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화
- 조회 수 7312
- 댓글 수 2
- 추천 수 0
강아지똥
글 권정생, 그림 정승각
# 1
글 권정생(1937 ~ 2007)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권정생 선생님은 1969년 동화 [강아지똥]으로 월간 [기독교 교육]의 제 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굴곡 많은 역사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 진솔한 글로 어린이는 물로 부모님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동화집 <강아지똥>,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소년 소설 <몽실 언니>, <점득이네> 등이 있다.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산문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등을 썼으며, 그림책 <강아지똥>, <오소리네 집 꽃밭>, <아기너구네 봄맞이>, <황소 아저씨>로 널리 알려졌다.
그림 정승각
정승각 선생님은 1961년 충청북도 덕동에서 태어났다. 어리들에게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여유로움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선생님은 해마다 어린이들과 함게 생활 이야기가 담긴 벽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그린 책으로는 <강아지똥>, <오소리네 집 꽃밭>,<황소 아저씨>,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 등이 있다.
지금은 충주에 살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더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위의 작가과 화가의 소개는 책에 나온 것을 옮겨 적은 것이다.
#2
책속의 그림 강아지똥은 곰인형을 담았다. 강아지똥 그림만이 아니라 진흙덩어리 아저씨도 역시 곰인형처럼 푸근하다.
나는 종종 착각을 한다. 눈코입이 있고, 말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 모든 것을 사람처럼 생각하는 착각이다. 일종의 의인화인데 내 경우는 좀 심각하다. 의인화 하는 것은 시를쓰는 순간순간만 일어나거나 혹은 어린시절 자신의 인형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내게는 거의 모든 사물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아서, 좀 심하게 몰입하는 편이다.
의인화. 사물, 동식물, 어떤 개념적 존재를 정말 사람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대체로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그만하게 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를 죽이려 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그건 아이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려 하는 장면과 똑같이 간주된다. )
이 책에서의 강아지똥의 죽음이 내게는 꼭 한알의 밀알의 죽음처럼, 예수님의 죽음처럼 느껴져서 눈울이 왈칵했다.
강아지똥이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쓸모없는 존재 취급을 받아서 슬퍼할 때 나도 같이 슬프고, 진흙덩어리가 자신이 고추를 죽게 했다고 후회할 때 나도 그와 같이 내 일을 몰라라 한 것에 뜨끔했다.
강아지똥이 민들레에게 묻고 그것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볼 때는 어느 성자의 죽음처럼 느껴서 마음이 아렸다.
여기에 나오는 존재들은 왜 이리 착한지 모르겠다. 착해서 그런지 색색의 착한 그림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환상적이게 보이는 민들레가 꽃 핀 모습도 멋지다.
# 3
작년인가 이 책이 엄청 나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빌려온 <강아지똥> 그림책에는 3개의 언어가 쓰여 있다. 물론 언어를 초월한 그림이 담겨 있는 게 매력이긴 하지만... 여러 나라에 보급할 만큼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착하다.
"왜?"
라는 질문을 안 할 수 없다. 그림책을 보다보면 '왜' 이런 내용을 어른들은 좋아할까? 아이들도 좋아할까?하는 의문이 끈이질 않는다.
아이가 있다면 나는 이 그림책을 읽어줄 수 있을까? 읽어주긴 하겠지. 그런데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서 잘 읽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이나 희생에 마음이 마구 흔들려 버린다.
그것이 설사 의인화된 사물이라도 해도.
작은 곰인형 처럼 그려진 강아지똥. 이렇게 보면 강아지똥은 더이상 더러워 보이지 않고 초라해 보이지도 않는다.
새나 닭이 몇번 찍어보고 못 먹는 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이지만 그림 속의 강아지똥은 아이의 모습처럼 귀엽다.
민들레에게 말을 거는 강아지똥.
민들레에 녹아들어가는 강아지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