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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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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3일 23시 3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1 페이지 이상)

1) 저자에 대한 기록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제법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그 감동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예술품이나 유적들 안에 자리하면서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어떤 위대한 정신적 가치에서 나옵니다. 미술이든, 건축이든, 음악이든, 공연이든, 문학이든, 학문이든,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념을 바꾸게 하는 것들의 심층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가치들이 반드시 들어있지요. 서구문명에서는 그것이 지난 2,000년 동안 한결같이 이라는 이름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하여 나타났는데, 내가 이 책에서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01010월 김용규 선생님의 휴머니스트 강연에서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 하였다. 저자는 이책을 딸에게 선물을 남겨주겠다는 마음으로 3년간 칩거하며 집필했다고 한다. 그의 다른 책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지식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특한 철학 담론을 펼쳤다는 평을 받는다. 이 책은 문학에 철학자의 사유와 철학적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문학 속의 주인공들을 일상의 무대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민을 통해 독자 스스로가 세상을 향한 자기 이해와 자기실현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후로도 그는 철학을 엄숙한 학문이 아닌, 우리의 삶을 새롭고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여기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 교양서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에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입맛에 맞게 철학을 조리해내고,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와 같은 작품에서는 철학을 영화에 접목시키며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출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휴머니스트, 2010)

다음까페-안산 여성문학회 http://cafe.daum.net/ansanw

개인 블로그 http://blog.daum.net/bongahlim/6

동영상 http://www.yes24.com/24/ChYes/VideoDetail?videoNo=765

2) 개인적 평가

 

이 책은 '환담'이라는 의미의 디아트리베(diatribe) 수사법을 활용하여 쓰여졌다고 한다. 두꺼운 페이지에 대한 압박감이 이 수사법을 활용하여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덕분에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난 후에 눈녹듯이 사라졌다. 철학이나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어렵다고만 생각하고 선뜻 선택하지 못했었는데 덕분에 그동안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나서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저자의 주석설명과 이해하기 쉽게 군데 군데 첨가한 문구들은 난해한 철학적 용어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하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 맺음말을 보면서는 저자가 최근의 여러 가지 사회적 행태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고 모쪼록 저자의 이런 노력이 지속적인 소통으로 이어져서 새로운 가치의 창출로 연결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1부 신이란 무엇인가

 

P27 그래서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P45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개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이로써 에로스 자신도 신적 존재가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P51 바로 이러한 사변적 논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궁극적 바탕으로서 자신은 탄생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했지요.

 

P52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 예술가들을 통해 무형의 기독교 신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형의 신으로 다시 탈바꿈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P59 모든 존재물은 존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 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2부 신은 존재다

 

P75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P97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알고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25)라고 했던 의심많은 도마의 애달픈 고백을 보세요. 여기서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요.

 

P99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할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P101 현대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하나님의 실존 문제는 물어질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만일 물어진다면, 그 성질상 실존을 초월한 것에 대한 물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대답은 - 부정이건 긍정이건- 하나님의 성질을 몰래 부정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 하나님의 존재는 존재자체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것들과 나란히 있는, 또는 다른 것들의 위에 있는, 한 존재의 실존으로 이해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라면 하나님은 유한성 특히 공간과 실체의 범주에 속한다. 비록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거나 가장 힘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 가장 높은 자라고 불린다고 해도 이 같은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P110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 있습니다. 들어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받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름까지 얻게 됩니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부여하는 실체지요.

 

P113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존재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존재만이 진리의 근거입니다만, 존재물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를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 더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완전하게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언급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고 단지 불완전한 지식, 곧 플라톤이 말하는 사견이지요.

 

P127 근대적 직업관의 근간이 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소명의식역시 이 같은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 무엇이든-설령 아무리 비천한일지라도-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이지요.

 

P129 이처럼 고대와 중세 그리고 적어도 17~18세기 들어 -계약, 곧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맺어진 합의의 구속을 자연법으로 인정하는 - 사회계약설이 나오기까지 서양의 자연법사상안에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로부터 뻗어 나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며 서양문명에 고착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형이상학이 뿌리 깊게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대연쇄가 한결같이 불평등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무기로만 해석된 것은 아니예요. 특히 근대에 들어서면서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평등이나 존엄을 옹호하는 기반으로도 인식하기 시작했지요.

 

P132 플로티노스는 유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유출은 마치 빛이 발광체의 주위로 번지듯이, 뜨거운 물체가 주변으로 열을 퍼뜨리듯이, 향기가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가듯이 매우 신비롭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빛을 발하지만 어두워지지 않고 샘물이 시냇물을 흘려보내지만 마르지 않는 것처럼 일자의 유출은 일자 자신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지요. 플로티노스는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고, rm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라고도 설명했습니다.

 

P137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자시늬 빛(형상)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거울에 비추듯이라는 표현을 보세요. 그게 바로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영혼의 성찰’, 곧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영혼의 작용입니다.

 

P141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지요.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됩니다.

 

P148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 존재는 생성, 작용할 때에만 존재일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변화할 때에만 불변할 수 있다니!

 

P150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지요.

 

P154 즉 신은 시간 밖에서는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P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스스로 생성, 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야-다시 말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야-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물론 기독교 신한이 존재자체라는 용어로 계승한 신이기도 합니다. 중세신학자들이 이해한 존재자체라는 개념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는 존재지요. 명사라기보다 동사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나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고 묘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유에도 이러한 역동적 신 개념이 들어 있지요.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P178 하이데거는 기획투자함으로써, 사르트르는 앙가주망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앙가주망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만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P227 한 인간의 판단 기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입니다.

-> 주변에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어떤 것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인지...

 

 

P230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것입니다.

 

P234 찬란한 빛 같은 신비한 어떤 것을 보았든, 신의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소리를 들었든, 아니면 스스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든 간에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면-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아닌 것이지요!

 

P235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P276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창조와 함께 시간이 생겼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신기하게도 현대 천체물리학이 내세우는 우주론인 빅뱅이론과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P297 무한한 종류의 옷이 진열된 옷가게에 들렀다면 누구나 당연히 그 옷가게에서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옷을 찾듯이, 수많은 우주 중 생명체에 적합한 우주도 있게 마련이며 바로 우리가 그 우주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 요컨대 실재하는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구조 사이에 공모또는 협동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 하지만 그는 정신이 우주의 기능에 본질적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우주의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요.

P301 성서 텍스트의 사실은 예컨대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세계의 사실입니다. 즉 창조, 신의 통치, 언약, 중생, 심판, 종말, 부활, 새 세상 등 성서의 언어로 구성된 성서세계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객관성이 보장되는 사실들이라는 이야기예요.

 

P302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역사,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지요. 그러므로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 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한다는 뜻이겠지요.

 

P304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대립도 이처럼 언어놀이의 차이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믿음이 행위를 낳고 행위가 믿음을 낳는다라는 이해의 진보와 성서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 공감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까?

 

P305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P314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세계로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초월성과, 세계에 부단히 참여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내재성을 동시에 지닌 유신론적 신입니다.

 

P320 만일 어떤 기독교인이 당신에게 신은 영원하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신이 시간 안에서 무한히 존재한다거나, 신이 시간 없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단지 신은 시간 밖의 존재, 곧 세계초월적 존재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P325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의 모상입니다.

...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영원이 변하는 시간 안에 부분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P330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도록 하는데요,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가능성이자 과정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이자 통로지요.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찾아낸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눈물과 땀에 젖은 우리의 삶, 곧 우리의 고달픈 시간의 끝에 허무가, 악마가, 전락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설사 그것이 빈말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P331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P334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이라고 불렀지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P337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 마음이 심리적 시간, 존재의 시간, 신적인 시간을 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P342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갈파한 대로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 희망을 구성하게한다는 것이지요.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P418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자연이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원시적 공간이라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렇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인간사회가 자연의 일부라고는 해도 자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 동물로부터 왔다고 해도 동물로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자연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인간사회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지요. ‘만들어간다는 데는 (또는 바람직하게)만들어야 한다는 가치 기준이 전제되어 있으니까요. 따라서 생존과 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세계의 법칙들이 학문, 예술, 종교와 같은 정신적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척 불편합니다.

->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말에 대해서 별다른 의심없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왔다는 것을 근거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이타성과 관계지향성을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커서 굳이 꺼내어 문제삼진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궁극적인 의문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저자의 거침없는 불편하다는 표현이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P424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건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20세가 후반 사회생물학에 바통을 넘겨주기까지는 사회다윈주의가 바로 그런 부당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P427 그렇다면 사회다윈주의자들은 모두 냉혈한, 악당, 무식쟁이 또는 사회파괴자였던 걸까요? 아니지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요. 그들은 당시를 대표하는 과학자거나 지식인이었고, 무엇보다 계몽주의자였어요. 당연히 그들은 이상사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상주의자들이었지요.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정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당한 수단을 제 스스로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나 자신에게 내 행동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 그 수단에 대해 항상 정당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럴려면 항상 깨어있어야지....

 

P433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느 점입니다.

 

P469 설령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당신이 A(:범죄)를 행하도록 강재할 수 있는 비밀장치를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데, 당신이 A외에 다른 행동을 시도하지 않는 한 그가 그 장치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까요? 이 경우 만약 당신이 실제로 A를 행했다면 당신에게는 달리 행동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당신이 그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당신이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선택한 것도 역시 사실이라는 겁니다.

-> 종교와 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 중 하나였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어느정도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P484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P528 우리는 지금까지 세네카와 바울 그리고 칼빈을 통해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그 출생부터 죽음까지 끊임없이 인도하는 신의 어떤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신의 그 속성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선으로 이끈다는 것도 살펴보았지요. 그들이 운명이라 했단 예정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라고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계 내재성또는 인격성이라고 부릅니다.

 

P533 마치 시계공이 완벽하게 설계해서 만든 시계가 일단 작동하면 그것을 만든 시계공의 개입없이도 정해진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신론자들의 세계는 신의 참여 없이도 충분히 조화롭게 작동합니다. 따라서 신의 개입에 의한 기적 같은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기도 하지요.

 

P543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왜냐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이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P547 20세기에 활동한 히브리인 랍비이자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그 유명한 <나와 너>에서 신을 “<><>보다 더 나에게 가까이 있는완전한 자기라고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타자이며 나타나고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라고 고백했는데요, 여기에도 이같은 사유가 강하게 배어 있지요.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P559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또한 신과 만나고 신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신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

 

P560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신의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

... 우선 신이 인간을 오직 자신의 섭리에 따라서 강제적으로이끈다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인격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또 어차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강제하려면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신의 인격성과 섭리는 기도와 관련해서 적어도 이 두가지 문제로 서로 부딪치지요.

 

P561 신의 섭리에 의한 강제는 선한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이어서 신의 인격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말이지요.

 

P567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야만 기도는 우리가 신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조종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야만 기도가 우리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신율적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래야만 기도가 신을 우리처럼 속되게 만드는 계기가 아닌, 우리를 신처럼 거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우리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P575 신의 강제적 섭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유익하다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한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576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 너무 마음이 힘들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했었다. 그 시간은 곧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P577 알고보면 신을 믿고 그의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디 극단적 자기체념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교훈했지요.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부단한 자기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밀이 부서져 빻아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빵이 되겠습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의 절구에 자신을 집어넣어 부서지고 빻아져서-그러나 버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P604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전부였지요. 또 그날 그 산에서 정작 아브라함이 불태워 신에게 바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마리 숫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지요. 아니,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안과 불신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해 낸 것이 무엇인가요?

... 그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

 

P608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P610 기도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자기체념으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욥이나 하박국이나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자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그 뿐아니라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구원, 곧 자신마저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을 신이 용납하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지요.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지요.

 

5부 신은 유일신이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P729 모두들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가 쉬이 상상이 가나요? 그곳에는 당연히 그 어떤 배타적 요소나 위계적 지배 그리고 특권에 의한 종속이 없으며 오직 사랑에서 나온 평등한 사귐과 자유로운 교제만 존재하지요. 그래서 구성원 모두가 기쁨뿐 아니라 슬픔도, 희망뿐 아니라 절망도, 삶뿐 아니라 죽음도 함께 느끼고 함께 나누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한 번이라도 이런 공동체를 실제로 봤거나 경험한 적이 있던가요?

 

P732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말이 신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3. ‘내가 저자라면

 

이전의 다른 책들보다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관심은 있었으나 잘 모르던 신에 대한 이야기들이라 읽으면서 이해하고 흡수하기가 바빴던 것 같다.

존재로서의 신, 창조주로서의 신, 인격으로서의 신, 유일자로서의 신......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최대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방식을 따라가다보니 자연스럽게 페이지가 넘어갔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잘 이해가 안된다 싶은 부분이 나오면 저자가 예를 들어서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설명을 해주는 구절이 나오는 걸 보면 아마도 누군가(아마도 딸)에게 보여주어 어려운 부분을 확인하고 그에 대해서는 더 상세하고 알기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마지막에 맺음말 부분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는 중간에 나온 다윈이 진화론을 쓸 때 친근하게 설명하는 수사학을 활용한 점과 귀납적으로 책의 내용을 구성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과학적 근거들을 모두 제시한 후 마지막에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점이 진화론의 인기비결이었다는 내용을 보면서 저자도 다윈의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잠깐했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신에 대한 긴 논의의 궁극적 목적이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여러 가지 가치의 문제들에 대한 문제제기 및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위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고민과 이야기들이 보완되거나 다음번의 저자의 작품으로 나오기를 기대하게 된다.

 

 

IP *.224.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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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3:22:09 *.124.233.1
레이스 완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4주간의 지적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새로운 한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작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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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6:54:09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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