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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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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4일 01시 46분 등록

4 Book Review :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I.  작가에 대하여(김용규,헤르메스 )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책은 철학과 인문학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어, 현대인의 삶과 인문학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지식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과 『다니』는 철학과 사회 사상, 과학지식, 진화론, 인류학 등 다양한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소설은 그에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 외에도 독특하고 다양한 맛의 지식을 철학과 함께 버무려낸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을 빌려 철학의 이해를 이끈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키우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자기계발 팩션『기적의 양피지 캅베드』등의 저서가 있다.

 

작가 김용규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 상에서 상당히 많지 않았다. 나의 무능탓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출생년월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일단 그를 해석해 보기로 했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했는데, 영문이름으로 헤르메스라고 사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그의 정체성에 조금 더 접근하기 위해서 왜 헤르메스라고 했을지 헤르메스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행자 · 목동 · 체육 · 웅변 · 도량형 · 발명 · 상업 · 도둑과 거짓말쟁이의 교활함을 주관하는 이며, 주로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전령 역할을 수행한다. 올림포스의 12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숨은 의미를 해석하는 학문인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용어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한다.

헤르메스라는 낱말의 어원인 헤르마(Herma)의 뜻이 "경계석 · 경계점"인 것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헤르메스는 "건너서 넘어감"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된 신이었다. 헤르메스는 교환 · 전송 · 위반 · 초월 · 전이 · 운송 · 횡단 등과 같은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모든 활동에는 어떤 종류의 "건너감"이 들어 있다. 이런 이유로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하는 사자 · 재화의 교역 · 상품의 교환 · 의미와 정보의 전달 · 언어의 해석 · 웅변술 · 작문 · 바람이 사물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길 때 사용하는 방법 · 사후세계("하데스"")로 건너가는 영혼이 제대로 길을 찾도록 돕는 것 등과 관련된 신이었다.

아마도 작가는 스스로가 해석학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우리에게 이 책을 통해서 현재의 우리의 세태를 꼬집고 있었다.

바우만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사냥터지기에서 정원사 이제는 사냥꾼으로 변화되어 있다고 했다.

작가는 지식인으로써 토론의 장을 만들어내고 뭔가 변화를 꾀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담론화를 시키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모아 새 길을 찾아야 한다고 그는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세계는 위험에 빠져 공포에 떨고 있고, 삶과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파편화된 가치들을 종합해 되살려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유력한 방법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세계를 세계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가치이기 때문이다. 먼 길이 되겠지만, 그 첫걸음은 신에 대해서, 그 이름으로 언급되어오던 정의, 진선미, 생명, 아름다움, 위대함 등의 전근대적 가치들에 대한 올바른 담론에서 먼저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새삼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는 이유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즈음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되었다. 지진도 문제이지만 원전폭발로 인한 그 피해도 우려되고 있다.

눈 앞에 또다시 닥친 재앙을 보면서 그의 글에 다시금 동조하게 된다.

 

출처 : yes24.com 작가 소개

      위키 백과 사전

      네이버 검색 결과

      http://blog.daum.net/shkimski/20

동영상 :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cont=5637&title=003004

 

II. 내 마음을 무찔러 대는 글귀

 

1)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p.8)

   - 왜 종교인들이 자꾸 정치에 간섭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어른들이 가끔하시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침묵한다면 누가 진정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아니, 종교와 정치, 사회는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책 후반에 나온 것 처럼 오히려 종교가 사회와 정치와 멀어지면서 지금과 같은 혼탁한 상황이 초래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2) 어떤 것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가진 위험을 풍자한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이 귀해 식수마저 부족한 어느나라 사람이 서구를 방문했다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지요. 그래서 수도꼭지를 여러 개 사서 자기 나라로 돌아와 벽에 꽂아 놓고 틀어 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는 내용입니다. (p. 9)

   - 일을 하다보면 다른 기업으로 벤치마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범하는 우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분명히 잘 나간다는 회사에서 성공한 시스템 또는 문화인데 우리에게 적용해서는 같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그 바탕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1. 신이란 무엇인가?

 

3) 신은 정말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처럼 백발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p.22)

 

4)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p.28)

 

5) 아무리 그래도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p.32)

   - 창세기에는 분명 신을 닮은 피조물이라고 했다. 그것은 외모가 아닐 수 있음인데, 당연히 외모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6) 르네상스란 재탄생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p.36)

미켈란젤로는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라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를 그리스로마인들의 정신과 기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p.36)

 

7)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지요.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해대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대담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어려서부터 체조와 운동경기를 통해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육체를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p.37)

 

8)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p.43)

 

9) 에로스는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감각적이거나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p.45)

 

10) ‘신이 곧 존재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상실, 즉 사망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겁니다. 이처럼 성서는 낙원추방의 서사에서부터 존재론적 함축성을 이미 내포한 것이지요. (p.59)

 

11) ‘나를 떠나지 말 것’, ‘등을 내게로 돌리고’,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같은 표현들을 한번 보세요. 여기에 사용된 떠남’, ‘등 돌림’, ‘돌아감이라는 개념들이 바로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녔다는 이야기입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만 살 수 있고 물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새가 공기 없이 어찌 날 수 있겠어요! 요컨대 모든 존재물은 존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 근본 가르침입니다. (p.60)

 

12) 그리스 신화에서도 축복과 징벌은 각각 신들의 개별적 총애와 분노에서 나온 것이었잖아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과 똑 같은 형상과 감정을 가졌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아낌없이 축복을 베풀지만 미워하는 인간에게는 무자비한 징벌을 내립니다. (p.62)

 

13) 이 종교의 신이 자기 자신을 존재로 계시했고 또 신학자들도 그렇게 파악해 왔기 때문이지요….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같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그 관계도 분명치는 않으니까요.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p.64-65)

   - 신은 무엇인가? 그리스로마신화와 성경에서 나오는 야훼와 예수. 일단 믿는다는 전제로 시작해 보자.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앞서 읽었던 2권의 책을 읽으면서 또 지금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종교안에서 느꼈던 갈등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2. 신은 존재다

 

14)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또는 존재자체라는 것이지요. (p.75)

신을 가르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 자체를 갖고 있다.” (p.75)

 

15) 신이 인간처럼 생긴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바다와 같은 모습이라고 인색했다는 사실입니다. (p.76)

 

16)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신분이나 특징 또는 삶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신분이나 새로운 삶의 목적을 얻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신이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준 것이 대표적이지요. (p.80)

   - 이름은 사람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물이나 동물에도 이름을 붙이는 순간 특별해 진다.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가 붙는 순간 관계가 형성되고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17)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p.81)

 

18)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 것은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p.83)

 

19)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p.86)

 

20)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또는 그는 현존한다입니다. (p.95)

 

21)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p.97)

 

22)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p.99)

 

23) 세상의 모든 빨간 사물들에는 빨강의 이데아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부분적으로만 들어있어서 그 빨강이 영원히 빨갛지는 않고 일시적으로 빨간색일 뿐이고 언젠가는 퇴색된다는 말입니다. (p.112)

 

24)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존재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p.113)

 

25) 이미지à 사물 à 수학적 대상 à 이데아로 올라갈수록 질적인 면은 점점 좋아지지만 양적으로는 점점 적어진다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p.117)

 

26)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에게 피라미드식 존재의 계층구조는 단순히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체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엄격한 가치체계이기도 했습니다. (p.122)

 

27) 자연과 사회 안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신이 정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마치 자연이 자연의 계층적 질서를 따라 조화를 이루듯이 인간이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이지요. 근대적 직업관의 근간이 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소명의식역시 이 같은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 무엇이든 설령 아무리 비천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이지요. (p.127-128)

   조건의 불평들이 무질서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물이 동등하게 완벽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클로씨가 왜 바위가 나뭇잎들로 장식되어 있지 않으며, 왜 개미가 공작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만일 평등이 어느 곳에서나 요구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 시종은 주인에 대해 평등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 할 것이다.” (p.128)

   - 이는 너무도 이기적인 논법이다. 자기들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이기심의 발로가 소명의식으로 결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신은 서로 사랑하라고 했지만 인간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사나와 지는 것 같다.

 

28) 부자는 최하위 노동자를 경멸하지 말지어다. 그도 자연의 연쇄 속에 있는 동등한 고리이니: 동일한 목적으로 노동하고 동일한 관점으로 합일되어 양자는 다 같이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p. 129)

 

29) 정신이 있기 위해 일자 자체는 정신이 아니라 정신의 아버지여야 하며, 따라서 정신은 그의 첫 아들인 것이다. (p. 133)

 

30)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하지요. (p. 136)

 

31) 자연의 사슬에서 그대가 빼 낸 하나의 고리는 열 번째건 만 번째건 사슬을 파괴할 것이다. (p. 141)

   - 지금의 자연재해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자연이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서 그 고리가 빠지고 그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 사슬이 파괴되면,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32) 무언가가 영원불변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존재는 논리적으로는 결코 변화할 수 없습니다. (p. 146)

 

33) 예컨대 정직함이라는 인격은 그것이 부단히 자기동일적으로 정직하게 행위할 때에만 유지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더는 정직한 게 아니지요. 만일 당신이 정직한 인격을 가지려면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동안 정직하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을 한다면 그때부터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p. 148)

 

34) 개념을 산출하는 우리의 정신은 앵글의 노출시간을 아주 길게열어 놓은 카메라와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들로부터 불변하는 개념들을 얻어내는 것이지요. (p. 151)

 

35)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p. 153)

 

36) 즉 신은 시간 밖에서는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p. 154)

 

37) 종교적 현실 속에서 하나인 신을 불변하는 존재인 성부와 창조활동을 하는 성자그리고 성스럽게 작용하는 성령으로 실제로 체험했다고 봐야 하지요. (p. 157)

 

38)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가 초월합니다. (p. 165)

 

39) 하나는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이지요. (p. 177)

 

40) 존재와 현존 그리고 실존이 그것이지요. 존재는 어의적으로는 단순히 있음을 의미하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선 시대와 학파에 따라 특별한 철학적 또는 신학적 의미가 다양하게 부여되었습니다. 존재개념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지요. 문제는 현존과 실존을 구별하는 것인데, 이 두개념은 사실 많은 저서에서 분명한 규정없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이 용어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해서 사용하기로 하지요. 실존은 어의만으로 보면 실재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p.178)

 

41) 신은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존재물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 이상 큰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무엇이라는 안셀무스의 말을 보통 그 이상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또는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하지요. (p.180)

 

42) 만약 우리가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나 아름다운 꼬리의 인어공주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p.182)

 

43)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섬은 현존할 수도 있고 현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셀무스가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신 개념은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하나도 결핍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p.183)

44)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칸트는 신은 현존한다라는 명제는 이 명제를 부정한 모순명제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논증만으로는 그것의 현존을 증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p.185)

 

45) 세계에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p.186)

 

46) 모든 자연적 사물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질서 지어주는 어떤 지적 통치자가 존재한다. 그 존재를 우리가 신이라 한다. (p.195)

 

47) 동서고금의 성현들은 모두들 예증법을 즐겨 사용한 것이고, 사실상 그 분야의 천재들이었습니다. 예수도 당연히 그들 중 하나였지요. 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유명한 산상수훈 가운데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 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p.201)

    - 정말 부모의 사랑은 그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그런데, 최근 신문지상에서 자신의 친딸을 강간하고, 자신의 친자식을 살해하는 그 사람들은 무엇인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이 늘고 있다. 정말 니체가 말한 것 처럼 신은 죽고 없는 것인가?

 

48) ‘신없는 세상을 사는 것이 가치가 덜 있을지는 몰라도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역설한 것처럼 더 편안하고 즐겁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p.203)

 

49)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아닐 뿐 아니라, …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를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창조론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나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어느 기독교 종파나 교단이 원하기만 한다면 가톨릭은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이미 받아들였지요. 진화론을 큰 무리없이 창조론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진화론을 근거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나, 창조론을 근거로 진화론과 싸우는 기독교 지식인들 모두에게 경고가 되는 것이지요. (p.207)

   - 중학교때였다. 당시 나는 주일학교 학생이었는데, 교리를 가르치던 대학생 선생님 하나가 진화론에 대한 얘기를 심각하게 한 기억이 난다. 80년대 이니 가톨릭이 아직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 나이의 나로써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였기에 그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의 고뇌하던 무게는 고스란히 느껴졌었다. 동시에 나도 종교에 대해서 한동한 고민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계속해서 종교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는 뒤의 글을 참조하면서 적도록 하겠다.

 

50) 동방정교에는 플라톤이, 가톨릭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프로테스탄트에는 칸트가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p.217)

 

51) 이로써 신학은 20세기에 칼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칸트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른바 진리의 땅에서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로내쫓아 버림으로써 근대신학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철학의 망령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격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p.217)

 

52) 내 영혼아, 네가 찾고 있는 것을 찾았느냐?

너는 하나님을 찾았고 그분의 모든 것 중에 최고의 어떤 것이며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했다.

…… 그러나 네가 발견했다면, 네가 발견한 것을 감각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주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을 발견했다면, 왜 당신을 느끼지 못합니까?

…… 왜 이렇습니까, 주님. 왜 이렇습니까? (p.219)

53) 현존하는 일차적으로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지요. (p.219)

 

54) 우리는 딱딱한 신학 이론이나 따분한 설교보다는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원합니다. 그러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라고 외칠 수 밖에 없지요. 나는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종교적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지요. 하나는 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비롭거나 기적과도 같은 종교적 경험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 데 많은 학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습니다. (p.222)

   - 1때였다. 중학교 때 교리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은 나의 종교생활에 영향을 가지고 왔다. 그냥 분위기에 이끌려서 나갔던 천주교는 그 이후 주일학교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정말 신이 우리를 만들었는지 궁금했고,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생겼다. 신화의 힘에서 나왔던 이야기들.. 카인과 아벨의 혼인에 이르러서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아담과 하와만 창조했다고 했는데, 저들은 누구지?

어느 날 무얼 먹어서 그랬는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당시 유명하다는 피부과를 찾아갔었는데, 오히려 차도가 없이 두드러기가 점점 커졌다. 두드러기는 숨구멍을 막기 때문에 몸의 3분의 1 이상을 덮으면 죽는다는 얘기도 들렸다. 병원에서는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약물중독으로 인해서 몸의 핏줄이 주황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닌 무엇인가가..나를 찾아왔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미소년의 얼굴을 한 사람의 형상을 띄었는데, 정확히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갔다. 내가 누워있는 곳으로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던가.. 어디선가 세분의 성녀가 나타났다. 나의 수호천사라고 했다.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검은 형상에게 어서 썩 꺼지라고 했다. 그 분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내 느낌에는 수녀님 같은 분위기였다. 가운데 있는 분 옆으로 2명이 같이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떴을 때, 내 마음은 한결 차분하게 가라 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아버지가 수소문해서 데려간 병원에서 지은 약을 먹고 나는 하루 만에 말끔하게 나았다.

정말 기이한 경험이었다. 나는 엄마 외의 사람에게는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다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나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름의 믿음이 생겼다. 나는 천주교에서 세례명이 젬마다. 그 분은 젬마의 수호성녀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나는 누군가 나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왜냐고? 다른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을까?

나는 정말 죽을뻔한 순간을 순간적으로 비켜 간적이 2번 있었다. 한번은 대학교 2학년때, 횡단보도를 막 건너와서 섰는데, 친구가 누가 날 보고 싶다고 하면서 불렀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친구에게 두걸음을 걸어간 순간,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코란도가 뛰어 들어와서 내 뒤의 벼랑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내 옆에 서있던 학우는 그 차에 밀려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나는 그 친구에게 두걸음을 걸어감으로써 살아났다. 또 한번은 5년전이다. 지하철에서 나와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와 함께 이동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는데, 무가지를 읽고 싶어져서 그걸 가지러 이동한 순간 내가 서 있던 그 자리로 자동차가 돌진해왔었다. 역시나 난 간발의 차이로 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를 만나기로 했던 동료는 나오다가 그 상황을 보고 자리에 주저앉았었다. 늘 내가 서 있던 자리였기 때문에, 내가 사고를 당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나는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신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55) 신비적 형태의 경험들은 대부분 매우 주관적이고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오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섬뜩하고 무시무시한어떤 초월적 존재를 만났을 때 무서워 떨며” “말을 잃고, 신경 조직의 가장 말초에 이르기까지 내적으로 전율하게되지요. 영혼은 이 신비로운 경험에 대해 맹목적 경탄, 멍하게 만드는 놀라움, 절대적 경이로 반응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는 그것에 완전히 압도당해 자신의 모든 능력은 압도하는 힘과 비교할 때 무능함이고, 총체적 무이며, 장엄한 위엄 앞에서는 한갓 먼지와 재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지요. (p.225)

 

56) 한 인간의 판단기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즌 것이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입니다.

 

57) 하나의 패러다임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경험은 서로 엉켜 있어서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쿤은 흔히 오리-토끼 그림이라고 불리는 자스트로 도형을 예로 들어 패러다임과 과학 지식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오리로도, 토끼로도 보이는 이 그림은 우리가 무엇을 보는(또는 경험하는)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또는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입니다. (p.228)

 

58)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내가 명확히 아는데 그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과학적 관찰을 근거로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외치는 과학자들의 선언이 모두 부질없고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신의 현존은 오직 실존의 문제일 뿐 논증이나 관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p.230)

 

59) “이 사람아, 그건 상관없으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라고 외치던 늪에 빠진 사내를 떠올려 보세요. 그 사람도 일단 늪에서 나오면 자기를 구해 준 성직자를 정말로 신이 보낸 것인지 알고 싶을 테니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p.231)

60)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경험을 통해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을 터득했고, 삶 전체가 바뀐 것이지요. 그에게는 메타노이아, 곧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고, 이로써 신은 그를 통해 역사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만일 바울이 신비적 경험을 한 이후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살았다면 그 경험은 벌건 대낮에 공연히 벌인 어릿광대짓에 불과했겠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여타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과 구분할 길이 없으며, 나아가 그 자체가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무의미합니다. (p.233)

 

61) 세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신과의 만남신의 존재에 대한 실증적 경험이 되는 겁니다. … 신비체험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이 기독교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무당들의 신접은 분명 일종의 종교적 신비적 형태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어떤 종류의 신비적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면-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라나 그게 아니면, 아닌 것이지요. (p.234)

 

62)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p.235)

 

3  신은 창조주다

 

63)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 모니카가 권하는 기독교는 모든 것이 선한 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선만이 존재할 뿐 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원론을 바탕으로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어요. (p.249)

 

64) 십자가 곁에서 슬픔에 잠긴 성모가

죄 없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처럼

바닷가에서 당신은 죄 많은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p.250)

 

65)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의 한계가 신앙을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라는 암브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월성을 평생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암브로시우스가 그 말 바로 앞에 붙인 신은 우리가 이성 없이 그분에 대한 신앙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p.253)

 

66)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서 삼십 대 초반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마치 포도가 포도주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위대한 학자이자 성인이 되기 위해 육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에서 금욕생활로, 영적으로는 마니교도에서 기독교도로 그 스스로 변해야만 했지요. 당연히 이에 따른 고통이 있었습니다. (p.254)

   -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친 모니카는 나중에 성녀반열에 들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15년을 함께했고 아들까지 낳았던 그 여인과 헤어지게 만든 장본인이 모니카라고 하면, 그의 사랑도 결국은 이기적이 사랑이 아니겠는가? 모든 종교에 대한 시각은 당시 사회적인 환경과 문화 등에 영향이 깊기에 당시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나로써는 그게 아들에 대한 사랑일지는 몰라도, 인류에 대한 사랑은 아닐 수 도 있다는 의문을 들게 한다.

 

67)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p.257)

 

68)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397, 그의 나이 마흔셋에 썼습니다. (p.264)

    - 지난 주에 읽었던 구본형 선생의 책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읽고, 나도 마흔 셋에 책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여서 이 글이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문구였다. 지금하고 있는 이 작업이 나의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신의 섭리로 준비되어진 일일 수도 있겠다는 조금 앞서간 생각까지 들게 한 문구였다.

 

69) 인간의 삶이란-자신의 삶이 그랬듯이-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 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p.265)

   - 길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그 동안 겪었던 실패나 어려움은 반드시 후에 큰 기반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는 어떤 일이든 우연히 겪게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70) “주여 당신은 위대하십니다로 시작하여 모두가 당신에게 구할 일이요, 당신 안에서 찾아야 할 일이며, 당신만을 두들겨야 할 일이오니, 이렇게 하는 데서만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고 열릴 것입니다” (p.266)

 

71)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지요. (p.275)

 

72)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 신은 시간 밖에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 밖에는 어떤 변화나 행동도 없습니다. 이 같은 논리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짓기 전에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담대하게 답했지요. (p.276)

 

73) 당신은 창조론과 빅뱅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부인할 수 없는 유상성에 먼저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교와 과학이 설사 같은 용어로 같은 내용을 말할지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역시 적잖은 놀라움 속에서 발견하게 될 겁니다. (p.277)

 

74) 물리학적으로는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물리학자가 예컨대 전자가 무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하더라도, 당신은 그가 뜻하는 것이 철학자나 신학자 또는 당신이나 내가 말하는 절대적 무로부터 전자가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물리학자는 우리가 감각적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어떤 무엇으로부터 전자가 생겨났다는 의미로 말했을 뿐이에요. (p.285)

 

75)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라는 자신의 말을 통해 전하고자 한 것은 신의 창조에 대한 자연과학 지식이 아니라, ‘신의 세계초월성이라는 철학적신학적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 (p.299)

 

76)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신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다는 말을 그가 세계의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의지대로 생성소멸인도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이지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신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당신이 지금 마주한 절망과 파국, 슬픔과 고통 그리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언젠가는 다가오고야 말 죽음에서 당신을 구하는 일이 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님을 염두에 두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이지요. (p.300)

 

77) 앨런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나란히 서서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라고 똑같이 말한다고 가정해도, 그 말을 통해 각자 전하려는 의미는 전혀 다른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두 사람이 똑같이 물이다!”라고 외쳐도 홍수로 물난리를 만난 사람이 이말을 외칠 때와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소리 칠 때는 전혀 다른 의므를 갖는 것과 같지요. 하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살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이지요. (p.301)

 

78) 패러다임 전환이 반드시 개종처럼 어려운 게 아니라 번역처럼 용이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면 두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유연해 진 겁니다. ‘새로운 문법(삶의 양식)을 익힐 수만 있다면 두가지 언어놀이가 가능하다가 되겠지요. (p.307)

   -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다는 것은 상당히 큰 차이이다. 우리 회사는 많은 M&A를 진행했었다. 같은 동종업인데도 불구하고, 업무를 진행하면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통일었다. 동일한 내용을 다른 언어를 상용함으로써 불거지는 문제점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79) ‘태초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신이 시간의 밖에서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p.317)

 

80) ‘시간 밖의 시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규정한, 시간이 가진 성질이 아닌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무한하게 분산되며 미래에서 다가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부단히 흘러가는 성질이 아닌, 그와는 다른 성질을 가진 어떤 시간을 뜻하지요. (p.319)

81) 주님의 연대는 불과 한 날이며 주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옵니다. 주님의 오늘은 내일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어제를 뒤좋지 않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영원하옵니다. (p.319)

 

82) 신은 영원하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신이 시간안에서 무한히 존재한다거나, 신이 시간없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 말은 단지 신은 시간 밖의 존재, 곧 세계 초월적 존재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p.320)

 

83) 태양의 회전 운동이 시간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고유한 운동량에 의해 시간이 인식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간이 연장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란 지속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없다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마음 밖에서파악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시간도 변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프로티노스는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p.326)

 

84)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 (p.330)

 

85) 우리의 서글픈 경험이 말해 주듯이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우리 삶이 가진 모든 것, 즉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삶 자체까지 점차 파괴합니다. 그 누구도 이를 피해가지 못하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시간을 크로노스라고도 부르는데요.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을 낳는 대로 잡아먹는 끔찍한 신이지요. 크로노스 안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삶은 단지 흘러가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p.333)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그래서 훌륭하다. 육신과 정신이 함께 나이들지는 않는 것 같다. 육신은 나이들어도 정신만은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이 모시는 임원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네 나이보다 최소한 10살은 젊게 생각하라고, 시간이 내 정신을 피폐하게 파괴하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겠다.

 

86)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도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 역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미래 또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p.335)

   - 과거의 나의 행동은 현재의 나를 결정하고 현재의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과거에 하지 못했던 공부를 아쉬워하면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또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고, 자기계발을 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지금의 행동이 단절된다고 하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87)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리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현재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p.337)

   - 물리적 시간을 사는 사람과 심리적 시간을 사는 사람은 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분리할 수 있지 않을까?

 

88)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p.344)

 

89) 시간이 경과하는 전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원 속에서 확실하게 인식한다. 그의 영원성은 현존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전체적 경과에 관계되고 이것을 초월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높은 망대위에 위치한 어떤 사람이 여행자들이 지난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동시에 직관하듯 신이 자신의 영원성에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p.346)

   - 조직생활에서 말단사원을 업무를 보지만, 팀장 또는 조직장은 전체 조직을 보게 된다. 말단 사원 입장에서는 왜 그일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어려운 일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 이는 현실의 삶에만 대비해 봐도 한번에 파악이 가능하다. 그냥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하는 모습을 보면 그 속내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신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90) 앞의 도식을 이용하면 왜 우리의 관점에서는 진화로 보이는 사실들이 신의 관점에서는 창조인지, 왜 우리가 매순간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사실들이 신에게는 예정된 사실인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p.348)

 

91) 신학자들은 플라톤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고 주어진 재료에 행한 일종의 형상화 작업으로 봅니다. (p.359)

 

92) 물론 인간과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이 신의 선함이나 아름다움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신은 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과 세계는 불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다우며,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 (p.369)

 

93)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일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p.370)

 

94)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굣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죵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연히 갈라서지요. (p.384)

 

95) 말씀이 단순히 진리 뿐 아니라 행위와도 연관된다는 사실 역시 더욱 두드러졌다는 겁니다. 이로써 말뿐만 아니라 행위로도라는 구호로 압축되는 예수의 사역이 가진 성격도 함께 부각되었지요. 예수는 공생애 3년 동안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의 말과 신약성서에 기록된 복음을 친히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행한 사역의 전부는 아니지요. 예수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하는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고, 그 자신이 곧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발화와 동시에 언제가 그것이 뜻하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행적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p.388)

 

96)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된 성육신에 담긴 또하나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심만 아니라 실천까지 요구하는 기독교는 물론, 이념 못지않게 행동도 중요시하는 서양문명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p.388)

 

97)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p.400)

 

98) 다윈 이전에도 진화에 대한 여러 가설이 이미 떠돌았는데 단지 실험이나 관찰에 의해 귀납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요컨대 진화론의 전성기를 위한 역사적 무대가 이미 만들어져 찰스 다윈의 눈부신 성공을 서서히 예비했던 것입니다. (p.411)

   - 일을 하다보면,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운이 7할이고 능력이 3할이라는 뜻이다. 신제품을 개발해도 시기가 잘 맞지 않으면 히트를 칠 수 없다. 때를 잘 맞추는 것도 능력이다.

 

99) 다윈은 약삭빠르다고 할 만큼 조심스러웠고 영민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윈은 다른 사람의 제자인 존 피스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마음은 귀납적 방법에 고정되어 있고 그래서 나는 연역적 추리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대다수의 사실로부터 시작했을 뿐 원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연구가 귀납주의의 소산임을 분명히 밝혔지요. 하지만 자신의 오랜 친구인 찰스 라이엘에게는 이론을 만들지 않고서는 어떤 관찰도 없다고 전하면서, 자신이 연력주의자임을 분명히 털어놓았습니다. 실제로 다윈은 <종의 기원>을 쓰기 전부터 진화론에 대한 착상을 먼저 갖고 있었고, 그것을 증명하기에 합당한 관찰들을 오랜 세월 끈기를 갖고 수행한 연역주의자였지요. (p.413)

 

100)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고 노래한 낭만적 공간이 아니라,…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재배하는 살벌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지요. (p.417)

 

101)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p.418)

 

102) 19세기 서양 사람들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은 사회적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사회다윈주의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인 근원적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생존경쟁적자생존은 사실상 신의 빛도 아니고, 분명하고 변함없는 보편적 빛도 아니지요. (p.421)

 

103)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 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후반 사회생물학에 바통을 넘겨주기까지는 사회다윈주의가 바로 그런 부당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p.425)

   - 어떤 교육을 받느냐는 그 사람의 앞으로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사회적으로 체득되어진 내용들은, 어려서부터 진리라고 교육되어진 부분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한번 잘못된 내용이 주입되고 나면, 그게 틀린 이론이라도 세뇌되어진 이들에 의해서 진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은 정말 어렵다.

 

104)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 때문에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줄신자는 지옥에 간다는 복음주의 교리에 자주 분노했지요. (p.437)

 

105)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종자적 형상은 시간과 함께 전개되는 세계의 진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발전을 이끄는 자연의 원리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그것은 우연한 변이에 의해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다윈주의적 진화가 아니라 창조 때 이미 결정된 종 안에서의 진화를 주도하지요. 즉 씨앗이 나무가 되고 계란이 닭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p.455)

   - 명리학에서 운명은 타고 난다고 한다. 타고난 운명을 알고 나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보완해 갈 수 있을지가 보인다고 한다. 결국 종자적 형상이란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지고 발화하고 진화시켜 나가는 지가 결정되는 것인가?

 

106)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석재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텍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p.461)

 

107) 하나님이 예지로 그대의 장래 행복에 관하여 오늘 확실히 아신다고 해서, 장차 그대가 행복해지기 시작할 때 행복해지려는 의지를 그대에게서 빼앗지는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대의 의지가 장차 범죄를 저지르리라고 예지하신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 범죄가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아니다. (p.467)

 

108) 신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와 뱁새개미의 차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지요. (p.473-474)

 

109) 신은 시공밖의 존재이고 인간은 시공안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유했듯이 마치 높은 망대에 오른 사람이 여행자들의 여정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에 직관하는 것처럼 인식하지요. (p.474)

 

110) 필연과 우연은 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니, 신의 뜻이 곧 운명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인간이 진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담겨 있지요! (p.479)

 

4  신은 인격적이다.

 

111)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p.498)

    -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상 하는 고민 중에 하나가 이거다.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이 좋은 것인 것?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말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인가? 과연 지금이 어느 때인가?

 

112)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 (p.503)

 

113) 마치 시계공이 완벽하게 설계해서 만든 시계가 일단 작동하면 그것을 만든 시계공의 개입 없이도 정해진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신론자들의 세계는 신의 참여 없이도 충분히 조화롭게 작동합니다. 따라서 신의 개입에 의한 기적 같은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기도 하지요. (p.533)

 

114)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 (p.544)

 

115)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나의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p.550)

 

116) 신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그 섭리는 모든 것에 미친다.라고 반복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하면서 유지하며 초월하고 포괄하며 관통하는존재론적 원리를,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라는 단 한마디 약속으로 계시했습니다. (p.556)

 

117)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 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신의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 (p.560)

 

118) 어린애의 젖을 떼야만 할 때 어머니는 자신의 유방을 검게 물들인다.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서는 안될 때 어린애가 유방에다 미련을 갖게 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유방을 검게 물들여 놓으면 어린애는 그 유방이 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고 어머니의 눈길은 여전히 인자하고 부드럽다. (p.564)

 

11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지요. 견딜 수 없는 공포와 전율 속에서도 신의 섭리를 믿고 따르려는 거룩한 기도입니다. …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p.567)

 

120) 결론적으로,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때때로 신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진한 대로 된다” (p.574)

 

121) 어떤 기독교 신자가 신에게 사업에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사업에 성공했을 경우에 그 사람은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이 오직 신의 섭리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성공이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의 결과라고, 또는 행운이나 우연이라고는 생각지 않겠지요. 그래서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업에 실패했을 경우에도 그 사람은 자신의 실패가 자신의 무능이나 태만 때문이 아니고 또 악운의 지배 때문도 아니며 오직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는 신의 섭리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따라서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p.576)

   - 신의 섭리는 인간에게 긍정의 힘을 준다. 기도로 신의 섭리를 바꿀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을 마음을 긍정적으로 갖고, 늘 희망을 갖고 살 수 있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자기세뇌가 또 어디 있겠는가?

 

122)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p.609)

 

5  신은 유일자다.

 

123) 하이젠베르크는 잠세태라는 적절한 용어를 개발함으로써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는 드러나지만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를 보통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하지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학문에서 전문용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해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마치 건축물의 벽돌처럼 용어는 사유의 기본단위이기 때문에 용어의 개발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요! (p.652)

 

124)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p.659)

 

125)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가 너무도 어려웠디 때문에 삼위일체론은 처음부터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격렬한 논쟁을 파급되었던 것이지요. (p.675)

 

126) 세익스피어의 <햄릿>에는 이런말이 나오지요. “분명한 말을 써야겠어. 어정쩡한 말을 쓰다만 봉변 당하겠는걸! (p.697)

    - 앞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용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최근에 나오던 유머 중에 하나가 문과생과 이과생의 인식이었다. 그 들에게 정의가 영어로 뭐냐?’고 물었더니 문과생들은 ‘Justice’라고 답변을 했고 이과생들은 ‘definition’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127)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이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마나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p.712)

 

128) 피아노로 를 치면 당신은 그 음을 정확히 들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와 함께 을 친다고 해도 당신은 그 음들을 혼합해서 예컨대 정도로 듣는 게 아닙니다. 이 세음은 이른바 으뜸화음을 이룬 채 당신의 귀에 들어오지요. 이 현상은 우리의 청각이 가진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하얀 종이에 빨강색과 파랑색을 덧칠했을 때 두 색을 혼합해 보라색으로 보게 되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p.727)

 

12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와 사도 바울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특수주의를 깨뜨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보편주의를 정립하는 데 발 벗고 나섰지요. 예수는 무엇보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특수주의를 못 박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니라라고 특수주의에 반기를 들었지요. (p.740)

 

130)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p.741)

 

131) 신에 대한 이해와 표현의 변천은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된 신의 역사일 뿐입니다. 시간 밖에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신이 역사 안에서 인간정신과 문화의 진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되었다는 뜻이지요. 성서에 계시된 신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은 매우 많은 것을 말해 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p.748)

 

132)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p.753)

 

133)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떨어져 전보다 더 치열하게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백 살 노인이 되어 죽은 그는 다시금 천국의 문을 두드렸지요. “거기 누구시오?” 또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수도자는 황급히 대답했지요. “당신입니다. 주님, 당신이에요!” 그러자 즉시 문이 열려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p.774)

 

134)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리혀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지요. (p.783)

 

135)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 (p.790)

 

136)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p.802)

 

137)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입니다. (p.804)

 

138) 근래에 유전공학, 진화생물학과 함께 부활하고 있는 과학주의가 통섭이라는 미명아래 자신들이 다시 큰 이야기로 등극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작은 이야기들 역시 큰 이야기가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p.805)

 

139) 바우만은 세계가 이처럼 지옥이 된 원인이 정원사가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그것을 되돌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p.807)

 

140)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모두 네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쪽이든 두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니다. 이 네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사랑과 이웃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사랑의 맹복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p.809)

 

III. 내가 저자라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우리 나라에서 출간된 책이라는 사실에 다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고, 책을 써왔기 때문에 저자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최근에 읽었던 신화의 힘, 공감세대, 신까지 종교생활을 하면서 한번씩은 의혹을 품었음직했던 내용들에 대한 글이어서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 여러가지 기여를 했다고 보여진다.

 

책 구성 내용

1부 신이란 무엇인가?

2부 신은 존재다.

3부 신은 창조주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

5부 신은 유일자다

 

책은 순서는 질문과 답변으로 되어 있고, 처음 시작이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시작해서 최후의 심판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가지고 있다.

이전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책을 다 읽는 데에 급급해서 전반적인 짜임까지 봐 줄 수 있는 여유는 스스로에게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저자의 말대로 디아트리베라는 수사법을 사용해서 쉽게 접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나와 같은 초심자들을 위해서 글에 나오는 신학자 또는 철학자들의 연대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반적인 주제가 신의 정의를 내리는 위주로 설명되어지다보니 시대가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책을 앞뒤로 넘겨야 하는 상황들이 좀 있었다.

책에서 얘기하는 내용의 큰 틀은 서양에서 정의 내리는 신의 의미라기 보다는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유일신에 대해서 제대로 정의를 내리고 싶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오히려, 다 읽고 나서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종교인으로써 안심이 되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구약신과 신약신의 차이점 비교

예수의 전/후 신학자들의 관점 차이와 신학의 발전 단계

각 시대별 상황과 신학자들의 변천으로 엮었다면 오히려 그 이해가 더 쉽지 않았을까?

IP *.47.13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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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3:25:52 *.124.233.1
고단했을 4주간의 레이스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옷깃을 스치는 만남은 없었지만,
이렇게 지적인 만남을 통해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홀가분한 한 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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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6:53:51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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