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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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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4일 00시 3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모든것을 함께 끌고 가는 것은 희망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있는것만 보지만 희망은 장차 있는 것을 보며,
사랑은 있는 것만 사랑하지만 희망은 장차 있을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 또 아주 영원을 향해서..."

- 위르겐 몰트만(1926~) -

저자의 차별점

저자는 그동안 인문학적 교양이 현실생활에 실제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다양한 대중적 철학서와 인문교양서, 그리고 ‘지식소설’을 집필,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논담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라며 스스로 질문한다고 한다. 그는 고상한 전문용어를 사용해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피하고 생동하는 일상용어를 사용해 독자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철학이 어려운 이유를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 할 때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고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이야기하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예로 들때, ‘사랑이란 상대를 배려하는 이타적인 마음이다’라는 말보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이몽룡과 성춘향의 이야기를 통해서 쉽게 이야기" 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작품을 자주 철학과 접목시킨다.

그는 인문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본 책에서 저자는 철학과 신학을 문학, 역사, 미술, 음악 등과 아울러 한편의 대서사시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것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저자의 독일 유학

저자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정통 인문학자이다. 본 책에서 '삼위일체론'를 설명할 때 중요한 신학자로 거론되는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 1926~)은 독일 튀빙겐 대학원 조직신학교수로 1967~1994년 재직한 것으로 나온다. 저자 김용규가 튀빙겐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어 몰트만의 직계 제자일 가능성이 크고, 최소한 큰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결론 부분에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상호내주적 또는 상호침투적 사랑으로 신을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튀빙겐 대학은 '프리드리히 헤겔'의 모교이기도 하며 신학을 바탕으로한 형이상학 분야로 알려져 있다. 김용규가 수학한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1457년 오스트리아 왕가에 의해 설립되었고 신성로마 황제와 교황의 인가를 받은 학교다. 1620년 예수회 수사들이 철학과 신학 강좌를 담당하였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신학을 바탕으로한 철학을 지향하는 대학이다.

위르겐 몰트만에 대하여

몰트만은 192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포로가 됐다. 거기서 영국 군목이 건네준 성경책을 읽으며 회심했고 신학에 입문하게 됐다. '희망의 신학'도 이때의 경험이 모멘텀이 됐다. 괴팅겐대 신학박사, 독일 고백교회 담임목사, 본대학 교수, 튀빙겐대 조직신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한국에 여덟차례 방문해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자신의 희망의 신학을 전파했다. 몰트만의 영향력은 국내 민중신학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보수교단과의 관계로까지 확장되었다. 다수의 한국인 제자들이 교단별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 연도별 정리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휴머니스트, 2010)
철학고양이 요루바 (주니어김영사, 2010)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 (살림출판사, 2009)
9인9색 청소년에게 말걸기 (주니어김영사, 2008)
설득의 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7)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웅진지식하우스, 2006)
철학통조림1~4권 (주니어김영사, 2006)
다니 (지안출판사, 2005)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론과실천, 2004)
데칼로그: 십계,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바다출판사, 2002)
영화관 옆 철학카페 (이론과실천, 2002)
알도와 떠도는 사원 (이론과실천, 2001)

저자에 대한 평가

저자는 남들앞에 나서는 것은 여간해서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 대한 자료가 인터넷과 저서를 통해서 거의 찾기가 어렵다. 독일 유학은 언제 다녀온 것인지, 몰트만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어떤 것인지, 왜 교수같은 사회적 명성이 보장되는 자리를 찾지않고 자유기고가로 남았는지 등 궁금한 것이 많다. 연락처라도 알면  찾아뵙고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을 정도다.

어쨌든 그의 저서를 연도별로 정리를 해보니 그는 2001년부터 2010년 까지 거의 매년 한권씩의 책을 발간하고 있다. 구본형 소장님과 같은 수준이다. 그런면에서 자기관리를 잘하고, 계획을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난 성격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전문서적을 쓰기보다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면에서 닮고 싶은 분이다. 소설형식의 철학책, 청소년들을 위한 철학책들, 대중문화와 연결시킨 철학서적, '설득의 심리학'이라는 자기계발서적 분위기의 책까지 쓰신 모습에서 끊임없이 형식적 실험과 변화를 추구하는 분이기도 하다. 그 중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는 중편소설 형식인데 자료 조사를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 가볍게 보려다가 지금은 아예 푹 빠져 있다. 그만큼 그의 글은 독자를 끌고 나가는 힘이 강하다.

2008년 단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대중서적을 계속 쓰면서, 사람들이 오래 두고 볼만한 학문적 저서도 몇 권 쓰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그가 말한 '볼만한 학문서적'이 바로 우리가 읽은 책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그가 마지막에 말한 것처럼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 행세를 하는 지금 시대에 진짜 '큰 이야기'를 해보자는 메세지를 전한다. 대중들이 읽을 만한 신학책으로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책이 주는 두께감에 부담을 줄 수는 있지만 그의 친절하면서도 논리적인 설명을 차근차근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신학의 흐름을 잡게 된다. 이 책은 세속적이고 작은 이야기들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에게 학창시절 교회학교의 기억들과 젊은날 나름대로 치열했던 신앙적 고민들을 되살아나게 했다. 아마도 저자의 커다란 질문에 새롭게 '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저자의 책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에서 그는 말한다 "시절이 수상하다. 경제가 어렵고 정치는 어지럽다. 가슴에 어둠이 내리고 마음의 길들이 끊어졌다. 나누어가질 믿음이 말랐고, 함께 간직할 소망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 궁벽한 시절이 더 깊어질 것이라 한다. 하지만 삶을 위해 희망은 아니더라도 소망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소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몰트만이 말한 '희망'-이 글 첫머리에 인용했던- 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망' 만이라도 가지자고 말한다. 직업도 돈도 없는 그이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그는 이미 빛나는 사람이다.

김용규.jpg

<사진: 단대신문 1230호 6면, 2008>

참고자료

1.  http://www.yes24.com/24/ChYes/VideoDetail?videoNo=765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 예스24, 아름다운책이야기
2.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3004&cont=5637
   예스 인터뷰,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살해범이다!” -by 김이준수 2011.3.2
3. http://www.d-voice.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18
   단대신문 dvoice,  자유기고가 김용규, 철학을 말한다.
4. 네이버, 위키피디아 인물정보 : 위르겐 몰트만, 김용규
5.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 살림출판사, 2009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지은이의 말

8.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후 서양 사람들은 1700년 가까이 단 하나의 신을 압도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숭배해 왔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새뮤얼 헌팅턴이 유행시킨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에도 나타나 있듯이, 서양문명이 곧 기독교 문명이고 그 심층에는 기독교의 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9.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도 없습니다!

10.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성직자들, 예컨대 사도 바울이 글을 쓰거나 설교를 할 때 즐겨 사용하던 디아트리베라는 수사법을 활용합니다. '기분풀이' 내지 '환담'이라는 뜻을 가진 디아트리베는 설사 심오한 철학적 변론이나 종교적 사상이라 할지라도 고상한 전문용어를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비속하지만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수법이지요.

1부 신이란 무엇인가? 

22. 신은 정말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처럼 백발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26. 창조가 전적으로 신의 능동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데 안성맞춤인 장면이지요.

27.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28. 신약성서에서도 신은 "어느 때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한1서 4:12) 또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디모데전서 6:16)로 표현됩니다. 혹시 놀라셨나요? 아니면 왠지 서운한가요?

 ☞ 이런 대화하는 듯한 문체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어려운 서양철학과 신학의 개념들이 저자의 설명으로 조금씩 머릿속에 자리잡혀갈때쯤, 이런 대화체에도 적응된 듯했다. 나의 질문을 먼저 알아채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서술방식이 경이로워 보인다.

32.  만약에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3. 미켈란젤로가 그린 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입니다.

36. 그들이 신에게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신들을 폄하했다기보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했다고 보아야 하지요.

37.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대담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어려서부터 체조와 운동경기를 통해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육체를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38. 인류 역사를 두고 인간의 육체를 이처럼 신성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미켈란젤로가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39. 고대나 중세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욕정과 죄의 온상이기 때문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41.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41. "인간답게 묘사회되 동시에 이상화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견지한 최고의 규칙이었습니다.

43. 미켈란젤로는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던 이데아의 미가 작품에서 물질성을 소멸시키고 인간의 영혼을 초월적 세계로 이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47.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신이 그리스 신들로 표현되는 이유는 신플라톤주의 철학 때문이다.

51.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궁극적 바탕으로서 자신은 탄생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했지요.

52. 유대교는 물론이고,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모든 종교에서 신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55.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56.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 이 책의 구성의 이유가 이 문장에 나와 있다. 각 부의 제목들이 이 문장에서 말한 신의 특성을 말한다. 그 말을 깊이 파고들면서 독자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59. 여기에 사용된 '떠남', '등 돌림' , '돌아감'이라는 개념들이 바로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녔다는 이야기입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만 살 수 있고 물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새가 공기 없이 어찌 날 수 있겠어요! 요컨대 모든 존재물은 존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64.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축복과 징벌을 묘사한 작품에는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닌 종교적 상징과 표현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2부. 신은 존재다

70. 중세 기독교 사상사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대립'이라고 불리는, 신구 두 신학적 입장 사이의 갈들은 12세기 말경 시작되었습니다.

72. 이렇게 성인이 된 뚱뚱하고 경건하며 유쾌한 천사 같은 신학자가 누군지, 아마 당신도 지금쯤은 눈치 챘겠지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1255~1274)입니다. 그리고 교황 요한 22세가 기적이라 믿었던 그 저서는 <신학대전>이지요.

75.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신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신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신이 어떤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지, 셋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 또는 '존재 자체'라는 것이지요.

76.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탁월한 중세신학자들도 신이 인간처럼 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바다'와 같은 모습이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입니다.

80. 우리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먼저 그것의 '이름'을 알아봅니다.

80.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신분이나 새로운 삶의 목적을 얻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84. 예컨데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습니다. 이때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입니다.

85. 우주라고 규정하고 이름 붙이면 우주는 동시에 우주가 아닌 것과 구분되어 최소한 둘 가운데 하나일  뿐, 만물의 궁극적 근원은 될 수 없습니다.

85.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아우그스티누스-

 ☞ 道를 도라 이름붙이면 도가 아니다. -노자 1장-, 노자사상의 도의 개념을 서양신학의 '신'과 같은 것으로 봐도 되는 것인가.

 88.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일자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92.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의 번역 "나는 있는 자다" 본래는 '자신의 있음'을 의미

93. 모든 시원이 그렇듯, 출발에서 벌어진 미세한 틈새가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간격이 되는 법입니다.

94. 그런 탓에 '있는 자'라는 말에는 '강한 자' 또는 '전능한 자'라는 말처럼 신이 하나의 '존재물'인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알게 모르게 녹아 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고대 히브리 사람에게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말이 가진 의미의 핵심은 단순히 '나는 있다' 또는 '나는 나로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99.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100.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 칼 바르트-

101. "하나님의 실존 문제는 물어질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만일 물어진다면, 그 성질상 실존을 초월한 것에 대한 물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대답은 -부정이건 긍정이건- 하나님의 성질을 몰래 부정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다" - 파울 틸리히-

102. 이후부터 우리의 이야기에서 '존재'라는 말이 나올 때는 그곳에 '신'이라는 말을 대입해서 이중적 의미로 생각해 보았으면 해요.

104.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 두 주제인 '본질'과 '존재' 중 하나인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으로 단번에 뛰어든 것입니다.

106.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도 거짓이다. -파르메니데스-

108. 플라톤이 '있다는 것'(영원불변하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한 반면, 우리는 그에게 '현존한다는 것'(세상에 가시적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존재란무엇인가?, 질송-

109.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이 철학적 사변이 후일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도 진실하고 참된 세상은 우리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어떤 다른 세상이지요. 곧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였던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110.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이지요.

114. 신=존재 :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서양문명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지요. 엄밀히 말하면 지난 2599년 동안 서양문명 전반에 이것보다 더 크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철학이론은 없습니다.

118.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사다리', 이 같은 사유가 19세기에 다윈에 의해 '진화의 사다리'라는 매우 의미 있는 개념으로 연결됩니다. 다윈은 '진화의 사다리' 대신 "생명의 나무"라는 용어를 사용.

119. 스콜라철학자 "존재의 대연쇄"=구약성서의 '야곱의 사다리'

124.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예시한 존재론적 계층구조라는 모호한 개념은 그의 영특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의 사다리'라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생물학적 위계질서와 결합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로 유입되어 가장 미소한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에 이르는, 무한한 수의 고리로 연결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굳어졌지요. 그것이 중세를 지나 적어도 18세기 후반까지는 철학자와 신학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교육받은 일반인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우주관이자 가치관이었습니다.

125. 교황과 국왕의 권위가 신성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 적어도 프랑스대혁명(1789)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진리였습니다.

128. "오, 인간이여! 그대의 존재를 그대 안에 한정시켜라. 그리하면 결코 더는 비참해지지 않으리라. 존재의 대연쇄에서 자연이 당신에게 할당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그리하면 아무도 당신에게 그곳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지 않으리라." -에밀, 루소-

 ☞ 현대에와서 뉴에이지적 책들에서 말하는 '참된자신'이 되라는 것도 비슷한 철학적 바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129. 부자는 최하위 노동자를 경멸하지 말지어다. 그도 자연의 연쇄 속에 있는 동등한 고리이니 : 동일한 목적으로 노동하고 동일한 관점으로 합일되어 양자는 다 같이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파멜라, 새뮤얼 리터드슨-

 ☞ 죽음 앞에선 모두 평등하다. 그런면에서 지위와 부는 결국에는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혁명적 사고, 계급적 사고도 서양의 자연법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는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신 앞에서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파멜라의 소명의식이 잘 나타나있다.

130. 존재론 전통에서 존재는 불변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진리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이 상충하는 지점이에요. 히브리인들의 존재 개념은 만물을 생성,소멸시키는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리 개념 역시 불변성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소멸하는 작용, 곧 변화시키는 본성을 근거로 하지요. 천지를 창조한 '신의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의 말은 만물을 생성,소멸시키고 의롭게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입니다.

132. 영원불변하는 일자가 어떻게 다른 어떤 것을 생성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던 일자가 뭔가를 갑자기 생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한다는 뜻이니까요. 이에 대해 플로티노스는 유출(deriv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134. "정신은 일자가 아니라, 일자 다음에 즉시 나오는 것이다" -질송-

134. 제한성, 규정성이라는 '안정된 조건'이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입니다.

135.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서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137. 아퀴나스가 말하는 성부,성자,성령이 플로티노스에게는 각각 일자,정신,영혼인데요.

138. 영혼을 거울에 비유하는 표현은 서양문명에서 하나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141.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지요.

142. 고대에는 물론 중세와 근대에 이르러서까지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 속에 남아 있는 그리스 철학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요. 그랬다고는 해도, 초이성적 계시를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사들에게 플라톤주의 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148.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생성,작용할 때에만 존재일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변화할 때에만 불변할 수 있다니!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듯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한 걸까요?

150.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지요.

151. (노출시간을 길게해서 찍은 사진)들이 바로 변화(운동)하는 대상을 탈시간화해서 불변(정지)하는 대상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요.

151. 히브리인들이 말한는 변화하는 존재란 불변하는 존재의 '시간안에서의 모습' 또는 '시간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152. 논리학은 철저하게 탈시간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서양문명이 탈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 우리에게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154.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

154. 모순되는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 사용하는 이 논법은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유를 종합한 기독교적 신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 예수를 초월자(하나님)이자 진정한 인간으로 고백하는 것도 같은 사고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성,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야-다시 말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야- 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159. "당신이 말한 존재의 장이란 양자물리학자들이 '퍼텐셜'이라고 부르는 '소립자의 장'을 말하는가?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야말로 바로 그것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고 존재하며 소멸하는 장이 아니던가?"

163.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은 '존재의 장'보다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언급한 "형상 없는 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구분하려는 이유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신도 세계의 일부가 되어 세계에 대한 신의 절대적 독립성, 곧 신의 세계초월성이 훼손되기 때문이지요.

165.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165. "최고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 -안셀무스-

166. "모든 인간적인 것과 무한한 질적 차이로 대립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알고 체험하고 경배하는 것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 분 = 신, -칼 바르트-

171. 우리는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172. 곧 존재로서의 신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지 않은가! 당신이 말하는 존재의 장이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조차 아니라면, 신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은 신자들의 마음과 신학자들의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많은 사변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177.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178. 실존은 어의만으로 보면 '실재로 존재함'을 의미로 신학자들이 사용,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해서 사용. 예컨데 하이데거는 '기획투사'함으로써, 샤르트르는 '앙가주망'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 앙가주망은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함.

179. 우리는 '실존'이라는 용어는 실존주의자들의 용법을 따라 사용, 기존의 의미대로 '실제로 존재함'을 표현할 경우에는 '현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지요. 요컨데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신은 현존하는가?"라고 묻겠다는 말입니다.

183. 안셀무스가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신 개념은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결핍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그러한 현존은 필연적이라는 미야기. 즉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185.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 -칸트의 반론-

186. 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지요. 이 같은 명제를 라이프니츠는 '사실적 진리' , 흄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명제' , 칸트는 '종합판단'이라고 불렀지요.

187. 중세에는 안셀무스가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는 칸트가 이겼지요.

196. 흔히 '지적 설계론'이라고 부른 이 주장의 현대적 표현은 "오존층의 두께가 생물 보호에 어쩌면 그리 적합한가? 이는 오직 신의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

199. 유비추론이란 사물이나 사건의 유사성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입니다. 예증법!

201.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단 하나의 예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교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수사학적 논증법으로서 예증법이 지닌 힘이자 페일리의 논증이 가진 설득력의 비밀이지요.

203.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206. 지적설계론을 내세워 창조설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전통적 교리에서 크게 벗어났다.

206.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를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기독교 종파나 교단은 진화론을 큰 무리 없이 창조론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다.

210. 한마디로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위대한 두 거인의 이러한 학문적 취향이 그들 이후의 서양 학문을 크게 두 줄기로 갈라놓았지요. 예컨데 아우그스티누스, 안셀무스, 베네딕토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VS 토마스 아퀴나스,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학자, 근대에는 대륙의 합리론자들과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첨예하게 대립

212.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 칸트-

213.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다)

215.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없다는 이야기 -칸트-

217. 신학은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얻었다.

218. 안셀무스, 아인슈타인, 폴 디렉은 이론적으로 증명되고 심리적으로 확신하지만 경험적으로 검증할 길이 없는 아름다운 생각들을 각자의 가슴에 품고 있었다.

219. 현존은 일차적으로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지요. 그래서 이야기는 이제, 우리가 경험을 통해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220. '신에 대한 경험' 또는 '종교적 경험'이란 가능한가에 대한 학자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종교를 갖는 궁극적 이유는 종교적 경험을 갖기 위해서지 종교적 이론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 - 이 사람아, 그건 상관없으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 -

223. 근대와 함께 대두한 합리적 주장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내에서조차 종교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세력들이 일어났습니다.

227. 인간의 판단 기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입니다.

227.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신과 연관해서' 살펴보고,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의 틀이고 삶의 태도에요. '패러다임'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요.

228.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린 오리-토끼그림)

230.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232. 종교적 경험에 관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교훈은 그것의 '신비적 형태'가 '일상적 형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233.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여타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과 구분할 길이 없으며, 나아가 그 자체가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무의미합니다.

234.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235.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팡세, 파스칼-

 

 3부. 신은 창조주다

240.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경건한 여인 중 하나로 꼽히는 모니카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아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지요.

246. 복잡하고도 미묘한 인간의 감정을 간결하고 무게 있게 표현한 문장들을 철저히 외우는 교육을 받은 이 소년은 나중에 청중에게 눈물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구어체 언어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 문학작품을 밑줄치며 읽어야할 이유! 반복해서 읽어야 할 이유!

250. 누구든 이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야 어떻게 초이성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다시 신앙의 시대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까요? 두고 볼 일이지요.

252. 초이성적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것이 고대 신플라톤주의가 초기 기독교에 공헌한 일이었습니다.

254. 파울 틸리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적 이성주의를 내세워 동방의 이원론인 마니교를 극복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대의 자연과학, 수학, 테크놀로지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64.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397년, 그의 나이 마흔셋에 썼습니다.

 ☞ 왜 하필이면 마흔셋인가. 구본형의 마흔셋에 다시 시작하다를 읽은 직후에 이 문장을 접하니 의미있게 느껴진다. 게다가 고백록은 자서전적인 성격을 갖는 책이 아닌가. 혹시나 이 사실이 구본형님께 영감을 주었을지 모른다.

266.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겁니다.

268.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기독교적 진리를 '증언'하려고 <고백록>을, 아니 <증언>을 저술했다는 겁니다.

276. 요컨대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는 말... 빅뱅이론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주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고 주장.

280. 성운들의 적색편이 현상은 그 성운들이 관찰자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지요. 그리고 그건 곧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81. 우주배경복사란 빅뱅이 생긴 지 약 38만년 후 원자가 형성될 때 떨어져 나온 전자기파로, 사실상 대폭발을 증명할 수 있는 "창조의 메아리"와도 같은것.

282. TV방송이 모두 끝난 후 화면에 나타나는 흰색 반점들도, 바로 빅뱅 무렵에 탄생했던 복사의 여파인 것이다. 이 밖에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이 우주팽창설을 뒷받침한다.

283. 우연에 의해 우주가 과거와 같은 특이점을 가질 확률이 10의 10승의 123승분의 1.

284. 우주는 그야말로 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286. 양자요동이 일어나는 '에너지로 충마난 진공'이나 '최초의 물질이 형성되는 양자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 무'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은 또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건 아직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말합니다.

287.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288. 10-34초가 되자 인플레이션이 멈추었고, 드디어 프리드만식 표준적 팽창이 시작, 빅뱅 후 38만년이 지나 우주의 온도가 절대온도 3000K로 내려가자 원자가 만들어지며 광자가 더는 흡수되지 않고 빛으로 떨어져 나갔지요.

289. 우주가 어떤 특이한 한순간에 탄생했고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293. 과학자들이 선호하는 답변은 이른바 '다중우주 해석론'입니다... 시공 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 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생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

300. 살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려 사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나 죽은 후에도 다시 살게 하는 것이 신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30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 <철학적 탐구>, <확실성에 대하여> '언어놀이'이론!

303.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304.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대립도 이처럼 언언놀이의 차이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믿음이 행위를 낳고 행위가 믿음을 낳는다'라는 이해의 진보와 성서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305.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07. '새로운 문법(삶의 양식)을 익힐 수만 있다면 두 가지 언어놀이가 가능하다'

311. 언젠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과학자가 그 꼭대기 바위에 앉아서 이미 수백 년을 기다린 여러 신학자의 환영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미국의 천문학자, 로버트 자스트로-

311.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러지 않은 채 성급히 어떤 일치나 합의를 끌어낼 목적으로 하는 소통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거나, 획일화를 위한 강제를 유발하기 때문이지요.

 ☞ 조화는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중요.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대립양상이나 개인간의 대립을 푸는 방법도 같을 것이다.

312. 진리 또는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하래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담론들을 어느 하나의 문법으로 획일화하려는 야망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313. 나는 우리의 삶과 세계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은 마치 오늘날 영상기술자들이 3차원 영상을 만드는 방법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동양과 서양을 결합시킬 때 꼭 유념해야 할 방법이다. 무조건적으로 통합시켜야 한다거나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라.

317. '태초'는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320. 광자와 같이 질량 없는 입자들에게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지요. 설령 그 입자들이 광원으로부터 탐지 장치까지 수십억 년을 이동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 입자들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전송 시점과 수신 시점이 동일하지요.

322. 영원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언제나 자기동일적 현재만 있기에, 여원은 불변하는 실재이며 신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325.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의 모상'입니다.

327.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

330.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

333. 사실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징. 그나마도 그 '지금'에는 시간적 연장, 곧 지속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분산되는 수많은 찰나들, 즉 지금,지금,지금이 무한히 계속될 뿐이지요.

334. 상기의 힘 :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신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상기의 힘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적 차원에서든 모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깔린 심오한 사유입니다.

337. 우리 마음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현재,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 사진과 영상이란 매체를 통해 이런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현재,미래를 지금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사진 아닌가. 방법을 생각해보자. 꾸준한 기록을 통해...

339. 우리의 마음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직관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삶은 정녕 구원받을 수 있을까? --> 키르케고르 <반복>, 오스카 쿨만 <그리스도와 시간>, 마르셀 푸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342.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344.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 인디언로드의 3번째 트랙, <unrequited>를 들으며 과거의 충만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지금 감격에 젖는다. 아 이렇게 살아야지. 삶이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345. 시간은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신에게는 시작과 종말이 고정된 영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매순간 인식되지만, 신에게는 그 모든 일이 단번에 파악되지요.

351.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이 우리가 보는 우주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359. '무로부터의 창조'는 기독교가 받아들인 히브리적 사고로, 신이 '창조주'이자 곧 '절대자'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363.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371. 누구든 세계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신과 세계가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범신론에 빠지게 됩니다.

374. 서양문명은 일찍부터 창조를 태초의 어떤 신비로운 시간에 의해 여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377.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387. 불변하는 진리인 로고스와 역동적인 다바르의 종합을 통해 신약성서에 기록된 '말씀(logos)'이 단순히 진리뿐 아니라 행위와도 연관된다는 사실 역시 더욱 두드러졌다는 겁니다. 이로써 '말뿐만 아니라 행위로도'라는 구호로 압축되는 예수의 사역이 가진 성격도 함께 부각되었지요.

388.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심만 아니라 실천까지 요구하는 기독교는 물론, 이념 못지않게 행동도 중요시하는 서양문명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389.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종합이 기독교 신학과 서양문명 안에 지금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지요.

393. 신약시대에 와서도 사도 바울에 의해, 창조가 태초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보존하고 인도하는 신의 사역으로 재차 강조되었지요.

395. 창조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역사가 아니고 섭리에 의한 지속적인 보존과 인도라는 의미입니다.

400.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자신의 본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말--> 서양문명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한 생각

411. 프로테스탄트 일반에서는 창조가 '피조물과의 친교'를 위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개혁파 교회 전통에서는 창조의 목적을 '신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이야기해 왔다.

412. 다윈 이전에는 그 누구도 지식인들과 대중을 동시에 즐겁게 한 과학저술가가 없었던 탓이지요. (다윈의 <종의기원>이 빵팔리듯 팔린것)

413. <종의 기원>이 대중적 성공을 거둘만한 장점. 1. 내포하는 유물론적,실증주의적 경향이 당시 지식인들의 취향과 맞았다는 점.(무신론적 경향) 2. 풍부한 사례와 뛰어난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한 다윈의 표현 기법이 대중을 매혹시키는 데 충분했다는 점.  귀납법 사용.

413. 하지만 다윈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찰스 라이엘에게는 "이론을 만들지 않고서는 어떤 관찰도 없다"고 전하며, 자신이 연역주의자임을 털어놓았습니다.

414. 진화론 :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이 일어난다!

416. 다윈은 <종의기원> 5판부터 '적자생존'을 병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소한 학문적 행위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회진화론과 연결되어 엄청난 사회적 불행을 초래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417. 자연이 그러하다면 인간사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중심으로 서구 각국에 들불 퍼지듯 퍼져 나갔기 때문이지요.

419. 생존과 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세계의 법칙들이 학문, 예술, 종교와 같은 정신적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척 불편합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사람들은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매혹되어 이미 진화론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자연을 따르라'는 해묵은 구호가 여전히 변치 않는 불문율로 통하고 있었다.

423. 19세기 말, 사회다윈주의자들이 새롭게 지지한 이념, 대내적으로는 인종,계급,남녀 차별주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였습니다.

 ☞ 호전적인 사회분위기는 인류최대의 전쟁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425.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와 함께 자유,평등,박애를 지향하던 이성과 계몽의 역사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426. 진화론자들이 진화가 경쟁의 산물이라는 데 반대한 예, 헨리 드럼몬드는 1894년 <인간의 등고>에서 "이타주의적 해석이 동시대 진화론에서 빠진 가장 중요한 요소다"라고 지적, 표트르 크로프트킨은 <상호부조 진화론>이란 논문을 통해서 경쟁이나 이기주의가 아닌 상호부조와 이타주의를 다윈의 진화설로부터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431. "다윈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433.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435. 19세기 유럽인들 : 현세에서는 물질적 삶을 충분히 즐기고,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는 종교생활을 통해 내세에서는 영원한 삶을 얻으면 그만이라는 세속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상류층은 야만적이었고, 중산층은 속물이었으며, 서민들은 누가 뭐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439.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에 대적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진화론 외에도 이신론, 인류교, 자유주의 신학, 실증주의, 유물사관 등의 부단한 도전에 지쳐있던 19세기 후반의 교회가 '약삭빠르게' 진화론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

 ☞ 제국주의 시대의  해외선교, 종교적 팽창주의와 연결됨.

443.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당연히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여긴다" -존 호트-

444. 진화는 이렇게 생명 없는 물질에까지 이미 널리 퍼진 자기조직이라는 신의 창조적 경향 가운데 극히 작고 거친 한 부분일 뿐이다. -존 호트-

451. 창조가 신이 '직접' 그리고 '일시에' 실행한 사건이 아니라, 신이 창조해서 위임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통해 점차 이뤄졌다는 이론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454. 그렇다면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진화 원리' 또한, 신이 만들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내지 '자연법' 또는 '영원한 법칙'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456.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을 인정했습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 140여년 만의 일입니다.

460. 신학은 특정 교리를 영구불변하는 진리로 주장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그것의 시대적 해석이 적절한지 또는 수용 가능한지를 늘 질문하면서 성서와 전통적 사상들을 통해 부단히 재고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461. 칼빈은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맞게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교훈했지요. 따라서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택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462. 내가 아는한 자연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이라는 대립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룬 전통적 신학 이론은 없습니다.

466. 딜레마를 물리치는 방법 1. 선언전제를 물리치는 '뿔 사이로 피해가기', 2. 연언전제를 물리치는 '뿔로 잡기', 그리고 그 딜데마와 정반대 결론을 이끌어 내는 딜레마를 만들어 반박하는 '반대 딜레마로 되받기'가 그것입니다.

467.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충하지 않고 양립한다는 말로,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논파함으로써 딜레마를 물리칩니다. -양립주의-

470. 신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전제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 사이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가 아무 어려움 없이 성립한다.

472. 이미 주어진 저차원의 질서에서 이전에는 없던 고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을, 복잡성과학에서는 '창발'이라고 부르지요.

484. 신학적 이유에서 우리가 창조의 나쁜 신과 구속의 좋은 신을 갖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지 않기 위해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은 하나여야 하고 창조의 목적이 곧 구속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485. 불온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계가 신처럼 온전해지는 것은 모두 신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이지요.

 

 4부. 신은 인격적이다

49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바울이 로마교회로 들어가기 전

498.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501. 실정법이 명령하고 금지하는 일 이외에는 공정하다거나 불공정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누군가가 원을 그리기 전에는 원의 반지름이 똑같지 않다는 주장과 같다. 이처럼 서양문명에서 로고스는 신의 섭리로서 '영원법'이자 인간이 따라야 할 모든 법과 도덕의 근거인 '자연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503.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 -세네카-

507. '인간의 이성에 의한 인간구원'이 '신의 은총에 의한 인간구원'을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를- 적어도 19세기까지 부단히 위협했다는 뜻입니다.

513. "바울에게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거나 실질적으로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다" -루돌프 불트만-

514. 우리의 이야기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용어와 수사학적 표현 형식에서 그랬을 뿐이며 내용에서는 구약성서와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에 닿아 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516. 세네카가 말하는 섭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칙일 뿐 우리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517.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이라는  말이지요.

519. "하나님께서는 은밀하신 섭리 가운데 결국 나를 다른 길로 돌이키셨다" -칼빈-

522. 칼빈은 비교적 긴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고,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고대 작가들의 고전적 지식들을 끌어다 활용하는 수법이었지요. 전형적인 인문주의 글쓰기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524. 칼빈이 자신의 신앙 모델로 다윗을 삼은 이유 : 회심이 신의 섭리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순간적일 뿐 아니라 점진적일 수도 있으며, 외적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칼빈은 자신의 개종을 통해 보여 주려 했다는 것.

544.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545.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혹은 '세계는 어떤 근원물질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철학적 물음에 열중할 때, 히브리 선지자들은 '신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되는가?'하는 종교적 물음에 골몰했습니다.

 ☞ 물음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이 바뀐다. 무엇을 묻느냐에 따라 경험되는 것이 다르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난 어떤 물음을 가지고 살았는가. 난 '이곳에 나로 나타난 이유는?' , '이루고 싶은 것은?' , '내가 바라는 성공은?' 이런 물음들을 다이어리 매 월첫장 마다 적어놓고 그때 그때 나름의 대답을 적는다. 질문을 살펴보니 나의 욕망에 관한 물음들이다. 살고싶은 마음의 씨앗을 자꾸 건드리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기때문이다.  이제 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볼 차례이다. 나와 신은 무슨 관계인가?

546. 자신의 시선을 누구보다도 예수에게 집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히 신의 초월성보다 인격성이 더 부각되었고 신과의 사귐이 더 친밀해졌지요.

549. 예수를 통해 신의 인격성이 강화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기독교 교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강조'가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그것이 점차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556.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557. 성서에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도 우연적인 것이 아닌,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신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에 따라 작정된 것임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559.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560.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567.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야만 기도가 신을 우리처럼 속되게 만드는 계기가 아닌, 우리를 신처럼 거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우리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574. 전통적으로 중요한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강한 섭리론'을 지지했으며, 강한 섭리론 안에서도 신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없이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76.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며 기도로 신의 섭리를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 -아퀴나스-

577. 부단한 자기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579. 우주적 체념을 감수하는 스토아주의와 우주적 구원을 믿는 기독교의 신앙 사이에 걸친 간격을 없이할 수는 없다.

593.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596. 어떤 이유에서든-무엇보다도 세계와 신의 모순성 때문에- 자신의 삶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리하고 있지요.

600.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경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이'를 믿는 어리석은자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똑같은 절망적 사황에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은 오히려 일체의 이성, 일체의 인간적 타산, 곧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수고 버리고 체념하는 것이었습니다.

60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지요.

 

5부. 신은 유일자다

623. 도킨스의 글은 종교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애썼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열정적 찬미자이자 로마의 철학시인이던 루크레티우스의 오래된 격언, 즉 "종교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데 그것이 너무나 위력적이다"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이런 주장에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곧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원이라는 전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633. '신은 선하다'라는 긍정문이 플라톤에 와서야 이론적이고 공적으로 가능해졌고, 그것이 불가항력적인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불안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던 고대인드르이 삶에 더없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기 때문.

634. 한마디로 신은 악한 게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뜻. 이것이 플란톤이 서양 사람들에게 준 위대한 선물이다.

636. 플라톤이 논리적 오류를 고의로 범하면서까지 일자와 선자체를 동일시한 것은 '존재론적 목적'이 아닌, 오직 '도덕론적 목적' 때문이었다. 플라톤 철학의 진짜 목적은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였던 거지요.

639. 플라톤이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지닌 종교인이었습니다.

641. 플로티노스가 신적 존재로 구분한 일자,정신,영혼이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과 맞아떨어진다. "그리하여 원의 중심 자체가 존재하는 한편 원의 반지름(정신)이 원의 중심점에 기초해서 존재하며 나아가 그 반지름에 기초해서 하나의 원을 구성하는 원의 둘레(영혼)가 존재하듯이 일자,정신,영혼이라는 세 자립체는 하나로 존재한다.

642.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의 초상화를 보면 대개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플로티노스의 저서 <엔네아데스>를 들고 있습니다.

643. 삼위일체 논쟁은 318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비롯되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감되었습니다.

645.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26)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

646. 예수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 28:19)라고 교훈했다. 사실상 이것이 신약성서에 기록된 삼위일체 신에 관한 명시적 표현이다. 문제는 구약성서의 신이 자신을 유일자로 계시했다는 점이다.

651. 아인슈타인 자신도 '산란'과 '간섭'이라는 파동현상과 자신의 광자 개념 사이에서 드러나는 모순, 이른바 '파동-입자 이원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652. 하이젠베르크는 빛과 같은 소립자들은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 또는 "일어나려는 경향"으로 규정할 수 있는 가능태일 뿐이엇, 실험자의 관찰에 의해 비로소 입자 또는 파동으로 현실화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656. 격렬한 논쟁과 법정 송사를 즐기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초기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성장을 도왔다.

659. 삼위일체, 곧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669. 사람들은 '이성의 힘'으로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지요. 그 결과 철학자들 대부분이 신비주의로 기울어 기존의 철학과 신비주의를 혼합한 종교 형태의 사상을 만들었는데, 신피타고라스주의 , 중/후기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 등이 대표적 예이지요.

674. 기독교인들로서는 자기 종교의 '최고 신'이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제2원리'로 평가 절하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절대적 초월자이자 불변자인 일자가 '직접'창조라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요.

675. 기독교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난관!

676. 오리게네스는 "피조물들에게 성부는 존재를, 성자는 합리성을, 성령은 성결함을 부여한다"라는 식으로 삼위일체를 교훈했습니다.

677. 칼빈은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모사요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을 관장하시는 분이다."

679. 313년 기독교를 승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소아시아 북서부의 비트니아에 있는 니케아에서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전체 교회회의를 소집했습니다.

686.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었고, 사상사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을 비로소 극복한 계기가 되었지요.

703. 동방교회의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 : 신은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우시아)이라고 명백히 선포함

706. 서방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있다는 '신의 상호내주'에 관한 세 교부의 중심 사상에 독립적으로 도달. -->'관계설'이라 불리는 삼위일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712.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관계설의 핵심이지요.

713. "아버지와 아들은 태초부터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중 하나를 아버지라고 할 때 다른 하나가 아들이 된다. 따라서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건 옳지 않다"

715.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이다.

717.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했지요.

720.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보배로운 사유)

720.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바로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할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이 일을 한겁니다.

721. 현대에 와서야 신학자들은 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인간 공동체'의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 --> 위르겐 몰트만, 레오나르도 보프

722. 몰트만은 신의 단일한 통일성을 주장하는 서방신학 전통의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에 단호히 반대. 다원적 삼위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내세웠지요. 몰트만은 이 주장을 동방신학의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에서 가져옴.

 ☞ 위르겐 몰트만이 독일 튀빙겐 대학의 신학교수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몰트만의 제자인가?

722. 페리코레시스란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라는 다분히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용어입니다.

723. 당신의 양손을 각각 엄지와 검지를 맞대 동그라미를 만듭니다. 그렇게 만든 왼손과 오른손의 동그라미를 서로 끼웁니다. 어때요? 당신의 양손이 마든 두 개의 동그라미가, 서로가 서로 안에 침투해 들어간 모양이 되지요? 우리는 이처럼 단순한 작업을 통해서도 서로가 서로안에 침투해 들어간 형태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 그 밖에 뫼비우스의 띠, 클라인 병(내부와 외부공간이 연결된) 등의 예가 있다.

724. 몰트만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한 14:11)라는 구절에서 성서적 근거를 찾음.  

727. 놀랍게도 음악에는 그러한 삼위일체의 특성을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요소가 존재하지요. 바로 '조성음악'인데, 이 음악의 두드러진 특성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음이 동시에 울려 화성을 이룬다는 겁니다. 이 세음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연합되지만 혼합되지 않는 형태로 당신의 귀에 들어오지요.

727. 교향악에선느 악기들이 각자 자기 소리를 냄으로써 또는 4부 합창에서 각 성부가 각각의 역할을 유지함으로써, 단성음악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다성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729.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사회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는 삼위일체적 사고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731. "삼위성이 단일성으로, 단일성이 삼위성으로 축소되는 일 없이 결합한" 통일성입니다. 이 통일성 안에는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 담겼지요.

732. 기독교에서 말한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738. 구약의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신을 기독교로부터 분리해 내려던 마르시온을 정죄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배타적 종교로 남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구약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일신 사상을 계승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안에있는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요소는 모두 걷어 냈지요. 예수와 사도바울이...

741.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742. 의문 : 예수가 직접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라고 배타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던가?

 ☞ 질문을 던져놓고 상세한 근거를 대며 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런게 수사학적 방법인가?

747.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 약 600년은 인류의 정신사에서 가장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장자,열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나왔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가 완성되었고 부처가 생존해 있었으며,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했지요. 또한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와 이사야, 예레미야를 거쳐 제2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특별한 시기를 '차축시대'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인류 정신사에서 거대한 수레바퀴가 움직인 시대라는 뜻이지요.

750.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

753.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764. 예수가 말한 '나', 즉 아브라함이 보고 즐거워한 그는 태초 이전부터 신의 곁에서 천지를 창조한 '로고스'이자, 진리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로고스'인 '선재적 그리스도'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등장하는 '나'는 당연히 '선재적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유스티누스의 생각이었다.

769.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 7:20) 칼 라너는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772. 틸리히는 "유신론적 하나님을 초월해야만 존재에의 용기가 회의와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을 포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774. 우리가 신과 주체-객체의 관계에 있는 한, 소외되고 절망하게 되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 줍니다.

774.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존재자체'를 말합니다. 이 존재자체는 현존과 본질을 모두 초월합니다. 이런 이유로 틸리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부정하는 게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지요.

776.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경험되며, 허무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 안에 존재하며,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안에서 작용하는"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삶의 무의미성과 죄책에 대한 불안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 곧 '존재에의 용기'를 우리에게 부여하지요.

777. 이런 신을 믿는 절대적 신앙에는 당연히 이름도 없고 교회도 없고 종교도 없고 신학도 없을 수밖에요.

778. 하지만 만일 기독교인들이 신을 삼위일체의 상호내주적 또는 상호침투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그의 유일성을 삼위일체 신의 본질인 본질 공동체적,영원동등적 포괄성과 통일성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에 대한 신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추구하는 비위계적, 비지배적 '인간 공동체 원형'으로 나타난다면, 틸리히의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전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그러한' 신을 '그렇게' 신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 몰트만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미 기독교 교리는 완벽하다는 것인가? 인류의 정신적 성숙에 따라 교리가 바뀌고 발전하며 신의 성숙도 이룬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니 좀 변명같아 보인다. 교회와 교단을 지키자는 것인가? 수없이 분열된 교단과 교회를 바꿔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780. 우리는 사실상 불안, 공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781.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 -이 책의 기본 강령-

782.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가능한 한 덜' 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신앙을 '되도록' 더 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783.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지요.

784. 나는 신의 삼위일체적 특성에서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방식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798.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799.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습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합니다... 신이 존재인 한 유일자라는 것은 존재론적 결론이자 논리적 귀결입니다.

800.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801.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그것(성령)을 통해 우리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세우고, 그분들과의 친교도 세우기를 원하셨다"라고 표현했고, 몰트만은 "피조물과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802.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파스칼-

803.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 당면한 문제들의 해법은?

803.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애석하게도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803.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신 대신 자연과 인간에 눈을 돌려 그것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세속적 가치(이성, 개인의 행복, 사회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들도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입니다.

804. 신을 배제한 이성, 사회진보, 민중해방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무가치한 이성, 무가치한 사회진보, 무가치한 민중해방이 아니겠어요?

804.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한갓 '작은 이야기'들이 진리로 정당화됨으로써 제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곧바로 보편성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각종 다른 영역에 침범하여 주인으로 행세하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805. 근래에 유전공학, 진화생물학과 함게 부활하고 있는 과학주의가 통섭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들이 다시 큰 이야기로 등극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작은 이야기들 역시 큰 이야기가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805.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 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는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 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806.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807. 전근대는 자연이 사냥터이고 인간이 사냥터지기로 활동했던 시기. 보존의 임무. 근대는 인간이 정원사로 일했던 시기. 설계, 관리, 실현... 지금은 사냥꾼의 시대지요. 임무는 단지 살아남는 것. 그럼으로써 세계는 점점 지옥이 되어 갑니다.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808.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810.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 지옥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우리가 어떻게 사냥도 하면서, 정원도 가꾸고, 사냥터도 잘 지킬 수 있는가?

810. 기독교의 신 개념은 애당초 상반/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이루어 낸 최초이자 최고의 종합이었지요. 상반/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다양한 기법들-탈시간화와 시간화의 논리, 러브조이의 이중적 논법, 쿠사누스의 대립의 일치,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몰트만의 해석 등=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810.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새로운 종합이 될 것이며 새로운 르네상스가 될 것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목차
지은이의 말
1부 신이란 무엇인가
2부 신은 존재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5부 신은 유일자이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맺음말-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참고문헌
찾아보기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56쪽)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에서 저자는 이 책의 구성을 암시하는 위의 문장을 제시한다. 그런데 위의 글대로라면 '5부 신은 유일자이다'는 '2부 신은 존재다' 뒤에 자리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신은 유일자이다'를 이 책의 마지막으로 구성했다. 왜 그랬을까?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5부는 2부의 플라톤의 '이데아'와 플로티노스의 '일자' 개념을 다시 설명하고, 아퀴나스의 '성부,성자,성령'과 플로티노스의 '일자,정신,영혼'을 비교하면서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 원래의 순서대로라면 2부 뒤에 이 책의 5부인 '신은 유일자이다'가 오는 것이 내용의 흐름상 맞다. 하지만 책을 쓸 때는 마지막에 자신의 설명을 재정리하고 주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5부에는 이 책을 쓴 목적이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마지막에 배치했을 것이다. 저자는 5부에서 기독교의 유일신 개념이 배타성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732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배타성은 한시라도 빨리 버려야 하는 '반신앙적 유산'이라고 규정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실천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현대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통한 서로 간(피조물)의 친교(실존)를 말하며 책을 맺음하고 있다. 흐름을 뒤섞음으로 책의 강약과 주장이 확실하게 전해진 느낌이다.

'내가 저자라면'이란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솔직히 저자가 제시한 길을 따라가기도 벅찼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짜놓은 구성에 놀랄 뿐이다. 각 부를 '여는글' 형식으로 시작해서 독자의 몰입도를 높힌것, 각 장의 마지막에 질문을 던지거나, 다음 장의 내용을 암시하는 방법, 어려운 철학과 신학을 대화를 나누는 서술방식으로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배려한 점 등 모든 것이 존경스럽다. 다만 내용상 결론 부분에서 전통신학을 옹호하는 부분 이나 실천적 대안의 모호함은 또 다른 질문들을 만들어 낸다. 한 권의 책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질문들에 대한 탐구와 대안의 실천은 나와 독자들의 몫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이렇게 바꾸겠다고 나를 내세우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쓴 '설득의 심리학'이라는 수사학적 비법이 담겨있을 법한 책을 통해 그의 방법을 전수받고  싶은 바램이 더 크다. 한 가지만 말한다면 10장을 더해 서양문명이 신을 잃어버린 이유/과정/현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면 맺음말이 더 와 닿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IP *.111.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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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11.03.14 07:44:05 *.160.33.89
애썼습니다. 
면접 준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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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3.14 10:39:44 *.138.118.64
축하드려요~!!^^ 부럽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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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6:23:34 *.166.205.13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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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3:23:33 *.124.233.1
경수님! 4주간의 레이스 완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2차 레이스 합격도 함께요!
부디 좋은 인연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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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9:14:08 *.166.205.131
직접 뵐 수 있다는게 더욱 기쁘네요~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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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6:54:01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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