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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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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24일 20시 46분 등록

휴일 없이 3주째 출근하다보니...
급기야는 날짜 감각도 요일 감각도 없어지나 봅니다.
오늘이 벌써 수요일인데...
그러니까... 메일을 두번 씩이나 빼먹고 보내드리지 못했네여...
지난 주말부터 태풍 온다고 설치다가...
볕 들자... 느닷없이 이라크 김선일 씨 사건이 터져버렸네요...
사건 터지면서 온통 가슴이 답답하면서...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픈 데까지 사건이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군요...
살아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기까지 하고...
가슴에 미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이처럼 세상을 암흑천지로 몰아넣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 그런 부질 없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암튼... 저항세력에 대한 미국의 증오와... 미국에 대한 저항세력의 증오...
애초에는 정말로 사소했을... 미움의 싹에서 그것이 비롯됐을 거라구 생각하니까...
지지고 볶고 사는 우리네 삶이 매우 위험스럽고...
마치 칼 날 위를 걷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은...
미움과 사랑을 소재로 한 두편의 글을 보내 드립니다.
조그만 미움이 광기로 표출되는 증오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어요?...
미움은 조그만 관심과 사랑으로도 치유되지만...
커다란 증오는 커다란 사랑이 아니면 치유할 수 없겠지요?....



(첫번째 글)
내가 겪은 미움... 일촉즉발

저는 결혼 8년차에 접어드는 남자인데요..
저는 한 3년전쯤에 이혼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습니다.
그 심적 고통이야 경험하지 않으면 말로 못하죠...
저의 경우는 딱히 큰 원인은 없었고
주로 와이프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더군요..
그리고 저도 회사생활과 여러 집안일로 지쳐있던 때라 맞받아쳤구요.

순식간에 각방쓰고 말도 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커갔구요..
사소한 일에도 서로가 밉게만 보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암묵적으로 이혼의 타이밍만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도 눈치가 있는지 언제부턴가 시무룩해지고
짜증도 잘내고 잘 울고 그러더군요..
그런 아이를 보면 아내는 더 화를 불같이 내더군요..
저도 마찬가지 였구요..
계속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이가 그러는 것이 우리 부부때문에 그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요..
가끔 외박도 했네요..
그런데 바가지 긁을 때가 좋은 거라고 저에 대해 정내미가 떨어졌는지
외박하고 들어가도 신경도 안쓰더군요..
아무튼 아시겠지만 뱀이 자기꼬리를 먹어 들어가듯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러기를 몇달..하루는 늦은 퇴근길에..
어떤 과일아주머니가 떨이라고 하면서 귤을 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에
남은 귤을 다 사서 집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주방탁자에 올려놓고 욕실로 바로 들어가 씻고 나오는데,
와이프가 내가 사온 귤을 까먹고 있더군요..
몇개를 까먹더니 하는 말이
"귤이 참 맛있네"
하며 방으로 쓱 들어가더군요.
순간 제 머리를 쾅 치듯이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아내는 결혼전부터 귤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하고,
결혼후 8년동안 내 손으로 귤을 한번도 사들고 들어간 적이 없었던 거죠..
알고는 있었지만 미처 생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순간 먼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예전 연애할 때에 길가다가 아내는 귤좌판상이 보이면
꼭 1000원어치 사서 핸드백에 넣고
하나씩 사이좋게 까먹던 기억이 나더군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져서 내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답니다.
시골집에 어쩌다 갈때는 귤을 박스채로 사들고 가는 내가 아내에게는 8년간이나
몇백원도 안하는 귤한개를 사주지 못했다니 맘이 그렇게 아플수가 없었습니다.

결혼 후에 어느덧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게되었다는걸 알게 됐죠..
아이문제와 내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말이죠..
반면 아내는 나를 위해 철마다 보약에 반찬한가지를 만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신경 많이 써 줬는데 말이죠..

그 며칠 후에도, 늦은 퇴근길에 보니 그 과일좌판상 아주머니가 보이더군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또 샀어요.. 그리고 저도 오다가 하나 까먹어 보았구요..
그런데 며칠전 아내말대로 정말 맛있더군요..
그리고 들어와서 살짝 주방탁자에 올려놓았구요..
마찬가지로 씻고 나오는데 아내는 이미 몇개 까먹었나 봅니다.

내가 묻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않던 아내가
" 이 귤 어디서 샀어요? "
" 응 전철입구 근처 좌판에서 "
" 귤이 참 맛있네 "
몇달만에 아내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도 몇알 입에 넣어주구요...
그리고 직접 까서 아이 시켜서 저한테도 건네주는 아내를 보면서
식탁위에 무심히 귤을 던져놓은 내모습과 또 한번 비교하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뭔가 잃어버린 걸 찾은 듯 집안에 온기가 생겨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아내가 주방에 나와 아침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보통 제가 아침일찍 출근하느라 사이가 안좋아진 이후로는 아침을 해준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그냥 갈려고 하는데, 아내가 날 잡더군요..
한 술만 뜨고 가라구요..

마지못해 첫술을 뜨는데, 목이 메여 밥이 도저히 안넘어가더군요..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도 같이 울구요..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다는 한마디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부끄러웠다고 할까요...

아내는 그렇게 작은 한가지의 일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작은일에도 감동받아 내게로 기대올수 있다는걸 몰랐던 나는
정말 바보중에도 상바보가 아니었나 싶은게 그간 아내에게 냉정하게 굴었던
내자신이 후회스러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후, 우리부부의 위기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가끔은 싸우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귤이던 무엇이든 우리사이에 메신저역할을 할수 있는것이
주위를 둘러보면 아주 많다는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두번째 글)
누구에게나 사랑은 찾아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서른아홉살 주부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저의 다리가 되어주는 고마운 남편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한살때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은 후 장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에 멋진 글귀로 글을 쓰지는 못합니다.

제가 남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방송을 통해서입니다.
지난 1983년 우연히 라디오의 장애인 프로그램을 통해 문밖 출입을 못하며 살고 있는 저의 사연이 나갔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지금의 남편이 제 이야기를 듣다가 들고 있던 펜으로 무심코 저의 주소를 적었답니다.

남편은 그 다음날 바로 저에게 편지를 했지만 저는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글을 잘 몰랐던 탓도 있었지만 남자를 사귄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남편은 답장도 없는 편지를 1년 가까이 1주일에 한번씩 계속 보내왔고, 저는 여전히 답장 한통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그 먼 곳에서 서울 금호동의 저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장애자인 제 사정상 반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먼 곳에서 저를 찾아온 사람이기에 손수 정성껏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만나고 제주도로 돌아간 남편은 그날부터 1주일에 한통씩 보내던 편지를 거의 매일 일기처럼 적어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포가 하나 왔는데 종이학 1,000마리를 접어 걷지도 못하는 저에게
1,000개의 날개를 달아 이 세상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게 해주고 싶다며 보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남편의 청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결국 직장을 포기하면서 저를 보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고, 3년에 걸친 청혼 끝에 저는 남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85년 7월17일, 저희는 마침내 부부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글쓴이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내 삶의 날개가 되어주는 당신께.-

여보, 지금 시간이 새벽 5시30분이네요.
이 시간이면 깨어있는 사람보다 아직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단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더욱 많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이미 집을 나서 살을 에듯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을 맡기고 있겠지요. 그리고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당신.
그렇게 열심히 뛰는데도 늘 힘겹기만 한 우리 생활이 당신을 많이 지치게 하고 있네요.

내가 여느 아내들처럼 건장한 여자였다면 당신의 그 힘겨운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으련만,
평생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는 그럴 수가 없기에 너무나 안타까워 자꾸 서러워집니다.
자동차에다 건어물을 싣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당신.
그런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 한 방울, 전기 한 등, 10원이라도 아껴쓰는 것이
전부라는 현실이 너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불편한 나의 다리가 되어주고, 두 아이들에게는 나의 몫인 엄마의 역할까지 해야 하고,
16년 동안이나 당뇨로 병석에 누워계신 친정어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당신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어머니께 딸인 나보다 더 잘하는 당신이지요.
이런 당신께 자꾸 어리광이 늘어가시는 어머니를 보면 높은 연세 탓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속이 상하고 당신에게 너무 미안해 남 모르게 가슴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답니다.

여보, 나는 가끔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지친 모습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당신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생각합니다.
“가엾은 사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한평생 걷지 못하는 아내와 힘겹게 살아야 할까?”라구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서러움이 북받치지만 자고 있는 당신에게 혹 들킬까봐 꾸역꾸역 목구멍이 아프도록 서러움을 삼키곤 합니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 당신을 따라 나섰지요.
하루종일 빗속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게 되지요.
그런데 며칠 전 겨울비가 제법 많이 내리던 날, 거리에서 마침 그곳을 지나던
우리 부부 나이 정도의 남녀가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가는 모습을 보았어요.
서로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게 하려고 우산을 자꾸 밀어내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당신이 비를 몽땅 맞으며 물건 파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 내가 느꼈던 아픔과 슬픔은 어떤 글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어요.
그때 나는 다시는 비 내리는 날 당신을 따라 나서지 않겠노라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답니다.

그리고 여보, 지난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당신은 결혼때 패물 한가지도 못해줬다며
당신이 오래도록 잡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나에게 조그마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었지요.

그때 내가 너무도 기뻐했는데 그 반지를 얼마 못가 생활이 너무 힘들어 다시 팔아야 했을 때,
처음으로 당신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어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신은 그때 일을 마음 아파 하는데, 그러지 말아요. 그까짓 반지 없으면 어때요.
이미 그 반지는 내 가슴 속에 영원히 퇴색되지 않게 새겨놓았으니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해요.

3년 전 당신은 여덟시간에 걸쳐 신경수술을 받아야 했었지요.
그때 마취에서 깨어나는 당신에게 간호사가 휠체어에 앉아있는
나를 가리키며 누군지 알겠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그럼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사랑할 사람인데요”라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에게 나는 바보처럼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한없이 눈물만 떨구었어요.
그때 간호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세요”라고.
그래요, 여보. 나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예요.
건강하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늘 나의 곁에 있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어린 시절 가난과 장애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에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늘 소원했던 공부를 시작했지요.
적지않은 나이에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야학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어머니 저녁 챙겨주고 집안청소까지 깨끗이 해놓고
또다시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와주는 당신.
난 그런 당신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할 겁니다.
어린 시절 여느 아이들이 다 가는 학교가 너무도 가고 싶어 남몰래 수없이 눈물도 흘렸는데 이제서야 그 꿈을 이루었어요.
바로 당신이 나의 꿈을 이루어주었지요.
여보, 나 정말 열심히 공부해 늘 누군가의 도움만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거예요.

여보, 한평생 휠체어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의 삶이지만
당신이 있기에 정말 행복합니다.
당신은 내 삶의 바로 그 천사입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고 늘 감사의 두 손을 모으며 살 겁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다음은 이 사연을 취재한 경향신문 기자의 취재수첩입니다.
[취재수첩]“다시 태어나면 제가 당신을 도울께요”

17년째 자신의 발이 되어준 남편에게 ‘사부곡’(思夫曲)을 보내온 임영자씨(39)는
서울 금호동의 조그만 주택에서 남편 김석진씨(45)와 중3인 딸 한나,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호세아와 함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집안 거실로 들어서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싱크대입니다.
소아마비로 항상 앉아있거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임씨가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싱크대의 다리를 없애고 바닥에 붙박이로 만든 것입니다.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병든 어머니와 남편,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는 주부로서의 알뜰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해진 사연만으로 알게 된 임씨에게 어떻게 3년에 걸쳐 변함없이 구애를 펼 수 있었는지,
참으로 남편의 천사같은 마음씨가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김씨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고 오히려 이를 묻는 기자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장애자와 비장애자를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까.
육체적으로 불편하다고 그게 장애자는 아닙니다.
장애자 역시 따뜻한 마음이 있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저는 아내에게 처음 편지를 쓰고 또 만났을 때도 아내가 장애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아내를 장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내가 있어 더 행복합니다”.

현재 임씨는 매주 3일 정립회관에서 운영하는
‘노들장애인 야학’에 나가 하루 4시간씩 공부를 합니다.
30년이 지난 이제서야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초등학교 과정의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내친 김에 대학까지 진학하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임씨와 결혼하기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제주에서 아내가 있는 서울로 올라와
12년째 봉고차를 몰며 행상을 하고 있는 김씨.
바쁜 와중에도 남편은 뒤늦게 ‘초등학생’이 된 아내가 안쓰러워 늘 아내의 발이 되어준답니다.
정말 이런 남편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런 남편을 위해 아내는 늘 사랑을 받고만 있는 자신이 미안하다며 울먹입니다.
“여보, 나의 소원이 무엇인지 모르지요?
내 소원은 높은 구두신고 당신 팔짱을 끼고 걸어보는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많지 않아 힘겹게 살고는 있지만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랍니다.
다만 한가지 유일한 소망은 우리 부부가 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 나는 건강한 사람, 당신은 조금 불편한 장애인으로 만나 다시 부부가 되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예요”.

IP *.229.14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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