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내일부터 회사에서 1박 2일로 워크샵을 가는 관계로 먼저 매맞습니다. ㅋㅋ
(변화경영연구원 첫번째 숙제)


1. 기억나는 대사

“사람들에겐 듣기 원치 않는 말도 있는 법이다.”

사람이 가장 쉽게 상처를 받는 건 말 때문이다. 말은 생각하게 한다. 한 마디 말로 인해 잊혀졌던 아니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아픈 과거를 연상하게 된다면 차라리 침묵이 최상의 미덕이 된다.


“복싱에 있어 기적이란, 참는 데 있다. 어떤 고통이 와도 참고 견디며 갈비뼈가 나가고 망막이 터져도 싸운다는 거지. 자신만 볼 수 있는 꿈 때문에 모든 걸 거는 거야’”

모건 프리먼의 묵직하고 차분한 나레이션에 흘러 나오는 이 대사를 들으며 문득 ‘모든 걸 거니까 외로운 거야’라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가 생각이 났다.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꿈을 위해 올인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권투는 변칙적인 활동이다. 왜냐면 모든 것을 반대로 할 필요가 있다. 오른쪽으로 움직이기 위해 왼쪽 발가락을 사용해야 한다. 고통으로부터 피하는 대신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스텝을 밟아야 한다. 펀치를 날리려면 뒤로 물러서야 하지만, 너무 떨어져서는 주먹을 날릴 수가 없다.”

비단 권투만 그러할까? 우리 인생도 완급조절이 필요하고 유연해야 한다. 역지사지 해야 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럼 인생은 청개구리?


“권투가 너무 좋은걸 어떡해요...31살이 늦었다면, 나한테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는 거예요.”

노처녀 매기(힐러리 스웽턴)의 권투에 대한 열정 앞에서 생물학적 나이는 장벽이 될 수 없다. 그녀가 가진 것은 오직 열정뿐... 또 기회는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명 대사. 이 대사로 인해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매기를 트레이닝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맞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항상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왼쪽 팔을 내려서도 안되고 상대방에게 등을 보여서도 안된다. 삶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가족, 친구, 연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고 어떤 고통과 유혹에도 견뎌낼 수 있도록 단련시켜야 한다.


“사람들이 당신이 지어준 이름으로 날 불러줬어요. 전 내가 원하는 걸 얻었어요.”

매기가 병원에서 프랭키에게 자신이 고통스럽지 않게 죽을 수 있도록(안락사) 부탁할 때 말한다. 관중들이 프랭키가 지어준 모쿠슈라(나의 소중한 혈육이라는 뜻의 게일어)라는 이름을 부르며 환호할 때 매기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가 아닌 소통하고 인정 받는 자신을 느낀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암울한 자신의 과거에서 엑소더스하는 해방의 느낌을 가졌으리라.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났다. 그들이 매기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침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매기는 프랭키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2. 소감

영화를 보는 내내 전편에 흐르는 페이소스에 전율했다. 참을 수 없는 인생의 무거움이랄까? 아카데미상을 4개 부문이나 석권했음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식 낙관주의와 해피엔딩, 과장, 폭력 미화 등은 눈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딸을 안락사 시키고 영화를 끝내버리는 비정한 가족주의 영화에 오히려 가깝다고 해야겠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화를 안보고 딴짓을 한 것이다. 이 영화는 절대 감동을 선사해 주지 않는다.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세 인물의 과거는 암울함 그 자체이다. 가족도 없다.(있긴 하나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정도다) 한마디로 비극적인 영화다.

그러나 비극을 예감하고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감독은 고독과 단절,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철저하게 항거한다.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면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러한 성향은 정점에 달한다. 척수가 부서져 식물인간이 된 매기에게 프랭키가 모쿠슈라의 뜻을 이야기 해주자 매기의 눈에서는 웃을 듯 말 듯 눈물이 떨어진다. 이윽고 프랭키는 산소호흡기를 떼내고 고통없는 매기의 죽음을 위해 아드레날린을 주사한다. 이 장면은 죽음과 슬픔이 인간이 소통하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페이소스로 승화되는 기적적 모멘텀이다.

이 영화는 주연 배우 3명의 연기력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프랭키라는 체육관장 트레이너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불안하게 삶을 덧없이 관조하는 염세주의자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해냈다.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석양의 무법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또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서 연기 뿐만 아니라 한 컷도 버릴 수 없고 일관성 있게 결말로 이어지는 디테일한 연출력을 과시했다.

체육관장에서 잡일을 하며 프랭키와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즐기는, 110번째 시합은 하지 말아야 했던(이 시합에서 실명한다.) 전직 권투선수 스크랩 역의 모건 프리먼은 묵직하고 간결한 대사와 함께 영화 전반을 이끄는 차분한 나레이션을 통해 자칫 신파조로 끝날 수도 있는 결말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해 준다.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 중의 하나인 ‘쇼생크 탈출’에서의 모습에 관록이 더 붙은 듯하다. 이 두 사람은 연기의 교과서라고 할만큼 절제미를 보여 주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매기 역의 힐러리 스웽턴의 열정적인 연기 또한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이 영화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인생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때 그때 함께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고통없이 삶의 찬란한 순간을 기억하며 생을 마치고 싶다. 살아간다는 건 힘들고 절대 가볍지 않고 외로운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상처를 받고 살아간다.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육체의 상처는 불가능 하더라도 최소한 마음의 상처는 치유가 가능하게 한다. 가느다란 실낱 같지만 희망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오직 권투에 목숨을 건 매기의 열정은 나의 부족함을 일깨운다. 매기는 권투에 대한 열정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골수만 빼고 다 버려야 한다. 열정은 미쳐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열정이라 할 수 있다.

엔드 크레딧(End Creddits)이 올라가면서 조용히 퍼져 나오는 음울한 기타소리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찌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예상치 못한 곳(변화경영연구원 첫번째 숙제)에서 만난 뜻밖의 행운의 영화(Million Dollar Baby Movie)인 셈이다.


3. 내가 감독이라면 이렇게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 고정적인 헐리우드 포맷의 영화이어서 새롭게 손 댈 거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출연 배우의 연기력, 시나리오, 음악, 조명, 카메라 등 영화를 이루는 구성요소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탁월한 연출력과 74살 나이에 걸맞는 인생에 대한 관조가 깊숙이 배어 있다.

굳이 지적하자면 스토리텔링에 대해서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영화 후반부에 매기가 척수를 다쳐 식물인간이 되어 고통스러워하자 결국 프랭키가 산소호흡기를 떼내 준 것은 줄거리 흐름상 안락사 문제로 이야기가 흘러갈 개연성이 있어 일관성 있는 이야기 전개에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관객들은 매기가 장애를 딛고 일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에 좌절하여 혀를 깨무는 매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매기가 프랭키에게 자신을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달라고 부탁을 하고 프랭키는 고민 끝에 이를 결행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치닫는다. 이러한 갑작스런 분위기 반전은 그다지 매끄럽게 연결이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뿐더러 관객들을 다소 불편하게 만든다. 물론 그렇게 허망한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영화적인 완성도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매기가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또 하나 부녀간의 애잔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왜 프랭키가 매기를 딸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 장치가 부족하다. 그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단 한 컷은 프랭키가 주사를 놓는 장면이었다.

오감독(?)의 입장에서 볼 때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프랭키와 스크랩의 배역을 바꿔서 영화를 제작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평가할 때 인종차별주의자, 마초주의자가 항상 수식어처럼 따라 붙는다.

이 영화 초반에 챔피언 유망주인 윌리가 프랭키를 배신하고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바로 흑인이다. 전직 권투선수인 스크랩은 110번째 시합을 하다가 흑인이기 때문에 한쪽 눈을 실명할 수 밖에 없는 비애의 경험을 갖고 있다.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진 않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지난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그의 인종차별적 성향을 유추할 수 있다.

한가지 첨언하자면 모건 프리먼이라는 관록의 흑인배우의 연기력은 정평이 나있기 때문에 둘의 역할을 바꿔 진행했다면 위의 약점을 커버하고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