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 공항

울란바토르는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3 시간 떨어져 있다. 여름에는 서머 타임을 실시한다. 그래서 우리와 아무런 시차도 없다. 비행기로 3 시간 후에 우리는 유목민들의 도시에 도착했다. ‘길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정착지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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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트오하 공항의 입국 심사대 바로 앞 작은 면세점
번쩍이는 duty free shop 이 아니라 초라한 술가게
빈한한 살림살이가 문득 조촐한 자제처럼 좋아 보인다

보드까가 유난히 많다
술병 속에는
러시아와 친하게 지낸 몽골의 최근 역사가 담겨있다

칭기스칸이라는 거대한 영웅에 압도되어 모든 위대한 것들은 칭기스라 불린다
술은 당연히 그렇다
그것은 잠시 영웅이 되려는 남자들의 오랜 벗이었으니

유목민 도시의 첫 번째 얼굴은
자존심이 된 천년영웅의 후광과
오랜 사회주의 속의 짧은 자본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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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

나랑톨 시장은 파랑 지붕을 가지고 있고 울란바토르의 남동쪽 끝 부분에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소매치기의 천국이다. 그들은 사람을 해치지는 않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곳에서 털리지 않는 법은 털릴 것이 없는 상태로 시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외국인이 위험한 이유는 그들에게는 털만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처럼 그저 손에 꼬기꼬기 돈 몇 푼 쥐고 시장 가 듯 그렇게 가면 된다.

우리도 그랬다. 우리는 여행의 3가지 필수품 - 여권/비행기표/지갑- 을 작은 백에 담아 차안에 놓아두고, 문을 닫고, 동료 두 사람이 지키는 가운데 돈 몇 만원만 달랑 손에 쥐고 나랑톨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몽골화폐단위는 투그룩인데 우리와 교환비율이 같다. 1만 투그룩이면 우리 돈 1만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원으로 부르곤 했다. 우리는 마치 전투하는 기분으로 쏜살같이 시장으로 들어갔고 순식간에 말부츠 하나씩을 사 가지고 나왔다. 몽골산 가죽 부츠는 2만원 정도고 러시아산은 5만원 정도면 좋은 것을 살 수 있다. 말을 타는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말장화는 필수품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의 모자를 툭 친다.
모자가 땅에 떨어진다.
당황하여 얼른 몸을 굽혀 주으려고 하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뒷주머니의 지퍼를 내려놓는다.
여러 명의 합동작전이다.

소매치기란 전쟁과 전투가 허용되지 않는 시기의 약탈 경제
몇 명이 떼를 이루어 표적을 교란하고 둘러싸 외부와 잠시 격리시켜
가볍게 지갑을 털어 낸다
그것은 옛날 위대한 칸의 시대
유목 전사들의 21세기적 수렵

털릴 준비를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
우린 거지처럼 그곳에 갔기에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했다
허겁지겁 빠져 나오긴 했지만
꼭 다시 한번 더 가고 싶은 귀여운 시장이었어

돈이 없어도 볼게 많으면
좋은 여행이지
정말 훌륭한 시장은
볼게 많으면 돼
사지 않아도 즐거운 세상이 있게 마련이다
간혹 어떤 시장은 있는 돈도 놓아두고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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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호텔들이다. 첫날 묵었던 바양골 호텔은 10층쯤 되는 두 개의 쌍둥이 빌딩이다. 최근에 내부를 좀 고친 듯 했다. 방에서는 새로 도배한 냄새가 났다. 호텔이라기 보다는 변두리의 작은 오피스텔 같았다. 샤워의 물은 쫄쫄거린다. 비누칠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수질도 뻑뻑하다. 나라 전체의 물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더 직접적인 원인은 도시 기반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나마 있는 시설은 낙후되어 있는 탓인 듯 했다.

간단히 물로 몸을 닦아 내다가 우리가 그 동안 너무 많이 쓰고 살았던 것임을 알았다. 너무 많은 비누거품 속에 살았다는 것, 너무 많은 향수와 너무 많은 샴푸 속에 살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조그만 바퀴벌레 한 마리가 화장실 바닥을 기어갔다.
비대한 미국 바퀴처럼 위협적이지 않다.
살려둘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럼 됐지. 죽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서울에 있는 집에서 발견되었다면 나는 잡아야 했다.
끝까지 추적하여 잡아야 했다.
그리고 바퀴약을 놓고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내 공간을 바퀴벌레로부터 사수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벌레를 남겨두고 내가 떠나면 된다.

여행은 머문 공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발자국과 추억을 남기고 바람처럼 그곳의 냄새와 함께 떠나면 된다.
더욱이 나는 유목민의 나라에 왔다.
더욱 더 바람 같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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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저녁때 대구 사람이 하는 중국 음식점에 갔다. 이것저것 한국에서 먹어 보았던 맛들과 다르지 않았다. 주인은 한국인 관광객이라고 특별히 유난을 떨지는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오히려 무뚝뚝해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나니 9시 쯤 되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은 대낮이다.

잠시 거리의 한 가운데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열에 일곱 지나는 차는 먼지를 뒤집어 쓴 한국의 중고차
옆구리 뒤쪽으로 ‘동남교통’이라 쓰여진 버스가 지나간다.
글자도 지우지 않고 그래도 사용한다

시가지 한 복판에 ‘서울의 거리’ 라는 스트리트 이름이 보이고
곳곳에 한국어 간판을 보는 것을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도시는 러시아 키릴 문자로 뒤집혀있고
나는 크, 쉬, 취 같은 설음이 가득한 낯선 거리에 망연히 서있다.
말도 통하지 않고
글도 뒤집힌 공간에 서 있다는 것은 막막하다.
간혹 police라고 쓴 차만 지나가도 반갑다.
뒤집히지 않은 글자만 만나도 안심이 된다.

그들은 말 타듯 차를 몬다.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질주한다.
조심은 지나가는 사람의 의무일 뿐
차는 우측통행을 하고 있지만 운전대는 각각이다.
한국차는 왼쪽에 핸들이 달려있고
일본차는 오른 쪽에 핸들이 달려있다.
쓰던 차 그대로 몰고 다닌다
고삐를 어느 손에 잡던 무슨 상관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말 타고 경주하듯 차를 몬다.
달려야 탄 듯 해서 채찍직 하듯
크락션 울리며 차를 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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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저녁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밝다. 여행지에서 날이 아직 밝은데 자러 간다는 것은 안될 말이다. 우리는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가장 아까운 것은 잠이다. 잠은 우리를 떠나기 전과 같은 공간에 머물게 한다. 시간의 흐름이 인지되지 않은 채 순식간에 흘러 가 버리면 공간적 차별성은 사라진다. 여행의 첫날 이국에서의 밤이 그렇게 흘러가서는 안된다.

외국인이 잘 간다는 카페는 원형의 노천 카페다
테이블마다 사람이 그득하다
잠 말고 뭐든지 하고 싶은 여행객들
안팎을 헤매다 누군가 눈밝게 손님이 막 떠난 테이블을 찾아내고

웨이터는 한국말에 능숙하다
우리가 영어를 배워 미국인에게 말 걸 듯 그들도 한국말 걸기를 좋아한다.
한국은 그들의 미국
부러움과 질시가 빵과 빠다처럼 적대감과 섞여 발라져 있다.

독일 맥주는 시원하고 맛있었다.
10시 반이나 되어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다.
포플라 닮은 가로수 사이로 밤이 겨우 어슬렁거리고
우리는 돌아가며 간단히 자기 소개를 했다.

백야란 놀기에 얼마나 좋은 것이냐
놀고 놀아도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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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이어 이른 아침

방에서 페인트 냄새가 나고 덥기도 하여 문을 조금 열어 놓고 잤다. 늘 깨던 그 시간에 깼다.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 몽골의 중앙 최북단에 있는 홉스굴 가는 비행기를 타야했다.


새벽에 폭우가 쏟아졌다.
잠시 느닷없는 소나기

이 도시에는 배수구가 없다
비는 반가운 것이고
빨리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

아침 이른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에
작은 묘목들이 팬스에 둘러 싸여 심어져 있다
열에 일곱 여덟은 죽어 있다

비는 표피를 적시기에도 부족하고
땅은 풀뿌리 깊이를 지나면 돌이니
초원 밖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는 땅

공항 대합실에 앉아
구름낀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몽골의 하늘은
늘 파란 하늘에 군데군데 구름이 끼여있다
구름이 없는 파란 하늘은 없고
파란 하늘 없는 구름 낀 날도 없다

몽골은 모든 것이 공존하는 곳이다
13세기와 21세기가 함께 있고
한낮의 더위와 새벽의 추위가 함께 하고
파란 하늘과 검고 흰 구름이 동행한다

유럽과 아시아가 병존하고
사회주의와 시장경제가 손잡고 있고
유목과 정착의 문명이 섞여있다

양이 염소와 섞여있듯
가능성과 빈곤이 섞여있고
우리가 이미 잃은 것과
앞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모두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