈으로 영화, 신학, 문학 등을 해석하고 창작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의 책은 철학과 인문학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어, 현대인의 삶과 인문학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지식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과 [다니]는 철학과 사회생각, 과학지식, 진화론, 인류학 등 다양한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소설은 그에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 외에도 독특하고 다양한 맛의 지식을 철학과 함께 버무려낸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을 빌려 철학의 이해를 이끈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키우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 자기계발 팩션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 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는 그는 그렇기에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제법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같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그 감동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예술품이나 유적들안에 자리하면서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어떤 위대한 정신적 가치에서 나옵니다. 미술이든, 건축이든, 음악이든, 공연이든, 문학이든, 학문이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하는 것들의 심층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가치들이 반드시 들어있지요. 서구문명에서는 그것이 지난 2,000년 동안 한결같이 ‘신’이라는 이름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하여 나타났는데, 내가 이 책에서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논담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폭넓은 만남이 바로 그가 책을 집필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쓸 때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며 스스로 질문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하며 쓰는 글이기에 “시절이 수상하다. 경제가 어렵고 정치는 어지럽다. 가슴에 어둠이 내리고 마음의 길들이 끊어졌다. 나누어가질 믿음이 말랐고 함께 간직할 소망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 궁벽한 시절이 더 깊어질 것이라 한다. 하지만 삶을 위해 희망은 아니더라도 소망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작가가 전해주는 소망에 관한 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참고]
2010년 10월 김용규 선생님의 휴머니스트 강연에서
책 앞부분 저자 소개
yes24 저자소개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1211016008

(동영상)
http://news.kyobobook.co.kr/theme/liveBestView.ink?sntn_id=2735&expr_sttg_dy=20101220170600
책에 관한 소개와 다음 질문에 답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책을 내게 된 이유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 신을 선택한 이유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의 집필 계획은?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이 책이 번역서가 아닌 것에 놀랐고, 읽어가면서는 신학과 철학, 과학 등을 넘나드는 분야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는 작가의 깊고 넓은 내공에 놀랐다.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전업주부라 소개하며 차를 내오는 모습에서는 다시금 책 안에서 느껴졌던 세심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대중을 위한 철학교양서를 주로 쓰는 것은 작가의 소명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그렇기에 이 방대한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우리가 맞고 있는 이 난관을 같이 풀어가자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가야 한다며 여기서부터가 희망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인문학자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칩거하면서 책을 쓰고 우리에게 같이 해보자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가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어려운 주제지만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저자의 노력이 있기에 더 늦기 전에 우리 앞에 놓여진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같이 지혜와 용기를 모아 새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지은이의 말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 서양문명이 특히 그렇지요. -p.8

1부 신이란 무엇인가

 르네상스(Renaissance)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양식이 드러내는 특징이지요. -p.36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可視的)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可知的)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p.41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데아가 이미 존재한다. 즉 그 모든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망각(Lethe)의 강을 건너며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이데아에 대한 기억들을 잊었다. 그렇지만 그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면 그 사물 안에 깃든 이데아를 상기, 즉 ‘다시 기억해 냄’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p.44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이같이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규칙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모방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탐구했고,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그리스로 보내 고대 미술품들을 모사해 오게 했지요. 그 결과 성서 이야기를 다룬 이들의 작품에도 그리스 문화가 자연스레 혼합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신이 제우스의 모습을, 아담이 아폴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나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에서 성모가 아테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지요. -p.47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존재하는 것은 비물질적 지성과 이성에 의한 것이다.”라고 교훈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인간이 가진 신의 형상으로 지목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동방정교의 위대한 신학자인 니세누스의 감독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포괄적 표현 안에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모든 선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인간의 본성을 지으셨다는 뜻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p.53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이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omnipresence)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p.56

"나를 떠나지 말 것", "등을 내게로 돌리고",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같은 표현들을 한번 보세요. 여기서 ‘떠남’, ‘등 돌림’, ‘돌아감’이라는 개념들이 바로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녔다는 이야기입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만 살 수 있고 물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새가 공기 없이 어찌 날 수 있겠어요! 요컨대 모든 존재물은 존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p.59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구약성서의 신처럼 공의(公儀)를 내세우지도 않고, 인간보다 도덕적이지도 않습니다. 애정과 증오에 대한 일정한 기준도 없어요. 그러니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지요. 마치 우리 인간의 감정이 그렇듯 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축복과 징벌을 묘사한 글 안에는 신인동감적 요소와 묘사가 넘칠지언정 존재론적 함축성이나 표현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p.64

2부. 신은 존재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해 오던 질문, 즉 “신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신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지, 셋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칙에 따라 신에 대해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 나갔는데요.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Qui est)' 또는 ‘존재자체(ipsum esse)’라는 것이지요. -p.75

다만 당신이 여기서 기억할 것은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탁월한 중세신학자들도 신이 인간처럼 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바다’와 같은 모습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입니다. -p.76

1장 존재란 무엇인가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이 본질(本質)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있음’이 곧 존재(存在)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p.84

그런데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자원이 될 수 없지요. -p.8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p.86

만일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따라서 신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그것은 오직 ‘존재’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가 “신을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라고 말한 이유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모든 피조물은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까닭입니다. -p.86

“누가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누가 고백할 수 있겠소, 나는 그를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고 해서 누가 감히 발설할 수 있겠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만물을 포괄하는 자, 만물을 보조하는 자, 그는 당신을, 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괄하고 보존하고 있지 않소?” -p.89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to on, einia)가 곧 실체(ousia)다. 예컨대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항상(eidos)은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실체다. 그래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보존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과 갖지 않다는 점에서는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ipsum esse)’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이 그런 이유다. -p.93

이름이란 본디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에게 속한 것인데, 신은 그 어떤 존재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신이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계시했으므로 신은 이름을 갖게 되었고-좋든 싫든-하나의 존재물처럼 인식되는 일 또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p.96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 이런 미약한 존재이기에 신 앞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한없이 작은 존재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이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이유이며, ‘신’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25)라고 했던 ‘의심 많은 도마’의 애달픈 고백을 보세요. 여기서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요. 기독교에서는 이 같은 우리의 성향을 죄성(罪性)이라고 부르지만,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간절히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고 싶은가요!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p.98

신의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창세기 3:19)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p.99

신은 거룩한 ‘존재’이고, 인간을 포함한 그 밖의 만물은 거룩하지 않은 ‘존재물’로 신과 갈라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부르지 않고 ‘존재자체(ipsum esse)’라는 용어로 표현했을 때도 바로 이런 구분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요컨대 “신은 존재물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p.99

만일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이외의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 자체를 부분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어느 것 때문도 아니라네. 또한 모든 것이 다 그렇다고 나는 말하겠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 자체’는 ‘아름다운의 이데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 한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며, 이 같은 원리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된다는 뜻이지요. -p.111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하지도 않습니다. -p.112

같은 종류의 사물들 사이에도 이데아가 “많이 또는 적게” 들어 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성질에는 언제나 ‘더 또는 덜’ 같은 질적 차이가 ‘단계적으로’ 생깁니다. -p.112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존재만이 진리의 근거입니다만, 존재물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를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 더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완전하게’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언급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고 단지 불완전한 지식, 곧 플라톤이 말하는 ‘사견(doxa)’이지요. -p,113

“여러 사물의 본성을 살펴보면 당장 이런 점을 알 수 있다. 정확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여러 사물이 계층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생명이 없는 물체들 위에 식물이 있고, 식물들 위에는 이성이 없는 생물들이 있고, 또 이성이 없는 생물들 위에는 이성이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p.118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사다리는 “아마도 인간보다 더 우월한 또 다른 종류”에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모호하게 언급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분명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물의 계층구조’였고 그 정상에 인간이 있지요. -p.119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에게는 피라미드식 존재의 계층구조는 단순히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체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엄격한 가치체계이기도 했습니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을 따라 존재의 체계를 가치의 체계로 가르쳤기 때문이지요. 그는 일자(신)는 참됨, 선함, 아름다움, 생명, 예지, 능력 등 모든 가치에서 최정상이지만 거기서 유출되어 나온 존재들은 계층구조의 밑으로 갈수록-마치 빛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워지듯이-점차 결핍된다고 교훈했습니다. -p.122

신을 존재자체(ipsum esse), 진리자체(ipsa veritas), 선자체(ipsa bonitas), 아름다움자체(ipsa pulchritudo)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신이 이 모든 가치의 정점(頂點)에 있다는 의미였지요. 또한 그들이 존재물들을 존재의 결핍(privatio esse)으로, 거짓을 진리의 결핍(privatio veritas)으로,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esse)으로, 추함을 아름다움의 결핍(privatio pulchritudo)으로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p.122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안셀무스처럼 부를 때 그것이 단순히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바치는 ‘공허한’ 찬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신을-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등등 - 어떠어떠한 가치들의 정점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이 바로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며,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p.123
→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인간으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한 그들이었기에 그렇게 잔혹하게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 사회 안의 공통으로 들어 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신이 정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마치 자연이 자연의 계층적 질서를 따라 조화를 이루듯이-인간이 사회적 계층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이지요. -p.127

부자는 최하위 노동자를 경멸하지 말지어다. 그도 자연의 연쇄 속에 있는 동등한 고리이니: 동일한 목적으로 노동하고 동일한 관점으로 합일되어 양자는 다 같이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p.129

정신은 이러한 자기직관(self-intuition)을 통해서 플라톤이 ‘이데아(idea)’라고 부른 것, 즉 세계 창조를 위한 모든 참된 ‘형상(idea)’을 자기 안에 만듭니다. 이 말을 플로티노스는 “정신 자체에 정신이 나누어 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표현했지요. 한마디로 플로티노스에게는 정신이 곧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데 모범이 되는 틀(paradeigma)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질송은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들처럼 ‘세계의 창조주’라는 신(神) 개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정신(nous)이 곧 신이다”라고 주장했지요. -p.134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p.135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이 ‘창조주’이기는 해도 다만 ‘창조의 틀’로만 작용할 뿐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영혼이합니다.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하지요. -p.136

"거울에 비추듯이"란 표현을 보세요. 그게 바로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영혼의 ‘성찰’, 곧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영혼의 작용입니다. -p.138

이 시에서 인간의 영혼은, 신들이 공간에 매달에 놓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거울로 묘사되어 있어요.

여기저기 빙빙 도네, 바람에 흔들거리는 거울 같은 영혼은, 수천 번 눈빛을 주는데도, 결코 전체를 보지 못하네. 한번 쳐다보고 다른 곳으로 내달리고는, 최근 한 일은 뒤에 남겨두네. -p.138

빨강이라는 색은 끊임없이 자기동일적 빨강을 생성할 때에만 유지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퇴색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p.148

개념을 산출하는 우리의 정신은 앵글의 노출시간을 ‘아주 길게’ 열어 놓은 카메라와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들로부터 불변하는 개념들을 얻어 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불변하는 존재란 변화하는 존재의 ‘시간 밖에서의 모습’ 또는 ‘탈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바로 그런 예이지요.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변화하는 존재란 불변하는 존재의 ‘시간안에서의 모습’ 또는 ‘시간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예컨대 그들의 신 야훼(YHWH)가 바로 그렇지요. -p.151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p.153
→그렇다면 인간이 불변하길 원하는 것은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겠지요.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은 신의 창조 활동과 함께 시간이 생겨났고, 따라서 신의 영원성이란 시간안에서의 무한함이 아니라 시간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신은 세계에 대해 초월적 존재이자 동시에 내재적 존재이고, 모든 존재물은 세계 안의 존재라는 교리와 연결된다. -p.154

신은 성질이 없어 선하며, 양이 없어 크고, 결핍이 없어 창조적이며, 지위가 없어 통치자이며, 외관이 없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장소를 갖지 않아 어디든지 있고, 시간을 갖지 않아 영원하며, 변함이 없어 변화하게 하고, 아무 작용을 받지 않아 모든 작용을 한다. -p.155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場, field)'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YHWH)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ha֩ya֩)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p.157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했지만 무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무에 가까운 어떤 원물질(原物質)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p.163

무와 물질의 중간에 있는-따라서 무는 아니지만 거의 무에 가까운-이 무형의 원물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p.163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같은 말을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라고 표현했는데, 내 생각에는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p.165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키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해서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기획투사(Entwurf)’함으로써, 사르트르는 ‘아가주망(engagement)’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앙가주망은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만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p.178
→ 스스로 움직이는 자 만이 일상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우선 ‘신은 현존한다’ 라는 명제의 모순명제인 ‘신은 현존하지 않는다’가 그 자체로 모순을 포함하나요?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판단 명제가 아니고 종합판단 명제입니다. 당연히 논증의 타당성만으로는 그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칸트는 이렇게 했습니다. “현실적 대상은 나의 개념 중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나의 개념에 종합적으로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말도 덧붙였다.

최고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187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만 사용되는데, 최고 존재[신]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지성은 이러한 초월적 사용을 위한 아무런 장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p.199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p.203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소위 과학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결국 기독교에 대항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p.205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에 입각해서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가상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바로 그 뒤에서 우리의 이성이 저지르는 온갖 오류가 생겨나지요.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p.213
→ 머리로만 판단해서 행동하면 안 되고 감성이 함께 사고를 도와주어야만 제대로 된 판단을 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를 포함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서로를 겨누며 싸우는 것도 너무나 뜨겁고 큰 머리만을 가지고 판단하였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율배반이란 서로 모순이 되는 두 명제가 진위(眞僞)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둘 중 어느 것도 경험적 확증 또는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p.214

진리는 타당할(valid) 뿐 아니라 건전해야(sound)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p.218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종교적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지요. 하나는 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의 가지를 부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비롭거나 기적과도 같은 종교적 경험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 데는 많은 학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습니다. -p.222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이 겪은 숱한 전쟁과 고난이 역사가들에게는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 간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사건이지만,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을 인도하고 훈련시키고 벌을 줌으로써 그의 목표를 이해시키는 과정이자 도구였던 겁니다. -p.229

찬란한 빛 같은 신비한 어떤 것을 보았든, 신의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소리를 들었든, 아니면 스스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든 간에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삶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 가면-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p.234
→ 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게 되는 것임을 지금은 신을 경험했다고 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과연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얼마 전 나를 어이없게 했던 한 목사의 기사가 떠올라 씁쓸해진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p.235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회의주의가 ‘이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 개인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준비 단계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얼핏 매우 기이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요. 누구든 이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야 어떻게 초이성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p.250

우리가 <고백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겁니다. 따라서 “주여 당신은 위대하십니다”로 시작하여 “모두가 당신에게 구할 일이요, 당신 안에서 찾아야 할 일이며, 당신만을 두들겨야 할 일 이오니, 이렇게 하는 데서만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고 열릴 것입니다”로 끝나는 <고백론>은 비록 회고록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눈물로 쓴 기나긴 신앙 간증(干證)이자, 탁월한 신학자가 쓴 성서 해석서가 되었습니다. -p.266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태초에’ 창조와 함께 시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지요. -p.276

수학에서는 무한의 세계를 다루는 방법으로 극한(lim) 개념을 이용하는데, 신학에서는 신을 모든 가치의 극한으로 규정하는 ‘긍정신학(theologia positiva)’이 그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신은 선하다’라는 말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선’을 근거로 그것의 완전한 형태, 곧 선의 극한의 형태를 가정하고 하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서양문명에서는 신의 속성을 종종 무한 개념을 사용해서 표현한다. -p.287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만물을 정하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유익과 은혜, 하나님의 권세와 은혜를 우리가 묵상케 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찾고 찬양하고 사랑하도록 자극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바, 그 사실을 그가 유지하는 질서를 통해 보여 주셨다. -p.292

데카르트는 <철학원리>에서 "우리는 언제나 신의 힘과 선의 무한함을 직시해야 하며, 신의 작업이 지나치게 위대하다거나 지나치게 정당하다거나 지나치게 완벽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잘못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p.294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 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현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p.297

현대과학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우주의 탄생과 함께 시간과 공간이 어느 한 순간에 생겼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시점이 곧 우주의 태초입니다. -p.299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이지요. -p.301

비드켄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forms of life)’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지요. 그러므로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p.302
→ 같은 단어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온 나에게 언어에는 참 많은 영역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다시 생각해보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각각의 언어에는 그들의 삶이 녹아있는 것임을 내 삶과 그들의 삶이 어떻게 언어로써 이해 될 수 있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의미를 발생시키는 규칙이라는 의미에서 삶의 양식을 ‘문법’ 또는 ‘논리적 문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는 문법이 말한다”라고 주장했지요. -p.303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information)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insights)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 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p.304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요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p.305

패러다임의 전환이 반드시 개종처럼 어려운 게 아니라 번역처럼 용이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유연해진 겁니다. -p.307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과 광장, 낡은 집과 새로운 집, 서로 다른 시기에 증축된 부속 건물을 가진 집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미로(迷路);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 -p.309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러지 않은 채 성급히 어떤 일치나 합의를 끌어낼 목적으로 하는 소통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거나, 획일화를 위한 강제를 유발하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설사 그것이 옳은 자가 그른 자에게 베푸는 선의라는 겉옷을 입고 나타날 때조차-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p.311

대화와 소통이 ‘상호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고대의 철학이, 중세의 신학이, 근대의 물리학이, 오늘날의 생물학이 그러하듯이 진리 또는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오늘날에는 통섭(consilience)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담론들을 어느 하나의 문법으로 획일화하려는 야망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진리라는 생각,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기인한 만행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학문을 하는 태도가 아니며, 리오타르의 표현대로 “상이한 질서의 축첩(蓄妾)관계”를 맺으려는 행위이고, 해묵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며, 자칫 서로가 망하는 제로섬 게임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경거망동이지요. -p.313

주님의 연대는 불과 한 날이며 주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옵니다. 주님의 ‘오늘’은 내일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어제를 뒤좇지 않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영원’하옵니다.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비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p.319

영원한 하나님조차 시간 없이는 살지 않는다. 하나님은 놀랍도록 시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성은 본래적인 시간성으로 모든 시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원성 속에서, 신성의 완전함 가운데 하나인 창조되지 않는 자존적 시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 어제, 오늘, 내일은 연속적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p.321

우리는 ‘있었다’거나 ‘있다’ 그리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존재(adion ousia)에는 ‘있다(esti)’만이 참된 표현으로서 적합하지요.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는 시간 안에서 변화하는 생성·소멸하는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p.322

영원이란 마치 하나의 점 안에 모든 것이 자리하듯이 그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동일성 안에 머물러 항상 자기이기에 언제나 변화가 없는 존재,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라고 하겠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존재, 즉 미래에 변모될 것도 없고, 과거에 변화된 것도 없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인 일자(一者)에 속하지요. (플로티노스는 이 말을 “더욱이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 그의 존재를 휘돌기 때문에 신에게는 ‘이전의 것’도 ‘이후의 것’도 없이 단지 ‘항상’만 있을 뿐이다. 마치 ‘복됨’ 자체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에게는 결코 변화라는 것이 자리 잡을 수 없다”라고 했다. -p.323

불변하는 영원이 변하는 시간 안에 부분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p.325

본성상 영원한 신은 자신의 영원성을 피조물에게 부여할 수 없어서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을 만들어 그것을 세계에 자신의 내적 질서와 동시에 부여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단일성(hen)을 견지하는 영원을,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원의 모상(aionion eikon)으로 창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p.325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존재물이 이데아의 분여(分與)에 의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 존재하며 인식도 되고 이름도 갖게 되듯이, 영원의 분여에 의해 시간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 지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식되며, 이름-수에 따라 진행되는 시간, 주야, 연월-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모상” 또는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이라고 규정했지요. -p.326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보통 영혼(靈魂)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걸? 따라서 바꿔 말하자면, 시간은 영혼이 잽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신의 영원성이 들어 있기에,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 -p.327

가령 당신의 마음이 지금 기쁘거나 슬프다면, 그건 대게 지금 바로 이 순간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분명 지나간 슬픈 일이나 다가올 미래의 기쁜 일과 연관된다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vis memooriae)’이라고 불렀지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p.335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현재·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p.337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식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memoriae)’처럼-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갈파한 대로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 희망을 구성하게”한다는 것이지요. -p.342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의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p.344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피조물들과 부단히 관계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인도한다는 뜻이지, 우주공간 어느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p.352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p.363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계 질서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죄를 지음으로써 “우주 전체가 약화되고 실추되는” 결과를 빚었다는 것입니다. ‘불온전하게 됨’, 이것이타락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의미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 (또는 존재론적) 함이지요. -p.370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라고 기록된 성육신에 담긴 또 하나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심만 아니라 실천까지 요구하는 기독교는 물론, 이념 못지않게 행동도 중요시하는 서양문명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p.388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힘을 한 때 깨닫고서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그러나 믿음은 진실로 그 지점에서 더 진진해야 한다. 믿음은 창조주로서 알려진 하나님을 영원한 통치자와 인도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의 움직임을 운행하시며, 작은 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시고 유지시키고 먹여주신다. -p.394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신의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의 성격을 늘 갖지요. -p.396

"선이란 그것을 소유한 존재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충족되며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설명했지요. ‘선자체’로서의 ‘일자’는 언제나 완전하게 자족적이기에, 그에게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p.398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쪽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p.400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후반 사회다윈주의가 바로 그런 부당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p.425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당연히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회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여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聖父)에 해당하는 ‘일자’는 전혀 변화하지 않아요. 따라서 창조에도 직접 관여하지 않습니다. 일자는 오직 자기로부터 유출된 ‘정신(nous)’과 ‘영혼(psyche)’을 통해서 사물을 생성하고 사물에 작용하지요. 이때 성자(聖子)에 해당하는 정신은 신의 영원한 형상(idea)을 자신 안에 생성합니다. 이 형상이 자연물의 범형(paradeigma)이 되기 때문에, 플로티노스는 그것을 ‘종자적 형상’ 또는 ‘자연의 씨앗’이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성령(聖靈)에 해당하는 영혼은 그것들이 현실화되는 ‘원리’이자 ‘운동능력’으로 작용해서 모든 물질세계를 순차적으로 창조해 냅니다. -p.448

요컨대 창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그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현실화 원리’라고 하든 ‘자연법’이라고 부르든 ‘제2원인’이라고 하든, 아니면 ‘영원한 법칙’이라 이름 짓든-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 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p.454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마치 역사학이 그렇듯이-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서·재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텍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p.461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신)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 -p.474
→ 어찌 보면 별반 차이 없는 인간들이 그 안에서 서로를 누르기 위해 애쓰고 자기 이득을 위해 엄청난 살생도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 앞에서도 한낱 작은 존재에 불과하거늘 뭐가 그리도 불안하고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을 하기에 안달복달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신)가 제한받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니 나의 선을 나타내지 않지만, 이는 하든, 안하든 자유요, 필연과 우연은 내게 접근하지 못하니, 내 뜻이 곧 운명이니라. -p.479

신이 행하는 일은 모두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서이며 (신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구하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大洋]에 대해 물방울 하나가 무엇이란 말인가? -p.482

당신께서는 지선하시니, 피조물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당신의 행복에는 아쉬울 것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다듬어 주신 것은 무슨 아쉬움에서가 아니라 넘치는 선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당신의 즐거움이 그것들로 인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불온전한 피조물들이 온전하신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고, 도리어 그것들이 당신에 의해 완전케 되어야만 당신의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p.485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p.498

"운명이 우리를 인도하며 각자의 수명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오. 또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물의 영속적 질서가 개체와 전체를 모두 지배한다오. 만사는 우리 생각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용감하게 참고 견뎌야 하오. 무엇이 그대를 기쁘게 하고 무엇이 그대를 울게 할지가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으며, 개개인의 인생이 서로 아주 달라 보여도 결과는 마찬가지라오. 우리가 받은 것은 무엇이든 사라질 것이며 우리 자신도 사라진다는 것이오. 그런데 왜 우리가 분개하며 무엇 때문에 불평해야 하는 거요?"

바울에게 신의 예정은 신의 자유롭고 기쁜 뜻에 근거한 것이므로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이며(로마서 9:16, 에베소서 1:5,9,11), 영원불변적이고(에베소서 1:4, 디모데후서 1:9, 2:19, 로마서 11:29), 불가항력적이지요(빌립보서 1:6;2,13).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논할 때, 이 말이 하나님께서 천국에 안일하게 앉아서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관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모든 사건에 대처하려고 키를 잡은 배의 선장과 같은 분이다. -p.518

그것[섭리]은 측량할 수 없는 신의 위대함이다. 그는 한 번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신다. 그러므로 신을 세계의 창조자로 고백하면서, 신은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지 않고 하늘에서 한가히 지내신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은 요망스럽게도 신에게서 그의 능력을 앗아가는 사람이다. -p.528

그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부단히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2인의 신, 즉 ‘신적인 너(the divine Thou)’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언제나 ‘나와 그것(I-It)’이 아니라 ‘나와 너(I-You)’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요.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에 의해 극대화되어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시선을 누구보다도 예수에게 집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히 신의 초월성보다 인격성이 더 부각되었고 신과의 사귐이 더 친밀해졌지요. -p.546

"어떤 것을 당신의 것이라고 특별히 주장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특별하게 아버지시고, 우리 모두에게는 공통적으로 아버지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만을 낳으셨고, 우리들은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p.549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신이 영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베일에 감춰 둔 채 주로 인격적 존재로 스스로를 드러냈고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도록 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지혜로운 절제(self-limitation)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성서에 나타난, 신에 대한 신인동형적 내지 신인동감적 표현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자신을 인간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계시 또는 선포하려는 지혜에서 나왔을 뿐, 신이 인간처럼 생기거나 인간처럼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p.556

기독교인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그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능하고 신실하여, 설사 내가 “이 눈물 골짜기에서 악한 일을 당하게 하실지라도 그것이 변해 선이 되게 하실 것”을 믿고 의심치 않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지요. -p.563

그는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의 선한 ‘목적’(로마서 8:28;9:11)과 ‘뜻’(로마서 9:19)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과 뜻은 하나의 ‘신비’(로마서 11:25)로 세상에 감춰져 있는데 그 신비 속에 ‘후회하심이 없는 부르심’(로마서 11:29)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지요. -p.563

토마스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petitio decentium a Deo)”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야만 기도는 우리가 신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조종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야만 기도가 우리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신율적(theonomy)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래야만 기도가 신을 우리처럼 속되게 만드는 계기가 아닌, 우리를 신처럼 거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우리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p.567

예수가 말한 신이 더해 줄 “모든 것”이란 ‘신이 보기에’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이지(마태복음 6:7,32),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신은 오직 그의 섭리에 다라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모든 것’을 더해 준다는 뜻이지요. -p.571
→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는 오해가 신의 부재를 낳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건 아니었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하여도 신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 자체로 면죄부를 마음 안에 새겨 놓는 겪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우쿠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지한 대로 된다”라고 교훈했고, 토마스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칼빈은 “모든 사건은 신의 감추어진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잘라 말했지요. -p.574

신으로부터 [무엇을]획득하게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p.576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시니 그분께로 가라.

부단한 자기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p.577

사람들은 대부분 무절제한 욕망으로 허덕이는 ‘폐허 속의 삶’에 절망해 언젠가는 뉘우치게 되지요. 그런데 바로 이 ‘뉘우침’이 <심미적 단계>의 인간을 다음 단계로 상승시켜 <윤리적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한마디로 뉘우침이 인간을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방’으로부터 해방시켜 윤리라는 햇볕아래 서게 한다는 말인데요.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여기에서 뉘우침은 그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뉘우침이 나를 고립시키지만, 나의 인생이란 시간 속에서 무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면에서는 뉘우침이 나를 전 인류와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거를 뉘우칠 수 없다고 한다면 자유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p.583
→ 결국 부단히 자기 성찰을 함과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그것을 담대히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임을! “그러니 이제 그대여 절망하라”고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오히려 권하지요.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교훈했습니다.

그러면 그대 속에 깃들인 경솔한 마음이 그대로 하여금, 요동치는 정신처럼 그리고 망령처럼, 그대에게는 이미 상실된 세계의 폐허 속에서 헤매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할 것이다.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정신은 결코 더 이상은 우울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비록 그대는 그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세계로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p.585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마치 “국토 없는 왕”처럼 일체를 외부에 의존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는 신조로 사는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스스로 갖지 못하며,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진실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지요.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끝 간 데 없는 병적 불안감은 여기서 기인합니다. 이에 반해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존하지요. 그는 매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과업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지체 없이 행동을 취하지요. 따라서 실수를 하거나 장애물에 부딪힐 때에도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p.586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마치 밤이 깊어야 이윽고 새벽이 오듯이 키르케고르에게 “무한한 체념은 믿음에 앞서 있는 마지막 단계”이지요. 무슨 소리냐고요?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p.593

바로 이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무엇보다도 세계와 신의 모순성 때문에-자신의 삶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리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p.596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전부였지요. 또 그날 그 산에서 정작 아브라함이 불태워 신에게 바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마리 숫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지요. 아니,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안과 불신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해 낸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백 살 넘어 얻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으로 자식을 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 -p.604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자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恩寵)의 본질입니다. -p.609
→ 나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고 용서가 안 되는 시간들 앞에서 불안으로 하루하루 일상을 이어가고 있더라도 내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할 순간이 온다면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길을 통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신께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p.609

5부 신은 유일자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자신의 사유를 ‘일자’라는, 더없이 높고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끌어올렸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자를 ‘선자체’라고 정의함으로써 곧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영역으로 발길을 되돌린 것입니다. -p.637

신은 초월적 존재지만 세계의 창조자로서 지금도 피조물의 세계에 부단히 직접 관계하므로 신과 세계 사이의 중간자는 필요 없다고도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아들도 신이며, 기독교는 유일신교하는 것이지요. -p.684

신성은 고유한 것이며 아버지 됨은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을 결합하여 ‘나는 성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들을 고백할 때도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과 고유한 것을 하나로 묶어서 ‘나는 성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해야 옳다. 이와 같이 성령에 대해 말할 때도 호칭에 알맞게 불러 ‘나는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한 분 신성 안에서 하나 됨이 온전하게 보존되며, 이와 동시에 각자에 대해 인지되는 고유한 것들의 차이를 통해서 위격들의 고유성이 고백된다. -p.705

하나님에 대한 말이 모두가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 같은 것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며,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들이 있어야 아들이라고 부르고,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관계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상대에 대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12

“에로스를 낭만적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타인 속으로 자신을 용해한다든가 더 높은 통일 속으로 타인과 함께 용해되려는 욕망 속에서 성립한다. 이와 달리 아가페는 용해를 넘어서서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존재들의 세계 속에서만 자리 잡을 수 있다. 요컨대 아가페는-마치 여러 악기가 서로 다른 자신들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polyphony)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이지요. -p.726

하나님에 대한 말이 모두가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 같은 것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며,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들이 있어야 아들이라 부르고,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관계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상대에 대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12

"그들의 흘러넘치는 [이종]사랑 덕분에 성부·성자·성령은 자신을 넘어서서 창조와 화해와 구속 안에서 유한하고 모순된 도덕적 피조물인 타자를 위해 자신을 개방하신다. 그 결과 자신의 영원한 삶 안에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제한해서 그들이 자신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p.728

"하나님의 세 인격이 상호내주를 통해 하나의 공동공간을 형성하는 것처럼, 피조물 차원의 공동체 역시 상호 자기발전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형성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p.729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p.732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신이 유일자인 교설에서 신을 다신론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신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신’이라는 하나의 특정 맥락에서 이야기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요. 다시 말해 유일신에 대한 다신론적 표현은 신이 실제로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들이 신을 여럿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p.745
→ 그 당시의 문화를 보지 않고서는 다신론을 저렇게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오해 속에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 그리고 현세욕(concupiscentia)이 생기고,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그 현세욕을 충족시키려고 숱한 우상을 신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p.746

이스라엘의 역사 흐름에 따라 야훼가 감정이 격한 절대적 폭군에서, 스스로 세운 계약에 충실한 입헌군주를 거쳐, 사랑이 넘치는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던 것은 신이 그렇게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 -p.748

당신을 찾는 이들은 모두 당신을 시험해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은 이들은 당신을 형상과 모습에다 결박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치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성숙함에 따라 당신의 나라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허영 따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당신과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나를 위해 기적을 베풀지 마소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당신의 법칙을 바르게 따를 수 있도록.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이야기와 연관해서 해석한다면, 릴케가 말하는 신의 나라와 법칙의 성숙이 역사 안에서 인간에 의해 이해되는 신의 성숙일 뿐입니다. -p.750

‘신’이라는 단어에는 변하지 않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기보다 서로 모순되고 심지어는 상호배타적이기까지 한 의미들이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융통성이 없었더라면 신 관념은 결코 인간의 위대한 개념의 하나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에 대한 어떤 하나의 생각이 의미나 적절성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조용히 폐기처분되고 곧바로 새로운 신학으로 대체되었다. -p.751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p.753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간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p.769

“(플라톤에 의해) 존재로서의 존재, 즉 존재자체의 개념은 모든 것 속에 내재하는 힘, 다시 말하면 비존재에 저항하는 힘을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있으며, 또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의 힘, 바꿔 말하면 존재의 무한한 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론[神論]에 대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과 존재의 힘을 굳이 동일시하지 않는 신학은 군주론적 유일신교다.” -p.775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종교들 사이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

다시 정리하면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라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룬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these)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p.781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그가 유대교이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을 믿는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 -p.798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다렸을 겁니다. -p.799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습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합니다. 또 논리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지요. 이미 수차례 밝혔듯 어떤 것이 만물의 ‘궁극적 포괄자’라면 그것은 ‘유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p.79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일자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성도 동시에 갖고 있지요. 일자성은 무규정성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지만,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heterologous love)’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p.800

우리가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를 따라 신을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의 정점’이라고 규정한다면, 신을 배제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을 배제한 이성, 사회진보, 민중해방이 아니겠어요? 무가치한 이성, 무가치한 사회진보, 무가치한 민중해방 아니겠어요? 이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이성, 진보, 해방이 아니지요. 학문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며, 문명 자체가 매일반입니다. -p.804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막이 되어 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기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서 인간과 세계를 가치 있게 하던 신은 죽어 버렸고, 인류애와 연대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킬 이성과 주체도 소멸해 버렸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바다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는 부러졌고, 유토피아를 향해 치켜들던 레닌의 팔은 잘렸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들을 차례로 몰아내고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됨으로써, 시대마다 유효했던 공인된 처방들이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 겁니다. -p.806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닙니다. 그래요. 바우만이 이름 붙인 유동하는 공포지요. -p.806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리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 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이다. 이 네 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안에서는 자기 자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p.809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떤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들 늦은들, 이곳이든 저곳이든 어떠리. -p.811

3. ‘내가 저자라면’

 바티칸 시스타나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보는 것으로 시작을 해서 ‘최후의 심판’을 살펴보는 것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다음 네 개의 명제 ‘신은 존재다’, ‘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신은 유일자다’ 를 바탕으로 서양문명에서 신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며 이와 관련된 서양의 철학적, 신학적 배경과 그로부터 파생된 서양 문명의 자취를 훑어간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20세기 신학까지 포괄하는 동시에 플라톤 철학에서 시작해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키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의 현대 철학까지 살펴보며, 특히 신에 대한 탐구가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현대 물리학의 빅뱅이론과 같은 자연과학적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핀다. 여기에 예술가와 작품, 고전문학의 걸작들이 곁들어지고 우주론과 진화론, 스티븐 호킹,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등 무신론을 주장하는 오늘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까지 살펴본다.

 이 책은 전문용어 대신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표현하는 ‘디아트리베’ 라는 수사법을 사용하여 서술함으로써 독자와 1대1로 대화하듯 묻고 챙기고 요점을 정리해주면서 다정하게 다가오는 저자의 모습을 새롭게 시도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상세한 주석으로 친절한 설명도 잊지 않고 중간 중간 싯구를 인용한다거나 다양한 작품의 일부를 인용해서 설명하고 더불어 여러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나열하기도 한다. 이해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는 부분에서는 다시 한 번 풀어서 설명해주는 부분에서는 최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가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고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또한 기독교인들만 읽는다고 생각하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점이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거부감 없이 이 책을 읽어나가게 끔 해준다.

 마지막에 저자는 오늘날 서양 문명을 위기로 몰아넣는 주된 원인이 신이 점차 잊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 그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사라져 감으로써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을 맞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유일성을 지닌 종교(기독교에 한정된 종교가 아닌)가 필요하며, 이것이 저자가 신에 대해서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고집한 이유가 저자의 개인적인 종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이 특정 종교를 생각나게 해 저자가 말하는 신의 의미-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의 정점인 진리, 선함, 아름다움, 생명, 정의, 위대함 등-를 왜곡해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라고 표현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서양문명 안에서의 문제만을 보았을 때는 기독교 안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서양을 넘어 인류가 직면한 문제로 보았을 땐 기독교를 넘어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므로 한 챕터 정도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어떻게 융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 있었으면 유일신의 보편성이 특정 종교에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덜 하지 않았을까 한다.
전체 구성에서는 맺음말을 먼저 읽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과 뜻을 이해하고 전체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므로 맺음말이 맨 앞으로 배치되는 것이 전체를 이해하는데 수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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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21:08:29 *.109.25.139
미선씨!
지난 4주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서로의 글과 함께 읽은 책을 통해 교감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일요일 저녁 푹 쉬시구요!
즐겁고 행복한 한 주 시작하시길 바랄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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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04:05:17 *.76.248.166
 매번 감탄할을 금치 못하게 하는 리뷰들 잘 봤어요.
 한달 동안 레이스를 잘 이어온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주고 싶어요.
 경인씨도 고생 많이 하셨구, 이번 한 주는 조금은 홀가분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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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6:57:34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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